[반경환의 명시감상]외로움과 싸우다 객사하다 -나혜석.
외로움과 싸우다 객사하다
ㅡ나혜석.
가자! 파리로.
살러 가지 말고 죽으러 가자.
나를 죽인 곳은 파리다.
나를 정말 여성으로 만들어 준 곳도 파리다.
나는 파리 가 죽으련다.
찾을 것도, 만날 것도, 얻을 것도 없다.
돌아올 것도 없다. 영구히 가자.
과거와 현재 공空인 나는 미래로 가자.
사남매 아해들아!
에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잘못된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에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
후일, 외교관이 되어 파리 오거든
네 에미의 묘를 찾아 꽃 한 송이 꽂아다오.
* 1896년 구한말 경기도 수원에서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나혜석, 동경에 유학 중이던 오빠의 권유로 1913년 동경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유화를 전공했던 나혜석, 최승구와 이광수 등과 사귀며 동경유학생들의 동인지였던 {학지광}에 여권신장을 옹호하는 ‘이상적 부인’ 등을 발표했던 나혜석, 1918년 동경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함흥 영생중학교와 서울 정신여자고등학교에서 미술교사를 지내다가 3.1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여 수개월간 옥중생활을 했던 나혜석, 1920년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하여 남편의 도움으로 1921년 경성일보사에서 최초의 서양화 전시를 열었던 나혜석, 1931년 일본 외무성 관리가 된 남편을 따라 만주에 거주하다가 1927년 모스크바를 거쳐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 등을 여행했고, 파리에서 야수파 계열의 그림을 그렸던 나혜석, 유럽여행 중 사귄 최린과의 불륜이 문제가 되어 1931년 이혼을 했던 나혜석, 그 뒤 조선의 사회제도와 냉대로 인하여 1946년 서울 자혜병원에서 행려병자로 인생을 마감해야 했던 나혜석----. 나혜석 시인은 그야말로 동양문화와 서양문화, 또는 조선의 유교주의와 서양의 자유주의와의 부딪침 속에서, 그 설자리를 잃어버린 ‘과도기의 선각자’였는지도 모른다.
조선은 유교적인 가부장제와 일부일처주의가 엄존하고 있는 사회였고, 여자는 그저 묵묵히 남편의 말에 따르고 순종해야만 하는 그런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나 서양은 근대 민주주의와 산업혁명의 결과로 여성들도 자기 자신이 인간임을 자각하고 여성해방과 남녀평등을 부르짖던 시기였던 것이다. 나혜석 시인은 서양의 민주주의와 남녀평등을 옹호하면서 사남매의 엄마이자 유부녀인 사실을 망각하고 최린과의 불륜을 저지르며 그것을 ‘자유연애’, 또는 ‘아름다운 사랑’으로 미화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나 선무당이 사람을 잡듯이, 사회적 혼란기의 그릇된 행동은 어디까지나 무슨 돌림병과도 같은 문화적 유행일 뿐, 동시대의 사상과 그 정신에 접근해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가자! 파리로/ 살러 가지 말고 죽으러 가자/ 나를 죽인 곳은 파리다/ 나를 정말 여성으로 만들어 준 곳도 파리다/ 나는 파리 가 죽으련다/ 찾을 것도, 만날 것도, 얻을 것도 없다/ 돌아올 것도 없다. 영구히 가자/ 과거와 현재 공空인 나는 미래로 가자”라는 시구처럼 파리가 나혜석과도 같은 여성해방주의자들의 낙원이었던 곳도 아니고, 남녀관계의 불륜을 전세계의 이상적인 모델로 포장해주는 것도 아니다. 민주주의는 우리는 누구나 다같은 인간이며, 만인이 평등하다는 사상이지, 남녀의 성 차이와 그에 따른 역할의 차이까지도 무시하고 무조건 자유연애를 옹호하는 사상도 아니다.
사남매 아해들아!
에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잘못된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에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
후일, 외교관이 되어 파리 오거든
네 에미의 묘를 찾아 꽃 한 송이 꽂아다오.
파리, 파리---, 그러나 나혜석 시인이 동경하던 파리는 조선의 신여성이었던 그녀의 환상 속에 있었지, 실제로 존재하는 파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를 여성해방으로 이해하고 여성해방을 남녀평등이 아닌 여성중심주의로 오해한 여자, 정복자를 정복하고 남성적 영웅보다 더 남성적인 영웅이 되고 싶어했던 여자, 남성과 여성의 성 차이와 남편과 아내의 역할을 오해하고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왔던 ‘부부의 가치관’을 ‘자유연애’, 즉, ‘불륜’으로 전복시켰던 나혜석 시인----. 나혜석 시인의 서울 자혜병원에서의 행려병자로서의 사망은 사필귀정이며, [외로우과 싸우다 객사하다]는 얼치기 신여성의 조그만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