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3일 하느님의 슬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당신께 간절하게 청하는 이방인 여인을 대하시는 태도는 그동안 보여주셨던 모습과 사뭇 다르다. 냉정하고 거칠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 여인은 마귀 들려 고생하는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달라고 청했다. 그건 당신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냥 함께 가셔서 그를 만나주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마귀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도망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 여인의 청을 거절하셨다.
우리는 우리나라 운동선수들이 일본과 시합하면 가위바위보도 이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웃으면서도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할 한국 사람은 없을 거다. 유다인은 이방인, 하느님을 모르는 그들을 개라고 불렀다. 예수님은 유다인이셨다. 이스라엘의 역사와 아버지 하느님과 관계를 알지 못하는 그 여인에게 기적을 일으켜준들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 생각하셨을 거다. 하느님이 한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 그분이 나처럼 육체적이고 문화적인 한계를 지닌 한 사람이셨다는 사실이 아주 가깝게 다가온다. 예수님은 나 같은 한 사람이셨다.
그 여인은 그 모욕감을 이겨냈다. 어쩌면 거절당할 거라고 예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그 모욕을 이겼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그는 육체적 문화적 한계를 넘어갔다. 나는 일본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조상들이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잘못한 일을 인정하고 용서를 청하고 합당하게 배상해 주고, 후손에게 역사를 올바로 가르쳐주기를 바란다. 잘못된 걸 바로 잡아주기를 바란다. 그들은 그래야 한다. 그렇게 되고야 말 거다. 여기서는 안 되더라도 하느님 앞에서는 반드시 그렇게 된다. 그 이방인 여인의 믿음도 이와 같은 맥락이었을 거다.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참되고 위대한 신이라면 마귀 들려 고통받는 자기 딸을 구원해 줄 수 있다고 믿었다.
가톨릭은 보편적이라는 뜻이다. 나의 이 믿음은 인류 공통의 마음이다. 평화는 서로 사랑할 때 이루어진다. 힘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친절과 신뢰는 만국 공통 언어다. 이를 악용한 게 사기이다. 한 어린 초등학생이 선생에게 살해됐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상상하려는 순간부터 눈물 나고 온몸이 떨린다. 강력한 처벌을 원하는 그 아버지 마음을 백번 천번 이해한다. 나도 그 선생이 밉다. 그래도 있는 힘을 다해 그 미움을 슬픔으로 바꾼다. 하느님은 얼마나 슬퍼하실까? 왜 그랬을까? 그가 마귀가 들려 그랬다고 하고 싶다. 그것 말고는 이 끔찍한 사건을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러면 그도 피해자가 된다. 그도 불쌍하다. 그는 그 죗값을 어떻게 치르겠는가? 우리는 미움과 분노와 복수가 아니라 슬픔으로 악(惡)에게 저항한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 5,4).”
예수님, 슬퍼합니다. 이 눈물이 주님의 마음이라고 믿습니다. 친절과 호의가 이용당해 속상하더라도 선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접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하고, 그 사랑으로 모든 이를 잘 대해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의 이 슬픔이 주님께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모든 범죄 피해자를 위로해 주시고, 그 고통에서 벗어나게 도와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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