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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감정의 표출과 그 공유가 일상을 점유한 나라이다. 그 감정은 덧없음의 일상을 비상(飛上) 시켜 열정과 열망을 인간의 피와 살로 승화시키는 마력(魔力)을 보여준다. 감정의 풍요로움은 시민사회에 귀속적 안정감을 가져다줌으로써 대중사회로 이끄는 견인력이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잔잔한 파고(波高)가 시민의 정서라면 깊은 파고로 열렬한 마음의 흔들림은 내면의 정열이며 애증의 거센 파도가 밀려옴은 대중의 열정이다. 그러기에 정서가 외부 환경에서 내면으로 공급되는 빛의 화학적 반응이라면 열망은 개인의 내면에 이미 형성된 본능적 요소들의 자발적 에너지라 하겠다.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감정은 몸과 마음의 본성에서 발현되는 것이라 거울의 반사처럼 즉각적이다.
감정은 타고난 본능에서의 일렁임이기에 그 대응능력 또한 돌발적이다. 감정을 내면화시키면 정서로 승화하겠으나 아름다움의 즐거움과 기쁨의 환희까지 내면화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표현과 대화에는 언어가 있어 소통이 가능하지만 마음의 교류와 공감에는 정서가 있어 교감이 가능하다. 인간의 활동에서 의식(意識)의 공유는 체계적이기에 형식적이며 이성적이기에 논리적이라면 정서의 교감에는 감성적이기에 감각적이며 표현적이기에 감상적이다. 정서는 생리적이고 경험적인 마음이 주변의 주어진 시공간의 상황과 내면의 대응에서 대상과 함께 하고자 하는 표현의 욕구라 하겠다. 감정은 첫 만남이라는 시공간의 상황 속 대상으로부터 전해지는 느낌에 대한 내면에서 일어나는 인상의 발현이라 하겠다.
감정국가답게 우리의 언어는 감정적 표현들로 가득하다. 감정구조가 언어구조이며 사회구조이기에 국가 또한 감정국가가 마땅하다. 말은 심리적이기에 정서적이라면 글은 논리적이기에 이성적이다. 말은 소리이자 음성이며 진동이자 떨림이기에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의 공유가 그 자체로 즉각적이지만 글은 문자이자 글자이며 기호이자 문장이기에 침묵의 말이자 배움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시각을 동원한 인간의 의식체계라 합리적일 때 그 전파가 가능하다. 말이 먼저였기에 자연의 소리라면 글은 말을 뒷받침하기 위한 양식이었기에 인간의 예술이자 무늬이다. 과거에는 말솜씨나 글재주라는 정서적 표현의 기능성을 강조해왔다면 지금은 말이 소통과 교류의 기능을 넘어 대중의 정서를 자극하는 이념의 언어가 되었다. 언어 고유의 현상이나 의미나 생각이 이젠 감정의 공유를 위한 액션과 편협함과 동정심으로 조작됨으로써 야비하고 간교한 언어 조작이 일상이 되어버린 나라이다.
이성의 과잉이나 초월은 자기 이탈적이기에 자기 성찰의 객관적 효용성이 요구된다. 관념적이기에 내면적이며 개인적이기에 추상적인 이성은 현실에서 대중에 영합하고자 이탈을 꿈꾼다. 그러한 이탈은 언제나 감정에 부합하는 코드화된 관념적 언어들을 동반함으로써 세상을 예단하고 선양하며 편애하는 전제적 구도를 형성해왔을 뿐이다. 그런 인식적 이탈은 이 나라가 감정국가라는 판결에 부합되는 행위이기도 하다. 이성의 대중적 선동에 감정이 기여해왔다. 논리의 이성적 언어체계에 감성의 초월적 믿음의 체계를 개입시키는 이성의 초월적 과잉은 그 양상을 은밀히 드러낸다. 그것은 언제나 천상의 진리를 현실의 믿음으로 요청한다.
감정의 과잉은 인간에게 결과의 행복을 제시한다. 불행까지도 정서적 연민을 통해 애잔한 공간을 마련한다. 감정에의 호소야말로 성취의 발판이자 완결의 순간이다. 정감을 불러올 연민에의 호소는 그 어떤 난관도 회상의 눈물로 해소되는 놀라운 능력을 보인다. 대중적 감정에의 호소야말로 법의 정신도 뒤덮는 파고의 넘침이다. 애정을 파고드는 예리한 온정적 호소가 얼마나 확고하고 결정적인데 굳이 이성의 찬바람에 나서 논리를 전개함으로써 대중적 소외의 몸살을 경험할 이유가 있겠는가. 이성은 순수한 논리와 실천적 분석 그리고 종합적 판단을 갖추기 위해 개별적으로 복잡다단한 삶을 강요하지만 감정은 선험적이고 무차별적이며 본능적이기에 누구나가 열망하는 쾌도난마의 능숙한 선전선동을 몰고 온다.
개념에서 해방된 인식능력이 벌이는 놀이에 예술이 있다고 서구 현대인들이 주장했다면 우리에게는 개념 무상(無常)의 전통적 감정 놀이가 있다고 말하겠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이성적 탐구를 용해시키기에 본능적이며 사실조차도 감상으로 덮어 조작해내는 놀라운 예술적 창조성까지 거리낌이 없다. 감정 예술의 극치는 무당의 굿판이었으니 그것은 초월적 형이상학이기에 죽은 자도 현실로 불러내는 능력을 거침없이 공유한다. 대중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의 횃불은 그 얼마나 영롱할 것이며 찬란할 것인가. 죽은 개념에 죽은 이념까지 억울한 죽음을 불러내는 감정 예술의 천도재(薦度齋)는 그야말로 사회적 제단에 진설된 현실 문제를 마음대로 각색하며 온정적 호소를 일상화하고 있다. 감정국가에서 감정 예술은 국가의 창조적 과제가 된 것이다.
언문(諺文)이라는 한글이야말로 속되고 평범한 백성들의 말소리였으니 그 기원은 불쌍한 머슴들을 돌보는 주인의 심정이었으며 잡다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허접한 인생들에게 시혜를 베풀기 위한 선정(善政)의 수단이었다. 머슴들은 일상이 감정적이기에 상스럽고 사나운 농투성이들의 욕지거리 언어와 아부 언어(형용사)들이 점점 더 언문의 기능을 수행해냈다. 봉건사회는 양반사회였으니 사회적 주도층은 당연히 사대부라는 족보 있는 가문이었으며 족보 없는 계층은 평민으로서의 백성들이었다. 족보는 혈연의 증거물이며 그것은 한문으로써의 문자였기에 문자 숭배는 한문의 숭배이자 중국에 대한 숭배가 당연했다.
그런 한글을 갈고 빗어 한자라는 족보 있는 글자를 뛰어넘어 국민의 언어가 되었다. 전통의 반전이자 민족의 승리였다. 그러나 한문을 말살하고 외국말을 차단해서 얻은 것이 언문이었기에 온 나라의 백성들은 다시 평민이 되어야 했으며 감정의 고양에 매진함이 마땅했다. 이성에 눈뜨면 안 된다는 구조화된 언어의 한계를 국가가 절대화한 것이다. 그처럼 절대국가에서 내국인들의 배움의 끝은 언제나 머슴으로 돌아가는 회귀성이 당연하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세상에서 형이상학적 너머 세계에 대한 희구나 아름다움에 대한 인간의 열망은 양반의 잔류물이기에 혁파의 대상이다. 민족적 올바른 삶의 추구는 결과적으로 성실함보다는 방만함을 몰고 왔을 뿐이다. 말의 창조성이 글의 논리성으로 귀결되지 못하고 감정의 파괴성으로 향했다.
며칠 전 구에서 운영하는 도심 속 가족 캠핑장을 지나가고 있었다. 모처럼 봄비가 굵직하게 내린 다음이라 날씨는 화창했고 주변은 청량했으며 공기는 청명했다. 6년째 지나다니는 숲속 산책길이었지만 어제는 색달랐다. 우선 지나다니던 길이 테이프로 차단되고 거기에는 가족 캠핑장을 방해하지 않게 해야 한다는 지침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코로나 이후 첫 개장이라 그랬나 보다. 결국 샛길로 돌아 공원을 향해 걷는데 관리사무소에서는 여성의 목소리가 외부 스피커로 연신 울려 나왔다. 그 내용은 캠핑장 준수 수칙들이었다. 건전한 시민이 되기 위해서 지켜야 한다는 나름의 캠핑장 자체 지침을 방송하고 있었으나 평일 오후의 한가한 시간에 캠핑장 이용객은 정작 아무도 없었다.
바로 붙은 공원 언덕에 올라 30분 정도 꽃구경에 경치 구경에 하늘 구경까지 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집을 향하고 있었으나 그 지침의 방송 소리는 그때까지도 안타깝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소방차와 자원봉사자들도 와 있는 것을 보니 개장을 앞둔 종합훈련의 과정인 것 같다. 이처럼 대상도 없이 한없이 울려 퍼지는 집단들의 지침에는 인간 순화를 위한 자연 파괴가 느껴진다. 자연을 찾아들었으나 그 자연은 허구적 자연이자 인공의 자연이어야만 했기에 인간의 손길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개인의 교양에 따르는 시민사회는 이미 의식화된 정서에 호소하는 대중사회가 되었다. 도심 속 가족 캠핑장은 도시의 양육된 대중들을 부화시키는 부화장처럼 느껴졌다. 거기에 가족이라는 온정적 고삐까지 죄고 있으니 자연에 와서 조차도 지침에 순종하는 어린 양들을 권양하기 위해 감정에 호소하는 현장이 저절로 열리고 있음을 본다. 절대를 향한 이념의 집단화 사회에서 개인은 언제나 선험적 교화(敎化)의 대상이 되어야만 하나보다.
이성의 사회적 보편 명제가 성립되기보다는 감성의 사회적 절대 명제가 득세하는 절대국가의 모습이다. 삶의 영역을 구분할 수는 없겠으나 현실은 그 구분을 전제하고 있다. 감정은 가공되지 않은 원초적 느낌이기에 나이에 걸맞게 순화되어야 보편적 인간상으로 정립되어 간다고 생각된다. 코흘리개 아이들은 타고난 감정을 발산해야 하기에 동화의 세계로 이끄는 것이 자연스럽다. 도덕의 순화로 엄마와 가족은 아이를 현실 세계로 이끈다. 중학생으로 성장하며 사회는 이성으로서의 규율의 정립을 요구하기에 지성을 요청한다. 어른이 되어서도 윤리 도덕적 감상에 젖어 이성으로의 순화를 거부하는 것은 감정의 집착이라 하겠다. 자발적으로 농경사회를 벗어나지 못하고 감정에 집착을 보이는 나라는 머슴국가일 뿐이다. 산업사회에서는 주관적 윤리도덕이 본능의 순화에 최선이었겠지만 지금의 시민사회에서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인간으로서의 성숙한 시민의식을 갖추는 방식에는 객관적 인식이 요구된다.
감정은 몸과 마음이 하나로 뭉쳐지며 일어나는 포괄적 느낌과 확증적 인식의 발현이다. 따라서 이성의 논리적 개념들을 벗어난다. 이성의 설계도가 아니라 감성의 조감도가 우리에게 먼저 다가옴은 당연해 보인다. 감정은 본성의 나타남이기에 순간적이라면 이성은 논리를 동반해야 하기에 순차적이다. 감정이 결과에 대한 냄비근성이라면 이성은 원인에 대한 탐구 근성이다. 감정은 삶의 풍요로움을 요청하기에 항시 자신의 영역을 지켜내기 위해 이성적 지성의 추구를 경계의 눈으로 주시하며 압력을 행사해왔다. 이성은 노출된 세계이기에 언제나 감시가 손쉽고 질타가 가능하지만 감정은 내면의 세계이기에 알아차릴 방도가 없으며 설령 알아차렸다 하더라도 이미 지나쳐 버렸기에 의미조차 사라진다. 감정은 충동적이기에 논리를 앞세우는 이성적 지식을 경원시하며 옳고 그름의 원인이 아닌 싫고 좋고의 결과로만 표상된다. 자율적 판단에 감정이/ 합리적 판단은 지성에/ 객관적 역량은 이성을 요구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역사는 감정적 판단이 항시 합리적 판단을 앞섰던 역사였다. 혈연사회는 감정이 법을 앞서야 하며 시민사회는 법이 감정을 앞선다. 감정이 원초적 후각이기에 선험적이라면 이성은 지성적 시각이기에 후험적이다. 감정을 앞세워왔던 당파라는 조직이 봉건사회를 유지시켰다면 혈연적 감정이 농경사회를 가능하게 해주었다. 추상적 개념들을 사용해 관념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이라 할 이성이 개념이라는 객관적 실체성을 가지고 그 논리적 구조를 갖춘 것도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부터이다. 하기는 두뇌를 합리적으로 써 본 경험조차도 아득한 것이 우리네 삶이었다. 봉건사회에/ 식민지 시절에/ 전쟁 통에/ 먹고사는 경쟁 통에/ 그 어디에서 차분하게 두뇌를 쓸 일이 있었겠는가. 오직 먹고사는 눈치 보기에 두뇌를 집중하다 보니 보편적 인식이라 할 이성적 사고는 발붙일 곳도 없이 방황하는 나라였을 뿐이다. 언제라도 이성은 침몰시켜야만 하기에 감정의 구조(救助)를 당연시하는 언문의 나라였다.
감정의 날카로움만으로 단련된 인간 군상들이 대중이 되어버린 감정국가다. 감정의 칼날을 잘 들도록 연마하는 기술은 넘쳐나지만 이성의 날카로움과 그 강도를 지속시킬 능력은 회피해온 사회였다. 무슨 수를 쓰든 내가 잘 살아야 한다는 물질적 용트림은 감정을 동반해 확대해나가기에 그 어떤 비리조차도 용납된다. 감정은 초등학생의 전유물이기에 철없는 행동들도 용서되어야 마땅하듯이 국가 존립도 거기에 맞추어가고 있다. 올바른 교육의 효과라면 이성의 합리적 판단으로 이행되어야 함이 당연하겠으나 서로가 공감능력을 상승시켜가며 인생의 즐거움을 만끽하고자 감정에 집착해왔을 뿐이다. 합리적 이성의 보고에 쌓아갈 논리적 자재들도 없는 빈한한 감정의 나라에서 백성이 살길은 당연히 언문의 치장이었다. 철들기 전부터 속되고 쌍스러운 육두문자 욕지거리를 많이 주고받는 감정적 교류야말로 진정한 친구가 되는 감정국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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