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하루 종일 먹는 것만 생각하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몸매나 건강 때문에 그러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몸을 움직이지 않고 주로 앉아서 생활하고 있으면서도
우리의 조상들보다 훨씬 더 많이 먹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헬스 클럽에서도 요리 채널을 보면서
군침이 도는 요리를 준비하는 것을 보기도 하고
일을 마치고 저녁 식사를 끝낸 후에도 음식을 더 먹으려고 합니다.
먹고 싶은 욕구나 먹는 즐거움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며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하지만
우리는 ‘정서적 배고픔(emotional hunger)’을 달래기 위하여 먹을 때가 더 많습니다.
우리는 실제로 배가 고플 때보다는 지루하거나 외로울 때나
화가 났을 때나 슬플 때 오히려 더 많이 먹습니다.
이렇게 스트레스나 우울증과 같이 정서적인 감정으로 느끼는 배고픔 상태,
즉 ‘정서적 배고픔(emotional hunger)’으로 인해 심리적인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감정적인 식사(emotional eating)’를 하게 되는 것을 ‘가짜 식욕’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배부르게 식사를 한 뒤에 후식(後食)을 찾는 것도 가짜 식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감정적인 식사’는 건강을 해칠 뿐만 아니라 소외되게 만든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또 식탐은 생존본능까지도 위협합니다.
빅터 프랭클(Victor Frankl)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연약한 죄수들이 혼자 먹어도 부족한 음식마저도 건강한 죄수들이 뺏어먹어
그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우리는 몸에 영양을 공급해주기 위하여 먹지만 먹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닙니다.
과식(過食)은 하느님께서 채워주실 수 있는 영적인 굶주림을 잊게 만듭니다.
먹는 것은 영적(靈的)인 의미도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성체(聖體)는 음식이기는 하지만 하늘나라의 잔치에서 먹는 영적인 음식입니다.
성체는 하느님 사랑에 대한 갈망에 대한 응답으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음식입니다.
우리들이 매일 먹는 양식(糧食)은 하늘나라를 상징하고 하늘나라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므로
하늘나라의 식탁에서는 탐식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할 코린토 교회가 이기적인 곳이 되자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인들을 심하게 꾸짖었습니다.
“여러분이 한데 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
그것을 먹을 때, 저마다 먼저 자기 것으로 저녁 식사를 하기 때문에
어떤 이는 배가 고프고 어떤 이는 술에 취합니다.”(1코린 11,20-21)
주님을 모셔오지도 않고 즉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먹지 않았기 때문에 성체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식탁은 친교의 장소이며 대화와 상담의 장(場)이며 유쾌한 장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식탁에서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만 마시신 것이 아니라
더 좋은 포도주를 더 많이 만드셨습니다.
라틴어 ‘gluttire’는 ‘급히 먹다(gulp down)’ ‘삼키다(swallow)’는 뜻을 갖고 있으며
탐식(貪食, gluttony; 라틴어 ‘gula’)은
‘과다하게 먹고 마시는 행위로 음식에서 쾌락을 찾는 무절제한 욕망’으로
굶주린 사람에게 나누어 주지 않고 혼자서 지나치게 많이 먹기 때문에 죄가 됩니다.
다른 사람의 행복이나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욕망만 채우려고 하기 때문에 ‘이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탐식을 여섯 유형으로 세분했습니다.
• 첫째, 급하게 먹는 것입니다.(praepropere, eating too soon)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먹는 것을 생각하며, 또 식사할 시간을 앞두고, 기다리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식사시간이 되지 않았지만 식욕이 동하면
그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먹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하나는 아주 빨리 먹는 것, 즉 속식(速食)하는 것입니다.
입안에 든 음식을 몇 번 씹지도 않고 꿀꺽 삼켜버리고는
또 음식을 집어 입에 넣는 것을 되풀이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음식에 감사하지 못합니다.
음식과 그것을 식탁에 오르게 해준 사람들에 대해 생각할
마음의 겨를과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 둘째, 호화로운 식사[豪食]입니다.(laute, eating too expensively)
진수성찬(珍羞盛饌), 수륙진미(水陸珍味), 아늑한 분위기,
장소 등의 조건을 갖춘 상태에서 식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음식과 아울러 정서적인 만족감을 중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자들과 상류층 사람들이 즐기는 유형으로
고대 로마 사회의 귀족들의 호사스런 연회가 이의 대표적인 유형입니다.
• 셋째, 많이 먹는 것 즉 과식(過食)하는 것입니다.(nimis, eating too much )
허기가 사라질 만큼 먹었지만 더 먹고 싶은 욕구를 물리치지 못해 또 먹는 것입니다.
몸이 요구할 때 그 욕구를 통제하지 못하고 그 욕구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아퀴나스는 활동하기에 적당한 분량의 음식으로는
결코 만족하지 못하는 유형이라고 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뷔페음식은 이런 욕구를 겨냥한 대표적인 음식입니다.
대중 뷔페 음식점 간판에 ‘무한정 식사-당신이 먹을 수 있을 만큼(All you can eat)’이라는 문구는
이 유형을 겨냥한 상업 전략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넷째, 게걸스럽게 먹는 것입니다.(ardenter, eating too eagerly)
몹시 굶주린 사람처럼 정신 없이 먹는 것을 말합니다.
공동식사를 할 때 자기가 원하는 맛있는 것을 더 먹고자 할 때
이런 행동을 보일 때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것을 더 가져가기 전에 자신이 그것을 더 먹기 위해 허겁지겁 먹어버립니다.
뷔페식 식사에서 처음 가게 될 때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가득 담아오는 것이 이에 해당합니다.
다음에 갈 때 그것이 남아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절제를 잘 하지 못합니다. 이미 습관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맛있는 음식 앞에서 남을 생각할 수 있는 배려와 절제의 미덕과는 전혀 거리가 멉니다.
• 다섯째, 까다롭게 먹는 것 소위 미식[美食]입니다.(studiose, eating too daintily)
자신의 기호에 맞는 상태나 그렇게 요리된 음식만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루이스가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예를 든 한 유형입니다.
“그저 내가 원하는 것은 잘 우려낸 홍차 한 잔, 제대로 익힌 달걀 하나,
그리고 적당하게 구운 빵 한 조각에 불과한데
문제는 이렇게 간단한 음식을 제대로 해내는 사람이 없다.”
이런 불평을 하는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음식은 값도 싸고 양도 많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까다로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여섯 번째 미친 듯이 먹는 것입니다.(forente – eating wildly)
라틴어 ‘forente’는 ‘먹이를 찾아 다니다(forage)’는 뜻을 갖고 있으며
‘날 것을 먹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이 급한 나머지 채 익지도 않은 날 것을 먹거나 쓰레기 통을 뒤져서 먹는 것을 말합니다.
미식(美食)과는 거리가 멉니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하여 마구 먹어대는 것도 이 유형입니다.
베네딕토 성인(St. Benedict, 480- 543)도 수도사들이 지켜야 할 73개 규칙 중
먹는 것에 관련된 규칙을 3개항으로 무겁게 다루었습니다.
“수도사는 하루 1파운드의 식사를 합니다.
식사 회수는 2회를 넘어서는 안 됩니다.
고된 일을 한때에는 수도원장의 판단에 따라 음식을 추가할 수 있지만
이것도 결코 배가 부를 정도의 많은 양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
일본의 속담이 결론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는 적게 먹지만 마음 편하게 먹습니다.”
에바그리우스는 수도사들에게 육체에서 타오르는 욕망을 끄게 하는 방편으로
‘배고픔(hunger), 노동(toil), 그리고 독거(solitude)’를 권고했습니다.
이 중 배고픔은 금식(禁食)을 의미합니다.
허기를 채우고자 하는 유혹을 물리치고 금식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사모하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힘에 의존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때로는 낮아지고 때때로 굶주린 것은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 함이라고 일찍이 모세가 말한 바 있습니다.(신명 8,3)
교회에서 음식과 관련된 중요한 상징적인 두 행사는 금식과 성찬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능력을 인정하고 감사하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방편으로 금식했습니다.
그리고 성찬을 통해 빵과 포도주로 오신 하느님의 은혜를 감사하게 받아들여 왔습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이것들은 교회 공동체에서 일어났던 신앙생활의 핵심 구성요소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신자들은 절기에 따라 함께 금식을 하고 함께 만찬을 나누었습니다.
대림절과 사순절에, 성탄과 부활의 축제를 앞둔 상태에서 신자들은 모두 함께 금식을 합니다.
금식은 축제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금식은 자기를 부인하고 비움으로 구세주와 부활의 주님을 맞이하고 기다리는 준비의 표현입니다.
이것은 악한 영을 쫓아내고 마음을 정화하고 하느님의 은혜를 받기 위한 준비였습니다.
이렇게 금식을 하고 난 후 축제일에 모두 함께 식탁에 모여 앉아 음식을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아퀴나스는 금식과 축제는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리듬이라고 표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