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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불교와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관문
영어 공부와 불서 읽기의 묘미 - 불기 2559년(2015년) 4월 23일 후기
Bhikkhu Bodhi 스님의 In the Buddha's Words (14)
영어 공부와 불서 읽기의 묘미 4월 23일 후기.hwp
서울경기강원지역방 3327번 글 http://cafe.daum.net/altlovebuddha/PEK/3327
의 후속타입니다.
<Bhikkhu Bodhi 스님의 In the Buddha's Words> 를 열네 번째로 읽었습니다. 오늘 영어 불서읽기에는 설각 스님, 환희장엄 법우, 클나라 법우, 저 관문 이렇게 4명이 참석했습니다.
오늘도 지난번에 모였던 장소 ‘Cafe 57th’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이곳은 지하철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에서 나와 80 미터 가량 직진하신 후 풍문여고를 오른 쪽에 끼고 돌아서 약 60 미터 가면 보이는 곳입니다. 모이는 때는 매주 목요일 오후 7시입니다. 다음 주(4/30)는 연휴가 시작되는 관계로 임시 휴강합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우리의 교재 <Edited and introduced by Bhikkhu Bodhi, In the Buddha's Words> 중 III. Approaching the Dhamma 의 Introduction을 읽었습니다. 교재 81페이지 밑에서 2째 줄부터 86페이지 5째 줄까지입니다.
<Bhikkhu Bodhi 스님의 In the Buddha's Words>를 읽는 동안의 후기는 영어와 저희가 시도해 본 번역을 올리겠습니다. 아직 이 책의 우리말 번역본이 없어서 이 후기는 순전히 저희 영어불서 읽기 모임의 작품이 되겠습니다.
III. Approaching the Dhamma
제3장 담마[법, 진리]에 다가가기
INTRODUCTION
소개 글
This solution to the problem of religious diversity has an immediate appeal to those disillusioned with the exclusive claims of dogmatic religion. Honest critical reflection, however, would show that on the most vital issues the different religions and spiritual traditions take different standpoints. They give us very different answers to our questions concerning the basic grounds and goals of the spiritual quest and often these differences are not merely verbal. To sweep them away as being merely verbal may be an effective way of achieving harmony between followers of different belief systems, but it cannot withstand close examination. In the end, it is as little tenable as saying that, because they have beaks and wings, eagles, sparrows, and chickens are essentially the same type of creature, the differences between them being merely verbal.
종교의 다양성의 문제에 대한 이러한 해결법은 독선적인 종교의 배타적인 주장에 환멸을 느낀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매력을 가진다. 하지만 정직하게 비판적으로 생각해보면, 가장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다른 종교들과 영적인 전통들이 다양한 입장을 취한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그것들[다른 종교들과 영적인 전통들]은 영적인 추구의 근본적인 근거와 목표에 대한 우리의 질문에 대해 매우 다양한 대답을 하고, 종종 이러한 차이는 단순히 말뿐만이 아니다. 그것들[차이들]을 단순히 말뿐인 것으로 일소해 버리는 것은 다양한 신앙 체제의 신도들 사이에 조화를 이루는 효과적인 방법일지는 모르나, 그것은 면밀한 조사를 해 볼 때 허점이 드러난다. 결국, 그것은 부리와 날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독수리, 참새와 닭은, 그들 간의 차이점은 단지 말뿐이라고 해서, 본질적으로 같은 유형의 생물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공격을 견디어낼 수 없다.
It is not only theistic religions that teach doctrines beyond the range of immediate empirical confirmation. The Buddha too taught doctrines that an ordinary person cannot directly confirm by everyday experience, and these doctrines are fundamental to the structure of his teaching. We saw, for example, in the introductions to chapters I and II, that the Nikāyas envisage a universe with many domains of sentient existence spread out in boundless space and time, a universe in which sentient beings roam and wander from life to life on account of their ignorance, craving, and kamma. The Nikāyas presuppose that throughout beginningless time, Buddhas without number have arisen and turned the wheel of the Dhamma, and that each Buddha attains enlightenment after cultivating spiritual perfections over long periods of cosmic time. When we approach the Dhamma we are likely to resist such beliefs and feel that they make excessive demands on our capacity for trust. Thus we inevitably run up against the question whether, if we wish to follow the Buddha’s teaching, we must take on board the entire package of classical Buddhist doctrine.
직접적으로 경험적인 확신의 범위를 넘어서는 교리를 가르치는 것은 단지 유신론적 종교뿐만이 아니다. 붓다도 또한 보통 사람들이 일상의 경험에 의해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교리들을 가르쳤고, 이 교리들은 그의 가르침의 구조에 토대를 이루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제1장과 제2장의 소개 글에서, 니까야들은 무한한 공간과 시간에 퍼져있는 감각이 있는 존재들의 많은 영역을 가진 우주와, 중생들이 그들의 무명, 갈애와 업 때문에,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헤매고 떠돌아다니는 우주를 마음에 그리고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니까야들은 시작 없는 시간 동안 내내, 셀 수 없는 붓다들이 나타나서 담마의 바퀴를 굴렸고, 각각의 붓다는 오랜 우주적 시간[겁]에 걸쳐서 영적인 완성을 닦은 후에 깨달음을 이룬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우리가 담마에 다가갈 때, 우리는 이러한 신앙에 저항하고 그런 신앙은 우리의 믿음과 능력에 지나친 요구를 하고 있다고 느끼기 쉽다. 만일 우리가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고 싶다면, 이렇게 우리는 불가피하게, 우리가 고전적인 불교의 교리의 전체 꾸러미를 받아들여야만 하는가의 문제와 마주친다.
For Early Buddhism, all the problems we face in deciding how far we should go in placing faith can be disposed of at a single stroke. That single stroke involves reverting to direct experience as the ultimate basis for judgment. One of the distinctive features of the Buddha’s teaching is the respect it accords to direct experience. The texts of Early Buddhism do not teach a secret doctrine, nor do they leave scope for anything like an esoteric path reserved for an élite of initiates and withheld from others. According to Text III,1, secrecy in a religious teaching is the hallmark of wrong views and confused thinking. The teaching of the Buddha shines openly, as radiant and brilliant as the light of the sun and moon. Freedom from the cloak of secrecy is integral to a teaching that gives primacy to direct experience, inviting each individual to test its principles in the crucible of his or her own experience.
초기불교에서, 신앙의 위치를 정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멀리 가야하는가를 결정할 때 직면하는 모든 문제들은 일격(一擊)에 해결될 수 있다. 그 일격에는 판단의 궁극적인 토대로서 직접적인 경험으로 돌아가는 것이 포함된다. 붓다의 가르침의 독특한 특성 중의 하나는 직접적 경험에 부여하는 존경이다. 초기불교의 경들은 비밀스러운 교리를 가르치지도 않고, 비법을 전수받은 사람 중의 엘리트를 위해 준비되어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주는 것이 보류되어 있는 은밀한 길과 같은 것의 여지를 남겨놓지 않는다. Text III,1에 의하면, 종교적 가르침에서 비밀이 있는 상태는 그릇된 견해와 혼동된 사고방식의 특징이다. 붓다의 가르침은 공개적으로 태양과 달의 빛처럼 빛나고 반짝이면서 비친다. 비밀스러움의 가면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각 개인이 자신의 경험의 도가니에서 그 원칙들을 시험해 보도록 요청하면서, 직접적 경험을 가장 중요시하는 가르침에 없어서는 안 된다.
This does not mean that an ordinary person can fully validate the Buddha’s doctrine by direct experience without special effort. To the contrary, the teaching can only be fully realized through the achievement of certain extraordinary types of experience that are far beyond the range of the ordinary person enmeshed in the concerns of mundane life. However, in sharp contrast to revealed religion, the Buddha does not demand that we begin our spiritual quest by placing faith in doctrines that lie beyond the range of our immediate experience. Rather than ask us to wrestle with issues that, for us in our present condition, no amount of experience can decide, he instead asks us to consider a few simple questions pertaining to our immediate welfare and happiness, questions that we can answer on the basis of personal experience. I highlight the expression “for us in our present condition,” because the fact that we cannot presently validate such matters does not constitute grounds for rejecting them as invalid or even as irrelevant. It only means that we should put them aside for the time being and concern ourselves with issues that come within the range of direct experience.
이것은 보통 사람이 특별한 노력도 없이 직접적 경험에 의해 붓다의 교리를 완전히 확증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와 반대로, 그 가르침은 세속 생활의 관심사에 빠져있는 보통 사람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어떤 특별한 유형의 경험의 달성을 통해서 완전히 실현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계시종교[성서에 기초를 둔 종교]와는 뚜렷이 대조적으로, 붓다는 직접적 경험의 범위를 넘어서 있는 교리에 믿음을 둠으로써 영적인 추구를 시작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현재 상태의 우리에게, 어떤 경험도 결정할 수 없는 문제들과 씨름하도록 우리에게 요구하기보다는, 그는 대신에 우리가 우리의 직접적인 복지와 행복에 관계되는 몇 가지 간단한 문제와, 우리가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대답할 수 있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기를 요구한다. 나는 “현재 상태의 우리에게”라는 표현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이런 문제들을 확증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것들을 근거가 희박하다거나 심지어 부적절하다고 거부하는 이유를 구성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우리는 당분간 그것들을 치워두고 직접적 경험의 범위 내에 오는 문제들을 문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The Buddha says that his teaching is about suffering and the cessation of suffering. This statement does not mean that the Dhamma is concerned only with our experience of suffering in the present life, but it does imply that we can use our present experience, backed by intelligent observation, as a criterion for determining what is beneficial and what detrimental to our spiritual progress. Our most insistent existential demand, springing up deep within us, is the need for freedom from harm, sorrow, and distress; or, positively stated, the need to achieve well-being and happiness. However, to avoid harm and to secure our well-being, it is not sufficient for us merely to hope. We first have to understand the conditions on which they depend. According to the Buddha, whatever arises, arises through appropriate causes and conditions, and this applies with equal force to suffering and happiness. Thus we must ascertain the causes and conditions that lead to harm and suffering, and likewise the causes and conditions that lead to well-being and happiness. Once we have extracted these two principles—the conditions leading to harm and suffering, and the conditions leading to well-being and happiness—we have at our disposal an outline of the entire process that leads to the ultimate goal, final liberation from suffering.
붓다는 그의 가르침이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담마가 단지 현재의 삶에서 괴로움의 경험과 관계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성적인 관찰에 의해 지지받아, 우리의 현재 경험을 우리의 영적인 진보에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을 결정하는 기준으로 사용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 안의 깊은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장 긴급을 요하는 존재적인 요구는 해로움, 슬픔과 고뇌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이다. 혹은 적극적으로 말하면, 복지와 행복을 성취하려는 욕구이다. 하지만 해로움을 피하고 복지를 확보하기 위해서 우리가 단지 바라기만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먼저 그것들[해로움과 복지]이 의지하고 있는 조건들을 이해해야 한다. 붓다에 의하면, 일어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적절한 원인과 조건을 통해서 일어나고, 이것은 동등한 힘을 가지고 괴로움과 행복에 적용된다. 이렇게 우리는 해로움과 괴로움으로 이끄는 원인과 조건을 확인해야 하고 마찬가지로 복지와 행복으로 이끄는 원인과 조건도 확인해야 한다. 일단 우리가 이 두 가지 원칙—해로움과 괴로움으로 이끄는 조건들과 복지와 행복으로 이끄는 조건—을 이끌어내고 나면, 우리는 궁극적 목표인 괴로움으로부터의 마지막 해탈로 이끄는 전체의 과정의 개요를 우리 마음대로 가지게 된다.
One text offering an excellent example of this approach is a short discourse in the Aṅguttara Nikāya popularly known as the Kālāma Sutta, included as Text III,2. The Kālāmas were a people living in a remote area of the Ganges plain. Various religious teachers would come to visit them and each would extol his own doctrine and tear down the doctrines of his rivals. Confused and perplexed by this conflict of belief systems, the Kālāmas did not know whom to trust. When the Buddha passed through their town, they approached him and asked him to clear away their doubts. Though the text does not specify what particular issues were troubling the Kālāmas, the later part of the discourse makes it clear that their perplexities revolved around the questions of rebirth and kamma.
이러한 접근법의 뛰어난 실례를 제공하는 한 경은 Text III,2에 들어있는 깔라마경으로 널리 알려진 앙굿따라 니까야에 있는 짧은 설법이다. 깔라마인들은 갠지스 평원의 외딴 지역에 살고 있는 종족이었다. 다양한 종교지도자들이 그들을 찾아와서 각기 자신의 교리를 찬양하고 경쟁관계에 있는 자들의 교리를 비방하곤 했다. 신앙체계의 이러한 대립 때문에 혼란스럽고 당황해서, 깔라마인들은 누구를 신뢰해야 할지 몰랐다. 붓다가 그들의 마을을 지나갈 때, 그들은 붓다에게 가서 자신들의 의심을 풀어 달라고 요청했다. 경에서는 어떤 특별한 문제가 깔라마인들을 괴롭히고 있었는지 명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설법의 후반부에는 그들의 골치 아픈 문제는 다시 태어남과 업의 문제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The Buddha began by assuring the Kālāmas that under such circumstances it was proper for them to doubt, for the issues that troubled them were indeed common sources of doubt and perplexity. He then told them not to rely on ten sources of belief. Four of these pertain to established scriptural authority (oral tradition, lineage of teaching, hearsay, and collections of texts); four to rational grounds (logic, inferential reasoning, reasoned cogitation, and the acceptance of a view after pondering it); and two to authoritative persons (impressive speakers and respected teachers). This advice is sometimes quoted to prove that the Buddha rejected all external authorities and invited each individual to fashion his or her own personal path to truth. Read in context, however, the message of the Kālāma Sutta is quite different. The Buddha is not advising the Kālāmas—who, it must be stressed, had at this point not yet become his own disciples—to reject all authoritative guides to spiritual understanding and fall back solely on their personal intuition. Rather, he is offering them a simple and pragmatic outlet from the morass of doubt and perplexity in which they are immersed. By the use of skillful methods of inquiry, he leads them to understand a number of basic principles that they can verify by their own experience and thereby acquire a sure starting point for further spiritual development.1
붓다는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의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깔라마인들에게 단언하면서 말을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들을 괴롭히는 문제들은 진정으로 의심과 당혹스러움의 보편적인 근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붓다는 그들에게 믿음의 10가지 근원에 의지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이 중 4가지는 기존의 경전적 권위(구전, 가르침의 계보, 소문, 경전의 모음집)와 관련된 것이고, 4가지는 이성적 근거(논리, 추리에 입각한 추론, 조리가 선 고찰, 심사숙고한 후에 견해를 받아들임)와 관련된 것이고, 두 가지는 권위를 가진 사람(인상적인 연설가와 존경받는 스승들)과 관련된 것이다. 이 조언은 때때로 붓다가 모든 외부의 권위자를 거부하고 각 개인이 자신의 개인적인 길을 진리에 맞추도록 요구했음을 입증하는 것으로 인용된다. 하지만 문맥 안에서 읽어보면, 깔라마경의 메시지는 아주 다르다. 이 점을 강조해야 되는데, 깔라마인들은 이 시점에서 아직 붓다의 제자가 되지 않았고, 붓다는 그들에게 영적인 이해의 모든 권위를 가진 안내자를 거부하고 오로지 자신들의 개인적 통찰에 의지하라고 충고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붓다는 그들이 빠져있는 의심과 당혹의 늪으로부터 벗어나는 단순하고 실용적인 출구를 그들에게 제안하고 있다. 질문[의문]이라는 숙련된 방법을 사용해서, 붓다는 그들을 그들 자신의 경험에 의해 입증할 수 있는 여러 가지의 기본적인 원칙을 이해하도록 안내하고, 그럼으로써 더 나아가 영적인 발전의 확실한 출발점을 획득하도록 한다.(주1)
NOTE 1. Among the criteria he proposes is the opinion of the wise, which shows that far from rejecting the opinions of others, the Buddha includes the opinions of the right sort of person among the standards for determining proper conduct. Other suttas tell us how we can judge who is truly wise; see Text III,4 and Text III,5.
(주1) 붓다가 제시하는 기준 중에 현자들의 의견이 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붓다는 적절한 행동을 결정하는 표준 가운데 제대로 된 사람들의 의견을 포함시키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른 경들은 어떻게 우리가 누가 진정으로 현자인지 판단할 수 있는가를 말해준다. Text III,4와 Text III,5를 보라.
Always underlying the Buddha’s questions and their replies is the tacit premise that people are primarily motivated to act by a concern for their own welfare and happiness. In asking this particular set of questions, the Buddha’s purpose is to lead the Kālāmas to see that, even when we suspend all concern with future lives, unwholesome mental states such as greed, hatred, and delusion, and unwholesome actions such as killing and stealing, eventually redound to one’s own harm and suffering right here and now. Conversely, wholesome mental states and wholesome actions promote one’s long-term welfare and happiness here and now. Once this much is seen, the immediately visible harmful consequences to which unwholesome mental states lead become a sufficient reason for abandoning them, while the visible benefits to which wholesome mental states lead become a sufficient motivation for cultivating them. Then, whether or not there is a life after death, one has adequate reasons in the present life to abandon unwholesome mental states and cultivate wholesome mental states. If there is an afterlife, one’s recompense is simply that much greater.
붓다의 질문과 그 대답에 항상 잠재해 있는 것은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자신들의 복지와 행복에 대한 관심에 따라 행동하도록 동기지어진다는 암묵적인 전제이다. 이러한 특별한 일련의 질문을 할 때, 붓다의 목적은 깔라마인들이, 우리가 미래생과의 모든 이해관계를 보류할 때에도, 탐욕, 성냄, 어리석음과 같은 불건전한 정신적 상태와, 살생, 도둑질과 같은 불건전한 행동은 결국 바로 지금 여기에서 자신의 해로움과 괴로움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도록 이끄는 것이다. 반대로, 건전한 정신적 상태와 건전한 행동은 지금 여기에서 장기간에 걸친 복지와 행복을 증진시킨다.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즉각적으로 눈에 띄는 불건전한 정신적 상태로 이끄는 해로운 결과는 그것들을 포기하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한편 건전한 정신적 상태로 이끄는 눈에 띄는 이득은 그것들을 배양하는 충분한 동기가 된다. 그러면, 죽음 후의 생이 있든 없든 간에, 사람은 지금 현재의 삶에서 불건전한 정신적 상태를 버리고 건전한 정신적 상태를 배양하는 적절한 이유를 가진다. 만약 사후세계가 있다면, 보상은 꼭 그 만큼 더 크다.
A similar approach underlies Text III,3, in which the Buddha demonstrates how present suffering arises and ceases in correlation with present craving. This short sutta, addressed to a lay follower, concisely articulates the causal principle that lies behind the Four Noble Truths, but rather than doing so in the abstract, it adopts a concrete, down-to-earth approach that has a remarkably contemporary appeal. By using powerful examples drawn from the life of a layman deeply attached to his wife and son, the sutta makes a deep and lasting impression on us.
비슷한 접근법이 Text III,3의 근저에 깔려있는데, 이 경에서 붓다는 현재의 갈애와 상호관련 속에서 어떻게 현재의 괴로움이 일어나고 소멸하는지를 논증하고 있다. 이 짧은 경은, 재가신도에게 설한 것인데, 사성제의 배후에 있는 인과적인 원칙을 간결하게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추상적으로 하기보다는 눈에 띄게 현대적인 매력을 가지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접근법을 채택하고 있다. 아내와 자식에게 깊이 애착하고 있는 한 재가신도의 생애에서 이끌어온 강력한 예를 들어서, 경은 우리에게 깊고 오래가는 인상을 주고 있다.
The fact that such texts as this sutta and the Kālāma Sutta do not dwell on the doctrines of kamma and rebirth does not mean, as is sometimes assumed, that such teachings are mere cultural accretions to the Dhamma that can be deleted or explained away without losing anything essential. It means only that, at the outset, the Dhamma can be approached in ways that do not require reference to past and future lives. The Buddha’s teaching has many sides, and thus, from certain angles, it can be directly evaluated against our concern for our present well-being and happiness. Once we see that the practice of the teaching does indeed bring peace, joy, and inner security in this very life, this will inspire our trust and confidence in the Dhamma as a whole, including those aspects that lie beyond our present capacity for personal verification. If we were to undertake certain practices—practices that require highly refined skills and determined effort—we would be able to acquire the faculties needed to validate those other aspects, such as the law of kamma, the reality of rebirth, and the existence of supersensible realms (see Text VII,4 §§23–24 and Text VII,5 §§19–20).
이 경과 깔라마경과 같은 경전들이 업과 다시 태어남의 교리에 대해 상세히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때때로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듯이, 그러한 가르침이 본질적인 것은 전혀 잃지 않고 삭제되거나 둘러댈 수 있는 단순한 담마에의 문화적인 첨가물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최초에, 담마는 과거생과 미래생과의 관련을 필요로 하지 않는 방식으로 접근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붓다의 가르침은 많은 면을 가지고 있어서, 어떤 각도에서 보면, 우리의 현재의 복지와 행복에 대한 관심을 배경으로 직접 평가될 수 있다. 일단 우리가 그 가르침의 실천이 정말로 평화, 기쁨과 내적 안전을 바로 이 삶에서 가져온다는 것을 알면, 이것은 개인적인 확인에 대한 우리의 현재의 능력을 넘어서 있는 국면을 포함해서, 전체로서의 담마에 대한 우리의 신뢰와 확신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만일 우리가 어떤 수행들—고도로 세련된 기술과 단호한 노력을 필요로 하는 수행들—을 시작한다면, 우리는 업의 법칙, 다시 태어남의 실재, 초감각적인 세계의 존재 등과 같은 다른 국면을 입증하는 데 요구되는 능력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Text VII,4 §§23–24 와 Text VII,5 §§19–20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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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불교와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