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할매못잖은'하빠'<할아버지+아빠>
힘·시간 다 되는 하빠들
신체나이 10년전에 비해 7세 젊어져 체력도 충분
은퇴후 노는 투명인간서 육아의 주축으로 부상중
60代가 가장 많이 산 책은 ‘삐뽀삐뽀119’… “잘 키우려면 배워야죠”
만사 제쳐두고 손주 키우기 전선에 뛰어드는 할아버지들, 미안함 씻으려 돌보미 자청
"30代엔 생계 위해 외면…자식에 미처 못해줬던걸 이제 해준다는 마음으로 손주 키워준다"
번역가로 일하다 최근 은퇴한 이창식(64)씨의 하루는 오전 8시에 시작된다. 매일 아침 정신과 의사인 사위가 두 살배기 손자 재영이를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에 있는 집으로 데려다 준다. 손자와 아침을 함께 먹고 오전 10시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어린이집에 재영이를 맡기고 나서 오후 4시까지가 이씨의 자유 시간이다.
지난 14일 오후 4시, 어린이집을 찾은 이씨가 큰 소리로 손자 이름을 불렀다. "재영아, 재영아." 재영이는 할아버지를 보자 활짝 웃으며 뛰어와 다리에 찰싹 붙었다. "하찌다! 하찌 왔다!" '하찌'는 재영이가 할아버지를 부르는 애칭이다. 손을 잡고 어린이집을 나선 두 사람은 함께 길 건너 놀이터로 향했다. 하루에 한두 시간씩 놀이터에서 재영이와 놀아주는 것은 외할아버지인 이씨의 몫이다. 재영이를 그네에 앉힌 이씨가 "슈욱! 슈욱!" 하면서 그네를 밀었다. 그네에서 내려온 재영이는 이씨의 손을 끌더니 땅을 가리키며 말했다. "하찌! 개미, 개미…." 이씨는 손뼉을 치며 "그래, 개미다, 개미"라고 맞장구를 쳤다. "우리 아파트 놀이터만 해도 할아버지 손을 잡고 나온 아이들이 점점 많아져요. 손주들에게 종일 사로잡힌 할아버지가 한두 명이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새액, 조옹이, 이, 저업, 기이! 새액, 조옹이, 이, 저업, 기이!" 지난 15일 네 살배기 여자아이 휘수가 질러대는 소리에 전북 전주시 완산구 황방산 자락의 단독 주택이 들썩거린다. 휘수는 전주북부경찰서(현 전주덕진경찰서) 서장을 지낸 신상채(64)씨의 손녀다. 휘수는 할아버지를 졸졸 쫓아다니며 소리를 질러댔다. 신씨는 맞벌이하는 아들 내외의 큰딸 휘수, 둘째 딸 유수, 건너편 아파트에 사는 차녀의 아들인 이겸이까지 세 명의 아이를 맡아 키우고 있다.
2009년 퇴임한 신씨는 퇴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로서는 자녀 곁에 있어주지 못했습니다. 퇴임 후에는 손주들 곁에 머물려고 합니다." 경찰로 일한 33년 동안 자녀 양육에 제대로 나서본 적이 없는 그는 지금은 손주 셋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다. 휘수는 다쳤을 때 "엄마" 대신 "하빠(할아버지)"라고 울부짖는다. "하빠가 제일 좋아!"라는 말을 달고 산다. 색종이 접어달라고 떼를 쓰던 휘수는 할아버지가 기자의 질문에 답하느라 바쁜 듯 보이자 품을 파고들더니 손을 뻗어 할아버지의 빵을 슬쩍 집어 먹었다. 신씨는 휘수를 꼭 껴안고 껄껄 웃었다. "사실상 우리 자식들은 아내가 키웠죠. 이제는 때때로 친구들 모임이나 여행을 하며 인생을 즐기죠. 그동안 일만 했던 저는 만사 제쳐놓고 손주들 육아에 전념하는 중입니다."
할아버지들이 손자·손녀 육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이른바 '하빠' 전성시대다. 하빠는 할아버지와 아빠를 합친 신조어다. 은퇴 후 집에서 삼시 세 끼 밥만 축낸다며 '삼식이'라고 놀림을 당했던 할아버지들이 집 안의 '투명인간' 신세에서 육아의 주축으로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할아버지'를 발음하기 어려워하는 어린 아이들 입에서 '하빠'라는 말이 나왔고, 이후 신씨가 지난 5월에 낸 책 '하빠의 육아일기'를 통해 많이 쓰이게 됐다.
'할아버지의 경제력과 할머니의 체력, 아빠의 무관심, 엄마의 정보력이 육아의 비법'이라는 우스갯소리는 이제 옛말이 됐다. 맞벌이 부부들은 "엄마 역할을 해주는 할머니뿐 아니라 아빠 역할을 해 줄 할아버지까지 나서야 아이를 키울 수 있다"고 말한다. 할아버지들은 왜 육아 전선에 뛰어들며 '하빠'가 되길 자청하는 것일까.
‘하빠’(할아버지+아빠)는“바쁜 엄마·아빠가 주지 못하는 사랑까지 가득 채워 손주를 사랑하려 한다”며 입을 모았다. 맨 위 사진은 신상채씨가 손녀 휘수·유수 자매와 뛰어노는 사진. 손녀들은‘하빠’와 있을 때 가장 크게 웃는다. 시계 방향으로 정석희씨가 손주 둘을 포대기
앞뒤에 안고 있는 사진이다. 그는“손주들은 내가 처음 맛보는 환희와 보람”이라고 말했다. 김병욱씨는 곧 태어날 손녀를 생각하며 직접 육아교실에 등록해 아기를 토닥이는 법부터 배웠다. 손자 재영이를 돌보는 이창식씨는“모든 시선을 손자에게 맞추다 보니 나까지 젊어지는 듯하다”고 했다. / 이진한 기자
|
◇보살핌 필요한 손주, 보살필 여력 되는 하빠
첫 손주를 보는 할아버지들은 대개 50대 후반에서 60대 초반이다. 6·25 전쟁 후 성장 가도를 달리던 한국에서 자라 한창 사회생활을 할 시기에 외환위기를 겪었다. 가족들을 먹여 살리는 것만으로도 힘이 부쳤다. 자연스레 자녀 양육은 아내의 몫이 되었다. 그래서 할아버지들은 육아 경험이 없는 경우가 많다. 할아버지에겐 손주 키우기가 생애 첫 육아다. '하빠'들은 손주를 키우면서 자녀나 부인과의 관계가 돈독해졌다고 말한다. 의정부 성모병원 소아청소년과 김영훈 교수는 "손주의 양육에 참여하려는 욕구는 가족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의 일종"이라고 말했다.
신상채씨는 10년 전에 지은 661㎡(약 200평) 크기의 2층짜리 단독주택에서 아들 부부와 함께 살고 있다. 아들 부부의 딸인 휘수·유수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손에 컸다. 큰길 건너편 아파트에 사는 딸 부부는 아들 이겸이를 자주 맡긴다. 신씨의 오전 일과는 잠에서 깬 아이들이 용변을 보게 하고 씻겨서 어린이집과 유치원에 보내는 것이다. "내 아들, 딸을 키우던 젊은 날에는 먹고 살기 급급해 자식 키우는 일에 무책임했어요. 은퇴 후 집에서 외로운 처지가 되어도 할 말이 없겠더라고요. 은퇴한 친구들을 봐도 자신의 역할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요. '지금이라도 손자들에게 후회 없는 사랑을 듬뿍 쏟아주는 방법으로 그때의 아쉬움을 풀어보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이들이 돌아오는 오후 4시쯤부터 부모가 퇴근하는 시간까지 함께 놀아주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아이들을 돌보는 기술에서는 할머니를 따라갈 수 없죠. 하지만 제가 도와주지 않으면 하나도 아니고 셋이나 되는 손주들을 어떻게 보겠어요?" 신씨는 "아이들이 다치지 않게 뾰족한 스케치북 모서리를 둥글게 자르는 것과 아기 똥 치우기가 주특기"라며 웃었다.
신씨는 "내 아들은 스크럼족(Scrum 族)"이라고 말했다. 스크럼족은 결혼 후에도 경제적인 이유로 부모와 함께 사는 성인을 일컫는 말이다. 서울시에 따르면 2010년 기준으로 가구주(家口主)인 부모와 함께 사는 30~49세 성인은 약 48만명이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거의 두 배로 늘어난 수치인데, '자녀 부양 때문'이라는 응답이 약 40%였다. 젊은 맞벌이 부부들이 늘면서 할머니를 넘어 할아버지까지 육아에 나설 수밖에 없다.
신씨는 말했다. "집 근처 유치원에 가봐도 할머니, 할아버지 손에 자라는 아이들이 더 많아요. 혼자 돈을 벌어서 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거든요. 제 자식이 게을러서 저한테 애를 맡기는 게 아니에요. 오죽하면 자기 몸 하나 지탱하기 어려운 노년의 부모에게 아이를 맡기겠습니까? 제가 힘이 있는 동안 이렇게라도 도울 수 있으니 즐겁죠."
육아정책연구소 이정원 박사는 "맞벌이 가정이 늘어나면서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손자의 수가 증가했다. 할머니 혼자 육아를 전담하는 시대는 지난 것"이라고 말했다. 하빠는 중장년층 남성의 자연스러운 변화 과정이기도 하다. "직장을 중심으로 생활하던 남성은 은퇴 후 여성의 공간이었던 집을 생활공간으로 삼게 됩니다. 가정에서의 생활이 익숙한 할머니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돌봄'에 익숙한 할머니의 행동을 따라 하게 됩니다."
|
◇기저귀 사는 할아버지 350% 늘었다
아기를 보는 할아버지들이 늘면서 '하빠 육아시장'은 급성장 중이다. 온라인 도서 사이트 예스24에 따르면 지난해 60대가 가장 많이 읽은 책 1위는 '삐뽀삐뽀 119 소아과', 2위는 '삐뽀삐뽀 119 이유식'이었다. 현직 소아과 의사가 영·유아의 응급 상황과 이유식에 대해 백과사전식으로 풀어쓴 책이다. 이 책들을 구매한 60대 남성은 2006년에서 2012년 사이에 약 3배로 늘었다. 예스24 김기정 도서팀장은 "30·40대 맞벌이 부부가 늘어나면서 육아가 조부모의 몫으로 돌아갔다. 손주들을 더 잘 키우고 싶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전문 서적의 도움을 받기 위해 책을 사고, 특히 육아 경험이 없는 할아버지들이 책을 통해 손자 돌보는 방법을 배우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하빠의 육아일기' '하찌의 육아일기'를 비롯해 '네가 기억하지 못할 것들에 대하여' '김이소 육아일기' 등 할아버지들이 쓴 육아일기를 찾기도 어렵지 않다.
육아 용품을 사는 할아버지들도 빠르게 늘어난다. 인터넷 쇼핑몰 옥션에 따르면 최근 4년간 육아 용품을 구매한 60대 이상 남성의 수는 해마다 평균 30% 이상 늘어난 것으로 조사됐다. 기저귀 구매율은 지난해 대비 350%나 급증했다. 옥션의 오혜진 홍보팀장은 "해가 지날수록 영·유아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육아 생필품의 구매율이 늘어나고 있다"며 "손주들을 돌보는 조부모 가정에서 필요한 물건을 직접 구매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빠들은 종종 청장년기에 자기 자식을 기르지 못한 '원죄'를 극복하기 위해 손주 돌보미를 자청하기도 한다. 가족에게 아버지가 필요할 때 '일이 먼저'라며 같이 있어주지 못했던 미안함을 그 자식의 자식을 돌봄으로써 해소하는 것이다.
은행 지점장을 지낸 정석희(70)씨는 젊을 때 아이들과 놀아준 기억이 없다. 늘 격무에 시달리며 야근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은퇴 후 외손자 둘을 5년간 도맡아 길렀다. 정씨는 그 이야기를 엮어 2006년 '네가 기억하지 못할 것들에 대하여'라는 책을 냈다. "두 외손주를 키우겠다고 나선 건 순전히 딸들에 대한 AS 차원이었다. 이렇게 해서라도 내 딸들을 돕고 싶었다"고 말했다.
마음이 있어도 몸이 따라주지 않던 과거의 노년층과는 달리 요즘 하빠들은 완력도 체력도 충분하다. 고려대 안산병원의 노인실태조사에 따르면 60~75세의 신체나이는 10년 전에 비해 7살 젊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국민체력실태 조사 결과에서도 지금 60세 이상의 체력은 1992년의 40대 체력과 비슷했다. 이런 체력을 바탕으로 손주들의 양육에 왕성한 관심을 보인다. 숙명여대 아동복지학과 유미숙 교수는 "생물학적으로 대(代)를 이으려는 욕구를 가진 남성의 경우, 친자식보다 손주를 보면서 '나의 존재감이 이어지고 있다'는 만족감을 크게 느낀다"며 "육아는 여성이 전담해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이 변화하는 가운데 할아버지들도 이러한 변화에 유연하게 적응한 것"이라고 말했다
◇"웃는 모습 한 번에 피로가 '삭'"
'작은 아이 유수는 할미보다도 내 등이 더 편한가 보다. 그러잖아도 부실한 허리지만, 허리의 통증이 몰려와도 아이가 편히 잠들 수만 있다면 앞으로도 아이 업어주기는 계속하고 싶다.'(신상채씨의 책 '하빠의 육아일기')
'분명히 배가 고플 텐테도 자꾸만 뱉어내니 골치가 아프다. 컴퓨터를 켜고 밥을 뱉어내는 아이를 검색했더니 하하, 우리 재영이 같은 애들이 바글바글하는구먼.'(이창식씨의 책 '하찌의 육아일기')
'하빠'들은 난생처음 해보는 육아가 쉽지는 않더라고 입을 모은다. 신씨는 "동생들을 업을 때는 어려서 몰랐고, 아비가 돼서 애들을 업을 때는 내가 젊은이였으니 아기가 무거운 줄 몰랐다"고 했다. "할아비가 되어서는 몸이 마음을 따라주지 않네요, 하하."
이창식씨는 "애를 맡아 키운 지 한 달 쯤 지난 후부터 육아일기를 적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유를 묻자 그는 말했다. "왜? 너무 힘들어서요. 보상은 못 받아도 '너를 키우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이었다'는 기록은 남겨야겠다 싶었습니다."
이씨는 아이 하나 키우는데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지 몰랐다고 했다. 가끔 주말에 아이와 함께 놀아주면 되는 줄 알았다는 것이다. "옛날 대우전자에서 직장생활을 10년 했어요. 10년 딱 채워서 과장까지 하다가 번역가로 전업했지요. 그땐 이미 딸이 초등학교 졸업할 때쯤이었으니 기저귀 갈아줄 일이 있었겠나. 이런 줄 몰랐지, 허허허." 신씨는 하루 세 번씩 손자의 똥 기저귀를 갈고, '뽀로로' '코코몽' '구름빵'을 공부한다. "말년에 쉬고 싶은 마음도 들지요. 그래도 딸을 키울 때 느끼지 못했던 기쁨을 느낄 수 있잖아요. 딸에게 미처 못해줬던 걸 해준다는 마음으로 손자를 키우고 있어요."
신씨는 "평생 가장 뿌듯했던 순간"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첫째 손녀 휘수는 거의 제가 맡아 키웠거든요. '엄마' '아빠'가 아니라 '하빠'라는 말을 제일 먼저 한 거 있죠. 가족들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를 쳐다보더라고요. 저요? 콧날이 시큰해지고 눈물이 줄줄 흘러서 가족들 눈치 볼 새도 없었답니다, 하하."
◇할아버지들 "기저귀 어떻게 가나요?"
16일 오전 10시 서울 서초구 보건소 3층에서 열린 '예비 할머니·할아버지 육아교실'의 첫 번째 강좌인 '신생아 관리' 시간. "할아버지들만 나와서 실습해볼까요?"라는 말에 인형을 안은 할아버지 셋이 쭈뼛거리며 앞으로 나왔다. 이날 열린 육아교실에서는 할머니 33명과 할아버지 3명이 함께 강의를 들었다.
"인형 안은 할아버지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 보세요!" 강사의 말에 교육실에 앉아있던 30여명의 할머니들이 "아이고, 우스워라"하며 손뼉을 치고 웃었다. 분홍색 옷을 입은 아기 인형을 안고 있던 김병욱(55)씨는 아기 인형을 손에 들고 쩔쩔맸다. 올해 5월 아들이 낳은 첫 손주를 본 김씨는 딸의 출산일이 가까워져 오자 직접 육아교실에 등록했다고 했다. 그는 "젊을 때는 직장 다닌다고 육아를 집사람한테만 맡겼었는데 손주들을 돌보려면 알아둬야 할 것 같아서 찾아왔다"고 말했다.
2005년 대기업에서 정년퇴직한 이영일(64)씨도 육아교실을 찾았다. 그는 서초구청에서 발간하는 소식지를 보고 직접 육아교실에 참가 신청을 했다. 맞벌이하는 아들 부부가 회사 일로 늦을 때면 이제 막 돌이 지난 첫 손녀를 돌보곤 했는데 어설픈 솜씨로 안아주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맞벌이하는 딸 부부가 아이를 낳으면 돌봐야 할 손주가 또 생기겠죠. 육아서적도 들춰봤지만 한계가 있어서, 조금 쑥스럽지만 이렇게 등록을 했지요." 그는 수업시간 내내 빽빽하게 필기를 했다.
지난 10여년간 육아 관련 교육을 해 온 강사 조영미(46)씨는 "최근 들어 조부모 대상 수업 수강생 중 10% 정도는 할아버지다. 할아버지들은 '내 자식 기저귀도 안 갈아봤는데 손주 기저귀 가는 법을 배우고 있다'고 쑥스러워하면서도 손을 들고 질문을 할 정도로 적극적이다"라고 말했다. 서초구 보건소 서정인 주사보는 "강사가 누구인지, 교육 과정과 시간이 어떻게 되는지 묻는 할아버지들의 전화가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동의대 명예교수 장양수(73)씨는 2000년에 태어난 손녀 장영주(13)양을 맞벌이하는 아들 부부 대신 6년간 키우며 기록한 내용을 '내 사랑 꼬마 도깨비'라는 책으로 2010년 엮어냈다. 중학교 1학년인 영주양은 사춘기에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할아버지를 잘 따른다. 장씨는 "처음엔 며느리가 나를 못미더워했다"고 말했다. "고지식한 것만 가르치지 않겠냐, 너무 내버려두는 건 아니냐… 이런저런 걱정이 많던 며느리도 나중엔 손녀를 떠맡기더라니까요. 손녀 이야기를 하면서 며느리와도 친해지고, 가족이 똘똘 뭉치게 됐어요."
이창식씨의 사위 조현우씨는 "장인어른은 높은 미끄럼틀 타기나 정글짐 기어올라가기 등 엄마나 할머니가 불안해하는 신체놀이도 과감하게 함께 해준다"고 했다. "할머니가 틈틈이 아이의 영양과 정서적인 측면을 주로 챙겨주시고, 할아버지는 신체 발달을 도와주시는 셈이지요. 할아버지가 육아에 참여하시면서 아이가 더 균형적으로 발달하는 느낌이에요."
서울시 보육정보센터 이남정 센터장은 "유치원 선생님, 초등학교 선생님 등 영·유아 교육 분야는 과도하게 여성에 치우쳐 있다"며 "할아버지를 통해 남성성에 대한 경험을 보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센터장은 "자녀의 성장기에 쏟지 못했던 관심을 손주에게 쏟음으로써 자녀에 대한 부채의식을 덜고 대리만족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위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