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2일 하느님 안에 있기
‘마음의 움직임을 잘 살피십시오.’ 아주 오래전 고해소에서 고해 사제에게 들은 권고다. 특별한 말도 아니고 고해자들에게 자주 해주는 말이었을 거다. 그런데도 아직도 그날을 기억하는 걸 보면 그 말이 아주 특별했었나 보다. 내가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살피고 움직일 수 있음을 깨달았던 거 같다.
하느님은 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따 먹지 말라고 하셨을까?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으면 좋을 거 같은데 말이다. 그 옛날 창세기 저자도 사람 안에 있는 반대 심리, 즉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마음을 발견했던 것일까? 악을 알면 악을 피하는 게 아니라 악으로 끌리는 마음을 봤던 거 같다. 하느님 안에 있으면 선행만 하는 게 아니라 선과 악을 구별하거나 악행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을 거다. 선과 악을 구분하는 능력보다는 하느님 안에 있는 게 최고의 선이다.
가톨릭 기도서를 보면 정말 많은 기도가 있다. 아침저녁 기도부터 시작해서 밥 먹을 때와 먹고 난 후 바치는 기도, 일을 시작할 때와 끝마쳤을 때 등등 그 많은 기도를 다 바쳐야 하는 건가? 그게 아니라 생활하는 동안 기도할 수 있게, 하느님과 연결될 수 있게 해주는 도구고 방법이다. 사람은 본시 하느님, 하늘나라, 영원, 영혼 같은 영적인 실재를 생각하지 않으면 그 즉시 세속적인 것에 몸과 마음을 빼앗기게 되어 있다. 세속적이라고 다 악한 건 아니지만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건 분명하다. 그렇다고 때와 상황에 따라 해야 할 기도를 일일이 다 정해놓고 기도하기 어려우니 내 안에 계시며 나와 함께 사시는 예수님과 수시로 대화하는 습관을 키워야겠다. 그것은 심각하고 심오하거나 거룩한 얘기일 필요 없다. 속상했던 일, 미운 사람 얘기도 좋다. 그 대신 최대한 솔직하고, 연인이나 가장 친한 친구보다 더 친하게 말한다. 중요한 건 대화 내용이 아니라 그분과 함께 있는 시간이다. 그것은 하느님 안에서 지내는 시간이다.
우리의 관심은 외적 행위가 아니라 내적인 상태, 영혼과 마음이다. 그렇다고 외적 행위나 수련이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니다. 기도, 금욕, 단련은 내 영혼을 더 하느님께 향하게 하고 튼튼하게 성장시킬 때 그 의미가 있다. 그래서 소위 열심하다고 하고 기도도 많이 하는 교우 중에 마음이 차가운 사람을 만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주님과 만남은 없고 그 행위만 있었기 때문일 거다. 바리사이 율법 학자들이 그런 사람들이었다. 사랑하고 자비로워야 한다는 신앙이 폭력이 되는 이유다. 하느님 없는 ‘열심’이다. 그런 ‘열심’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살해한 거다. 마음 안에 하느님이 안 계시니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한 거다. 하느님 나라에 안전하게 완전히 들어갈 때까지 늘 깨어 마음을 살펴 길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잠언은 말한다.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거기에서 생명의 샘이 흘러나온다(잠언 4,23).”
예수님, 제 마음이 주님의 계명으로 기울게 해주십시오. 오직 주님만 믿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아드님과 더 친밀해지게 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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