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Yanbian ChaoXianZu) |
주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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延邊朝鮮族自治州는 1952년 9월 3일에 성립되었으며 총면적은 42,700㎢이며 6개시 2개현 즉 延吉市, 훈春시, 圖門市, 敦化市, 龍井市, 和龍市, 安圖縣과 王淸縣 을 포함하고있으며 자치주정부 소재지는 연길시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민족단결진보 모범자치주이다.
자치주성립이래 중국 공산당과 국가는 연변의 건설과 발전을 매우 중시하고 관심하여왔으며 주은래, 주덕, 동필무 등 로일대 무산계급혁명가들이 선후하여 연변을 시찰하였다. 다음의 11기 3중전회이후 등소평, 강택민, 리붕 등 당과 국가영도자들은 친히 연변에 와서 시찰하였으며 연변의 발전을 다그칠것을 고무격려하였다. 1983년 8월 등소평동지가 연변에 와서 시찰하였으며 "연변조선족자치주를 더욱 빨리 더욱 좋게 건설하자", "훈춘과 두만강을 개발하여 동북아 각국지간의 우호합작관계를 발전시키자"라는 제사를 제기하였다. 1991년 7월 리붕총리가 연변에 와서 시찰하였으며 "경제를 발전시키고 연변을 진흥시키자"는 제사를 제기하였다. 자치주 성립이래 공화국의 발전과 함께 연변은 천지개벽의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개혁개방 20년래 전국 각민족 인민은 기회를 단단히 틀어지고 개혁을 심화하고 발전을 가속화 하였으며 온정을 유지하여 자치주의 경제실적이 크게 증가되었다.
1997년 전주 국내 생산 총액이 115.1억원에 도달하였으며, 지난해와 비교해보면 7.9% 증가하였고 1952년에 비하여 13.6배 증가하였다. 그중 제1산업증가액은 18.9억원으로써 4.5%하강하였고 제2산업증가액은 47.0억원으로써 11.6% 증가하였고 제3산업 증가액은 49.2억원으로써 8.7% 증가하였다. 인구당 국내생산총액은 5270원으로써 지난해보다 399원 제고되었으며 지난해보다 17.6% 증가되었다. 재정수입은 13.3억원에 도달하였으며 지난해보다 12.6% 증가되었으며 1952년보다 514.4배 증가되었다. |
주정부 소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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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길시(延吉, YenJi)
延吉시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인민정부청사가 있는 소재지로서 연변의 중앙부에 자리하고 있으며 연변에서는 가장 큰 도시로 정치, 경제등 모든면에서 중심도시이다. 총면적은 1,340㎢이고 인구는30만이 좀 넘는가운데 조선족은 40%조금 안되고 있다. 그 산하에는 9개 사업소, 2개의 진, 6개의 향, 66개의 촌이 있다.
연길이란 이곳 산에 안개가 자욱하고 연기가 끼여 처음에는 연집강(延集崗)이라고 하다가 나중에 그 음이 바뀌어 연길로 되었다고도 하고 혹은 길림을 이었다고 하여 연길(延吉)이라 했다고도 한다. 연길은 장백산맥 소구릉지대의 산들에 둘러싸인 분지에 자리잡고있다. 지세는 3면이 높고 서쪽이 트이였으며 해발 평균 높이는 154m이고 제일 높은 산은 시의 남쪽, 룡정과 접한 모아산으로 517m이다. 부르하통하수가 서에서 동으로 시내를 가로질러 흐르며 연집강이 북에서 남으로 흘러 부르하통하에 합류된다. 이 부르하통하가 시내를 하남과 하북으로 가르고 연집강의 서쪽은 거기 인민공원이 있어 공원로라 부른다. 이렇게 강을 기준하여 시내가 세 구역으로 크게 나누어지지요. 그러나 하북이 제일 중심가로서 가장 번성하다. 그리고 이 두 강에는 다섯개의 다리가 놓여져 시내를 하나로 묶어주고 있다.
연길시는 2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지만 근래에 와서 개발된 역사는 100여년 된다.19세기초에 조선의 이재민과 산동성, 하북성의 가난한 백성들이 이곳의 농토를 개간하기 시작하였다. 그후 일본인이 이곳을 강점한 후 1934년 간도성의 직할시로 삼고 이곳을 동북지방 자원약탈의 교두보로 삼았다. 해방후에는 중국공산당 길림성위원회가 이곳에서 일을 2년간 하다가 1952년에는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성립된 후 자치주의 직할시로 되었다.
연길은 교육과 언론, 문화의 도시로도 별 손색이 없다. 연변대학이 종합대학으로서 전국 100개 중점대학에 뽑혔으며 그밖에 대학에 준하는 전문학교 같은 곳도 10개에 가까이 있고 또 61개소의 중소학교가 있어 교육도시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리고 연변방송국과 연변일보 등 언론기관도 상당히 수준이 높으며 예술단체만도 70여개나 있고 연변예술극장이 있으며 연길체육관과 8만명을 수용하는 연길인민체육장도 갖추고 있다.
이밖에 연변의 역사적인 유물로는 <연변감옥터>를 꼽아야 할 것이다. 이 감옥터는 현재 연변예술극장이 들어선 곳인데 이 감옥은 1924년에 일본이 우리 독립지사들을 가두기 위해 지은 것으로서 많을 때는 1000명이 넘게 수용되어 있었다고 하며 또한 이 감옥에서는 유명한 탈옥투쟁이 벌어졌다고 하므로 역사의 교육장으로 삼을만한 곳이다.
그러나 연길에서 무엇보다 자랑스럽다고 느껴지는것은 <<사은기념비>>이다. 민주촌 산비탈, 화강암에 <<사은기념비(師恩記念碑)>>라 한자로 씌여진, 높이 1.87m의 이 비석은 말 그대로 제자들이 스승의 은혜를 기념하여 세운것이다. 1907년, 국자가-현 연길의 옛이름-서쪽교외 와룡동에 반일애국주의자인 오상극, 리연휘, 남성우 등 조선의 선각자들에 의하여 신식학교인 창동학교가 세워졌다. 이 학교는 곧 크게 발전하여 3년뒤에는 중학교과정까지 두고 많은 애국인재를 양성하였다. 그러나 1920년 경신년 대참변때 학교가 완전히 불타버리고 교사들은 모두 뿔뿔이 혜여지고말았다. 그후 1935년 9월 이 학교의 졸업생인 정세환 등은 이곳 와룡동에 사은의 정을 안고 이 기념비를 세운것이다. 그 영광스러운 공을 쌓은 창동학교는 지금 자취가 없지만 이 비석이나마 남아 옛 창동학교의 그 숨결을 조금이나마 느끼게 한다. |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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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길림성동부에위치함. 북한과 러시아와 접경. 연변조선족자치주는 3국 접경지대에 위치하고있으며 웅위롭고 풍경이 독특하고 경치가 아름다운 장백산으로 하여 이 세상에 그 이름을 널리 날리고있다. 주 내에는 자연자원이 아주 풍부하 며 일정한 공업기초와 사통팔달한 교통조건 및 선진적 인 체신통신시설이 갖추어져있으므로 해내외 각계 인 사들이 투자하고 무역을 진행하는 리상적인 곳으로 불리우고있다. 근면하고 열정적인 전 주 각 민족 인민들은 그대가 관광유람, 상담,고 찰길로 연변 에 오시는것을 진심으로 반길것이다. 또 그대에게 다방면의 량질봉사를 제공해드릴것이다. 투자우대 정책을 토대로 두만강지대국제합작의 둘도없는 기회 를 빌어 그대의 사업이 연변땅에서 깊이 뿌리를 박고 주렁진 열매를 맺으리라 우리들은 믿고있다. 중국 동북 길림성 동부에 위치해 있는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중국, 러시아, 조선 3국 접경지대에 위치해있고 동해에 인접해있 다. 동부는 러시아와 이웃하고 변경선의 총길이는 232.7km이며 남부는 북한(조선)과 이웃하고 변경선의 총길이는 522.5km로서 중국동북의 대외련결의 중요위치를 차지하고있을 뿐만아니라 구라파-아세아대륙의 중심지역이다.
그리고 중국과 조선, 한국, 일본 등 나라와 래왕 함에 있어서 제일 가까운 지역이다. 연변은 동해와 제일 가까와 15km떨어져있고 러시아의 보세르만과 다만 41km떨어져있다. 개방도시 훈춘은 동해연안의 주요항구-러시아의 보세르, 자루비노, 해삼위, 북한의 라진, 청진, 한국의 속초, 부산, 일본의 신슈꾸, 아까다 등 항구와 제일 가까이는 42km떨어져있고 제일 멀어서 해삼위를 지나 러시아 적탑일대를 지나가는데 해삼위를 지나 서부 시베리아 철도를 에돌기보다 1500km 단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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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적 |
42,700㎢, 연길시는 1,350㎢ |
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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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반부의 중온대습윤 계절풍 연평균 기온 5.3℃로서 사계절이 뚜렷하고 강우량은 709.6㎜.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산좋고 물좋으며 삼림이 무성하고 중온대습윤성기후에 속한다. 봄철에는 건조하고 바람이 많으며 여름철에는 덥고 비가 많으며 가을에는 시원하고 비가 적으며 겨울철에는 춥고 길다. 동쪽에 동해와 접하고 서부 북부에 또 높은 산맥이 천열병풍으로 되어 성내의 동일한 경도의 지구에 비하여 가을철이 따뜻하고 여름철이 시원하다.
년 일조시간수는 2,150~2,480시간에 달하며 평균 기온은 2도~6도, 극단최저기온은 섭씨 영하 23도~34도이며 극단 최고기온은 섭씨 34도~38도, 無霜期는 100~150일, 秋霜은 대부분 9월하순에 나타나며 春凍은 5월상순에 끝나며 11월부터 이듬해 3월은 結凍期이다.
평균 강수량은 400~650이며 장백산은 1000~1500에 달한다. 주내 평균기온은 대체로 해발고와 위도의 증가에 따라 감소되며 동부가 서부보다 높고 분지가 산지보다 높다. 중부분지와 동북산맥 골짜기의 강우량은 비교적 적고 서부 산구와 동남부 바다에 린접된 지구의 강우량이 비교적 많다. 일반적으로 가을철에 서풍, 여름철에 동풍, 풍속은 봄철에 제일 크다. |
주요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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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문시(圖們, TuMen) 도문시는 연길시에서 동쪽으로 50km 떨어져있으며 두만강 중류에 위치해있다. 시 산하에 3개 사업소, 3개 진, 2개 향,62개 촌이 있으며 총면적은 1,164㎢이고 인구는 14만명인데 조선족은 60%정도 차지한다. 도문시는 연변에서 유일하게 두만강에 붙은 도시이다. 옛날의 이름은 회막동, 현재 도문시의 서남쪽에 있는 하나의 촌락 이름이였다.
하전자(下甸子)혹은 애호전자(艾蒿甸子)라고도 했다. 한어로는 灰幕洞, 會幕洞, 檜幕洞, 海幕洞, 開幕洞 등 표기가 다양했다. 1933년 일제는 회막동 이름 을 도문이라고 고쳤는데 두만강의 두만의 동음이역이다보니 土們, 豆滿이라고 적기도 했다. 만족 어로는 투먼싸이친(圖們色禽), 싸이친이란 강이라 그 뜻은 <<만수지원(萬水之源)>>이 된다. 백 여년 전에 조개명(趙開銘)이라는 산동사람이 여기에 와서 첫괭이를 박아서부터 강건너 조선 함 경북도 남양군일대의 사람들이 이주해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1925년에 20여호, 1931년에 이르러 백여호의 인가를 가진 작은 촌락이였다는데 지금은 무려 10만을 헤아리는 인구를 가진 도시로 변모했다.
도문은 남으로 강을 사이두고 북한 남양시와 마주하고 북으로는 연변과 흑룡강성과 잇대여있어서 군사요충지이고 교통의 인후이다. 현재 연변 각지와 장춘, 심양, 북경, 목단강 등으로 통하는 열차는 도문이 시발점이고 두만강연안에서 육로와 철도로 북한과 무역을 하는 제일 큰 해관(세관)이 여기에 있다.
연변에서 유일하게 두만강에 붙은 도시다. 옛이름은 회막동. 현 도문의 서남쪽에 있는 마을 이름이었다. 100여년 전 산동사람 조개명이 이곳에 와서 살기 시작했다고한다. 이후 강 건너 함경북도 남 양군 일대의 사람들이 강을 건너와 살기 시 작하면서 도문이 형성됐다. 도문 강변. 남양시가 바로 손에 잡히는 곳 . 강변 주차장에서 택시가 서자마자 한무리 의 장사꾼들이 들이닥친다.
『북한우표예요. 한국돈도 받아요. 1만원입니다』 도문과 남양시 사이에 난 국경다리. 도문교 . 중국땅 쪽 절반까지 가려면 20원을 주면 된다. 도문은 1931년도에는 100여 가구만이 사는 寒村(한촌)이었으나 지금은 10만명을 웃도 는 도시로 변했다. 도문은 南으로 강을 사 이에 두고 남양市와 마주하고 北으로는 연 변과 흑룡강성에 잇대 있다. 교통 요지다. 연변 각지와 장춘, 심양, 北京으로 통하는 열 차는 모두 도문이 시발점이다. 두만강 연안 에서 북한과의 교역량이 가장 많다. 본디 도문 해관(세관)은 훈춘 해관(세관)의 분소였다. 그러던 게 도문의 수출입 물량이 폭발적으 로 늘면서 되레 훈춘 해관이 도문 해관의 분소가 되고 말았다. 고층건물 사이로 게딱 지 같은 집이 잇대 있고 연길에선 이미 자 취를 감춰버린 인력거가 아직도 택시와 공존하고 있다.
도문에는 북한을 관광토록 해관(세관) 옥상에다 전망대 시설을 해놓았다. 많은 한국인 관광객이 모이며 옛날엔 그 곳에 수상시장이 열려 북한사람과 서로 물건을 사고팔고 하였다. 또 도문시에는 홍범도장군이 일본군을 통쾌히 물리쳤던 현장인 봉오동전적지가 있어 우리 민족에게는 특별한 감회를 느끼게 하는 곳이다.
두만강(豆滿江,?만쟝) 길이가 521㎞, 유역면적이 1만513㎢로 우리 나라에서 세 번째로 큰 강이다. 한반도의 북동부에 위치하며 중국의 동북(東北,뚱베이)지방과 구소련의 연해주 사이의 국경을 흐르고 있다. 역사적으로 여진족과 관련이 깊은 곳으로 ‘두만‘이라는 명칭은 여진어에서 유래된다. 북한으로 가는 철도 북한쪽 남양 국경 두만강을 통해 건너다볼수 있는 함경북도 남양시의 가라앉은 분위기는 묘한 감회에 젖게 만든다. 관광지로 조성되어 있는 두만강 부분에는 다리와 철교가 하나씩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이곳의 철교로는 북한과 중국 사이를 연기를 뿜으며 오가는 기관차가 다니고 있으며, 다리에는 사람들이 오가는 것을 볼수 있다. 양다리 끝에는 세관이 있는데 각각 다리를 지키는 군인들이 서있다. 중국쪽에서는 관광객들이 다리 끝에 있는 작은 탑에 올라갈 수 있는데 입장요(2元)를 받는다. 올라가면 두만강을 조금 넓게 바라볼 수 있다.
돈화시(敦化, DunHua) 돈화시는 연변의 서북부에 자리잡고 있으며 시 산하에 4개 사업소와 10개진,10개 향,391개 촌이 있으며 총면적은 11,886㎢이고 인구는 48만명인데 조선족은 5%가 채 안되여 조선족이 가장 적게 사는 곳이다.
돈화는시는 목재와 삼림야생자원과 광산물자원이 풍부하며 교통과 공업도 상당히 발달되여 있으며 특히 장백산의 풍부한 토약자원을 이용하여 의약공업이 발달하였는데 국내외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있다고 한다. 육정산풍경구에는 발해국의 무덤들이 있으며 근래에는 정각사란 큰 절이 세워져 관광객들이 많이 찾고 안명호휴가촌이 경치가 뛰여나 관광객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리고 돈화시인민정부경내에 있는 항일명장 《진한장장군기념비》도 한번쯤 찾을 만한 곳이다. 장군은 어린 나이에 항일전선에 나가 혁혁한 공을 세우시고 28세의 꽃다운 나이로 순국했다.
용정시(龍井, LongJing) 연변 동남부에 위치한 용정은 면적 3,783㎢, 인구는 35만여명이다. 용정에서 처음으로 조선족마을이 조성된 해는 1877년이라고 전해지고있다. 함경북도 회령의 리재민, 장인석, 박윤언 등과 평안북도의 김인상 등이 처음으로 14호를 거느리고 와집령(흔히 오랑캐령이라고 부른다)을 넘어 륙도하와 해란강 함수목(지금의 용정시 시교)에 이르러 강변의 황무지를 개간함으로하여 첫 마을이 시작되였다고 한다. 이것이 용정의 시초라 할것이다. 북한의 會寧과 육로로 직접 왕래하고 있다.
용정은 우리 민족이 개척한 우리의 도시이다. 그러므로 이곳에서는 지금도 70% 이상이 조선족이므로 한족이 오히려 우리말을 배우는 현상이 많다. 또한 용정은 우리 민족이 본격적으로 벼농사를 시작한 곳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용정은 일제의 마수가 제일 먼저 뻗친 곳이기도 하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1908년 일제는 <조선인의 생명재산을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이곳에 군경을 파견하여 <조선통감간도파출소>를 세웠다. 이 기구는 나중에 <간도일본총령사관>으로 바뀌였다. 후에 많은 애국지사들이 이곳으로 몰려들면서 교육열이 높아져 학교가 세워지고 차차 민족의식도 싹트고 따라서 애국심도 들끓게 되였다. 그러다 끝내 3.1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 3월에는 이곳에서 대대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른바 <3.13만세운동>이라 불리우는 이 사건은 만주지방 조선민족의 독립의지를 내외에 과시한 가장 뜻깊은 사건이였다. 이후로 용정은 우리 민족의 얼은 가장 잘 지키는 요람이 되였다.
연길시에서 버스를 타면 약20분정도 소요되는 거리에 연길못지 않게 우리 나라 역사와 연관이 있는 용정시가 있다. 민족시인으로 알려진 윤동주가 중학교를 이곳에서 다녔고,박경리의 대하소설인 토지(土地,투띠)에 나오는 배경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곳은 일제시대에 우리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독립투사들의 많은 싸움터중의 하나이다.
용정은 장백산맥의 중단에 위치해있으며 주변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중간이 평원 분지입니다. 경내에 해란강과 부르하통강이 흘러 농업이 발달하였다. 전국에서 제일 큰 과수농장이 있으며 용정 일대에서 생산되는 잎담배(연초)와 사과, 배, 송이버섯이 특산물로 꼽힌다. 광물로는 석탄, 철광석, 금, 연, 대리석 등이 채굴되고 있다. 이곳의 공업으로는 제지, 화학, 피혁, 방직, 건축자재, 식품공업 등이 있다.
이 밖에도 용정 조선족 민속박물관, 용정 지명 기념비 등에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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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구자 노래비 (노래듣기)
1. 일송정 푸른솔을 늙어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2. 용두레 우물가에 밤새 소리 들릴 때 뜻 깊은 용문교에 달빛 고이 비춘다 이역 하늘 바라보며 활을 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는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3. 용주사 저녁종이 비암산에 울릴 때 사나이 굳은마음 길이새겨 두었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윤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 |
용정시에서 연길로 조금 나오면 낮은 산이 있는데 그정상에 작은 정자가 있다. 이 정자가 선구자라는 노래에 나오는 일송정(一松亭,이쑹팅)이다. 이 일송정에서 보면 해란강이 유유히 흐르는 모습이 보이는데 자신의 나라를 떠나와 외로운 싸움을 했던이들의 깊은 서로움이 느껴지는듯하다.
일송정은 용정시에서 승용차로 10분거리에 있다.
일송정, 용문교, 혜란강, 용두레 모두 「선구자」에 나타나는 지명인데 용정시 소재지안에 있다. 용정시 입구에 들어서면 혜란강과 그 위에 놓인 용문교를 지나게된다. 근처에 오늘날 용정 지명의 유래가되는 용두레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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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
1932년 10월의 어느 저녁 무렵, 만주 모란강변에 있는 한 싸구려 여인숙에 묵고 있던 조두남에게 윤해영이라는 청년이 찾아왔다. 윤해영은 평소 만주의 평원을 무대로 일제와 싸우다가 쓰러져 간 독립투사의 혼을 위로하고 아울러 만주 지역에 사는 동포가 선열을 추모하며 노래 할 수 있는 장엄하고 위대한 노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두 명의 청년은 의기 투합했다. 윤해영은 조두남에게 용정에서의 동포들의 고생과 독립 운동의 상황을 소상하게 들려주었다. 조두남은 윤해영의 시에 감격하여, "내 민족이 함께 조국의 광복을 기다리고 희망을 잃지 않으며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남긴 그 소원에 응하기 위해서 젊은 정열을 기울여 작곡에 착수했다. 독립 투사가 출입하던 일송정의 어느 용정 언덕과 한이 서린 해란강의 물결, 밤이 되면 함께 울던 용주사의 종소리... '용두레'란 낮은 곳의 물을 높은 곳에서 퍼올리는 농기구로 '용'은 '龍'의 음과 통하고 우물가와 합쳐서 용정(龍井)의 지명을 상징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곡에는 처음 「용정의 거리」라는 제목이 붙여졌다. 용정이란 북간도 지역에서도 특히 조선 사람이 밀집되어 있던 거리이기도 했다. 해방 후 이 노래가 국내에 소개되었다. 일반 국민에게는 1960년대 기독교 방송의 시그널로 사용되면서 널리 애창되기 시작하였다.
연변조선족자치주 내에서 한인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곳은 백두산(중국에서는 장백산이라고 부름) 다음으로 선조의 넋이 어린 용정(龍井)의 일송정(一松亭)이다. 가곡 용정의 노래 <선구자> 때문이기도 하다. 1절부터 3절까지 부르다 보면 용정을 가보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가사 속에 등장하는 고유명사를 찾아가면 훌륭한 용정 관광이 된다.
용두레 우물을 마시며 그 넋으로 민족계몽과 반일기치를 높이든 옛 간도 용정이 아닌가! '용정의 남산'이라 할 비암산.. 사방이 잘 보이는 꼭대기에 일송정 정자가 있다. 일송정에 올라 <선구자>를 힘차게 불러보고. 가사가 공원입장권 뒤에 쓰여있다. (공원 입장료 5위안). 정자 난간에 앉아 사방을 둘러보면 아름답기 그지없다. 석양에 비치는 용정벌과 들녘을 구비구비 흐르는 해란강은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 지난 세기 해란강은 조선족 개척민들에게 다시없는 생명의 젖줄이었다. 연변에 벼농사를 도입한 것이 우리 조선족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다.
당시 계속되는 재난으로 인하여 가아에 시름하던 영세농민들이 살길을 찾아 이곳에 와서 황무지를 개간한 그들이야 말로 오늘의 연변벌을 일구어 놓은 개척의 선구자들이다. 개척시대 해란강 변에 제일 큰 마을인 용두레촌(龍井村)에 조선 개간민들이 정착한 것은 1870년경이다. 1907년 일제(日帝)는 용정에 조선총독부 간도(間島) 파출소를 설치하고 이어 1909년에는 간도 일본총영사관으로 대치하면서부터 용정촌은 점차 평온을 잃어갔다.
3.13독립운동, 청산리대첩, 5.30 반제(反帝)투쟁, 해란강 대학살 등 수백건의 항쟁과 수난을 겪은 용정은 반일투쟁의 중심지였다. 1935년 전후 일제의 혹독한 탄압으로 항일운동이 잠시 위축되고 수많은 투사가 줄줄이 사라져가던 무렵 광복에의 실망과 비탄에 젖은 동포들에게 심기일전 일제타도의 새로운 용기를 불러일으키려고 내놓은 용정의 노래 <선구자>는 그 시절 용정주민들의 저항심의 절규였다.
그로부터 50여 성상, 용정인 작사가 윤해영, 작곡가 조두남은 이미 타계하고 이 가곡은 반세기동안 해외에 묻혀있다가 1988년 이해승 등 해외인사들이 선구자의 고향땅 용정에 되돌아 왔다. 일송정 공원에는 일송정에서 약간 떨어진 평지에 일송정 탑이 있고 오른편에는 선구자의 노래비가, 왼쪽에는 이원수 작사 홍난파 작곡의 "고향의 봄"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양편의 돌은 1998년 9월3일 한국의 거제시 해금강 조경사이자 용정시 명예시민인 윤종환씨가 세운 것이다. 일송정 탑 받침대 양옆에는 가곡 <선구자>의 유래가 적혀있다.
일송정에 올라가는 돌계단은 한국 평택시의 주식회사 <솔고>의 임직원 헌금으로 97년에 말끔히 보수되었다. 연길시내버스 중에서 용정까지 운행하는 노선이 있다. 버스요금은 5위안(元). 용길에서 한시간 이내에 용정에 도달한다.
현재는 조두남이 친일 가요를 작곡했다는 논란 때문에 [선구자]의 인기도 옛날 같지 않다. 게다가 주흥이 무르익은 상황에서 '분위기 깨는 노래' 1, 2위로 지목되는 노래가 「선구자」와 「보리밭」이다.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중국 용정에 한국문인 추모바람(중앙9/3)
중국 용정 (龍井) 이 간도 (間島)에서 활동했던 한국 문인들의 얼을 기리는 장소로 떠오르고 있다. 이는 얼마전까지 중국 당국이 연변자치구 내 한국의 민족혼 확산과 이로 인한 파장을 우려, 상당한 압박을 가했던 것과는 대조를 이루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중국과 교류가 재개된 이후 용정에서 일어났던 대표적 사건은 ▶일송정이 있는 용정 비암산의 '선구자 탑' 의 폭파.제거 (92년.건립은 91년임) ▶용정중학교 내 '윤동주 시비 (詩碑)' 건립 당시 제막식 무산 (93년 : 시비는 건립됨) ▶용정 명동촌에 복원된 '윤동주 생가 옛터' 표식비의 강제철거 (94년) 등 세가지. 하지만 지난해 텅 비어 있던 '선구자 탑' 기단 (基壇)에는 지난해 '일송정' 을 새긴 비 (碑)가 들어섰으며 급기야 지난 7월, 5년간 윤동주 생가 앞뜰에 묻혀 있었던 표식비까지 빈 기단 위로 복원됐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지난달 8일 역시 비암산에 '녀성작가 강경애 문학비' 가 들어섰다. 강경애 (1906~44) 는 짧은 생애 동안 대표작 '인간문제' 등 2편의 장편소설과 17편의 단편소설, 그리고 평론.수필.시를 발표했던 한국 여성문학이 선구자. 황해도 장연 출신으로 용정에 머물면서 장편소설 '인간문제' 등을 발표했다. 문학비 건립을 주도했던 사람은 최근 '강경애 전집' 을 엮어낸 이상경 (한국과학기술대.국문학) 교수인데 문학비 주변 경관조성과 진입 계단공사가 미완성인 채 남아 있다.
이같은 움직임은 한국전쟁 당시 북으로 간 충북 옥천 출신 시인 정지용(1902~미상)에게로 이어지고 있다. 옥천문화원이 주도하는 '정지용 시비' 건립은 내년 8월 '제4회 옌볜 (延邊) 지용제' 핵심행사로 진행키로 하고 현지 문화발전추진위원회 측과 협의를 끝낸 상태다. 시비가 들어설 곳은 용정에서 가까운 연길 (延吉) 의 연자별장 부근. 또 한사람은 함북 명천 출신으로 옌볜에서 활동을 했던 소설가 김창걸 (1911~1991) 이다. 그는 '암야' (暗夜) 등 리얼리즘 계열의 단편소설 20여편을 남긴 옌볜대 조문학부 교수였다. 문학비 건립을 추진하고 있는 국민대 장백일 명예교수는 "IMF로 지연됐던 일을 재추진하기 위해 최근 현지를 방문해 협의를 진행했다" 고 밝혔다. 문제는 건립비용을 마련하는 일이다. 이와 관련 옌볜대 한 교수는 "두나라 교류 초기 한국측이 지나치게 '옛 우리 땅' 에 집착했고 이에 중국정부가 너무 민감하게 반응한 결과 불상사도 생겼는데 요즘 들어서는 양측이 모두 일정 선을 지키는 추세로 들어섰다" 고 밝혔다. 옌볜 = 허의도 기자 <huhed@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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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정중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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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레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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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정에는 윤동주가 다녔던 대성중학교가 있다. 그 학교에는 여전히 조선족들이 다니고 있고 교사(校舍,쑈써)앞에 윤동주 기녑비도 있다. 이학교는 용정을 방문한다면 반드시 들러보는 곳 중의 하나이다.
용정중학교는 일제시대부터 이곳에 있던 은진중학, 명신여자중학, 동흥중학, 광명중학, 대성중학, 광명여자중학 등 여섯 학교를 합쳐 새로 발족한 학교이다 . 그러므로 교문 오른편에 연합기념비 ( 聯合紀念碑 ) 가 거석으로 웅장하게 서있었다. 그리고 그옆에는 윤동주의 시비가 큰규모로 세워져있으며 그위에 그의 유명한 < 서시 > 를 써놓았다 . 그리고 그 뒤에는 그의 일대기를 연대별로 정리해놓고 있었다 . 2 층 전시실에는 각 학교에서 배출한 위인들의 사적이 기록되여 있고 또 학교의 역사도 소개해놓고 있다 . 그중에는 윤동주를 비롯하여 김약연목사와 문익환목사 등 우리가 익숙한 인물이 있는가 하면 항일열사 김정길 , 그녀가 연길감옥에서 수놓았다는 수건이 지금 중국혁명박물관에 소장되여있다는 소개도 있다 . 그중 명동중학교는 1911 년 간도에서 최초로 여학생을 받아 교육한 유명한 학교이다 . 그리고 기미년 3.13 만세시위 때 그 학교의 중학생들이 충렬대를 조직하여 시위의 맨 앞장에 < 섰다는 자랑스런 학교요 이로 인하여 경신년 대참변시에는 일본군대에 의하여 교사가 완전히 불타버린 비운의 학교이기도 하 다 . 그리고 독립운동가 김약연목사가 세우고 저명한 교육가 정재면선생이 학교의 기틀을 닦고 이동휘선생의 딸 이의순선생이 심혈을 기울여 가르치던 학교이다 . 또한 시인 윤동주와 목사 문익환 등 유명인사를 배출한 학교이다 . 용정중학은 반일 구국과 민족의 넋을 꽃피우며 배움의 샘터로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잇다. 은진중학, 명신여자중학, 동흥중학, 광명중학, 대성중학, 광명여자중학의 6개 중학교가 1946년 통합하여 용정이 됐다. 옛 간도의 대명사인 용정중학은 수많은 인재를 걸러냈다. 1,800명의 졸업생들이 세계 18개국와 지국에 살고 있으며 많은 이들이 정계, 군계, 재단, 기업에서 요직을 맡고 있다. 이들 중 우리에게 알려진 인사는 문익환 목사, 징일권씨(육군참모총장 역임), 이상철 목사(캐나다연합교회 총회장 역임), 정대희 목사(밴쿠버 거주, 전 건국대학교 총장) 등이다. 용정중학 교정에는 20년대와 30년대 용정 반일투쟁의 선봉이던 대성중학의 교사(校舍)가 역사보존 건물로 남아있다. 1921년 건립된 이 건물은 오랜 세월의 풍상을 겪어 무너질 위기에 직면한 것을 용정시 정부, 한국사단법인 해외한민족연구소의 주선과 금성출판사 김낙준 회장의 지원으로 옛모습대로 94년에 복원했다. 이 건물의 2층에는 역사전시관이 들어섰다. 학교창립 65주년을 맞이해서 세운 역사박물관에는 옛 간도에서의 우리민족의 개척사, 문화교육의 발자취, 반일민족독립의 역사와 용정중학으로 통합된 6개 중학의 역사가 글과 사진으로 전시되어 있다. 대성중학 앞에는 용정이 낳은 저항시인 윤동주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윤동주는 우리민족이 낳은 저명한 저항시인이다. 1917년 12월31일 용정시 지산에서 출생한 윤동주는 은진중학과 평양숭실대학과 연희전문을 거쳐 일본동경 입교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그는 1943년 경도경찰에 체포되어 45년 후무오까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그처럼 갈망하던 해방의 날을 보지 못하고 29세의 젊은 나이로 용정 동산교회묘지에 고요히 잠들고 있다. |
용정시에 있는 이 샘은 용정시의 이름이 붙게 된 기원이 되는 곳으로 이 샘으로 말미암아 이곳에 마을이 들어서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 자리에 용정지명기원지정천((龍井地名起源之井泉, 룽징띠밍치왠즈징?)이라고 쓰인 비석이 세워져있다. 그곳에 작은 공원을 조성해 놓았는데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 한다. 용두레 우물은 현재의 용정시 정부 청사에서 북쪽으로 약 300미터 되는 지점에 있다. 이는 용정이라는 이름의 기원이 되는 뜻깊은 우물이다. 1886 년 봄 정준이라는 젊은이가 우연히 옛 돌각담 밑에 파묻힌 우물 하나를 발견하였다 .우물에서 나온 물이 깨끗하고 맛도 좋다 .
한 마을에 살던 충서방이 용두레를 만들 어 물긷기에 편하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자연히 이 마을을 < 용두레 촌 >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
그때 이곳에 정착한 장인석씨가 마침 학식이 좀 있는지라 박윤언과 상의하고 < 용두레 > 라는 < 용 > 자와 < 우물 > 이라는 < 정 > 자를 합쳐서 < 용정 > 이란 이름이 생겨나게 되었다 . 언제 부턴가는 우물을 파는데 우물에서 용이 하늘로 날아올라갔다는 신비한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하였다 . 1934 년 용정촌의 주민 이기섭의 발기로 우물옆에 2 미터 높이의 화강암을 세우고 거기에 < 龍井地名起源之井泉 > 이라고 글씨를 써넣었다.
용정에는 일송정 말고도 볼 것이 많다. 용정이라는 이름의 발상지인 <용두레 우물>, 해란강을 건너는 용문교, 민족교육의 발상지 용정중학, 저항시인 윤동주 시비, 윤동주 묘소 등이 있다.
용두레 우물은 <용정지명 기원지>라고 하는 불리는 공원에 있다. 용정시 용정가와 육도구가 교차하는 길목에 이 공원이 있다. 19세기 말엽에 조선 이민인 장인석, 박인언 등이 옛 우물을 하나 발견했다. 물맛이 좋고 시원하기에 물긷기 편리하도록 그들은 우물에다가 타래박을 만들어 놓았다. 후에 육두구의 사람들은 자기네 마을을 용정촌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34년에 용정지명의 기원을 기념하기 위해 주민들이 우물을 수선하고 약 2미터 높이의 <용정지명기원지정천>이란 아홉 글자를 새긴 비석을 우물가에 세웠다. 1986년 용정현 인민정부는 <문화대혁명>에 의해 파손된 우물을 다시 파고 <용정지명기원지 우물>이란 비석을 새로 세웠다.
이 공원은 1996년 9월21일 용정시와 거제시가 우호교류협정을 체결하고 그 뜻을 후세에 기리기 위해 거제시 대우중공업 조선해양부문 임직원 일동이 조성했다. 이 공원에는 노인들을 위한 정자도 세워져 있다. 입장료 5위안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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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정 중학교 (구:대성중학교) 1921년에 천도교 계통의 동흥중학교와 유교 계통의 대성중학교가 설립되었다. 당시 이 두 학교는 300여 명의 학생이 재학하였으며 교사와 학생들은 항일 민족 해방 교육을 받았다. 일제는 이 두 학교를 탄압하기 시작하였고 1927년 10월 용정 주재 일본 총영사관은 영사 경찰을 동원하여 이 두 학교의 교사들을 체포하자, 학생들은 영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런 탄압에도 불구하고 이들 학교에서는 「애국가」「권학가」「학도가」등 가곡과 조선 역사·조선 지리를 열심히 가르쳤다. 일제는 자기들이 펴낸 일본어 등 교과목을 강요하였으나 학교에서는 이를 가르치는 척 하면서 비밀리에 <최신동국사략 最新東國史略> <월남망국사> <이순신전> <안중근전> <국어국본> 등의 교과를 가르쳤다. 일제는 마침내 1934년 초 두 학교를 합쳐 민성중학교를 만들었으나 강한 반대에 부딪쳐 1년만에 종전대로 분리시켰다. 그 후 일제는 다른 방법을 동원하여 대성중학교 교사 현관의 지붕 모양이 고려 시대 건축물의 특색을 띠었다고 하여 방학중에 허물어 버리고, 일본인에 의한 일본어 교사를 채용하여 감시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일본어 시간에 학생들이 벙어리 시늉을 하는 등으로 저항하자 학교의 동쪽 교문밖에 작은 벽돌집을 짓고 일본 총영사관이 분주소(分駐所)를 앉혔다. 그러자 교원과 학생들은 교문을 남쪽으로 옮겼다. 1939년 일제는 위만주국의 교육령에 의거하여 두 학교를 '용정국민고등학교'로 개편 병합하고 교장에는 형식적으로 조선인을 앉히고, 일체의 권한을 행사하는 부교장에는 일본인을 앉혔으며 일본인 교사들을 배치했다. 합병된 후 학생들은 "밀정을 잡아내자'는 구호를 외치며 7일간 동맹 휴학을 했으며, 학생들은 조선인 밀정교사를 잡아 밀정을 않겠다는 서약을 받기도 했다. 1941년에 일제가 다시 이 학교를 '용정 제2국민고등학교'로 개편하자 학생들은 물리적으로 대결하려 했고 교사들은 사표를 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오늘날 용정중학교가 대성중학교 자리에서 그 전통을 이어 가고 있으며, 무수한 인재를 배출해 냈다.
서전서숙(瑞甸書塾)
서진서숙은 연변최초의 신식 사립학교요 또한 연변 모든 조선족사립학교의 어머니이다. 1906년 8월에 반일 애국지사 이 상설이 용정에 와서 이동녕, 여준, 왕창동, 이상익 등과 함께 이 신식학교를 세우고 신학문과 반일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듬해 일제가 용정에 설치한 <조선통감부 간도파출소>에서 서전서숙에 갖은 간섭을 하므로 부득이 문을 닫게 되었다. 이 유서깊은 서전서숙의 옛터는 지금의 용정실험소학교 구내에 있다. 큰 고목이 몇그루 서있는 곳에 <서전서숙유지(瑞甸書塾遺址)>라고 힘있게 씌여져 있다.
■ 1910년대 전후 연길·용정 일대 민족 사립 학교
① 동신 학교 - 1905년 용정의 지신향에서 설립되었으며, 연변 지역에서 한민족이 설립한 최초의 사립 학교로서 초등 수준이었다. 이 지역에는 일찍부터 함경 북도 지방의 농민들이 이주해서 개간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천주교 신자가 많이 살고 있어, 천주교 마을로 칭하여지기도 하였다. 한국 이주민들은 중국인 지주로부터 공동으로 돈을 마련하여 땅을 사들였으며, 후손들의 교육을 위해 마을 사람들의 힘으로 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1917년 이후에야 어느 정도 학교의 모습이 갖추어졌으며, 교과서는 중국의 교과서를 사용하였지만, 교사들은 모두 한국에서 망명해 온 반일 애국 지사들이었다. 1940년 다라즈이 공립 학교에 편입되었다.
② 서전서숙 - 연변의 한민족이 설립한 사립 학교 가운데서 가장 그 이름을 떨진 학교이다. 1906년 8월에 이상설이 한민족이 많이 살고 있는 용정에 망명해 와서 세운 학교이다. 그는 자기의 개인 재산으로 학교 건물로 쓸 민가를 사서 이를 개수하여 학교를 열었다. 서전서숙이라는 학교 이름은 그 근처의 서전대야라는 평야 이름을 딴 것이다. 중등반과 초등반으로 나누어 실시한 교육은 반일 애국 정신을 기르는 데 중점을 두었다. 1907년 6월 이상설이 고종 황제의 밀명을 받고 헤이그의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로 떠나게 되면서 학교의 경비 조달이 어려워 학교 운영이 힘들게 되었다. 그 때 설치된 통감부 간도 파출소의 일본인이 반일 애국 교육을 실시하는 서전서숙을 박해하자 학교 설립 8개월 만에 폐교되지 않을 수 없었다. 1년이 채 안 된 기간이지만 서전서숙에서 공부한 학생들은 그 후 간도 각지에서 교육자와 항일 독립 운동가로 활약하였다.
③ 창동 학교 - 현재의 연길시의 서북쪽 10여 리 떨어진 화룡동에서 1908년 설립된 민족 사립 학교이다. 이 지역은 연변이 개처되는 초기부터 한민족이 이주하여 마을을 이룩한 곳으로 이미 1880년 대에 100여 호 가까이 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에 반대하는 애국 지사들이 한국으로부터 이 곳으로 많이 망명해 오면서 구국을 위한 교육을 추진해야 된다는 주장이 일어나, 마을 유지들을 중심으로 공동을 돈을 마련하여 학교를 설립하였다. 창동 학교는 연길에서는 최초로 설립된 한민족 학교이다. 학교 교육의 취지는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서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었으며, 이 일대의 한민족 독립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1920년대에 들어와 만주 각지에서 무장 항일 독립 운동이 전개되면서 창동 학교는 무장 투쟁의 인재 양성을 위한 군사 훈련과를 특설하기도 하였다. 1935년 일제의 군대가 들어와 학교를 점령하고 군대를 주둔시키려고 하자 이를 반대한 주민들이 스스로 학교를 불태워 버리고 자진 폐교시켰다. 그 후 얼마 지난 후 주민들은 창동 학교의 교사들과 졸업생들에 대한 추모와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는 '사은 기념비'를 세웠는데, 현재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전해 오고 있다.
④ 명동 학교 - 1908년 4월 화룡현 다라즈 명동촌(현재의 용정시 지신향)에 김학연이 명동서숙을 설립하였는데, 1909년 명동 학교로 개칭하였으며, 처음에 초등부로 출발하였으나, 1910년에는 3년제의 중등부로 증설하였다. 명동촌은 연길에서 남쪽으로 15km 떨어진 육도하 북쪽에 있는 여러 마을 가운데 하나이며, 이 일대를 보통 명동 지구라고 불렀다. 19세기 말부터 이 일대에 함경북도에서 두만강을 건너온 수많은 농민들이 정착하기 시작하였는데, 1901년 종성에서 온 김약연이 자기 호를 따 규암재라는 서당을 차려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1907년 용정에 있던 서전서숙이 일제의 박해로 해산당한 후 서전서숙 학생으로 김약연의 사촌 동생인 김학연이 명동촌으로 와서 규암재를 개편하여 근대적 교육을 실시하기로 하고 명동 학교를 창립하게 된 것이다. 명동 학교는 강력한 항일 교육을 실시하던 서전서숙은 문을 닫았지만, 그 교육 정신과 전통을 계승하여 민족 독립 운동의 인재를 양성하였다. 1909년에 한국에서 기독교 신자가 교사로 초빙하여 오면서 김약연도 기독교를 신앙하게 되었으며, 교과목에 성경과를 설치하였다. 학교의 교과목은 소학부에 국어, 수신, 한문, 산수, 주산, 이과, 작문, 습자, 창가, 체조, 지리, 동국 역사 등이었는데, 이는 한국의 근대 학교의 교과목과 거의 일치한 것이다. 당시 명동촌은 항일 독립 운동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으며, 많은 애국 지사들이 학교의 교사로 활약하였다. 1911년 초에는 이동휘의 주장에 힘입어 여학생부를 증설하기도 하였다. 1919년 3.1 운동의 소식이 전해지자 용정 3.13 만세 시위 운동에 명동 학교가 그 중심이 되었으며, 그 이후 많은 독립 운동의 인재를 양성해 내었다.
[용정] 80년 역사 룽징 정동중학 문닫아
일제 수난기 만주지역에서 민족교육의 요람으로 큰 자취를 남겼던 중국 지린(吉林)성 룽징(龍井)의 정동중학교가 지난 8월 문을 닫은 것으로 뒤늦게 알려졌다.
1일 인터넷 홈페이지 '연변창구'에 따르면 정동중학교는 1918년 10월 민족지사들과 우국인사들에 의해 `정동서숙'이라는 이름으로 개교한 이후 일제의 갖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민족혼의 산실, 독립투사 양성기지로서 성가를 떨치며 꿋꿋이 명맥을 이어왔다.
그러나 최근 입학생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끝내 문을 닫고 말았다. 이로써 정동중학은 80년의 역사와 전통, 숱한 파란과 상흔을 뒤로 한 채 역사의 갈피에 묻히게 됐다. 정동중학교는 개교 2년만인 1920년 10월 일제가 한밤에 불을 질러 학교 건물이 완전 소실되기도 했다. 그러나 민족지사들과 지역 동포들이 허리띠를 졸라매며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학교를 재건했다. 이후 광개중학, 연길현 2중, 연길현 9중 등으로 교명이 바뀌기도 했으나 한인동포들과 지역 주민들의 강력한 요구로 지난 84년 정동중학이라는 옛 이름을 되찾았다.
지난 74년에는 옌볜(延邊)주정부와 지역 농민들이 건평 1천224㎡의 새 교사를 짓기도 했으며, 88년 10월 개교 70주년에 즈음해서는 1백여명의 국내외 졸업생들이 모교를 찾아 회포를 나누기도 했다.
'연변창구'는 "텅 빈 교사는 쓸쓸한 쑥밭 속에 파묻혔고, 정동중학이란 간판은 철문을 걸어맨 쇠사슬에 얽매어 있었다"고 폐교의 뒷모습을 전했다. <연합> 1999/12/1 18:02:29
화룡시(和龍, HeLong) 화룡시는 연변의 남부,두만강의 상류에 있으며 두만강을 사이두고 조선의 함경북도와 양강도와 마주하고 있다. 시 산하에 4개 사업소, 10개 진, 5개 향 159개 촌이 있고 총면적은 5,044㎢이며 인구는 24만명인데 조선족이 60%를 차지한다. 화룡시는 처음 용정시에 속하였다가 독립되였으며 화룡이란 《두 산이 한 골짜기를 끼고 있다》는 뜻의 만주어라고 한다.
화룡시는 백두산의 동쪽기슭이라 높은 산과 험한 봉우리가 있어 임업자원이 풍부하고 석탄, 화강석, 대리석등 광물자원도 풍부하며 농업도 대단히 발달하여 잎담배, 아마, 사과배등이 유명하며 특히 평강벌의 쌀은 우수하기로 널리 알려져있고 또 숭선과 로과 두 곳의 통상구가 있어 북한과의 무역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한국인에게는 북한을 가장 가까이 볼수 있어 인기를 끌며 또 정효공주의 묘와 고구려때 쌓았다는 성자산산성과 발해때 쌓은, 발해 시대 한 때 수도 西古城이 있고 그밖에 원시주민부락터도 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1920년 10월 21-23일 靑山里싸움터도 여기에 있어 우리민족이 많이 찾을 곳이다. 특히 숭선은 그 산천이 너무 아름다와 꼭 한번 찾을만한 곳이다. 그리고 두만강발원지와 선경대, 전초 조어대(▩魚坮)도 한번쯤 가볼만한 곳이다. 화룡 龍水鄕 龍海村 서쪽 산에는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인 발해국 3대왕인 大欽茂의 네째딸 貞孝公主의 묘가 자리잡고 있어 정부의 보호구역으로, 보존되고 있다.
왕청현(王淸, WangQing) 연변의 북부에 자리하고 있는 왕청현은 현 산하에 8개 진,10개 향,226개 촌이 있으며 총면적은 8,994㎢이다. 인구는 28만명 인데 조선족은 34% 정도된다. 옛날에 왕청현은 변강의 요새라서 군대를 주둔시켰으므로 《보루》라고 하여 만주어로 《왕친》이라고 불렀다. 이것이 변하여 왕청이 되었다고 한다. 토지가 비옥하고 가야하, 수분하가 흘러 농업이 발달하고 왕청일대는 산지로 되어 있어 산림면적이 755,609 핵타르에 이른다. 풍부한 산림자원은 물론 이곳에서 야생하는 각종 희귀 한약재와 동물들로 천연동식물원이란 미명도 가지고 있다. 산간지에 있어 야생식물과 동물자원, 광산물자원이 풍부하다. 이곳에는 금, 연, 동 등을 비릇하여 12가지의 광물이 채굴되고 있다. 산림목재, 건축자재, 야금, 식품 등 공업이 주를 이루고 있다.
안도현(安圖, AnTu) 안도현은 연변의 서남부에 위치해있다.현 산하에 6개진,7개 향, 222개 촌이 있으며 현의 총면적은 7438평방키로미터이고 인구는 22만명정도 되는데 조선족은 25%쯤 차지한다. 《안도》란 도문변방을 평안히 한다는 뜻이라고 하며 안도현의 소재지인 명월진은 《밝은달》이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안도현은 자원이 풍부하여 커다란 보물창고라 할수있다.
백두산맥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길게 뻗어있고 삼림자원이 풍부하므로 현내에 백하임업국,안도임업국,안도삼림경영국이 설치되여있다. 또한 야생동물이 많고 식용야채도 많으며 광산물도 풍부하다.물이 많아 수력발전소도 갖추어져있어 공업도 상당히 발달되어있다. 특히 안도현에는 몇백리 뻗은 장백산맥으로 하여 경치가 빼여나서 가는 곳마다 유람지가 펼쳐지고 있는데 무엇보다 백두산이 있어 관광객이 많이 찾고있다. 그러나 이 백두산관광객을 현지에서 모시지 못하고 교통이나 숙박시설 등으로 하여 연길로 대부분 빼았기고있어 안도현으로서는 매우 아쉬울것이다.
훈춘시(HunChun) 훈춘시는 연변의 동부에 자리잡고 동으로는 우수리강을 경계로 러시아의 도시 뽀드고르나야와 마주하고 남으로는 두만강을 사이하여 북한의 두만강시와 마주하고 있다.시 산하에 4개 사업소,3개 진,8개 향,126개 촌이 있고 총면적은 5119평방키로미터이며 인구는 20만명 가까운데 조선족은 45%쯤 된다. <훈춘>이란 말은 훈춘하에서 따왔는데 훈춘이란<꼬리>라는 만주말이라고 하며 전의 되어 성읍,변경,국경지역이란 뜻을 가진다고 한다. 중국과 러시아,북한 삼국의 접경지대에 위치한 훈춘은 또한 동해에 닿아있어 이미 국가급변경개발도시로 되어있다.장령자의 통상구는 러시아와 무역하는 중요한 통로가 되어 있고 북한과 왕래하는 통상구 두 개가 있어 무역도시로서 구실을 하고있다.
훈춘의 자연자원은 매우 풍부하여 길림성에서 제일 큰 탄정니 있으며 금도 곳곳에서 많이 나고 화력발전소가 두곳이나 있는 등 공업도시로 발전하고있다. 최근에는 UN에서 이 삼각지대일대를 특구로 개발한다고 떠들썩하여 한 때 많은 공장들이 들어섰으나 아직 별 성과가 없어 실망이 크다고는 하나 앞으로가 크게 기대된다. 또한 훈춘에는 그 독특한 위치로 하여 관광객을 부르고있다. 동해와 닿은 곳인 방천에는 3국을 굽어볼수 있는 망루가 있고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그밖에 시의 하남다리 북쪽편에 자그마한 공원이 있는데 거기에 유명한<<룡호석정자>>가 있다. 그리고 훈춘의 서북부에 팔련성이 있는데 이는 발해3대왕 대흠무가 바다로 세력을 넓히려 이곳으로 도읍을 옮겨 쌓았다고 하며 그의 사후에는 다시 버려졌다.성은 도읍지의 성답게 아주 튼튼히 쌓았다고 한다. |
인구 |
조선족 인구는 218만명(98년 기준)으로 전년대비 0.46%감소함. 연길시인구 38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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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인종 |
한족이 58.2%차지, 조선족(38.94%), 만족(2.49%), 몽고족(0.97%). 1992년 통계에 의하면 이 가운데 조선족이 59퍼센트로 가장 많다고 하였으나 지금은 40퍼센트도 채 안될것이라고한다. 다음이 한족이요 그밖에 만족, 몽골족, 회족 등도 조금씩 있어 모두 11개 민족이 살고있다고 한다. 자치주에는 주로 한족, 조선족, 만족, 회족과 23개소수민족이 살고있다. 1997년말 전주 총인구는 218.4만으로써 그중 한족 58.0%, 조선족 39.2%, 만족 2.4%, 회족 0.3%, 기타소수민족이 0.1%를 차지하고 있다. 전주인구밀도는 매평방키로미터에 51명이다. |
자원 및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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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림자원과 천연약재가 풍부함. 러시아와 북한과의 변경무역이 성행. 주요농산물로는 벼,옥수수,콩,과일이 있음. 특산물로는 담배,영지,황기등이있고 야생동물로는 달비,백두산호랑이, 표범,꽃사슴 동물약재로 녹용,웅담이 있다. 금속광물로는 금,알루미늄,아연,은,구리망간,수은,몰리브덴이 있고 비금속광물로는 석탄,석유,석회암이 있다. 경공업위주의 공업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의약,담배,술,방직,건축자재등.
연변의 삼림면적은 347.2만헥타르이고 삼림피복률은 78.2%이며 림목축적량은 3.32억립방메터이고 120여가지의 목본식물이 자라 고있다.주로 홍송,백송,모래불송,락엽송,가문비나무,달피나무,봇 나무 등이다. 연변은 광물자원이 풍부하다.금속광물자원으로는 연,아연,동, 알루미늄,망간,몰리브덴이 위주이다.비금속광물로는 석탄,석유( 저장량이 1억톤),모래암,용수정,운모,고령토,세멘정초,안산효암 ,규소토 및 석규석 등이다.전 주적으로 이미 탐사해낸 석탄저장 량은 12억톤에 달한다.현재 석탄의 년생산량은 414만톤이고 년 발전량은 23.67억키로와트시로서 전력이 충족하다.140만키로와트 의 발전능력을 구비한 훈춘발전소는 이미 20만키로와트의 발전능 력을 구비하였고 60만키로와트의 2기공정은 국가계획에 들었다. 연변에는 하천이 많다.전 주에는 크고 작은 하천이 487줄기로 서 물에네르기 매장량은 140만키로와트에 달한다.목전 물에네르 기 실제 리용량은 4.7만키로와트이고 건설중에 있는 장비량은 8. 5만키로와트이며 전 주의 수력자원잠재력은 아직도 상당히 크다. 연변의 지방특산물은 비교적 풍부한바 야생동물은 500야종,야 생경제식물은 1500여종이다.인삼,록용,담비는 <<동북의 3가지 5 보배>>로 불리우고있다.연변은 중국의 저명한 약재 보물고의 하 나이다.중외인의 주목을 끄는 세계원시상태의 완정한 자연종합체 인 장백산과 두만강하류의 <<한눈에 3국이 안겨>오는 변경유람지 역은 국내외 유람객의 유람명승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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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
연변의 기후는 중온대 습윤성계절풍기후에 속하여 봄이면 건조하고 바람이 많으며 6월부터 8월까지 비가 많고 가을이면 시원하고 겨울이면 충위가 심하다. 년평균기온는 섭씨 2-6도이고 제일 추운 기온은 섭씨 령하23-34도이며 제일 더운 기온은 섭 씨 34-38도이다.년일조시수가 2150-2480시간이고 년강우량이 40 0-650mm이다. 강우량이 6,7,8월 3개월에 집중되여 전년강우량의 60%를 차지한다. 년평균바람속도는 2-4m/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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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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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은 독특한 자연인문경관을 가지고있다. 웅위롭고 풍경이 독특하 고 경치가 아름다운 장백산은 이미 중외의 이름난 유람명승지로 되였다. 주요한 유람구는 백운봉, 천지, 폭포, 온천군, 미인송과 <<닭이 울면 3국이 듣고 개가 짖으면 3개 변경이 듣는>>변경풍모이다. 목전 연변에 이미 개발된 8개 유람구로는 장백산경치관광유람구, 연길민속유람구, 훈춘변경경치유람구, 룡정력사유적유람구, 두만강변경유람 구, 화룡룡왕산유람구, 돈화륙정산유람구 등이다. 이미 개통된 12개 유람 업종은 장백산풍경유람구, 장백산동기설산유람구, 원지만족발원지유람, 연변조선족자치주민속유람, 중조변경유람, 중국-로씨야변경유람, 두만강 수상유람, 발해고대유적유람, 룡정력사유적유람, 화룡약물보건유람, 직승 비행기항공유람, 사냥유람 등이다. 주요유람지는 장백산풍경, 장백산천지 , 장백산 폭포, 거룡천(온천), 은환호(소천지), 곡지림해(지하살림), 천녀 욕궁지(원지), 방천풍경, 화룡선경대, 돈화정각사, 연명호, 룡정민속 박물관 , 안도홍기촌, 도문교두국문 등이 포함된다.
백두산, 용정, 도문, 청산리, 봉오동전적지는 연길에서 출발한다. 연변조선족지치주의 소재지로써 면적은 1,350㎢이며, 인구는 38만명이다. 19세기초에 산동성, 화북성, 조선으로부터의 이주민이 들어와 세운 도시이다. 연길시는 문화도시이며 상업도시이다. 연변가무단,조선족화극단,연길시조선족예술단등 70여개 예술단체가 있으며, 상업지구로는 서시장과 시장주변의 백화상점이 있다.
백두산 · 천지 우리 민족의 발원지 백두산은 16세기부터 세차례의 폭발로 용암분출이 있었다. 첫번째는 1597년 8월이고 두 번째는 1688년 4월이며 세 번째는 1702년 4월이다. 백두산 정상에 자리잡은 천지는 화산폭발로 이루어진 호수이다. 천지의 남북길이는 4.85㎞이고, 동서길이는 3.35㎞이다. 천지 수면은 해발 2,196m이고 물깊이는 204m이다. 천지는 현재 중국과 북한의 국경으로서 압록강, 두만강, 송화강의 발원지이다.
천지로 가는 길은 天文峰 (천문봉) 가는 길과는 별도로 二道白河公司 (이도백하공사)에서 二道白河(이도백하)가 흐르는 계곡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한시간 정도 달리면 백두산온촌에 도착하는데, 이곳에서 하차하여 장백폭포를 보면서 산허리로 난 좁은 길을 따라 계속 올라가야 한다. 지척으로 폭포의 물보라를 보며 천지입구로 접어들면 신비스런 천지가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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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비 대성중학교(현 용정초중)교내에 윤동주시비가 세워졌다. 저항시인 윤동주는 1932년 4월 16세에 송몽규, 문익환등과 함께 은진중학(현용정초중)에 입학하여 급우들과 함께 교내 문예지를 꾸렸다. 학교웅변대회에서 윤동주는 「땀 한방울」이라는 자작 원고로 1등상을 받았다.
일송정, 용문교, 혜란강, 용두레 모두 「선구자」에 나타나는 지명인데 용정시 소재지안에 있다. 용정시 입구에 들어서면 혜란강과 그 위에 놓인 용문교를 지나게된다. 근처에 오늘날 용정 지명의 유래가되는 용두레가있다. 일송정은 용정시에서 승용차로 10분거리에 있 다.
청산리·봉오동 전적지 청산리 전적지는 화룔현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30㎞ 떨어진 곳에 있다. 1920년 10월 21일 독립군 800여명이 홍범도, 김좌진 장군의 지휘하에 일본 침략군 3,000명을 매복 습격하여 그 중 2,000명의 일본군을 사살했다. 대패한 일본군은 보복으로 청산리 직소라는곳부터 3㎞에 이르는 지역민을 모조리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봉오동 전적지는 도문시 봉오동저수지 동북쪽 산골안에 있다. 1920년 6월 27일 독립군 북로 제1군의 홍범도 장군의 지휘하에 400여명의 독립군을 이끌고 토벌나온 일본수비부대 300여명을 매복습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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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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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길
모두 연길에서 출발한다 서울에서 연길가는 길은 다양하다. 비행기편으로는 서울-북경-연길, 서울-장춘-연길 , 서울-심양-연길 배와 기차이용시 인천 -단동-심양-연길, 인천-대련-심양-연길 연길에서 백두산까지는 버스와 승용차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 먼저 버스로 이도백하까지 가야하는데 4시간정도 걸린다. 이도백화에서 장백폭포까지는 택시를 이용해야하는데 2시간정도 소요되며 장백폭포에서 정상 바로아래까지는 지프를 이용하면 40분정도 소요된다. 여기서부터 10분정도 걸으면 백두산 천지에 도착하게 된다. 연길에서 용정까지는 버스로 50분정도 소요된다. 용정 시내에서 윤동주 시비, 용두레,용문교,혜란강을 모두 볼수있고 시 근교에있는 일송정을 가면된다. 연길에서 도문까지는 버스로 1시산 30분 소요되는데 도문세관에 가면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 남양시를 볼 수 있다. 연길,백두산,용정,도문 관광은 2박3일면 가능하다. 가이드 비용은 1일 30달러이다.
백두산 여행 : 동춘페리
기차시간표
구분 |
열차번호 |
출발 |
도착 |
요금 |
일반실 |
6인침대 |
특석침대 |
심양->연길 |
k677 |
17:00 |
07:12 |
74원 |
149원 |
240원 |
연길->심양 |
k678 |
17:02 |
06:46 |
74원 |
149원 |
240원 |
대련->연길 |
4223 |
11:08 |
09:19 |
74원 |
160원 |
250원 |
연길->대련 |
4224 |
18:05 |
15:34 |
74원 |
160원 |
250원 |
북경->연길 |
k215 |
15:03 |
19:57 |
98원 |
210원 |
340원 |
연길->북경 |
k216 |
11:25 |
12:16 |
98원 |
210원 |
340원 |
장춘->연길 |
k675 |
21:00 |
06:31 |
--- |
--- |
146원,196원,225원 |
연길->장춘 |
k655 |
10:05 |
19:38 |
39원 |
80원 |
--- |
연길->장춘 |
k676 |
21:12 |
06:30 |
--- |
--- |
146원,196원,225원 |
연길->장춘 |
k656 |
08:37 |
18:35 |
39원 |
80원 |
--- |
| |
항공시간표
지역 |
구간 |
편명 |
출발 |
도착 |
운행요일 |
연길 |
서울->연길 |
북방항공 |
12:10 |
2:10 |
월, 금 |
서울->연길 |
아시아나 |
9:50 |
11:20 |
목, 일 |
연길->서울 |
북방항공 |
7:50 |
9:50 |
월, 금 |
연길->서울 |
아시아나 |
12:55 |
2:55 |
목, 일 |
장춘 |
서울->장춘 |
북방항공(CJ688) |
12:20 |
13:00 |
화,목,토,일 |
서울->장춘 |
아시아나(OZ337) |
10:00 |
12:10 |
월,수,목,금 |
장춘->서울 |
북방항공(CJ687) |
08:10 |
10:50 |
화,목,토,일 |
장춘->서울 |
아시아나(OZ338) |
12:30 |
15:40 |
월,수,목,금 |
심양 |
서울->심양 |
북방항공(CJ682) |
12:55 |
13:20 |
월,화,목,금,토 |
서울->심양 |
대한항공(KE859) |
09:50 |
10:40 |
화,수,목,금,토 |
심양->서울 |
북방항공(CJ681) |
09:30 |
12:15 |
월,화,목,금,토 |
심양->서울 |
대한항공(KE860) |
12:00 |
14:55 |
화,수,목,금,토 |
대련 |
서울->대련 |
북방항공(CJ686) |
12:25 |
12:30 |
매일 |
대련->서울 |
북방항공(CJ685) |
08:45 |
10:55 |
토요일제외 |
09:00 |
11:10 |
토 |
북경 |
서울->북경 |
대한항공(KE851) |
09:55 |
11:05 |
매 일 |
서울->북경 |
아시아나(OZ331) |
10:05 |
11:15 |
서울->북경 |
중국국제항공(CA124) |
10:05 |
11:55 |
북경->서울 |
대한항공(KE852) |
13:30 |
16:40 |
매 일 |
북경->서울 |
아시아나(OZ332) |
12:20 |
13:20 |
북경->서울 |
중국국제항공(CA123) |
09:30 |
12:20 |
하얼빈 |
서울->하얼빈 |
아시아나 |
10:00 |
11:30 |
화,목,일 |
서울->하얼빈 |
북방항공 |
13:20 |
14:30 |
월,수,금 |
하얼빈->서울 |
아시아나 |
13:00 |
16:20 |
화,목,일 |
하얼빈->서울 |
북방항공 |
09:00 |
12:20 |
월,수,금 |
장춘 |
부산->장춘 |
북방항공 |
12:35 |
13:55 |
월,금 |
장춘->부산 |
북방항공 |
08:25 |
11:35 |
월,금 |
국내선 항공시간표
지역 |
구간 |
편명 |
출발 |
도착 |
운행요일 |
연길 |
장춘->연길 |
북방항공 |
16:00 |
16:40 |
매 일 |
심양->연길 |
북방항공 |
6:20 |
7:20 |
대련->연길 |
북방항공 |
18:05 |
20:05 |
북경->연길 |
중국국제항공 |
4:40 11:40 16:50 18:10 |
6:35 13:40 18:30 20:05 |
연길 |
연길 ->장춘 |
북방항공 |
14:20 |
15:00 |
연길->심양 |
북방항공 |
20:00 |
21:20 |
연길->대련 |
북방항공 |
20:00 |
22:30 |
연길->북경 |
중국국제항공 |
17:20 |
19:20 | |
쇼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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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
연변고려호텔
연길시 애단로에 위치. 900여평으로 된 3성급호텔.
총63실의 객실과 타자루28칸. 삼층은 노래방과 식당으로 200여명되는 사람 수용. 13층은 민족특색을 띤 한식음 식점인데 최고의 요리사가 정성스럽게 만들어 드리는 각종 맛나는 음식을 맛볼수 있다. 14층은 혼례식, 환갑등을 진행하는 대형연회장인데 동시에 300여명되는사람을 수용. 서쪽에 자리잡은 고려호텔의 출입구로 들어가보면 눈앞이 확 트이며 호화롭게 장식된 로비가 한눈에 들어온다.
개원호텔
연길류경호텔
연길류경호텔유한공사는 일본동영그룹에서 투자하여 1995년10월 25일 연변 조선족자치주소재지 연길시에 일떠세운 일본독자기업으로서 목전 전주 독자기업가운 데서 투자와 건축규모가 가장큰 외국인 지정관광호텔의 하나이다. 류경호텔은 연길시중심 국제무역청사북쪽 150메터에 위치하고있는데 백화청사,공원,연변병원 등으로 둘러싸여 관광려행,상품구입,휴식 및 사무를 보는데 편리를 주고있다.류경호텔은 건평이 3400평방메터로서 6층청사안에 35개의 방,61개의 침대를 마련하고 매 방마다 공기조절기 등 선진적인 시설들을 갖추고 손님들을 왕으로 모시고있다.호텔내에는 독특한 풍격에 아늑한 환경을 가진1,2층으로된 식당이있는데 조선과 일본에서 초빙해온 료리사들이 일본료리,조선료리,중국료리 및 서양료리들로 자기들 독특한 솜씨를 자랑하며 아름다운 평양아가씨들의 살뜰한 봉사는 손님들에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인상을 남겨줄것이다. 본공사에서는 손님을 위해 투자자문,대외무역 및 관광려행 등 업무도 취급하고있다. 총지배인:리현비 지점:연길시신흥거리124호 전화:0433-2561623 팩스:0433-2561563 우편:13000
연변체신호텔
ss연길시 번화가에 위치. 3성급 호텔로서 연변체신국제 여행사와 장백산 삼강호텔을 함께 운영하고 있다.
총면적이 13,000평으로 120실의 객실과 커피숍, 한식당, 중식당, 양식당이 있으며 부대시설로는 사우나, 볼링장, 회의실등을 갖추고 있다. 서쪽에 자리잡은 <<연변체신호텔>>의 출입구 로 들어가보면 프런트와 가지각색의 기념품을 진렬한 쇼핑이 보인다. 에스클레이터로 이층에 와보면 호화롭게 장식된 레스토랑이 한눈에 안겨온다. 이곳에서는 24시간동 안 고객들을 위하여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고 있다.
연길백운호텔
gg연길시 애단로에 위치. 총 면적이 4000평.
북쪽에 자리잡은 백운호텔의 출입구로 들어가보면 큰 세계지도를 바탕으로한 프런트가 보인다. 벽쪽에는 세계각국의 부동한 시간을 가리키는 시계를 걸어놓았는데 처음으로 중국에 온 외국손님들에게 많은 편리를 준다. 이밖에도 일층 에는 커피숍과 술집이 있다. 이층부터는 객실로 이루어졌는데 스위트룸, 이인용객실, 삼인용객실등 총 68실에 130개 침대를 갖고있다. 풍격이 완전히 다른 레스토랑에서 는 여러가지 환갑, 결혼잔치등 연회를 열수있다. <<연길백운호텔>>에는 또 노래방, 사우나, 휴식실등 오락장소가 있다.
<<고객제일, 복무제일>>은 <<연길백운호텔>>의 복무지침.
송기호텔
ads연길시 건공거에 자리잡은 만주땅의 유일한 백의호텔이다.
여류작가가 쌓아가는 호텔문화의 탑, 정갈한 민족정기를 한몸에 지니고 부르하통하가에 우뚝솟은 <<송기호텔>>은 향수로 끓어넘치는 돌솥밥이며 인정의 따사로움을 되찾아주는온돌침대, 세계를 지척에 두게하는 텔레비죤위성접수기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 호텔에는 70개의 스탠더드룸과 호화스위트가 있다. 이밖에도 중국요리점, 한국요리점, 회의실, 연회청, 노래방, 안마실등이 아름답고 산뜻하게 장식되여 있다. 일층 프런트에서는 외국돈을 중국인민페로 바꾸어주는 복무도 한다. 프런트옆에는 커피숍과 상품부가 있는데 상품부에는 귀국할때 가지고 갈수 있는 정교롭게 만들어진 많은 기념품들이 진렬되여 있다. 이것이 조선족 여작가 박향숙씨가경영하는 민족특색과 문화특점을 한 몸에 지닌 송기호텔이다.
백두산아래 천지의 물줄기따라 찾아오시면 그리운(?) <<고향집>>송기호텔이 반겨맞는다. |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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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조선족자치주는 역사가 유구하여 일찍 26000년전의 구석기시대에 연변땅에는 <<안도인>>들이 살았다. 기원 713년에 발해국이 나타났으며 당조에 속하였고 도읍지를 오동성(지금의 돈화시)에 두었다. "연변"이란 단어는 1920년을 전후하여 나타났는데 지리적위치가 3개나라의 교차점에 위치하고 있어 "沿邊"으로 이름지었으며 그후 연길변무공소관할에 소속되어 이름을 연변(延邊)으로 고쳐졌다. 일본제국주의가 동북을 침략한후 1934년 12월에 연변은 간도성으로 명명되었다.
1945년 8월 일본이 투항한후 중국공산당은 연변에 인민정권을 건립하고 간도성정부를 세웠으며 그해 11월에 연변행정감동전원공소로 바꿨다. 1948년 3월성립된 연변전원공소는 1952년 9월3일 민족자치구역의 자치를 실행하여 원래의 공소를 취소하여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성립되었다. 1955년 12월 연변조선족자치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한개시 다섯개 현이였다. 1958년 돈화현이 연변에 귀속되었으며 1965년에 도문시가 설립되였다. 1985년, 1987년, 1993년에 돈화 룡정, 훈춘, 화룡등이 시로 승급되었다. 지금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연길, 도문, 돈화, 훈춘, 룡정, 및 화룡시와 왕청, 안도 두개현으로 구분되었으며 수부를 연길시에 두고있다. | |
첫댓글 장미꽃향기님 연변소개에 감사드립니다.
최근 자료도 감사합니다.
처음 서막에서 보여준 의상이 의미하는 것이 무궁화처럼 보였는데 진달래을 표현했음을 늦게야 깨달았슴다.
도라지타령,옹혜야 등 우린 한 핏줄임을 절감합니다. 용이 등장하는 모습도 같고..................
윤동주님과 문익환 목사님 소개도 감사합니다.
다음에는 윤동주 기념비앞에서 찍은사진 영상으로 올려 드릴게요. 싸다시한번 감사 합니다.
열심히 감상 하시고 상대를 기분좋게 하시는 갈봄여름없이님의
고운 댓글에 에너지 충천하고 갑니다.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보아주셔 감사 합니다 우리의 고유명절 추거우세요.쎄쎄
석 연후휴식 가족과 함께
감사합니다^^
朴麗君님 모처럼 다녀 가심에 감사 합니다
연변 소개란에 9개 사업소, 2개의 진, 6개의 향, 66개의 촌이란 우리식으로 해석하면 뭔가요?
9개 사업소란 성하게 잘 되여가는 단위를 말하고,, , 2개의 진이란 자그마한 도시를 가르키고 농촌에서의 6개의 큰 공사를 말합니다.
6개의 향이란
장미꽃 향기님 연변 소개에 감사 드립니다.
권타관님의 귀걸음에 저의 기분도 영 좋슴다.싸
감사 합니다
감동영상입니다.
이국땅에서의 우리민족의 설움이 설움이 눈물겨워집니다
하지만 이렇게 굳건히 연변에 자리잡아 민족의 기상과 투지를 이어가고 있고
민족의 전통을 가꾸고 지키고 있는 우리 민족이 자랑스럽습니다.
그 혹독한 공산체제에서 얼마나 많은 고통과 설움이 많았을까요.
자랑스러운 우리 연변민족 우리나라에서 많은 관심과 아낌없는 지원을 하여야하겠습니다.
우리는 같은 민족 대한의 단군의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가슴벅차 오르는 민족심 우리는 뭉쳐야합니다.
북한이 하루빨리 정신차려서 통일을 이루고 더 나아가서
연변 우리땅 만주까지 통일을 이루어
우리민족이 함깨하는 날이 속히 와서 아리랑을 다 함께 불렀으면...
나우님의 정성어린 댓글과 함께 우리민족의 자랑을 다시한번
가슴깊이 느끼며 글올린 보람을 느껴 봅니다.
공감가시는 나우님의 금쪽같은 말씀에 다시한번 감사 드립니다.
기회가 되면 연변으로 민족의 정취를
찾아서 방문해보고 싶습니다
민족의 자부심으로 ~
나우님 연변에 오시게 되면 오시면 꼭 쪽지로 련락하여 주세요.한민족의 자부심으로 가슴이 뿌듯해 옵니다.싸
정성껏 대접해 드릴게요.
ㅎㅎ 향기님 약속 하셨어요..
꼭 한번 가보고 싶습니다
그어느 외국보다더 연변 우리민족을 찾아서요
아마도 퇴직전이나 후에 가보고 싶습니다
아니 꼭 가겠습니다.
향기님께서 연변구경도 시켜주신다고 하니
부담없이 여비만 후하게 챙겨서 가겠습니다.
기다려주실거죠..ㅎ
감사합니다 기억할께요...
정말 대단하군요...어떻게 저렇게 많은 인원이 모여 완벽한 그림을 만들고, 공연도 잘 할 수 있는건지...놀랍습니다.
(질문: 저 많은 거문고는 다 어디에서 가져온 건가요? 장구도 다 어디에서 가져온건지?)
상세한 연변 정보 방문시 많은 도움이 되겠습니다.장미꽃향기님 연변 조선족 자치주 홍보 대사 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