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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꿈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살아간다. 꿈이 있기에 인생의 고해도 견딜 수 있는 것이다. 삶을 자동차에 비유한다면 꿈은 엔진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희망이라는 엔진을 가슴에 달고 무한질주로 달려온 이가 있다. 14살 어린 나이에 자동차 정비공이 돼 40년 외길을 달려온 끝에 그는 자동차 정비업계의 독보적인 위치에 올랐다. 화제의 주인공은 박병일 명장. 자동차 정비 부문 제1호 명장인 박병일 씨를 만나 그의 인생 스토리를 들어봤다. 〈편집자 주〉
최고 장인을 향한 길
박병일 명장의 고향은 서울 인왕산 산동네. 유려한 풍취의 산과 계곡이, 그 자연을 닮아 순박한 마을주민들이 그의 유년기 인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그는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초등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의 영향도 컸다.
“선생님처럼 생긴 사람과 결혼할 것이라고 얘기했다가 한동안 동네아이들한테 놀림거리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쑥스럽게 어릴 때 일을 털어놓는 박 명장. 인물화를 그리는 시간에 그는 여 선생의 모습을 도화지에 담았다고 한다. 며칠 후 그의 그림은 교실 뒤쪽 게시판에 걸리게 된다. 선생님은 조성과 색감이 뛰어나다며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그 후 조선일보 미술경시대회에 참가해 입선을 하고, 동아일보에서도 금상을 받았다. 담임 선생은 스케치북과 크레파스까지 사주며 그림그리기를 열심히하라고 독려했다. 이듬해 그는 인왕산 산동네를 떠나 봉천동으로 이사를 간다. 그는 미술대회에 참가하려고 신문배달을 시작한다.
빈한한 가정 살림 때문에 물감 살 돈이 없었던 것이다. 신문 1백20부를 매일같이 돌리는 것은 어린 그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튿날이면 팔이 올라가지 않아 세수를 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림물감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어 그는 고단함을 견딜 수 있었다.
70년대 새마을운동이 일어나면 전통 기와장이었던 아버지의 일감은 하루가 다르게 줄어들었고, 이에 비례해 가세는 점차 기울었다. 학교를 다니려면 집을 팔고 이사를 가야하는 처지에 놓였고, 그는 고민 끝에 중학교를 중퇴하고 영등포에 있는 버스회사 정비공장 견습공으로 들어갔다. 당시 서울에는 버스가 6백대 정도밖에 없었던 시절이었다.
봉급 없이 밥만 먹여준다는 입사조건이었지만, 그는 꾀를 부리지 않고 일을 했다. 밤 11시부터 새벽 5시까지 일하고 오후 1시부터는 운행하는 버스를 따라다니며 문제가 있는 부분을 메모해두었다가 정비반장에게 보고하는 게 그의 업무였다. 성실한 그였지만 불만은 있었다. 기술을 배우러 왔는데 잔심부름과 허드렛일만 시켰기 때문이었다.
대학교를 다니면서 저녁에만 부품자재과에서 근무하는 형이 그에게 〈자동차대백과사전〉을 구해 읽을 것을 권했다. 이론을 알고 실무를 익히면 남들보다 몇 배는 빠르게 기술을 익힐 거라면서. 그는 한 달에 한번 쉴 때마다 청계천 헌책방을 뒤졌고, 그러길 넉 달 만에 〈자동차백과사전〉을 손에 쥐었다. 선배들이 책 보는 것을 싫어해 몰래 읽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동차 원리를 익힌 후 기술자 형에게 제안을 한다.
이론과 실기를 서로 맞바꾸자는 제안이었다. 형은 시험 삼아 그에게 당시 난이도가 제일 높다는 차동기어 조정방법에 대해 질문했고 그는 막힘없이 답변했다. 형은 놀란 표정을 지었고, 결국 그의 제안은 받아들여졌다. 그는 어린 나이에 이론과 실무를 두루 지닐 수 있었다.
그로부터 2년 후 공장장이 차 2대를 맡아서 정비하라고 했다. 꿈에 그리던 반장이 됐다. 남들은 10년이 돼야 바라볼 수 있는 것을 2년 만에 이루었으니 그 기쁨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자동차 정비기능사 시험에 응시해 단번에 합격하고 그 여세를 몰아 1급 자격증까지 취득했다.
그는 군대에서도 자동차 정비를 담당했다. 사단검열·군단검열에서 1등을 하고 나니 선임은 물론 부대장까지 그를 신임했다고 한다. 시간이 날 때마다 자동차 책을 구입하고 이론과 실무를 정리한 덕에 자동차 검사 1급을 비롯해 중기정비 1급· 중기검사 1급·교사면허까지 취득할 수 있었다.
군 제대 후 동부고속의 정비사 모집에 응시해 3차까지 합격했다. 당시 고속버스에는 비행기 스튜어디스처럼 예쁜 안내원도 있었고 봉급 또한 일반회사보다 2배정도 많아 자동차 정비공에게는 꿈의 회사라 불렸다. 자축하기 위해 월미도를 찾았다. 거기서 그는 예전에 함께 근무했던 공장장을 만났다. 공장장은 “지금 근무하는 회사는 차량이 1백대가 넘어 관리가 쉽지 않다. 네가 와서 도와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고, 그는 갈등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은혜를 입었으면 꼭 갚아야 사람의 도리이고, 갚지 못하면 잊지 말고 은혜의 무게를 마음에 간직하라’던 아버지의 말씀이 떠올랐다. 그렇게 그는 인천사람이 됐다.
동생들 학비를 대주다보니 가불대장은 맡아 놓고 했지만 그래도 그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힘들 때마다 그는 ‘책속에 길이 있다’는 말을 마음속에 되새김질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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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틈 날 때마다 자동차 서적뿐만 인문학 서적도 독파해 가기 시작했다. 책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맛보았던 것이다. 책들은 그에게 지식은 물론 사유의 폭을 넓게 해줬다. 《철강 왕 카네기》와 《인생을 30대에 걸어라》라는 책을 읽고 그는 일을 한번 저질러 보기로 한다.
그는 꿈을 펼치기 위해 용단을 내렸다. 결과는 성공적. 자동차 전기도급 일을 수주해보니 월 1백만원의 수익이 남았다.
그는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자동차 기술을 서로 얘기하고 논하는 ‘한밝자동차연구회’에 갔다가 좋은 소식을 접하게 된다. 독일 출장을 갔다 온 한 회원이 독일 오펠정비 지침서를 보여준 것이다. 다른 회원들은 주시하지 않았지만 그는 귀가 솔깃했다. 상세히 물으니 회원은 “유럽은 기계식 차량은 거의 볼 수 없고 전자제어차량이 80% 이상”이라고 덧붙였다. 그가 지대한 관심을 보이자 회원은 책을 복사해도 좋다고 했다.
그는 다시 책과 씨름을 하지만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정복이 불가능한 책이었다. 그는 전자만 가르치는 학원에 등록하고 시퀀스를 가르치는 전기학원에 등록해 정규과정을 마쳤다. 남들이 예상과는 달리 10년 후에나 나올 것이라던 전자제어차량이 3년 만에 우리나라에서도 출시됐다. 1986년 선보인 최고급차 그랜저와 로열살롱이었다.
차가 부의 상징으로 여기던 시절이라 정비공장에는 비상이 걸렸다. 고칠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회로도만 봐도 바로 시스템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발 없는 말이 천리 가듯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선견지명이 있는 이로 알려져 주말이면 전자제어실무특강을 다니기에 바빴다고 한다.
1989년 그는 현장실무를 더 익힐 겸해서 도급업을 접고 카센터를 차렸다. 카센터를 운영하면서 그는 그만의 노하우를 축적해 간다. 난이도가 있는 고장은 자세히 기록해 뒀고, 그 해법을 모색했다. 노력 끝에 4권의 〈정비사례백과〉라는 책을 출간했다.
교통방송과 TV방송에서 자동차 상담을 하고, 자동차잡지에 정비사례는 물론 메커니즘을 분석하는 정비시승기까지 쓰게 됐다. 스스로 부족함을 인지한 그는 1993년 인천기능대학에 입학해 자동차 정비의 최고봉인 자동차 정비기능장 자격을 취득했다.
그는 일본 아이싱사로 날아가 자동변속기 전문교육을 받고 귀국해 현장경험에서 얻은 노하우를 합쳐 〈자동변속기〉 2권을 집필했다. 책은 날개 돋친 듯 팔렸고 그의 이름은 전자제어에서도, 자동변속기에서도 일인자로 알려졌다. 현장의 소리를 그대로 전달하여 만들었기에 기존의 책들과는 달랐다. 다음해는 독일로 가 전자제어엔진을 공부하고 돌아와 책을 썼고 그 후 얼라인먼트 교육을 받으러 미국 센트루이스헌터사를 찾아가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해비듀티 라이센스를 딴 후 역시 우리 현장에 맞는 휠 얼라인먼트 책을 출간했다. 그가 쓴 책이 30권 정도이다.
현장에서 작업하면서 상해 방지와 정비시간 절약, 경비 절감에 대한 아이디어를 메모해 뒀다. 그 결과 그가 받은 특허가 9개이다.
그는 세계최초로 자동차 급발진 원인을 찾아냈다.
그가 급발진 원인을 찾아 낼 수 있었던 것은 4차원 정비방법을 창안해 현장에서 많은 경험을 쌓았기 때문이었다. 1차원 정비가 육안으로 보는 정비라면 2차원 정비는 소리를 듣고 고치는 정비이고 3차원 정비는 데이터 정비이다. 스캐너를 통해 데이터를 주고받으며 진단하는 방법이 3차원 정비이다. 4차원 정비는 고장 나기 전 미리 사전정비까지 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분석하는 방법이다.
그는 2002년 대한민국 자동차 정비명장(정비업계1호)에 선정됐다.
2005년 직업능력개발의 달 유공정부포상에서 산업포장을 받았는데 그때 부모님은 “우리 아들이 옥새가 찍힌 대통령상을 받았다”며 기쁨의 눈물을 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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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비 사업사 전경. |
2006년에는 우리나라 2번째로 기능한국인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그의 삶은 ‘꿈을 가진 자는 꼭 꿈을 이루게 된다’는 사실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그의 아들도 그와 같이 자동차 정비의 길을 걷고 있다. 그는 공부를 더 하고 싶은 직원들을 선발해 야간에 대학을 보내주고 있다. 전 직원이 자격증 1~2개씩은 다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는 스스로를 ‘부자’라고 말한다. 국내는 물론 외국을 다니며 구한 자동차관련 책만 5천권이 넘으니 책 부자이고, 2억 원 정도를 투자해 만든 자료가 내 책상에 가득하니 밥을 안 먹어도 배 부르는 자료 부자이고, 국내는 물론 외국기술자들에게 교육한 인원이 20만 명쯤 되니 사람부자이고, 고생 끝에 해당분야의 최고 장인이 됐으니 인간승리 부자라는 것이다.
그는 앞으로는 기술명장이 아닌 인간명장으로 살 계획이다.
“어렵게 터득한 기능을 후학에게 전수하는 일에 매진할 것입니다. 기능인이 대우받는 사회를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이를 위해 기능인 회관을 만들 계획입니다.”
그는 독실한 불자이다.
강화 보문사 신도인 그는 매월 2회 이상 보문사·적석사 등 사찰을 식구들과 참배하고 있다.
보문사에 옥불 두분을 불사했으며 나한상 두분도 불사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