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 군자금 모금의 문중적 기반과 활동*
- 論山 魯城尹氏를 중심으로-
박걸순**
1. 머리말
2. 大韓建國團의 조직과 활동
1) 大韓建國團의 조직
2) 大韓建國團의 활동
3. 개별적 군자금 모금 활동
1) 尹太炳의 모금 활동
2) 尹喬炳의 모금 활동
3) 尹相肯의 모금 활동
4. 맺음말
1. 머리말
일제 강점기의 항일투쟁은 혈연과 지연공동체를 배경으로 한 문중적 기반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는 척족 인맥을 중심으로 전개된 안동 유림들의 도만과 항일투쟁을 들 수 있다. 또한 가문 차원으로는 이회영의 육형제가, 문중 차원의 개화와 독립운동의 사례로는 山東申氏가 주목되었다. 이럴 경우, 항일투쟁은 혈연과 동향 의식으로 인해 더욱 엄격한 결속력과 지속성을 지닌다. 또한 이들이 해외로 망명할 경우에도 국내의 혈연적 기반과 연계가 꾸준히 추구되었다.
국외에서와는 달리 국내에서의 문중적 항일투쟁은 일제의 직접 통치라는 여건 때문에 용이하지는 않았으나 그 사례를 찾기가 어렵지는 않다. 충남의 경우는 종족 마을이라는 혈연과 지연을 배경으로 대종교라는 종교적 유대를 형성하고, 야학이라는 공동체적 공간을 중심으로 부여지방의 민족운동을 주도한 長亭의 晋州姜氏가 대표적이다. 또한 은진송씨와의 혈연과 학연 형성을 배경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한 대전지역의 慶州金氏(松崖公派)도 사례로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금번 충남대학교 마을연구단의 3차년도 연구 대상인 충남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의 魯城尹氏도 그러한 사례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魯城尹氏는 16세기 중반 尹昌世가 노성(논산) 비봉산 기슭에 부친의 묘소를 정하고 자신도 마을을 이루어 정착하면서 세거하기 시작한 坡平尹氏 魯宗派를 일컫는다. 노성윤씨는 17세기에 이르러서는 연산의 광산김씨, 회덕의 은진송씨와 함께 ‘湖西 三大族’으로 칭할 만큼 명문거족으로 성장하였다. 이처럼 노성윤씨가 입향후 단기간에 명문거족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윤돈과 윤창세의 처족인 문화유씨와 청주경씨의 재정적 기반에 힘입은 바 크다. 노성윤씨는 은진송씨와는 ‘懷泥紛爭’, 광산김씨와는 ‘連泥紛爭’이라 일컬어지는 노․소론간 분쟁을 빚었다. 특히 논산지방에서는 18세기에 이르러 연산의 광산김씨가 지배하는 ‘노론의 바다’에 노성의 파평윤씨가 ‘소론의 섬’을 만들며 양대 축으로 세력을 키워나갔다. 이들의 경쟁은 향론을 장악하고 문중의 위상을 제고하기 위한 서원의 남설 현상으로 극명히 드러났다. 일제 강점기에도 병사리와 장구리는 ‘동족마을’로 파악되었다. 병사리에는 노성윤씨 외에 18세기 중엽에 입향하여 온 수원백씨도 세거하며 근대 민족운동의 공간에서 함께 활동하기도 하였다.
노성윤씨가 근대 민족운동의 전면에 나서는 것은 1893년 12월 수령의 봉건적 탐학에 분개하여 봉기한 魯城民擾로부터 시작된다. 이 때 민중들은 관아를 습격하고 현감을 축출하는 등 격렬한 투쟁을 벌였다. 이 때 장두를 포함한 主論者들은 大姓인 노성윤씨들이었으나, 이들은 피신하여 처벌을 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동참한 수원백씨 중 白允相․白化西 등은 피체되어 처벌을 당하였다.
魯城民擾의 여진이 남아 있고, 동학농민군이 활발히 활동하던 무렵, 대원군의 近臣인 前 校理 宋廷燮이 노성현의 진사 尹滋臣에게 국왕의 옥새가 찍힌 밀지를 가지고 왔다. 이 밀지는 노성윤씨의 창의를 촉구하는 것으로서, 고종이 동학농민군과 보수유림을 동원하여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려 하였음을 잘 보여준다. 이 계획은 준비 단계에서 실패로 끝났으나, 밀지의 존재는 당시 노성윤씨의 위상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1운동 직후인 1919~1920년간 충남 일대에서는 군자금 모금 활동이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비밀결사인 大韓建國團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는데 노성윤씨들이 주요 인물로서 활동하였다. 이들의 군자금 모금 활동은 대동단과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金庸源이나 대한(북로)군정서를 이끈 金佐鎭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는데, 이들은 대전과 홍성 출신이란 지연과 혈연적 배경을 바탕으로 연계하고 있다. 한편 같은 시기이나 이들과는 별개로 임시정부와 연계하며 군자금 모금 활동을 벌인 尹喬炳이나 尹相肯의 활동도 주목된다.
본고는 이 같은 노성윤씨의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정리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에 관하여는 부분적으로 검토한 선행 논고가 있으나, 이들의 항일투쟁은 개인적 활동을 넘어 노성윤씨의 문중적 기반, 나아가 지역적 공간으로 외연을 확대하여 이해하고 구조화할 필요가 있다고 사료된다. 본고는 이를 주목하고 분석하여 일제 강점기 문중을 기반으로 한 군자금 모금 활동의 사례로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2. 大韓建國團의 조직과 활동
1) 大韓建國團의 조직
1921년 5월, ≪東亞日報≫와 ≪獨立新聞≫은 4월에 피체된 大韓建國團員에 대한 기사를 보도하였다. 이 기사에 의하면 대한독립단은 민심을 고취하고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충청도 인사를 중심으로 조직되었으며, 단원은 尹泰炳을 단장으로 하여 尹相起․趙炳彩․白南式(이상 論山)․李商雪(永同)․金世鎭(淸州) 등 6명임을 알 수 있다.
이 때 밝혀진 大韓建國團員은 모두 후술할 金庸源의 휘하에서 활동했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1년 뒤인 1922년 5월, ≪東亞日報≫와 ≪獨立新聞≫은 ‘軍政府員’ 또는 ‘金佐鎭의 部下’ 9명이 控訴를 신립하였다는 기사를 보도하였다. 9명의 명단은 金瑛鎭․金明秀․柳冀宗․李完伯․李昌鎬․金伯順․盧載喆․趙炳彩․李相雪로서, 1920년부터 김좌진의 부하가 되어 무기를 지니고 이듬해 봄까지 군자금을 모금하여 만주로 보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용원의 부하들이 중심이 되어 대한독립단이란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김좌진의 군정부를 후원하였다는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판결 「이유」에서 단서를 얻을 수 있다.
김영진․조병채는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고 중국 길림에 있는 조선독립운동 기관인 길림군정부의 군무 독판겸 총사령관이라는 김좌진 등의 행동에 조력을 하여 조선독립운동을 달성시킬 목적으로 동지인 윤상기․이치국․백남식․윤태병 등과 공모하고 조선 각지의 부호들로 하여금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제공하도록 하여 이를 김좌진 등에 보낼 것을 계획하고 피고 노재철․김명수․한기종․이완백․이창호․김백순․이상설 등은 모두 이에 찬동 협력할 것을 결의하고 …
즉, 김영진과 조병채가 이 조직의 중심인물로서 군자금 모금을 주도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이들은 김좌진과 인척 관계이거나 이전부터 잘 알던 사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좌진은 1919년 6월, 이전부터 알고 있던 조병채에게 부하인 千景洙를 보내 군자금 모금에 대한 협조를 부탁하였고, 조병채 등이 이에 부응하여 이해 10월(음) 논산군 光石面 井洞里에 거주하던 윤상기의 집에서 김영진․김세진․조병채․신현창 등 동지들이 모여 비밀결사로서 대한건국단을 조직하였던 것이다.
… 피고 조병채에 대한 제2회 예심조서 중에 김좌진은 일찍이 서로 아는 사이인 바 동인이 중국 길림성에서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군정부의 군무 독판겸 총사령관으로서 자기는 대정 8년 봄 이래로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여 왔던바 동년 음력 6월 경 김좌진의 부하라는 천경수라는 자가 찾아와 말하기를 김좌진 등은 동지와 더불어 조선의 독립운동에 모든 힘을 다하고 있는 바, 군자금이 결핍하고 있으므로 동지를 모집하여 조선 독립을 위한 군자금을 모집하여 이것을 군정부로 보내달라는 전갈이 있었다고 하므로 즉시 이를 승낙하였다. … 대정 8년 음력 10월 중 윤상기 집에서 김영진․김세진 등과 만났을 때 그전에 국외에 있던 김영진으로부터 천경수를 심부름시켜 나에게 김세진은 극력 동지와 함께 조선독립운동에 힘을 다하고 있으므로 국내 동포는 이 점을 헤아려 합심 협력, 국권회복에 노력하도록 바라며, 각자 그 동지들에게 그 취지를 선전시켜 금액의 다소를 불구하고 운동자금을 모집하여 보내 줄 것을 바란다고 전달한 것을 위의 김영진 등에게 말하였던 바, 그들은 모두 이에 찬동하고 자금 모집 방법에 대해 협의하고 며칠 후에 백남식, 윤태병 등 수십 명의 가입 희망자가 속출하여 비밀단체를 조직하고 김영진은 백남식에게 권총을 빌려주어 독립운동 자금 모집에 종사시켰다 …
김좌진은 국내에서 활동할 때에도 군자금 모금에 주력하였다. 그런데 그가 만주로 건너가 활동할 당시에는 일제의 간도 침략으로 자금 조달이 원활하지 못하자 고향 인근의 지역적 연고와, 김영진․김세진이 再從이란 혈연적 관계를 통해 국내에서의 모금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김좌진은 1차로 부하인 천경세를 조병채에게 보내 군자금 모금을 부탁하였고, 김영진을 재차 파견하여 대한건국단을 조직하게 한 것이다. 이 판결문상에는 비밀결사의 명칭이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大韓建國團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바 없다.
대한건국단의 정확한 규모는 알 수는 없다. 위의 판결문에는 ‘수십 명의 가입 희망자가 속출’하였다고 하고 있으나, 그 규모는 김영진 등의 판결문과, 강견중 등의 판결문에 등장하는 25명을 전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조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21년 4월, 대한건국단원 6명이 피체되었다. 대한건국단의 실체는 이상설의 피체로 드러났는데, 이들은 일제의 모진 고문에도 불구하고 ‘혀를 깨물며’ 조직에 대해 함구하였으나, 대한건국단은 이들의 피체로 말미암아 더 이상 활동할 수 없었다. 이들의 피체 과정에서 주목되는 사실이 있다. 즉, 윤태병과 백남식은 충북에서, 윤상기와 김세진은 경기도 경찰부에서, 이상설은 동대문서에서, 조병채는 경남에서 피체되었는데, 이는 이들이 전국을 대상으로 개별적으로 활동을 시도하였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들의 활동이 1920년말로 그치고 있어 사실상 그 이후에는 단원들이 활동을 위해 전국에 분포하였다기 보다는 피신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이로써 볼 때 대한건국단은 김용원의 군자금 모금 조직이 그가 상해로 망명하기 직전에 김좌진과 연계되며 대한건국단으로 확대 발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만, 대한건국단원의 활동이 김용원이 주도할 당시의 활동과 중복되는 것이 4건이 있어 혼선을 초래케 한다. 그런데 이는 그들이 이전에 김용원의 부하로서 활동했던 것까지 심문이나 공판에서 밝혀졌기 때문에 함께 적시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그러나 일제가 단장을 尹太炳으로 파악하고, 尹相起의 집에서 동지들이 모여 대한건국단을 조직하였다는 사실은 대한건국단에서 노성윤씨가 차지하는 비중을 반증하는 것으로도 짐작된다. 한편 이들이 비밀결사의 명칭으로서 ‘大韓’을 표방한 것은 당연하나, ‘建國’을 칭한 것은 선구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2) 大韓建國團의 활동
대한건국단은 1919년 6월(음) 김좌진이 파견한 특사와 연계되며 이 해 10월(음) 조직되었는데, 이들은 조직과 더불어 활동을 개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대한건국단원의 군자금 모금 활동은 1919년 11월 19일 白南式과 申鉉彰이 대전군 기성면 가수원리의 徐丙冑의 집에 가서 350원을 모금한 것을 시작으로 1921년 초까지 20회에 걸쳐 진행되었다. 그런데 이들의 모금 활동은 서병주로부터 모금하는 경우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대부분 권총을 휴대하고 위압적 행동을 동원하는 형태를 보인다. 즉, 대상자를 포박하여 권총을 겨누거나, 대상자나 그 가족들을 위협 또는 폭행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모금 대상자를 잘 아는 단원은 동행하지 않았다. 예컨대 공주의 인영태로부터 모금할 때, 그를 잘 알고 있던 조병채는 빠지고 대신 지리에 밝은 임종구가 참여하였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대한건국단의 군자금 모금 활동 형태는 김용원이 주도한 경우와 유사하나, 인척관계를 이용하여 무기나 폭력을 동원하지 않았던 윤교병의 경우와는 확연히 구별된다.
이들이 사용했던 권총은 1919년 11월(음) 경성부에서 김용원이 김영진에게 준 것이다. 따라서 전술한 바와 같이 이강공 탈출 기도가 실패한 뒤 김용원이 채근병에게 맡겨 둔 권총을 김영진에게로 넘긴 것으로 보인다. 권총은 김영진과 조병채가 관리하며 단원들의 군자금 모금 활동 때 이용하도록 한 것인데, 김영진은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권총을 김형만이나 김윤국의 집에 은닉해 두기도 하였다. 단원들은 모금 대상자에게 자신들이 지닌 권총을 보여주며 최근 상해로부터 지급된 신식 권총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예컨대 백남식이 일제의 심문 때 공주의 인영태에게 모금을 할 당시 “ … 나는 주인에게 요즘 상해 임시정부원이라고 하며 돌아다니는 사람은 모두 구식 권총을 가졌는데 이것은 이같이 신식 권총이며 최근 상해로부터 도착 분배한 것이다. 이것만 보아도 알 터이니 신용하고 돈을 내라고 하였다.”라고 진술한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구식 권총을 지니고 임시정부를 사칭하는 사람들과의 차별성을 강조하며, 자신들이 지닌 신식 권총을 임시정부의 信標로 활용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비밀리에 대상자의 집을 방문하여 모금하기도 하였으나, 사전에 군자금 모금 요구서 등의 문서를 우송하거나 인편으로 보낸 후 지정한 날짜에 가서 받아오기도 하였다. 1920년 12월 부여의 이규석에게 모금할 때에는 노재철이 1개월 전에 미리 臨時政府經理局警告書와 臨時政府總幹部諭告를 우송한 후 방문한 것이었고, 부여의 김영만에게 모금할 때에도 역시 노재철이 경고문 등을 우송해 둔 뒤 모금하러 간 것이었다. 이들은 대상자가 현금이 없다고 하면 납부지원서를 받아 후일을 기약해 두기도 하였다.
대한건국단원의 활동은 대부분이 군자금 모금 활동이지만, 간혹 밀고자를 응징하려고도 하였다. 즉, 조병채는 자신을 임시정부원으로서 강도짓을 한다고 일경에 밀고한 부여군 규암면 호암리에 사는 林秉鎭을 만나 그를 힐책하며 응징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들이 활동시 지녔던 臨時政府經理局警告書․特派員證․納金命令書․軍政府領收證․軍政府褒賞狀․大韓政府領收證․臨時政府總幹部諭告․軍資金請求命令書 등 여러 가지 문건은 이들의 성격을 아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고 여겨진다. 즉, 임시정부와 군정부를 동시에 연계하는 양상은 당시 임시정부와 만주 독립군과의 관계 설정과 관련하여 주목하여야 한다. 즉, 북간도 大韓正義團의 산하 무장단체인 大韓軍政會는 대종교 계통의 민족주의자와 신민회 계통의 민족주의자들이 합작한 독립군 단체로서, 1919년 10월 大韓軍政府로 통합되었다. 이 때 김좌진은 신민회 계통으로서 大韓軍政府의 독립군을 전적으로 책임지고 창설하고 사령관을 맡았다. 大韓軍政府는 창설 직후 임시정부에 군정부의 성립을 보고하고 임시정부 산하의 독립군 군사기관으로 공인해 줄 것을 신청하였다. 이에 대해 임시정부는 이해 12월, 大韓軍政府를 大韓軍政署로 변경할 것을 조건으로 승낙하였다. 따라서 대한건국단원이 임시정부나 군정부 관련 문서를 동시에 휴대한다는 것은 2개 기관에서 별개로 발행한 문서가 아니라, 사실상 임시정부와 군정서를 동일시 한 하나의 문서로 간주해도 무방할 듯하다.
김좌진이 이끄는 대한군정부(서)는 독립군의 무기 구입과 식량 등 군수 물자 조달을 위해 막대한 군자금이 필요하였다. 대한군정부(서)의 군자금은 간도 거주 동포로부터의 징수금과 국내로부터의 의연금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거주 동포들에게 재력에 따라 출연하도록 하되, 부담을 경감시키려고 분납 등의 방법으로 배려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국내에도 ‘募捐隊’를 파견하였다. 예컨대 李杰, 許精, 李鴻來, 金光淑 등이 군자금 모금을 위해 1920년 8월 말 함경북도에 파견되었다가 9월 9일 延社警察隊와 교전하고 돌아간 적이 있다. 이 때 그들이 지녔던 군자금 모금 관련 문서는 매우 다양하여 군자금 모금 양태를 잘 보여줄 뿐만 아니라, 대한건국단원이 지녔던 문서의 일단을 추측할 수 있게 한다. 즉, 그들은 군자금을 받고 대상자에게 영수증인 「收納票」를 주었다. 大韓軍政府財務署義捐局 명의의 「收納票」에 기록된 내용은 금액과, 이를 ‘大韓獨立에 關한 準備金’으로 영수한다는 내용, ‘國家 光復 大業을 爲하야 盡力하는 誠忠을 嘉尙하야 此票를 交付’한다는 사실을 기재한 것이다. 그런데 「收納票」는 大韓民國 元年 발행으로 되어 있어 1919년부터 군자금 모금 활동 때 사용했음을 알려주며, 대한건국단의 활동 시기와도 일치하고 있다. 또한 李杰 등이 지녔던 문서인 「感謝狀」에는 ‘右人이 光復에 軍資金 ○○圓을 捐約했으므로 玆에 특히 感謝狀을 수여함’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대한건국단원이 소지하였던 軍政府褒賞狀과 같은 것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대한건국단원들이 지녔던 군자금 관련 문서는 천경세가 1919년 10월(음) 초에 다시 와서 조병채에게 전달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천경세가 전달한 문서가 부족하자 직접 군정서와 재무서와 인장을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였다.
피고 김명수에 대한 동 신문조서 중, 대정 10년 음력 3월 초순 경에 유기종이 와서 이 근처에 가정부 재무총장이 왔는바 나에게 가정부의 도장을 알선해 오라는데 당신이 새겨달라고 하고, 또 宋迪憲(김영진의 이명:필자)이라는 자가 찾아와서 하는 말이 가정부에 돈을 바칠 사람들이 많은 바 이를 받고 처리할 受領에 필요한 인장이 없어 이를 수령할 수 없으니 가정부에서 사용하는 인장을 조각하여 달라고 부탁하므로 나는 이를 승낙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유기종으로부터 印材를 받아 군정서의 인장과 재무서의 인장을 조각한 바, 유기종이 백노지(갱지)를 지참하여 半紙보다 작게 잘라서 5장에 그 인장을 찍은 다음에 그 도장을 아궁이에서 불태워 버렸다 …
이에 의하면 군정서와 재무서 인장의 조각은 김영진의 지시로 유기종이 김명수를 소개하여 진행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위 판결문에 보이는 ‘가정부의 재무총장’이라는 인물은 김영진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김영진은 앞의 「朝鮮軍政府 系統表」에서도 재무총장으로 파악된 바 있는데, 임시정부의 재무총장이라기 보다는 김좌진 휘하의 군자금 모금 책임자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그런데 군자금 모금 책임자가 국내에서 임시정부나 군정부(부)의 인장을 새겨 사용한 것은 드믄 사례라 할 수 있다. 함경북도에서 활동했던 李杰 등이 소지했던 문건을 보면 적은 수가 아니었다. 예컨대 그들은 군자금 영수증인 「收納票」 16綴을 소지하고 있었는데, 각 綴에는 30매의 수납표가 묶여 있었으니(그 중 하나의 철에는 50매가 묶여 있음) 모두 500매의 영수증을 지니고 있던 셈이며, 군자금 납부를 명하는 「部令」 306매, 「督促書」 106매, 「軍券」 101매, 「感謝狀」 9매 등 다양하고 많은 수의 문건을 소지하고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김좌진의 특사인 천경세가 조병채에게 건넨 군자금 모금 관련 문서의 종류나 수량이 얼마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대한건국단의 실제적 지도자인 김영진과 김좌진의 관계를 고려하면 김영진이 인장을 새겨 사용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었다고 보인다. 또한 김영진의 말대로 군자금을 낼 사람이 많은데 영수증이 없어 돈을 받지 못하여 인장을 새긴 것이라면 그들의 활동이 활발하였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대한건국단의 활동과 관련하여 의문이 드는 것은 왜 이들의 주요 활동지역이 부여에 집중되고, 활동시기가 1920년 말로 종료되는가 하는 점이다. 대한건국단의 군자금 모금 활동은 충남 대전․논산․금산․보령과 전북 익산에서도 있었고, 경남 거창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들의 활동 내역을 보면 20건 중 12회가 부여지역에 집중되어 있고, 1920년 말에 김영진과 노재철이 주축이 되어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활동 무대가 부여지방에 집중된 것은 이 지역 활동의 주역인 노재철을 비롯하여 그와 함께 활동한 이창호와 김백순이 부여군 규암면 출신이라서 지역적 연고가 있었고 사정에 밝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대한건국단원의 활동이 1920년 말 경으로 그치는 것은 김좌진이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 승리 이후 노령으로 부대를 이동하는 독립군의 변화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1921년 4월, 주요 단원인 조병채와 백남식 등이 피체되어 조직이 발각된 것도 이유의 하나라 할 수 있다. 각종 기록에 나타난 대한건국단원의 군자금 모금 활동 내역은 다음과 같다.
<표 1> 大韓建國團의 군자금 모금 활동 내역
일자 |
지역 |
대상 |
모금액 |
참여자 |
1919. 11 |
충남 대전 |
徐丙冑 |
350원 |
백남식, 신현창 |
1920. 1 |
충남 논산 |
金仁泰 |
실패 |
조병채 외 1인 |
1920. 1 |
충남 공주 |
印榮台 |
50원 |
백남식, 강중현, 임종구 |
1920. 3 |
충남 금산 |
宋錫驥 |
100원 |
조병채, 이상설, 백남식, 윤태병 |
1920. 3 |
충남 금산 |
尹相應 |
142원 |
상동 |
1920. 5 |
충남 보령 |
黃五顯 |
860원 |
김영진, 김명수, 이광호 |
1920. 10 |
충남 부여 |
任性宰 |
100원 |
김영진(100원 납부 지원서) |
1920. 11 |
충남 부여 |
李石津 |
실패 |
노재철, 김백순(1천원 납부 지원서) |
1920. 12 |
충남 부여 |
尹相玉 |
100원 |
노재철 |
1920. 12 |
충남 부여 |
李圭信 |
100원 |
노재철, 윤상옥(200원 납부 지원서) |
1920. 12 |
전북 익산 |
李圭錫 |
실패 |
(김영진 지시) 노재철(윤교병이 모금) |
1920. 12 |
충남 부여 |
朴昌奎 |
실패 |
노재철, 이창호, 이치국(500원 납부 지원서) |
1920. 12 |
충남 부여 |
金領滿 |
실패 |
(김영진 지시) 노재철, 이치국(400원 납부 지원서) |
1920. 12 |
충남 부여 |
李台憲 |
실패 |
(김영진 지시) 노재철, 이치국(1천원 납부 지원서) |
1920. 12 |
충남 부여 |
金明奎 |
실패 |
(김영진 지시) 노재철 |
1920. 12 |
충남 부여 |
廉健洙 |
실패 |
노재철, 이치국(200원 납부 지원서) |
1920. 12 |
충남 부여 |
金在哲 |
300원 |
(김영진 지시) 노재철, 이창호, 이치국 |
1920. 12 |
충남 부여 |
朴南奎 |
실패 |
상동 |
1920. 12 |
충남 부여 |
崔文基 |
실패? |
김영진, 유기종 |
1921. 2 |
경남 거창 |
? |
? |
조병채, 양헌석, 이병규 |
3. 개별적 군자금 모금 활동
1) 尹太炳의 모금 활동
3․1운동 직후 충남 일원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이 벌어지는데, 이는 김용원에 의해 주도적으로 전개되었다. 김용원은 3․1운동 때 향리인 대전에 있었는데, ‘만세 소동’이 별 성과가 없이 끝나자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 친구인 이면호의 권유에 따라 대동단에 가입하였다. 그는 1919년 11월 全協 등과 李堈公의 탈출을 주도하다가 실패하자 피신하여 향리에 은거하고 있었다. 그는 1920년 3월 아내와 동지들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는 향리에 은거하는 사이에 동지들을 모아 충청도 논산과 공주, 금산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이 때 병사리의 尹太炳, 尹相起 등 노성윤씨와 백남식으로 대표되는 수원백씨가 주요 인물로 활동하였다. 김용원의 군자금 모금 주도 활동에 대하여는 다음의 김용원 판결문이 참고 된다.
피고인은 대정 8년 중 조선 독립을 위하여 계획된 상해 임시정부의 별동 단체로서 조선 안의 불령자들로 조직된 대동단이라는 단체에 가입하여 그 간부로서 활동 중, 그 운동자금이 궁핍하여 조선 내 각지의 부호에게서 돈을 강탈하여 그 자금을 마련할 것을 기도하고, 그 해 음력 11월 중에 경성부 내에서 金鎰 곧 金暎鎭에게 권총 1정을 교부하고 그 사람으로 하여금 白南式 외 수명에게 권총을 위협의 도구로 삼아 각지에서 돈을 강탈하도록 교사하였기 때문에 위 백남식 외 수명은 위 교사에 기인하여 대정 8년 11월 19일 충청남도 대전군 기성면 가수원리의 徐丙冑의 집에 침입하여 집안의 사람을 협박하고 돈 3백 50원을 강탈하였는데, 대정 9년 3월 6일까지 그 외의 3개소에 침입하여 각각 집안사람들을 협박한 끝에 각각 돈을 강탈했다. …
여기에서 김용원이 모금한 군자금의 성격을 대동단 운동자금이라고 파악한 것은 주목된다. 김용원은 1919년 3월(음) 대동단 단원인 金翊洙가 논산지방에서 모은 군자금 10원을 수령하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망명하기 직전까지 총 8회의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였다. 이 중 논산군 연산면 장전리에 거주하던 김익수는 1919년 5월 20원, 동년 11월 50원, 동년 12월 300원 등 4회에 걸쳐 대동단원들로부터 총 380원의 군자금을 거출하여 김용원에게 제공하였다. 대동단원의 자금은 김용원이 직접 수령하던가 蔡謹秉을 보내 받아왔는데, 그의 상해 망명 자금으로서의 성격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백남식도 공판 때에 공주 印榮台의 집에 군자금을 모금하러 간 부분에 대해 “내가 소속하고 있는 大同團의 군자금 청구를 하기 위해”라고 진술한 바 있다. 이는 백남식이 대동단원이었음과, 모금한 자금의 성격이 대동단의 활동 자금이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김용원은 부하들을 조직하여 대동단 이외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군자금을 모금하기도 하였다. 그는 1919년 11월 11일 (음) 尹庸重․趙秉彩․洪淳驥․高錫民을 시켜서 논산군 성남원 북리 金仁泰의 집으로 가 그를 몽둥이로 위협하며 군자금을 거출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동년 12월 9일(음)에는 白南式․趙秉彩․任鍾龜․尹相起․尹太炳․姜中見․李重基 등 7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공주군 우성면 鳳若里 印榮台의 집으로 가서 130원을 모금하였다. 이 과정에서 백남식은 김용원이 준 권총을 발사하고 임종구는 인영태를 묶기도 하였다. 1920년 1월 16일(음), 김용원은 금산군 금성면 下柳里 宋錫驥의 집에 부하 백남식․조병채․윤태병․李相靈을 보내 93원을 모금하여 오도록 하였다. 이들은 이날 같은 동리의 尹相應의 집에도 들러 143원을 거출하였다. 이들이 군자금 모금 활동시 지참하였던 권총과 실탄은 1919년 10월(음) 서울의 笠井町에서 김용원이 채근병에게 주어 은닉하도록 한 것이었다. 이 무기는 이강공 탈출기도 때 김용원 자신이 소지하고 이강공과 정운복에게 위협을 가하였던 것이다. 그는 일제의 심문 때 자신이 소지했던 권총을 전협에게 주고 향리로 피신하였다고 진술하였으나, 자신이 향후 군자금 모금 활동을 위해 채근병에게 주어 은닉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김용원 주도의 군자금 모금 활동을 간단히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표2> 김용원 주도의 군자금 모금 활동 내역
일자 |
지역 |
대상 |
모금액 |
비고 |
1919. 3 |
충남 논산 |
金翊洙 |
10원 |
대동단원 |
1919. 5 |
충남 논산 |
金翊洙 |
20원 |
상동 |
1919. 11 |
충남 논산 |
金翊洙 |
50원 |
상동 |
1919. 11 |
충남 논산 |
金仁泰 |
0원 |
모금 실패 |
1919. 12 |
충남 논산 |
金翊洙 |
300원 |
대동단원 |
1919. 12 |
충남 공주 |
印榮台 |
130원 |
김용원이 윤태병, 백남식 등 부하 인솔 모금 |
1920. 1 |
충남 금산 |
宋錫驥 |
93원 |
부하 백남식 등 4인 보내 모금 |
1920. 1. |
충남 금산 |
尹相應 |
143원 |
상동 |
※ 일자는 음력
※ 인명이 굵은 글씨로 된 것은 대한건국단의 모금 활동과 중복됨
위의 활동을 보면, 대동단원인 김익수로부터 모금한 것을 제외하면 실제 김용원이 군자금 모금 활동을 주도한 것은 1919년 11월부터 이듬해 1월에 걸친 약 3개월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이 같은 그의 군자금 모금 활동은 그가 상해로 망명함에 따라 기소중지가 되어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귀국하여 독립공채를 이용하여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다가 1924년 9월 피체되며 이때의 활동과 함께 수사를 받게 된 것이다. 일제는 김용원을 심문한 결과 ‘朝鮮軍政府 系統’을 밝혀냈다고 발표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朝鮮軍政府 系統表
上海假政府로부터 密命을 傳達하기 위해 入京
군무총장 盧伯麟 |
上海假政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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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庸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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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相圭, 鄭永植 외 3名 |
(별명 金鎭玉,韓東用,金源,金濟一,金忠玉,韓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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財務總長 金永鎭(淸州) |
秘書役 李冕浩(論山) |
軍資金 募集團長 姜中見(羅州) |
(별명 金溢) |
(별명 李浩錫) |
(별명 姜東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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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募集員> |
<傳令> |
<募集員> |
金世鎭(淸州) |
蔡謹秉(抱川) |
白南式(論山) |
李相奎(永同, 별명 李龍來) |
金翊洙(論山) |
金相洙(羅州) |
尹相起(論山) |
趙秉彩(靑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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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鍾基(불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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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 10명 |
<從事員> |
<從事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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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太炳(論山) |
任鍾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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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淳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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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庸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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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濟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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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표는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김용원이 대동단에 가입하였다가 임시정부로 망명한 시기가 1920년 3월이고, 귀국하였다가 피체된 때가 1924년임을 감안하면 그가 군무총장 노백린의 직접 지휘를 받아 30여명의 조직을 거느리고 국내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주도하였다는 사실은 정황상 성립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사실이 밝혀진 것은 1924년의 일이나, 당시 그의 공판에서는 이 죄가 적용되지 않았다. 오히려 제령 제7호 위반, 공갈 피고사건으로 2년형이 확정된 뒤 다시 망명 이전의 군자금 모금 활동을 문제 삼아 다시 공판에 회부한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그는 1927년 2월 24일 공주지방법원에서 강도교사죄로 징역 2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부하들 중 백남식과 김영진이 10년형을 선고받고, 노재철이 9년형, 강중현이 7년형을 선고받는 등 많은 사람들이 그의 명령에 따르거나, 그를 수행하여 행한 군자금 모금 활동으로 중형에 처해진 것에 비하면 그가 병중이었음을 감안하더라도 형량이 너무 가볍다. 따라서 그가 망명 이전 군자금 모금 활동을 주도한 것은 사실이나, 朝鮮軍政府 系統表는 과장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상해에서 철혈단을 조직하고, 임시정부에서 임시의정원 상임위원과 경무국장 등 요직을 역임하며 활동하던 김용원은 병에 걸려 1924년 4월 약 4년여의 해외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였다. 그러나 그는 상해에서 함께 기거했던 吳根榮(일명 吳榮)을 만나 그의 안내로 수원 남창리에 거주하던 李圭淵을 찾아가 임시정부의 독립공채를 보이며 군자금을 모금하는 활동을 하다가 이 해 9월 일제에 피체되었다. 병으로 인해 구속과 형집행정지를 반복하던 그는 1928년 11월 28일 다시 형집행 정지가 취소되어 일제에 피체, 압송되게 되었다. 이 때 그는 자신을 압송하던 일경을 때려 기절시키고 피신하였는데, 그의 은신을 도와준 조병채의 존재는 주목하여야 한다. 조병채는 일찍이 김용원의 부하가 되어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8년형을 선고받고 5년 6개월의 옥고를 치른 인물이다. 이 때 그는 피신하는 김용원을 보호하고 안내하였다가 다시 벌금 50원의 처분을 당한 것이었다.
조병채는 1904년 정산군의 관문이었던 청양면 왕진리(당시 청면) 농민이 중심이 되어 1천여 명이 봉기한 定山 農民抗擾의 주도자인 趙炳吉과 동일인이다. 3월 1일부터 15일간에 걸쳐 전개된 정산 농민항요는 부패 관료와 봉건적 학정에 대한 의식적이고 계획적인 항쟁이었다. 또한 일시적 선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 地契革罷와 監理의 축출을 요구하며 폭동으로 발전하여 지계사업에 대한 불만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이후 그는 김용원은 물론, 만주의 김좌진을 후원하기 위해 김좌진의 再從인 金英鎭․金世鎭 등과 함께 대한건국단을 조직하여 군자금 모금 활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인물이었다. 즉 조병채는 반봉건투쟁에 이어 반제투쟁의 민족운동에 앞장선 인물이라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김용원이 주도한 군자금 모금 활동에서 주목하여야 할 것은 주된 활동 지역이 논산이고, 그의 부하 가운데 윤상기와 윤태병 및 백남식은 병사리의 노성윤씨와 수원백씨라는 점이다. 특히 이들은 후술할 병사리 출신 尹喬炳의 활동과 함께, 병사리에서 조직된 大韓建國團의 주도적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병사리와 노성윤씨를 기반으로 한 군자금 모금 활동의 면모로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2) 尹喬炳의 모금 활동
윤교병은 병사리 17번지 출생이다. 그는 평소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고 있었는데, 상해 임시정부의 군자금 모금원 羅相泌과 함께 1919년 10월(음)부터 1921년 3월(음)까지 충남 논산과 보령, 전북 전주와 익산 및 경북 봉화 등지에서 10여회에 걸쳐 960원을 모금하여 상해 임시정부에서 특파한 鄭祥燮에게 전달하는 활동을 하였다.
나상필은 경기도 용인 사람으로 임시정부에서 파견한 정상섭을 만나면서 모금원이 되어 군자금 모금 활동을 시작하였다. 나상필과 정상섭은 이전부터 알던 사이였으나, 1919년 9월 서울 창신동에서 만나 군자금을 모금하여 상해 임시정부로 망명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 때 정상섭은 서울에 머물며 군자금을 모으기로 하고, 나상필은 논산의 윤교병과 의논하여 군자금을 모으기 위하여 논산으로 내려왔다. 나상필과 윤교병은 1915년경 서울의 李宗夏 변호사의 집에서 만난 적이 있는 구면이었다. 정상섭도 윤교병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 나상필로부터 군자금 모금 계획을 전해 들은 윤교병은 이에 찬성하고 그에게 지방의 부호들을 안내하기로 하였다.
윤교병과 나상필이 제일 먼저 군자금 모금 대상으로 정한 것은 전북 익산의 李圭錫이었다. 그들은 1919년 10월(음) 이규석의 집으로 가 70원을 모금하였다. 이 때 나상필은 자신이 李始榮의 조카 李奎鴻이라고 변성명을 하였다. 그 까닭은 이시영이 임시정부의 재무총장으로 있어 자금을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였으나, 李圭錫이 이시영과 척족관계에 있었음을 이용하려 한 것이다. 이는 ‘아직 상민 칭호도 벗지 못한 이규석’에게 이시영과 같은 유명한 양반과 인척 관계라는 점을 자극하여 군자금을 거출하고자 하는 계책이기도 하였다. 나상필은 그로부터 1년 반이 지난 1921년 4월(음) 李貞雨에게 1천원 권 임시정부 공채증서를 주어 이규석에게 나머지 930원을 모금하여 오도록 하였으나, 이규석의 거부로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이들이 다음 군자금 모금 대상자로 지목한 사람은 논산의 부호인 尹一炳이었다. 윤일병은 윤교병과는 20촌의 친척으로서, 그도 이전부터 정상섭을 알고 있었다. 윤교병과 나상필은 1919년 11월(음) 윤일병의 집을 방문하여 100원을 모금한 이래 이듬해 4월까지 3회에 걸쳐 360원을 모금하였다. 또한 이들은 1920년 5월(음) 역시 논산의 부호인 천석지기 尹任重으로부터 2회에 걸쳐 350원을 모금하였는데, 그 또한 윤교병과 20촌의 친척이었다. 즉, 윤교병은 척족 내의 부호들을 나상필에게 소개하며 군자금을 거출한 것인데, 당시 노성윤씨 가운데에는 군자금을 제공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1920년 6월(음), 이들은 慶北 奉化郡 法田面 尺谷里 姜鳳元의 집으로 갔다. 강봉원은 나상필이나 윤교병 가문과 수대 전부터 인척관계였다. 그들은 강봉원의 집에서 보름간 머물며 그의 아들인 姜聞昌을 상대로 군자금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인척관계인 점을 이용, 『甲乙錄』을 만든다는 명분을 내세워 모금하려 하였다. 또한 그들은 동군 春陽面 春陽里에 거주하는 姜泌로부터도 『甲乙錄』 제작 명분으로 100원을 모금하였다. 이는 과거 자신들의 가문이 소론에 속한 사실을 활용, 인척을 찾아다니며 군자금을 모금한 특이한 사례로 주목된다. 이들이 무기를 휴대하지 않고, 또한 강압적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모금이 가능했고 비밀이 보장되었던 데에는 이 같은 혈연적 유대가 작용하였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이후 이들은 1920년 8월(음) 보령의 李是雨로부터 여비조로 40원을 받았는데, 이시우는 윤교병의 조카였다. 1921년 3월에는 전북 전주의 金鍾振으로부터 역시 여비조로 10원을 받는 등 총 960원을 모금하였다. 이시우와 김종진이 이들에게 준 돈은 군자금이라기보다는 여비의 성격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그러나 이들이 모금한 총액과 정상섭에게 건넨 액수에는 포함되어 있다. 나상필은 모금액 중 여비 등으로 사용한 110원을 제외한 850원을 7, 8회에 걸쳐 정상섭에게 전달하였다. 그러나 정상섭이 이 돈으로 인천에서 쌀 거래를 하다가 모두 날리고 1920년 9월(음) 병사하는 바람에 그간의 노력이 허사가 되자 그들은 다른 방법을 강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1920년 11월(음), 나상필은 서울에서 평소 친숙하여 가끔 시국에 대해 의견을 나누던 朴起緖와 군자금 모금 대책을 협의하였다. 이 때 나상필이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公債證書를 가지고 다니면 신용을 얻어 군자금 모금이 수월할 것이라고 하자, 박기서는 1921년 4월 임시정부 특파원인 鄭泰愈를 소개하였고, 정태유는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1천원 권 공채증서를 나상필에게 주었다.
나상필은 이 공채증서를 가지고 윤교병을 다시 찾아갔다. 그는 윤교병에게 이미 350원을 주었던 윤임중으로부터 나머지 650원을, 이정우에게는 이미 70원을 주었던 이규석으로부터 930원을 받아오도록 하였으나 모두 성공하지 못하였다. 나상필은 한달 뒤인 5월에 공채증서를 강경의 형 집에 와 있던 박기서를 방문하여 돌려주었다. 나상필과 윤교병이 상해를 왕래하였다는 주장도 있으나, 확인되지 않는다.
이상과 같은 윤교병과 나상필의 군자금 모금 활동 사항을 정리하면 다음의 표와 같다.
<표3>윤교병․나상필의 군자금 모금활동 내역
일자 |
지역 |
대상 |
모금액 |
비고 |
1919. 10 |
全北 益山 |
李圭錫 |
70 |
이시영의 친척, 이후 재차 모금시도 실패 |
1919. 11 |
忠南 論山 |
尹一炳 |
100 |
윤교병과 20촌 |
1920. 3 |
忠南 論山 |
尹一炳 |
60 |
상동 |
1920. 4 |
忠南 論山 |
尹一炳 |
200 |
상동 |
1920. 5 |
忠南 論山 |
尹任重 |
350 |
윤교병과 20촌, 천석지기, 2차에 걸쳐 모금 |
1920. 6 |
慶北 奉化 |
姜鳳元 |
40 |
인척관계 이용, 甲乙錄 발간 구실 |
1920. 6 |
慶北 奉化 |
姜 泌 |
100 |
상동 |
1920. 8 |
忠南 保寧 |
李是雨 |
40 |
윤교병의 조카, 여비 성격 |
1921. 3 |
全北 全州 |
金鍾振 |
10 |
여비 성격 |
1921. 4 |
忠南 論山 |
李貞雨 |
실패 |
독립공채를 주어 이규석에게 930원 징구하였으나 불응 |
※ 일자는 음력
3) 尹相肯의 모금 활동
윤교병과 나상필이 활동했던 비슷한 시기인 1920년 후반에 역시 논산지방을 무대로 한 광복단 충남지단과 윤상긍 등의 군자금 모금 활동이 있었다. 윤상긍은 논산군 상월면 상도리 출신이다. 광복단 충남지단은 1920년 11월 5일 지단장 朴在玉(일명 朴在榮) 등 7인이 일제에 피체되며 그 조직과 활동이 드러나게 되었다.
일제의 기록에 의하면 이 조직은 間島光復團의 단장 朴聖彬이 金國景을 전라․경상․충청지방 수령으로 임명하고 군자금 모금과 독립군 모집을 위해 국내에 잠입시키면서 활동이 시작된 것으로 되어 있다. 김국경은 간도광복단의 지휘에 의해 대소 관공리를 암살하기 위해 경성에 잠복해 있던 중 정무총감이 이해 10월 9일 공주지방을 순시한다는 소문을 듣고 곧 동지를 모으는 한편 무기를 구입하기 위해 평양으로 동지를 보내고 자기는 공주로 내려왔다.
이 때 김국경은 홍성에 거주하던 지기인 朴在玉을 만나 그를 광복단 충청남도 지부장으로 임명하고 정무총감 암살 계획에 가담케 하였다. 박재옥은 이에 찬동하고 평양에서 무기가 올 때를 기다렸다. 그러나 무기는 오지 않았고, 결국 공주에 왔던 정무총감이 논산으로 떠나 계획이 실패하자, 김국경은 10월 11일 박재옥과 이별하고 경상도 지방으로 떠났다.
박재옥은 활동을 계속하기 위해 윤상긍을 찾아왔고, 윤상긍은 박재옥의 권유에 따라 단원이 되었다. 이들은 10월 12일 李承兆를 단원으로 가입시키고 그에게 ‘大韓民國光復團之印’이라는 인장을 새기게 하고 군자금 납부를 요구하는 通告書 8매를 제작하였다. 이들은 통고서를 光石面에 거주하는 尹龜炳 외 2명에게 발송하였다. 이 때 박재옥은 윤상긍을 通信員으로, 李周鎬를 論山支團長으로 임명하였는데, 간부의 선임과정과 절차에 의문이 제기되는 부분이다.
이들은 성동면에 거주하는 부호인 趙東始가 그간 여러 계열로부터 수차 군자금을 요구하는 문서를 받고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임시정부를 상대로 사형을 면제해 주도록 노력하겠다고 하여 운동비 명목으로 3회에 걸쳐 560원을 받았다. 이들은 이른바 ‘成功謝金’으로 돈을 더 거두기 위해 「死刑宣告取消證」을 만들어 먼저 단원 姜榮義를 조동시에게 보내고, 11월 8일 단원들이 조동시의 집으로 가서 수금할 예정이었으나, 이 계획이 사전에 탄로나 피체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간도광복단이나 박성빈에 대하여는 다른 자료에 전혀 나타나지 않아 조직의 실체 등에 대해 알 수 없다. 또한 광복단 충남지단의 활동도 이 이상은 확인되지 않는다. 물론 이전의 광복회 충청도지회와는 시기나 인물도 완전히 달라 연계성도 찾을 수 없다. 따라서 그 조직의 실존 여부나, 모금 활동의 독립운동적 성격 여부는 판단하기 어렵다.
4. 맺음말
본고는 3․1운동 직후부터 1921년 4월경까지 충남 일원에서 전개된 군자금 모금 활동에서 노성윤씨의 참여와 활동을 살펴본 것이다. 당시 이곳의 군자금 모금은 김용원을 중심으로 임시정부와 연계한 활동, 윤교병과 나상필의 활동, 윤상긍과 광복단 충남지단의 활동, 대한건국단의 조직과 활동 등이 거의 같은 시기에 전개되었다. 이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노성윤씨들은 16세기 중반부터 병사리에 세거하기 시작하여 17세기에는 은진송씨, 광산김씨와 함께 ‘湖西 三大族’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1893년의 魯城民擾를 주도하였고, 곧 이어 전개된 동학농민운동 때 창의를 촉구하는 고종의 밀지가 전달되는 등 위상이 강화되며 근대 민족운동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3․1운동 직후 대동단원 김용원은 대동단과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하여 논산․금산․공주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이 활동은 그가 상해로 망명하기 직전인 1920년 1월로 그치나, 1924년 귀국한 김용원을 심문하여 일제가 파악한 「朝鮮軍政府 系統表」에는 30여명의 부하들이 보인다. 이들의 활동은 논산을 주 무대로 하고 노성윤씨인 윤상기와 윤태병, 수원백씨인 백남식이 주요인물로 참여하고 있고, 大韓建國團으로 확대 발전하고 있어 주목된다.
윤교병은 병사리 출신으로 임시정부에서 특파한 정상섭과 연계한 군자금 모금원 나상필과 함께 1919년 10월부터 1921년 4월까지 주로 충남 논산과 경북 봉화 일원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벌였다. 윤교병은 나상필과 함께 논산의 윤일병, 윤임중 등 문중의 부호와, 봉화의 강봉원 등에게 모금을 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문중이거나 인척관계였다. 이는 혈연적 유대를 이용한 독특한 군자금 모금 사례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은 군자금 모금 과정에서 무기를 사용하거나 위압적 행동을 하지 않았다. 이들은 다시 정태유, 박기서 등 임시정부 특파원과 연계하여 임시정부가 발행한 독립공채를 지니고 군자금 모금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한편 1920년 10월, 윤상긍과 광복단 충남지단의 활동도 보인다. 그러나 이 조직은 실체를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모금 활동의 독립운동적 성격도 판단하기 어렵다.
1919년 10월(음) 조직된 대한건국단은 당시 ‘軍政府員’ 또는 ‘김좌진의 부하’로 인식되었다. 실제 대한건국단은 조병채 등 기존 김용원 부하들이 김좌진이 파견한 특사와 연계하며 조직한 것인데, 김좌진의 재종인 김영진, 김세진이 참여하고 있어 김좌진의 후원 조직이 분명하다. 대한건국단의 규모는 25명 내외로 보이는데, 조직의 명칭에서 건국을 선구적으로 표방한 점이 주목된다. 대한건국단의 실제 주도자는 김영진과 조병채였는데, 일제는 그 단장을 윤태병으로 파악하였고 윤상기의 집에서 결성되었다는 점에서 노성윤씨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대한건국단의 활동은 1919년 11월부터 1920년 말까지 20여회에 걸쳐 전개되었다. 이들은 임시정부와 군정서에서 발행한 다수의 문서를 지니고 다녔으며, 군자금 영수증이 부족할 경우에는 김영진의 주도로 군정서와 재무서의 인장을 새겨 사용하기도 하였다. 대한건국단의 주요 활동지역은 부여지방에 집중되어 있는데, 이는 주역인 노재철 등이 부여 출신으로서 지역 사정에 밝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들의 활동시기가 1920년 말로 끝나는 것은 후원 대상인 김좌진의 독립군 부대가 청산리대첩 이후 근거지를 이동하는 등 변화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3․1운동 직후부터 1921년 4월경까지 충남 일원에서 전개된 군자금 모금 활동에는 윤교병, 윤상긍, 윤태병, 윤상기 등 노성윤씨들이 다수 참여하고 있고, 또한 노성윤씨 중 군자금 제공자가 다수 있어 이를 군자금 모금의 문중적 기반과 활동 사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여러 명의 노성윤씨들이 별개로 전개한 군자금 모금 운동을 문중적 기반에서 파악하기 위해서는 향후 자료의 보완과 후속 연구가 요구된다.
주제어 : 魯城尹氏[坡平尹氏], 丙舍里, 軍資金, 大韓軍政府, 大韓民國臨時政府, 金庸源, 金佐鎭, 尹喬炳, 尹太炳, 尹相肯, 大韓建國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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