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1일.
오늘은 날이 날이니 만큼 산 보다는 3.1 정신을 새겨보는 의미로 독립문과 서대문 형무소를 둘러보고 광화문과 그 부근들을 재조명해 보려고 했다.
오늘이 바로 3.1운동 105주년 이기 때문이다.
한민족이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한국의 독립 의사를 세계 만방에 알린 날을 기념 하는 날로 한국의 국경일이다
양력 3월 1일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시절부터 국경일로 지정하여 기념하였던 날로, 한국의 5대 국경일 중 하나이기도 하다.
임시정부에서는 1920년에 3·1절을 국경일로 지정하여 국경일 명칭을 ‘독립선언일’ 이라 칭하였으며, 3월 1일을 ‘대한인이 부활한 성스러운 날(聖日)’로 내무부 포고를 공포하였다. 3·1 독립선언 1주년 기념식은 상해 올림픽대극장에서 성대하게 진행되었다. 이후에도 3월 1일은 광복을 열망하는 독립운동가들과 온 민족에게 가장 큰 기념일이자 축제의 날이었으며, 중국, 미주 등의 해외 동포들 또한 3·1절이 되면 다양한 행사를 통해 민족의 독립을 염원하였다.
광복 이후 미군정 치하에서는 1946년 2월 21일 군정법률 제2호 ‘경축일 공포의 관한 건’을 공포하여 경축일로 지정하기도 하였으나, 이는 대한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열사에 대한 감사를 표하는 것으로 그 의미가 제한되었고, 행정명령 13호 ‘3·1절(독립일) 기념축하식 거행에 관한 건’을 통해 지정된 장소 이외에는 축하식을 제한하였다.
정부 수립 이후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공포함으로써 국경일로 지정되었고,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에 따라 공휴일로 지정되어 임시정부로부터의 국경일 전통을 계승하였다. 이날이면 정부에서는 애국지사, 독립유공자 유족, 국가 주요인사 등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참석한 기념식을 거행하며, 각 지역에서도 기념식을 비롯하여 1919년 3·1운동 당시 해당 지역의 만세 운동 광경의 재현과 같은 다양한 행사를 시행한다. 또한 가정과 기업 등에서도 태극기를 게양하여 이날을 기념한다.
삼일절 노래(정인보)
기미년 삼월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 독립 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 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한강물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선열하 이 나라를 보소서
동포야 이 날을 길이 빛내자.
새해를 맞은지 엊그제 같았는데 벌써 3월이라니 오늘의 추위도 아마 마지막 일것 같은 예감이다.
하긴 남쪽의 꽃소식을 접한지도 제법 되었지만 이곳 호수공원의 산수유 나무에도 곧 꽃이 필것 같고 아랫말산엔 진달래가 오늘 내일 하고있는 걸 보니 봄은 우리곁에 이미 와 있다고 보아도 될것 같았다.
이런 세월의 흐름을 보니 나의 삶도 결코 짧은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팔십문턱을 밟았으니
이승에서의 모든 희노애락은 다 겪었다고 할 것이며 풀잎에 잠깐 머물다간 이슬 같은 허무한 삶은 아니었다고 본다.
사랑하는 사람과 한평생을 같이 하며 누릴건 다 누렸으니 참으로 아름다운 생이었다고 할 것이며 일상 속에서 작은 기쁨과 소소한 멋속에 사랑을 일구는 작은 텃밭의 주인같은 삶이었다고 생각한다.
끝없는 욕망을 무언가로 채우려는것 자체가 어리석은 짓으로만 보아진다.
진정한 채움은 우선 욕심부터 버려야 할 것이다.
우린 잡다한 물건에서부터 감상적인 짐을 잔뜩 쌓아 놓고도 더 가지려고 하면서 스스로 함들어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비움의 노력이 우리의 삶을 더 풍요롭고 자유롭게 해 줄것이란 믿음으로 한번 살아볼 결심인데 어느순간 생의 끝점에서 허우적 거리고있는 나를 보니 한심하기만 하구나!
지하철에서 엘리베이트를 타고 밖으로 나오자 찬바람이 휙하고 얼굴을 스친다.
먼저 유관순 동상을 본다.
독립관은 그냥 바라만보고.
각종 행사텐트가 즐비하다.
서재필 동상.
미로찾기 놀이공간.
독립문.
높이 14.28m, 너비 11.48m 크기의 문으로, 자주민권과 자강운동의 기념물이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이후 자주독립의 결의를 다짐하려고 중국 사신을 영접하여 사대외교의 표상으로 인식된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건립하였다. 곧 1896년(건양 1)에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徐載弼)은 독립협회를 조직하고서 독립문 건립을 발의하였는데, 그 뒤 고종 황제의 동의를 얻고 뜻있는 많은 애국지사와 국민들의 호응을 받아 1896년 11월 21일에 정초식(定礎式)을 거행하였다. 1년 뒤인 1897년 11월 20일에 완공하였다.
이 문의 건축 양식은 서재필의 구상에 따라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본땄다. 다만 미적 배려가 부족하고 석재를 쌓는 수법도 이전의 성벽을 쌓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서재필의 자서전에 의하면, 설계는 독일 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가 하였고, 조선인 목수가 시공하였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경성부사(京城府史)』에는 러시아인 사바틴이 설계를 하고, 조선인 심의석(沈宜錫, 1854~1924)이 공사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문은 화강석 쌓기로 건립하였는데, 가운데 부분에는 홍예문(虹霓門)이 있고, 문 안쪽의 왼쪽에는 정상으로 통하는 돌계단이 있으며, 정상에는 돌난간이 둘러져 있다. 홍예문의 이맛돌에는 오얏꽃[李花] 문장이 새겨져 있고, 그 위의 앞뒤 현판석에는 각각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이라는 쓴 글씨와 함께 그 좌우에 태극기가 새겨져 있다. 문 앞에는 이전의 흔적인 서울 영은문 주초 2개(사적, 1963년 지정)가 서 있다.
1917년에 수리공사를 하였고, 1928년에는 조선총독부가 받침 부분이 내려앉을 위험이 있다고 하여 공사비 4000원을 경성부에 위탁하여 크게 수리하기도 하였다. 당시에 벽체 안쪽에 새로운 재료로 강조한 철근콘크리트를 보강하였다. 1979년에 성산대로 공사로 인해 원래의 위치에서 서북쪽으로 70m 떨어진 지점으로 옮겼다. 원래 자리에는 ‘독립문지. 이전일자 1979. 7. 13. 서울특별시장’이라고 새긴 가로·세로 각 70㎝ 크기의 기념동판을 묻었다. 이전공사는 1980년 1월에 마쳤다.
독립문(영은문)
인왕산.
태극기.
우리부부도 태극기앞에,
각종 기념품 판매장.
3.1절 기념행사.
감옥.
구치소 내부.
서대문 형무소(소나무)
안산.
조문(헌화)
한센병자 격리 수용.
인왕산.
사형장.
인왕산.
수감자 운동장.(격벽장)
새로 세운 게양대.
안산을 다녀오려고 하다 어찌나 춥고 배도 고파
내일 안산 계획이 있기에
오늘은 형무소 보는것으로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