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을 통해 얻는 어울림
김학영
밤이 깊은가 했더니 어느 사이 새벽이다. 글 한 편을 완성하기 위해
한 밤을 지새고도 성취에서 오는 흡족함은 없고, 다른 사람의 옷을
빌려 입은 듯 마음이 불편하기만 하다.
어둠에 가려져 있는 세계는 온통 虛다. 가까이 있는 아파트도 검은
색의 虛요 멀리 매봉산의 산자락도 엄연히 虛다. 어느 곳이 논둑이
고 어느 곳이 밭이랑인지 알 수 없는 그저 커다란 검은 캔버스 한 장
펼쳐져 있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모습이다.
누리를 위무(慰撫)할 태양이 솟아 오르기 전의 어둠이 가득한 시
간 온 세상이 虛로 빼곡이 차있다. 채우는 것에만 익숙하게 길들여진
나는 엄연히 공존하는 두개의 세계(有爲, 無爲)를 모르고 살아와
가 있어야 有가 존재 할 수 있는 원리, 수레바퀴는 공간이 있어야 구
를 수 있는 이치를 생각하지 못했다.
하늘이 있으면 땅이 있고 해가 있으면 달이 있는 세계, 남자가 있
으면 여자가 있고 가득함이 있으면 모자람이 있는 세계에서, 눈에 보
이는 有가 있으면 반드시 보이지 않는 虛가 공존하는 것이 만고불변
의 법칙임에도 눈에 보이는 실체만 생각했지 공기의 고마움조차 모
르고 살아온 것 같다.
사물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한다.
초등학교 미술시간에는 산을 그린 다음에 집을 그리고 집을 그린 후
길을 그렸지만 눈앞에 그려지는 그림은 아파트가 먼저다. 고만고만
한 키의 성냥갑을 세워놓은 듯한 모습이 그려지고 밭둑이 보이기 시
작하더니 뒤늦게 멀리 매봉산의 산자락이 은근하게 펼쳐진다.
새벽운동을 시작한 사람들의 부지런한 기운이 기분좋게 퍼지는 시
각 여기저기 술렁이는 사람들의 모습 중 노인들이 단연 으뜸이다.
육십을 넘은 나이는 쉽게 발견할 수 있지만 사십 이하의 나이는 좀 처
럼 발견할 수 없는 것이 요즘 새벽 산의 모습이다.
장수 체조를 하는 사람들이 태권도의 기마 자세처럼 자세를 낮추
고 복부를 두드리는 소리가 산골짝에 가득히 건강한 기운을 뿜는다.
삶에 지친 세인들에게 힘을 북돋아 주는 승전고 소리처럼 힘차게 울
려 퍼진다.
건강한 삶을 지향하는 부지런한 모습들을 보면서 문득 요즈음 나
의 화두인 조화라는 낱말을 떠올려본다.
내가 사는 곳이라서 그렇게 생각되는 것인지 모르지만 이곳 수곡
동의 그림은 비교적 조화가 잘 이루어진 것 같다. 산이 둘러쳐진 구
도가 좋고 아파트의 배치가 좋으며 무엇보다 여백의 미가 좋은 곳이
다.
다른 동네에 비해 아이들 놀이터가 많고 휴식공원이 많아 넉넉함
을 느낄 수 있으며, 어느 한곳의 욕심이 많이 작용해 어울림을 깨는
일이 없는 균형미가 있어 마음에 든다.
아파트가 有라면 놀이터와 공원은 虛라면서 가 부족한 서울의
도시계획을 강력히 비판하는 김용옥 교수 노자강의를 녹화해 가면
서 열심히 듣고 있다.
비싼 땅에 놀이터나 휴식공간보다 돈이 되는 아파트 위주의 계획
을 하다보니 자연적으로 빌딩이 숲을 이루어 숨이 막힐 정도의 서울
현실을 목이 쉬도록 개탄하는 모습이 TV화면을 가득 채운다.
나는 조화라는 낱말보다 순수한 우리말인 어울림이라는 말을 더
좋아한다 어느 한쪽이 모자라거나 지나치면 어울림은 이루어지지
않아 보기 싫다.
굽이 높은 구두를 신은 내 옆에서 고무신을 신고도 키를 낮추느라
무릎을 구부린 아내는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벌을 서는 모습으로 힘
이 들었다. 억지로 나와 키를 맞추느라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외적인 어울림이 거꾸로 된데다 급한 성격인 나와 달리 아내는 성
격이 느긋하여, 일찍이 우리 부부는 서로 다른 성격을 어울리게 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인생의 숙제가 벅차 신혼 초부터 부부싸움이 잦았
다. 외면도 내면도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의 남녀가 살아가면서 어우러
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던가.
어울림! 그것은 어찌 보면 상대적인 요소가 같이 있을 때 이루어지
는 묘한 것이라 생각된다. 태초에 아담만 만들어졌다는 생각을 가끔
해본다.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말이다.
나보고 신의 작품 중 가장 훌륭한 것을 꼽으라면 아담이 잠든 사이
만드신 이브를 자신 있게 꼽겠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지상 최대의
작품인 것 같다.
나의 이브는 부족한 나를 섬기느라 상당부분 힘이 들었다. 선악과
를 따먹자고 내게 단 한번 유혹한 적도 없으면서, 살아오는 동안 일
이 잘못 될 때마다 원망을 들어야했고, 괴팍하고 신경질적이며 욕심
이 많은 내 성격을 감내하느라 허구헌날 속울음을 울어야했다.
요즈음 노자강의를 듣고 내 삶을 뒤돌아보며 깨우친 점이 있다면
虛라는 존재의미다 비우는 삶을 살아갈 때 보다 값진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옛 성현의 지혜를 깊이 생각해 본다.
虛其心 實其腹(마음을 비워 자기를 채움)이라 했다 컵이 비어 있
어야 물을 채울 수 있듯이 내 마음에 욕심을 비워야 빈 공간에 측은
지심이나 사양지심을 채울 수 있을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속물로 가득 찬 자신의 그릇을 밑바닥까지 비워내
고 맑고 깨끗한 무위자연의 물로 헹구어내고 싶다 새롭게 정화되고
순화된 순일한 영혼의 물을 담아 크게는 이 세계에서, 작게는 우리
가정에서 유용하게 쓰여지는 그릇으로 살고 싶다.
어느 한편이 기울어져 보기 싫은 곳에 자신이 다가섬으로 균형이
잡혀가는 모습을 상상해보면 가슴이 뿌듯해진다.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의 역할을 썩어 가는 곳에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
을까.
십 년만에 맞이하는 화이트크리스마스라고 모두가 야단법석이다.
모 백화점에서는 크리스마스에 눈이 오면 천만원 상당의 경품을 주
겠다고 일찍부터 호들갑을 떤 모양이다. 창을 열면 순백의 눈이 햇빛
을 받아 눈이 부시다.
멀리 매봉산의 소나무 위에 얹혀있는 눈송이들이 마치 백로들이
무리 지어 앉아있는 모습처럼 아름답다. 모든 안부와 소식을 전화로
묻고 전하게 되면서 편지 써본 기억조차 까마득한 내게 올 겨울 설경
이 그려진 카드가 몇 장 배달되어 우리 집은 방안도 눈이고 창밖에도
눈이다.
미처 생각조차 하지 못한 내게 소중한 마음을 전한 분들을 어떻게
뵈어야할지 부끄럽다 말만 앞세우고 행동은 따라주지 못한 자신의
인간미 부족한 내면이 또 한번 자료로 입증된 것 같아 거북살스런
마음으로 창 밖의 눈을 바라본다.
새 천년이 시작되는 경진년에는 내 마음속에 눈처럼 하얀 여백을,
虛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마음 가득한 욕심과 집착을 쏟
아버려 하얗게 비어버린 마음의 캔버스에, 더불어 사는 삶과 작지만
소중하고 바람직한 삶들을 스케치해서 내 신앙과 어울리는 따뜻한
그림을 그려볼 작정이다.
1999년 11월 29일 천년이 저물어 가는 더 없이 소중한 시간에
2001. 11 집
첫댓글 새 천년이 시작되는 경진년에는 내 마음속에 눈처럼 하얀 여백을,
虛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마음 가득한 욕심과 집착을 쏟
아버려 하얗게 비어버린 마음의 캔버스에, 더불어 사는 삶과 작지만
소중하고 바람직한 삶들을 스케치해서 내 신앙과 어울리는 따뜻한
그림을 그려볼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