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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원 품꾼의 비유(1)
마 20:1-16
1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2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3 또 제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4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그들이 가고
5 제육시와 제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6 제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7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8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9 제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10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11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12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13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마 20:1-16 / [포도원 일꾼과 품삯] 하늘나라는 또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느 포도원 주인이 자기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얻으려고 아침 일찍이 나갔다. 2) 그는 일꾼들과 하루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고 그들을 포도원으로 보냈다. 3) 아홉 시쯤에 품꾼들이 대기하는 곳을 지나다가 보니 몇 사람이 일거리를 얻으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4) 그래서 주인은 그 사람들도 포도원으로 보내며 그날의 일이 끝나는 시간에 적당한 품삯을 주겠다고 하였다. 5) 정오와 오후 세 시쯤에도 주인은 나가서 이와 같이 하였다. 6) 그날 저녁 다섯 시쯤 다시 마을에 나갔다가 몇 사람이 더 서 있는 것을 본 주인은 7) `왜 자네들은 하루 종일 일하지 않는가?' 하고 물었다. `아무도 우리에게 일거리를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주인은 `그러면 내 포도원으로 가서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게' 하고 말하였다. 8) 저녁이 되자 주인은 관리인에게 사람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사람부터 품삯을 주라고 하였다. 9) 오후 다섯 시에 온 사람들이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10) 그러자 아침 일찍 온 사람들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이 받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받은 품삯 역시 한 데나리온씩이었다. 11) 그들이 투덜거렸다. 12)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이 사람들과 온종일 뙤약볕에서 일한 우리들에게 똑같은 품삯을 주신단 말입니까?' 13) 그러자 주인이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이보게, 나는 자네에게 잘못한 것이 없네. 자네는 하루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받기로 처음부터 정하지 않았는가? 14) 자네 품삯이나 가지고 가게. 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준 것은 내 마음에 달린 것일세. 15) 내 돈을 내 마음대로 주는데 무엇이 잘못인가? 네가 친절을 베푼 것이 자네 비위에 거슬린단 말인가?' 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될 것이다'
천국은 마치 어떤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얻으려고 이른 아침부터 거리로 나간 주인과 같습니다. 강조점은 일꾼들을 부르는 주인의 심정이며 품삯은 은혜입니다. 그래서 비록 늦게 부름을 받은 품꾼도 똑같은 품삯으로 대우합니다.
포도원에 들여보내려는 집 주인과 같으니(1-2) 먼저 포도원 주인은 자신의 포도원에 일꾼이 모자랐음을 암시합니다. 그래서 포도원 밖에서 일할 품꾼들을 이른 아침부터 구합니다. 예루살렘의 입성을 앞두고 있는 예수님은 곧 추수의 때, 천국은 가까이 오고 있었지만, 여전히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적어 밖에서 품꾼까지 불러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비유 말씀을 주신 듯합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3-7) 하루 품꾼을 채용하여 쓰는 아침 정시가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제삼시 곧 오전 아홉 시, 제육시 곧 열두 시, 제구시 곧 오후 세 시 때에도 적당한 품삯을 약속하여 포도원에 일하도록 보냈습니다. 그런데 포도원 주인은 하루 일이 마무리되는 한 시간 전에도 밖에 나갑니다. 그런데 아직도 품꾼으로 쓰이기를 기다리며 서성거리는 사람들을 발견합니다. 이에 주인은 그들을 바로 포도원에 들입니다. 여기 포도원 주인은 포도원의 일보다 품꾼들의 처지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그들은 일을 하고 싶어 장터조차 떠날 수 없었고 품삯이 얼마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품삯의 흥정을 뒤로 한 채, 한걸음에 포도원으로 가서 일을 했습니다.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8-16) 하루 일이 끝나자, 포도원 주인은 청지기에게 제십일시에 와서 1시간 일한 사람들부터 임금을 줍니다. 그런데 모두가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을 받게 합니다. 일한 시간과는 상관없이 모두가 하루의 품삯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른 아침부터 정시에 와서 온종일 일한 품꾼들은 더 많은 품삯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했다가 똑같이 주어지자 하늘을 찌를 듯한 분노로 화를 냈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뜻은 명확합니다. 모두가 약속대로 품삯을 지급받은 것이며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똑같이 주는 것은 자기 뜻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는 명구까지 남기십니다.
적용: 혹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라는 당신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불안한 인생길에 헤매는 우리를 불러 주셔서 하나님을 먼저 믿고 그 은혜를 누리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아무 공로나 자격 없음에도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시고 우리 삶 가운데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와 사랑을 찬양합니다. 우리보다 늦게 신앙생활을 시작한 이들과 기쁨을 함께 누리며 도와주는 하나님 나라의 충성된 일꾼이 되게 하소서.
< 설 교 >
자비의 법
마 20:1 ~ / 이필재 목사
유대 나라는 포도가 특산물이라서 성경에 포도나무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오늘 말씀도 똑같은 내용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기 포도원 주인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 주인은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포도 농장은 이 세상, 즉 하나님의 나라 건설 현장을 뜻하고 일하는 품꾼들은 하나님이 쓰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유대 나라는 9월이 포도 수확 계절입니다. 포도 농사하시는 분들은 모두 경험이 있어서 잘 아시겠지만 포도는 마지막 수확기가 매우 중요합니다. 이때가 되면 하루 더 햇볕을 쪼이냐 안 쪼이냐에 따라서 포도의 질이 차이가 납니다.
지금 세계 문화를 보면 와인 문화 경쟁같이 느껴집니다. 한국도 이제는 와인 문화가 일반화 되어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가끔 교인들이 저에게 와서 불필요한 질문을 할 때가 있습니다. “목사님! 교회 다니는 사람은 와인 마셔도 괜찮은 거지요?” 그 사람은 마시고 싶은 겁니다. 어떤 때는 “와인은 마시면 안 되지요?” 그 사람도 마시고 싶은 겁니다. 절대 안 마시는 분들은 질문을 안 합니다. 금주, 금연 운동을 우리나라 같이 철저하게 하는 나라가 없기 때문에 그것이 질문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개신교만 그렇습니다. 이 약속이나 일리적인 문제는 아름답게 지켜가는 것이 좋은 일이긴 한데 어떤 때는 이런 문제가 율법화 될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더 큰 죄가 됩니다. 결혼식 하는 데서 신랑, 신부를 축하하기 위해 거기 나온 와인 한잔 높이 쳐들고 축하를 해주고 한 모금씩 음미한 것을 보고 죽을죄를 지은 것 같이 취급 한다면 율법화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질문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병이 나서 병원에 입원을 했는데 몸속에 무슨 돌이 생긴 겁니다. 그런데 의사가 무엇을 추천했느냐 하면 이런 돌은 물이나 혹은 맥주 같은 것을 시원하게 마시면 밀려서 소변으로 금방 떨어질 수 있으니 한번 그렇게 시도해 보라고 권했는데 저한테 전화를 해서 “맥주를 마셔야 합니까?” 하고 저한테 허락을 받기 원하는 교인도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목사라면 어떻게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상황 윤리라는 것이 생긴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면 큰 죄잖아요? 그러나 전쟁터에 나가면 많이 죽일수록 영웅이 되고 상을 받고 계급이 올라갑니다. 상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술 이야기, 포도주 이야기는 많이 나오고 있는데 이런 것들을 우리가 조심해서 본뜻이 뭔가를 생각하지 않으면 성경을 오해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이 내가 다시 올 때 도적같이 오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도둑놈인가요? 잘못하면 괜히 성경을 오해할 수 있습니다.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오해할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이 비행기를 타시면 승무원들이 묻습니다. “캘리포니아 와인을 드시겠습니까, 프랑스 와인을 드시겠습니까?” 왜 그 두 와인이 그렇게 문화화 되는 것일까요? 캘리포니아나 프랑스의 기후가 큰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 나라는 캘리포니아 기후와 비슷합니다. 그래서 포도가 특산물로 유명해진 것입니다. 제가 캘리포니아에서 포도밭을 여러 번 구경했는데 얼마나 큰지 끝이 안보입니다. 아예 포도밭 한쪽에 와인 공장이 세워져 있는 곳이 많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의 내용은 이 내용 자체만 보아서는 누가 읽어보아도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일종의 공정성, 형평성의 문제입니다. 이 포도원의 주인은 하루 종일 포도원에서 일할 품꾼을 구입해서 자기 포도원 농장에 투입을 하고 있는데 시간적으로 다섯 종류의 일꾼을 투입했습니다. 이른 아침, 제 3시, 제 6시, 제 9시, 제 11시라고 했는데 유대인의 시간 개념과 지금 우리가 쓰는 시간은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을 번역을 하면 오전 6시, 오전 9시, 12시, 오후 3시, 오후 5시 이렇게 시간 계산이 됩니다. 아마 우리 사회 문화는 이렇게 일꾼을 투입하는 주인은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른 아침에 한번 약속하고 하루 종일 일시키고 품삯 주는 문화이지 시간마다 다르게 일꾼을 쓰는 일터는 거의 찾아보기가 힘이 듭니다. 또, 일꾼들이 일정한 장소에 모여 있는 것도 우리나라 경우는 이제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인력시장(Market Place)’라고 하는데, 외국에는 거의 다 ‘Market Place’ 문화입니다. 저도 교회 건축을 할 때 수없이 차를 가지고 가서 일꾼들을 실어 나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 성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일꾼들을 선택할 때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일의 종류를 말해 주어야 합니다. 어느 동네이든지 일할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소가 따로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면 일꾼이 필요한 사람들이 거기 가서 자기 일에 필요한 일꾼들을 데리고 오는 것인데 만약 “딸기 농장에 가서 딸기 따는 일입니다.” 그런 다든지 “건축 현장에서 보조하는 역할입니다.” 혹은 “짐 싣고 나르는 일입니다.
” 일의 종류를 밝히고 하루에 얼마를 주겠다고 선언하면 내가 하겠다고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듭니다. 그러면 내가 필요한 인원만큼 선택해서 싣고 가고 저녁이 되면 약속한 임금을 나눠주고 아침장소까지 도로 데려다주는 문화입니다. 외국에는 이것이 일반 문화화 되어서 어느 동네나 다 이런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이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인가? 그것을 우리가 살펴 볼 것입니다. 이 ‘Market Place’에서 놀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인이 하는 말이 계속해서 나타납니다. 바로 “어찌하여 놀고 있느냐?” 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놀지 말라 하십니다. 일을 하라고 일을 주시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놀고 있느냐?” 하는 단어가 일을 하라는 권고 아닙니까? 그랬더니 이 사람들은 정당한 대답을 했습니다. “할 일이 없어서입니다. 우리를 일꾼으로 써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모두 일터에 보냈는데 여기서 주인의 마음이 나타났습니다. 이 주인은 누구든지 일을 할 수 있도록 일감을 주려고 노력하고 모든 사람이 일할 수 있게끔 하는 마음이 확실해 졌습니다. 간혹 우리들은 내 적성과 전공에 맞는 일이 생기지 않아 시간을 허비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강하게 하면 어떤 일이든 찾을 수 있는 것이 또한 이 포도 농장 곧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 삶의 기쁨을 일하는 것으로 주셨습니다. 젊은이는 젊은이대로, 나이가 많으면 많은 대로 각각 할 일이 주어진 것이 세상인데 성경 자체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세기에 천지 창조를 하시고 제일 먼저 인간에게 명령하시기를 “엿새 동안 힘써 네 모든 일을 하고” 그렇게 일감을 주셨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하도 일이 많아서 식사할 겨를도 없었다고 하였으며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의 문제에 있어서 유대인들에게 배울 것이 하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받는 훈련이 하나 있는데 누구든지 똑같은 기술 노동 하나를 배우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대학 교수가 되었든 제사장이 되었든 공무원이나 상공이나 할 것 없이 자기의 본업과 관계없이 하나의 기술 노동을 배워서 활용하고 있는 문화입니다. 기술은 사람이 살아가다가 어떤 경우를 만나도 살아남을 수 있는 지혜입니다. 그래서 내가 만약 대학 교수가 되었는데도 이발하는 기술을 따로 배워둔다든지 미용하는 기술을 따로 배워둔다든지 컴퓨터 기술이라든지 농장에서 일할 수 있는 농사 기술이라든지 지금하고 있는 직업 외에 자기가 할 수 있는 기술 노동 하나를 반드시 가지고 사는 국민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은 어디를 가나 넉넉히 살아남는 힘이 있습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자신의 말로 그 사회의 최고의 지식 계급의 엘리트였습니다. 최고의 학문 기관인 가말리엘 문하생이라고 자랑하는 율법 학교 졸업생입니다. 가장 젊은 나이에 최고 출세한 산헤드린 공의회 멤버십을 가진 사람이요 권력자입니다. 왕 지파 사람이요 전통 혈통의 아브라함 후손이라고 자기 신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그 사회에서 최고 출세했는데 어느 날 그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아무 쓸모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왜인가요? 복음을 전하는 사람, 전도사가 되니까 이 모든 것이 쓸데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본래 자기가 가지고 있던 것이 다 없어졌는데도 넉넉히 순교를 당할 때까지 전도 생활을 했습니다. 왜입니까? 자기가 배워둔 기술 하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아시아 일대를 방랑자같이 떠돌아 다녔지만 넉넉히 살아남은 것은 바로 어려서부터 자기가 지킨 기술 노동 하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유대 사회에서 유목민이 많기 때문에 흔한 천막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에 가서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를 만나서 천막 제조업에 같이 뛰어들어서 넉넉히 자기 몫을 해냄으로 바울은 자비량 선교 활동이 잘 이루어지잖아요? 이러한 바울의 선교 활동 때문에 선교사들 가운데 바로 ‘천막 선교(Tent Making Missional)’이라고 하는 말이 생긴 것입니다. 이 문제는 예수님도 해당됩니다. 예수님은 무슨 기술이 있었습니까? 목수의 기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구를 만들고 집을 짓는 넉넉한 기술을 가지고 사셨잖아요?
어느 날 미국 신문에 크게 보도가 되었습니다. 시청에서 쓰레기 수고 노동자 모집을 했는데 유명 대학 교수 두 사람이 신청을 해서 화제가 되어서 신문에 난 것입니다. 두 분이 다 채용되었습니다. 그러니 이것이 신문에 얼마나 큰 화젯거리입니까? 신문 기자들이 톱기사로 냈습니다. “당신들은 이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직업을 가지고 또 지금도 아무 문제가 없는데 그 훌륭한 직업을 왜 버리고 이러한 직업에 신청을 했습니까?” 거기에 대한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이것이 더 좋아 보여서입니다.” “무엇이 더 좋아 보이는데요?” “네, 저는 대학교수로 지금까지 날마다 책상에서 머리를 쓰는 직업을 가지고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때만 되면 연구 논문을 발표해야 되고 그것이 점수가 안 나오면 골치가 아프고 이런 머리 쓰는 직업을 평생 했는데 아무리 봐도 이 직업은 머리 쓸 일이 없을 것 같이 보였습니다. 똑같은 동작만 똑같은 동네에서 하면 넉넉히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학에서는 내가 이 사회의 문제점이 되고 교수들 간에, 학생들 간에 그 문제 중심에 서서 이런 처리, 저런 처리 이 사람의 골치 아픈 관계성 때문에 신경이 날마다 예민해졌는데 그런 신경을 하나도 안 쓰니까 얼마나 편한지요?” 또 쓰레기를 가져가는 방법도 한국 같지는 않습니다. 주택이 바둑판처럼 정리가 되어 있는데 시청에서 보내준 규격이 똑같은 쓰레기통이 약속한 장소에 그날이면 나란히 있습니다. “쓰레기차를 몰고 가면서 사람의 손으로 하는 게 아니라 스위치를 누르면 기계가 나가서 손이 되어서 쓰레기통을 딱 규격에 맞게 되어 있으니 집어서 그 자리에 놓는 작업만 하면 되니까 아무 신경 쓸 거 없고 내가 맡은 이 지역에서 똑같은 일을 날마다 하니 너무나 편안하고 신경도 안 쓰니 너무나 좋습니다.” 그래서 그 교수 두 사람이 신문에 크게 나고 더 신기한 일은 “대학 교수보다 월급이 많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좋습니다.” 그렇게 신문에 난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시카고 대학에서 교수하시는 한국인 한 분이 민족별로 직업관에 대한 설문 조사를 해서 신문에 발표를 하셨는데 이렇게 그 결과가 나왔습니다. “지나간 10년 동안에 설문지에 응답한 사람 중 일본 사람은 80퍼센트가 직업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 미국 사람입니다. 미국 사람들은 한 가지 자기 일을 찾았으면 일평생 그것을 집요하게 해가는 습관이 있는 민족입니다. 그래서 전문성이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종족 가운데 지나간 10년 동안에 가장 많이 직업을 바꾼 사람이 한국 사람입니다.” 일본 사람은 80퍼센트가 안 바꾸었는데 한국 사람은 80퍼센트가 바꾸었다는 겁니다. 이런 차이가 나타났다는 것을 발표한 것을 읽었습니다. 일은 누구나 할 수가 있습니다. 나에게 맞는 일도 있습니다. 다만 생각을 어떻게 갖느냐 입니다.
이 포도원 주인은 지금 한탄스럽게 질문합니다. “어찌하여 놀고 있느냐?” 반드시 돈을 버는 일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선진국일수록 자원봉사 문화가 발달했잖아요? 교회 봉사도 거기 속합니다. 갈보리 교회는 365일 하루 24시간 끊이지 않는 릴레이 기도를 권사님들이 하고 계신데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갈보리교회 특징이 있다면 일하는 교회, 행동하는 교회, 세계를 품은 교회입니다. 만약 우리가 일을 하지 않으면 이 교회를 향해서 주님이 “어찌하여 놀고 있느냐? 세상이 이렇게 넓고 할 일이 많은데 너희는 어찌하여 놀고 있느냐?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이것을 우리가 잘 깨달아야 교회 구실을 제대로 할 수가 있습니다. “길을 알고 가는 나그네. 우리는 걸었지 님의 손에 잡히어. 잡힌 손에 힘이 빠질 때 더욱 힘주어 잡으시는 님의 손. 님에 끌려 님만 보고 가다가 돌아보니 한평생이 지났네. 청춘에 곱던 얼굴 님 쳐다보다 다 늙었네. 쉬었다 가자고 님께 소원했으나 님은 내 손을 놓지 않네. 이대로 하늘까지 가자 하시네. 아! 잡힌 손이 행복하여라. 길을 알고 가는 나그네. 사랑하는 님이시여! 내가 끌려가다 안식할 주님이시여!”
오늘 말씀의 초점이 무엇입니까? 제일 일찍 포도원에서 일한 사람들의 불평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들은 왜 불평했나요? 주님의 공정성을 항의한 것입니다. 무엇이 불공정입니까? 자신들은 아침 6시에서 저녁 6시까지 12시간 일했습니다. 오후 5시에 온 사람은 한 시간만 일했습니다. 그러나 노동의 가격은 똑같이 주어버렸습니다. 아마 이러한 노동 문화는 세계 어디에서도 없는 문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항의는 이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 자리에서 이런 대우를 받았어도 똑같이 항의했을 것입니다. 현대 사회 일의 문화는 타임카드 제도입니다. 아침에 출근할 때 내 카드로 찍으면 내가 이 회사에 발 들여놓는 시간에 시간이 적히잖아요? 일마치고 나올 때 그 카드를 또다시 찍으면 그것을 계산해서 임금을 받는 문화입니다. 또, 고용주의 입장에서도 오늘 이 포도원 주인과 같이 노동의 값을 지불하는 사장은 아마 세상에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한 시간만 일하는 사람에게 하루 품값을 줘서 보내는 사장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래서 이 자리는 불공정의 문제가 매우 불편스럽고 썰렁한 분위기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에 대한 주인의 대답이 무엇인가요? 이렇게 말합니다. “친구여! 내가 네가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약속한 것이 한 데나리온의 노동의 삯이 아니냐? 그것을 내가 분명히 지불했는데 나는 너한테 원망 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는데 왜 나를 원망하느냐? 아침에 그 약속을 하고 나를 따라와 하루 종일 한 데나리온을 생각하며 너는 일했고 나는 그 약속을 분명하게 지켰는데 뭐가 불평이냐?” 지금 이 사람들의 불평은 주인의 약속 때문도 아니요 한 데나리온이 적어서도 아닙니다. 단지 그 사회는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하루 노동 문화의 적절한 금액이 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그 약속을 서로 약속하고 이행했습니다. 그런데 왜 불평했습니까? 이들의 불평은 자신에게 주어진 품삯이 아니라 적게 일한 사람에게 돌아간 값이 너무 많은데서 나온 불평입니다.
그러면 이 주인의 노동법을 무엇이라고 말해야 되겠습니까? ‘자비의 법’이라고 말합니다. 일은 적게 했어도 많이 한 사람과 같이 대우했을 때 그 대우를 받은 사람들은 분명한 주인의 자비 혜택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주인은 왜 이런 자비의 법을 이 사람들에게 적용시켰을까요? 바로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 사람들도 아침부터 일할 수 있기를 희망했지만 자기들을 세워주는 사람이 없어서 못한 것뿐이다.” 일부러 늦게 일하려고 계획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일은 한 시간을 했지만 이 정도의 가격은 가지고 집에 들어가야 그 가족들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자비의 법입니다. 사실 이 날 이 포도원 주인은 큰 손해가 났습니다. 일은 조금 했는데 많은 품삯을 지불했기 때문입니다. 주인 외에 손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이러한 경우에 내 자신을 놓고 한번 평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날 포도원에서 일을 했다면 어떤 사람의 자리에 있기를 바라십니까? ‘아! 한 시간 일하고 하루 품삯 받아가다니!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이겁니까? 생각해 보세요. 그 사람들은 좋은 주인 때문에 혜택은 받았지만 떳떳하지는 않습니다. 정당하게 일을 하고 땀 흘리는 대가를 받을 때 행복감이 있지 얌체처럼 한 시간 그럭저럭 때우고 많은 임금을 받은 그 마음이 평안하겠습니까? 사실 이 사람들은 받기는 했어도 죄는 안 짓고 공연히 죄인 된 기분을 가졌습니다. 이게 좋겠습니까? 또, 그들은 오후 5시가 될 때까지 매우 불안한 하루를 보냈습니다. 써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아! 오늘도 허탕인가? 나를 기다리는 가족들에게 이렇게 빈손으로 들어가야 하나?’ 하루 종일 불안하다가 마지막 시간에 희망이 주어졌는데 그 한 시간마저도 편치는 않았습니다. ‘한 시간 일해 봤자 돈이 얼마나 된다고 그 작은 것을 가족들에게 내가 어떻게 가지고 들어가지?’ 이렇게 일을 마쳤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루 종일 불안하게 보낸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 비해서 아침부터 일한 사람들은 하루 종일 행복한 마음으로 보냈습니다. 왜일까요? 저녁의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둘 중에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이 주인의 자비의 법 정신은 “너희들이 더 행복했어. 하루 종일 너희들은 콧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일한 사람이 하루 종일 불안에 떨던 저 사람을 부러워하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에 온 이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는 것은 내 뜻이니라. 나는 네게 원망 받을 일은 안했다.” 이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의 법 정신이란 최대 공약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혜택 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 자비의 법 혜택자들이 많이 나옵니다. 탕자의 비유를 보세요. 이 탕자는 야단맞고 쫓겨나야 될 사람이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잖아요? 그런데 큰 아들의 불평이 나와서 집안을 어지럽게 합니다. 왜 불평했나요? 아버지가 공정성을 잃었다는 겁니다. “이런 놈은 마땅히 내쫓아야지 무엇을 잘했다고 금가락지를 끼우고 손을 잡아 잔치를 벌이시나이까? 그런데 비해서 나는 아버지의 말씀을 한 번도 불순종 한 적이 없나이다. 이게 아버지의 공정입니까?” 그래서 막 불평을 하잖아요? 그러면 아버지의 대답이 뭡니까? “뭐라고? 네가 더 행복하지 않았느냐? 너는 이 집안에서 아버지가 주는 혜택 속에서 마음대로 행복하게 살았지 네 동생은 저렇게 거지꼴이 되어 들어오고 싶지 않은 집을 창피하게 맨발로 걸어 들어오는 네 동생이 부럽단 말이냐? 더 좋은 것을 누린 네가 형제에게 돌아가는 아버지의 자비가 왜 불평이냐? 너도 같이 기뻐해야지!” 더 심각한 자비의 법이 있지요? 십자가상의 강도는 어떻게 되었지요? 그 사회의 흉악한 강도여서 더 이상 존재시킬 수가 없어 사형 틀에 매달린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자비의 법 혜택자가 되지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갈 것이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가지겠습니까? “괜히 일찍 믿었네. 손해 많이 났네. 일생동안 내가 헌금한 게 얼마야? 평생 교회 봉사하고 평생 기도하고 평생 조심하고 살고…. 어휴! 손해 많이 봤다. 죽기 전에 살짝 믿고 갈걸….” 이게 더 부럽습니까? 모태신앙으로 태어나서 평생 주님께 헌신하며 살아오신 교우님들은 제일 큰 축복자들입니다. 임종 직전에 예수 믿고 구원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 성도는 ‘아! 하나님의 자비의 구원이시다. 나 같은 죄인도 구원의 반열에 들 수 있다.’ 이것뿐입니다. 우리가 다 같이 생각할 일은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원하여 주는 지 난 알 수 없도다.’ 생각해보면 우리도 다 탕자입니다. 모태신앙자도, 중간개종자도 모두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의 법 때문에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에 있는 것뿐입니다.
이 포도원 저녁은 모두가 행복해 졌는데 제일 먼저 온 일꾼들만 불행해 졌습니다. 수고를 덜 한 형제에게 돌아가는 주인의 은혜를 함께 기뻐해 주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탕자 동생이 돌아온 그 자리에 형이 “아! 네가 어디 갔다가 이제 돌아왔느냐?” 라고 얼싸안아 주었다면 그 자리는 얼마나 복된 자리가 되었겠습니까? 만약 그 자리에서 이런 불행스러운 대화를 하지 않고 일을 많이 한 이른 아침 일꾼들이 한 데나리온의 돈을 받으며 “주인이시여! 감사합니다. 주인께서 오늘 우리를 불러주지 아니했다면 가족들에게 참 어려울 뻔 했는데 이렇게 우리들에게 일을 주셔서 이렇게 아름다운 열매를 손에 들고 집에 돌아가게 해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이 다음에 또 불러주시면 더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이런 말을 하고, 일을 적게 한 사람은 “주인이시여! 우리는 그저 왔다 갈 뿐인데 이렇게 훌륭한 혜택을 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이 다음에 저희를 또 불러주신다면 오늘 하지 못한 것을 열심히 해서 주인에게 우리도 보상을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함께 집을 향해 가면서 나눌 수 있는 대화는 “형제여! 우리는 사실 일도 안했는데 당신들과 똑같이 받아가니 공연히 형제에게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아니요. 우리는 아침부터 즐거웠습니다. 이 시간을 생각하면서 말이요. 당신들은 오후 5시가 될 때까지 일감이 없어서 얼마나 불안한 하루를 보냈소? 오늘 우리는 참 좋은 주인을 만났소. 우리 빨리 가서 기다리는 가족들에게 이 기쁨의 따뜻한 저녁을 선물합시다.” “그래요.” 이렇게 했다면 뒤에서 바라보는 주인은 또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평생 동안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땀 흘려 일 해온 성도님이 계세요. 그분은 ‘아! 이 얼마나 하나님의 복된 은혜인가? 일평생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행복하게 살아왔도다.’ 이제 예수 믿기로 작정하고 지난주에 등록한 사람은 ‘아! 하나님의 자비의 법이 나 같은 사람도 은혜의 반열 가운데 들게 하시도다. 더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이 일평생 하던 나도 열심히 하면서 살아야지.’ 저는 교회 창립을 많이 한 사람입니다. 창립자나 그 교회를 위해서 아무 공로가 없는 엊그제 들어온 사람이나 “형제여! 우리 이렇게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함께 만났으니 참으로 기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역에 쓰임을 받을 때 얼마나 행복한 공동체가 되겠습니까? 갈보리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 모두 오늘 말씀에 담겨져 있는 이 주님의 자비의 법의 진리를 생각하면서 일평생 행복한 삶의 터전이 되는 행복한 삶의 터전이 되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품삯을 주시지 않고 은혜를 주신다.
마 20:1-16 / 강문호목사
오늘 본문은 참으로 인상깊은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은 포도가 익어갈 때면 갑자기 태풍이 불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한 시간이라도 더 포도를 따야 하는 긴급한 상황이 종종 있습니다. 그런 배경을 깔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포도원을 가지고 있는 주인이 아침 일찍 일군들이 모이는 곳에 가서 하루에 1 데나리온 임금을 주기로 하고 품군을 데리고 왔습니다. 9시에 또 나가 보니 일군이 또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또 데려다가 일을 시켰습니다. 12시 3시 또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후 5시에 나가보니 일군이 또 있었습니다. 이제 6시에 해가 지니까 한 시간 정도 밖에 일할 시간이 남지 않았는 데 그 일군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냐?”
“우리를 품군으로 쓰는 이가 없습니다.”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그리고 한 시간만에 모든 일이 끝났습니다. 주인은 청지기에게 말했습니다.
“품군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그런데 5번째 들어와서 한 시간 겨우 일한 일군에게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지불하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온 일군은 자기에게는 더 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자기에게도 한 데나리온만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불평하면서 말했습니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주인이 말했습니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그리고 예수님이 이 이야기의 총 결론을 이렇게 내리셨습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오늘 본문은 은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교회에서 가장 많이 쓰여지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사랑, 믿음, 은혜, 예배, 기도 이런 단어들입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는 원어로 카리스라고 합니다. 카리스라고 하는 말은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의미입니다.
무엇이 은혜입니까?
1. ‘왜?’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은혜입니다.
다음 질문에 대한 대답은 모두 <은혜>입니다. 물음에 모두 <은혜>라고 대답하시기를 바랍니다.
왜 하나님은 성실한 에서를 선택하시지 않고 교활한 야곱을 선택하셨을가요?
왜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는 음란하다고 선지자 한 명 보내시지 않고 멸망시키시고, 니느웨 성은 요나를 보내어 모두를 구원하시는 것일가요?
왜 하나님은 동키호테같은 삼손에게 그렇게 큰 힘을 주신 것일가요?
왜 하나님은 불륜 관계에서 태어난 솔로몬에게 그렇게 탁월한 지혜를 허락하셨을가요?
왜 하나님은 수많은 어부들 가운데 베드로를 선택하셔서 수제자로 삼으신 것일가요?
왜 하나님은 하필이면 예수믿는 이들을 핍박하는 바울을 선택하셔서 최고의 선교사로 삼으신 것일가요?
욥과 아브라함은 동시대 사람입니다. 그런데 욥은 동방 최고의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메시야 조상으로 욥을 선택하시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을가요?
베드로도 야고보도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왜 야고보는 감옥에서 순교하게 하시고 베드로는 천사를 보내어 감옥에서 끌어내셨을가요?
이새에게는 아들이 8명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막내 아들 다윗을 왕으로 선택하셨을가요?
본문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주인은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일군에게 12시간 일한 일군과 같은 임금 한 데나리온을 주었을가요?
대답은 같이 “은혜”입니다.
불교의 고행, 힌두교의 업보, 유대교의 율법, 이슬람교의 법전은 모두 자기 노력만큼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은 은혜의 종교입니다.
얼마 전에 뉴욕 타임즈에서 일본인 범죄에 대하여 분석한 결과를 보도하였습니다. 10만명 당 미국은 감옥에 가는 사람이 519명입니다. 200명중에 한 명이 감옥에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37명입니다. 그 이유를 기자가 분석하였습니다. 일본에서 살인죄로 15년 형을 받고 출옥한 사람을 인터뷰하였습니다. 감옥에 15년 있는 동안에 한 명도 면회온 사람이 없었습니다. 감옥에서 나오는 날 교도소 앞에 아내와 아들이 처음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아내와 아들이 말했습니다.
“절대로 우리 동네 근처에도 얼씬 하지 말아요.”
15년 감옥에 있는 동안 세 딸이 모두 결혼하였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만나주지도 않고 상대하여 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울면도 말했습니다.
“손자, 손녀도 4명인 데 얼굴도 본 적이 없지요. 사진도 못 보았지요.”
철저히 율법적인 사회입니다.
그래서 일본은 범죄율이 낮다는 것입니다.
포드 자동차 회사는 직원들 등급이 정확하게 정해져 있습니다.
모두 27등급입니다. 평사원이 1등급입니다. 대표이사가 27등급입니다. 주자창을 무료로 사용하려면 9등급이 넘어야 합니다. 13등급이 되면 책상이 창가쪽으로 배정받게 됩니다. 그리고 책상에 화분이 하나씩 놓여집니다. 그리고 16등급부터는 화장실이 따로 있는 사무실이 배정됩니다.
이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댓가만큼 받는 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노력만큼 주어지는 임금은 은혜가 아닙니다. 한 시간 일하고 한 데나리온 받는 것이 은혜입니다.
미국의 흑인들은 백인들로부터 멸시를 받고 있습니다. 옛날에 종살이를 하였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흑인의 인권을 찾으려고 흑인 인권 운동을 하다가 멤피스에서 피살된 목사님이 마르틴 루터 킹이십니다.
그리고 흑인 운동가중에 말콤 엑스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은 흑인 문학 베스트 셀러 작가입니다. 말콤 엑스는 어려서부터 자기가 흑인이라는 사실에 상당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거울을 보면서 자기 검은 얼굴을 볼 때마다 비관하였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비관하고 부모를 원망하기도 하였습니다.
“왜 나는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싫어하는 검은 사람이 되었는가?”
하루는 세수비누로 하루 종일 검을 얼굴을 닦아 보기도 하였습니다. 얼굴을 희게 하여 보려고 무진장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허사였습니다. 아무리 닦고 닦아도 검은 피부는 희어지지 않았습니다. 비관하기도 하였습니다. 집안에 들어 앉아 아예 두문 불출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를 영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자기를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무한한 값진 창조물이라는 사실이 깨달아졌습니다. 은혜받고 한 말이 있습니다.
<검정은 아름답다>(Black is beautiful.)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창조물은 모두가 아름다운 것입니다. 검은 피부도 하나님이 창조하셨으니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그는 처음으로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하늘을 나르는 것처럼 기뻤습니다. 어깨에 두 날개를 단 것처럼 홀가분한 기분이었습니다. 그는 그 동안 자기의 아팠던 경험을 되새기면서 글을 썼습니다. 그 글은 일약 베스트 셀러가 되었습니다.
왜 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은혜입니다.
2. ‘불구하고’가 은혜입니다.
하루종일 놀고 한 시간 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루 임금을 받았습니다. 한 시간 일군은 품삯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품삯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은혜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자격이 모자람에도 불구하고 주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미안함에도 불구하고 주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이 일군은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5시에 나가 보았습니다. 서성이는 일군을 모두 데리고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군은 이렇게 변명하였습니다.
“우리를 품군으로 쓰는 이가 없습니다.”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거짓말하였습니다. 거짓말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불구하고>가 은혜입니다.
어떤 의사가 아프리카의 어느 외진 마을에서 의료봉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의료 선교사였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 외국 유학을 하고 돌아와서 축산을 하는 인테리 총각이 있었습니다. 그와 언어가 통하기에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부농임에도 가난한 조국을 위해 일해야겠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훌륭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는 독특한 결혼 풍습이 있었습니다. 청혼을 할 때 남자가 암소를 끌고 처녀의 집으로 갑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암소 받고, 딸 주세요!”
일등 신붓감에게는 암소 세 마리, 괜찮은 신붓감에게는 암소 두 마리, 그리고 보통 신붓감이라면 암소 한 마리로도 결혼을 승낙 받을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의사는 이 청년이 친구들과 마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어디론가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누군가에게 청혼을 하러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이 몰고 나온 청혼 선물은 살찐 암소 아홉 마리였습니다. 그 마을에서는 암소 아홉 마리라면 당장이라도 부자의 반열에 드는 엄청난 재산이었습니다. 모두가 놀랐습니다. 도대체 그 청년이 찾고 있는 처녀가 누구인가 모두 궁금해 하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초비상이었습니다. 그 총각이 누구 집으로 가는 지 눈여겨 보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청년은 마을 촌장의 집을 지나 갔습니다. 그 마을에서 가장 부자인 농장의 주인집도, 마을의 학교 여선생님의 집도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걷더니 어느 허름한 집 앞에 멈춰 섰습니다. 그리고는 그 집 노인에게 청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노인의 딸은 너무도 마르고 약해보이는 초라한 여자였습니다. 암소 한 마리로 청혼을 할 상대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런데 암소 아홉 마리를 가지고 가서 청혼을 하는 것을 보고 동네 사람들이 수군대기 시작했습니다. 그 처녀가 마법으로 청년을 홀린 것이라는 소문까지 돌게 되었습니다.
그 후 의료 선교사인 의사는 의료봉사를 마치고 본국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가끔 그 청년을 생각할 때마다 그 때 왜 아홉 마리의 소를 몰고 그 보잘 것 없는 처녀에게 청혼을 했는지 궁금해지곤 했습니다. 그 후 오랜 세월이 지났습니다. 휴가 차 다시 그 마을을 찾아갔습니다. 그 의사는 큰 사업가가 되어있는 옛날의 그 청년을 만났습니다. 저녁 식사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식사를 하면서 의사는 그에게 청혼선물로는 과도하게 암소 아홉 마리를 건넨 이유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는 웃을 뿐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궁금증이 더 해 갔습니다. 그 때 커피를 들고 한 여인이 들어왔습니다. 아름답고 우아한 한 흑인 여인이었습니다. 유창한 영어와 상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미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의사는 마음속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아! 이 사람이 그때의 말라깽이 처녀 말고 또 다른 아내를 맞이했구나. 하긴 저 정도는 되어야 이 사람하고 어울리지.’ 그 때 사업가가 천천히 말을 시작했습니다. “선생님, 저 사람이 그 때 제가 청혼을 했던 그 여인입니다.” 의사의 놀란 모습을 보고 사업가는 말을 이었습니다. “저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저 사람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저 사람과의 결혼을 꿈꾸고 살아 왔습니다. 아시다시피 저희 마을에선 몇 마리의 암소를 받느냐가 여자들의 세계에선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저도 그런 관습을 무시 할 수가 없어서 암소를 몰고 갔습니다. 사실 제 아내는 한 마리의 암소면 충분히 혼인을 승낙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정말 사랑한 여인이 스스로 자기 자신의 가치를 한 마리의 암소 값에 한정하고 평생을 사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자신을 두 마리나 세 마리를 받았던 처녀들과 비교하면서 움츠려져 살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청혼 때 몇 마리의 암소를 받았느냐가 평생 동안 자기 가치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에 저는 세 마리를 훨씬 뛰어넘는 아홉 마리를 생각해낸 것입니다. 결혼하고 나서 아내에게 공부를 하라고 말해준 적이 없습니다. 외모를 꾸미라고 요구한 적도 없습니다. 저는 있는 그대로의 아내를 사랑했습니다. 또 사랑한다고 이야기 해 주었을 뿐입니다. 처음에는 무척 놀라 하던 아내가 차츰 저의 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혹시 나에게 암소 아홉 마리의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후로 아내는 ‘암소 아홉 마리’에 맞는 사람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아내는 더욱 건강해지고 아름다워져 갔습니다. 저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아내를 사랑하지만, 이제 아내는 결혼할 당시의 모습보다 지금 자신의 모습을 더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 수근대던 동네 아낙들도 요즘은 제 아내의 밝은 미소를 사랑해 줍니다. 누군가 당신에게 소중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최고의 가치를 부여해야 합니다. 그리고 누군가로부터 인정을 받으려면 자신에게 최고의 가치를 부여해야 합니다. 그것이 제가 ‘암소 아홉 마리’로 배운 인생의 교훈이었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한 마리 정도 가격의 처녀에게 9 마리 소를 지불하는 것이 은혜입니다.
3. "내 뜻대로"가 은혜입니다.
은혜의 세 번째 의미는 ‘내 뜻대’입니다. 주인이 말했습니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은혜란 절대 주권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뜻대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엿장수가 엿 가위를 일분에 몇 번 두드릴가요? 대답은 간단합니다. 엿장수 마음대로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주권자이십니다. 그 분 마음입니다. 그 분 뜻대로입니다.
우리 성막 쎄미나가 245기를 지났습니다. 그런데 166기 성막 쎄미나는 내장산에서 있었습니다. 전라도 목사님들이 성막 쎄미나를 내장산에서 하자고 하면서 나를 초청하였습니다. 쎄미나 장소가 가서 보니 내장산속에 있는 모텔이었습니다.
내장산에 장로님 한 분이 은혜 모텔을 세웠습니다. 모텔하면 음란이 연상됩니다. 더구나 유흥지 모텔이니까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모텔 이름을 은혜 모텔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만 받고 있었습니다. 사연을 들어 보았습니다. 5년 전에 위암 죽음을 선고받았습니다. 이제는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그런데 기도로 기적적으로 고침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는 죽기까지 유흥지에서 복음을 전하여야겠다고 깨달았습니다.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유흥지에 은혜 모텔을 만들어 놓고 기독교 행사만 유치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옛말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연월일시(年月日時) 기유정(旣有定)인데 부생(浮生)이 공자망(空自忙)이라.>
(태어난 사주팔자가 이미 정해져 있는 데 인생들이 그것을 모르고 공연히 그것도 모르고 바쁘게 뛰어 다닌다.)
팔자가 정해져 있으면 변화시킬 수 없다는 말입니다. 팔자 소관이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노력하여도 팔자를 넘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팔자를 바꿀 수 있는 비법이 6가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 적선(積善)
좋은 일을 많이 하면 팔자를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조상들이 좋은 일을 많이 하면 자녀들 팔자가 바뀌고 축복이 임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 500년 명문가를 보면 좋은 일, 선한 일을 많이 한 가문이라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2) 눈밝은 스승.
좋은 스승을 만나면 운명이 바뀌어지고, 팔자를 고칠 수 있다는 것이 우리 조상들의 이론입니다. 인생의 중요한 고비마다 영통한 스승의 가르침을 잘 받아 나가면 팔자를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부모들은 자녀들이 좋은 스승을 만나게 하여 달라고 보통 100일 기도를 드리곤 하였습니다. 기도가 하늘에 사무치면 자녀가 좋은 스승을 만나 팔자가 바뀌었습니다.
(3) 명상.
하루에 100분정도씩 매일 명상을 하면 팔자를 능히 바꿀 수 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기도입니다.
(4) 음택(陰宅)이나 양택(陽宅)
명당 자리에 음택(陰宅) 묘지를 잘 쓰거나, 양택(陽宅) 양지바른 곳에 집터를 잘 선택하여 살면 팔자를 고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5) 독서
책을 많이 읽으면 지혜가 생겨서 팔자를 고칠 수 있습니다. 안 좋은 일이 있을수록 밖으로 나가 다니지 말고 집안에 앉아 책을 많이 읽으면 운명, 팔자를 고칠 수 있습니다.
(6) 명리(命理)
자기 자신을 잘 알아서 재물복이 없는 사람은 사업을 하지 말고 취직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의 팔자를 고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자기 운명과 팔자를 고칠 수 있는 것이라고 옛 조상들은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자기 운명을 바꾸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모두가 변하게 됩니다.
아일랜드 코크라는 곳에서 생긴 사건입니다. 빌딩 4층 창문에서 한 사람이 일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밑에서 일하는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순간 모두가 이리 저리 황급하게 피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4층에서 일하던 사람의 발판이 삐끗하면서 그 사람이 밑으로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당황한 이들이 모두 몸을 피하며 놀라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명이 꼼짝 않고 서서 그 사람이 떨어지는 방향을 응시하였습니다. 그리고 달려가서 그 사람을 받았습니다. 순간 그 사람의 뼈가 부스러지면서 평생 불구가 되었습니다. 떨어진 이는 평생 자기를 받아주고 불구가 된 그 사람을 돌보아 주었다고 합니다. 둘 다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자기를 사랑하여 준 이에게 일생 관심을 두고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신 분이십니다. 그 분을 위하여 살아가겠다고 그 분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 은혜받은 자의 자세입니다.
마지막으로 은혜 이야기 하나 드리고 마치려고 합니다.
올해 80세가 되신 임막덕 권사님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는 6.25 때 황해도 옹진에서 인천으로 피난 내려왔습니다. 여자의 몸으로 아들 둘과 생계를 이어 나가기도 어려웠습니다. 힘도 없고, 가진 것도 없었습니다. 의지할 만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은혜 체험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보따리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보따리 속에 항상 전도지를 가지고 다니며 발길이 닿는대로 전도를 하였습니다. 만나는 사람에게마다 전도를 하였습니다. 어린이들에게는 복음 전하는 목사가 되라고 일렀습니다. 전방 포부대가 떠난 자리에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권사님은 대포알 껍데기를 매달아 놓고 종으로 사용하였습니다.
평생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눈물로 기도하고 헌신했습니다. 그가 모은 돈으로 지하 1층, 지상 4층 총 767평의 성전 건축을 하게 되었습니다. 돈을 벌어 그 교회만 길렀습니다. 그 교회에서 12명의 목회자를 배출하였습니다. 그 동안 권사님의 자손 중에 목사와 장로, 의사 등 축복받은 일꾼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약하고 가난한 권사님에게 축복을 부어 주시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큰 감동과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은혜는 축복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1. “왜?”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은혜입니다.
2. "불구하고"가 은혜입니다.
3. "내 뜻대로"가 은혜입니다.
꼴찌가 첫째가 되려면
마 20:1-16 / 문기태목사(창원침례교회)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 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으니 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 보내고 또 제 삼 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저희가 가고 제 육 시와 제 구 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제 십일 시에도 나가 보니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가로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제 십일 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받은 후 집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 20:1-16)
이스라엘땅은 과일이 자라기 적합한 기후조건을 갖춘 지역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서 나는 과일을 유럽에서는 제일로 친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3대 나무를 들면 무화과, 감람나무 그리고 포도나무를 뽑습니다. 그만큼 이스라엘에서 포도나무는 흔합니다. 그런데 과일은 얼마나 햇빛을 많이 받고 자랐느냐?하는 것에 의해 당도가 높고 낮음을 결정 짓습니다. 포도주도 어느 해에 담갔느냐?를 중요하게 여긴다고 합니다. 일조량이 유난히 많았던 해의 포도로 담근 것이면 맛이 훨씬 좋아 값이 더 많이 나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포도원 주인은 포도를 딸 때가 되면 긴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햇빛을 더 많이 받도록 기다렸다가 따야 당도가 좋은데 당도를 높이기 위해 조금, 조금 더 기다리다가 우기가 되어 비바람이 몰아치면 농사가 다 망치는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일찍 포도를 따자니 당도가 낮고 좀 기다렸다가 따자니 비가 오면 다 망치겠고 적당한 타이밍을 잡기가 어렵습니다. 그렇게 기다리다가 '지금이다.'하고 결정하여 포도를 딸 때는 그야말로 온 일손을 다 끌어다가 포도를 따야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포도원 주인이 장터에 나가서 일꾼을 보고는 "너도 가서 일해라. 너도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이렇게 닥치는대로 데려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일손이 많이 필요하고 빠른 시간에 수확을 마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른 아침 즉 여섯시, 그리고 아홉시, 열두시, 오후 세시, 다섯시에도 데려왔습니다. 마지막 포도원에 들어간 사람은 1시간 밖에는 일하지 못했습니다.
이미 일거리를 놓치고 하루의 시간을 다 보냈는데, 한 나절을 다 보낸 이 사람들에게 주인은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그에 상당한 댓가를 주리라." 말합니다. 주인에게는 일손이 아주 부족합니다. 기회를 놓치면 일년 농사가 헛수고가 되어 버립니다.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주님께서 더 많은 이들에게 중요한 기회를 주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나이 많은 사람이나 젊은 사람이나 건강한 사람이나 병든 사람이나 지식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모두에게 지금 좋은 기회를 주고 싶어 하십니다.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그렇게 하루 종일 일한 다음 저녁이 왔습니다. 주인은 노동자들에게 품값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맨 나중에 온 사람부터 주었습니다. 맨 나중에 온 사람 1시간 밖에 일안했는데 한 데나리온을 주었어요. 아침부터 하루 종일 일한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저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었으니까, 우리에게는 다섯 데나리온을 주겠지. 적어도 세 데나리온은 줄거야.' 하고 기대했는데 그도 한 데나리온이에요. 여기서 원망을 하는 거요. 원망할만하잖아요? "나는 하루 종일 일했는데 한 데나리온. 왜 저 사람들은 잠깐 밖에는 일하지 않았는데 왜 역시 한 데나리온 입니까?" 불공평하다고 원망을 합니다. 여러분, 그 원망과 불평이 부당합니까? 당연합니까?
예수님이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주 중요한 것을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나중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써 나중되는 자가 많을 것이다." 입니다. 새번역을 보면 더 재미있게 표현했습니다. '이와 같이 꼴찌들이 첫째가 되고 첫째들이 꼴찌가 될 것이다.'
여러분은 지금 첫째 인생입니까? 꼴찌인생입니까? 여러분 첫째 인생이 되고 싶습니까? 꼴찌 인생이 되고 십습니까? 여러분 모두 꼴찌인생으로 출발했어도 첫째 인생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하시려는 말씀은 무엇일까요? 꼴찌 인생이 첫째 인생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은혜를 깨달으면 꼴찌 인생도 첫째가 됩니다.
이 말씀은 먼저 유대인들을 겨냥한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적자 후손들이고 특별히 선택을 받은 선민이라는 것입니다. 그에 반해 이방인들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외인들이요, 율법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는 야만인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은 우습게 여기고 항상 자기들의 성경 지식과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자랑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회 있을 때마다 유대인들을 책망했습니다. 오히려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셔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믿음을 통한 구원을 강조했습니다. '죄인도 회개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이방인들도 구원받아 풍성한 생명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니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은 한없이 미운 존재였습니다.
본문에서 이른 아침에 일하러 온 사람들은 유대인을 암시합니다. 이 유대인들은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려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행실을 이방인들의 행실에 비추어 볼 때 너무 완벽에 가까웠습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율법을 배우며 살아 세상의 때도 묻지 않았고 그러니 당연히 특별대접을 받을 것이다.' 하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렇게 하다보니 선택받은 은혜, 이제껏 하나님께 사랑받으며 산 은혜를 잊고 기쁨과 감사가 사라졌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은 죄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은혜보다는 자신의 행위를 의지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필요함을 못 느끼고 거부합니다. 윤리적으로, 성경적으로 완벽에 가까운 삶을 사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기를 잘합니다. '우리는 일찌기 조상적부터 이제까지 율법을 잘 알고 지켰으며 안식일을 철저히 지켰다. 금식도 자주 하고 기도도 열심히 하는데 너희는 그게 뭐냐? 이제껏 하나님도 모르고 살지 않았느냐? 그런데 어떻게 천국 가겠느냐?'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들도 죄인입니다. 똑같이 하나님의 큰 은혜가 필요한 불쌍한 이들입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반면에 많은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고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이들은 이제까지 하나님을 모르고 방탕하게 산 것이 후회가 되고 부끄럽게 짝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불러 주시고 일할 기회를 주시니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모릅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주님을 위해서 살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제일 늦게 믿고 돌아온 이들을 첫째 자리에 올리십니다. 그리고 먼저 믿은 이들은 꼴찌로 만드십니다.
오후 세 시, 다섯 시에 온 사람들은 그 만큼 일은 못했지만 한 데나리온을 받아 가야 굶고 있는 가족들을 먹여 살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은혜를 베푼 것입니다. 하나님도 오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로 구원해 주십니다. 그런데 이른 아침에 온 사람은 주인과 계약한대로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은혜로 받은 것이 아니고 수고한대로 품삯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품삯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내가 남보다 더 고생하고 수고했으니 당연히 더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목청을 높입니다. 결국 그런 생각때문에 나라가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나라위해 희생하여 나라가 좋아졌으니 보람으로 만족하겠다.' '주님과 교회를 위해 헌신하여 좋은 결과를 보게 되었으니 감사하다. 그 과정에서 기쁨이 넘쳤으니 나는 충분한 보상을 받은 것이다.' 하는 사람이 많이 나와야 나라가 건강해지고 교회가 은혜스러워집니다.
토레이 박사가 호주에서 집회를 인도할 때에 강단위에 쪽지가 올라왔습니다. "박사님, 저는 기도 제목이 하나 있습니다. 오랫동안 기도했는데 응답이 없습니다. 저는 3대째 신앙생활을 하고 있고 25년동안 주일학교 교사로 봉직했고 20년동안 교회 장로로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습니까?"
토레이 박사가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당신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공로를 내세워 기도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공로의식을 말살하기 전까지는 기도가 절대 응답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품삯을 구하지 말고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공로를 늘 바라보며 불평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바라보며 항상 감격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꼴찌인생에서 벗어나 첫째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2. 비교하지 않으면 꼴찌 인생도 첫째가 됩니다.
주인과 나와의 계약을 생각해보면 원망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애당초 약속이 한 데나리온이니까 그렇잖아요? 얼마나 고마워요? 아무도 불러주지 않았으면 하루 공치고 놀아야 하잖아요. 놀지 않고 하루 일하고 품삯을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감사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나와 똑같이 대우받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어요. 나는 저 사람보다 더 많이 일했는데 같은 대접을 받네 하고 비교하다 보니까 감사가 사라지고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모습을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에 대해서는 긍정적이고, 남에게 대해서는 부정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감은 있는데 남을 멸시하는 교만이 있습니다. 자신은 다 긍정적으로 보고 남은 항상 부정적으로 봐요. 이 때문에 불행합니다. 둘째는 자신에 대해서는 부정적이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사람이 있어요. 이 사람은 항상 남을 부러워하며 살아요. 남의 처지만 좋아보여요. 남의 떡만 커보여요. 남의 자식은 잘된 것 같고 내 자식은 잘못된 것 같아요. 심지어는 남편도 남의 남편이 훨씬 좋고 내 남편은 '어쩌다 저런 게 걸렸나?' 이렇게 생각한데요. 항상 불평이라는 거예요. 그 다음에 세 번째는 자기에게 대해서도 부정적이고 남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에요. 이 사람이 염세주의자에요. 항상 이 사람은 불평과 원망이 가득합니다. 세상을 향해 아주 비관적입니다. 그런가하면 자기에 대해서도 긍정적이고, 남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사람이 있어요. 나 자신도 행복하고 남도 행복하게 봐요. 그리고 남을 부러워 할 것도 없고 더불어 행복할줄 아는 사람이에요. 긍정적으로 보면 행복하고 비교하면 불행해집니다.
오늘 본문에 주인은 말씀합니다.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무슨 말입니까? "네가 받은 것이 은혜라고 왜 생각을 못하느냐? 네가 받은 한 데나리온을 왜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느냐? 내가 너를 부르지 않았다면 너는 오늘 하루 공쳤을 거 아니냐? 내가 너를 불렀기에 하루 일했고 또 품값도 받는 것 아니냐? 네 것. 그것이 많던 적던 내가 본래 너와 약속한 것 아니냐? 너와 나의 약속이 한 데나리온이다. 이것은 정당하다. 합당하다. 또 은혜다." 그 말입니다. 얼마나 중요한 얘깁니까?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것을 인하여 감사하십니까? 난 하나님께 받은 좋은 것이 하나도 없다라고 생각하십니까?
미국 스텐포드대학교 필립 하츠 박사가 조사한 자료를 소개하겠습니다. 이 지구상의 60억 인구를 똑 같은 비율로 100명으로 줄여서 한 마을에 모아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100명중 20명만 자기 집에서 살았고 80명은 적정 수준이 못미치는 주거 환경에서 살았습니다. 100명중 70명은 문맹이었고 백 명중 50명은 영양부족을 겪고 있었습니다. 100명 가운데 한 명 만이 대학교육을 받았습니다.
통계적으로 보면 지구촌에 살면서 내 집이 있고 먹을 게 있고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주 복이 많은 선택된 사람입니다. 게다가 전쟁의 위험, 감옥에서의 고독, 기아의 괴로움등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세계인구 상류층 500만명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체포, 고문, 죽음의 위협없이 매주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라면 특별한 행운아입니다. 냉장고에 먹을 것이 있고 몸에 걸칠 옷이 있으며 잠잘 수 있는 집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 75%의 사람들보다 더 풍요로운 삶을 사는 셈입니다. 만약에 저축해 둔 약간의 돈이 있어서 아이가 아플 때 병원에 입원시킬 수 있고 친구에게 식사를 대접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지구촌에서 상위 8%에 해당하는 부자에 속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최소한 그정도는 속하는 굉장한 부자들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말슴하십니다.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여러분 혹시 일찍 구원받은 것이 억울합니까? 남보다 더 많이 헌신하고 충성한 것이 억울합니까?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손해본 것 같습니까? 뒤 늦게 불려 온 내 가족이 나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목 마땅합니까? 혹시 공연히 나보다 다른 사람에게 주님이 더 많이 은혜 베푸시지 않나? 하는 생각때문에 은혜받고도 행복하지 못한 것은 아닙니까? 그런 마음을 품고 있으면 첫째 인생으로 시작하였어도 꼴찌 인생으로 끝나게 됩니다.
우리는 오직 은혜로 삽니다. 잃어버린 기회도 꾸짖지 아니하시고 새로운 기회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이 얼마나 고마운 말씀입니까? 사실은 일을 했으니 돈을 주는 게 아니고요, 돈을 주기 위해서 일을 시킨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한 시간밖에 남지 않았음에도 "이 사람아 처자식이 있는데 놀고 있어서야 되겠나? 한 푼 벌어야 살게 되지 않겠는가?" 이 주인의 마음이 얼마나 귀합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불쌍히 여기시고 또 은혜를 베푸십니다. 새로운 은혜를 베푸십니다. 현재라고 하는 시점에서 기회는 공평합니다. 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내가 사는 현재, 현재 이 현시점, 이 현실 이대로가 내게 주신 은혜요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은혜가 무엇입니까? 그것을 소중히 여기세요. 이미 주신 모든 것이 내게 주신 최상의 은사임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 기회, 약속, 축복들을 깨닫고 불평하지 않고 감사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여 일하면 여러분은 꼴찌 인생으로 시작하였어도 첫째 인생으로 역전시킬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부터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포도원에서 일하며 주님 주신 한 데나리온을 기뻐하며 행복하게 사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품꾼을 부르는 선한 주인
마태복음 20:1-16 / 윤영택(옥스포드한인교회)
오늘 읽은 본문 바로 앞 마태복음 19장에 부자 청년이 예수께 찾아와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질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의 대화 끝에 재산이 많은 것 때문에 근심하며 돌아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부자 청년은 부모를 잘 만난 덕인지 능력이 좋은지 일찌감치 부자가 되었고 사회적인 지위나 율법을 잘 지키는 종교적인 열심 등 모든 면에서 부러움과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작은 부자는 스스로 만들고 큰 부자는 하늘이 만든다는 말이 있는데 옛날 유대 사회에서도 부자는 하나님께 복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뜻밖에도 이 사람을 가리켜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쉽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감짝 놀라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물었더니 주님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으로서는 할 수 있느니라’ 하셨습니다. 지난 여름에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는 제목으로 이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이 부분을 좀 더 생생하게 증언합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율법을 잘 지켰다고 자랑했던 부자 관원은 가진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그후에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재산이 많은 것 때문에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영생도 좋지만 재물을 더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에 고민하며 저울질하다 그만 물질쪽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여리고 성의 세리장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난 뒤 삶의 방식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재산의 절반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혹시 남의 것을 도적질한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다 약속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삭개오를 가리켜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는 칭찬을 하셨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매국노와 죄인으로 낙인이 찍힌 세리장 삭개오를 변화시켜 새사람이 되게 하시는 것, 이것이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입니다.
결과적으로 드러난 사실이지만 부자 청년이 예수께 찾아온 것은 솔직히 나는 자타가 공인하는 복받은 사람, 이미 구원을 얻은 사람이라 자신하며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고픈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그것도 유명하신 예수 선생님으로부터 ‘그만하면 충분하다’는 칭찬을 듣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천국시민으로서 먼저 갖추어야 할 중요한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현세의 복과 영생의 상징으로 굳게 믿었던 그의 재물이 그의 발목을 잡는 걸림돌이 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이 부자 청년을 모델로 삼아 구원에 대한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어떻게 다른지 분명하게 가르쳐주셨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맥없이 돌아가는 부자 청년의 모습을 보고 놀랐습니다. 저런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우리 같은 사람은 불가능한 것 아닐까? 베드로가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으니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요?’라고 질문했습니다. 저 사람은 버리지 못했지만 우리는 다 버렸으니 그 보상이 무엇인가 질문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가 하면 구원에 대한 불확실한 믿음에서 나온 질문이기도 합니다. 부자 청년이 가진 것과는 비교가 안되지만 그래도 가진 것 모두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에게는 혹시 영생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영광의 보좌에 앉게 될 때 나를 따르는 너희들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을 심판하게 될 것이며,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 사람들은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얻을 것이다’ 하셨습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다’는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그리고 곧장 오늘의 비유를 말씀하셨으며 결론에서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하셨습니다. 이 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재물이 많고 적음이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지만 재물 때문에 구원을 소홀히 여기는 사람들은 너무 많습니다. 돈이 너무 많아 세상 살아가는데 부족함이 없어 즐기며 살다가 영생에 무관심한 사람이 있습니다. 가난 때문에 몸과 마음이 지쳐 육신의 것만 따르다 영원한 생명을 거절하고 결국 세상에게 굴복하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주님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 하셨고, 언제나 가난한 자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나 부자이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갈 수 없고 가난하면 누구나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신 적은 없습니다.
영생은 돈으로 사고 파는 것이 아니고 물질의 많고 적음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부자에다 율법도 잘 지키는 사람은 당연히 구원을 얻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옛날 유대인들이 눈에 보이는 물질을 기준으로 정하고 믿었던 고정관념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 사회의 낡은 통념을 깨뜨리고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달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자 청년처럼 자신만만하다고 얻은 것이 아니고 제자들처럼 확신이 없어 염려한다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이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선물 영생입니다. 영생 혹은 구원은 사람이 노력하거나 본성이 착하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달렸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내 뜻이 아니라 구원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생의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가장 앞섰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맨나중이 되고 나같은 사람은 안될거라 생각하는 사람이 앞서는 일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천국의 비밀이며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의 비유를 살펴봅시다.
어느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서 일할 일군들을 모집하러 날이 밝기 전 이른 아침에 장터로 나가 하루 한 데나리온 일당을 약속하고 품꾼들을 포도원으로 들여보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아침 해가 환하게 떠오른 제삼시에 또 장터로 나갔습니다. 유대인의 제삼시는 현대 시간으로 아침 9시인데 아직 일자리를 얻지 못한 사람들이 놀고 서있었습니다. 주인은 이 사람들에게 적당한 품삯을 주겠다 약속하고 포도원으로 들여보냈습니다. 비록 첫 시간을 놓쳐 풀타임 일당을 받을 수는 없지만 적당히 받을 수 있으니 다행이라 생각하고 포도밭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낮 12시와 오후 3시에도 또 나가 아직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놀고 섰는 사람들을 보고 동일한 방식으로 포도원으로 불렀습니다. 아마 그 사람들도 하루 일당의 반토막이나 아니면 밥값이라도 받으면 좋겠다 기대하고 들어갔을 것입니다.
주인의 일군 모집은 여기서 끝이 났습니까? 주인은 제11시 즉 오후 다섯시에 또 장터로 나갔는데 거기 놀고 있는 사람들을 또 있었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섰느냐?’는 질문에 사람들은‘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사람이 없습니다’하고 풀죽어 대답했습니다. 이 사람들도 일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야 가족들에게 줄 양식을 사들고 갈 수 있는데 아무도 불러주는 사람이 없어 시간만 보내고 있었습니다. 오후 다섯시는 농장 일이 마감하기 한 시간 전이니 이제 누가 우리를 쓰겠다고 부르겠는가?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그들은 맘 속으로 울고 있습니다.
지금도 많은 실직자들과 대학을 나온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구하려고 살벌한 취업경쟁 속에서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인력시장 언저리를 서성대는 수많은 젊은이들과 새직장을 얻으려고 대기중인 명예퇴직자들의 심정이 오늘 장터에 나온 품꾼들과 같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오후 다섯시에도 놀고있는 사람들까지 자기 포도원으로 들여보냈습니다. 어떤 주석가의 말처럼 포도 추수기에 일손이 부족하여 눈에 뜨이는 대로 모두 불러들였을까요? 수확기를 놓치면 농사를 망치기 때문에 한 푼이라도 더 건지려고 애쓰는 주인이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예상을 완전히 깨뜨리는 일이 품삯을 나눠주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주인은 청지기에게 나중 온 사람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사람의 순으로 품삯을 나눠주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후 다섯시에 들어와 겨우 한 시간만 일한 사람이 받은 품삯이 놀랍게도 온전한 하루 일당인 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돈을 받은 일군이 당황하여 ‘이거 혹시 이른 아침에 온 사람에게 줄 것을 저에게 실수로 주신 것 아닙니까?’라고 묻지 않았을까요?
성경에는 그런 말이 없지만 청지기가 그 사람에게‘우리 주인님이 그렇게 하라 했으니 아무 말 말고 받아가시오’하자 돈을 받아든 사람들이 감동을 받아 주인 앞에 큰절이라도 했을 것 같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불러주지 않아 종일토록 장터에서 서성이며 맘고생했던 우리를 포도원으로 불러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하루 일당을 통째로 받았으니 놀랍지 않은가 하며 주인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시했을 것입니다.
앞 사람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을 본 다음 사람들 역시 주인의 너그러움에 놀랐고 중간에 들어와 하루 일당의 절반이나 혹 그 이상만 받아도 족하다 생각했던 사람들은 머리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습니다. 이 포도원의 기본급은 한 데나리온인가 보다. 그럼 거기에 시간 수당이 붙으면 얼마나 될까? 오늘 운수대통이로다 하고 잔뜩 기대하며 받은 돈을 세어보니 역시 앞 사람과 동일한 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고 뒤로 갈수록 품삯을 받은 사람들의 얼굴빛이 점점 달라졌습니다. 너그러운 주인에 대한 칭송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마침내 먼저 온 사람들이 주인을 향해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 이런 사람들과 하루 종일 수고하고 더위를 참고 일한 우리를 똑같이 취급하시면 안되지요’
이른 아침에 부름을 받은 일군들은 자기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기술이 좋고 일도 잘해 먼저 선택받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장터에서 빈둥거리다 뒤늦게 한 시간만 일한 친구들과 동일하게 취급하는 주인의 태도가 도대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이 포도원의 품삯 지급 기준은 도대체 뭐야? 라고 수근거릴 때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합니다. 이보게 친구, 내가 그대에게 무엇을 잘못하였는가? 내가 그대와 약속한 한 데나리온을 주었으니 그대가 받은 것이나 가지고 돌아가게.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 그대와 같은 품삯을 주는 것이 내 뜻이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인가? 내가 너그럽게 베푸는 것이 그대 눈에는 거슬리는가? 했습니다.
여기까지가 주인과 일군들의 대화 내용이고 마지막 16절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되리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내린 비유의 결론입니다.
추수기에 일손이 모자란 주인이 닥치는 대로 사람을 불렀다면 한 푼이라도 더 남기려고 품삯을 시간당 꼼꼼이 계산하여 나눠주었을 것입니다. 그래야 주인도 손해가 없고 일군들도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나중 온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품삯을 준 것을 보면 이 주인은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여 더 많은 이득을 남기려 했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약속한 대로 정당한 품삯을 주지 않은 악덕 주인도 아닙니다. 자기 이득보다는 일자리를 주고 품삯을 주려는 선한 마음으로 일군을 불렀으니 존경을 받으면 받았지 원망을 살만한 사람은 아닙니다. 이런 주인이 어디 있다면 그 포도원에서 일하려고 전국의 일군들이 몰려들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비유를 듣는 제자들도 주인의 뜻을 이해할 수 없지만 이야기 속에 나오는 일군들 역시 주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비유는 어디까지나 천국의 비밀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신 이야기이고 실제로 그런 주인이 있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 주인이 정말 있다면 일부러 오후 다섯시에 장터를 어슬렁거리다 그 주인의 눈에 뜨여 대충 일하고 하루 품삯을 챙기려는 게으르고 약삭빠른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겁니다.
이 비유는 그런 것까지 예상하여 만든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들려준 비유의 목적은 어떤 진리를 설명하기 위한 수단이지 그 비유가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아니다를 따지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게 됩니까?’(마19:27) 했던 베드로의 질문에 대해 천국은 이와 같다고 설명하신 대답으로 이해하면 족합니다.
포도원 주인이 한 일은 세상의 기준으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천국 스타일이라는 것이 이 비유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이렇게 너그럽고 선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하나님 나라의 포도밭으로 들어온 일군들입니다. ‘영생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들에게 뜻대로 주시는 것이지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 알겠느냐? 그러므로 죄인들을 불러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선하심을 사람의 생각으로 판단하여 불평하거나 오해하지 말라’고 따끔하게 일침을 놓으십니다.
우리는 세상의 방식, 세속적인 가치기준에 익숙하고 길들여졌기 때문에 이렇게 독톡한 하나님 나라의 방식은 너무 생소하여 적응하기 힘들어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못마땅해 하고 시기가 나며 ‘하나님 그런 식으로 하면 안되지요’하고 하나님을 한 수 가르치려 든다. 이것이 먼저 온 품꾼들이 주인을 향해 원망하던 태도였습니다.
어떻게 저런 인간에게 영생을 주실까? 저 사람에 비하면 나는 훨씬 양심적이고 주의 사업을 위해 더 많이 헌신하고 희생하며 오래 전부터 수고했는데 나는 알아주지 않고 이제 막 예수 믿은 어린애 같은 저 사람이 나보다 더 사랑을 받다니 이것은 불공평하다. 나는 몇대째 예수 믿는 집안에서 자란 사람이고 이제껏 한눈 팔지 않고 성실하게 예수를 믿고 있는데 저 친구들은 뭔가? 세상에서 맘껏 즐기고 못된 짓만 골라 하다 이제 교회 다녀보겠다고 어쩌다 얼굴 한 번 보이는데 저런 사람도 영생을 얻는다면 나는 정말 억울하다. 하나님이 나를 저런 친구들과 똑같이 취급하신다면 불공평하다. 하나님은 도대체 뭘하고 계신다는 말인가? 이런 식으로 불평할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먼저 된 사람이 나중이 되고 나중 된 사람이 먼저 된다고 하신 것이 바로 이런 사람들을 두고 하신 말입니다. 나중에 부름을 받아 하나님 나라의 포도밭에서 일하게 된 사람들은 나같은 사람을 불러주신 은혜에 감격하여 온 힘을 다해 기쁨게 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시민은 이런 감격과 기쁨으로 층만하여 사는 사람이며 그 나라의 특성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입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등 종교 지도자들은 천국의 중심에 있다고 자부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대로 세리와 창기들은 같은 유대인이지만 하나님 나라 밖으로 내던져진 죄인 취급을 받았고 감히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기 두려웠던 버려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만일 천국문 앞에 선착순으로 줄을 선다면 맨 꼴찌에 서있다 문 닫는 시간이 되어 잘려나갈 것으로 여겨지던 사람들입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어디쯤 와있다고 생각했을까요? 이른 아침이라고 하기에는 자신이 없고 아침 9시나 낮 12시쯤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했을까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그 사람이 모태신앙인가 아닌가, 종교생활을 얼마나 열심히 하고 있는가 아닌가 그런 것보다 그가 지금 하나님의 구원을 진심으로 갈망하며 구원의 기쁨을 감사하는 사람인가를 보십니다. 스스로 앞섰다고 생각하여 나중 된 사람들을 무시하고 동등한 취급 당하는 것을 불쾌하게 여기는 사람의 어리석음을 꾸짖으시며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이라고 알려주십니다.
하루 한 데나리온 받고 일하기로 약속한 일군은 뜨거운 햇빛과 더위와 씨름하며 수고해야 하는 것을 알고 동의한 사람입니다. 일찌감치 부름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 나라의 사업에 동참하고 있다는 그 사실 하나 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며 땡볕에서의 수고와 인내를 감수하기로 작정한 사람입니다. 내가 일찍부터 택함을 받고 하나님의 포도원에서 평안한 마음으로 일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동안 포도원 밖 세상이라는 장터에는 아직도 부름 받지 못하고 초조한 마음을 달래며 서성이는 많은 사람들이 있음을 생각합시다.
영혼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동이 트기 전 이른 아침부터 세상이라는 장터로 나가셨을 뿐 아니라 지금 구원의 역사가 종결되어 가는 석양의 시간에도 계속하여 사람들을 불러 하나님 나라로 들여보내시는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어떤 사람은 모태신앙인으로 불러내시고 어떤 이는 청년의 시절에, 인생의 쓴맛 단맛을 다 경험한 장년과 노년의 시절에 부르시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떤 이는 병상에서 마지막 가쁜 호흡을 내쉬는 순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나라로 들어갑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 거룩한 성으로 들어가는 열두 대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동서남북에 각각 세 개씩 열려있는 열두 문은 세계 모든 민족을 불러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상징합니다. 이 열두 문에 대한 재미있는 설명이 있습니다. 동쪽으로 난 문은 아침 햇살을 받는 방향으로 난 문인데 이 문은 이른 새벽부터 하나님께 부름 받은 어린아이들이 들어오는 문이라고 했습니다. 서쪽으로 난 문은 석양의 햇살을 받으며 노인들이 들어오는 문이고, 남쪽 문은 한참 일할 나이에 주님께 부름 받고 들어가는 순교자의 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북쪽 문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빈손 들고 주께 와 십자가를 붙드네’하고 고백하며 들어오는 문이라 하였습니다. 동서남북 사방으로부터 남녀노소, 빈부귀천, 민족과 혈통을 초월하여 이른 아침부터 오후 5시 천국문이 닫히려는 순간까지 세상의 택함 받은 모든 사람들을 쉬지 않고 불러모으시는 하나님의 열심과 선하고 너그러우심에 영광을 돌립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아무 것도 공헌한 것이 없어 보이는 사람도 있지만 하나님이 그를 부르시면 빈손 들고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들고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달렸던 강도 역시 그렇게 부름을 받고 주님과 함께 낙원으로 들어간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불공평하고 부당합니까? 그러니까 나도 젊을 때 잘 놀다 인생의 석양에 손들고 하나님께 돌아가면 되겠구나 그런 생각을 합니까? 누가 자기 맘대로 원하는 때에 구원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까? 그것이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자신의 것으로 뜻대로 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는 집 주인과 같다’하셨지요? 먼저 온 사람부터 나중 온 사람 순으로 일당을 주는 것은 유대사회에서 통용되던 이 세상의 일반적인 방식입니다. 그런데 맨 나중에 온 사람부터 맨 처음에 들어온 사람의 순으로 한 데나리온씩 똑같이 나눠주는 것은 천국 스타일입니다. 나중에 온 사람부터 일당을 받게 하는 이것이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도적인 이야기 전개 방식이었습니다. 오후 5시에 들어온 일군의 기쁨과 감사하는 모습을 먼저 들어온 사람들이 보고 깨달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은혜의 선물입니다.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지난 날의 추억으로 여기고 지금은 기쁨도 눈물도 감사와 가슴 벅참도 사라지고 무덤덤하게 지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뜨거운 가슴으로 신앙생활하는 다른 사람을 이상한 눈으로 흘겨보며 판단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기쁨으로 가득한 순수한 영혼들을 보며 나는 어디서 그것을 떨어뜨렸는가 생각하고 잃어버린 여러분의 첫사랑을 회복하여 주 안에서 날마다 감사하는 충성스런 주의 일군으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오늘 읽은 본문 바로 앞 마태복음 19장에 부자 청년이 예수께 찾아와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질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의 대화 끝에 재산이 많은 것 때문에 근심하며 돌아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부자 청년은 부모를 잘 만난 덕인지 능력이 좋은지 일찌감치 부자가 되었고 사회적인 지위나 율법을 잘 지키는 종교적인 열심 등 모든 면에서 부러움과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작은 부자는 스스로 만들고 큰 부자는 하늘이 만든다는 말이 있는데 옛날 유대 사회에서도 부자는 하나님께 복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뜻밖에도 이 사람을 가리켜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쉽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감짝 놀라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물었더니 주님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으로서는 할 수 있느니라’ 하셨습니다. 지난 여름에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는 제목으로 이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이 부분을 좀 더 생생하게 증언합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율법을 잘 지켰다고 자랑했던 부자 관원은 가진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그후에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재산이 많은 것 때문에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영생도 좋지만 재물을 더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에 고민하며 저울질하다 그만 물질쪽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여리고 성의 세리장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난 뒤 삶의 방식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재산의 절반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혹시 남의 것을 도적질한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다 약속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삭개오를 가리켜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는 칭찬을 하셨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매국노와 죄인으로 낙인이 찍힌 세리장 삭개오를 변화시켜 새사람이 되게 하시는 것, 이것이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입니다.
결과적으로 드러난 사실이지만 부자 청년이 예수께 찾아온 것은 솔직히 나는 자타가 공인하는 복받은 사람, 이미 구원을 얻은 사람이라 자신하며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고픈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그것도 유명하신 예수 선생님으로부터 ‘그만하면 충분하다’는 칭찬을 듣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천국시민으로서 먼저 갖추어야 할 중요한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현세의 복과 영생의 상징으로 굳게 믿었던 그의 재물이 그의 발목을 잡는 걸림돌이 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이 부자 청년을 모델로 삼아 구원에 대한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어떻게 다른지 분명하게 가르쳐주셨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맥없이 돌아가는 부자 청년의 모습을 보고 놀랐습니다. 저런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우리 같은 사람은 불가능한 것 아닐까? 베드로가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으니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요?’라고 질문했습니다. 저 사람은 버리지 못했지만 우리는 다 버렸으니 그 보상이 무엇인가 질문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가 하면 구원에 대한 불확실한 믿음에서 나온 질문이기도 합니다. 부자 청년이 가진 것과는 비교가 안되지만 그래도 가진 것 모두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에게는 혹시 영생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영광의 보좌에 앉게 될 때 나를 따르는 너희들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을 심판하게 될 것이며,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 사람들은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얻을 것이다’ 하셨습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다’는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그리고 곧장 오늘의 비유를 말씀하셨으며 결론에서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하셨습니다. 이 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재물이 많고 적음이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지만 재물 때문에 구원을 소홀히 여기는 사람들은 너무 많습니다. 돈이 너무 많아 세상 살아가는데 부족함이 없어 즐기며 살다가 영생에 무관심한 사람이 있습니다. 가난 때문에 몸과 마음이 지쳐 육신의 것만 따르다 영원한 생명을 거절하고 결국 세상에게 굴복하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주님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 하셨고, 언제나 가난한 자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나 부자이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갈 수 없고 가난하면 누구나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신 적은 없습니다.
영생은 돈으로 사고 파는 것이 아니고 물질의 많고 적음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부자에다 율법도 잘 지키는 사람은 당연히 구원을 얻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옛날 유대인들이 눈에 보이는 물질을 기준으로 정하고 믿었던 고정관념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 사회의 낡은 통념을 깨뜨리고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달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자 청년처럼 자신만만하다고 얻은 것이 아니고 제자들처럼 확신이 없어 염려한다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이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선물 영생입니다. 영생 혹은 구원은 사람이 노력하거나 본성이 착하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달렸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내 뜻이 아니라 구원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생의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가장 앞섰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맨나중이 되고 나같은 사람은 안될거라 생각하는 사람이 앞서는 일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천국의 비밀이며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의 비유를 살펴봅시다.
어느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서 일할 일군들을 모집하러 날이 밝기 전 이른 아침에 장터로 나가 하루 한 데나리온 일당을 약속하고 품꾼들을 포도원으로 들여보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아침 해가 환하게 떠오른 제삼시에 또 장터로 나갔습니다. 유대인의 제삼시는 현대 시간으로 아침 9시인데 아직 일자리를 얻지 못한 사람들이 놀고 서있었습니다. 주인은 이 사람들에게 적당한 품삯을 주겠다 약속하고 포도원으로 들여보냈습니다. 비록 첫 시간을 놓쳐 풀타임 일당을 받을 수는 없지만 적당히 받을 수 있으니 다행이라 생각하고 포도밭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낮 12시와 오후 3시에도 또 나가 아직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놀고 섰는 사람들을 보고 동일한 방식으로 포도원으로 불렀습니다. 아마 그 사람들도 하루 일당의 반토막이나 아니면 밥값이라도 받으면 좋겠다 기대하고 들어갔을 것입니다.
주인의 일군 모집은 여기서 끝이 났습니까? 주인은 제11시 즉 오후 다섯시에 또 장터로 나갔는데 거기 놀고 있는 사람들을 또 있었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섰느냐?’는 질문에 사람들은‘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사람이 없습니다’하고 풀죽어 대답했습니다. 이 사람들도 일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야 가족들에게 줄 양식을 사들고 갈 수 있는데 아무도 불러주는 사람이 없어 시간만 보내고 있었습니다. 오후 다섯시는 농장 일이 마감하기 한 시간 전이니 이제 누가 우리를 쓰겠다고 부르겠는가?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그들은 맘 속으로 울고 있습니다.
지금도 많은 실직자들과 대학을 나온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구하려고 살벌한 취업경쟁 속에서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인력시장 언저리를 서성대는 수많은 젊은이들과 새직장을 얻으려고 대기중인 명예퇴직자들의 심정이 오늘 장터에 나온 품꾼들과 같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오후 다섯시에도 놀고있는 사람들까지 자기 포도원으로 들여보냈습니다. 어떤 주석가의 말처럼 포도 추수기에 일손이 부족하여 눈에 뜨이는 대로 모두 불러들였을까요? 수확기를 놓치면 농사를 망치기 때문에 한 푼이라도 더 건지려고 애쓰는 주인이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예상을 완전히 깨뜨리는 일이 품삯을 나눠주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주인은 청지기에게 나중 온 사람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사람의 순으로 품삯을 나눠주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후 다섯시에 들어와 겨우 한 시간만 일한 사람이 받은 품삯이 놀랍게도 온전한 하루 일당인 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돈을 받은 일군이 당황하여 ‘이거 혹시 이른 아침에 온 사람에게 줄 것을 저에게 실수로 주신 것 아닙니까?’라고 묻지 않았을까요?
성경에는 그런 말이 없지만 청지기가 그 사람에게‘우리 주인님이 그렇게 하라 했으니 아무 말 말고 받아가시오’하자 돈을 받아든 사람들이 감동을 받아 주인 앞에 큰절이라도 했을 것 같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불러주지 않아 종일토록 장터에서 서성이며 맘고생했던 우리를 포도원으로 불러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하루 일당을 통째로 받았으니 놀랍지 않은가 하며 주인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시했을 것입니다.
앞 사람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을 본 다음 사람들 역시 주인의 너그러움에 놀랐고 중간에 들어와 하루 일당의 절반이나 혹 그 이상만 받아도 족하다 생각했던 사람들은 머리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습니다. 이 포도원의 기본급은 한 데나리온인가 보다. 그럼 거기에 시간 수당이 붙으면 얼마나 될까? 오늘 운수대통이로다 하고 잔뜩 기대하며 받은 돈을 세어보니 역시 앞 사람과 동일한 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고 뒤로 갈수록 품삯을 받은 사람들의 얼굴빛이 점점 달라졌습니다. 너그러운 주인에 대한 칭송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마침내 먼저 온 사람들이 주인을 향해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 이런 사람들과 하루 종일 수고하고 더위를 참고 일한 우리를 똑같이 취급하시면 안되지요’
이른 아침에 부름을 받은 일군들은 자기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기술이 좋고 일도 잘해 먼저 선택받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장터에서 빈둥거리다 뒤늦게 한 시간만 일한 친구들과 동일하게 취급하는 주인의 태도가 도대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이 포도원의 품삯 지급 기준은 도대체 뭐야? 라고 수근거릴 때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합니다. 이보게 친구, 내가 그대에게 무엇을 잘못하였는가? 내가 그대와 약속한 한 데나리온을 주었으니 그대가 받은 것이나 가지고 돌아가게.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 그대와 같은 품삯을 주는 것이 내 뜻이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인가? 내가 너그럽게 베푸는 것이 그대 눈에는 거슬리는가? 했습니다.
여기까지가 주인과 일군들의 대화 내용이고 마지막 16절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되리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내린 비유의 결론입니다.
추수기에 일손이 모자란 주인이 닥치는 대로 사람을 불렀다면 한 푼이라도 더 남기려고 품삯을 시간당 꼼꼼이 계산하여 나눠주었을 것입니다. 그래야 주인도 손해가 없고 일군들도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나중 온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품삯을 준 것을 보면 이 주인은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여 더 많은 이득을 남기려 했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약속한 대로 정당한 품삯을 주지 않은 악덕 주인도 아닙니다. 자기 이득보다는 일자리를 주고 품삯을 주려는 선한 마음으로 일군을 불렀으니 존경을 받으면 받았지 원망을 살만한 사람은 아닙니다. 이런 주인이 어디 있다면 그 포도원에서 일하려고 전국의 일군들이 몰려들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비유를 듣는 제자들도 주인의 뜻을 이해할 수 없지만 이야기 속에 나오는 일군들 역시 주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비유는 어디까지나 천국의 비밀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신 이야기이고 실제로 그런 주인이 있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 주인이 정말 있다면 일부러 오후 다섯시에 장터를 어슬렁거리다 그 주인의 눈에 뜨여 대충 일하고 하루 품삯을 챙기려는 게으르고 약삭빠른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겁니다.
이 비유는 그런 것까지 예상하여 만든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들려준 비유의 목적은 어떤 진리를 설명하기 위한 수단이지 그 비유가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아니다를 따지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게 됩니까?’(마19:27) 했던 베드로의 질문에 대해 천국은 이와 같다고 설명하신 대답으로 이해하면 족합니다.
포도원 주인이 한 일은 세상의 기준으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천국 스타일이라는 것이 이 비유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이렇게 너그럽고 선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하나님 나라의 포도밭으로 들어온 일군들입니다. ‘영생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들에게 뜻대로 주시는 것이지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 알겠느냐? 그러므로 죄인들을 불러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선하심을 사람의 생각으로 판단하여 불평하거나 오해하지 말라’고 따끔하게 일침을 놓으십니다.
우리는 세상의 방식, 세속적인 가치기준에 익숙하고 길들여졌기 때문에 이렇게 독톡한 하나님 나라의 방식은 너무 생소하여 적응하기 힘들어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못마땅해 하고 시기가 나며 ‘하나님 그런 식으로 하면 안되지요’하고 하나님을 한 수 가르치려 든다. 이것이 먼저 온 품꾼들이 주인을 향해 원망하던 태도였습니다.
어떻게 저런 인간에게 영생을 주실까? 저 사람에 비하면 나는 훨씬 양심적이고 주의 사업을 위해 더 많이 헌신하고 희생하며 오래 전부터 수고했는데 나는 알아주지 않고 이제 막 예수 믿은 어린애 같은 저 사람이 나보다 더 사랑을 받다니 이것은 불공평하다. 나는 몇대째 예수 믿는 집안에서 자란 사람이고 이제껏 한눈 팔지 않고 성실하게 예수를 믿고 있는데 저 친구들은 뭔가? 세상에서 맘껏 즐기고 못된 짓만 골라 하다 이제 교회 다녀보겠다고 어쩌다 얼굴 한 번 보이는데 저런 사람도 영생을 얻는다면 나는 정말 억울하다. 하나님이 나를 저런 친구들과 똑같이 취급하신다면 불공평하다. 하나님은 도대체 뭘하고 계신다는 말인가? 이런 식으로 불평할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먼저 된 사람이 나중이 되고 나중 된 사람이 먼저 된다고 하신 것이 바로 이런 사람들을 두고 하신 말입니다. 나중에 부름을 받아 하나님 나라의 포도밭에서 일하게 된 사람들은 나같은 사람을 불러주신 은혜에 감격하여 온 힘을 다해 기쁨게 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시민은 이런 감격과 기쁨으로 층만하여 사는 사람이며 그 나라의 특성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입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등 종교 지도자들은 천국의 중심에 있다고 자부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대로 세리와 창기들은 같은 유대인이지만 하나님 나라 밖으로 내던져진 죄인 취급을 받았고 감히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기 두려웠던 버려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만일 천국문 앞에 선착순으로 줄을 선다면 맨 꼴찌에 서있다 문 닫는 시간이 되어 잘려나갈 것으로 여겨지던 사람들입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어디쯤 와있다고 생각했을까요? 이른 아침이라고 하기에는 자신이 없고 아침 9시나 낮 12시쯤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했을까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그 사람이 모태신앙인가 아닌가, 종교생활을 얼마나 열심히 하고 있는가 아닌가 그런 것보다 그가 지금 하나님의 구원을 진심으로 갈망하며 구원의 기쁨을 감사하는 사람인가를 보십니다. 스스로 앞섰다고 생각하여 나중 된 사람들을 무시하고 동등한 취급 당하는 것을 불쾌하게 여기는 사람의 어리석음을 꾸짖으시며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이라고 알려주십니다.
하루 한 데나리온 받고 일하기로 약속한 일군은 뜨거운 햇빛과 더위와 씨름하며 수고해야 하는 것을 알고 동의한 사람입니다. 일찌감치 부름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 나라의 사업에 동참하고 있다는 그 사실 하나 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며 땡볕에서의 수고와 인내를 감수하기로 작정한 사람입니다. 내가 일찍부터 택함을 받고 하나님의 포도원에서 평안한 마음으로 일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동안 포도원 밖 세상이라는 장터에는 아직도 부름 받지 못하고 초조한 마음을 달래며 서성이는 많은 사람들이 있음을 생각합시다.
영혼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동이 트기 전 이른 아침부터 세상이라는 장터로 나가셨을 뿐 아니라 지금 구원의 역사가 종결되어 가는 석양의 시간에도 계속하여 사람들을 불러 하나님 나라로 들여보내시는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어떤 사람은 모태신앙인으로 불러내시고 어떤 이는 청년의 시절에, 인생의 쓴맛 단맛을 다 경험한 장년과 노년의 시절에 부르시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떤 이는 병상에서 마지막 가쁜 호흡을 내쉬는 순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나라로 들어갑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 거룩한 성으로 들어가는 열두 대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동서남북에 각각 세 개씩 열려있는 열두 문은 세계 모든 민족을 불러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상징합니다. 이 열두 문에 대한 재미있는 설명이 있습니다. 동쪽으로 난 문은 아침 햇살을 받는 방향으로 난 문인데 이 문은 이른 새벽부터 하나님께 부름 받은 어린아이들이 들어오는 문이라고 했습니다. 서쪽으로 난 문은 석양의 햇살을 받으며 노인들이 들어오는 문이고, 남쪽 문은 한참 일할 나이에 주님께 부름 받고 들어가는 순교자의 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북쪽 문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빈손 들고 주께 와 십자가를 붙드네’하고 고백하며 들어오는 문이라 하였습니다. 동서남북 사방으로부터 남녀노소, 빈부귀천, 민족과 혈통을 초월하여 이른 아침부터 오후 5시 천국문이 닫히려는 순간까지 세상의 택함 받은 모든 사람들을 쉬지 않고 불러모으시는 하나님의 열심과 선하고 너그러우심에 영광을 돌립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아무 것도 공헌한 것이 없어 보이는 사람도 있지만 하나님이 그를 부르시면 빈손 들고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들고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달렸던 강도 역시 그렇게 부름을 받고 주님과 함께 낙원으로 들어간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불공평하고 부당합니까? 그러니까 나도 젊을 때 잘 놀다 인생의 석양에 손들고 하나님께 돌아가면 되겠구나 그런 생각을 합니까? 누가 자기 맘대로 원하는 때에 구원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까? 그것이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자신의 것으로 뜻대로 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는 집 주인과 같다’하셨지요? 먼저 온 사람부터 나중 온 사람 순으로 일당을 주는 것은 유대사회에서 통용되던 이 세상의 일반적인 방식입니다. 그런데 맨 나중에 온 사람부터 맨 처음에 들어온 사람의 순으로 한 데나리온씩 똑같이 나눠주는 것은 천국 스타일입니다. 나중에 온 사람부터 일당을 받게 하는 이것이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도적인 이야기 전개 방식이었습니다. 오후 5시에 들어온 일군의 기쁨과 감사하는 모습을 먼저 들어온 사람들이 보고 깨달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은혜의 선물입니다.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지난 날의 추억으로 여기고 지금은 기쁨도 눈물도 감사와 가슴 벅참도 사라지고 무덤덤하게 지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뜨거운 가슴으로 신앙생활하는 다른 사람을 이상한 눈으로 흘겨보며 판단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기쁨으로 가득한 순수한 영혼들을 보며 나는 어디서 그것을 떨어뜨렸는가 생각하고 잃어버린 여러분의 첫사랑을 회복하여 주 안에서 날마다 감사하는 충성스런 주의 일군으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길
마 20:1-16 / 이윤재목사
오늘은 12월 둘째 주일, 올 해도 한 달이 안 남았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빠른지 욥9:25-26절 말씀과 같습니다. “나의 날이 체부보다 빠르니 달려가므로 볼 수 없구나. 그 지나가는 것이 빠른 배같고 움킬 것을 날아 내리는 독수리같구나”. 얼마나 세월이 빠른지 시간은 달리는 우체부같고 날아가는 독수리와 같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일 여러분에게 한 달밖에 시간이 없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2년전에 제가 추천사를 쓴 책이 있습니다. 김영사에서 나온 <내 생애 마지막 한 달>이라는 책입니다(사진1). 이 책은 미국 우드랜즈 펠로우윕 교회의 케리 슉 목사님이 쓴 책인데 사연이 있습니다. 교인중 하나가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병으로 생각했는 데 결국 한 달만에 돌아갔습니다. 한 달동안 환자의 마지막을 보면서 쓴 책이 이 책입니다. 케이 슉 목사님은 그 교인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누구에게나 마지막 한달은 있다. 그러면 그 한 달을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죽음은 우리에게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누구에게나 죽음이 있고 우리의 시간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에 우리는 최선을 다할 수 있는가? 만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너 지금 오라” 한다면 우리는 기쁘게 그 앞에 갈 수 있는가? 초대교회 어느 수도원에서 평생을 기도하며 살았던 한 노인이 임종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형제들이 그의 수의를 입히며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가 눈을 뜨고 웃었습니다. 그나마 한번도 아니라 세 번이나 그렇게 했습니다. 형제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아바, 저희는 울고 있는데 왜 아바께서는 웃으십니까? 그나마 왜 세 번이나 웃으십니다”. 노인이 말했습니다. “내가 첫 번째 웃은 것은 그대들이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요. 두번째 웃은 것은 그대들이 죽음을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요. 그리고 세 번째 웃은 것은 내가 땅의 수고를 마치고 하늘의 안식을 얻으러 가기 때문이요”. 그리고 눈을 감았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생의 마지막에 이렇게 하나님께 웃고 갈 수 있을까요? 그러기 위해서우리가 우리의 남은 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그것이 중요합니다.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 당신의 남은 생을 어떻게 살겠습니까? 믿지 않는 사람과 믿는 사람의 답변이 달랐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겠다”. 그러나 믿는 사람은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며 살겠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합니까? 우리의 남은 날동안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며 살겠습니까?
오늘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때는 이스라엘이 포도를 수확할 때였습니다(사진2). 이스라엘에서 포도는 7-8월에 수확하는데, 이 시기는 우리 나라처럼 가장 무더울 때입니다. 모든 추수가 다 그렇지만, 포도는 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너무 일찍 따면 아직 안 익고 너무 늦게 따면 햇빛에 열매가 상합니다. 따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땁니다. 그러면 커다란 광주리에 담습니다. 일꾼들이 광주리를 포도주 틀로 가져가 통째로 부으면 발로 밟습니다(사진3). 그래서 즙이 된 포도액은 항아리에 담아서 6주 정도 땅속 웅덩이에 저장합니다. 제가 이스라엘에 있을 때 키부츠에서 3주 있었습니다. 그때 포도따는 일을 한번 도와 본 일이 있는 데 만만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날씨는 덥죠. 포도따고 나르고 발로 밟고 찌꺼기 걸러내고 항아리에 담고 옮기고, 얼마나 일손이 많이 필요한지 모릅니다. 그때 제가 오늘의 말씀을 이해했습니다. 단시간에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 시간을 늦추면 안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주인이 어떻게 했습니까? 모두 5번 나가서 일꾼을 불렀습니다. 아침 6시부터 오후 5시까지입니다. 포도원 이야기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남은 생에 하나님의 포도원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며 살겠습니까? 특별히 새 해에 하나님의 일을 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은혜로 부르셨습니다.
오늘 말씀이 주는 가장 큰 것은 주인이 일꾼을 은혜로 불렀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주인은 일꾼을 직접 불렀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지주들은 대개 세 종류의 일꾼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청지기입니다. 청지기는 주인은 아니지만 상당한 재량권을 가지고 주인의 일을 대신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매니저입니다. 다음은 종입니다. 종은 자유는 없었으나 주인이 시키는 일을 하면서 가족처럼 주인과 함께 살았습니다. 청지기와 종은 정규노동자입니다. 그러나 바쁠 때는 주인이 품꾼도 불러 썻습니다. 품꾼은 요즘 말로 하면 일용직입니다. 정한 시간에 일하고 일한대로 보수를 받습니다. 지금 주인이 부르는 사람은 품꾼입니다. 만일 정규직으로 일할 청지기나 종을 부른다면 주인이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지금 부르는 사람은 품꾼입니다. 일용직인 품꾼까지 주인이 나설 필요가 있습니까? 그런데도 주인은 자신이 직접 나섭니다. 1절을 보실까요? 마20:1, “천국은 마치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집주인이 직접 나갔습니다. 그나마 아침 일찍 나갔습니다.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직접 부르셨다는 것을 아십니까? 성경의 하나님은 일꾼을 직접 부릅니다. “아브라함아”,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이 직접 불렀습니다. “모세야”, 떨기나무 숲에서 하나님이 직접 불렀습니다. 사무엘아, 다윗아, 사울아, 하나님이 직접 불렀습니다. 예수님도 사람을 직접 불렀습니다. 안드레야, 빌립아, 마리아야, 베드로는 두 번이나 직접 불렀습니다. 베드로야, “요한의 아들 시몬아“. 여러분도 하나님이 직접 부르신 것을 아십니까?
예루살렘의 다마스커스 게이트에 가면 지금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품꾼의 비유와 비슷한 풍경이 벌어집니다. 다마스커스 게이트근처에는 주로 팔레스타인 아랍사람들이 몰려 삽니다. 아침 일찍 되면 일을 찾는 사람들이 여기 저기서 몰려 듭니다(사진4). 하루 일거리를 찾아 몰려온 일용직 노동자들입니다. 그러면 고용주들이 봉고차를 몰고 와서 쓸 만한 사람들을 태우고 일터로 갑니다. 대부분의 고용주는 유대인이고 노동자는 아랍사람입니다. 고용주가 나타나면 일꾼들을 그 주변으로 몰립니다. 고용주가 자기를 선택해주기를 바라면서 그 앞으로 바짝 다가갑니다. 고용주가 두리번 거리고 손가락으로 사람을 찍으면 그 사람은 환히 웃으면서 고용주를 따라갑니다. 남은 사람들은 그 사람을 부러운 듯 쳐다 봅니다. 왜 주인은 어떤 사람은 부르고 어떤 사람은 안 부를까요? 그것은 주인의 자유입니다. 쓰고 안 쓰고는 주인이 알아서 합니다. 그러나 어쨓든 부름받은 사람에게는 주인의 부름이 은혜입니다. 자기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키도 비슷하고 얼굴도 비슷하고 배운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중에서 주인이 불렀으니 그는 참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주인이 직접 불러준 은혜말고 또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이 받은 은혜가 또 있습니다. 자, 첫 번째 사람을 보시죠. 2절, 한 데나리온 약속하고 불렀습니다. 이 사람은 약속받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당연히 한 데나리온 줄 것을 약속까지 했습니다. 이 말은 내가 반드시 주겠다는 것입니다. 일용직 노동자에게 주인이 무엇이 아쉬어서 약속까지 합니까? 여러분, 성경에 600회 이상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아십니까? 안주면 못받고 주면 다행인 피조물인 우리에게 하나님이 600번이나 약속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네게 주리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그중에서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약속은 366번이나 나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한번 한 약속은 반드시 시킵니다. 두 번째 사람에게는 어떻게 했습니까? 3-4절입니다. “내가 네게 상당하게 주리라”. 두 번째 사람에게는 정확한 액수를 약속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상당하게” 하는 말은 헬라어 원어로 “디카이오스”입니다. 이 말은 “공정하게, 정의롭게”하는 말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첫 번째보다 세 시간을 덜 일했습니다. 그래서 한 데나리온 주겠다고 약속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네가 일한만큼은 공정하게 주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세 시간 덜 일했으니 불러주기만 해도 고마운 데 “공정하게” 주겠다고 까지 말합니다. 어떻습니까? 좋은 주인 아닙니까?
세 번째, 네 번째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이렇게 말합니다. 마20:5, “제 육시와 제 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세 번째나 네 번째나 주인이 똑같이 대했다는 것입니다. 제 육시는 12시요, 제 9시는 오후 3시입니다. 처음 부른 사람에 비래 세 번째는 6시간 덜 일했고 네 번째는 9시간 덜 일했습니다. 만일 이 사람들을 주인이 부른다 해도 똑같은 조건으로 부를 수는 없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해보셨나요? 아르바이트는 시간대로 받습니다. 아무리 좋은 주인이라도 6시간 덜 일한 사람, 9시간 덜 일한 사람을 똑같이 주지 않습니다. 돈만이 아닙니다.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6시간, 9시간 덜 일한 사람을 부를 때는 사실 저자세일 필요도 없습니다. 굳이 사정하면서 “꼭 오십시오. 부디 오십시오”.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대부분 “올테면 오고 말테면 말라”는 식으로 대합니다. 그런데 포도원 주인은 똑같이 대했습니다. 보수도 두 번째 사람처럼 상당하게 주겠다고 하고. 자세도 정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똑같이 대하고.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시는 자세는 언제나 똑같다는 것을 아십니까? 삼상15:29,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 하나님은 변개함이 없습니다. 히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느니라”. 예수님은 동일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 대하여 대하는 자세가 같고 같은 사람을 대할 때도 과거나 미래나 같습니다. 어떻습니까? 지나간 한 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대하지 않았습니까?우리가 하나님을 다르게 대했지 하나님은 우리를 똑같이 대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 한번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아멘. 하나님의 은혜의 절정은 마지막 사람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은혜로 부르셨습니다.
은혜로 부름받은 사람은 일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일꾼들을 은혜로 부르셨지만 그중에 가장 많은 은혜를 받은 사람이 마지막 부른 사람입니다. 자. 주인이 오후 5시에 밖에 나가보니 거기 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왜 여기 있느냐?”. 그랬더니 그가 말합니다. 7절, “저를 품꾼으로 부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주인이라면 그때 어떻게 했겠습니까? 지금 일을 시작한지 11시간이 지났는 데도 그는 아직 부름받지 못했습니다. 괜히 부름받지 못했겠습니까? 주인이 네 번이나 나왔는 데도 괜히 눈에 띄지 못했겠습니까? 뭔가 중대한 결격사유가 있는 것입니다. 몸이 병들었다든지, 힘이 없다든지, 인상이 나쁘다든지, 그러면 쓰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주인이 그를 씁니다. 7절, “너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주인은 다 씁니다. 일 잘하는 사람은 일잘해서 쓰고 일못하는 사람은 불쌍해서 씁니다. 능력있는 사람은 자격때문에 쓰고 능력없는 사람은 은혜로 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제 친척 아주머니중에 아들을 둘 둔 어머니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두 아들이 전혀 다릅니다. 하나는 공부 잘해서 서울대학에 가고, 다른 하나는 몸이 아파서 평생 데리고 삽니다. 어머니가 누구를 더 사랑합니까? 똑같이 사랑합니다. 공부잘한 아들은 기뻐서 사랑하고 아파서 집에 있는 아들은 불쌍해서 사랑합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사람이 받은 은혜는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자, 지금 한 시간 남았습니다. 오후 6시에 일이 끝나는 데 지금 5시입니다.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해 봤자 한 시간 밖에 일 못합니다. 지금 들어가면 사람들이 “저 것 왜 왓나?” 째려봅니다. 그리고 만일 돈을 준다면 “무엇을 했다고 돈주나?” 사람들이 욕합니다. 그러면 왜 주인은 이 사람을 포도원으로 들어가라 했습니까? 불쌍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아빠 하나 믿고 기다리는 가족들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 그러면 간단합니다. 일시키지 않고 돈만 주면 됩니다. 들어가 일해봐야 한 시간, 괜히 걸거치기만 합니다. 그래서 화끈하게 “이리 오세요. 지금 시간도 늦고 일도 끝나가니 내가 한 데나리온 주겠소. 그것을 가지고 가족에게 가세요. 다음 부터는 일찍 와서 일을 받으세요”. 그런데 이 주인은 어떻게 했습니까? 7절, “포도원에 들어가라”. 제가 이 부분을 묵상했습니다. 왜 주인은 굳이 그에게 일하라 했을까? 제가 깨달은 것은 이것입니다. “주인은 품꾼에게 값싼 동정은 베풀지 않았다. 그를 값싸게 동정함으로서 그의 자존감에 모멸감을 주지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적었지만 그는 그 일을 함으로 정당한 보수를 받게 했다. 일보다 사람을 더 세워준 것이다”. 이것이 주인이 준 은혜였습니다. 공짜로 돈을 주는 것도 은혜지만 자신이 직접 일을 해서 보람있는 보수를 받게 하는 은혜, 일 안 시켜 공짜 인생을 살게 한 은혜보다 일하게 함으로 떳떳한 인생을 살게 한 은혜, 그것이 그가 받은 가장 큰 은혜였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굳이 목수로 일해야 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아들이신 예수님을 그렇게 가난한 집에 보내셔서 요셉처럼 목수로 살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일을 하면 얼마나 하고 집을 지으면 몇 채나 짓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목수로 태어나고 목수로 산 이유는 무엇입니까? 신약성경에 재미있는 통계가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이 사람들앞에 나타난 횟수가 모두 132회입니다. 그런데 그 중 10번을 제외하고 122회는 일상의 일터에 예수님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현장은 누군가가 일하는 현장이었고 그 일터에서 예수님은 하늘 나라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비유가 모두 52개인데 그중 45개가 일과 관련된 비유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12은 모두 일하는 사람이었고 예수님이 만난 사람중에 노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사도행전도 예외가 아닙니다. 사도행전에는 모두 40번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데 그 중 39번이 사람이 일하는 현장에 나타났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은 일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일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구름 위에서 부채 붙이고 한가하게 노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마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멍에를 메고”입니다. 왜 예수님은 우리에게 멍에를 매고 따르라고 하시는가? 멍에는 무겁고 부자유한 짐인데 왜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지고 따르라 하시는가? 저는 오래 고민했습니다.
제가 깨달은 것은 이것입니다. 예수믿으면 두 개의 짐이 있습니다. 하나는 내려놓는 짐이고 또 하나는 지는 짐입니다.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 짐이 내려 놓는 짐입니다, 예수믿으면 먼저 짐을 내려놓습니다. 이 짐은 죄의 짐이요 인생 짐입니다.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 네 모든 짐 내려놓고”.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내려놓고 내 주되신 주앞에 나와”. “예수앞에 나오면 모든 죄 사하고”, 예수님앞에 나오면 모든 짐 내려놓습니다. 구원은 죄의 짐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짊어지신 것입니다. 믿음은 날마다 하나님이 우리 짐을 대신 져주시는 것입니다. 시68:19절을 믿어야 합니다. “날마다 우리 짊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아멘.
그러나 또 하나의 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져야 할 짐입니다. 하나는 예수님 때문에 내려놓는 짐이고 또 하나는 예수님 위해 지는 짐입니다. 이 원리는 모든 인생살이의 원리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 때문에 내가 행복합니다. 그러나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할 일이 있습니다. 그를 위해 희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님 때문에 은혜입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이 늙으면 부모님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이 원리입니다. 예수 믿으면 예수님 때문에 내려놓는 짐이 있고 예수님위해 지는 짊이 있습니다. 그런데 기쁨은 예수님 때문에 짐을 내려놓을 때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위해 짐을 질 때도 동일하게 행복합니다. 남녀가 서로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받는 위로 때문에만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사랑때문에 더 행복합니다. 희생을 배우지 않으니까 더 큰 행복을 맛보지 못합니다.
최근 나온 통계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미국의 경우입니다만, 기독교인 대 비기독교인의 이혼률이 27%대 24%랍니다. 기독교인이 더 많은 것입니다. 한국의 경우입니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의 자료를 보면 전체 이혼상담자의 27%가 기독교인입니다. 그런데 불교인은 10%, 천주교는 8%입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무종교인입니다. 종교가 없는 사람이 이혼률이 월등하게 높습니다. 그러나 종교인중에서는 기독교가 가장 높습니다. 왜 그럴까? 제가 생각해 보았더니 이런 이유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배우자로 인해 받을 유익만 바라고 그로 인해 받을 희생과 손해는 싫어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 마디로 사랑에 희생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사랑이 감정이 되었습니다. 받기만 바랍니다. 주기는 싫어합니다. 조금만 고난이 와도 그만 두자고 말합니다. 상대방에게 짐을 떠 맡기면서도 상대방을 위하여 짐을 지기는 싫어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어떤 교인이 상대적으로 많이 교회를 떠날까요? 교회에서 아무 것도 안 하는 교인입니다. 교회안에서 봉사하고 섬기지 않은 교인입니다. 교회안에서 섬기고 봉사하지 않으면 세 가지 현상이 나타납니다. 우선 기쁨이 없습니다. 기쁨은 받을 때만 오는 것이 아니라 줄 때 오고 섬길 때 옵니다. 받기만 하고 주지는 않으니까 기쁨이 자라지 않습니다. 둘째 봉사하지 않으니까 친구가 없습니다. 함께 일하는 동역자가 없습니다. 셋째 따라서 소속감이 없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녀도 정이 없습니다. 교회 여기 저기에 손때를 묻혀야 하는 데 손님처럼 왔다가 손님처럼 갑니다. 믿음도 안 자라고 내 교회라는 생각도 안듭니다. 그러다 어떤 일이 있으면 미련없이 떠납니다. 그래서 봉사해야 합니다. 제가 어릴 때 할아버지를 도우려고 지게를 지고 따라 나섰습니다. 냇가를 건너는 데 돌이 반질 반질합니다. 지게를 지고 건너면서 빠지면 어쩌나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약간 무거운 짐을 졌더니 발에 힘이 생겨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인생을 가볍게 사는 것만이 안전한 것은 아니다”. 어떻습니까? 새해에는 봉사하지 않겠습니까? 새해에는 예수님으로부터 받는 은혜뿐 아니라 예수님께 드리는 은혜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은혜받았으니 섬기고 봉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넌센스 퀴즈가 있습니다. ”봉사활동을 오래 하다가 드디어 빛을 본 사람은 누구입니까?“ 답은 ”심봉사“입니다. 오래 봉사하면 심봉사처럼 빛을 본다는 말입니다. 은혜받으면 일합니다. 그리고 일하면서 은혜는 더 커집니다.
예수님을 위해 일한 사람에게 축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일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어떤 축복을 주실까요? 축복은 마지막 순간에 나타났습니다. 일꾼들이 일을 다 마치자 품삯줄 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부르는 이름의 순서가 다릅니다. 보통은 먼저 온 사람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런데 주인은 어찌된 일인지 맨 나중에 온 사람부터 부릅니다. 맨 나중에 온 사람은 오후 5시에 온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1데나리온을 줍니다. 순간, 먼저 온 사람들이 동요하기 시작합니다. “아니, 우리가 먼저 왔는데 늦게 온 사람부터 돈을 주다니?아, 그러면 일찍 온 우리에게는 돈을 더 주는가?”. 그런데 기대는 곧 실망으로 바뀌었습니다. 받아보니 똑같이 1데니리온입니다. 그래서 항의했습니다. 마20:12, “나중에 온 이 사람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말은 거칠었고 감정은 상해 있었습니다. “왜 일을 적게 한 사람과 많이 한 사람을 똑같이 취급합니까? 맨 나중에 온 사람은 1시간 일하고 우리는 12시간 일했습니다. 어떻게 1시간 일한 사람과 12시간 일한 사람과 같습니까? 이것이 계산에 맞는 것입니까?” 먼저 온 사람들은 거칠게 항의했습니다. 그때 주인이 말했습니다. 마20:13,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주인은 잘못이 없었습니다. 그는 약속대로 한 것 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20:14-15,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일찍 온 사람은 늦게 온 사람이 자기와 똑같이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항의했지만 그것은 주인의 뜻을 대단히 오해해서 온 것입니다. 주인의 뜻은 이것입니다. “내 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에게 풍성하게 주는 것, 그것이 주인의 뜻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이 마음을 아시나요? “내 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에게 풍성하게 주는 것”, 일을 많이 했으면 많이 한 대로 적게 했으면 적게 한 대로 풍성하게 주는 것, 있는 대로, 있기만 하면, 무엇이라도 주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이 주인의 마음이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이 주신 것이 은사입니다. 은사는 성령의 선물입니다. 은사는 하나님이 주신 일을 잘 하도록 하나님이 주신 하늘의 능력입니다. 벧전4: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 그 힘이 은사입니다. 은사는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우선 내가 좋아하는 일, 그것만 하면 신나는 일, 둘째 그 일을 해도 잘하는 일, 나도 만족하고 남도 잘한다고 하는 일, 셋째 열매가 있는 일, 그 일을 하면 성과가 있고 열매가 있는 일, 그것이 은사입니다. 은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능력입니다. 누구나 은사가 있고 누구나 잘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물론 교회안에서 잘할 수 있는 일만 할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내가 잘 못해도 사명이기 때문에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보통 8:2를 말합니다. 내가 잘 할 일 80, 내가 잘 못해도 협력해서 할 일 20,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갑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하고 싶은 일을 못하는 사람,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을 해야 할 일을 못하는 사람, 하나님의 사람은 소명의 사람입니다. “소명이란 하지 않을 수 없는 어떤 것입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일하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을 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 일은 하나님이 주신 일입니다. 교회안에서나, 교회밖에서 하나님이 주신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 그들은 복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길 바랍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공평기준
마 20:1~16 / 이필재목사
우리 인간들은 누구에게나 소원이면서 고민이 두 가지 공존합니다. 하나는 다른 사람과 같아지고 싶은 소원입니다. 다른 사람이 살고 있는 집에서 나도 살고 싶고, 다른 사람이 가진 소유를 나도 갖고 싶고, 다른 사람이 누리는 영광을 나도 누리고 싶은 상대적 소원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같아지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롤모델(Role Model)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 사람과 같이 되고 싶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내가 다른 사람과 같은 행복의 자리에 왔을 때 그때가 되면 이제는 또 다른 욕망이 고민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고 싶은 욕망으로 변합니다. 무엇인가는 특별한 것을 소유하고 싶고 조금이라도 우월한 행복을 누리고 싶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같지 못한 불행이 해결되니까 이제는 다른 사람과 같은 것이 불행의 조건으로 느껴지는 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저는 오래 전에 뉴욕에 부흥회를 하러 간 적이 있는데 식사 초대한 집은 굉장히 잘 사는 것같이 보였습니다. 그 주인이 하는 사업을 저에게 소개했습니다. 옷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옷을 대량으로 생산해서 도매로 팔아넘기는 옷장사가 아니고 일 년에 옷을 몇 십 벌 정도만 만들어 판다고 합니다. 아주 유행 감각이 좋은 특수 옷감을 가져다가 절대 조건 하나를 가지고 옷을 만드는데 똑같은 옷을 다시 만들지 아니하는 조건으로 맞춤형입니다. 그러니까 유명인들이 너도 나도 그 집에서 옷을 만들어서 옷 한 벌에 수천만 원씩 합니다. 그래도 밀려드는 일감이 항상 있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서 만든 옷은 그 사람 밖에는 세상에 없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안 만들기로 약속을 하고 비싼 값에 판매합니다. 여러분들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백화점에 가서 옷을 하나 잘 사 입었는데 다니다가 나와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을 보면 기분이 어떻습니까? 별로 좋지 않습니다. 이상하게 사람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남보다 특별하고 싶은 하나의 욕망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인류 역사에는 끝없이 이 평등하고자 했던 역사와 공평의 정의가 늘 문제가 됩니다.
오늘 성경말씀에는 주인과 고용인의 공평과 평등의 문제가 불편해진 이야기로 나타났습니다. 먼저 시대적 배경을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대 나라의 특산물 가운데 포도가 유명합니다. 기후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열대 기후라서 포도 생산의 가장 좋은 기후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주 잘됩니다. 성경 말씀에 유난히 포도원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이유가 그 지방의 특산물이기 때문입니다. 포도 농사는 여러 가지 기술이 필요한데 가지치기를 잘해야 되고 거름주기를 잘해야 되는데 제일 중요한 것은 수확기 선택이라고 합니다. 마지막 며칠 햇볕을 잘 받아야 하는데 그 며칠이 매우 중요합니다. 몇 시간만이라도 그 햇볕을 받으면 맛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문제는 조금만 너무 익으면 떨어지는 경우가 많고 상품 가치가 떨어집니다. 그래서 이 시기를 아주 잘 선택하는 것도 기술이라고 합니다. 또, 유대 나라의 포도 수확 시기는 바로 우기가 닥치는 계절이라서 포도 수확기는 포도 농장 주인들이 신경을 많이 써야 된다는 설명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오늘 이 포도원주인은 아마도 결실기에 접어든 포도 농장에 일손이 많이 필요했던 거 같이 보입니다. 하루 종일 일군을 모집하러 다니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마켓플레이스(Marketplace) 인력시장이라고 합니다. 외국에는 이런 시장이 동네마다 있습니다. 저도 교회 건축할 때 밴 차를 몰고 가서 “오늘 하루에 얼마씩 줄 테니까 건축 노동에 일할 사람!” 소리치면 새까맣게 몰려듭니다. 그러면 투입해서 하루 종일 일하고 저녁에는 약속한 임금을 주고 보내는 일을 건축 끝날 때까지 해본 일이 있습니다. 시간적으로 다섯 가지 종류의 일꾼이 포도원에 투입됩니다. 이른 아침, 제3시, 제6시, 제9시, 그리고 제11시입니다. 유대나라 문화의 시간 개념은 오전 6시를 0시로 계산합니다. 성경에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3시는 오전 9시가 됩니다. 제6시면 낮 12시고 제9시가 오후 3시이고 제11시는 오후 5시가 됩니다. 일은 오후 6시에 끝이 납니다. 성경에 나타난 대로 일은 아침부터 하루 종일 건강한 사람의 하루 노동의 삯은 한 데나리온씩 정하고 있는데 우리 돈으로 약 10만원씩입니다. 그 사회에서는 그렇게 주면 누구든지 노동하겠다고 말들을 하니까 그렇게 된 것입니다.
여기 포도원 주인으로 표현된 사람을 하나님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예수님은 이 설교의 목적이 돈 버는 방법을 가르친다거나 노동 계약법을 설정하시거나 포도 수확에 관심 있거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고자 하시는 목적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포도원인 세상에서 일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왜 사는가 하는 철학적인 문제,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예수님의 정의가 나왔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신 일을 하기 위해서 우리가 세상에 산다.” 우리 한국 사람들이 중남미에 이민가면 거의 가 성공합니다. 돈을 잘 법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중남미 사람들은 놀기를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돈을 그렇게 많이 벌어서 뭐하느냐?” 결국 재미나게 놀기 위해서 돈을 버는 것인데 그 돈 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틈에 돈 벌기를 좋아하는 우리 한국 사람이 들어가니까 자연히 돈을 벌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주인은 지금 자기 포도원 밭과 노동자들이 몰려있는 이 인력시장을 하루에 다섯 번이나 왕복하고 있습니다. 주인의 최대 관심이 뭔가? 놀고 있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생각해 보면 오후 5시면 이제 하던 일도 정리하던 때입니다. 그 시간에 노동자를 투입하는 주인은 세상에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주인은 마지막 시간까지 찾아가서 그들로 하여금 일을 하라고 시키고 마침내 그 시장에서 놀고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것을 볼 때 이 주인은 만족해하고 있습니다. 주인은 놀고 있는 사람의 노동력도 평가한 적이 없습니다. “너 무슨 일 잘할 수 있느냐, 없느냐?” 현장에서 “너 왜 게으르게 그렇게 하느냐?” 이런 참견하는 게 아무것도 안 나옵니다. 그런 일 하는 그 자체만이 주인의 마음에 기쁨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든 인생이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포도원이라는 이 세상에서 능력이 있든지 없든지 일을 하기를 소원하시며 시간적으로 내 인생은 이제 오후 5시라 일을 해봤자 한 시간 그럭저럭 하다가 끝나는 그런 시기가 되었다 하여도 하나님은 일터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하나님 백성됨의 가치는 엿새 동안 네 모든 일을 힘써 행하고 있는 창세기의 이 일에 대한 철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왜 사느냐? 일을 하기 위한 것이다.” 세상 기준으로 보면 아무 쓸데도 없다고 판단하고 이것은 저주받은 인생이라고 규정해서 멸시하던 태어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 된 사람을 놓고 죗값의 논쟁을 벌일 때 예수님은 뭐라고 했습니까? “그가 이렇게 된 것이 자기의 죄도 아니고 부모의 죄도 아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 이 사람도 할 일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정의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은 누구든지 그 나름대로의 선한 일이 있어서 존재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됨을 분명히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소중한 인생관을 잊어버리고 인생을 포기하듯 빈들빈들 놀고 있는 자에게 주인은 하루 종일 부지런히 왕래하면서 일감을 마련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내 인생은 이제 오후 5시라서 한 시간밖에 남지 않았으므로 할 일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주인이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날 많은 사람은 하루 동안 일하는 기쁨 속에 시간이 잘 지나갔습니다. 저녁이 되니까 문제가 생겼습니다. 일한 것 때문에 그 자리는 매우 불편스러운 말다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한 시간 일한 사람과 하루 종일 일한 사람의 보상을 똑같이 한 것이 불공평의 문제로 터진 것입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말한다면 오늘 말씀의 내용은 누가 판단해도 공평하지 않습니다. 합리성이 결여된 최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오늘날과 같은 문화개념에서는 절대 맞지 않습니다. 현대 사회는 출근해서 입구에 타임카드를 꺼내서 내 이름이 적힌 카드를 타임기계에 ‘찰칵’ 대면 하루에 몇 시간 몇 분 몇 초 일했는지 다 계산해서 그것에 의해서 합산해서 일한만큼 보상하는 문화입니다. 가끔 우리들은 예수님의 행적 가운데 보면 아무래도 예수님은 수학에 별로 관심이 없으신 거 같습니다. 헌금 많이 한 사람들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에서 쓰는 동전에서 가장 낮은 두 렙돈을 헌금한 사람을 보고 “이 사람이 가장 많이 했다.”라고 평가하신 적도 있고, 막달라 마리아가 300데나리온의 옥합을 깨뜨릴 때도 가룟 유다는 합리적인 계산을 금방 하는데 예수님은 합리적 계산하는 가룟 유다를 오히려 책망하십니다. 양 아흔아홉 마리보다 한 마리가 더 소중하다는 분위기의 설교도 하시고 제가 생각할 때 재정 부장은 요한에게 맡기셨으면 아무 문제가 없으셨을 거 같습니다. 그런데 유다에게 맡기셔서 괜히 손해를 많이 보셨습니다. 오병이어 오천 명 먹이실 때도 계산을 잘못하셨는지 12바구니나 남았다고 했습니다. 수학은 별로 관심이 없으신 거 같습니다.
여러분! ‘사자의 공평’이라는 동물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늑대와 사자와 여우가 팀을 이룹니다. “우리가 먹고 살기 위해서 팀을 이루어야 한다.” “그럽시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늑대야! 너는 뛰기를 잘하니까 온 산을 뛰어다니면서 먹잇감을 다 튀어나오게 하라. 토끼도 튀어나오게 하고 노루도 튀어나오게 해라. 그러면 튀어나오는 대로 내가 잡아 죽이겠다. 여우야! 너는 내가 죽이는 것을 다 한군데로 모아라.” “그렇게 합시다.” 그래서 셋이 힘을 합쳐서 일을 했더니 토끼가 수십 마리가 잡혔습니다. 사자가 늑대에게 말했습니다. “늑대야, 먹자. 공평하게 세 사람 몫을 나눠라.” “네! 사자 한 마리, 늑대 한 마리, 여우 한 마리!” 계속 똑같이 나눈 후에 “모두 나눴습니다.” 사자가 “이게 공평이냐?” “네!” 와락 달려들어서 늑대를 물어 죽였습니다. 여우에게 “네가 다시 나눠봐라.” 여우는 큰일 났습니다. ‘아니, 늑대가 공평하게 했는데?’ 잘못하면 자기도 죽을 거 같았습니다. 여우는 여우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에이, 모르겠다.’ “사자 10마리, 나는 1마리, 사자 10마리, 나 1마리!” 사자가 “껄껄껄!” 웃으면서 “공평하다. 이제 먹자.” 먹고 났는데 여우가 아무래도 이상하거든요? “사자님! 사자님은 10마리, 나는 1마리를 먹었는데 이게 왜 공평한 겁니까?” “너는 하루에 1마리만 먹어도 돼. 나는 10마리를 먹어야 배가 불러. 이게 공평이야.” 그래서 그것을 ‘사자의 공평’이라고 합니다. 성경에 공평과 불공평의 이야기는 아주 많이 나옵니다. 탕자 비유도 같은 내용이 됩니다. 큰 아들이 아버지에게 불공평을 항의하지 않습니까? “나는 지금까지 아버지의 명을 어긴 적이 한 번도 없거늘 염소새끼 한 마리도 내 친구와 즐기게 하지 아니하시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친구와 함께 다 탕진한 둘째 아들이 돌아오매 살찐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이것이 공평입니까?” 맞는 말입니다. “저런 나쁜 놈은 아버지 집에서 내쫓아버려야지 무엇을 잘했다고 죄 짓고 돌아온 놈을 금가락지를 끼우고 비단 옷을 입히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하시나이까? 그러면 나도 일찌감치 저 놈과 같이 탕진하고 돌아올 것을 괜히 여기서 일하지 않았습니까?” 합리성을 말합니다. 오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하루 종일 땀 흘리며 일한 사람과 한 시간 정도 그럭저럭 끝마무리만 한 사람과 똑같이 대우하는 것은 불공평합니다.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공평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공평은 그 목적이 구원에 있습니다. 한 시간만이라도 포도원에 와서 일을 하라고 하는 것은 “좀 늦기는 했어도 하나님의 구원의 삶에 동참하라.” 이것이 하나님의 공평입니다. 우리 일반 사회나 국가도 법의 정신은 뚜렷합니다. 모든 인간이 최대 공약서로 행복한 삶을 함께 누릴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제도입니다. 그렇지 않은 것은 악법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행복하게 살려면 이 하나님의 법 정신을 이해할 때 함께 살 수가 있습니다. 보십시오. 여러분 가운데 모태 신앙이 많습니다. 80세가 되신 분은 80년 동안 얼마나 많은 세월을 헌금했습니까? 교회 봉사하느라 얼마나 많은 시간을 얼마나 많이 애태우면서 신앙생활을 하셨습니까? 죄 짓지 않으려고 얼마나 이를 악물고 80년 동안 보내셨습니까? 그래서 구원 받은 인생이 되어 영생을 누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은 죽기 10분 전에 구원 받습니다. 그렇다면 어떡합니까? 저는 그런 사람에게 병원에게 가서 많이 세례를 주었습니다. 십자가 위에 예수님과 같이 달렸던 흉악범은 평생 흉악범입니다. 죽기 몇 분 전에 말 한마디 했습니다. 그 말 한마디 때문에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가리라.”는 구원의 약속을 얻어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공평한 것인가? 모태 신앙자들이 불평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나도 평생 망나니로 살다가 죽기 전에 회개 한마디 하고 구원 받을 것을 일평생 내가 교회 봉사한 것이 얼마인데 마음 상한 게 얼마인고 얼마나 많이 헌금을 했는데….’ 불평할 수 있지 않습니까? 여기 나타난 인간의 심리를 보자면 인간들은 근본적으로 마음이 은혜스럽지 못해서 나에게 아무 손해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에게 주어지는 은혜가 싫은 것입니다. 여기 주인이 말합니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는데 내가 너를 내 포도원에서 일을 하라고 불러준 것이 잘못이냐? 너와 약속한 한 데나리온을 내가 약속대로 지불하지 않았느냐? 내가 너한테 무엇을 잘못했느냐? 너의 불평은 너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형제에게 주어지는 혜택이 괴로운 거 아니냐? 그것은 내 뜻이지 네가 참견할 문제가 아니다.” 이게 하나님의 공평입니다. 하나님의 공평은 탕자 비유에서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을 볼 때 이렇게 생각하신 것입니다. 큰 아들이 더 복되다고 보시는 것입니다. 불평하는 큰 아들에게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너는 쓰지 않았을 뿐 네 소유는 여기 다 있도다. 타락하지 않고 재산 허비하지 아니하고 착하게 살아온 네가 더 복이 있는 사람이지 거지꼴이 되어 돌아온 네 동생이 더 복된 사람이냐? 그러면 너는 타락하지 못한 것이 불평이냐?” “모태신앙으로 태어나서 평생을 신앙으로 살아온 그것이 더 복된 사람이지 평생 죄 짓다가 마지막에 구원받은 강도가 부러운 것이냐?” 지금 포도원 주인은 불평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생각하면서 말하는 것입니다. “친구들이여! 당신들은 내가 이른 아침에 만났기 때문에 하루 종일 행복하게 일했소. 이렇게 일을 하면 저녁에 한 데나리온의 돈을 받아서 기다리는 가족들에게 돌아간다는 기쁨 속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냈소. 그러나 저녁에 한 시간만 일한 사람들은 아침부터 오후 다섯 시까지 정말 괴롭고 불행하게 시간을 보냈소. 아! 오늘도 허탕인가? 일을 해서 가족들이 기다리는 장소에 가장으로서 아버지가 임금을 가지고 돌아가야 할 텐데 오늘도 틀렸구나. 아! 이 빈손을 가지고 가족들에게 어떻게 돌아가나. 하루 종일 그런 마음으로 고통 받았다. 그러면 어느 쪽이 더 행복했느냐? 생각해보라.” 인간은 본래 마음이 은혜롭지 않아서 남에게 가는 혜택을 싫어합니다. “다만 적게 일한 사람들에게도 내가 한 데나리온씩 준 것은 그 친구들도 이 저녁에 그 정도의 돈은 가지고 들어가야 가족과 함께 행복한 저녁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내가 손해를 보면서 혜택을 준 것이다. 그것이 왜 네 괴로움이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이 사람들에게 주는 혜택은 내 뜻이니라. 내가 선함으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것이 나의 공평이다.” 자비를 기초한 공평입니다. “네가 더 행복했다.”
보십시오. 저는 목회를 하면서 많은 경우를 봅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가난합니다. 그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아무 거나 맛있게 잘 먹습니다. 길거리에서 국수 한 그릇을 5분 안에 다 먹어치웁니다. 자장면 곱빼기로 시켜서 10분 안에 다 먹습니다. 어쩌다가 갈비가 생기면 3인분 정도 거뜬히 먹어치웁니다. 그 사람은 당뇨, 콜레스테롤이 무슨 소리냐고 아무 것도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재벌입니다. 그런데 뭐가 잘못인지 먹지 못합니다. 그렇게 영양사가 와서 영양가를 따져서 비싸게 맛있는 고급 음식을 두 숟갈 먹어보고 안 먹겠다고 합니다. 산더미 같이 쌓인 음식이 무용지물입니다. 누가 더 행복합니까? 하나님의 공평을 볼 줄 모르는 사람은 평생을 불행하게 삽니다. 은혜의 개념에 하나님의 축복을 내가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남보다 행복하게 살아온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는 하나님의 은혜를 불평한다면 그것은 오늘 이 포도 농장에 불평하는 일꾼들과 똑같습니다. 일을 많이 한 노동자들이 그날 주인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있다면 이것입니다. “주인이시여! 참으로 감사합니다. 주인이 오늘 저희들을 써주지 않으셨다면 하루 종일 고통스러우셨을 터인데 저희들을 써주셔서 이렇게 행복한 열매를 손에 쥐고 집에 가게 되었으니 너무 행복합니다. 앞으로도 써주시면 더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런 말입니다. 일을 적게 한 사람은 “주인이시여! 주인은 자비의 주인이십니다.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하루 종일 일한 품삯을 주시니 정말 황공합니다. 다음에 써주시면 오늘 못한 것까지 저희들이 열심히 일해 드리겠습니다.” 일꾼들끼리 집에 돌아가면서 서로 나누는 이야기가 있었다면 “형제여! 우리는 한 시간만 일하고 많이 받았으니 당신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듭니다.” “아니요. 우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행복하게 일했소. 바로 이 저녁을 생각하면서 말이오. 그런데 형제는 오후 5시까지 일감이 없어서 얼마나 초조하고 불안했소? 오늘 우리들은 주인을 잘 만났소. 이제 우리를 기다리는 가족들에게 이것을 들고 가서 빨리 행복하고 따뜻한 저녁을 맞이합시다.” 이렇게 되어졌다면 주인은 더욱 기뻤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평은 자비에 초점을 맞추고 지금도 계속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비가 없는 인간 기준은 내 혜택을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혜택이 고난스러운 것입니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소.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상상해 보건데 이 포도원 주인은 그 다음부터는 불평한 사람들은 써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쓰임을 받고 있는 그 자체만이 우리는 감사하고 오늘 이 하나님의 자비의 말씀이 우리 모두의 영혼을 풍성하게 하기를 축원합니다.
천국(교회) 일꾼의 마음가짐
마태복음 20:1-16 / 이상호목사
이 세상에는 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중요한 일들이 산적해 있습니다. 사회는 항상 유능한 일꾼들을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도 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인류를 구원하셔서 이 땅에 하나님의 정의로운 통치를 실현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위대한 목표를 수행하는 데에는 그 무엇보다 정의롭고 유능한 일꾼들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 1절에 품꾼을 기다리는 포도원 주인이 나옵니다. 본문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일꾼을 부르시는 주님의 심정을 포도원 품꾼을 찾는 주인의 모습을 통하여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팔레스틴에서는 9월 말 경에 포도를 수확하는데, 우기가 곧 닥쳐오므로 서둘러서 수확하였습니다. 때문에 이때는 일손이 부족합니다. 주인들은 틈만 있으면 장터에 나가 일할 사람들을 구했고, 한 시간만 일할 수 있어도 환영하였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본문의 포도원과 흡사합니다. 마지막 시대, 추수의 때입니다. 주님은 요 4:35에서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복음을 들은 적도 없는 사람들이 역사상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때입니다. 전 세계 65억의 인구 중 40억이 넘는 엄청난 수효의 영혼들이 방치된 채 멸망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주님의 심정이 어떠하시겠습니까? 그리고 복음을 받았지만 묵은 땅이 되어 반드시 기경해야 할 사람들이 역사상 가장 많은 때이기도 합니다. 많은 일꾼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주님은 지금 추수할 곡식을 앞에 두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일꾼을 찾고 있는 농부의 심정으로 일꾼을 부르고 계십니다.
본문에 보면, 포도원 주인은 이른 아침 장터에 나가 한 데나리온의 일당을 약속하고 품꾼들을 포도원에 들여보냅니다. 그리고 3시와 6시, 9시에도 장터에서 놀고 있는 사람들을 품꾼으로 받아들여 포도원에 들여보냅니다.
우리 시간으로 말한다면, 이른 아침은 새벽 6시경, 그리고 3시와 6시와 9시는 각각 오전 9시, 12시, 그리고 오후 3시 경에 해당하는 시각입니다.
주인은 오후 5시경에 장터에 또 나갑니다. 거기 여전히 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제 곧 해가 지고, 일도 끝이 납니다. 주인이 그들에게 묻습니다.
7절,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가로되 우리를 품군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놀라운 일입니다.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았는데, 그런데도 주인은 품꾼들을 초청합니다. 주인의 은혜로운 마음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제 날이 저물고, 하루의 일과가 끝이 납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입니다. 해질 무렵 피곤한 몸을 추스르고 이마의 땀을 훔치며 일당을 지급받는 기분좋은 장소에서, 뜻하지 아니하게 불평과 원망의 소리가 터져 나오게 되었습니다. 늦게 온 자나 아침부터 일한 자나 모두 한 데나리온씩 주는 주인을 향하여 불만의 목소리를 높이게 되었습니다.
처음 장터에서 불려 나와 일을 시작할 때의 기쁨과 감사는 간데 없고, 볼멘 목소리로 주인과 다른 품꾼들을 헐뜯게 된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원망하는 이들을 책망하시면서,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본문의 비유에서 우리는 교회의 일꾼이 어떤 마음으로 사역해야 하는가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부르신 주님, 그리고 마지막 날 일꾼에게 보상하시는 주님의 은혜로운 모습을 다시 한번 생각하며 감사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포도원 주인의 마음에 합하는 품꾼의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주님의 몸 된 우리 교회의 일꾼은 어떤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까?
1. 비교의식을 버려야 합니다.
10절,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11절,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12절,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품꾼들 가운데 집 주인을 원망한 자들은 ‘먼저 온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아마 새벽부터 와서 일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품꾼들이었습니다.
11절에서 ‘원망하여’의 원어는 '비방하다, 수군거리다'의 미완료형입니다. 이 단어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어려움을 만나 모세와 하나님을 대항하여 불평할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출 15:24, 출 16:7,8). 이것이 미완료형으로 사용된 것은 품꾼들이 한 번만이 아니라 거듭 반복하여 주인을 원망하였음을 보여줍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디며 일한 것을 주인이 몰라준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 ‘수고’는 병이나 무거운 세금 등으로 인한 ‘내리누르는 숨막히는 고통’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불평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온종일 숨막히는 고통을 참으며 일했는데, 일한 것에 대한 댓가가 너무 적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중 온 자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았으니, 자기들은 ‘더 받을 줄’ 알았습니다.
이들의 마음속에는 비교 의식이 있었고, 이것 때문에 자신들을 불러준 주인의 은혜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주님으로부터 칭찬받는 일꾼이 되려면 먼저 자신 속에 있는 비교의식을 버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마음이 있을 때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사라지게 됩니다. 원망하던 이들은 사실 주인과 한 데나리온의 일당을 약속하고 일을 시작하였고, 주인이 이제 한 데나리온을 품삯으로 주었기 때문에 불평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주인이 하는 말을 보십시오. (13절)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우리는 남과 비교를 잘 합니다. 주위의 사람들이 자기에 비해 뭔가 나은 것 같거나, 다른 사람의 인정을 더 받는 것 같을 때 우리의 비교 근성이 발동하기 쉽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이 있기 쉽습니다.
‘저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저렇게 은혜를 주셨는데, 왜 나에게는 은혜주시지 않는가?’ ‘저 사람은 나보다 별로 잘난 것도 없는데 교회에서 저렇게 중요한 직책을 받다니 너무 불공평한 것이 아닌가?’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성도에게 해당되지 않는 말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형제가 나보다 더 은혜받기를 원해야 합니다. 다른 성도가 더 많은 축복을 받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과 더불어 기꺼이 협력해야 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비교의식을 꽁꽁 묶어서 쓰레기통에 집어던져야 합니다. 내게 주신 한 데나리온에 만족하며, 늦게 온 사람들이 나와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을 진심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포도원 주인되신 우리 주님은 이런 일꾼을 기뻐하시고, 이런 일꾼에게 더 많은 일거리를 주시며 더 많은 상급을 예비하실 것입니다.
2. 동역자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포도원에 먼저 왔던 이들에게는 동역자 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얼마를 받았느냐에만 관심이 있었지 함께 일했던 사람들에 대한 동료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주인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하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동역자 의식보다는 경쟁의식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사회는 서로 돕는 동역자 의식보다는 경쟁의식을 더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경쟁의식이 사라지고 동역자 의식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다른 성도와 경쟁하려 하기보다 오히려 서로 서로 도와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포도원에 일찍부터 와서 일하던 사람들이 늦게 온 사람들을 동료로 생각하였더면 적어도 이렇게 볼성사납게 주인을 원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13절에서 주인이 원망하는 자들을 향하여 ‘친구여’라고 부른 것을 주목하십시오. 이 말은 일차적으로는 ‘동료’(companion)란 의미이지만, ‘전우’(fellow-soldier)를 가리키는 데도 쓰입니다. 즉, 같은 목적을 가졌고 운명을 같이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성도들에게 동역자 의식이 강할 때 그 교회는 화목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한 주인 밑에 말과 당나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주인의 짐을 등에 가득 싣고 함께 떠나게 되었습니다. 하루 종일 걷다가 밤 늦게서야 주막에 들러 잠시 쉬고 다음날 새벽이면 길을 떠나는 힘든 나날이 며칠씩 계속되었습니다. 몸이 약한 당나귀가 말에게 부탁을 합니다.
“여보게, 좀 도와주게. 이대로 가다가는 죽고 말겠네. 그러니 내 짐을 조금만 가져가 주게.” 당나귀는 숨을 헐떡이며 말에게 애원했습니다.
그러자 말은 몹시 화를 내며 단번에 거절했습니다.
“안돼, 나도 지금 무거워 죽을 지경인데, 네 짐을 더 가지라고?”
당나귀는 더 이상 부탁하지 못하고, 얼마를 가다가 그만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당나귀의 등에 실었던 짐과 죽은 당나귀까지 말의 등에 실었습니다. 그래서 말은 훨씬 더 무거운 짐을 지고 걷게 되었습니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성도 여러분, 당나귀가 애원할 때 조금만 도와주었어도 혼자서 이런 고생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말은 주인에게 당나귀를 잃게 하는 죄를 지었고, 자신도 무거운 짐을 지는 고생을 하였습니다.
이 말과 같은 성도들을 교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교회의 많은 일을 골고루 분담하지 않고 소수의 사람들이 너무 많은 일을 맡아서 기진맥진한 경우를 찾아보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교회에 큰 행사가 있을 때 보면, 처음 시작할 때는 마치 자기가 다 할 것 같이 해놓고는 나중에 슬쩍 빠져버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서로 도와가며 일을 하면 금방 끝낼 수 있는 일도 도와주지 않아서 몇몇 사람이 오래까지 그 일을 하느라고 고생해야 합니다. 이래서는 교회가 화목하여 온전히 설 수가 없습니다. 우리 교회의 일꾼들에게 이 동역자 의식은 매우 중요한 덕목입니다.
바울에게는 디모데와 누가, 실라와 아리스다고 같은 훌륭한 동역자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동역자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 대하여 말하기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놓았나니”(롬 16:4) 라고 하였습니다.
바울같은 위대한 전도자에게도 동역자가 필요했습니다. 그에게 이런 동료들이 없었더면 성공적으로 사역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교회에서 얼마나 동역자 의식을 가지고 계십니까?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동분서주 할 때 그의 동역자들은 물질적인 필요를 채워 주었습니다. 사도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그들은 주님의 일을 감당했습니다. 바울이 어려울 때마다 많은 위로가 되어주었습니다. 그의 목숨을 위해서 목이라도 내어 놓았다는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포도원에 먼저 왔던 품꾼들은 나중 온 사람들과 함께 주인의 일을 동역한다는 동료 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의 일꾼은 무엇보다 이 동역자 의식이 탁월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위의 형제 자매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가는 일에 합력하는 일에 기뻐하는 일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의 종들과 더불어 주의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주님을 섬기는 일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3. 빚진 자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꾼은 항상 은혜로 불러주신 주님께 빚진 자 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포도원에 일찍 와서 일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한 데나리온을 약속 받고 포도원에서 일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일을 하고 품삯을 받았다는 사실로 인해 장터에서 놀고 있던 자신들을 불러준 주인의 고마움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주인의 음성을 기억하여야 했습니다.
7절, “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가로되, 우리를 품군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그러나 일찍 온 자들에게는 주인의 은혜에 대한 빚진 자 의식이 없었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주인에게 불평과 원망을 쏟아놓았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의 크신 사랑을 입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에 힘입어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의 멤버가 되어 교회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날마다 받아 누리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위해 봉사한다고 해서,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얼마나 갚을 수 있겠습니까? 영원히 멸망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흘려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갚을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우리가 감히 어떻게 주님의 은혜를 만분의 일이라도 갚을 수 있겠습니까? 교회에서 주의 일을 좀 했다고 해서 나를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내가 이만큼 했는데, 나를 몰라주다니’ 하는 섭섭한 마음을 갖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아직 주님께 빚진 자 의식을 갖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일했다고 해서 그에 상당한 대접을 요구할 권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에서(눅 18:9-15) 은총과 긍휼 앞에 선 겸허한 죄인과 자의로 강철 같이 버티는 교만한 율법 인간의 표본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 장부책과 도덕 장부책에는 잘한 것이나 빚 받을 것은 기록하지 말고 회개할 것과 사랑의 빚진 것만 기록해야 합니다. 쥐꼬리만 한 은혜를 입혀 주고 그를 일생 정신적 노예처럼 내 장부책에, 시혜자 명단에 올려놓지 말아야 합니다.
한 성자가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선 성도들의 맨 뒷자리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모두들 훈장처럼 잘한 것을 달고 나온 가운데 그만은 유별났습니다.
"그대는 무엇을 하였느냐?"고 주님이 물으시는 말에 그가 대답했습니다.
"주여, 잘한 일이 하나도 기억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빚진 자들입니다. 빚진 자가 주를 위해 일 좀 했다고 무슨 큰 공을 세운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에 합한 일꾼은 자신이 받은 은혜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남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비교하는 마음에서는 불평과 원망이 쉽게 솟아나오는 법입니다.
함께 일하는 주위의 성도들과 동역자 의식을 더욱 가지십시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빚진 자라는 의식을 가지고 교회 생활을 할 때, 우리의 교회가 더욱 화목하고 화평이 넘치는 공동체로 성장하게 될 줄 믿습니다.
주님의 관대한 은혜
마 20:1-16 / 송기성목사
“아 하나님의 은혜로”
몬테뢰오리는 마태복음 20:1-16 말씀을 ‘가장 위대하고 훌륭한 비유 중의 하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관대한 은혜를 보여주고 있으며, 기독교의 핵심적인 진리를 깨우쳐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포도원 품꾼들의 비유’라고 일컬어지는 이 비유는 사실 그 해석이 어렵기로 유명한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세 종류의 인물에 대해 성경학자들은 ‘포도원 주인’을 하나님으로, ‘청지기’는 예수 그리스도로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품꾼’에 대해서는 각각 의견이 다양합니다. 첫째, 먼저 일한 자는 유대인이고 나중에 일한 자는 이방인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전자는 구약의 성도이고 후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것입니다. 셋째, 부름받은 시간은 각 개인의 연령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관점에서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그 이해가 다르게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고자 했던 점은 하나님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일하신다는 사실과 인간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관대한 은혜로 인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속한다는 사실입니다.
1. 주님의 관대한 은혜는 아무도 쓰는 이가 없는 사람을 품꾼으로 쓰시는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천국을 포도원으로 비유하셨는데 이는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천국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포도원 주인으로 비유하셨는데 이는 교회의 주인은 바로 하나님이심을 뜻하고 있습니다. 또한 집주인이 직접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냈다는 것은 우리를 교회의 일꾼으로 부르시고 써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이른 아침 6시경에 나가 하루 한 데나리온 씩 품꾼들과 약속하고 포도원에 들여보냈습니다. 그리고 9시, 12시, 오후3시에도 장터에 나가 놀고 서있는 사람들을 포도원에 들여보내며 상당하게 주리라고 하였습니다. (I will pay you a fair wage) 포도 수확기에 일손이 많이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오후 3시에 품꾼을 쓴다는 것은 예사롭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포도원 주인은 제 11시 곧 오후 5시에도 장터네 나갔습니다. 가서 보니 아직도 놀며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그들에게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Why are you waisting the whole day here doing nothing?) 하고 물었습니다. 그들의 대답은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No one hired us.)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포도원 주인은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라며 그들도 품꾼으로 써주었습니다.
종일토록 장터에서 놀며 시간을 허비한 사람들, 그들에게는 그들을 품꾼으로 써주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 원인과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만 그들을 쓰는 이가 없었다는 것은 무언가 그들에게 문제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천만 뜻밖에도 포도원 주인이 다른 사람을 보내지 않고 직접 장터에 나가 오후 5시에 아무도 써주지 않는 사람들을 품꾼으로 써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포도원 주인, 교회의 주인, 천국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관대한 은혜인 줄 믿습니다.
얼마 전에 정동 젊은이 교회에서 말씀을 전한 “철인”의 저자 다니엘 김 선교사와 그의 가족 이야기입니다. 그는 한국에서 10년, 일본에서 10년, 미국에서 10년을 살다가 이제는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8년째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믿음이 돈독한 3대째 크리스천이지만 그의 아버지는 재일교포 2세로 20여만명 야쿠자 조직의 80여지부 중의 한 지부 보스였습니다. 사업가인줄 알고 결혼을 한 그의 어머니는 평생 야쿠자 남편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녀는 구치소에 있는 남편에게 수백 통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돌아오시기만 하면 됩니다. 새로운 삶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새롭게 시작합시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것을 우리에게 허락하실 것입니다.”
사람은 물론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아버지였지만 어느 날 편지를 읽다가 갑자기 복음이 깨달아지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 전까지는 ‘하나님이 진짜 계실까?’ 의문했었는데, 그 날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왜 나를 사랑하십니까?’ ‘하나님, 왜 나같은 죄인을 용서하십니까?’ 그는 가슴을 치며 회개하기 시작했고 하나님을 뜨겁게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생각이 들자 하나님 앞에 옷을 입고 있는 것도 죄송했다고 합니다. ‘나 같은 죄인은 옷을 입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옷을 다 벗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려는데 ‘나 같은 죄인은 무릎 꿇을 자격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 밤새도록 서 있었다고 합니다. 하룻밤 동안 그렇게 주님을 체험하고 난 다음 날 새벽, 그는 “주님, 제가 많이 용서받았으니 많이 사랑해 드리겠습니다!”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 후 큰 희생을 치르고 야쿠자 조직에서 나온 그는 아내의 기도대로 장로님이 되셨고, 후쿠오카에서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은퇴 후 지금도 그는 하루를 기도와 말씀으로 시작하고 끝마친다고 합니다.
다니엘 김 목사님은 풀러 신학원에서 설교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그의 여동생도 어머니의 기도대로 하나님의 종이 되었노라며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아버지를 변화시킨 복음은 온 가족에게 새로운 소망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삶은 죽은 삶이다. 마치 암흑 속에 있는 것과 같다. 그분의 은혜만이 우리를 소생시키고 온전한 삶을 살 수 있게 한다. ‘한 번 사는 인생,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목적을 주셨다. ‘네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내가 ‘하나님의 영광’이란 단어를 처음 만난 것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고린도전서 10:31의 말씀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중학교 1학년 때 한국에서 일본에 온 선교사님을 통해 이 말씀을 들은 그는 이 말씀을 외웠습니다. 선교사님은 그에게 “너는 이 말씀을 위해 살고, 이 말씀을 위해서 죽어라”라며 신앙훈련을 시켜주었다고 합니다.
아무도 쓰는 이가 없는 자, 아무도 써 주는 이가 없는 인생, 그것도 온종일을 놀며 허비한 오후 5시, 해 지기 전 파장의 때, 그 누가 그 시간에 그런 사람을 찾아 쓰려고 장터에 나오겠습니까? 그리고 포도원 품꾼으로 써 주겠습니까? 하나님의 관대한 은혜, 주님의 관대한 은혜로 말미암아 여러분과 저까지도 하나님의 포도원, 하나님의 교회에서 품꾼으로 쓰임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그 관대한 은혜를 받고 쓰임을 받게 될 포도원 품꾼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또 살든지 죽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섬겨야 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도 쓰는 이가 없는 자를 품꾼으로 써 주시는 주님의 관대한 은혜를 기뻐하고 감사하십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심으로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마25:21)라는 주님의 칭찬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2. 주님의 관대한 은혜는 나중 온 사람에게도 먼저 온 사람과 같게 품삯을 주시는 은혜입니다.
해가 지고 저녁이 되자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품꾼에게도 한 데나리온씩을 주었습니다. 먼저 온 자들은 한 데나리온씩 받기로 약속했지만 훨씬 더 받을 줄 기대했습니다. 왜냐하면 나중 온 자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지만 먼저 온 자들은 열한 시간이나 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온 종일 더위를 견디며 수고한 사람이 온종일 놀다가 막판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들과 똑같은 품삯을 받은 것은 불공평한 처사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먼저 온 품꾼들은 한 데나리온씩을 받은 후 감사하기는커녕 집 주인을 원망했습니다. 그들의 불평과 불만에 대해 집주인은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약하게 보느냐 (... or are you jealous because I am generous?) 라며 반문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집 주인은 약속을 지켰습니다. 다만 나중 온 자에게는 약속한 바가 없었지만 관대하게 은혜를 베풀어 주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먼저 온 자가 나중 온 자와 자기를 비교하여 우월감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 온자를 질투하였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실적과 판단을 기준으로 감히 하나님의 관대한 은혜에 대해 불평불만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거역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포도원에 들어가 일한 사람들, 그들은 그들을 써 주는 사람이 없는 경험을 해보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을 써 주신 주인에 대한 고마움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온 종일 더위를 견디며 수고한 것에 대한 자부심이 많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품삯을 당연한 댓가로 생각하며 그 이상의 보상을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와 같은 심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마19:27)라며 보상을 기대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된 자가 많으리라” (마19:30)라며 베드로의 우월감과 보상심리에 대해 일침을 놓으셨습니다. 하지만 겸손과 감사함으로 주님께 쓰임받는 것만으로도 기뻐하며 최선을 다하는 나중 된 사람들에게는 주님께서 분에 넘치도록 복을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포도원 주인, 교회의 주인, 천국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관대한 은혜인 줄 믿습니다.
조덕삼 장로님과 이자익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테이트 선교사가 1905년 봄 김제에 금산교회를 세웠습니다. 그곳에는 마방 주인이자 일대에서 가장 큰 부자인 조덕삼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선교사를 통해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 때문에’ 살기 좋은 자기 나라를 떠나 조선에 왔다는 말을 듣고 선교사의 헌신과 용기에 감동을 받아 예수님을 믿고 자기 집 사랑채에서 예배를 드리도록 했습니다. 그러자 그 집 마방에서 머슴으로 일하던 이자익이라는 마부도 함께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마부 이자익(1882-1959)은 경남 남해도 섬에서 출생한 사람인데 3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6살 때 어머니마저 돌아가신 후 생활이 너무 어려워 17살 때 무조건 육지로 나와 김제군 금산까지 와서 머슴살이를 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부흥되면서 1907년 한 명의 장로를 뽑게 되었는데, 함께 세례를 받고 함께 집사 임명을 받은 이자익 집사가 장로로 선출되었습니다. 먼저 예수님을 믿고 사랑채를 예배당으로 내놓은 조현삼 집사, 그는 마부 이자익보다 나이도 15살이 많은 주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의연하게 교인들 앞에 나와 “이 결정은 하나님이 내리신 결정입니다. 나는 교회의 결정에 순종하고 이자익 장로를 받들어서 교회를 열심히 섬기겠습니다. 우리 금산교회 교인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후에 장로가 된 조덕삼은 자신의 머슴인 이자익이 먼저 장로가 되었지만 질투하지 않고 기꺼이 받아 들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자익을 평양신학교로 보내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이자익이 목사가 되자, 1915년 자신의 머슴이었던 이자익을 금산교회 담임목사로 모셔 깍듯이 모셨습니다. 이자익 목사님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고 장로교 총회장을 세 번이나 하신 인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자익 목사님에 대해 말하기 전에 반드시 언급하고, 칭송하는 분은 바로 조덕삼 장로님이십니다. 신앙생활뿐만 아니라 민족교육을 위해서도 헌신한 조덕삼 장로님은 1919년 12월 17일 52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의 마지막 유언은 “절대로 우상을 섬기지 말고 제사는 지내지 말아라. 예수를 잘 믿어 나를 만날 수 있도록 신앙생활을 잘하고, 너희들은 내 대를 이어서 목사님을 잘 섬기고 교회를 지켜야한다.”였습니다. 이때 가장 많이 통곡을 한 사람은 이자익 목사님이었다고 합니다.
시편 116:12-14에 시편 기자는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는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라며 하나님의 너그러운 은혜에 감사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은혜를 인하여 기뻐하고 감사하며 보답하는 사람은 결코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지도 않으며, 나중 된 자로서 나중 되지도 않고 도리어 먼저 된 자로 인정도 받고 복도 받게 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중 온 자에게도 먼저 온 자와 같게 품삯을 주시는 주님의 관대한 은혜를 기뻐하고 감사하십시다. 그리고 주님의 구원과 축복에 보답하며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성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선행을 베풀었기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선행을 베풀 수 있도록 주어지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너그러운 은혜는 우리의 선행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선행을 베풀 수 있도록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도 쓰는 이가 없는 사람을 쓰시며, 나중 온 사람에게도 먼저 온 사람과 같게 품삯을 주시는 하나님의 관대한 은혜를 힘입어 기쁨과 감사, 충성과 헌신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에게 선행도 많이 베푸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일용직 노동자 예수의 삶
마 20:1-7 / 이정익 목사
얼마 전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직장의 신”이라는 연속극이 있었습니다. 이 연속극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을 그렸습니다. 그 초점은 비정규직의 비애, 초라함, 불안에 맞춰져 있었습니다. 비정규직은 임시직입니다. 이들은 직장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 어려움은 차별이고 인격모독이고 멸시입니다. 그들은 그 어려움 때문에 서글퍼 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오늘 우리사회는 비정규직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비정규직은 오늘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그 옛날에도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20장부터 23장까지를 보면 이스라엘의 계약법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21장에는 종에 관한 법이 나옵니다. 이 법은 종의 인권을 다루는 법입니다. “히브리 종을 사면 6년간 주인을 섬길 것이요 7년째 해에는 몸값을 지불하지 않고 나가 자유인이 되게 하라”(21:1-2)는 것이 당시 종의 법입니다. 또 “종이 들어올 때 단신으로 왔으면 단신으로 나갈 것이며 장가 들었으면 그의 아내도 함께 나가라 만일 상전이 그에게 아내를 주어 아들이나 딸을 낳았으면 그의 아내와 자식들은 상전에게 속할 것이요 그는 단신으로 나갈 것이로되”(21:3-4) 라며 아주 세세하고 자상하게 실천사항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신명기 12장부터 26장에는 신명기법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신명기 법전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법을 말합니다. 그 중 신명기 15장에는 빚 면제받는 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2절에서는 “매 칠년의 해마다 이웃에게 꾸어준 채주는 빚을 면제하라 그리고 형제나 이웃에게 빚 독촉을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12절 이하에는 “모든 종을 6년 동안 일을 시키라 그리고 7년 되는 해에 자유를 주라 내 보낼 때는 빈손으로 보내지 말고 후히 주어 보내라 그러면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법들은 가난한 사람들, 즉 무산계급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들이 보호받으며 함께 살아가도록 하기 위한 취지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법들은 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기득권층들은 여전히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살아갔고 어려운 사람들은 외면했습니다. 가난한 백성은 여전히 압박당했고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가난하고 힘들게 살아가던 그 시대 사람들은 메시야를 대망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 기득권층들은 메시야를 그렇게 기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의 현실이 편했기 때문에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비정규직들은 심각하게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예수님의 탄생을 미리 알고 먼저 찾아왔던 사람들이 비정규직인 동방박사들과 목자들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메시야 도래를 간절히 기다렸다는 증거입니다.
오늘도 이 비정규직 노동자들 문제가 심각합니다. 임금도 차별받고 권리도 보장이 안됩니다. 인격도 존중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심각할 정도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차별받는 것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서러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더 배우려고 더 성공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입니다.
비정규직 예수
그런데 알고 보면 예수님도 비정규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요셉은 일찍 죽었습니다. 성경에서도 요셉은 예수님 출생 때만 잠깐 나왔다가 곧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동생들은 네명이나 있었고 어머니가 있었고 여러 명의 누이들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집은 가난하기까지 했습니다.(마 13:53-58, 막 6:1-6) 예수님은 장남이었기에 부모님과 동생들을 부양해야 했습니다. 성경은 그때 예수님의 직업, 한 일을 “목수”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을 천시했습니다. 마가복음 6장 3절에서는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하고 빈정댔습니다. 이 빈정댐은 예수가 그 시대의 천한 직업 즉 오늘의 비정규직이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목수는 헬라어로 “테크톤”이라는 말입니다. 16세기 영어성서 번역자가 처음으로 목수(carpenter)라고 번역한 이후 계속 목수라는 말로 번역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목수는 나무를 다루는 기술자를 말합니다. 그런데 당시 팔레스타인에는 나무가 없었습니다. 집 구조도 목재구조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목수라는 직업은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때 순교한 저스틴(Justin Martyr)이라는 사람은 예수께서 목수일이 아니고 쟁기와 멍에를 만드는 직업에 종사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는 쟁기, 멍에, 밭에 감추인 보화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눅 9:62, 마 11:29) 그 말은 예수님이 쟁기를 만들고 멍에를 만드는 일에 종사했다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다는 표현도 사용한 것이고 멍에를 매지 말라는 표현,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 등도 나왔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주 사용하는 언어를 보면 그의 직업을 알 수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자기 직업에 맞는 언어가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어느 학생이 싸우고 교무실로 불려와 혼나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교사들이 그것을 보고 뒤통수를 쥐어박으며 한명씩 말했습니다. 한 교사가 말했습니다. “자기 분수도 모르고…” 이 교사는 국어교사입니다. “너희들이 싸운다고 세상이 달라지냐?” 이 교사는 세계사 교사입니다. “벌레만도 못한 놈들” 하고 말하는 교사는 생물교사입니다. “말리지는 못할망정 서로 장단 맞춰 싸우냐” 이 교사는 음악교사입니다. “아이고 이 녀석들, 내가 돌아 돌겠어”이 교사는 과학교사입니다. 모두 자기분야에서 많이 사용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은 어느 직장에 다닌 것이 아닙니다. 그날 그날 감독관이 시키는 대로 잡부처럼 막일을 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도 감독관이 고용한 일용직 노동자였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고향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고 배척을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노동현장에서 많은 것들을 목격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서를 보면 그렇게 목격된 사안들을 비유로 쏟아내셨습니다. 누가복음 18장 1-8절을 보면 불의한 과부에 대한 비유가 나옵니다. 어느 과부가 재판관에게 찾아가 호소를 했습니다. 억울한 일을 풀어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판관은 들은 척도 안합니다. 그래서 매일 찾아가 호소를 합니다. 그랬더니 귀찮아서 들어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과부는 왜 그렇게 찾아가 호소를 했겠습니까? 어느 주인이 돈을 떼먹고 안주니까 그랬을 것입니다. 또한 마가복음 12장 1-12절에서는 노사갈등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주인과 노동자간에 심각한 갈등의 문제를 겪습니다. 그리고 13-21절에서는 부자 형이 동생에게 유산을 아무 것도 주지 않고 혼자 독차지한 내용을 다룹니다. 그래서 가난한 동생이 재판관에게 호소를 합니다. 부자 형은 소출이 많은데 자꾸만 시설을 확장하여 쌓아 놓으려고만 하고 동생에게는 한 푼도 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시며 부자 형에게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하고 경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6장 19-31절에서는 거지 나사로를 문전박대한 부자도 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부자와 그 시대를 향하여 천국과 지옥의 문제를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9장 35-38절에서는 목자 없이 기진맥진한 무리들과 각종 병자들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날마다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비정규직으로 노동하면서 그 노동현장에서 가난하고 헐벗은 노동자의 삶을 보고 경험하신 것입니다. 그 노동 현장에서 가난한 노동자의 삶을 직접 체험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런 비유를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성경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이 한 때 가난한 노동자와 연대한 흔적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42-45절을 보면 임금이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하고 말합니다. 그러자 신하들은 임금에게 대답하기를 “주여 언제 우리가 주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은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힌 것을 보고도 공양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고 대답합니다. 그때 임금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비정규직으로 세상의 약자들 틈에서 일하시면서 노동현장에서 보고 경험하신 아주 뼈아픈 모습들을 각종 비유들로 쏟아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시대를 향하여 하고 싶으신 각종 메시지들을 전해주시는 것이고 그 시대를 신랄하게 고발하신 것입니다.
성경의 인력시장
노동현장에 가 보면 인력시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새벽 일찍이 일용직 노동자들이 한 곳으로 모여듭니다. 그러면 인력이 필요한 노동현장에서는 그곳으로 찾아와 봉고차로 일용직 노동자들을 필요한 만큼 데려갑니다. 그렇게 데려감을 받은 사람들은 열심히 일을 하고 일당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데려감을 받지 못한 일용직 노동자들은 그 날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공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은 인력시장에 가 보면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그 시대에도 인력시장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목격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인력시장을 비유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0장 1-6절에 나온 포도원 비유가 그것입니다. 노동자들이 인력시장에서 배회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포도원 주인이 와서 일하라고 일거리를 주었습니다. 3시에도 불러오고 6시에도 줄러오고 9시에도 불러오고 11시에도 주인은 노동자들을 불러서 일거리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포도원에는 각기 다른 시간대에 온 노동자들이 함께 모여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마감되어 결산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일찍 온 노동자나 늦게 온 노동자나 똑같이 품삯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먼저 온 노동자들이 “왜 똑같이 주느냐”고 불평을 했습니다. 노동자들을 보면 스스로 편을 만듭니다. 노동자 스스로가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편을 가릅니다.똑같이 주면 노동자들에게 모두 이득이 됩니다. 먼저 온 노동자들은 약속한 대로 품삯을 받았고 늦게 온 노동들은 더 받는 것이니까 분명 이득입니다. 그럼에도 왜 똑같이 주느냐고 불평을 합니다. 노동자들이 스스로 편을 가르고 스스로 계급을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은 귀족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회사에서 노동자를 더 늘리려고 하면 그것을 막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더 임금을 더 달라”, “우리 아들딸을 채용하라”, 그리고 “더 뽑지 말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이들을 가리켜 귀족 노동자들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사례들이가 오늘만 있는 것이 아니고 2천년 전에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모습을 직접 보시고 성경에 포도원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인은 노동자들이 불평을 하니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마음대로 하는데 왜 불평을 하느냐?” 여기 주인은 노동시간이 다르더라도 동일한 임금을 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노동자들은 스스로 편을 만들고 분열을 조장했지만 오히려 주인은 노동자 편을 들어 일치를 도모하고 있습니다. 그는 파트타임이라고 해서 그들을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늦게 와서 일했다고 차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노동자들이 지고 있는 가족 부양의 책임이나 생존권을 인정하고 존중해 주었습니다. 이 주인은 굉장히 선한 사람입니다. 여기 주인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따로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차별하지도 않고 똑같이 대우했습니다.이렇게 보면 여기 나오는 기업가는 오늘 기업가들의 본보기가 될 수 있습니다. 이 기업가는 이윤을 목표로 하지 않았습니다.기업논리를 뛰어 넘었습니다. 그는 기업의 재산을 부정하게 착복하는 기업가와 차별화 된 진정한 기업가 정신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천국은 차별 없는 나라
이 세상은 아침 일찍 온 사람에게 돈을 더 줍니다. 우리는 이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침 일찍 온 자나 늦게 온 자나 다 똑같은 임금을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기서 천국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이 비유를 통해서 노동시간이 다르더라도 임금은 똑같이 받는 곳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본문 1절을 보면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주인이 인력시장으로 갔습니다. 마태복음 20장 1-6절에서는 3시에도, 6시에도, 시에도, 11시에도 나갔다고 말씀합니다. 3시면 오늘날로 보면 오전 9시입니다. 11시면 오후 6시입니다. 즉 마감 시간입니다. 주인은 그때에도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온 노동자들 모두에게 똑같이 임금을 주었다고 말씀합니다. 그곳이 천국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차별이 없는 나라입니다. 평등이 적용되는 나라입니다.천국은 모두가 차별없이 대우받는 종말론적인 나라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 나라를 선포하면서 회개를 촉구하신 것입니다. “천국이 가까왔으니 회개하라.”(막 1:15)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힘든 노동자였습니다. 당시의 비정규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30년의 생애동안 생활하면서 목수일로 가족을 부양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은 장인 수준의 목공도 아니었습니다. 흙을 이용하여 집을 짓는 당시의 육체적인 노동자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노동자 생활을 통해서 당시 비참하게 살아가는 노동자들의 삶을 직접 체휼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어려운 삶의 현장을 목격했습니다. 가난에 굶주리는 민중을 목격했고 남편 잃은 과부의 부르짖음을 목격했습니다. 노사의 갈등을 목격했고 부모잃은 아이들이 노예로 팔려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하루 품삯을 받아 살아가는 노동자들의 삶을 보시며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너희들의 것이라고 선언하기도 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 천국은 차별이 없는 나라라고, 임금 차별도 없는 나라라고, 그 나라는 부자들이 들어가기가 어려운 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부자들이 천국 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천국이 가까웠으니 회개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시대를 향하여 그렇게 말씀했다고 고발당해서 예수님은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렇게 쉽고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제자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려고 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꼭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형식적으로 신앙생활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예수의 혼을 가진 참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포도원 주인처럼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 살리는 기업을 운영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귀족 노동자가 아니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노동 풍토를 만들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나누는 삶이고 주님께서 보여주신 참 제자의 길입니다. 그런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노동의 은총
마 20:1-16 / 인명진 목사
한 도둑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을 도둑이라고 말해야 할지 그냥 침입자라고 말해야 할지 얼른 구분이 되질 않습니다. 그냥 이상한 한 사람이라 말해 두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 사람이 도둑인지, 침입자인지 아니면 이상한 사람인지는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여러분이 판단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한 이상한 사람이 한 밤중에 백화점에 침입했습니다. 이 사람은 여느 도둑들과는 달리 백화점에서 물건 하나 훔치지도 않고, 손대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백화점에 있는 모든 물건의 가격표를 뒤바꿔놓았습니다. 겉으로 보았을 때에는 도둑 맡은 물건도, 자리를 이동한 물건도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나서 이 이상한 사람은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 백화점을 유유히 빠져 나갔습니다.
다음날이 날이 밝았고, 평소와 같이 직원들도 출근했습니다. 매장 오픈 시간이 되자 손님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저기서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직원도 손님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합니다. 수천만원 나가는 다이아 목걸이 하나에 단돈 1달러, 이미테이션 가짜 다이아에 수천 달러의 가격표가 붙어 있었습니다. 밍크 코트가 단돈 천원, 명품 가방이 10원 얼마나 놀랄 일입니까? 세상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성도님들은 세상에 이런 백화점 어디 없나 생각하실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복음이 이와 같습니다. 복음은 세상이 정한 모든 가격표를 뒤바꿔 놓는 것입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됩니다.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때로 길 잃은 양 한 마리가 아흔 아홉 마리 양보다 더 소중합니다. 많은 재산을 드린 부자의 헌금보다 가난한 과부가 드린 두 렙돈이 더 큰 헌금이라고 말합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산을 옮긴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복음은 작은 것을 매우 값지게 생각하고 큰 것을 별 볼 일 없는 것으로 말합니다. 복음은 세상이 정해놓은 가격표를 전부 바꿔놓습니다. 복음은 적은 것, 작은 것, 미천한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합니다. 복음은 결코 큰 것에 위축당하지 않고, 비싼 것에 기죽지 않습니다. 복음은 큰 숫자에 움츠려 들지 않습니다. 복음은 세상이 말하는 가치를 거부하고 하늘의 가치를 말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누구입니까? 복음의 정신을 따라 세상이 정해놓은 가격표를 거부하는 사람입니다. 복음의 정신을 따라 세상이 말하는 가치를 바꾸는 사람들입니다.세상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하잖게 여기고, 세상이 하잖게 여기는 것을 소중하게 여기고, 세상이 크다는 것을 것을 작다고 여기고, 세상이 작다는 것을 크게 여기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어떤 의미로 보면 세상의 가치관과 역행하는 것이 복음이요,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붙여주신 가격표와 가치관의 지배를 받으며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붙여주는 가격표를 기준 삼고 살아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셨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세상과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면 왠지 손해 볼 것 같고, 영적인 싸움을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더 큰 문제는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살면 어떤 영향력도 끼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썩어져 가는 세상에 동조만 할뿐입니다.
지난 주중 저에게 가장 크게 다가온 주제는 비정규직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정부가 비정규직 노동자 고용기간을 현행 2년에서 최대 4년까지 늘리는 방안을 제출했습니다. 이 제안에 대해서 정부와 노동계, 경제계가 다른 의견을 내놓고 있습니다. 문제는 비정규직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만드는 법이 비정규직을 영원한 비정규직으로 만든다는 서글픈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용이 불안하면 삶의 뿌리가 흔들입니다. 언제 그만 두어야 할지 모르는 불안감이 생활의 모든 영역으로 번지게 됩니다. 그러면 이 사회는 점점 더 살기 힘든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 자명합니다.
그러면 성경은 노동과 직업에 대해서 어떤 관점으로 말하고 있습니까? 먼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포도원 품꾼의 비유입니다. 어느 커다란 포도원을 가진 농장 주인이 자기 포도원에서 일할 일군들을 구하려고 아침 일찍 장터로 나갔습니다.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사는 사람들에게 한날의 일자리가 있다는 것은 어려움 가운데 큰 행복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들도 고용이 불안한 비정규직이었습니다.
남자가 가장 큰 어려움은 일하고 싶은 데 이마에 땀 흘려 일할 곳이 없을 때입니다. 남자의 존재 가치는 일과 함께 생기는 데 아침에 일어나도 일할 곳이 없다면 서글픈 현실입니다. 사실 남자에게 직장과 가정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대부분의 남자는 망설입니다. 가정을 먼저 선택하는 여성들은 남자의 이런 생태를 얼른 이해하지를 못합니다. 남자에게 직장과 일터는 가정을 지킬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는 곳입니다. 자신의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남자에게 일터와 직장이 없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큰 것을 잃어버린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남자이기 때문에 이 심정을 잘 아는 것이 아니라 저 역시 실직자가 되어 6개월 쉬어 본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1996년 6월 공부를 마치고 귀국 했는데, 목회 임지도 돌아갈 집도 없었습니다. 목회자에게 실직은 직장뿐만 아니라 집까지 없는 노숙 가족의 신세로 전락합니다. 그래서 처자식 데리고 처가에 가서 머물렀습니다. 장인 장모님이 잘 해주는데도 무위도식 하는 것 같고, 처자식 하나 먹여 살리지 못하는 못난이처럼 비춰져서 면이 서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얄팍한 마음으로 아내와 아들은 처가에 두고 누나 집에 갔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좀 편하겠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거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더군다나 이때 둘째 아들 성주가 아내의 뱃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자식 하나 책임지지 못하고 아이 가진 아내 하나 돌보지 못하는 무능한 인간이라는 자책감이 마음에 가득 했습니다. 가장과 남편으로 책임감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 한없이 부끄러웠습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품꾼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도 공치면 어떻게 하나 하면서 간절한 심정으로 일자리를 찾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써 줄 사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자리를 찾는 구직자의 애환이 그대로 담겨 있는 본문입니다. 또한 이 본문은 요즘으로 말하면 인력시장 비슷한 풍경입니다.
제가 부산진교회에서 부목사 생활을 할 때 교회 바로 옆에서 매일 새벽 시간이 되면 인력시장이 열렸습니다. 건축하는 사람들이나 농장 주인들이 봉고차를 몰고 와서 그 중에 힘깨나 쓸만하고 건강해 보이는 젊은 사람들 중심으로 먼저 데리고 갑니다. 당연히 나이가 좀 들어 보이거나 연약해 보이는 사람은 하루 품을 팔기도 쉽지 않습니다.
지난 97년 IMF가 시작되자 이 인력시장으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일하려고 하는 사람은 많은데 일자리가 없어 공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절반도 넘는 사람들이 신세를 한탄하면서 아침부터 소주잔을 기울이며 낮술에 취해 있는 사람들을 흔하게 보았습니다. 며칠씩 공치는 날이 생기자 이들 중에 노숙자로 전락하는 사람들도 하나 둘씩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돈을 못 벌어 가장으로써 책임을 다하지 못하니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세상을 비관하면서 술에 찌들어서 살아갑니다. 그리고는 노숙하다가 집단수용소에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직장을 잃은 사람의 아픔이고, 가난한 사람들이 느끼는 생존의 위협입니다.
예수님 당시도 우리나라의 IMF 시대 못지않게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나라는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 이래저래 공출도 당하고 그야말로 절박한 상황이었습니다. 경제사정이 어려워지면 있는 사람보다는 가난한 사람들이 생존 위협에 내몰리게 됩니다. 예수님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얻지 못했고, 하루 종일 일해도 겨우 먹고 살 수 있는 정도였습니다. 장터에 나가면 언제든지 자기를 부려줄 주인을 찾는 일군들이 여기저기서 서성대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유대 시간으로 한 시쯤 장터에 나갔습니다. 유대시간은 우리의 시간과는 달리 해가 뜨는 아침 6시를 기준으로 해서 0시가 됩니다. 그러니 한 시라 표현된 것은 요즘으로 말하면 7시에 해당합니다. 포도원 주인은 장터에 나가 일군들에게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이들을 농장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제 3시 우리 시간으로 9시에 농장 주인이 장터에 나가보니 아직도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서성이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데나리온을 준다고 약속을 하고 이 사람도 포도원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 후 제 6시 낮 12시쯤 되어 다시 장터에 나가보니 아직도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서성거리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이들 또한 같은 조건을 제시하고 농장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이어서 3시쯤에 또 나가보니 아직도 사람이 있어 주인은 이 사람 또한 농장에 데리고 갔습니다. 유대시간으로 제 12시 오후 6시가 되면 모든 일을 마치는데 오후 5시가 되어 또 장터에 나가보니 아직도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후 5시까지 품을 팔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개 어떤 사람들이겠습니까? 나이도 상대적으로 많이 든 사람일 것이고, 신체도 약한 사람일 것이고, 여러 가지 조건에서 떨어지는 사람일 것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비정규직으로도 써주지 않는 그런 사람일 것입니다. 그들은 오늘도 일이 없이 공친다면 가족이 굶게 될 수도 있고, 가족 앞에 빈손으로 들어가야 하니 집에도 들어가지도 못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농장 주인은 이런 마음을 꿰뚫어 보고 “당신들은 왜 이 장터에서 종일토록 놀고 있소?” 그러자 그들은 한목소리로 “써주는 이가 있어야 일을 하지요”라고 대답합니다. 그래서 이 주인은 “우리 집 농장 문을 닫으려면 한 시간 정도 밖에 남지 않았는데 이제라도 일을 하겠소?” 하고 제안합니다. 이들은 정말 기쁜 마음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농장에 들어가 해가 지기까지 열심히 일했습니다. 한 시간만이라도 일을 할 수 있어도 기쁨이었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일군이 없어도 오후 5시에 일군을 데려와서 1시간 일을 시키고 하루 일당은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로서는 포도원 주인이 납득이 잘 가지 않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이 주인이 좀 똑똑한 사람이라면 내일 우리 집에 와서 일을 하시오 할 것이지 오후 5시가 되어 이 사람을 데려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후 5시에 농장의 일군으로 초청 받았다는 자체가 은혜입니다. 아침 7시에 와서 일을 하고, 9시에 와서 일을 하는 사람은 농장에 품을 팔러 온 것이 당연한 것이지만, 오후 5시에 온 사람은 일하는 것도 은혜요, 품삯을 받는 것도 은혜요,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그러니 일하는 것이 얼마나 신이 나겠습니까? 앞서 온 일군들은 남의 일을 하는 것이지만, 오후 5시에 온 사람은 주인보다 더 열심히 일 했을 것입니다. 일당 받기가 민망해서 야간 잔업도 자청했을 것입니다.
자! 이제 일을 마치는 저녁 6시가 되었습니다. 농장 문을 닫았습니다. 그리고 일군을 모으고 품삯을 주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일찍 온 사람부터 품삯을 계산해 주면 좋을 것 같은데 가장 늦게 온 사람들로부터 셈을 해서 줍니다. 오후 5시 와서 1시간 일한 사람에게 농장 주인이 하루 일당인 한 데나리온을 줍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한 시간 일하고 하루 일당을 받아 본적 있습니까? 하루 일당을 받았을 때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그야말로 웬 횡재냐? 했겠지요.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12시간 일한 사람은 얼마를 받을 것으로 생각했겠습니까? 9시간 일한 사람은 몇 데나리온 받을 것이라 생각했겠습니까? 한 시간에 한 데나리온 얼른 계산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막상 주인은 똑같이 하루 일당인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 아닙니까? 더 받을 줄 알았던 기대감이 무너지자 먼저 와서 일한 사람들이 불평과 원망을 쏟아놓습니다. “우리는 아침 일찍 와서 온종일 땀을 흘리며 열심히 일했는데 오후 5시에 와서 한 시간 일을 한 사람과 어찌 똑같이 대우할 수 있습니까?”
일반적으로 볼 때 이 사람들이 화내는 것은 당연 것처럼 느껴집니다. 한 시간 일한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다면 12시간 일하고, 9시간 일한 사람은 이보다 더 받는 것이 인간 사회의 질서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농장 주인은 노동자에게 부당한 대우를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농장주인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아침 일찍 일하러 온 품꾼과 품삯을 얼마 주기로 했습니까?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일을 마치고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여러분! 농장 주인이 임금을 착취했습니까? 근로기준법이나 노동법을 어겼습니까? 약속한대로 주었습니다. 그런데 왜 먼저 온 사람들이 화가 나서 불평합니다. 이 원망의 원인은 자기 것을 받지 못해서 하는 원망이 아닙니다. 일을 적게 한 사람이 자기와 같은 일당을 받는 것을 보니 배가 아픈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니 원망이 생기고 불평이 생긴 것입니다.
불평하는 사람들은 자기 받을 것을 정당하게 받았습니다. 그런데 왜 불평하고 원망합니까? 오후 5시에 온 사람이 하루 일당 받으면 배가 아파야 합니까? 아니면 같이 기뻐해야 합니까? 일찍 온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했기 때문에 일당을 받는 기쁨을 잃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노동의 은총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왜 농장 주인은 아침 7시에 온 사람과 오후 5시에 온 품꾼에게 왜 똑같은 일당을 주었을까요? 품꾼은 일한 만큼의 댓가를 받는다고 생각했고, 농장 주인은 필요한 만큼 준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아침 7시에 온 사람도 가족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한 데나리온이 필요했고, 오후 5시에 온 사람도 처자식 먹여 살리기 위해 한 데나리온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농장주인은 한 데나리온씩을 준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생각은 어떠합니까? 우리들 역시 오전 7시에 농장에 온 일꾼처럼 일한 만큼 받으려 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더 받으려 합니다. 우리가 느끼는 직장에 대한 불만이 다른 사람과 자꾸만 비교하기 때문에 오는 것 아닙니까? 우리의 생각도 전환해야 합니다. 일한 만큼 받으려 하지 말고 필요한 만큼 주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생각하지 말고 필요한 만큼 주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노동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깔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본문이 오늘 구약의 말씀 창세기 3장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에 야훼 하나님이 인간에게 징벌을 내렸습니다. 먼저 하와에게 해산의 고통이 주어졌습니다. 아담에게도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사는 노동의 징벌을 내리셨습니다.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에덴동산의 삶과 비교했을 때 아담의 삶은 견뎌내기 힘들 정도로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래서 출산의 고통도 형벌이고, 이마에 땀을 흘리는 노동도 저주라고 생각했습니다.
어쨌든지 아담과 하와에게 내린 하나님의 징벌이 서로 다른 것 같지만 내용적인 면에서는 결국 똑같습니다. 출산이나 노동이나 모두 생명의 본질에 속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출산이 없으면 지구상에 있다가 사라진 수많은 동물들처럼 인간도 사라질 것입니다. 노동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노동의 수고가 없으면 생명이 번성하지 못할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표면적인 것만 생각하여 해산의 고통과 노동의 수고가 저주라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저주만은 아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었기 때문에 죽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즉각적인 죽음 대신에 해산의 수고와 노동의 수고를 더 하셨습니다. 이것은 징벌이 아니라 은총이었습니다. 고통을 통해서 자기를 닮은 생명이 태어나는 기쁨을 주셨습니다. 이마에 땀을 흘리는 노동을 통해 먹거리를 주셨고, 인생의 보람을 주셨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지만 아담과 하와는 여전히 출산과 노동을 통해서 생명을 지속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다만 그 두 행위에는 엄청난 수고가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만약 인간이 출산과 노동을 포기하거나 또는 그것에 따르는 고생을 감내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자신의 본질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출산의 고통과 노동의 수고를 징벌로 여기는 우리사회 전반에 깔려 있지 않습니까? 출산의 고통과 노동의 수고는 범죄 한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더 정확한 통찰은 무엇입니까? 야훼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아담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의 토대인 땅까지 저주를 받았습니다. 성서 기자의 직관은 아주 정확합니다. 땅 때문에 인간이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인간 때문에 땅은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다. 타락한 인간 때문에 땅이 착취당하고 있습니다. 만약 인간이 없었다면 땅이 저주받을 일이 없었다는 말이 됩니다.
제가 신대원 다닐 때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공부했습니다. 주말에는 내려가고 주초에는 교회 사역을 마치고 올라와서 공부를 했습니다. 이때 기차와 버스 속에 같은 책을 여섯 권 잃어버리고 일곱 권째 사서 완독을 한 책이 있습니다. 독일 여성신학자가 쓴 책인데 도로테 죌레가 쓴 “사랑과 노동”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 그녀는 인간은 사랑하고 노동함으로써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즉 사랑하지 않으면 인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노동하지 않으면 인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랑하고 노동하는 것은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 보십시다. 품꾼들은 새벽 인력시장에서 농장 주인이 자기들을 써 주기를 기다리면서 줄을 길게 서 있었습니다. 당시 경제 사정이 좋지 못하여 하루 일당 품을 팔수 있는 것이 은혜였습니다. 농장 주인이 자기를 뽑아서 일거리를 줄때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오늘 우리 식구들이 밥 굶지 않게 되었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뒤에 일군들이 계속 들어오면서 일하는 것이 은혜고, 품삯을 받는 것이 은총이라는 사실을 잊어 버렸습니다. 대신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그가 처음 가졌던 기쁨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런 비유 말씀을 하시면서 예수님께서 본문 말씀 끝부분에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합니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가 나중 된다는 말씀입니다. 농장에 일찍 온 자들은 처음에는 감사함으로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불평으로 마쳤습니다. 처음에는 은혜로 시작했다가 나중은 일당으로 마쳤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노동 현장이요, 우리의 노동 현실입니다. 고용주는 할 수만 있으면 적은 임금 줄려고 하고, 노동자는 할 수만 있으면 많이 받으려고 합니다. 이런 긴장감 속에 고용시장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또한 비정규직은 아니라도 평생직장이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의 삶의 근거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삶의 밑바닥까지 흔들리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어떻게 해야 흔들리지 않으면서 성서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받으려 하지 말고 필요한 만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노동은 형벌이 아니라 은총이라는 사실을 믿고 감사함으로 일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노동과 직장 앞에 붙여놓은 가치기준과 가격표를 떼어내고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리에 필요한 만큼의 가격표를 붙여놓으십시오. 수고와 고통이라는 가치기준을 떼어내고 은총이라는 가치기준을 붙여놓으십시오.
그리고 하오 5시에 농장으로 불려온 일꾼처럼 감사함으로 일하십시오. 또한 수고한 수입으로 나와 가족만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사용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 자리는 복의 근원이 되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에 침투시켜 이상한 가격표를 붙여 세상을 변화시키시기를 원하십시다.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노동의 가치 기준과 가격표를 붙여 세상이 당황해 하는 그런 멋진 삶 사시지 않으시렵니까?
사랑하는 갈릴리 여러분!
천국 백성은 포도원에서 감사하며 일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일하면서도 감사하면서, 일이 끝난 후에도 품삯 받는 것도 은혜로 여기며 고마워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천국의 주인이요, 그들의 마음이 바로 천국입니다. 올 한해에 필요한 만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노동과 일자리를 주신 것을 은총으로 생각하고, 오후 5시 인생처럼 기쁨으로 농장 문을 닫는 갈릴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신앙
마태복음 20:1-16 / 박한응 목사
할렐루야!!
오늘도 은혜를 사모하여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성도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다 같이 한 번 따라하시기 바랍니다.「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신앙」오늘의 설교 제목입니다.
벌써 12월이 되었고 오늘이 6일입니다. 금년이 이제 세 주일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12월이 되면 사람들은 공연히 마음들이 들뜨고 있습니다. 거리와 상가에는 벌서 크리스마스의 상품들이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고 성탄절 노래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 성탄절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보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더욱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이 세상에 계셨더라면 그 옛날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꾼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을 야단을 쳐서 내 쫓으시던 것처럼 다시 한 번 예수를 빙자하여 돈을 벌려고 하는 사람들을 책망을 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이 12월을 맞이하여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12월을 맞이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12월은 모든 것을 결산하는 달입니다. 기업들도 12월이 되면 결산을 해서 금년에는 과연 얼마의 흑자를 남겼으며 만약 손해를 보았으면 얼마의 손해를 보았는지를 결산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도 “신앙의 결산” 을 해야 합니다. 금년 한 해 동안의 나의 신앙이 얼마나 성장을 하였는지 아니면 성장하지 못하고 오히려 병들어서 활동을 하지 못하는 상태는 아닌지, 아니면 아예 식물인간처럼 전혀 움직이지도 못하는 그런 상태는 아닌지, 결산을 해야 하며 또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하였는지를 결산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마25장에는 우리가 잘 아는 달란트의 비유가 있습니다. 주인이 먼 곳으로 갈 때에 종들에게 그들의 재능에 따라서 달란트를 맡겼다가 돌아와서 회계를 하자고 하였습니다. 이때 열심히 충성스럽게 일하여 많은 이익을 남긴 종들은 칭찬과 아울러 상을 받았지만 게으르고 불평이나 원망을 하던 사람은 결국 책망을 받고 가진 것도 빼앗기고 어두움에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우리들은 항상 주님 앞에서 결산하는 자세로 믿음생활을 하여야 할 줄로 믿습니다.<아 멘!>
또한 12월은 모든 것을 정리하는 달이기도 합니다. 금년 년 초에 작정하였던 것을 다하지 못한 것은 빨리 마쳐야 합니다. 하나님께 작정을 한 것이거나 의무 감당하지 못한 것도 갚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신23:21)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 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이라”
또 누구에게 채무를 진 것이 있으면 그것도 빨리 갚아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모든 것을 정리하는 달이 바로 12월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다 틀렸다고 체념해 버릴 것이 아니라 금년이 아직도 20여 일이나 남아 있으니 이 남은 기간에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마치 오늘 본문 말씀에 있는 대로 마지막 오후 5시에 포도원에 들어가서 한 시간만 일을 한 사람이 열심히 최선을 다하여 일한 결과로 하루 종일 일한 사람과 똑같은 품삯을 받은 것처럼 남은 기간에 열심히 최선을 다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아 멘!>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수난을 당하시기 전에 마지막 길인 뵈뢰아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을 가르치신 목적이 바로 천국을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1절에 보면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라고 시작을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하여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려고 하신 천국의 비밀을 함께 생각하면서 은혜 받기를 바랍니다.
1.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우리들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할 일은 많은데 일꾼이 없어서 우리를 천국의 추수꾼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마9:37-38)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때로는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전도자로도 부르십니다. 우리들은 주님의 품꾼입니다. 품꾼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일만 열심히 하면 정한 품삯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성실하지 못한 일군은 절대로 다시 쓰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시대 어느 때이든지 간에 항상 일꾼을 불러서 쓰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30년 동안 고통을 받을 때에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내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의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사무엘, 이사야, 예레미야, 모두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서 쓰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간혹 요나와 같이 하나님의 부름을 거역하였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기도 한 사람이 있기도 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12제자를 비롯하여 바울과 같이 주님의 부름을 받아 쓰임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일꾼을 부르고 계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 멘!>
(사6: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라고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을 하였습니다.
삼상3:10절 말씀에는 사무엘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주님이 일꾼을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일꾼을 찾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2. 부름 받은 사람은 그 시기가 언제이든지 간에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마가복음11:13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열매가 없고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그 나무가 말라죽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주의해서 볼 말씀은 “예수님께서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고 하였는데 예수님이 열매의 때가 아닌데 열매가 없다고 저주하신 것이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 말씀에서 무화과나무는 우리들 성도들을 말하는 것인데 우리 성도들은 우리 주님이 요구하시면 언제든지 열매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철이 아닙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직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내년에 열매를 맺겠습니다. 라고 핑계를 할 수가 없습니다. 항상 언제든지 준비가 완비되어 있다가 주님이 원하시면, 주님이 요구하시면, 주님이 쓰시겠다면, 언제든지 드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이 부르실 때 내일 하겠습니다. 내년에 하겠습니다, 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하여야 합니다. 믿으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아 멘!>
세상에는 많은 초대가 있습니다. 결혼식의 초대가 있고, 생일잔치, 회갑잔치의 초대가 있고, 친목계 모임의 초대가 있고, 또 한 해가 저물어 가니 망년회를 갖는 초대가 있고, 많은 종류의 초대가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의 초대에 여러분들은 빠질 수 없다고, 빠져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조금도 신앙 양심의 가책도 없이 아주 당연한 것처럼 당당하게 갑니다. 아무런 미안함 같은 기본 신앙 양심마저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바른 길로 인도하려고 하는 목사를, 잘못된 사람으로, 옹졸한 사람으로, 사람의 도리도 모르는 사람으로, 몰아 부치고 맙니다.
여러분들 중에 만약에 어느 날 대통령이 점심을 함께 하자고 초대를 하였습니다. 아주 신나서 그러마고 대답을 하였는데 이튿날 예산 군수가 점심 식사를 함께 하자고 초대를 하였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같으면 누구의 초대에 응하겠습니까? 유치원 아이들도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을 다 아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초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서도 세상 사람들의 초대가 더 중요하다고 그리로 가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찌 세상 사람들의 초대와 하나님의 부름을 비교할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보세요 몸에 병이 나서 아플 때는 아프다고 못나오고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 한 번만 고쳐주시면 주님 뜻대로 살겠습니다” 해 놓고 병이 나으니까 이제는 잔칫집 다니느라고 主日을 범하고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우리 다 같이 찬송을 부르겠습니다.
<찬송가 522장>
2. 웬일인가 내 형제여 마귀만 따르다 저 마귀 지옥 갈 때에 너도 가겠구나
3. 웬일인가 내 형제여 재물만 취하다 세상 물질 불탈 때에 너도 타겠구나
예수님 당시 유대 나라나 로마의 풍습에는 아침 6시에 일을 시킬 사람이 시장에 가서 품꾼과 하루의 품삯을 정하고 데려다가 일을 시켰습니다. 일찍이 불려간 사람은 그 날 재수가 좋다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늦도록 불려가지 못한 사람은 점점 불안해 질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오후 5시가 되도록 아무도 자신들을 데려다가 일을 시키지 않는 그 사람들은 얼마나 불안하고 초조하였겠습니까? 이제는 거의 체념할 수밖에 없는 시간인데 뜻밖에도 일을 하도록 부름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지금 얼마의 품삯을 받을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일을 하게 된 것 자체가 한없는 기쁨이요 축복입니다. 일의 소중함은 실업자가 되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아파서 고통을 당해 본 사람만이 건강의 소중함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여!!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께 부름 받았다는 그것 자체가 축복 인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아 멘!>
집사가 아니면 어떻습니까? 권사가 아니면 어떻습니까? 장로가 안 되면 어떻습니까? 지금 내가 예수의 부름을 받아서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고 내 영혼이 구원받은 그 사실이 귀중하고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 멘!>
문제는 부름 받은 시간이 문제가 아니고 얼마나 열심히 일을 하였느냐가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교회에서 언제 부름을 받고 언제 무슨 직분을 받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주어진 직분에서 얼마나 열심히 충성하였느냐가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먼저 들어온 사람들은 품삯에 대하여 불평과 원망을 하였습니다.
(마20:11)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사랑하는 ○○교회 성도 여러분!!
이제 12월이 되면 모든 교인들이 당회와 구역회에 관심이 집중됩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여러분 스스로가 자신의 믿음을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의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아서 한 줌 부끄러움이 없는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계2:10)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고 한 말씀과 같이 지난 1년 동안 얼마나 죽도록 충성을 하였습니까?
이제 2015년이 12월로 접어들어서 마지막 고비를 지나고 있습니다. 마치 한해를 하루에 비교한다면 해지기 1시간 전과 같습니다. 해지기 한 시간 전에 들어갔어도 아침 일찍 포도원에 들어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품삯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금년 한 해가 저물기 전에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충성을 한다면 주님은 반드시 처음 부름 받은 사람과 동일한 상급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아 멘!>
3.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곳이 어디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 중에 주인이 품꾼들에게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라” 고 하였습니다. 오늘의 주님께서 우리들을 부르시는 곳은 포도원입니다. 포도는 이스라엘 성지에서 생산되는 대표적인 농산물 중의 하나로 이스라엘 곳곳에서 포도원을 볼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포도원에 대하여 여러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의 백 이스라엘을 가르치기도 하고 그리스도와 성도, 그리스도와 교회간의 관계를 뜻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포도원은 두말할 것 없이 교회를 뜻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라” 고 한 것은 곳 “교회에 들어가서 일하라” 고 하신 말씀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 멘!>
오늘날 성도들이 교회를 등한시하고 또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럴듯한 이유를 대면서 세상으로 나갑니다. 어떤 사람은 바빠서, 어떤 사람은 흥미가 없어서, 또 어떤 사람은 자기의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또 어떤 사람은 사업이나 결혼 문제로 인해서 교회를 떠납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께 경배와 예배를 드리는 곳이지 자기의 어떤 욕심이나 소원을 얻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인간의 사명이기 때문에 교회에 모여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고 교제하며 충성하며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포도원에 들여보내시는 하나님
마 20:1~ 16 / 이정선 목사
예수님은 탁월한 이야기꾼이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사람들에게 천국을 가져다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천국에 대해서 말하고 가르치는 것이 필요한데, 이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천국을 이해시키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능력을 행하시고 행동으로 보여주시기도 했지만, 말씀으로도 많이 가르치셨는데, 천국을 알기 쉽도록 가르치신 방법이 비유(parable)를 사용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비유라는 것은 어떤 현상이나 사물을 직접 설명하지 않고 그와 비슷한 다른 현상이나 사물을 빌려 표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도 예수님은 말씀하시려는 이야기가 천국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 밝히십니다. 물론 이 이야기가 천국의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천국에 관한 중요한 몇 가지 사실들을 확실히 알려줄 것입니다. 우선 이 이야기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한 포도원 주인이 아침 일찍 일꾼들을 구하러 나갔습니다. 여기 나오는 이른 아침은 오전 여섯 시를 의미합니다. 노동 시간은 해가 뜨는 때부터 해가 지는 때까지입니다. 해가 뜨는 시각은 아침 여섯 시이고, 해가 지는 것은 저녁 여섯 시입니다. 위도가 높아질수록 계절에 따라 일출과 일몰 시각이 변하지만, 적도 지방에서는 일년 내내 같은 시각에 해가 뜨고 같은 시각에 해가 집니다. 그래서 하루 24시간을 해가 있는 열두 시간과 해가 없는 열두 시간으로 나누어 시각을 정합니다. 즉 해가 떠서 한 시간이 지나면 한 시가 되는 것입니다. 열두 시가 되면 해가 지겠지요.
아침 일찍 인력시장에 나간 포도원 주인은 일꾼들을 만나 하루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하고 포도원에 들여보냈습니다. 데나리온은 로마의 화폐인데, 노동자가 하루 일하고 받는 돈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제삼시에 인력시장에 또 나갔습니다. 제삼시는 해가 뜬 이후 세 시간이 지난 시각이니까 우리 시계로 치면 아침 아홉시가 되겠지요? 그런데 그 시각에도 일거리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 서성거리고 있었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그 사람들에게도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라고 했습니다. 품삯은 상당한 액수로 정했습니다. 그들에게 상당한 액수라면 아홉 시간 일한 만큼이 되겠지요.
제육시와 제구시, 그러니까 열두시와 오후 세시에도 시장에 나가서 놀고 있는 사람들을 포도원에 들여보냈습니다. 이 사람들은 여섯 시간과 세 시간 밖에 일할 수 없겠고, 품삯은 1/2 데나리온과 1/4 데나리온이 될 것입니다. 그래도 하루 공치는 것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주인이 제십일시에 또 시장에 나갔습니다. 십일시면 해가 지기 한 시간 전입니다. 그때 나가서 무슨 일꾼을 찾겠으며, 또 일꾼을 찾았다 한들 한 시간 일 시켜서 무엇을 하겠어요? 그래도 포도원 주인은 시장에 나갑니다. 가서 보니 그때까지도 일거리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묻습니다. ‘당신들은 왜 이렇게 하루 종일 놀고만 있소?’ 그랬더니 그 사람들이 대답합니다. ‘아무도 우리에게 일거리를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 그러면 지금이라도 내 포도원에 들어가 일을 하시오.’ 그렇게 해서 한 시간짜리 일꾼들도 포도원에 들어왔습니다.
마침내 해가 졌습니다. 일꾼들을 다 모아놓고 품삯을 주는데, 맨 나중에 들어온 사람들부터 나오라고 해서 품삯을 줍니다. 이 사람들은 한 시간 일했으니까 1/12 데나리온을 받게 되겠지요? 뉴질랜드 달러로 하면 12달러 75센트입니다. 그 돈 받아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맥도널드에 가서 햄버거 하나 사먹고 집에 들어가면 끝나버리겠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이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입니다. 열두 시간 일한 품삯입니다. 12달러 75센트 받을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150달러를 준 것입니다. 어안이 벙벙했겠지요?
오후 세시에 들어온 사람들이 불려나옵니다. 세 시간 일했으니까 품삯은 38달러 25센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도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열두시에 들어온 사람들도 한 데나리온을 받았고, 오전 아홉시에 들어온 사람들도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맨 처음 아침 여섯시에 들어온 사람들도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들이 폭발한 것입니다. ‘지금 장난하는 거요? 한 시간 일한 사람한테 150달러를 주면서, 하루 종일 열두 시간 일한 우리한테도 똑같이 150달러밖에 안 준단 말입니까? 이런 불공평한 일이 어디 있어요?’
사실 엄청나게 불공평하긴 하네요. 그러면 누가 아침부터 와서 일하려고 하겠어요? 다들 숨어 있다가 오후 다섯시에 나와서 일하겠다고 하겠지요. 그것도 모르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일한 사람들은 억울해 죽을 지경입니다. 그래서 포도원 주인을 원망합니다. 말하자면 주인이 나쁘다는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에게 농락을 당했습니다. 같은 돈을 받고 일은 많이 했으니까 노동력 착취를 당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학대를 당한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포도원 주인이 악한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자 포도원 주인이 말합니다. ‘내가 너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냐? 내가 너를 학대하고 농락한 것이 무엇이냐? 너와 나 사이의 약속은 하루 일하고 하루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 주는 것이 아니었더냐? 내가 그보다 더 일을 시킨 것이 있느냐? 내가 약속한 것보다 품삯을 덜 주기라도 했느냐? 다만 나는 너보다 늦게 들어온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하루 품삯을 주었을 뿐인데, 내가 그렇게 좋은 일을 한 것 때문에 네가 나를 악하게 생각한단 말이냐?’
자, 이것이 예수님의 이야기 내용인데, 천국이 바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선 포도원은 천국을 의미합니다.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이시지요. 일꾼들은 우리 인간들입니다. 하나님이 천국에 들어갈 사람들을 불러 데려오십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포도원 주인이 하루 종일 한 일이 무엇입니까?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포도원에 들여보낼 일꾼들을 찾으러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에요. 하나님은 구원받을 백성들을 찾으시는 데 이렇게 열심이시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다 어떻게 해서 예수를 믿고 구원 얻게 되었겠습니까?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를 찾아내시고 포도원으로 인도하신 결과인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못 들어가면 누가 손해입니까? 하나님께 조금이라도 손해가 됩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는 아무런 손해도 없어요. 우리만 불쌍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왜 하나님이 그렇게 열심히 우리를 찾으십니까? 왜 해 지기 한 시간 전까지 시장에 나가서 일할 사람을 데려옵니까? 그 사람들이 와서 무슨 일을 한단 말입니까? 와도 그만이고 안 와도 그만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구원받을 사람들을 찾아 데려오신단 말입니다. 바로 그 은혜로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아니에요?
예수님의 이야기 중에 집 나간 아들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버지 재산을 뺏다시피 챙겨가지고 나가서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거지가 되어가지고 죽도록 고생만 하던 아들이 결국은 뉘우치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아버지 입장에서는 아주 괘씸한 아들입니다. 그렇게 제 발로 나갔으니 아들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이 나가서 거지가 될 것을 알았던가 봐요. 날마다 아들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아버지가 뭐가 아쉬워서 못된 아들을 걱정하고 기다려야 합니까? 그것은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아들은 비록 못된 자식이었지만, 아버지는 그 아들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가슴을 졸이며 돌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뭐라도 아쉬워서 해 떨어지기 한 시간 전에 나가서 일꾼들을 데려온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 독생자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뭐가 아쉬워서가 아닙니다. 인간을 구원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무슨 손해가 생기기 때문이 아니에요.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서 희생하게 하신 것은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요 3;:16). 그래서 그 아들을 믿고 누구나 구원을 얻도록 하신 것입니다.
시장에서 서성거리는 일꾼들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불러주지 않으시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갈 데도 없는 우리 죄인들입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있느냐?’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우리가 하나님 말고 다른 데 가서 구원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구원할 수도 없습니다. 자기 구원에 대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가 바로 인간인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주인이 불러주지 않으면 갈 데도 없어 하릴없이 서성거릴 수밖에 없는 우리를 해가 지기 한 시간 전, 마지막 기회에 부르셔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런데 해가 질 때가 다 됐는데도 일거리를 찾지 못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그들은 하루 종일 무엇을 하다가 그제서야 나타났을까요? 집나간 탕자처럼 그렇게 인생을 허비하고 나서야 뉘우치고 늦게나마 구원의 길을 찾으러 온 것일까요? 사실 오후 다섯시까지 일거리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 일거리를 찾게 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어차피 한 시간만 지나면 모든 것이 끝나버릴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집으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집에 가면 굶주린 채 아버지만 기다리고 있는 어린 자식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루 종일 기다렸는데 아무도 써주는 사람이 없었다면, 이제 그들은 절망과 원망과 분노를 품고 인생을 마감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아무런 희망도 가질 수 없는 사람들에게 포도원 주인이 나타났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일꾼들을 불러모으시려는 하나님의 열심이 아니었더라면 어쩔 뻔했습니까? 포도원에 들여보낸 일꾼들이 충분하니까 이제 일꾼 찾는 일을 그만두셨더라면, 이 사람들은 어쩔 뻔했습니까?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결코 그냥 지나쳐버려서는 안 될 사실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그토록 열심히 일하셨다는 것입니다.
포도원에 들어가 보면 아침 일찍부터 와서 일하는 사람도 있고, 점심때쯤 들어온 사람도 있고, 저녁 해질 무렵에야 들어온 사람도 있습니다. 바로 천국이 그럴 것입니다. 민족적으로 보면, 이스라엘은 수천 년 전부터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되어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다른 모든 민족들은 우상을 섬기고 하늘의 해와 별에게 절을 할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그러다가 AD 313년에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신앙은 로마 제국을 중심으로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인들과 라틴족이 포도원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로마 제국이 야만 고트족에게 망했지만 고트족은 기독교를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게르만족이 포도원에 들어옵니다. 그렇게 해서 기독교가 유럽으로 퍼져나가고 앵글로 색슨족이 뒤를 이어 포도원에 들어옵니다. 유럽에서 꽃을 피웠던 기독교는 청교도들에 의해 신대륙으로 건너가 미국에서 부흥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선교사들의 손에 들려진 복음이 태평양을 건너 조선반도에까지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에야 우리 민족이 복음을 듣고 포도원에 마지막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아직도 포도원 주인은 문 닫을 생각을 하지 않으시고 여기저기 다니시면서 포도원에 들여보낼 일꾼들을 찾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다른 민족들에 비하면, 우리는 해 떨어지기 직전에 겨우 들어온 셈인데,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동전 몇 개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수천 년 전에 들어온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한 데나리온을 받습니다. 먼저 들어온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일단 들어오는 순간부터는 모두가 동일한 것입니다. 아침 여섯시에 들어온 사람이나 오후 다섯시에 들어온 사람이나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는 것은 구원의 충족성을 의미합니다. 먼저 들어왔다고 구원을 두 번, 세 번 받는 것이 아니고, 나중에 들어왔다고 반쪽짜리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믿은 사람이나 나중에 믿은 사람이나 받는 것은 똑같은 온전한 구원인 것입니다.
먼저 들어왔다고 무슨 기득권을 가지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인에게 불만도 터뜨리고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의 본질을 대단히 오해한 것입니다. 먼저 들어왔든 나중에 들어왔든, 들어온 사람들은 오로지 주인에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거기에 자기가 수고한 것, 자기의 공로가 끼어들어오니까 주인이 하시는 일이 못마땅하게 생각되는데, 구원은 내 공로로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찾아 포도원에 들여보내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입니다.
만일 먼저 들어온 사람들이 그런 착각에 빠져 기득권을 주장하거나 우월주의에 빠진다면, 그것은 먼저된 사람이 나중되는 결과만 초래할 것입니다. 포도원에 가장 먼저 들어온 이스라엘 민족이 지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 포도원 밖에 나가버리지 않았습니까? 중간에 포도원에 들어와 열심히 일했던 유럽의 교회가 지금은 어떻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텅 비고 사람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반면에 수천 년 동안 포도원 밖에서 서성거리며 소망 없이 죽어가던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는 지금 폭발적으로 교회가 부흥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먼저된 자들이 나중되고 나중된 자들이 먼저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을 일찍 부르셨든 늦게 부르셨든, 그것은 여러분의 구원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똑같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다만 일찍 부르셨으면 일찍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고 더 많은 충성과 사랑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하신 것을 감사하십시오. 만약 늦게 부르심을 받았으면 소망 없이 죽어가던 나에게도 마침내 찾아오셔서 그 오랜 세월의 불안과 죄악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신 것을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남들 먼저 부르신 것에 대해서 부러워할 필요도 없고, 남들 늦게 부르신 것에 대해 우월감을 가져서도 안 됩니다. 자꾸 그런 것 생각하다 보면 쓸데없는 논쟁이나 불필요한 사색으로 빠지게 됩니다. 그저 나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감사하며 하나님께 충성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나중되었다가 먼저되는 분들이 많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먼저 되었다가 나중되는 분은 아무도 없기를 바랍니다.
4. 주님이 부르시는 것은 지금 즉시 일하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부름을 받은 일꾼은 내일 일하라고 부른 것이 아닙니다. 지금 즉시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라고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한 시간이 남았던지 두 시간이 남았던지 지금 즉시 일하라는 것입니다. 믿으시면「아멘」하시기 바랍니다. <아 멘!>
어떤 사람은 일찍 젊어서 부름을 받고 직분까지 받은 분도 있지만 또 어떤 분은 늦게 믿어서 늙어서도 직분도 없이 평신도로서 믿음생활을 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얼마나 하나님께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앞으로 남은여생을 열심히 하나님께 충성과 헌신과 봉사를 하여 영광을 돌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일하는 것도 때가 있고 충성하는 것도 때가 있습니다. 기회가 지나가면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습니다.
(고후6:2)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이 말씀은 현재를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미래의 소망을 가지고 살지만 거기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것은 현재요 일하는 것도 현재입니다. 우리는 현재에 살고, 현재에 일하고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곳 일한다는 말과 상통합니다. 그러므로 현재에 살아 있다는 것은 현재에 보람 있게 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내일로 미루지 마세요. 그리고 내년으로 미루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탄이 우리에게 속삭이는 말 중에 하나가 바로 “내일이 있다. 내일 하라. 내일 해도 늦지 않다” 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일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내일은 아무도 보장해 주지 못합니다.
(약4:13-14)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눅 12:16절 이하의 말씀에는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부자는 내일을 알지 못하고 곡간을 크게 짓고 많은 곡식을 쌓고 몇 해 동안이고 먹고 마시고 놀고 즐기자고 하였으나 그 날 밤에 그의 영혼을 하나님이 거두어 가실 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내일 하면 되지” “내일부터 하지” “내년에 하면 되지” 하는 생각은 사탄의 속삭임입니다.
어떤 왕은 충신으로부터 올라온 상소를 “내일 읽지” 하고 미루었다가 그 날 밤에 암살을 당해 죽었습니다. 그 상소의 내용은 신하들 중에 역모를 꾀하는 무리가 있으니 자객을 조심하라는 상소였습니다.
다 같이 복음성가를 부르겠습니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1. 내일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불행이나 요행함도 내뜻대로 못해요
험한이길 가고가도 끝은없고 곤해요
주님예수 팔내미사 내손잡아 주소서
내일일은 난몰라요 장래일도 몰라요
아버지여 날붙드사 평탄한길 주옵소서
2. 좁은이길 진리의길 주님가신 그옛길
힘이들고 어려워도 찬송하며 갑니다
성령이여 그음성을 항상들려 줍소서
내마음은 정했어요 변치말게 합소서
내일일은 난몰라요 장래일도 몰라요
아버지여 어버지여 주신소명 이루소서
3. 만왕의왕 예수께서 이세상에 오셔서
만백성을 구속하니 참구주가 되시네
순교자의 본을받아 나의믿음 지키고
순교자의 신앙따라 이복음을 전하세
불과같은 성령이여 내맘에항 상계셔
천국가는 그날까지 주여지켜 주옵소서.
현재는 항상 한 번밖에 기회가 없습니다. 내일이면 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바로 지금, 일하라고 주님은 우리를 불러 주신 것입니다. 내일이나 내년으로 미루지 말고 열심히 최선을 다하여 충성하면 반드시 하나님은 상급을 예비해 주실 줄 믿습니다.<아 멘!>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우리들은 많은 것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언제부터 예수를 믿었느냐를 중요시한 것이 아니고 지금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느냐를 더욱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에 아무리 은혜를 많이 받고 또 아무리 충성을 많이 하였다고 하여도 지금 나의 신앙이 어떠하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겔33:12-13) “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이르기를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공의가 구원하지 못할 것이요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는 날에는 그 악이 그를 엎드러뜨리지 못할 것인즉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의로 말미암아 살지 못하리라
가령 내가 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살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그 공의를 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지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곧 그 안에서 죽으리라”
그러므로 지금 현재의 믿음 상태가 중요한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의 믿음을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지금 당장 주님께서 재림하신다면 주님 앞에 갈 수 있을는지, 아니면 지금까지 입술로만 주여 주여(마15:8)하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고 있다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외식하는 자가 되어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에스겔서 33:20절 말씀에 “이스라엘 족속아 나는 너희가 각기 행한 대로 심판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오후 다섯 시에 포도원에 들어가서 1시간만 일을 한 사람들은 아침 6시에 들어와서 일한 사람들과 비교하여 볼 때 그 일한 양은 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1시간 동은 저들은 최선을 다하여 열심히 하였기 때문에 똑같은 품삯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2015년이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이 순간에 우리는, 바로 오늘의 소중함을 깨닫고, 열심히 충성하는 성도가 되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풍성히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끝까지 충성을 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충성이나 헌신의 개념은 1회성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지속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마24:13)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즐기는 모든 운동경기는 마지막1초가 지나고 끝나는 종이 울릴 때까지 열심히 하여야 합니다. 아무리 이기고 있다고 하여도 방심을 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역전되는 경우를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농구에서는 마지막 1초를 남겨두고 3점 슛을 날려 역전되는 경우가 있고 또 축구도 마지막 1분을 넘기지 못하고 역전 꼴을 당하는 수도 있습니다.
또 여러분이 잘 아는 이솝의 우화 중에 토끼와 거북이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토끼는 앞서가면서 거북이가 쫓아오려면 아직도 멀었으니까 나무 그늘에서 한숨 자고 가자고 한 것이 그만 거북이에게 지고 말았습니다.
마지막 1초라도 결코 방심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이제 12월을 맞이하여 금년이 다 가도록 결코 방심하거나 게으름을 부려서는 안 됩니다. 금년이 다 가도록 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 앞에 부름을 받는 그 순간까지, 이 생명 마치는 날까지, 절대로 나태하거나 게으름을 부려서도 안 되고, 방심해서도 안 되고, 또한 뒤를 돌아보아서도 안 됩니다.( 눅9:62) 좌우로 치우쳐서도 안 됩니다. 앞만 보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야 합니다.
(빌 3:13-14)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불레셋 나라에서 벧세메스로 가는 소들처럼 맡겨주신 일에 최선을 다하며 앞만 보고 달려가는 성도가 되어서 마지막까지 참고 견디어 승리하여 우리 주님이 예비하신 면류관의 상급을 받는 성도가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아 멘!>
하나님의 이상한 계산법
마 20:1~ 16 / 홍문수목사
성경을 읽다 보면 종종 이해가 안 되는 내용들이 나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경에 오류가 있어서 그럴까요? 그건 절대 아니죠. 성경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혹시 이해가 안 되는 내용이 나오면 하나님과 인간의 생각 차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런 말이 있죠. “뱁새가 어찌 황새의 뜻을 알리요?” 뱁새와 황새 사이에도 그렇게 큰 차이가 있는데, 하물며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얼마나 큰 차이가 있겠습니까?
사55: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으니라”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차이가 나는데 한 마디로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 우리 생각과 달라도 열린 마음으로 겸손히 대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말씀 속에 담겨진 오묘한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런 유의 말씀이 나옵니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말씀 속에 하나님의 진리가 들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은 ‘포도원의 품꾼’ 비유입니다.
[1] 포도원의 품꾼 비유 : 이상한 주인의 이야기
이스라엘이 위치한 팔레스틴 지방의 포도 수확기는 9월경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품꾼을 구하러 나갑니다. 장터에 있는 사람들을 포도원 품꾼으로 데려갑니다. 여기서 포도원은 천국 혹은 교회를 의미합니다.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품꾼은 천국 혹은 교회로 인도된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장터는 세상을 가리킵니다.
1절 보면, 포도원 주인이 이른 아침 품꾼을 구하러 나갑니다. 오전 6시경일 겁니다. 당시 시간법은 이랬습니다. 오전 6시부터 오후6시까지 낮 시간을 1시간단위로 계산합니다. 하루의 출발 시간이 오전6시이고, 오전7시를 제1시, 오전 8시는 제2시, ... 이런 식으로 불렀습니다.
2절 보면, 주인이 사람들을 품꾼으로 데려가면서 1데나리온씩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잘 아시는 대로, 데나리온은 로마의 은화로 노동자 하루 품삯 해당되는 액수입니다. 그런데 한참 후 제3시 즉 오전 9시에 주인이 나가서 또 품꾼을 데려옵니다. 이때는 품삯을 정하지 않고 ‘상당하게’ 약속합니다. 알아서 주겠다는 겁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아마 1데나리온에서 깎고 주겠다는 말로 들릴 수도 있었습니다. 또 시간이 흘렀습니다. 제6시 즉 정오에도, 제9시 즉 오후3시에도 주인이 나가서 놀고 장터에 나가 놀고 있는 사람들을 데려옵니다. 심지어 제11시 즉 오후5시에도 그렇게 합니다. 6절~7절. “6 제십일시(=오후5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7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참 이상한 주인입니다. 그 시간에 데려가서 뭐하려고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해질 때까지 1시간밖에 남지 않았는데, 얼마나 일한다고 데려가는지!
잘 생각해 보면, 포도원 주인의 이런 행동은 일손이 딸려서 그랬다기보다 놀고 있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차원에서 그런 것 같습니다. 놀고 있는 사람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을 불쌍히 여겨 일부러 고용해 준 겁니다. 참 이상한 주인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보면 이 주인이 정말, 정말 이상한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침내 해가 저물어 마감시간이 됐습니다. 8절 보면, ‘저물매’ 그랬는데 오후 6시를 가리킵니다. 하루 일과의 마감시간입니다. 품꾼들이 줄을 서서 품삯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나중 온 사람들부터 줍니다. 이것도 이상하죠. 처음에 온 사람부터 줘야 하는데 말입니다. 9절. “제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맨 마지막 제11시에 온 사람들에게 1 데나리온씩 줍니다. 아마 그들은 매우 감격스러웠을 것입니다. 겨우 1시간 남겨두고 고용된 것만 해도 감지덕지인데, 예상치 않게 하루 품삯을 다 받은 것입니다. 그들보다 일찍 들어온 사람들은 내심 더 많은 품삯을 받으리라 기대하고 부푼 마음으로 기다립니다. 그런데 웬걸 일찍 온 사람들도 모두 다 1데나리온씩 줍니다. 그러자 그들의 반응이 어땠습니까? 주인을 원망하고 난리입니다. 10절~11절. “10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11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아마 우리라도 그랬을 겁니다. 정말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질 않습니다. 이게 무슨 계산법인지! 정말 이상한 계산법입니다. 이건 세상의 계산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상한 계산법입니다.
그러나 주인은 불평하는 그들을 책망합니다. 14절.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이렇게 1데나리온씩 똑같이 주는 게 주인의 뜻이라는 겁니다. 주인 마음대로입니다. 오전6시부터 온 사람에게 1데나리온을 약속하고 그대로 줬습니다. 문제없습니다. 나중에 온 사람들에게도 주인 마음대로 1데나리온씩 줬는데 역시 문제없습니다. 인간들끼리 서로 비교해서 배가 아파서 그렇지 주인의 행동 자체에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탕자의 비유에 나옵니다.(눅15:11~32) 둘째 아들이 아버지 재산을 받아갖고 나가 탕진합니다. 알거지가 되어 돌아옵니다. 아버지는 반갑게 맞이합니다. 잔치까지 베풀어줍니다. 큰 아들이 아버지에게 성질을 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그럴 만하죠. 그러나 그게 바로 아버지의 마음이에요. 살아 돌아온 것만도 좋은 겁니다. 큰 아들이 아버지의 마음을 모를 뿐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말씀에서 우리가 캐치해야 되는 게 뭡니까? 주인의 마음 즉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자비의 마음입니다. 사람들이 장터에서 놀고 있는 게 불쌍했던 겁니다. 그 날 먹을 게 없어요. 딸린 가족들도 굶을 수밖에 없어요. 불쌍해서 고용해 준 겁니다. 품꾼이 꼭 필요해서가 아닙니다. 이게 바로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인간에게 아무런 공로가 없지만, 잘 한 게 없고 죄만 지었더라도 예수 십자가 대속을 믿기만 하면 그냥 용서하시고 구원해서 천국으로 인도해 주시는 겁니다. 인간끼리 비교하면 내가 저 사람보다 좀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거기서 거기입니다. 하루 종일 일한 사람이나 마지막에 와서 일한 사람이나 주인의 입장에서는 별 게 아니고, 다만 불쌍해서 써 주고 돈을 챙겨 주는 겁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자비가 극명하게 나타난 게 강도의 구원이죠.(눅23:39~43)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옆에 있던 한 강도가 구원 받았잖아요. 평생 죄만 짓다가 막판에 회개하고 예수 믿고 구원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보증해 주셨어요.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아슬아슬한 구원, 턱걸이 구원이죠. 목회하면서 이런 경우를 종종 봅니다. 평생 예수님을 믿지 않다가 임종 직전에 예수님을 믿음을 영접하고 숨을 거두는 경우가 있습니다. 목사로서 한 영혼을 구원했다는 짜릿한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너무 쉽게 구원받는 거 아닌가? 누구는 평생 신앙생활 하고 천국 가는데 이런 사람은 심지어 세례를 받지 않고도(십자가에 달린 강도처럼) 천국에 가다니! 인간적으로 불공평하다는 생각조차 들어요. 이게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 사항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셨기에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모두 구원해 주십니다. 엡1:4~5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 수 없지만, 내가 구원받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남이 쉽게 구원받았다고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해 보면 해결됩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100점이에요. 커트라인이 100점이란 말입니다. 90점짜리도 50점짜리도 떨어지는 것은 매한가지입니다. 그런데 불쌍해서 다 붙여 준 거에요.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이 바로 그겁니다. 그런데 90점짜리가 50점짜리 가리키면서 “쟤는 나보다 훨씬 못한데 왜 붙여줘?” 이렇게 항의하면 안 되죠. 자기도 붙여줬는데 말입니다. 인간은 잘 나도 못 나도 다 죄인이고 그 죄를 따라 엄격하게 처리하면 다 멸망합니다. 하나님의 자비 때문에 구원받은 것을 감사할 뿐입니다. 시103:10~11 “10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11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2]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의 자세 : 감사, 순종, 충성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바른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불평하는 사람들처럼 주인의 마음을 모르는 철부지가 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섭섭해 하십니다. 책망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기에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① 감사 :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전적으로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엡2:8~9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인간 조건을 구원을 위해 눈곱만큼도 보탬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것 갖고 자랑하면 안 됩니다. 거기서 실족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시편 기자의 고백을 해야 됩니다. 시116:12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고 한경직 목사님을 잘 아시죠. 그는 한국교회에서 대표적으로 훌륭한 분입니다. 왜 그분이 그렇게 훌륭한가요? 큰 교회를 이루어서 그런가요? 많은 업적을 남겨서 그런가요? 아닙니다! 그의 겸손과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마음이 훌륭한 겁니다. 그가 템플턴 상을 수상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 상은 종교의 노벨상으로 일컬어지는 큰 상입니다. 수상을 여러 번 거절했던 겨우 수상을 수락하셨는데, 수상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고백했답니다. “여러분, 저는 이 상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저는 일제 시대에 신사참배를 한 죄인입니다.” 한국교회가 과거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신사참배한 죄가 있죠. 그것을 제대로 회개하지 못했는데, 목사님은 그게 그렇게 마음에 걸렸던 겁니다. 그는 평생 죄인을 구원하신 은혜에 감사 감격한 분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평생 이런 감격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그저 감사, 만만 감사, 평생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② 순종 : 우리는 부족한 죄인입니다. 구원받고 의인이 되었다고 해도 그것만 법적인 차원일 뿐, 실제로는 아주 무지한 자들입니다. 그럼로 겸손히 하나님이 말씀마시는 대로 겸손히 순종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축복하십니다. 구원받은 성도라도 순종하지 않으면 축복이 없습니다. 똑같이 구원을 받아도 개인별로 축복의 차이가 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신28: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구원은 무조건적이지만, 축복은 조건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범사가 잘 됩니다. 잠3:5~6 “5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저의 중학교 시절 이야기입니다. 당시는 중학교 시험을 보고 들어갔어요. 입학해서 1학년이 됐는데, 교실에서 아이들이 수군거려요. “쟤 보결생이야. 쟤도 보결생이야.” 처음에는 그게 뭔지 몰랐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실력이 모자란데 사이드로 들어왔다는 겁니다. 그런데 한 아이는 자기가 모자란 줄 알고 선생님 말씀 순종하면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나중에 졸업할 때는 성적이 쭉 올라가서, 고등학교도 잘 가고 대학에도 잘 갔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 아이는 일류 중학교 들어왔다고(자기 실력으로 들어 온 것도 아니면서) 으쓱거리며 놀러만 다니더니 결국 고등학교 입시에 낙방하고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 신앙생활에 교훈이 됩니다. 우리는 다 보결생입니다. 우리의 실력이나 공로로 구원받은 게 아닙니다. 그 뿐인가요? 아무리 오래 신앙생활을 해도 늘 부족하고 모자랍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대로 살면 반드시 실패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때만 큰 축복이 있음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③ 충성 :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우리가 아무리 충성해도 시원치 않습니다. 그렇게 한들 우리가 자력으로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충성할 수박에 없습니다. 고전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바울은 누구보다도 충성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절실하게 느끼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충성하고 또 하고 ... 그런 겁니다. 그러고도 그렇게 충성한 것조차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의 또 다른 고백이 고후5:14에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 ” 그리스도의 사랑을 생각하면 저절로 마음이 끌리고 충성하게 된다는 겁니다.
찬양 가수 조지 베버리 쉐아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황금의 바리톤 목소리를 소유한 사람으로 일커어졌습니다. 그는 본래 돈이 없어 대학 중퇴하고 보험회사 세일즈맨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방송국 공개홀에서 노래한 것이 계기가 되어 미국 NBC 방송국의 전속가수 제의를 받게 됩니다. 그 때 그의 나이 23세였는데, 그 앞에는 돈과 인기가 펼쳐지게 된 겁니다. 그런데 어쩐지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회가 사라져버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고민하며 기도합니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평소 애송하던 신앙 시 한 편을 발견합니다. 그 시를 읽어 내려가던 그의 뺨에 눈물이 흘러내렸고,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의 목소리, 저의 젊음, 저의 인생을 모두 주를 위해 드리겠습니다." 그는 마음속에 솟아오르는 멜로디를 그 시에 맞춰 작곡을 했고, 바로 그 날 탄생한 찬양이 찬송가 94장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입니다. 그 후 그는 빌리 그래함 목사를 만나 평생 동역하며 찬양과 간증으로 많은 영혼을 주님께 인도했습니다. 이처럼 충성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면 저절로 하는 겁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저절로 하는 충성이지만 하나님은 일일이 기억해 두셨다가 천국에서 상을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계2:10 “ ...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여러분, 기왕 신앙생활 하는 것인데 누구나 받는 구원 외에 이런 상급을 받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먼 훗날 주님 앞에 설 때 아무런 상급이 벗는 부끄러운 구원을 받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고전3:14~15 “14 만일 누구든지 그(터=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 누구든지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본문 16절 예수님께서 비유를 끝내면서 덧붙이신 말씀 보세요!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먼저 믿은 자의 장점, 나중 믿은 자의 장점이 있습니다. 먼저이든 나중이든 구원받는 것은 동일하지만, 축복과 상급은 차이날 수 있습니다. 구원의 평등성, 축복과 상급의 차등성입니다. 그리고 이런 공식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구원, 순종으로 축복, 충성으로 상급”
늦게 믿은 게 자랑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이점이 있습니다. 늦게 믿은 게 너무 안타까워서 남은 시간 더 열심히 충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유에 나온 사람 중 제11시에 온 사람들 중 그런 사람이 있었을 겁니다. 너무 황송하고 고마워서 다른 사람보다 더 열심히 충성을 다했다면 주인이 얼마나 좋아했겠습니까? 그런데 늦게 믿고도 대충 신앙생활 하면 곤란하겠죠.
먼저 믿은 사람의 이점이 있습니다. 일찍 믿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모태 신앙인이 제일 부럽습니다. 더욱 성숙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고, 더욱 주의 일에 충성할 기회가 많은 겁니다. 금상첨화입니다. 그런데 참 안타깝게도 먼저 믿었는데 오히려 잘못하는 경우도 이따금 봅니다. 교만하고 자랑합니다. 되지도 못하고 된 줄 압니다. 별 것도 안 하고 많이 한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우리는 일찍 믿었으면 일찍 믿은 대로, 늦게 믿었으면 늦게 믿은 대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숨지는 그 순간까지 부족해도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이런 말이 있죠. 한 사람의 평가는 관 뚜껑 닫을 때 안다! 개관사정(蓋棺事定)입니다. 숨지는 그 순간까지 겸손히 감사하고 순종하고 충성을 다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처럼!
딤후 4:7~8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여러분, 세월이 신속하게 지나갑니다. 남은 날을 계수하며 더욱 열심을 내시기 바랍니다. 세월이 갈수록 더욱 감사하고, 말씀대로 순종해서 풍성한 축복을 누리고, 맡겨주신 일에 충성함으로 천국의 상을 예비하는 승리자가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