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10~12.<2박3일>서울시지부에서 신입 지회장들과 각 구청 지회에서 건강한 만 60대 이하 1~2 명씩 추천되신 회원들로 제주도 역사 탐방을 다녀왔다.
제주도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섬이다. 나는 한국에서 4번째로 큰 <옛날은 5번째로 컸지만, 바다를 막아 간척지로 육지 면적이 넖어진 탓>강화도가 고향이다. 제주와 강화의 유사점이 섬이기도 하지만 외침을 많이 받기도하고 임금과 양반들의 유배지로 과거의 피 비린내 나는 역사의 흔적이 있다.
첫째날은 10시30분 제주공항 도착해서 알뜨르 비행장 근처의 식당으로가서 점심식사를 방어회와 매운탕으로 했다.
알뜨르(아래 벌판)비행장<현재 제주국제공항으로 쓰이는 정뜨르 비행장과 함께 대표적인 일제의 군사시설이다.>, 격납고및 일본군 진지를 첫번째로 답사 했다. 1920년대 중반부터 모슬포 지역의 주민들을 동원하여 활주로를 비롯한 비행기 격납고와 탄약고등을 10년에 걸쳐 세웠는데 후에 다시 확장을 하게 된다.
중일전쟁을 벌였던 일본은 알뜨르를 전쟁의 전초기지로 삼았고 일본에서 이곳으로 날아온 비행기가 주유를 하면 상하이 베이징 난징까지 공습 가능하였다고 한다. 전선을 남쪽으로 확대해 나가던 일본은 진주만 공습으로 시작된 미국과의 전쟁을 위하여 남부 해안을 군사기지화 하면서 원래 66ha였던 알뜨르비행장을 264ha의 규모로 확장했다.
패배의 색이 짙어진 일본이 극단적으로 내세운 전술인 가미카제를 위한 조종훈련을 이곳에서 했다니 섬뜩하면서도 가슴 아픈 역사가 아닐 수 없다. 격납고는 폭격에 견디기 위해 견고한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 빵카로 웬만한 중장비로도 부술 수 가 없다. 격납고 주변에 감자, 고구마, 배추밭이 펼쳐져 있는데 20여개의 격납고가 위치하고 있다
알뜨르 비행장에서 법정사까지 산야와 계곡을 건너 1시간50분 등산코스여서 더욱 광복회원간에 결속력을 가질 수 있었다. 너무나 난 코스라 한번은 미끄러져 넘어지고, 한번은 물에 빠져 양말이 젖은 상태로 무오법정사에 도착했다. 무오법정사항일운동은 기미1919년3.1운동보다 5개월 먼저 일어난 제주도내 최초 최대의 항일운동이자 1910년대 종교계가 일으킨 전국 최대의 무장 항일 운동이었다.
인근의 송악산진지, 가마오름 평화박물관과 함께 제주에 남은 일제의 군사 유적으로 일제와 전쟁의 광기를 상상하며 평화의 섬으로 태어난 제주와 우리 대한민국에 또 다시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하며 다음 코스로 가려고 버스에 탑승했다.
모슬포(원래는 못살포)로 가는중에
버스운전하며 해설까지 하시는 운전기사가 질문을 한다. 저 가로수 나무이름을 아시나요?<이게 뭔나무요?> 정답:"뭔나무"라 한다.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 제주도는 거대한 요새였다. 패전을 눈앞에 둔 일본군은 '일본본토'를 방어하기 위해 제주도를 방어기지로 삼고 최후의 결사항전을 벌이는 '결( )7호작전' 준비에 들어갔다. 이를 위해 일제는 제주도 해안가를 빙 둘러 해안진지를 구축했다. 1945년 8월 제주의 인구는 25만여 명의 제주도에 6만 7천여 명의 일본군이 주둔 했다. 송악산 제1분화구 외륜 능선에 일본군이 구축한 동굴형태의 진지도 볼수있다. 태평양전쟁 말기 수세에 몰린 일본이 제주도를 저항기지로 삼아 구축한 일본군의 비행장 경비체계와 미군의 앙륙전에 대비한 구체적 방어준비 현장을 살펴볼수있는 역사적 장소이다.
송악산에서 삼방산쪽을 바라보는 전경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송악산 일대를 배회하던중 말타기를 하는 곳에 접근했다. 마부가 5천원에 사진도 찍어주고, 정해진 코스를 돌때 승마의 기분에 젖기도하니 맑고 푸른 하늘과 바닷바람에 말 등 위에서 말의 움직임에 몸을 맡기고 반동에 힢의 오르내림은 기분전환 만점이었다.
1974년도에 건축한 제주 KAL호텔에서 숙소를 정해 기쁜 마음이었다. 그 이유는 1979년 3월3일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 첫날 밤을 보낸지 41년 8개월 만에 연어처럼 돌아왔다. 감개무량 했다. 벌써 칠순의 나이로 머리는 희고 얼굴은 주름살로 간 것을 보니 세월이 많이 흐른 탓이렸다. 구혼여행은 광복회 동작지회 같은 나이인 이범직 해병장교 출신 의원이다.
둘째날, 날씨가 너무나 좋다. 조천 만세운동 기념관으로 09시에 출발 했다. 조천 만세운동은 제주시 조천읍에서 1919.3/21~3/24까지 네 차례에 걸쳐 있었던 독립만세로
1차시위는 14명의 주동자와 150여 명의 유림, 김필원의 혈서로
행진하자 조천리,신촌리,함덕리의
5~6백여 명이 합류해 경찰과 충돌했고 주동자들은 체포되었다.
그후,3/22~24일은 모두2천여 명의 시위자가 조천읍장날 시위했다. 조천 만세운동 후 서귀포서도 만세운동이 있었다.
제주해녀 항일운동기념탑을 관람했다. 1931~1932년 4월까지 연인원 17,130명이 참여하고 집회및 시위회수가238회에 달했던 항일운동으로 해녀들뿐 아니라 청년과 일반 농민층도 가담하여 일제의 식민지 수탈정책에<전복 소라 등 해산물을 1Kg의 저울을 20%인 200g값만 준 일본놈들> 적극적으로 투쟁했다. 국내 최대의 여성주도 항일투쟁인 동시에 최대의 어민 봉기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느끼게한다.
4.3평화공원을 가다.
1947년3월1일 제28주년 3.1절 기념 제주도 대회가 열렸고 제주읍에서는 북국민학교의 3.1절 행사가 오후2시에 끝나자 군중들은 가두시위에 나섰다. 시위대가 관덕정을 거쳐 서문통으로 빠져나간 뒤 관덕정 부근에 있던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여 다쳤다. 이때 기마경찰이 다친 아이를 그대로 두고 지나가자 흥분한 군중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했고 관덕정 부근에 포진하고 있던 무장경찰은 군중을 향해 총을 쏘았다. 경찰의 발포로 주민6명이 희생되었고, 이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그때까지 큰 소요가 없던 제주사회가 들 끓기 시작했다. 제주4.3의 도화선이라 불리는"3.1사건'은 이렇게 시작되어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및 1954년 9.21까지 발생한 무력 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미군정기에 발생하여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 이르기까지 7년 여에 걸쳐 지속된 한국현대사에서 6.25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극심했던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1947.3.1
경찰의 발포로 주민 6명이 사망한 3.1사건에 항의하여 1947.3.10일부터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민.관 합동 총 파업이 시작됐다. 제주도민의 민관 총 파업에 미국은 제주도를
'붉은 섬"으로 지목했다. 본토에서 응원경찰이 대거 파견 됐고, 극우 청년단체인 서북청년회 (서청)단원들이 속속 제주에 들어와 경찰, 행정기관,교육기관 등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빨갱이 사냥을 한다는 구실로 테러를 일삼아 민심을 자극시켰고, 이는 4.3사건 발발의 요인이 되기도 했다. 당시 한반도는 분단의 위기에 봉착하고 있었다. 남로당 제주도당은 이반된 민심과 5.10단독선거 반대투쟁을 결합하여 경찰과 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무장봉기를 일으키게된다.
1948년4월3일 새벽2시 한라산 기슭 오름마다 봉화가 붉게 타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 위원회가 주도한 무장봉기가 시작되었다. 350명의 무장대는 12개경찰지서와어북청련회 등 우익단체 단원의 집을 지목해 습격했다.
해안선으로부터 5Km
전국에서 5.10선거를 반대하는 유혈사태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5.10 총선거를 앞두고 미군정과 무장대와의 평화협상(4월28일)이 성사 되었다. 그러나 협상 사흘만인
5월1일 우익청년단이 제주도 오라리 마을을방화하는 소위, '오라리사건'이 벌어지고, 5월3일 미군이 경비대에게 총공격을 명령함에 따라 협상은 깨어졌다.
경찰은 오라리 마을에서 경찰의 후원아래 우익청년 단원들이 방화한 사실을 무장대의 방화로 몰아갔다. 미군정은 오라리 방화사건이후 평화적 해결 대신 우력에 의한 강경 진압작전으로 선회했다. 무장대는5.10선거를 무마 시키기 위해 주민들을 산으로 보내고 5.10총선거 200개 선거구에서 제주도 2개선거구만이 투표수 미달로 무효 처리 되었다. 그러자 미군정은 이를 남한만어 단독정부 수립을 저해하는 불순세력의 음모로 판단했다. 미군정은 미국대령을 제주도 총사령관으로 파견해 무리한 검거작전을 감행하며 6.23 재선거를 시도했으나, 그마저도 실패하자 충격을 받았다. 결국, 제주도에 대한 강경토벌작전이 실시되어 도민들이 집단 희생되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달았다.
1948.8.15 대한민국이 수립된 후 정부는 제주도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군 병력을 증파하여 강력한 진압작전을 펼치고, 대대적인 강경 토벌작전이 제주 전역을 휩쓸게 됀다. 10월 11일 제주도에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해안에서 5Km 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대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이 발표됐다.
이때부터 군경토벌대는 중산간마을에 불을지르고 주민들을 집단으로 살생하기 시작했다.
1948.11.17 제주도에 계엄려이 선포되었고, 중산간마을을 초토화시킨 대대적인 진압작전이 전개 되었던 것이다.
1949.5월10일 재선거후 무장대는
궤멸됨
1950년 한국전쟁 발발
1954.9.21한라산전면 개방
★1947~발포사건 이래로 토벌진압과정에서25,000~30,000
명의 주민들이 희생되었고 7년 7개월 만에 막을 내리게 된 비극의 역사를 시청하며 제주의 역사탐방의 막을 내렸다.
4.3평화공원에 학살된 자들의 명단이 처절한 제주도민의 삶을
추념하며, 제주도 성산 일출봉의
다시 떠오르는 일출은 오늘도 내일도 미래에도 영원하리라!
셋째 마지막날
KAL호텔 첵크아웃 하고 어리목 어승생악 오름 등반 편도 1시간 이상 걸었다. 산굼부리의 억새풀밭의 가을의 갈색이 물든 경치속에 사진 촬영하며 광복회원 일행들과의 유족의 정은 물론 가을을 만끼하는 순간 이었다. 어리목을 출발 중식 후에 농산물 쇼핑으로 여행의 끝을 맺고~ 17시30분 제주공항 이륙해 19시 김포공항 도착 했다. <1시간 연발>
2박 3일간 뜻 깊은 독립운동 뿌리 찾기에 기획하시고, 안전하게
지휘 해 주신 광복회 서울지부 장호권지부장님과 이지혜국장님께 감사의 인사를드린다. 또한 일선에서 시종일관 단체 사진 촬영 등코로나예방과 안전을 위해 수고하신 서울지부 김흥수대리님과 도우미님들, 그리고 함께 참석해 했던 광복회원들께 감사의 인사와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성산포 일출봉의 전경과 우도를 보며 펼쳐진 해안선은
영원한 대한민국 제주도의 행복하고 자랑스런 역사를 창조해 나감은 물론, 후대를 빛낼 것입니다.
(사)독립유공자유족회
상임이사 황긍재올림
첫댓글 이번 독립운동 뿌리찾기 제주도 2박3일 동안 우리 선조들의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몸바쳐 피흘린 고귀한 나라사랑을 많이 느끼고 왔습니다. 앞으로 과거를 거울삼아 미래향적으로 발전해 나아갈수
저 또한 나라와 민족을 위해 봉사 헌신 할수 있도록 마음을 갑습니다.
코람데오(하나님 앞에서)님! 독립유공자 후손다운 타산지석 (남의 실수나 과거 잘못한 역사를 거울삼아)이란 사자성어의 뜻처럼 미래에 새 역사를 창조해 나아가자구요
좋은 여행이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