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자는찡그리는 법이 없다. 모든 게 감사하다고 사는게 너무 즐겁다고 한다. 10 살 때 왼쪽 다리를 잃었다 그런데 오늘 그는 오늘도 천연덕 스렵게 웃는다.
외다리 찹쌀 떡 장수 최영민 씨 이야기는 7년전 TV 프로에 알려줬다. 30킬로그람이 넘는 떡 통을 메고 벼락같이 달리는 모습도 경이롭지만 목발에 기대 온몸으로 공을 차고 완벽하게 착지하는 장면은 사람을 숙연케했다
이 영상이 몇 달 전 YouTube에 다시 올라오면서 120만 찍었다. 조자신이 부끄럽습니다. 2분 보고 신내봅니다. 조자신이 부끄럽습니다. 이 분 보고 힘내봅시다. 2분 구 막 근황 알려주세요. 같은 땟거리 5천계 달렸다.
사십를 바라보는 최영만씨는 여전히 겸손했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 인터뷰를 거절하던 글을 지난달 말 충남 천안에서 만났다.
기대와 다른 삶을 살면 어쩌나 하는 염려는 기우였다. 코로나 탓에 차산 떡을 못 팔게 됐지만 열정은 그대로 였다 두잡도 4 잡도 햏다
일만 있으면 뭐든지 하죠 힘들기 않느냐고 물으니
왜 아니겠어요 그래도 마음은 힘들지 않아요
대리운전도 하고 시급 9천7백원짜리 알바란 알바는 다 했어요. 화장품 공장에서 뚜껑을 닫고 선반 제작회사에서 일하고 다이소에서 물품 검사도 했습니다.
제가 눈썰미와 제주가 있나봐요. 상조회사도 다니고 족발만 드는 일 돼지털 깎는 일도 했고요. 의료기 장사도 했습니다. 신통지아나 않지만 해요. 밤낮으로 손님이 있으면 대리운전도 했고요.
요새는 자가용이 오토잖아요. 먹고 살아야 하니 몇 년 전에 배웠죠? 손님들도 깜짝 놀라서 술이 깨서 토끼 눈으로 보도라고요. 그래서 좋은 분은 많아서 면전에 대고 심한 말은 못해요. 운전할 줄 아세요 하고 물어요. 스톱 할 때 만난 분들은 반가워해 주시고요
어릴때에 부모에게 버려진 아픔을 극복해야 했다. 아빠 엄마로 알던 이들이 숙부 숙모라는 걸 알고는 그래서 나를 때렸구나 하고 모든 게 이해했다고 했다. 나의 버려졌다.
고아원이 미국 입양을 결정했지만 왜 아이를 버려 나는 주위와 다시 찾아온 숙부 숙모 수원에 정착했다. 그리고 1년후 학교 길에 횡단보도를 건너다 버스에 치여 다리를 10살이었다. 본적을 찾아보니 친부모는 다 돌아가셨더라고요. 그러나 묻지 않아서요.
만난 적은 없지만 미워하잖아요 다 용서했어요. 교통사고 후 힘들어 깼어요. 집에서 매일 두드려 맞고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했죠. 축구 선수가 꿈이었는데 그날 이후를 벤처아자 있었어요
숙부 숙모가 이혼하고선 진짜 혼자가 됐어요 부모를 원망한 적은 없나요?
그러면서도 두문 불출 했어요. 감정이 복잡했습니다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남겼어요. 모두 미워하지 않아요
어자피 지나간 일이잖아요. 현재를 살아야 내는 게 더 중요하죠 후에는 신경 안 써요
세번 수술했어요 자라나는 뼈를 깎았죠? 그런데 장해가 창피해서 국가에서 주는 수당은 20살 전까지 받지 않았어요. 이때까지 장애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 같아요
어떻게 마음을 달랫나요 할 일이 없으니 매일 도서관에 가서 죽치고 앉아 내가 여태까지 병에 걸렸구나.윌래목표가 축구 선수였으나 한 번 해보자 해서 목표를 갓고 산에 올라갔어요. 이천번 수 만번 불 넘겨찾죠? 온 몸에 상처가 났지만 가슴에는 용기가 치솟아 절망하지 말자 죽기 살기로 한 번 해보자. 햇지요 성공했을 이때 처음으로 남들이 저를 똑같은 사람으로 대해주는 걸 느꼈어요.
살만한 세상 떡장사를 하면서 별의별 일을 다 당해봤어요. 얼굴에 떡을 집어 던지며 당장 꺼져라 욕하는 밥맛 떨어지게 저런 사람 못 들어오게 하라며 면박을 주는 손님도 있었다. 술을 드셨으니까 정신적인 사고를 못 참잖아요.
떨렸어요. 스트레스 받을 시간에 하나라도 더 팔자 마음을 다 잡아줘. 싫어한다 싶으면 좋은 시간 되십쇼 하고 물러섰죠.
나중에 오히려 손님들이 재편을 들어 주도라고요. TV에 나오고 장사가 잘된 됐나요? 크게 달라진 건 없었어요. 사진 찍어 달라고 하는 정도이지. 매출의 큰 변화는 없었어요. 죄송합니다. 제자랑하는것 같아서 일할 수 있는데 왜 공짜 돈 받나요? 당신도 포기하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