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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시인·극작가. |
베르겐 출생. 대학시절부터 모험을 즐겨 세계 각국을 여행하였다. 나중에 옥스퍼드대학에서 G.G.N.바이런, M.W.셸리, J.키츠 등의 업적을 연구하여, 《요절한 시인들》(1932) 등을 썼다. 종군기자로서 중국의 내전(內戰)을 목격하고 에스파냐내란 2년간의 소비에트 체제 등을 체험하여, 종래의 시대적 절망·회의·신앙 등을 다룬 서정성으로부터 차차 사회문제로 눈을 돌렸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이 침입하자 이에 항전, 마지막에는 영국으로 가 종군기자로서 베를린 폭격작전에 직접 참가하였다가 피격, 전사하였다. 시집 《희망봉을 돌아서 Rundt Kap det Gode Haab》(1922), 소설 《배는 다시 나아간다 Skibet gaar videre》(1924), 희곡 《우리의 명예와 우리의 힘 V r oere og v
r makt》(1935), 에스파냐내란을 다룬 《패배 Nederlaget》 등이 대표작이다. /naver
1894 -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3세(Aleksandr III) 사망
알렉산드르 3세 [Aleksandr III, 1845.3.10~1894.11.1]
러시아 황제.
정식 명칭 Alexandr Alexandrovich. 알렉산드르 2세의 둘째 아들, 니콜라이 1세의 손자이다. 처음에는 군인이 될 생각이었으나 1865년 맏형 니콜라이가 죽자 황태자가 되었고, 이어 황제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테러로 아버지가 암살되자 곧 즉위하여 전제주의의 강화를 목표로, 로마노프왕조의 군주 중에서 가장 보수적인 황제가 되었다. 귀족 ·지주에게 특별할인으로 장기의 유통자금을 대여해 주는 지주토지은행(地主土地銀行)을 창설하고 농민공동체에 대한 지주의 감독제, 경찰권의 강화, 대학자치제의 박탈, 특정 직업인의 중등교육의 제한, 초등교육을 교회의 감독하에 두는 등의 시책으로 대개혁시대(大改革時代)의 자유주의적 조치를 대폭적으로 제한하였다. 또 반(反)유대법을 펴서 유대인을 학살하는 한편, 폴란드 ·우크라이나 ·발트 지방에서의 대러시아화(化) 정책 등의 반동정치를 감행하였다.
대외적으로는 불간섭정책을 취하여 아프가니스탄과의 분쟁으로 군대를 동원한 외에는 전쟁의 경험이 없다. 또, 신중하게 3제동맹(三帝同盟: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 황제의 동맹)’을 부활시켰으나, 관세문제 등으로 독일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러시아-프랑스동맹을 맺었다(1891∼1894). 이 동맹에 의하여 도입한 프랑스의 자본으로 남(南)러시아에 신공업이 일어나고, 시베리아철도도 착공하였다(1891). 치세(治世)에 러시아 자본주의의 약진이 시작되었으나 그것이 도리어 러시아 농업을 약화시켰고, 러시아에도 산업 프롤레타리아가 뿌리를 내려서 마르크스주의와 결합한 노동운동이 혁명적인 급진적 지식계급인 나로드니키의 운동을 대신하게 되었다. 청 ·일전쟁이 계속되는 동안에 죽었다. /naver
- 'Gen. Tadeusz Kosciuszko and Insurgents' - 'Copernicus'
- 'Stancyk(Jester)' - 'Ostafi Daszkievicz'
- 'Sobieski at Vienna'
1893 - 폴란드의 화가 얀 마테이코(Matejko, Jan) 사망
마테이코 [Matejko, Jan, 1838.6.24~1893.11.1]
폴란드의 화가.
크라쿠프 출생. 1858년부터 독일의 뮌헨과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그림공부를 하였다. 1864년 파리의 살롱전에서 금상을 받은 《스카루가의 설교》로 명성을 얻었고, 그 후 조국의 역사상의 큰 사건과 전투 등을 주제로 한 사실적인 역사화를 많이 그렸다. 때로는 당시의 정치를 비판한 그림도 그렸으며, 또 초상화도 많이 남겼다.
1873년부터는 크라코프미술학교의 교장으로 일하는 한편 유럽 각지의 아카데미 회원으로서도 많은 활동을 하고, 1889년부터는 크라코프의 성마리아성당의 장식을 맡기도 하였다. 그는 지나치게 주제를 중시한다는 비판도 받았으나 국민화가로서의 영향력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대표작에 《그른바르드의 전투》 《포프코프 근처의 스테판 바트리》 등이 있다. /네이버
- 'Children Coming out of School' - 'Children Playing'
1887 - 영국의 화가 로렌스 스티븐 라우리(Lowry, Lawrence Stephen) 출생
라우리 [Lowry, Lawrence Stephen, 1887.11.1~1976.2.23]
영국의 화가.
현대 도시생활의 황량함과 외로움을 표현한 산업풍경화로 유명하다. 1905~25년 맨체스터와 샐퍼드의 여러 미술학교에서 간헐적으로 공부했으며, 맨체스터 부동산회사의 집세 수금원으로 출발해 현금출납 책임자로 지위가 오르기까지인 1910~52년에 장기근무했다. 1915년 샐퍼드와 맨체스터를 비롯한 잉글랜드 중동부 지방의 산업 풍경을 묘사하는 일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뒤 20년에 걸쳐 굴뚝 등의 공장 구조물을 배경으로 뭔가 고립된 분위기에서 작업복 차림의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는 독특한 도시 풍경의 소재를 발전시켰다. 그의 그림에 사용된 색채는 대개 단조롭지만, 때로는 강렬하고 때로는 미묘한 색조의 대비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다소 소박한 그의 양식적 특징은 강렬한 구도와 능숙한 스케치로 보완되어 있다. 라우리는 1939년 런던에서 처음으로 개인전을 가질 때까지는 대중에게 거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의 실제 재능에 대해서는 견해가 분분하지만, 그의 예술적 상상력의 독창성은 대체로 인정받고 있다. /브리태니커
1884 - 프랑스의 언론인, 작가 알베르 롱드르(Londres, Albert) 출생
롱드르 [Londres, Albert, 1884.11.1~1932.5.16]
Albert Londres (1 November 1884 - 16 May 1932) was a French journalist and writer. One of the inventors of investigative journalism, he criticized abuses of colonialism such as forced labour. Albert Londres gave his name to a journalism prize for Francophone journalists.
Biography
http://en.wikipedia.org/wiki/Albert_Londres
우리의 역할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것도, 비난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역할은 자신의 신용과 명예, 삶 전체를 저울에 올려놓고,
전쟁과 분쟁으로 입은 세상의 상처에 펜을 가져다 대는 것이다.
- 알베르 롱드르
1880 - 독일의 기상학자, 지구물리학자 알프레트 베게너(Wegener, Alfred) 출생
베게너 [Wegener, Alfred Lothar, 1880.11.1~1930.11]
독일의 기상학자, 지구물리학자.
대륙표이설(大陸漂移說)을 최초로 완벽하게 설명했다. 고아원장의 아들로 태어나 1905년 베를린대학교에서 천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당시 고기후학(古氣候學)에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1906~08년에 극지방의 대기순환을 연구하기 위한 그린란드 탐험에 참여했다. 그후에도 1912~13, 1929, 1930년의 3차례에 걸쳐 그린란드를 탐험했다. 마르부르크·함부르크 대학교에서 기상학을 가르쳤으며, 1924~30년에 그라츠대학교의 기상학 및 지구물리학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1930년 마지막 그린란드 탐험도중 죽었다.
베게너는 다른 선배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남아메리카 대륙의 동해안과 아프리카 대륙 서해안의 해안선이 서로 비슷한 것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들 대륙들은 한때 서로 붙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1910년경에는 오늘날의 모든 대륙들은 후기 고생대(약 2억 5,000만 년 전)에 하나의 커다란 육괴(陸塊) 혹은 초대륙(超大陸)을 구성했으며, 그후 갈라졌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베게너는 이러한 고대륙(古大陸)을 판게아라고 불렀다. 다른 과학자들도 이러한 초대륙의 존재를 주장하기는 했지만, 그들은 초대륙이 오늘날 세계의 여러 대륙들로 분리된 것은 초대륙의 일부가 함몰 또는 침강해 대서양과 인도양을 형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베게너는 판게아를 구성한 지역들이 오랜 지질시대를 통해 수천㎞에 달하는 거리를 천천히 이동함으로써 서로 분리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대륙의 운동을 일컬어 '대륙이동'(continental displacement:독일어로 Verschiebung der Kontinente)이라고 했는데, 이는 후에 '대륙표이'(continental drift)라는 용어로 대체되었다.
1912년 베게너는 그의 학설을 강의에서 처음 제시했으며, 1915년 가장 중요한 저서인 〈대륙과 대양의 기원 Die Entstehung der Kontinente und Ozeane〉을 통해 완전한 형태로 출판했다. 그는 자신의 학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지질학적 및 고생물학적 증거를 모으기 위해 과학문헌을 조사했다. 그결과 밀접한 유연관계(類緣關係)를 가진 생물 화석 및 유사한 지층들이 멀리 떨어진 대륙들, 특히 아메리카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의 양쪽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베게너의 대륙표이설은 그후 10년간 몇몇 학자들에 의해 지지를 받았으나 대륙이동을 일으키는 힘에 대한 그의 가정은 믿기 어려워 보였다. 1930년대에 이르러 그의 학설은 대부분의 지질학자들로부터 부정되었으며, 그의 이론은 그후 수십 년 간 사장되었다가 1960년대에 들어서야 판구조론(板構造論)의 일부로 부활되었다. /브리태니커
1879 - 헝가리의 정치가 텔레키 팔(Teleki Pál) 출생
텔레키 [Teleki Pál, 1879.11.1~1941.4.3]
헝가리의 정치가.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나치 독일과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1905년부터 헝가리 의회 의원을 지냈고, 저명한 지리학자였던 텔레키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파리 평화회의(1919)에 헝가리 대표로 참석했다. 1921년에 그는 평소부터 신뢰하지 않았던 정당정치에서 손을 뗐으나 총리가 되어 다시 공직생활로 돌아왔다(1939. 2. 15). 그뒤 여러 파시스트 정당을 해산했지만, 반유대주의 법률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텔레키는 트리아농 조약(1920)을 개정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독일의 힘을 빌려 그 조약으로 잃었던 영토를 돌려받고 싶어했지만, 히틀러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은 헝가리에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를 분할하고 루마니아로부터 트란실바니아 북부를 강제로 양도받았다. 텔레키는 히틀러의 이 2가지 조치를 지지했다. 1940년 그는 유고슬라비아와 우호조약을 맺었는데, 1941년 독일이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자, 텔레키는 독일을 도와서 유고슬라비아와 싸워달라는(그리하여 우호조약의 약속을 깨뜨리라는) 독일의 요구와 독일을 도우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영국의 위협 사이에서 진퇴양난의 궁지에 빠졌다. 양쪽의 압력에 견디지 못한 그는 결국 자살했다. /브리태니커
1878 - 아르헨티나의 법률가, 정치가 사아베드라 라마스(Saavedra Lamas, Carlos) 출생
사아베드라 라마스 [Saavedra Lamas, Carlos, 1878.11.1~1959.5.5]
아르헨티나의 법률가, 외교관, 정치가.
1878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출생하였다. 1903년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교에서 법학박사학위를 취득하고 1915년 법무·교육장관, 1932∼1938년 외무장관을 지냈다. 1935년 부에노스아이레스 회의를 주재하였는데, 이 회의의 결과로 다년간에 걸쳤던 차코전쟁이 종식되었다. 1936년 국제연맹회의 의장에 선출되었고, 1941∼1943년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 총장을 지냈다. 《Por la Paz de la Americas》(1937)를 비롯하여 많은 저서를 남긴 그는 1936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네이버
1870 - 오스트레일리어의 시인, 학자 크리스토퍼 브레넌(Brennan, Christopher) 출생
브레넌 [Brennan, Christopher John, 1870.11.1~1932.10.5]
오스트레일리아의 시인·학자.
그의 매우 개인적인 시들은 대중적인 인기는 얻지 못했지만, 비평가들로부터 생기가 넘치고 진솔하다는 호평을 받았다. 적은 부수만 찍어내거나 또는 타자로 쳐서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들끼리만 돌려보았기 때문에 사실상 여러 해 동안 대부분의 작품들을 구할 수 없었다. 1958년 시집이 나와 무명시인의 신세를 면할 수 있었다.
시드니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1892 문학석사), 뛰어난 고전학자이기도 했다. 그의 시에는 그리스와 라틴 시인들의 영향이 엿보인다. 해외연수 장학생으로 독일에 머무는 동안 상징주의자들에게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귀국 후 도서관에서 목록작성 일을 했으며, 시드니대학교 시간강사를 거쳐 1920년 동 대학 독문학 및 비교문학 부교수로 임명되었다. 인습에 어긋나는 생활방식 때문에 1925년 부교수직에서 쫓겨났고, 그뒤 몇 년 동안 가난하게 살았다. 1897년 〈21편의 시:근원을 향하여 XXI Poems:Towards the Source〉를 200부만 한정출판했고 1914년에는 〈시집 Poems〉, 이듬해에는 〈운명의 노래 A Chant of Doom〉를 발표했다. /브리태니커
1864 - 폴란드의 소설가 스테판 제롬스키(Zeromski, Stefan) 출생
제롬스키 [Zeromski, Stefan, 1864.11.1~1925.11.20]
폴란드의 소설가.
자연주의적이고 서정적인 문체로 칭송받고 있다. 키엘체의 중등학교와 바르샤바의 수의과대학을 다닌 뒤, 시골 대지주의 저택에서 가정교사로 일하다가 스위스와 폴란드 바르샤바의 자모이스키 도서관(1897~1903)에서 사서로 일했다. 폴란드 나우엥초프에 살던 1905년부터 대중교육운동을 벌이다가, 1908년 러시아 당국에 체포되었으며 그뒤 파리(1909~12)와 바르샤바에서 살았다. 그의 첫번째 단편소설은 1889년에 발표되었고, 최초의 장편소설 〈시시포스의 노동 Syzyfowe Prace〉은 1897년에 출판되었다. 그는 〈재 Popioly〉(3권, 1904)로 마침내 명성을 굳혔다. 그의 마지막 장편소설인 〈봄날 Przedwiośnie〉(1925)은 폴란드 독립이 거둔 최초의 성과를 다루고 있다. /브리태니커
1849 - 일본 메이지 시대의 육군 대장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출생
노기 마레스케 [乃木希典,1849.11.1~1912.9.13]
일본의 육군 군인.
조슈 한[長州藩]의 무사 출신으로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의 조슈 정벌 때 조슈 한의 보국대(報國隊)에 가담해 포병대원으로 전투에 참가했다. 보신 전쟁[戊辰戰爭]에도 참가하여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를 따라 바쿠후의 군대와 싸웠다. 1871년 도쿄로 가서 신친위대(新親衛隊)의 육군 소좌로 임관되었으며 1875년 고쿠라[小倉]의 보병 14연대장 직무대리가 되었다. 세이난 전쟁[西南戰爭]에서는 군기를 적에게 빼앗기는 일생일대의 치욕을 당하기도 했다. 1886~88년 독일에서 군제와 전술을 공부하고 돌아와 청일전쟁에 보병 제1여단장으로 출정했다. 1896년에 제3대 타이완 총독이 되었으나 통치에 실패하여 사임했다(1898).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휴직중이었으나 소집되어 같은 해 5월 제3군 사령관으로 뤼순[旅順]을 공략했다. 1907년에는 가쿠슈인[學習院] 원장을 역임했으며 자신을 신임하던 메이지 천황[明治天皇]이 죽자, 장례일에 도쿄의 자택에서 부인과 함께 자결했다. 당시 일본군의 최고 지도자로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와 함께 '해군의 도고, 육군의 노기'라고 일컬어진다. /브리태니커
- 'Sarah Bernhardt, Actress' - 'Young Love'
1848 - 프랑스의 화가 쥘 바스티앵 르파주(Bastien-Lepage, Jules) 출생
바스티앵 르파주 [Bastien-Lepage, Jules, 1848.11.1~1884.12.10]
프랑스의 화가.
시골 풍경을 배경으로 한 풍속화를 그려 프랑스와 영국에서 널리 모방되었다. 바스티앵 르파주는 알렉상드르 카바넬에게 그림을 배웠고, 1870년 파리 살롱 전에 처음으로 작품을 출품했으며, 1874년 살롱 전에서는 에두아르 마네의 표현양식을 약간 모방한 〈봄 노래 Spring Song〉로 상을 받았다. 〈목초밭 The Hayfield〉(1878, 파리 루브르 박물관)은 장 프랑수아 밀레의 전통을 따른 작품으로서, 바스티앵 르파주의 작품을 특징짓는 감상적인 요소를 보여준다. 잔 다르크를 로렌 지방의 시골소녀로 묘사한 〈하늘의 소리를 듣고 있는 잔 다르크 Joan of Arc Listening to the Voices〉(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는 그의 대표작이다. 그는 유명한 초상화가이기도 했다. /브리태니커
1815 - 미국의 의사 크로포드 롱(Long, Crawford) 출생
롱 [Long, Crawford Williamson, 1815.11.1~1878.6.16]
미국의 의사.
수술시 마취제로서 에테르를 처음 사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롱은 뉴욕 시에 있는 몇몇 병원에서 일한 뒤 고향 조지아 주로 돌아가 제퍼슨에서 개업했다. 그는 '에테르 모임'(에테르 중독 때 생기는 유쾌한 상태를 즐기는 사람들의 사교모임)에서 부상을 입은 사람들이 통증을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을 관찰했다. 1842년 한 환자에게 에테르를 흡입하게 한 뒤 통증없이 환자의 목에서 종양을 제거했다. 그는 계속해서 다른 질병치료에도 에테르를 사용했지만 1849년까지 그에 대한 보고서를 출판하지 않았다. 그보다 3년 전인 1846년 치과의사 윌리엄 모턴은 비슷한 종류의 수술에서 에테르의 사용장면을 공개했다. 모턴이 발견과 발표에 대한 자신의 업적을 주장했지만 에테르를 임상에 처음 사용한 사람은 롱이라는 사실이 인정되고 있다. /브리태니커
1800 - 미국 대통령 관저 백악관 개관
미국 대통령 관저인 백악관이 1800년 11월 1일 개관됐다. 워싱턴 DC 포토맥강을 내려다보는 펜실베니아가(街) 1600번지에 위치한 백악관은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를 첫 주인으로 맞았다.
초대 조지 워싱턴 대통령이 1792년 행정-입법부 분리를 상징해 의사당에서 16블럭 떨어진 곳에 초석을 놓도록 했으나 정작 본인은 완공 한 해 전인 1799년 사망했다. 아일랜드 출신 건축가 제임스 호번(James Hoban, 1762~1831)이 공사를 맡아 회백색 사암(砂岩)을 주요 자재로 썼다. 주변 빨간 벽돌 건물들과 대조를 보여 '화이트 하우스(White House)'로 불리우기 시작했고, 100년 후인 1901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때 공식 명칭으로 확정됐다.
1814년 영국과 전쟁 중 한 차례 불탔고, 1929년 허버트 후버 대통령 시절엔 화재로 서관(West Wing)이 대부분 소실되기도 했다. 현재는 방 132개에 화장실 32개, 7개 계단이 있는 6층 건물로 확장됐다. 백악관 건물은 내셔널 캐피털 공원의 일부이며, 1988년 박물관으로 승인됐다. /조선
[역사속의 오늘] 백악관 개관
1800년 11월 1일, 미국 대통령 관저인 백악관이 개관됐다. 백악관은 행정부와 입법부의 분리를 상징해 의사당에서 16블록 떨어진 워싱턴 DC 포토맥강을 내려다보는 펜실베니아가 1600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1791년, 조지 워싱턴 초대 미국대통령이 수도로 지정된 워싱턴에 적합한 대통령 관저를 설계하기 위한 공개 경쟁을 지시, 건축가 제임스 호번이 필라델피아 스타일의 조지 양식의 건물 초안으로 설계권을 얻어냈다. 호번은 엷은 회색 사암으로 된 구조물을 건축했다. 이 건물은 주변 빨간 벽돌 건물들과 대조를 보여 'White House(백악관)'로 불리기 시작했고, 1901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때 공식 명칭으로 확정됐다. 이곳은 존 애덤스 대통령 이후의 모든 미국 대통령의 관저로 사용되었으며, 수도에서 가장 오래된 연방 건물로 기록되고 있다.
이후 1814년 영국과 전쟁 중 화재와 1929년 허버트 후버 대통령 시절의 화재로 피해를 입기도 했다. 현재 방 132개에 화장실 32개, 7개 계단이 있는 6층 건물로 확장돼 있다. 건물의 일부는 개방되어 매년 150만명의 관광객이 다녀간다. 또 백악관 건물은 1988년 박물관으로 승인됐다.
정보관리부 이재근 /매일신문 2008년 11월 01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9921&yy=2008
1772 - 프랑스의 화학자 라부아지에, 연소에서 공기의 역할을 연구하여 발표
연소에서 공기의 역할을 연구하여 중요한 업적을 남긴다. 1772년 11월 1일 황과 인이 탈 때에는 공기를 흡수하여 무게가 증가하고 산화납(Ⅱ)를 숯과 같이 가열하여 생긴 금속성 납은 공기를 잃어 버려서 산화납(Ⅱ)보다도 무게가 감소한다는 사실을 과학 아카데미에 보고했다. 아직 이 과정에서 공기의 역할을 정확하게 알지 못했지만 연구를 계속해서 그 실험결과를 그의 첫 저서인 <물리와 화학 소론>에 실어 출판했다.
http://user.chollian.net/~mooner13/a735.htm
- 'Antonio Canova' - 'The Three Graces' - 'Princess Maria Leopoldine'
- 'Canova' - 'Hercules and Lichas' - 'Pius VII'
- 'Paulina Borghese as Venus'
- 'Cupid and Psyche' - 'Bust of Napoleon'
- Galleria Nazionale 'Borghese'
1757 - 이탈리아의 조각가 안토니오 카노바(Canova, Antonio) 출생
카노바 [Canova, Antonio marchese d'Ischia, 1757.11.1~1822.10.13]
작품으로는 교황 클레멘스 14세의 묘(1783~87, 로마 산아포스톨리 교회)와 교황 클레멘스 13세의 묘(1787~92, 로마 성베드로 대성당), 나폴레옹의 조상(밀라노 브레라 미술관, 런던 웰링턴 박물관), 〈비너스 빅트릭스 Venus Victrix〉처럼 비스듬히 누워 있는 자세로 제작된 나폴레옹의 누이 보르게세 공주의 조상 등이 있다. 나폴레옹이 물러난 뒤 파리에서 미술품들을 되찾아온 공로로 후작이 되었다. 아버지는 석공으로 1761년 죽었으며, 역시 석공인 할아버지가 그를 키웠다. 베네치아 의원의 후원으로 11세에 파냐노(아솔로)로 가서 조각가 주세페 베르나르디(토레티라고도 함)의 문하생이 되었고, 같은 해인 1768년에 베르나르디가 파냐노에서 베네치아로 작업실을 옮기자 그를 따라갔다. 카노바는 스승을 도우면서 몇 개의 소소한 의뢰품을 혼자 힘으로 만들었으며, 당시의 유행대로 고전 미술을 공부하면서 누드 데생을 하기도 했다.
1775년 독립해 베네치아에 작업실을 차렸다. 1779년 베네치아 공화국의 행정장관인 피사니에게서 의뢰받은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 Daedalus and Icarus〉는 최초의 주요작품이다. 로코코 양식을 띤 이 조상은 너무 사실적이어서 살아 있는 모델에 석고를 부어 만든 것이 아니냐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1779~80년 로마에 머물면서 스코틀랜드의 화가이자 화상인 개빈 해밀턴을 비롯한 당대의 주요미술가들과 만났으며, 해밀턴의 지도를 받아 고전미술을 보다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또한 그는 나폴리와 헤르쿨라네움·폼페이·파이스툼 등의 고대유적지를 방문했다. 잠깐 베네치아로 되돌아갔다가 1781년 다시 로마로 와서 남은 생애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는 로마 미술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주요인물이 되었으며 언제나 기꺼이 젊은 미술가들을 돕고 후원자를 소개해주었다. 1783년 로마의 산아포스톨리 교회에 교황 클레멘스 14세의 묘를 만들어 달라는 중요한 의뢰를 받았다. 1787년 이 묘가 공개되자 그것을 보려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바로 그해에 성베드로 대성당에 교황 클레멘스 13세의 묘 제작을 의뢰받아 1792년에 완성했는데, 클레멘스 14세의 묘보다 고대미술에 담긴 고전미학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졌음을 보여준다. 그뒤의 묘들은 점점 더 신고전주의 양식에 가까워졌으며 감정의 표현과 절제를 동시에 갖추고 있어서 어떤 점에서는 당대 영국의 조각가인 존 플랙스먼의 작품과 비슷했다.
1798년 프랑스가 로마를 침략하자 카노바는 북쪽으로 갔다. 빈에서는 장크트아우구스티네 교회에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묘비를 만들었다(1798~1805). 1802년 교황의 권유로 나폴레옹의 초청을 받아들여 파리에 갔으며 궁정 조각가가 되어 프랑스 미술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1802년 나폴레옹의 흉상을 만들었으며, 1806년 조제프 보나파르트에게서 나폴레옹의 기마상 제작을 의뢰받았다. 1807년경 〈비너스 빅트릭스〉처럼 거의 발가벗은 채로 긴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모습으로 나폴레옹의 누이인 파올리나 보르게세의 조상을 완성했는데,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의 하나인 이 작품은 고전적 여신상과 당대의 인물상을 결합한 것이다. 1811년에는 나폴레옹을 고전시대의 영웅들처럼 나체상으로 묘사한 2점의 거대한 조상(밀라노 브레라 미술관, 런던 웰링턴 박물관)을 완성했다. 또한 나폴레옹 시대의 가장 표현이 풍부하고 야심적인 작품인 〈메두사의 머리를 들고 있는 페르세우스 Perseus with Medusa's Head〉(1801, 바티칸 궁전)·〈권투선수들 Pugilists〉(1802)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1805년 교황청의 미술품들과 고대 유물을 관리하는 총감독관으로 임명되었다. 1810년 로마에 있는 '아카데미아 디 산 루카'의 원장이 되었으며 죽을 때까지 이 자리를 지켰다. 프랑스인들이 약탈해간 이탈리아의 귀중한 미술품들을 되찾기 위해 파리를 방문한 뒤 1815년 런던에 가서 '엘긴마블스'를 접했다. 파리에서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자 그 보답으로 교황이 이스키아의 후작 작위를 주었다. 런던에 있는 동안 후에 조지 4세가 된 섭정 왕자로부터 실물 크기의 군상인 〈비너스와 마르스 Venus and Mars〉를 의뢰받았다. 그밖에 말년에는 성베드로 대성당에 있는 스튜어트 기념비(1819)와 나폴레옹의 기마상을 개조해 완성한 나폴리 소재의 찰스 3세 조상(1819), 1821년 노스캐롤라이나의 롤리에 세워진 고대 로마의 옷차림을 한 조지 워싱턴의 이상적인 기념상(1820, 1830년 화재로 소실) 등을 의뢰받아 제작했다.
카노바는 화가이기도 했지만 그림(대부분 포사뇨의 카노바 미술관에 소장)은 그다지 많지 않으며 대체로 수준이 낮다. 그림으로는 몇 점의 초상화와 헤르쿨라네움에서 발견된 고대 그림들을 개작한 것들이 남아 있다. 그는 로마의 판테온을 모방해 직접 설계한 포사뇨의 사원에 묻혔다. 카노바는 조각의 신고전주의 양식을 발전시킨 점에서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림에서 차지하는 비중 못지 않게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가 18세기말과 19세기초에 유럽 조각 분야에서 얼마 만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는가는 그에 대한 찬사로 가득 찬 회고록·시·산문 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비록 그 다음 세기에 명성이 크게 떨어지긴 했지만, 살아 있는 동안 그의 작품을 평가할 때 '탁월한', '놀라운', '최상'이라는 수식어들이 자주 사용되었다.
D. Irwin 글 /브리태니커
1636 - 프랑스의 시인, 비평가 니콜라 부알로(Boileau, Nicolas) 출생
부알로 [Boileau(-Despréaux), Nicolas, 1636.11.1~1711.3.13]
17세기 프랑스의 시인·비평가.
파리 출생. 시집으로는 《풍자시집 Satires》(1666) 《서한시(書翰詩) Epitres》(1668~1695) 등이 있는데, 그의 이름이 후세에 남은 것은 문학 비평사상 극히 중요한 《시법(詩法) L’art Poetique》(1674)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그는 시인이라기보다는 비평가 ·이론가였으며, 《풍자시집》(1666)에서는 17세기 프랑스의 풍조인 프레시오지테(preciosite:부자연스러운 꾸밈)이나 뷔를레스크(burlesque:광대취미)를 공격하였다. 또 《시법》에서는 그의 친구이기도 한 위대한 작가들, 즉 몰리에르, 라 퐁텐, 라신 등의 대변자가 되어, 그들의 작품에서 고전주의문학의 이론을 추출하여 집대성하였다. 그의 비평의 근원을 이룬 것은 이성(理性)과 양식(良識)이었다. 그는 “이성을 사랑하자”고 노래하고, “자연에서 멀어지지 마라”고 읊으면서, 자연(인간성) 속에 있는 ‘진실성’을 정확히 묘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naver
- 'Church of St. Mary of Peace, Rome', 'Church of St. Agnes, Fountain and Obelisk, Rome'
1596 - 이탈리아의 화가, 건축가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Pietro da Cortona) 출생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 [Pietro da Cortona, 1596.11.1~1669.5.16]
본명 피에트로 베레티니(Pietro Berrettini). 코르토나 출생. 출생지 이름을 따서 코르토나로 불렸다. 17세기 중엽 로마 등에 있는 팔라초의 바로크양식 천장에 천장화를 장식한 일로 유명하다. 그는 화려한 색채와 빛의 효과를 이용하여 바로크양식의 천장에 알맞은 아름다운 인물·장식을 그려, 회화와 건축을 통일적으로 구상하였다.
대표적인 천장장식화로는 로마의 팔라초 바르베리니, 피렌체의 팔라초 피티 등이 있다. 그 밖에 교회 내외부 장식도 많이 했으며 장식방법은 후기 바로크미술의 이탈리아와 프랑스 건축장식에 큰 영향을 끼쳤다. 건축가로서는 바로크양식의 작품이 적으며, 로마의 산티 루카 에 마르티노의 내부는 훌륭하다. /naver
1520 -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마젤란 해협에 들어서다
[어제의 오늘]1520년 ‘마젤란 해협’ 첫 통과
ㆍ대서양과 태평양 연결한 첫 뱃길
1520년 11월1일 마젤란 해협이 발견됐다. 남아메리카 최남단 칠레 푼타 아레나스와 티에라 델 푸에고 사이의 마젤란 해협은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첫 해로다.
남반구 끝에 미지의 대륙이 있으리란 믿음은 중세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지도에 어렴풋이 그려진 이 대륙은 ‘안티크톤’. 거꾸로 된 나라로 여겨졌다. 하늘과 땅이 뒤집혀 있고, 눈이 땅에서 하늘로 내리며 열여섯개의 손가락을 가진 사람들이 춤을 춘다고 상상했다. 대항해 시대의 탐험가들은 남아메리카와 미지의 대륙 사이에 수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포르투갈의 탐험가 페르디난드 마젤란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 수로는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지름길일지도 몰랐다. 스페인 왕 샤를 5세가 그의 탐험을 지원하고 나섰다. 아시아의 향신료를 스페인으로 실어올 ‘향료길’을 찾기 위함이었다.
1519년 8월, 마젤란과 선원 237명은 5척의 배를 나눠 타고 스페인 세비야를 떠났다.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사이를 비스듬히 가로지른 탐험대는 이듬해 10월 남위 52도에 진입했다. 바람은 거칠고 파도는 높았다. 아슬아슬하게 바위 틈을 헤친 끝에 탐험대는 수로의 끝이 대양으로 연결돼 있음을 확인했다. 맞은편 섬에서는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원주민들이 피운 불이었다. 마젤란은 이 섬을 티에라 델 푸에고 ‘불의 섬’이라고, 눈 앞의 바다를 태평양, ‘평화로운 바다’라고 명명했다. 그들이 헤쳐온 대서양에 비하면 더없이 고요한 바다였다. 이 수로는 ‘성자들의 해협’으로 불렀다. 그날이 만성절 즉 모든 성자들을 기념하는 가톨릭 축일이었기 때문이다. 이 해협은 마젤란의 탐험을 기려 ‘마젤란 해협’으로 바뀌어 불리게 된다.
마젤란의 탐험대는 서쪽으로 항해를 계속해 3년여 만에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마젤란 자신은 필리핀 막탄 섬에서 원주민 부족을 습격하다 사망했다. 그러나 대원들은 첫 세계일주 항해에 성공한 셈이었다. 생존자는 18명에 불과했다. 향신료를 싣기 위해 선원 일부를 낯선 땅에 버리기도 한 가혹한 항해였다.
1941년 파나마 운하가 개통될 때까지 마젤란 해협은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주요 수로였다. 바람과 파도가 거세고, 좁은 곳은 폭이 2㎞밖에 되지 않아 큰 배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통과해야 했다. 지금은 ‘지구의 끝’을 찾아오는 여행객들이 페리에 몸을 싣고 이 해협을 건넌다.
최명애 기자 glaukus@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0-10-31 21:28:33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1010312128335&code=100100&s_code=ap005
- Portrait of Cellini - 'Saliera(Saltcellar)'
1500 - 이탈리아의 조각가, 금속 세공가 벤베누토 첼리니(Cellini, Benvenuto) 출생
첼리니(Cellini, Benvenuto, 1500.11.1~1571.2.13]
피렌체파의 조각가, 금세공인, 작가.
매우 뛰어난 마니에리스모 미술가이며 자신과 당대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묘사한 자서전으로 가장 주목받는 르네상스기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를 음악가로 키우려던 아버지의 계획을 거부하고 피렌체의 금세공인인 안드레아 디 산드로 마르코네의 공방에서 금속세공 도제가 되었다. 1516년 소란을 일으켜 시에나로 추방되었다가 1517∼19년 피렌체로 돌아왔으며 그뒤 로마로 옮겼다. 1523년 피렌체에서 싸움을 일으켜 기소되어 사형선고를 받자 다시 로마로 달아나서 그곳에서 살라망카 주교와 시지스몬도 키지, 교황 클레멘스 7세를 위해 일했다.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1527년 로마 방어전투에 참가하여, 오랑주 공과 부르봉 왕가의 고관을 사살했다고 한다. 로마가 함락된 뒤 피렌체로 돌아갔으며, 1528년 만토바에서 곤차가 추기경의 도장을 만들었다(만토바 감독교회의 사료보관소). 1529년 로마로 되돌아가 교황청 주조소의 '마에스트로 델 스탐페'로 임명되었으며, 1530∼31년 클레멘스 7세의 제의에 달 유명한 쇠단추를 만들었다. 귀금속으로 만든 그의 다른 많은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이것도 녹아없어졌지만, 그 도안은 18세기에 본떠 그린 3점의 드로잉(런던 대영박물관)으로 남아 전해진다. 그가 클레멘스 7세를 위해 만든 많은 작품들 중 현재 남아 있는 것은 1534년에 만든 2개의 메달(피렌체 우피치 미술관)뿐이다.
첼리니는 경쟁자인 다른 금세공인을 죽였지만 교황 파울루스 3세로부터 사면을 받았다. 그러나 다음해 공증인에게 부상을 입히고 로마에서 피렌체로 달아나 거기에서 알레산드로 데이 메디치를 위해 많은 주화(파리 국립도서관 메달 진열실)를 만들었다. 로마에서 1년을 더 보낸 뒤 한동안 프랑수아 1세의 초청으로 프랑스를 방문하여 프랑수아 1세의 초상 메달(1538, 피렌체 바르젤로)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여행에서 그가 남긴 유일한 작품이다. 1537년 로마로 돌아오는 길에 횡령죄로 고발되어 감옥에 갇혔다. 탈옥을 시도하다 잡혀 다시 감옥에 갇혔지만 결국 1539년 페라라의 에스테 추기경의 도움으로 석방되었으며, 그 대가로 그를 위해 도장을 만들어주었다(1540경, 원품은 분실되고 납에 찍힌 도장 자국이 리옹에 있음). 1540년 다시 프랑수아 1세의 초청을 받아 미완성 상태의 소금그릇을 가지고 프랑스의 퐁텐블로로 가서 왕을 위해 금으로 완성했다. 이것은 첼리니가 만든 귀금속 작품 중 유일하게 진품으로 확인된 작품(빈 미술사박물관)으로 르네상스기의 금세공인이 만든 작품 중 가장 뛰어난 것이다. 1542년 프랑수아 1세로부터 귀화를 허락하는 인가장을 받았으며, 1544년 그로부터 신화에 나오는 인물들로 장식한 12개의 은촛대를 만들어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그 가운데 주노 상의 도안은 파리의 루브르 궁에 있는 한 드로잉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1543∼44년에는 루브르 궁의 입구에 청동으로 커다란 반달 모양을 한 퐁텐블로의 님프를 만들어놓았다. 1543년에는 퐁텐블로에 세울 분수를 위해 거대한 마르스 상의 모형(분실되었음)을 만들었다.
1545년 첼리니는 갑자기 파리를 떠나 피렌체로 돌아갔다. 피렌체에서 그는 코시모 데이 메디치의 환영을 받고, 가장 유명한 조각인 청동상 〈페르세우스 Perseus〉(아직도 피렌체의 로자데이란치에 세워져 있음)와 토스카나 대공의 거대한 흉상(피렌체 바르젤로)을 의뢰받았는데, 1546년 부도덕한 짓을 저지르고 베네치아로 달아나는 바람에 1548년경에야 완성되었다. 같은 시기에 그는 팔레스트리나에서 출토된 고대의 토르소를 〈가니메데스 Ganymede〉(1546∼47,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로 복원하고, 대리석상인 〈아폴론 Apollo〉·〈히아킨토스 Hyacinth〉(1546)·〈나르키소스 Narcissus〉(1546∼47)를 만들었는데, 이 세 대리석상은 〈페르세우스〉의 실험용 주조품으로 만든 작은 부조 작품인 그레이하운드(1545)와 함께 현재 모두 피렌체의 바르젤로에 소장되어 있다. 첼리니는 또한 피렌체에서 은행가이자 예술후원가인 빈도 알토비티의 청동 흉상(1550경, 보스턴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박물관)을 만들었다. 〈페르세우스〉를 세상에 공개한 뒤(1554) 자신의 무덤(피렌체의 산타안눈치아타 교회에 있음)에 세워놓으려고 대리석 십자가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현재 스페인 에스코리알의 왕립수도원교회에 있다. 이 〈에스코리알 십자가 Escorial Crucifix〉(1556)는 그의 미술이 당시 경쟁자였던 바르톨로메오 암만나티나 바초 반디넬리의 작품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준다. 피렌체 아카데미의 문장(紋章)을 위한 2개의 도안(대영박물관, 뮌헨 국립 그래픽 미술관)은 1563년에 완성되었다. 그의 자서전은 1558~62년에 제작되었으며 1565년부터 금세공과 조각에 관한 주요논문인 〈금세공에 관하여 Trattato del-l'oreficeria〉·〈조각에 관하여 Trattato della scultura〉를 쓰기 시작했다.
첼리니의 명성이 오랫동안 유지되고 있는 것은 미술가로서의 그의 작품보다는 자신의 생애를 기록한 자서전에 힘입은 바가 더 크다. 1728년 이탈리아에서 처음 출판된 첼리니의 자서전은 영어(1771)·독일어(1796)·프랑스어(1822) 등으로 번역되었으며, 당시 낭만주의 운동의 여파로 즉시 널리 보급되었다. 비서에게 구술하여 씌어진 이 자서전은 문학적인 가식 없이 구어체로 서술되어 있으며, 작가 자신이 로마의 클레멘스 7세와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 및 피렌체의 코시모 데이 메디치를 만나 현지에서 겪은 경험들을 직접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비록 과장이 심하고 자기자랑이 많기는 하지만, 놀랄 만큼 솔직하고 비할 데 없이 진솔한 인간 기록이며, 바로 이 때문에 첼리니라는 인물은 잘 알려져 있다.
J. P. Hennessy 글 /브리태니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