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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이 많은 청년(2)
마 19:16-30
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18 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20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5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26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27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마 19:16-30 / [부자 청년, 낙타와 바늘귀; 막 10:17-27, 눅 18:18-27] 어떤 젊은이가 예수께 와서 물었다. `선생님, 제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17)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네가 어찌하여 내게 선한 일에 대하여 묻느냐? 선한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뿐이시다. 생명으로 들어가려거든 계명을 지켜라' 18) `어느 계명입니까?' 그가 다시 묻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ㄱ)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ㄱ. 출20:12-16,레19:18(참조,신5:16-20)) 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20) `저는 언제나 그 계명들을 다 지키고 있습니다. 아직도 무엇을 더 해야 합니까?' 하고 그 젊은이가 말하자 21)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네가 완전하게 되려거든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22) 이 말씀을 들은 젊은이는 큰 부자였으므로 침울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23) 그러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매우 어렵다. 24) 다시 말하지만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25)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놀라서 `그러면 세상에서 구원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26) 예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다' 27) [백 배의 상;막10"28-31,눅18:28-30] 그때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게 되겠습니까?' 28)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새 세상이 되어 인자가 그 나라에서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29) 그리고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고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식이나 재산을 버린 사람은 백 배의 상을 받을 것이고 또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30) 그러나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자가 많을 것이다.
< 설 교 >
온전한 성도
마 19:16-23 / 김정호목사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70세에도 광장에 나가 사람들과 토론을 멈추지 않았고 새로운 악기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죽을 때까지 창작 활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89세에도 앞으로 자신이 어떤 일생을 살 것인지를 계획했고 90세가 넘어서도 교황청의 천정을 조각했습니다. 피카소는 90세가 넘어서까지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했습니다. 그가 남긴 모든 작품을 합치면 25만 점이 넘고 아직까지도 그 작품들을 분류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의 나이는 80세입니다. 모세는 그 후로 120세가 되기까지 많은 일을 감당했으나 눈의 빛을 잃지 않고 몸이 쇠약해지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나이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나이를 문제 삼지 않은 것입니다. 오로지 사명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환경과 나이 같은 세상의 잣대들로 자신이나 사람을 평가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상황을 생각하지 말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아서 행하십시오. 사명을 제한하는 모든 굴레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나이에 맞는 일이 있다는 편견을 버리십시오. 하나님께 붙들리면 환경과 조건과 나이를 초월하여 하나님의 일을 잘 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없다는 사탄의 음성에 귀를 막고 할 수 있다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여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 계명을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그 부자 청년이 계명을 지키었다고 당당하게 대답하였을 때 예수님께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을 때 그 부자 청년은 재물이 많아 근심하며 예수님을 떠났다는 내용입니다. 우수한 부자 청년이었으나 온전하지는 못했습니다. 가난한 자들과 이웃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였고 무정하였습니다. 예수님 보다는 재물을 더 사랑하고 의지하였습니다. 부자 청년은 많은 재물로 인하여 근심하며 떠나는 불행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시대는 교회의 외형적인 크기나 숫자 보다는 내면적인 삶과 성경적인 생활이 중요합니다. 모든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온전한 성도로 변화되는 것이 중요하고 새로운 시작입니다. 늦었다고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바로 지금이 온전한 교회와 성도로 변화 되어야 할 새로운 시작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함께 기도하고 최선을 다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축원 드립니다.
1. 계명을 지키라
본문 1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계명을 지킴으로 생명과 영생을 얻게 된다는 말씀이 아니라 생명에 들어가고 구원받을 자는 계명을 지키는 생활을 하는 자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계명을 지킴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거저 받는 것입니다. 공로가 아닌 100%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구원 받은 사람은 계명을 잘 지켜야 합니다. 계명을 지키는 정도에 따라 성화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도무지 선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청년의 왜곡된 사상과 신앙관을 깨우치기 위해 선의 주체이시며 궁극적 원인자이신 하나님을 두드러지게 강조하셨습니다. 따라서 선을 행함으로서 구원을 얻으려는 이 부자 청년의 바리새적인 구원관은 인간은 결코 스스로는 선한 존재가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선을 행할 수 없다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 벽에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계명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때 계명을 지키게 되어 온전한 성도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새 중에 자고새라는 새가 있습니다. 이 새는 다른 새들이 알을 품으면 따라서 알을 품는 시늉을 하는 새입니다. 오늘날 성도들 중에 이런 자고새 성도가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영적이지 않는데, 거룩하지 않는데, 충만하지 않는데, 주님을 품은 듯 모양만 내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자고새가 날아가 버리면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기도 후에, 예배 후에, 말씀 묵상 후에, 헌신 후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아 기진해 하며 허무해 하는 성도들 말입니다. 신앙생활은 취미삼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관념도 아닙니다. 지식은 더 더욱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풍성함이며 실재입니다. 여러분은 건천 신앙인일 확률이 아주 높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상황이 최악이며 사방이 가뭄인데도 어디서인지 솟아오르는 생수를 경험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옹달샘 신앙입니다. 옹달샘의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전심으로 간구하십시오. 마음으로 간청하십시오. 여러분은 비 오기를 기다리는 우기형 성도입니까? 아니면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옹달샘 신자입니까? 여러분은 자고새입니까? 지금의 건천신앙으로는 승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승리는 겨우 근근이 하는 승리가 아닙니다. 넉넉하게 충분하게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건천신앙에서 샘물수 신앙으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만사를 중단하고서라도 이 일에 목숨을 걸어야만 합니다. 진짜 은혜는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때문에”의 은혜가 아니라, “찌라도”의 은혜가 진짜 은혜입니다. 들어오는 은혜와 솟아나는 은혜는 우리를 구분하게 될 것입니다.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은혜의 힘으로 최악의 상황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얼마든지 가뭄 같은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즐거움으로 주의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억지로 겨우 겨우 하는 일이 아닙니다. 기쁨으로 집중해서 사명으로 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주변의 소리보다 주님의 내성이 더 크게 들리며 주변의 외부의 환경보다 솟아오르는 내면의 은혜가 더 크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옹달샘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살아있는 한 자라가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도 살아 있다면 매일매일 자라가야 합니다. 매일 젖만 먹는 어린아이가 아닌 밥도 먹고 딱딱한 것도 능히 소화 할 수 있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직은 육신을 입고 살지만 육신에 속한자로 육신에게 져서 육신을 따라 살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이 어느 사람에게 속한 자가 아니니 사람의 눈치를 보거나 칭찬을 듣기 위해, 내가 영광을 얻기 위해 애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혹 내가 어떤 일에 대해 심기도하고 물도 준다고 할지라도 더 잘나거나 특별할 수 없고 오직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뿐인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구원 받은 온전한 성도는 주의 계명을 어떤 값을 치루더라도 목숨 바쳐 지킵니다. 계명을 지킴으로 더욱 온전한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본문 21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예수님은 사람이 재물과 하나님을 함께 온전히 섬길 수 없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탐욕스런 존재이기 때문에 재물이 많을수록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의지하게 되어 차차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땅에 욕심이 많으면 하늘에로의 관심이 적어지게 됨을 아시고 부자 청년이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진정한 영생의 삶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을 알게 하셨습니다. 부자 청년은 율법에 나타난 외적인 계명들을 다 준수하려고 했지만 형식적인 차원에 머무르고 말았습니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명령은 다가오고 있는 천국에 관한 임박한 종말의식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도저히 실천 불가능한 순종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다가옴을 깨닫지 못하고 천국을 소망하지 못하는 한 땅의 소유물을 더욱 굳게 잡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늘의 보화는 이 부자 청년이 찾아 헤매는 영생을 의미합니다. 청년의 마음이 지상의 재물에서 해방되는 그 순간부터 영생을 보장하는 말씀입니다. 자기 보물이 있는 그 곳에 자기 마음과 소망과 미래와 영생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보화는 영생이 되어야 합니다. 영생을 위해 땅의 보화와 소유를 포기할 수 있는 선택과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회개이고 거듭남입니다. 생각과 말과 형식에만 머무르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세상에는 두 가지 사랑이 있는데 그것은 받기만 하려는 세상의 헛된 사랑과 받은 사랑을 나누어주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받는 사랑에는 항상 갈증이 따르지만 주는 사랑은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사람들이 이 사실을 자신의 경험을 통해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오늘도 받는 사랑에만 집착하는 이유는 이기심으로 인한 온갖 상처로 마음이 비뚤어진 채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통로가 막혀있기 때문입니다. 주는 사랑은 놀라운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먼저 사랑을 주면 상대방이 변합니다. 그리고 나에게는 큰 기쁨이 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들은 사랑을 원합니다. 사랑으로 충만하시고 그 충만하신 사랑을 가지고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과 모든 곳에 나아가셔서 삶의 지경을 넓히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사랑이 부족합니다. 모든 이들에게 나누어줄 사랑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모든 짐을 지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며 우리를 피곤하고 지치게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는 바로 주님이 거하십니다. 사랑의 주님께서 여러분 안에서 날마다 샘솟는 생수를 공급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자신의 힘이 아니고 주님을 의뢰하고 기대한다면 주님은 여러분에게서 조금씩 또 조금씩 새롭고 풍성한 생수의 사랑을 공급해주실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없으나 주님이 하신다는 그것이 기독교의 비밀입니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다 사랑을 원합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이들도 오직 사랑을 구합니다.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는 사랑할 수 없을지라도 날마다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을 의뢰 기도함으로 기대한다면 그것은 가능한 일이며 주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시고 사용하실 것입니다. 오직 사랑으로 사람은 살고 죽습니다. 여러분도 사랑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나는 할 수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서 조그만 사랑이 조금씩 흘러나오게 될 때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서 더욱 더 크고 아름답고 풍성한 사랑이 점점 더 넘치게 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영생이고 천국입니다.
내 소유를 가난한 자들에게 준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고 모든 소유와 재물의 공급자가 하나님이심을 믿을 때에는 가능합니다. 물질을 부자나 높은 사람들에게 주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주어도 받기 어려운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은 어렵지만 이것이 사랑이고 순종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적진으로 달리며 성벽을 뛰어 넘는 것입니다(삼하 22:30). 가난한 자들에게 소유를 나누면 하나님이 더 큰 손으로 반드시 채우시고 동시에 온전한 성도가 됩니다. 이런 놀라운 기적과 같은 은혜를 체험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나를 따르라
본문 21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온전한 성도와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단계가 있습니다. 계명을 지키고 소유를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그리고 와서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최종 단계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고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시로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셨고 훈련 시키셨습니다. 구원의 기쁨을 얻고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것을 포기해야만 끝까지 예수님을 온전히 따를 수 있습니다. 세속적인 기대와 욕망을 이루려 한다면 따를 수도 없고 끝까지 따라가지도 못합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과 더불어 죽고 더불어 사는 일체적 삶을 각오해야 합니다. 제자가 되는 장벽이도하고 길이기도 합니다. 참된 평화는 자기의 소욕을 극복하고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뢰할 때만 주님의 길을 묵묵히 그리고 끝까지 따를 수 있습니다. 부자 청년은 잠시 보장된 현재 때문에 영원히 보장된 미래와 영생과 천국을 잃어버리는 최대의 불행한 선택을 하였습니다. 젊음과 많은 재물이 천국을 막는 저주의 도구가 된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 중에 하나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맡기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보다 더 불쌍한 사람은 하나님께 맡기고도 불안해하여 맡긴 것을 도로 찾아 끌어 앉고 낑낑대며 사는 사람입니다. 이보다 더 비참한 사람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돈과 명예와 권력에 문제들을 맡기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어느 누가 냄새나고 더러운 쓰레기를 버린 후에 아깝고 불안하여 뒤돌아보고~ 얼마 후에 버린 쓰레기가 아까워 다시 수거하여 오는 자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맡김이 그런 듯싶습니다. 하나님을 믿긴 믿는데 7-80% 정도만 맡기는 것에 익숙합니다. 다~ 맡기긴 불안하니까! 그러나 7-80%만 맡겼다면 사실은 안 맡긴 것입니다. 우리는 맡기고도 불안하기 때문에 이미 맡기고 버린 염려와 문제들을 다시 찾아 움켜쥐고 삽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 보이는 나의 지혜, 경험, 수단을 믿는 것이 더 안전하고 든든하기 때문입니다. 이러므로 100% 맡기고 사는 자에게는 주님이 평강으로 보답하십니다. 진정 맡긴 자에게는 그 증표로 평안을 주십니다. 이 평강이 염려를 몰아내고 이 평강이 염려를 잊게 해주는 것입니다. 맡겼는데도 불안합니까? 덜 맡겼거나 안 맡긴 것입니다. 불안은 불신앙의 열매입니다. 대중목욕탕엘 가보면 카운터 뒤에 이런 글귀가 눈에 뜨입니다. “귀중품은 주인에게 맡기십시오. 주인에게 맡기지 않은 것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정으로 맡긴 것만 맡아 주시고 해결하여 주십니다. 맡기지 않은 것까지 강제로 빼앗아 책임지거나 해결하여 주시지 않으십니다. 이제 염려하는 시간을 기도로 바꾸십시오. 기도 외에는 염려를 몰아낼 방법은 없습니다. 문제를 묵상하던 시간을 기도의 시간으로 바꾸십시오. 습관과 형식적인 기도를 실제적이고 집중적인 기도로 바꾸십시오. 기도에 몰입하십시오. 염려를 대적합시다. 염려를 내어 좇으십시다. 염려의 중독증을 치유 받으십시오. 어떤 경우에도 걱정이 안 되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풍랑 속에서도 주무셨던 주님의 평강을 사모하십시오. 하나님은 최악의 상황들을 최상의 조건들로 바꾸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염려하는 마음을 평강의 마음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누가 믿음이 좋습니까? 잘 맡기고 사는 사람입니다. 누가 행복합니까? 문제가 많은데 100 퍼센트 맡김이 되는 사람입니다. 쉽게 생각하는 것을 훈련하십시오. 신앙은 쉬운 것입니다. 영성이 깊다는 것은 심플하다는 뜻입니다. 작은 물방울에 바위 패이듯 작은 것부터 맡기게 되면 이후에는 바위 덩어리 같은 문제도 맡김이 가능하여 집니다. 맡기는 삶을 위하여 때마다 분초마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그러나 맡긴 척은 하지 마십시오. 믿는 척도 하지 마십시오. 거룩한 척도 하지 마십시오. 신령한 척도 금물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삶의 우선순위에 두십시오. 실제로 맡겨 버리십시오. 맡김의 확신(평안)이 올 때까지 기도하십시오. 실제로 홀리(holy)하고 실제로 심플(simple)하십시오. 실제로 신령하고 실제로 영의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하면 당신의 염려와 근심 속에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물 붓듯이 부어 주십니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을 끝까지 따릅시다. 뒤돌아보거나 계산하고 염려하지 말고 오직 감사와 찬양으로 주님을 따릅시다. 도망가려고 하면 더 복잡하고 힘이 들지만 앞장서서 따라가면 주님이 힘을 주시는 기쁨을 주십니다. 주님만 따르는 온전한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자신과 모든 성도와 교회가 주님이 원하시는 수준으로 온전해져야 합니다. 아직은 부족하고 서툴고 실수가 많습니다. 그러나 낙망하거나 비난하거나 포기하지 맙시다. 앞으로 좀 더 잘 하면 됩니다. 계명을 지킵시다. 가난한 자들에게 줍시다. 주님을 따릅시다. 내가 앞장서서 온전해져서 또 다른 사람을 온전케 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착한 사람이라고 천국 가는가?
마 19:16-26 / 피영민목사
서론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땅에서 착하게 살다가 죽으면 천국가고, 악하게 살다가 죽으면 지옥을 간다고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죽은 후에 천국가고 싶으면 ‘남에게 해를 끼치지 말고 착하게 살면 된다.’ 라고 생각하고 이렇게 살아 갑니다. 또한 이것은 많은 사람의 신앙이며 종교입니다. 천국은 행복한 장소요 지옥은 괴로운 장소이기 때문에 착하게 산 사람이 행복한 곳으로 가고 악하게 산 사람이 괴로운 곳으로 가게 되는 것은 공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간에는 이런 대중적인 종교(popular religion)가 얼마나 그릇된 생각인가,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말씀 드리고 천국갈 수 있는 분명한 길을 여러분께 제시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착한 사람이 천국 간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 잘못되었는지 세 가지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Ⅰ. 이런 생각이 잘못된 세 가지 이유
첫째, 착한 사람이 천국간다면 사람들 가운데 몇등까지 착해야 천국가는 것입니까? 이것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기 보다는 도리어 불안을 준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착하다 악하다 하는 것을 체크 리스트를 만들어서 점수로 매긴다고 합시다. 1등 하는 사람도 있고 꼴찌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100점 맞은 사람, 5점 맞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점수가 각기 다르게 나올 것입니다. 등수로 세워 놓는다면 여러분은 몇 등쯤 되시겠습니까? 교회 다니는 사람이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보다 등수가 높겠습니까? 교회 안다니는 이들 중에도 착한 사람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다니는 사람 중에도 점수가 떨어지는 이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점수로 1등부터 꼴찌까지 세워 놨다고 했을때에 문제는 몇 등부터 천국 가고 지옥을 가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상위 10%만 천국 가는 것입니까? 그러면 999등까지 천국 간다고 할 때에 1,000등은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1점만 더 맞을걸! 억울해 죽겠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몇 등부터는 지옥가는 겁니까? 상위10%? 50%? 90%? 그 기준은 누가 정하는 것입니까? 아무도 알 수 없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인류 역사상 그 기준을 말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든 안 다니는 사람이든 자기 자신을 악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없습니다. 자신을 보통 착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천국 갈 만큼 착하십니까?” 라고 물으면 “그만큼 착하지는 않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착하긴 착하지만, 천국에 들어갈 만큼 아주 착하다고 보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스스로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해도 천국에 들어갈 등수에 들었는지 확신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의 심층부에는 불안감이 있는 것입니다. 죽은 후에 천국에 들어갈 확신까지는 없다는 것입니다.
체코 프라하에 가면 ‘황금 소로’라고 불리는 좁은 길이 있습니다. 그 길에는 유대계 독일인 작가인 프란츠 카프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수수께끼 같이 알 수 없는 많은 작품을 지었습니다. 작가 카프카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나의 본질은 불안이다.”(ist ja mein wesen angst)라고 하였습니다. 또 독일 영화 제목을 보면 “불안이 사람들의 영혼을 잠식하고 있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착한 사람이 천국 간다는 생각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기보다는 도리어 불안을 준다는 것입니다.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지만, 천국 갈 만큼 착하지는 못하다라는 생각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죽음이 다가올수록, 나이를 먹어 갈수록 불안감이 쌓여 간다는 것입니다.
둘째, 착한 사람이 천국 간다는 생각은 공평한(fair) 생각 같이 보여도 사실은 불공평한(unfair) 생각입니다.
어떤 사람은 착하게 살아가고 어떤 사람은 악하게 살아갑니다. 먼저 착하게 사는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착한 기질을 가지고 태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착한 사람은 아버지도 착하고 할아버지도 착합니다. 악한 기질이 없어서 착하게 살아갑니다. 반대로 태어날 때부터 놀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즉, 선천적인 요인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태어난 환경, 본성 그리고 교육에 따라 사람이 착하게도 되고 악하게도 됩니다. 자신의 태생, 환경, 교육은 자신이 공헌 한 것입니까? 자신의 허물입니까? 그것은 스스로 택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사람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착한 사람이라고 천국 가고 악한 사람이라고 지옥 가는 것이 공평하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착한 사람이 천국 간다는 생각은 도리어 불공평한 생각입니다. 결코 공평하지 않습니다.
셋째, 사람을 착하다고 말하는 비교기준이 다른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만이 비교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 16절에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질문 합니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얼마나 착하게 살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엉뚱한 대답을 하십니다. “어찌하여 착하게 사는 것에 대하여 물어보느냐 선한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시니라.” 이 대답의 의미는 사람이 사람과 비교해서 선하다 악하다를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비교하면 아무리 악한 사람도 선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사람 한 명을 죽였다고 합시다. 나쁜 사람입니까? 좋은 사람입니까? 나쁜 사람입니다. 그러나 열 명 죽인 사람에 비하면 매우 착한 사람이 됩니다. 또, 열 명 죽인 사람은 삼백 명 죽인 사람에 비하면 아주 착한 사람이 됩니다. 즉, 비교기준이 사람이 되어서 악하다 착하다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 말씀의 의미는 사람이 착하다고 말하려면 하나님과 비교해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수준에 달하면 그 사람은 착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수준에 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 나는 천국 갈 만큼 선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 “너는 부모를 공경해라. 살인하지 말라. 도덕질 하지 말라” 시며 십계명 가운데 두 번째 돌비에 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자 청년이 20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부자 청년은 스스로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노력으로도 부족함 없이 천국 갈 수 있다고 자만하고 있습니다. 21절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네가 온전 하고자 할찐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부자 청년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22절에 “재물이 많은 부자 청년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계명은 두 번째 돌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첫 번째 돌비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자 청년에게 첫 번째 계명을 물어보십니다. “너는 나 이외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했는데 잘 지켰느냐?” 즉 부자 청년은 “재물이 나의 신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못 믿고 내 돈을 믿습니다.” 부자 청년은 하나님보다 재물 신, 맘몬 신을 자신의 마음속에 모시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 청년 마음에 하나님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맘몬이 들어 있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은 스스로가 모든 계명을 다 지켜 착한 사람이기 때문에 천국 가리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부자 청년은 1계명, 첫 관문부터 실패한 사람이었습니다. 1계명부터 실패한 사람이 어떻게 5계명을 지켰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착하다고 말하려면 하나님과 비교해야 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기준에 도달해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선하고 착하다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인간 가운데 “나는 천국 갈 만한 착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에서 사도 바울이 이 진리를 명백하게 선포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로마서 3장 10절~12절에서도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음이여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의인은 한 명도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나는 악한 사람이며 죄인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천국 갈 만큼 착한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자기 노력으로 천국 갈 사람이 있습니까?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보내시면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들로 지금도 많이 있고 앞으로도 천국 갈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즉, 천국은 텅 비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천국가는 길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천국 가는 세 가지의 길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Ⅱ.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천국 가는 길”
1. Person (예수그리스도)
구원이란 한 사람을 믿음으로 오는 것입니다. 천국은 사람을 믿음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 분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분은 나사렛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며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합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이라.'(God with us!) 그분은 30년 동안 요셉의 아들로 성장해서 청년의 때에 목수의 일을 하셨습니다. 3년 동안은 제자들을 양육하시고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분은 인간이셨지만 죄가 없으셨습니다. 완전하고 순수하고 정결하고 거룩하고 사랑이 많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럼에도 완전한 그분이 죄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의인들의 친구가 아니라 죄인들의 친구였습니다(Friends of sinners). 각종 병자가 몰려왔고 죄인들이 몰려왔고 세리와 창녀들이 몰려와서 치료받고 용서받아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9장 13절과 마가복음 2장 17절에 “내가 의인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하러 왔노라”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길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기록되었고, 요한복음 6장 40절에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라”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착하다고 천국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천국 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사람이 착하면 천국 가기 때문에 ‘착하게 살아라’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사람을 속이는 자입니다. 그런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거짓 종교입니다. 인본주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그리하면 천국 갑니다.
2. Payment(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자의 죄값을 대신 지불하셨다.)
왜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 갑니까? 예수님이 우리 죄값을 대신 지불해 주셨기 때문에 예수님 믿으면 죄용서 받고 천국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나는 착한 존재다.’ 과시하기 오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을 우리 대신 행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 자기 죄값을 갚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미 우리가 저지른 죄를 선행으로 갚을 수 없습니다. 선행을 하는 중에도 우리는 또 나쁜 짓을 하기 마련입니다. 죄를 용서받을 만큼 선행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의 선행이 우리 죄값을 갚는다고 하나님을 만족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선행하고 열심히 종교 행위를 해도 자기의 죄값을 스스로 갚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죄인의 죄값을 대신 갚아 주신 분이 있다면 죄없이 사신 한 분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십니다. 완전한 신성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자기를 믿는 자의 죄값을 갚아 주려고 오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 라고 기록되었고, 베드로전서 3장 18절에 “그리스도께서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 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대신’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죄에 대해 속죄한 희생 제물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 치르셨기 때문에 예수 믿는 자는 죄 용서받고 천국 가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자는 하나님 앞으로 인도함을 받게 됩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도다” 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찔리고 상한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마지막에 “다 이루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자의 죄값을 다 갚으셨다는 의미입니다.
3. Power(하나님은 죄인을 용서하시고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능력이 있으시다.)
여러분 중에 “나는 이미 죄에 깊이 빠져 있기 때문에 감히 천국 갈 수 있을까?”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본문 26절에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즉,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누구든지 죄값 갚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자는 죄 용서 하시고 천국으로 인도하는 겁니다. 사람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의 괴수라도 용서하고 천국으로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나는 죄가 많다 착하지 못하다. 죄값을 갚을 수 없다. 내 자신을 믿을 수가 없다.” 이런 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죄값을 갚으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천국은 착한 사람이 절대 갈 수 없는 곳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하는 이가 가는 곳입니다. “어찌 그런 일이 가능합니까?” 라고 묻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전능한 하나님이시기에 불가능한 것도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으십니다.
결 론
여러분! 죽기 5초 전이라도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면 하나님이 건져 천국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한 강도가 예수님께 이렇게 고백합니다. 누가복음24장 42절에서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이 한마디에 예수님은, 43절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안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예수님 믿어서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시고 천국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나이까?
마 19:16-26 / 최승천 목사
다보면 믿음이란 어떤 범위와 한계까지가 내게 제한되어 있는 것일까라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믿음의 세계는 무한하고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의 범위도 무한하지만 나는 내가 스스로 어떤 범위의 한계를 가지고 또 내가 어떤 스스로의 제한을 가지고 믿음 생활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의 안타까움입니다. 물론 이런 생각들은 인간의 짧은 사고에서 연유에서 이루어진 것일 겁니다.
우리가 단 한 가지 세상을 떠나면 영원한 세계가 있고 우리에게는 영원구원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주님 앞에 선다는 사실만해도 이런 한계에 대한 생각은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믿음 생활하다보면 자칫 우리 자신이 어떤 한계를 가지고 믿음생활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선까지는 되고 그 위의 선은 도저히 내 믿음으로 실행하지 못하고, 그리고 이 선까지는 믿음으로 살아가는데 그 선이 넘어가면 나는 믿음가운데 그 일을 지속하지 못한다는 내 자신의 한계를 발견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헤쳐 나가야 될 삶의 한계를 돌파하지 못하는 때도 있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헌신의 수준을 우리가 이루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좌절하는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한 우리의 믿음을 탓하지 않으시고 언제나 은혜와 자비와 은총의 손길로 우리를 인도하셔서 우리를 그의 백성으로 양육해 가시는 것을 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러한 우리 믿음의 한계와 범위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도대체 우리는 어떠한 범위 내에서 믿음생활 할 것인가, 어떠한 한계를 가지고 믿음생활을 할 것인가, 그 한계를 어떻게 극복해낼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한 부자청년이 예수님께 왔습니다.
“예수님, 내가 어떤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 청년은 대단한 부자였습니다. 아마 열심히 일했고 쉬지 않고 애를 썼고 뿐만 아니라 노력을 했던 사람으로 보입니다. 가뜩이나 자신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이와 같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이 청년은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청년에게 말씀합니다.
“십계명을 지켜라.”
이 청년은 기뻐서 대답합니다.
“예, 예수님. 제가 그것을 다 지켰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하면서도 마음에 뭔가 찌운 한 것이 있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예수님께 묻습니다.
“혹시 아직도 제게 무엇 부족한 것이 있겠습니까?”
라고 예수님께 문의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하느냐, 네가 만약 온전해지려고 하면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나를 따르라.”
이 청년은 이 말씀을 듣고 갑자기 큰 충격을 받게 되었어요.
왜냐하면 자신 있게 십계명을 지켰다고 얘기하고 혹시라도 내게 부족한 것이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그 부족한 것을 해결하겠습니다. 라는 듯한 어조로 주님께 말씀을 드렸지만 이 청년은 예수님께 이와 같은 말씀을 받았을 때 그 말씀을 지킬만한 믿음의 한계가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큰 충격 속에서 흔들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가 재물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예수님을 따르면 영원한 생명을 얻겠는데 그렇지 못하고 재물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못하고 나는 영원한 생명을 포기할 것인가 라고 생각하니까 그것도 또 마음에 용납이 안 되고 이러저러한 마음의 갈등으로 말미암아 근심은 했지만 결국 이 청년은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고 결국은 근심하며 자기의 삶으로 돌아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보고 제자들이 마음에 깜짝 놀라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매우 어렵다. 특별히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마치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너무나 마음에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예수님,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이지만 우리 마음에도 아직까지 저 돌아간 청년과 같은 마음이 있습니다.”
왜죠? 예수님께서 청년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은 구체적으로 물질이 많은 것도 있지만 물질에 대한 집착에 대해서 말씀하신 거예요. 제자들도 그것을 모를 리가 없죠. 제자들도 생각하지만 예수님을 따랐지만 본인들도 아직까지 세상에 대한 욕심이 있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조차도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다 보면 무슨 한 자리 할 것 같고 예수님 따라다니다 보면 예수님은 권능이 있어서 왕이 되면 그들은 무엇인가 대단한 위치에 오를 것 같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보니까 정말 너무 두려웠던 겁니다.
“예수님 그러면 도대체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 때 예수님께서 믿음의 정답을 말씀해 주셨어요.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 할 수 있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우리 사람의 힘으로는 믿음을 지킬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주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갈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믿음에 대한 본질을 한 마디로 말씀해 주신 것 같애요.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 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 믿음의 세계요, 은혜의 세계요, 축복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가지고 잠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 한계를 가지고 믿음생활을 하려는 백성의 안타까움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십계명을 지키되 자신이 생각한 수준에서 지키고 그것으로 만족했던 한 청년의 모습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이 청년은 사실 십계명을 지켰다고는 하지만 진정한 십계명을 지키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이 청년이 진정한 십계명을 지켰다고 하면 이 청년은 당연히 주님 앞에 그의 아름다운 삶이 진설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십계명의 두 가지 정신이 무엇입니까?
하나는 내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라.
두 번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에 대한 진득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아름다운 사랑의 모든 면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라는 그와 같은 말씀을 들었을 때 이 청년은 마음에 큰 충격을 받은 것을 보니 그는 진심으로 십계명을 지키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외적으로는 계명을 지켰다고 스스로는 평가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지켰다고 생각하는 수준이 자신이 설정한 수준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설정한 수준이 아니라 자신이 설정한 수준이었어요. 우리도 그래도 ‘내가 믿음이 있는데’ 라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의 기준입니까? 아니면 내가 생각한 기준입니까? 내가 그래도 믿음이 있는 사람이야 라는 기준이 누가 설정한 근거에서 그와 같이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까?
내가 가진 믿음의 한계, 내 생각과 감정, 기호 위주의 믿음이라는 것은 언제나 중요한 순간에 힘을 쓰지 못하고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사단은 이 부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그것가지고 흔들어서 우리를 공격해 무너뜨립니다.
사람에 대하여 늘 의심하는 마음, 물질에 대한 지나친 집착, 자신에 대한 자신이 없는 열등감, 자만심과 교만함, 헌신치 못하는 믿음 없음, 지나친 쾌락에 대한 집착, 우리들이 연약한 이와 같은 각종의 분야들이 있는 거죠. 우리 주님께서 바로 우리의 연약함을 긍휼이 여기시는 부분이 바로 이와 같은 우리의 약점들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이런 약점들 때문에 우리가 믿음의 세계에서 더 깊은 진보의 세계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을 사단이 너무나 잘 알고 이것을 가지고 흔들고 있는 거죠.
아마 오늘 이 청년은 예수님께 “내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라고 묻는 것을 보면 자신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다 지키려고 했던 마음이 있었을 수도 있고 그렇지 못했을 수도 있어요. 만약에 있었을 수도 있다라고 생각하면 이 청년은 정말 자기가 무언가 예수님 말씀대로 하고 싶었던 거예요. 그 말씀을 듣고 보니까 내 수준이 그것이 안 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도 있다는 거죠. 또 한 가지는 예수님께서 나에게 무슨 말씀을 할 때도 내가 정말 그대로 지키리라는 마음보다 내가 차라리 지금 이 상태에서라도 예수님이 나를 인정하기를 바라는 이와 같은 확신을 받고 싶어서 예수님께 확인하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확인받고 싶어 해요.
그렇지. 당신생각도 그렇지. 어떻게 생각해. 왜냐하면 자신이 없으니까 확인받으려고 그래요. 그런데 자신이 있으면 남에게 확인 안 받아도 돼요. 남이 무슨 생각을 하건, 어떻게 생각을 하던 내가 자신 있으면 다른 생각 동조 안 받아도 괜찮아요. 그런데 자신이 없으니까 꼭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옳다라는 것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이 연약한 상태의 사람입니다.
오늘 이 청년도 그랬던 것 같아요. 내가 믿음대로 살고 있다는 것을 예수님의 입술을 통해서 인정받고 싶었던 거예요. 그런데 영 엉뚱하게 예수님으로부터 그와 같은 말씀이 들려졌을 때는 충격 속에 가라앉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요.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살아가지만 정말 내 삶의 중심이 하나님을 향해 있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면밀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믿음이 부족하다고 생각돼 걱정되어 문의하지만 그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비극을 봅니다.
십계명을 지켰다고 말하면서도 석연치 않은 면이 있어서 혹은 자신감이 있으면서도 확인 받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이와 같이 흔들거리는 마음으로 문의한 것이죠.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듣고 결국 그는 한계를 느끼고 추락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내가 이 정도만 주님 앞에 드리고 내가 요정도만 믿음대로 살고 내가 이 정도만 주님을 따르면 주님께서는 나를 인정해주실 거야라고 생각한 마음들. 내가 정한 기준이에요. 주님이 정한 기준은 아무 상관없습니다. 이 청년 정말 그 마음속에 갈등 속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음생활 할 때 내 기준을 가지고 믿음생활 하시면 안돼요. 우리는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신 순수한 기준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되는 거죠.
오늘 주님께서 이 청년에게 말씀하신 것은 그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해서 그를 거지가 되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는 마음으로 이 청년의 모든 짐을 다 벗겨주시려고 했던 거예요.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 나 자신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로워지고 그 자유 안에서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면 때로는 우리가 포기해야 될 때가 있고 때로는 주님께 드려야 될 때도 있고 때로는 모든 것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내 마음대로가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운용해야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축복의 세계로 인도함을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믿음이라는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세계가 열려지는 거예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 원하실 때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새로운 은혜와 축복의 세계를 열어주시려는 거죠. 우리가 아이들에게 어떤 일을 지도할 때 그 아이를 귀찮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바른 길로 가기를 원하기 때문에 가르치는 것처럼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자유를 주고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더 큰 축복과 은혜의 세계로 인도하는 거죠.
‘네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나를 따라 오너라’라는 것은 하나님의 세계의 축복이 얼마나 큰지 직접 네가 체험해보라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과 믿음의 세계가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것인지 네가 한 번 체험해 보고 그 축복을 받으라는 주님의 뜻이었던 것입니다.
이 청년을 이렇게 만든 근원은 무엇일까요?
왜 근심하면서도 그 한계를 넘지 못할까요?
이제까지 살아온 자신의 방법과 철학의 문제입니다.
자신은 최고의 가치를 돈으로 여겼던 거예요. 그것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했고, 그것을 위해서 잠을 못 잤고, 그것을 위해서 절제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생각했던 가치를 잃어버리게 될 때 이 사람은 흔들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비록 주님의 나라에 가고 싶고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었지만 그가 생각했던 최고의 가치라고 여겼던 돈을 포기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새로운 믿음의 길을 선택하기에 이 청년은 자신의 이전의 자기의 삶의 기득권에 대한 집착이 너무 컸던 거죠. 정말 새로운 길을 선택하기에 집착이 너무 크니까 결국 새로운 길을 선택하기를 포기했던 거죠.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나를 버리고 새로운 은혜 속에서 나를 새롭게 건축해가는 것입니다. 내 생각도 기호도 방법도 삶의 모든 목표와 추구하는 것도 가치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정복하는 것을 넘어서서 사랑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소유를 넘어서 베풀고 나누는 것을 배우시는 겁니다.
섬김을 받고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고 오히려 다른 사람을 세우는 것을 배우는 것이 믿음의 길입니다.
은혜의 세계에서 내 인생을 다시 건축해가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용기가 부족해요.
그렇게 원하면서도 자신의 삶을 새롭게 건축하기에는 용기가 부족한 것이죠.
믿음은 우리들에게 용기를 구합니다. 기도는 미디안의 수많은 사람들을 대적할 때 32,000명의 군사들이 모집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가지고도 도저히 못 이기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더한 말씀을 하죠. 31,700명을 돌려보내라. 300명가지고 나가라.
기드온은 여기서 과연 내가 무엇을 따를 것인가 생각했을 겁니다. 32,000명도 모자라지만 300명에 비하면 많죠.
그러나 기드온은 믿음으로 용기 있게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골리앗 앞에 나아갈 때 정말 물맷돌에는 자신 있었지만 그것보다 더 큰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확신하고 용기 있게 달려 나갔던 것입니다.
믿음은 용기가 필요해요.
내가 믿음대로 살아야지.
믿음대로 내 모든 삶을 운용해야지.
내가 하나님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사랑하고 헌신하라 하셨으니 헌신하고, 다른 사람에게 베풀고 나누라 했으니 다른 사람에게 베풀고 나눠봐야지.
‘나는 어떻게 사나’가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가 나에게 어떻게 열려질까’를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두 번째, 내 생각과 관습과 기존의 집착이 우리에게 주는 아픔은 어떤 것입니까?
이와 같이 내 습관과 관습과 나의 이전의 모든 철학적 사고로 말미암아 우리들에게 영적인 아픔이 다가와요. 어떤 아픔일까요?이전의 것을 깨지 못함으로 인해 가질 수밖에 없는 갈등입니다. 이 청년은 근심하며 돌아갔어요. 새로운 가치를 추구해야 되는데 이전의 가치가 나를 붙잡아서 갈등하게 만드는 거죠.
우리는 늘 갈등하며 삽니다. 갈등의 원인은 늘 두 개의 가치 속에서 어떤 한 가지를 분명히 선택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늘 우리들의 삶 가운데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한 가지를 분명히 설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은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했어요.
제가 늘 말씀드리잖아요.
죽자니 청춘이요, 살자니 고생이라.
우리는 늘 이렇게 하니 저게 어렵고 저렇게 하니 이게 어렵고......
여러분 우리 인생에서 제일 어려운 게 뭐죠?
우유부단함이에요.
이렇게도 결정을 못하고 저렇게도 결정 못하고 결국 이러다 아무런 결정도 못하고 결정할 시기를 놓쳐요. 그 때는 결정을 해도 때가 지나서 의미가 없어져요. 우리는 어떤 것이든지 우리가 정한 원칙을 가지고 결정해야 돼요.
제가 저희 교역자들이 어떤 말씀을 하실 때 제가 꼭 이렇게 물어봐요.
“다음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면 이렇게 하겠느냐?”
뭐죠? 원칙이 있느냐 하는 거죠.
원칙을 정하지 않고 어떤 일을 그때그때 마다 처리하게 되면 다음에는 영 엉뚱한 결정을 하게 돼요. 그리고 언제든지 한 번 한 번 새로운 결정을 하기 위해서 수많은 힘과 수많은 시간과 모든 에너지를 소진해야 돼요. 우리가 어렵더라도 원칙을 정하면 그 원칙에 따라서 어떤 일을 진행하면 우리는 끝까지 그 일을 진행할 수 있어요.
그 다음부터는 마음에 갈등이 없어요.
이렇게 정했으니 이렇게 하면 된다. 라고 살아가는 거죠.
물론 우리의 믿음의 수준이 올라가면 원칙의 수준도 높아지겠죠.
그러나 우리는 한 마음을 정하지 못하면 언제나 갈등하고 갈등은 우리에게 고통과 아픔을 줄 뿐입니다.
믿음대로 살려고 작정했으면 믿음대로 살고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인생의 갈등 속에서 방황하고 기뻐하지 못하는 거죠.
축복이 없는 삶의 무덤덤함 속에서 후회하는 삶을 살게 되죠.
마음을 결정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기대와 축복으로 인해 삶의 고통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영광이죠.
오늘 1부 예배 지나서는 비가 별로 안 와서 그 갈등이 없었을 텐데요, 1부예배때는 비가 상당히 많이 왔어요. 비가 많이 와서 그런지 평상시보다는 적게 오셨더라고요.
제가 생각해보니까 오늘 1부 예배에 오신 분들이 이렇게 생각은 안했을 것 같아요.
‘비가 왔는데 교회 와서 예배드리고 나니까 정말 후회된다. 내가 왜 예배당에 왔는지 다음부터는 비오는 날에는 오지 말아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할 것 같아요? 제 생각에는 그렇지 않을 것 같아요.
‘그래도 비가 오는데 이렇게 예배당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 보니까 하나님께서 내 믿음을 축복해주셨구나! 적어도 내가 종이신자는 아니구나!’
종이신자는 뭐냐 하면 비가 오면 녹아서 없어지는 신자가 종이신자라고 그래요. 비가 오면 녹아지잖아요. 종이는.
적어도 내가 이런 믿음 가지고 있으니 감사하다.
그래요. 믿음대로 살면 후회하지는 않아요.
기대가 없으면 삶은 너무나 지루해져요.
여러분, 우리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지루함-권태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삶이 지루한 마음이 들고 권태롭기 시작하면 삶이 의미가 없어져요.
그런데 우리 삶에 어느 날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날마다 하는 반복적인 똑같은 일에 생명력과 창조력을 불어넣어 주셔서 그것이 날마다 새로운 일이 되는 거예요.
어제도 아침 먹고 점심 먹고 저녁 먹고 똑같은 일하고, 오늘도 아침 점심 저녁 먹고 똑같은 일 하는데 그것이 날마다 새롭게 느껴지는 거예요. 날마다 만나는 사람이 새롭게 느껴지고 기대가 되고 소망이 되고 하루하루 하나님의 은혜를 소망하는 겁니다.
하나님, 오늘 나에게 어떤 기쁨을 주시렵니까?
내가 오늘 어떤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게 하시렵니까?
하나님 오늘은 내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은 무엇일까요?
라고 하나님께 늘 이런 기대를 가지게 되는 거죠.
특별히 하나님의 나라는 역전의 진리입니다.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했어요.
버리면 얻고 얻고자 했을 때 우리는 얻지를 못해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신다고 말씀하셨어요.
은혜를 체험해본 사람만이 더 큰 은혜를 사모할 수밖에 없죠.
주님이 주시는 큰 기쁨의 은혜를 위하여 우리를 한 번 던져 봅시다.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를 보고 맘이 졸여서 가지 못하는 이와 같은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원대한 능력과 은총의 세계를 이루고자 하는 거죠.
그럼 마지막으로 세 번째, 어떻게 우리는 주님의 길을 따를 수 있을까요?
오늘 주님은 참 아픈 얘기를 했어요.
부자는 천국에 가기가 어렵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도 더 어렵다. 불가능하다는 얘기잖아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섬뜩하겠어요?
정말 우리가 오늘 말씀을 듣고 우리의 마음도 그렇잖아요.
부자가 누굴까요?
하나님 앞에 가난한 자라는 것은 심령이 가난한 자예요. 그 마음의 심령이 가난한 자예요.
무슨 마음이에요?
‘하나님,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오셔서 나를 인도하시고 내게 은혜를 주시고 하나님의 축복을 더하십시오. 하나님 없으면 나는 도무지 세상을 살 수 없는 자입니다.’라고 심령이 가난한 자가 진정으로 가난한 자예요.
무엇을 가졌건 심령이 가난해야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은혜 없으면 살 수 없다고 고백하는 이들. 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는 자들이죠.
여러분, 어떻게 주님의 길을 따를까요?
내 갈등의 근원을 파악하여 하나님께 맡기고 결단으로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결심하고 결정하면 의외로 삶은 편해집니다.
결심하고 결정까지가 힘들지 그 이후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도됩니다.
늘 말씀 드리죠.
한 번 하는 것이 능력이다.
한 번 마음에 결심하는 겁니다. 결정하는 겁니다.
이건 그렇게 자연스러운 게 아니에요.
여러분 자연스럽게라고 말하는데 ‘내 마음속에 자연스럽게’가 뭐라고 얘기했죠?
‘내 마음 있는 죄악의 흐르는 대로’가 자연스럽게 예요.
우리 인간은 자연스러운 것은 죄짓는데 자연스러워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억지로 하나님의 은혜로 의도적으로 가야돼요.
여러분, ‘힘대로, 힘에 진하도록’이라고 성경에 말씀하고 있죠.
우리는 정말 내 마음의 의지로는 죄를 쫓고 싶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힘대로 힘에 진하도록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따라 주의 역사를 이루기를 소원하는 믿음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반복하다보면 어느 때 어느 순간 그것이 나에게 편안한 삶의 길이 되는 거죠.
주님은 결코 우리를 피해보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헌신이란 잃음이 아니라 얻음이고 하나님의 축복을 심고 은혜로 100배 60배 30배를 거두는 것입니다. 내 삶의 논리, 살아온 경험, 가지고 있는 감정과 기호들이 우리로 하여금 주님께 나아가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결국 내 자신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수용하는 마음의 결심과 결단이 필요합니다. 결심과 결단은 자연스럽게 되지 않아 부자연스럽지만 각오하고 그렇게 따르는 것입니다. 사람은 못해도 하나님의 능력을 주셔서 우리에게 그 일을 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주를 따라하고 믿음으로 주님의 역사를 이루고, 믿음으로 결심하고, 믿음으로 진행하는 것은 우리의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문득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입혀 주시는 순간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순간이 있죠.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순간이죠.
갈릴리 어부였던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었어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믿음으로 양육하고 그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날마다 돈만 세고 날마다 계산만 하는 세리 마태는 주님의 제자가 되고 주님의 일생을 기록하는 사람이 되었어요.
주님이 우리를 부르는 순간 우리 인생은 다르게 건축되기 시작합니다.
이 시간도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주여! 내 마음에 오셔서 내 마음의 은혜를 주시고,
주여! 내 삶에 오셔서 내 삶에 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나로 하여금 주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용기와 담대함과 은혜와 능력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부르심과 주님의 은혜주심을 놓치지 않는 축복의 백성이 되게 하옵소서.
이 때 우리는 우리 자신도 예상치 못했던 놀라운 일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입으면 이런 생각이 들어요.
‘내가 이런 일을 하다니 내 능력이 아닌데 주님이 나와 함께 하셨어.’라는 마음의 확신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믿음의 일을 실행하다니......’
처음에는 놀라나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우리의 수준이 되는 겁니다.
믿음으로 결단합시다.
내 마음과 이전의 생각과 모습이 기준이 되지 말고 주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이 기준이 되어야 돼요. 내 한계는 내가 결정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결정하시는 겁니다. 주님의 결정의 한계는 아무런 제한이 없어요. 우리의 삶을 다하여 주님 앞에 아름답게 헌신하고 아름답게 드려지고 주의 뜻을 위하여 아름답게 사용되는 것이 주님의 뜻이에요.
한계를 가지고 여기까지는 할 수 있어. 그런데 이건 안 돼. 이것은 내가 스스로 그은 금이에요. 그것을 벗어나야 합니다. 여호와를 기대하는 심정으로 우리의 삶의 밭에 은혜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여호와를 기대하라 저가 내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주시리로다
눈물로 씨를 뿌리면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우리는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을 바라보며 은혜로 주의 영광을 이루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라고 주님께 물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청년처럼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내게 무엇인가 부족한 것이 있습니까? 주님 가르쳐 주십시오.
그리고 이 청년과는 달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을 때 그 일을 따르고 실행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그 때 우리의 삶은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전혀 다른 사람이 됩니다. 날마다 그물 깁고 물고기 잡던 사람이 이제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 날마다 돈만 세던 사람이 이제는 주님의 백성으로 주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주의 뜻을 이루고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며 정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라고 주님에 대해서 의심하고 반문하던 자가 주님의 제자가 되어 주의 역사를 이루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 주님께 문의 합시다.
“아직도 내게 무엇이 부족합니까?”
그 부족을 채워주시고 하늘의 위로와 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주의 백성들에게 주의 영광과 은총이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아직도 부족한 것이 있습니까
마 19:16-26 / 지태일목사
5-6년 전 벤처 기업이 잘된다고 할 때에는 강남의 테헤란로에서 사무실을 구하지 못해 많은 애를 먹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말들어 보면 벤처 기업을 하던 강남의 테헤란로 빌딩에 빈방들이 늘어나고, 입주하는 사람들이 없어 사무실도 빼지도 못해서 많이들 힘들어 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경기가 안좋은가를 보여주는 단면입니다. 당시 좋을 때는 돈을 엄청나게 많이 벌어 성공한 젊은 사장님들은 성공한 사람들로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일찍 성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돈을 많이 벌었다고 부자가 되었다고 해서 꼭, 인생이 다된 것은 아닙니다. 성공한 것 때문에 실패한 인생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실패한 것 같아도 성공한 인생이 있고, 성공한 것 같아도 실패한 인생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16절을 보면 예수님을 찾아온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이란, 20절에 보면 젊은 청년이었다 하고, 22절을 이어서 보면 이 청년은 재물이 많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인지 아니면 남달리 돈버는 재주가 특출나서 인지, 오늘날처럼 무슨 벤처 기업을 잘 해서인지는 말씀하고 있지 않지만, 일찍이 젊어서 재물을 많이 소유하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10:17-31)에서는 재산이 많은 부자라 했지만 누가복음에는 큰 부자, 관원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적으로 잘 나가는 정치가로 권세를 가진 관원이었고 율법을 잘 지키는 교양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복음서의 말씀들을 종합하면 이 청년은 부와 권력과 세상의 영광 그리고 젊음을 겸비한 잘 나가는 인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영생을 얻기 위한 데에도, 종교적인 열정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만한 조건으로 본다면 많은 사람의 선망의 대상으로 부러움을 살만한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존경을 받고,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될만한 사람입니다. 누구에게나 당당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첫째, 그러나 이 부자 청년은 영적 갈망(질문)은 있으나 방법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6절)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 있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첫 질문은 참 훌륭한 질문입니다. 여기에는 영생에 대한 관심과 종교에 대한 관심, 내세에 대해 관심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다가 영생을 얻기 위해서 할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물론 영생은 은혜로, 믿음으로 얻는 하나님의 선물이지 무슨 인간의 행위로, 노력으로 얻는 것은 분명 아님니다만, 뭔가 해야한다는 것, 인생을 진지하게 살려고 하는 질문임에 틀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바르게 살자면 이런 질문이 있어야 합니다. 이 질문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님니다. 이 질문만해도 대단한 관심이요 갈망을 보여 줍니다. 사람에게 중요한지? 도대체 관심사가 무엇인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인생은 세 가지 질문에 도전을 받고 이에 응답하며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1)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무엇인가를 배우고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2)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내가 사는 날 동안에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안다는 것 중요합니다. 3) 나는 무엇을 바라보고 사는가? 현세만이 아니라 내세의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 너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부자 청년은 인생에 대해, 종교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진지한 접근이 있었던 사람으로 보입니다. 졸부나, 세습이나, 어떤 편법으로 세상을 떵떵거리며 또는 거들먹거리며 사는 사람은 아닌듯 합니다.
2. 그러나 관심 이상으로 이 부자 청년은 자만심이 가득찼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의 말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생에 대한 부자 청년에 대해 질문에 대답을 하셨습니다.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이 말씀은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말씀은 아님니다. 다만 그 청년의 죄를 깨닫게 하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님입니다. 율법을 다 지킨 사람은 없거니와 율법을 지키려고 애쓰는 사람은 노력할수록 죄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돌아보니 내가 지키지 못한 것이 많습니다라고 말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때 다시 부자 청년은 묻습니다.
18절을 보면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내가 또 지키지 못한 계명이 있습니까라?”라는 말투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심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19절에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예수님께서 청년에게 이 다섯 가지의 계명을 말씀하시자 이 청년은 20절에 자신 있게 대답하기를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마가복음에는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라고 말합니다.
이 부자 청년이 이토록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던 것은 하지 말라는 말씀은 정말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라는 말씀대로 실제로 했기 때문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정말로 사람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라- 정말로 그렇게 했습니다. 이 부자 청년은 자신의 삶에 대하여 당당합니다. 자신이 있었습니다. 십계명을 다 지키면 되지 그 이상 무엇이 필요한가? 하는 자신의 확신을 보여줍니다. “아직도"라는 말에는 이만하면 되지 않았느냐는 자만심이 깔려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영생을 얻기에 손색이 없는 훌륭한 신앙의 소유자로 인정받기를 기대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이만하면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기준에 만족하며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믿으며 살아왔습니다. 이 부자 청년이 자신있게 하는 말을 보면서 우리는 두 가지의 모습을 우리 안에서 거울처럼 볼 수 있습니다.
1) 하나는, 말로는 늘 죄인이며 부족하다고 말하면서도 행동으로는 언제나 자만심 가득한 사람입니다. 겉으로는 겸손하지만 행동은 언제나 자기 중심적이고 이만하면 되지 더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고 반문하듯이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2) 또 하나는, 말로도 태도로도 언제나 자만심 가득하여 아직도 나에게 부족한 점이 있다는 말입니까? 하고 목을 꼿꼿이 세우고 사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정한 수준에 맞추어 사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도덕적 기준이고, 자신이 모든 윤리의 규범입니다. 다른 어떤 권위도 이 사람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오늘 이 시대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자기 중심적 삶을 아무 문제 의식없이 살아갑니다. 인정하지 않습니다.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을 지키라는 말씀에 부자 청년은 율법을 다 지켰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아직 영적 상태로 매우 어두웠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무지하고 자신의 죄의 실상을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누가? 나는 하나님 앞에서 나는 율법을 다 지켰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당시에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입니다. 대개 자신들은 율법을 완벽하게 지켰다고 합니다. 이렇게 당당하고 자신있는 부자 청년을 향하여 예수님은, "좋습니다." "참 훌륭합니다." "당신만한 믿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며 칭찬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왜 예수님께서 청년이 계명을 다 지켰다고 했을 때 그 정도면 되었다고 칭찬하시지 않고 근심하게 하셨을까요?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란 말입니까?
예수님은 21절에,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데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청년은 많은 재물을 나눌 자신이 없어서 근심하며 떠나가니라”.
여기서 “온전하고자 할찐대”라는 말씀은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완전한 의인이 된다는 말이 아니라. 말씀에 대한 감각이 무딘 그 심령을 깨우쳐 주면서,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나타난 행동뿐 아니라, 그 마음까지 지배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하나님 말씀은 하지 않는 것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라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예를들면 나는 평생 도적질하지 않았으므로 제 8계명을 지켰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웃이 굶어죽고 있는데 나 혼자만 배불리 먹고 있고 모른체 한다면 그것은 계명을 범하는 것입니다. 내 평생 살인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제 6계명을 지켰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기 죽어가는 사람을 못본체 하고 그냥 지나간다면 이는 제 6계명을 범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을 귀히 여기라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비록 살인 하지 않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을 경시하면 이는 살인 죄를 범한 것입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율법을 완전히 지켜서 하나도 어기지 않았다고 하는 부자 청년의 말에, 예수님은 그러면 네 주위에 굶어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 병든 사람들, 헐벗은 많은 사람들은 무엇이냐? 네 눈에는 그들이 보이지 않느냐? 가서 네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부자 청년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 참으로 듣고보니 내가 잘못했습니다. 이제 명하신 대로 하겠습니다라고 했습니까? 아님니다.
셋째로, 부자 청년은 영적이기를 원하면서도 물질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 다른 것, 계명은 다 잘했다고 인정은 하되,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제안하심니다. 그러니까 "아직도, 부족한 것이 있습니까?" “이만하면 됐잖습니까?”라고 묻는 부자 청년에게 "그래 아직도 부족한 것이 있다"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을 말씀하셨습니다. “네게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 예수님께서는 그 심령에 있는 우상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네 가진 것을 다 팔아---"하나님 나라 들어가는데 재물에 대한 애착 내지 재물을 의지하는 것은 위태롭다는 것입니다. 그는 진짜로는 자신의 영혼의 문제 영생보다 실상은 돈이었습니다.
재물은 잠시 있는 동안 필요한 것 뿐,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에서 건지지 못합니다.
시49:17절 이하에 보면 “저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물질은 세상 사는 날 동안에만 필요한 것입니다. 잘 사용하다가 가는 것이지 물질은 한 푼도 가지고 가는 것은 아님니다. 세상 사는 날 동안에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자는 멸망하는 짐승같도다. 말씀합니다.
재물은 세상 사는 날 동안에 필요한 것이지만 사랑의 대상, 의지할 대상이 못된다는 말씀입니다. 재산을 포기하고 가난한 사람과 나누도록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혼자 독불장군으로 살지 말고 가난한 이웃과 함께 나누며 사랑하며 살도록 말씀 하십니다. 그러나 부자 청년은 그 지식이 은혜가 되고 순종이 되어 축복을 누린 것이 아니라, 22절을 말씀을 보면 예수님을 통한 가르침이 도리어 근심이 되어 차라리 안듣 것만도 못한 채 '근심하며 돌아가는' 청년의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을 만난 것이 근심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이 근심이 되었습니다. 왜, 재물이 많음으로 그렇게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줄 수 없다하여 부자 청년은 근심하면서 돌아갔습니다.
여기서 "근심하여"라고 번역한 단어 "뤼페오"(lupevw)는 "섭섭하다" "서운해 하다"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젊은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에 실망한 나머지 근심과 서운함으로 기가 죽어서 어깨를 늘어뜨리고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직도 나에게 더할 일이 있습니까?" 이 정도면 되잖습니까? 하던 당당하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예수님께서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는 것입니다. 섭섭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율법을 지켰다고 생각했는데 칭찬은 고사하고 기를 죽이다니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칭찬받고 이스라엘에서 이만한 믿음을 본 적이 없다고 할 줄 알았습니다. 이 사람이 갖춘 조건을 보면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로마의 백부장보다 나았을지 모릅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으로부터 백부장에게 한 그 칭찬을 들을 수 있다고 기대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기대는 실망으로 끝났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너무 잘난 척 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 앞에서 기가 죽어 돌아가야 했습니다.
이 부자 청년이 예수님 앞에서 등을 돌리고 기가 죽어 섭섭한 마음으로 떠나야만 하는 이유를 성경은 "많은 재물"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예수님께 등을 돌리고 떠남으로써 실패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동안 그가 이룩한 업적들, 십계명 준수한 것, 부자로서 선망의 대상이 된 일, 의회원으로써 출세한 업적들이 그를 그토록 당당하게 만들었는데, 예수님 앞에서 모두 무너져 내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재산과 자신의 영생 길을 놓고 선택의 기로에서 그는 영생의 길보다 자신의 재물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그동안 진지하게 진리에 고민하고 인생의 의미를 생각해 온 것은 사치한 것이었습니다. 진심이 아니었습니다. 신앙을, 영생을 하나의 악세사리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마치 자신이 영생의 길을 소망한다고 남을 속이며 스스로도 착각한 것입니다.
그는 마지막에 진리와 영생이 아니라 돈을 택하였습니다. 이것이 그가 실패한 이유입니다. 지식적으로 알기는 원하면서도 실천하기는 싫어합니다. 영생의 조건은 완전한 포기여야 합니다. 완전한 순종이어야 합니다. 참 영생을 얻지 못하면 재산이, 명예나 지식, 부귀영화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삭개오는 뽕나무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너무 좋아 자기 집으로 초대하고 고백합니다.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 남에게 토색한 것은 3-4배나 갚겠습니다. 그리고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순종했습니다. 이제는 남의 것을 착취하는 자리에서 베푸는 자리로 과감하게 나갑니다.
53세에 우울증과 불치병으로 1년 밖에 더 살수 없다는 판정을 받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석유왕 록펠러였습니다. 그는 시한부 인생 선고를 받고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님을 알고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그때부터 삶을 바꿨습니다. 쥐고 있는 재산을 털어 4000여개의 교회를 세우고 도왔습니다, 많은 학교를 세우는 교육 사업을 했습니다.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해 병원을 지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사회사업을 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면서 인생의 맛을 알고 그는 시한부 1년에서 무려 44년을 더 살았습니다. 그러니 97세를 산 것입니다.
죽음을 앞에 둔 재산가는 무엇을 준비해야 합니까? 죽음 저 편에 있는 영생의 문제가 아닙니까?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언제부터인가 영생보다는 현실이고 물질이고, 진리보다는 사상입니다. 갈등이란 두 가지 가치관 사이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를 버려야 합니다. 두 마리 토끼는 못잡습니다. 어느 것을 버리겠습니까? 손안에 있는 허무한 것을 버리면 더 좋은 것을 받을 수 있습니다. ♬ 손에 있는 부귀보다 주를 더 사랑하는가? 이슬같은 목숨보다 주를 더 사랑하는가?......
인도의 원숭이가 포수에게 잡히는 것은 손안에 있는 먹이를 놓지 못해 덫이 된 구멍에서 손을 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길이요, 저 하늘나라에 가서도 영원히 사는 길이 있는 줄을 알면서도 근심하며 가지 못하며 되돌아 가는 것은 현대인의 무서운 현실 욕심 때문입니다. 얼마나 욕심이 많은지 모릅니다. 가진 자들이 더 가지려고, 그 정도만 되어도 감사한데, 거기에 자족하지 못하고 욕심을 내어 수단과 방법을 안가리다 보니 기쁨이 오히려 근심과 불안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다가 제대로, 자기 뜻대로 안되면 돌이킬 수 없는 불행한 길을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순간의 잘못된 결정으로 영원을 후회하지 않아야겠습니다. 진주의 가치를 알았으면 소유를 팔아서 진주가 감추어진 밭을 사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네 재물을 다 팔아”라는 말씀은 모든 신자에게 적용되는 목표는 아님니다. 여러분 혹시 이 말씀 듣고 근심하면서 이 자리를 떠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좋습니다. 선택 사양입니다. 예를들면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사는 것이 좋습니다만, 이것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고 독신의 은사가 있어야 가능 한 것입니다. 그 말씀을 모든 여자들에게 다 적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은 Mammonism(배금주의)의 사상에 온통 물들어 검은 돈이 판을 칩니다. 돈만 있으면 안 되는 것이 없다는 세상입니다. 인격도 돈으로 가늠하고, 세상이 돈짝만하게 보이는 '생명경시의 시대'입니다. 돈 몇 푼 때문에 울고 웃고 남을 속이고 미워하고 죽이고, 자살하고 심지어 자신의 명예도, 권력도 물질 때문에 아랑곳 하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사실 물질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님니다.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이것으로 좋은 일, 선한 일, 아름다운 일 얼마나 많이 합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부자 청년을 보니까 이렇게 귀한 물질이, 정말로 인간에게 범사에 유익한 물질이 오히려 영생에 장애가 된 것을 봅니다. 부자 청년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는 괜찮았습니다. 율법도 잘 지키고 관심도 많고 그러나 물질 때문에 더 이상 예수님을 믿을 수도 따를 수도 없는 그런 상황으로 떨어집니다.
기독교 축복은 "덮어놓고 부자가 되시오'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막연한 기복신앙(祈福信仰)은 오히려 참 신앙에 걸림돌이 됩니다. 따라서 성도나 교회가 돈의 지배를 받아서는 안됩니다. 그럴수록 물질로부터 초연하고 깨끗해야 합니다. 물질의 비중이 얼마나 큰가? 이에 대해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하나님과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은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마6:24) 하나님도 돈도 다 사랑할 수 없는 것이 성도의 한계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해야 합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단지 신앙적인 물질관이 분명해야 합니다. 의로운 재물을 가져야 합니다. 수입도 의로워야 하고 지출도 의로워야 합니다.
욥은 하나님이 사단에게 허락하신 시험으로 끝까지 잃은 재물보다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합니다. 재산 전부를 잃고도, 심지어 재산만이 아니라 자녀 10명도, 자신의 몸도 병들어 건강도 다 잃고, 사랑하는 아내가 시험하고 떠나가도 을 해도 티끌 가운데 앉아서도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욥기1:21절에,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이다"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위대한 신앙가입니다. 욥은 인생이 무엇인지를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솔로몬이 기브온 산당의 일천번제의 결과로 받은 전무후무한 축복을 압니다. 그러나 나중에 이 부(富)와 편안함이 신앙을 혼탁하게 함으로 솔로몬에게는 오히려 불행을 가져다주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재물의 풍요는 하나님을 무시하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무소유'(無所有)를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야베스의 기도처럼 하나님이여!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 30:8-9)
영국교회의 기도문에는 '주여 우리가 부요할 때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말이 있다. 가난하고 먹을 것이 없을 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할 뿐 아니라, 부요할 때 우리의 영혼이 망하지 않도록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에서 당부하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배부르지라도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신 영호와 하나님을 잊지말라는 것입니다. 가난할 때보다 부요할 때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일이 안될 때보다 잘될 때, 정상에서 넘어지기 쉬운 법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실족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재물 때문에 오히려 축복을 빼앗긴 사람들이 많이 나옴니다.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판에서,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양과 소 얼마를 끌고 오다가 하나님 말씀 불순종하다가 버림받은 사울왕, 은 30에 예수님을 팔았던 가롯유다, 하나님께 바친다고는 하지만 제대로 약속대로 서원한대로 하지 않다가 부부가 한 날 죽음을 맞이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 암람 나라 나아만의 선물을 가로채다가 그 문등병이 자기 몸에게 들어간 엘리야의 종 게하시, 물질에 어두워 이스라엘을 저주했던 발람 선지, 여리고성에서 아름다운 시날산의 외투 한 벌과 금은을 취하다가 아이성 전투에도 실패하고 결국 온 가족이 돌로 쳐죽임을 당했던 아간, 소돔과 고모라를 빠져 나오다가 뒤를 돌아다 보지 말라고 했는데 불순종하여 뒤를 돌아다 보다가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처....,
이 모든 사람들을 생각해 보면 다 탐심에서 온 것입니다. 돈의 히브리 원어는 '탐낸다"는 동사에서 유래됐습니다. 돈은 '축복과 보상'의 원리도 되지만 유혹의 씨앗도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금은 성전의 기물도 되지만, 광야 금송아지 신상(神像)도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돈이 앉아서는 안됩니다.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가르침이 빛나는 시대입니다.
요한 웨슬레는 노동자들에게 침례를 주면서 주머니의 지갑이 물에 젖을까봐 꺼내려는 사람들에게 '그대로 놔두십시오, 당신의 지갑도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의 영생이 귀한 줄 알면서도 물질 때문에 주저하고, 진리를 알면서도 실행치 못하고 도리어 근심하며 예수님을 떠나갔던 부자 청년, 이것 때문에 생기는 갈등은 무엇으로도 해결 못하는 영원한 근심입니다. 주님을 만났거든 끝까지 믿고 따라 갑시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과 같이 여기고 오직 주님만을 푯대로 나갈 때 '사도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시몬 베드로도 그물과 부친을 버리고 주님을 따를 때 천국 열쇠를 얻는 특권을 얻었습니다. 잃으면 얻을 것입니다. 하물며 그것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영생임에야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이 은혜를 가지고 오늘도 승리하시는 귀한 삶을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당신의 우상은
마 19:16-30 / 최영기목사
우상이라고 하면 보통은 부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우상을 섬기면 안 되는 것, 우상은 제거해야 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주위에는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무척 많습니다. 무신론자이고 종교가 없다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이렇게 들리지만 이유는 우상을 돌이나 금속으로 만든 형상만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상에는 정신적인 우상이 있습니다. 바울은 탐욕이 우상이라고 말합니다(골 3:5). 하나님 대신에 의지하고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우상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는 재물이 우상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권력이 우상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학문이 우상입니다. 가정이 우상이고 건강이 우상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우상 숭배를 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이 우상 숭배자임이 노출되는 사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누가는 눅 18:18에서 지도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돈도 있고 사회적인 지위도 있으면서도 신앙심이 깊은 보기 드문 청년입니다. 이 청년은 예수님에게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것을 묻느냐? 선한 분은 하나님 한 분이라고 말하십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선하다 선하지 않다는 말씀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막 10:17에 보면 부를 때에 잘 보이기 위해서인지 보통 사람들은 그런 표현을 쓰지 않는데 청년은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느냐고 묻습니다. 하도 선하다는 말을 쉽게 사용하니까 바로잡아주기 위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라는 평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청년은 좀 더 극적인 대답을 원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무슨 계명을 지키라는 것이냐고 묻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십계명 중에서 이웃과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 십계명을 인용해주셨습니다. 극적인 대답을 원했던 청년에게는 대답이 실망스러웠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자기는 이 계명을 다 지켰다고 대답합니다. 이 때에 예수님은 이 청년에게 소유를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로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청년은 근심하면서 떠났다고 하였습니다.
Ⅰ.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우상이다
이 사건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어떤 것일까요?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야 한다는 의미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청년의 마음속에 있는 우상을 지적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자신을 쫓으라고 했을 때에 청년의 행동은 청년에게는 재물이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였고 재물이 우상인 것을 실증해 보여주었습니다.
1. 우상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방해한다
우리는 이제 왜 청년이 계명을 다 지켰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으면서도 영생에 대한 확신이 없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청년에게는 재물이 우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우상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방해합니다. 그러므로 영생에 대한 확신이 자주 흔들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따뜻한 사랑의 관계가 아닌 분들은 자신을 살피시기 바랍니다. 혹시 자신에게 우상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를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우상을 타파할 때에 구원의 확신도 생기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따뜻해질 것입니다.
2. 돈이 우상이 되기 쉽다
우리에게 우상이 되기가 가장 쉬운 것이 재물 즉 돈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 6:24에서 예수님은 재물을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또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하여 크리스천이 열매 맺는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가 재물에 대한 욕심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마 13:22).
그러면 어떻게 하면 재물의 노예가 되지 아니하고 재물이 우상이 되지 않도록 할 수 있을까요? 청지기의 삶을 살면 됩니다. 자신의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자신은 관리를 맡은 청지기로 사는 것입니다.
후안 칼로스 오티즈라는 아르헨티나 출신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분은 전통적인 목회를 하다가 교회를 가정 교회로 전환하여서 큰 부흥을 맛본 분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가정 교회 자체에 부흥을 가져오는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 교회는 신약 교회이고 가정 교회를 시도하는 분들은 신약 교회를 재현해보겠다는 욕구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 교회가 성공하기 위하여서는 지도자들도 전통적인 지도자가 아니라 성서적인 지도자가 되어야 하고 성도들의 삶도 전통적인 기독교인의 삶이 아니라 성서적인 기독교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서적인 기독교인의 삶 중의 하나가 청지기의 삶입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이 어느 주일에 강단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예수님이 인생의 주인이시고 자신은 예수님의 종인 것을 믿습니까?" 성도들은 "아멘!"으로 화답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의 주인이고 여러분이 종이라면 여러분이 소유한 것은 다 주님의 것이라고 믿습니까?" "아멘!" "주님이 여러분의 소유한 것의 주인이라면 여러분의 집도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믿으십니까?" "아멘!" 그때에 목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믿는다면 집을 소유하고 계신 분들은 집문서를 갖다가 다음 주일 예배 때에 주님에게 바치시기 바랍니다." 다음 주일 거의 대부분의 성도들이 집문서를 갖고 왔습니다. 목사님은 예배 시에 성도들로 하여금 집문서를 앞으로 갖고 나와서 바치도록 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바친 후에 목사님은 갖다 바친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서 앞으로 나오게 하여 집문서를 되돌려 주면서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집문서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관리를 여러분에게 맡기셨습니다. 잘 맡아서 관리하기 바랍니다." 이후부터 이 교회에서는 예를 들어 선교사님이 방문하셨을 때에 성도들에게 당신 집에 모시겠느냐고 묻지를 않습니다. 모시라고 통보만 하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필요가 있는 것이면 사용하는 것이지 관리인에게 물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가정 교회 세미나를 주최할 때에 목자에게 참석자를 집에 모실지 안 모실지를 묻지를 않습니다. 특별한 사정으로 인하여 모시기 못할 목자가 있는지 만 묻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목자들은 청지기의 삶을 살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청지기 의식을 갖고 살 때에 우리는 자신의 소유가 나의 우상이 되는 것을 염려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렇게 살 때에는 소유에 대한 자유로움이 있습니다. 자신의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연연해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염려에서도 해방됩니다. 하나님의 것이니까 하나님이 지키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상실할까 염려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Ⅱ. 가진 것이 많으면 천국에 가기 어렵다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재물 뿐만이 아니라 권력이건 명성이건 학문이건 건강이건 무엇이든 많이 소유한 분은 천국에 가기가 힘이 듭니다.
1. 부자는 가진 것을 의지한다
예수님은 어린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8:3). 어린이들의 특징은 자신의 무력을 의지하기 때문에 어른에게 의지하는 것입니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휴스턴에 유명한 암 센터에 많은 분들이 치료하러 옵니다. 한국에서 미국에까지 치료를 위하여 오신 분들이면 경제적인 여유들이 있으신 분들입니다. 소위 세상적으로 성공한 실력 있는 분들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질환으로 고생을 하면서도 예수님을 영접하는 예가 적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힘으로 살아오다가 누구인가, 그 대상이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아닌 남을 의지한다는 것이 힘든 것 같습니다. 의사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해도 예수 영접을 주저합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힘을 의지하면서 살아오다가 죽게 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이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존심을 생각한다는 것은 자신과 하나님을 같은 수준에 놓는다는 의미입니다. 일생을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 살아왔으니 당연하다고도 보겠습니다.
2. 부자도 구원 가망이 있다
그러면 돈이 많은 분이나 높은 지위에 있는 분이나 사회적인 명성이 있는 분에게는 전도를 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처럼 힘들지만 하나님은 할 수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그 증거가 우리 교인들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갖출 것을 다 갖추었으면서 예수를 잘 믿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위에서 여러 가지 면에서 부자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을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사람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언제 어느 계기를 통하여서 자신이 의지하던 것이 의지할 것이 못 되는 우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을 찾고 의지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남을 의지할 필요를 느끼는 자신 만만한 분들에게 예수 믿으라고 기회 있을 때마다 말을 해야 소용이 없습니다. 염증만 느끼게 만듭니다. 그렇다고 포기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하고 항상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가끔 가다가 좀 익었는지 찔러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절대 예수 믿지 않을 것 같은 분도 예수 믿게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알고 절대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Ⅲ. 우상의 포기는 포기가 아니다
부자 청년이 슬퍼하면서 떠났을 때에 제자들은 자신들은 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쫓았다는 사실을 말씀 드렸습니다. 유치하게 들리지만 제자들은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말씀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물질적인 풍요는 하나님의 축복이고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뜻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금과 똑같은 생각이지요. 우리 교회는 좀 낫습니다만 많은 분들이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물질적인 축복을 위해서 입니다. 목사님들도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해야 하는 이유로 축복 받기 위한 것을 주로 드는데 이 축복은 보통은 물질적인 축복을 의미합니다. 행복이라든가 사명이라든가 천국의 보상을 의미하는 하늘 축복이 아니라 세상 축복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제자들의 신앙의 뿌리를 흔들어 놓는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자신들도 구원 받았다고 자신할 수가 없는 것 아닌가는 생각이 들어서 자신의 상태를 이 질문을 통하여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안심시켜 주십니다. 천국에서 예수님과 더불어 큰 일을 할 것을 예고하십니다(28절).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들에게는 영생의 축복이 있을 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포기한 것을 몇 배로 돌려 받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29절).
1. 포기한 것 이상으로 보상 받는다
우리가 우상을 포기하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사실 포기하는 것이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얻고자 하는 자는 잃고 잃고자 하는 자는 얻는 역설적인 진리가 적용되기 때문입니다(마 16:25).
저는 목회자로 헌신할 때에 담임 목사로 헌신한 것이 아니고 교육 목사도 헌신하였습니다. 그때에 저는 사람들에게 인정 받아 유명해지는 것을 포기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목회자들 틈에서는 담임 목회를 해야 인정을 받지 부목사나 교육 목사는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소개할 때에 교육 목사라고 소개하면 상대방의 악수하는 손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곤 했습니다. 서울 침례 교회에 부임할 때에도 남에게 알려지고 남에게 인정 받는 것은 포기하고 왔습니다. 제가 교회 생활이 행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 교인들만은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결심 하나만을 갖고 부임했습니다. 저는 우리 교인들을 위한 목사가 되기로 결심을 했기 때문에 부흥 집회 같은 것도 거의 안 나갑니다. 어떤 분은 제가 외부 집회를 많이 나가는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제가 외부 집회로 인하여 주일을 비우는 일이 1년에 6번 정도입니다. 기독 단체의 높은 직책도 사양해오고 있습니다. 기독 단체의 중요성을 몰라서가 아니라 저는 우리 교인들을 위하여 부름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유명한 사람이 되어버리고 말랐습니다. 주님께서 유명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제가 밖에 나가지 않으니까 목회자들이 찾아오십니다. 그래서 세미나를 주관하게 되었습니다. 책을 저술할 생각은 꿈도 꾸지 않았는데 주위에서 강권하여서 책도 쓰게 되었습니다. 가정 교회 전파를 주님 주신 사명으로 생각하고 거기에 관련된 집회에는 초청에 응하는데 그러다 보니 뜻하지 않게 인정 받는 사람이 되었고 알려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제가 추구해서 얻은 것이 아니고 포기했기 때문에 주가 주신 것이기 때문에 자유함이 있습니다. 명성을 상실하면 어쩌나 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인정 받기 위하여 항상 새로운 것을 생각해 내야하는 강박감이 없습니다.
주님은 형제가 가족이나 땅을 주를 위하여 버리는 사람은 100배로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과 땅입니다. 가장 중요한 두 가지를 주를 위하여 포기할 때에 몇 배로 돌려주신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100배라는 것은 상징적인 표현이겠지요. 가족에게 핍박 당하고 가족에게 배척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여서 예수 믿기를 주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배척 당하더라고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언제인가 여러분들로 인하여 가족들도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그때의 가족의 관계는 믿기 전의 가족의 관계와는 비길 수도 없는 따뜻한 관계가 될 것입니다. 그것이 100배도 되돌려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또 가족이 예수 믿을 때까지 친가족보다도 더 아껴주는 믿음의 가족을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100배로 되돌려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2. 영원한 것으로 보상 받는다
오늘 본문의 청년은 재물이라는 우상에서 벗어나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였습니다. 생각해보면 이 청년은 엄청난 가능성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재물이 있었습니다. 사회적인 지위가 있었습니다. 젊음이 있었습니다. 돈이 있고 신분이 있는 젊은이라면 방탕한 삶을 살 수가 있는데 이 청년은 십계명을 다 지켰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신앙심까지도 있었습니다. 막 10:21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쁘게 생각하셨다고 했습니다. 이때에 이 청년이 예수님께서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따르라는 명령에 순종하였더라면 비울보다도 더 위대한 인생을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물이라는 우상에 매여서 초청에 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성경에는 그 청년의 이름은 등장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 청년은 가진 재물을 갖고 50-60년 편하게 살다가 그 인생은 끝났을 것입니다. 영생을 얻지 못한 채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가진 것이 많지 않았지만 과감하게 버리고 주님을 따라서 기독교 역사에 우뚝 서는 위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과 더불어 백성을 다스리는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초청이 있을 때에 우상에 매어서 부자 청년처럼 주저앉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떤 분에게는 그 초청이 특정한 사역에로의 초청일지 모릅니다. 목자나 대행 목자가 되라는 초청일지 모릅니다. 아니면 목회자나 선교사가 되라는 초청일지 모릅니다. 어쩌면 가진 물질을 주님을 위하여 크게 바쳐보라는 초청일지 모릅니다. 이 초청 앞에서 부자 청년처럼 주저앉지 마시기 바랍니다.
Jim Elliot이라는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1950년대에 Wheaton 신학교에 다니던 학생이었습니다. 키도 크고 잘 생기고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는 학생이라 목회자가 되어 훌륭한 목회를 할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신학교를 졸업한 후에 그는 목회 대신에 에콰도르 선교사로 자원하였습니다. Auca 라는 미전도 종족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호전적인 종족입니다. 그래서 방문하기 전에 호감을 얻기 위하여 경비행기를 타고 부락 위를 나르면서 생활 필수품을 떨어뜨려 주었습니다. 1년쯤 된 후 1956년 1월 6일 Jim Elliot과 세 친구 선교사는 Auca 부족이 사는 마을 근처 바닷가에 착륙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1월 8일 이들은 창에 칼에 난자 당하여 죽은 상태로 발견되었습니다. Jim Elliot의 인생은 낭비되었을까요? 아닙니다. 그의 삶과 죽음은 신혼에 남편을 잃은 Elizabeth의 글을 통하여 수많은 사람에게 알려졌고 이를 읽고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선교사로 자원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Jim Elliot의 일기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발견되었습니다. "He is no fool who gives what he cannot keep to gain what he cannot lose" "영원히 남을 것을 소유하기 위하여 영원히 쥐고 있을 수 없는 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절대 바보가 아니다." 우리의 우상은 모두 다가 영원히 쥐고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초청이 있을 때에 부자 청년처럼 영원히 쥐고 있을 수 없는 것을 위하여 영원히 남을 것을 포기하지 아니하고 Jim Elliot처럼 영원히 남을 것을 위하여 영원히 쥐고 있을 수 없는 것을 포기하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직도 부족한 것
마 19:20-26 / 박지온목사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아직도 부족한 것 그렇게 제목을 삼았습니다. 일본에서 전철에 죽을 아이를 살리고 죽은 한국 학생에 대해서 신문에 대대적인 그런 홍보도 있고, 일본인들도 너무 감격해 하고 이렇게 했던 사실을 보게 됩니다. 또 그뿐 아니고 한국에서도 종종 그런 일이 있죠. '생명을 대신해서 죽었다!' 이래가지고 굉장히 감사하고, 전 국민들이 추앙하고 추모하는 이런 것들을 보게 됩니다.
저는 이런 것을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어요. 그건 당연하죠. 만약에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데, 구체적인 예를 든다면 물에 빠졌습니다. 물에 빠져서 죽을 사람은 아니지만, 우리 집 사람 같은 경우에는 물에 빠지면 죽거든요. 물에 빠졌다! 죽게 되었을 때에, 나를 건져주었다! 그러면 그 사람에 대해서 나는 감사할 정도가 아니죠. 내가 '있다!' 그러면 있는 것도 털어서 아마 뭔가 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될 겁니다.
여러분 이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당연한 일인데, 여기에서 '100년도 못살 인생을, 생명을 구원해 주었다!' 그래서 이렇게 감사하고, 이렇게 헌신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그렇다면 100년이 수백 번 와도 못 더함이 없는 영원한 구원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러면, 감사 정도가 아니고, 그러면 헌신 정도가 아니고, 내가 마음을 드린다! 헌신정도가 아니죠. 그래서 이런 축복과 은혜가 여러분, 지금 이 자리에 모여있는 여러분들에게 이 예배 시간을 통해서 우리는 드리고 있습니다. 이걸 가지고 구원의 백성들이 누리는 축복 아닙니까! 지금 뭔가 이 시간에 이걸 아셔야 되죠. '이 영원한 생명으로 구원하신 하나님 너무 감사합니다! 그리고 내게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드리겠습니다!' 이게 예배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그 '헌금한다!' 뭐 이런 것도 다른 게 아닙니다. 이런 배경이에요. 그냥 내가 하나님 앞에 복을 받기 위해서 뭘 한다! 그런 배경이 아닙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축복과 은혜가 나뿐 아니라 온 세계에 나가야 되겠습니다! 이를 위해서 내가 갖고 있는 것 다 드리겠습니다!' 그게 바로 선교이고, 선교헌금이고 그럼 배경입니다. 그렇다면 '돈 벌어야 된다! 뭘 해야 된다!' 이유가 여기에 다 들어가 있는 것이죠.
그런데 이 시간에 그렇게 축복된 역사가 있는데도, 뭐 예를 들어서 내가 뭔가 '나를 죽음에서부터 구원해 주었다!' 그러면 볼 때마다 감사할 것 아닙니까! 나는 볼 때마다 싱긋이 웃음이 나올 것 같아요. 볼 때마다 뭔가 이 고맙고 감사하고, 어떨 때는 괜히 손도 한번 잡고싶고 그렇게 안 되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런 이 세상에 어떤 '생명을 구원했다!' 그런 배경이 아니고, 영원한 생명으로 구원하신 그 하나님! 우리는 볼 때마다 뿐만 아니라 말할 때마다, 생각할 때마다, 부를 때마다 늘 그런 느낌이 와야 될 것 아닙니까!
그리고 여기에 내 인생전부를 드린다! 가정과 내 삶과 내 전체를 드린다! 그게 바로 신앙생활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뭡니까? 예배입니다. 이 회복이 예배예요. 그런데 예배에 나와 가지고 감사하기는커녕 아무렇지도 않다! 내가 내 인생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해준 그 사람을 볼 때에 아무렇지도 않다! 그걸 가지고 '미쳤다!' 그러거든요. 여러분 지금 현재 '구원의 은혜에 대해서 아무렇지도 않다!' 그것은 보통 미친 게 아닙니다. 그건 영적 문제 중에 영적 문제예요. 그러니까 예배시간에 여러분 왔다! 감사할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 정말 이 큰 은혜를 내가 무엇으로 보답합니까! 하나님 앞에 헌신 하리이까!' 이게 나와야 되는 거죠. 그게 나와야 진짜 뭡니까? 진짜 구원받은 자들의 삶이 이게 예배입니다. 이게 회복이 될 때에 여기에 모든 능력이 내 삶에 발산되는 겁니다. 역사가 되는 거죠.
여러분 '예배 회복된다!' 그럴 때는 그리스도 회복 아닙니까! 바로 하나님 회복입니다. 그 인격의 회복입니다. 이게 바로 전부 예배예요. 그리고 내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린다는 속에서 가장 또 예배의 완성과 예배의 정점이라는 것은 드리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은혜 받았으니 내 인생을 드리겠습니다!' 이게 바로 가장 기본적인 것이 헌금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냥 나와서 예배드릴 때마다 헌금 드리는 것, 이것은 예배에 요소보다도 본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계획과 뜻을 따라서, 그 좋은 기쁘신 뜻을, 내 인생을 드리고, 내 삶을 드리고... 그러니 여러분 돈을 번다! 그 다음에 내가 뭘 한다! 전부 하나님의 기쁘신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내 삶을 드리는 이런 배경이거든요. 전부!
가장 기본적인 것이 이제 십일조를 드린다! 우리는 '감사를 드린다!' 그러죠. 우리는 더 나아가서 뭔가 이 세계 복음화에 선교 헌금을 드린다! 그런 전부 배경입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뭔가 우리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할수록 예수 그리스도 내 안에 더 회복이 됩니다. 더 풍성하게 되고, 그러면 더욱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뭐가 나옵니까? 힘이 발휘가 됩니다.
이것을 가지고 우리는 성령의 역사로, 그래서 '목회 할 때에 기도해야 목회가 된다!'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 사회 생활도, 경제 생활도, 말하자면 직장생활도, 어디에도 그리스도가 회복되고 예배가 회복되는 만큼 뭡니까? 힘이 나게 됩니다. 능력이 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는 새 힘을 얻으리니...' 이 배경이 되거든요. 여러분들이 정말 '예배가 회복된다!' 하는 여기에 모든 것이 있고, 예배 회복된다고 하는 그 말이 바로 뭡니까? '복음이 회복된다! 그리스도가 회복된다! 말씀이 회복된다!' 그런 배경 아닙니까!ㄴ
지난주에 '하나님으로는' 어때요? 하실 수 있는데, 어떻게 하실 수 있습니까? 다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는 다 하실 수 있습니다! 눈을 감고 있는 자들에게도 하실 수 있습니다. 다 하실 수 있습니다. 지난주에 어떤 일어났던 사건을 우리교인들이 이제 간증을 하는 것을 제가 들었습니다. 제가 직접들은 것은 아니고, 이제 귀에 들려온 거죠. 평생에 앓던 그런 정신 문제가 있어서, 너무 고통스러워서 시골인데 목사님 청하고 장로님 청해도 전혀 듣지를 않아요. 이 뭔가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친척 되는 대구에 송현교회 우리 교인한테 연락을 했습니다.
이분들 두 분이 집사님 한 분하고, 권사님 하고 갔죠. 갔는데 누워 가지고, '목사도 안되고, 장로도 안 되는데, 너희들이 뭐라고 찾아왔느냐!'고 그 사람이 그러더래요. 그러니까 아마 지금 여기와 계실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제 뭐라고 그러느냐 하면, '목사도 못하고, 장로도 못해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사단은 물러가라! 결박 받아라!' 예배드리고 그랬는데, 그렇게 기도하는데 순간에 나아버렸어요. 떠나버렸어요. 지금 거기는 야단입니다. 보통 일이 아닙니다. 장로도 안되고, 목사도 안 되는데, 평신도가 가서 해버렸으니까! '도대체, 대구 송현 교회 예수는 누구고, 우리 예수는 누구냐!' 안 그러겠습니까!
그걸 몰라요. 다른 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영적 문제 해결이 안됩니다. 이것을 모르니까! 뭔가 예수 그리스도 이 외에 섞으니까! 힘이 안 나가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게 나오니까 힘이 안 나오는 겁니다. 이 축복의 역사가 어디에 생기느냐?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할수록, 현장에 들어가면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현장에 가서 뭐, '전도된다!' 이게 안 되는데 무슨 전도가 됩니까! 이게 되면 저절로 되게 되어 있는 겁니다. 내가 예수로 충만해 지니까,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충만해 지니까, 내 안에 나와 함께 계시는 그분이 내가 가는 곳에 뭐냐? 역사가 나와 버렸습니다. 그러면 거기서 전도도 나가게 되고, 여기서 응답도 나오게 되는 것이고, 여기서 모든 것이 나오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중요한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가난이나 질병, 이것은 또 고통이나 어려움 통해서 여러분 교회 나오고, 구원받는 동기가 됩니다. 지난주에도 말씀했습니다 만은, 가난하고, 또 병나게 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뭐가 아닙니까? 목표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소원이 아니고, 목표가 아니에요. 그러나 하나님의 목표는 다른데 있어요. 그런데 그것을 이루자니까, 도대체 안 돼! 이게 깨닫지를 못한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그런 목표와 계획을 볼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해준 것이, 그게 가난이요, 질병이요, 고통일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가난하고, 질병이 오고, 고통이 올 때에 뭘 봐야 됩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이 있느냐? 하나님 계획을 볼 수 있는 눈만 열려버리면 해결되는 것 아닙니까! 그 일이 빨리 이루어져야죠.
그런데 여러분 조금 더 들어가서 뭐냐하면, 가난이나 질병이나 고통이나 이런 모든 배경들은 엄격히 말하면 그 출발점이 하나님이 아니고 누구입니까? 창세기 3장입니다. 창세기 3장이에요. 그러니까 우리에게 실패하게 하는 배경이 창세기 3장이에요. 그래서 가난하게 만드는 배경이 창세기 3장입니다. 그래서 질병이 오게 되는 배경이 창세기 3장입니다. 고통 하게 하는 배경이 창세기 3장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아셔야 될 것이 창세기 3장만 해결되면 뭐가 됩니까? 질병, 가난, 고통 해결되는 겁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누구를 보냈습니까? 하나님이 친히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 그랬습니다. 그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게 될 때에, 여러분과 저는 그 영적인 문제들이 해결되고, 모든 고통과 괴로움에서부터, 재앙에서부터 해방 받는 참 생명의 역사가 시작이 됩니다. 요한 복음 1장 12절입니다. 이런 축복을 받은 자들이 모여서, 이 축복을 주신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미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이것을 예배라 그럽니다.
지금 여기에 모인 분들이 그냥 모인 분들이 아닙니다. 이 축복과 은혜를 알고 깨닫는 자들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삶으로 이어가는 삶을 우리는 신앙생활이라 그럽니다. 예배 생활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뭐냐하면, 우리가 이 삶을 이어가고, 이 축복의 역사를 이어갈 수 있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셨는데, 그게 뭐냐하면 언약했습니다. '주일날 몇 시에 모여라!' 이게 가장 기본적인 예배의 언약이거든요. 예배의 언약은 다른 게 아닙니다. 그 언약을 확인하고, 그 언약은 바로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확인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하는 그런 시간입니다.
그 다음에 이 축복의 시간을 통해서 우리의 개인과,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삶이 전부 뭡니까? 예배 화되어집니다. 생각도, 느낌도 바로 오직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 다음에 생각도, 느낌도 주께서 원하시는 뜻과 계획을 따라 갑니다. 그 일을 위해서 내 인생을 드리려고 하는 모든 것! 그렇게 될수록, 그런 내가 되어질수록, 현장에 가는 곳마다 원수의 세력이 깨어집니다. 여러분 잘 아셔야 합니다. 원수의 세력이 깨졌다! 쉽게 말해서 조금 전에 말씀한 것처럼 정신적인 이상이 왔을 때에, 그 문제가 평생 해결되지 않는 그 문제가, 내가 갔을 때에, 그리스도 이름을 불렀을 때에, 해결되었다는 것은 바로 뭘 이야기하느냐? 흑암에 세력이 떠나갔다는 것뿐만 아니라, 실패가 해결 된 겁니다. 좌절이 해결된 겁니다. 또 더 나아가서 질병이 해결된 겁니다. 모든 기도의 응답이 거기에 나오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이해가 된다 그러면 '왜, 실패하느냐? 왜, 어려우냐?' 답은 하나입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 새 힘을 주시느니라!' 여기서 모든 것이 풀어지게 되고, 또 여기서 모든 것이 해결되게 되는 겁니다. 이 축복과 역사가 바로 여러분과 제게, '내가 예수 그리스도 영접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린다!' 그런 정도가 아니고, 예배드리는 동안에, 예배드리면서 우리 스스로가 예수로 충만하게 되고, 이 예배드리는 동안에 뭐합니까? 그 예수로 충만하게 되면 사실적인 증거가 뭡니까? 성령으로 각 심령 위에 임하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이 순간에 성령으로 임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축복과 은혜를 가지고 나가는 순간 우리의 현장에서, 여러분이 가는 곳곳마다 실패하게 하는 창세기 3장의 문제가 떠나가게 됩니다. 고통 하게 하는 모든 창세기 3장의 문제가 떠나게 됩니다. 해방 받았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 인생이 해방 받게 됩니다. 여러분의 모든 삶이 해방 받게 됩니다. 이 축복과 역사 속에 여러분을 세우셔서 이 일에 증인으로 삶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일에 지금현재 엄청난 축복과 은혜를 이루도록, 세계를 품는 교회를 건축하는 일에 세웠다! 그래서 저는 세계를 품는 교회를 건축한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제 여러분들이 뭐 '교회 건축하는 것이 축복이다! 은혜다!' 그저 말로만 하지말고, 교회를 건축하는 축복이 아니고, 말로만 하면 축복이 아니라 고통입니다.
여러분 보셨죠. 이 3500평되는 교회를 건축하려고 그러면 돈이 엄청나게 들어가야 돼요. 아마 오늘 보시면서 '저게 축복이다!' 그런 사람보다도 '큰일났구나! 저 돈을 누가 다 대노!' '축복이다!' 그러다가 축복에 눌려 가지고 답답한 사람들이 아마 더러 더러 많이 있을 줄 압니다. 여러분 그걸 아셔야합니다. 그게 축복이다라는 사실이 내 것이 되고, 내 축복이 되려고 그러면 여러분이 실제로 그 축복 속에 들어가야 됩니다. 그러면 뭘 말하느냐? 교회를 지을 때에 저 엄청난 돈을 내가 어떻게 하느냐? 엄청난 돈도 뭐 있든지, 말든지 간에 여러분 작정헌금이나 빨리 내면 돼요. 그럴 하루빨리 낸다! '하나님, 내가 이것을 낼 수 있는 힘도 주시고 은혜도 주옵소서!' 그게 뭡니까?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이 일에 영적으로 참여해 버립니다. 그러면 그건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하나님, 은혜 주옵소서!'
그래서 나는 그 예루살렘 성전 건축할 때에 다윗에게 주셨던 물질적인 풍부가 엄청나거든요. 짓고 난 후에 솔로몬에게 주셨던 것도 금이 돌덩이처럼 여겨졌을 정도니까! 풍부하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먼저 이 교회 건축하기 전에 개인교회, 가정교회, 직장교회 그랬습니다. 아마 교회 건축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여러분 조금만 정시기도를 하고 있는 사람 같으면 영적인 축복이 회복 될 겁니다. 죽어도 안 하거든요. 결국 안 하니까 안 되는 겁니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조금만 하시면 역사가 나옵니다. 영적 문제가 회복이 됩니다. 조금만 기도하게 되면...
그래서 여러분 교회 건축이라는 제목을 두고 여러분 걱정하고 눌릴게 아니고, 생각과 느낌이 오는 데로 뭐 하라 그랬습니까? '걱정을 기도로 바꾸어라!' 그랬습니다. 그 다음에 이걸 구체적으로 뭔가 내가 시간을 내어 가지고, 이 문제가지고 조금만 여러분 기도하면요. 교회가 건축된다는 것 전에 약속하신 그대로 누가 건축됩니까? 내 영적인 회복입니다. 내 가정에 교회가 건축이 회복됩니다. 그래서 아마 여러분 가정교회 건축! 그랬는데, 가정예배도 구체적으로 한번 드려보세요. 드리면서 구체적으로 교회 건축 위해서 가정에서 기도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회복하실 겁니다. 먼저 영적으로 엄청난 축복이 옵니다.
그러니까 이런 하나님이 아니시라 그러면 우리가 교회 건축할 필요가 없잖아요. 그리고 이 교회를 건축해서 이런 이 하나님을 우리는 말해야 되겠다! 세계 복음화 아닙니까! 이 일에 우리가 눈이 열려야 구체적으로 여러분 사명도 생길 뿐 아니고, 건축해야 될 이유도 생기고, 건축한 이후에 신앙생활이 바로 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아니면 '내가 교회 건축했다! 우리교회 바라! 크다!' 이래봐야 아무것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오히려 뭡니까? 사단이 '봐라!' 그리고서는 교만만 커지고, 다른 것만 잃게 돼요. 여기에 조금만 이런 부분이 해결되게되면 엄청난 하나님의 축복과 역사가, 여러분 말로 아니라 사실적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믿습니까! 진짜 믿습니까! 눌리는 게 더 많은 것 같은데...
그러면 '예배에 성공한다!' 그러면 실제로 이 점을 알아야 합니다. 현장에 들어갈 때마다 이 일이 성공되어지며, 현장에 들어갈 때마다 승리하게 된다는 사실은 간단한 사실입니다. 왜? 내가 예배에 성공하고, 영적인 힘을 얻을수록 절대로 목회가 기도해야 되고, 목회가 뭔가 하나님 앞에 은혜를 입어야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 그건 알아요. 그런데 '내가 직장에 들어가서 사업을 하는데도 은혜를 입어야 된다!'는 생각은 별로 안 하는 것 같아요. '수단 써야 된다!' 그리고 이건 '속여야 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고, 그리고 '적당히 잘 방법을 추구해야 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똑같이 여러분 믿는 자들에게는 현장에 들어갈 때에 은혜를 입어야 됩니다. 누가 복음 10장 19절에 보면, "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자꾸 지하철 헌금하려고 그러니까, 자꾸 지하철 말이 안 나옵니까! 여러분 솔직히 말해서 이 대구에 지하철 같은 사고가 이 땅에 일어난 적이 역사에는 거의 없어요. 거의 없는 것이 아니고, 나는 못 들어봤어요. 하기야 옛날을 못살아 봤으니 못 들었는지 모르지만, 이런 게 없어요. 서울에 그렇게 지하철 돌아다녀도 대구 같은 지하철 사고 안 나왔어요.
이상하죠. 대구는 지하철 생기자마자 몇 백 명씩 죽는 사건이 벌써 몇 번입니까! 하여튼 대구는 '지하철 사고났다!' 그러면, 몇 백 명이에요. 여러분 한번 들어보세요. 엄청난 문제들 아닙니까! 지금 나는 일일이 그 일어났던 한사람, 한사람들의 대화하는 내용을 들으면서 진짜 눈물 흘려질 정도가 아닙니다. 너무 비참하니까 눈물이 안 나와요. 분노가 나와요. 오히려 무슨 이런 일이... 그게 우리가 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한 것이 아닙니다. 그 배경이 누구라고 믿습니까? 진짜 그렇습니까! 막 말로 해 가지고 우리 교인이 거기에 몇 명만 탔더라도 그 일이 안 생깁니다. 이 말하니까 좀 이상하게 생각하는지, 그냥 비웃음인지, 아니면 이 즐거운 웃음인지 모르는데...
여러분 확실히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왜?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자녀로 내가 섰을 때에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통해서 뭘 해야 됩니까? 세계를 바꾸어야 됩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세계 바꾼다!' 그런 부분이 아니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주의 성령으로 충만해 졌을 때에, 내가 현장에 가면 실패하게 하고, 고통 하게 하는 뭐가 역사가 안됩니까? 흑암이 묶이게 됩니다. 사단의 역사가 묶이게 되는 것 아닙니까! 정신이 이상한 그 현장에 갔을 때에, 내가 힘이 있어서 아닙니다. 내가 가는 곳에 예수 이름으로 나갈 때에 뭡니까? 고통 하게 하고, 괴롭게 하고, 그 영혼을 아프게 하는 뭡니까? 흑암이 묶였습니다. 여기에 승리가 있습니다.
이 모든 문제가 터지고, 모든 사건이 터질 때에 바로 거기에 그걸 아셔야 합니다. '내가 거기에 없어서 그렇구나!' 그 말이 뭡니까? '복음을 전하지 못해서 그렇구나!' '내가 거기 가서 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말씀하면 다 해결된 문제인데... 이것이 안 되었구나!' 왜? 이 말씀을 전할 때에 왕으로 오시고, 선지자로 오시고, 바로 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지금 이문제 위해서, 이 사건 위해서, 이 땅에 몸을 주셨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마다 구원을 얻는다!'고 약속했습니다. 안 믿고 안 불러서, 안 믿고 기도 안 해서 그렇죠.
이 사실을 믿고 조금만 움직이면, 하나님께서 엄청난 기쁨과 감사로 거기에다가 당신의 뜻을 다 이루는 겁니다. 이를 위해서 세웠다! 모든 축복과 역사가 여기서 이루어진다! 그 이야깁니다. 여러분 우리가 '교회를 건축한다!' 그런 배경 정도가 아닙니다. 여러분 '교회를 건축한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교회 건축하게 하는 과정, 배경이 뭡니까? 세계 복음화! 거기에 선교, 거기에 전도, 하나님의 계획이 거기 다 있습니다.
이런 기쁘신 뜻을 하나님이 이루어 나가실 때에, 여기에 모든 축복과 역사가 약속이 되어있고, 그 약속과 역사가 구체적으로 이루어 가시는 사실에 여러분과 저를 세웠다는 것을 비로소 뭐가 됩니까? 깨달을수록 감사가 나오는 겁니다. 깨달을수록 뭐가 나옵니까? 증거가 나옵니다. 깨달을 수록 뭐가 됩니까?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한번 체험하면 한번 체험할수록 '야, 나는 못할 줄 알았는데, 나는 아무것도 아닌 줄 알았는데, 이 박지온 목사만 가서 될 줄 알았는데...' 아니거든요 여러분 가도 돼요. '박 목사만 가면 될 줄 알았는데, 내가 왔더니 된다!' 됩니다! '나는 예수 믿은 지가 얼마 안되었는데...' 됩니다! 누구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바로 여러분과 제가 지금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할 때마다, 그 이름 부를 때마다, 바로 그 현장에 흑암에 세력은 깨어지고, 실패하게 하는 모든 문제들은 떠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주일성수라는 것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죠. 이것을 맛보면 맛볼수록, 이 순간이, 이 날이 모든 문제 해결하는 뭡니까? 기초가 됩니다. 바탕이 됩니다. 이것이 되어지면, 체험이 되어지면 되어질수록 여기에 뭐가 나옵니까? 헌신이라는 것은 저절로 나옵니다.
여러분 나의 생명을 구원해준 사람을 위해서 점심 먹으러 갔다! 밥 한끼 사먹었습니다. 사먹을 때에 가만히 앉아서 얻어먹는 사람은 아마 세상에 없을 겁니다. 혹시 그 사람이 돈을 낸다 그러면 생명을 걸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안 그렇습니까! 멱살을 걸머지고, '돈 내가낸다!' 그러고 나갈 겁니다. 여러분 이 축복의 역사가 체험될수록 하나님의 교회에 올 때에, '주여, 이 일을 우리가 해야 됩니다!' 이 사실이 세계에 이루어져 나가야 됩니다. 그렇다 그러면 뭡니까? '주여,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드리겠습니다! 헌신하겠습니다!' 그게 헌금 아닙니까! 저절로 되는 겁니다. 헌금에 수준 따라서, 그 사람의 신앙 생활의 수준이 저절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삶이 이루어지게 되면, 이 시간에 메시지 듣는 시간에 눈감고 앉아서 들을 수가 없어요. 한번 받아합시다. "예배가 안 된다는 것은 사단의 짓이지, 내 일이 아니다!" 그렇게 여러분 예배가 안 된다는 것은 사단의 짓이죠. 그리고 아무리 포근하고 편하지만, 예배 시간에 눈이 감기게 하는 것은 사단의 역사지, 내 역사가 아닙니다. 사단의 역사를 빨릴 해결해야 돼요. 안되면 결국은 뭡니까? 사단은 망하게 하기 위해서 들어오고, 실패하게 하기 위해서 들어오고, 궁극적으로 죽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서 들어갑니다. 계속 놔두면 죽어요, 살아요? 그래서 내가 예배시간에 졸고 있는 사람을 안 놔둡니다. 한사람만 내 눈앞에 띄어도 꼭 자꾸 제가 건드리는 이야기가 바로 그거예요. 들어오는데, 그걸 뻔히 알고 있는데...
그런데 또 기술적으로 졸고 있는 사람이 있어요. 눈 뻔히 뜨고 졸더라 구요. 도리 없지, 어쩝니까! 그러나 분명히 아실 것은, 여러분 지속적으로 이 축복과 사실을 놓쳐 버리게 되면 뭐가 됩니까? 재난이 옵니다. 그러니 예배가 안된 사람은 시간이 멀지 않습니다. 얼마가지 않으면 문제가 오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또 핑계대지 말아요. 반드시 올 대는 또 핑계거리가 와요. 사단의 역사입니다. 정말 그런 문제 오거든, '주여, 알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회복하십시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 부르고, 조금 하나님 앞에 기도해 보세요. 내게 축복과 은혜가 오히려 저주로 나오게 되는 이런 모든 문제가 바로 이 사단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옛말에 그런 말이 있잖아요. "꿈보다 해몽이 중요하다!"고 설교보다 뭐가 중요합니까? 설교를 해석하는 여러분, 받는 사람이 더 중요합니다. 오늘 여기 목사가 와서 설교한다! 말씀가지고 할 것 아닙니까! 말씀을 받는 순간, 순간 여러분 믿음에 따라서 그 설교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받고, 어떤 사람은 저렇게 받습니다. 받는 데로 됩니다. 받아합시다. "내 믿음대로 될지어다!" 할렐루야! 축복으로 받으면 믿음입니다. '목사님이 어떻게 나를 알고 나를 치냐!' 그러면 그것은 치는 걸로 받아들이고, 자기가 그렇게 믿었으니까! 안됩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을 들을 때에 정말 중요한 것! 그래서 여러분 예배에 성공하는 가장 첫 번째 조건이 뭐냐하면, 말씀입니다. 강단의 말씀과 나와 현장관계가 이루어지게 되는 이런 눈이 떠져야 합니다. 말씀이 구체적으로 내게 이루어진다! 그것은 기본적인 역사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이 지금 내게 들려지는 순간에, 내가 그 말씀을 응답으로 받는 순간에, 현장과 연결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현장이 계속 연결되는 동안에 지속이 되어집니다. 그러면 여기서 나오는 것이 뭐냐하면, 기도 아닙니까!
그러면 그때마다 생각대로, 내가 생각하는 순간순간 마다 나도 모르게 생각을 계속하면 걱정이 됩니다. 걱정은 뭐로 통해서 옵니까? 생각을 통해서 오는 것이죠. 마태복음 11장 28절에 이후에 그것은 뭡니까? 생각을 통해서 옵니다. 그래서 성경에 뭐라 그랬습니까? 기도의 응답을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여러분 지금 어떤 생각이 나옵니까? 그 생각 자체가 벌써 기도입니다. 그 생각이 기도와 연결되면 전부 뭡니까? 응답으로 나옵니다. 역사가 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그런 생각과 그런 마음으로 현장에 갈 때마다 현장을 말씀대로 성취되는 눈이 열리게 됩니다.
그러니까 '합리성이다, 뭐다!' 이게 되면 합리성은 저절로 나오게 되는 겁니다. '전문성이다!' 저절로 나오게 됩니다. 내가 어떤 사건을 뭐 어떻게 보느냐? 거기 전부 응답이 나오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이때부터 뭡니까? 여러분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 뭐냐? 이것이 자연적으로 분석이 되죠.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한 명 영혼이 구원받는 문제!' 그걸 쉽게 말해서 '전도와 선교!' 그래서 여러분들이 뭐냐하면요. '세계 복음화'라는 생각만 가졌다! 하나님이 펄쩍 뜁니다. 아마 우리 교회에 여러분을 향해서 이 시간 펄쩍 펄쩍 뛸 겁니다. 너무 좋아서 왜? 너무 여러분을 기뻐하시거든요.
성경에 보면 말씀이 누가복음 15장 7절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죄인하나 구원받는 것, 돌아오는 것, 해방시키는 것! 이건 뭐 엄청나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이런 상황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5장에 쭉 나오는 비유들이 안 있습니까! 드라크마의 비유라든가, 양 100마리 비유라든가, 그게 뭡니까? 드라크마를 잃었다가 하나 찾는 것, 그 다음에 양 100마리 잃었다가 한 마리 찾는 것, 여기에 모든 기쁨을 집중 시켰어요. 하나님이 진짜 기뻐하는 것! 이 문제라 그랬습니다.
무슨 말이냐? 여러분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 백 번, 천 번 여러 가지 한다 그래도, 예를 들어서 영혼구원과 관계없는 일 아무리 많이 한다 그래도 하나님 돌아섭니다! '많이 해 봐라!' 부자가 바로 그런 이야기입니다. '내가 많이 했습니다. 다 했습니다!' 아닙니다. 바로 영혼구원의 문제, 온 천하를 얻어도 비교가 안 되는 한 영혼의 구원문제! 바로 그게 선교와 전도입니다. 여기에 교회가 맞추었다, 개인이 맞추었다, 여기에 적은 마음만 드려도 하나님이 여러분 하는 사건과 일들마다, 마음만 가지고 해도 기뻐하시는 정도가 아니고 모든 축복과 역사가 연결됩니다.
그러니까 전도하면 복을 받는다! 뭐, 선교하면 복을 받는다! 그런 배경이 아니고, 전도와 선교를 하나님이 너무 좋아하시니까! 이게 이 땅에 주님이 오신 목적이요, 하나님의 계획이요, 세계 복음화에 하나님의 거룩하신 계획이요! 여러분과 저를 여기다가 세웠기 때문에 여기에 모든 축복과 역사가 약속된 겁니다. 그래서 오늘 교회를 건축한다! 그런 배경 이전에 이런 어떤 배경가지고, 여러분들이 정말 하나님이 이 일에 '우리 자신을, 우리 마음을, 우리 생각을 헌신할 수 있도록 해 주옵소서!' 이 사실 자체가 이루어지게 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통해서 '내가 뭘 한다!' 그 말이 아닙니다. 내가 뭐 '착한 일했다!' 그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늘 부족한 것이 뭐라 구요? 늘 부족한 것이 예배입니다. 가는 곳마다 앉는 곳마다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순간, 순간 우리가 예배가 회복되는 순간, 아직도 부족한 것이 있다면 예배입니다. 또 예배드리고, 또 하나님을 바라보고, 또 주님을 바라보고, 그래서 또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 부르고, 또 주님 앞에 나가고 아직도 부족한 것! 그 말은 바꾸어서 아직도 충만한 것,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 부르고 현장에 가는 곳마다, 현장에 갈 때마다 거기에 모든 성공과 축복과 부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왜? 흑암 권세가 떠나가게 됩니다. 거기에 죽음과 멸망이 떠나가게 됩니다. 이 사실을 이웃에게 말하고, 이 사실을 세계에 말하는 것을 전도와 선교라 그럽니다. 여기에 우리의 모든 것을 맞추어 나갈 때에,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기뻐하십니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는 교회를 건축할겁니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 삶을 하나님 앞에 드릴 것입니다. 영 육간에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쁨으로 가야 할 길
마 19:23-26 / 이정익목사
본문은 천국에 대한 말씀입니다. 마 19장 내용은 예수께서 이제 점점 예루살렘으로 가까이 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삶의 내용과 관심의 내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1장에 가서 예수님 일행은 마침내 예루살렘에 입성하게 됩니다. 그때 한 젊은이가 예수께 와서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젊은이가 영생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기특한 일입니다.
예수께서 그 젊은이에게 그러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그 계명은 제 5계명에서 10계명까지 계명들을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그러자 이 청년이 “그것들은 이미 다 지켰다”고 대답했습니다. 참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보시기에 참 기특하게 보였을 것이고 또 한편 당돌하게 말하는 젊은이에게 뭔가 깊은 뜻을 가르쳐 주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젊은이에게 예수님은 한 가지 더 행하라고 강조하셨습니다.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 그러면 하늘에서 큰 복이 임하리라, 그리고 나를 따르라”(21). 그런데 본문은 이 젊은이가 재물이 많아서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보면 후에 그 젊은이가 예수께 다시 찾아왔다는 말이 없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고 한참동안 묵상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진정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진정으로 귀한 것은 무엇인가,” 구약성경의 중심은 장차 세상에 예수께서 태어나실 것임을 예고한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중심은 그 예수께서 드디어 세상에 오셨고 오셔서 죽으셨고 부활하셨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강조점은 “그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영생을 얻고 천국을 얻을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 약속이 복음입니다. 이 길을 만들기 위해서 예수께서 오셨고 죽으셨고 영생을 천국의 길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가지고 있는 물질 때문에 이 영생을, 이 천국을 포기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보다 쉬우니라.” 여기 부자는 누구입니까. 다음의 부류의 사람들일 것입니다.
하나는 돈이 많은 사람입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영적생활이나 천국이나 영생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돈 많은 사람은 돈을 관리하고 더 늘리려고 골몰하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먼 훗날, 미래, 영생, 천국에 관심 둘 여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돈 많은 사람은 천국가기가 어렵다는 말입니다. 또 현실에 집착해 사는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오늘 사람들은 대부분 현실에 집착해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에 대해서 추구도 준비도 존재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또 하나는 무관심입니다. 도무지 관심이 없고 개념조차도 없습니다. “한번쯤 진지하게 생각해볼게” 그런 자세도 없습니다. 이 무관심은 참 불행한 마음입니다. 천국이나 영생에 관심이 없으면서도 그것을 부정하는데는 또 아주 강렬하고 확신이 있습니다. 그러니 천국에 가겠습니까. 그래서 천국가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또 지식입니다. “나는 지식인이다“ 이것이 문제를 일으킵니다. 자신이 지식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애써 천국이나 영생이나 예수 그리고 부활을 부정합니다. 그런 것을 부정해야 지성인이라고 생각하는 풍조가 이 땅에 있습니다. 그래서 지식인이라고 자청하는 사람들은 무신론적인 글을 쓰고 무신적인 사상을 피력합니다. 말하자면 이런 사람들이 모두 오늘 이 시대의 부자들입니다. 이런 부자들은 천국가기가 어렵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어려우냐 하면 약대가 바늘귀 통과하기만큼 어렵다고 했습니다. 구멍이 작아서가 아니고 무관심 때문이고 철저하게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오늘 현대인들은 이런 의미에서 다 부자들 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여기까지는 우리들도 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길을 잘 압니다. 그런데 그 다음 예수님이 가신 부활의 길, 천국의 길은 새로운 길입니다. 그 새 길을 예수님이 보여주셨습니다. 새 본을 보이신 것이고 새 길을 개척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생전에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모로 길이 되십니다. 신앙의 길이 되시고 인생의 길도 되시고 의의 길도 되십니다. 더 중요한 것은 내세의 길이 되신 것입니다. 내세의 길은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들이 죽은 후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되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 길을 예수께서 스스로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성경에 밝히 기록해 주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 길은 참 중요한 길, 아주 중요한 문제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중요한 길이 오늘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가 없는 길이 되어버렸습니다. 오늘 천국은 별로 인기가 없는 시대입니다. 천국은 아주 먼 미래에 훗날에 기왕이면 있으면 좋은 곳으로만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별로 인기가 없는 것입니다. 인기가 없기는 신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을병이라도 들면 모두 천국가게 되어서 축하를 하고 본인도 자랑스럽게 생각을 해야 하는데 병들면 한사코 가기를 싫어하니 얼마나 인기가 없는 곳입니까. 오늘 사람들이 관심 있는 것은 오직 오늘 현실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예수님은 “부자는 천국에 가기가 어렵다”는 말씀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정곡을 찌르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 천로역정을 읽었습니다. 신학교 때 읽고 오늘 40년 만에 다시 들고 읽어 보았습니다. 천로역정은 17세기에 살았던 존 번연이 쓴 고전입니다. 이 천로역정은 구원론을 중심해서 기독교의 신학, 실천, 교리와 체험을 통해서 얻어진 경험들은 우리에게 준 교훈서이고 고전입니다. 그래서 이 책이 오늘까지 성경 다음으로 사랑받고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거기 보면 한 크리스천이 천국을 향하여 가는 도중에 경험하는 과정을 그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 크리스천이 일생을 살고 더 나은 세상인 천국을 향해 갑니다. 이 여행자가 여행과정에서 여러 인물 만납니다. 여러 장소를 거치고 여러 사건을 경험합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역경을 거치면서 마침내 천성에 도착하여 영화롭게 되기까지 삶의 체험을 그림처럼 드라마처럼 묘사한 책이 천로역정입니다. 이 주인공이 천성을 향하여 가는 동안 여러 가지 기독교 교리들을 경험합니다.
회심
회심은 한사람의 불신자가 신자 되는 관문입니다. 한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과정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4영리를 한번 읽어주고 10여분 만에 예수를 영접하는 기도 따라 하라고 몇 줄 따라 읽게 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이제 구원받았다”고 말해 줍니다. 그리고 그 뒤 그가 어떻게 믿는지 살피지도 않고 내 버려둡니다. 생각해 보면 무책임한 일입니다. 신앙의 성장은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한 알의 씨가 땅에 떨어져 심겼다고 무조건 60배 100배의 결실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씨를 뿌려놓고 그냥 뇌두면 무조건 100배 열매 맺는 것도 아닙니다. 농부들은 그렇게 농사짓지 않습니다. 농부들이 그렇게 농사지으면 몇 년 못가서 망합니다. 씨를 뿌린 농부는 그 후 얼마나 가꾸고 물주고 잡초 뽑고 북돋우고 수고합니까. 그렇게 해서 60배 100배의 결실을 얻는 것입니다. 회심은 씨로 말하면 싹이 나는 것을 말합니다. 씨가 땅에 뿌려져 싹이 나면 자라게 되는데 그냥 싹이 나고 자라는 것 아닙니다. 아기 하나를 낳아보십시오. 그냥 놔두면 저절로 자랍니까? 그 아이가 자라기까지 얼마나 손이 많이 갑니까? 아이는 그렇게 양육되는 것입니다. 천로역정은 한 사람이 참된 회심의 과정에 이르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죄에 대한 깊은 회개와 예수에 대한 깊은 믿음이 있어야 함을 설명합니다. 천로역정 1부 전 체중 10%는 신자가 성경을 읽다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죄짐을 짊어지고부터 좁은 문을 통과해 자기 언덕에서 죄짐을 벗어 던지는 과정까지의 회심과정을 통해서 참된 회심은 철저한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한 사람의 영혼이 회심하는 과정은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천로역정입니다.
성화 즉 성결
성화는 곧 성결입니다. 내가 주님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주님 안에 들어와서 나는 주님을 내 마음으로 영접하였습니다. 그때 주 안에서 내 영혼은 거듭나고 이어서 나는 죄 씻음을 받습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때부터 나는 주님의 뜻을 이루며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나는 그때부터 성결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나는 죄와 그리고 하나님과의 만남을 방해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나는 멀어지기 시작하고 나는 점점 하나님께로 가까워지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 가까워지는 삶이 성결해져 가는 삶입니다. 그 과정을 가는 동안 나는 옛 생활에 대한 동경도 미련도 동시에 갈등도 함께 느끼며 살아가게 됩니다. 예를 들면 담배를 피우던 분들은 그때부터 이 담배 때문에 갈등을 느끼게 됩니다. 끊기는 해야 하겠고 쉽게 끊어지지는 않고 그래서 갈등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끊으려고 몇 번씩 결심도 노력도 하다가 몇 번씩 실패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금연 스토리를 들어보면 별 이야기들이 다 있습니다. 그래서 고민과 갈등과 고뇌를 느끼는 것입니다.
술도 마찬가지입니다. 술을 마시면 죽는다는 말을 듣고서도 끊지 못해서 계속 마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술만 마시면 반 미치도록 주사하는 분들도 그러면서도 못 끊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끊었습니다. 그랬다고 내 안에서 완전히 술의 뿌리가 뽑힌 것도 아닙니다. 내 안에 뿌리는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다가 유사시에 술 냄새나 담배냄새를 맡으면 내 속에서 고개를 들고 일어납니다. 그래서 또 빠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 속에서 이 뿌리가 숨죽인 체 하고 있다가 어느 날 냄새를 맡는 순간 속에서 꿈틀거린 것입니다. 이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영접하고 믿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랬다고 어느 날부터 모든 것이 저절로 탁 끊어지는 것 아닙니다. 이 눈물겨운 투쟁을 거쳐야 비로소 거기로부터 행방될 수가 있습니다. 그 과정이 나를 추스르고 새로 태어나는 과정입니다. 더러운 옷을 깨끗하게 하려면 세탁기에 넣고 하이타이를 풀어 넣고 방망이를 돌려대야 세탁이 되듯이 내가 성결해지기까지 그런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나는 점차적으로 깨끗해지고 예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성결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천로역정을 보면 이 성결의 문제를 심도 있게 보여줍니다. 이 책의 전체분량의 90%는 이 성결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내가 죄를 깨닫고 회개하면 곧 용서를 받습니다. 그렇게 용서받는 것을 칭의라고 말합니다. 이 칭의는 순간 이루어지지만 성결은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천성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천로역정은 한사람의 성도가 성화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다양한 체험의 보고입니다. 많은 고난과 시련을 통해 가면서 점차적으로 영적으로 성장해 갑니다. 천로역정은 성화는 마음으로 한순간 이루어진다거나 회심 후 흔히 방언이나 신유사건이 동반하는 특별한 경험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꾸준히 나를 극복해 가면서 의의 길로 걸어가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목자의 안내
한 사람이 성장하는 과정을 보면 많은 사람의 지도를 받습니다. 태어나서는 부모의 지도를 받고 조금 성장하면 학교 선생님의 지도를 받게 됩니다. 더 성장하면 사회의 지도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사회는 나의 학교입니다. 더 성장하면 친구들의 지도를 받고 배우자를 만나 지도를 받습니다. 또 새 생명을 낳아 내가 성장한 것처럼 그 과정을 거치게 해서 또 다른 인생을 세상에 남겨놓게 됩니다. 그것이 인생이 성장하는 과정입니다. 천로역정을 보면 천성을 향하여 가는 곳 마다 미로가 있어 길을 잃거나 유혹을 받아 엉뚱한 길로 떨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지혜자 즉 목자에게 길을 물어 안내 받습니다. 거기에도 삯꾼 목자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대로 길을 알려줍니다. 안내해준 대로 가다 보면 엉뚱한 길로 가게 됩니다. 목자를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인생의 길에 이 길 안내자가 필요합니다. 크리스천이 천성을 향하여 가는 동안 지혜자의 충고를 받습니다. 주인공 크리스천이 천성을 가는 동안 4명의 목자들을 만납니다. 이 주인공이 가는 동안 목자들은 이 네 가지 조언을 늘 해 줍니다. 그래서 크리스천이 천성을 향해 가는 길을 끝까지 잘 가도록 안내해 줍니다.
오늘 우리도 좋은 목자를 만나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안내자, 충고자, 진정한 목자는 성경입니다. 이 세상에 성경만한 안내자, 인도자, 목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길이 있고 샘이 있고 안내가 있고 나침반이 있습니다.
천국의 목표
주인공 크리스천은 신앙생활 처음부터 천성에 대한 목표의식이 분명했습니다. 가는 도중 때로 희미해질 때가 있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 그때는 그만 포기할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멀리 보이는 천성을 바라보며 힘을 얻고 다시 길을 걸었습니다. 산에 오를 때 힘들 때는 그만 주저앉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눈앞에 보이는 목적지 봉우리를 보아야 합니다. 목적지를 보면 인내하게 되고 힘들지만 또 일어나 걷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인은 가다가 힘들 때, 희미해질 때는 목적지인 천성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크리스천은 결국 천성에 무사히 도착하여 기쁨으로 입성하는 것으로 이 이야기가 끝납니다.
오늘은 너무 현세적입니다. 부와 건강에 대한 관심이 지대한 반면 천국에 대해서 그리고 천국의 영화로움에 대한 기대감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천국과 지옥에 대한 설교도 없어집니다. 본문은 오늘 현대인들에게 천성에 이르는 길이 약대가 바늘귀 통과하는 만큼이나 어렵다고 말씀합니다. 우선 천국에 대한 관심이 희박합니다. 그리고 삶의 우선순위에서 현실에 밀립니다. 그래서 천로역정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신앙생활이나 영적생활 그리고 성결한 생활하기가 어려운 시대입니다. 그래서 다 포기하고 관심도 없고 까맣게 잊고 살아갑니다. 젊어서 처녀 때까지 열심히 이 길을 가던 여성들이 믿지 않는 남편과 결혼한 후 오늘 이 길을 까맣게 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청년 때까지 열심히 이 길을 가던 사람들이 장성해서 사업하느라 바빠서 자주 빠지다 보니 그만 미끄러져 오늘 까맣게 잊고 사는 분들도 있고 입시 공부하느라 빠지다 보니 미끄러져 오늘 까맣게 잊고 사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다시 회복할 노력도 수고도 마음도 없습니다. 굳이 믿는다면 더 있다가 더 늙은 후에 시간이 많을 때 믿겠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영생, 구원, 천국은 그렇게 값싼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 말씀하시기를 “부자는 천국에 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 통과하는 것이 더 쉽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
마태복음 19:23-30 / 이상호 목사(세광교회)
예수님께서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하고 말씀하신 배경은 본문 16절부터 나와있습니다. 마19:16절부터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젊은 율법사가 있었는데, 아마 굉장히 부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찾아와서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그의 생각과 뜻을 아시고, 하나님의 올바른 뜻을 깨닫게 하시려고, 유도적인 질문을 하심으로 대화를 시작하셨습니다. "네가 이러이러한 율법을 아느냐?" 그러니까, 20절에서, "그 모든 율법을 제가 다 지켰습니다." 다른 성경에 보면, "내가 어렸을 때부터 그 모든 율법을 다 지켰습니다." "그런데 무슨 부족한 것이 또 있겠습니까? 나야말로 영생에 들어갈 자격이 있지 않습니까?"라는 대답을 한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건방진 대답입니까? 이런 것을 구제불능이라고 합니다. 누가 감히 예수님 앞에서 "내가 율법을 다 지켰다"고 뻔뻔하게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그 청년을 나무라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 부자청년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시대적 배경과 사회적 편견이 있었던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부자와 가난한 자에 대한 문제를 특별하게 종교적 차원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런 생각이 우리들 마음속에도 자리잡고 있을지 모릅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부자는 어쨌든지 하나님께 축복을 받아서 부자가 된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적어도 하나님 앞에서, 남이 모를만한 의로운 일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부자가 되었다는 이론입니다. 그 증거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부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그걸 반대로 생각해서, 가난한 자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저주를 받아서 가난하게 되었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은 욥기서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래서 문둥병자, 소경, 앉은뱅이를 보면, 불쌍히 여기지를 않고, 저들이 얼마나 죄가 많으면 저렇게 천벌을 받았을까, 하고 멸시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유대 종교인들은 부자는 존경하고, 대우해주고, 가난한 자, 병든 자는 멸시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부자에 대해서 뿌리 깊은 잘못된 신앙적, 종교적, 시대적 편견이 있었습니다.
마 19:21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이 말씀은 네가 율법을 다 지켰다고 말하지만, 너는 온전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무엇이 온전하지 않다는 말일까요? 19절에 있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하신 말씀에 걸린다는 뜻입니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지 않으면서 무슨 율법을 다 지켰다고 하느냐? 그러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라. 그리고 나를 좇으라."하고 명확하게 영생의 길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정말 슬픈 사실은 22절에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한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영생의 길이라면 그까짓 재물이 무슨 대단한 것입니까? 말씀대로 다 나누어주고 오겠습니다." 그랬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근심하며 돌아가니라." 다른 복음에 보면 슬픈 낮으로 심히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그랬습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이 사람은 재물을 선택하고, 영생을 포기해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젊은 부자가 슬픈 얼굴로 떠나가는 뒷모습을 보시면서, 예수님은 엄청난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 같이 23-24절을 읽겠습니다. 23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24절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얼마나 어려우냐?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보다 더 어렵다" 하십니다. 이 말씀은 부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확률이 전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당시 사람들과 똑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던 제자들이 놀라서 물었습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26절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실 수 있을까요?
그렇지요. 하나님이 하시면 간단합니다. 바꾸시면 됩니다. 낙타도 실 같이 만들어서 바늘귀로 통과시키실 수 있는 겁니다. 부자를 가난뱅이로 바꾸시는 건 더 간단합니다. 그러면 성경의 부자가 다 가난뱅이가 되어서 천당갔습니까? 아니지요.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부자가 반드시 물질적 부자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부자는 무엇입니까? 마음이 교만한 자를 부자라고 합니다. 돈이 암만 많아도 마음이 가난하고 겸손하면 부자가 아닙니다. 물론 문자적으로 삭개오 같이 재산을 처분하여 토색한 것을 4배나 갚은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알거지가 되어야 천국에 간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래서 마음을 비워 가난한 부자가 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부자 청년은 물질을 포기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비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어떤 면에서는 다 부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작게 만드시는 중입니다. 얼마나 작아져야 할까요? 바늘귀로 들어갈 만큼 작아져야 합니다. 그 만큼 작아지려면 얼마나 고통이 크겠습니까? 그래도 작아져야만 합니다. 무슨 고생을 해서라도 천국 갈 길이 있다면 가야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영생을 돈주고 살 수는 없습니다. 이것만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필수입니다. 작아지지 않으면 못 들어가요.
어떻게 하면 작아질 수 있을까요?
프로 골퍼들도 어쩌다가 실수를 하게되면, 슬럼프에 빠지게 된답니다. 그래서 평소 자기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아주 점수가 저조하게 될 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럴 때는 다 그만두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기본자세부터 다시 훈련을 쌓아야 회복된다고 합니다. 맨 처음 골프를 배울 때 골프채를 손에 쥐는 것부터 시작하는데, 몸과 발과 심지어는 마음까지, 다시 원점에서부터 시작해서 훈련을 쌓아올려야 슬럼프에서부터 벗어나고, 향상된 점수를 낼 수가 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지금 무언가 잘못되었을 때, 그 잘못된 자세나 잘못된 방법을 그대로 두고서는, 아무리 열심을 내고, 부지런히 연습한다고 해도 되는 게 아닙니다.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자기 자신도 모르면서 무얼 연습한다는 말입니까? 그런 때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기본을 다시 연습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작아지는 훈련입니다. 작아지는 것은 뼈아픈 경험입니다.
특히 야구에서는 이런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9회말 2아웃부터 게임은 시작된다." 게임은 끝나보아야 압니다. 야구를 아시는 분은 9회 말에 2아웃 됐어도 거기서 역전패도 되고, 역전승도 되는 것입니다. 그 때까지는 졌다고 말하지도 못하고, 이겼다고도 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9회말, 2아웃, 그 마지막 시점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시작하는 마음이 작아진 마음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간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실제로 약대를 작게 만들어서 바늘귀로 들어가게 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만일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갈 만큼 작아지게 바꾸려면, 아마 되게 힘들 겁니다. 실제로 약대만큼 큰 부자가, 작아지고 작아져서, 마침내 바늘귀로 들어갈 만큼 작아지게 바꾸려면, 얼마나 심한 고통과 뼈를 깎는 아픔이 있어야 하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이 사람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다는 말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손에 잡히기만 하면, 엄청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때 또 베드로가 나섰습니다. 정말 못 말립니다.
27절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베드로가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습니다." 그랬는데, 이 말은 "저 청년은 못 버렸지만, 우리는 다 버렸습니다." 하고 자랑하는 투의 말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정말 다 버렸습니까? 베드로가 다 버렸다고 큰소리 친 것은 뭡니까? 고기잡이였습니다. 생업이지요.
그러나 베드로가 그 정도라도 물질적인 것을 버렸다고 칩시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나, 영적으로는 버린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마음으로 꽉 차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베드로는 분명히 집을 버렸고, 가정을 버렸고, 직업을 버렸음으로, 다 버린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 공명심을 버리지 못했어요. 정치적 출세욕도 버리지 못했어요. 세속적인 허영도 버리지 못했고, 자기 생명을 버리지 못했어요. 마침내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는 부끄러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다 버렸다고 하는 베드로였지만, 마음속으로는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을 가지고, "예수님으로부터 내가 무엇을 얻을까"하는 생각만 하는 것입니다.
28절: 그러나 그 베드로의 질문의 대답으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12보좌에 앉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 때 제자들이 얼마나 가슴이 부풀었겠습니까? "나도 한 자리 하겠구나." 그러나 주님의 뜻은 달랐습니다. 이들을 12보좌에 앉히려면 바늘귀로 통과할 수 있도록 작아지게 바꾸시겠다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바늘귀로 통과하는 방법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가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늘귀를 통과하도록 작아지는 것이라는 것을 그는 미처 몰랐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얻겠습니까? 하고 엉뚱한 꿈을 꾸었던 것입니다.
29절: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예수님 말씀은 너무나 희한합니다. 버리면 여러 배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죽으려고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나의 것을 포기할 때 받는 것입니다. 부자는 물질의 애착 때문에 영생을 잃어버렸습니다. 바리새인은 자기 의를 내세우다가 구원을 얻지 못했습니다. 서기관은 자기 지식에 맞지 않다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제사장들은 신앙의 기득권을 쥐고 있다가, 예수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 버리면 여러 배를 받는다는 말씀을 기억하세요.
30절 "먼저 된 자로써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써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그 당시 유대인들이나 한국인은 전통적으로 선배가 먼저 진급하고, 후배는 나중에 해야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사회구조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선배가 항상 앞서 간다는 생각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생각입니다. 특히 선배가 반드시 먼저 죽습니까? 신앙의 선배가 반드시 훌륭합니까? 그렇지 않을 수가 더 많습니다. 먼저 된 자란 과연 누구를 가리킬까요?
첫째,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전체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나라를 민족적으로 선택하사, 전 인류의 제사장 나라로 삼으시고,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신정국가를 세우시려고 역사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저버리고 우상숭배를 일삼았으므로 멸망하여 나중 되는 나라가 되었고, 이방나라들은 예수님 때문에 나중에 양자가 되어 천국에 먼저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부자가 바로 먼저 된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당시로 보면, 종교적인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 교법사 같은 사람들은 다 부자였으며, 종교적으로 높임을 받고, 정치적으로도 권세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정치, 경제, 종교, 문화, 모든 면에서 앞서가는 사람들, 먼저 된 자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부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만큼, 의로운 사람임으로 반드시 천국에 들어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중 된 자, 가난한 자들은 죄를 지어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이렇게 불행하게 아무렇게나 살다가, 지옥에나 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부자는 마음만 먹으면 선행을 할 기회가 많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는 먹고사는데 바빠서, 못된 짓도 하고, 도둑질도 하며, 죄와 타협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고, 뭐고, 그런 거 생각할 여유가 없으니까, 되는대로 살다가 지옥에나 가는 게 당연한 걸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먼저 된 부자는 항상 먼저 되고, 가난한 자는 나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태복음 21장 31절에 보면,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예수님께서 당시에 앞서가는 대제사장 바리새인들을 앞에 놓고, 그들이 가장 천하게 여기는 세리와 창기를 들어 말씀하시기를, 세리와 창기가 너희들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바로 먼저 된 자들이 나중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과연 그렇게 되었습니다. 먼저 된 종교지도자들은 백성을 선동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죄인들과 가난한 백성들은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습니다.
셋째, 오늘날 우리를 가리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를 먼저 믿은 우리가 현재에 안주하며 전도하지 않고 나만 편안히 예수 믿고 잘 살겠다는 데에 목적을 둔다면 우리는 나중 될 것입니다. 그래서 묵은 닭, 골동품이 되어버려서 아무 생산력이 없는 한 달란트 짜리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을 차리고 예수닮기를 하여 성장하고, 전도하는 제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가난한 사람은 겸손하기 쉽고, 진실하기도 쉬워요. 교회 나오는 것도 부자가 어렵지, 가난한 사람은 쉬워요. 먼저 된 사람들은 기득권 때문에 예수님을 영접할 수가 없어요. 결국은 나중 되게 되고, 가난하고, 병들고, 신분 낮은 사람들은 마음을 활짝 열고, 예수를 쉽게 영접한 결과, 이들이 먼저 되더란 말이에요.
맺는 말 :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보다 더 어렵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부자는 천국에 절대로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부자는 무엇입니까? 마음이 교만한 자를 부자라고 합니다. 돈이 암만 많아도 마음이 가난하고 겸손하면 부자가 아닙니다. 우리도 어떤 면에서는 다 부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작게 만드시는 중입니다. 우리도 바늘귀로 들어갈 만큼 작아져야 합니다. 그 만큼 작아지려면 고통이 심합니다. 그래도 작아져야만 합니다. 작아지지 않으면 천국에 못 들어가요.
어떻게 하면 작아질 수 있을까요?
기본자세부터 다시 훈련을 쌓아야 합니다. 신앙의 기본이 무엇입니까? 성경 읽고 기도하면 성령이 전도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작아지는 훈련입니다.
우리는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됩시다. 버리면 여러 배를 받습니다. 죽으면 살고, 살면 죽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나의 것을 포기할 때 받는 것입니다.
지식이 있다고 해서 신앙도 함께 있는 게 아닙니다. 돈이 있다고 해서 의도 함께 있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이제부터 9회말 2 Out인데, 누가 그리스도를 영접하느냐? 어떤 자세로 사느냐에 따라서 역전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낙타 타고 바늘구멍 통과하기
마 19:23-26 / 이정선목사
놓친 물고기는 다 크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아쉽다는 뜻이지요. 물속에 돌아다니는 고기를 보고 아무리 커도 아깝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낚시에 걸려가지고 다 잡은 것 같았는데, 내 것이 거의 다 되었는데, 놓쳐버렸단 말이에요. 그러니 내 것을 잃어버린 것처럼 아깝고 아쉬운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그 부자 청년은 놓친 물고기였습니다. 젊은 사람이 구도자로 살아간다는 것부터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이 청년은 영생을 사모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계명을 신실하게 잘 지키고 있었습니다. 조금만 더 다듬고 헌신하게 하면 좋은 제자가 될 수 있는 젊은이였습니다. 그래서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듣고 이 청년이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왜냐하면 돈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청년에게 돈이 많지 않았더라면 다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얼마나 아쉬워하셨겠어요? 그놈의 돈 때문에 괜찮은 영혼 하나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돈이 상당히 중요하지만, 창조주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돈이 얼마나 하찮은 것이겠습니까? 그런 별 것 아닌 돈 때문에 천하보다 더 귀한 생명을 잃게 되었으니 예수님 속이 많이 상하셨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이 이 청년을 가운데 두고 돈과 경쟁을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이 청년을 원하셨고, 돈도 이 젊은이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돈이 이겼습니다. 이 청년이 돈을 선택한 것입니다. 언젠가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
돈에게 아까운 청년을 빼앗기고 나서 하시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이 말씀 속에 아쉬움이 가득 묻어나지 않습니까? 그래도 직성이 안 풀리시는지 한술 더 떠서 말씀하십니다.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얼마나 아쉽고 속이 상하셨으면 그렇게까지 말씀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은 부자들을 적대시하신 적이 없습니다. 부자라는 것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결격사유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 부자 청년은 돈 때문에 영생을 얻는 데 필요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아마도 그 청년의 구도적 삶은 앞으로 더 힘들어질 것 같습니다. 더 고민하고 더 많은 갈등을 겪게 되겠지요.
부자들 가운데 구원을 얻은 사람들도 많습니다. 예수님과 관련된 부자로는 아리마대 요셉이 먼저 떠오릅니다. 그는 예수님의 무덤을 제공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는 가장 가난하게 태어나셨지만 죽어서는 최고의 무덤에 장사되셨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부자였기 때문에 그런 무덤을 제공할 수 있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야에 대하여 예언하면서 ‘그의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사 53:9)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위하여 무덤을 제공하도록 선택된 사람이 구원을 얻지 못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또 구원 받은 부자로는 삭개오도 있습니다. 삭개오가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겠다고 했을 때, 예수님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눅 19:9)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부자 청년과 반대로 삭개오는 돈을 구원 얻는 데 사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돈 많은 것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구약의 대표적인 부자는 욥입니다. 그는 돈이 많으면서도 도덕적으로나 신앙적으로 흠이 없는 온전한 사람이었습니다. 욥에게는 돈 많다는 것이 구원 얻는 데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도 재산이 많았고, 이삭은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거부가 되었다(창 26:12,13)고 했습니다.
이러한 구약의 사상적 배경에서 돈이 많다는 것은 하나님이 복을 주신 것이라고 믿고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시니까, 제자들이 심히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지금 예수님이 천국에 들어갈 사람들을 모으시는데, 천국에 들어갈 사람이 별로 없을 것 같단 말입니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풍유적인 표현으로 봐야겠지요. 액면 그대로 해석해서 부자는 절대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주장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주로 이단들이 그런 식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경우가 많지요.
학자들은 또 나름대로 이 말씀을 연구하고 그 배경을 찾아내려고 애쓰기도 합니다.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간다는 표현이 터무니없는 것이기는 합니다. 낙타가 바늘구멍에 왜 들어가요? 그래서 낙타라는 단어가 밧줄로 대치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낙타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카멜로스인데, 밧줄이 카밀로스예요. 그래서 카멜로스 대신 카밀로스를 쓰면, 밧줄을 바늘구멍에 꿴다는 것이 돼서 상당히 일리 있는 표현이 되거든요.
또 옛날에는 성에 드나들 때 낮에 사용하는 큰 문이 있는가 하면, 밤에 다니는 작은 문이 있는데, 이 작은 문을 바늘구멍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문이 낮아서 사람이 지나가려면 몸을 굽혀야 하는데, 장사꾼들이 낙타를 끌고 밤에 오면 이 바늘구멍을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도 몸을 굽혀야 지나갈 수 있는 낮은 문으로 낙타가 들어가려면 이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낙타를 무릎을 꿇리고 어떻게 끌어서든지 통과를 하려면 무지하게 어려웠을 것 같아요. 그런 배경에서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간다는 말을 들으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돈이 얼마나 많아야 천국에 들어가기 어려운 부자가 되는 걸까요? 제가 알기로 우리 성도들 가운데 자신을 부자라고 생각하는 분은 없을 것 같습니다. 천국 가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 같군요.
그런데 부자인지 아닌지를 누가 결정합니까? 재산이 얼마부터 부자에 포함되는 것입니까? 우리가 스스로 부자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여기서 우리가 사는 정도의 생활수준이면 세계 인구의 상위 10% 안에 들어가는 부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부자입니까? 아닙니까? 저는 한국에 살면서 가난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서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아프리카에 갔습니다. 한국에서 살던 것과 비슷한 생활수준으로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거기서는 최고의 부유층이 되더군요. 거기서 느끼는 갈등이 적지 않았습니다. 우리 장로님 얘기를 들어보면, 옛날에 부산에서 잘 나가는 부자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산의 부자가 서울에만 가면 한없이 작아지더라는 것입니다. 서울역에 내려 대우빌딩을 보는 순간부터 자신이 한없이 가난하게 느껴진다는 거예요. 부산에서는 부자인데 서울만 가면 가난하게 느껴지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에 따라서 부자도 되었다가 가난하게도 되었다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것은, 돈이 우리를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돈에 대한 우리의 마음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마음 먹기에 따라서는 삭개오처럼 돈을 천국 가는 데 도움 되도록 사용할 수도 있으니까요.
예레미야 선지자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간파하였습니다(렘 17:9). 그렇게 부패한 마음과 돈이 만나면 천국에 갈 수가 없습니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묻습니다. 그러면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그에 대한 주님의 대답이 뭔가 보세요.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만지시고 변화시키시면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자기 스스로 노력하고 애를 써서 돈에 대한 욕망에서 벗어나고 돈을 선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기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더 크고 값진 가치를 발견하게 되면, 돈이 구원 받는 데 걸림돌 되지 않게 우리의 마음이 변하는 것입니다. 삭개오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돈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철학을 일러주는 대표적인 말씀을 구약에서 하나, 신약에서 하나 찾을 수 있습니다. 구약의 잠언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 30:8-9). 우리 인간의 삶이 상황과 환경의 영향을 받는 연약한 것임을 인정하고, 그래서 돈이 구원 받는 데 걸림돌 되지 않을 환경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 구약의 철학이 소극적인 대처라면, 신약에서 찾을 수 있는 가르침은 훨씬 고차원적이고 적극적인 대처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고백하지요.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 돈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돈과 상황을 완전히 지배하고 자유로울 수 있게 된 성숙한 믿음과 인격의 상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재물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천국 가는 데 장애가 된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일 것입니다. 그래도 좋다고 그 저주를 껴안고 살면 곤란하지요. 어떤 분이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사업이 잘 안 됐어요. 그래서 새벽기도회에 열심히 나와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그랬던 사업이 잘 되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잘 돼가지고 새벽기도회에 나갈 시간이 없어졌습니다. 어떻게 보면 새벽기도회에 나갈 필요가 없어진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더니 사업이 더 잘 돼서 주일날 교회도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사업 잘 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만일 우리 가운데 일이 너무 바빠서 예배에 참석도 못하고 성경 읽을 시간도 없고 기도할 겨를이 없는 분이 있다면, 정말 정신 차려야 됩니다. 차라리 그럴 바에는 잠언 기자의 말처럼, ‘하나님, 사업이 너무 잘 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아는 성숙한 믿음에 도달했다면,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에게는 얼마든지 재물의 축복을 주셔도 안전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도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이렇게 말했던 욥의 믿음이 우리에게 있다면,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안심하고 무엇이든지 허락해 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모양이든지, 돈이 너무 많아서 포기하기가 아까워서 그렇든지, 아니면 사업이 너무 잘 돼서 하나님께 예배드릴 시간을 낼 수가 없다든지, 재물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게 되는 그런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재물이 많다고 교만하지 않고, 재물이 없다고 비굴하지도 않고, 풍부함에도 처할 줄 알고 비천함에도 처할 줄 알아 모든 일에 자족하며,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요 취하신 이도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으로, 그래서 돈이 아니라 천국을 소유하고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인간의 한계와 하나님의 능력
마 19:23-26 / 임덕순목사
우리는 한 주간동안 날마다 태풍의 피해소식을 들으며 지냈습니다. 이번 태풍의 이름은 매미인데, 순 우리말로, 여름에 시끄럽게 울어대는 매미를 뜻하고, 북한에서 제출한 이름이랍니다. 1999년까지는 괌에 있는 미국 태풍경보센터가 태풍에 이름을 부여했으나, 미국식 이름만 쓸 게 아니라 태풍위원회 회원국 고유 언어로 각각 이름을 제출해서 돌아가며 쓰자고 하여, 1999년 에는 14개국에서 열개씩 제출해서 140개의 태풍이름을 결정했답니다. 한국은 개미, 나리, 장미, 수달, 노루, 제비, 너구리, 고니, 메기, 나비 등 10개를 제출했고, 북한은 기러기, 도라지, 갈매기, 매미, 메아리, 소나무, 버들, 봉선화, 민들레, 날개 등 10개를 내서, 태풍 이름 중 한글이 14%를 넘는다고 합니다. 태풍이 연간 약 30여 개쯤 발생하므로, 이름이 전부 사용되려면 약 4∼5년이 걸린답니다.
태풍이란, 북태평양에서 발생하는, 중심권 내의 최대풍속이 17m/sec 이상인 열대성 저기압을 말합니다. 열대성 저기압은 발생 지역에 따라 이름이 서로 다릅니다. 북태평양 남서부에서 발생하는 열대성 저기압은 태풍으로 부르고 있으며, 북대서양 카리브해에서 발생하는 열대성 저기압은 허리케인(hurricane), 인도양에서 발생하는 것은 사이클론(cyclone), 호주에서는 윌리윌리(willy-willy)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우리가 태풍에 대하여 유난히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태풍의 엄청난 위력에 의한 자연 재해 때문입니다. 중심최대 풍 속이 초속 44m이상인 A급 태풍의 경우, 그 위력은 2차대전 중 일본 나가사끼에 떨어진 원자 탄 1만개의 위력과 맞먹는 것으로 추정합니다. 최근에 발명된 수소폭탄은 원자폭탄의 1,000배 이상의 힘을 가진다고 하는데, 태풍은 그 수소폭탄 100개 이상의 위력을 가진 셈입니다.
풍속이 초속 50m가 넘으면 거리의 가로수가 뿌리째 뽑혀 날아가고 철제 송전탑이 엿가락처럼 휘는 엄청난 위력이랍니다. 그런데 이번 ’매미’는 12일 북제주군 기상대의 풍속계에 초속 60.0m를 기록해서, 지난 2000년 8월31일에 태풍 ‘프라피룬’이 흑산도에서 기록한 초속 58.3m를 뛰어넘었습니다. ’매미’의 기록은 우리나라 기상관측 이래 최대순간풍속 이었습니다. 태풍의 위력을 가늠하는 가장 중요한 수치는 중심기압인데, 중심의 기압이 낮을수록 바람의 세기가 강해지는데, 매미가 12일 밤 경남 사천시에서 기록한 최저 중심기압은 950헥토파스칼로, 1959년 사라가 세웠던 기록인, 951.5 헥토파스칼을 능가했습니다.
일반적으로 태풍은, 일본 오키나와 해상까지 진출하면 세력이 약해지는 게 보통이고, 내륙에 상륙하면 거의 소멸되는 것이 보통인데, 매미는 한반도에 접근할 때까지 세력을 유지했고, 더구나 내륙에 상륙해서도 힘을 잃지 않고 오히려 파괴력이 강해졌습니다. 이것 역시 이례적인 일이랍니다. 매미는 내륙에서도 초속 40m 이상의 강한 바람을 유지했습니다.
이번 매미의 피해는 대단했습니다. 인명피해는 사망 107, 실종 23 명 등 130명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재민은 4,751세대 12,091명으로 집계가 되었고, 재산피해는 4조 7천억원이나 된다고 합니다. 전국에서 주택 등 건물 2천461채가 파손되고, 6천294채가 침수되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단 하루 동안 지나간 태풍인데, 왜 이렇게 피해가 컸을까요?
태풍 자체야 불가항력적인 자연현상이라 하더라도, 단 하루 동안의 비와 바람으로 이렇게 큰 피해가 발생했다는 것은, 우리의 재난대처 시스템에 큰 맹점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무엇보다 정부당국이 다가오는 태풍의 위력과 이에 대한 국민행동 지침을 적시에 알렸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그것만이라도 제때에 이루어졌다면 피해의 상당 부분은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부산항 부두시설과, 항만에 정박한 선박도 큰 피해를 당했습니다. 또 조선소에 묶여있던 대형 시추설비가 밧줄이 끊어져 인도를 며칠 앞둔 다른 선박을 들이받은 사고까지 일어났습니다. 이런 피해들도 사전경고만으로 충분히 방지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경남 마산시의 한 지하층에서는, 밀어닥친 해일로 10여명이 사망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시 당국이 태풍의 위력을 감안해 해일이 일어날 수 있고, 그러면 지하실에 물이 밀려든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알려줬더라면 이 같은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작년에 피해를 본 지역이 이번에 다시 똑같은 태풍피해를 본 지역이 많은 것도 문제입니다.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더라도 피해가 없게 복구하는 것이 아니라 눈가림으로 이전과 비슷하게 꾸며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해마다 재난이 겹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국민들의 자연재해에 대한 경각심 부족도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사항입니다. 강풍을 동반한 태풍이 닥쳐온다는데 승용차를 몰고 태연하게 귀경길에 나선 사람들이 있고, 저지대 아파트 주민들이 아무 의심도 없이 지하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았다가 피해를 당했습니다. 이런 일들은 자연재해에 대한 경계심 해이 라고 밖에 설명할 방도가 없습니다. 우리는 재난에 대하여 아무런 대비가 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세상에 다 드러내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웃나라 일본은 어떠했는지 아십니까? 일본에도 매미가 지나갔습니다. 일본의 남단에 있는 미야코지마 라는 섬에는 9월 11일 오전 순간최대풍속이 74미터나 되는 바람이 불어닥쳤습니다. 거기에도 공항이 있는데 공항 관제탑의 창이 다 박살나서 내부의 관제 기계들이 다 부서졌습니다. 그런데도 그 섬을 비롯한 일본 전체에서 사망자 단 3명밖에 없었습니다. 태풍의 피해를 줄이기 위하여 철저하게 대비하고 대피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와 비교가 됩니다. 일본은 같은 태풍을 맞고도 멀쩡한데 우리는 왜 이렇게 피해가 심각할까요?
최근 홍콩에도 두견이라는 A급 태풍 때문에 초비상이 걸린 적이 있습니다. 두견은 초속 51미터의 강풍을 동반했습니다. 두견은 홍콩에 오기 전에 대만에서 2명의 목숨을 빼앗았고 홍콩을 지나서 광동과 심천을 관통하면서는 20명이 사망했습니다. 그런데 조밀한 도시인 홍콩에서는 단 한명도 피해가 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홍콩의 경우, 태풍이 오면, 시그널 1-10까지 등급을 정해 시민들의 행동지침을 하달하고, 국민들은 철저하게 따른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이번 두견이 왔을 때 시그널 8의 경보를 내렸답니다. 시그널 8의 경보를 내리면, 직장 근무자도 즉시 귀가해야 하고, 식당도 문을 닫고, 학교는 물론 휴교를 하고, 밖에 내놓았던 입간판은 모두 안으로 들여놓고, 주식시장도 휴장하고, 창문은 꼭꼭 걸어 잠그고, 유리창은 파손에 대비해 테이프로 미리 막아두고, 자동차는 버스, 자가용까지 운행이 금지되고, 시민들은 외출을 금지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정부가 지도하고, 국민들은 그대로 따라서 행동하기 때문에 강한 태풍이 강타해도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미국이나 일본도 그렇게 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정부가 있는 나라의 국민들이 재난을 대비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태풍이 온다고, 방송국의 일기예보만 있었을 뿐입니다. 그것도 어떻게 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지침은 없고 그냥, 철저히 대비하여야 한다는 원론적인 보도만 했습니다. 정부에서는 일체의 행동지침이나 명령이 없었습니다. 마산에서는 해일이 밀어닥쳐 지하실에 있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다 죽었지만 그 흔한 사이렌 경보하나 없었답니다. 과연 우리나라에 정부가 있는지 생각해볼 일입니다 .
그리고 국민도 문제입니다. 혹시 정부가 준비에 필요한 명령을 내렸다 해도 우리 국민들은 정부의 말을 무시하고 지키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왜 이모양일까요?
정부는 정부가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한 인식이 없습니다. 사회의 기본질서유지와 국민보호라는 가장 기본적인 직무는 소홀히 하면서, 자기들 자리만 지키고 있습니다. 질서를 지키도록 하려면 법과 원칙이 시행되어야 하는데, 법과 원칙은 조용하고 말 잘 듣는 사람들에게나 강요할 뿐이지 집단으로 법을 어기는 사람들에게는 언제까지나 양보만 합니다. 국민들이 그런 정부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정부가 설령 무슨 명령을 한다 해도 말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고속도로를 점거하고, 파출소에 가서 행패를 부리고 불을 지르고, 군수를 구타하는 이 나라는, 정부가 있다고 할 수가 없는 나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 최우선 임무인 정부의 무책임과, 국민의 대비태만이 이런 큰 재난을 불러온 것입니다.
그리고 더 큰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인간 능력의 한계 때문입니다. 1000톤이나 나가는 대형 철제크레인을 부러뜨리는 초속 50미터 이상의 바람을 누가 당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은 자연 앞에도 맞설 수 없는 나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우리는 철저하게 깨달았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고 별의 별 자신감을 보여도, 자연 앞에서도 꼼짝 못하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기회에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지 실체를 파악하는 기회가 되어야 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겸손합시다.
사람에게 맞닥뜨리는 한계 중에서 가장 심각한 것은 죽음입니다. 태풍은 가끔 다가오고, 예보도 가능하며, 준비만 잘하면 덜 피해볼 수도 있습니다. 태풍은 바람이 지나가는 지역만 강타합니다. 그래서 태풍이 지나가지 않은 서울지역은 이렇게 안전했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고, 예보도 할 수 없으며, 피하는 방법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이 인간 모두에게 찾아오고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이 겪어야 하는 궁극적인 한계입니다.
인간이란 존재가 어떤 한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아십니까?
행 17: 26에,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지으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시간과 공간의 한계 안에서 살아가고 있을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가령, 1953년도에 제주도에서 태어나 지금 이 흑석동에 사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의 나이는 50세 입니다. 그 사람의 경우, 50년 전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은 2003년 오늘이란 시간을 우리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50년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몇 살에 세상을 떠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 사람을 낳은 부모도 모르고 자신도 모르고 부인도 모릅니다. 다만 하나님만 아십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주신 시간만큼 살 것입니다. 그 사람이 만약, 2023년에 죽는다면 70년 이라는 시간을 할당받은 셈입니다. 거기서 하루도 더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그 사람의 시간의 한계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에게 배당된 시간의 한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의 한계가 있는데, 그것은 공간의 한계입니다. 그 사람은 제주도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산이 고향이라고 한다면 거짓말입니다. 고향이 둘 일 수는 없습니다. 그 사람이 지금 서울의 흑석동에서 산다면, 반포에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가 안방에 있다면 거실에는 없습니다. 단 1 미터 정도의 적은 공간 안에서만 그는 존재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어디서 죽게 될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곳에서 죽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한 평생을 자기 마음대로 살았다고 할지라도, 사실은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시간의 한계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공간 속에서만 살다가 갔을 뿐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인간이 제각기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 같아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인류를 지어 온 지구상에 흩어져 살게 하셨고, 그들의 연대를 한정하셨고 거주의 경계를 한정해 놓으셨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으며, 여기에 대하여 그렇지 않다고 말할 사람은 한명도 없습니다.
인간은 이렇듯, 나약한 존재입니다. 사람에게는 이것 외에도 무수한 한계가 있습니다.
능력의 한계, 지혜의 한계, 방법의 한계, 체력의 한계, 기억력의 한계 등 헤아릴 수 없는 한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 한계가 너무 많아서 눌리고 갇히고 묶여서 몸부림쳐 그것을 벗어나 보려고 노력하고 노력하다가 안 되니까, 좌절도 하고 누구는 자살도 하는 것입니다.
이 한계를 극복하는 비결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붙잡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수 없이 만나는 인간의 한계와 그것을 극복한 비결이 보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고된 노동을 하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어 해방을 주려 하셨지만, 애굽 왕 바로는 완강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열 가지의 재앙을 애굽 땅에 내려서 바로를 굴복시키고 그들에게 해방을 주었습니다. 그들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해방을 얻었습니다. 출애굽한지 사흘 만에 홍해가 그들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들은 어디를 가나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인하여 전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때 마다 그들 앞에 길을 내셨습니다. 광야생활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생활이었습니다. 먹을 것도 마실 물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반석에서 물을 내 주시고, 날마다 만나를 내려주어 살게 해주셨습니다. 그들은 40년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남았고 드디어 가나안땅이 건너다보입니다. 그런데 요단강이 마지막 길을 막습니다. 요단강 역시 하나님의 능력으로 건넜습니다. 강물이 위에서 갑자기 멈춰 서서 건너게 해주었습니다.
강은 그렇게 건넜지만, 여리고성은 매우 견고했고 주민들은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훨씬 강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원주민들의 마음에 두려움을 주어 도망치게 하셔서 승리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들의 앞에는 걸음걸음마다 장애물이 가득했고 그들의 한계는 도처에서 드러났지만 그때 마다 하나님이 그들의 한계를 넘게 해주셨습니다. 결국 그들은 가나안을 정복했고, 오늘 그들이 거기에 사는 것이 그 사실의 증명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인간의 한계를 때마다 만나게 하시는 것은 인간을 절망케 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은 나약하고 수많은 한계 속에 있지만, 너희들을 만드시고 불러내신 너희의 하나님은 강하시고 우주 만물을 주관하는 주인이시니, 하나님을 붙잡아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라는 신호입니다. 시50:15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니라” 고 약속하신 뜻이 이것입니다.
행17:27에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그 이유는 하나님은 혹 더듬어 발견케 하려 하심이라” 고 명백히 그 의도를 밝혀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때마다 만나는 한계는 절망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고 만나는 절호의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무수한 한계가 앞을 가로막습니다. 누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한계를 느끼십니까? 무엇 때문에 힘드시고 무엇 때문에 포기해야할 것 같다고 생각하십니까? 돈 문제입니까? 건강 문제입니까? 자녀문제로 한계를 절감하십니까? 하나님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맞닥뜨리는 문제 중에 뭐니뭐니 해도 가장 큰 한계는 역시 죽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죽음을 정복하신 분이요, 우리들을 위해 부활과 영생을 준비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겪는 모든 한계는 하나님께로 가는 기회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십니다.
어떤 관원이 예수님께와서 진지하게 질문하기를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선한 행위를 해내지 못합니다. 사람자체가 선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선을 행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악한 일은 잘하지만, 선한 일은 마음만 먹을 뿐이지 행할 능력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모두 똑같아서 사람의 힘으로는 도무지 구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공자도 석가도 마호멧도 자신을 구원하지도 못했고 남을 구원할 수도 없습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다.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2;16) 이것이 진실이요, 진리입니다.
그런데 길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인간의 마지막 한계를 뛰어넘을 방법이 있다는 선언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만이 인간의 구원의 길이심을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예수께서만 인간의 구주시며 구원을 주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짊어지신 십자가 공로가 구원의 공로요 구원의 길입니다. 인간의 궁극적 한계는 예수님을 의지할 때에만 극복됩니다. 그리고 평상시에 만나는 일반적인 한계도 역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수시로 한계에 부딪치나, 하나님은 수시로 길을 여십니다. 그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세계선교, 새 성전건축, 모두가 힘든 일입니다. 땅값 비싼 서울에서 돈 많지 않은 우리들의 힘으로는 어렵습니다. 우리의 한계를 벗어나는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망하지 맙시다. 우리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 다음에는 우리의 손을 내밀어 전능하신 하나님을 붙잡읍시다. 우리에게 한계를 경험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을 혹 더듬어 발견케 하려 하심인데, 그 하나님은 결코 멀리 계시지 않고 우리의 내민 손을 붙잡아주려고 가까이 계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하셨습니다. 가까이 계실 때는 우리가 한계를 만났을 때입니다. 한계를 만나서 절망하지 말고, 우리를 도우려고 가까이 다가와 계신 하나님을 붙잡고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인간은 모두 자신의 한계 때문에 신음하는 존재들입니다. 서로 동정하는 마음을 가집시다. 인간의 힘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문제가 가득합니다. 우리 자신을 알고 겸손해 집시다.
우리도 언제 어떤 일을 당할지 아무도 모릅니다. 수재를 만난 분들을 힘껏 도웁시다.
인간의 한계는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하나님의 능력은 절망의 인간을 구원합니다.
인간의 한계를 절감하는 기회는 도리어 구원의 하나님을 붙잡고 구원받는 축복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믿는 성도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힘든 기회에 하나님을 더듬어 붙잡는 기회가 되도록 하십시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겸손히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복된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헌신의 영광
마 19:23-30 / 오정호목사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단지 천국에 간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주님을 위하여 이 땅에서 꿈과 비전을 가지고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ld)는 "나는 녹슬어 없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닳아서 없어지기를 원한다." 는 마음의 소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자신의 모든 것을 썩혀두는 것이 아니라 극대화(maximization)시켜서 인생이 가장 아름답게 절정으로 주앞에 드려지기를 갈망하였습니다.
우리시대 그리스도인의 문제는 의식주가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성도다운 꿈이 없이 사는 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꿈과 은혜를 확신할때 우리는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나라를 위한 꿈을 가진 거룩한 꿈장이(visionary) 즉, 꿈있는 성도, 꿈있는 가정, 꿈있는 교회를 주님께서는 지금도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1.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내어주신 주님은 헌신(獻身)을 기대하십니다(23~26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23~24절). 이 말씀은 그 배경사건이 있습니다(13~22절). 장래가 촉망되고 재정적으로 풍족한 젊은 관원이 있었습니다. 그는 재력이 있었을 뿐 아니라 영적인 면도 깨어있어서 영생의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주님께 질문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마태복음 19:21)고 제안하셨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재물이 많은 그는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마태복음 19:22). 이 청년은 영생과 재물을 맞바꾼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어떤 것보다 영생과 구원의 문제가 인생에 있어서 중요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제자된 우리들은 구원의 문제는 이미 해결받은 자들입니다. 구원받기 전에, 물질따라 사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주님의 은혜를 힘입고 구원의 확신과 천국의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주님은 기대하고 계십니다. 기대하심이 마땅한 이유는 주님께서 자신을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모두 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16).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우리의 생명의 선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로마서 8:32). 아들을 주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은사로 다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께서 주님자신을 주셨다는 메시지가 인생의 복음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 함이니라"(마태복음 20:28). 주님은 갈보리 언덕을 오르시고 살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셔서 자신을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겉옷을 주시고 마지막 피와 물과 땀까지 주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것은 하나도 남김없이 다 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주님은 제자된 우리에게 합당한 헌신을 기대하십니다. 물질의 헌신만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자체의 주인이 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체험한자처럼 살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사도)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요한 외의 모든 제자들이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주님은 자신을 가장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생명을 요구하셨습니다. 주님이 순교를 요구하실 수 있는 이유는 주님께서 다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호의를 온전히 받아드립니까?
우리는 주님의 생명과 은혜와 성령을 받고 영생을 약속 받았습니다. 이제 주님은 우리의 일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전부를 요구하십니다. 스스로 표준(standard)을 세워서 만족하지 말고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주님의 수준에 맞추어 따라가야 합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사도행전 20:24). 동일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구원을 체험한 우리는 바울과 동일한 마음의 고백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잘 산다는 것은 마음의 감동을 가지고 주의 뜻대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인식하고 이루며 사는 것입니다. 한번밖에 없는 인생을 값지게 사는 것입니다. 값지게 산다는 것은 세상 물질에 탐닉하며 사는 종류의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물질, 재능, 은사, 시간과 에너지를 주께서 원하시는 일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청년 부자 관원은 근심하며 돌아갔지만 우리는 결코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 능력을 새롭게 하여 주님께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헌신을 기대하십니다.
2. 헌신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헌신의 영광(榮光)을 약속하셨습니다(27~30절).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27~28절).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좇았다고 고백할 때 주님은 그것을 인정하시고 당연히 여기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주시고, 우리의 헌신을 기대하실 뿐 아니라 그 헌신을 다 기억하십니다. 헌신자와 헌신의 일을 기억하십니다. 이 땅에서 주님을 신실하게 섬기고, 주님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주의 뜻을 이땅에 실천하기 위해서 땀흘린 자는 영광의 보좌에 앉히리라고 주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소자(小子)에게 냉수 한 그릇 대접한 것도 결코 그 상을 잃지 않는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마태복음10:42). 얼마나 분명하고 놀라운 보상입니까!
우리가 하는 모든 헌신을 하나님께서 다 기억하신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아이를 돌보고 격려하는 일, 주차장에서 차를 반듯하게 세우는 일, 먼저 믿는 사람으로서 본을 보이는 일들 모두를 주님께서 다 기억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복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복받을 그릇을 잘 준비하는 것은 자신의 책임입니다. 삶의 준비를 잘 해야 주님의 응답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29절). 여기서 여러 배 혹은 백배(마가복음 10:30)는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모든 복을 의미합니다. 주님앞에 헌신하며 희생을 감수한 자마다 하나님의 복을 주시리라 약속하셨습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 여러분,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해 주시거나 특별한 응답을 주실 때, 그것을 성도의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영광은 출발의 영광입니다. 은혜받은 자의 모습을 가지고 이제는 헌신의 영광의 자리로 나아가야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립보서 1:29).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물질, 재능, 은사, 시간과 에너지를 주께서 원하시는 일에 온전히 헌신합시다.
마음을 다해 주님께 헌신한 자마다 필요한 모든 것을 주님께서 채우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립보서 4:19). 헌신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은혜와 능력으로 공급하심을 확신합시다. 또한 내면의 확신이 외적인 헌신으로 열매맺도록 마음과 의지를 다스립시다. 성도의 누릴 복은 사랑받고 은혜받는 영광뿐 아니라 드리며 헌신하는 영광까지 확대되어야 합니다.
실상 우리구주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일이 성도를 위대한 존재로 바꾸는 힘이 있다면,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다함없는 사랑으로 드리는 것은 성도의 삶의 의미를 붙잡도록 이끌어줍니다.
누가 헌신의 영광의 자리에서 생명주신 주님을 알현(謁見)하는 은총을 누리겠습니까? 누가 주님의 얼굴에 미속 가득 하도록 기쁨의 존재로 당당히 서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모두에게 평범한 날 중에서 결코 평범하지 않은 헌신의 흔적을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마 19:23-30 / 박지온 목사
오늘 본문 말씀에서 제목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그렇게 제목을 잡았습니다. 우리 18장, 19장에 쭉 흘러나오는 원칙과 흐름을 좀 붙잡아야 되겠습니다. 어린 아이라고 하는 그런 문제! 천국은 어린 아이가 들어간다! 이런 자와 같이 되라! 이런 것은 생명 관계를 말한다! 그랬습니다. 이 참 복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여러분과 제게 이루어지는 참 생명의 관계! 이것이 이루어져야 가능하고, 또 이 일을 중심으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 '사랑이다! 뭐 믿음, 소망, 사랑 항상 있으나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다!' 이럴 때에, 이 사랑을 자칫 잘못하면 교회에서,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을 인간적인 사랑으로 자꾸 오해를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뭔가 인간적인 사랑이기보다도 생명 관계입니다. 생명관계! 그래서 차라리 굳이 인간적인 것으로 연결시킨다면 '부모자식간에 흐르는 사랑이다!' 차라리 그렇게 제일 뭔가 연결시키기가 쉽죠.
그래서 그 성경에 나오는 사랑에 대한 네 가지 크게 대표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먼저 우리가 쉽게 떠오르는 것이 '에로스'라 그래서 인간적인, 이성적인 그런 사랑! 그 다음에 우리가 아는 데로 부모자식간에, 좀 다른 차원에서 사랑! 그래서 인간적인 애정을 갖고 있는 이 사랑은 없어질 수도 있고, 있을 수도 있고, 그건 뭐 감정 따라서 변하게 되는 그런 모습! 그러나 성경에서 바탕을 갖고 있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사랑!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고, 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문제 해결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 차라리 부모가 자식한테 사랑, 그 사랑과 더 가깝게 해석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탕 된, 이 생명이 바탕 된, 믿음 바탕 된, 헌신 이것이 기초가 된 모든 삶이 바로 성경은 '신앙의 삶'이라 그렇게 말하고 있고, 여기서 나오는 것이 전도와 선교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성경이 성취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혀 성경은, 오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이런 배경에서 앞에 진지한 그런 문제를 염두 해두고 설명을 좀 들어야 되죠. 다시 말해서 지난번에 한 영혼의 가치라든가, 이런 것이 먼저 선행해서 이해가 안 되면 오늘 이 부자에 대한 이런 문제가 이해가 안 되는 것이죠. 오늘 이건 좀 그런 측면에서 들을 때에, 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런 문제들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번에 나온 이야기로 부자 그래서 모든 것을 가지고 있고, 이 부자의 어떤 노력이, '내가 노력하고, 내가 애쓰고, 내가 힘쓰고, 그래서 다 이루었습니다!' 하는 그런 어떤 배경들, 그러나 우리 예수님께서는 '부족한 것 해라! 그 모든 것을 가졌다 할 지라도 다 내어놓아라! 그리고 와서 나를 쫓으라! 참 생명에 들어오너라! 이 생명의 주인공이신 그리스도 영접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바로 소유해라! 새로운 가치가 여기서 나온다!' 이 배경이 지금 성경에 배경입니다.
그래서 오늘 그 말해서 지난번에 실망하고 돌아갔던 그 청년도 다시 이어서 오늘 성경에 말씀한 것처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느냐? 그 청년도 받아합시다.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그런 배경입니다. 포인트가 지금 전혀 안 되는 배경입니다. 전혀 할 수 없는 것 같지만, 그러나 그 청년도 구원의 영광 속에 들어가게 할 수 있는 분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시다! 그렇게 말을 받아서 오늘 이해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19장 20절에 보면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뭐 '했다, 소유했다!' 이런 배경이거든요.
그런데 뭔가 이 훈련이 안 되는 겁니다. 내가 가지고 있고, 내가 소유하고 있고, 내가 뭐 지금 포함하고 있으니까 다 된 것처럼 생각을 했는데, 성경은 뭐라 그랬느냐하면 참 생명은 진실한 헌신과, 진실한 돌봄과, 진실한 이런 성령의 인도 받아야 되는 건데, 그것이 뭐냐하면 사실상 부자가 되면 될수록, 또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뭐가 안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부자에게, 가지고 있는 자에게, 부요가 풍성한 자에게, 의무도 함께 주었다는 사실을 이해를 하셔야 됩니다. 그러면 왜 많이 주었느냐? 하나님이 그에게 그 많은 것을 갖게 하신 때에 의무가 따라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의무를 가졌다고 해서 행해지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 아실 것은, '부자가 된다!' 그럴 때에 하나님은 부자로서 의무를 감당하도록 원하시고, 그 과정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더 어려울 수가 있습니다. 저는 그 세상에 부자 되는 사람들이 그냥 쉽게 아무렇게나 부자 되었다! 그렇게 믿지는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부자를 욕하고, 부자를 마치 죄인처럼 대하고, 그런 것은 절대 금물이죠. 여러분 부자 된다는 것이 쉬운 게 아닙니다. 또 부자가 될 때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의무를 갖고 있기 때문에, 부자로서 그들이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을 못하는 것에 대한 비난이 나올 수도 있지만, 가졌다는 것에 대해서 비난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그 저희 집을 이렇게 보면서, 그렇게 큰 부자는 아니지만 조금 재물을 갖고, 또 갖게 되는 과정을 보면서 이런 어떤 집안에 이런 부를 쌓게 되는 과정도 엄청난 시련이 있더라 구요. 심지어는 사업 실패하고, 죽음 직전에 가게 되는 이런 어떤 절망감! 그래서 온 집안이 완전히 초상집처럼 되어졌던 그런 어떤 실패감... 이런데서 다시 또 일어나서 이렇게 이어지고 하는 그런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오늘에 이런 부를 소유하는 것이 그냥 되는 것은 아니더라 구요.
그러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저런 면모도 있었구나!' 뭐냐하면 친척들이나, 또 어떤 그 관계되는 사람들이나, 아는 사람들이 뭐 이렇게 돈을 요청하고 이럴 때에 내가 보기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돈을 그 사람이 뭔데 무슨 관계인데 돈을 달라고 할 필요도 없고, 줄 필요도 없는 과정인데도... 그런데도 돈을 달라고 하더라 구요. 그러니까 나 같으면 일언지하에, '야, 네가 노력해서 해라!' 한마디로 거절할 수 있는데도, 또 돈을 주더라 구요. 부자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저렇게 시련을 겪고 해서 모은 돈이지만, 하나님이 그들에게 해야될 의무가 있구나! 그 나누어주는 것이죠. 또 갖고 있는 돈을 주는 일입니다. 의무죠. 그런데 그것이 정말 어렵습니다. 가진 것 내어놓으라고 하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그러니 젊은 부자에게 지금 우리 예수님께서 말씀하는 것은, '가진 것 내어놓아라!' 그게 안 되었잖아요. 재물이 많으므로 안되어서 슬퍼서 돌아갔습니다.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인간적인 것도 이 땅에 이런 큰 의무가 부여되는데, 하물며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 부자 중에 부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부자 중에 부자입니다. 세계 복음화다! 이건 뭐 말할 것도 없는 것이죠.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오늘 '영육 간에 부요를 주신다!' 그럴 때에 이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생각을 해요. 예수 믿고 막 신앙 생활하는데, '십일조도 냅니다! 십 이조도 선교 헌금으로 냅니다! 뭐, 주일 헌금도 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 안됩니까!'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어요. 어떨 때는 그런 생각도 들어요. 하나님 앞에 어제 저녁에 십일조 내었는데, 오늘 손해가 왕창 왔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하나님, 어제 십일조 내었는데 왜 안됩니까!' 이런 생각이 딱 나오더라 구요. 나오는데 내가 뭐 많은 것도 아닌데, 이런 것이 나온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뭔가 사업하면서 일할 때에 그런 것이 충분히 나올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 아실 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세계 복음화라는 자리에서, 그 다음에 이 일을 할 수 있도록 내가 물질로 보호자가 되고, 물질로 안내자가 되고, 정말 하나님 앞에 쓸 수 있는 자들로 세운다는 것, 그냥 오는 게 아닙니다. '혹독한 시련이 필요하다!' 이겁니다. 이것을 내어놓기 위해서는, 내어놓을 수 있는 인격이 되기 위해서는 혹독한 시련이 필요하더라 구요. 그런데 그런 과정이 올 때에 불 신앙으로 바라볼 때는, '하나님, 왜 이럽니까!' 이렇게 됩니다 만은, 여러분과 저는 그렇게 그런 과정을 겪고 나갈 때에 반드시 따라 올 것이 뭐냐하면, 그 언약을 확인하고, 언약의 내용을 붙잡고, 우리가 구원받고 구원에 확신! 그 다음에 여러분과 저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단단히 붙잡고 바라볼 수 있는 비전이 심어져야 되는 겁니다. 이 일이 이루어지게 되면 그 다음에 문제는 따라오는 것이죠.
하나님이 그 일을 하게 할 때에 과정 속에 실패도, 어렵고 힘들다 그러면 그것이 실패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실패 자체가 기도 제목이 되고, 기도가 나온다는 사실 자체가 응답이 되어집니다. 여러분들이 뭔가 기도하게 되는 것 바로 응답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데 그게 벌써 왜 하나님 기도는 안 해서 문제이지 하게 되면 응답이 나오더라 구요. 그러니까 기도 안 하면 할 수 없어요. 그 다음에 여러분 안 믿어서 문제이지 믿으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여러분 어떻게 하든지 기도하게 만드는 것 참 중요해요. 기도하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 문제가 생기면 기도해요. 그러니 뭐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수밖에 없고, 그렇게 하시게 되는... '일이 생겼다! 사건이 생겼다!' 그건 기도하게 하시는 겁니다. 기도한다! 그러면 뭐가 나옵니까? 응답이 보장이 됩니다. 약속이 되는 거죠. 이것이 조금만 이해가 된다 그러면 문제가 아니죠.
그래서 부자가 되었다! 하나님의 의무와 사명 부자로서 뭐냐하면, 이 재물을 골고루 분배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나라 재벌도 문제가 모으기만 하는데, 분배! 내어놓는 것은 못하니까! 이 개혁을 해야 된다... 그 재벌개혁은 다른 게 아닙니다. 그 문제 들고 나오는 것 아닙니까! 중요한 것은,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그리스도 이름으로 큰 축복과 은혜, 축복이라는 것을 우리는 돈이라는 것으로 연결시키니까, 쉽게 그렇게 연결시켜 봅시다. 돈을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의무를 감당할 수 있는 뭐가? 믿음이 안되어요. 그래서 이 믿음을 바로 붙잡고 바로 인도하기 위해서, 여러분에게 뭔가 시련과 또 문제가 나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마태복음 6장에 30절에 보면 그렇잖아요. "너희는 먼저" 뭐라 그랬습니까?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은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것이 이루어지는데, 이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사람 힘으로 안됩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나온 것이 뭐라 그랬느냐 하면요? 22절에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이때에 예수님께서 위에 있는 배경을 가지고 말씀하시죠. 23절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얼마나 어려우냐? 전혀 불가능하다! 그런 이야기가 나와요. 24절에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뭐라 그랬어요? "쉬우니라" 저는 굳이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느냐?' 그런데 '부자가 하늘나라 들어가기보다 오히려 더 쉽다!' 그랬거든요.
제가 이 메시지를 준비하면서 무슨 생각을 해 봤느냐 하면, 바늘에 실을 꿰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아마 나이가 들수록 더 어렵습니다. 젊을 때는 그래도 좀 괜찮은데, 나이 들면 돋보기 끼고, 그것도 안되면 이렇게 하고 해 가지고, 그것도 안 되어서 침을 발라 가지고 실을 뾰족하게 만들어 가지고 그렇게 껄끄적 거리는 게 없어도 잘 안 들어가는데, 여러분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려고 하면 이것은 걸끄적 거리는 것이 너무 많아요. 우선 약대는 워낙 못 생겼습니다. 그 다음에 등에 혹이 났지, 다리 길지 진짜 잘 안 들어 갈 수밖에 없는 그런 구조상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건 뭐 제쳐놓고라도 바늘귀와 약대와는 비교가 안 되는 겁니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전혀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전혀 안 된다!
그때에 다음에 나온 말씀이 25절에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그랬습니다. 보통 놀란 게 아니고 이건 뭐 너무 너무 놀란 거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그때에 26절에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뭐라 그랬습니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할렐루야! 쉽게 말해서 여러분 부자가 하나님의 의무를 감당하도록 분배해 주고 나누어주고 이게 안되어요. 안되게 되어 있어요. 어렵습니다. 그 다음에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네가 가지고 있는 것 내어놓아라!' 이게 안되게 되어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의 본성은 이게 안되어요. 못 돼요.
제가 그저께 손자를 데리고 있으면서 교외로 나간다고 금요일 날, 뭐 이렇게 과자부스러기를 가지고 갔는가 봐요. 와서 하는 이야기가 나는 그렇게 독한 줄 몰랐는데, 와서 하는 이야기가, 옆에서 누가 하나 다라고 하는데 하나도 안 주더랍니다. 조그마한 것 하나도 절대로 안 주더랍니다. '야, 진짜 우리는 그렇게 안 키웠거든요! 주라 그러고 이랬는데도...' 그런데 그것은 뭐냐하면, 요만한 뭘 먹는데 제가 과자를 하나 달라고 그러면 안 줘요. 딱 들고, 내가 그걸 10봉지, 20봉지 사줄 수 있는데도, 지가 그것하나 나를 달라고 하면 절대로 안줍니다. '아, 저게 인간의 본성이구나!' 인간의 본성이 못 주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여러분 그 교회의 신앙생활 수준 중에 가장 높은 수준이 드리는 수준입니다. 드리는 수준! 이게 가장 신앙생활 수준의 뭔가 척도입니다. 그래서 일단은 여러분 주일날 몸을 드리는 것! 이 수준 우선 귀중한 겁니다. 여러분 주일날 거룩한 성전에 나와서 하나님 앞에 바쁜 일 제쳐놓고, 뭘 제쳐놓고 아닙니다. 일단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드린다! 내 몸을 드린다! 이것이 신앙생활에 가장 최우선 축복에 수준 아닙니까! 우리가 '예배 성공한다!' 바로 이 문제 아닙니까! 여기다가 또 뭡니까? 마누라가 반찬 산다고 해도 천 원 주는 것을 아까워하는데, 십일조 한다고 하면서 '만원, 10만원, 20만원 딱 떼어놓는 것!' 그건 은혜 아니면 절대로 못합니다.
혹시 오늘 뭐 십일조 한다고 딱 떼어내었다. 놀라야 됩니다. 여러분 '아,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가!' 놀라야 됩니다. 절대로 못 내어놓게 되어 있어요. 받아합시다. "하나님은 오늘 할 수 있다!" 여러분 인간수준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아마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도 모르게 십일조 아무렇지도 않게 딱 내어놓을 수 있는 수준까지 쉬웠습니까? 안되게 되어 있어요. 뭐 '감사헌금, 선교헌금 낸다!' 안되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 알아야 합니다. 근원적으로 안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세계 복음화 놀라운 축복의 비전을 갖고 섰다! 거기에 어제 산업선교 모여 가지고 좀 뭐 이렇게 모임하고 그랬습니다 만은, 거기에 우리의 직장과 우리의 사업과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바 '이것을 하나님 앞에 드리겠나이다!' 이것은 인간 욕심으로, 인간 스스로, 인간생각으로, 절대로, 절대로 안 되게 되어있어요. 한번 받아합시다. "잘 안 된다! 지극히 정상이다!" 정상입니다. '안 된다!' 정상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뭐라 그랬습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 배경이 그게 뭡니까? '하나님으로는 하실 수 있나이다!' 그 배경입니다.
앞에 청년 이야기하면서, 얼마나 착합니까! '예, 내가 그것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딱 한가지 뭡니까? '재물을 다 내어놓아라! 그리고 나를 쫓으라! 청년이 근심하며 돌아가니라!' 다 했지만 이게 안되어요. 그게 안 되는 배경이 거꾸로 뭐냐?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안에 들어가지 않고, 참 하나님 앞에 생명 관계가 아니면, 하나님이 안 하시면 이 일은 이룰 수 없다! 그 배경입니다. 여러분 몸을 드리고, 헌금을 드리고, 그게 우연하게 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절대로 안되게 되어 있어요.
그 다음에 바로 성경은 이것을 통해서 모든 것을 보장시켜 주었습니다. 보장을 백 번, 천 번 받아도 이게 안되거든요. 그러니까 먼저 그 나라와 그 의가 안 되는 것이, 따라서 이게 안 된다! 그러지 만은 하나님이 그 나라와 그 의를 이루어주시고 그 다음에 이것도 따라 오도록 약속해 주신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저는 뭘 말하느냐? 많은 의무를 우리에게 사업을 하게 했으며, 사업을 하게 하신 만큼, 자녀도 가정도 주시면 주시는 만큼, 여러분과 제게 세계 복음화에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의무를 부과해 주셨다! 그런데 이 일을 근원적으로 내게서 있을 수 없습니다. 언약을 붙잡고 확실한 보장을 확인하는 만큼, 이 일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을 약속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어떤 언약이냐? 그리고 언약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들을 우리가 분명히 보아야 되겠습니다. 우선 이 성경을 보면 여러분과 저를 세워놓고 하나님이 엄청난 약속을 합니다. 그 약속은 내 계획이 아니고, 여러분 계획이 아닙니다. 그래서 내가 모았다! 내가 뭘 했다! 이것 가지고는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죠. 그래서 종교로는 안되고, 신비도 안되고, 노력으로도 안되고, 울어도 안되고, 참아도 안 되는 겁니다. 뭐로 됩니까? 오직 하나님의 계획을 붙잡고 믿음으로 나가는 겁니다. 이게 지금 우리가 서있는 그런 배경이거든요.
그래서 뭐 교회 건축문제나 이런 모든 문제도 여러분 아실 것은, 걱정할 일이 아니라 기도할 일이고, 그 다음에 기도할 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뭡니까? 믿을 일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하는 것은 첫 번부터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얼굴을 좀 보라 그랬습니다 만은, 여러분 얼굴 보면서, '세계 복음화 할 수 있는 얼굴이다!' 이 생각이 잘 안 날겁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세계 복음화 하기보다는 대구 복음화 하기도 힘들어요. 그런데도 누가 합니까? 하나님이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 믿음이... 그 다음에 하나님이 여기서부터 일을 이루시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한 이틀동안 희락이를 데리고 있는 동안에 고생을 해 가지고 예화가 자꾸 나오는 것 같은데, 아이를 데리고 이제 화원에 갔습니다. 화원에 가 가지고 나의 계획은 한바퀴 돌기로 했죠. 화원에 원숭이도 보여주고, 구간조도 보여주고, 계획을 하고 이제 갑니다. 올라가는데 이놈이 생전 안 하던 요구를 합니다. 지가 데리고 가면 좋다고 잘 따라오는 것만 해도 과분한데, '엎자고 해요, 안 간데, 그냥...' 그 어떻게 합니까! 제가 거기 올라가는데, 혼자도 올라가기 힘드는데, 지금 저희 할머니가 이제 엎고 올라갑니다. 올라가면서 아무리 꼬아도 안돼요. '힘들어서 안되고, 뭐해서 안되고...' 그래도 안된데요, '엎고 가제...'
그래가지고 어디까지 갔느냐 하면, 그 구간조 가니까 얼마나 또 재미있게 이야기를 하던지, 생전 안 하던 소리를 하네요. '여보' 그래요, 또 그것도 걸걸한 아줌마 음성으로 '콩 심었나!' 그러더라 구요. 그러니 이놈이 깔깔, 깔깔 웃더라 구요. 원숭이가 얼마나 처량하게 앉았는데 저희 할머니가 예를 잘 들더라 구요. '왜, 원숭이가 저렇게 처량하게 앉았느냐? 엄마 아빠를 떠나 가지고 지 혼자 돌아다니다가 붙잡혀서 저기 가두어 놓았다! 너도 말 안 들으면 저기 가둔다!' 그렇게 꼬득여 가지고 걷도록 만들고...
뭘 말씀하고 싶으냐 하면, 지가 엎자고 하던지, 안기자고 하던지, 어떻다고 하던지 간에 내가 계획했기 때문에, 그 아이를 엎든지, 안든지, 뭐 요구를 하던지, 말든지 한바퀴 돌았습니다. 한바퀴 도는 동안에 돌아보니까 뭐 재미도 있거든요. 깔깔 웃기도 하고, 또 그렇게 그 계획 속에 따라오기만 해도 웃음도 있고, 기쁨도 있고, 감사도 있고, 누림이 따라 오더라 구요.
오늘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여러분과 저를 하나님이 엄청난 계획 속에 이미 세워놓았습니다. 받아합시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능히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할렐루야! 믿습니까! '능히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하나님의 역사와 그 능력의 역사로 여러분 수준과 상관없어요. 가면서 뭐 불 신앙하고, 안 믿고 별소리 다 할겁니다. '왜, 이러냐?' 그러고 얼굴 찡그리고, 그러다가 조금 좋은 게 있으면 웃기도 하고, 이 확신이 없으니까 별 짓을 다해도 하나님은 하실 것입니다. 받아합시다. "우리 수준과 상관없이 하나님은 하실 것이다!" 믿습니까!
이제 교회 건축에 아마 이 뭔가 그림이 나오고, 모형도가 나오면 놀랄 겁니다! 진짜 우리가 이런 교회를 지으려고 생각하지도 못했던 그런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이루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이 원하시고,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세계복음화의 필요하다! 그러면 누가 합니까? 내가 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것 이전에 중요한 것이,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를 선택해 놓고 뭘 하시기를 원하느냐? 마태복음 24장 14절 한번 찾아봅시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할렐루야!
여러분과 저를 세워놓고 전도와 선교! 세계 복음화 하면서 나오지 만은 여러분과 저를 세계 복음화 하도록 하나님께서 여기에 약속을 해 놓았습니다. 그 일을 이룰 수 있도록 여러분과 저의 모든 것을 뭘 합니까? '보장해주신다!' 그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확신되는 만큼 모든 문제가 해결되죠. 그래서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모든 문제 해결 자다!' 하는 배경이 바로 이런 부분입니다. 분위기!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데로 요셉 세계 복음화 하도록 하나님이 계획 하셨잖아요. 그 계획하신 비전을 처음에 어디 주느냐? 여러분 잘 알다시피 창세기 37장 1절에서 11절까지 꿈으로 안 주었습니까! 또 이말 듣고, 꿈꾸고 뭘 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미 우리 말씀에서 세계를 정복하겠다! 하나님이 약속해 주었습니다. 그러면 그 약속을 잡고 나가는 동안에 어디 가느냐? 그 약속을 성취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요셉을, '노예로 들어가도 보장해 주었고, 감옥에 들어가도 보장해 주었고, 어디에 가서도 보장해 주셨다!' 이 내용 아닙니까!
다윗도 마찬가지로 왕으로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왕이 되는 일, 또 왕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해야 될 그 모든 일들을 약속으로 보장받았습니다. 그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무조건 보장해 주었습니다. 다윗이 범죄하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번 지하철 참사 유족 돕기 위한 헌금이 나옵니다. 여러분 중심으로 헌금하되, 헌금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여기에 우리 기도를 담아야되고, 참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소원을 좀 바로 붙잡아야 되겠다 싶어요.
저는 그 서울에 가 있으면서 사무실에다가 계속, 또 우리 남아있는 부교역자들에게 계속 연락을 했습니다. '우리 교인들이 없나? 한번 계속해서 연락을 해봐라!' 저는 첫 번 뭐 우선 생각이 '터졌다! 우리 교인들은...' 이렇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사무실에 연락해도 '아직까지 없습니다!' 우리 부교역자들도 '아직까지는 없습니다!' 그렇게 나오더라 구요. 그러니 마음속에 뭐냐하면, 벌써 한 수 백 명이 안 그랬는데, 그때는 얼마 안되었다 그래도, 벌써 이렇게 이야기 들어보니까, 한 두 명이 아니더라 구요.
그러면 우리 교인들이 뭔가 2,000명! 아이까지 한 2500명! 그 이외에 다 연결되는 사람 치면 이건 뭐 보통숫자가 아니거든요. 그러면 어디에 끼여있던 사람도 연결될 수가 있다는 배경입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몇 일 동안 '없다!' 그래요. 제가 와 가지고 잠깐 그 이야기를 듣는 동안에, 없다는 배경보다도 '하나님이 보호하셨다!' 그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숫하게 내가 당장 몇몇의 이야기만 들어도 바로 그 시간에 당할 수밖에 없는 그런 환경이었어요. 그런데 괜찮았거든요.
뭐 예를 든다 그러면, 이분은 약속만 철저히 지키는 사람인데, 새벽기도 갔다가 와 가지고 너무 곤해서 잠깐 졸아서 누워있는 동안에 그만 약속 시간을 놓쳐버렸네! 바로 그 차를 타는 시간인데 약속시간을 놓쳐 가지고, 그 시간까지 거기 도착해야 되는데 그 전철을 못타고 택시를 타고 가다가 택시 안에서 바로 자기가 타야될 전철, 그 시간 때입니다. 그 시간 때에, '불이 났다!' 택시 안에서 들었데요. 영락없이 거기 들어가 가지고 '천당 갔겠지, 지금쯤...' 그런데도 하나님이 보호해 주었습니다. 보장입니다. 무엇 때문에 마태복음 20장 14절을 이루기 위해서 여러분과 저를 세워놓았기 때문에, 그의 삶을, 생활을 보장해 주시는 겁니다. 이 약속이 여기 나오는 겁니다.
또 한 분은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우리 그 화요일 날, 여전도회에서 신입생 환영회를 안 했습니까! 그 환영회 위해서 그 날 정기적으로 모이는 바로 그 모임이 그 시간 때인데, 그 전철을 타고 가서 거기 모여야 되는데, 그 날 모임을 하루 당겼데요. 월요일 날 모이고, 우리 교인 그분 때문에 그 모임에 있는 사람은 다 산 겁니다. 월요일 날 모이고 화요일 날은 쉬고 안 갔던 겁니다. 그런데 그 일이 터졌습니다. 이런 게 이것뿐만이 아니라 시간이 없어서 말을 다 못하겠는데, 많더라 구요.
'아...,' 내 마음에 무슨 생각이 드느냐 하면, '이것은 우연이 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에게, 요셉에게 주셨던 세계 복음화! 다윗에게 주셨던 세계 복음화! 바울에게 주셨던 세계 복음화! 그것을 위해서 여러분과 저의 삶을 보장해 주셨구나! 이 일을 위해서 보장해 주셨습니다. 이 사건이 너무 뭔가 이 와 닿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할 일 있습니까! 보장해 주십니다. 시켜야 될 것 아닙니까! 그래서 나는 마음에 '아, 교회 짓기 전에는 절대로 안 죽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어요. 어떤 때는 '죽겠다!' 싶은 생각이 있더라도, '교회 짓게 하시니 절대 안 죽겠구나!' 짓는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짓고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지기까지 여러분 안 죽습니다. 실패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뭡니까? 보장해 주셔야 됩니다.
바울 같은 경우 보세요. 사도행전 27장 24절에 보면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바울을 가이사 앞에 세우시기 위해서, 세계 복음화의 역사를 로마에까지 가지고 가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완전히 배에서 죽게된 순간에도 완벽하게 보장했습니다. 이것을 알고 있는 바울, 깨닫고 있는 바울은 어떤 문제나 사건이 생겨도 어떻게 했습니까? 당당했습니다. 위축당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들이 당당할 수 있고 위축당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계획을 보고 확신하는 순간, 보장을 확인하는 순간, 당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지금 굶어서, 지금 파도에 휩싸여 죽기 직전에도, '어제 밤에 내게 말씀하신 그 하나님의 약속을 나는 믿노라!' 보장받았거든요. 확실하게! 그리고 '여러분들도 머리카락 하나도 상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나님의 보장을 무엇 때문에? 바울의 세계 복음화를 위해서 약속 받은 겁니다. 이 보장이 이루어졌다 그 이야기입니다.
끝으로 말씀을 맺습니다. 이런 큰 축복과 보장을 우리에게 주었지만 이게 잘 안 되는 가장 큰 걸림돌이 이게 안 되는 거죠. 여러분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 모든 문제 해결되었고, 이 보장의 중심 아닙니까! 그래서 계시록에도 보면, '재난이 오고, 지진이 일어나고, 문제가 생기고, 사건과 사고가 생기는데도, 하나님의 백성은 확실하게 보장해 주신다!' 이게 계시록의 내용입니다. 여러분들이 뭔가 기도할 수밖에 없는 문제가 생기고, 사건이 터지고, 일이 일어나게 될 때에 응답하시기 위한 보장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그런 보장이죠.
그런데 안되고 있는, 못하고 있는 배경이 뭐냐? 이 일에 걸리고 있는 문제가 뭐냐? 자신입니다. 자신의 문제! 자신의 문제라는 것이 다른 게 아닙니다. 뭐냐하면 내 자신의 욕심으로는, 이제 그 청년이 말한 것처럼, 전부 자신이 노력했고, 자신이 애썼고, 자신이 모았고 그러니 못 내어놓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시고, 하나님이 은혜 주셨다!'는 그게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일 처음에 요구하는 것이, '자신을 포기하라!' 그래서 우리가 믿음이라는 것은 다른 게 아니거든요. 자기의 욕심, 자기의 생각, 자기가 갖고 있는 것, 자기 뜻! 그래서 율법, 그 다음에 신비, '다 내어 던져라!' 이겁니다. 그러면서 '오직 복음! 하나님으로는 할 수 있다!' 겸손하게 나가면 되는 거죠.
그래서 그 나아만 장군에 대해서도, 이스라엘의 선지자가 제일 먼저 요구한 것이 뭐냐하면, '네 자신을 다 벗어 던지라!' 그 이야기거든요. 요단강에 몸 씻고 가라는 이야기가 다른 게 아닙니다. '번쩍번쩍하는 군복 다 집어던져라! 네 자신을 포장하고 있는...' 속으로는 죽을 지경인데도 겉으로 포장하거든요. 내 가정이 죽을 지경인데도 기도 안하고, 하나님 앞에 안 엎드리고, 버텨보려고 이를 갈고, 포장하고, 다른 사람 앞에 맨 날 히히 웃고 앉았는 것, 속은 다 썩어 가면서도... 그것 다 벗어 던져 버려라! 겸손하게, '하나님, 내게 이런 문제 있습니다!' '여러분이여, 이런 문제 기도로 도와 주십시오!' 포장하지 마라! 이것 내어 던지면 여러분 기도하게 하시고, 기도가 나오도록 만들면, 그것은 응답하시게 되어 있습니다. 문제가 나왔다! 응답하시게 되어 있습니다. 나아만 장군의 문제 바로 그 문제 아닙니까!
그래서 옷을 집어던지고 다 벗어버리고 썩은 몸을 가지고 요단강에 퐁당 들어갔다가, 또 퐁당 들어갔다가, 그것도 한번 들어갔다가 나오면 잘 안 되죠. 몇 번했어요? 한번 들어갔다가 나오면 믿음이 안 생긴다는 겁니다. 자꾸 들어가요. 반복해서 '예수 그리스도!' 들어가 봐요. 일곱 번 들어갔다가 나오니까, 어떤 문제가 생겼습니까! 기적 같은, 너무나 꿈같은, 평생소원인, '어린아이 살결처럼 보드라워지고 깨끗하여졌더라!' 약속했습니다.
여러분과 제게 있어서 걸림돌이 뭐냐? 불 신앙입니다. 요만한 것 생겨도 지금까지 완전 체질이거든요. 다 내어 던져 봐요. 지금까지 망했으면 됐지, 얼마나 더 망하렵니까! 한번 받아합시다. "이왕 망하다가 안된 것, 완전히 망해버려라!" 다 던져버려요. '주여, 알았습니다! 다 주께 내어놓았습니다!. 내가 소유하고 내가 노력하고 안된 것 다 던집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손에 맡깁니다! 주여, 죽어도 믿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다'가 아니고, '죽어도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 단순한 믿음으로, 주님만 바라보도록 한번 눈을 떠보세요. 성경이 '오직 여호와를 앙망 하는 자'에게 뭐라 그랬습니까? '새 힘을 주시느니라!'
그래서 우리가 메시지 듣는 동안에 뭐가 있느냐? 너무 예수 믿는 사람들이 복음을 섞어 있다는 겁니다. '섞은 복음!' 말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섞은 복음!' 예수 그리스도 말하는데 별걸 다 섞어 가지고, 이 시간에 단순하게 다 던져 버리고,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 붙잡고, 하나님의 능력 속에 내 자신을 맡깁니다!' 그럴 때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뭐가 이루어져요? 모든 것 다 주십니다! 하나님의 평안과 안식이 여러분과 제게, 이 말씀 통해서 한 주간도 성취되어 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원과 영생의 한 비밀
마 19:23-30 / 안효관목사
요즘 서점가에서 베스트 셀러가 되는 책들은 주로 재산을 모으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입니다. 책 제목만 보아도 금새 호기심을 유발할 수 있는 책들이 굉장히 많이 출판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10억’ 시리즈가 눈에 띱니다. “150만원 월급으로 따라하는 10억 재테크,” “월급쟁이 10억 벌기,” “나의 꿈 10억 만들기” 등이 그 대표적인 책입니다. 그 외에도 참 재미있는 제목의 책들도 있고, 아주 자극적인 제목의 책들도 있습니다. “백만장자가 되는 법” “니들이 돈맛을 알아?” “너 아직도 돈 꾸러 다니니?” “바람난 여자가 알아야 할 세금” “20대에 독립해서 1억 만들기” “로또복권에 당첨되지 않고 부자가 되는 법” “한국의 부자들” “돈 밝히는 여자가 아름다운 이유” “알짜 3억 만들기” “아이를 부자로 키우는 15가지 방법” 등입니다.
한 때 로또 복권으로 온 나라가 들썩거리더니 이제는 돈버는 방법에 대한 책들이 나를 들썩거리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아마도 IMF 이후 계속되는 경제침체와 증가하는 실업률, 그리고 불투명한 경제전망 등이 그 원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돈버는 방법에 대한 관심이 자칫 영혼과 마음의 피폐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지 않을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교훈 가운데 하나는 돈을 쓸 수 있는 마음의 그릇이 준비되어 있지 않는 상태에서 모아진 재물은 결국 그 자신을 타락시킬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어두운 역할을 해 왔다는 사실입니다.
서울 강남이 한참 개발될 때 졸부들이 그랬습니다. 강남에 개포동이라는 동네가 있습니다. 개발되기 이전에는 거의 버려진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엄청난 부촌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생겨났습니다. ‘개포동이 예전에는 개도 포기한 동네였는데, 지금은 개도 포텐사를 타고 다니는 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버려진 땅이 개발을 통해서 엄청나게 발전했는데, 그 와중에서 땅을 가지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졸지에 부자가 되었습니다. 졸지에 부자가 된 졸부들은 품안에 들어온 돈을 주체하지 못하고 사치하고 쾌락을 즐기다가 거의 대부분이 졸지에 망해버렸습니다.
복권에 대한 뒷이야기도 우리가 많이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복권을 통해서 엄청난 부자가 된 대부분의 사람들이 1년 정도는 행복해 한답니다. 그러나 1년이 지나고 나면 가정이 파탄된다든지, 사업이 망한다든지, 폐인이 된다고 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돈을 쓸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상태에서 갑자기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돈이 들어오니까 어떻게 쓸 줄을 몰라서 그렇게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최근에 나온 재미있는 책이 한 권 있습니다. “경주 최부자집 300년 부의 비밀”이라는 책입니다. 1600년대 경주지방에서 가문을 일으킨 최치원의 17세손인 최진립 씨의 후손은 300여년 동안 그 부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흔히 ‘아무리 부자라 하더라도 3대 넘기기 힘들다’고들 하는데 경주 최부자집은 3대가 아니라 300여년 동안 10대에 걸쳐 부를 유지했는데, 거기에는 아주 독특한 가문의 전통이 있었다고 합니다. 최부자집의 가훈을 소개해 드립니다.
①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 권세와 부귀를 동시에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높은 지위에 오르다 보면 정적이 생기게 되고 반대자들에 의해서 가문이 망할 수 있기 때문에, 양반 지위를 인정받는 데 필요한 최소의 조건인 진사만 유지할 뿐 더 이상의 벼슬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② 재산은 만 석 이상 지니지 마라. - 지나치게 부자가 되지 말라는 뜻도 있지만, 철저하게 근검절약하면서도 만석이 넘는 재산은 모두 사회에 환원했다는 것입니다.
③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 늘 가난한 이웃을 외면하지 않고 돌보아야 한다는 가훈입니다. 최 부자집에서 1년에 소비하는 쌀의 양은 대략 3000석(6000가마)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1000석은 식구들 양식이었고,. 1000석은 과객들의 식사대접에 사용했다고 합니다. 최부자집 사랑채는 100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는데 항상 과객들이 들끓었습니다. 또 과객들이 묵고 가는 사랑채에는 독특한 쌀 뒤주가 있었다는데, 두 손이 겨우 들어가도록 입구를 좁게 만든 뒤주입니다. 과객이면 누구든지 이 쌀 뒤주에 두 손을 넣어서 쌀을 가져갈 수 있도록 배려한 것입니다. 다음 목적지까지 갈 때 소요되는 여행경비로 사용하라는 뜻입니다. 입구를 좁게 한 이유는 지나치게 많은 양은 가져가지 말라는 암시였습니다.
④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마라. - 흉년이 되면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농토를 헐값에 팔아서라도 생계를 유지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최부자집에서는 다른 사람의 아픔을 빌미로 돈을 모으지 않았고, 흉년에 굶주린 농민들의 토지를 헐값에 사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⑤ 며느리들은 시집 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 부자집에 시집왔다고 해서 사치하려는 생각을 아예 하지 않도록, 3년 동안 철저하게 근검절약의 정신을 심어주기 위해서 검소하게 살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⑥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 경주를 중심으로 ‘사방 100리’라 하면 동쪽으로는 경주 동해안 일대까지이고, 서쪽으로는 영천까지, 남쪽으로는 울산, 북쪽으로는 포항까지 이른다고 합니다. 그 주변이 사는 사람들이 굶어죽는데 나 혼자 만석군으로 잘 먹고 잘사는 것은 부자 양반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1년 동안 사용하는 쌀 3000석 가운데 나머지 1000석은 여기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부자이면서도 어려운 이웃을 외면하지 않은 따뜻한 부자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부자가 이 정도 된다면 얼마나 멋이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부자에 대해서 아주 혹독한 비판처럼 들리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23-24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예수님께서 두 번에 걸쳐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무척이나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겨납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마치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한다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고, 그렇다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부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인가’ 하는 의문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가 부자가 되고 싶어 합니다. 신앙을 가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누구도 가난에 찌든 삶을 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부자가 되겠다는 꿈은 접어야 한다는 말인가?
제자들도 그런 의혹이 생겼던 모양입니다. 25절에 보면 “제자들이 심히 놀라며”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합니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제자들이 심히 놀랐다는 말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무척이나 어렵다는 말씀에 제자들도 큰 충격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정말로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모든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부자의 의미는 단순히 재물이 많은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배경을 우리가 잊지 말고 이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본문 바로 앞에 보면,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영생을 얻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합니다. 그 청년은 어렸을 때부터 율법을 잘 지켰습니다. 세상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다 얻은 사람이고, 누릴 수 있는 것 다 누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남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영생에 대한 문제를 풀지 못하고 예수님을 찾아왔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청년에게서 영생의 문제가 풀리지 못하도록 그를 붙잡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셨습니다. 그게 바로 ‘재물’이었습니다. 그 청년의 마음에는 영생을 얻고 싶은 열망보다도 재물에 대한 욕심이 그의 마음의 중심을 꽉 붙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재물이 그의 인생의 주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인생에서 재물이 주인의 자리에 앉아 있는 한 영생의 문제가 풀려지지 않음을 아시고, 그 청년에게 “네 재물을 먼저 포기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영생을 얻고 싶은 열망에 예수님을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재물을 포기하지 못해서 슬픈 기색을 하고 심히 근심하며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영생은 주인이 바뀌는 것입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었던 사람이 주인의 자리를 하나님께 내드릴 때 영생이 주어집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재물이던 사람이 재물을 인생의 주인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하나님을 주인의 자리에 모실 때에 영생이 주어집니다. 세상에서 즐기던 쾌락이 인생의 주인이던 사람은 쾌락을 주인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하나님을 내 인생의 주인의 자리에 모셔야 합니다. 그래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그 인생에서 재물을 주인의 자리에서 끌어내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영생을 얻는데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재물을 인생의 주인 자리에서 끌어내리지 못한 채 재물의 노예가 되어 영생의 길을 포기한 그 청년을 바라보시면 예수님께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너무너무 어려운 일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부자라는 말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단순히 재물이 많다는 것으로 부자라고 말하지 않고, 재물이 인생의 주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재물에 노예가 된 사람을 말합니다. 재물에 노예가 된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주인인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인 나라에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신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재물을 주인으로 섬기는 사람은 그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재물이 그 인생의 주인이라는 말은 그는 재물을 신(神)처럼 섬기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재물이 우리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재물을 다스려야지 재물이 우리를 다스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부자 청년은 재물을 다스리지 못하고 재물에 노예가 된 표상입니다. ‘재물을 다스린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우리는 앞에 말씀드린 경주 최부자집의 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최부자집은 부자이면서도 돈에 노예가 되지 않았습니다. 적당하게 돈을 쓸 줄도 알았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돌아볼 줄도 알았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책임이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부자 청년은 ‘네가 가지고 있는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는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재물만은 포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어떻게 모은 재산인데’ 하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재물에 노예가 된 또 한 예를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입니다. 그는 날마다 호위호식하며 살아갈 만큼 큰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집 앞에는 거지 나사로가 있었습니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거지가 자기 집 앞에 있는데도 그는 그 거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자신만을 보고 있을 뿐입니다. 재물에 노예가 되어 재물에 눈이 가려지니까 이웃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그 부자는 죽어서 지옥에 갔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거지인 나사로를 도와주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지옥에 간 것이 아니라, 거지 나사로를 볼 수 없을 정도로 재물에 그 인생이 붙잡힌 ‘재물의 노예’였기 때문에 지옥에 간 것입니다.
여러분, 부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 때문에 일부러 가난해질 필요는 없습니다. 부자가 되십시오. 그러나 재물에 노예가 되지 말고 재물을 다스릴 수 있는 부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재물을 잘 사용하면 재물을 가지고 얼마나 많은 좋은 일들을 할 수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선한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물질적인 뒷받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런 물질에 대해서 거부하지 않으셨습니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가지고 있는 돈을 다 포기해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부자 청년처럼 재물에 노예가 된 사람에게는 인생의 주인의 자리를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 재물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을 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인간은 어느 누구나가 돈에 대한 욕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저는 돈에 대한 욕심이 하나도 없는데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목사인 저도 돈을 좋아하고 돈에 대한 욕심이 있습니다. 세상에 돈을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단지 돈에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 돈을 마치 냄새나고 더러운 거름더미처럼 취급할 필요는 없습니다. 디모데전서 6:9-10절에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돈을 사랑해서, 돈을 사모해서 부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돈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결국 믿음을 버리게 된다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왜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로 하여금 믿음에서 떠나게 만듭니까? 돈을 사랑하게 되면 돈이 우리 인생의 주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재물이 우리 마음에 주인이면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일 수 없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주인이면 돈이 우리의 마음에 주인 자리를 궤차고 들어올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이것인 신비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가 돈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 돈이 우리 인생의 주인이 되지 않고 하나님이 주인 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면 안 됩니다.
여러분, 내 의지로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절대로 안 됩니다. 일시적으로는 돈을 인생의 주인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영원히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삶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역사가 아니면 절대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인생이 돈에 노예로 살아가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도해야 합니다. 내 의지로는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끊을 수가 없습니다. 끊은 것 같다가도 돈을 보면, 또 삶에서 돈이 절실하게 필요할 때면 금새 또다시 돈을 사랑하게 됩니다. 오직 돈만을 생각하는 돈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그게 우리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안 됩니다.
부자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철저하게 돈의 노예로 사는 구두쇠형 부자입니다. 돈이 한 번 들어가면 죽어도 안 나오는 사람입니다. 가난한 사람이나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도와줄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선한 일을 위해서 돈을 사용할 줄 모릅니다. 철저하게 돈을 우상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둘째는 돈의 위력으로 다른 사람을 조정하려는 사람입니다. 돈의 위력을 알기 때문에 돈을 모읍니다. 그리고 그 돈으로 사람을 삽니다. 권력을 사고, 인기를 사고, 영화를 삽니다. 부자가 된 이유는 다른 사람 앞에 자신을 내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돈을 잘 씁니다만, 나를 드러내는 곳에만 돈을 사용합니다.
셋째는 청지기로 사는 부자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재물을 잘 관리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곳에 사용합니다. 돈을 사용하되 나는 청지기이기 때문에 내 이름이 드러나지 않아도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곳이라면 언제든지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부자가 되고 싶으십니까? 우리 중앙가족 모든 믿음의 식구들은 청지기로 사는 부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절대로 돈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부자만 돈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도 돈에 노예가 될 수 있습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더욱 돈을 갈망합니다. 영생보다도 돈을 더 갈망하고, 하나님보다도 돈을 더 사랑하면 그런 사람도 돈에 노예로 사는 사람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중앙가족 모든 믿음의 식구들은 부하든 가난하든 돈의 노예로 살지 말고, 청지기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게 영생을 얻는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청지기로 하나님 앞에 충성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맡겨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창 15:1-2, 마 19:27-29 / 이성희목사
서론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포샤는 자신에게 청혼한 세 청혼자에게 그녀의 초상화가 든 상자를 고르게 하였습니다. 세 상자 중의 하나는 금상자입니다. 그 상자 위에는 “누구든지 나를 택하면 남자들이 바라는 것을 얻을 것이다”라고 씌어져 있었습니다. 두 번째 상자는 은상자인데 “누구든지 나를 택하면 그 사람은 합당한 대가를 얻을 것이다”라고 씌어져 있었습니다. 비사니오는 무서운 글이 적혀 있는 세 번째 상자인 납상자를 선택합니다. 납상자에는 “누구든지 나를 택하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주고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고 씌어져 있었습니다. 가장 큰 도전에는 언제나 가장 큰 상이 주어지는 법입니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정하는 것은 마치 이 납상자의 글을 따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엄청난 위험이 뒤따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둘씩 짝을 지어 전도하러 내어 보내실 때 얼마나 염려가 되셨든지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매일 아예 목숨을 내걸고 살아야 하는 모험과 같습니다. 하물며 예수님 당시에 제자들이 복음을 가지고 나갈 때 어떠했겠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복음성가에는 “오 주님 같은 친구 없도다 저 천국 없으면 난 어떻게 하나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예수 잘 믿고, 교회 열심히 다니고, 봉사하고, 봉헌도 많이 했는데 천국이 없으면 어떻게 합니까? 우리가 신앙하는데 확신이 없으면 절대 희생하지 못합니다.
무엇을 얻는 것 즉 일을 한 다음에 대가를 얻는 것이 인간의 보람입니다. 노동의 효과는 대가가 아주 큰 요인입니다. 열심히 수고한 후에는 수확이 있어야 합니다. 여름 내내 땀을 흘렸으면 가을걷이의 대가가 있어야 합니다. 대가가 없는 노동은 효과나 질이 형편없이 떨어집니다.
맥그리거의 인간이론 가운데 사람의 본성은 악하므로 강압과 지시가 아니면 효율성이 떨어지므로 강압적으로 해야 한다는 ‘X이론’과 사람의 본성은 선하므로 자율적으로 하도록 유도해야 효율성이 오른다는 ‘Y이론’이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오우치라는 일본계 미국교수는 ‘Z이론’을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당근과 채찍을 균등히 사용하고, 적절한 대가를 주어 독려해야 효율성이 높아진다는 이론입니다. 그는 일본의 성과급(보너스) 제도를 그 예로 들고 있습니다. 성과급 제도란 일본에서 시작하여 한국에도 익숙한 제도로 노동의 효과증대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고 봅니다. 성과급 제도는 우리나라의 경제성장의 한 요인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대가가 있어야 노동의 능률도 오르고 보람을 가집니다.
어느 왕이 신하에게 물었습니다. “국회의원에게 왜 보수를 줘야 하지?” 그 때 신하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폐하, 국회의원에게 보수를 주지 않으시면 국민들이 더 많은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그래서 국회의원들은 지난 4개월 동안 법안을 한 건도 처리하지 않고 무노동이지만 추석 상여금을 일인 당 387만원씩 지급받았습니다. 법안을 처리하지 않고 서로 싸운 것도 큰일을 한 것이라고 국회의원들은 말할지 모릅니다.
성경에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가 있습니다. 종일 일한 종이나, 한 시간만 일한 종이나 주인에게서 받는 대가는 평등하였습니다. 포도원에 들어와 일한 품꾼 모두에게 한 데나리온씩을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나의 대가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거나, 비교하여 적다고 불평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에는 대가 없는 소명이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다섯 달란트를 더 남겨서 “착하고 충성된 종아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여라”는 대가를 받았습니다. 두 달란트 받은 종은 두 달란트를 더 남겨서 똑같은 대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남기지 않고 땅 속에 감추었다가 가지고 왔습니다. 주인은 “악하고 게으른 종아 바깥 어두운 데 나가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고 합니다.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것도 대가입니다. 착한 자나 악한 자가 다 대가를 반드시 받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른 대가가 무엇인가,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라고 묻습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자에게 반드시 대가를 주십니다. 주를 따르는 자가 얻는 대가가 무엇인가를 잘 보고 열심히 주를 따르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열두 보좌에 앉아 열두 지파를 심판합니다.
마태복음 19:28에는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고 합니다. 주님을 따른 제자들이 첫째로 얻을 것은 열두 지파를 심판하는 심판권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성도들도 마지막 날에 인자와 함께 세상을 심판할 것을 신약성경에 여러 번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2:30에는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6:2에는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라고 합니다. 성도의 심판권을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주시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열두 지파를 왜 심판하십니까?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거부하였습니다. “너희도...심판하리라”고 하셨는데 심판의 주권은 오직 예수님 한 분만 가지고 계시는 권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예수님의 권위로 심판할 수 있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심판하실 모든 절차를 보좌하며 대행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 13%가 영원한 심판과 지옥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3분의 2가 부활과 심판에 관한 것입니다. 마지막 날의 심판은 우리 신앙과 장래에 아주 중요한 주제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헤롯은 예수님의 탄생 때부터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거부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헤롯이 죽이려고 하여 애급으로 피난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책잡으려고 하였고,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지 못하고 하나님을 모독하였다고 하여 독신죄로 고소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재판하는 과정에서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인이 아닌 로마인이었지만 재판을 굽게 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내어주었습니다. 이런 모든 행위들은 심판을 받아 마땅합니다.
사도행전 3:14-15 상반절에는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라고 합니다. 생명의 주를 죽였으니 생명 없는 심판을 받아야 마땅한 것입니다. 어떻게 생명의 주를 죽이고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시편 9:7에는 “여호와께서 영원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준비하셨도다”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25장의 비유들은 모두 다 심판의 비유입니다. 열 처녀의 비유에 보면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미련한 다섯 처녀에게는 “너희들을 알지 못한다”고 하여 심판을 하였습니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은 “양은 오른쪽에 염소는 왼쪽에” 나누실 것입니다. 최후의 심판이 어떤 것인가를 의미합니다.
시편 96:13에는 하나님은 “의로 세상을 심판하신다”고 합니다. 시편 103:6에는 “모든 자를 위하여 심판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시며, 정의로 심판하신다는 것을 알게 해주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도 심판자가 아닙니다. 사람은 심판의 대상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판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빌라도도 심판을 받는 자입니다. 화가 혼토르스트의 ‘가야바 앞의 예수님’이란 그림이 있습니다. 그 그림을 자세히 보면 대제사장 가야바가 예수님을 심판하는 것 같지만 그의 얼굴에는 초조한 빛이 역력합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상대적으로 평안합니다. 가야바가 예수님을 심문하고 있는 것 같지만 오히려 예수님께 심판을 받고 있다는 말입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인간을 대신해서 심판관이 심판을 받은 것이다”라고 예수님께 대하여 말했습니다.
사도 요한의 제자이며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캅은 자신을 화형에 처하는 자들에게 “당신들은 활활 타오르는 불로 나를 위협합니다. 하지만 겨우 한 시간만 지나면 그 불길은 꺼지고 맙니다. 반면에 당신들은 믿지 않는 자를 위해 정해놓은 다가오는 심판의 영원한 형벌의 불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다가올 심판을 알아야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영어선생님이셨습니다. 영어시험을 치는 날이면 다른 친구들 다 집에 보내고 선생님이 저를 불러서 시험 채점을 하게 하셨습니다. 제가 채점을 한다고 친한 친구의 성적을 올려줄 수 있습니까? 그렇게는 못합니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시험은 본대로 채점을 해야 합니다. 아무리 미운 친구라도 점수를 깍지도 못합니다. 점수는 높이지도 못하고 깎지도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저는 채점을 도와주는 일을 하는 것이지 제가 채점관은 아닙니다. 만일 제가 살짝 점수를 고쳤다면 선생님이 금방 다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고친 것을 알면 제가 혼이 나고, 다시는 제게 채점을 맡기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선생님이 채점자이고 난 도우미이지만 그래도 제가 폼은 제대로 잡았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열두 지파는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 따른 제자들은 심판 자리에 함께 앉아 심판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심판하게 되는 은혜의 대가를 누리게 됩니다.
야곱에게 하나님께서는 ‘네가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의 근원이신데 하나님의 복을 대행하는 은혜를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초대교회의 감독에게 양무리를 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목자이신데 교회의 감독들에게 교회의 치리권을 주신 것입니다. 요즘 장로님들이 교회를 치리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이며, 그리스도가 머리이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이 대신 치리하고 다스리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시겠다고 합니다. 이런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 더구나 심판의 대행자가 된다는 것은 완전한 영광입니다. 이 영광을 주님을 따르는 우리도 누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둘째, 버린 것 이상으로 받고 영생을 상속합니다.
마태복음 19:29에는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고 합니다. 육적인 것을 모두 버리면 영적인 것을 상속하게 됩니다. 부동산과 혈육과 소유를 다 버리면 더 버릴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내 이름”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복음, 하나님 나라를 말합니다. 복음과 나라를 위하여 모두 버리면 버린 것보다 여러 배를 더 받고, 영생을 상속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버리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버리면 더 많아지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계산법입니다.
창세기 12:1에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합니다. 고향, 친척, 아버지 집을 버리라는 것은 3중으로 포기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포기하는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며, 이름을 창대하게 하시며, 복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버린 이상으로 얻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다 버리고 떠난 후에 하나님은 더 많고 큰 것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주실 것을 알기에 창세기 15:1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아”라고 부르셨는데 2절에는 아브라함이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은 주신다고 하시지 않았지만 아브라함은 주실 것을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어머니와 동생들이 밖에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셨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형제와 자매요 어머니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은 이 말을 듣고 굉장히 섭섭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전파를 위해서 육적인 모든 것을 버리셨습니다.
버리면 ‘여러 배’를 받는다는 것은 문자적으로는 ‘일백 배’를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영생을 상속합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생에서는 물질적 배가를 얻게 되며, 내생에서는 영생의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윌리엄 캐리는 인도에서 복음을 전한 영국 선교사입니다. 캐리는 개신교 현대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립니다. 그는 리빙스턴을 아프리카에 파송하고, 토마스를 한국에 파송한 런던선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충심이 대단하였지만 대가는 혹독하였습니다. 풍토와 환경이 열악하여 고생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정부의 관료주의와 매일 씨름해야 했습니다.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고, 자녀들도 잃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41년간 한 번도 영국에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많은 것을 잃었지만 영생을 상속하는 복을 누린 것입니다.
“열심히 일한 대가는 미래에 받게 되지만 게으름의 대가는 지금 당장 받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는 자가 된 대가는 현재도 육적인 복을 받지만 미래에 영생의 소망으로 주어질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지은 인간에게 하나님은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라고 하시며 먹지 못하게 하시고 영생도 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자신을 버린 자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영생을 보장하십니다.
십자가의 영성을 위한 실천은 몇 가지 훈련을 통하여 가능하다고 합니다. 첫째는 정직성의 훈련입니다. 둘째는 소유를 버리는 훈련입니다. 셋째는 자기 부인의 훈련입니다. 넷째는 고독의 훈련입니다. 다섯째는 환난을 통한 훈련입니다. 여섯째는 낮아지고 섬기는 훈련입니다. 버리는 훈련은 십자가의 영성을 위한 중요한 훈련이며 실천입니다. 수도사들이 이런 훈련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제가 만났던 수도사들 가운데는 부잣집 장자도 있고, 의사도 있고, 변호사도 있고, 약사도 있었습니다. 이런 분들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십자가를 향해 정진하고 있는 이들입니다.
하나를 얻으려면 다른 하나를 버려야 합니다. 버리지 않고는 바꿀 수 없고, 죽지 않고는 다시 살아날 수 없습니다. 신앙적으로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잘 버리는 것이 지혜입니다. 어떤이가 말하기를 “행복한 삶의 조건은 자신이 가진 5%를 버리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사실입니다. 버려보십시오. 그 때부터 행복한 삶은 시작이 됩니다.
제비 이야기입니다. 아빠 제비와 아기 제비가 얘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아빠, 저 아까운 집을 버리고 정말 떠나야 하는 거예요?” 아기 제비의 말을 듣고 아빠 제비가 남쪽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소유에 집착하다가 강남땅을 놓치고 얼어 죽은 제비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버리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버리는 것이 영생을 얻는 길입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영생의 개념이 있습니다. 첫째는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을 통한 ‘영생’(eternal life)입니다. 둘째는 고대 로마인들이 말하는 공동체 구성원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아 있음으로 이루는 ‘불멸의 삶’(immortal life)입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영생이란 인간의 기억이나 생각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재(實在)이며 미래의 영원한 삶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구원의 삶, 영생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참 쉽습니다. 우리가 쉽게 구원 얻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가장 어려운 방법을 택하셨습니다.
프랑스의 극작가 장 아누이는 “당신이 공짜로 얻은 것은 너무 많은 것을 이미 지불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구원 얻은 것은 공짜로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나의 구원을 위하여 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엄청나게 많은 대가를 이미 지불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대가로 우리가 영생을 얻었습니다.
결 론
독일 개신교회의 목사인 디트리히 본회퍼는 히틀러 암살계획에 가담하여 1945년 4월 미군이 진출하기 직전에 처형을 당하였습니다. 그는 ‘제자도의 대가’라는 그의 책에서 십자가가 사라진 은혜는 값싼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무엇이든 대가가 있어야 가치도 있습니다. 십자가는 대가 때문에 무한한 가치가 있습니다.
십자가의 믿음은 구원이라는 하나님 나라가 주어지는 대가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세상에서 승리하는 자가 하나님 나라에서 받을 대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낙원에서생명나무 열매를 먹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게 하겠다고 합니다. 셋째는 만나를 주어 먹게 하며 흰 돌에 새 이름을 새겨 주겠다고 합니다. 넷째는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겠다고 합니다. 다섯째는 흰옷을 입히며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우지 않겠다고 합니다. 여섯째는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겠다고 합니다. 일곱째는 하나님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겠다고 합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 나라를 얻는 자에게는 이런 엄청난 대가가 주어집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자도 대가가 있습니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못에서 이를 갈며 슬피 울고, 끝이 없는 고통 속에 살게 되는 대가가 주어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가로 영생을 얻게 된 우리는 감사하며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잘 따르는 자에게는 주님의 보좌에 함께 앉아 심판하는 권리를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게 되는 영생을 상속하는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마음을 다해 주님을 잘 따릅시다. 그리하여 영생의 복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