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박 승 휘
우리에게 사계절의 변화는 자연 질서가 보여주는 환희이다. 계절
의 변화가 없다면 생활의 리듬이 풀리고 우리의 감각 기능이 생기를
잃을 것이다. 계절은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고 새로운 생명의 의미
를 가르쳐 준다. 바야흐로 장마와 태풍이 물러가고 불볕 더위가 기승
을 부리면서 여름 휴가철 대이동이 시작되고 있다. 산으로 바다로 해
외로 흡사 홍수 같은 물결이다. 올 피서객을 삼천 삼 백 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하니 참으로 엄청나다. 8월초까지 항공기와 철도는
예약이 동났다니 가히 전쟁이라고 할 것이다. 더러는 덩달아 떠난다
는 인상이 짙기도 하다. 이열치열이라는 좋은 말이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뜨겁게 살지 않으면 가치가 없다면서 뜨겁게 살기를 원한다.
또 괜히 그걸 남에게 과시하려고도 한다. 그러나 마음써야 할 일이
있다. 피서 인파가 무질서와 직결되어서는 안되겠다는 사실이다. 자
칫 쪽빛 바다 물결 계곡으로 달려가려는 일념으로 옆을 살필 겨를이
없을까봐 걱정인 것이다. 바닷가에서 듬뿍 태양을 마시면서 숲 속의
정기를 가슴 깊이 마시려는 모처럼의 그 마음을 뉘라서 뭐라 하랴.
그렇지만 이 세상은 나 혼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남들이
즐거워하는 무엇인가에 관심을 가져주면 그만큼 그들도 내게 관심을
가져다가 줄뿐만 아니라 그로 인하여 더욱 즐거워질 수 있는 것이다.
순서를 무시하는 것이 질서의 파괴다 또 속도를 탐하는 것은 결코
자랑할 일이 못되는 것이다.
여름 한낮 아주 무더운 더위에 혼자서 서재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
었다. 옆구리에 선뜻한 느낌이 들어 눈을 떠보니 험상궂게 생긴 낯
모르는 손님이 시퍼런 칼을 내 옆구리에 밀착시키고 있었다. 순간 가
슴이 철렁할 줄 알았는데 나는 얼떨결에 “어떻게 오신 분이시죠" 라
고 졸린 음성으로 물었나 보다.
“이봐 난 강도야 이 칼이 안보여?”
그제 사 정신을 차린 나는 이런 경우도 있구나 싶어 속으로는 떨리
면서도 "잘 오셨습니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라면서 태연하게 정색
을 하고 낯선 사람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말을 걸었다. 불그
스레 술에 취한 얼굴에 막판 인생을 가는 인상이 역력하게 보였다.
“이봐 허튼 짓을 하면 심장 밑까지 쑤셔버려. 난 엊그제 큰집에서
나온 별을 단 놈이야 알아서 해.”
"여보시오. 여긴 당신과 나밖에 없으니 안심하고 우선 목부터 축입
시다"
나는 냉장고에서 냉수를 꺼내서 잔을 내밀었다.
“난 목사요. 이 집은 교회당에 붙은 집이고 내가 당신에게 드릴 수
있는 가장 값진 것이 있는데.”
“목사 그게 뭐야. 빨리 내놔 우물쭈물 말고.”
“목사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기도하여 주는 것이요. 내가 당
신을 위하여서 기도해 주고싶소."
“이 사람 기도하여 주고 싶다고. 기도는 지겨워. 큰집에서 설교도
많이 들었고 기도라는 것을 많이 받았지. 그 따위가 나 같은 사람에
게 무슨 소용이야 난 돈이 필요하단 말이요."
자 그럼 이 집에 있는 돈을 다 찾아봅시다. 얼마 안되겠지만 당신
고향에 내려갈 여비는 되겠지요."
그래서 여기저기 뒤져서 몇 만원을 내 놓았다.
"얼마 안되지만 보태어 쓰시오. 그리고 당신도 목사 집을 방문하였
으니 기도는 하고 가야하지 않겠소. 자, 기도를 합시다."
나는 강요하다시피 하여서 이 친구 앞에 다가앉아 진정으로 간절
하게 기도를 하기 시작하였다.
“주여, 주님께서 귀한 손님을 보내주심을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앞날의 책임을 져 주시기를 바랍니다."
생전에 그렇게 결사적으로 기도를 하여 본적이 몇 번이나 있었던
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여 본다.
나는 정말 이 형제의 영혼을 위하여 간곡한 기도를 드리기 시작하
였다. 땀이 얼굴에서 등줄기에서 비 오듯이 쏟아지는 것도 아랑곳없
이 성령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간절하게 기도를 하였다. 얼마나 지났
을까? 흑흑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리지를 않는가! 이 친구 입에서도
“주여, 주여”하는 것이었다. 기도를 마치고 보니 이 친구의 얼굴이
눈물로 빛나고 있는 것이다. 그 순간의 감격은 나의 목회 생활을 압
축한 보람 같은 것이었다.
“목사님, 나도 인간입니다. 바로 살아 보려고 별의별 고된 일을 다
하여 보았지만 안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늘어놓기 시작한 그의 이야기에서 나는 이 사회를 보았고,
이 사회 속에서 교회를 보았고, 또한 나 자신을 보았다. 이 어두운 사
회의 비리와 구조 악이 그 속에 당당히 서있는 수많은 교회들 그 교
회에서 목회를 한다는 뻔뻔스런 나 난 이 친구 앞에서 오히려 부끄
러움을 느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오늘 고향으로 내려가겠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일어서며 그 시퍼런 재크나이프를 내 책상 앞에 놓
으면서 하는 말이
“목사님, 이거 선물로 놓고 가겠습니다."
“이거 내가 무엇에 쓰라구?"
“그럼 꺾어버리겠습니다."
라고 하더니 칼날을 무릎에 대고 딱 부러뜨려 놓는 것이 아닌가.
"여보시오 점심 시간은 지났지만 나가서 점심이나 같이 먹읍시
다."
“아닙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말하는 억양으로 보아서 대단한 결단이 서 있는 것을 느꼈다.
나는 얼마 안 되는 돈을 그의 주머니에 넣어 주면서
"여비나 될는지. 자 그럼 소식은 없더라도 고향에 가시거든 꼭 교
회에 나가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을 도우실 것입니다. 믿음을 포기
하지 말고 살아가십시오."
“안녕히 계십시오. 미안합니다. 나 같은 놈이 생각나거든 기도나
한번 더하여 주십시오."
나는 그의 뒤를 따라 가까운 버스정류장까지 배웅하여 주었다. 다
정한 친구처럼, 그를 태운 버스가 떠날 때에 손을 흔들어 주었다. 차
창에 비친 그의 눈가에 이슬 같은 것이 보였다. 대낮의 불청객이 선
물로 주고 간 꺾어진 재크나이프. 나를 놀라게 하고 우울하게 하고,
나를 깨우쳐 주고 사랑을 느끼게 하였다. 사람 사는 곳에는 하나님
이 계신다. 문득 석양의 빛살이 온 누리를 감싸듯이 환하게 빛을 내
뿜는 황혼 때까지 명상에 잠기다가 어둔 밤 쉬되리니」라는 찬송가
를 불러본다. 찬송가 가락이 속에서 스며 나오는 나를 마주 보시는
그 분의 시선에 나는 이미 나의 언어를 잃고 고개를 떨군다.
"구주여 나와 함께 하소서!"
2001 11집
첫댓글 나는 그의 뒤를 따라 가까운 버스정류장까지 배웅하여 주었다. 다
정한 친구처럼, 그를 태운 버스가 떠날 때에 손을 흔들어 주었다. 차
창에 비친 그의 눈가에 이슬 같은 것이 보였다. 대낮의 불청객이 선
물로 주고 간 꺾어진 재크나이프. 나를 놀라게 하고 우울하게 하고,
나를 깨우쳐 주고 사랑을 느끼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