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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이 많은 청년(1)
마 19:16-30
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18 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20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5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26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27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마 19:16-30 / [부자 청년, 낙타와 바늘귀; 막 10:17-27, 눅 18:18-27] 어떤 젊은이가 예수께 와서 물었다. `선생님, 제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17)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네가 어찌하여 내게 선한 일에 대하여 묻느냐? 선한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뿐이시다. 생명으로 들어가려거든 계명을 지켜라' 18) `어느 계명입니까?' 그가 다시 묻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ㄱ)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ㄱ. 출20:12-16,레19:18(참조,신5:16-20)) 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20) `저는 언제나 그 계명들을 다 지키고 있습니다. 아직도 무엇을 더 해야 합니까?' 하고 그 젊은이가 말하자 21)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네가 완전하게 되려거든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22) 이 말씀을 들은 젊은이는 큰 부자였으므로 침울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23) 그러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매우 어렵다. 24) 다시 말하지만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25)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놀라서 `그러면 세상에서 구원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26) 예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다' 27) [백 배의 상;막10"28-31,눅18:28-30] 그때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게 되겠습니까?' 28)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새 세상이 되어 인자가 그 나라에서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29) 그리고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고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식이나 재산을 버린 사람은 백 배의 상을 받을 것이고 또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30) 그러나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자가 많을 것이다.
재물을 포기하지 못하고 영생의 확신을 얻지 못한 부자 청년과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모습이 대조를 이룹니다.
부자 청년의 고민(16-22)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해 질문을 합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영적인 축복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은 좋은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두 가지 관점에서 부족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먼저 이 청년은 영생의 확신을 스스로의 선행으로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씀을 철저하게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가운데 늘 부족함을 느꼈고, 영생의 확신은 없었습니다. 영생을 스스로 얻을 수 있다는 오해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그는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의 복을 누리기 위해서 온전해 지고자 한다면, 자신이 의지하고 있는 것을 하나님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새로운 삶으로의 전환, 예수님을 따르는 삶으로 회개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재물을 우상처럼 여기고 있었기에 예수님의 요구에 순종할 수 없었습니다. 재물은 그에게 자랑이요, 만족, 의지, 힘, 안정의 근원일 수 있습니다. 이 청년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이 어떤 죄에 빠졌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교만과 재물에 대한 집착을 떨치지 않는 한 그의 마음은 참 평안은 없을 것입니다.
구원을 얻을 사람(23-30) 부자 청년이 구원의 길에 들어오지 못하는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재물을 의지하는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복으로 이해됐던 재물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 방해하는 장애물이 될 수 있습니다. 구원은 자신의 힘으로 얻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이 선물로 주실 때 가능합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는 이생과 내세에 대한 약속이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겸손함이 요구됩니다.
적용: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신뢰하며 따르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없습니까? 믿음의 고백과 삶의 차이는 없는지 돌아봅시다.
제아무리 중요한 것들도 왔다가 사라집니다. 우리는 때론 감동을 받거나 삶이 계속될 것 같으면 붙잡고 집착하며 변화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라져가는 것들을 고집스럽게 쫓아가서 삶의 흐름을 통제하려 듭니다. 삶의 흐름은 막을 수 없습니다. 남은 것은 과거와 현재에 대한 느낌이며, 둘 사이의 차이를 흔히 상실이라고 부릅니다. 두 주인을 섬기는 이에게 천국과 영생은 없습니다. 재물이 문제가 아니라 재물에 집착하는 마음이 문제입니다. 마음이 있는 그곳이 사람의 간절한 바람이 머무는 곳입니다. 자신의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나의 진심을 살펴보시고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의 마음을 맞추기로 다짐하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 설 교 >
사랑과 행복 나누기 운동
마 19:16-26 / 조용기 목사
<서론>
할렐루야~ 옆에 계신 분들에게 주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인사해 주십시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사랑과 행복 나누기 운동”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인간의 이상은 모두 다 평등하게 잘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을 바라보면 빈부의 격차는 어느 사회든지 만연하고 인권의 무시 및 유린은 그 정도의 차는 있지만 항상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주의, 주장을 해 오고 있으나 그 어느 것 하나도 완전히 문제해결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직 타락한 인간의 근본적인 죄와 탐욕과 이기주의를 해결하지 못하는 이상 해결은 아득하기만 한 것입니다.
<본론>
1. 타락한 인간의 마음은 탐심과 욕심이 점령
타락한 인간의 마음은 항상 탐심과 욕심이 점령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문제입니다. 누구든지 겉으로는 아주 근사하고 점잖고 훌륭하게 보이지만 속으로 파고 들어가면 욕심과 탐심과 탐욕이 마음을 꽉 잡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 마음에 욕심과 탐심에 잡히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이 이야기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19장 16절로 22절에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나와서 무릎을 꿇고 “선생님이여, 선한 선생님이여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러니 예수님께서 “날보고 선한 선생이라 하지 마라. 선한 선생은 오직 한분이니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시니라 생명을 얻고자 하거든 계명을 지켜라” “어떤 계명이니까?” 주님이 십계명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는 말이 “나는 이미 그 계명들을 다 지켰습니다.” 주님이 고개를 끄덕끄덕 하시고 “그러나 아직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무엇입니까?” “네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 그러면 생명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하니까 부자는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재산을 팔아서 주고 주님을 따르다니 그럴 수가 있느냐. 그러므로 그는 일어나서 그냥 근심을 하고 떠났습니다. 욕심과 탐심이 마음을 잡고 있는데 탐심을 하나님 앞에 쏟아 부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구원은 받고 싶지만 재산은 놓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 보고 하신 말씀이 부자가 천국 들어가는 것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힘들다. 그것 왜냐, 물질이 우상이 되어 있습니다.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했는데 물질이 다른 신이 되어 있습니다. 우상에 절하지 말라고 했는데 물질이 우상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고 하나님께 복을 받아 부자가 된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만 예수를 믿지 않고 부자가 된 사람은 그 물질이 신이 되고 물질이 우상이 되어서 아무리 해도 그 우상을 떠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못 믿습니다.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힘듭니다.
제가 한번 우리 한국에서 제일 손꼽는 부자 한 분에게 전도하려고 여러 번 면회를 신청했다가 나중에 허락을 받아서 그 비서실에 가서 1시간을 기다려서 점심시간이 되어 둘이 함께 식당에 가서 음식을 먹는데 예수 믿으라고 전도를 내가 입에 하면 당장 사업 투자에 대한 이야기만 했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아야 됩니다. 하니까 “아~ 지금 인도네시아에 큰 사업이 있는데 거기 빨리 투자를 해야지. 시간 늦으면 안 된다.”고 그러고 “사람이 오래 못삽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으십시오.” 하니까 “아, 나는 젊은이하고 피를 다 갈아치웠다. 늙은 피는 다 뽑고 젊은 피를 몸에 다 갈아 넣었기 때문에 아직까지 몇 십 년은 더 산다. 그러므로 지금 서둘러 믿을 필요가 없다.” 그러더니만 얼마 안 있다가 죽었습니다. 여러분 부자의 마음은 물질이 신이 되고 우상이 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놀래서 말했습니다. “주님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겠습니까?”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할 수 있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아무리 해도 안 되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즘 서점가에서 베스트셀러가 되는 책들 가운데 재산을 모으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 많이 있습니다. “150만원 월급으로 따라하는 10억 재테크”, 150만원 월급 받고 사람이 10억을 어떻게 만드느냐. “월급쟁이 10억 벌기”, “나의 꿈 10억 만들기” 등 ‘10억’ 시리즈가 있습니다. 그 외에도 “백만장자가 되는 법”, “아이를 부자로 키우는 15가지 방법” 등 책 제목만 보면 인생의 목표 오직 ‘돈’입니다. 여기도 돈, 저기도 돈, 저기도 돈, 돈, 돈 전부 돈벌이 하는 대한 관심이 기울어져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IMF 이후 계속되는 경기침체와 증가하는 실업률, 그리고 불투명한 경제전망이 그 원인일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권을 통해 엄청난 부자가 된 대부분의 사람들이 얼마 있지 아니하여 가정 파탄이 일어나고 사업이 망하고 폐인이 되어버린 이야기를 우리가 종종 읽습니다. 재산을 모으는 것도 중요하지만 재산을 어떻게 모아서 어떻게 쓰느냐. 그 방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재산을 주면 재산이 망조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돈을 올바로 쓸 수 있는 마음의 그릇이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모아진 재물은 오히려 그 자신을 타락시킬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어두운 역할을 하며 인간의 영혼과 마음을 망가뜨립니다. 예수님도 영생을 얻기 원하는 부자 청년에게 먼저 가진 것을 모두 다 팔고 난 다음에 마음을 털털 털어버리고 빈 손 들고 주님을 따르기 시작하라. 그러면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한 것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5절에 보면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14절로 15절에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욕심이란 마음속에 들어오면 반드시 사망을 낳고 마는 것입니다. 욕심은 우리의 분수 이상의 일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2. 인간이 만든 최대의 주의(主義)
그런데 이러한 어려운 환경 속에 인간은 역사적으로 어찌하면 우리들이 같이 잘 살아볼까 평준화 되어서 잘살아 볼까. 거기에 대한 여러 가지 연구를 하고 이론을 만들어 세우고 실천을 했습니다. 인간이 만든 두 최대의 주의는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인인 것입니다. 공산주의를 우리가 보십시다. 공산주의국가의 이상은 모든 사람이 평균적으로 잘살게 하기 위해서 정책을 건다는 것입니다. 모든 생산수단인 공장이나 밭이나 논이나 집이나 물질은 정부가 다 가지고 일반 사람들은 물질은 절대로 소유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 함께 노동해서 함께 벌어서 똑같이 나누어 잘 먹고 잘 살자. 이것이 공산주의인 것입니다. 엄청난 독재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의 재산을 국가가 다 빼앗아야 되는 것입니다. 국가가 모든 재산을 다 소유하고 일당독재를 하는 것입니다. 다른 정당은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국가가 시키는 대로 공장에서나 노동현장에서 일해서 돈 벌면 국가가 다 가져갑니다. 그 돈을 가지고 국민들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줘서 잘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듣기에는 참 복음 같으나 실제로는 망조가 든 이야기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재산 안 되니까 어찌하든지 일을 시키면 눈을 피해서 게을러서 일을 안 합니다. 제가 북한에 갔을 때 한 사람이 제게 말하기를 정부에서 시키는 일이기 때문에 일을 안 한다는 것입니다. 하루 농장에 가서 풀 다섯 포기만 뽑아도 하루 밥은 먹으니까 열심히 일한 놈이나 풀 다섯 포기만 뽑고 있었던 놈이나 똑같이 잘 먹고 잘 입는다고 하니까 누가 일합니까? 그리고 정치적 권리를 가진 사람은 잘살고 없는 백성들은 평준화 되어서 전부 가난해집니다. 인간은 게으르고 비생산적인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공산주의는 19세기에 유럽의 급속한 산업화와 함께 일어난 것으로, 생산재를 공공 소유하여 모든 물질은 국가가 갖고 국가가 공평하게 나눠준다는 사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공산주의 체제는 정당도 일당제이며 국가보다 우선적으로 헌법보다 위에 있습니다. 이러한 공산주의는 기본적으로 자본의 소유와 분배를 똑같이 한다는 유토피아적 체제를 앞세웁니다. 그러나 개인의 사유재산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생산 과정에서 동기부여가 되지 않고 결국 생산성이 낮아져 가난과 불행이 만연하게 되고 하향 공산 조정되어 전부다 가난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1990년대 대표적인 공산국가인 소련이 그로 말미암아 경제적으로 파탄에 이르러서 나라가 망하고 만 것입니다. 그와 함께 동유럽의 위성국가들이 다 공산주의 하던 나라들이 망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현재 여전히 공산주의를 내걸고 있는 몇몇 나라가 있지만 여러분 우리가 알다시피 북한이 얼마나 가난합니까? 굶주리기를 밥 먹듯이 하고 헐벗고 고통을 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모든 것은 국가가 다 맡아서 하고 너희들은 시키는 데로만 하라. 그러면 인간은 자유가 없이 국가가 시키는데로 노예생활을 해야 되고 잘사는 사람도 못사는 사람도 없이 공평이 나눈다고 하니까 점점 적게 나눠받아서 점점 가난해지는 것이 공산주의인 것입니다. 공산주의는 생산과 분배를 다 함께 똑같이 함으로 인간의 힘으로 유토피아를 이루겠다고 표방했지만, 엄청난 독재와 게으르고 비생산적인 인간을 만들어 결국 대부분 붕괴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살고 있는 자유민주주의의 자본주의는 좋은 것입니까? 자본주의에는 재산의 개인 소유권을 인정합니다. 우리는 우리 개인 이름으로 집도 등기하고 토지도 등기하고 개인 이름으로 재산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 소유를 인정한 이상 이제 나가서 경쟁하여 돈을 벌어야 되는데 엄청난 경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공산주의에서 도망쳐 온 사람이 우리 남한에 내려와서 제일 먼저 하는 말이 도저히 경쟁에서 살아나갈 수가 없다. 이렇게 악착같이 일을 해야 되면 어떻게 살아 나가느냐? 적응 못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공산주의는 일을 안 해도 국가가 먹여 주는데 이 나라에 와서는 일을 안 하고는 먹고 살수가 없으니 도저히 못살겠다는 것입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게으르게 살면서 잘 사는 사람 없습니다. 국가 경쟁력에 수원해서 열심히 일을 해서 투쟁하며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력을 다 하므로 생산성이 높아지고 물질은 많이 생산하고 전반적으로 물질은 나라가 풍성해지지만은 부정부패가 심합니다. 자유민주주의 시대에 세금 적게 내려고 특권을 얻으려고 뒷돈을 써서 부정부패가 심하고 또 빈부격차가 심해지는 것입니다. 부자는 투자를 많이 해서 점점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점점 가난하게 되어서 빈부격차가 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민주주의 체제도 온전하지 못합니다.
장 지글러는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에서 지구는 현재보다 2배나 많은 인구도 먹여 살릴 수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인 FAO의 평가에 의하면 1984년 당시 농업 생산력을 기준으로 계산해 보면, 60억 세계 인구의 2배나 되는 120억을 거뜬히 먹여 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지구상에는 수백만 명의 어린이들이 굶주려 영양실조가 되고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장 지글러는 지구상에 식량 자체는 풍부하게 있는데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확보할 경제적 수단이 없이 불공평한 분배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라고 것입니다. 잘 먹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가지고 먹을 수 있고 못 먹는 사람은 그것을 가질 수 있는 수단이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세계 225명의 대재산가의 재산을 모두 합하면 1조 달러가 넘는데, 이것은 전 세계 가난한 사람 25억 명의 연간 수입과 맞먹습니다. 225명이 전 세계 가난한 사람의 25억 명의 연간수입과 맞먹는 이러한 불공평이 있는 것입니다. 세계 15대 부호들의 총 자산은 일부 아프리카 나라들의 국내 총 생산보다 많습니다. 자본주의는 재산의 개인 소유권을 인정하며 좀 더 잘 살기 위해 인간이 만든 제도인 것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제도 아래 사람들은 더 많은 재산을 모으려고 사나운 경쟁과 투쟁의 삶을 삽니다. 그 결과 부정부패가 심하고 불공평한 분배로 말미암아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는 것입니다. 지구 한쪽 끝에서는 너무 먹어서 문제가 되는 반면, 지구의 다른 쪽에서는 못 먹어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이러한 것이 자본주의의 현실인 것입니다.
3. 미국 금융가 월가의 비극
현재 전 세계적인 경기침체의 원인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나라도 경기침체로 말미암아 직장을 잃고 어려우 일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왜 이렇게 되었던 것입니까? 미국의 금융가인 월가의 위기가 찾아온 것은 미국의 초대형 투자은행이 파산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인 것입니다. 이들 대형은행들이 파산하게 된 주원인은 모기지론인 것입니다. 즉, 주택담보대출인 것입니다. 은행이 주택을 사달라는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는데 이자를 많이 받으면서 돈을 빌려 주었습니다. 일반인들은 그 돈을 은행에서 받아서 주택을 사서 도로 팔아서 많이 벌었습니다. 그래서 주택경기가 막 끌어 오르기 시작하니까 많은 투자가들이 주택은행에 돈을 투자했고 주택은행에서는 수많은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고 원금과 이자를 받아서 잘되다가 거품이 꺼졌습니다. 주택 값이 떨어지고 부동산 값이 떨어져서 나중에는 도저히 원금도 갚을 수 없고 이자도 갚을 수 없으니까 모두 다 두 손을 들고 은행에 집 가져가라는 것입니다. 우리 빌린 돈을 갚을 수가 없으니까 집 가져가라고 내놓습니다. 은행에서는 도저히 가져갈 수 없는 것은 주택 값이 너무 떨어져서 빌려준 돈보다 더 낮은 돈으로 주택을 받아야 되니까 못 받아들입니다. 우리 한국의 교포 한사람이 제게 이런 말을 했어요. 자기는 큰 집에 살고 있다고 그래요. 공짜로 살고 있다고 그래요. 그래서 웃기는 소리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아닙니다. 은행에서 내가 돈을 론 받아서 그 주택을 샀는데 열심히 원금과 이자를 매달 갚으면서 살아왔는데 집값이 떨어져서 내가 은행에서 빌린 돈보다 집값이 더 밑으로 떨어져서 도저히 원금도 이자도 갚을 수가 없으므로 내가 은행에 도로 내놓았습니다. 내 원금 빌린 것 못 갚겠으니까 집 가져가라고 은행에서 안 가져가겠다. 우리 안가지고 가겠다. 당신이 가지고 있다가 갚으라. 아니 우리는 안가지고 있겠다. 가지고 가거라. 그러니까 가져가라고 해도 안 가져가고 갚을 수는 없고 하니까 그냥 공짜로 산다는 것입니다. 돈도 안내고 이자도 안내도 내놓으라는 말도 안하고 편안하고 요새 참 잘 산다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주택은행이 완전히 몰락하니까 주택은행에 투자한 다른 투자 회사들이 함께 몰락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미노식으로 온 은행이 무너지고 기업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 온 세계로 미쳐서 오늘 세계 금융시장이 연쇄적으로 파산되고 있는 것입니다. 가장 잘 사는 나라하면 미국 월가의 비극은 전 세계를 경제적인 위기나 어려움에 빠지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인간의 힘으로 돈을 자꾸 벌어서 바벨탑으로 하늘에 쌓으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인간의 힘으로 하늘에 닿도록 돈을 벌어서 쌓으려고 자꾸 남의 돈을 빌리고 채권을 팔고 국채를 팔고 그리고 난 다음 그 돈으로 투자를 한 것이 적자가 나고 또 적자가 나니까 나중에 앞으로 봐도 적자요, 뒤로 봐도 적자요 어찌할 수 없이 바벨탑은 무너지고 거기에 투자한 국민들은 거지가 되고 빈털터리가 되고 경제가 파탄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인간의 탐욕과 욕심으로 돈만 벌기 위해서 하는 모든 일은 결국에는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창세기 11장 4절에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그것이 바벨탑의 탐욕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이름을 내고 하나님이 온 지면에 흩어지라고 했는데 흩어지지 말자. 육신의 정욕이 우상이 되고 신이 되어서 섬기는데 심판을 안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잠언 16장 18절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4. 해결은 무엇인가?
이 해결책은 무업니까? 어떻게 해야 공산주의가 인간을 평준화해서 잘살게 하다가 실패했고 자본주의는 개인자본소유를 허락하나 경쟁이 심하고 부패가 심하고 빈부격차가 심해져서 또 못살게 되고 이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해야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사랑과 행복을 서로 나누는 도리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랑과 행복나누기 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쉽나요? 부자 청년보고 예수님이 재산 나누어 주고 따라 오라고 하니까 따라 왔습니까?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가버렸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자들이 절대로 나누어 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부자가 나누어주고 천당 가기는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힘들다고 말한 것입니다. 부자가 자기 돈을 나누어 주는 것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힘든데 그러면 잘사는 사람은 점점 잘살고 못사는 사람은 점점 가난해지면 어떻게 이 세상이 평화로운 세상이 될 수 있는 것입니까?
누가복음 10장 27절에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는데 실제로 생활해보면 그렇게 안 되거든 하나님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과 행복과 사랑을 나누라고 하면 인간의 마음에 탐욕이 들고 일어나서 안돼! 못해! 그것은 할 수 없어. 못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 40절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고 말해도 하나님께 하라는 것은 하겠지만 이웃에 하라는 것은 탐욕 때문에 해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난 6월 9일 동아일보에는 “국숫집 운영 오형섭 씨 부부 토요일엔 공원서 식사대접”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왔는데 오형섭, 현진이 씨는 국숫집을 하면서 토요일에는 주변의 노숙인과 장애인, 홀몸 노인 100여 명에게 따뜻한 밥 한 끼를 대접했습니다. 원래는 사업을 하던 오형섭 씨는 사업에 실패하고 국숫집을 하면서 난방도 하지 못하고 겨울을 지내는 등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 했기 때문에 자기 마음속에 “몸과 마음이 추운 사람일수록 저 어려운 생활을 어떻게 지낼까?”는 동정심이 생겼습니다. 이 부부는 지난 2007년 1월부터 토요일마다 밥 한 끼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국수를 먹으러 왔던 손님들도 감동해서 함께 국수를 하는데 도와주고 나누는데 도움을 준 것입니다. 일부의 사람들은 몇 만원의 돈을 가져와서 보태주기도 한 것입니다. 오형섭 씨 부부는 영구임대아파트에 살며 국숫집을 운영해서 번 돈의 많은 부분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점심 봉사에 썼습니다. 그러므로 현씨 가족의 생활은 아직 그리 넉넉하지 못한데도 불구하고 이 부부가 하는 말은 “우리가 아낀 만큼 더 많은 이웃들이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행복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오늘날 전 세계적인 경제 위기 가운데에서 먼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처럼 내가 가진 것으로 가난하고 헐벗고 소외된 이웃에게 사랑과 행복을 나누는 길밖에는 인류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나눈다는 것 듣기는 쉽지만 하기는 힘든 것입니다. 제가 나누는 이야기를 하니까 여러분 얼굴이 다 달라지네요. 나눈다는 것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이야말로 예수님이 한 말이 참말입니다.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만큼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으면 사람이 변화되어서 행복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힘이 생겨난다는 것이 다른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 15절로 17절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큰일입니다. 내가 말만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 나누어 주고 행복을 함께 하는 일을 안 하면 내 믿음은 헛것 된 믿음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많이 나누어주든지 적게 나누어주든지 그것이 차이가 아니라 우리가 행복을 주고 나누는 마음을 가져야 믿음이 참 믿음이지 욕심 중심으로 사는 것은 참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6장 38절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결국 우리가 하나님 방법으로 사는 방법은 나누어 주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더 복을 준다는 것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돌려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눌러 흔들어 넘치게 해서 안겨 주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참 좋은 말 같이 들리지만 실천을 하라고 하면 실천하기가 힘듭니다.
고린도후서 9장 6절로 9절에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
흩어 가난한 자에게 주었는데 가난해 지느냐. 가난해지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너희가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해주겠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내가 먼저 축복을 심으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더 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착한 일을 넘치게 해주겠다. 그러므로 주라 그리하면 돌려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눌러 흔들어 넘치게 하여 안겨 주리라. 이 진리는 예수 안 믿는 사람 모릅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은 내가 끌어안고 손에 쥐고 모아야 잘살지 나누어주면 안 되는 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우리가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고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기 때문에 주님께서 심는 자에게 먹을 양식과 씨앗을 주시고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도록 축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생활과 안 믿는 생활의 다른 점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예수 믿는 신앙의 은혜가 없는 공산주의는 망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 믿는 신앙의 정신이 없는 자본주의도 망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어떤 주의라도 주님의 사랑을 그 마음속에 품지 않는 주의는 망합니다. 공산주의도 결국 망했고 자유민주주의도 오늘날 시련에 부딪쳐서 흔들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속에 우리의 것을 이웃과 나누는 사랑과 행복을 나누는 마음이 있어야 그 다음에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적게 나누면 적게 거두고 많이 나누면 많이 거두는 것입니다. 교회도 한가지인 것입니다. 우리가 나만 예수 믿고 우리 교회만 부흥되면 된다고 열심히 잘 믿고 우리 교회만 부흥 되냐 하면 부흥되지 않습니다. 열심히 주의 종을 내보내고 선교사를 내보내고 교회를 세우고 선교지에 복음을 전파하는 이러한 선교사역에 우리 교회가 자꾸 나누면 하나님이 그 일을 잘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 교회를 자꾸 축복해 주는 것입니다. 자꾸 더 많은 사람 보내고 더 많은 헌금이 들어오게 되고 더 하나님의 복을 받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지 않는 사람과 믿는 사람이 다릅니다. 믿지 않는 세계와 믿는 세계가 다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그러한 관점으로 인생을 보지 않습니다. 내가 끌어 모으고 쥐고 있어야 되지 절대 남에게 주면 안 된다는 것이 안 믿는 사람들이 사는 원리인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은 내게 있으면 남과 나누자. 이웃과 나누자. 우리가 복음도 나누고 물질도 나누고 행복도 나누자. 나누면 나눌수록 풍성해지고 움켜쥐면 움켜쥘수록 점점 적어지는 것입니다. 기쁨은 나눌수록 많아지고 슬픔은 나눌수록 적어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것을 못합니다. 사람은 못하지만 하나님은 하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9장 26절에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사람은 나누라고 하면 못 나눕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할 수 있습니다.
스가랴 4장 6절에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야훼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야훼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하나님은 성령을 주셔서 우리에게 이 하나님의 은총을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성령을 받으면 변화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 32절로 35절에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여기에 보십시오. 오순절날 성령이 임하여 성령을 받고 사람들에게 큰 변화가 다가왔습니다. 자기 집도 팔고 밭도 팔고 논도 팔아서 그 돈을 사도들에게 가져와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므로 교회 나오는 사람 중에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더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유토피아적인 세계인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 마음에 사랑과 행복을 나누겠다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조금씩 나누어 갖다. 나누어 먹자. 나누어 입자. 나누어서 살자. 그 운동이 일어나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이 없어지고 평준화 되어서 잘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더 나누는 일을 하기 위해서 축복을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최근 심리학자들은 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건강하고 행복하며 장수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행복하고 장수한다. 어떻게 그러느냐. 연구결과를 발표했는데 남에게 줄 줄 아는 사람들이 고통과 아픔도 적게 느끼고 정신적으로 더 건강하며 스트레스도 적고 질병에도 덜 걸린다는 것입니다. 미국 미시간대학의 학자들이 5년간 400명의 노인 부부들을 상대로 연구한 결과, 다른 사람들을 돕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수명이 훨씬 더 길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연구의 책임자인 브라운 교수는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이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행복과 사랑을 나누면 여러분이 오래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1999년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2천여 명을 대상으로 봉사활동 여부에 대한 결과를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두 개 이상의 단체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향후 5년간 죽을 확률이 63%나 줄어든다는 놀라운 결과를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이 봉사하는 사람 더 오래 살아 더 많은 봉사하라고 생명도 길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생명을 길게 해주시는 하나님이 물질을 왜 더 주지 않으며 사업을 더 번창하지 않게 해주시겠습니까? 자꾸 주어야 사업이 번창하는 것입니다. 나누어야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공산주의도 실패하고 자본주의도 실패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가 성공하려면 나누어줘야 되는 것입니다. 부자가 되는 것은 얼마든지 되라고 격려해요. 얼마든지 부자가 되십시오. 많은 직장을 만들어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많은 수입을 얻어서 많이 나누어 주십시오. 병든자를 위해서 가난한 자를 위해서 교육을 위해서 어린이들을 위해서 많이 나누어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얼마나 부자가 되어도 좋고 또 하나님이 자꾸 부자가 되게 해주시는 것은 그런 좋은 일을 더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인생을 보는 눈을 변화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언젠가 방송에서 아주 훈훈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몇 해 전, 대구에는 요술 쌀 단지가 있었는데, 마음껏 퍼내도 결코 바닥을 드러내지 않는 쌀 단지입니다. 쌀가게가 가난한 동네에 있었는데 하루는 어린아이가 굶어서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너무나 마음이 아파서 쌀 단지를 문밖에 내놓고 그 쌀 단지에다 글을 써 붙였습니다. ‘누구든지 배고픈 사람은 이 쌀을 공짜로 퍼가십시오.’ 얼마 있지 않으니까 쌀 단지가 비었어요. 그래서 계속 쌀 단지를 채웠습니다. 그런데 희안한 일이 생겼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쌀 단지에 주인이 붓지 않아도 언제나 가득해 있어요. 왜 그러느냐. 쌀을 사가는 사람이 나갈 때 반드시 그 쌀 단지에 쌀을 좀 부어놓고 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쌀 단지에 언제나 쌀이 꽉 들어차 있고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은 쌀 단지에 와서 쌀을 마음대로 퍼가서 그래서 요술 쌀 단지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소문이 나서 각 동리마다 쌀집에서 요술 쌀 단지를 시행했는데 그것이 지금까지도 잘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나누기 시작하면 이 운동이 전체로 전개되어서 수많은 사람이 나누게 되고 사회가 훈훈하고 잘살게 되는 사회가 된다는 것을 저는 그것을 읽고 느낀 것입니다. 인간이 사는 세계는 두 가지 사상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주의를 통해서 공산주의가 좋다. 사회주의가 좋다. 자유민주주의가 좋다. 자본주의가 좋다. 다 말합니다. 다 인간의 이상은 잘 먹고 잘 살고 공평하게 사는 것이 이상과 꿈입니다. 그러나 자기는 욕심을 딱 가지고 나는 내놓고 너희들끼리 나눠서 잘살아라. 나는 내 놓아라. 공산주의도 공산주의 지도자들은 얼마나 잘삽니까? 공산주의의 지도자들은 호화만장하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맘대로 잘 살테니까 국민 여러분은 전부다 물질 내놓고 나눠서 잘 살아라. 말이 되는 것입니까? 자유민주주의도 서로 재산을 소유할 수 있지만 경쟁이 심해서 잘사는 사람은 얼마든지 잘사는데 못 사람은 굶주려 죽고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립니다. 안됩니다. 인간의 주의와 주장으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이 변화되어서 사랑과 행복을 나눌 수 있게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조그만 것이라도 나눌 수 있게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 나눌 수 있게 되려면 마음이 변화되어야 나눠요. 마음이 어떻게 변화됩니까? 성령 받아야 변화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성령 받아야 마음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아야 이웃의 동리에 교회를 세우기도 하고 주의 종을 보내기도 하고 해외 선교사를 파견하고 헌금하기도 하고 마음이 변화되어야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에게 사랑과 행복을 나누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이 일어나지 않은 이상 인간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결론>
인간이 만든 주의는 불완전한 것입니다. 정부가 전능하지 않는 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탐욕과 욕심은 힘으로도 능으로도 제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셔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게 되면 변화의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이 임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사랑과 나누기 운동을 많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림동산을 통해서도 사랑과 행복을 나누고 굿피플을 통해서 온 세계적으로 사랑과 행복을 나누고 사랑과 행복 운동을 위해서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과 사랑을 나누고 호스피스를 통해서 가난하고 병들어 가는 사람을 도와주고 나누고 있습니다. 이런 나누기 운동을 많이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자꾸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수적으로 자라고 물질적으로 자라고 성도들이 들어오고 나가며 꼴을 얻고 축복을 받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간단한 것 같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인 것입니다. 행복과 사랑을 나눠야 나도 행복해지고 나도 잘살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움켜쥐고 행복과 사랑을 나 혼자만 가지겠다고 하면 나도 불행해지고 생활이 어려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착한 일을 하면 너무나 기뻐하시고 박수를 치고 오냐 잘한다. 점점 더 잘하기 위해서 내가 더 복을 주마하고 복을 남김없이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우리 생활에 복음도 나누고 물질도 나누고 생활의 행복도 나누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 같이 기도드리겠습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인간이 만든 주의는 불완전하기 짝이 없습니다. 공산주의도 불완전하여 망했고 자본주의도 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두다 사람의 마음이 변화되지 않는데 환경적인 주의를 아무리 새롭게 만들어도 그것이 인간에게 진실한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예수 믿고 성령 받아 마음이 변화되어 사랑과 행복을 나눌 마음이 생기면 인생의 문제는 해결되게 되는 것입니다. 공산주의도 예수 믿어야 성공하고 자본주의도 예수 믿어야 성공합니다. 예수 없는 주의는 성공하지 못하고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성령 받고 사랑과 행복을 나누는 우리, 복음을 나누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자나 깨나 나누는 운동에 참여해서 행복하고 건강하고 장수하고 기쁘게 사는 우리들이 다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구원에 실패한 부자 청년
마태복음 19:16-22 / 이진영 목사
서론
어느 날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청년은 “어느 계명을 지켜야 합니까?”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청년이 “나는 이 모든 것을 다 지켰는데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청년은 재물에 대한 욕심 때문에 근심하며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구원을 추구하는 부자 청년의 잘못된 방법과 물질에 대한 탐심입니다. 부자 청년은 율법과 행위로 구원을 받으려고 했고 영생보다 재물을 사랑했기 때문에 구원에 실패한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구원에 실패한 부자 청년”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부자 청년은 율법과 행위로 구원을 받으려 했기 때문에 구원에 실패했습니다.
어느 날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물었습니다.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 선한 일! 이것은 율법과 행위를 의미합니다. 이 사람은 구원의 원리나 구원의 방법을 묻는 것이 아니라 율법과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는 전제하에 구체적인 율법의 행위를 물은 것입니다. 율법과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유대인들의 구원관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태어나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고 선한 일을 하고 공적을 쌓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레위기 18:5). 인간이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면 율법을 통해서도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절대로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없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연약하고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율법과 행위로는 구원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구원을 받는 방법이 무엇이냐? 세상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 죄를 지시고 내 죗값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는 역사적 사실을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자 청년은 예수님께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유일한 구원의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율법과 행위로 구원을 받겠다고 한 것입니다. 인간이 죄에서 구원받는 데 가장 치명적인 장애물이 무엇이냐? “죄에서 구원받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선한 일을 하고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적선사상(積善思想)과 공적사상(功績思想)입니다. 그래서 율법과 행위와 공로를 강조하고 거기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과 행위로는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율법과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율법의 이율배반적인 속성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율법의 이율배반적인 속성이 무엇이냐? 율법은 인간을 의인으로 만드는 법이 아니라 인간을 죄인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많이 지키고 죄를 적게 짓는다고 의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백 가지의 율법 중에 아흔아홉 가지를 지키고 한 가지만 어겨도 율법은 죄인으로 규정합니다. 사람들이 율법의 이율배반성을 모르기 때문에 율법과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께서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다.”고 탄식하신 것입니다(로마서 7:9-10). 바울 사도도 율법의 이율배반적인 속성을 깨닫기 전에는 자신이 선하고 의롭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가말리엘이라는 대학자에게 율법을 공부했고 바리새파에 속했습니다. 바리새파는 정복자들의 종교적 탄압과 헬라와 로마의 이방 문화로부터 이스라엘의 종교와 율법을 지키기 위해 일어난 무리입니다. 바리새파는 그들의 종교와 율법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릴 정도로 종교와 율법에 열심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태어나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면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율법을 지킨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다메섹(시리아의 다마스커스)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거듭나는 은혜를 체험한 후 비로소 율법의 이율배반적인 속성을 깨달았습니다(사도행전 9장). 바울 사도가 율법의 이율배반성을 깨닫고 나니 죄가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전에는 자기가 의로운 줄 알았는데 율법의 원리를 깨닫고 나니 그가 행한 것이 다 죄였습니다. 그래서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다.”고 탄식하신 것입니다. 부자 청년은 예수님께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청년도 회심하기 전의 바울 사도처럼 율법과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율법과 행위로는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을 수 있다면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겠습니까? 부자 청년은 율법과 행위로 구원받으려고 했기 때문에 구원에 실패했습니다. 구원의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믿음이 진실하지 못한 위선자는 참된 기쁨과 만족과 평화를 누리지 못합니다.
신앙의 목적은 죄에서 구원받고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는 것입니다. 구원과 영생의 기쁨은 예수를 영접한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이 땅에서도 신령한 기쁨과 만족과 평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해도 마음에 기쁨과 만족과 평화가 없다면 신앙생활을 잘못하고 있든지 이단종파에 빠졌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부자 청년은 참된 기쁨과 만족과 평화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나름대로 열심을 냈지만 기쁨과 만족과 평화를 누리지 못한 것입니다. 부자 청년이 왜 참된 기쁨과 만족과 평화를 누리지 못했느냐? 신앙이 진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본문과 병행구절인 누가복음 18:18,에 의하면 이 부자 청년은 관리입니다. 관리는 회당을 관리하는 사람으로 종교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흠이 없고 지혜를 두루 갖춘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에서 관리는 선망과 동경의 대상입니다. 그리고 이 청년은 돈이 많은 부자입니다. 이 사람은 건강 물질 명예 등 사람들이 원하는 것들은 다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마음에 기쁨과 평화가 없고 참된 만족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청년이 왜 평화와 기쁨과 만족을 누리지 못했느냐? 신앙이 진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거짓과 위선으로 인간은 속일 수 있어도 자기 양심은 속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은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재판관이기 때문입니다. 이 청년이 진실하지 못한 위선자라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과 청년의 대화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묻자,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청년이 “어느 계명을 지켜야 하느냐?”고 묻자 예수님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청년은 “.......내가 이 모든 것을 다 지켰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을 말씀하셨느냐? 부자 청년이 인색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은 사랑의 계명입니다. 십계명의 1계명부터 4계명까지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계명이고 5계명부터 10계명까지는 인간에 대한 사랑의 계명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계명을 잘 지켰는지 지키지 않았는지는 하나님만 아실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계명이나,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계명이나, 하나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계명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계명은 인간의 형식주의와 위선 때문에 인간은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가장 악하고 불의한 위선자가 인간의 눈에는 거룩하고 의롭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계명은 하나님만 아실 수 있습니다.
반면에 인간에 대한 계명은 인간의 안목으로도 어느 정도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계명은 드러나지 않을 수 없고 인간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다 지켰다는 청년에게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란 말은 ‘네가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고 싶으면’이란 뜻입니다. “네가 진짜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고 싶으면 네 제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전지하신 예수님은 부자 청년의 인색함과 재물에 대한 탐심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부자 청년에게 “네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자 청년처럼 믿음이 진실하지 못한 위선자는 참된 기쁨과 만족과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이 그 사람을 심판하고 정죄하기 때문입니다. 거짓 없는 진실한 믿음을 가져야 참된 기쁨과 만족과 평화를 누리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부자 청년은 영생보다 재물을 사랑했기 때문에 구원에 실패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자, 청년은 재물 때문에 근심하고 돌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는 “네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부자 청년에게는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돈과 물질에 대한 탐심으로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도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재물 때문에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작은 왕국의 왕에 버금가는 재물과 권세를 소유했습니다. 또 예수님께 무덤을 제공한 아리마대 요셉도 부자였고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의 공회의원으로 돈과 권력을 소유했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은 재물과 권력을 가지고도 신앙생활을 잘했습니다. 그러나 부자 청년은 재물에 대한 탐심으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들에게 재물을 나누어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 사람에게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진짜 믿음인지 형식적인 믿음인지 인간은 알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는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과 전지하신 예수님만 판단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믿음에 겸손해야 합니다. 절대로 자기 믿음에 자만하면 안 됩니다. 자만하는 사람은 구원이 의심스러운 사람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와 장로와 권사 중에 “저런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 생각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새벽마다 약 50분 정도 기도를 하는데 고맙고 감사해서 가슴이 저리도록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도 있고, 영적으로 맞지 않고 구원이 의심되어서 답답하고 숨이 막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 믿음 자랑하며 온갖 못된 짓 다하면서 회개도 하지 않고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하는 인간이 구원받고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 목사나 교인이나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부자 청년은 영생보다 재물을 사랑했고 천국보다 이 세상의 영화를 사랑했습니다. 영생과 천국보다 재물을 사랑한 사람이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진짜 구원받은 사람은 재물이나 명예나 세속적인 것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영접한 후 그의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부자 청년의 신앙은 하나님과 재물이라는 두 주인을 섬기는 신앙입니다. 부자 청년은 하나님과 재물 중 어떤 주인을 선택했습니까? 재물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구원에 실패했습니다. 천국과 영생보다 재물을 사랑한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가겠습니까? 천국과 영생보다 재물을 사랑하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첫째, 부자 청년은 율법과 행위로 구원받으려고 했기 때문에 구원에 실패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율법이나 인간의 행위로는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구원의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믿음이 진실하지 못한 위선자는 참된 기쁨과 만족과 평화를 누리지 못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신앙이 진실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베풀고 사는 사람이 참된 기쁨과 만족과 평화를 누린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부자 청년은 천국과 영생보다 재물을 사랑했기 때문에 구원에 실패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 여러분에게 주신 물질의 축복이 신앙생활에 장애물이 되지 않도록 지혜롭게 잘 관리하시고 잘 활용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리이까
마 19:16~22 / 김광일 목사(벧엘교회)
‘목사님! 전도가 너무 쉬워요’는 손현보 목사의 저서입니다. 이 책에 ‘고추밭을 뽑힌 권사님’이라는 일화가 나옵니다. 권사 임직을 할 때 손목사가 당부합니다. “권사의 직분은 중요한 사명입니다. 대통령이 되는 것보다 하나님이 주신 직분이 더 중요합니다. 새벽기도에 나오셔서 교회를 위해 기도하십시오.”그런데 임직한 권사가 기도를 나오지 않습니다. 이유를 물었더니 바쁘다고 합니다. 성도들에게 물으니 “그 권사님은 고추 농사를 지으십니다. 얼마나 지극 정성으로 고추농사를 지으시는지 근방에서 제일일 겁니다. 아침저녁으로 고추밭에 가서 벌레도 잡고, 물도 주고, 약도 쳐주느라 바쁘답니다.”권사를 불러 다시 물었습니다. “권사의 직분도 제대로 못하면서 고추밭은 날마다 가신다면서요? 고추농사 때문에 바쁘시다면서요? 그게 그렇게 중요합니까? 고추에는 관심이 있고 하나님의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까?” 아무리 설득해도 바뀌지 않습니다. 어느 날 기도를 하는데 “네가 하나님의 종이라면 그대로 두면 안 된다. 고추를 다 뽑아버려라”는 마음을 주십니다. 그건 좀 심하다싶어 그냥 넘어가려는데 계속해서 그 마음이 떠나지를 않습니다. 고추밭을 찾아갔는데 고추농사가 잘되어 있었습니다. 손목사는 웃통을 벗고 손으로 고추를 뽑기 시작했습니다. 두세 시간 뽑으니 손에 물집도 잡히고 너무 더워 더 이상 할 수 없었습니다. 어느 정도 남겨두고 돌아갔는데 난리가 났습니다. 권사가 고추밭을 보고 “내가 누구하고 원수를 졌기에 이런 일이 생기나?”라며 실성한 사람처럼 되어 있다는 겁니다. 손목사가 갔더니 권사가 분을 내며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평생 원수 진 사람이 없는데 어떤 죽일 놈이 고추를 다 뽑아놓았습니다. 혹시 그 놈이 집에 불이라도 놓으면 어떻게 합니까?” “권사님, 실은 그 죽일 놈이 접니다.” “왜 목사님이?” “권사님은 지금까지 수십 년 예수 믿고 권사까지 되셨는데,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 죽으신 것 때문에 감격한 적이 있습니까? 권사님은 고추밭 때문에 심장이 떨리고 치가 떨린다고 하셨는데 예수 믿고 이렇게 심장이 떨린 적이 있으셨나요? 옆 사람이 지옥 가는 것이 안타까워 고추밭 뽑힌 것처럼 가슴이 찢어진 적이 있습니까?” 그러자 그가 조용히 눈을 감고 있더니 손목사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목사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고추가 뭐라고...” 다음날부터 새벽기도를 나오기 시작했으며 열심히 전도를 하더니 세례 받게 한 사람이 11명이나 되었습니다. 사람마다 고추밭은 다를 것입니다. 직장이나 사업일 수 있고, 자녀일 수도 있습니다. 바쁘게 만들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몰두하지 못하게 한다면 다 고추밭입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데 걸림이 된다면 스스로 뽑아야 할 것입니다.
부자 청년은 젊음, 재물, 명예를 다 얻었지만 구원의 확신이 없어서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한 채 살아가는 불신 세대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청년은 바리새인들처럼 공적에 의해 의롭게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 랍비들은 계명 중에도 영생에 이르는 계명이 있는 가하면 영생에 지장이 없는 어겨도 별 상관없는 계명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끊임없는 기도와 율법과 시편암송, 노인들에 대한 공경을 통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청년은 메시야 왕국에서 영생할 수 있도록 하는 고상한 행위가 무엇인지를 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대답을 들은 청년은 재물을 더 의지하였기에 순종치 못하고 근심하며 돌아가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같이 주님을 찬양하기 원합니다.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내 주되신 주 앞에 나가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내려놓고 주님만 사랑해 주 사랑 거친 풍랑에도 깊은 바다처럼 나를 잠잠케 해 주 사랑 내 영혼의 반석 그 사랑 위에 서리”
우리가 주인 삼은 것들은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들로 인하여 바빠진 것은 아닙니까? 자신이 만든 신앙의 틀에 갇혀 자신이 원하는 행위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드러난 외형적 크기나 숫자가 아닙니다. 신앙의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의 질문에 대답하신 예수의 명령은 과연 무엇입니까?
첫째로 계명을 지키라
유대인들이 전해주는 이야기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자기가 언제 죽을지 가르쳐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거절하셨지만 워낙 아끼는 사람인지라, 최후의 날은 안식일이 될 것이라고 귀띔하셨습니다. 그 날 이후 다윗은 안식일마다 계명을 연구하는 데 시간을 바쳤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이 정하신 날이 되자 죽음의 천사가 다윗을 찾아왔습니다. 다윗은 계명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탈무드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든 계명에 매달리고 있는 동안에는 죽음조차 범접할 수 없었습니다. 천사는 틈을 노렸지만 다윗은 좀처럼 틈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죽음의 천사는 마침내 계략을 꾸몄습니다. 정원에 있는 나무를 흔들어 살랑거리는 소리를 냈습니다. ‘저 소리의 정체가 뭐지?’ 궁금증을 참지 못한 다윗은 사다리를 세워놓고 나무에 오르다가 미끄러져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충격 때문에 계명인 토라를 암송할 수 없었고 그 순간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유대인들이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지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현실이 아무리 힘겨워도 하나님의 계명을 놓치지 않는 한 유대 민족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계명의 불꽃을 꺼뜨리지 않았기에 어떤 시련 가운데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랍비가 제자들에게 들려주는 계명을 통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으로서의 자부심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계명을 지키며 사는 것이 생명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17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계명을 지킴으로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생명에 들어갈 자, 곧 구원 받을 자는 계명을 지키는 생활을 하는 자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되는 계명을 다 지킴으로 영생의 삶을 살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계명의 명령자이신 하나님과 계명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야 합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맹목적이고 외형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계명의 정신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계명의 참된 순종만이 생명에 들어가는 길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계명의 문자적 해석이나 실행이 아니라 계명의 영적 깊이와 넓이를 이해하는 일이 중요함을 알라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입니다.
둘째로 소유를 나누라
카이로 빈민가에서 23년을 보내고 1993년 프랑스로 돌아온 엠마뉘엘(Soeur Emmanuelle) 수녀의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곳이라 할 수 있는 이집트 카이로의 빈민가에서 23년을 보냈습니다. 물도 전기도 없는 낡은 양철집에서 가난한 자들과 고락을 함께 했습니다. 카이로 시 주변 공동묘지에 찾아가 그 곳에서 생활하는 빈민들을 섬겼습니다. 그 곳 사람들은 가난한 중에도 언제나 즐겁고 유쾌했습니다. 구차하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서로 섬기고 돌봐주며 서로 나누었습니다. 엠마뉘엘 수녀도 그들의 그런 모습을 보며 기쁨과 보람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로 돌아온 엠마뉘엘 수녀는 뜻하지 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물도 전기도 없는 가난한 카이로 빈민들은 삶의 기쁨을 누리고 살아가고 있는데 반해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부유한 프랑스 사람들은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세금도 불만이요 행정관리에도 불평이요 교통요금이나 휘발유 가격에도 부아를 끓였고 학교 교육의 질에도 못마땅해 했고 아이들이나 배우자에게도 짜증이었습니다. 카이로 빈민에 비교하면 프랑스 국민들은 최상의 문화와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카이로 빈민에 비하면 프랑스 사람들의 월급이나 일자리는 최상이요 최고였습니다. 그런데도 사회 계층의 꼭대기에서부터 밑바닥에 이르기까지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누는 마음이 없는 사회는 풍요로움 가운데서도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 21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여기의 ‘온전하다’는 ‘텔레이오스’ 인데 도덕적 완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능과 부족을 통감하고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께 의탁함으로 이루어지는 온전입니다. 예수께서는 재물과 하나님을 함께 섬길 수 없음을 아셨습니다. 재물이 많을수록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의지하게 되어 차차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됩니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라는 명령은 천국에 관한 종말의식을 갖지 않는 다면 실천이 불가능합니다. ‘가서 팔아 나누라’는 것은 온전함을 얻기 위한 전제조건이었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율법을 순종하면서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온몸과 뜻과 정성으로 행하지 않았음을 깨닫고 회개해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늘의 보화를 언급하시면서 부자 청년의 마음이 땅의 재물에서 해방되는 순간부터 영생의 삶이 보장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를 따르라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 선교사는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사람의 가슴에 감동을 주는 선교사입니다. 탁월한 수재였기에 25세의 나이에 모교로부터 교수 초빙을 받았습니다. 같은 해 보스톤에 있는 큰 교회로부터 담임목사 청빙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두 곳을 다 거절했습니다. 선교사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결혼한 지 보름 만에 아내와 함께 인도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인도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선교사라는 이유로 쫓겨났습니다. 다시 배를 타고 미얀마로 떠났습니다. 항해 도중에 아내는 유산을 했고 랑군에 도착했을 때는 들것에 실려 배에서 내려야만 했습니다. 그곳에서 저드슨 부부는 복음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아이를 낳았는데 몇 달되지 않아 열병으로 죽였습니다. 그러나 저드슨은 낙심하지 않고 사역에 최선을 다하다가 그만 감옥에 끌려 들어갔습니다. 창문이 없는 캄캄하고 더러운 감방에서 고생을 했습니다. 감옥에 있는 동안 아내는 건강을 해쳐 그가 출감한 직후 37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저드슨은 낙심하지 않고 복음을 위해 사역하다가 자신도 병들어 견딜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요양을 하려고 고국으로 가는 배를 탔지만 병이 악화되어 선상에서 숨지고 말았습니다. 저드슨의 삶은 이렇게 끝이 났습니다. 차라리 대학교수로 갔더라면, 차라리 큰 교회 목회자가 되었다면 얼마나 행복한 삶을 살았을까? 그러나 저드슨 부부는 진정한 복을 놓치고 싶지 않아 세상 복을 포기하였습니다. 불교 국가인 마얀마에서 최초로 성경을 만들어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데에 쓰임 받았습니다. 1850년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죽어갔으나 100년 후 교인들이 20만 명이 넘는 결실을 보았습니다. 부인은 가장 귀감이 되는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저드슨 부부야말로 진정으로 주를 따른 자의 모습이 아닙니까?
본문 21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계명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행위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따르는 것으로 이루어져야 됨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의 명령은 궁극적으로 예수를 따르는 제자직과 연결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의 길을 제시하실 때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따라야 합니다. 세속적인 기대와 세상적 인연에서 해방되어 오직 예수께 자신의 전부를 맡기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고 더불어 사는 삶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나 부자 청년은 잠시 보장된 현재 때문에 영원히 보장된 영생을 잃어버리는 선택을 하였습니다.
에콰도르의 아우카족 선교를 하다가 순교한 짐 엘리엇(Jim Elliot)은 일기에 다음과 같은 구절을 남겼습니다. “영원히 남을 것을 소유하기 위하여 영원히 잡을 수 없는 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바보가 아니다 (He is no fool who gives what he cannot keep to gain what he cannot lose)” 누가 진정한 부자입니까? 여전히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잠깐 있을 것을 영원히 있을 것처럼 붙잡고 있는 어리석은 부자청년의 모습은 아닙니까? 영원한 것을 위해 일시적인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영원히 남을 것을 위해 세상적인 것을 포기하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합니다.
계산하지 말고 염려하지 말고 감사로 주를 따르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고집스러운 신앙의 틀을 벗어나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어리석은 부자 청년의 모습이 우리 가운데 있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부디 예수께서 명령하시는 뜻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계명을 삶으로 지키시기 바랍니다. 가진 소유를 나누는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기를 부인하고 끝까지 주를 따라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마태복음 19:16~22 / 이수영 목사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 사람은 여러 가지 면에서 보기 드물게 잘난 사람입니다. 본문 20절과 22절에서는 그를 “청년”이라 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그를 “관리”라고 말하는데(눅18:18) 이것은 높은 공직을 가진 지도자급 인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는 사회적으로 신분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본문 22절에서는 그가 “재물이 많았다”고 합니다. 젊은 나이에 이미 명예와 권력과 부를 다 거머쥐었다면 그는 비범한 사람임이 틀림없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마가복음은 그가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물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막10:17). 이를 보아 그는 예의범절에 있어서도 아주 훌륭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높은 관직에 있고 재산이 많다고 해서 거들먹거리거나 거만한 자세로 주님을 대한 것이 아니라 공손하고 예의를 갖출 줄 아는 것을 볼 때 교양 있고 가정교육을 잘 받은 사람 같습니다. 또 본문 16절에 보면 그는 예수님께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질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삶에 관해 깊이 있고 진지한 관심을 갖고 사는 고상한 사람인 것으로 짐작케 합니다. 더 나아가 그는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계명들을 잘 지키라고 말씀하시자(본문 17-19절) 대답하기를 “이 모든 것을 내가 지켰다”(본문 20절)고 할 만큼 신앙적으로도 철저하고 모범적인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만큼 완벽하게 갖출 것 다 갖추고 흠잡을 데 없어 보이는 사람을 또 찾아보기란 대단히 힘들 것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그가 만일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더라면 수제자 자리는 필경 그에게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나를 따르라.” 하셨지만(본문 21절) 그는 그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갔습니다(본문 22절). 세상적으로는 크게 성공한 인생이었을지 몰라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일에 있어서는, 다시 말하면 신앙적으로는 실패한 인생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은 사실은 부러워할 것이 없습니다.
인간적으로는 훌륭하게만 보일 이 사람이 예수님 앞에서 드러내 보인 문제점이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로, 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인식과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선한 선생님이여!” 한 데 대해 예수님께서는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하시며 의외로 냉담한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반응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당시 랍비들 사이에서는 오직 하나님만 선하신 분으로 여겼기 때문에 랍비들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예수님을 향하여 “선한 선생님이여!”라고 부르려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과 같은 이로 믿는 믿음을 가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비록 그 부자청년관원이 “선한 선생님이여”라고 예수님을 잔뜩 예의를 갖추고 호칭을 최고로 높여 부르기는 했으나 그에게는 예수님에 대한 참된 인식과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것을 꿰뚫어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는 나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과 동일하게 믿지도 않으면서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지 않으냐?”고 되물으셨던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둘째로, 그에게는 구원과 영생에 관한 바른 이해가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묻기를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했습니다. 즉, 영생을 어떤 선한 행위를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엇을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말씀만 하십시오. 저는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습니다.” 하는 것이 그의 속생각이었을지 모릅니다. 그 사람이 갔을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19:26) 하신 것처럼 구원과 영생은 우리 자신의 선행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인데 그 사람은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셋째로, 그는 자기가 율법의 행위에 있어서 완전하다는 자기도취에 빠져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계명을 말씀하셨을 때 그는 대답하기를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나이까?”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율법준수가 얼마나 형식적이고 피상적인 것이었는지는 예수님 자신의 지적을 통해 잘 드러납니다. 본문 2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 청년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스스로는 계명을 다 지켰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사실상 그에게는 계명의 참 뜻이며 계명 중의 계명인 이웃에 대한 사랑과 관심과 헌신이 결여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넷째로, 그에게는 바른 가치관의 정립이 없었습니다. 그는 무엇이 더 가치 있고 본질적이며 궁극적인 것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시는 하늘에서의 보화를 붙잡기보다는 이 세상에서의 물질적 부와 그 향유에 더 집착했습니다. 재물에 대한 그의 애착은 그의 젊음, 그의 명예, 그의 교양, 그의 율법적 행위들을 모두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의 그 물질욕은 그로 하여금 주님 앞에서 기쁨과 평안을 얻기보다는 슬픔과 근심을 갖게 했습니다. 믿음은 현재 가진 것 다 가지고 그 위에 영생을 하나 더 보태 갖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모든 것에 우선하게 하는 가치관의 변화가 믿음입니다. 무엇을 취하거나 무엇을 사용하거나 하나님나라를 위하여 하며, 하나님의 나라와 상관없는 것들은 기꺼이 버릴 줄 알게 되는 삶이 믿음인 것입니다. 그 부자 청년 관리에게는 이러한 바른 믿음에 따른 가치관이 서있지 않았기 때문에 슬픔과 근심의 길로 떠나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와서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고 여쭈어 보았지만 사실 그의 그 질문은 인생에 관한 그의 깊고 진지한 진리추구의 관심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그가 가지고 누리던 그 권세, 명예, 재산이 너무 좋고 그것을 잃지 않고 영원히 갖고 누리고 싶은 욕망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닌지 의심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청년 부자 관리가 예수님께 던진 질문은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계명들을 지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 청년은 자기가 모든 계명을 지켰다고 하며 아직도 무엇이 부족한지를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청년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그는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여 갔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권면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그 청년이 자기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지 못하는 것 때문에만 영생을 얻지 못할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말씀하신 다음에 이어서 하신 말씀에도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즉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신 말씀입니다.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따르며 그의 제자가 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기억하고 깨닫고 그 뜻대로 실천하며 사는 것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됨에 관하여 하신 두 가지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입니다.
하나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과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어떤 상황에서 나온 것인지를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 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시고 제삼일에 살아나셔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처음 알리셨을 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하며 말하기를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하자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마16:21-23) 이어서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과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말의 뜻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다른 말씀을 생각하게 됩니다. 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고 그의 의를 구할 때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가 무엇일지도 알게 될 것입니다.
다른 한 가지 말씀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5)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도 결국은 사랑의 십자가일 것입니다. 열심히 서로 사랑함으로써 주님의 제자임과 영생을 누릴 하나님나라 백성임을 드러내 보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복음을 위해 지갑을 찢어라
마 19:16-22 / 양인순 목사
지난 주 금요일 미래목회 포럼 조찬기도회에 참석했습니다. 종교개혁 495주년을 맞이하여 한국교회의 미래를 고민하며 모인 자리입니다. 먼저 이사장이신 종교교회 최이우 목사님께서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지난 4년 동안 감리교단은 감독회장 선거로 갈등과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후보자간의 비방과 세상 법정 싸움으로 장로교회의 장로가 감리교회 임시회장이 되는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어렵게 이루어진 금번 총회에서 의미있는 결정이 이뤄졌습니다. 지금까지 감리교단은 세습이 아주 자연스럽게 이뤄졌습니다. 물론 세습이냐 계승이냐의 찬반논쟁이 있기도 하지만 이것은 교회의 치부를 말할 때 단골메뉴였습니다.
감리교 신학교에서 이런 자조적인 말이 나왔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목사, 장인이 장로면 성골, 아버지만 목사면 진골, 양쪽 모두 없으면 백골...이런 농담이 회자될 정도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런데 이번 감리교 교단에서 처음으로 담임목사직을 아들이나 사위에게 물려줄 수 없다는 것을 감리교 장정에 추가 했습니다.
그 결과 더 이상 기득권의 세습이 허용되지 않는 교단이 되었습니다. 개척교회를 섬기던 아버지가 아들에게 교회를 대물림하여 목회를 한다고 문제가 될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대기업에서 재벌이 자녀들에게 변칙으로 부를 세습하듯이 교회에서조차 자식이나 사위에게 대형교회의 기득권을 물려주는 것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거셌습니다. 그것을 근본적으로 차단했다는 점에서 크게 환영받을 일입니다.
이어서 루터의 종교개혁 495주년을 기념하여 김동호 목사님의 특강을 들었습니다. 높은뜻숭의교회를 4개로 분리해서 한국교회에 신선한 자극을 준 분입니다. 저희 교회에도 여러번 초청을 해서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김목사님은 스스로를 가리켜서 ‘돈을 잘 뜯어내는 목사’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자기보다 돈을 잘 뜯어내는 목사는 없다고 자부합니다. 그런데 그 뜯김이 강요나 억지가 아니라 가난한 자를 도와서 생명을 살리자는 것이기에 모든 사람들이 기쁨으로 돈을 뜯겨준다는 것입니다.
김목사님이 자신이 최근에 쓴 책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책의 이름이 이채롭습니다. <복음을 위한다면 지갑을 찢어라>입니다. 그 책의 제목을 이렇게 자극적으로 정한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자기 교회 청년들이 아프리카의 말라위에 들어가서 단기선교 사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중에 스텝 한 명이 안식년을 맞아 한국에 들어왔는데 말라리아가 창궐하여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마침 자기가 정성스럽게 돌보던 아이가 말라리아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슬퍼했습니다. 그 모습을 김 목사님이 보고 페이스 북에 그 안타까운 소식을 전했답니다. 그랬더니 수많은 젊은이들이 ‘속절없이 죽어가는 아프리카의 아이들을 생각할 때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이라고 댓글을 달더랍니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답니다. ‘아무리 가슴이 찢어지면 뭐하냐. 그렇다고 말라리아에 걸려 죽어가는 아이들이 살아나는 것도 아닌데’ 그래서 페이스 북에 이렇게 글을 올렸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릴 위해 몸을 찢으셨다. 그분의 찢기심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고 구원을 얻었다. 이제 신음하는 세상을 위해 우리 가슴을 찢자. 가슴만 찢지 말고, 우리 지갑도 찢자!” 그래서 ‘가슴만 찢지 말고, 지갑을 찢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마침 10달러짜리 모기장을 사서 보내주면 말라리아를 예방할 수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말라리아 예방을 위해 모기장을 사서 전해주자’고 일명 모기장 프로젝트를 제안했습니다. 그리고 은행 계좌를 페이스 북에 올렸더니 일주일 만에 5천만 원, 한 달 후 무려 7천 5백만 원이라는 돈이 모였습니다. 말라리아로 죽어가는 아이들을 살리는 생명의 모기장을 전달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강한 도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다 찢기셨습니다. 로마의 군병이 내리치는 채찍에는 날카로운 뼈와 쇠조각이 달려 있었습니다. 그 채찍으로 내리칠 때마다 온몸의 살을 찢기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채찍에 맞으심으로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 놀라운 사랑으로 구원받은 우리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위해서 나는 무엇을 찢고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찢어야 할 것인가?
그래서 오늘 설교의 제목을 <복음을 위해 지갑을 찢어라>로 정했습니다. 좀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제목입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따르고자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주제가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지갑은 은유적인 표현입니다. ‘지갑’의 의미는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꼭 필요로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만은 절대 안됩니다 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찢는다’는 것은 헌신을 말합니다. 주님을 위해 자신을 내어 놓는 결단을 의미합니다. 내가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우리도 지갑을 내어드리는, 우리의 지갑을 찢는 결단이 있어야 될 줄 믿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찢어야 할 지갑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시간의 지갑을 찢어라.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지갑 중의 하나는 바로 시간입니다. 세월이라고 표현해도 좋습니다. ‘시간은 금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시간을 돈을 주고 사지는 않지만 그 시간은 돈보다 소중합니다.
전에 교과서에서 나왔던 시간의 중요성을 말할 때 나온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서점에 책을 사러갔습니다. 정가가 찍혀 있는데 주인에게 책값을 깎아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분주하게 움직이던 주인이 안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다시 책값을 할인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주인이 정색을 하면서 오히려 정가보다 더 높은 값을 내라고 합니다. 손님이 화를 내면서 말합니다. ‘아니 책값을 깎아달라는데 오히려 더 많이 달라니 저를 놀리십니까?’ 그러자 주인이 말합니다. ‘저는 손님과 흥정할 시간이 없습니다. 저에게는 시간이 곧 돈입니다.’
그렇습니다. 똑같은 하루 24시간이 주어져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시간의 의미와 효용은 달라집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권면하십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5:15-16)
누가 세상에서 지혜로운 자일까요? 바로 ‘세월을 아끼는 자’입니다. 이 말의 헬라어 의미는 ‘돈을 주고 기회를 사라’입니다. 주어진 기회를 최선을 다해 이용하라는 뜻입니다(making the most of every opportunity).
다른 의미로는 ‘건져 올리다’입니다. 주어진 세월 속에서 무엇을 건져 올리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낚시를 하다보면 엉뚱한 것이 걸려 올라옵니다. 우리의 주어진 인생 속에서 엉뚱한 것을 건져 올릴 때가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녹화방송이 아닙니다. 언제나 생방송입니다. 주어진 시간과 기회를 최대로 활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이 자기에게만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 유익한 일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바쁘게 움직여도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라면 결국은 자신의 생명을 죽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언젠가 오늘 내 인생의 종착역에 다다릅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그 순간에 죽음의 그림자가 홍수처럼 밀려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주어진 시간을 무엇을 위해 써야할까요? 자신을 아름답게 관리하기 위해 시간을 투자하는 것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을 위해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루 24시간 중 주님을 위해서 얼만큼의 시간을 드리고 있는지요?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시간이 구별되어 있는지요? 무엇보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얼만큼의 시간을 드리고 있는지요?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평양 대부흥운동이 일어날 때 <날 연보>을 드렸습니다. 돈을 드리지 못하면 자기 시간의 일부를 작정하여 전도하는 일에 힘을 썼습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의미 없는 것을 낚으려고 몸부림치는 인생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가치있는 일에 시간을 투자하시기 바랍니다. 주어진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시간의 지갑을 한 번 찢어보십시오. 기도하는 일, 말씀을 묵상하는 일, 예배드리는 일, 남을 섬기는 일, 생명을 살리는 일에 투자해 보십시오. 그것이 하늘 보화를 쌓는 복된 일이 될 줄 믿습니다.
둘째로, 재능의 지갑을 찢어라.
하나님께서는 각자에게 은사를 주셨습니다. 남보다 무언가를 잘 할 수 있는 재능을 주셨습니다. 은사는 개발을 하면 개발할수록 더 능력이 나타납니다. 아무리 좋은 은사라도 활용하지 않으면 없어지고 맙니다. 아무리 튼튼한 근육을 가지고 있어도 두달만 깁스를 하고 있으면 근육이 사라지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은사의 근육도 사용하지 않으면 소멸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은사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이유를 설명해 주십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11-12)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이유는 봉사의 일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기 위함입니다. 이 두 가지 일을 준비시키려고 은사를 주셨습니다. 한마디로 은사를 주신이유는 자신의 유익을 위함이 아니라 공동체를 섬기라고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해 섬기라고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와 재능을 지금 누구를 위해서 사용하고 있는지요? 우리는 종종 나에게 유익하고 도움이 되면 봉사합니다. 그러나 손해가 된다고 생각하면 그만두기 쉽습니다.
하나님이 은사를 주신 이유는 바로 남을 섬기기 위함입니다. 남을 섬기는 데는 자기 희생이 따라야 합니다. 자기의 시간을 드려야 하고, 재능을 쏟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가 속한 공동체가 건강해집니다.
세상에서도 요즘은 재능기부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기술이나 능력이 있으면 환경이 어려워서 도움을 받지 못하는 자들에게 나눕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재능을 나누는 가운데 기쁨과 보람을 느낍니다.
하물며 주의 자녀된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로서 우리에게 특별한 선물로 주신 재능을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사용하는 것은 너무나 소중합니다.
교역자를 제외하고 교회에서 하는 모든 일은 다 자원봉사입니다. 주방에서 주일 봉사자들에게 일당을 지급하지 않습니다. 청소를 한다고 돈을 주지 않습니다. 꽃꽂이를 한다고 선물을 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주의 전에서 하는 모든 일은 자신의 주어진 직분과 재능을 가지고 섬기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수고와 섬김이 교회를 든든히 세워가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은사와 재능을 사장시키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를 돌아보시고 내 눈에 거슬리는 것이 보입니까? 그게 보인다는 것은 내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관심이 없는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보고도 누군가 하겠지 지나갑니다.
내가 거슬리고, 부담이 된다는 것은 사명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좋지 않은 모습이 보이거든 ‘아 이것은 내게 주신 사명이구나. 내가 바로 섬김으로 아름답게 변화시켜야 될 부분이구나’ 이렇게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한 번 정성껏 섬겨보십시오. 그곳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사랑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십시오. 남이 보지 않는 곳, 손길이 머물지 않는 그곳을 내가 한 번 섬겨보십시오. 원망이나 불평으로 나타내지 마시고, 바로 그것을 위해 나의 재능과 은사를 활용해 보십시오. 우리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그 사랑의 섬김이 성지교회를 아름답게 만들어 갑니다. 우리 모두 재능의 지갑을 찢어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길 때 아름답게 변화되고, 회복되는 은혜가 나타날 줄 믿습니다.
셋째로, 재물의 지갑을 찢어라.
시간의 지갑과 재능의 지갑보다 더 찢기 어려운 것이 바로 재물의 지갑입니다. 현대자본주의 시대의 핵심에는 자본, 돈이 중심에 있습니다. 사람들의 사고가 항상 돈을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공부를 해도 돈, 일을 해도 돈, 무엇을 해도 돈과 연관을 시킵니다. 돈벌이가 되면 마음이 움직이고, 몸이 움직입니다. 그러나 돈이 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모으려고 애를 씁니다. 이것이 바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올바른 재물관을 가져야 합니다. 천지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재물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물론 우리들의 노동의 댓가가 지불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수고하고 애를 써도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헛수고입니다. 농부가 아무리 땀흘려 농사를 지어도 태풍이 한 번 휩쓸면 허사가 되고 맙니다. 내가 직장에서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그 회사가 갑자기 부도가 나면 실직자가 됩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됩니다. 내 손이 수고하는 대로 얻게 하시는 하나님의 복이 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재물은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임시로 맡겨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선하고 바르게 좋은 일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하고 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가 될 수 있습니다. 재물의 노예로 살지 않고 주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한 부자 청년의 딜레마를 소개합니다. 이 청년은 영생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에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는 청년이 종교의 문제,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다는 자체가 대단합니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그 부자청년은 어떤 계명을 지켜야 하는지 되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십계명의 말씀을 통한 하나님 사랑과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쳐주십니다. 그러자 이 청년이 놀라운 대답을 합니다.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20절)
그는 종교적으로 열심히 특심한 자입니다. 젊은 부자가 하나님의 계명을 자신있게 지켰다고 말할 수 있다는 자체가 놀랍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직격탄을 날립니다. 21절 말씀을 다같이 읽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마19:21)
지금까지 부자 청년이 영생을 얻기 위한 행동은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아무리 계명을 지켰다할지라도 그 속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재물의 지갑을 찢지 않는 한 그의 모든 종교적 행위는 가짜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형제를 사랑한다 해도 내 지갑을 털어서 필요를 채우지 않는 한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한다면 네가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늘에 보화를 쌓는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바로 그 재물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못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청년의 반응을 보십시오.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마19:22)
여기에 부자 청년의 딜레마가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할렐루야!’ 기쁨으로 간 것이 아니라 근심하며 갔습니다. 그 후로 이 부자 청년은 성경에 다시 등장하지 않습니다. 결국 부자 청년은 주님보다는 재물을 더 귀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가 행한 모든 행위는 종교적인 쇼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게 됐습니다. 아마 침례교인이었던 같습니다. 목사님이 물에 집어넣으려고 하는 순간 “잠깐만요” 외쳤습니다. “제 지갑을 좀 빼 놓고요” 그러자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바로 그 지갑이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진정 주님을 따르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려면 지갑이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재물을 바르게 사용해야 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많은 재물을 가졌다 할지라도 부자로는 오랫동안 기억되지 않습니다. 그가 하나님이 주신 재물을 어떻게 선용했느냐를 기억합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주인공 오스카 쉰들러(Schindler)는 히틀러의 만행 앞에서 유대인을 구출할 계획을 세웁니다. 그는 쉰들러 리스트-자신이 건져내야 할 유대인들의 목록을 만들고, 자신의 모든 재산을 바쳐서 생명을 건집니다.
그의 마지막 돈을 다 털어 유대인들을 기차에 태워 보낸 후, 그는 선로에 앉아 하염없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로를 터벅터벅 걸어오다가 무심코 자기의 손가락에 끼어진 금반지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소리칩니다. “내가 이것을 왜 끼고 있지? 이 금반지를 팔았더라면 한사람의 생명을 더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이것을 내가 왜 끼고 있지?” 통곡합니다.
잊을 수 없는 것은 그 마지막 장면입니다. 그는 자신이 구해내지 못한 유태인들이 끌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내게 돈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한 사람은 더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마지막 메시지를 아시지요. “한 영혼을 구한 것은 우주를 구한 것이다.”
예수님은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우주를 건진 것과 같다는 의미입니다. 쉰들러 한 사람의 고귀한 노력이 죽어가는 수천의 유대인들의 목숨을 구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죄가 죄인 줄도 모르고 멸망의 길로 달려가는 사람들을 위하여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쉰들러는 유태인과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살리고자 자신의 재물을 다 털었습니다. 자신이 게을러서, 좀 더 돈이 있었더라면 더 많은 생명을 건질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자신을 향해 통곡하며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런데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믿고 있는 우리들은 지금도 세상에서 방황하는 영혼들, 죽어 가는 영혼들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쉰들러는 다 주고도 더 주지 못한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립니다. 그 쉰들러의 사랑의 섬김과 눈물이 수많은 생명을 살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쉰들러를 본적이 없지만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를 기억하고, 생각합니다.
무디 신학교의 총장을 지낸 조지 스위팅 박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죽을 때 우리가 묻게 될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얼마나 벌었는가? 가 아니라 그의 나라를 위해 얼마나 드렸는가? 가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얼마나 벌어서 모아놓았느냐가 아닙니다. 얼마나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하늘에 쌓았느냐 입니다. 주님께서 이 시간 저와 여러분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는 지금 나를 위해 하늘에 무엇을 쌓고 있느냐?”
사랑하는 성지가족 여러분! 우리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시간, 재능과 재물의 지갑을 무엇을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까?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바로 그 지갑이 주님을 위해 쓰여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내 지갑을 찢지않고 주님을 섬긴다는 것은 단지 부자청년처럼 종교적인 행위에 불과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자신의 몸을 찢으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으로 우리는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마리아처럼 옥합을 깨트려야 할 때입니다. 잠시 있다 사라질 것을 붙잡고 떠는 인생이 아니라 그것을 복음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드려진 만큼 하늘에 보화를 쌓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마음만 찢는 자가 아니라 소중히 여기는 지갑을 찢어야 합니다. 그 결단과 행동하는 믿음이 생명을 살리는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우리 모두 복음을 위해 지갑을 찢는 헌신과 결단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영생의 길
마 19:16-17 / 김태복목사
오늘 초청 받아 저희 교회를 방문하신 분들에게 진심으로 환영의 인사를 드립니다. 오늘은 처음 오신 분들이나 교회 나오신 지 얼마 안 되는 분들을 위해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교회를 나오지 않는 분들에게 “교회를 나오셔서 영혼 구원을 받으시지요?”라고 하면 세 가지 반응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천국과 지옥이 어디 있습니까? 나는 그런 것은 안 믿습니다.”라고 반응을 나타냅니다. 그런 분들은 아직도 세상에 대한 미련이 강한 분들이라, 죽음 후에 천국이 있든지, 지옥이 있든지 별로 관심이 없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이 땅에서 천년만년 살지 못합니다. 어느 날인가, 다 죽습니다. 요즈음 우리나라는 고령화 속도는 더욱 빨라졌습니다.
65세 이상 노년인구는 4백36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9.3%입니다. 출산율은 계속 떨어지는 데 비해, 이제는 의약의 발달로 대부분 80세나 90세 이상을 사시기 때문에 앞으로 우리나라가 노인 국가가 되지 않을까 염려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노인들에게 가서 “가장 큰 관심사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무엇이라고 답할 것 같습니까?
대부분의 노인들은 “병들지 않고 건강하게 살다가 잠자는 듯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하실 것입니다. 모두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어느 나이 많은 목사님을 통해서 이런 재미난 이야기를 들어 보았습니다. 한번은 지하철을 탔는데 왜 노인이 쪽지를 하나 주고 가더랍니다. 제목은 “인생은 70세부터”라고 한 다음, 다음과 같은 글이 담겨 있더랍니다.
“80세에 저승사자가 찾아오거든 집에 없다고 하라. 저승사자가 90세 찾아오거든 너무 이르다 하라. 100세에 찾아오거든 때가 아직 안 되었다 하라. 110세에 찾아오거든 내가 알아서 간다고 하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는 죽음을 초월하고 사는 모습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싫든 좋든 어느 날인가 다 죽는 날이 옵니다.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됩니까? 성경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천국에 가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지옥에 간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믿든지 안 믿든지 관계없이 천국과 지옥은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 신자들은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오늘 처음 오신 여러분들이여, 영원히 살 수 없는 이 세상보다는,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시는 영생의 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어느 분은 너무나 죄를 많이 지어서 믿을 수 없다고 대답합니다.
아마, 이 분들의 생각에는 교회는 아주 선한 사람들만 다니는 줄 압니다. 그러나 사실은 교회는 자기가 죄인들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성경 롬3:10에는 이 세상에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또한 성경은 요일서1:9에서는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줄 믿고 회개하는 자들은 어떠한 죄라도 용서함 받는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똑같이 십자가형을 당한 죄인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도 없으시면서도 우리 죄를 위해 대신 십자가형을 당하셨지만, 그 죄인들은 무서운 살인 강도였습니다. 그러므로 일생 죄만 짓다가 결국 최고형인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오른 편에 못 박힌 강도가 예수님에게 회개하면서 기도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간청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이 악한 자여, 너는 무서운 살인강도가 아닌가? 너는 죄값으로 지옥 가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약속 하셨습니다. 분명히 천국에 갈 것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너무 많아서 천국에 갈 수 없다는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앞에 나아와 십자가를 의지하고 회개하는 자는 진홍같이 붉은 죄가 있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씻어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오늘 초청받아 나오신 분들이 이처럼 복된 약속을 믿고 모든 죄를 회개하심으로 영생의 복을 받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어느 분들은 “모든 종교는 다 똑같지 않습니까?
그리고 모든 종교가 요구하는 것은 선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말하면서 자기는 다른 종교를 믿고 있고 선하게 살려도 힘씀으로 천국이 있다면 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오늘 읽어드린 성경 말씀을 보면 예수님 앞에 한 청년이 와서 영생의 길을 묻고 있습니다. 이 청년은 세상적으로 보면 아주 훌륭하고 성공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신랑감으로 친다면 최상급입니다. 그는 부자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모든 계명을 지켰다고 고백하는 것을 볼 때에 정상적인 방법으로 노력하여 부(富)를 축적한 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상당히 경영능력이 뛰어나고 대단히 성실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눅18:18에 보면 관원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마 율법을 전공한 율법학자로써 그 당시 산헤드린 공회 의원이 될 정도의 뛰어난 지도자로 볼 수 있습니다. 공회 의원은 요즈음 식으로 말하면 국회의원과 같은 직책입니다. 요즈음 지방선거기간인데 벽에 붙어 있는 포스터를 보거나 연설을 들어보면 다 훌륭한 사람들 같아서 어느 분이 말하기를 다 찍어주고 싶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진정으로 나라와 지역을 위해서 진실과 성실로 일할 사람을 선출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청년은 젊은 나이에 그런 성공한 자리에 앉은 것을 보면 탁월한 인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 위치에 있으면 교만할 만도 한데, 막10:17에 보면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영생 문제를 물었던 것을 보면 겸손의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울러 저는 현세적인 성공으로 만족하지 않고 영원한 삶에 대해서도 갈급하게 사모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도덕인이요 종교적인 지도자였다. 그러한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진지하게 구도(求道)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습니까?”라고 묻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엇을 보더라도 훌륭한 이 청년을 향해서 말씀하시기를 “세상에서 너처럼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훌륭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노라. 너와 같은 사람이 영생의 복을 받지 않고 누가 받겠는가?”라고 치하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의외입니다. “영생에 들어가려면 계명을 지켜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자신 있게 대답하기를 ”계명들을 다 지켰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 너무나 어려운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그것으로 부족하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려면, 네 소유를 다 팔아서 네 가난한 이웃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아와라” 그러한 말씀을 듣자, 청년은 재산이 너무 많음으로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행위로서는 결코 영생을 받을 수 없다는 예수님의 선언과 같은 것입니다. 그 사실을 부자 청년이 돌아간 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23절 “부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간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아무도 행할 수 없는 것을 부자 청년에게 가혹하게 요구하셨습니까?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묻는 태도가 처음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생의 방법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청년은 묻기를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청년은 처음부터 영생의 방법은 오직 선한 행위를 온전히 나타내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자기 행위로 부자도 되고, 자기 행위로 오늘의 자리까지 출세하고, 열심히 계명을 지킴으로 존경받는 지도자가 되었음으로 천국 가는 길도 그 방법으로만 가능하다고 믿으면서, 예수님께 “내가 무엇을 더 행하여야 구원 받겠습니까?”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네가 그렇게 행위로서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자신 만만한가?”
“그렇다면 최고의 선한 행위를 나타내기 위해 네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 주고 그 다음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만약에 이 청년이 예수님의 요구를 듣고 고민하다가 결국 재산을 다 팔아 어려운 자들에게 다 나누어 주었을지라도, 예수님은 목숨을 바치라는 더 큰 행위를 요구하셨을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영생의 길은 무엇입니까?
영생을 얻기 위해서서는 자기는 아무 자격이나 능력이 없음을 자인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율법을 통해서 구원 받으려고 하다가 결국 롬7:24에 와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했습니다. 바로 그러한 자기 절망의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사망의 몸에서 건져낼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이심을 고백하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은 나름대로 영생의 길을 찾으려고 예수님께 왔지만, ‘영생이냐, 영벌이냐?’의 갈림길에서 결국 세상 것으로 인해 영벌의 길을 가게 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님께 와서 “내가 아직도 무엇을 부족합니까?”라던 영적 교만심을 버리고, 주님 앞에서 “주여, 어떻게 구원 받을 수 있습니까?”라면 갈급한 심정으로 물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할 때에 “주님, 그 일만은 도저히 못 합니다. 불가능합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다른 길로는 영생의 길이 없습니까?”라면서 갈급한 심정으로 물었다면, 주님은 너무나 쉬운 믿음을 통한 영생의 길을 가르쳐 주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천국에 들어가려면 선행을 많이 쌓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불교나 유교, 다른 종교들은 거의 그런 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만은 너무나 분명하게 영생을 얻는 방법은 선한 행위로 되는 것이 결코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 데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14:6에서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시면서 자기만이 유일한 영생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느냐, 안 믿느냐에 따라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느냐, 지옥에서 영벌을 받고 사느냐로 판가름 되어지는 것입니다.
6.25사변 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북한군이 쳐들어 와서 대구와 부산, 마산을 제외한 모든 국토가 점령당했으나 유엔군이 참전함으로 북진하여 통일을 눈앞에 두었으나, 난데없이 중공군 100만 명이 참전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후퇴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미군은 애국지사들과 반공주의자들을 북한에서 탈출하게 위해 해군 함정 LST를 흥남 부두에 갖다 대고 승선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함정의 승선능력은 1만 명인데 그 날 배를 타려는 사람이 10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할 수 없이 기독교인들만 먼저 태우기로 작정하고 그 일을 해군 군목 보킬 선교사에게 맡겼습니다. 보킬 선교사는 함정과 육지 사이에 외나무다리를 만들어 놓고 신자인가, 아닌가를 심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라고 물으면 “나의 구주가 되십니다.”라고 답변하면 합격하여 태웁니다.
어느 때는 주기도문을 외워보라고 하기도 하고 아는 찬송가를 불러보라고도 합니다. 과거에 선한 일을 많이 했느냐? 아니면 죄를 짓고 살았느냐를 묻지 않고 기독교인인가, 아닌가만 테스트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분은 “우리 형님이 장로님입니다.” 혹은 “우리 동생이 교회 집사입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아무리 선행을 많이 했을지라도 다 불합격되어 탈 수가 없었습니다.
승선 거부를 당한 사람들은 발만 동동 구르며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부터 그 지긋지긋한 공산치하에서 살아야 되기 때문입니다. 외나무다리에서 테스트 받은 것은 1분도 걸리지 않았으나, 불합격된 사람들은 공산치하에 거의 55년 동안 지옥 같은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승선한 사람들은 남한에 와서 자유롭게 살 수가 있었습니다.
천국과 지옥의 생활은 55년과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날들입니다. 지금 흥남 부두 같은 이곳에서 예수님을 믿느냐, 아니냐에 따라 천국이냐 지옥이냐, 영생이냐, 영벌이냐로 갈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 오신 분들은 모두 예수님을 믿으시기로 작정하심으로 천국에서 영생의 복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특별 보호를 받습니다. 마치 미군 함정에 탄 사람들은 그 때부터 한국 국민의 자격을 받을 뿐 아니라 특별 보호를 받는 것과 같습니다. 흥남 부두에서 함정에 승선한 사람들은 밥이나 치즈, 과자 우유 등 푸짐한 음식이 주어졌고 입을 옷과 잠자리가 주어진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믿는 사람들은 천국 시민으로 인정하시고 특별 보호하십니다. 세계 모든 나라들을 보십시오. 잘 사는 나라들은 거의가 기독교를 믿습니다. 반대로 종교를 잘못 택함으로 고통 받는 나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불교 종주국 인도는 너무나 비참한 나라가 되었고 중동(中東)의 국가들은 회교 때문에 얼마나 종교 굴레에 매여 있습니다.
특히 그 중에 여인들의 고통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 반면, 기독교를 잘 믿고 있는 나라들은 얼마나 잘 살고 있습니까? 전 세계 170개국 중 선진국은 약 30개국인데 이 나라 중 90%가 기독교 국가들입니다. 이는 기독교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은 탓입니다. 아니 멀리 갈 것도 없이 남한과 북한을 비교해 보십시오. 북한은 얼마나 비참한 나라가 되었습니까?
사실, 60년대만 해도 북한이 남한보다 더 잘 살았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얼마나 경제 격차가 큰지, 지난해 남한과 북한의 1인당 국민소득 격차가 12.7배를 기록, 전년보다 0.7배 확대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통계청은 20일 발표한 ‘2000년 남북한 경제 사회상 비교’ 자료를 통해 “남한의 1인당 국민소득이 지난해 9628달러를 기록한 데 비해 북한은 757달러에 그쳤다”고 발표했습니다.
또 무역총액은 남한이 북한보다 169배가량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남한은 경제적으로 세계 10위권 안에 들고 있지만, 북한은 세계 모든 나라 중에 거의 끝에 가 있습니다. 아니, 딴 것을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농사만 따져 봐도 너무나 분명합니다. 남한과 북한은 같은 기후대요, 토질이 똑 같습니다.
그런데 남한은 계속 풍년이 든 반면, 북한은 거의 20여 년 동안 계속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이 굶어죽는 일이 발생함으로 남한과 세계 앞에 거지처럼 손을 내미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연동교회 이성희 목사님이 8월에 북한에 갔을 때, 밭에 옥수수가 열리어서 가서 만져보았더니 껍데기만 있고 열매는 거의 없더랍니다. 참으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우연입니까? 아닙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과거 북한은 모든 동리마다 교회가 서 있었으나 공산치하가 되면서 모두 폐쇄했고 기독교인들을 체포하여 수용소에 보내거나 총살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 버림받은 땅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나라와 아닌 나라가 차이가 이렇게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잘 믿는 가정은 천대까지 복을 받는다고 성경은 약속하고 있습니다.
오늘 초청받아 나오신 분들이여, 여러분들도 천국이냐, 지옥이냐, 영생이냐, 영벌이냐로 나누어지는 외나무 같은 갈림길에서 오늘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하심으로 영생의 복과 특별히 보호를 받는 복을 받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내 인생의 주인
마 19:16-22 / 박찬길목사
로마대학의 로스쿨 졸업반에 다니는 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감당할 길이 없어서 '필립 네리'라는 부자 노인을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합니다. 네리 노인은 젊은이의 요청을 들어주기로 허락한 후에 이런 질문을 합니다. '젊은이, 이 돈으로 무엇을 하려는가?' 젊은이가 대답합니다. '예, 우선 법대를 마치려고 합니다.' 노인이 계속해서 질문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예, 변호사가 되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집을 짓겠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결혼을 해야죠.' '그리고 그 다음에는?' '자녀를 낳아서 교육을 시켜야지요.' '그리고 그 다음에는?' '점점 늙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 '
이 젊은이가 대답을 못합니다. 젊은 법학도는 순간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엔가 내 피는 식게 된다. 나를 위한 장례식이 있을 것이고 공동묘지에 무덤 하나가 더 늘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 영원한 망각이다...' 노인은 아무 대답이 없는 그 대학생을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사망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심판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영원이다. 예수 안에서는 영원한 천국. 예수 밖에서는 영원한 지옥이다.'
젊은이는 노인으로부터 이러한 말을 듣고는 문제가 생겼어요. 손에 돈을 들고는 있는데 마음이 편안하지가 않은 겁니다. 마음에서 "그리고 그 다음에는 영원이다." 이 말이 지워지지가 않는 겁니다. 고장난 레코드처럼 뇌리에서 떠나지가 않는 겁니다. 결국 젊은이는 현명한 결단을 내려서 로마 법대에서 우르반 대학으로 옮겨갔습니다. 거기에서 성경과 신학과 역사 그리고 철학을 공부하고는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로마 우르반대학의 대강당에는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리고 그 다음에는... 영원이다... 영원이다."이라는 글귀가 쓰여 있다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쯤은 영생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청년도 영생에 대해서 궁금증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예수님을 찾아와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에 대해서 묻습니다. 이 젊은이는 보통의 청년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과 동일한 내용이 마가복음 10장과 누가복음 18장에도 나오는데, 여기에 나오는 것을 종합해 보면 이 청년의 이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이 청년은 재산이 많은 부자였습니다.
22절을 보면 재물이 많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 청년이 가진 재물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인지, 아니면 돈버는 데에 탁월한 재주가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재산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청년은 일찍이 젊어서부터 재물을 많이 소유하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둘째로, 이 청년은 지위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18절에 보면 관원이라고 했습니다. 당시에 관원은 유대 회당의 지도자이거나 산헤드린 공회의 공회원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만일 이 청년이 산헤드린 공회의 공회원이라고 하면 오늘날의 국회의원입니다. 이 청년은 당시 사회적으로 상당히 출세한 사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셋째로, 이 청년은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청년에게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시지요. 살인하지 말아라. 간음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거짓 증언을 하지 말아라.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청년은 이 모든 것을 지켰다고 자신있게 대답합니다. 신앙적으로 대단한 열정이 있는 청년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이 청년은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갖고 싶어하는 것을 모두 가졌어요. 젊은 나이에 돈도 많지요. 출세도 했지요. 도덕적으로나 율법적으로도 모범생이지요. 재물과 권력과 명예를 모두 소유했어요.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미 성공한 인생을 살아가는 청년이었고, 성공을 향해서 탄탄대로를 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청년에게 예수님께서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21절입니다.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여러분, 이 청년은 당시 많은 종교지도자들과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적대적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올무에 걸려 넘어지게 만들까 궁리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젊은 나이에 권력과 재물을 거머쥐고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신앙적으로 겸손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보자마자 꿇어앉았다고 했습니다. 예의가 바른 청년이지요.
이 청년은 젊은이들과도 달랐습니다. 젊은 나이에 영생에 대해서 갈망하는 청년들이 많지 않거든요. 영생보다는 현재의 삶에 욕심을 냅니다. 자신의 비전을 이루는 데에 욕심을 갖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영생을 얻고 싶은 간절한 열망이 있었습니다. 이 청년은 오랫동안 고민하던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분으로 예수님을 생각해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 찾아와서 영생을 얻는 길에 대해서 묻고 있는 겁니다.
이쯤 되면 예수님으로부터 "네 믿음이 크도다" 칭찬을 받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에게 처럼 "이스라엘 중에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다"고 극찬을 하셨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은 지금 이 청년의 내면 깊은 곳을 보고 계셨던 겁니다. 이 청년은 외적으로는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세상으로나 율법적으로나 윤리적인 삶에서도 조금도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20절에 있는 말씀처럼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라고 말한 것을 보면 본인도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았다고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영생에 대하여 고민했던 이 청년에게 한가지 부족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내면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하여 소유를 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청년이 가지고 있는 많은 재물이 영생에 대한 열망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재물에 대한 욕구를 포기하지 않으면 영생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재물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영생을 얻는 것과 재물이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재물이 많으면 영생을 얻지 못하고, 재물이 없으면 영생을 얻는 것일까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핵심은 무엇일까요?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영생은 재물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지요. 예수님은 재물의 많고 적음을 가지고 영생을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지요.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요지는 물질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으면 영생을 얻을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청년은 외형적으로는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내면적으로 재물에 대한 욕구가 얼마나 강했는지 모릅니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면서 떠나갔다고 했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재물이 많기 때문에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갔다"고 하였고, 누가복음에서는 "큰 부자인고로 심히 근심하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청년에게 있어서 관심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었고 다른 하나는 재물이었습니다. 이 청년은 하나님과 재물, 두 신을 모두 섬기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크고 재산에 대한 애착도 큽니다. 어느 한쪽을 선뜻 선택할 수 있는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심각한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본질적으로 부인하는 거잖아요. 제일 중요한 계명을 어기는 거예요. 십계명의 제1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라고 했는데, 이 젊은이는 다른 계명을 다 지켰지만 가장 중요한 십계명의 제1계명을 어기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요?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요? 내 인생의 주인이 바뀐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까지는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었어요. 내가 집착하는 그 무엇이 내 인생의 주인이었어요. 내가 욕심을 갖는 그 무엇이 계속해서 나를 이끌어 왔어요.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내 인생의 주인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내 인생이 바꿔지는 것이 영생입니다. 이전까지 나에게 주인 노릇하던 것을 내 마음에서 내려놓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이 영생이요 구원인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이것을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이 청년이 비록 어릴 때부터 율법을 지키며 신앙적으로 살았다고 해도 그 내면에는 아직도 물질이 주인이기 때문에 주인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질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면 앞으로 계속해서 물질이 주인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지금 주인을 바꾸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면 이 세상의 모든 물질이나 재물은 내려놓아야 할까요? 소유가 많으면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지 못하는 것일까요? 물질이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면서 영생과 구원을 얻는 비결은 없을까요? 하나님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며 물질에서 자유하게 하는 비결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십일조입니다. 하나님은 성경 여러 곳에서 이 진리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십일조는 열개 중의 하나는 주님의 것이고 나머지 아홉은 내가 사용하는 것이지만, 십일조의 진정한 의미는 모든 물질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고백의 표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물질을 소유하고 있으면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지 못한다. 소유가 많으면 영생을 얻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물질을 소유하고 있으면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지 못할 것 같아서 아예 물질을 주지 않으시는 분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부요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창세기 1장 28절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고 제일 먼저 복을 주신 것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만큼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아서 잘 살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물질적으로나 여러 가지로 부요하게 살기를 원하면서도 거기에 영향받지 않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고백의 표시로 십일조를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십일조는 하나님을 물질의 주인으로 섬기는 성도의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젊은 청년을 통해서 물질이 아무리 많아도 십일조를 구별하는 사람은 물질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게 될 것이고, 물질이 적다고 해도 십일조를 구별하지 않는 사람은 물질이 주인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씀해주고 계신 겁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지켜주셔야 내가 안전하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다윗처럼 주님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집을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주님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된 일(시127:1)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시편 127편 2절에 있는 말씀처럼 주님께서 지켜주지 않으시고 보호해 주지 않으시면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눕는 것이 부질없어 지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먹고 살려고 애쓰며 수고해도 하나님이 지켜주지 않으시면 모든 일이 헛된 일이 되는 줄로 아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겨서 물질을 구별해야 하나님이 물질을 보호해 주신다는 것을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이 진리는 우리가 조금만 생각해 봐도 쉽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내가 쌓는다고 해서 쌓여지는 것이 아니잖아요. 내가 쌓는 것이 모두 쌓여지면 세상에 물질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살아보셔서 아시지만 하나님의 보호를 떠나면 물질도 내 손을 떠나지요. 지출되지 되지 않아도 되는 부분에 쓸데없이 지출되잖아요. 때로는 내가 알게 나가기도 하고 때로는 모르게 나가기도 합니다. 헛되게 나가는 거예요. 하나님이 지켜주지 않으면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저는 우리 좋은교회 모든 교우들이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며 살기를 바랍니다. 물질의 주인도 하나님으로 고백하기를 바랍니다. 이 믿음으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섬길 때에 복을 받는 거예요. 하나님이 쌓게 해 주셔야 쌓이는 거예요. 하나님을 물질의 주인으로 고백하며 드릴 때에 내 삶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형통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하면 십일조를 감당하며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길 수가 있을까요? 우리 삶의 수준을 조금만 낮추면 됩니다. 우리는 자신의 수준을 잘못 계산할 때가 있어요. 우리는 가끔씩 착각하며 살아요. 삶의 수준을 열에다가 맞추면서 살아요. 처음부터 십일조는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홉에다가 생활 수준을 맞추면 되는데, 계산을 잘못해서 열에 맞추고 삽니다. 이것이 맞는 계산 같지만 틀린 계산입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자신의 수입 수준보다 높이 삽니다. 욕심을 내서 인컴에 맞지 않게 삽니다. 듣기 거북한 이야기를 할까요. 여러분이 진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집을 사도 내 수준에 넘치는 것을 사고, 차를 사도 내 분에 넘치는 차를 삽니다. 방 하나면 되는데 두 개에서 살고, 두세 개면 되는데 욕심을 내서 네 개 다섯 개짜리에서 산단 말입니다. 그러니 돈이 모자라지요. 돈이 모자라니까 뭐부터 줄여요. 십일조부터 줄입니다. 헌금부터 줄입니다. 어리석은 일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위하여 내 생활을 줄여야지요. 부모가 자식을 위하여 생활비를 줄이는 것처럼, 교인은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의 생활비를 줄여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이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닐까요?
오래 전에 우리 청년 하나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비전도 크고 신앙도 좋았어요. 그런데 오늘 성경에 나오는 청년처럼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불러서 권면했습니다. "형제는 열심히 신앙 생활해서 좋은데, 혹시 십일조를 하지 못하는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느냐?" 사실 이런 이야기는 아무에게나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거든요. 아무에게나 하지도 않구요. 그 친구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합니다. 십일조를 하고 싶은데 생활비가 모자라기 때문에 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제가 들어보니까 여기저기 나가는 것이 많이 있더라구요.
그 때에 제가 소화하기 힘든 이야기를 했어요.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의 생활을 줄이는 것이다. 나 같으면 새차를 팔고 중고차를 타고 다닌다." 이 친구가 자신의 삶의 수준보다 나은 차를 타고 다녔거든요. 제가 계속해서 그랬어요. "자신의 수준에 맞지 않는 차를 사느라고 십일조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지 못한다. 나 같으면 생활을 줄여서 하든지, 중고차를 타고 다니는 한이 있어도 십일조는 감당한다" 제가 그 친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말 사랑하기 때문에 이야기를 한 겁니다.
이 친구가 이야기를 다 듣더니 그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목사님, 잘못했습니다. 다음주부터 하겠습니다" 그리고 정말 다음주부터 십일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친구가 십일조를 하기 위해서 생활비를 어떻게 조절했는지 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외형적으로는 그대로입니다. 차도 그대도 타고 다닙니다. 그럼에도 십일조는 지금까지 잘 감당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물질에 대해서 굳이 부자 청년에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당시에 물질이 많은 사람이 이 청년 하나뿐이었을까요? 여러 사람들이 있지 않았겠어요? 그럼에도 왜 이 청년에게만 말씀을 하셨을까요? 대체적으로 청년 때에는 자기의 비전을 먼저 이루려는 욕심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도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을 먼저 이루고 나서 그 다음으로 십일조를 드려야지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겁니다. 생활이 조금만 안정되면, 차를 사고 나서, 집을 사고 나서, 졸업하고 나서, 결혼하고 나서, 자식들 대학 졸업하고 나서..., 그 때에 가면 온전히 감당해야지. 장년들도 이런 생각이 있지만 청년 때에는 이런 마음이 더하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것을 너무나 잘 아시니까 젊었을 때부터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고백을 하며 살라는 뜻으로 오늘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겁니다.
여러분, 젊은 나이 때부터 하나님이 주인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청년 때부터 물질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십일조를 감당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자녀들은 부모님이 주시는 용돈에서부터 십일조를 감당하세요. 용돈에서부터 해야 나중에 돈을 벌면 하게 되는 거예요. 록펠러도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용돈에서부터 십일조를 했다고 하잖아요.
그 동안 마음은 원이었는데 하지 못하셨던 교우들, 한 동안 십일조를 감당하다가 중간에 쉬고 있는 교우들, 용기를 내서 다시 한번 시작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에게도 십일조 생활을 가르치기 바랍니다. 물질의 훈련은 젊어서부터 하는 것이 좋아요. 가정에서 어린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좋습니다. 이러한 훈련을 잘 받는 사람이 나중에 하나님의 큰 일을 감당하는 사람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주인은 누구이십니까? 무엇이 여러분의 마음에서 주인 노릇을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아 영생을 택하시겠습니까? 물질을 주인으로 삼아 물질을 섬기며 살아가시겠습니까? 여러분 인생의 주인과 물질의 주인은 하나님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는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아 십일조를 구별하는 신앙으로 승리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물질의 주인이 하나님이신 것을 가르쳐주시니 감사합니다. 물질의 주인뿐만이 아니라 내 삶의 주인도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굽게 믿고 살아서 영생을 얻는 데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영생을 소유함으로 하늘의 기쁨과 이 땅의 기름진 복을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확신없는 구도자
마 19:16-22 / 이정선 목사
저는 요즘 부쩍 이런 생각이 많이 듭니다. 나는 과연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가? 저도 50년 가까운 세월을 살았으니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만 가지고도 한 사람의 인생으로서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고, 최종적인 평가를 받기까지도 그리 많은 시간이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사는 모습이 잘 살고 있는 것인지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인생은 둥글둥글 그렇게 한평생 살다가 가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딱 한 번밖에 없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뿐인 이 인생을 잘못 살아버리면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잘못된 길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바른 길을 찾으려 하는 사람을 우리는 구도자라고 부릅니다.
여기 한 구도자가 등장합니다. 마태의 기록과 누가의 기록을 종합하면, 이 구도자는 젊은 사람이며, 관원입니다. 관원이라면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을 의미합니다. 또 돈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의 조건들을 여럿 구비하고 있군요. 젊은 사람이 고위직에 올랐고 거기다 돈도 많으니 요즘말로 하면 최고의 신랑감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 심각하게 물었습니다.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젊은이는 영생을 얻기 위하여 무척 진지하게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마가와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이 젊은이는 어려서부터 율법을 다 지킨 사람입니다. 그것이 영생을 얻는 방법인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어려서부터 열심히 율법을 다 지키고 살았지만, 아직 영생을 얻었다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마침 천국에 대해서 전파하는 예수라는 선생이 근처에 왔습니다. 그러니 만사를 제쳐놓고 찾아와서 묻는 것입니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더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사람들에게 천국을 주시기 위해서, 즉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젊은 구도자가 등장하기 직전에 누가 예수님을 만나러 왔던가요? 어린아이들이었어요(13절). 제자들 생각에 이 어린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손님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시는 천국에 대해서도 알지 못할 것이고, 그런 아이들에게 천국을 설명하는 것은 시간 낭비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을 내쫓으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어린아이들이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천국이 바로 이런 아이들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천국을 가져오신 예수님께서 천국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것 같은 어린아이들이 천국을 소유했다고, 또는 천국에 합당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곧바로 이 부자 청년 관원이 찾아와서 하는 말이, 자기는 어려서부터 영생을 얻으려고 열심히 율법을 지키며 살았는데, 아직도 천국을 소유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천국을 소유한 어린아이들과 천국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는 이 부자 청년이 아주 뚜렷하게 대비되고 있습니다. 이 청년이 얼마나 불행했을까요? 영생을 얻어야 한다는 것은 아는데, 그래서 영생을 얻기 위해서 그렇게 애를 쓰며 살았는데, 아직 영생을 얻은 것 같지 않단 말입니다. 그러니 가장 불행한 인생을 사는 사람 아닙니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영생을 얻었다는 확신이 있습니까? 영생에 관심이 없거나 영생을 믿지 않는 사람은 영생 얻지 못한 것 때문에 고민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생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영생을 얻고 싶은데 얻지 못했다고 생각되면 문제가 심각해지는 것이지요.
저는 어렸을 때 걱정이 많았습니다. 천국을 가기는 가야겠는데, 하나님이 나를 천국에서 안 받아주실 것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거짓말을 할 때도 있고 남을 미워하는 마음을 가질 때도 있으니까요. 그래도 한 가지 희망은 있었습니다. 어른이 돼서 더 착해지면 하나님이 천국에서 받아주실 것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목표로 삼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 더 착해집니까? 얼토당토 않는 소리지요. 어른이 된 지금 저는 그렇게 걱정하던 어린 시절보다 훨씬 덜 착합니다.
내가 구원 받았다는 확신을 가질 수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 자신을 구원의 근거로 삼기 때문입니다. 내가 뭔가를 해서, 즉 내가 계명을 지키고, 내가 착한 사람이 되어서 구원을 얻는다면, 구원 얻을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러니 이 젊은 구도자는 미칠 지경인 것입니다. 영생을 얻으려고 아무리 율법을 지켜도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입니다. 그러니 영생을 얻었다는 확신이 안 생기는 것입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얻습니다. 성경의 핵심 구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우리에게 보내주신 독생자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요한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 5:13).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주신다고 했어요. 그런데 예수를 믿으면서도 영생 얻은 것을 믿지 못하면, 믿는 것입니까? 믿지 않는 것입니까? 예수를 믿었으면, 믿는 자에게 영생 주신다는 것도 믿어야 할 것 아닙니까?
이 젊은이가 예수님께 한 질문을 보세요.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여기서 우리는 선의 개념부터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선이 무엇입니까? 악의 반대입니까? 나쁜 짓 안 하는 것이 선입니까? 아니면 좋은 일을 하는 것이 선입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의 개념은 본래의 선에서 파생된 2차적 개념입니다. 1차적인 본래의 선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영생을 얻게 하는 선은 본래의 선이신 하나님뿐이라는 것입니다. 2차적 개념으로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한 일을 가지고는 영생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내가 뭔가를 해서 구원을 얻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이십니다. 하나님의 모든 것이 선입니다. 우리는 2차적 개념을 가지고 1차적 개념을 규정하고 평가하는 오류를 저지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의 기준으로 하나님이 선한지 선하지 않은지를 판단한단 말이에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선이고, 하나님의 뜻이 선입니다. 그리고 그 선하신 하나님의 성품에서 파생된 구체적인 일들, 즉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우리 삶에서 시행되어야 하는 것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선의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살인하지 않는 것, 거짓말하지 않는 것, 도둑질하지 않는 것 등은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는, 즉 하나님의 선에서 파생된 2차적인 선이란 말이지요. 이 2차적인 선은 일반은총으로 인간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도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젊은이가 추구하는 선은 2차적 개념의 선(선한 일)입니다. 2차적인 선을 추구해서는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본래의 선이신 하나님(선한 이)을 추구해야 합니다. 진정한 구도자는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추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연구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꼭 적절한 비유는 아니지만, 그것은 마치 삼국지에서 섬길 주군 없이 천하를 떠돌던 조자룡이 유비를 만나서 그 수하로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 순간부터 조자룡은 완전히 유비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추구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삶과 운명을 맡기는 것입니다. 완전히 하나님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과 동화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처럼 우리도 거룩해지는 것이 최종적인 지향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것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선하신 하나님과 코드를 맞추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에 들어가려거든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이 구도자의 언어와 예수님의 언어를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젊은 구도자는 묻기를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하고, 예수님은 대답하시기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어떤 차이가 발견됩니까? 구도자는 영생, 즉 영원한 생명을 말하고, 예수님은 그냥 생명을 말씀하십니다. 영어로 life, 헬라어로는 조에(ζωή)인데, 우리말로 하면 생명, 목숨도 되고 삶, 인생도 됩니다. 우리말에서 목숨과 인생은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그만큼 세밀한 의사전달이 가능하지만, 그냥 life라고 하면 그 안에 더 많은 의미를 다양하고 풍성하게 담을 수 있는 이점도 있습니다.
젊은 구도자가 영생을 얻으려고 한다는 것은 현재 살고 있는 것도 생명인데, 그보다 나은 영원한 생명을 추구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그냥 생명이라고 하심으로써 영생만이 진정한 생명이라고 대답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생명은 죽음 가운데 잠깐 살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생명이라고 할 만한 것이 못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얼마나 진지하고 심각하게 영생을 추구해야 할 것인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는 말씀에 젊은 구도자가 묻습니다. “어떤 계명 말입니까?”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계명들은 십계명의 둘째 돌판에 새겨진 계명들입니다. 인간 상호간에 지켜야 할 계명들이지요. 계명은 하나님에 대한 것들과 인간에 대한 것들로 크게 나누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영생을 얻겠다는 구도자에게 인간에 대한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왜 하나님에 대한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는 말씀은 하지 않으시는 걸까요? 하나님에 대한 계명이나 사람에 대한 계명이 모두 중요합니다. 그런데 소위 영생을 얻겠다는 사람들은 주로 하나님에 대한 계명에만 충실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래서 종교적인 실천은 대단히 열심히 하면서, 이웃에 대한 계명은 별로 신경 안 쓰는 것입니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습니다만, 한 세대 전만 해도 악덕 고용주가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것이 큰 사회적 문제였습니다. 산업화를 최우선적인 국가의 아젠다로 상정하고 있던 시절이라서, 그런 일들이 정권 차원에서 방조 내지 묵인되었습니다. 한국 근대문학에서 최고의 작품으로 선정된 것이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라는 소설인데, 그런 시대적인 배경을 다룬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런 비도덕적인 일에 가담한 기독교인들이 참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작업환경은 열악하게 해 놓고, 거기서 일하는 여공들에게는 임금도 제대로 주지 않는 구로공단의 사업주가 교회의 유력한 장로라든가 하는 경우입니다. 교회에서는 충성하고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지만, 사업장에서는 악덕 기업주라는 도무지 조화되지 않는 현실을 아무런 가책 없이 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의 손에 목숨을 잃게 된 원인 가운데 하나는 당시 경호실장이었던 차지철의 권력 전횡이었다고 하는데, 차지철도 매우 신앙심이 깊은 기독교인이었다고 합니다. 신앙심 깊은 기독교인이라는 것과 권력을 가지고 전횡을 일삼는 것이 도무지 조화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은 뭡니까? 하나님에 대한 계명은 철두철미하게 지키면서, 사람에 대한 계명은 전혀 관심도 갖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이것이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계명을 지켜야 하느냐는 구도자의 질문에 예수님이 그렇게 대답하신 이유입니다.
그랬더니 이 청년 하는 말이 이렇습니다. ‘그런 계명은 제가 다 마스터했습니다. 그런데 그것 가지고는 영생을 얻었다는 확신이 안 생깁니다. 뭐가 부족한 걸까요?’ 이것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말씀을 아무리 많이 읽고 듣고 알아도 거기에 그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삶에 적용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차이에요. 예를 들어, 하나님에 대해서 알라고 하니까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연구를 많이 해가지고 하나님에 대해서 얼마든지 말할 수 있게 된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잘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그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 하나님과 더 깊고 풍성한 교제를 누리게 되었다면, 정말 하나님을 잘 알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이 젊은이도 마찬가지입니다. 계명을 다 지켰다고 했지만, 문자적인 의미에만 충실했을 뿐, 계명의 더 깊은 의미와 뜻에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수박 껍데기만 열심히 빨아먹었으니 어떻게 영생의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계명을 지킨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일러 주십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그랬더니 그 젊은이가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돈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이 사람이 심히 근심했다고 기록했고, 마가는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기록했습니다.
이 젊은이는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 세상의 가치, 즉 돈이지요. 그 가치와 천국의 가치 사이에서 갈등하고 방황하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삭개오 역시 돈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시고 천국의 가치를 접하게 되니까 세상의 가치를 아무런 주저 없이 내놓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의 가치에 비하면 세상의 가치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젊은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겠다고 하면서 생명이라고 할 것도 없는 죽음 가운데 잠깐 사는 이 세상의 가치에 발목이 잡혀 영생 얻는 것을 주저하고 있으니, 얼마나 바보 같은 일입니까?
제가 이 나이가 되니까 인생에 대해서 진지하게 돌아보게 된다고 했지요? 내가 이 젊은 관원처럼 구도자의 길을 가면서도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을 포기하지 못해서 정작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을 놓치는 것은 없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이 젊은 구도자에게 하시는 예수님 말씀의 포인트는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예수님이 아무한테나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따라오겠다는 것도 돌려보내십니다. 가서 일을 해야 할 사람이 있고, 따라와서 일을 해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 보시기에 이 구도자는 따라오라고 할 만한 사람이었던가 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실 때 그들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어부들은 그물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심지어는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다는 표현도 사용됩니다. 세관에 앉아 있던 마태는 따라오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일어나서 따랐다고 했습니다. 세관에 앉아 있던 사람이 일어났다는 것은 직장을 때려치웠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젊은 관원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하기에는 돈이 너무 많았는지 마음이 약했는지 모르겠지만, 평생을 구도자로 살아오던 인생이 허무하게 무너지고 마는군요.
만일 우리가 세상의 돈으로 하늘의 보화를 살 수 있다면, 아무리 많은 돈을 들여도 남는 장사일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좀 더 편하게 잘 살려고 하늘의 보화를 얻는 데 소홀히 산다면, 그 인생은 정말 잘못 살고 있는 인생입니다. 우리가 주님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근심하는 그런 인생을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잠깐 사는 우리의 인생이 천국을 준비하고 하늘에 보화를 쌓는 일에 더욱 매진하는 참으로 값진 인생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직도 부족한 것 한 가지
마 19:16-22 / 안효관목사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길을 가실 때에 한 청년에 예수님께 달려와서 무릎을 꿇고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합니다.
이 청년에 대한 기록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이 청년은 부자였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18장에 의하면 관원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관원’이라는 말은 유대 회당의 지도자이거나 산헤드린 공회의 공회원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의 공회원이라고 하면 오늘날로 말하면 국회의원입니다.
이 청년은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갖고 싶은 모든 것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첫 번째는 젊음을 가졌습니다. 두 번째는 부자였기에 재물도 많았습니다. 세 번째는 권력입니다. 국회의원이거나 최고한 고위 공직자였기에 그의 사회적인 신분은 출세한 사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재물과 권력과 명예를 모두 가졌던 젊은이였다는 말입니다. 어쩌면 인생의 성공을 향해서 달려가는 그의 앞에 거치는 것이 하나도 없어 보일 정도로 그는 인생의 탄탄대로를 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더구나 그는 요즘 정치인이나 재벌들과는 달리 구리는 것이 하나도 없이 도덕적으로 완벽하게 살아왔습니다. 본문 18절 이하를 보시기 바랍니다. “가로되 어느 계명이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언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그는 율법에서 명하고 있는 계명들을 다 지키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이렇게 말할 정도면 그 청년은 아주 완벽한 삶을 살아온 것입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보면 더 재미있는 말이 첨가 되어 있습니다. “아주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철이 들어서 그렇게 살아온 것이 아닙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철저하게 도덕적으로 훈련받고 그런 삶을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그런 청년을 바라보시면서 예수님께서는 그 청년을 “사랑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그 청년이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 청년이 거짓으로 둘러댔다면 예수님은 그 청년을 바라보시면서 아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요즘 출세했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뒤가 깨끗한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여자 문제가 있다든지, 돈 문제에 구린데가 있다든지, 뭔가 윤리적으로 개운치 않는 면이 많습니다.
2004년, 국회정치개혁 특별위원회에서 선거법을 개정하는 과정에서 아주 못된 짓을 했다고 분개한 내용이 실려 있었습니다. 국회의원의 도덕성과 자질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가 높아진 만큼 깨끗한 정치인을 가려내기 위해서 ‘벌금형’ 이상의 형을 받은 전과 기록을 공개하기로 합의해 놓고, 막판에 가서 ‘금고형’ 이상의 형을 받은 전과기록만 공개하는 것으로 바꿔버린 것입니다. ‘금고형’이라는 것은 죄를 지어 감옥에 갇히는 벌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감옥에 갇히는 중벌을 받은 사람보다는 작은 죄를 지어 벌금으로 벌을 받은 벌금형이 훨씬 더 가벼운 죄입니다. 국회의원 후보자의 전과기록을 금고형으로 바꾸고 나면 음주운전-도박 등 생활사범, 선거사범, 그린벨트 훼손 등 환경사범, 폭력 사범, 배임-횡령-사기 등 경제사범의 전과기록이 숨겨지게 됩니다. 그렇게 선거법을 개정한 것은 현역 의원들 가운데 금고형 이상의 전과를 가진 사람은 모두 17명에 불과하지만, 벌금형 이상의 전과를 가진 사람은 무려 147명이나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부끄러운 전과기록을 감추기 위해서 합의한 선거법을 막판에 자기들에게 유리한 대로 바꿔버린 것입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나라 현재 국회의원수가 273명입니다. 그 273명 중에 벌금형 이상의 전과기록을 갖고 있는 사람이 무려 147명이니까 절반이 훨씬 넘는 숫자입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권력을 가진 사람 가운데 절반 이상이 드러난 죄를 지었고, 그것으로 인해 재판에서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청년은 어려서부터 철저하게 계명을 지켰습니다. 그는 윤리적으로 뿐만 아니라 법적으로도 깨끗한 젊은이였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그에게는 신앙적인 겸손과 종교적인 열정까지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10:17절에 보면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 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적대적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올무에 걸려 넘어지게 만들까’ 궁리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젊은 나이에 권력과 재물을 거머쥐고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예수님을 보자마자 꿇어앉았다고 했습니다. 신앙적인 겸손을 엿볼 수 있는 자세입니다.
그리고 영생을 얻고 싶은 간절한 열망도 있었습니다. 당시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꼬투리를 잡으려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존경하거나 경외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예수님이 보통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부를 때에도 “선한 선생님”이라고 했습니다. 최대의 경의를 표한 것입니다. 그것뿐만이 아니지요? 그는 오랫 동안 고민하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분으로 예수님을 생각해냈고, 예수님께 찾아와서 영생을 얻는 길에 대해서 물은 것입니다. ‘이 분이라면 영생을 얻고 싶어 고민하는 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우리 시대 최고의 랍비’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정말 모든 면에서 훌륭한 청년이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청년의 모습은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 청년은 자기 스스로 오랫 동안 고민해오던 한 가지 문제가 풀리지 않아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 청년을 보면서 ‘저 정도면 정말 훌륭한 사람이야. 아마 저분은 세상에서 최고로 행복할 거야. 걱정거리가 없을 거야’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그런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돈도 많은 부자입니다. 높은 권력의 자리에 오른 명예도 있습니다. 그는 아주 어려서부터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친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거기에다가 그는 인격적으로 나무랄 데 없을 정도로 훌륭합니다. 열심히 신앙생활하는데, 모든 사람에 부러워할 만큼 열성적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아마 우리도 다 그를 부러워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우리 눈에는 부러운 대상이라 하더라도 그에게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고민과 걱정거리가 있습니다. 오늘날 돈 많은 사람이라고 걱정 없이 사는 사람 있겠습니까? 권력을 가졌다고 걱정 하나 없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많이 배워 교수가 되었다고 세상 걱정 없이 살 수 있습니까? 많은 사람에게 인기를 얻고 명예를 얻는 훌륭한 인품을 가졌다고 고민하지 않고 살아갑니까?
무엇으로 고민하느냐 하는 것이 다를 뿐이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걱정과 고민이 있습니다. 이 안 목사에게 고민이 없을 것 같습니까? 저에게도 걱정되는 일과 고민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길에 나가서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아무에게나 물어보세요. 걱정이나 고민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지. 정신이 좀 모자란 사람 빼고는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심지어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도 요즘 ‘유치원 다니느라, 학원에 다니느라 너무 피곤해서 주일날 예배에 가지 않고 좀 쉬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무엇 때문에 걱정하고 계십니까? 어떤 고민이 있습니까? 걱정이나 고민은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고민이 없는 세상에 살고 싶은 욕망을 해서는 안 되고, 어떤 고민을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걱정을 하더라도 좀 고상한 문제를 가지고 걱정을 하자는 말씀입니다. 고민을 하더라도 세상적이고 순간적인 문제로 고민하지 말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청년처럼 좀 수준 높은 고민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하는 문제로 걱정하거나 고민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우리가 고민하고 걱정하는 것 대부분이 예수님께서 걱정하지 말라고 하신 그 문제 아닙니까?
여러분, 이제부터 좀더 고상한 것으로 고민하고, 좀더 수준 높은 문제로 걱정하는 성숙한 신앙인으로 살아가십시다. 어떻게 하면 좀더 열심히 주님을 섬길 수 있을까? 지금의 내 모습으로 어려운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무엇일까?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끄럽지 않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러분, 이런 수준 높은 문제로 고민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예수님께 찾아온 청년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의 계명들을 어렸을 때부터 잘 지켰는데도, 영생에 대한 고민이 풀려지지 않았다고 하면서 이렇게 되묻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그는 모든 면에서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어쩌면 이 정도면 됐지 않습니까? 아직도 뭐가 더 필요합니까?’라는 물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질문은 깊은 고뇌에 찬 질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왔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계명대로 살아왔는데, 그것도 어려서부터 철저하게 지킨다고 지켜왔는데, 왜 영생에 대한 갈증이 풀려지지 않는 것입니까? 아직도 뭔가가 더 필요한 것입니까?” 그렇게 물은 것입니다.
여러분, 이 청년에게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왜 이 청년은 영생에 대한 고민을 풀어내지 못했습니까? 우리는 그 이유를 청년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예수님은 지금 이 청년의 내면 깊은 곳을 보고 계셨습니다. 외적으로 모든 조건은 충분했습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인생이었고, 율법이나 윤리적인 삶에서도 조금도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자기 스스로 ‘이 정도면 됐지’라고 생각할 만큼 그는 자신만만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내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문제를 풀어갈 방법을 제시하셨습니다. ‘네가 가지고 있는 재물을 포기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청년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많은 재물이 영생에 대한 열망을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그 재물에 대한 욕구를 포기하지 않으면 영생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가 얼마나 재물에 대한 욕구가 강했는지를 그의 행동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영생을 얻고 싶은 열망으로 예수님을 찾아와서 예수님 앞에 무릎까지 꿇고 영생을 얻는 방법을 물었던 이 청년이 ‘재물을 먼저 포기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는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누가복음에서는 동일한 말씀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큰 부자인고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마가복음에서는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여러분, 이 청년이 어떤 모습으로 돌아갔는지 아시겠지요? 그는 재물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씀을 듣고는 슬픈 기색을 띠고 심히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처음 이 청년은 영생을 얻고 싶다는 고민을 안고 예수님을 찾아왔었습니다. 그러나 재물에 대한 말씀을 하시니까, 이제 그의 고민은 영생에 대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재물을 포기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하는 것이 영생에 대한 고민보다 그의 마음을 짓누르는 더 큰 고민이 되어버렸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의 내면 깊은 곳에 숨어 있던 또 다른 고민을 예수님께서 들추어내셨고, 그것을 먼저 해결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에 그는 지금까지 감추어진 더 큰 고민을 발견하게 된 것뿐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그것을 고민거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물질에 대한 대단한 집착 때문에 그는 많은 재물을 모을 수 있었고, 그것만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인생의 최고 가치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아예 고민거리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물질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으면 영생을 얻을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질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면 그는 마음은 영원히 물질이 주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우리 인생의 주인이 바뀐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까지는 내가 내 인생에 주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욕심한 것은 어느 것 하나 포기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이제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인생이 바꿔지기 위해서는 이전까지 주인노릇하던 것을 내 마음에서 쫓아내야 합니다.
이 청년은 물질이 인생의 주인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에게 그 주인을 바꾸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인을 바꾸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주인노릇하던 것을 버려야 합니다. 내 마음에서 쫓아내야 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주인을 맞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19장에서 주인을 바꾼 한 인생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삭개오라는 세리가 있었습니다. 그도 이 청년처럼 재물이 많은 부자였습니다. 또 세리장이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세무서장입니다. 출세한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그 마을을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예수님의 얼굴을 볼 수 없게 된 삭개오는 뽕나무에 올라가서라도 예수님의 얼굴을 뵙고 싶었습니다. 삭개오에게도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부자 청년처럼 열망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삭개오를 뽕나무에서 내려오도록 하시고는 그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맞아들인 삭개오는 너무 기뻤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예수님께서 ‘네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시지도 않았습니다. ‘왜 재물을 끌어안고 있느냐’고 책망하시지도 않았습니다.
삭개오는 자기 스스로 재물을 포기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것이 너무 기뻐서 이제는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겠다는 표시입니다. 이전까지 그의 인생에 기쁨을 주는 것은 오직 재물뿐이었습니다. 아무도 자기와 상종도 하지 않는 고독한 삶 속에서 그에게 기쁨이 되는 것은 오직 재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하니까 재물을 끌어안고 있을 때 재물을 통해서 얻었던 기쁨보다 훨씬 더 큰 기쁨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 재물을 포기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로다.” 삭개오는 아직 자기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았습니다. 주겠다고 말을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재물을 갖고 있느냐 버렸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재물이 주인이던 삭개오의 인생에 이제는 더 이상 재물이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님이 발견하셨기 때문입니다.
삭개오는 인생의 주인을 바꿨습니다. 재물에서 예수님으로 바꿨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청년은 주인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그는 재물을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자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그것을 포기하는 것은 지금까지의 자기 인생 전부를 포기하는 것과도 같은 아픔과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재물을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부족한 것 한 가지 - 그것은 인생의 주인을 바꾸는 것입니다. 비록 그것은 오직 한 가지이지만, 영생을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 하는데 있어서는 절대적인 한 가지입니다. 그 부족한 것을 취하느냐 마느냐에 따라서 영생의 문제가 좌우됩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마음에는 누가 인생에 주인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까? 무엇이 인생의 주인노릇을 하고 있습니까? 내 인생의 주인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주님이 주인이시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 청년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네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고 말씀하실 때, 기꺼이 순종할 수 있습니까? 이 청년처럼 많은 재물을 갖지는 못했지만, 이 청년처럼 재물이 우리 마음의 주인 자리를 꾀차고 있어서 재물을 포기할 수 없다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돌아간” 그 청년과 우리는 다르지 않습니다.
재물만이 아닙니다. ‘자식’이 우리 마음의 주인 자리에 있다면 성경은 우리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할 것입니다. “자식이 있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돌아가니라.” 무엇이든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우리 마음에 주인 자리를 꾀차고 있다면 그것 때문에 우리는 결국 영생을 소유할 수 없고, 그것으로 인해 우리는 그 청년처럼 심히 근심하며 주님 곁을 떠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은 선택입니다. 세상을 선택할 것이냐 영생을 선택할 것이냐 하는 양자택일입니다. 세상과 영생을 동시에 가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길 것이냐 재물을 섬길 것이냐 하는 선택입니다. 거기에도 양자택일이 있을 뿐 둘 다를 동시에 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요청하십니다. 영생을 택할 것이냐 재물을 택할 것이냐?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재물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심히 근심하며 돌아간 그 청년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아니길 바랍니다. 세상 것과 재물을 포기하는 대신 영생을 선택하여 소유하심으로 천국의 기쁨과 축복을 누리시는 복된 생애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오직 한 분
마 19:16-22 / 박지온목사
오늘 제목을 "오직 한 분"이라 제목을 삼았습니다. 지난주에는 월요일 날 나가서 목요일 날 돌아왔습니다. 아마 나가있는 동안에 그 유명한 '지하철 방화사건!' 세계 적으로 유명한 사건이 되어 버렸어요. 이 일이 아마 화요일 날 있었고 화요일 날 제가 집에 없으니까, 이 사건에 대한 소문을 수요일 날, 또 계속해서 여러 군데서 전화가 집으로 왔었어요. 집으로 오니까, 집에 사람들이 전화를 안 받고 있으니까, 너무 궁금해 가지고 진짜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서 막 수소문을 하고, 수소문하는 과정 속에 휴대폰 번호를 아는 사람은 휴대폰으로 하고, 이렇게 해서 저한테까지 오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각 지역에서 또 일본과 미국에서까지 송현 교회 박 목사가 이상하게 되었는가 보다 이래가지고 전화를 하고 그런 것을 봅니다.
제가 그 전화나 그런 사건을 보면서, '살아있구나!' 이 살아있다는 것이 '어려움 속에서 살고 있구나!' 얼마든지 죽을 수 있는데도 '살아있구나!' 여러분들이 지금 이 자리에 살아서 이곳에 와있다! 은혜 받고 말씀 통해서 우리가 성령의 은혜와 인도를 받는 곳에 와있다는 것도 귀중하지만, 일차적으로 여러분 살았다는 것도 귀중합니다. '이 어려운 세대 속에서 생명 붙어있다는 것도 참 귀중하다! 하나님의 큰 계획과 역사가 있다!' 이렇게 또 한번 믿어집니다.
2004년 대구에 지하철, 이 문제를 제가 집에 와서 신문을 통해서 좀 자세하게... 돌아다니느라고 TV도 옳게 못 보고 뉴스도 옳게 못 들었기 때문에, 상세한 내용을 대략만 듣고 있었는데, 집에 와서 내용과 그렇게 된 이유들을 쭉 설명을 한 것을 경찰 조사를 통해서, 기자들의 신문을 통해서 이 기록한 것을 좀 보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면서 뭘 봤느냐 하면, 1079호에 정작 방화사건이 일어난, 불을 낸 이 차량에는 사망에는 사망이 6명이고, 부상자가 12명밖에 안 나왔어요. 그러니까 뭐 그렇게 큰 사건이 아닙니다. 물론 한 사람만 죽어도 큰 사건이라고 할 수 있지만, 뒤에 나오는 사건과 비교하면 그렇게 큰 사건이 아닙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들어온 그 객차에, 80호죠. 거기에 거의 사망자와 부상자들이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뭐 몇 백 명이 죽은 이런 모든 사망자 부상자가 1080호에서 다 나왔어요.
그런데 그 80호를 운전하는 분이 아마 최 모씨라고 그러는데, 이 분이 들어오자 말자, 이제 연기에 쌓이고 이러니까 아마 본정신이 아니죠. 그 마스터키를 뽑아 가지고 주머니에 넣고는 달아나 버렸어요. 그러니까 이제 마스터키를 뽑아 버리면 밧데리도 작동 안 하니까, 완전 작동이 멈춰버린데요. 거기 뭐 개폐 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 비상등 이런 모든 것들이 다 나가버린데요. 그러니까 달아나도 혼자 달아났다 그러면 문제는 다른데, 그 키까지 완전히 뽑아 가지고 달아나 버리니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방송을 두 세 번하고, 가만히 기다리라고 방송하고는 자기는 키를 빼 가지고 달아나 버렸으니까! 완전히 불구덩이 가스 속에 쳐 넣어 버렸어요. 이런 결과가 되어버렸어요.
제가 그걸 이렇게 보면서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사람이 한 짓이 아닙니다. 이것은 백 번 천 번해도 본심으로 한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1079호에 방화를 말하자면 불을 지른 사람도 정신문제 있다는 것은 벌써 TV를 통해서 듣고 있죠. 그런데 '돈 사람이다!' 그러면, 80호는 '더 돈 사람입니다!' 결국은... 그러니까 이제 '흑암 세력 배경이고, 이것은 사단의 세력이지! 그냥 그렇게 나오는 것은 아니다!' 누가 멀쩡한 사람이 그렇게 하겠습니까! '이것은 도저히 인간으로서 어떻게 이런 어려운 문제를 당하도록 밀어 넣은 사건은 아니다!' 이런 어떤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무슨 문제가 오느냐 하면, 이런 문제는 앞으로 얼마든지 더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또 이런 사건이 생긴 대구에는, 대구만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이 시대에 대한 경종입니다. 뭔가 여러분과 저에 대한 확실한 경종입니다. 그리고 뭔가 대구를 향한 하나님의 큰 계획이 또 함께 있다! 그렇게 느껴져요.
왜? 대구 사람이 보통사람이 아닙니다. 일단은 센 사람입니다. 말도 세고, 이빨도 세고, 정신도 셉니다! 특별히 다락방 메시지를 하면 거의 대구 사람들이 제일 셉니다. 여러분들이 우리 그 송현 교회가 전 세계에 끼친 영향이, 이 대구라는 배경가지고 센 사람이었기 때문에, 복음은 조금 가지고 가서 얼마나 세게 했기 때문에 역사가 나왔다는 것은 인식이 되어야 됩니다. 일단은 뭔가 하나님의 큰 계획이 이 시대에 여러분과 제게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고, 대구에 이런 문제가 있었다는 것은 대구가 어떻다는 것 정도가 아니고, 큰 하나님이 계획을 우리가 다시 한번 보아야 되겠다! 하는 그런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시점에서 오늘 '오직 한 분이다!' 하는 그런 제목을 삼고 함께 말씀을 생각할 때에, 정말 여러분과 제가 서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붙들어야 되겠습니다. 첫 번째로 먼저 생각해야 될 것이 뭐냐하면, 선한 기준입니다. 19장 16절에 보면,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분이 예수님께 나와서 한 질문은 진실한 질문입니다. 지금까지 거의 우리가 예수께 향한 질문은 예수님을 어렵게 하려고 하는 의도적인 질문이요, 속이고 있는 그런 질문이요, 그러한 질문이었는데, 이 분은 진실한 질문입니다.
누가 복음서에 보면, 똑같은 배경가지고 설명할 때에 이렇게 질문한 분이 관원이라 그랬습니다. 아마 그래서 주경 학자들은 '행정장관이다! 뭐, 재판관이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아마 젊은 사람으로 입신 출세를 했고, 나름대로 뭔가 진리를 추구하는 참 선한 관원이다. 그렇게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그에 대해서 진심으로 대답을 하신 배경들이 본문에 나온 배경이죠. 17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선한 분을 말하면서 생명이라는 것과 연결을 시켜 주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본문에서 보여준 데로, 선이라고 할 때는 생명과 직결됩니다. 여러분 살았다는 것이 생명이고, 그것도 영원한 생명은 진짜 선입니다. 여기서 반대되는 것은 뭡니까? 죽음입니다. 여러분 죽음은 악하고, 그 다음에 영원한 죽음은 영원한 악함입니다. 그렇게 성경은 구분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부모에게 효도한다! 건강하면 되는 겁니다. 일단 육신 적으로도 부모에게 불효한다! 일찍 죽으면 돼요. 가장 큰 불효 아닙니까!
이런 배경에서 여러분 선이라 그럴 때에, 영생의 문제! 그 다음에 가장 악이다. 죽음과 영원한 멸망의 문제! 그래서 여기에서 선의 기준은 영생하는, 말하자면 선에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선한 분은 누구냐? 한 분이시다. 여호와입니다. 그리고 가장 악한 분이 누구냐? 악한 사람이 누구냐? 악한 인간이 누구냐? 악한 것이 뭐냐? 뭘 악한 일을 했기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고 악에 근원은 사단이다! 그런 배경이 되어 있습니다.
시편 1편에 보면 선과 악에 대한 구체적인 구분이 나와있죠. 선한 사람을 의인이다! 악한 사람을 악인이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1절에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시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시 1:3)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그랬습니다. '선이 뭐냐? 복이 뭐냐? 착함이 뭐냐?' 그게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자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느냐? 마치 어디에 있는 자와 같습니까? 반드시 축복을 받는다. 반드시 성공한다. 반드시 영광의 나라로 들어간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어떻게 비유했느냐? 이 땅에서 살아있는 동안에도 마치 '시냇가에 뿌리를 박고 있는 나무와 같다!' 그래서 '시절을 쫓아 과실을 맺는다!' 그렇게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내 안에 오직 한 분 그분이 내 안에 와 있다! 생명입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 풀려나가죠. 그러면 여러분과 저는 '내가 뭘 하기 때문에 선하다!' 그 말이 아닙니다.
여기 이제 오늘 찾아온 관원이, 이 청년의 그 의식에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내가 뭘 해야 선하다 그러겠느냐?' 뭘 하겠습니다. '무슨 선한 일을 했기 때문에 선하다!' 그런 배경이 아닙니다. 원천적으로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 원천적으로 선하다! 그랬습니다. 복이 있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아무리 영원한 멸망을 받고, 영원한 지옥에 들어가고 싶어도 안되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많은 악을 써도 어디에 못 가요? 지옥 가기는 다 틀렸다! 아무리 악을 써도 망하기는 다 틀렸다! 이미 여러분과 저는 어디에? '시냇가에 심은 나무다!' 그랬습니다. 영원한 생명에 뿌리를 박고 있는 자다! 이게 복음입니다.
그래서 지금 무슨 문제와 사건이 생겼다! 시절을 쫓아 폭풍이 불수도 있습니다. 눈비가 올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계절이 되면, 시절이 되면, 열매맺는 시절이면, 반드시 열매가 나오게 된다! 그렇게 약속했어요. 저는 화원유원지에 가끔 가죠. 제가 가면서 요즘 이제 봄철이 가까워 오고 그러기 때문에 늘 가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계절이 변하면 어김없이 죽었던 나무가 싹이 트고 입이 나오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어렵다, 힘들다!' 상관없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서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도록 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어둡고 힘든 그늘이 있느냐? 하나님의 시간표가 됨에 따라서 복음 속에 뿌리를 박고 서 있을 때에 역사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도 뭐라 그랬습니까? '오직 여호와를 앙망 하는 자에게는 새 힘을 주신다!' 그랬습니다. '다른 길이 없다!' 그랬습니다. 이것을 자꾸 놓친 것이 사단의 속임수거든요. '여기에 있다 속지 말라! 하나님께서 반드시 축복하시고 역사 하신다!' 그렇게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반대되는 길이 뭐냐? 4절에서부터 "(시 1:4)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시 1:5)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시 1:6)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생명이 없고, 여호와의 생명이 구체화되지 않았을 때에 오는 것이 뭐냐? 반대입니다. 그래서 악인은 사단의 길에서 사는 사람을 말하고 있고, 선한 사람은 여호와의 길에 서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악인은 사단의 영으로 사는 사람이요, 선한 사람은 여호와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이다. 이것이 성경에 구체적인 두 가지 문제입니다. 그래서 사단의 손에서, 사단의 영으로, 사단으로 말미암아 사는 사람은 근원적으로 이것은 악하다! 이겁니다. 아무리 뭘 '잘했다, 못했다!' 이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지하철 문제를 굳이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이 악한 게 아닙니다. 그 사람이 뭐 악하고... 근본적으로는 여러분 똑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악하다! 뭐 좋다! 그러는 문제는 이것은 흔히 다 종이 한 장 차이다! 사람은 환경 따라서 얼마든지 인간은 악하게 보일 수도 있고, 선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 내 마음에 이 변화를 약할 때일수록 아주 더 심각해지더라 구요. 더 심각해지고 조금 뭔가 이게 힘이 있고 이러면 또 괜찮은데, 내가 너무 힘들고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힘들어요. 그래서 보통 때는 내가 뭘 먹든지 옆에서, '그걸 먹지 마라' 그러든지 상관이 없는데, 내가 약할 때는 옆에서 조금만 '먹지 마라' 그래도 성질이 나오고, '먹어라' 그러면 또 이상하고, 하여튼 이건 뭐 종잡을 수 없는 그런 성격적인 그런 게 나오더라 구요. 그래서 악하다는 것도 환경, 사건 따라서 사람이 달라져 버립니다.
여러분들이 뭔가 지금까지 교도소 안 들어간 것은 환경이 그런 데로 인도를 받았습니다. 안 그러면 다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뭘 느끼느냐 하면, '악인이다!' 사단의 손에, 영원한 죽음과 멸망에 빠져있는 사람! 이걸 가지고 운명에 빠져있는 사람이다! 안 그럽니까! 그걸 악인이다! 그렇게 했습니다. 선하다 거기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 새 생명의 역사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이다! 그것이 선하다! 그렇게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여기서 먼저 조금 짚고 넘어가야 될 것이, 사단의 손에 빠져있다는 것을 우리가 너무 많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쉽게 듣고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창세기 3장에 빠졌다! 그 이야기입니다. 이 말을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원죄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오늘 여러분들이 교회 나오고 있으나 원죄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으면 그것은 악인입니다. 그것은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있으나 구체적으로 복을 받을 수가 없게 되어있습니다. 이래서 원죄를 해결하지 못한 사람을 우리는 악인이다!
여러분과 저는 천국 백성입니다. 그런데 천국백성이라 그럴 때에 천국에 죽어야 들어갑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죽어야 들어갑니다. 그런데도 안 들어가도 이 자리에서 우리는 천국을 누리고 삽니다. 그러면 그렇게 천국을 누리다가 죽으면 응당히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 중요한 문제가 해결이 되었는데, 그 문제 해결이 뭐냐? 죄입니다. 원죄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원죄를 해결했기 때문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영원한 멸망에 빠진 그들은, 영원한 멸망에 들어가는 그들은, 원죄를 해결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그러면 '죄가 없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간다!' 그 말이 아닙니다. 죄를 해결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들어가느냐? 똑같이 죄가 있지만, 죄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영원한 멸망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악과 선이다! 선과 악이다!' 여기서 확실하게 구분이 되는 것을 바로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자연적으로 이렇게 영원한 문제, 영원한 원죄를 해결하지 못했을 때에, 왜, 그러면 악하게 될 수밖에 없느냐? 왜, 그러면 그렇게 되느냐? 여기서 따라나오는 문제가 심각하거든요.
그것이 우리가 잘 아는 데로 첫 번째 문제가 뭡니까? 당장 나오는 것이 영적 문제가 해결이 안 되었다! 영적 문제가 있다! 그 이야기거든요. 영적 문제가 있다는 것은, 3장에 빠져서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운명 속에 살아가고 있다! 이겁니다. 운명이라는 것은, 운명 자체가 망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이어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계획이다!' 그럴 때에, 축복과 은혜를 전제로 하고, 내가 인도 받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계획이다! 섬리다!' 그런 배경이고, 운명이라는 것은, 그냥 '망한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똑같이 내 자신을 포기하고, '어차피 운명에 의해서 따라간다!' 그럴 때에 이것은 망하는 전제이고, 이것은 축복과 은혜의 전제입니다. 이것이 너무 차이가 나는 이런 배경이 되죠.
그런데 여러분 '영적 문제다!' 그럴 때는, 뭐 여러 가지 영적 문제는 '이것이다, 저것이다!'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은, 가장 근원적인 겁니다. 그게 뭐냐하면, 여러분 영적 문제가 있다고 그럴 때는 가장 근원적인 것이 뭐냐하면, 불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도저히 안 믿어져요. 그래서 제일 어렵고, 힘들고, 그 다음에 방법이 없는 것이 바로 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영적 문제에 일단 해결이 안되면 뭐가 안 되느냐? 말씀을 못 들어요. 설교 말씀이 안 들려집니다. 아무리 강단에서 막 축복이 쏟아지고, 그 말씀 붙들고 기도하면 한 주간 응답이 막 터져 나올 이야기도 들어오지를 않습니다. 이상하게 문고리만 잡고 나가면 싹 잊어버립니다. 이상하게 말씀을 들을 때에, '너나 잘해라!' 이렇게 되고, 나한테 들어오지를 않습니다. 이것은 영적 문제 중에 가장 큰 문제입니다. 가장 큰 문제이거든요. 이게!
그러니까 뭐가 나오느냐 하면, 이렇게 되면 모든 범사에 불 신앙이 오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것도 저것도 안 된다는 것이 오고, 부정적인 것이 오고, 그 배경에서는 딱 한가지 결론이 뭐냐하면? 신앙에 결과가, 신앙에 결론이 감사가 나옵니다. 지금 내가 신앙생활하고 있다는 결론이 감사입니다. 이래도 감사가 나오고, 저래도 감사가 나오고... 뭔가 적고 큰 일로 이상하게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나옵니다. 그런데 이 감사가 없어지고, 불 신앙에 영적 문제에 빠졌다는 가장 쉽게 판단되는 것이 뭐냐? 이상하게 불평이 나오고 짜증이 나오고, 신경질이 팍팍 나오고 그렇습니다.
나는 우리 집에서 뭔가 이 어떤 때는 나도 모르게 뭐 보는 것만도 괜히 이제 사랑스럽기도 하고 그런데요, 어떤 때는 보는 것만 해도 짜증스러워요. 그게 참 신앙과 불 신앙의 차이가 그렇게 내 마음에 일어나는 어떤 그 생각 속에도 그렇게 다른 것을 느낍니다. 왜 그러느냐하면, 자꾸 이제 제가 뭔가 보니 시원찮은 모양이죠. 저를 볼 때는, 그러니까 이제 간섭을 자꾸 하는 겁니다. '이것도 하지 마라! 저것도 하지 마라! 이것도 먹지 마라! 저것도 먹지 마라!' 그러면 '굶으란 말이냐!' '범사에 이렇게 생각해주고 이렇게 해주는 분이 있으니 얼마나 감사하나!' 혼자 살았으면 절대로 없었을 것 아닙니까! 감사할 일인데도, 그게 절대로 그렇게 돌아가지 않습니다. 이 짜증이 나오고 이렇게 나오는 거죠.
여러분 우리가 조금만 눈을 열고 신앙으로 보고, 또 이것이 심리적으로 긍정적인 눈으로만 봐도 범사에 감사합니다. '이것 주신 것, 부모주신 것, 이 환경 주신 것, 이 축복주신 것, 이 은혜의 자리에 서게 된 것 감사합니다!' 이 축복의 자리에 서게 된 것, 뭐 생각할수록 감사합니다. 그 경상도 말로, '우짜다가 이 자리에 있느냐!' 이게 자연적으로 나오거든요. 그런데 이게 불 신앙으로 오게 되면, 우짜다가가 아니고, '하필이면 왜 이런 일이 생기느냐?' 전부 이렇게 됩니다. '하필이면, 대구에 이런 일이 생기느냐?' 이런 것도 나옵니다.
그래서 여러분 그 간단합니다. 감사가 사라지고 불평이 나오면 영적 문제 심각합니다. 그리고 교회메시지 들을 때에, 메시지 듣는 순간에 감사가 나오고 '참, 감사합니다! 이게 안 나오고, 막 들을 때마다 불 신앙으로 비평이 나오고, 평가가 나온다!' 그게 참 보통 일이 아닙니다. 이걸 가지고 우리는 쉽게, '영적 문제다!' 그래서 설교는 방향이 '맞다, 안 맞다!' 이 문제가 아닙니다. 누가 와서 성경을 읽기만 해도 은혜를 받는 이런 자리에서야, 진짜 생명을 가진 자의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안 되었을 때에, 이것이 안되면서도 '교회 오게 된다! 교회 왔다!' 이러면 자기도 모르게 어디에 빠집니까? 종교에 빠집니다. 이것이 안되면서 문제가 생겼다! 기도 열심히 한다! 자기도 모르게 신비에 빠지는 겁니다. 이게 이제 문제가 되거든요.
누가 그런 질문을 했어요. 뭔가 이상하게, 어떤 그 문제를 가지고 그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사단을 사정없이 결박하면 결박할수록 뭔가 마음이 좀 불안해 진데요. 그런데 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이 문제를 주신 하나님의 계획이 뭡니까?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있도록 눈을 열어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면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 진데요. 그게 왜 그러느냐? 그 말이 맞습니다. 여러분 바로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 남편이면 남편, 사건이면 사건! 남편이면, '저 인간 속에 역사 하는 사단은 확∼ 꺾어지게 하시고, 이런 못된 일을 하는 사단은 꺾어지게 하시고...' 이렇게 기도하면 뭐가 먼저 앞서느냐 하면, '그 못된 짓이다, 못된 일이다!' 하는 그런 계획들을 내가 하나님의 계획보다 내 생각이나 모든 것을 앞세워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내 뜻을 따라서 이렇게 해 주시고, 내 뜻에 이렇게 꺾어 주시고, 이게 앞세워지게 됩니다. 자연적으로 그러니까, 그게 안되면 막 불안합니다. 안 되면, '하나님이 왜 안 해 주시냐?' 싶고, 그래서 사단 결박을 많이 하면 오히려 더 불안할 수 있어요. 이게 이해가 안되면 그 다음에 '하나님, 내게 이런 문제를 주신 하나님의 뜻이 뭡니까? 하나님의 뜻이 뭔가를 깨닫고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게 하옵소서!' 그러면 내 뜻이 싹 사라지고 뭔가 하나님의 뜻을 전면에 내세우는 기도가 되어버립니다. 자연적으로 그러니까 그렇게 기도하면 기도할수록 편안해진데요. 배경이 그래서 그렇습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여러분 교회 와서 하나님 앞에 막 원천적인 것이 안 되어졌을 때에 감사가 안 나오고, 이런 것이 안 되어 졌을 때에 불 신앙에 문제, 영적인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이 안되었을 때에, 무슨 문제나 사건이 생기면 생길수록 기도는 열심히 할 수 있습니다. 더 열심히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더 열심히 하면 할수록 내 뜻이 앞장세워져서 합니다. 내 욕심이 앞장세워져서 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우리는 '우상!'이라 그럽니다. 우상이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복음이 안되고, 참 생명이 안되고, 교회 나와서 열심을 내면 낼수록 우상 숭배에 빠져 버립니다. 종교에 빠져 버립니다. 종교가 그래서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안 믿고 형상 우상에 절하고 거기에 빠져 가는 사람이나, 예수를 믿으면서 욕심이 전제된 기도가, 욕심이 전제된 모든 종교 행위가 불 신앙 상태의 우상숭배와 똑같다는 배경이... 그래서 흑암과 어둠의 세력이 똑같이 그를 지배하고 역사 되는 배경이 이 배경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신앙생활 속에서 간단한 차이 같지만 엄청난 차이가 여기서 나올 수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의 언약 속에 세워진, 이미 승리를 약속 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망할 수가 없습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승리 속에 세워져서 승리가 약속되었다 그럴 때에, 내 뜻과 내 힘과 내 능력이 아니고, 누구의 뜻과 누구의 계획입니까?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계획이 전제된 것이지, 이것이 내 것이 아닙니다. 나는 그 속에 들어가서 인도만 받을 뿐입니다. 그러면 그 언약 붙잡고 인도 받을 때에 하나님이 이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이 일이 바로 이해가 되어야 돼요.
그래서 이런 문제도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육신에 질병도 나올 수 있고, 그 다음에 고통도 나올 수 있고, 힘든 문제도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런 문제들이 나올 수 있을 때에, 여러분 하나님이 원래 우리를 향해서 병들어죽어라! 물론 병들어 죽죠. 마지막에는 병 안 들어서 죽을 수도 있으나, 갑자기 죽는 수도 있으나... 그래서 이 땅에 사는 동안에, '평생 병들어라!' 그게 하나님의 목표는 아닙니다. 이 땅에 있는 동안에, '고생 진탕해라!' 그게 하나님의 목표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목표는 이 땅에서 병을 통해서, 고통을 통해서, 어려움을 통해서, 뭐하기 위한 겁니까? 하나님의 계획을, 하나님의 목표를 볼 수 있는 뭡니까? 눈이 열려질 계획입니다. 그걸 붙들어 라는 것이지!
그러면 그게 눈이 열리면 여러분과 저를 통해서 하나님은 뭡니까? 당신의 목표를 성취시킵니다. 그 목표가 뭡니까? 세계 복음화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세계 복음화 하려고 그러면, 나는 몸이 약해 보니까 아무것도 못해요. 몸이 약하니까 뭘 해야 됩니까? 건강해야죠. 건강이라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필요합니다. 목표를 깨닫게 될 때에 여기에 필요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여러분 정말 이 땅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목표가 바로 인정이 되어야 됩니다. 인식이 되어야 됩니다. 이게 이해되기까지 오는 문제가 고통이 오고, 괴로움이 올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깨달으면 그 목표에 필요한 것을 하나님이 채워주신다! 이게 성경에 약속이거든요.
우리 그 신봉준 목사님이 미국 뉴저지에 같다왔습니다. 같다 오셔서 어저께 저녁에 목사님께로부터 전화가 왔어요. '너무 감사하다고, 우리 교인들이 얼마나 힘을 얻었고 지속해서 송현 교회에서 이 사역을 해 주신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 교인들이 정말 감사하고 기뻐한다'고 그러면서 '제가 우리 선교 위원장에게 편지라도 좀 쓰고 싶다고, 선교위원장님이 누구십니까?' 그러더라 구요. 제가 '탁 장로님이시다!' 그렇게 가르쳐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뭐냐하면 얼마나 힘을 얻고, 우리가 새 치료의 역사를 봤다고... 그래서 우리 신 목사님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냐 하면, '가니까 뭘 전도한다, 시스템을 구축한다! 이전에 개개인이 너무 많은 상처를 안고 있고 치료가 필요하더라!' 그래서 조용히 앉아서 치유 메시지를 조금 조금씩 전하고...
아마 앞으로 가실 분도 일단 병들어 있기 때문에, 문제는 일단 뭡니까? 일단 배경이 다른 역사 속에 혼란스러우니까, 이것부터 치료해 주어야 되는 겁니다. 거기 가서 뭐 들뜰 것도 없고, 서둘 것도 없고... 신 목사님이 어떻게 보였는지 모르지만, '굉장히 겸손하시다!' 그러더라 구요. 겸손한지 어떤지 몰라도, 일단 그곳에 가서는 겸손한 척 했는가 봐요. 어쨌든 중요한 것은, 여러분들이 치료받을 부분이, 그리고 개개인이 이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새 힘 얻고, 일어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거기서 모든 것이 다 따라나오게 되어있죠.
그래서 '영혼치유, 영적인 치유다! 영적인 문제가 해결된다!' 이것은 모든 것 중에 근본입니다. 그 다음에 이것이 해결되면 여기서 나오는 것이 뭡니까? 신앙의 역사다! 여기서 나오는 것이 마음에 감사가 나오고, 여기서 부드러움도 나오고, 포용도 나오고, 일만 달란트 백 번, 천 번해도 영적 치유가 안되었는데, 나올 수가 없어요. 여기서 모든 것이 나오죠. 이것이 조금도 안되면 다음에 나오는 것이 뭡니까? 우리가 잘 아는 데로, '정신문제가 나온다!' 안 그럽니까! 문제는 뭡니까? 지금 지하철 문제도 전부 이 정신병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우굴 거리는 것이 앞으로의 문제입니다. 더 큰 문제입니다.
여기에서 잘 못되어 나올 때에 뭡니까? 짜증이 나오고, 이상하게 뭐 조그마한 문제가지고도 신경질이 나오고, 조그마한 문제가지고도 불 신앙이 나오고, 부정적인 사고가 나오고, 이런 게 나오고 교회 안에도 보면, 이렇게 되면 이것이 영적 문제가 와서, 이것이 정신적인 문제로 표출이 되거든요. 그 사람 얼굴만 봐도 이상하게 소름이 돋고 여러분 혹시 사람얼굴보고 소름이 돋습니까! 제가 이 정신문제, 치료문제 있을 때에, '이상하게 그 사람 뒤통수만 봐도 한 주먹 쥐어박고 싶고...' 이런 사람들이 이게 전부 뭡니까? 이 정신적인 문제가 오거든요. 그러면 자기도 모르게 약간 헤까닥하면 주먹 내밀어 버리고, 이렇게 하는 것이 오게 되거든요. 그게 근본적인 문제가 뭐냐하면, 영적 문제 해결이 안되어 있다는 겁니다. 해결이 되었다 그래도 확신이 없어요. 이런 배경들이 구체적으로 이제 해결이 되어야 되죠.
그렇게 되면 이것이 해결이 안되니까 나오는 것이, 우리가 잘 아는 데로 질병문제가 나오고, 그래서 이제 말씀드렸습니다 만은, 하나님의 목적은 여러분이 병들고 실패하고 고통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조금만 이해되어서, '하나님의 계획이 이것이구나!' 그래서 우리도 모르게 정말 우리 중심 속에 현장에 날마다 실패하고 있던 이런 배경에서, '아, 실패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이 이것이구나!' 이것이 오게 되고, 깨닫게 되는 순간에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 모든 것이 회복되어야 되죠. 이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 아닙니까!
저는 옛날에 저희 집 사람이 너무 어렵고 힘든 동시에, 그 날 밤새도록 정말 고생을 하고 지내야 되는데, '일본 선교해야 되겠다!' 그 다음에 '세계 선교해야 되겠다!' 이것 깨닫는 순간에 그게 없어져 버렸어요. 그냥 나는 그게 '메시지 중에 메시지다!' 싶어요. 오늘 여러분과 제게 한 개인, 한 가정이 여러분 구체적으로 정말 '하나님의 목적이 이것이구나! 나를 이 땅에 살게 하고, 내 가족을 이 땅에 살게 하고, 내 후손을 이 땅에 보낸 하나님의 계획이 이것이구나!' 그러면 그 일을 이루기 위한 필요를 하나님이 채워주십니다. 그게 경제와 건강과 모든 축복이 여기서 따라오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다른 이런 이름이 이 세상에 없다고 그랬습니다. 이 축복과 역사를 주실 분이 오직 그분 안에 들어가고, 그분 생명 속에 들어가는 길이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이 땅에 그리스도로 오셨습니다. 그 한 분을 영접하는 순간에 전혀 새로운 생명으로 인도 받게 됩니다. 이 축복의 역사를 알았다면, 우리는 뭡니까? 확실한 목표가 생기죠. 확실한 목표! 그게 뭡니까? 전도와 선교라는 것이 나옵니다. 그래서 교회가 자연스럽게 개인이, 모든 삶에 중심이 전도와 선교라는 삶으로 저절로 이어지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두 번째로 이 사실을 구체화시키기 위해서는, 여러분 나도 모르게, 우리도 모르게, 우리 자신들의 마음속에, 우리 가족의 마음속에, 우리 사업의 마음속에 중요한 중심이 뭡니까? 전도와 선교! 전도는 가까운데, 선교는 먼데!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이제 우리 산업선교에서 그냥 뭐 '중국선교' 이름 붙일 것 없어요. 중국 가던지, 왜? 우리는 하나님이 가라는 곳에 갈 거니까! 산업선교를 꼭 중국만 할 겁니까! 전 세계를 다 할겁니다. 어디든지! 그럴 거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라 그러시는 데로 할겁니다. 그래서 '어디에 한다, 뭘 한다!' 할 것 없습니다.
저는 보내는 것도 전에는 선교사를 보냈지만, 이제는 선교사를 보내는 것 보다 우리 교회에서 나갔다 와요. 그리고 나갔다 오는 게 제일 부담이 적더라 구요. 그 사람들에게도... 그래서 나갔다 오면, 누구만 갈 것이 아닙니다. 전부 선교사가 되어 가지고 여러분 나갔다 와야 됩니다. 한번씩 나갔다 오고 정 안 내보내주거든, '목사님, 나를 좀 내어보내 주세요!' 그러면 제가 봐서 훈련받은 상황 따라서, 사람을 따로 평가 못하잖아요. 훈련 다 받았다 그러면 일차적으로 심사 대상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그 신학원 지금 개강하려고 그러는데, 좀 등록하시고 훈련 좀 받으세요. 세상에 말 안 들어요. 뭘 알면 얼마나 아는지 모르지만, 다 알고 있는 것 같아요. 뭐라 그러면, '다 알어, 받을 필요 뭐 있나!' 아닙니다. 훈련받아야 구체적으로 목적이 더 확인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지금 새삼스럽게 뭘 말하고 싶으냐 하면, 조금 뭔가 마음에 그런 생각이 있다 그러면, 합숙 훈련 다시 한번 같다 와요. 한번 같다와서 다 된 것 아닙니다. 말씀을 듣고, 또 듣고 확인되는 만큼 뭐가 옵니까? 하나님의 역사가 나오게 되어있어요.
이렇게 될 때에 뭐가 오느냐? 자연적으로 나오는 것이 뭐냐하면, 여러분과 제가 훈련을 제대로 받아야 진짜 나옵니다. 그리스도가 원색적으로 설명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게 안되면 원색적인 설명이 잘 안나옵니다. 그리스도 그러면 자꾸 잡말이 붙어요. 옛날에 알던 말이 자꾸 붙어요. 그런데 훈련받으면 받을수록 그런 잡말이 다 떨어져 나가 버리고, 원색적인 복음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훈련을 제대로 받아야, 훈련받아야 축복도 함께 임할 수 있습니다. 이게 바로 되어야 됩니다. 그리고 이 훈련을 받게 될 때에 누가 바로 설명되어야 되느냐? 그리스도가 바로 설명되어져야 전도와 선교에 핵심이 나옵니다.
여러분 모르는 데는 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로마서 10장 13절에 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바로 증거 되고, 그 다음에 증거 되어졌을 때에 바로 영접되어져야 됩니다. 이것이 1장 12절 아닙니까! '누구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곧 믿는 자라'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약속했습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서만 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것을 가지고 성경은 뭐라 그랬느냐? '은혜 받았다!' 그랬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은혜라!' 그랬습니다. 뭐 은혜 돈 조금 생겼으니 은혜 받았다! 은혜보다도 그건 망조가 나올 수가 더 많습니다. 요나가 마침 어디 가는 배가 나왔습니까? 다시스로... 잘못하면 인간욕심은 이렇게 빠질 수 있습니다. 진짜 은혜 받은 것이 뭡니까? 오늘 내가 예수 그리스도 정말 감사하구나! 확신하고, 확신될수록 뭐냐? 원색적인 복음이 나도 모르게 만나는 사람 속에서 터져 나오게 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때에 오는 것이 뭐냐하면, 말씀을 맺으면서 드립니다. 중요한 것이 변화입니다. 여러분 생명이 변하고, 내게 예수 생명이 역사 되는 순간부터 내가 변하고, 내가 있는 환경이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생명을 떠나서는 이게 오지 않습니다. 변화가 오지 않아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쭉 지나오면서 예수 생명 붙들고, 신앙 생활하는 가운데서 가정이 안 변하고, 개인이 안 변했다! 가정이 안 변했다는 것은, 개인이 안 변했다는 것이거든요. 그러면 여러분 진짜 근본적인 문제부터 좀 점검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그 이번에도 희락 이를 만나면 뭘 보느냐 하면, '야, 많이 변했다!' 완전히 너는 속이는 단수도 고단 수예요. 딱 이 할아버지, 할머니 이용하는 것도, 속이면서 이용하는 것도 고단수예요. 그리고 말도 이제는, 전에는 뭐 말하는 것도 겨우 했는데, 이제는 앞뒤를 재어가면서, '어떻게 하면 할머니를 뭔가 속일까!' 하는 것, 또 아주 이 뭔가 이 머리를 써서 하더라 구요. 그래서 제가 웃으면서, '야, 참 많이 컸다!' 그러니까 저희들은 잘 몰라요. 컸는지, 어떤지! '키도 많이 컸다!' 잘 몰라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으냐? 1년, 2년 이후가 엄청나게 다릅니다. 여러분 진짜 생명 가졌느냐? 여러분 1년 후, 2년 후가 다릅니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뒤돌아보면, '많이 변했구나! 내 가정이 많이 변했구나! 내 개인이 많이 변했구나!' 이것이 진짜 체험이 될 때에, 정말 변했구나! 이 사실이 구체적으로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장소가 하나님의 역사가 나옵니다. 모든 만남이 하나님의 역사가 나옵니다. 뭐가 되어 있을 때? 생명이 되어 졌을 때! 여기서 전도가 저절로 나오게 되고, 선교가 저절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죽은 사람에게 뭘 기대합니까! 죽음은 최악입니다. 생명은 최선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참, 생명 살았다!' 이 말씀 듣고 내 영혼이 치료받고, 주님 앞에 섰다! 하루 하루가 달라지고, 5년 후에 여러분 모습이 달라집니다. 가정과 교회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가 이 축복된 역사 잡고 5년 후, 10년 후 엄청나게 달라집니다. 한국을 바꾸고 세계를 바꾸는 중앙에 서 있을 것입니다. 변화의 역사가, 이 축복의 역사가 바로 오늘 여러분과 저를 하나님이 원하는 목표로, 이를 위해서 모든 것 채우시는 하나님의 역사로 한 주간도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마 19:16-22 / 피종진목사
어느날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하고 영생에 관한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다시 묻기를 '어느 계명입니까?'하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고 대답해주셨습니다. 그 때 그 청년은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하고 다시 질문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러한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부족한 것이 없다, 내가 남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의 역사가 함께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는 것 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고, 의로운 것보다 불의한 것이 더 많고, 담대한 것보다도 연약한 것이 더 많은 것이 우리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부족을 깨닫는 것만큼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시고, 은혜로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이 청년이 예수님께 질문한 내용을 보면 세 가지 부족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청년의 부족이 우리의 부족이 되지 않기 위해서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깨닫고 새로워지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 영생의 길을 알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6절)
이 청년은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좋은 것을 가르쳐주시고, 좋은 말씀을 해주시며, 또 착한 일을 하시는 하나의 선생님으로만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의 구주이시고, 우리의 생명이십니다. 요한복음 14:6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했고, 요한복음 17:3에 보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람이 수단과 방법, 지식과 과학의 모든 시스템을 통해서 행복한 삶을 영위한다 할지라도 영생을 알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그는 정말 어리석고 미련한 생활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시고 그를 믿는 자에게 영생을 얻는 길을 제시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오늘 우리는 온 인류를 위한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깨달아야 합니다. 물을 떠난 고기가 살 수 없듯이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땅을 떠나서 나무가 존재할 수 없듯이 우리는 예수님께 생활의 뿌리를 내려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없이 사는 사람은 타락과 멸망의 길에서 몸부림치며 방황하는 인생인 것입니다. 마음을 달래보기 위해서 술을 마시고 흡연을 하며 마약을 합니다. 그리고 소리를 지르고 부셔보고 몸부림치며 땅을 치고 통곡해도 마음이 치료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삶의 목표를 예수님께 고정하고 사는 자에게는 주님이 그의 반석이 되시고, 피난처가 되시며, 생명의 근원이 되어 주십니다. 영생을 얻는 자만이 하늘의 기쁨과 찬송이 있게 되고, 천군천사가 함께 하는 아름다운 삶이 이루어질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볼 때 저 분의 머리에 얼마나 정치학, 문학, 생물학, 지리학, 역사학에 대한 지식이 들어있는가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느냐? 내 마음 속에 예수가 함께 하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 땅의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 할지라도 영생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사람은 그의 죽음과 함께 영원한 심판과 멸망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최후의 날에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아침 안개처럼 다 사라지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생의 기쁨과 축복은 영원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생을 소유한 자에게 찬송과 기쁨이 있게 해주셨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이 청년은 영생의 길을 알지 못하고 살았기 때문에 그의 삶에 만족이 없었습니다. 또 이 분은 영생을 어떤 인간의 행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영생은 선한 일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돈으로 사는 것도 아닙니다. 남보다도 더 뛰어난 수단과 방법이 있다고 해서 영생을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 예수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우리 성도 여러분, 또 전 세계에서 위성이나 TV, 인터넷 혹은 라디오로 이 말씀을 시청하시는 여러분, 예수님은 영원히 당신과 함께 하시고, 영원히 당신의 구주가 되시고, 영원히 당신을 천국까지 인도해주시기 위해서 오늘도 역사해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헌신과 봉사가 없는 생활을 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21절) 이 분은 혼자 열심히 쌓아놓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청년은 주님을 위해서는 쌓아두지 아니했습니다. 마태복음 6:19에 보면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주님을 위해 헌신과 봉사를 할 줄 알 때 하나님이 역사해주십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 자에게는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와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구제할 수 있는 힘을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시편 122:9에 보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네 복을 구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려 하는 자는 성전을 위할 수 있는 복을 준다는 말입니다.
베드로전서 4:10에 보면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한 청지기같이 봉사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십니다. 또 잠언 29:7에 보면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 주나, 악인은 알아 줄 지식이 없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를 도울 수 있는 지식을 주십니다.
잠언 14:31에 보면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가난한 자를 학대하면 그를 지으신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는 자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0:42에 보면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지상에서 하는 모든 봉사는 바로 주님의 백성으로서의 마땅한 의무요, 실천해야될 도리입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축복은 행함으로 받습니다. 시편 9:12에 보면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가난한 자가 사기성이 아닐진대 도와주기를 좋아하십시오. 도와주어서 손해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주변의 가난한 분들을 찾아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심어주어야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북한 동포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저들이 사랑을 받을 때 감사할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감사한 그 마음 속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심어질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9:36에 보면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구제하기를 좋아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를 좋아했는데, 어느 날 이 여인이 병들어 죽었습니다. 이 때에 베드로가 거기에 나타났을 때 많은 사람들이 선행과 구제한 일이 심히 많았던 다비다를 칭찬하면서 베드로에게 그들이 입고 있는 속옷과 겉옷을 내어 보이면서 모두가 하나님께서 그 여인을 살려주기를 위해서 간청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 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았다고 했습니다(행 9:40). 하나님께서 일으켜주셨습니다. 평생에 심은 선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절대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사랑으로 조명하면 악이 무릎을 꿇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배후에서 도와주시고 승리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줄 때에 감동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베풀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하늘의 상 받을 축복을 쌓아놓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21절) 왜냐하면 이 사람은 전부 다 땅에만 쌓아놓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늘의 상 받을 일을 많이 해야 됩니다. 갈라디아서 6:7에 보면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심는 대로 하나님이 거두게 하십니다. 절대 하나님은 주님의 이름으로 행한 일에 대해서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심은 것을 거두게 해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받을 상을 기뻐하고 소망했습니다. 디모데후서 4:7,8에 보면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나는 하나님 앞에 상을 받을 수 있겠는가? 나는 하루 하루를 지날 때마다 상 받을 일을 했는가? 한 주간, 한 달, 1년을 지날 때마다 하나님께 상 받을 준비를 했는가?'를 생각해야 됩니다. 마태복음 5:10∼12에 보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때로는 몸을 심고, 마음을 심고, 시간을 심고, 정성을 다하여 심는데 그 때마다 하늘과 땅의 모든 복이 임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여러분에게는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해 동안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여러분 자신의 부족한 것을 돌아보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능력을 구하여 아직도 영생의 길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이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주님을 위해 헌신과 봉사의 삶을 살며, 하늘의 상 받을 축복을 쌓으면서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