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챙기기 백성호의 붓다뎐
2500년 전이나 지금이나…천국은 ‘욕망’ 확장판이다
카드 발행 일시2024.03.20
에디터
백성호
백성호의 붓다뎐
관심
“삶이 고통의 바다”라고 여기는 우리에게 “삶은 자유의 바다”라고 역설하는 붓다의 생애가 궁금하지 않으세요? 백성호 종교전문기자가 ‘붓다뎐’을 연재합니다. ‘종교’가 아니라 ‘인간’을 다룹니다. 그래서 누구나 읽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종교와 상관없이 말입니다.
사람들은 지지고 볶는 일상의 소리에 깜짝깜짝 놀라며 살아갑니다. 그런 우리에게 붓다는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가 돼라”고 말합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이 돼라”고 합니다. 어떡하면 사자가 될 수 있을까. ‘붓다뎐’은 그 길을 담고자 합니다.
20년 가까이 종교 분야를 파고든 백성호 종교전문기자는 작가이기도 합니다. 『인문학에 묻다, 행복은 어디에』『예수를 만나다』『결국, 잘 흘러갈 겁니다』등 10권의 저서가 있습니다. 붓다는 왜 마음의 혁명가일까, 그 이유를 만나보시죠.
⑩2500년 전의 천상과 지금의 천국…둘은 닮았다
싯다르타는 직접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랐다. 입고 있던 비단옷도 벗었다. 지나가던 사냥꾼을 불러서 옷을 바꾸어 입었다. 삭발한 머리에 누추한 옷차림. 이제는 누가 봐도 알 수가 없었다. 싯다르타가 출가 전에 왕족 신분이었다는 걸 말이다.
당시 인도 북부에는 20개의 큰 도시가 있었다. 그리고 16개의 나라가 있었다. 먹고 먹히는 정복 전쟁이 끊이지 않는 일종의 전국시대였다. 출가한 싯다르타는 국경에 구애받지 않고, 북부의 나라들을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생로병사의 문제를 풀기 위해 출가를 했으니, 그는 솔루션을 찾아야 했다.
#고행의 수행자를 찾아가다
깨달음을 이루는 가장 빠른 길이 뭘까. 그건 이미 깨달은 스승을 만나는 거다. 동아시아에서는 그걸 ‘줄탁동시’라고 부른다. 병아리가 부화할 때 어미 새는 바깥에서 알을 톡톡 쫀다. 그 소리를 듣고서 알 속의 아기 새도 정확하게 그 지점을 쫀다. 안에서도 쪼고, 밖에서도 쪼다가, 결국 알이 깨진다. 병아리는 그렇게 알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온다.
인도 쉬라바스티의 기원정사 유적지에서 만난 인도의 불교 동자승들. 모든 종교가 마찬가지다. 첫 출발점은 내 안에서 올라오는 물음이다. 백성호 기자
모든 종교가 마찬가지다. 가장 먼저, 내 안에서 올라오는 물음이 있다. 인간에 대한 물음이든, 생사에 대한 물음이든, 영원에 대한 물음이든 상관없다. 수행자는 그 답을 모른다. 그래서 계속 묻는다. 계속 찾는다. 자기 자신에게도 묻고, 세상을 향해서도 묻는다.
그러다가 스승을 찾는다. 간절함이 있다면 스승을 만날 수 있다. 그 스승이 이미 깨달은 이라면 더 바랄 게 없다. 왜 그럴까. 그는 길을 알기 때문이다. 물음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어디로 가야 하는지 훤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수행자는 스승에게 물음을 던진다. 스승은 그 물음에 답을 한다. 어미 새가 바깥에서 알을 톡톡 쪼는 것과 똑같다. 알 속의 병아리가 소리를 알아차릴 때, 비로소 줄탁동시가 이루어진다. 그렇게 쪼고, 또 쪼다가 알이 팍! 깨진다. 수행의 길에서 깨달음을 이루는 가장 빠른 길이다.
싯다르타가 그걸 몰랐을까. 그는 카필라 왕궁에 있을 때, 이미 브라만교의 베다 철학과 우파니샤드 철학에 상당한 안목이 있었다. 그러니 그도 알았을 터이다. 안목 있는 스승을 찾는 것이 가장 빠른 길임을 말이다.
#고행의 목적이 무엇인가
인간은 욕망을 가진 존재다. 욕망의 뿌리는 몸이다. 숱한 수행자가 고행을 통해 몸을 이기려고 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몸에 뿌리내리고 있는 욕망을 이기고자 한다. 2500년 전, 인도에는 고행의 전통이 있었다. 수행자들은 몸과 몸속 욕망을 이기고자 온갖 고행을 했다.
어떤 이는 쇠꼬챙이가 박힌 방석 위에 앉아서 명상하고, 또 어떤 이는 뜨거운 숯불 위에 누워 있기도 했다. 한쪽 발로만 서서 버티기도 하고, 절식(絶食)에 가까운 식사를 하면서 굶어 죽기 직전까지 가는 이들도 있었다. 모두 몸에게서, 몸의 욕망에게서 항복 선언을 받기 위함이었다.
싯다르타 왕자가 출가한 카필라성의 동쪽 성문에서 힌두교 수행자인 사두를 만났다. 백성호 기자
2500년 전 인도에는 밧가와라는 수행자가 있었다. 그는 고행을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싯다르타는 그 사람을 찾아갔다. 밧가와 공동체 사람들은 정령을 숭배하고 있었다. 당시 인도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하늘과 구름, 해와 달, 바람과 나무 등 자연에는 저마다 정령이 있다고 믿었다.
인도만 그런 건 아니었다. 동아시아의 전통 신앙도 그랬고, 아메리카 인디언들도 그랬고, 북유럽의 바이킹족도 그랬다. 고대 인류에게는 그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가장 두려운 대상이 자연이었고, 고대의 인류 또한 자연의 일부처럼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싯다르타가 질문을 던졌다.
“참으로 대단한 고행입니다.
이런 고행을 통해서
무엇을 얻고자 합니까?”
밧가와가 대답했다.
“우리는 고행을 통해
천상에 태어나기를 바라오.”
그 말을 듣고 싯다르타는 실망했다. 천상에 태어나는 건 다음 생이다. 이번 생에서 죽고 난 다음에 일어나는 일이다. 싯다르타의 관심은 ‘다음 생’이 아니었다. 내가 숨 쉬고 있는 지금의 삶, 이번 생에서 생로병사에 대한 문제를 풀고자 했다. “삶은 고통의 바다”라는 울타리를 뛰어넘기를 바랐다. 바로, 지금.
#천국은 어떤 곳일까
밧가와의 수행 목적을 듣고 피식 웃는 사람도 꽤 많지 싶다. “고대 인류는 역시 우스꽝스러운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네.” 이렇게 무시하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따지고 보면 그렇지도 않다. 2024년에 살고 있는 우리가 종교를 믿는 이유도 비슷하다. 많은 사람이 죽어서 천국이나 극락에 태어나기를 바란다. 고대 인도인들이 고행을 통해서 천상에 태어나기를 바랐다면, 현대인은 믿음을 통해서 천국에 태어나기를 바란다. 본질적으로 다를 게 없다.
2500년 전 인도 사람들은 죽어서 천상에 태어나기 위해 수행하는 이들도 꽤 있었다. 싯다르타는 천상에 태어나기 위함이 아니라 생로병사의 문제를 풀기 위해 출가했다. 백성호 기자
왜 그럴까. 2500년 전과 지금이 왜 비슷한 걸까. 나는 그게 ‘욕망’ 때문이라고 본다. 지상에서 갈망하는 욕망이 무한으로 충족되는 곳. 거기가 천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꽤 많다. 천국에는 화려함과 눈부심, 극한의 행복감과 끝없는 물질의 풍요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땅에서 내가 가진 욕망의 무한 확장판이다. 그게 우리가 꿈꾸는 천국의 풍경이다.
나는 궁금하다. 욕망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 우리가 천상에 태어날 수 있을까.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싯다르타도 이 말에 공감하지 않았을까. 생로병사의 문제가 풀리는 곳은 욕망의 무한확장판이 아니라, 오히려 무한의 고요가 있는 곳이 아닐까. 우리의 마음이 가난할 때, 비로소 드러나는 무한의 고요 말이다.
싯다르타와 밧가와는 밤새도록 토론을 했다. 밧가와는 하나의 수행 그룹을 이끄는 지도자였지만, 싯다르타는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밧가와의 수행 방식에 대한 한계를 지적할 정도였다. 삶의 고통을 끊기 위해 수행의 고통을 택하는 방식. 그 방식의 종점은 죽어서 천상에 태어나는 일. 싯다르타는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었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난 싯다르타는 이별을 고했다. 그는 밧가와 수행 공동체에 머물지 않았다. 그곳에는 그의 물음에 대한 답이 없었다. 싯다르타는 마가다국의 라즈기르를 향해 길을 떠났다. 마가다국은 당시 인도의 16국 가운데 가장 강성한 왕국이었다.
짧은 생각
인도를 순례하다 보면
눈에 띄는
독특한 광경이
하나 있습니다.
다름 아닌
가축입니다.
차를 타고 가다 보면
도로 위에
소가 다니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인도 없이
혼자 다닙니다.
인도의 주된 종교는
힌두교입니다.
힌두교에서는
소를,
특히 등에 볼록하게
혹이 난 소를
신성하게 여기니까
마구 풀어놓고 키우나 보다.
저 소들은
주인이 없는 소겠구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않더군요.
그 소들은
모두 주인이 있는
소였습니다.
그럼 해가 저물면
어떻게 될까요.
밖에 나와서
마음대로 나돌아다니던
소가 저녁이 되면
어떻게 할까요.
놀랍게도
소가 알아서
자신의 집을 찾아갑니다.
그렇다고
집 근처에서만
놀던 게 아닙니다.
아주 멀리
떨어진 곳까지 가서
풀도 뜯어 먹고,
온종일
자유롭게 보내다가
알아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개를 풀어놓으면
자기 집을 찾아서
돌아오듯이 말입니다.
순례길에서 만난
인도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에서
자기 집을 찾아갈 줄 아는
소는 인도 소뿐이다.”
처음에는
우스갯소리로 들렸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틀린 말이 아니었습니다.
실제
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저녁 무렵에
긴 도로를 따라서
한참을 걸으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소를 종종
목격하게 되니까요.
주인은 아침에
소의 젖을 짜서
보관합니다.
그런 뒤에
소는 스스로 잡을 나가서
온종일
풀을 뜯어 먹고
돌아다니다가
해 질 녘에 돌아옵니다.
소만 그런 게
아닙니다.
개도 거의
바깥에 풀어놓고
키웁니다.
들판에서
돼지도 풀어놓고 키우는
광경도 봤습니다.
어찌 보면
사람과 가축이,
사람과 동물이
참 조화롭게 산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처음에는
자동차와 사람과
소가 뒤섞여 있는 광경이
정신없어 보였는데,
차분히 살펴보면
소가 참 자유롭게 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과 동물의 조화,
사람과 자연의 조화.
복잡하고
정신없어 보이는
인도에는
그런 광경이 있습니다.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36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