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념무심(無念無心)
견성(見性)을 또한 무념 무심이라 하니 여기에 대해 설명하고자 합니다.
나의 이 법문은 무념으로 으뜸을 삼는다.
만약 유념이 없으면 무념도 또한 서지 못합니다.
我此法門은 無念으로 爲宗하니라.
若無有念하면 無念도 亦不立이니라. [六祖壇經]
이 무념이란 제8 아뢰야 무기무념이 아니고 진여본성의 무념이니, 제8 아뢰야 무기무념으로써는 진여대용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유념이 없다는 것은 일체 망념이 다 떨어져서 제8 아뢰야 무기무념까지도 끊어짐을 말합니다. 십지°등각의 대보살이 견성을 하지 못한 것은 마조스님 말씀과 같이 침공체적해 있기 때문입니다. 침공체적이란 내용으로 봐서는 무념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제6의식의 생멸무념이 완전히 떨어졌다 해도 제8 아뢰야 무기무념이 남아 있으며, 제8 아뢰야 무기무념이 완전히 떨어진 데서만 진여무념 근본무념이 성립됩니다.
진여무심은 무주심(無住心), 즉 머무를 수 없는 마음이어서, 여기는 부처도 머무를 수 없고 조사도 머무를 수 없고 진여무념이라고 이름할 수도 없으되 마치 사람이 물을 마셔 보고 차고 더운 것을 아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직 증(證)해야 알지 증(證)하기 전에는 모릅니다. 무념을 으뜸[宗]으로 삼는다 하니 말뚝같이 무엇을 세워 놓고 으뜸[宗]을 삼는다고 오해하기 쉬워서 그래서 무념도 세울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무(無)라 함은 무엇이 없음이며 념(念)이라 함은 무엇을 생각함인가? 무라 함은 상대의 두 가지 상[二相]이 없으며, 모든 진로(塵勞)의 망심이 없는 것이다. 념이라 함은 진여본성을 생각하는 것이다. 진여는 곧 무념의 본체요, 생각[念]은 진여의 작용이다.
無者는 無何事며 念者는 念何物고 無者는 無二相이며 無諸塵勞之心이요 念者는 念眞如本性이니 眞如는 卽是無念之體요 念은 卽是眞如之用이니라. [六祖壇經]
무(無)라는 것은 차(遮:가리는 것)를, 념(念)이라는 것은 조(照:비치는 것)를 말합니다. 두 가지 상[二相]이 없다는 것은 양변을 떠난 중도를 뜻합니다. 무란 쌍차를 말하며, 양변을 떠나며 모든 진로의 망심이 없는 것이 진여입니다. 념이란 그 진여의 작용을 말하니 쌍조입니다.
어떤 사람이 무심(無心)을 ‘마음이 없다’, 또 무념(無念)을 ‘생각이 없다’고 해석하였는데 ‘없다’고만 하면 그것은 단견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없는[無] 마음이요, 없는[無] 생각입니다. 일체 진로가 없고 두 가지 상이 없는 생각[念]이니 이 념은 진여의 작용이 됩니다. 즉 무념이라는 것은 양변이 떨어진 진여의 념이니, 이것이 실지로 쌍차쌍조한 중도정각입니다. 그러니 무념이 즉 중도이고 중도가 즉 무념이며, 진여가 즉 무념이며 무념이 즉 진여입니다. 다시 강조하면 무란 생멸의 양변을 완전히 떠나서 쌍차가 되고 념이란 쌍조가 되어 항사묘용인 진여대용이 여기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법을 깨친 자는 즉시 무념이니 기억도 없고 집착도 없다.
悟此法者는 卽是無念이니 無憶無著이니라. [六祖壇經]
선종에서 표방하는 것은 견성성불인데 그 견성성불의 근본이 어디 있느냐 하면 무념을 성취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육조스님이 무념을 으뜸[宗]으로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념이라고 하여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단멸공(斷滅空)이 아니고 모든 두 가지 상이 다 떨어진 동시에 진여의 항사묘용이 거기서 일어나는 무념이라는 것입니다.
용시비구가 중한 계를 범하였으나 무생을 깨쳐서 벌써 성불하여 지금까지 있느니라.
勇施犯重하나 悟無生하야 早時成佛하야 于今在니라. [證道歌]
무생(無生)이 성불이고 성불이 무생이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무생(無生)과 무념(無念)이 표현은 달라도 내용은 같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인용한 것입니다.
자기의 본성을 깨치면 한번 깨치면 영원히 깨쳐서 다시는 미혹하지 않는다. 해가 나올 때에 어둠과 합하지 아니하는 것과 같이 지혜의 해가 뜨면 번뇌의 어두움과는 같이하지 아니하므로 마음과 경계를 함께 요달하여 망상이 나지 아니한다. 망상이 나지 아니하니 곧 무생법인이다. 본래 있는 것이 지금 있으니 수도와 좌선을 빌리지 않으니 닦지도 않고 좌선하지도 않는 것이 즉시 여래의 청정선이다.
悟自家本性하면 一悟永悟하야 不復更迷하나니 如日出時에 不合於冥이라 智慧日出하면 不與煩惱暗으로 俱니 了心及境界하야 妄想이 不生이니라 妄想不生이 卽是無生法忍이니 本有今有하야 不假修道坐禪이니 不修不坐가 卽是如來淸淨禪이니라. [馬祖語錄]
마조스님이 자성을 깨쳤다 함은 한번 깨치면 영원히 깨친 것이어서 다시 미혹하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니, 그것은 구경각을 성취한 것을 의미하며 참 무생법인(無生法忍)이라는 것입니다. 무생법인을 성취하면 수도하고 좌선할 필요가 없이 언제든지 자유자재하게 활동할 뿐입니다.
무엇을 닦는다 하여, 닦을 것이 있는 사람이면 아직 병이 덜 나은 사람이니, 마조스님이 자성을 깨쳤다 하는 것은 병이 다 나아서 약이 필요 없는 데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여래청정선(如來淸淨禪)이라 하며 부처님과 조사가 전해 내려온 조사선(祖師禪)이라 합니다. 그래서 육조스님뿐 아니라 그 이후 고불고조(古佛古祖)가 전해 내려온 선이라 하든지 도라 하든지 법이라 하든지, 완전히 구경을 성취해서 다시 닦을 것이 없는 데서 ‘자성을 깨쳤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지 닦을 것이 있는 데서, 약을 아직 써야 하는 병이 있는 데서 ‘자성을 깨쳤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절대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무생(無生)을 깨치는 것을 묘각이라고 한다. 한 생각에 단박 초월하는 것이니 어찌 번거로운 논의가 있으리오.
悟無生을 名爲妙覺이니 一念頓超어니 豈在繁論이리오. [馬祖語錄]
무생(無生)이라는 것은 구경각을 말합니다. 한 생각 잠깐 사이에 삼현°십지를 초월해서 구경각을 성취한 것이니만큼 이런저런 이론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쓸 것이 없으면 성불한다.
無心可用하면 卽得成佛이니라. [馬祖語錄]
모든 집착과 머무름을 완전히 떠나 순수한 무심이 되어서 마음을 쓸 것이 없음을 성불이라 합니다.
무심이 부처이니라.
無心이 是佛이니라. [馬祖語錄]
마음이 즉 부처며, 무심이 즉 도이니, 마음이 일어나거나 생각에 움직임이 없어, 유무(有無)°장단(長短)°피아(彼我)°능소(能所) 등의 마음이 없으면 마음이 본래 부처요 부처가 본래 마음이니라.
卽心是佛이요 無心是道니 但無生心動念하야 有無長短彼我能所等心하면 心本是佛이요 佛本是心이니라. [宛陵錄]
유°무, 능°소 등 양변을 다 여의면 순전한 무심이 되며 이것을 중도니, 부처니, 견성이니 합니다.
다만 바로 여기에서 무심하면 [진여자성의] 본체가 스스로 나타나서 마치 큰 해가 허공에 떠오르는 것과 같아서 시방세계를 두루 비추어 다시 장애가 없느니라.
但直下無心하면 本體自現하야 如大日輪이 昇於虛空하야 徧照十方하야 更無障碍니라. [傳心法要]
무심이라는 것은 일체 마음이 없는 것이다. 여여(如如)의 체(體)가 안으로는 목석과 같아서 움직이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며, 밖으로는 허공과 같아서 막힘이 없고 장애가 없으며, 능소도 없고 방소(方所)도 없으며, 모양도 없고 얻고 잃음도 없느니라.
無心者는 無一切心也니 如如之體가 內如木石하야 不動不搖하며 外如虛空하야 不塞不碍하야 無能所無方所하며 無相貌無得失이니라. [傳心法要]
무심의 내용을 설명한 것입니다. 그러면 무심을 얻으려면 어느 지위에서 어떻게 얻게 되는가.
어떤 사람은 법문을 듣고 한 생각 동안에 무심을 얻고 어떤 사람은 십신°십주°십행°십회향에 이르러 마침내 무심을 얻습니다. …… 한 생각 동안에 얻는 사람과 십지를 거쳐서 얻는 사람과는 공용(功用)이 같아서 다시 깊고 얕음이 없으니, 다만 겁(劫)을 지나도록 공연히 심신만 수고롭게 할 뿐이다.
有聞法하고 一念에 便得無心者하며 有至十信十住十行十廻向 乃得無心者하나니 …… 一念而得과 與十地而得者로 功用이 恰齊하야 更無深淺이요 祗是歷劫枉受辛勤耳니라. [傳心法要]
누구든지 무심을 성취하는 데 있어서 바로 가는 길이 있으니 시간을 많이 허비하지 않고 헛고생을 하지 않고 바로 깨치는 길로 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황벽스님의 말씀입니다.
망념이 나지 아니함이 선(禪)이요 앉아서 본성을 보는 것이 정(定)이다. 본성이란 너의 무생심(無生心)이며 정이란 경계를 대함에 무심하여 팔풍(八風)에 움직이지 아니함이다. 만약 이렇게 정을 얻은 사람은 범부일지라도 부처님 지위에 들어간다.
妄念不生이 爲禪이요 坐見本性이 爲定이니 本性者는 是汝無生心이라 定者는 對境無心하야 八風에 不能動하나니 …… 若得如是定者는 雖是凡夫나 卽入佛位니라. [頓悟入道要門]
일체처에 무심이 즉 무념이니 무념을 얻었을 때에 자연히 해탈하느니라.
一切處無心이 卽是無念也니 得無念時에 自然解脫이니라. [頓悟入道要門]
일체처에 무심하면 즉 열반에 들어 무생법인을 깨치니 둘 아닌 법문[不二法門]이라 하며 다툼 없음이라 하며, 또 일행삼매(一行三昧)라 한다. 어떤 까닭이냐? 필경 청정하여 나와 남이 없는 까닭에 애증이 일어나지 아니하니 이것이 두 성품이 공함이며 무소견(無所見)이니 즉 진여의 얻음이 없는 말씀이다.
一切處에 無心하면 卽入涅槃하야 證無生法忍하나니 亦名不二法門이며 亦名無諍이며 亦名一行三昧니라 何以故오 畢竟淸淨하야 無我人故로 不起愛憎하야 是二性空이며 是無所見이니 卽是眞如無得之辯이니라. [頓悟入道要門]
무념을 얻은 사람은 자연히 모든 부처님 지견(知見)에 들어가니, 이런 법을 얻은 사람은 즉 불장(佛藏)이며, 법장(法藏)이라 한다.
得無念者는 自然得入諸佛知見이니 得如是者는 卽名佛藏이며 亦名法藏이니라. [頓悟入道要門]
마음이 일어난다 해도 가히 지각할 만한 최초의 모습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최초의 모습을 안다 한 것은 무념을 말한다.
心起者는 無有初相可知 而言知初相者는 卽 謂無念이니라. [起信論]
부처님 지위가 무념이니라.
佛地가 無念이니라. [元曉疏, 賢首義記]
여래가 마음을 깨칠 때에 최초의 동상(動相)이 본래 깨끗함을 아니, 이런 까닭에 무념이라고 한다.
如來覺心之時에 知初動相이 本來淨이니 是故로 說言卽謂無念也니라. [元曉․賢首疏]
제일의(第一義)를 세운다는 것은 오직 무여열반계(無餘涅槃界) 가운데를 말함이니 이것이 무심입니다. 어째서 그러냐 하면 이 계(界) 가운데에는 아뢰야식이 영원히 끊어졌기 때문이다.
第一義建立者는 謂唯無餘涅槃(佛地)界中이니 是無心地라 何以故오 於此界中에 阿賴耶識이 亦永滅故니라. [瑜伽論 一三]
제일의를 세운다는 것은 불교에 있어서 가장 구경도리(究竟道理)를 말합니다. 유식계통에 있어서는 무심을 무여열반이라 하고 정각이라 합니다.
부처님은 무생(無生)으로 생(生)을 삼고 머무르지 아니함을 머무름으로 삼는다.
佛은 無生으로 爲生하고 無住로 爲住니라. [攝論 十]
부처님의 무심은 구경각을 성취한 구경무심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무심이 도라고 말하지 말아라. 무심도 오히려 한 겹 관문이 사이해 있느니라.
莫道無心云是道하라 無心도 猶隔一重關이니라. [十玄詩]
이 무심이라는 것은 6식 경계와 7식 경계가 완전히 끊어진 칠지보살의 무상정(無相定)에서의 무심과 팔지보살 이상의 멸진정에서의 무심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멸진정의 무심도 제8 아뢰야 무기식을 의지한 것이지 진여본성을 본 구경무심은 아니니, 제8 아뢰야 무기식을 완전히 벗어나야 참다운 무심이지 그 이전의 무심은 거짓 무심입니다.
(성철스님의 백일법문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