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혼과 이혼, 아이 사랑
마 19:1-15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를 떠나 요단 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시니
2 큰 무리가 따르거늘 예수께서 거기서 그들의 병을 고치시더라
3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5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6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7 여짜오되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8 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10 제자들이 이르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겠나이다
11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12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13 그 때에 사람들이 예수께서 안수하고 기도해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하시고
15 그들에게 안수하시고 거기를 떠나시니라
마 19:1-15 / [이혼에 대한 교훈;막10:1-12]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마치고 갈릴리를 떠나 요단강 건너편 유대 지방으로 가셨다. 2) 많은 군중이 예수를 따라오자 예수께서는 거기서도 일일이 그들의 병을 고쳐주셨다. 3) 바리새파 사람들 몇이 예수께 와서 말로 올무를 걸어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어떤 경우든지 이유가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상관없습니까?' 하고 물었다. 4)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성경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성경에는 ㄱ)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는 것과 (ㄱ. 70인역 창1:27(참조,5:2)) 5) 남자는 그의 부모를 떠나 제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루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6) 두 사람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는 것이다.' 7) `그러면 왜 모세는 ㄷ) 이혼장을 써주면 아내를 버려도 좋다고 하였습니까?' 하고 그들이 다시 묻자 (ㄷ. 신 24:1-4) 8)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모세는 너희의 완고하고 악한 마음을 알고 그런 말을 하였지만 그것은 본래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 아니다. 9) 나는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음행한 까닭이 아니고서는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간음을 행하는 것이다.' 10) 그때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만일 꼭 그래야 한다면 차라리 결혼하지 않는 것이 낫겠습니다.' 11)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할 수가 있다. 12) 어떤 사람은 날 때부터 결혼하지 못할 몸으로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사람의 손으로 그렇게 되며, 또 어떤 사람은 하늘나라를 위해 스스로 결혼하지 않는다.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 13) [어린아이를 축복하시다;막10:13-16,눅18:15-17] 그때 사람들이 어린아이들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머리에 손을 얹어 기도해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데리고 온 사람들을 보고 `우리 선생님을 괴롭히지 마시오' 하고 나무랐다. 14) 그러자 예수께서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 하늘나라는 이런 어린아이들과 같은 자들의 것이다' 하시고 15) 그들의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시고 그곳을 떠나셨다.
예수님이 결혼 관계와 아이들에 대한 태도에 대해 하나님의 관점에서 가르쳐 주십니다.
결혼과 이혼에 대한 교훈(1-12) 예수님에 대해 위기감과 불안감을 갖고 있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이혼에 대한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혼을 지지한다면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을 지지하는 것으로 드러나고, 이혼을 금지한다면 모세의 율법을 반대하는 것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어떤 것을 지지하든 거기에 반대의 입장을 가진 사람들의 반감을 사게 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질문의 초점은 이혼에 있었지만, 예수님은 결혼이 갖는 의미에 초점을 두고 말씀하십니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보완적 관계로 창조되었고, 결혼은 남자와 여자가 만나 한 몸이 되는 관계의 시작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결혼한 남자와 여자는 한 몸이 되었기에 사람이 인위적으로 나눌 수 없는 관계임을 밝혀주십니다. 그럼에도 모세의 율법에서 이혼을 허락한 것은 인간의 죄악된 본성에 의해 희생자를 보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율법에서 이혼 증서를 쓰게 한 것은 남편들이 아내를 함부로 쫓아낼 수 없도록 하는 보호막이었습니다. 이혼 증서를 받은 여자는 재혼할 수 있었고, 결혼 지참금 반환을 요구할 수도 있었습니다. 오직 음행만이 이혼의 근거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는 결혼 관계 유지를 위해 서로가 헌신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13-15) 가부장적인 성격이 강한 사회에서 여자와 아이들은 존중받지 못하고 항상 우선권에서 밀렸습니다. 이런 모습은 제자들이 어린 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안수와 기도를 받으려는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발견됩니다. 제자들의 관점에서는 아이들에게 마음을 쓰는 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이들을 환영하셨는데, 아이들을 사랑하신 것도 있지만, 아이들이 보이는 신뢰하는 자세를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을 예수님께서 기대하신다고 제자들에게 교육의 기회로 삼으십니다.
적용: 가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관계(부부, 부모와 자녀)를 바라보는 기독교적 시각은 세상의 시각과 다를 수 있습니다. 당신이 바라보는 가정 안에서의 관계는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습니까? 세상적 관점에서 기독교적 관점으로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까?
상황이 좋지 않을 때는 꾹 참고 견디라는 조언을 들어봤을 것입니다. 이런 조언은 흔히 공격적이고 빈틈없는 태도를 부추겨서 무엇이든 할 태세로 초점과 생각을 날카롭게 벼리도록 만듭니다. 불행하게도 마음을 단단히 먹고 싸움을 대비하다 보면 시야가 좁아지게 됩니다. 그래서 두려워하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까지 잘라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창조 섭리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우리 마음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본질적인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음에 책망 받지 않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려 노력하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설 교 >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라
마 19:13-16 / 이삼규 목사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늙고 병들었을 때 제자들로부터 한 가지 부탁을 받았습니다. “선생님, 마지막으로 사람들에게 가장 소중한 메시지를 하나만 들려주십시오.” 소크라테스는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말했습니다. “아테네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시민들을 향해 간절히 외치고 싶은 말이 하나 있다네.” 제자들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 말이 무엇입니까” 소크라테스가 큰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사람들이여, 재물을 모으는 일에만 충실하지 마시오. 그것을 물려받을 어린이들에게 좀더 많은 사랑과 정성을 쏟으시오. 이것이 내 일생을 통해 얻은 가장 귀한 교훈입니다.”
사람들은 간혹 진정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어린이를 잘 양육하는 것이 부모에게 맡겨진 제1의 사명입니다.
어린이의 마음은 하늘과 닿아 있습니다. 어린이는 하늘이 인류에게 보낸 선물입니다. 방정환 선생은 아이들을 ‘어린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 속에는 ‘어리신 분’이라는 존경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어린이주일은 1856년 레오날드 목사님이 시무하는 북미의 한 교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어떻게 하면 어린이들의 믿음이 견고해질까를 생각하다가 그 마을의 일곱 살 어린이들을 부모님들과 함께 초청하여 어린이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한 꽃을 달아주고 성경책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이 소문은 많은 교회에 퍼져나갔고 미국 전역에서 6월 첫 주에 어린이주일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1919년부터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서 어린이주일이 꽃주일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고, 해방 이후에는 국가적으로 5월 5일을 어린이날로 정하면서 교회적으로는 5월 첫째주일을 어린이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여 자녀에 대한 소중함을 다시 한번 기억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갓난아기는 하루에 평균 300번씩 웃는다고 합니다. 아이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면 그 1차적 책임은 부모에게 있습니다. 어린이는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잠시 맡겨준 선물입니다. 어린이는 소유의 대상이 아닙니다. 만약 이 선물을 훼손하면 나중에 주인으로부터 큰 책망을 듣습니다. 어린이는 아직도 하나님이 인간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강력한 사랑의 메시지입니다. 이번에 북한 룡천역 폭발사고로 어린아이들이 불구경하다가 많은 어린이들이 죽고 얼굴에 심한 화상을 입었습니다. 그들이 장래의 희망인데 참으로 가슴 아픈 사건이었습니다.
1.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13절)
1)어린 아이들을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그들이 자기 자녀들을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나왔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무엇보다 귀중한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자녀들을 예수님 앞에 데려 오기를 기뻐하십니까?
자녀들이 세상에서 좋은 선생님과 만나기만 해도 거기에 상당한 발전과 진보가 이루어지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하물며 그들이 예수님과 만나게 된다면 거기에 어떤 일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자녀들을 예수님 앞에 세워 보십시오. 거기에 그들의 밝은 미래가 있는 것입니다.
2)자녀들에게 아무 문제가 없을 때, 아직 평안할 때 예수님 앞에 그들을 데려왔습니다.
자녀들이 병들기 전에, 그들에게 무슨 아픔이 있기 전에 예수님 앞에 자녀들을 데려왔습니다. 우리는 이런 점을 배워야 합니다. 문제가 일어난 후에는 참으로 수습이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미리 주님과 자녀의 관계를 잘 맺어 줄 때 오히려 문제는 사라지게 될 줄 믿습니다. 사후약방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문제가 생긴 후에는 고치기가 어렵습니다.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자녀들을 데려와야 합니다.
3)예수님이 자기 자녀들을 위하여 축복기도해 주시고 안수해 주시기를 원하여 데려왔습니다.
이 부모들은 그 자녀들에게 예수님의 축복하심이 있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가졌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귀한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예수님의 축복하심과 그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심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이 시대에 이토록 자녀들이 예수님의 축복을 받고 살아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합니다. 이것이 다른 무엇보다 우선되는 것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을 주님 앞에 데리고 나오는 일에 우리 모두는 열심을 내야 합니다.
어떤 교우들을 보면 늘 자식들과 함께 예배에 참석하려고 애를 쓰는 모습을 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주일 하루 만이라도 온 가족이 함께 하나님을 찾아 예배하는 모습은 너무나도 좋아 보입니다. 늘 주님을 사모하는 정신으로 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자녀문제일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우들의 대화 속에서도 최대의 관심거리가 자녀문제인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요즘 각 가정은 과거만큼 아이들을 많이 낳지 않습니다. 그리고 몇 안 되는 자녀들에게 최대의 관심을 쏟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부모님들의 관심이 많이 있다고 해도 자녀의 문제들이 과거보다 더 가벼워졌다든지 혹은 없어졌다든지 하는 말은 들을 수 없습니다. 아니 시대의 변화와 함께 자녀 교육이 더욱 더 힘들다는 소리만이 들릴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자녀들의 문제에 대한 해결이 단순히 부모님들의 관심만으로 되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부모님들의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부모님들만의 힘으로 자녀문제 전체를 해결할 수 있다는 식의 생각은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너무나도 빨리 달라지고 있습니다. 과연 어떻게 해야 저들을 바로 세울지 걱정스러울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실 것입니다. 자녀가 잘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께로 데리고 나오십시오.
2. 꾸짖는 제자들
어떤 부흥 강사님이 집회를 하는데 그 교회 청년이 강사님을 꼭 만나고 싶다기에 호텔 커피숍에서 만났습니다. 그 청년의 이야기를 들어본즉 아버지가 그 교회 장로님으로 시무하고 계시는데, 그 청년이 초등학교 5학년시절 아버지 생신 때 꽃 한 송이와 편지선물을 준비하고 있는데 아버지께서 방에 오셔서 물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야 임마! 너 벌써 연애하는 거야, 너 임마 공부 못하고 연애하면 죽을 줄 알아"하며 머리를 쥐어박고 나가셨다는 것입니다.
이 아이는 그 때부터 아빠를 미워하기 시작했고 교회는 형식으로 나갔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타락한 상태에서 부흥회를 한다니 강사님께 상담을 요청한 것이었습니다.
강사님이 그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내가 어른 된 사람으로, 그리고 아버지가 된 사람으로서 네게 사과하고 싶다, 미안하구나."라고 이야기를 하며 대화를 끝냈습니다. 이 이야기가 있은 후 장로님을 조용히 불렀고 10년 전의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무엇인가 물어 보지도 않고 관심도 없이 마음을 알아주지 아니하므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진정으로 아들에게 늦었지만 깊은 용서를 빌라고 했습니다. 집회 마지막 날 마지막 시간이 되었습니다. 상담을 한 청년은 뒤에 앉아 있었습니다. 설교의 끝부분에 자신의 일에 책임을 지는 부모가 되라고 설교를 하는 중 그 청년의 아버지 장로님이 앞으로 울면서 나왔습니다. 교인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무슨 큰 죄를 지었는가?
"목사님! 아들 때문에 교인 앞에 고개도 들 수 없고, 강단에서 기도하는 것도 부끄러운데 이 모든 책임이 저에게 있습니다." 강단 앞에서 엉엉 울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바닥을 치면서 "아들아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다."라고 말입니다. 이 모습을 바라본 아들이 뛰어 나와 아버지의 등을 부둥켜안고 울었고 교회는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한참 뒤에 강사님이 장로님 부자를 위하여 울면서 기도를 했으며 자초지종을 다 이야 기했습니다. 그때 자식 가진 부모는 다시 한번 생각하며 회개하는 시간이 되었다고 합니다.
어린아이들이 예배에 방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들은 예배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경건한 예배를 위해서는 주의를 시켜야합니다. 어떤 부모들은 자기 집에서 하는 것처럼 예배당에서도 마냥 내버려 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배당에서도 그러니 식당이나 다른 장소에 가면 오죽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차원이 다릅니다. 부모가 말씀 듣는데 방해하러 온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 안수 받고 축복 기도 받으러 온 것입니다. 제자가 이것을 모르고 꾸짖은 것입니다.
제자들은 어린아이를 데리고 오는 사람들을 꾸짖은 이유는 두 가지였을 것입니다. 어른들의 일에 어린아이를 데리고 옴으로 당시 사회 관습을 무시하고 또 일을 그르친다는 판단 때문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은 바쁘고 또 심신이 피곤하신데 어린아이까지 데리고 와서 성가시게 한다는 생각일 것입니다. 그래서 지각없는 부모라고 꾸짖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꾸짖음이 잘못된 것은 금방 드러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처럼 깊은 생각 없이 단순한 생각으로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을 꾸짖은 것입니다.
3. 예수님의 교훈
1)어린 아이들을 용납하라!
주님은 자기 자녀들이 주님의 기도를 받고 안수 받기를 원하여 나오는 그 부모들의 마음을 받으셨습니다. 그런 마음들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들을 이기적이라고 비난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느라 피곤하신 주님의 육신적 상황으로 볼 때 이 부모들의 행동은 조금도 상대방을 배려할 줄 모르는 이기적인 측면이 엿보입니다. 그러기에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자식들이 복 받는 삶을 살게 하고픈 그 부모의 마음을 이기적이라 비난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의 민망함을 없이 하여 주시고 가까이 다가올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것을 봅니다.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이는 천국백성들의 모형입니다.
첫째, 어린이는 순수함 때문입니다.
어린이들은 자신을 꾸미거나 남의 눈을 속이지 않습니다.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에서 가식과 위선이 끼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세리장 “삭개오”를 알지 않습니까? 그는 사람들로부터 배척받는 세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지만, 예수님과 사람 앞에서 결코 위장된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모든 체면을 벗어버리고 예수님이 보고 싶어 끙끙대며 뽕나무 위로 기어 올라갔습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순수합니까?
이시대의 우리는 순수함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습니다. 점점 사람들은 교묘하게 머리를 쓰며 지식으로 포장하기를 좋아하고, 물질과 명예로 차려입기를 좋아합니다. 여러분들은 먼저 이러한 모습에서 벗어나서 있는 그대로 부끄러움 없이 예수님 앞에 달려 나가는 순수한 모습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 어린이는 감격 속에 날마다 기쁨이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는 세상을 보는 신비로움에 항상 감탄 합니다. 별것도 아닌데 와 하고 야단을 떱니다. 그리고 신기해하면서 손뼉을 칩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어린이들의 특징입니다. 어른들은 감격이 없습니다. 마음이 무뎌지고 강퍅해졌기 때문입니다. 남이 잘 되는 것을 시기하는 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감동스러운 것이 있어도 좀처럼 감동을 받지 않습니다. 또 칭찬해 주려고 하지도 아니합니다. 어두움만 보기를 좋아하고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비판할 일을 찾는 눈이 밝아져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보며 칭찬과 존경과 사랑의 감탄사를 연발하는 사람들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 백성은 항상 감격이 속에 환희가 충만한 나라입니다.
셋째, 어린이는 언제나 겸손하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는 스스로 설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알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순수한 자랑은 있어도 교만은 없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능력이 없음을 알기 때문에 남을 해칠 마음도 없습니다. 언제나 내세울 만한 것이 없음을 알기 때문에 교만할 레야 교만할 수가 없는 겸손한 존재가 어린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어린이는 의지할 존재, 자신을 돌봐 줄 보호자를 필요로 하고, 또 자신을 돌보아 주는 부모를 전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어린아이를 놓고서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어린이가 부모를 의지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천국의 주인이라는 말씀입니다.
2)어린 아이들에게 축복하라!
주님의 행동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두 번째 귀한 진리는 주께서 어린아이들을 매우 기뻐하시며 그들을 축복하시는 일을 매우 기꺼이 여기셨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아이들을 안수하신 후 그곳을 떠난 것으로 보면 아마 아이들이 주님 앞에 나온 이 시간이 모든 집회가 끝나갈 즈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매우 지치고 힘드실 시간이었을 것임이 분명한 데 주님은 이 순간에도 그 아이들 모두의 위에 손을 얻어 안수 하신 후 비로소 그 장소를 떠나셨다고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어린아이들을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어린아이들을 사랑하신다면 당연히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어린아이들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제자들로 인하여 어린아이들이 주님 앞에 나오는 것이 방해 받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즉 어린아이들이 주님 앞에 나오는 데에 어떠한 장애도 없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런 주님의 마음을 알았다면 주님의 몸 된 교회는 바로 이런 체제를 갖출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자유롭게 나와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교육 제도를 갖출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어린아이들을 주님을 자유로이 만날 수 있게 할 것인가를 고민할 수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온 성도들이 주일학교 교육에 대한 관심을 더 크게 기울일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 농촌교회는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린 아이들이 너무나도 급격하게 감소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번 오봉 초등학교 졸업식 때 참석해보니 단 세 명이 졸업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서글펐습니다. 10여 년 전만 해도 4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이렇게 변한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소수의 아이들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좀더 온 교회가 관심을 가지고 이 어린 아이들을 교육시켜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교훈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십시다.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십시오. 또한 그들에 예수님의 축복받는 자녀가 되도록 노력하십시오. 천국은 이런 자들의 것입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십시오. 그러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어린이의 소중함
마 19:13-15 / 김남수목사
오늘 성경말씀은 사람들이 예수께 안수하시고 기도하심을 바라고 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아이들을 꾸짖고 싫어해 쫒아버리려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제자들을 꾸짖으시고 아이들을 사람들 앞에 세우고 천국은 이런 사람들의 것이다하고 오히려 아이들을 통해서 어른들을 통해서 어른들을 교훈하셨으며 한사람 한사람 아이들에게 친히 안수하시고 축복하신 후에 그 자리를 떠나서 다른 곳으로 가셨다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 곁에는 항상 아이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예수님이 아이들을 사랑하시는 것을 아이들이 알기 때문에 언제든지 아이들은 예수님 주위에 모여서 예수님과 함께 말씀을 듣고 사랑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아이들을 금하는 것을 꾸짖고 아이들을 소중하게 여기셨느냐 하면 아이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가치관과 주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인데 왜 주님께서 아이들을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첫째 아이들은 어른들의 보호를 절대로 받아야 할 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아직 다 성숙하지 않은 어린이기 때문에 연약하고 약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어른들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되며 환경으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될 입장에 있기 때문에 아이들을 잘 돌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어린이 헌장에는 건전하게 태어나 따뜻한 가정에서 사랑속에 자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해로운 사회 환경과 위험으로부터 먼저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버림받거나 나쁜 일과 힘겨운 노동에 이용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주요 골자인 것입니다.
또 UN의 Declaration Human Right for the Children 1959 에 아이들은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은 인종과 성과 언어와 종교와 정치에 관계없이 인간의 권리를 가지며 특별히 보호함으로 육체적, 정신적, 도덕적, 영적, 사회적으로 건강히 자유와 권리를 누릴 특권이 아이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날 때부터 이름과 국적을 가질 권리가 있으며 사회 보장과 건강히 자라고 적당히 영양분을 섭취할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보호와 구조를 언제나 받아야 합니다. 무지와 잔인함과 성적 착취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먼저 보호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영국에는 유명한 신사도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타이타닉"호의 배가 침몰해 들어갈 때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지만 제일먼저 누구부터 구조하는냐? 첫 번째 아이들입니다. 그 다음은 병약자나 노약자입니다. 그리고 여자분들을 먼저 구조합니다. 사고가 생길 때 마다 대부분 그때마다 군인들은 정렬을 해서 배가 다 침몰할 때 까지 움직이지 아니하고 아이들과 노약자들이 다 구출되고 아녀자와 약한 분들이 다 구출을 받은 다음에 혹시 자리가 남으면 넘어가고 아니면 그냥 수장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오랜 전통이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어떠한 환경과 어떠한 입장에서도 보호받을 권리가 있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주님이 아이들을 건드리지 말아라, 아이들을 괴롭히지 말아라, 아이들을 내게 오는 것을 말리거나 야단치지 말아라고 주님이 그들을 환영하시고 일일이 손을 얹으셨다는 것은 참으로 주님이 그 아이들의 입장과 아이들의 신체적인 조건을 충분히 이해하셨다는 것입니다.
만일 자기보다 열 배나 더 거대한 동물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소리친다고 하십시다. 예를들어 155파운드가 나가는 사람에게 1500파운드가 되는 거대한 곰이 와서 입을 딱 벌리고 침을 흘리며 머리를 흔들고 손을 들고 달려든다면 그냥 해보려면 해보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선 힘으로나 덩치로나 그 무력으로는 당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단 충격을 받게 되고 도망도 가지 못 갈 것입니다. 거대한 위압과 거대한 파워에 눌려서 꼼짝못할 것입니다. 10파운드 나가는 아이에게 150파운드 나가는 부모가 아이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야단을 치고 물건을 집어던지면 아이들이 얼마나 충격을 받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이들의 입장에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연약함과 유약함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들이 알아듣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를 해야지 평소에는 좋은데 화 나면 성난 곰처럼 사자처럼 달려들으면 아이들이 일생동안 지울 수 없는 충격과 고통 속에 시달린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분노나 폭력 위협에서 보호를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인터넷에 보니 잘난 엄마가 못난 아이를 만든다라고 했습니다. 똑똑한 엄마가 바보 아이를 만든다고 했습니다. 과외 공부하는 선생님한테 가서 "도대체 이 애는 누구를 닮았는지... 머리가 나쁜 것 같애요. 아무리 공부를 해도 성적이 오르지 않으니 도대체 이 아이는 구제 불능인가봐요...."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하고 아이를 맡기려고 한다면 아이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서 몸둘 바를 모를 것입니다. 만약 자기 어머니가 처음 만난 선생님에게 자기를 소개하는데 "바보, 병신, 천치" 저능아처럼 자기를 평가하고 그 아이들 잘 부탁하기 위해서 더 나쁜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있다가 "어머니에게 잠깐 나가 계세요" 하고는 아이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너 어머니 어떻게 생각하느냐" "무서워요" pressure 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pressure를 너무 많이 받으면 신경질적이 되고, 다투게 되고, 거짓말하게 되고, 도둑질하게 되고, 설사하고 우울증 걸려서 그러면 부모가 더 닦달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정신적인 보호를 받아야 될 아이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지게 됩니다.
유명해 지기보다는 순수해지기를 바라야 되고 겉 모양보다는 주님을 사랑하는 속에 아름다움을 가꾸는 지혜가 신앙인 것입니다. 오히려 똑똑한 부모는 아이들을 자주 안아주고, 자주 들어주고, 자주 대화해 주고, 자주 쓰다듬어주고, 자주 시간을 같이해 주는 것이 똑똑한 부모인 것입니다. 학교 성적보다는 영적 상태를 날마다 관심 갖고 날마다 그것을 체크하는 부모가 똑똑한 것입니다. 이민 생활 처음 하면서 누구나 다 겪은 경험입니다. 큰집-성공, 그리고 돈 버는 것 그런데 20-30년을 지난 후에 결론은 큰집, 좋은 집이 아동 교육에 그렇게 영향을 주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부모의 성공이 자녀의 교육에 도움을 주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가 경험했습니다. 돈이 많은 것이 아이들의 장차 교육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오히려 조그마한 단칸방에서 서로가 부딪히며 서로 정을 느끼고, 서로 사랑을 느끼며 그리고 가난이 무엇이고, 인생이 무엇이고, 삶이 무엇이고, 인정이 무엇인가를 배우고 자란 아이들이 오히려 넓은 방에다 컴퓨터 놓아두고, 해 달라는 대로 해주고 마음놓고 자란 아이들 보다 인간미, 사람이 자라면서 눈물과 인생을 살아나가는 참 사람다움이 오히려 더 다른 결과가 온다는 것을 우리가 이미 경험을 통해 배웠습니다.
조그마한 단칸 아파트에서도 부모와 형제 따뜻하게 많은 시간을 밖에서 보내지 않고 가정과 자녀들과 함께 하루의 이야기를 나누며 학교이야기, 앞날의 이야기, 신앙 이야기 교회 이야기를 하면서 사랑의 교제를 하면서 자란 아이들이 자기 방 문 잠가 놓고, 속에서 게임하면서 자란 아이들보다 훨씬 인간답고 세상을 성공하고 어려운 일이 올 때 이겨나갈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나는 어느 베이비시터를 만나본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은 아이를 맡으면서 너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다 직장에 나가고 사업장에 나가니까 아이를 갖다 맡겼는데 아이가 도착하기도 전에 소리를 지르고 울기 시작해서 아이를 맡겨놓고 엄마가 돌아서면 아이는 그때부터 손을 얼굴에 대고 절망적인 울음을 울기 시작합니다. 아마 그 베이비 시터 그 분은 처음 그 아이를 맡았는데 이 아이는 여러번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거기에서 받은 어려움과 고통이 여기서도 그렇게 되리라는 생각 때문에 아이가 어머니를 떨어지는 그 아픔을 스스로 느끼고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얼마 얼마를 그렇게 처절한 울음을 울고 그리고 얼마 후에는 시무룩하게 하루 종일 지내다가 엄마가 오면 만나고 가는 모습을 보고 과연 이 아이를 위해서 지금 열심히 뛰며 돈을 벌고 지금 큰집을 장만하기 위해서 이 아이의 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그렇게 뛰는 것이 지혜로운 것인가 하는 깊은 질문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차라리 그 아이와 같이 시간을 보내고 사랑과 신뢰를 가지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안정과 고요함을 줄 수 있다면 그 아이에게 더 필요한 것은 이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더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깊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또 지금 어린아이를 둔 부모들은 정신을 차려서 그 아이가 적어도 학교에 가서 자기 삶을 시작할 수 있는 자기가 독립해서 설 수 있는 시간까지는 부모가 돌보고 그를 키워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젊은 엄마들이 돈은 천천히 벌어도 되고, 집은 나중에 사도 얼마든지 살 수 있고, 성공이라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우리가 20년동안 경험하고 그 경험과 실험을 통해서 나온 결론이기 때문에 확실한 진리입니다. 우리는 다시한번 우리의 자녀들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고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두 번째 어린이들은 우리의 내일이며 소망인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에 주님이 아이들을 그렇게 소중하게 한 아이 한 아이를 손을 얹고 축복하고 기도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장래가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적으로도 아이들이 자라서 신앙이 커지지 않으면 교회는 내일이 없습니다. 사회도 이 아이들이 올바로 자라서 건전한 내일을 만들지 않으면 사회가 무너질 것입니다. 문화도 없어질 것입니다. 가정도 대를 잇는 아름다운 전통과 신앙도 끝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어렸을 때에 그들에게 소중한 가치를 두고 그것이 모든 것 보다 중요한 가치를 인정해 주어야 될 줄 압니다.
어느 아이가 양녀로 어디에 보내졌는데 눈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무척 괴로워했습니다. 자기 부모가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하니 그 증오심이 일생동안 힘들었다고 합니다. 어느날 자기 어머니가 자기를 찾는다는 소리를 듣고 자기는 어머니를 만나지 않겠다고 소리를 질렀는데 나중에 어떻게 설득을 해서 한번만 만났으면 좋겠다고 해서 만났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옆에 앉아 있는데 자기 얼굴을 만지면서 "얘야 예나 지금이나 얼굴이 변함이 없구나" 딸이 자기를 만지는 어머니 손길의 감촉이 어머니도 맹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딸이 묻기를 "어머니도 맹인이십니까" "그렇다 나도 너도 눈이 어두우면 두 사람이 어떻게 하겠느냐? 그래서 내가 시력이 좋아지지 않을 때 너를 다른 부모에게 맡기고 너를 그리워 했노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평생토록 자기를 버렸다는 생각 때문에 일생을 증오심으로 괴로워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이들은 소중하기 때문에 그들을 잘 돌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저명한 23명의 성자 중에 단 한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전부가 18세 이전에 신앙생활에 들어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성공하는 사람들을 보면 모두 일찍부터 하나님을 위하여 사회 인류를 위하여 힘쓴 사람들입니다. 모차르트는 6살때부터 독일 황제앞에서 연주를 했다고 합니다. 스펄젼 목사는 20세때 영국 사회에서 대 설교가로 말씀 증거에 힘썼습니다. 헨델은 10살에, 23살때에 검은땅 아프리카로 찾아가서 선교와 그리고 그 백성들을 살리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칼빈 선생은 26세때에 "기독교 강요"라는 위대한 저서를 내고 종교개혁에 나섰습니다. 아이들을 잘 키우면 내일이 있습니다.
저는 일본을 여러번 여행하면서 궁금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문화를 가질 수 있는가? 대중문화, 예의 범절은 이 세상에서 두 번째 가지 않습니다. 미국은 일등 국민이지만, 일본은 특등 국민입니다. 그 예의 면에서나 신실한 면, 정직성에서는 두 번째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위대한 민족입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해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교육, 심리, 아동교육에 대해서 관심있게 보는 사람이기 때문에 더욱 일본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일본에서 오랫동안 교포생활하시던 한국 분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해답을 얻었습니다. 학교에서 영어, 한국어, 일본어 성적이 아무리 좋아도 대대로 전통이 되는 첫 번째 priority가 정직성과, 신실성, 도덕성이 없으면 학교에서 졸업이 되지 않으며 성적이 나오지 않고, 사회에서 인정을 해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석, 지각, 거짓 이런 것들을 가장 나쁜 것으로 보고, 정직과 신실함을 바르게 하고 그것이 최고의 priority를 두어서 도덕 교육이 마지막 교육이자 첫째 교육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예입니다. 그렇다고 일본사람이 영적으로 훌륭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교육이라는 의미가 이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들은 영원을 지닌 영원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아이들을 동등하게 소중하게 보셨다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사람은 칼라가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어른 아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에는 칼라가 없습니다. 차이가 없습니다. 노인이나 젊은 사람이나 똑같습니다. 한국사람은 유교, 오래된 문화 속에서 장유유서입니다. 노인과 젊은 사람이 반드시 계급이 있어서 위 사람은 아랫사람을 눌러야 되고, 위에 사람보다 아랫사람은 덜 중요하다는 것이 우리 민족입니다. 그래서 어린이라는 단어가 없었습니다. "야, 애" "저애, 재" "이애, 얘" "이놈" 이것이 대우였습니다. 소파 방정환 선생님은 이 한국 아이들을 이렇게 누르면 아이들에게 장래가 없다고 하여 아이들에게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 쓰게 되었고 동요도 만들고 아이들을 소중하게 인정했다는 것이 역사의 한 이야기입니다. 영혼에는 색깔이 없습니다. 남녀, 노소, 빈부, 귀천 다 동일한 영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한 심령을 살리기 위해서 일하는 똑같은 노력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고아 사역을 하면서 많은 분들에게 질문을 받습니다. 그것이 "무슨 좋은 일이 생깁니까" 그냥 밑도 끝도 없는 곳에다 계속 쏟아 주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1년에 30-40만불씩 40-50만불씩 아이들에게 먹이고 키우고 도와주는 아무 나타나는 일이 아닙니다. 비즈니스로 말하면 무지무지하게 손해나는 비즈니스를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 사업이라는 것은 남이 보지 못하는 영적 세계를 볼 수 있어야 되는데 그 아이들을 위해서 지금은 아무 열매가 없지만 10-20년 후가 되면 적어도 1,858명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저들의 삶이 변화되어서 새로운 인물들이 나오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또 다른 사업입니다. 우리가 다 길렀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이제 새로 아이들을 키운다고 생각하십시오. 어렵고 가난하고 병들고 고아된 아이들에게 그를 돌보는 선교사님들에게 20불씩 보내서 그 아이에게 옷을 입히고, 밥을 먹이고, 교육을 시켜서 한달 동안 돌본다면 그 아이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고마움과 하나님 앞에 구원받는 영혼이 될 줄 믿습니다.
영혼에는 색깔이나 노소나, 빈부나, 남녀나 동서의 차이가 없이 동일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한 영혼 한 영혼을 동일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만큼 동일한 가치를 두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힘써야 될 줄 믿습니다.
요한 웨슬레 어머니는 19명의 아이를 낳아 모두 훌륭하게 양육하였습니다.
그는 1. 그는 간식을 엄금했습니다. 2. 전원 8시에 취침, 3. 개인의 의사 존중, 4. 아이 전원을 하나님께 인도 5. 말하기 시작하면서 기도부터 가르침, 6. 가정예배 때는 절대 정숙, 7. 떼 쓰면 아무것도 주지 않음, 8. 잘못을 고백하면 무조건 용서하고 고백하지 않으면 반드시 벌함. 9. 부모나 아이들이나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킨다. 10. 부모의 채찍을 두려워하며 부모의 훈계를 고맙게 여기게 하며 키우니 큰 일을 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오늘 어린이 주일입니다. 내일을 바라보는 투자, 그래서 우리 교회가 할 수 있다면 여러분 가정서부터 시작해서 우리 세계에 있는 어린이들을 위해서 힘있게 그리고 보람있는 영적 투자와 가치 있는 사역을 감당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주께서 오늘 저희들을 훈계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말씀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축복하셔서 저희들의 자녀들이 하나님 안에 잘 자랄 수 있게 하시고, 인격적으로나 신앙적으로 훌륭한 아이들이 되어서 어려서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고 늙어서도 그 말씀 안에 살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주님이 아이들을 보신 것처럼 우리도 볼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나라에 들어 갈 사람
마 19:13-15 /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에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안수기도해주시기를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는데 제자들이 꾸짖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말씀하시기를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하시고는 그 어린 아이들에게 안수하셨다고 합니다. 어린 아이들이 예수님께 오는 것을 막으려 한 제자들이 잘못했음을 분명히 하신 일입니다. 같은 일을 전하는 막10:14에 따르면 어린 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온 사람들을 제자들이 꾸짖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 노하셨다고 합니다. 왜 예수님께서 노하시기까지 하셨겠습니까? 제자들이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전하는 일이 있기 조금 앞서서 이미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들에 관하여 분명히 말씀하신 바가 있었는데 제자들이 그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들에 관하여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마18:1-6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여쭙기를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는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말씀하심으로써 천국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어린 아이들을 자신들의 거울로 삼을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거울을 멀리 하면 자기 자신을 볼 기회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거울을 가까이 해야 자주 자기 자신을 살피며 자기의 잘못된 점을 보고 고치게 되는 것입니다. 거울을 들여다보고는 깜짝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대학을 막 졸업하고 공군장교후보생으로 입대하여 훈련을 받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입대하기 딱 6주 전에 소위 1.21사태라고 하는 엄청난 사건이 터졌습니다. 북한의 특수부대인 124군 부대에서 특수훈련을 받은 무장공비들이 청와대를 까부수겠다고 내려와서 청와대 뒷산까지 침투해 들어온 사건이었습니다. 훈련을 받기 시작한지 한 달 쯤 지났을 때 첫 야간경비를 서게 되었습니다. 배정된 경비위치가 내무반 아래층과 위층 사이의 계단 중간층이었습니다. 취침시간 중이어서 소등을 한 상태로 어두움 속에서 경비를 서느라 처음에는 몰랐는데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서 보니 벽에 대형 거울이 걸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훈련이 시작된 이후 한 번도 거울을 본 적이 없었던지라 별 생각 없이 거울 앞에 다가가 섰는데 거울을 보는 순간 그만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거울에 낯선 사람이 보였는데 야간침투를 한 것 같이 얼굴을 검게 칠하고 위장을 한 완전 무장공비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그 공비가 쓴 안경이 제 안경과 꼭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자세히 보니 무장공비가 아닌 바로 저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그때는 초비상시국이어서 훈련이 보통 강하지 않았습니다. 첫 한 달 동안은 세수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얼굴에 땀과 흙먼지와 때가 겹겹이 쌓인 채로 하루 종일 햇볕에 그을리며 한 달을 지내다 보니 완전히 딴 얼굴로 변해있었던 것입니다. 그 얼굴을 보고서 비로소 지나간 한 달 동안의 훈련생활의 고달픔이 일시에 밀려와서 한참을 혼자 울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거울을 자주 보지 않으면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변하는지 모르는 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나라에 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기 모습이 하나님나라에 합당한 것인지 아닌지를 늘 살펴야 할 것을 가르치시며 어른들의 거울이 될 수 있는 어린 아이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귀찮게 여기고 멀리하려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어린 아이들을 거울삼아 우리가 배울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린 아이들을 거울삼아 배우라고 가르치신 것은 무엇보다도 자기를 낮추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누가 더 높으냐, 누가 더 크냐, 누가 예수님의 좌우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냐 하는 관심사로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서로 다투고 길을 가면서도 논쟁을 벌여야 했던 제자들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질문 자체가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하는 것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서 어린 아이들이 “자기를 낮춘다”는 것은 오랜 삶의 경험과 인격의 도야를 거쳐 형성된 겸손의 덕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린 아이들에게서 그런 것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자기를 낮춘다는 것은 그저 그 자체로 어리고 작고 약한 존재임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무슨 큰 야망을 품거나, 그 야망을 이루기 위하여 맹렬히 운동을 하거나, 친구나 동료의 실수나 실패를 틈타거나 그들을 딛고서라도 올라서겠다고 무섭게 집념을 불태울 줄 모르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남이 앞서가는 것 때문에 시기하고 분노할 줄 모르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남과 경쟁하거나 싸워서 쟁취할 힘이 없어서 부모님의 사랑과 어른들의 배려 없이는 무엇 하나 스스로 가질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거기서 큰 자일 것이라고 스스로 기대하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자신을 거기에 들어갈 자격조차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열린 나라임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우리가 어린아이들을 거울삼아 배울 것은 자기를 낮추는 것 말고도 더 있을 것입니다. 우선 어린아이들은 순진하고 꾸밈없이 진실합니다. 엄마가 어린 아이에게 말하기를 “너 엄마가 이거 했다고 아빠한테 말하지 마.” 하면 “엄마가 이거 했다고 아빠한테 말하지 말라고 그랬다”고 아빠에게 말할 만큼 순진한 것이 어린아이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순수하고 진실한 이들이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또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존합니다. 어린아이들은 모든 면에서 상대적으로 약합니다. 그러기에 더욱 의존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커가면서 많이 배우고 오래 익히지 않고서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으며, 그 어느 것도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자신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스스로는 하나도 못하면서 할 것은 다 하고 가질 것은 다 가지는 것이 어린아이들입니다. 엄마아빠에게 매달리고 울기만 해서 모든 것을 얻어내는 것이 어린아이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하나님을 향해 이런 어린아이들과 같기를 원하신다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힘이라고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밖에 없는 사람들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은 부모를 절대적으로 신뢰합니다. 어린아이들에게는 자기 엄마아빠가 무조건 최고입니다. 어린아이들에게 물어보면 예외 없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는 자기 엄마이고, 세상에서 제일 멋지고 잘 생긴 남자는 자기 아빠입니다. 어린아이들이 툭 하면 “난 커서 아빠랑 결혼할 꺼다”, “난 이 담에 엄마랑 결혼할 꺼야” 하는 것은 그래서 그렇습니다. 엄마아빠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고 믿는 것이 어린아이들입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갖고 싶고 하고 싶은 것은 뭐든지 다 엄마아빠에게 해내라고 떼쓰곤 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끼리 자기들 엄마아빠 이야기하는 것 가만 들어보면 우습기 짝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밑도 끝도 없이 부풀리고 과장해가며 자기 엄마아빠 자랑을 하면서도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의식이 전혀 없습니다. 한 아이가 자기 아빠한테는 개구리만한 금덩어리가 있다고 말하면 다른 아이는 자기 아빠한테는 송아지만한 금덩어리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들입니다. 자기 아빠는 무조건 최고일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엄마아빠에 대한 신뢰감 때문에 어린아이들에게는 일체의 염려가 없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잠들 때 이부자리는 충분히 있는지, 잠자리 주변은 다 안전한지, 대문은 닫았는지, 현관문은 잘 잠갔는지, 가스차단기는 내렸는지, 그런 거 확인하지 않습니다. 졸리면 아무데서나 그냥 잠들고 맙니다. 비가 오거나 천둥이 치거나 상관하지 않고 그냥 잘 뿐입니다. 나머지는 엄마아빠가 자동으로 다 하게 되어있습니다. 정말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시127:2)는 말이 딱 맞는 말씀입니다. 어린아이들과 같이 아무런 염려를 하지 않으며 하늘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 다 맡기고 사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것임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 어린아이들에게는 편견과 차별의식이 없습니다. 남녀, 사회적 신분, 빈부, 피부색, 인종과 국적에 따른 편견과 차별은 어린아이들의 세계에는 없습니다. 어른들끼리는 아예 상종을 하지 않는 사이라 하더라도 그 어린 자녀들끼리는 얼마든지 친하게 어울려 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리다고 해서건 또는 그 어떤 이유에서건 일체의 차별이 없는 나라이며 그런 차별을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들어갈 나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천국에서 누가 크냐고 질문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보다 근본적으로 하나님나라에 누가 들어갈 수 있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어린 아이를 보게 하시며 그 답을 찾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어린아이들을 거울삼아 늘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신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모든 거짓과 교만, 불신과 염려, 편견과 차별의식, 탐욕과 무정함과 사악함으로부터 돌아서서 어린아이들과 같은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업
마 19:13-15, 18:1-6 / 서정호 목사
마19:13-15,18:1-6)
부모님의 장점이나 기타 등을 진행하기 위해서 '부모님 이름을 써라.'라는 과정이 있었는데 100명의 학생중에 10-15명의 학생이 손을 들고 이렇게 말했습니다."어 아빠이름 모르는데요."부모님 입장에서 이런 얘기를 들었을 때 어떤 충격이 올까요?평생 나를 위해서 살고 나를 위해서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사람이 부모님이신데 정작 아이는 아빠이름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정말 중요한 것이 과연 무엇일까?우리 아이들은 무엇을 배우고 있을까?그리고나서 제가 이렇게 얘기했습니다."아빠이름이나 엄마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그냥 아빠,엄마라고 적어라.아빠,엄마라고 적어놓고 아빠 밑에 아빠 장점 10가지,엄마 이름밑에 엄마 장점 10가지씩 적어보세요."라고 숙제를 냈는데 어떤 여학생이 손을 들었습니다.제가 "뭐가 궁금해? 얘기해봐?"라고 했더니 그 여학생이 저에게 이렇게 얘기했습니다."우리 엄마 장점이 하나도 없는데요."충격적인 것은 아빠이름도 보르고 엄마는 장점이 하나도 없어요.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과연 이 아이들은 무엇을 하는 걸까?진짜 이아이들 머리 속에는 뭐가 들어있을까?그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 번 생각을 해보세요."여러분 머릿속에 어떤 하나의 금고가 있습니다."라고 상상하시면 됩니다.굉장히 튼튼한 금고이고 아무도 못 훔쳐 갑니다.비밀번호는 여러분들만 알고 있습니다.이제 이 금고의 문을 열었을 때 과연 무엇이 들어있을까요?여러분의 금고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습니까?그 들어있는 것을 한번 적어보세요."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회사를 홍보하기 위해서 자기를 알리기 위해서 인맥을 쌓기 위해서 어떤 이득을 위해서 한 달이나 세달 정도는 당신처럼 할 수 있지만 1년 내내 이렇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당신은 장난이 아니다.라고 내가 생각했습니다."그래서 그분은 제대로 봤었습니다.제 머리속 금고에는 나의 생각들을 그냥 나누고 싶다는 생각밖에는 없었습니다.
만화가 중에 공포의 외인구단을 만들어서 대한민국 만화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신 분 이현세작가가 유명해졌을 때 습작으로 만들었던 모든 작품들을 거절했던 많은 출판사들 중에서 한곳이 엄청난 거액을 제시하면서 습작품을 책으로 내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그런데 이현세씨의 아내는 이현세씨에게 이렇게 얘기했습니다."습작품을 계속 가지고 있으면 유혹을 받게 될 것이다."그 말을 듣고 이현세씨는 자기의 습작품을 불태워버렸습니다.당시로 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돈을 받을 수 있는데 그 거액을 포기하고 불을 태워버렸습니다.그때 기자가 물었을 때 이현세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만화를 왜 그려야하는지에 대한 목적없이 그렸던 작품을 돈 때문에 세상에 내놓기 싫었다."
이현세씨는 자신의 자존감과 행복의 가치를 선택했습니다.이제 여러분 머리속 금고를 다시 한번 둘러보십시오.자신의 머리속에 있는 것을 조용히 문을 열고 다시 한번 바라보십시오.진정 무엇을 원하는 것이 들어있는가,그 금고속에 소중한 것을 쌓아가시기 바랍니다.
어두운 밤을 무서워하는 아이에게 어느날 밤 엄마가 뒷 마당 장독대에 가서 간장을 떠오라고 시켰습니다."엄마,바깥은 지금 캄캄해서 무서워요""아가,밖에 예수님이 계신데 뭐가 무섭니? 예수님이 너를 지켜주실거야" "정말 바깥에도 예수님이 계세요?" "그럼,그분은 어디에든 계신단다.네가 힘들 때 널 도와주신단다"그러자 아이가 잠시 생각하더니 장독대로 나가지 않고 뒷문을 살짝 열고 밖에다 크게 말했습니다."예수님,거기 계시면 간장 좀 떠다 주세요?" 유치원에서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우리 친구들이 엄마를 도와드리려면 무엇을 할수 있을까요?"어떤 아이는 "저는 설거지를 도와드릴 거예요." "저는 방을 닦아드릴 거예요." 여러가지 말을 하는데 또 다른 아이는 "선생님, 저두요!" 손을 듭니다."그래요.말해보세요." "전 가만히 있을래요." "왜 가만히 있는 거지?""엄마가 그러는데요.저는 가만히 있는게 도와주는 거래요."
옛날에는 어린 아이들을 무시하고 어린 아이들이 무엇을 할려고 해도 못하게 하였습니다.그래서 한 사회 학자가 "19세기는 여성을 발견했고, 20세기는 어린이를 발견했고, 21세기는 노인을 발견한다"고 하였습니다.여러분 '어린이를 발견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20세기 전까지는 어린이를 진정한 인간으로 대하기보다 부모나 사회의 부속품 정도로 취급하였습니다. 1920년대에 우리 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 있을 때 더욱 심하여 '어린이'라는 말조차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어린이들은 ‘이놈,’‘어린 것,’‘꼬마’‘애 새끼’라고 하였습니다.그래서 일본 유학생이었던 소파 '방정환' 선생은 이를 안타깝게 여기고 우리나라의 미래는 어린이를 귀하게 여기는데 있다고 생각하고 여름 방학에 귀국하여 어린이에게 존대 말 쓰기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이때 처음으로 '어린이'(어리신 이)라는 말을 사용했고 어린이도 하나의 인격체임을 선언했습니다.다음해인 1922년 5월1일로 처음으로 '어린이 날' 제정을 제안했고,1923년에는 순수 아동 잡지 '어린이'를 창간하게 됩니다.그해 5월1일 아동 문화 운동 단체인 '색동회'를 창설하게 됩니다.이것이 오늘날 '어린이 날'의 유래가 된 것입니다.예수님 당시에도 어린이는 여자들과 함께 한 집안의 재산 목록에 들어 갔을뿐 결코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하였습니다.지금도 중동 지역에 이슬람 국가에서는 한 남자가 4명의 여자를 데리고 살면서 여자들과 어린이는 사람 대접 받지 못하고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예수님 당시에는 더욱 심해서 예수님은 어린이를 대할때 당시 사람들이 볼때에 충격적인 대우를 하셨습니다.
어린이주일을 맞아 예수님께서 어린이를 어떻게 대하였는가?을 통하여 우리가 배우고,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1.예수님은 어린이를 귀하고 사랑해야할 대상으로 여겼습니다.본문에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의 안수 기도를 받기 위하여 어린이들을 데리고 왔습니다.그렇게 하는 이유는 어린 자녀가 예수님이 은총으로 복을 받고 잘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심정으로 데리고 왔습니다.그런데 제자들은 그들을 크게 꾸짖으며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제자들을 혼내시며 19:14절에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라. 금하지 말라. 천국은 이런 자의 것이니라” 하시고 안수 기도를 해주셨습니다.예수님께서 피곤하고 힘들지만 어린 아이 아이가 오는것을 용납하시며,사랑하시고 귀하게 여기셨습니다.물론 제자들의 심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전도하시고,병을 고치느라고 무척 피곤하셨을 것인데 말도 알아듣지 못하는 어린 아이들까지 데려와서 시끄럽게 하고 예수님을 괴롭히면 얼마나 힘드시겠습니까?그래서 제자들은 그것을 염려해서 어린 아이를 오지 못하게 했습니다.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그러한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기며,책망하시고 어린이를 용납하고,귀하게 여기라고 하시고 마18:5절에서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예수님 당시에는 나이가 어린 어린이가 '어른'들을 영접하는 것이 전통이요풍습이었는데예수님은 큰 어른들이 '작은 어른 아이'를 영접하라고 하셨습니다.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당시 어린이를 무시하고 천대하는 전통을 깨버리는 것이었습니다.그러면서 작은 '어린이'를 영접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무슨 뜻입니까?어린 아이를 무시하거나 멸시하지 말고 어린 아이를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그래서 사도 바울도 엡6:4절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하였습니다.
옛날 독일에 '요한 트레보니우스'라는 '까르멜 수도원'의 원장이 있었는데 그는 맨발의 수도사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린이들을 가르칠 때 늘 모자를 벗고 가르쳤습니다.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그 이유를 물으니 이렇게 말했습니다.“지금은 어린 아이들이지만 언젠가는 그들 중에서 대통령이나 국무총리도 나오고,신부나,장관도 될 것이고,학자나 교사들이 될 터인데 이를 생각하고 공경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그의 생각은 허사가 아니었습니다.그의 제자들 중에서 개혁자 '마틴 루터'가 배출되었습니다.미국에서 교회를 가던 선생님이 길에서 빈둥 거리고 노는 네 명의 소년들을 보고 그냥 지나가지 않고 그 선생님은 그 네 명의 소년들을 귀하게 여기고 교회로 인도 하여, 그들을 주일 학교의 한 클라스에서 가르치게 되었습니다.그 네 명의 소년들은 장성해서 각각 헤어져 수십년이 지났습니다.그런데 주일 학교를 가르친 그 선생님의 생일이 되었을때(1932년), 그에게는 과거에 가르치던 네 명의 학생으로부터 생일 축하 편지가 왔는데 한 통은 중국에서 '선교사'로 일하고 있는 제자가 보낸 것이고,다른 한 통은 연방 정부의 '은행 총재'로부터 왔고,세번째의 편지는 당시의 '대통령의 비서관'이 보낸 것이었고, 지막의 것은 네 소년 중의 하나로 가르치던 31대 대통령 '하버트 후버'가 직접 보낸 친서의 생일 축하 편지였던 것입니다.여러분. 어린 아이가 작다고 함부로 대하고 무시하지 말고 예수님 말씀대로 사랑하고 귀하게 대하고. 그리고 예수님처럼 영접하여 예수님을 대하듯 하라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요즈음은 어린이 전도가 쉽지 않습니다.신경을 많이 써야 합니다.예산도 세우고, 린이 전도에 투자를 해야 합니다.그들이 지금은 소비자이지만 20-30년 후에는 교회의 기둥들도 성장할 것입니다.차세대에 교회를 지킬 교사,집사,권사,장로,목사,선교사,정치가,지도자가 되어 주님의 귀한 일꾼이 될 것입니다.
2. 예수님이 어린 아이는 우리가 본 받아야 할 대상이라고 하셨습니다.
본문 18:3-4절의 말씀이 바로 이 교훈입니다.“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여러분 어른들의 입장에서는 생각할 때 어린 아이는 무조건 가르쳐야 할 대상이고,부모의 말에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어린 아이에게 무엇을 배우겠냐?'고 하면서 어린 아이를 무시했습니다.그러나 예수님은 오늘의 본문에서 이런 발상을 역전시켜 오히려 어른들이 어린 아이에게 배워야 한다고 하시면서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어린 아이와 같이 낮추어야 천국에서 큰자"라고 하셨습니다.어린 아이에게는 천국에 들어 갈수 있는 마음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그럼 어린 아이의 어떤 마음이 천국에 들어가는 마음이겠습니까?순수하고 정직한 마음, 단순한 마음,낮추는 겸손한 마음,부모를 의지하는 마음 잘 믿는 마음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잘 믿지만 어른들은 믿지 못합니다.어른들은 사람에게 상처받고,배반당한 인생 경험때문에 세상을 믿지 못하고, 사람들을 믿지 못합니다.그래서 이렇게 믿지 못하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도 믿지 못하게 됩니다.믿음이 없이는 결단코 구원 받을 수도 없고, 또한 영원한 천국에 들어 갈수도 없습니다.본문에 예수님이 너희가 천국에 들어가려면 어린 아이를 본받아 어린 아이의 정직과 겸손함,그리고 단순성함과 믿음을 본받아야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미국에 ‘4센트짜리 교회’[약40원]라는 교회가 있습니다.웅장하고 아름다운 교회당에 어떻게 `4센트짜리'라는 별명이 붙었는가 하는데는 네 살짜리 어린 아이의 솔선적 헌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건물이 오래 되어 퇴락한 교회당의 신축을 위해 모든 교인들이 모여 집회를 갖고 마지막으로 교회 신축을 위하여 헌금하는 순서를 가졌는데 목표로 정한 액수가 너무 많아 교인들이 서로가 얼굴만 쳐다보며 눈치를 보고 먼저 돈을 바치기를 꺼려했습니다.교회안에는 미묘한 정적과 긴장이 감돌았는데 이때이제 겨우 네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아이가 정적을 깨뜨리고 강단 앞 계단을 올라 목사님께로 다가갔습니다.그리고는 고사리 같은 손을 펴며,쥐고 있던 1센트짜리 동전 4개를 목사님 앞에 놓았습니다."목사님, 이 돈은 우리 엄마가 나 사탕 사먹으라고 주신 돈이에요.제가 사탕 사먹는 것보다는 이 돈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 목사님께 드리는 거예요" 어린 아이에게 있어 사탕 사먹는 일은 가장 중요한 일인데 그것을 포기하고 헌금하는 어린이를 통해 큰 감명을 받은 어른들은 마음을 고쳐먹고,자기 차나 집을 구입하려고 모아 두었던 돈을 비롯하여 자신이 가장 아끼는 것들을 하나님 앞에 바치기 시작했습니다.그렇게 해서 건축이 시작되어 예배당이 웅장하게 세워지게 됩니다.예배당이 훌륭하게 세워진 후 사람들은 어린 아이의 솔선 수범적인 4센트 헌금을 잊을 수 없었고, 간이 흘렀어도 4센트 헌금의 감동이 사그러지지 않았습니다.그래서 '4센트짜리 교회'라는 별명이 붙은 교회가 되었습니다.
어린이는 단순하게 잘 믿습니다.하나님을 잘 믿고 선생님을 잘 믿고 친구를 잘 믿습니다.여러분 오늘 어린이 주일에 "너희가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하신 예수님 말씀대로 어린 아이의 마음을 본받고, 배우시기를 바랍니다.3.예수님이 어린 아이는 어른들이 보호해야 라고 지켜야 할 대상이라고 하셨습니다.어린 아이들이 말썽을 피우고 속을 썩여도 끝까지 참고 인내하며 양육하며 보호해야 할 대상입니다.
어린이 주일을 맞아 늙으신 당회장 목사님이 주일학교에서 설교를 했습니다.평소 교육 전도사가 하는 설교를 재미있게 듣던 어린이들에게 목사님의 설교는 재미 없고,지루하기 그지 없었습니다.예배당은 아수라장이 되었고,목사님은 식은 땀을 흘리며 겨우 설교를 끝내고 목사님이 마지막 축도를 하게 되었습니다.축도하는 모습을 처음 본 새로나온 어린 아이가 궁금하여 친구에게 물었습니다.“얘아, 왜 목사님이 손을 들고 기도하지?”“야 임마 그것도 몰라? 목사님이 우리에게 설교를 잘못했으니 하나님 한테 벌 받고 서있는 거지" 여러분 본문에서 예수님이 어떻게 보호하라고 하셨습니까? 5절에 '어린 아이를 영접하라'고 하셨고,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본문 6절에서 예수님은 매우 강경한 어조로 중요한 경고를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한 마디로 작은 자,곧 어린 아이를 무시하고 업신여겨 '실족케 하지말라'는 것입니다.여기서 '실족함'이라는 말은 부모나 어른들이 어린 아이를 실망 시키거나,넘어지게 하지 말고,잘 보호하라는 뜻입니다.그리고 예수님이 10절에서 아주 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10절에서 발견되는 매우 흥미로운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하나가 바로 ‘저희 천사들’이라는 말씀입니다.'소자'나 '어린이'들에게는 저희를 지키고, 따르는 '수호 천사'가 있다는 것입니다.힘이 없고,약한 어린이를 보호하도록 하나님이 천사들을 보내었고,천사들에게 보고를 받는다는 것입니다.그렇다면 우리 어른들은 천사들이 다 보고 있으니까 어린 아이을 무시하고, 함부러 대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그리고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 보호하는 어린 아이들을 부모들이 더욱 지키고,보호해야할 의무가 있지 않습니까?어린 아이들이 스스로 자기 자신을 지킬수 있을때 까지 잘 키우고,도와주어야 합니다.육체적인 도움도 주어야 하지만 육체적인 도움보다도 영적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본문에서 예수님이 가장 중요하게 강조한 도움은 육적인 도움 보다도 영적 도움이라고 생각합니다.본문의 문맥에서 예수님은 영적 도움을 베풀지 못하고 어린이를 실족하게 하는것은 영원히 망하게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그렇다면 무엇보다 어린이들이 예수 믿고 구원받아 영생 얻도록 부모님이 도와야 합니다.그래서 그들이 성장해서 부모의 도움이 아닌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며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린 생명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잠깐 맡긴 선물이고,기업이라고 하셨습니다.
시127:3절에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부모가 잠깐 맡아서 키우는 기간에 어린 아이를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 받는 자녀로, 천국 가는 자녀로 키워야 합니다.이렇게 도워주는 것이 부모의 사명과 책임을 다하는 것이고,예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도움입니다.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보호는 잘못된 '과잉 보호'가 될 수도 있습니다.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어린이 교육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과잉보호'라고 생각합니다. '과잉 보호'는 자녀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녀를 망하게 하고, 파멸시키는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어린아이의 요구는 무조건 들어주고, 무조건 감싸주고, 아이들이 하고 싶은대로 내 버려두는 것은 아이가 자라가며 중대한 행동장애나 정신장애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고 이것이 자녀들를 실족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 오게 됩니다.구약 사무엘상에 나오는 엘리의 가정이 바로 그런 가정이었습니다.엘리 제사장이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죄를 짓고, 잘못하고 있음에도 크게 책망하지 않고,과잉보호를 했습니다.삼상2:24절 “내 아들들아 그리하지 말라.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죄하게 하는도다”엘리 제사장은 두 아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를 무시하고 제사를 드리기 전에 먼저 제물을 먹고,문란한 성생활을 하는데도 젊잖게 타이르기만 할뿐 별로 혼내거나 책망을 하지 않은 결과가하나님이 '엘리가 나보다 자식을 더 사랑한다'고 진노하시고 큰 벌을 내리셨습니다.그래서 엘리의 두 아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고 전쟁터에 나갔다가 한꺼번에 죽었고,엘리 제사장도 그날 같이 죽고,엘리 제사장 며느리가 아이를 낳다가 죽어 가문이 망했습니다.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어떻게 자녀를 양육하고 있습니까?자녀가 잘못을 했는는데도 기가 죽을까봐 아무런 책망도 하지 않는 엘리 제사장과 같은 부모는 아닙니까?또 자녀가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데도 자식을 혼내지도 않고, 회를 안 나오고, 예배를 빠졌는데도 그냥 내버려두는 부모는 아닙니까?잠13:24절에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자녀가 교회를 안나오고,잘못을 했는데도 책망하지 하는 것은 자식을 망치는 것이고 실족하게 만드는 것입니다.그래서 예수님이 본문에서 말씀하시기를"실족하게 하려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낳다”는 것입니다.이 말씀은 자녀들이 영원한 지옥에 가는 것보다 차라리 육신을 바다에 빠져 죽게하는 것이 낳다는 것입니다.육신의 생명보다 영적인 생명,곧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을 살리고 구원하라는 말씀입니다.미국 경찰 당국이 만들어 낸 '자녀 잘못 기르기 10가지'를 발표하였습니다.1.어려서부터 갖고 싶은 것을 다 주면서 길러라.온 세상이 자기 것같이 생각하고 살것이다.2. 나쁜 말을 할 때 하고 싶은 말을 다하게 그냥 버려두면서 아이를 길러라.웃어 넘겨라.그러면 자라나서 자기 마음대로 말하는 사람이 될 것이고, 남의 마음에 상처되는 말을 마구 뱉아 놓는 사람이 될 것이다.3.아무런 영적 훈련을 시키지 말고 내버려 두며 길러라.자라나고 나면 알아서 잘 하겠지라고 길러 보아라.자라나서 자기 마음대로 하게 되면서 하나님을 떠나 갈 것이다. 4.잘못된 행동을 책망하지 말고 길러라.자라나서 자동차를 훔치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지역사회 잘못이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5.아이가 정돈하지 않은 이불,신발,버려둔 책,마구 어지럽히면 대신 정리하여 주어라. 그러면 이 다음에 자라나서도 자기 할일을 하지 않고 책임을 미루게 될 것이다.6.보고 싶은 것은 마음대로 보고, 먹고 싶은 것은 마음대로 먹게 내버려 두어라.그러면 자라나서 쓰레기 인간이 될 것이다.7.이 앞에서 자주 싸우는 부모가 되라.그러면 자라나서 틀림없이 가정 파탄이 될 것이고, 가정이 깨어져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8.용돈을 달라는대로 주고 떼를 쓰면 다 해주라. 곧 죽게 되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9.먹고 싶은 것,입고 싶은 것, 마시고 싶은 것,해 달라는 것,요청하는 것을 거절하지 말고 다 해주어라.자라나서 누구에게 거절당하면 쉽게 분노하고, 실망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10.누구와 대립될 때 아이 편에 서주어라.자라나서 이 세상 모두가 대적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송길원' 목사님의 글에 나오는 이야기인데,한 어머니가 자녀에게 심부름을 시키자 아이가 ‘나미공’이라고 말하더랍니다.처음에 어머니가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자,아이가 “나,미안해.공주야!”라고 하더랍니다.부모들이 자녀들를 공주와 왕자처럼 키우다보니,주위에 보면 온통 왕자병, 공주병 환자들이 많습니다.여러분,왜 이렇게 공주 병 환자들 왕자 병 환자들이 많이 생기는 줄 아십니까? 요즘에 자녀를 하나나 둘밖에 키우지 않기 때문에 자녀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는데서 생겨난 병입니다.옛날에 자녀가 많던 시대와는 달리,요즘에는 아이를 하나나 둘만 낳기 때문에 부모가 자식이 하자는 대로 끌려 다닙니다.그러나 이 말을 오해하지 말고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1)우리는 자녀를 사랑해야 하고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인물로 잘 양육해야 합니다.2)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될 줄로 믿습니다.하나님보다 자식을 더 사랑한다면,그것은 자식을 '우상화'하는 것이 됩니다.자녀는 우상이 아니고 하나님의 주신 선물이고,기업입니다.그래서 자녀는 잘나도 하나님의 것이고,못나도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이 잠깐 맡긴 기업이고,상급입니다.
따라서 자녀에 과잉보호하며 집착하면 결국에,자녀를 우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부모들이 자녀를 우상으로 삼으면 첫째는 하나님께,둘째는 자식에게,셋째는 자기 자신에게,3중으로 죄를 짓는 것입니다.하나님이 잠깐 부모에게는 맡긴 어린 자녀를 하나님의 뜻대로 키워야 할 책임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우리 부모들은 자녀들이 원하는 방법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자녀를 키우고 양육해야 훗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의 칭찬과 상급을 받게 됩니다.어린이는 우리가 배워야 할 대상이고,조건 없이 사랑 하고 영접해야 할 대상이고 건강하게 보호해야 할 대상입니다.무엇보다도 어려서부터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양육을 해야 합니다.그래서 우리 교회 어린이나,아니 이 나라의 어린이들이 이런 어린이들이 되도록 다같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부모님의 장점이나 기타 등을 진행하기 위해서 '부모님 이름을 써라.'라는 과정이 있었는데 100명의 학생중에 10-15명의 학생이 손을 들고 이렇게 말했습니다."어 아빠이름 모르는데요."부모님 입장에서 이런 얘기를 들었을 때 어떤 충격이 올까요?평생 나를 위해서 살고 나를 위해서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사람이 부모님이신데 정작 아이는 아빠이름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정말 중요한 것이 과연 무엇일까?우리 아이들은 무엇을 배우고 있을까?그리고나서 제가 이렇게 얘기했습니다."아빠이름이나 엄마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그냥 아빠,엄마라고 적어라.아빠,엄마라고 적어놓고 아빠 밑에 아빠 장점 10가지,엄마 이름밑에 엄마 장점 10가지씩 적어보세요."라고 숙제를 냈는데 어떤 여학생이 손을 들었습니다.제가 "뭐가 궁금해? 얘기해봐?"라고 했더니 그 여학생이 저에게 이렇게 얘기했습니다."우리 엄마 장점이 하나도 없는데요."충격적인 것은 아빠이름도 보르고 엄마는 장점이 하나도 없어요.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과연 이 아이들은 무엇을 하는 걸까?진짜 이아이들 머리 속에는 뭐가 들어있을까?그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 번 생각을 해보세요."여러분 머릿속에 어떤 하나의 금고가 있습니다."라고 상상하시면 됩니다.굉장히 튼튼한 금고이고 아무도 못 훔쳐 갑니다.비밀번호는 여러분들만 알고 있습니다.이제 이 금고의 문을 열었을 때 과연 무엇이 들어있을까요?여러분의 금고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습니까?그 들어있는 것을 한번 적어보세요."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회사를 홍보하기 위해서 자기를 알리기 위해서 인맥을 쌓기 위해서 어떤 이득을 위해서 한 달이나 세달 정도는 당신처럼 할 수 있지만 1년 내내 이렇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당신은 장난이 아니다.라고 내가 생각했습니다."그래서 그분은 제대로 봤었습니다.제 머리속 금고에는 나의 생각들을 그냥 나누고 싶다는 생각밖에는 없었습니다.
만화가 중에 공포의 외인구단을 만들어서 대한민국 만화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신 분 이현세작가가 유명해졌을 때 습작으로 만들었던 모든 작품들을 거절했던 많은 출판사들 중에서 한곳이 엄청난 거액을 제시하면서 습작품을 책으로 내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그런데 이현세씨의 아내는 이현세씨에게 이렇게 얘기했습니다."습작품을 계속 가지고 있으면 유혹을 받게 될 것이다."그 말을 듣고 이현세씨는 자기의 습작품을 불태워버렸습니다.당시로 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돈을 받을 수 있는데 그 거액을 포기하고 불을 태워버렸습니다.그때 기자가 물었을 때 이현세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만화를 왜 그려야하는지에 대한 목적없이 그렸던 작품을 돈 때문에 세상에 내놓기 싫었다."
이현세씨는 자신의 자존감과 행복의 가치를 선택했습니다.이제 여러분 머리속 금고를 다시 한번 둘러보십시오.자신의 머리속에 있는 것을 조용히 문을 열고 다시 한번 바라보십시오.진정 무엇을 원하는 것이 들어있는가,그 금고속에 소중한 것을 쌓아가시기 바랍니다.
어두운 밤을 무서워하는 아이에게 어느날 밤 엄마가 뒷 마당 장독대에 가서 간장을 떠오라고 시켰습니다."엄마,바깥은 지금 캄캄해서 무서워요""아가,밖에 예수님이 계신데 뭐가 무섭니? 예수님이 너를 지켜주실거야" "정말 바깥에도 예수님이 계세요?" "그럼,그분은 어디에든 계신단다.네가 힘들 때 널 도와주신단다"그러자 아이가 잠시 생각하더니 장독대로 나가지 않고 뒷문을 살짝 열고 밖에다 크게 말했습니다."예수님,거기 계시면 간장 좀 떠다 주세요?" 유치원에서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우리 친구들이 엄마를 도와드리려면 무엇을 할수 있을까요?"어떤 아이는 "저는 설거지를 도와드릴 거예요." "저는 방을 닦아드릴 거예요." 여러가지 말을 하는데 또 다른 아이는 "선생님, 저두요!" 손을 듭니다."그래요.말해보세요." "전 가만히 있을래요." "왜 가만히 있는 거지?""엄마가 그러는데요.저는 가만히 있는게 도와주는 거래요."
옛날에는 어린 아이들을 무시하고 어린 아이들이 무엇을 할려고 해도 못하게 하였습니다.그래서 한 사회 학자가 "19세기는 여성을 발견했고, 20세기는 어린이를 발견했고, 21세기는 노인을 발견한다"고 하였습니다.여러분 '어린이를 발견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20세기 전까지는 어린이를 진정한 인간으로 대하기보다 부모나 사회의 부속품 정도로 취급하였습니다. 1920년대에 우리 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 있을 때 더욱 심하여 '어린이'라는 말조차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어린이들은 ‘이놈,’‘어린 것,’‘꼬마’‘애 새끼’라고 하였습니다.그래서 일본 유학생이었던 소파 '방정환' 선생은 이를 안타깝게 여기고 우리나라의 미래는 어린이를 귀하게 여기는데 있다고 생각하고 여름 방학에 귀국하여 어린이에게 존대 말 쓰기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이때 처음으로 '어린이'(어리신 이)라는 말을 사용했고 어린이도 하나의 인격체임을 선언했습니다.다음해인 1922년 5월1일로 처음으로 '어린이 날' 제정을 제안했고,1923년에는 순수 아동 잡지 '어린이'를 창간하게 됩니다.그해 5월1일 아동 문화 운동 단체인 '색동회'를 창설하게 됩니다.이것이 오늘날 '어린이 날'의 유래가 된 것입니다.예수님 당시에도 어린이는 여자들과 함께 한 집안의 재산 목록에 들어 갔을뿐 결코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하였습니다.지금도 중동 지역에 이슬람 국가에서는 한 남자가 4명의 여자를 데리고 살면서 여자들과 어린이는 사람 대접 받지 못하고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예수님 당시에는 더욱 심해서 예수님은 어린이를 대할때 당시 사람들이 볼때에 충격적인 대우를 하셨습니다.
어린이주일을 맞아 예수님께서 어린이를 어떻게 대하였는가?을 통하여 우리가 배우고,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1.예수님은 어린이를 귀하고 사랑해야할 대상으로 여겼습니다.본문에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의 안수 기도를 받기 위하여 어린이들을 데리고 왔습니다.그렇게 하는 이유는 어린 자녀가 예수님이 은총으로 복을 받고 잘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심정으로 데리고 왔습니다.그런데 제자들은 그들을 크게 꾸짖으며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제자들을 혼내시며 19:14절에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라. 금하지 말라. 천국은 이런 자의 것이니라” 하시고 안수 기도를 해주셨습니다.예수님께서 피곤하고 힘들지만 어린 아이 아이가 오는것을 용납하시며,사랑하시고 귀하게 여기셨습니다.물론 제자들의 심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전도하시고,병을 고치느라고 무척 피곤하셨을 것인데 말도 알아듣지 못하는 어린 아이들까지 데려와서 시끄럽게 하고 예수님을 괴롭히면 얼마나 힘드시겠습니까?그래서 제자들은 그것을 염려해서 어린 아이를 오지 못하게 했습니다.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그러한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기며,책망하시고 어린이를 용납하고,귀하게 여기라고 하시고 마18:5절에서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예수님 당시에는 나이가 어린 어린이가 '어른'들을 영접하는 것이 전통이요풍습이었는데예수님은 큰 어른들이 '작은 어른 아이'를 영접하라고 하셨습니다.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당시 어린이를 무시하고 천대하는 전통을 깨버리는 것이었습니다.그러면서 작은 '어린이'를 영접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무슨 뜻입니까?어린 아이를 무시하거나 멸시하지 말고 어린 아이를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그래서 사도 바울도 엡6:4절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하였습니다.
옛날 독일에 '요한 트레보니우스'라는 '까르멜 수도원'의 원장이 있었는데 그는 맨발의 수도사로도 알려져 있습니다.그런데 그는 어린이들을 가르칠 때 늘 모자를 벗고 가르쳤습니다.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그 이유를 물으니 이렇게 말했습니다.“지금은 어린 아이들이지만 언젠가는 그들 중에서 대통령이나 국무총리도 나오고,신부나,장관도 될 것이고,학자나 교사들이 될 터인데 이를 생각하고 공경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그의 생각은 허사가 아니었습니다.그의 제자들 중에서 개혁자 '마틴 루터'가 배출되었습니다.미국에서 교회를 가던 선생님이 길에서 빈둥 거리고 노는 네 명의 소년들을 보고 그냥 지나가지 않고 그 선생님은 그 네 명의 소년들을 귀하게 여기고 교회로 인도 하여, 그들을 주일 학교의 한 클라스에서 가르치게 되었습니다.그 네 명의 소년들은 장성해서 각각 헤어져 수십년이 지났습니다.그런데 주일 학교를 가르친 그 선생님의 생일이 되었을때(1932년), 그에게는 과거에 가르치던 네 명의 학생으로부터 생일 축하 편지가 왔는데 한 통은 중국에서 '선교사'로 일하고 있는 제자가 보낸 것이고,다른 한 통은 연방 정부의 '은행 총재'로부터 왔고,세번째의 편지는 당시의 '대통령의 비서관'이 보낸 것이었고, 지막의 것은 네 소년 중의 하나로 가르치던 31대 대통령 '하버트 후버'가 직접 보낸 친서의 생일 축하 편지였던 것입니다.여러분. 어린 아이가 작다고 함부로 대하고 무시하지 말고 예수님 말씀대로 사랑하고 귀하게 대하고. 그리고 예수님처럼 영접하여 예수님을 대하듯 하라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요즈음은 어린이 전도가 쉽지 않습니다.신경을 많이 써야 합니다.예산도 세우고, 린이 전도에 투자를 해야 합니다.그들이 지금은 소비자이지만 20-30년 후에는 교회의 기둥들도 성장할 것입니다.차세대에 교회를 지킬 교사,집사,권사,장로,목사,선교사,정치가,지도자가 되어 주님의 귀한 일꾼이 될 것입니다.
2. 예수님이 어린 아이는 우리가 본 받아야 할 대상이라고 하셨습니다.
본문 18:3-4절의 말씀이 바로 이 교훈입니다.“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여러분 어른들의 입장에서는 생각할 때 어린 아이는 무조건 가르쳐야 할 대상이고,부모의 말에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어린 아이에게 무엇을 배우겠냐?'고 하면서 어린 아이를 무시했습니다.그러나 예수님은 오늘의 본문에서 이런 발상을 역전시켜 오히려 어른들이 어린 아이에게 배워야 한다고 하시면서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어린 아이와 같이 낮추어야 천국에서 큰자"라고 하셨습니다.어린 아이에게는 천국에 들어 갈수 있는 마음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그럼 어린 아이의 어떤 마음이 천국에 들어가는 마음이겠습니까?순수하고 정직한 마음, 단순한 마음,낮추는 겸손한 마음,부모를 의지하는 마음 잘 믿는 마음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잘 믿지만 어른들은 믿지 못합니다.어른들은 사람에게 상처받고,배반당한 인생 경험때문에 세상을 믿지 못하고, 사람들을 믿지 못합니다.그래서 이렇게 믿지 못하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도 믿지 못하게 됩니다.믿음이 없이는 결단코 구원 받을 수도 없고, 또한 영원한 천국에 들어 갈수도 없습니다.본문에 예수님이 너희가 천국에 들어가려면 어린 아이를 본받아 어린 아이의 정직과 겸손함,그리고 단순성함과 믿음을 본받아야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미국에 ‘4센트짜리 교회’[약40원]라는 교회가 있습니다.웅장하고 아름다운 교회당에 어떻게 `4센트짜리'라는 별명이 붙었는가 하는데는 네 살짜리 어린 아이의 솔선적 헌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건물이 오래 되어 퇴락한 교회당의 신축을 위해 모든 교인들이 모여 집회를 갖고 마지막으로 교회 신축을 위하여 헌금하는 순서를 가졌는데 목표로 정한 액수가 너무 많아 교인들이 서로가 얼굴만 쳐다보며 눈치를 보고 먼저 돈을 바치기를 꺼려했습니다.교회안에는 미묘한 정적과 긴장이 감돌았는데 이때이제 겨우 네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아이가 정적을 깨뜨리고 강단 앞 계단을 올라 목사님께로 다가갔습니다.그리고는 고사리 같은 손을 펴며,쥐고 있던 1센트짜리 동전 4개를 목사님 앞에 놓았습니다."목사님, 이 돈은 우리 엄마가 나 사탕 사먹으라고 주신 돈이에요.제가 사탕 사먹는 것보다는 이 돈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 목사님께 드리는 거예요" 어린 아이에게 있어 사탕 사먹는 일은 가장 중요한 일인데 그것을 포기하고 헌금하는 어린이를 통해 큰 감명을 받은 어른들은 마음을 고쳐먹고,자기 차나 집을 구입하려고 모아 두었던 돈을 비롯하여 자신이 가장 아끼는 것들을 하나님 앞에 바치기 시작했습니다.그렇게 해서 건축이 시작되어 예배당이 웅장하게 세워지게 됩니다.예배당이 훌륭하게 세워진 후 사람들은 어린 아이의 솔선 수범적인 4센트 헌금을 잊을 수 없었고, 간이 흘렀어도 4센트 헌금의 감동이 사그러지지 않았습니다.그래서 '4센트짜리 교회'라는 별명이 붙은 교회가 되었습니다.
어린이는 단순하게 잘 믿습니다.하나님을 잘 믿고 선생님을 잘 믿고 친구를 잘 믿습니다.여러분 오늘 어린이 주일에 "너희가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하신 예수님 말씀대로 어린 아이의 마음을 본받고, 배우시기를 바랍니다.3.예수님이 어린 아이는 어른들이 보호해야 라고 지켜야 할 대상이라고 하셨습니다.어린 아이들이 말썽을 피우고 속을 썩여도 끝까지 참고 인내하며 양육하며 보호해야 할 대상입니다.
어린이 주일을 맞아 늙으신 당회장 목사님이 주일학교에서 설교를 했습니다.평소 교육 전도사가 하는 설교를 재미있게 듣던 어린이들에게 목사님의 설교는 재미 없고,지루하기 그지 없었습니다.예배당은 아수라장이 되었고,목사님은 식은 땀을 흘리며 겨우 설교를 끝내고 목사님이 마지막 축도를 하게 되었습니다.축도하는 모습을 처음 본 새로나온 어린 아이가 궁금하여 친구에게 물었습니다.“얘아, 왜 목사님이 손을 들고 기도하지?”“야 임마 그것도 몰라? 목사님이 우리에게 설교를 잘못했으니 하나님 한테 벌 받고 서있는 거지" 여러분 본문에서 예수님이 어떻게 보호하라고 하셨습니까? 5절에 '어린 아이를 영접하라'고 하셨고,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본문 6절에서 예수님은 매우 강경한 어조로 중요한 경고를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한 마디로 작은 자,곧 어린 아이를 무시하고 업신여겨 '실족케 하지말라'는 것입니다.여기서 '실족함'이라는 말은 부모나 어른들이 어린 아이를 실망 시키거나,넘어지게 하지 말고,잘 보호하라는 뜻입니다.그리고 예수님이 10절에서 아주 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10절에서 발견되는 매우 흥미로운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하나가 바로 ‘저희 천사들’이라는 말씀입니다.'소자'나 '어린이'들에게는 저희를 지키고, 따르는 '수호 천사'가 있다는 것입니다.힘이 없고,약한 어린이를 보호하도록 하나님이 천사들을 보내었고,천사들에게 보고를 받는다는 것입니다.그렇다면 우리 어른들은 천사들이 다 보고 있으니까 어린 아이을 무시하고, 함부러 대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그리고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 보호하는 어린 아이들을 부모들이 더욱 지키고,보호해야할 의무가 있지 않습니까?어린 아이들이 스스로 자기 자신을 지킬수 있을때 까지 잘 키우고,도와주어야 합니다.육체적인 도움도 주어야 하지만 육체적인 도움보다도 영적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본문에서 예수님이 가장 중요하게 강조한 도움은 육적인 도움 보다도 영적 도움이라고 생각합니다.본문의 문맥에서 예수님은 영적 도움을 베풀지 못하고 어린이를 실족하게 하는것은 영원히 망하게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그렇다면 무엇보다 어린이들이 예수 믿고 구원받아 영생 얻도록 부모님이 도와야 합니다.그래서 그들이 성장해서 부모의 도움이 아닌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며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린 생명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잠깐 맡긴 선물이고,기업이라고 하셨습니다.
시127:3절에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부모가 잠깐 맡아서 키우는 기간에 어린 아이를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 받는 자녀로, 천국 가는 자녀로 키워야 합니다.이렇게 도워주는 것이 부모의 사명과 책임을 다하는 것이고,예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도움입니다.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보호는 잘못된 '과잉 보호'가 될 수도 있습니다.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어린이 교육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과잉보호'라고 생각합니다. '과잉 보호'는 자녀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녀를 망하게 하고, 파멸시키는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어린아이의 요구는 무조건 들어주고, 무조건 감싸주고, 아이들이 하고 싶은대로 내 버려두는 것은 아이가 자라가며 중대한 행동장애나 정신장애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고 이것이 자녀들를 실족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 오게 됩니다.구약 사무엘상에 나오는 엘리의 가정이 바로 그런 가정이었습니다.엘리 제사장이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죄를 짓고, 잘못하고 있음에도 크게 책망하지 않고,과잉보호를 했습니다.삼상2:24절 “내 아들들아 그리하지 말라.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죄하게 하는도다”엘리 제사장은 두 아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를 무시하고 제사를 드리기 전에 먼저 제물을 먹고,문란한 성생활을 하는데도 젊잖게 타이르기만 할뿐 별로 혼내거나 책망을 하지 않은 결과가하나님이 '엘리가 나보다 자식을 더 사랑한다'고 진노하시고 큰 벌을 내리셨습니다.그래서 엘리의 두 아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고 전쟁터에 나갔다가 한꺼번에 죽었고,엘리 제사장도 그날 같이 죽고,엘리 제사장 며느리가 아이를 낳다가 죽어 가문이 망했습니다.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어떻게 자녀를 양육하고 있습니까?자녀가 잘못을 했는는데도 기가 죽을까봐 아무런 책망도 하지 않는 엘리 제사장과 같은 부모는 아닙니까?또 자녀가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데도 자식을 혼내지도 않고, 회를 안 나오고, 예배를 빠졌는데도 그냥 내버려두는 부모는 아닙니까?잠13:24절에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자녀가 교회를 안나오고,잘못을 했는데도 책망하지 하는 것은 자식을 망치는 것이고 실족하게 만드는 것입니다.그래서 예수님이 본문에서 말씀하시기를"실족하게 하려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낳다”는 것입니다.이 말씀은 자녀들이 영원한 지옥에 가는 것보다 차라리 육신을 바다에 빠져 죽게하는 것이 낳다는 것입니다.육신의 생명보다 영적인 생명,곧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을 살리고 구원하라는 말씀입니다.미국 경찰 당국이 만들어 낸 '자녀 잘못 기르기 10가지'를 발표하였습니다.1.어려서부터 갖고 싶은 것을 다 주면서 길러라.온 세상이 자기 것같이 생각하고 살것이다.2. 나쁜 말을 할 때 하고 싶은 말을 다하게 그냥 버려두면서 아이를 길러라.웃어 넘겨라.그러면 자라나서 자기 마음대로 말하는 사람이 될 것이고, 남의 마음에 상처되는 말을 마구 뱉아 놓는 사람이 될 것이다.3.아무런 영적 훈련을 시키지 말고 내버려 두며 길러라.자라나고 나면 알아서 잘 하겠지라고 길러 보아라.자라나서 자기 마음대로 하게 되면서 하나님을 떠나 갈 것이다. 4.잘못된 행동을 책망하지 말고 길러라.자라나서 자동차를 훔치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지역사회 잘못이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5.아이가 정돈하지 않은 이불,신발,버려둔 책,마구 어지럽히면 대신 정리하여 주어라. 그러면 이 다음에 자라나서도 자기 할일을 하지 않고 책임을 미루게 될 것이다.6.보고 싶은 것은 마음대로 보고, 먹고 싶은 것은 마음대로 먹게 내버려 두어라.그러면 자라나서 쓰레기 인간이 될 것이다.7.이 앞에서 자주 싸우는 부모가 되라.그러면 자라나서 틀림없이 가정 파탄이 될 것이고, 가정이 깨어져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8.용돈을 달라는대로 주고 떼를 쓰면 다 해주라. 곧 죽게 되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9.먹고 싶은 것,입고 싶은 것, 마시고 싶은 것,해 달라는 것,요청하는 것을 거절하지 말고 다 해주어라.자라나서 누구에게 거절당하면 쉽게 분노하고, 실망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10.누구와 대립될 때 아이 편에 서주어라.자라나서 이 세상 모두가 대적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송길원' 목사님의 글에 나오는 이야기인데,한 어머니가 자녀에게 심부름을 시키자 아이가 ‘나미공’이라고 말하더랍니다.처음에 어머니가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자,아이가 “나,미안해.공주야!”라고 하더랍니다.부모들이 자녀들를 공주와 왕자처럼 키우다보니,주위에 보면 온통 왕자병, 공주병 환자들이 많습니다.여러분,왜 이렇게 공주 병 환자들 왕자 병 환자들이 많이 생기는 줄 아십니까? 요즘에 자녀를 하나나 둘밖에 키우지 않기 때문에 자녀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는데서 생겨난 병입니다.옛날에 자녀가 많던 시대와는 달리,요즘에는 아이를 하나나 둘만 낳기 때문에 부모가 자식이 하자는 대로 끌려 다닙니다.그러나 이 말을 오해하지 말고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1)우리는 자녀를 사랑해야 하고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인물로 잘 양육해야 합니다.2)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될 줄로 믿습니다.하나님보다 자식을 더 사랑한다면,그것은 자식을 '우상화'하는 것이 됩니다.자녀는 우상이 아니고 하나님의 주신 선물이고,기업입니다.그래서 자녀는 잘나도 하나님의 것이고,못나도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이 잠깐 맡긴 기업이고,상급입니다.
따라서 자녀에 과잉보호하며 집착하면 결국에,자녀를 우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부모들이 자녀를 우상으로 삼으면 첫째는 하나님께,둘째는 자식에게,셋째는 자기 자신에게,3중으로 죄를 짓는 것입니다.하나님이 잠깐 부모에게는 맡긴 어린 자녀를 하나님의 뜻대로 키워야 할 책임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우리 부모들은 자녀들이 원하는 방법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자녀를 키우고 양육해야 훗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의 칭찬과 상급을 받게 됩니다.어린이는 우리가 배워야 할 대상이고,조건 없이 사랑 하고 영접해야 할 대상이고 건강하게 보호해야 할 대상입니다.무엇보다도 어려서부터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양육을 해야 합니다.그래서 우리 교회 어린이나,아니 이 나라의 어린이들이 이런 어린이들이 되도록 다같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자녀교육을 잘하는 행복한 가정
마 19:13, 신 6:4-9 / 김영윤목사(부산방주감리교회)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특별히 오늘은 어린이주일입니다. 오월은 가정의 달이기에 오늘은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 자녀교육편을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 자녀들을 어떻게 키우면 훌륭하게 크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 수가 있겠습니까? 요즈음 우리주변에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문화사조가 유행하는 시대입니다. 신세대, 미시족, 엑스시대, 야타족, 나타족, 둥지족,난데족 등등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회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기성문화와 심각한 충돌까지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이 이같은 문화사조와 시대정신을 어떻게 인식하고 대처하느냐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해마다 5월5일이 되면 어린이날이구나 하고 어린이에게 하루동안 관심을 갖게 됩니다. 앞으로 이나라를 짊어지고 갈 어린이라고 생각한다면 하루만이 아니라 일년 365일 동안어린이에게 관심을 베풀어 주어야 합니다. 어린이가 잘 자라고 바르게 자라야 사회가 밝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린이를 양육하는 어른들의 생각이 달라져야합니다. 어른들의 순간적인 향락이 가정을 파괴하고 자녀들을 서슴치 않고 길거리에 버려서 고아가 되게 하기도 하고 문제아가 되기도 하고 부모나 사회에 반항하는 아이로 만들기도 합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심은대로 거두리라]는 성서의 말씀대로 어른들이 뿌린 씨앗을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부모는 3살도 안되었는데 피아노를 가르치고 노래를 가르치고 춤을 가르쳐서 사람들 앞에서 자랑을 하게 합니다. 이것은 교육을 위한 교육이 아니라 부모들의 기호에 맞추기 위한 교육일 것입니다. 우리들은 우리의 자녀들을 시험치는 기계, 음악하는 기계, 사무보는 기계, 돈버는 기계로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참 사람을 만드는 진정한 생명있는 교육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부모들은 어떻게 자녀를 양육해야 하겠습니다. 올바른 양육방법을 알고 그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전인류가 최대의 관심을 갖고 투자해야 할 사업이 무엇입니까? 가장 우선적인 사업은 자녀사업입니다. 그래서 자녀교육에 전생애를 받쳐서 투자 하기도 합니다. 어느 부모이던지 간에 자녀들이 다 성공 하기를 원하고 가르칩니다.
세상것은 다 가르치지만 인성교육은 되지 않아서 얼마전에도 외동아들이 자기 약국을 경영하는 부모를 죽이는끔찍한 일이 생겼습니다. 자녀가 하나밖에 없으니 너무 옹야옹야 키워서 막을 길이 없습니다. 자녀들을 때릴 때는 따끔하게 때려주어야 합니다. 분명히 잘못된 것을 보면서도 용서해 주는 부모는 훗날 후회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가 성공하기를 원하면 야단도 쳐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에 한참 나오는 뉴스를 보면 교사가 학생을 야단쳤다고 경찰에 신고해서 아이들 보는 앞에서 잡아가지를 않는지, 아이들이 교사들을 집단구타 하는일이 생겨나지 않는지, 오히려 부모들이 학교에 찾아와서 교사들에게 따지는 일들을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의 교육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가를 알 수 있는 현실입니다. 과거 우리가 공부할 때는 선생님의 그림자도 밟지 않았습니다. 이런 아이들에게 우리 기독교 교육이 필요한데 대학교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자의 가정의 아이들 조차도 교회가라고 하지를 않습니다. 결국에는 실패의 교육이 될 것입니다.
지금 지구상에는 민족적 주체성을 가지고 끈질기게 생존하는 민족이 있습니다. 이 민족은 나약하고 힘없이 살아온 민족이지만 지금도 세계무대를 휩쓸고 있습니다. 이들이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여러분 스팔타 교육은 망했습니다. 그러나 유대교육은 엉성했지만 지금도 생명을 이어가는 신비가 있습니다. 스팔타교육은 훌륭한 육체와 힘을 길렀지만 그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지혜와 사랑을 망각했습니다. 스팔타교육은 어린이를 전쟁의 수단으로 보고 나라의 재산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니 그 교육은 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외국침략으로 성전이 파괴되고 학교가 없어지고 성곽이 무너져도 자녀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일은 계속했습니다. 어린이를 보는 눈이 달랐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빼앗겨도 가정만은 포기하지 않고 세상지식은 못가르쳐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율법을 가르치고 이웃사랑하는 교육을 했습니다. 물론 세상교육을 하지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밭에 곡식을 심으면 좋은흙과 비료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땅이 아무리 좋고 비료가 아무리 좋아도 하늘의 햇빛과 비를 의지하지 않으면 열매는 거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생명은 땅과 씨앗에 있는 것 같지만 그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교육은 좋은 흙이나 좋은 비료같은 학문도 배워야 하지만 더 귀한 것은 하늘에 생명 있는 하나님의 말씀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육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느니라]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마땅히 행할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여 어릴때의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물론 부모들의 의무는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의무는 자녀들을 교육시킬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좋은 옷은 못입혀도 좋은 침대에 잠자리를 마련해 주지 못해도 자녀들에게 학교에서 공부를 시킬 수 있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 부모들은 어린이를 어떻게 양육을 하시렵니까? 어린이는 내것이 아닙니다.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내놓은 것 처럼 내놓아야 합니다. 주일날만큼이라도 내놓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내 자녀들을 세상교육에만 맡기지 말고 교회교육에 맡겨야 합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자녀는 의사, 법률가, 과학자 등등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하나님의 뜻대로]하옵소서 하는 마음을 가지고 교육을 해야 합니다. 행복한 가정은 성경을 가르쳐 키운 가정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디모데는 그의 외조모 로이스와 그의 어머니 유니게를 통하여 어려서 부터 철저하게 성경으로 교육을 받았습니다. 한 가정의 행복에 있어서 자녀가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히 큰 것입니다. 디모데를 둔 유니게의 가정은 행복한 가정입니다. 이렇게 행복한 가정이 되게 하기 위해서 유니게는 성경을 가르치고, 믿음으로 키우고, 양심적인 인간으로 키운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대구에서 목회할 때, 대구 신천초등학교에 매년 일일교사로 가서 아이들을 가르친 적이 있습니다. 학교교육에 대해서 부모님들이 관심이 참 많이 있습니다. 어떤 초등학교에 작문을 했는데 어떤 어린이는 [사람이 태어나고 죽어가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공부하라고 너무 억압하지 말고 자유를 주세요],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 [내가 자라면 자가용을 타고 돈을 많이 버는 사람에게 시집을 갈 것입니다],[나는 커서 사장이 될래요] 합니다. 여러분 이러한 사실들은 무엇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까? 어린이들은 사회가 주는 가치관, 학교에서 가르치는 가치관, 가정에서 가르치는 가치관 모든 것이 다르기 때문에 가치관을 세우지 못하고 불안해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 어린이들의 생각이 유치해 보이지만 그들 나름대로 가치관을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자녀들을 여러분 귀하게 여기고 책임있게 가르치고 키우는 부모님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여러분 학생들이 학교 시험 기간이므로 교회에 가지 말라는 부모가 있습니까? 어려서 부터 교회로 인도하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지금 우리 자녀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 자녀들에게 고급 식물을 먹이고 영양음료를 마시우고 살을 찌게 하고 있지 만은 영적 심령은 굶주리고 목말라 지옥의 해골 처럼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좋은 옷을 입히려고 백화점을 드나들면서, 의로운 옷을 입히는 신령한 백화점인 교회는 왜 찾아 오지 않은 것입니까? 부모는 사랑하는 자녀들의 육체를 길러 주시기 위해서 의식주를 제공하고 지식을 길러 주기 위해서 학교에 보냅니다. 그러나 자녀들의 정신적으로 원만하고 남을 사랑하고 평화로운 사람들로 자라기 위해서는 사랑이 넘치는 가정에서 자라게 하고 사랑을 주어야 하고 사랑을 받고 자라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링컨의 어머니가 심어준 사랑의 씨는 링컨의 마음속에서 자라서 훌륭한 인도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세계를 뒤흔든 2차 세계대전의 원흉인 히틀러의 손에 육백만명이 죽었습니다. 그것은 히틀러의 어린시절이 불운 했기 때문입니다. 히틀러 아버지가 장사를 나가면 몇달씩 집을 비우게 되니까 어머니가 유태인의 집에 자주 놀러 가고 그 유태인과 불륜의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것을 안 히틀러는 여자를 증오하고 복수심에 불탔습니다. 그의 편견으로 6백만명이 비명에 죽어 간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영향이 이렇게 큰 것입니다. 반대로 무디의 형제는 아홉이 있었는데 어느날 아버지가 돌아 가셨습니다. 아버지가 계셔도 아홉을 기르기 어려운데 무디의 어머니는 소매를 걷어 부쳤습니다. 사람들이 식구를 줄이라고 고아원에 맡기라고 했지만 그는 [내 기운이 다할 때까지 내 품에서 키우겠다고]하고는 뼈가 부서지도록 일을 해서 자녀들에게 학교 교육은 제대로 시키지 못했지만 주님안에서 신앙으로 잘 길러냇습니다. 그 결과 미국과 영국을 뒤흔들면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위대한 하나님의 종, 무디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어머니의 가슴은 위인을 길러냄과 동시에 범죄자도 길러내는 것입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의 기를 꺽지 말아야 합니다.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미래상을 심어주고 칭찬하며 꿈을 심어 주어야 합니다. 에디슨은 학교에서 저능아라고 생각을 하고 3개월만에 퇴학을 시켰습니다만 어머니는 아들에게 꿈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에디슨이 세상을 떠날 때는 1869개의 발명왕의 이름이 붙었습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은 어머니의 생일축하에 많은 사람을 초청을 했습니다. 한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훌륭한 아들을 둔 비결이 어디 있느냐 물으니까 [나는 내아들이 어려서 부터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고 교회를 떠나가지 않도록 가르쳤노라]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훌륭한 어머니는 자녀를 믿음으로 가르칩니다.
그리고 가정에서의 교육은 공정해야 합니다. 야곱은 열두 아들이 있었는데 요셉을 더 사랑해서 형제들이 시기하고 팔아 버렸습니다. 특별히 아들, 딸 구별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녀주심을 감사한 마음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동생들이 손해보는 것은 있습니다. 늘 형 것을 물려받기 때문입니다. 한 번은 형으로부터 매번 물려받고 자란 사람이 어머니에게 말을 합니다. 나는 형이 빨리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깜짝 놀라서 왜, 했더니 나는 지금까지 신발, 옷 등 등을 다 물려받았는데 형이 빨리 죽어야 예쁜 형수님을 물려받아서 결혼을 하지요. 했다는 것입니다. 큰 아들만 생각하지 말고 가끔가다가 둘째에게도 좋은 것을 사주어야 공정한 교육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좋은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좋은 부모가 되려면 자녀에게 최대의 자유를 주어야 합니다. 우리네 교육은 이렇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머니가 저녁을 준비하면서 오늘저녁에 무엇을 먹을까 하고 물어보면 아이들이 [신 김치넣고 만두, 손을 빛은 칼국수 등등]을 요구합니다. 그러면 어머니가 그것을 해 주는 것 보다는 눈을 아래로 깔고[귀찮아, 국수언제밀고 있어, 더운데]하면서 간단하게 빵과우유를 먹자 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하는 교육입니다. 그러면 물어보지나 말지 왜 물어봅니까? 물어본다는 것은 선택권을 준다는 것인데 그 선택권은 처음부터 무시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자녀교육에 자유를 주어야 하는데 모든 선택권을 무시한채 교육을 하기 때문에 훗날 대학교수가 되어도 아버지를 살해하고 스스로 해낼 수 있는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서양인들은 [어머니 시장가세요. 두가지만 사다주세요. 하나는 아이스크림인데 바닐라가 10%들은 것 하고, 하나는 볼펜인데요. 빅에서 나온 아룬드스틱 미디엄 사이즈로 사다주세요]합니다. 우리네 교육은 두리뭉실 넘어가지만 서양인들은 조목조목 적어서 사다준다는 것입니다. 자녀가 성숙되어 가는 속에서 부모는 안내자, 조력자, 지원협력자입니다. 그 차원을 넘어서면 부모의 의지대로, 욕구대로,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키우는 도구적 사고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에 한계를 그어주어야 합니다. 6-8세가 되면 공정한 법을 쫓아 게임을 합니다. 그러므로 노는시간, 공부시간, 가져야 될 것, 안될 것, 해야될 것, 안될 것 등등을 분명하게 구별 해 주어야 어린이가 잘 성장이 되는 것입니다. 좋은 부모는 엄격해야 합니다. 약속한 것을 지키어야 합니다. 부모가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아이가 [왜 약속을 안 지키느냐]하면[시끄러워]하고 야단을 치고 맘니다. 그러면 그 아이의 마음에는 불만과 억울한 생각을 갖게 되고 불신이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벌을 줄 때 홧김에 감정에 치우쳐 벌을 먼저주지 말고 자녀의 잘못을 충분히 설명을 하고 벌을 주어야 합니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다른 것은 사람에게는 지키는 도리가 있는 것입니다.여러분 개나 돼지가 도리를 지킵니까? 만약 사람이 도리를 지키지 않으면 스스로 짐승화 되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지키는 마땅한 도리는 자녀들은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자신이 장수하고 복받은 비결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계명이므로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두번째 도리는 양육의 도리입니다. 어느 가정이든지 자녀를 소홀이 하지는 않습니다.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바라지만 그렇게 안됩니다. 훌륭하게 될 수있도록 부모님이 가르치고 길러야 합니다. 세상교육기관이 많이 있지만 아이들이 태어나면 그 가정에서 제일 먼저 배웁니다. 그러므로 가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그대로 배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못된 일이 일어나면 다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 합니다.
교회에 다니던 학생이 아버지의 말을 안들면 교회목사책임이라고 하고, 고1짜리가 그렇다고 하면 학교는 10년을 다녔습니다. 교회는 일주일에 1시간을 가르치고 학교는 6일동안 6-8시간을 가르쳤는데 17살이면 17년 동안 집에서 가르친 것은 무엇입니까? 일주일에 한시간 가르치는 것이 잘못이 되었습니까? 하루에 6-8시간 가르치는 학교가 잘못했습니까? 누가 잘못 가르킨 입니까? 그러면서 모든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얼마전에 군이 탈영을 해서 인명 피해도 입혔습니다. 그럴때는 모든 책임은 군에다가 돌립니다. 그래서 그 군인과 관계된 높은 사람들이 옷을 벗습니다. 군에서 잘못 교육을 시켰다고 합니다. 학생이 잘못하면 학교에다가 책임을 전가해서 교장이 옷을 벗고 문교부 장관 까지 해를 끼칩니다. 교인이 잘못하면 교회가 비난을 받고 힐난을 합니다. 물론 책임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가장 근원은 가정에 있고 부모에게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학교에서 학생이 잘못해서 부모를 학교로 오라고 하면 와서 내 아이는 잘못이 없다고 다 그런다는 것입니다. 내 아이는 착하고 순하다고 하면서 선생님을 야단을 칩니다. 소년원 형무소에 가면 면회 오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우리 아니는 괜찮은데 친구 잘못 만나서 그렇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형무소에는 전부 괜찮은 애들만 들어와 있어요. 괜찮치 않은 아이는 다 밖에 있고 괜찮은 신랑감, 신부감을 구하려면 교도소로 가면 됩니다.
성경에는 그런 가정이 있어요. 엘리 가정입니다. 이 가정은 자녀교육의 실패해서 가정이 망하고 제사장 대가 끊어지고 나라가 망하게 되었습니다. 자녀들의 잘못을 호디게 꾸짖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잘못을 저지르면 고통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부모에게 반항하고 불순종 하는 아이는 나중에도 말을 듣지 않습니다. 출처를 모르는 물건을 가져오면 따끔 하게 혼내 주어야 하고 제자리에 갖다가 놓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이제 행동을 조심 하십시오. 아이들은 그대로 배웁니다. 그래서 그 아이가 행동을 하는 것을 보면 그 부모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린이가 소끕장난을 하고 있습니다. 여자 아이는 풀을 뜯어다가 반찬도 만들고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저녁때가 되자 남자 아이가 어디서 술병을 들고 와서는 소리를 지릅니다. 여러분 이 아이가 창조해 낸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른들이 하니까 어린이들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부터는 자녀교육에 신경을 쓰시기 바랍니다.
나는 부모를 원망한 적이 없습니다. 내게는 땅 한조각도 없습니다. 그러나 큰 유산을 받은 것이 있습니다. 어머니의 신앙이 유산입니다. 여러분 예수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그렇다면 물려 줄 것 없다고 애석해 하지 마세요. 재물이 없어도 괜찮고 지식이 부족해도 괜찬습니다.오직 자녀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공경할 수 있는 마음을 유산으로 물려 주시기를 바랍니다.불이나도 없어지지 않은 신앙 그것을 물려 줍시다. 금 은 보화를 물려 주는 것 보다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을 유산으로 물려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성경은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여 여러분의 자녀들이 참된 신앙인으로서 나라의 기둥, 교회의 기둥, 가정의 기둥으로 만들어 후세에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혼은 안 된다
마 19:1-15 / 최영기목사
얼마 전에 이혼에 관한 설교를 했는데 오늘 또 이혼에 관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가운데에 이혼의 아픔을 겪은 분들이 계셔서 그런 분들의 상처를 다시 건드려주는 것 같은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성경 본문을 쭉 쫓아가며 설교하는 강해 설교를 하기 때문에 제가 주제를 정하는 것이 아니고 본문에 의하여 설교 주제가 정해집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이혼에 관한 교훈을 주고 계시니까 제가 이혼에 관한 설교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Ⅰ. 이혼과 결혼
오늘 이혼에 관한 교훈은 바리새파 사람이 예수님에게 도전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혼에 관한 예수님의 의견을 물었습니다. 당시에 이혼에 관하여 유대인들에게는 두 가지 견해가 있었습니다. 둘 다 신명기 24:1에 기초를 두었습니다. "수치스러운 일'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견해가 달라졌습니다. Shammai라는 지도자의 견해를 따르는 사람들은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것은 간음이거나 거기에 버금가는 성적인 죄를 의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한 일이 있을 때에만 이혼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한편 Hillel이라는 지도자의 견해를 따르는 사람들은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것은 여자가 밥을 태웠든 지 아니면 단순히 남편이 정이 떨어지는 사소한 일까지 해당한다고 해석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혼을 쉽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1세기에 해당하는 역사를 기록한 2세기 초에 살았던 Josephus라는 사람도 바리새인이었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혼을 한 경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 크리스천 사이에도 이혼을 쉽게 생각하듯이 당시에 경건하다는 바리새인들 사이에도 이혼을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이혼에 관한 질문을 하는 의도는 빤합니다. 예수님이 Shammai와 Hillel 둘 중에서 어느 편을 들던지 동의하지 않는 쪽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적으로 만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쪽 견해를 선택하는 대신에 창조의 원리로 돌아가셨습니다. 창 1:27을 이용하여 부부는 한 몸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혼 자체를 부인하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그래서 그렇다면 왜 모세는 이혼을 이혼 증서를 써주고 아내를 버리라고 명령하였느냐고 도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모세의 계명을 악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 24:1에 보면 이혼을 할 수 있다고 했지 이혼을 하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혼은 허락이지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실을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왜 허락하셨는지를 설명하셨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해서 입니다.
당시에 이혼은 남자만이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혼 당한 여자는 경제력이 없으니까 혼자 살 수가 없습니다.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에 남편이 나타나서 여자가 자기 아내라고 주장하면 여자로서는 도리가 없습니다. 다른 남자와 간음하는 꼴이 됩니다. 이러한 것을 막기 위하여 이혼 증서를 써주고 이혼하라고 한 것입니다. 여성의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해주기 위하여서 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이혼 증서만 써주면 이혼할 수 있는 것으로 해석하였습니다. 경건하다는 바리새인들이 이처럼 이혼을 가볍게 생각하는 것이 이상하지만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이 쉽사리 이혼을 선택하는 것을 보면 인간은 시대를 초월하여서 똑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1. 이혼은 가능하다
인간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사악하기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모세도 유보 조항을 두었고 예수님도 유보 조항을 두었습니다. '음향 이외의 이유로' 라고 단서를 붙이셨는데 꼭 음행만이 아니고도 가능성을 비추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혼을 절대로 금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어떤 아내는 남편이 끊임없이 바람을 피우는데도 이혼을 하지 못하고 삽니다. 나중에는 남편이 애인을 데리고 부부 침실에서 자도 거실에 담요를 들고 나와서 자면서도 이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혼은 하나님 뜻에 어긋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상습적으로 구타를 하고 "죽이겠다"고 수없이 내뱉는 데도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같이 삽니다. 크리스천은 이혼해서는 안되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마약 중독자가 되어서 자신을 파괴할 뿐만이 아니라 자녀들을 비롯한 가족 전체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데도 그 파괴 가운데에 머물러 있습니다. 크리스천은 절대 이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생존권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같이 살 것을 기대하지 않으십니다. 이혼은 크리스천에게도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이혼 했다고 무조건 색안경을 쓰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2. 이혼은 극약 처방이다
그러나 이혼은 극약과 같습니다.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도 해결책이 보이지 않을 때에 최후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혼은 모든 방법을 다 시도한 후에 시도하는 극약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암을 치유하는 새로운 방법이나 약이 그렇습니다. 암이 걸리면 수술을 합니다. 수술을 해서 안 되면 항암 주사를 놓습니다. 항암 주사는 중금속이 든 독약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독을 주입하여서 몸을 살짝 죽이되 암 세포를 약간 일찍 죽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독한 방법을 써도 암세포가 없어지지 않으면 최후로 약효가 검증되지 않은 새로운 약을 투여하거나 효과가 검증되지 않은 새로운 방법을 시도합니다. 죽은 것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이혼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수술도 아니고 항암 주사도 아니고 결혼을 치유하는 극약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던가, 어쩌다가 손찌검을 했다던가, 마약이나 도박에 빠졌다고 자동적으로 이혼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이혼을 미워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말 2:16상). 이혼은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한 후에도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아니하고 생명과 생존권이 위협을 받을 때에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혼은 크리스천들의 어휘에서 제거해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젊은 부부들을 보면 아주 쉽게 "이혼합시다" "그러면 우리 헤어져요"라고 말하는데 이런 말은 해서는 안 됩니다.
3. 결혼 대상자는 신중하게 선택한다
그러므로 미혼들은 결혼 배우자를 선택해야 할 때에 신중해야 합니다. "살아보다가 안 되면 이혼해 버리지"라는 것은 크리스천의 선택이 아닙니다. 배우자를 선택할 때에 내가 이 사람과 죽을 때까지 살 수 있는가를 생각하고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잘못된 선택이라면 이혼하고 일생을 혼자 살 용의가 있는지 살피시고 결혼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혼을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고 살려면 꼭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과 결혼하시기 바랍니다. 부부가 확실히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했으면 그 결혼에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는 티각태각하더라도 믿음이 성숙하면서 결혼 생활도 성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이혼이 하나님 백성의 선택이 될 수 없다면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 말할 때에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날 때부터 신체 장애로 혼자 살아야 하는 사람도 있고, 예를 들어서 궁궐에서 일하기 위하여 스스로 거세하고 환관이 된 사람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주님의 사역을 위하여 혼자 사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혼자 살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힘을 주셨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입니다(11절, 12절 하). 이 말씀 뒤에는 결혼해서 사는 것도 하나님이 도와주시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혼자 살라고 하시든지 결혼해서 살라고 하시든지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확실히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과 결혼하기 바랍니다. 교회 다니면 다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하는데 반드시 그렇지 않습니다. 이분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주님에게 순종하면 사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부모가 목사이고 장로이고 권사라고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본인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여 순종하면서 사는지를 살피시기 바랍니다. 그렇기만 하면 결혼 생활에 갈등이 없을 수 없고 풍파가 없을 수 없지만 반드시 이혼을 생각할 필요가 없는 행복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4. 불행한 결혼도 행복으로 바뀔 수 있다
지구촌 교회의 이동원 목사님 하면 누구인지 대부분 잘 아실 것입니다. 설교를 아주 잘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분이 설교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시카고 근처에 집회를 갔을 때에 한 부부의 초청을 받았답니다. 두 부부를 보니 너무 행복하고 성령 충만해 보였답니다. 아주 아름다운 집에서 살고 있는데 벽에 보니까 사진 같기도 하고 그림 같기도 한 것이 붙어있더랍니다. 들여다보니까 십자가를 그렸는데 양 날개에 환히 웃고 있는 부부 사진이 하나씩 붙어있더랍니다. "재미있는 그림입니다."하니까 계면 적게 웃으면서 '사연이 있는 그림입니다"하더랍니다. 사연인즉슨 약 3년 전에 두 부부는 지옥 같은 결혼 생활을 하다가 별거에 들어갔답니다. 미국에서는 어는 정도의 별거 기간이 지나면 변호사 앞에서 사인을 함으로 자동적으로 이혼이 됩니다. 별거 기간이 끝나고 변호사 앞에서 사인을 하는 날 새벽에 남편이 마음이 답답하더랍니다. 애 낳고 10년을 살아왔는데 이런 식으로 끝내야 하는가? 그 동안 교회와도 멀어졌는데 새벽기도를 나갔답니다. 사람들 만나는 것이 싫어서 끝날 때쯤 나가서 들어가니까 사람들이 한 두 명 정도밖에 없어서 맨 앞 자리에 앉아서 기도를 하기 시작했답니다. 그런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하더랍니다. 눈물 가운데에 그러다가 앞에 달린 십자가가 보였는데 맨 십자가인데 그 위에 예수님이 달리셔서 피를 흘리시는 모습이 보이더라 는 것입니다. 왜요? 왜요? 하는 물음에 자신이 대답을 하더랍니다. 내 죄 때문에. 자신의 이기심과 고집과 욕심과 정욕 때문에. 그러면서 통곡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그 동안 아내가 성격이 괴팍해서 결혼이 이 모양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 제가 더 잘못했어요" 통곡 섞인 기도가 나오더라 는 것입니다. 이때에 그 아내도 변호사 앞에서 사인하는 날이라 마음이 착잡해서 교회당에 들어섰습니다. 아내는 평소에 새벽 기도를 참석하는 분인데 이날은 일이 있어서 늦었습니다. 뒤에서 기도를 하려고 엎드렸는데 앞에서 어떤 남성이 통곡을 하면서 "제가 더 잘못했어요"라고 기도를 하는데 들어보니 자기 남편 음성이더래요. 아내도 오열이 터져 나오면서 십자가 앞에서 생각해보니 남편도 잘못했지만 자기도 잘못을 많이 한 것이 깨달아지더랍니다. 그래서 앞으로 뛰어갔답니다. "여보, 저예요" "아니, 당신이" 둘은 부둥켜안고 십자가 앞에서 통곡하는 기도를 드렸답니다. 그리고 다시 해봅시다, 손을 잡고 나오며 결심했답니다. 그 후부터 두 부부의 언어는 "여보 내가 더 잘못했어요" "여보 내 책임이에요" "나는 당신이 필요해요" 가 되었고 하나님은 둘의 관계를 놀랍게 회복시켜주었답니다. 1년이 지난 후 잘 아는 화가에게 십자가를 그려 달라고 부탁을 했답니다. 십자가 밑에서 둘이 화목했으니까 그립을 그려주면 십자가 양 날개 위에 사진을 붙이겠다고. 그래서 그려 받은 것이 벽에 붙여진 그림이고 사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혼의 원인은 궁극적으로는 죄입니다. 그러므로 부부가 상대방 탓을 하는 대신에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상대방의 잘못을 용서하면 아무리 어려운 결혼도 행복한 결혼 생활로 바뀔 수가 있습니다.
Ⅱ. 결혼의 근본 원리
결혼 생활을 기술입니다. 행복하기 위하여서는 기술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기술은 확실한 하나님의 결혼 원리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창세기 1:27을 인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행복하고 건강한 부부가 되려면 다음 세 가지 원칙 위에 결혼 생활이 영위되어야 합니다.
1. 부모를 떠난다
부모를 떠난다는 것은 부모의 보호 밑을 떠나서 아내와 더불어 독립적인 개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부모를 떠나서 부부가 독립된 개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장성한 자녀를 가진 부모들은 자녀들이 독립적인 부부관계를 이루도록 도우셔야 합니다. 결혼한 후에도 자녀들을 금전적으로 돕는 부모들이 있는데 가끔은 모르지만 이것은 부모들은 자녀들이 독립 개체가 되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 부모들은 자녀 대학 졸업까지 책임지고 좀 더 여유가 있으시면 결혼식까지 책임지시고 다음부터는 자신들이 독립하여서 살도록 하여야 합니다.
금전적으로 뿐만이 아니고 정신적으로도 떠나야 합니다. 결혼한 후에도 자녀가 부모의 말을 듣고 부모가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을 기쁘게 여겨서 착하다느니 효자라느니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생각입니다. 결혼한 후에는 독립적인 결정을 하고 거기에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합니다.
2. 배우자와 합한다
합한다는 헬라어는 아교라는 단어에서 왔습니다. 아교를 사용하여 떨어지지 않게 붙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은 아내와 아교 칠을 해서 붙인 것처럼 붙어야 합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아교 칠을 해서 붙인 것처럼 붙어야 합니다. 부부는 배우자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남편은 아내보다 부모가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아내는 다시 얻을 수 없지만 부모는 다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말입니다. 부모도 다시 얻을 수 없지만 아내도 다시 얻을 수 없음을 모릅니까?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 안에서는 이혼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부는 아교 칠을 해서 붙인 것처럼 떨어질 수 없는 사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결혼을 해도 부모가 아내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혼하지 말고 부모에게만 효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부부가 합해야 부모님에게 잘해드릴 수 있습니다. 배우자에게 자신이 가장 중요한 존재라는 확신이 생기면 자신을 아껴주고 사랑해주는 상대방을 나아준 부모님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부모를 배우자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면 배우자는 부모를 라이벌로 생각하게 됩니다. 라이벌을 사랑하는 것은 힘이 듭니다. 아내보다 부모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치고 행복한 가정을 누리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아내와 합한다는 것은 부모를 저버리라는 뜻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해서 말씀 드립니다. 사도 바울도 친족을 돌보지 않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고 안 믿는 사람보다 더 악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딤전 5:8). 특히 혼자 되신 부모님들을 모시는 것은 크리스천 자녀들의 의무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것에 관하여 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딤전 5:4). 부모를 떠나서 아내와 합한다는 것은 부모를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부부가 아교로 붙이듯이 떨어질 수 없는 독립적인 개체가 되어서 대등한 입장에서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하고 보살펴드리라는 것입니다. 부부가 상대방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될 때에 비로소 참된 효도가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3. 부부는 한 몸이다
부부는 뗄 수 없는 한 몸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이에 아무도 끼여들 수 없습니다. 자녀들도 그 사이에 끼어 넣으면 안 됩니다.
13-15절에서 예수님은 어린이들에게 대한 관심과 사랑을 표시하십니다. 당시에 속죄일에는 랍비가 어린이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해부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부모들이 예수님도 손을 얹고 축복해달라고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이러한 것들이 갈 길이 바쁜데 귀찮게 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막다가 예수님에게 꾸중을 들었습니다. 어린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린이들에 대한 사랑은 각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어린이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복을 받는 이유중의 하나는 어린이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어린이 교육을 책임지는 교회가 되고자 하는 노력 때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를 돌보아야 하지만 사랑하는 자녀도 부부의 사이에 끼여들어서는 안 됩니다. 부부는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엡 5:28). 부부 사이가 안 좋으니까 자녀들에게 전 인생을 거는 분이 있는데 그러면 안 됩니다. 자녀들에게 내가 너 때문에 산다 식으로 말하면 자녀들이 얼마나 압박감을 느끼겠습니까? 부부가 하나 될 때에 자녀는 안정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자녀들 앞에서는 자녀들보다 아빠에게는 엄마가, 엄마에게는 아빠가 더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확실히 말해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자녀들이 섭섭해 할 것 같지만 아닙니다. 이러할 때에 자녀들이 안정감이 생깁니다. 부부는 자녀 앞에서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자녀 교육 문제 등으로 의견이 엇갈려도 침실에서 해결하고 자녀들 앞에서는 같은 모습과 의견을 보여야 합니다.
젊은 엄마들 가운데에는 아기가 예쁘다고 데리고 자는 분들이 있는데 그러면 안 됩니다. 아기가 아무리 예뻐도 남편보다 예뻐서는 안됩니다. 자녀 교육의 목적이 독립된 인격체로 키우는 것이라고 한다면 따로 재우는 것이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부부는 떼려도 뗄 수 없는 함 몸이라는 자각이 있을 때에 행복한 부부관계를 위하여 노력하게 되고 이러할 때에 부부는 행복할 수밖에 없고 행복한 부부 밑에서 행복한 자녀들이 키워지고 행복한 부부가 될 때에 부모님들은 진정으로 행복하게 만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가정
마 19:1-12 / 안효관 목사
예수님 주변에는 항상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좋아서 따라다니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병이 들어서 병을 고치고 싶어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또 예수님에게서 심오한 진리를 듣고 싶은 열망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주변에는 예수님을 미워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특별히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 등 당시 종교 지도자급에 속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행적이나 가르침을 몹시도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에게서 비방할 거리를 찾으려 했고, 예수님을 시험해서 어려움에 빠뜨리려고도 했습니다.
오늘 본문 3절에 나오는 바리새인들도 역시 예수님을 적대시 하던 무리들 가운데 일부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찾아와서 이렇게 질문합니다.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그들이 이렇게 질문한 것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당시에 이 문제는 서로 상반된 주장 때문에 혼란스러운 문제이긴 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바리새파에는 두 갈래의 사상적 흐름이 있었습니다. 힐렐 학파와 샴마이 학파가 그것입니다. 힐렐 학파는 율법을 폭넓게 해석했습니다. 반면 샴마이 학파에서는 율법을 아주 엄격해서 해석했습니다.
이혼에 관한 해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이혼에 관한 명확한 규정은 신명기 24:1-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내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으면 이혼 증서를 써주고 이혼할 수 있다”고 규정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수치스러운 일이냐 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 문제를 놓고 힐렐 학파에서는 ‘음란한 일은 물론이고 음식을 태우는 것, 남편에게 나쁜 평판을 일으키는 것’까지를 모두 수치스러운 일에 포함된다고 해석했습니다. <오늘날에 힐렐 학파의 주장을 따르면 이혼할 부부가 많은 것이다.>
반면 샴마이 학파에서는 이 수치되는 일을 엄격하게 해석해서 ‘이혼할 수 있는 유일한 사유는 오직 간음만이 해당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당시 유대교는 어느 주장을 더 따라겠습니까? 음란한 것은 물론이고 음식을 태우거나 남편에 조금이라도 손해되는 일을 하면 이혼할 수 있다는 힐렐 학파의 주장을 따라겠습니까? 아니면 오직 간음한 것 외에는 이혼할 수 없다는 샴마이 학파를 따랐겠습니까? 남성중심의 사회였던 것을 생각하면 그 답은 뻔합니다. 유대교 회당의 공식적인 입장은 샴마이 학파의 해석을 따라 간음한 경우에만 아내를 내쫓을 수 있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힐렐 학파의 해석이 적용되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남성 중심의 사회였기 때문에 남성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전이나 오늘날이나 남자들은 기회만 닿는다면 자기들 하고 싶은 대로 하려고 합니다. ‘아내가 죽으면 화장실에 가서 웃는다’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닐 것입니다.
■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동갑내기 60세 부부가 결혼 35주년을 축하하고 있었습니다. 파티가 열리고 있는 곳에 천사가 나타나 그 부부에게 소원을 하나씩 들어줄테니 말해보라고 말합니다. 부인이 먼저 소원을 말했습니다. 자기는 ‘모든 짐을 훌훌 털어 버리고 홀로 자유부인이 되어 세계일주 여행을 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자, 천사는 가지고 있던 지팡이를 확 흔들었습니다. 그러자 부인의 손에 세계일주 항공 여행표가 들려져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남편이 소원을 말했습니다. “저는 저보다 30살쯤 젊은 마누라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천사는 알았다는 듯이 또 지팡이를 흔들었습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30세의 젊은 여자가 생긴 것이 아니라, 남편이 90세 늙은이로 변해버렸습니다.
옛날 우리나라에서도 남자들은 기생집에 출입하고 첩을 두며 살면서도 당당했고, 여자들은 일부종사(一夫從事) 또는 불경이부(不更二夫)라고 해서 오직 한 남자만을 섬겨야 했습니다. 이 얼마나 불평등했습니까? 그런데도 그게 당연한 것처럼 여겼습니다. 남성 중심의 사회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이 “아무 연고를 무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은 일입니까?”라고 묻는 것은 ‘힐렐 학파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묻는 것은 만약 예수님께서 힐렐 학파의 이런 주장을 따른다면 바리새인들은 샴마이 학파의 주장으로 예수님을 공격할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님께서 샴마이 학파의 주장을 따른다면 그들은 힐렐 학파의 주장을 앞세워 예수님을 공격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셔도 그들은 예수님을 공격할 충분한 계획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을 하셨습니다.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잃어보지 못하였느냐?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곤경에 빠드려 꼬투리를 잡기 위해서 질문했던 바리새인들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대답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힐렐 학파의 주장을 따르느냐 샴마이 학파의 주장을 따르느냐 하는 어떤 이론을 앞세운 것이 아니라, 창세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성경의 말씀으로 대답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의 지혜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그리하셨습니다. 곤경에 빠뜨리려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할 말을 잃게 만드셨습니다. 한 번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바치지 않는 것이 옳습니까?”라고 묻는 물었습니다. 물론 그에 대한 대답을 얻고 싶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올무에 걸려 넘어지게 하려는 의도에서 던진 질문이었습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라고 말씀하시면 매국노라고 몰아붙일 것이고, 바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 당시의 정치권력에 반기를 든 정치범으로 몰아붙일 것입니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대답할 수 없는 딜렘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고 대답하심으로 대적자들의 말문을 막아버리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대답은 힐렐 학파의 주장을 다를 것이냐, 샴마이 학파의 주장을 따를 것이냐 하는 문제 앞에서, 예수님은 힐렐 학파의 주장도 따르지 않고, 그렇다고 샴마이 학파의 주장도 따르지 않았습니다. 오직 성경의 진리를 따르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가장 큰 사회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인 이혼에 대한 각론을 성경의 원리에 입각해서 아주 시원하게 풀어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종종 딜레마 속에서 고민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저렇게 할 수도 없는 상황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성경이 무어라고 말씀하시는지를 살펴 성경의 진리를 따른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자꾸만 현실에 적응하며 살도록 우리를 유혹합니다. 오늘날의 문화를 수용하도록 촉구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선택의 기준은 성경말씀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성경에 물어야 합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고, 어떤 것이 우리가 가야할 신앙인의 길인지를 성경에 묻고, 성경 속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은 당시 유행하는 두 학파의 해석을 놓고 자기들이 좋은 쪽으로 선택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시 유행하는 학파의 해석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하나님께서 본래 의도하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선택의 갈림길에서 어느 길이 옳은 것인가를 판단하기 어려울 때에 가장 먼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서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세미한 음성으로 다가올 때에, 그 말씀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선택한 우리의 선택이 우리를 최선의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게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따르는 길은 우선 당장 보기에는 손해 보는 것 같을지라도, 말씀을 따라 선택한 것이 잘했다는 결론은 반드시 얻게 될 것입니다.
이혼의 문제도 그렇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창세기 2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결혼의 원리를 들어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답을 하셨습니다. 창조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결혼의 원리는 “남자가 부모를 더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는 것”(창 2:24)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건강한 가정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1> 결혼은 부모로부터 떠나는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경제적으로 독립해야 합니다.
2>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결혼한 남편과 아내는 더 이상 둘이 아닙니다. 이제 하나입니다.
‘하나’라는 말은 서로 다름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2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돕는 배필’이 된다는 것입니다.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고 도와줌으로서 함께 한 몸으로 성숙해져가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차별도 없습니다. 남편은 여자를 지배하고 여자는 남자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사랑으로 감싸주고 사랑으로 서로에게 순종하는 아름다운 관계일 뿐입니다.
우리 인간은 모두가 부족한 존재들입니다. 완전한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부족하기에 그 부족한 것을 서로 도우며 살아가기 위해서 돕는 배필을 만나 결혼을 해서 한 몸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 미국의 유명한 잡지중의 하나인 ‘라이프’지에 한 늙은 부부의 사진이 실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 사진의 제목은 ‘아름다운 참사랑의 모습’이었습니다. ‘라이프’지의 기자가 영국을 방문했던 어느 날 지하철 대합실 식당에 앉아 늦은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데, 바로 앞자리에 연로하신 부부가 서로를 부축하면서 마치 소꿉놀이하는 어린아이들 같이 정답게 앉아 있었습니다. 남편은 비스킷을 주문하고, 아내는 차 한 잔을 주문했습니다. 연로한 부부는 옷차림으로 보아 퍽 가난한 부부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주문한 비스킷과 차가 나오자 남편은 천천히 비스킷을 먹기 시작했고, 아내는 뜨거운 차를 몇 모금 마시고 남편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그 눈동자에는 한없이 고요한 평화가 맴돌았습니다. 그때 남편은 먹던 비스킷의 반을 아내 앞으로 밀어놓더니 틀니를 뽑아 옆에 있는 냅킨으로 깨끗이 닦아서 아내에게 건네주었습니다. 아내는 그 틀니를 받아 자연스럽게 입에 넣고는 남편이 자신 앞으로 밀어준 비스킷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아내가 마시던 차를 마시며 맛있게 먹는 아내의 모습을 다정하게 바라보며 앉아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본 기자는 코끝이 찡하며 눈시울이 뜨거워져 자신도 모르게 그 아름다운 사랑의 모습을 사진기에 담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아름답고 그림 같은 노년을 함께 맞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바로 그런 아름다운 가정과 부부관계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사회는 이혼을 조장하고 부추기는 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불과 몇 년 전부터 ‘황혼이혼’이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늘그막에 부부가 이혼하는 것인데, 그게 안타까운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자들에게는 행복의 꿈을 이루는 일인 것처럼 매스컴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여자들이 그 동안 남자들의 권위적인 태도에 멍든 가슴으로 평생을 살아온 아픔도 있긴 하지만, 황혼이혼이라는 것이 마치 환상적인 아름다움과 꿈을 이루는 용기인 것처럼 포장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단면입니다.
요즈음 여자들이 무엇을 가장 행복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지 아십니까?
20대에는 공부는 못해도 얼굴이 이쁜 것이 최고의 행복이고, 30대에는 맨날 놀러 다니는데도 애들이 속 안 썩이고 공부 잘해주는 것이 행복이고, 40대에는 성형수술을 했는데도 티가 안 나는 것이 행복이고, 50대에는 먹기는 많이 먹는데 아랫배가 안 나오는 것이 행복이고, 60대에는 남편이 돈 많이 벌어놓고 일찍 죽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라고 한답니다.
우스개 소리이지만, 우리 사회의 모습입니다. ‘라이프’지 기자가 영국에서 보았던 그 아름다운 부부의 모습이 오늘날 우리 시대에 신선하고 감동적으로 들리는 것은 어쩌면 우리 사회의 불행인지 모릅니다. 그게 당연해야 하는데, 그게 이상한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부부의 하나됨과 행복을 깨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입니다. 부부 사이에 죄가 끼어들면 부부의 하나됨이 깨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행복은 점점 멀어져 갑니다.
옛날에 커다란 바위를 깨는 한 방법이 독특했습니다. 오늘날에야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해서 커다란 바위를 깨뜨리지만, 옛날에는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커다란 바위에 작은 구멍을 내고 그 안에 나무 막대기를 박아 둡니다. 그리고는 그 나무 막대기에 매일 물을 줍니다. 그러면 나무 막대기는 물을 먹고 부풀어서 그 크고 단단한 바위를 가를 수 있었습니다.
부부 사이에 들어온 작은 죄가 꼭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지만, 어느새 더 깊이에까지 파고 들어와서는 부부의 하나됨과 행복을 깨뜨려버립니다.
아담과 하와를 생각해 보세요. 처음 아담이 하와를 보았을 때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창 2:23) 아내 하와를 본 순간 ‘너’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바로 내 분신이요 나 자신의 일부라는 아름다운 고백이었습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자 그런 아름다운 고백은 온데 간데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죄를 지은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왜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따 먹었으냐?”고 물으시자 아담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세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죄가 둘 사이를 갈라놓지 않고 창세기 2장과 같은 사랑 안에 있었다면 이렇게 대답했어야 합니다.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인 나의 분신과 함께 하기 위해서 먹었습니다. 다 저의 잘못입니다.” 그러나 죄가 둘 사이를 갈라놓자, 아담은 하와를 ‘저 여자’라고 부릅니다. 더 이상 나의 분신이 아닙니다. 이제는 ‘웬수 같은 저 여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여러분, 왜 이혼을 하려고 합니까? 왜 이혼하는 가정들이 많아집니까? 서로의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돕는 배필로 살아가면 절대로 이혼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죄된 우리 인간은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서서는 남편이나 아내가 내가 제시한 기준치에 맞춰주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기준치에 와주지 않으면 화가 납니다. 그러다가 아담과 같이 ‘저 웬수 같은 여자’ ‘웬수 같은 남자’가 되어버립니다. 그러기에 이혼을 하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의 결혼 원리에 입각해서 ‘한 몸을 이룬 부부는 이제 둘이 아니라 하나이기 때문에 이혼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되묻습니다. “그러면 왜 모세는 이혼증서를 써주어서 내어버리라고 명하였습니까?” 이 말은 그들이 논쟁의 본문으로 삼았던 신명기 24장의 말씀을 빗대서 한 말입니다. 신명기 24장에는 분명하게 ‘아내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을 때에는 이혼증서를 써주고 이혼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신명기 24장에서 이혼증서를 써 주라고 하신 것은 남자들이 언제든지 여자를 내쫓을 방편으로 사용하도록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남자들이 맘만 먹으면 이혼하고 여자를 내쫓을 수 있는 사회적인 문화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남성들의 횡포를 방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로 이혼증서를 써 주라고 하신 것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라고 묻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본래는 이혼하는 것이 아닌데, 우리 인간의 완악함은 어떻게 해서든지 조건만 되면 이혼하려고 덤벼드니까, 남자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이혼하는 횡포를 방지하기 위해서 이혼 조건을 조금 까다롭게 해서 가능하면 이혼을 하지 못하도록 하려고 이혼 증서를 주라고 한 것뿐입니다. 이혼을 조장하기 위해서 주신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진리는 우리에게 이혼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혼은 우리 인간의 욕망과 죄가 만들어낸 것일 뿐입니다.
우리 이렇게 해 봅시다. 두 손의 손가락을 쫙 편 다음 서로 마주쳐 봅시다. 그리고 중지들을 가운데로 구부려 넣고 나머지 손가락은 서로 맞댑니다. 그리고 엄지를 떼었다 놓았다 하면서 따라합니다. “부모님 없이도 살 수는 있고.” 부모님이 우리 곁을 떠나가도 우리는 세상 사는 이치를 터득해 잘들 살아갑니다. 다음은 집게손가락을 떼었다 놓았다 하면서 “친구 없이도 살 수 있고.” 새끼손가락을 떼었다 놓았다 하면서 “자식 없이도 살 순 있어도.” 우리는 친구와 자식 없이도 세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약지를 떼었다 놓았다 해보세요. 약지는 죽어도 안 떨어집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 없이는(당신과 떨어져서는) 절대로 못살아.”
여러분, 아무도 내 속을 썩이는 남편, 아내라 하더라도 사랑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부족한 것이 있으면 탓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그 부족한 것을 내가 채워가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를 부부로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틀니를 뽑아 서로의 입에 끼워주어야만 음식을 먹을 수 있고, 비스킷을 단 하나밖에 살 수 없어 나눠서 먹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 서로를 배려하고 도와주며 사는 것이 행복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든 식구들의 가정에 이런 행복과 기쁨이 가득하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결혼과 이혼
마 19:1-12 / 이상호 목사
결혼은 인륜지대사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도 이혼율이 높아져가고 있습니다. 결혼은 우리 인생사에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여자가 누구와 결혼하는가 하는 것은 그 일생을 좌우하는 문제가 됩니다. 남편이 대통령이 되면 영부인이 되는 것이고 목사에게 시집가면 사모가 되며 남편이 사장이 되면 사모님 칭호를 듣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결혼 잘못하면 그 평생을 망치게 됩니다. 이혼이요 ? 어쩌면 이혼할 바에야 결혼 안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도 합니다. 잠언 21:9절에 보면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말씀합니다. 비록 가난하게 혼자 살지라도 큰 부자로 다투면서 사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이지요. 매일 싸우면서 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힘들고 불행한 삶이겠습니까?
결혼제도는 세상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후 하나님이 직접 세우신 제도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직접 주례하시어 그들을 결혼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축복하시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8 상)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첫 번 기적을 행하신 곳이 가나 혼인잔치였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 19 : 5 - 6) 하십니다. 결혼을 만드신 분은 이혼을 금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가 연합하는 관계를 설명하여 오묘한 진리를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엡 5:31-32). 부부관계는 다름 아닌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와 같다는 것입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엡 5:22-23). 우리 성도생활의 첫번째 준칙은 하나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교회를 위하여 자기 몸을 주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것은 남편이 어떻게 아내를 사랑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 5:25). 신자는 교회에서는 교회천국을 이루어야 하고 가정에 돌아가서는 가정천국을 이루어야 합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세우신 결혼제도에 대한 바른 깨달음이 있기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은 결혼식을 할 때, 주례목사님이 가장 많이 본문으로 삼는 구절중에 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목적으로 묻는 말씀의 답변입니다.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 있었던 이혼의 문제와 율법에 나타난 이혼증서에 관한 질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혼에 관한 문제였던 것입니다.
10년 전만 해도 이혼이라는 문제가 우리나라에서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2,000년이 지나면서 점점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최근의 보도를 보면 50대에서 3%인 이혼율이 40대에서는 5%이고 20대에서는 세쌍 중 한 쌍이 이혼하는 것으로 나왔습니다. 신혼여행을 가서 싸우고 돌아온 부부가 무려 49%나 된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서 우리도 본문의 바리새인들과 같이 정당한 이혼의 사유를 내어놓고 주님 정당합니다. 하고 따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바리새인의 관심사는 결혼과 이혼이 하나님이 주시고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이라는 근본적인 원리에서 너무나 벗어난 의도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은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나올 때의 예수님께 대한 성경 어디를 보아도 그들이 예수님께 은혜 받기 위해 나왔다는 말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들이 예수님께 나온 동기는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교훈은
1. 성도는 성경의 원리대로 살아야 합니다.
1) 아내를 버려도 되는 이유에 대해 바리새인들이 묻습니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첫 번째 질문은 다시 말하면 "구실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은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이혼 결혼 문제는 오늘의 우리 사회의 이혼이나 결혼 문제처럼 아주 예민하고 중요한 주제였습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 바리새인들은 힐레파와 샴마이파로 나뉘어 이혼 문제에 대해 논쟁하고 있었습니다. 힐레파에서는 여자가 부도덕할 뿐 아니라 여자답지 않으면 이혼 조건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여자가 요리를 못한다든가, 밥을 태운다든가, 아이를 가지지 못한다든가, 심지어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 샴마이파에서는 이혼 할 수 있는 조건은 오직 한가지 여자가 바람을 피웠을 경우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이 논쟁 끝에 이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시험했던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아주 정확하고 지혜로운 말씀으로 대답을 하셨습니다.
“성경을 읽지 못하였느냐?” 하시면서 창조때부터 가정의 기초가 무엇인지를 설명해주시고 있습니다.(4-6절)
(4-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 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 하시니"
이 말씀이 어디에 나오는 말씀입니까? 창세기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혼 문제를 전통에 의해서 풀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푸신 것입니다. 마4:4이후에 사탄의 시험을 받으실 때도 예수님은 말씀으로 문제를 해결하셨음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삶에서 문제와 난제에 부딪히게 될 때에는 그 기준점을 어디에 두어야 하겠습니까? 네, 바로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경이 뭐라하든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하니까 나도 할 수 없이 따라간다 하면서 적당하게 살아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를 합리화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가 힘드니까 적당히 타협하고 해석해서 행동합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은 여기서 예수님처럼 전통이나 율법이나 습관을 따라서 해석하지 말고 성경이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성경의 원리로 돌아가야 하는 줄로 믿습니다.
말씀에 의하면 이혼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들의 관심은 어떻게 합법적으로 이혼할 수 있을까? 입니다. 그러한 그들의 헛된 관심사를 주님께서 묵과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시대에 방송이나 드라마, 뉴스 등을 통하여 주입되고 있는 결혼에 대한 시각은 너무나 이혼이나 재혼 등이 자연스럽게 보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의 말씀에 기준을 두고 결혼관을 세워야 하겠습니다.
2. 성경에서는 이혼은 어떤 경우에도 안된다는 근본적인 입장을 가르칩니다.
예수님은 모세가 이혼증서를 주어서 아내를 버리라고 한 것은 사람들의 완악함 때문이며 하나님의 원래의 의도는 그렇지 않음을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결혼관과 가정에 관한 생각을 다시금 세워주는 말씀으로 받으시고 이제는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가정과 부부의 관계를 세워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대부분 이혼의 동기는 무엇입니까? 죄입니다. 이기심입니다. 그 마음속에 어떤 이기적인 동기가 있으니까? 배우자를 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럴듯하게 죄는 숨기고 그럴듯한 이유를 내세웁니다. 예수님은 모세가 이혼 증서를 주라고 한 것은 왜입니까?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이 말은 모세의 본래의 뜻은 이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혼 증서는 남편이 정당한 사유없이 아내를 마음대로 버리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이며, 여성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하여 만든 장치가 바로 이혼증서였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혼 증서를 써주는 이유는 이혼의 합리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여자를 보호해 주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이혼 증서가 없이 그냥 여자를 버리면 그 여자는 간음죄에 해당하게 되어 돌에 맞아 죽습니다. 그래서 합리적으로 여자를 보호해 주고 재혼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기 위해 이혼 증서를 써 주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다른 여자를 얻기 위한 방편으로 이혼 증서를 써주라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자기 편한대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나 편리한 대로 성경을 해석하면 안됩니다. 가정을 향한 성경의 원리가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가정이란 남녀가 만나 함께 사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의 창조하신 기초적인 공동체임을 말씀하십니다. 부부는 인간의 자의적인 선택에 의해 만나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짝지워 주신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깨뜨릴 수 없는 관계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여 한 몸이 되는 것, 분리될 수 없는 친밀감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창조계획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성경의 원리가 무엇인가? 말씀이 가르쳐 주시는대로 가정을 지켜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세상 풍속이 우리의 가정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시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 믿음의 원리를 따라 가정을 세워 나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부득불 이혼할 수 밖에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마 19:9). 배우자가 음행을 하여 부부의 정절과 언약을 어겼을 때입니다. 그럴지라도 용서할 수 있으면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성경적 결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결혼이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가 교회천국과 가정천국을 이루어 영원한 천국에서도 상급 받는 복된 성도들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