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산책] 외국에는 없는 한국의 먹거리 ‘콩나물’
출처 경향신문 :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311262020005
엄민용 기자
우리가 먹는 음식 가운데 가장 한국적인 것이 콩이다. 콩의 발상지가 오늘날 중국과 맞닿아 있는 우리나라 두만강 유역이다. 이런 콩이 18세기 중엽에 유럽으로 건너갔고, 미국에서는 19세기 초에 재배되기 시작했다.
우리 땅에서 나고 자란 작물인 만큼 콩은 우리 식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먹거리다. 한국인이라면 아무리 콩을 싫어해도 콩을 먹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음식의 맛을 내는 데 기본적으로 쓰이는 간장·된장·고추장 등이 콩을 주재료로 한다. 콩을 삶아서 찧은 뒤 덩이를 지어서 말리면 ‘메주’가 된다. 이 메주를 소금물에 30~40일 담가 우려낸 뒤 그 국물을 떠내어 솥에 붓고 달인 것이 ‘간장’이다. 그렇게 간장을 담근 뒤에 장물을 떠내고 남은 건더기가 ‘된장’이다. 또 고추장을 만들 때 반드시 넣어야 하는 것이 메줏가루다.
콩이 한국인의 대표 먹거리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식재료가 콩나물이다. 오늘날 콩을 나물로 키워 먹는 민족은 우리가 유일하다. 녹두의 싹을 틔워 키운 ‘숙주나물’을 먹는 나라에서도 콩나물은 안 먹는다. 문헌상으론 중국의 <신농본초경> 등에도 콩나물을 가리키는 ‘대두황권(大豆黃卷)’이 나오지만 현재 중국인 식탁에선 콩나물을 찾기 어렵다. 반면 우리는 고려 때의 <향약구급방>에 콩나물을 말려 약재로 쓴다는 기록이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도 전국적으로 콩나물이 들어간 음식이 매우 많다.
한편 콩을 발아시킨 것이 콩나물이므로, 녹두를 발아시킨 것은 ‘녹두나물’이 돼야 한다. 하지만 녹두나물은 표준어가 아니다. ‘숙주나물’ 외에 ‘녹두채’ ‘숙주채’ 등이 국어사전에 올라 있다. 녹두나물을 숙주나물로 부르는 것에 대해서는 조선 세종 때 인물 신숙주와 관련한 설이 있다. 그는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를 빼앗은 세조를 도왔다. 누군가의 눈에는 절개가 없는 인물로 비칠 수 있다. 그런데 숙주나물은 음식으로 만들면 한나절 만에 상한다. 이처럼 쉽게 상하는 것이 신숙주의 절개와 같다고 해서 ‘숙주나물’로 불리게 됐다는 설이다. 그러나 이는 하나의 얘기일 뿐 국립국어원의 공식 견해는 아니다.
엄민용 기자 margeul@kyunghyang.com
빛명상
한 촌로의 미꾸라지 그릇
어제 서문시장에 나갔다. 한 촌로가 한 그릇 남짓 남은 미꾸라지를 떨이한다고 했다. 그 미꾸라지가 잘다는 이유를 들어 몇 백 원을 더 깎으려 하고 있었다. 촌로는 요 근래 비가 왔을 때 집 앞 논둑에서 잡은 토종이란 이유로 못 깎는다고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미꾸라지 사이에는 버들붕어, 피라미, 자라 새끼 한 마리도 섞여 있었다. 옛날 어린시절 대구 감샘못(지금은 평리 아파트 단지)에서 많이 보았던 안면 있는 놈들이라 그 흥정에 끼여들었다. 몇 백 원 더 얹어 주기로 하고 가로챌 수가 있었다. 비닐봉지에 소금을 치려는 행위를 제지하고, 조그마한 바스켓을 하나 사서 샘물을 구하여 담아 와 집어넣으니 모두들 다시 살아났다.
송사리 몇 마리가 기운을 잃고 있어, 그것들을 딴 그릇에 옮겨 별도로 초광력超光力을 주었다. 우리 민물고기들의 아름다움, 민첩함과 슬기, 저력, 끈기는 우리민족의 고고함과 독특함을 대변해 준다.
잃어가는 냇물과 우리 토종들, 그리고 동심의 마음들……. 비가 그친 후 소쿠리를 들고 개울가에 가서 고기 반, 물 반과 어울리던 마음, 그리고 잡았다가 놓아 보내는 즐거운 시절의 순수함을 컴퓨터 앞에 앉은 지금의 아이들의 모습과 한번쯤 비교해 보면 어떨까?
다음날 몇 마리 신통치 않은 놈들을 남겨 두고 나머지 녀석들을 데리고 아량교에 갔더니, 그 물에 이놈들을 놓아 주었다간 병 주고 약 주고, 다시 병 주는 꼴이라는 생각이 들어, 다시 동화사 계곡 밑까지 데리고 갔다. 그리고 그 놈들과 비슷한 녀석들이 그 곳에서 살고 있는지 살펴보니, 자라 같은 놈은 빼고 그런대로 즐겁게 지내고 있었다.
아직도 이 정도의 녀석들이 살 수 있는 자연이 있다는 것이 다행스러웠고 그나마 잘 보존될 수 있었으면 하는 맘 간절했다. 모두들에게 ‘잘 적응해서 잘 살아라’ 하고 초광력超光力을 주고 놓아 주니, 그 중 두서너 놈이 추어탕 신세에서 살아났다는 기쁨에서인지 꼬리를 팔랑팔랑 쳤다. 그러고 나서 돌 밑으로 숨었다가 다시 나와 뒤돌아보는 꼴이 내 마음을 흐뭇하고 기쁘게 해주었다.
울산에 있을 때 가끔 직원들을 데리고 시장에 가서, 잡혀가기 직전의 미꾸라지들을 모아서 태화강변에 도로 놓아 주던 때가 생각이 난다. 그때 그 녀석들도 고마워하며 뒤돌아보았었다. 그때 함께 했던 동료들이 지금도 시장을 돌아다니고 있을 것을 그려 보니 이런 것이 소박하지만 진정한 기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을 살리는 것은 곧 이런 우리의 토종 고기들을 살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잃어버린 물고기를 찾으려는 마음들이 모일 때 곧 깨끗한 환경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환경이 우리를 살려 준다는 것을 한번쯤 하던 일을 멈추고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자연은 가장 고요한 생명의 원천이며, 영원히 우리와 함께 조화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한 사람, 한 가족의 손길과 보살핌이 모여 온 나라가 되살아난다. 외래종 관상어 등을 무작정 수입하지 말고 아름답고 수수한 우리의 민물고기와 토종들을 기르고 보존하여, 잊혀져 가는 우리의 순수한 마음을 되찾아야 하지 않을까? 모처럼 등산이나 야유회를 가게 될 때 조금의 마음과 시간을 낸다면 깨끗한 환경을 만들 수 있을 텐데…….
출처 : 빛(VIIT)으로 오는 우주의 힘 초광력超光力
1996.6.30. 초판 1쇄 P.108~109
우리꽃과 우리의 토종
근무가 없는 직원 서너 명과 함께 울산 태화강 상류 쪽으로 산책을 나갔다. 의레 산책을 가자고 하면 직원들의 손에는 신주머니와 나무집게가 들려 있다. 언제부턴가 우리들은 강변이나 가까운 산사에 오를 때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이 두 가지는 필수품인 된 지 오래다.
어느 단체에서 자연보호다, 환경보호 캠페인이다 하고 요란스럽게 떠들지 않아도 가끔 우리와 같은 사람들을, 아니 비슷한 일행들을 틈틈이 만나게 되면 소리 없이 눈웃음을 주고받는다. 그 눈웃음의 언저리에서 진정 이 땅을, 이 강을 사랑하고 있는 순수한 모습들을 보면서 이렇게 곳곳에 숨은 평범한 사람들이 있는 한 우리의 강산은 그래도 희망이 있고 후손들에게 물려줄 아름다운 곳이 어디엔가는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한 단체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들은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회색바지를 입고 손에는 뭔가를 들고 있어 우리는 그들을 유심히 지켜보게 되었다. 한동안 종교의식이 끝나자 가져온 물고기와 자라, 거북이 등을 놓아주고 있었다. 참 보기 좋은 유쾌한 광경이었다. 요즈음처럼 정서가 메마르고 이웃 간의 정이라곤 담쌓고 지내는 세상에서 고기를 잡지 않고 놓아 보내고 있었다.
가끔 비온 후 재래시장에 나가면 어김없이 미꾸라지, 붕어, 새우 등 잡다한 고기에 어린 피라미 새끼까지 잡아와 팔고 있는 촌로들에게 다가가 무조건 사서 다시 강물에 놓아 보내는 즐거움은 그 어디에 비할 수 있을까? 그런데 오늘 40~50여 명이 작게는 비닐 한 봉지에 자라 한 마리가 들어있는 것에서 어떤 분은 바께스에 가득 담겨 있는 물고기를 놓아주는 분도 보였다.
‘방생(放生)’이라는 것이 요즘같이 메마른 세상에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던가. 하지만 한 번만 더 생각해 주셨으면 한다. 방생될 고기를 살펴보면 오히려 역행이랄까, 아니 한 것만 못한 경우가 있다. 방생하는 고기의 종류에는 이스라엘 잉어도 있었고 베스나 블루길 같이 외국에서 수입된 고기도 보였다. 심지어는 관상용 금붕어도 들어 있었다.
그 뿐이랴. 남들이 하니 덩달아 구입한 거북이도 있었다. 참 안쓰러웠다. 외국에서 온 물고기를 우리의 강이나 바다에 마구 방생하는 것은 열대어 같은 작은 고기들이 살고 있는 예쁜 어항에 소금쟁이, 미꾸라지 거북이를 넣어주는 것과 같다. 어찌될까 한번 생각해 보라.
어항에 적응하지 못하는 놈은 죽어서 그 물마저 흐려 공해를 만들 것이며 또 어떤 놈은 평온하기만 하던 그곳을 휘저어서 분탕칠 것이며 어떤 놈은 열대어를 마구 잡아먹어 멸종시킬 것이다.
어린 시절 우리들과 함께 해온 우리들의 토종 민물고기(붕어, 송어, 피라미, 송사리, 미꾸라지, 준태기, 맹금쟁이, 새우, 소금쟁이, 모래무지 등등)가 가뜩이나 있을 자리가 없어 멸종 위기에 놓여 있는데 이러한 외국의 잡어들이 우리의 고기를 몽땅 잡아먹어서야 되겠는가. 우리의 본성인 인간성마저 무너져가는 요즈음 우리의 것이 멸종된다면 언젠가는 우리의 자식들이 잃어버린 우리 것을 되찾고자 할 때 어디에서 다시 찾을 수 있겠는가.
밭이나 들이나 논만 하더라고 70년대에는 도심에서 10여 분만 나가면 메뚜기랑 홍굴레랑 여치들을 한 주머니씩 잡아도 다음날 또 가면 그 놈들은 어디에서 자꾸 나오는지 또 한 주머니씩 잡아왔는데 요즈음은 보기조차 어려워지고 있지 않는가.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삶, 그림자가 뭔지조차도 모르고 전자게임과 컴퓨터에 매달려 있는 요즘 어린이들, 그 어린이들이 자라서 무엇을 생각하고 또 어떤 것을 만들어낼까.
이야기가 빗나가는 것 같지만 한 번 사라져간 우리의 토종들, 우리의 꽃들(민들레, 맨드라미, 채송화, 백일홍, 해바라기, 나팔꽃, 할미꽃···), 우리의 물고기들은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나마 종교단체에서 방생하는 것까지는 좋지만 조금만 더 생각하고 골라서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여 언급해 보았다.
우리의 강도 살리고 우리의 민물고기도 보존해 나가는 방법을 꼭 재고해 주었으면 한다. 욕심 같아서는 각 가정에 수족관이나 어항, 연못에 우리의 귀여운 토종 물고기를 들여놓으면 얼마나 좋을까. 때로는 맑은 곳을 찾아 놓아 보내기도 하고······.
후일 우리의 아이들이 우리의 그때 그 마음을 회복하고 옛것을 찾을 때를 대비하여 한 번쯤 생각하고 실천해 보자. 언제라도 본 학회에 오시면 기꺼이 도와줄 것이다.
출처 : 빛(VIIT)의 책 3권
‘초광력超光力’ 빛(VIIT)으로 오는 우주의 힘
1999년 03월 08일 초판 1쇄 p. 237~239
감사와 축하드립니다. 우리의 꽃.토종의 보호해주심의 무궁한 공경과 감사마음올립니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