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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빅토리아 십자훈장을 수훈한 영국인 가운데 마지막 생존자 존 크루익생크가 10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BBC가 16일(현지시간) 전했다. 이상하게도 방송은 이 기사를 보도하며 홈페이지에 사진 한 장도 게재하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전날 일본에 대한 승리(VJ)의 날 80주년 기념식이 열렸고, 마지막 남은 참전용사 가운데 한 명인 야바르 압바스(104) 예비역 대위가 찰스 3세 왕과 카밀라 왕비를 감동하게 만들었다.
애버딘 출신의 예비역 중위 크루익생크는 1944년 6월 17일 카탈리나 비행정을 조종해 독일 U보트를 공격해 빅토리아 십자훈장을 목에 거는 영예를 안았다. 그는 2차 세계대전에서의 활약으로 국가 최고의 군사 영예를 받은 181명 가운데 마지막 생존자였다. 유족은 그가 지난주에 사망했으며 장례식이 비공개로 거행될 것이라고 밝혔다.
크루익생크는 노르웨이해에서 영국 선박을 보호하던 중 교전 중에 중상을 입었다. 승무원들이 앞에 있는 U보트를 발견하고 격렬한 총격과 함께 폭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폭탄은 발사되지 않았고, 크루익생크 중위는 항공기를 돌려 다시 공격해야 했다. 그는 손수 폭탄을 투하해 잠수함을 성공적으로 파괴했다.
그는 폐 두 군데와 하반신 10군데 등 모두 72군데를 다쳤다. 항해사 존 딕슨은 사망했고 부조종사와 다른 두 승무원도 중상을 입었다. 크루익생크 중위는 의료 처치를 거부하고 기수를 돌려 셰틀랜드 술롬 보이(Sullom Voe) 기지로 돌아갔다.
그는 다시 비행 작전 임무로 돌아오지 못했고, 1946년 왕립공군(RAF)을 떠나 은행 일을 시작했다. 그가 영국인과 영연방(커먼웰스) 군인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영예인 빅토리아 십자훈장을 목에 건 것은 1944년 8월 29일이었다. 당시 국왕이었던 조지 6세가 손수 목에 훈장을 걸어주면서 "결단과 꿋꿋함, 헌신"의 예라고 상찬했다.
자신이 겪은 일을 거의 입에 올리지 않았던 그는 2008년 한 인터뷰를 통해 "어떤 장식이나 인정을 생각하며 그런 일에 뛰어들지 않았다. 그것은 의무로만 여겨졌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2013년 전쟁 중에 조종했던 것과 유사한 항공기를 타고 비행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지난해 그의 104번째 생일을 기념해 카탈리나 비행정이 애버딘에 있는 그의 집 상공을 비행했다.
야바르 압바스 예비역 대위가 지난 15일 찰스 3세 국왕과 카밀라 왕비 앞 무대에 섰을 때 본인은 신문과 방송의 헤드라인을 장식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고 인디펜던트가 다음날 전했다.
그는 스태퍼드셔에서 열린 일본에 대한 승리(VJ)의 날 80주년 공식 기념식에 마지막 남은 참전 용사 중 한 명으로 참석했다. 야바르는 아시아 전선에서의 경험에 대해 짧은 연설을 하려고 했지만 대본에서 벗어나기로 결정했다.
그는 청중들에게 "암 치료를 받고 있는데도 사랑하는 왕비와 함께 여기에 계신 용감한 왕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고 말했다. 왕과 왕비는 눈에 띄게 감정적이었다. 야바르는 계속해서 관중들에게 자신도 지난 25년 동안 싸워 온 암에서 벗어났다고 말해 박수를 받았다.
BBC의 카비타 푸리 기자는 올해 초 그를 만났다며 그가 직접 들려준 인생 역정을 전했다.
그는 영국령 인도 차르카리(Charkhari)주에서 태어났는데, 본인은 "말 한 마리의 마을"이라고 묘사했다. 공식적으로 그는 1921년 태어났다고 등록돼 있는데 본인은 1920년 12월 15일에 태어났다고 말한다. 그는 1939년 영국이 인도를 대신해 나치 독일에 선전 포고를 했을 때 학생이었다.
1941년 12월 초부터 새로운 적과 새로운 전선이 생겼다 . 일본은 진주만에 있는 미 해군 기지를 공격했다. 몇 시간 뒤 일본군은 동남아시아의 영국 식민지를 표적으로 삼았다. 그리고 불과 몇 달 만에 일본은 말라야(지금의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버마(지금의 미얀마)를 비롯해 한 세기 이상 대영제국의 일부였던 영토를 점령했다.
1942년 중반까지 야바르는 영국을 위해 싸울 것인지 인도 독립을 위해 싸울 것인지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는 대영제국의 일부가 얼마나 빨리 일본에 함락됐는지 믿을 수 없었다. 인도가 다음 국가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뚜렷했다.
야바르는 "난 영국 제국주의의 지지자가 아니었고, 사실 그것을 혐오했다"고 푸리 기자에게 털어놓았다. 당시 영국인들에게 "인도를 그만두라"고 요구하는 독립 운동이 커지고 있었지만 잔인하게 탄압 받았다. 야바르는 영국을 위해 싸우는 것이 자유의 이름으로 전쟁을 치르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인도인들은 식민지 통치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인도 민족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나치즘과 파시즘이 득세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나는 전쟁이 끝난 후 그들이 약속했던 대로 인도 군대로 독립할 수 있기를 선택하고 희망해야 했다."
그래서 야바르는 입대했고 약 250만명의 인도 군인 중 한 명이 됐다. 처음에 그는 시크교 제11연대에 입대해 동벵골의 외딴 지역에 있는 "신이 버린 곳"에 배치돼 전략적 장소를 지키며 하루를 보냈고 행동이 부족하다는 사실에 실망했다. 영국 장교들의 태도도 그를 좌절시켰다. "나는 아버지의 군대와 같은 버전에 있었고, 동료 장교로서 백인 중년 남성들과 함께 지냈는데, 그들은 여전히 인도를 가까운 미래에 계속 통제할 왕실 식민지로 여겼다."
어느 날 혼란스러운 상황에 야바르는 'The Army Gazette'에서 장교들이 전투 카메라맨으로 훈련을 받도록 유혹하는 광고를 발견했다. 그는 지원했고 곧 합격했다.
그는 일본에 빼앗긴 영토를 되찾는 것을 목표로 새로 편성된 영국 제14군에 합류했다. 이 군대는 정글전을 위해 잘 훈련돼 있었고 더 나은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다국적인 이 부대는 대부분 인도인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서아프리카와 동아프리카를 포함한 대영제국의 다른 지역 출신들이 가세해 최대 100만명으로 늘어났다.
이 부대는 야바르에게 완전히 다르게 느껴졌다. "멋진 동지애였다. 영국인과 인도인이 서로 섞여 있었다."
야바르는 1944년부터 버마 전역의 최전선에서 촬영을 계속했다. 그는 권총과 빈텐 필름 카메라, 삼각대, 여러 롤의 필름을 갖고 무장한 조수와 함께 지프를 타고 여행하곤 했다. 그는 촬영한 필름을 캘커타(지금의 콜카타)로 보내 그곳에서 편집돼 선전이나 뉴스 영화용으로 배포됐다.
야바르는 일본이 인도 북동부의 전략 요충 도시들을 침공했을 때 임팔 포위 공격과 코히마 전투에 참전했다. 일본의 목표는 중국에 대한 연합군의 보급선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임팔과 코히마에서 일본군을 격퇴한 것은 매우 중요했는데, 이 도시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더라면 일본이 인도 깊숙이 진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전투는 일부 역사가들에 의해 2차 세계대전의 가장 중요한 전투 중 하나로 묘사됐다. 영국군, 구르카군, 인도군, 아프리카군은 인도에 대한 공세를 단호하게 중단시켰다. 수만 명의 일본군이 목숨을 잃었다. 많은 이들이 포로로 남지 않으려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야바르는 전투의 여파를 잊을 수 없다. "일본인들이 적의 손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몸에 칼을 꽂는 끔찍한 광경이었다." 버마를 탈환하기 위한 영국군의 진격은 그 후 시작됐다.
야바르는 만달레이에서 약 50km 떨어진 곳에 있었을 때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는 일본군이 얼마나 완강하게 저항했고 연합군이 전진할 수 없어 얕은 참호에 엄폐했는지 얘기했다. 그는 구르카 부대와 함께 있었지만 계속 촬영을 했다. 그는 저격수가 자신의 카메라를 보고 방아쇠를 당긴 일도 있었다고 했다. 그의 옆에 있던 구르카 용병이 목숨을 잃었고, 야바르의 카메라도 산산조각이 났다. "살아 있는 것이 행운이다."
만달레이 전투는 연합군에게 결정적인 전투였다. 만약 일본이 점령할 수 있었더라면, 수도 랑군(지금의 양곤)으로 가는 길이 열릴 것이었다. 야바르는 탱크에 타고 있었고 액션을 더 잘 찍어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그냥 뒤쪽 트렁크 위로 올라가 촬영을 시작했다."
포탑이 열렸고 그는 다른 장교로부터 내려가라는 말을 들었다. "어리석은 일이었지만 어렸을 때 하는 일이다."
목표는 일본의 요새 포트 더퍼린(Fort Dufferin)을 점령하는 것이었는데 치열한 총격전이 펼쳐졌다. 야바르는 공중에서 가차 없는 폭격을 받는 적의 진지를 촬영했다.
푸리 기자는 런던의 제국 전쟁 박물관에 가서 야바르가 그날 촬영한 영상을 발견했다. 소리가 없어도 편집되지 않은 흑백 이미지는 야바르가 묘사한 것처럼 극적이다. 푸리 기자는 그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영상을 보여주기 위해 그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그것을 보면서 80년 전의 일이 모두 되살아난다고 말했다. 포트 더퍼린 승리의 징표로 영국 국기가 게양되는 순간을 담은 화면을 보며 "이게 내 슛이야"라고 말했다. 그 뒤 고개를 저으며 "여기 앉아서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고, 내가 그 한 가운데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80년 전 카메라와 총으로 일본군을 쏘는 것이 기뻤다는 사실이 지금은 믿기지 않는다고도 했다. "나는 그것이 별로 자랑스럽지 않지만, 그것이 당신이 최전선에 있을 때 느끼는 감정이다."
야바르는 그날 아침에 찾은 것을 푸리 기자에게 보여줬다. 그는 세월이 많이 흘러 누렇게 변한 일기장을 보여줬다. 그는 늘 잉크를 갖고 다녀 만년필로 일기장에 적었다. 그는 1945년 3월 20일 포트 더퍼린이 함락된 날을 찾아 읽었다. "다행히 모든 것이 끝났고 난 아직 살아 있다. 멀지 않은 곳에서 포격 소리가 아직도 들린다. 어쩌면 요새를 향해 일본군의 대포가 발사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내일 알게 될 거야. 이제 새벽 2시, 잠을 자야 해."
푸리 기자는 야바르에게 용감하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마치 이상한 질문인 것처럼 기자를 쳐다보며 "절대 그렇지 않다"고 딱 잘랐다.
1945년 5월 8일 유럽 승전(VE)의 날, 야바르는 얼마 전 탈환한 랑군 시내를 촬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중요하지 않아 일기에 기록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거의 변한 것이 없었다. 일본과의 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그 몇 달 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해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전쟁이 끝난 후 야바르는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지휘를 받는 영연방 점령군의 일원으로 268 인도 여단에 배치됐다. 그는 원폭 투하 몇 달 뒤 히로시마로 가 황폐한 흔적과 끔찍한 부상자들을 목격했다. "건물은 없었고 타워 하나만 남았다. 나머지 모두는 평평했다."
야바르는 기억만으로도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여전히 나를 괴롭힌다. 인간이 서로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히로시마는 끔찍한 경험이었다."
그가 바랐던 대로 영국군은 인도를 떠났다. 1947년 8월, 인도는 분할됐고, 힌두교도가 다수인 인도와 무슬림이 다수인 파키스탄이란 새로운 국가가 탄생했다. 야바르는 피비린내 나는 여파를 목격했으며 인도를 분할하기로 한 결정에 가슴이 아팠다. 2년 후 그는 영국으로 건너왔다.
그는 BBC에서 전 세계를 여행하는 뉴스 카메라맨으로 몇 년을 일했다. 그는 많은 상을 수상한 독립영화 제작자가 됐다.
8월 15일 VJ의 날은 야바르가 축하하는 날이 아니다. "전쟁은 범죄다. 전쟁은 금지돼야 한다. 미친 짓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실제로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했다."
그는 당시 인류를 위해 가치 있는 일의 일부라고 느꼈다고 말한다. 80년이 지난 지금,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전쟁, 특히 가자지구가 그의 마음 속에 있다. "우리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것 같다. 무고한 남성, 여성, 어린이, 심지어 아기까지 계속 살해하고 있다. 그리고 세상은 몇몇의 명예로운 예외를 제외하고는 침묵 속에서 지켜보고 있다...여전히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헛된 일이었다. 우리는 전혀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