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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본문 말씀이 포함된 요나서 전체적으로 보면 요나가 제 아무리 선지자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았을 때는 하나님께 쓰이지 못했고, 은혜의 통로가 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당했으며, 심지어는 그 자신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도 심각한 위기에 빠뜨렸던 반면..
바다에 빠지게 되면서 큰 물고기 배속에서 죽기 직전에 그제라도 뉘우치고 돌이키면서 어떤 면에서는 반강제적으로 라도 말씀으로 존재, 창조, 통치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순복함과 함께 말씀대로의 신앙으로 다시 서고 행하기로 결단했을 때는 그 자신부터 기적적인 방법으로 살 수 있게 되었던 것일 뿐 아니라 허다한 사람들과 가축들까지, 진정 이방 땅의 한 대도시 전체를 살리는 기회와 통로가 되기까지 한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편 그것은 니느웨 성 사람들에 있어서도 본질적으로는 결코 다를 수 없는 이치와 원리인 것인데 그들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사악하고 반복하며 쌓이고 또 쌓인 죄악들 가운데 있었을 때는 온 성에 재앙이 임박했고 순식간에 진멸될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었지만..
반대로 요나를 통한 하나님의 뜻대로 돌이켰을 때, 실상 왕부터 해서 모든 거주자들이 금식하면서 철저히 참회하고, 심지어 짐승들까지 그렇게 하게 했을 정도로 전적으로 말씀에 순복했을 때는 생각 이상으로 빨리 죄악과 진노들, 재앙과 심판의 위기들이 사해지고 돌이켜 지게 되었으며, 진정 구원과 살림의 일들이 실제로 생생하게 경험되어 진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상 오늘날 있어서도 그와 같은 영적인 이치나 원리는 조금도 다를 수 없는 것인데 오늘 하나님의 백성된 자들마다 마치 엣 사람과 같은 더 이상의 자기 자신의 힘과 의, 세상적인 능력과 방법들이 아닌 처음에 믿음으로 구원에 참예케 된 사랑, 이치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아버지의 창세전부터의 뜻과 약속과 섭리 안에서 순간순간마다 오직 한 분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고 붙잡으며 그 이름으로 기도하고 찬미하면서 바로 그 이름에 약속되신 성령님으로 인한 하늘의 힘과 은혜와 실제를 덧입어 죄악들과 싸우며 혹 범한 죄악들은 최대한 빨리 회개하고 돌이키면서 다른 그 무엇보다 말씀을 정말 하나님의 말씀으로 제대로 사모하고 가까이하며 주야로 더욱 읽고 들으며 묵상하고 실천하며 증거하는 등과 같은 결단과 몸부림들로 깨어 있고 살아 있는 신앙이 된다면..
그 누구보다도 말씀으로 존재, 창조, 통치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고, 창세 전부터 뜻하시고 계획하시며 약속하시고 준비하신 하늘의 은혜와 능력들을 그 당사자 자신부터 생생히 누릴 수 있게 하시는 것일 뿐 아니라 그 온 지경의 사람들까지도 함께 누릴 수 있게 하시는 것이며, 더 나아가 이 세상의 여러 가지의 사안과 영역들, 여러 모양의 사람과 대상들에 있어서도 어떤 식으로든 말씀의 약속대로 크고 작은 살림과 구원의 도구들, 은혜와 축복의 통로들이 되게 하시는 것임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특히 바로 그와 같은 말씀의 신앙, 말씀의 열정이야 말로 직접적, 실질적인 측면에서는 말씀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더욱 생생하고 강렬하게 역사하시면서 하늘의 힘과 구원의 일들, 응답과 복들 등을 여러 모양의 도구와 통로와 방법들 등을 통해 현실적, 실제적으로 풍성하고 강력하게 경험케 하시는 것이고, 뿐만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 말씀대로 십자가를 지시면서 온 세상과 전 인류, 모든 시간과 공간보다 더 크신 구주로서의 그 목숨값을 모든 대속과 대신, 나음과 화평 등을 위한 값과 대가로 대신 주심으로 인해 시대와 나라들을 넘어 모든 구원을 다 이루심과 함께 믿음으로 값없이 참예케 될 수 있도록 길과 통로가 되어 주신 것이며 그러면서 영적으로 더 이상의 죄악과 사탄과 사망과 심판들의 노예가 아닌 하나님의 것이자 천국과 부활과 영생의 백성, 본질적으로 말씀의 사람으로 실제로 거듭날 수 있게 하심과 함께 온갖 은혜와 응답과 복들 등을 살아서도, 죽어서도, 세상 끝 날에도, 영원에 이르기까지 생생하게 누릴 수 있게 하신 열쇠와 방법이 되신 구주 예수님으로 인한 크고 작은 모든 구원의 일들에 있어서도, 진정 그 이름으로 인한 기도의 응답 한 번에 이르기까지도 시대와 나라들을 넘어 가장 합당한 것임이 아닐 수 없는 것이며..
근원적으로는 그렇듯 말씀 그 자체이시고 오직 말씀으로 하나되신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되심과 기뻐 역사하심으로 인한 모든 하늘의 힘과 구원의 일들이 생생하고 강렬하게 되지 않기가 힘든 것이고, 그와 함께 삶의 자리들, 사역의 현장들, 모든 문제와 기도제목들, 모든 영역과 몸부림들에 있어서도 날마다 순간마다 말씀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의 사건들과 말씀 중의 말씀인 복음의 능력들을 갈수록 더 풍성하게 누리고 뜨겁게 경험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세계이자 법칙인 것임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만일 아래의 본문이 있는 요나서의 처음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선지자든, 또는 오늘날의 목회자든, 사실은 그 누구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어떤 이유로든 자기 소견대로 행하며 불순종한다든지, 더 나아가 계속해서 말씀과 정반대로 죄악, 세속, 소견, 탐심, 음행, 거짓, 우상 등을 숨기고 있고, 반복하면서 벗하고 있다면, 참으로 그 누구든, 진정 그 어떤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도, 심지어는 비록 한 때, 일정 기간이었긴 했지만 어쨌든 믿음의 대선배들인 다윗, 솔로몬, 베드로 등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처럼 실제로 연약한 인생, 연약한 육신의 몸을 입고 있는 이상 그렇게 할 수야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때는 이미 제대로 되고 합당한 믿음으로 참예케 되고 인침 받으며 천국과 부활과 영생의 백성으로 뒤바뀌게 된 구원이라는 것이 취소되지는 않고, 실상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되심으로 인해 이미 하나님의 것으로 뒤바뀌고 영생까지 이어지게 된 결과까지 포함된 구원에 있어 취소라는 개념 자체가 맞지 않는 것이나, 게다가 행위라는 것이 구원에 참예케 됨에 있어서, 그러한 결정에 있어서 직접적인 관여나 역할인 것일 수가 없는 것이듯이 마찬가지로 잘못된 행위에 의해 구원이 돌이켜지거나 취소케 되는 차원인 것일 수도 없는 것이고 만일 그렇게 된다면 이 세상에서 연약한 육신의 몸을 입고 사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 중에서 구원이 돌이켜지지 않을 자가 단 한 사람도 없게 되는 것이라 볼 수 있는 것인데 어쨌든 그렇다고 죄악들을 범해도 된다거나 회개도 필요 없다거나 죄악들로 인해 아무렇지 않게 된다거나 하는 등일 수는 없는 것이고 오히려 반대에 가까운 것으로 사실상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더욱 사랑하셔서라도 기뻐 역사하시거나 귀하게 사용하시고 하늘의 힘과 응답과 복들을 여전히 넘치게 하시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로 아비의 심정으로 하나님의 시간까지 더 이상의 죄악들을 반복하지 않고 하루 바삐 돌이키며 속히 제대로 된 믿음에 설 수 있게 되도록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들 등과 같은 징계들을 아끼지 않으시곤 한다는 것입니다..
진정 그에 있어서, 특히 죄악이라는 것이 얼마나 고약하고 끔찍할 수 있는 것인가에 있어서의 구체적인 실제 사례나 유사 사례가 오늘 본문의 요나와 니느웨 성이 아닐 수 없는 것이고, 더 나아가 그에 있어 가장 대표적인 믿음의 선배는 간음, 살인교사와 유사한 악과 같이 참으로 있을 수 없는 죄악들까지 범함으로 인해 그 자신과 가족들 뿐 아니라 온 나라 전체에 결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아픔과 곤고와 비참들이 넘치게 만들었던 다윗이라 할 수 있는 것이며, 사실은 태초의 인생들인 아담과 하와 때부터, 게다가 노아의 시대에는 더더욱 극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이고, 더군다나 남북 이스라엘 열왕의 때에야 말로 아주 직접적, 현실적, 구체적으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으로..
사실상 참으로 그러한 죄악의 모양과 정도와 강도에 따라, 또한 하나님의 시간과 계획과 섭리에 따라, 그리고 그 당사자의 그릇과 영성과 준비 등에 따라 그 자신의 심령이나 육신, 영혼, 가정 뿐 아니라 여러 모양의 관계와 영역들, 온 나라와 백성들에게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제와 곤고들, 비참과 파괴들, 반란과 전쟁 등과 같은 위기와 절망들, 진정 크고 작은 가시덩굴과 엉겅퀴와 같은 상황들이 그 지경이나 온 땅에 적지 아니 가득하게 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아무리 큰 죄악들이나 잘못들, 연약함들 가운데 있었다고 하더라도 요나처럼, 니느웨 성 백성들처럼, 뿐만 아니라 다윗이나 솔로몬처럼, 더 나아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처럼, 어떤 면에서는 다메섹 도상의 사도 바울 등처럼 회개하고 돌이킬 때 생각보다는 빨리 하나님의 마음도 움직여지시고, 진노들이나 징계들이나 심판들 대신에 용서와 구원과 회복들이 생각 이상으로 강렬하고 신속하곤 했던 것을 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또다시 쓰이고 더 귀히 쓰이며, 심지어는 잘 되고 더욱 더 잘 될 수도 있게 되는 것도 볼 수 있으며, 실상 결국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인데 그 이유는 결코 복잡하지 않은 것입니다..
진정 모든 시대와 나라들을 넘어 온 세상과 전 인류, 모든 시간과 공간보다 더 크신 성자 하나님이신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 목숨값 구원이 시대와 나라들을 넘어 그만큼, 그 이상으로 강력한 것이기 때문이고, 뿐만 아니라 직접적, 경험적인 면에 있어서는 그 이름 가운데 약속되신 성령님의 시공을 넘는 전지전능의 하늘의 힘이 그 이상으로 실제적인 것이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 창세전부터 상상도 못할 사랑과 은혜와 능력으로 뜻하시고 계획하시며 약속하시고 준비하시며 하나하나 진행될 수 있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과 통치와 섭리로 인한 구원의 역사들이 측량도 못할 만큼 엄청난 것이기 때문이고..
근원적으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되심으로 인한 모든 하늘의 힘과 구원의 일들이 우리들이 생각지도 못하고 짐작도 못할 정도로 놀랍고 실제적이며 기적적이고 신실하며 강력한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구주 예수님께서는 믿음과 함께, 본질적으로는 말씀의 믿음과 함께 하는 그러한 하늘의 힘과 구원의 세계, 복음의 세계, 하나님의 세계에 있어 진정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게 할 수 있다고까지 하셨는데 참으로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으며 기도하고 찬미하면서 말씀으로 몸부림치는 산 믿음과 함께 모든 상황들 속에서 우리 인생들이 날마다 순간마다 누릴 수 있고, 더 나아가 세상 끝 날과 영생에 이르기까지 누릴 수 있는 모든 하늘의 힘과 구원의 일들, 은혜와 응답들, 역전과 복들 등은 잘 따지고 헤아리며 통찰해 보면..
원론적으로는 사실 하나님 아버지의 상상도 못할 사랑과 은혜와 능력들 만큼인 것이고, 온 세상과 온 우주보다도 더 크신 성자 하나님이신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 목숨값의 대속과 대신들, 나음과 화평들 만큼인 것이며, 뿐만 아니라 성령님의 시공을 넘는 권능과 실제들 만큼인 것이고, 근원적으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되심으로 인한 역사들 만큼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그 누구보다도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 대략 2000년이 지난 오늘 나 같은 자까지도, 진정 나 같이 억만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곧 꼭 원죄까지 거론하지는 않더라도 하나님의 모든 말씀의 법 앞에서 구원에 참예하기 전의 허다한 죄악들은 물론이거니와 그 이후에도 셀 수 없이 범하게 되는 크고 작은 죄악들 속에서도 실제로 단지 믿음으로 값없이 구원에 참예케 될 수 있었던 것일 뿐 아니라 그 어떠한 상황들, 악들 속에서도 그러한 구원이 돌이켜지지 않은 것이며, 게다가 앞으로도 그 어떠한 경우에라도 돌이켜 지지 않는 것이고..
더 나아가 수시로 자복하고 돌이키면서 사함과 나음들을 입으며 새롭게 되고, 반전과 역전들도 되며, 더군다나 끊임없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힘과 역사들, 응답과 복들 등을 삶의 자리와 사역의 현장들에서 계속해서 날마다 순간마다 허다하게 누릴 수 있는 것이고, 심지어는 세상 끝 날의 신령한 몸으로의 부활과 영원한 나라의 소망까지도 조금이라도 희미해지기는커녕 갈수록 더 분명해 지고 더더욱 갈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며, 사실 세상 끝 날에도 말씀대로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말씀대로 신령한 몸을 입고서 말씀 그대로 영원한 나라와 기쁨과 생명도 생생히, 반드시 누릴 수 있게 됨도 결코 아닐 수 있는 것이거나 거짓이거나 불가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욘4:8~11)
('페북두란노서원66'중에서 인용과 추가/밀알서원)
*양범주목사의 '21세기 두란노서원'/2024년 11월 4일(월)2부/사진 조연진사모, 이미지 박원영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