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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퀴브라 귀뮈샤이는 이민자 여성 출신으로 독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 중 한 명이다. 그녀는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고 말한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인용하면서, 언어가 우리에게 세계를 열어주는 동시에 우리를 그 안에 가둔다고 말한다. ‘누가 세상을 설명하는가? 누가 서술하고, 누가 서술되는가? 누가 이름을 붙이고, 누구에게 이름이 붙여지는가?’ 언어가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더 이상 논쟁할 필요가 없는 사실이다. 그녀는 오랜 시간 언어가 어떻게 우리의 생각을 형성하고 우리의 처세와 정치를 결정하는지 탐구해왔는데, 이런 주제를 파고든 건 부당함에, 사회가 개인에게 가하는 부조리에 익숙해지지 않기 위해서였다. 사람들은 이름 붙여지지 않은 자들에게 존재의 배경을 묻지 않는다. 증오는 의견으로 받아들여지고, 극단주의는 인터넷에서 지속적인 여론으로 나타난다.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정의에 저항하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을 보수주의자쯤으로 여긴다.
이 책은 복잡성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인간으로서 동등한 권리를 갖고 존재할 수 있고, 그 길로 가기 위한 성찰이자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우리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언어를 찾아가는 과정을 담았다. 우리의 언어, 생각, 느낌, 삶의 구조와 한계를 인식할 때 우리 모두는 동등한 권리를 갖고, 말하고, 존재할 수 있다는 퀴브라 귀뮈샤이의 주장은, 혐오가 뉴노멀이 된 오늘날 꼭 필요한 목소리가 아닐 수 없다.
👩🏼🏫 저자 소개
퀴브라 귀뮈샤이
1988년 함부르크에서 독일에 거주하는 튀르키예인 외국인 노동자의 손녀로 태어났다. 런던대학교의 SOAS(소아즈, 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와 함부르크대학교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현재는 독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 중 한 명으로 꼽힌다.
2008년부터 2019년까지 자신의 블로그에 ‘외래어 사전’이라는 연재를 시작해 독일 사회에서 살아가는 외국인으로서 인터넷, 정치, 차별과 혐오, 페미니즘에 관한 글을 썼다. 비평과 자기 고백을 넘나드는 특유의 유려한 글은 높은 조회수를 기록했고, 2011년 독일에서 우수한 온라인 콘텐츠에 수여하는 그림온라인어워드(Grimme Online Award) 최종 후보에 올랐다.
일상에 만연한 차별에 반대하는 캠페인으로 그녀가 공동 추진한 해시태그 운동 #ausnahmslos(‘예외 없음’이라는 뜻)은 2016년 클라라 제트킨 여성상(Clara-Zetkin-Frauenpreis)을 받았다.
테드(TED) 강의 무대에 여러 번 섰고 다수의 일간지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며 왕성한 필력을 선보이고 있다. 남편, 아들과 함께 영국 옥스퍼드에서 살다가 다시 함부르크에서 거주하고 있다.
📜 목차
1장―언어는 나와 사회라는 존재의 집이다
2장―우리에게는 다의성이, 모호성이 필요하다
3장―누가 서술하고 누가 서술되는가?
4장―개성을 빼앗긴 사람들
5장―더 이상 연대를 끊지 않기로 다짐할 때
6장―증오는 의견이 아니다
7장―우파들의 어젠다
8장―범주는 언제 새장이 되는가?
9장―내가 나로 말하길 멈추지 않을 때
10장―대화에서는 모두가 승리한다
감사의 말
미주
📖 책 속으로
어떤 단어에 대해 내가 생각하고, 의미하고, 느끼는 바를 상대방에게 이해시키려면 단어가 아닌 문장으로 풀어 번역해야 한다. 그래서 많은 감정들은 특정한 언어 안에서만 살아 있다. 언어는 우리에게 세계를 열어주는 동시에 우리를 그 안에 가둔다.
--- p.16
백과사전, 품사, 시제 등 모든 면에서 인간에게 언어는 물고기에게 물과 같은 존재다. 언어는 우리가 완전히 알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를 형성하고 표현하는 생각과 삶의 소재다. 내가 이것을 깨달을 때, 내가 인식의 한계를 느낄 때, 비로소 내 안에서 겸허함이 싹튼다. 제한된 관점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던 나에게 세상에 대한 겸허함이 자라난다. 나는 이러한 한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감사할 따름이다. 나는 이러한 한계를 변함없는 전제와 가정으로 간직한 채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길 소망한다. 우리는 한계를 깨달음으로써 무지하게 전제로 삼았던 것들을 상대화할 수 있다. 우리가 보편적이라고 가정했던 것들,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 존재하는 한계에 불과하다고 정의할 수 있다.
--- p.30
언어와 정치적 비인간화의 상호관계는 이 책에서 내가 다루려는 주제다. 나는 우리가 어떻게 다르게 말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더 인간적으로 말할 수 있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쿠르트 투홀스키는 언어는 무기라고 했다. 그렇다. 언어는 무기가 될 수 있다. 화자들이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무기가 되는 때도 있다. 하지만 언어는 무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언어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언어는 우리에게 밤의 어둠 속에서 환하게 달빛을 비추는 역할을 한다. 우리의 세계를 제한할 수 있지만 무한히 열어줄 수도 있는 것이 언어다.
--- p.34
언어와 세계 사이에는 틈새가 있다. 존재하는 모든 일이 언어로 표현되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이 말하는 언어 안에 존재할 수는 없다. 그가 언어를 충분히 정복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언어가 모든 것을 담기에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 p.65
그렇다. 언어의 박물관은 우리에게 세상을 열어준다. 하지만 이 박물관은 절대 완벽한 상태에서 온갖 다양한 특성들로 언어를 이해하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이름 짓는 자들이 스스로 이해한 것만을 이해한다. 의미와 경험이 닿는 범위에 한해서 말이다. 그 이상은 갈 수 없다. (……) 이 박물관에는 두 가지 범주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름 붙여진 자들과 이름 붙여지지 않은 자들. 사람들은 이름 붙여지지 않은 자들에게 존재의 배경을 묻지 않는다. 자신들이 기준이고, 표준이고, 척도다.
--- p.78
고정관념은 갑옷이다. 갑옷은 그것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제3자의 무지를 보호해준다. 고정 관념은 무시당하는 자들이 입어야 하는 무지의 갑옷이다. 갑옷은 무거워서 입는 자들에게 짐이 되고, 약하고 인간적인 순간에 이들을 굴복시킨다.
--- p.103
하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한 사람이 목표를 세우는 순간에 길이 열리기 시작한다. 그가 자신을 특징짓는 이미지를 깨닫고, 자신에게 각인된 특징에 굴복하지 않기로 다짐할 때 길이 열리기 시작한다. 한 사람이 비인간화를 깨닫고, 평탄하지 않고 자신의 개성을 위해 허락되지 않은 공간을 받아들이고 더 이상 연대를 끊지 않기로 다짐할 때 길이 열리기 시작한다.
--- p.140
우리 모두에게 어떠한 당면 과제가 있는지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현재의 사회 구조에서 이미 고통받고 있는 자들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한다.
--- p.162
빌어먹을 외국인들! 더러운 년! 이런 말들이 불쑥 스쳐 지나간다. 누군가 이런 말들을 당신의 귀에 대고 속삭이면, 당신 외에는 아무도 이런 욕설을 들었다는 것을 입증할 길이 없다. 증오심으로 불타오르는 자들이 증오의 대상에게 증오를 표현하는 스쳐가는 순간 인터넷에서 반향실을 발견하고, 되풀이되고, 극단화된다. 그리고 지속적인 여론으로 나타난다. 증오는 뉴노멀이 된 것이다.
--- p.181
아직 우리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지 않다. 아직 우리는 모든 사람들의 인간다움이 실질적으로 인정받는 구조, 한 사람의 관점이 다른 사람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구조에서 살고 있지 않다. 우리가 절대성을 주장하지 않을 때, 어떤 관점도 다른 관점을 지배하지 않을 때, 이를 구조적으로 예속시키고 통제할 때, 모든 사람들이 혈통, 인종, 신체, 종교, 성, 성별, 국적과 관계없이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 그런 후에야 우리 모두가 나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다.
--- p.256
우리는 인간이다. 우리는 실수를 한다. 우리는 상처를 주고 상처를 입는다. 우리가 서로에게 끊임없이 한 가지 입장만 강요하지 않을 때만, 우리가 스스로와 다른 사람들에게 경직된 관점으로 구속하지 않을 때만, 우리는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실수해보지 않으면 절대로 걷고, 말하고, 읽고, 쓰는 법을 배울 수 없다. 이러한 인간적인 실수를 통해 우리는 세계와 우리 자신을 알아가는 것이다.
--- p.280
🖋 출판사 서평
“언어는 어떻게 우리의 생각을 만들고 처세와 정치를 결정하는가”
언어가 생각과 삶을 이루는 소재라면
우리는 의구심을 품고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이민자 출신 독일의 대표 여성 언론인 퀴브라 귀뮈샤이의
언어와 존재, 더 나은 세계와 자유를 향한 빛나는 통찰
튀르키예인 외국인 노동자의 손녀로 태어나 무슬림이라는 정체성을 안고 독일 사회에 정착해 독일을 대표하는 여성 언론인으로 자리매김한 퀴브라 귀뮈샤이. 그녀는 우리 사회의 뜨거운 논제들, 그 안에 드리운 진짜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서 언어의 체계를 살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의 하루 24시간은 잠 든 순간을 빼면 매 순간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언어와 존재』는 느낌, 사고, 가치를 만들어내고 사회의 한 풍경을 이루는 언어의 건축 구조를 그녀 특유의 유려하고 은유적이며 자기고백적인 문장으로 파헤친 책이다.
언어와 인식 중 무엇이 먼저라고 생각하는기? 퀴브라 귀뮈샤이는 물 위에 비친 달빛을 뜻하는 튀르키예어 ‘야카모즈(yakamoz)’라는 단어를 알고 나서야 밤바다를 산책할 때 어둠 속에서 빛나는 달빛을 인식할 수 있었다. 이처럼 언어는 우리의 인식에 변화를 일으킨다. 우리가 그 단어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무엇을 지칭하는지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언어를 쓰느냐에 따라 그 언어에 담긴 세계관을 흡수하고 언어가 만들어낸 풍경에 젖어든다. 그래서 언어는 우리에게 세계를 열어주는 동시에 우리를 그 안에 가둔다. 퀴브라 귀뮈샤이는 언어가 ‘한 개인’과 ‘사회’라는 존재의 집이자 우리의 생각과 삶을 이루는 소재라고 분명하게 밝힌다. 언어에 따라 우리의 생각은 가지를 치고 더 나아가 관점과 신념을 형성하며 처세와 정치까지 결정한다고 말이다.
오래전부터 쓰여 익숙해진 말, 효율과 기준을 내세운 꽤 그럴듯하게 들리는 표현, 권력과 주류 아래 조장되어온 언어 체계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항상 의구심을 품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누가 서술하고 누가 서술되는가?
범주화, 경계 짓기를 넘어 환대와 포옹으로
특히 퀴브라 귀뮈샤이는 언어와 정치적 비인간화의 상호관계에 주목했다. 누가 세상을 설명하는가? 누가 서술하고, 누가 서술되는가? 누가 이름을 붙이고, 누구에게 이름이 붙여지는가? 사람들은 이름 붙여지지 않은 자들에게 존재의 배경을 묻지 않는다. 자신들이 기준이고, 표준이고, 척도다. 특히 권력이, 발언권이 있는 쪽이 정해준 언어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관점과 개성을 지워버린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작가 제임스 볼드윈은 ‘검둥이 작가’로만 존재하지 않기 위해 태어난 곳을 떠나 자진 망명을 해야 했다. 영어는 볼드윈의 모국어였지만 그 언어 안에서 그는 굴욕감을 느끼고 존재의 일면을 제한당했다. 퀴브라 귀뮈샤이 역시 튀르키예 이민자 출신으로 독일에서 살아오면서 비슷한 경험을 숱하게 했다. 그녀는 독일어, 영어, 라틴어, 튀르키예어를 구사할 줄 알았지만 모국어인 튀르키예어는 어학 능력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학교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에서는 튀르키예어를 사용하지 않아.” 사회는 이렇게 말했다. “불만이 있으면 네 나라로 가.”
그녀가 오랫동안 언어라는 주제에 열정적으로 천착해온 것은 자신이 겪은 것처럼 한 사회가 개인에게 가하는 부조리와 부당함을 알아차리고, 언어를 통해 정치적 비인간화가 공고해지는 것에 체념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언어와 존재』는 그녀가 이런 현실 속에서도 더 많은 환대와 포옹을 지속적으로 요구해온 과정이 담겼다. 그녀의 글을 따라가다 보면 사회 구조에서 소외되고 있는 자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이 어째서 우리 모두의 당면 과제인지를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말이 부서진 곳에서는 어떤 사물도, 어떤 인간도 존재할 수 없다
언어가 ‘무기’를 넘어서서 ‘도구’가 되기 위하여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언어를 아주 대범하게 사용하는 사람들, 이들이 말을 통해 뱉는 고정관념은 주류가 아닌 사람들에게 무지의 갑옷이 되어 짐이 되고, 약하고 인간적인 순간에 이들을 굴복시킨다. 증오심에 불타오르는 이런 자들은 정치적 올바름이 아니라 정의에 저항하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을 보수주의자쯤으로 여긴다. 이들이 혐오의 대상에게 혐오를 표현하는 순간 인터넷에서 반향실을 발견하고, 되풀이되고, 극단화된다. 그리고 지속적인 여론으로 나타난다. 퀴브라 귀뮈샤이는 혐오는 그것이 어떤 형태든 무시되어서는 안 되며, 이를 용인해서도, 토론에서 새로운 자극제가 되는 ‘의견’으로 격상시켜서도 안 된다고 지적한다. 증오가 의견이 된 순간 말은 부서지고, 그 자리엔 어떤 사물도, 어떤 인간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 의해 하나의 범주로 간주될 때, 얼마나 굴욕적이고 금치산 선고를 받은 것처럼 무기력한지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차별과 소외가 범람하는 세계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다르게’ 말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더 ‘인간적’으로, 표준과 척도, 효율을 내세우지 않고 한 존재를 배제하지 않으면서 말할 수 있는지 살핀다. 특히 쿠르트 투홀스키의 말, “언어는 무기다”를 인용하며서 언어가 화자들이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무기가 될 수도 있지만 무기에 그치지 않고 도구가 될 수도 있다며 ‘도구로서의 말하기’를 강조한다.
누구나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고, 말하고, 연결될 수 있는 세상을 위해
퀴브라 귀뮈샤이의 메시지는 “나로 존재하고, 말하고, 연결될 수 있는 세상”으로 축약해볼 수 있다. 그녀는 세상 자체는 정의롭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아직 우리는 모든 사람들의 인간다움이 실질적으로 인정받는 구조, 한 사람의 관점이 다른 사람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구조에서 살고 있지 않다. 다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 모두는 ‘인간’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실수를 하고, 상처를 주고받는다. 이것을 인정하고 이 겸허함을 바탕으로 서로에게 끊임없이 한 가지 입장만 강요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경직된 관점으로 구속하지 않을 때, 그리고 언어, 생각, 삶의 구조와 한계를 인식할 때 모든 사람들이 혈통, 인종, 신체, 종교, 성별, 성적 지향, 국적, 빈부 격차와 관계없이 자유롭게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 후에야 우리 모두는 나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다.
복잡성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인간으로서 동등한 권리를 갖고, 말하고, 존재할 수 있는 방법, 모든 사람을 위한 공간이 마련된 ‘언어의 집’을 찾는 이 책은 고유하고 다양한 존재들의 실패와 연대의 기록인 동시에 다양성과 다의성, 환대를 지지하는 열정적인 연설문과 같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