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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원 품꾼의 비유(2)
마 20:1-16
1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2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3 또 제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4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그들이 가고
5 제육시와 제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6 제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7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8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9 제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10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11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12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13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마 20:1-16 / [포도원 일꾼과 품삯] 하늘나라는 또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느 포도원 주인이 자기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얻으려고 아침 일찍이 나갔다. 2) 그는 일꾼들과 하루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고 그들을 포도원으로 보냈다. 3) 아홉 시쯤에 품꾼들이 대기하는 곳을 지나다가 보니 몇 사람이 일거리를 얻으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4) 그래서 주인은 그 사람들도 포도원으로 보내며 그날의 일이 끝나는 시간에 적당한 품삯을 주겠다고 하였다. 5) 정오와 오후 세 시쯤에도 주인은 나가서 이와 같이 하였다. 6) 그날 저녁 다섯 시쯤 다시 마을에 나갔다가 몇 사람이 더 서 있는 것을 본 주인은 7) `왜 자네들은 하루 종일 일하지 않는가?' 하고 물었다. `아무도 우리에게 일거리를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주인은 `그러면 내 포도원으로 가서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게' 하고 말하였다. 8) 저녁이 되자 주인은 관리인에게 사람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사람부터 품삯을 주라고 하였다. 9) 오후 다섯 시에 온 사람들이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10) 그러자 아침 일찍 온 사람들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이 받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받은 품삯 역시 한 데나리온씩이었다. 11) 그들이 투덜거렸다. 12)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이 사람들과 온종일 뙤약볕에서 일한 우리들에게 똑같은 품삯을 주신단 말입니까?' 13) 그러자 주인이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이보게, 나는 자네에게 잘못한 것이 없네. 자네는 하루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받기로 처음부터 정하지 않았는가? 14) 자네 품삯이나 가지고 가게. 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준 것은 내 마음에 달린 것일세. 15) 내 돈을 내 마음대로 주는데 무엇이 잘못인가? 네가 친절을 베푼 것이 자네 비위에 거슬린단 말인가?' 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될 것이다'
< 설 교 >
은혜
마 20:1-16 / 김태환 목사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지내온 삶을 회고하면서 세 가지를 후회한다고 합니다. 첫째는 베풀지 못하고 산 것에 대해 후회한다고 합니다. 가난하게 산 사람이든 부유하게 산 사람이든 때가 되면 "좀 더 주면서 살 수 있었는데… " 이렇게 긁어 모으고, 움켜 쥐어봐도 별 것 아니었는데, 왜 좀 더 나누어주지 못했고 베풀며 살지 못했을까? 참 어리석게 살았구나 이런 후회를 하게 된다고 합니다. 둘째는, 참지 못하고 산 것에 대해 후회한다고 합니다. “그때 내가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왜 쓸데 없는 말을 하고, 쓸데 없이 행동했던가?” 하면서 후회한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내가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까 좀 더 참을 수 있었습니다.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참았더라면 내 인생이 좀 달라졌을 텐데, 참지 못해서 일을 그르친 것이 후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좀 더 행복하게 살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빡빡하고 재미없게 살았는지, 왜 그렇게 짜증스럽고 힘겹고 어리석게 살았는지, 얼마든지 기쁘고 즐겁게 살 수 있었는데…..” 하면서 후회한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나 때문에 다른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했던 일들을 후회한다고 합니다.
충분히 공감이 가는 이야기입니다.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그런 후회를 하게 된다고 하니까 여기에 있는 우리들도 그런 후회를 하게 되겠네요. 정말 그렇다면, 우리는 마지막 한가지를 더 후회하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 좀 더 잘 믿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입니다. 더 기도할 수 있었고, 더 성경을 볼 수 있었고, 더 크리스천 답게 살 수 있었는데 하는 후회가 들 것 같습니다. 이런 후회가 들지 않도록 좀 더 진실하게, 좀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믿음생활을 돌보아야 하겠습니다.
이번 수련회에 모두 네 번 말씀을 듣는 시간이 있습니다. 마지막 토요일에는 폐회예배니까 간단하게 기도회 식으로 예배를 드리려고 합니다. 그러면 저에게 모두 세 번 말씀을 전할 기회가 있는데, 무슨 말씀을 전할까 하다가 세 가지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주제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은혜와 섬김입니다. 이 두 가지 주제는 모두 우리 신앙생활에서 소홀하게 할 수 없는 주제들입니다. 그리고 많이 들었던 주제입니다. 그렇지만, 그 정확한 뜻과 의미를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두 차례, 섬김의 삶에 대하여 한 차례, 같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말처럼 많이 사용하는 말이 없습니다. 웬만하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해서 안 되는 말이 없을 정도입니다. 한번은 교회 청년들과 함께 뉴욕에 가서 책도 사고, 쇼핑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자고 의기투합해서 갔습니다. 거의 17년 전쯤의 일이니까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아침 새벽 기도회 마치고 바로 출발했습니다. 뉴욕 맨하탄에 도착하니까 점심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큰 한식집에 들어갔습니다. 각자 음식을 시켜 먹었습니다. 그런데, 내 앞에 앉았던 여자 청년이 저를 보면서 “목사님, 이것 제가 다 못 먹으니까 좀 드세요” 하면서 싫다고 사양하는데도 굳이 해물찌개를 덜어 줬습니다. 보니까 해물을 많이 줬더라구요. 그런데 무슨 수염 같은 것이 그릇 밖으로 나와 있어서 전 그게 새우 수염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새우부터 먹으려고 수염을 집어 들었더니 새우가 아니라 귀뚜라미였습니다. 그래서 웨이터를 불러서 항의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웨이터가 “이게 왜 들어갔지?” 하면서 귀뚜라미를 가지고 가 버렸습니다. 난 매니저가 와서 사과를 할 줄 알았습니다. 근데, 시간이 가도 아무 얘기가 없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그 웨이터는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흥분했더니 청년들이 저 보고 참으랍니다. 그래서 더 이상 어쩌지 못하고 나오는데 입구에서 주인 같아 보이는 여자가 친군지를 붙들고 수다를 떨고 있습니다. “가게가 잘 되려면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지 그냥은 안 돼!” 아마 주인이 교회에 나가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친구에게 가게 잘 되는 비결을 자랑스럽게 떠들어대고 있었습니다. 전 그냥 나왔습니다. 청년들이 참으라는데 어쩌겠습니까? 지금 같았으면 참지 않았을텐데요. 밖으로 나오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무슨? 위생 관리나 잘 하지!”
제가 이런 말씀을 길게 드리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그저 축복의 수단 정도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가게도 잘 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공부도 잘 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좋은 직장도 구하고…..” 그냥 이 정도 쯤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이보다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메시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가장 잘 말해주는 성경 말씀이 두 군데 있습니다. 첫 번째 말씀은 오늘 읽은 마태복음 20:1-16 말씀입니다. “하늘나라는 마치 ……..와 같다”고 합니다. 영어 성경에는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the landowner who went out early one morning to hire workers”라고 되어 있습니다. “for”라는 말은 “왜냐하면” 이란 뜻입니다. 19:30에 “그러나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왜냐하면(for) 하나님의 나라는 마치 땅 주인과 같기 때문이다” 이렇게 연결됩니다. 그 땅 주인은 어떤 주인인가 하면 아침 일찍부터 나가서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들을 고용하는 집 주인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일이 우리 주변에 있습니까? 별로 찾아 보기 어렵습니다. 세상은 이런 면에서 보면 하나님의 뜻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예전에는 꼴찌가 첫째가 되는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螢雪)의 공”이라는 말이 그래서 나왔잖아요? “형(螢)”자가 “개똥벌레 형”자 거든요? “설(雪)”자는 “눈 설”자입니다. 여름에는 반딧불이를 잡아서 수건에 싸가지고 그 빛으로 공부를 하고, 겨울에는 문을 열고 눈 빛으로 공부를 해서 과거에 급제하는 것입니다. 너무 가난해서 등불을 켤 처지도 못된 어려운 환경에서 과거에 급제하는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이제는 그런 일들이 별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어려서부터 조기 교육하고, 어려서부터 좋은 교육을 받은 아이들이 대학교, 대학원까지 가는 것입니다. 점점 더 그런 사회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사는 미국은 특별히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사회로서 자기가 일한 것만큼 대가를 받는다는 사상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남 잘 때 열심히 일한 사람은 돈을 그만큼 많이 법니다. 그러나, 남이 일할 때 놀고 일하지 않는 사람은 그만큼 대가를 적게 받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도 이제는 낡은 생각이 되었습니다. 놀고 먹는 것 같지만 대가는 많이 받는 그런 전문 직종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회사마다 보면 같은 시기에 회사에 입사했다고 해서 모두 같은 월급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월급을 결정할 때는 개별적으로 회사와 결정을 합니다. 그만큼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더 많이 받습니다. 그렇더라고 하더라도 역시 큰 틀에서 보면 이것도 역시 일한만큼 대가를 받습니다. 능력이 뛰어나면 뛰어난 만큼 인정해 줍니다. 능력이 없으면 일한 시간은 많아도 월급은 적습니다. 이제 한국도 이런 선진국 시스템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습니다. 능력위주의 사회가 되었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요점은 꼴찌가 첫째가 되는 그런 일은 찾아 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그런 현상은 더 심해질 것입니다. 능력이 없는 사람은 낙오자가 되고 꼴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말씀을 읽어보면 꼴찌가 첫째가 되는 그런 세상이 있습니다. 그 세상에서는 첫째가 꼴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합니까? 그런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꼴찌가 첫째가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열심히 노력하면 됩니까? 아니면, 뇌물이라고 써야 합니까? 우선 그런 일이 가능한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능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이해하는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기가 노력한 만큼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알게 모르게 노력한 만큼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이해하기가 그만큼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았다고 말하는 크리스천들까지도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그 핵심에 쉽게 접근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크리스천들까지도 일한만큼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세상적인 가치관에 물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일꾼들과 하루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한 주인이 오전 9시에 일꾼들을 포도원으로 들여 보냈습니다. 12시에도 일꾼들을 포도원으로 들여 보냈고, 오후 3시에도, 오후 5시에도 일꾼들을 포도원으로 들여 보냈습니다. 오후 6시에 하루 일과가 끝났던 모양입니다. 그러니 정상적인 사람들이라면 1시간 밖에 일하지 않는 일꾼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으리라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한 시간 밖에 일 안 했는데, 주인이 몇 푼이라고 쥐어주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침 9시에 온 일꾼들은 주인이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 주는 것을 보면서 “저렇게 인심이 후한 착한 주인인데, 우리에게 설마 한 데나리온을 주겠어? 조금이라고 더 얹어 주겠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 사람들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지극히 정상적인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모두 똑 같이 한 데나리온 씩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잘못한 것이 없다고, “너희들과 애초에 한 데나리온 씩 주기로 약속하지 않았느냐? 약속한대로 한 데나리온 씩 받았는데 무슨 불평이냐?” 하면서 자기는 잘못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한 마디 하십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하는 것이 무슨 잘못이오? 내가 자비로운 사람이라서 당신의 눈에 거슬리오? 그러므로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 (15-16절)
지금까지 말씀을 잘 정리해 주는 말씀이 로마서 4:1-8 말씀입니다.
1 <아브라함의 믿음과 의> 그러면 이 문제에 대해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이 발견한 것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2 아브라함이 행위를 통해 의롭다 함을 얻었다면, 그에게는 자랑할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3 성경이 뭐라고 말합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그 믿음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4 일을 해서 품삯을 받는 사람은 그가 받는 품삯을 당연히 받을 것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지, 선물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5 그러나 일을 하지 않는데도 품삯을 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경건하지 않은 사람을 의롭다고 여기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여기시는 것이 됩니다.
6 다윗은 행한 것과는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사람이 받은 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7 “자기 죄를 용서받고, 자기 허물이 가려진 사람은 복이 있다.
8 주님께서 죄 없다고 인정해 주는 사람은 복이 있다.”
1 Abraham was, humanly speaking, the founder of our Jewish nation. What did he discover about being made right with God?
2 If his good deeds had made him acceptable to God, he would have had something to boast about. But that was not God's way.
3 For the Scriptures tell us, "Abraham believed God, and God counted him as righteous because of his faith."① / ①Gen 15.6
4 When people work, their wages are not a gift, but something they have earned.
5 But people are counted as righteous, not because of their work, but because of their faith in God who forgives sinners.
6 David also spoke of this when he described the happiness of those who are declared righteous without working for it.
7 "Oh, what joy for those whose disobedience is forgiven, whose sins are put out of sight.
8 Yes, what joy for those whose record the LORD has cleared of sin."① / ①Ps 32.1-2 (Greek version)
쉽게 번역하면 이런 뜻입니다. "인간적으로 말한다면 아브라함은 유대 나라를 건설한 사람입니다.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의로와지는 삶에 대하여 발견한 것이 무엇입니까? 만약 그의 착한 행동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면, 그는 뭔가 그것에 대하여 자랑할 것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을 의롭게 만드는)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보시고 의로운 사람으로 간주해 주셨다'고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일을 할 때는 그가 받는 임금은 선물이 아닙니다. 그가 일을 해서 대가로 번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그들이 행한 일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그들의 믿음 때문에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 받는 것입니다. 다윗이 일한 것이 없이도 하나님께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 받은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기록했을 때, 다윗 역시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 그의 불순종이 용서를 받고, 그의 죄가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기쁨이여! 그의 죄의 기록을 주께서 지워주신 사람들의 기쁨이여!'"
은혜 (I) 정리
1. 하나님의 나라는 일한 대가로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들어가는 나라이다.
2.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 (첫째가 꼴찌가 된다)
3. 그러나, 이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갖춘 사람이다. (꼴찌가 첫째가 된다)
4. 나의 신앙생활 (교회 생활) 중에 9시 온 사람, 12시에 온 사람들, 3시에온 사람들처럼 불평하는 마음이 든 적은 없는가? 그들도 모두 “빈둥거리며 서 있는 사람들 (people standing around doing nothing in the marketplace, 3, 5, 6절)”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즉 불평했던 그들도 주인의 은혜로 포도원에 들어와 일했던 사람들이었다.
두 종류의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한 사람은 하나님을 알기에 온 마음으로 그 분을 섬기는 사람이고, 또 다른 한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기에 진심으로 그 분을 찾는 사람이다.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마 20:1-16 / 곽선희 목사
최근 베스트셀러 중에 하나인 'Overcoming the Rating Game' 이라고 하는 아주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작가는 임상 심리학자인 폴 호크라고 하는 분입니다. 이분의 책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은 이렇습니다. 현대인에게 가장 근본적이고 원초적인 어려운 병이 바로 우울증과 열등감이라는 겁니다. 우울증이라는 병은 고칠 수 없는 병입니다. 적어도 약으로서 고칠 수 있는 병은 아닙니다. 수술로 고칠 수 있는 병도 아닙니다. 더 무서운 것은 자기가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기 때문에 더 무서운 것입니다. 우울증의 결론은 자기가 죽던지, 남을 죽이던지 거기까지 갑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울증은 정신적으로 이미 자살을 하고 있는 겁니다. 정신적 만성 자살 상태가 우울증입니다. 아주 무서운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우울증과 열등감' 여기에 시달리지 않는 사람이 현대인으로서는 없다는 겁니다. 정도의 문제가 있을 뿐이죠. 자, 그런데 문제는 이게 어디서부터 비롯되느냐 하면 끝없이 남과 자신을 비교 평가하면서 이 비교의식에서 생긴다는 겁니다. 남과 나를 비교하고 있는 거예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스스로 자기를 불행하게 비하시키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현실 속에서 은혜를 생각해야 되고, 내가 처한 처지 이대로에요. 그 속에서 절대적 은혜를 깨달을 수 있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어느 사이에 다른 사람하고 비교하면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어요. 자기 존재를 잃어버린 거예요. 거기서 정신적인 이런 무서운 질병, 고칠 수 없는 상황에 온다는 것이죠.
어느 날 양이 말입니다. 비가 많이 오는 날, 나무 밑에 서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습니다. 아시는 데로 양은 털이 많지 않습니까? 비가 계속 와서 그 몸을 적시니까 그 몸이 무거워지고, 이거 추워서 견딜 수가 없는데 그런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하나님,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힘도 없고, 능력도 없고 또 빠르게 달릴 수 있는 그런 달리는 힘도 없고 왜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하나님께 원망을 했더랍니다. 했더니, 하나님 말씀하시기를 "네 말하는 걸 들으니 그럴 것 같다. 그러면 어떡하면 좋겠냐? 네게 옹이를 주어서 너도 남을 잡아먹으면서 살게 그렇게 해주랴? 아니면 입에다가 독을 넣어주어서 뱀처럼 한번 물면 상대방이 죽어 뻗어지는 그런 독을 넣어줄까? 아니면 뿔을 주어서- 날카로운 뿔을 주어서 들어 받고 그래서 싸워서 이기도록 그렇게 해줄까?" 했더랍니다. 했더니, 양이 가만히 생각해보다 하는 말이 "이대로 내버려 두십시오." "누구를 해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면 해치고 싶어져서 어려울 것이고요. 차라리 내가 손해를 보며 사는 게 낫지 남을 해치면서 사는 것은 괴롭습니다. 이대로 내버려 두세요." 그렇게 양이 하나님께 호소했더랍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길 원하십니까?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 됐으면 좋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여 나를 이런 사람으로 만들어주세요." 라고 구할 수 있는 구체적인 내용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불만은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은요, 자신에 대한 문제,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한 문제 이 비교하는 중에 아주 심각한 그리고 중요한 결론적인 말씀이 있습니다. 자신에 대한 문제를 볼 때는 주님과 나와의 문제를 볼 때는 공평합니다. 확실히 공정, 공평, 공의롭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과 비교하게 되면 불공평합니다. 이게 맘에 안 들어요. 문제는 어느 잣대로 세상을 보느냐? 어떤 시각에서 나 자신을 평가하느냐에 있는 것이에요. 오늘 본문에는 분명히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것과 나 자신에 대한 것. 나 자신과 하나님께 대한 것 그것이 확실해 지고 극대화 되게 될 때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점점 작아집니다. 그런 게 별로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 나와의 관계를 비교, 비교하기 시작하면은 어느 사이에 나와 주인과의 관계 그것마저 잃어버리고 원망하게 됩니다. 어느 사이에 원망 불평으로 그렇게 바꾸어지더라 하는 얘깁니다.
기회는 오늘 본문에 보는 대로 평등하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인의 큰 뜻입니다. 큰 긍휼이기도 합니다. 이미 기회를 잃어버린 자에게 까지도 기회는 공정하게 주어졌습니다. 여러분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이미 공평하게 주어지고 있다.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옛날에는 포도원이라는 것은요, 지금도 그렇습니다마는 포도는 잘 열려가지고 마지막에 익을 때가 되면 포도원 전체에 그 포도 향기가 아주 진동합니다. 그때는 일조를 받아야 되는데 그 햇빛을 며칠 더 받느냐가 아닙니다. 몇 시간 더 받느냐에 따라서 당도가 좌우됩니다. 우스운 얘기입니다마는 제가 한번 비행기를 타고 미국을 가는데 비행기 안에서 일하는 전무님이 계세요. 그분이 저희 교회 교인은 아닙니다마는 저희 교회에서 내놓는 설교테이프를 많이 듣는데요. 자기는 비행기 타고 다니기 때문에 주일을 잘 지키지 못하는데 "내가 목사님의 설교테이프를 열심히 들어서 제는 절반은 소망교회 교인입니다." 비행기에서 내릴 때 제게 포도주를 한 병 주더라고요. 그래 포도주를 주면서 "목사님 이거 얼마나 귀한건지 모를 것 같아서 제가 설명을 할랍니다. 이거 몇 년이라고 딱 써있어요. 이게 몇 년이라는 게 참 중요합니다, 이게. 요해가 일조가 제일 좋았거든요." 그 포도 똑같은 포도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해에 만들었느냐가 왜 중요하느냐? 그 해에 날씨가 좋았어요. 일조를 많이 받아서, 햇빛을 많이 받아서 당도가 높은 거예요. 그러면서 한참 설명을 하고 제게 준 것을 기억을 합니다. 이래서 말입니다. 유대 사람들은 될 수만 있으면 햇빛을 많이 받아가지고 아주 당도가 높도록 기다려야 되는데 이게 문제가 있어요. 바로 뒤에 우기가 따라오고 있어요. 이스라엘 나라는 겨울이 우기거든요. 그래서 우기가 따라오니까 만일에 조금 더 기다리다가 그대로 비바람이 몰아치면 농사가 다 망치는 거예요. 일찍 포도를 따자니 당도가 낮아서 안 되겠고 좀 기다렸다가 따자니 비가 오면 다 망치겠고 . 아주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이제 포도를 딴다 할 때가서는 그야말로 온 동네가 다 드러나서 포도를 따게 되는 거예요. 이것만으로는 손으로 해야 되니까, 모두가 온 동네가.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니까 주인이 다급하게 거리에 나서서 일꾼을 구하는 것을 볼 수가 있어요. "너도 가서 일해라. 너도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이렇게 재촉을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보면 '새벽에 나갔다.' 하는 말이 몇 시 인지 모르겠고 그 다음에 제 삼시, 제 육시, 제 구시, 제 열한시. 이렇게 되어 있는데 '제 삼시' 이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 시간으로 말하면 아홉십니다. 시간을 우리 시간으로 잠깐 바꾸어서 생각을 하면 새벽, 그리고 아홉시, 열두시, 세시, 다섯시 마지막 포도원에 들어간 사람은 1시간 밖에는 일하지 못했습니다. 한 시간밖에 없는 그 사람에게도 주인은 말합니다. "내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라." 한 시간 남았으니, 그까짓 거 . 그거 아니란 말이에요. "한 시간도 소중해, 남은 시간 한 시간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이렇게 재촉을 했습니다. 이미 일거리를 놓치고 시간을 다 보냈는데, 한 나절을 다 보낸 이 사람들에게 주인은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상당한 것을 주리라." 말합니다. 이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이미 젊은 사람도- 새벽에 일하는 사람이죠. 다섯시라고 하게 되면 이제 조금밖에는 남지 않았어요. "너도 일하라." 기회는 공평하게 주어집니다. 현재라고 하는 입장에서 공평한 것이요. 나이 많은 사람이나 젊은 사람이나 건강한 사람이나 병든 사람이나 지식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모두에게 현재라고 하는 입장에서 기회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한 데나리온을 주마." 하고 약속을 했습니다. 자 이제 문제가 있습니다. 하루 종일 일한 다음에 이 사람들의 풍속은 저녁에 품꾼들을 다 불러가지고 품값을 당석에서 주게 돼있어요. 그런데 맨 나중에 온 사람부터 주었다 이겁니다. 문제가 여기 있어요. 맨 나중에 온 사람 1시간 밖에 일안했는데 한 데나리온을 주었어요. 그 다음사람도 한 데나리온, 그 다음 사람도 한 데나리온 . 아침부터 하루 종일 일한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저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었으니까, 적어도 우리에게는 서너 개 주겠지.' 하고 기대했는데 그도 한 데나리온이에요. 여기서 원망을 하는 거요. 원망할 만하잖아요? "우리는 하루 종일 일했는데 왜 한 데나리온 . 왜 저 사람들은 잠깐 밖에는 일하지 않았는데 왜 역시 한 대나리온 입니까?" 이게 불공평한거라 이거죠. 원망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다시 한번 생각해보세요. 주인과 나와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원망할 것 없어요. 애당초 약속이 한 데나리온이니까 그렇잖아요? 그것도 9시에 온 사람, 12시에 온 사람으로 생각해보면 난 반나절밖에는 일하지 않았잖아요. 그러니 얼마나 고마워요? 주인과의 관계에서 보면은 이 놀지 않고 하루일하고 품고 품삯을 받았다는 것만을 가지고 만족하고 감지덕지 하거든요. 그러나 다른 사람, 나와 똑같이 대우받는 것이 마음에 안 들어요. 그게 마음에 안 드는 거예요. 비교하다 보니까 원망하게 되었죠. 심리학 이론 중에 '교류분석'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상을- 인간의 모습을 네 가지로 분류해서 생각합니다. 첫째는 자신에 대해서는 긍정적이고, 남에게 대해서는 부정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감이 있는가 하면 남을 멸시하는 교만이 있어요. 자신에 대한 문제는 다 긍정적이고 남은 항상 부정적으로 봐요. 이 평가기준 때문에 이 사람은 불행합니다. 또 하나는 자신에 대해서는 부정적이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사람이 있어요. 이 사람은 항상 남을 부러워하며 살아요. 남의 처지만 좋아보여요. 남이 먹는 떡만 커보여요. 남의 자식은 잘된 것 같고 내 자식은 잘못된 것 같아요. 심지어는 남편도 남의 남편이 훨씬 좋고 내 남편은 '어쩌다 저런 게 걸렸나?' 이렇게 생각한데요. 항상 불평이라는 거예요. 항상 내 것은 나쁘고 남의 것만 좋아. 그것도 베네 병신이죠, 저거요. 이거 문제라고요. 그러나 많이 있어요, 이런 게요. 그 다음에 세 번째는 뭐냐면 자기에게 대해서도 부정적이고 남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에요. 이 사람이 염세주의자에요. 항상 이 사람은 불평 원망이죠. 세상 다 망했어요. 비관적이죠. 그런가하면 자기에 대해서도 긍정적이고, 남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사람이 있어요. 나 자신도 행복하고 남도 행복하게 봐요. 그리고 남을 부러워 할 것도 없고 더 불어 행복할줄 아는 사람이에요. 이런 네 가지 사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본문에 대단히 귀중한 말씀이 있어요. 두고두고 생각하십시오. 주인은 말씀합니다.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무슨 말입니까? "네가 받은 것이 은혜라고 왜 생각을 못하느냐? 내가 너를 부르지 않았다면 너는 하루 종일 장터에서 놀고 공쳤을 거 아니냐? 내가 너를 불렀기에 하루 일했고 또 품값도 받는 것 아니냐? 네 것. 그것이 많던 적던 내가 본래 너와 약속한 가 아니냐? 너와 나와의 약속이 한 데나리온이다. 이것은 정당하게 받은 것이다. 합당하게 받은 것이요 또 은혜롭게 받은 것이다." 그 말이죠. 얼마나 중요한 얘깁니까? 또 중요한 말씀이 있어요. "내가 늦게 온 사람들에게도 은총을 베푸는 것이 내 뜻이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못하겠느냐? 내가 선함으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여러분 얼마나 강한 말씀입니까? 내가 선함으로 왜 네가 악하게 보느냐? 결정적인 말씀이에요. 깊이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은요.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예수님과 참 중요한 시간에 만나서 대화를 하는데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 양을 먹이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이나 물으시고, "네가 나를 위해서 장차 큰 핍박을 받고 어려운 고난을 당해야 되겠다." 이렇게 예언의 말씀을 하십니다. 베드로가 그때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그게 뭐냐면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베드로는 멀리 도망갔었어요.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으나, 요한은 재판정에서도 끝까지 따라갔고 십자가 밑에 서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장면을 다 지켜보았어요. 그게 요한이었어요. 그래서 베드로가 생각하기를 '나는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으니까 '장차 죽을 고생을 할 것이다.' 하는 것 같고, 요한은 예수님을 끝까지 따랐으니 어떻게 될까?' 해서 그때 딱 한마디 물어봅니다.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그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내가 다시 올 때까지 머무르게 할지라도 너와 무슨 상관이냐? 너와 무슨 상관이냐? 요한은 요한의 길을 가는 것이다. 너는 네 길을 가는 거야. 너와 무슨 상관이냐?" 아주 중요한 말씀이에요. 우리는 종종 이 때문에 문제가 되요. 하나님과 나 사이에 절대적 은혜, 다시 한번 확인해 보세요. 우리는 다른 사람이 더 받든 덜 받든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 우리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재밌는 말이 있어요. 불란서 사람들은요, 유머를 우스갯소리를 하면은 벌써 생각이 많아서 말하기 전에 벌써 웃는데요. 영국 사람들은 말을 다 듣고 나서 웃는데요. 독일 사람들은 다음날 웃는데요. 한국 사람들은 다른 사람 웃는 것 보고 웃는데요. 뜻을 알고 웃는 게 아니에요. 남이 웃으면 따라 웃는 거야 . 그것 참 한국사람 형편없네요. 웃는 일 하나만도, 내가 웃고 내가 기뻐해야죠. 다른 사람에게 따라다녀요. 제가 잘 아는 연세대학교 교수님 두 사람이 언젠가 그런 얘길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직 우리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집을 팔고 멀리멀리 이사했다고 그래요. 두 친구 교수가 어려운 월급을 모아가지고 연세대학교 가까이 집을 두 채를 지었어요. 그런데 이집에서 타일을 깔면 이집에서 타일을 깔고 이집에 카펫을 깔면 이집에 카펫 깔고 이집에 침대가 좀 커지면 저쪽 침대가 커지고 . 두 집에서 경쟁을 하는데 완전히 부도났데요. 이러다가는 살림 망치겠다고, 두 마누라가 서로 경쟁을 하는데 "아이고, 아이고 안 되겠다고 ." 다 팔아가지고 아주 멀직하니 가버렸다고 그래요. 여러분 다른 사람의 집에 어떻게 했던 그거 너무 따라가지 마세요. 우리는 이래서 문제에요. 개성 있게 삽시다. 남이 가졌다고 내가 가져야 될게 뭐 있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남이 못가진거 내가 가진 것도 있잖아요. 행복은 질적인 것이에요. 은혜는 절대적인 것이에요.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오직 은혜로 내가 있습니다. 잃어버린 기회도 꾸짖지 아니하시고 새로운 기회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오늘도 주는 말씀하십니다.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이 얼마나 고마운 말씀입니까? 어찌 생각하면 일을 했으니 돈을 주는 게 아니고요, 돈을 주기 위해서 일을 시킨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한 시간밖에 일을 안한 사람에게도 "이 사람아 처자식이 있는데 놀고 있어서 되겠나? 한 푼 벌어야 살게 아니겠는가?" 이 주인의 마음이 얼마나 귀합니까? 여러분 잃어버린 기회, 만회할 길이 없어요. 우리 인간으로서는 다시 만회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불쌍히 여기시고 또 은혜를 베푸십니다. 새로운 은혜를 베푸십니다. 현재라고 하는 시점에서 기회는 공평합니다. 과거를 묻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오늘 내가 오늘 얼마나 절대적 은혜에 감사하면서 사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내가 사는 현재, 현재 이 현시점 이 현실 이대로가 내게 주신 은혜요. 내가 주신 가장 큰 은혜요. 하나님께서는 나를 통해 역사 합니다. 이 기회를 통해서 역사 합니다. 사도바울은 늘 간직하고 있는 신앙이 있습니다. 내게 주신 은혜, 내게 향하신 경륜, 내게 주신 사명 . 아주 지극히 절대적이고 지극히 주관적입니다마는 그 속에 사도바울의 모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가 뭡니까? 그것을 소중히 여기세요. 이미 주신 모든 것이 내게 주신 최상의 은사임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주는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허비하는 사람
마 20:1-16 / 김홍도목사
성경에는 이해하기 힘든 말씀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불의한 청지기가 재산을 탕진해서 허비하는 것을 보고도 그 주인은 칭찬을 했다는 사실도 깊이 생각해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드릴 본문의 내용도 대단히 난해하지만 깊이 생각해 보면 큰 은혜가 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을 포도원에 일꾼을 들여 보내는 주인으로 비유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주인이 아침에 나가보니 일하지 않고 노는 사람이 있어서 불러 포도원에 들여 보내 일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3시에 또 나가보니 장터에 노는 사람이 있어서 또 들여 보냈습니다. 또 6시에, 9시에, 11시에 계속 놀고 있는 사람들을 불러다 포도원의 일을 시킨 사실을 본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루 일이 끝난 다음에 품삯을 주는데 나중 온 사람부터 주기 시작했습니다. 제일 늦게 들어와 1시간 일한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씩 주었습니다. 다음에 조금 일찍 들어온 사람도 한 데나리온 이렇게 모두 한 데나리온씩 주었던 것입니다. 그 때에 제일 먼저 들어 온 사람들이 주인에게 불평하기를 "주인이여! 나중 온 사람들은 겨우 1시간만 일했는데 종일토록 일한 우리와 똑같이 줍니까?"하고 항의했습니다. 이 때에 주인이 대답하기를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않았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은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라고 하며 끝으로 한 말씀이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하고는 결론을 지었습니다.
이 말씀은 여러 가지 귀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것은 은혜로 불러 주신 것이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야 될 의무가 있다던지 혹은 빚진 자가 되어서 해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뜻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아침부터 저녁 때까지 전부 다 주인의 은혜로 포도원에 들여 보냈지 누구에게 빚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공의를 벗어나지 않고 약속한 대로 다 주셨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행위의 결과보다 마음의 동기를 보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시간에 일을 했는가 혹은 얼마나 많은 양의 일을 했느냐 보다도 한 시간이라도 마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일했느냐?하는 것을 보신다는 말씀입니다.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오래 예수를 믿었느냐? 또는 얼마나 교회를 위해 일을 많이 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우리 마음에 감사한 마음과 정성스런 마음으로 믿고 일을 잘 했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늦게 예수를 믿었다 할지라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감격한 마음으로 믿는 것이 중요하지, 오래 믿었다고 게을러지고 나태한 생각을 가지고서 신앙 생활을 하면 오히려 늦게 예수 믿기 시작하여 잘 믿는 것만 못하기가 쉬운 것입니다.
셋째로 먼저 믿고 일을 많이 했다고 해서 교만하지 말라고 하는 중요한 경고의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6절에 말씀하신 것은 먼저 예수 믿고 오래 믿었다고 해서 일을 많이 했다고 해서 혹은 마음에 교만해지거나 나태해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언제나 새로 믿는 것처럼 부족함을 깨닫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신앙 생활을 해야 된다는 것을 여기서 말해 주고 있는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이 말씀이 가르쳐 주고 있는 중요한 진리는 우리가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또한 믿음으로 받는 것이지 오래 믿었다 하여 구원받을 자격을 갖추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오직 믿음으로 받은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사랑이지 무슨 자격이 있어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가 영생을 얻는 것은 우리의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말미암아 주시는 선물인 것입니다. 선물은 무슨 대가를 치루고 받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4장 5절에도 보면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게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라고 했습니다. 일을 아니해도, 경건치 않다 할지라도 믿는 자를 의롭게 하심을 믿으면 그것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11시에 와서 잠깐 일하고도 포도원에서 한 데나리온의 임금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최후까지라도 우리가 믿으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지 우리가 오래 믿었다고 해서 혹은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님을 여기서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온 일꾼들이 나중에 와서 한 시간 일하고도 종일 일한 자기들과 똑같이 주는 것을 보고 원망하고 불평한 것은 주인의 긍휼과 사랑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자는 모두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으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우리 죄를 대신하여 피 흘려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음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기사가 누가복음 15장에 탕자의 비유 가운데도 나타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의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 중 자기 몫을 가지고 먼 나라에 가서 다 탕진해 버리고 거지가 되어 돌아왔는데도 그 아버지는 목을 껴 안고 입을 맞추고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우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까지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은 이해 타산을 초월한 사랑이요, 허비하는 사랑임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 타산적인 생각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맏아들이 보기에는 아버지가 쓸데없이 재산을 낭비하는 것 같이 보였습니다. 먼저 온 포도원의 일꾼들은 주인이 쓸데없이, 공정하지 못하게 재산을 허비하는 것으로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 주인의 사랑과 긍휼이 아니었더라면 먼저 온 일꾼들도 한 데나리온도 받을 수 없고 포도원에 들어 올 수도 없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탕자가 돌아왔을 때 그 아버지께서 사랑을 베푸는 것을 보고 불평을 한 맏아들 자신도 실상은 집안에 가까이 있으면서 정신적인 탕자노릇을 한 것입니다. 재산만 탐내는 맏아들의 마음 속에는 아버지의 재산을 어떻게 하면 전부 자기가 소유할 수 있을까?하고 생각했을테니 어떤 의미에서 더 나쁜 탕자였을지도 모릅니다. 그 맏아들은 허비하는 사랑이 참 사랑임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위의 비유와 같은 무서운 죄와 오류를 범할 때가 많습니다. 실상 아무 것도 아닌 내 의(義)와 공적만을 생각하고 죄인을 용서할 줄 모르는 때가 많지는 않습니까? 내가 좀 먼저 믿었다고 나중 믿은 자를 멸시하고 무시하는 일은 없습니까? 참 사랑을 베풀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 아무리 큰 잘못을 지었다 할지라도 관용하는 마음으로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사랑은 주고 또 주어도 못다 준 것 같이 생각하여야 하며, 이해 타산을 초월하여야 사랑이고 또 참 사랑은 허비하는 사랑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아무리 죄가 많다 하여도 회개하고 뉘우치기만 하면 하나님은 인색하게 외면하지 아니하고 사랑해 주시고 구원해 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가복음 14장 3절부터 보면 마리아가 예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유대인들이 가장 귀중히 여기는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와서 깨뜨려 예수님 발에 부은 기사가 있습니다. 이 때 계산 잘하는 가룟 유다는 말하기를 "그 향유를 300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지 아니하고 어찌 허비하느냐?"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책망했습니다. 예수님을 팔아 버릴 그에게는 허비하는 것 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리아에게는 그것이 허비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1. 진정한 사랑은 허비하는 것입니다.>
아낌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나친 죄책감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없어 하는 마음을 가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서해 주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호세아서가 있는데 그는 사랑의 선지자입니다.
아모스는 아모스대로, 호세아는 호세아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잘 나타내 준 선지자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무슨 죄악 속에 있어도 용서해 주시고 얼마든지 사랑해 주시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이것이 다 하나님의 허비하는 사랑이요, 극진한 사랑의 표현인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허비하는 사랑에 의하여
첫째, 우리같은 죄인들도 구원을 받았습니다.
둘째, 이러한 가정이 실현될 때에 우리의 가정에는 참 평화가 있고 우리의 사회는 복지 사회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셋째, 이러한 사랑이 주어질 때 강인한 죄인들이 마음문을 열어 놓고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죠지·와싱톤의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어렸을 때에 도끼로 아버지가 사랑하는 사과나무를 찍어 넘어뜨렸습니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화를 내었지만 그 아들이 "제가 그랬어요"하며 정직하게 잘못을 뉘우치며 말하게 될 때에 그 아버지는 아들의 정직한 마음을 보시고 기뻐하며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럴 때 그 아들은 훌륭하게 자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자녀를 키울 때에 그 아이가 알면서도 잘못했을 경우에는 꾸지람을 주어야 하지만 실수로 잘못하고 뉘우칠 때에는 사랑으로 감싸주고 용서해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 때 그 아이는 감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부부 간에도 똑같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남편이 까다롭고 따지기 잘하고 늘 꾸지람을 준다고 하면 그의 아내는 분명 마음 문을 닫고 숨기고 변명하고 도피하려고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해해 주고 모든 이해 타산을 초월하여 사랑해 주고 용서해 주는 남편 앞에서는 깨어진 마음으로 잘못된 것이 있으면 회개하고 받아들이게 될 것이며 그 속에는 참 사랑이 용솟음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이 하나님의 참 사랑이신 허비하는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을 가지고 살 때에 내 가정, 내 이웃, 내 나라, 내 민족, 또 전 세계에 진정한 평화와 행복이 있게 된다는 것을 믿고 언제 누구에게나 사랑을 베푸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아멘-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마 20:1-16 / 한대근목사
지난 한 주간 저는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부족한 목사를 강사라고 귀하게 여기고 매 시간마다 열심히 참여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전혀 부럽지 않았습니다. 주보의 칼럼에도 썼지만 온 세상을 향해 “나 보다 더 행복한 사람 나와보라”고 외치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러나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결코 제가 잘 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제가 지혜롭거나, 힘과 능력이 남보다 뛰어나서도 아닙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하나님은 저에게 많은 것들을 축복으로 주셨습니다.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지만 좋은 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는 것부터, 좋은 장로님, 신실한 권사님들과 함께 섬기고 있는 것, 그리고 늘 밝은 웃음으로 곁에서 힘이 되어주시는 집사님들과 따뜻한 사랑으로 안아주시는 여러 성도님들, 그리고 부족한 사람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나날이 성장해 가는 미래의 주역들, 사랑하는 어머니, 아내, 자녀들......., 지금 제 곁에 있는 모든 분들은 바로 하나님께서 저를 축복하시려고 보내주신 하나님의 천사들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2박 3일간의 가족 휴가를 보내면서 아이들과 함께 이런 말을 나누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축복은 절대로 당연한 것이 아니란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란다. 절대로 교만하거나 자만하지 말자. 더 열심히 주님과 교회를 섬기자” 그리고 “저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삽니다”라고 고백하며 살자고 다짐하고 다짐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자신의 의, 자신의 공로, 자신의 노력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열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들어가는 곳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어느 큰 농장을 소유한 사람이 아침 일찍 인력시장에 나갔습니다. 그곳에는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농장 주인은 아침 일찍부터 나와 있는 사람들에게 1데나리온을 주기로 약속하고 자기의 농장에서 일하도록 들여보냈습니다. 그러다가 아침 9시쯤 되어 농장 주인이 다시 밖에 나가보았더니 그곳에 아직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서성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그 사람들에게도 적당한 품삯을 주겠노라고 하면서 자신의 농장에서 일하도록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정오와 오후 3시에도 이 주인은 밖에 나가서 놀고 있는 사람들을 데려다가 일을 맡겼습니다. 그날 저녁 5시쯤, 이제 일을 마칠 시간에 주인이 마을에 나갔다가 몇 사람이 일자리가 없어서 놀고 있는 것을 보고는 그들까지도 자신의 농장에 들어가 일하도록 배려를 했습니다.
어느덧 농장의 하루 일이 끝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주인은 관리인을 불러서 맨 나중에 온 사람부터 품삯을 주도록 했습니다. 오후 5시에 들어 온 사람들이 1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아침 일찍 온 사람들은 더 많이 받을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차례가 돌아와서 받은 품삯은 똑같이 1데나리온씩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침 일찍 들어온 사람들이 투덜거리기 시작했습니다.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들과 온종일 뙤약볕에서 일한 자신들과 똑같이 품삯을 주는 것은 불공평하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주인이 나서서 말합니다. 처음부터 약속한 일당은 1데나리온이었습니다. 약속한 품삯을 준 것이기 때문에 전혀 주인으로서는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늦게 들어온 일꾼들에게 품삯을 주는 것은 주인의 마음에 달려 있는 것임으로 그것에 거슬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천국의 질서’에 대해서 설명하고 계십니다. 한시간 일한 사람이나 여덟 시간 일한 사람이나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을 주는 것이 천국의 가치관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은 일한 만큼 보상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공로사상이 숨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은 은혜의 원리입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는 모든 이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무한하시고 풍성하신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제가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많이 받은 사람인지를 생각하면서 감사하고 또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받은 은혜를 함께 나누려고 이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함께 은혜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1.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높고 낮음의 차이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누가 더 높은가, 누가 더 큰가, 누가 더 많은가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가치입니다. 세상의 가치로 따지면 오후 5시에 들어와 한시간 일한 사람과, 아침 일찍부터 들어와 여덟 시간을 일한 사람이 결코 같은 보수를 받을 수 없습니다. 또한 그 사람의 지위나, 경력, 실력, 학력에 따라서 철저하게 차별을 합니다. 사람의 가치를 그 존재의 본질에서 찾지 아니하고 그가 이루어내는 부가가치에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아니하고 그가 가진 소유, 지위, 권력등, 그를 둘러싸고 외적인 것들을 보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분수에 맞지 않는 겉치레에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합니다. 방학 때만 되면 성형외과에 발을 디딜 틈이 없다고 합니다. 외모를 중시하는 사회의 단면입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모습을 보고, 그 사람을 평가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상에서 높아 보이고, 인정받기 위해 다른 사람이 하는 것처럼 함으로 동등한 위치에 서기를 원하고, 심지어는 더 높아 보이기 위해 자신의 형편에 맞지 않는 겉치레에 치중합니다. 남들보다 더 나아야 한다. 남들보다 더 높아야 한다. 남들보다 더 많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아직 판단력이 미숙한 어린아이들을 하루종일 학원으로 내쫓고, 되지도 않는 형편에 유학과 이민을 보내느라 빚더미에 허리가 휘고, 부모의 기대에 못 미치는 아이들은 스트레스로 인하여 각종 정신질환을 앓는 등, 복잡한 사회 문제를 양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체면치레라고 부릅니다. 체면 때문에 하지 않아도 될 일들을 해야만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결혼식만 해도 그렇습니다. 남들의 이목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음식들을 쓰레기로 버리고 있습니까?
늘 말씀을 드리지만 사람의 가치는 소유에 있지 않습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그 모습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정확하신 분입니다. 우리의 속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높고 낮음의 차별이 없습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합니다. 먼저 된 자 나중 된 자를 따지지 않습니다. 소유의 많고 적음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배움과 지식의 정도를 묻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믿음이라고 하는 공통적인 고백을 통해서 누구에게든지 열려 있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어느 누구도 높고 낮음의 차이로 사람을 멸시할 수 없으며, 멸시 당할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는 계급의식을 가지고 들어오면 안 됩니다. 세상에서 누리던 질서를 교회 안에 가지고 들어와서 교회의 질서가 세상의 질서처럼 변질될 때, 교회는 타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돈 많은 사람이 대접받고, 돈 없는 사람이 멸시받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세상의 지위가 높은 사람이 대우받고, 지위가 낮은 사람들은 소외 받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공부 많이 한 사람이 인정받고, 공부 못한 사람이 천대받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한 데나리온의 은혜를 받는 곳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55장 1절에도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 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했습니다.
집회 때 부르던 찬양 중에 “너는 내 것이라”는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뇌성마비 장애인인 송명희 씨의 시로 만든 찬양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네가 부유해도 가난해도 - 너를 사랑하여 구원했단다. /현명해도 미련해도 - 너를 지혜 되어 사용할 것이다. /잘났으나 못났으나 - 너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강하여도 약하여도 - 너의 힘이 되어 일으키리라. /의로워도 악하여도 - 너를 나의 피로 바꾸었단다. 그러므로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목사도, 장로도, 권사도, 집사도,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이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산 너무나 소중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밖에 없는 것처럼 사랑하십니다.
2. 나중 온 자들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아침 일찍부터 온 사람들 외에도 9시, 12시, 3시, 5시에 온 사람들까지 모두가 다 주인의 따뜻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주께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젊어서 믿던지, 늙어서 믿던지, 똑같이 구원이라고 하는 보상을 우리들에게 주십니다. 천국이라고 하는 축복을 믿는 모든 자들에게 주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려 있던 강도도 죽기 직전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믿었다고, 죽기 직전에 믿었다고 주님이 외면하거나 물리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한 영혼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영혼이 지옥에 갈 운명에서 천국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전혀 불가능하다고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사랑하시고 끝까지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집을 나간 아들에 대한 비유를 베풀어주시면서 하나님의 사랑은 포기하지 않는 분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리고 한 영혼이 돌아올 때, 천국에서 잔치가 열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의 가족들 중에, 아니 우리의 이웃들 중에 어떤 사람이든지, 우리는 포기하지 말고 그들을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죽는 순간까지도 그들의 영혼을 붙들고 지도해야 합니다. 최후의 순간까지도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사랑과 은혜의 문이 열려 있음을 열심히 알려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주님의 사랑의 품안에 이끌어 모든 사람이 다함께 천국의 잔치를 즐기도록 우리 먼저 믿은 성도들이 자리를 베풀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3. 선택받은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하루 일당이 여덟 시간을 일한 사람이나 한 시간을 일한 사람이나 똑같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의 실수는 바로 본래의 자신들의 위치를 잊고 있었다는데 있었습니다. 더 많이 일했다고 하는 비교 우위 때문에 교만해져 있었습니다. 주인은 그런 그들을 이렇게 책망합니다. 14절입니다.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들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은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함으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여기서 여덟 시간을 일한 사람들은 당시 자기 의를 주장하는 유대인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선택을 받은 민족이라고 하는 대단한 자부심이 있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과 다른 이방인들이나, 자신들처럼 살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서 무시하고 경멸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본질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의로워서 하나님이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의로워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할 때에도 그들이 의로워서 그들을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을 받은 것입니다.
여덟 시간 일한 사람들도 농장 주인의 선택과 부름이 없었다면 하루 종일 할 일 없이 놀아야 했습니다. 하루 품삯을 받을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들일 수 있었습니다. 가족들을 굶길 수밖에 없는 무능한 가장 소리를 들을 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농장 주인의 배려로 인하여 하루를 공치지 않고 1데니온의 은총을 입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순간적으로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덟 시간 일하고 한 데나리온을 받은 그 사람이 농장 주인에게 선택을 받은 그 자체에 감사하였더라면 늦게 들어와서 자신들과 똑같이 1데나리온씩 받은 사람들에 대해서 박수를 치며 좋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본질을 잊고 우월감에 빠져있었습니다. 우리는 여덟 시간 일한 사람이라고 하는 우월감, 우리는 먼저 선택되었다고 하는 우월감, 그것이 책망을 받은 원인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먼저 선택되었다는 그 사실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8시간 전이든, 한 시간 전이든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사실 자체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가 진정한 천국의 백성인 것입니다. 영원히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 사탄의 종이 되어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당해야 할 운명이었던 존재,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으니 어찌 아니 감사합니까?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할렐루야! 저는 금번에 이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은연중에 저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한 편으로는 절망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위로를 받으려고 했던 것을 깨닫고 회개하였습니다. 저는 깨달았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오직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밖에 제가 자랑할 것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며 감사하고 무릎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기어다니며 오직 주님의 은혜로 산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제게서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면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였음을 저는 인정하고 고백합니다. 금번 집회를 마치고 일부러 내 주변을 돌아보기 위해 시선을 밖으로 돌렸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저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음을 발견했습니다. 어느 기도원에서 우연히 만났던 90이 다 되신 노인 권사님의 눈물 어린 중보기도가 있었습니다. 저희를 염려하며 깨어 있던 장인 장모님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외에도 사랑하는 성도들의 뜨거운 성원과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백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에게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것을 감사하고 또 감사합시다. 나의 나 된 것은 오로지 주의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천국은 여덟 시간 일하고 1데나리온을 받은 사람이 한 시간 일하고 1데나리온 받은 사람을 보고 박수 쳐주고, 축하해주고, 축복해주는 곳입니다. 먼저 온 자가 자신의 특권을 주장하는 곳이 아니라 나중 온 자에게 “여기 따뜻한 곳에 앉으십시오”라고 말하면서 자리를 양보할 수 있는 곳이 천국입니다. 나중 된 자나 먼저 된 자의 구분이 없는 곳, 오히려 나중 된 자가 먼저 된 자처럼 대접을 받는 곳이 천국이요 하나님 나라의 질서인 것입니다. 이런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런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4.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오늘 비유의 핵심 중의 하나는 먼저 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경거망동함으로 하나님의 책망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가끔 이 비유를 우리의 신앙의 나태함을 합리화하는 말씀으로 악용하는 우를 범하기도 합니다. 절대로 이 말씀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주님의 경고입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는 불행을 겪는 유대인들은 바로 자신의 동족이었습니다. 아무리 큰사랑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 은혜를 모르고 교만해진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얼마든지 떠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경거망동하다가 버림을 받았습니다. 솔로몬도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방탕함에 자신을 내던졌다가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면 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만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생명처럼 붙잡았습니다. 그 결과 그는 버림을 받지 않고 영원히 쓰임을 받았습니다.
우리 모두 겸손합시다. 여기 있는 목사를 비롯해서 우리 모두가 교만을 회개합시다. 오직 겸손한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주님을 바라봅시다. 먼저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 축복과 은혜를 절대로 빼앗기기 않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넘어짐의 이유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한 후에 오히려 자신이 버림을 받을까 두려워했습니다. 끝까지 겸손하게 은혜 안에서 삽시다.
불평과 감사
마 20:1-16 / 박정근목사
예수님은 가르침의 천재이십니다. 그는 언제나 가르치실 때마다 진리를 생활 속에서 찾아 내셨습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중요한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사람들에게 익숙한 사업과 시장 얘기를 하십니다. 오늘 들려주시는 이야기는,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친숙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에 보니 고용주와 고용인, 봉급, 더 나아가 고용주와 고용인의 갈등, 요즘 연일 신문에 보도되는 노사 갈등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을 남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삶 속에 있는 이야기라는 마음으로 한번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이야기의 배경은 2000년 전 팔레스타인입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척 어렵게 살고 있었어요. 로마의 압제 속에서 정치는 불안하고, 경제는 바닥을 치닫고 있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들은 로마 제국에 수많은 세금을 내야 했습니다. 그 세금은 수입에 따라 내는 세금이 아니라 일정하게 정해진 세금이었어요. 그 해에 농사가 되지 않으면 땅을 팔아서라도 그 세금만큼은 채워야 했습니다. 그래서 토지를 잃은 사람들이 수없이 많았어요. 그 결과 당시의 팔레스타인 시장에는 새벽마다 인력시장이 열렸습니다.
오늘날은 아침 9시에 일하고 저녁 5시나 6시에 퇴근하지만, 그 당시는 하루 12시간을 일하는 것이 노동의 기준이었어요. 해뜰 무렵인 새벽 6시부터 해질 무렵인 저녁 6시까지 일하는 것이 통상 예였어요. 농사지을 땅이 없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날품팔이 노동을 팔아서 하루하루 연명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가족을 위해 오늘 하루 내가 노동을 해야 합니다. 오늘 내가 노동하지 않고 품을 팔지 않으면, 자녀들과 가족들이 굶을 수도 있기 때문에, 시장에 나가 누가 나를 데려가기 원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시장에 나와 자기를 데려가기 바라며 웅성거리고 있는 겁니다.
본문을 보면, 그러한 인력시장에 한 주인이 왔습니다. 그는 큰 농장의 주인이었어요.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많은 기대를 하겠지요. "아, 오늘은 한두 명이 아니고 몇 명을 뽑아 가겠구나!" 하고요. "주인님, 제가 포도농사에는 아주 경험이 많습니다. 제가 작년에도 사장님 댁에서 일하지 않았습니까? 저를 써주세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주인이 필요한 사람만큼만 데리고 갑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다른 주인을 기다려야 하겠지요. 아침 9시가 되었고 이미 해가 많이 떴어요. 기다리는 사람들은 초조합니다. 그런데 똑같은 주인이 나오더니, 또 거기 있는 사람 몇 명을 데려가는 겁니다.
이제 나머지 사람들은 마음에 낙심이 찾아오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아직 한가지 희망이 있어요. 그것은 12시에 일해도 품삯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나절이라도 일해서 품삯을 받아야 가족들이 연명을 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는데 똑같은 주인이 나와서 12시에 사람들을 데리고 갑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다 지쳐 있습니다. 그때, 통상적인 예를 깨고 3시에 주인이 나와서 또 사람들을 데리고 갑니다. 더 놀라운 것은 마감시간이 1시간 밖에 남지 않았는데, 5시에 나머지 사람들을 데리고 들어가서 일을 시켰습니다.
드디어 6시, 업무시간이 다 끝났어요. 이제 봉급 받을 시간입니다.
그런데 이 주인이 봉급을 거꾸로, 늦게 온 사람부터 주는 겁니다. 5시에 온 사람부터 봉급을 주는데, 웬일입니까? 그 사람은 이해하기를, 오늘 밤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요. 6시에 끝나는 것을 보니 12분의 1 데나리온, 얼마나 될까 하고 생각했는데, 봉급을 받아보니 한 데나리온이 들어 있는 겁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노동자의 임금이 하루 한 데나리온이었어요. 하루치의 품삯이 다 들어있는 겁니다. 너무나 놀랐어요. 갑자기 이 농장에는 기쁨과 설렘이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설렘과 기대감이었을까요? 새벽 6시부터 일한 사람들은 흥분이 되었어요. 오후 5시에 온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았으니 약삭빠른 사람은 이미 자기의 봉급을 다 계산했을 겁니다. "야! 오늘은 횡재했구나!"
저 사람은 한시간 일하고 한 데나리온을 받았으니, 나는 아마도 12 데나리온, 혹은 휴식시간을 다 빼면 적어도 10 데나리온은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설렘이 노동자들 사이에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봉급 봉투를 받아들고 나서 그 설렘은 완전히 바뀌어 버렸어요. 아침 6시에 일한 사람이 봉급 봉투를 뜯어보니 그 속에는 한 데나리온 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자 이 농장에는 기쁨과 설렘이 다 사라지고 노사쟁의가 일어납니다. 급기야 노동조합이 생기고 데모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 플랜카드에는 아마 이렇게 적혀 있었을 겁니다. "물러가라! 포 사장!" (포 사장은 포도원 주인을 지칭합니다) "노동자의 품삯을 떼어먹은 포 사장을 구속하라!" 노동조합장이 나오더니 연설문을 낭독합니다. "포 사장은 국가노동법과 시장원리를 위배하므로 우리 노동자들을 철저하게 우롱하였다. 우리는 지난 10년간 농장과 회사를 위해 사력을 다해 일해 왔건만, 그는 우리들의 이 수고를 돌아보지 않고, 갓 들어온 신입사원과 우리들의 봉급을 동일하게 지불함으로 우리 노동자들을 기만하였다. 물러가라! 포 사장!" 이는 성경에 없는 것 같지만 제가 현대어로 번역한 겁니다.
11절을 보세요. 이 말씀이 나옵니다.
받은 후 집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아주 강한 헬라어의 '원망'이라는 단어를 썼어요. 최고 강한 원망의 뜻입니다. 12절.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기쁨과 설렘이 원망과 분노로 바뀌었어요. 그들의 데모에 대한 주인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주인은 두 가지를 대답합니다. 하나는, "나는 너희에게 정당하였다. 왜냐하면 내가 너희를 아침 6시에 데리고 올 때 계약서를 썼지 않았느냐?" 그 계약서에 한 데나리온씩 주겠다고 약속했어요. 그 당시 보통 이런 계약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노동자의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준다는 것은 너와 나, 모두가 아는 사실이니까요. 그런데도 주인은 오해를 없애기 위해 그들을 불러올 때에 한 데나리온씩 줄 것을 약속했어요. 그래서 그는 얘기하기를 "나는 너희에게 잘못한 것이 없고 정당하다. 너희는 하루 일했고 하루 품삯을 받았을 뿐이다" 라고 합니다.
다른 하나는, 5시에 온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준 것이, 비록 정당한 것은 아니지만 틀린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들이 한 데나리온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을 나도 안다. 그러나 내가 은혜로 호의를 베풀어서 5시에 온 사람들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준 것뿐이다." 라고 하면서 그는 반문합니다. "내가 선한 일을 행한 것을 너희가 악하다고 보느냐? 그것이 가능하고 옳은 일이냐?" 이것이 비유의 전부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이 비유의 뜻이 무엇입니까? 많은 학자와 목사님들이 설교를 하면서 이 본문을 잘못 해석하십니다. 어떤 학자는 평생 성경을 연구했지만 잘못 결론을 맺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먼저 온 사람은 유대인이고, 나중 온 사람은 이방인이다." 그래서 천국, 교회 안에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의문을 품습니다. 과연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2장에서 말한 그 얘기를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천국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에서 이 비유는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또, 어떤 이는 주장합니다. 1절에서 '천국은 마치∼' 라고 하면서 천국을 설명하고 있으니까, 천국에서는 모든 사람이 동등하다. 부자, 가난한 자, 양반과 상놈,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동등함을 얘기하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옳은 얘기지만 이 비유의 뜻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어떤 뜻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는가?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이 비유의 마지막을 보아야 합니다. 16절을 보세요.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이 말씀이 중요한 이유는 이 말씀을 주시기 직전인 19장 마지막 절을 보아야 합니다. 19장 30절입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이 비유의 앞과 뒤에 똑같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은 오늘날 교회 안에 똑같이 구원받고 영생을 얻어 교회생활, 신앙생활 하는 사람 가운데 먼저 된 자가 있고, 나중 된 자가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더 신기한 것은 처음에 먼저 되었던 자가 후에 나중 되는 경우도 있고, 나중 되었던 자가 시간이 지난 다음 먼저 되는 자가 되는 일이 있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무슨 얘기일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어떻게 교회 안에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가 구별되는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깨닫고 살면 먼저 된 자가 되는 것이고,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해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면, 신앙 연수는 오래되었으나 나중 된 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씀합니다.
교회 안에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또 하나는 불평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인간은 이 두 종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은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불평하며 살아가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주시면서, 왜 어떤 사람은 감사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가 하는 이유를 두 가지로 날카롭게 지적해 주십니다.
1. 물질적 보상의식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왜 감사하지 못했을까요? 먼저 들어왔는데 왜 나중 된 자가 되어 버렸을까요? 예수님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그들이 물질적 보상의식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이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주신 배경을 아셔야 합니다. 배경은 19장에 나타납니다. 한 부자 청년이 있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계신 예수님께 부자 청년이 찾아와 얘기합니다. "예수님, 내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그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계명을 지키거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런 것들은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그 다음에 제가 또 할 일이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그가 부자임을 아시고 말씀합니다. "너에게 딱 한 가지가 부족하다.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리고 나를 좇으라!" 라고 했어요. 그 부자 청년은 돈이 많으므로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가 튀어나옵니다. "예수님,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이 말은, 저 부자는 버리지 못하고 예수님을 좇았지만 나는 버렸다는 얘기입니다. 제가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니, 베드로가 버릴 것이 있어야 버리고 좇아오지요? 그런데 다 버리고 주를 좇았다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러니 우리에게는 무엇을 주시겠습니까?"(마 19:27) 라고 질문합니다. 이 베드로의 질문 앞에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겁니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베드로를 교훈하기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 더불어, 오늘 교회 안에 베드로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훈계하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왜 예수님을 좇는가? 왜 신앙생활 하는가? 물질적인 보상을 받기 위해 신앙생활 하는 자들이 교회 안에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 상급은 바라보아야 합니다. 열심히 신앙생활 하면 이 땅에 약속이 있지만 반드시 천국에도 약속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일하므로 덤으로 주는 약속을 받는 것과 물질적인 보상을 동기로 삼아 신앙생활 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겁니다. 베드로의 마음속에도 이런 마음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 땅에서 물질적 보상을 얻기 위해 신앙생활 하는 자들이 교회 안에 많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한 대가로, 헌금한 대가로, 십일조를 드린 대가로, 주님께 충성한 대가로 이 땅의 물질을 보상받으려고 하면 감사보다는 원망에 사로잡혀 남은 생을 망치기 쉽다고 예수님은 가르쳐 주십니다. 나중 된 자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신앙생활의 동기가 너무나 중요합니다.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가도 중요하고, 얼마나 많이 바쳤는가도 중요하고, 얼마나 헌신했는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열심히 헌신봉사한 동기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욥기>서를 보면 사탄이 나아와 하나님께 대적을 합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을 칭찬합니다. "너, 욥을 봐라. 참 신앙인이 아니냐. 얼마나 믿음이 좋으냐." 사탄이 이 얘기를 듣고 시큰둥해서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나님, 그게 뭐 대수입니까? 아닌 말로 욥은 재산 많지요, 자녀 잘 되지요, 건강하죠, 예쁜 마누라가 날마다 시중들어 주지요, 그러니 하나님을 어찌 안 섬기겠습니까? 나라도 섬기겠네요! 그게 뭐가 대단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시험권을 줍니다. "그래, 욥의 목숨만 건드리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보아라!" 사탄이 욥을 시험합니다. 먼저, 재산을 다 날립니다. 그 다음, 자녀들이 다 죽습니다. 자녀들이 버스 대절해서 단풍놀이 갔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다 죽습니다. 광풍이 불어오더니 증권 투자했던 300억이 날아가고, 부동산에 투자했던 200억이 날아가고, IMF가 와서 빈털터리가 되어 버렸어요. 건강했던 몸도 병들었어요. 검은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함께 한다고 했던 부인이 병들고 돈 없으니까 저주하고 도망가 버립니다. 여러분의 이야기로 생각해 보세요. 놀라운 것은, 욥은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욥은 얘기합니다. "내가 적신으로 나와서 적신으로 돌아간즉(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간즉)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라 내가 어찌 하나님을 원망하랴! 오직 나의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하나님의 목적이 있을 거야!" 친구들이 그토록 그를 야유하고 조롱해도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를 거부합니다. 여러분, 이 사탄의 호소는 지금도 유효합니다. 이 사탄의 말을 듣고 여러분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세요.
당신은 왜 신앙생활 하십니까? 왜 봉사합니까? 왜 헌금합니까? 왜 성가대하고 교사합니까? 물질적 보상을 바라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건강과 자녀를 지켜주시고 장수하게 하시는 것이 신앙의 동기라고 한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은혜와는 상관없는 자입니다. 교회 안에 물질적인 보상, 이 땅의 보상을 바라고 신앙생활 하는 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런 자들은 환경이 좋을 때는 감사하지만, 조금만 어려우면 여기 있는 사람들 같이 이를 갈며 언젠가 주인을 향해,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게 된다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물질적인 보상의식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서, 주님이 너무나 귀해서 신앙생활, 헌신, 봉사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그 외의 동기는 다 없애기 바랍니다.
2. 공로의식
왜 원망하고 불평했을까요? 이유는 공로의식 때문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많이 수고했다는 겁니다. 저 사람보다 먼저 와서 10시간이나 더 넘게 일했다는 겁니다. 교회 안에 이러한 공로의식 때문에 고생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불평은 왜 나를 알아주지 않느냐는 겁니다. 알아서 모셔야지, 내가 이만큼이나 했는데 왜 교회에서 알아주지 않느냐는 겁니다.
리더스다이제스트의 설문조사에 의하면, 목회자들의 불만 1호는 내가 그렇게 수고하고 사역했는데, 왜 교인들이 나의 수고를 알아주지 않는가 입니다. 반대로 교인들의 불만 1호는 내가 이렇게 이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봉사했는데, 우리 목사님이 나를 알아모시지 않는가입니다. 목사도 불평이 있고, 교인도 불평이 있습니다. 공로의식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잘 들으셔야 합니다. '이 교회가 이만큼 성장한 것이 누구 덕인데!' 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힘을 안 썼다면 이 교회가 이렇게 될 수 있었나! 어림도 없지! 이 교회 지을 때 내가 힘 좀 썼잖아!' '내가 여전도회에서 열심히 봉사하지 않았으면 오늘날 이렇게 되었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 은혜로 봉사합니다. 구원의 감격으로 교회에 들어와 천국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도 모르게 내 마음속에 공로 의식이 쌓이기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이 본문의 사람들처럼 원망합니다. 하나님과 사람들을 향해... 이것이 옳습니까?
그 날의 아침을 생각해 보세요. 추위에 떨고 있었던 그때! 오늘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까 없을까 하면서 노심초사하던 그때! 오늘 하루 벌지 않으면 가족과 내가 굶어죽을 그 때에, 주인이 찾아와 나를 불러주던 그때! 내가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행위를 깨끗하게 해도 구원받을 수 없었는데, 죄의 종이 되어 이곳저곳 추위에 떨고 있던 그 때에, 예수님께서 찾아와서 나같이 더러운 자를 불러주셨던 그날 아침을 생각해 보십시오. 신앙생활에 있어서 오래된 위험이 여기에 있습니다. 날이 가면 갈수록 구원받은 감격을 잊어버리는 겁니다.
내가 어떻게 주님 앞에 부름 받았는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부름 받았는데, 그 모든 은혜는 다 잊어버리고, 구원받아 포도원과 천국에 들어와서 내가 행한 작은 봉사만 기억에 남는 겁니다. 그래서 주인을 향해 얘기하는 겁니다. "나는 새벽 6시에 와서 주인을 위해 종일 일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게 뭡니까? 왜 내가 병들고 이렇게 밖에 못살아야 합니까?" 원망의 마음이 그들 속에 있는 겁니다. 이것이 목사와 안수집사, 집사의 위험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일찍 들어온 자의 실수였습니다.
그렇다면 늦게 들어온 자들의 마음을 한번 볼까요? 3시가 되었어요. 이제 다 포기했어요. 그날 5시까지 집에 돌아가지 않고 기다린 것으로 봐서 아마도 절대적으로 일자리가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일을 하러 나올 때 자녀가 이런 말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아버지, 내일까지 등록금 내야 돼!" 그 아이의 눈빛을 보고 나왔는지도 모릅니다. 새벽 6시에 나왔으나 뽑히지 못했어요. 9시에도 지나갑니다. 반나절 품삯이라도 기대했지만 12시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집에 돌아갈 수가 없어요. 마지막까지 기다려 봅니다. 오후 3시, 절망의 순간이 찾아왔어요. 주인이 나타났으나 그냥 지나갔어요. 이제는 일할 기회가 없습니다. 그런데 5시에 부름을 받았어요. 거기다가 1시간 일하고 하루 품삯을 다 받았어요. 이 사람이 얼마나 주인을 사랑하며, 주인의 은혜에 감사하고 감격해서 충성했겠습니까?
왜 남아 있었을까요? 돈을 들고 가지 않으면 굶어야 할 그 가족들을 생각하며, 차마 일을 하지 못했다는 말을 할 수 없어서, 가족에게 일한 척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아마 6시까지 계속해서 남아 있었을 겁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채로 말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5시에 오더니 자기를 향해 오라는 겁니다. "아, 오늘은 밤일이 있나보다!" 하고 생각했을 겁니다.
1시간 동안 열심히 일했을 겁니다. 밤일을 할 줄 알았는데 "땡땡!" 하고 종을 치는 겁니다. "1시간 밖에 일을 안 했으니 돈이라도 제대로 받을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봉급 봉투에 하루 품삯이 들어있는 겁니다.
늦게 들어온 사람들의 심정을 헤아려 보십니까? 이 사람들은 봉급을 받아들고 어떻게 했을까요? 6시에 가라고 한다고 갔을까요? 아닙니다. "주인님, 제가 도와드릴 일이 없을까요? 집 청소라도, 아니면 화장실 청소라도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비록 남자지만 빨래도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어떻게 당신을 도와드릴까요?" 이것이 늦게 들어온 자의 심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결론을 맺으신 겁니다.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저는 이 심정을 조금은 이해합니다. 지난 여름 서용산 선교사님이 사역하는 중앙아시아의 키르키즈스탄을 갔어요. 아침 일찍 선교사님과 차를 타고 가는데 길옆에 남자들이 모여 있었어요. 차가 가까워지니까 막 달려오더라고요. 물건 파는 사람인가 했더니 아니었어요. 바로 인력시장이었어요. 그 나라에서는 하루종일 일하면 2달러를 받아요. 2500원입니다. 이것도 잘 받는 거랍니다. 그 돈을 벌기 위해 건장한 남자들이 떼로 몰려 있는 겁니다. 오전 11시쯤 그 길로돌아오는데, 절반도 못 팔려 가고 축 쳐져서 나머지 사람들이 나무그늘에 앉아 있는 겁니다. 그들은 아마도 굶어야 될거라고 선교사님이 말해 주었어요. 그 심정을 생각해 보셨나요?
어떤 자가 먼저 된 자입니까? 감사하는 사람,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이 넘치는 사람입니다. "아, 하나님! 나 같은 사람을 구원해 주셨나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이 설교를 지금 저에게 하고 있습니다. 제가 안식년 나갔습니다. 지난 6년간 영안교회에서 목회 하는 동안 제가 참 유명한 사람이 되었더군요. 인터넷 방송으로 세계에 제가 나갔어요. 인터넷 방송에서 저의 설교를 가장 많이 클릭 한다고 하더군요. 미국 가는 비행기 안에서도 "박정근 목사님 아닙니까?" "어떻게 아십니까?" "인터넷으로 설교를 들었습니다."
제 마음속에 나도 모르게 이런 마음이 들었어요. "그래, 내가 안식년 받을 만 하지~ 영안교회 300명 될 때 와 가지고 내가 900명 만들었잖아~" 어느 날 아침, 지는 낙엽을 바라보며 말씀을 읽는데, 하나님께서 얼마나 비수같이 제 마음을 쳤는지 모릅니다. 교회에서 화장실 청소라도 시키면 감사하게 해야 할 나인데... 어느덧 공로의식이 내 마음을 꽉 잡고 있었어요. 하나님께서 안식년 동안 이 심령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저 뿐입니까? 오늘 교회 안에 공로의식에 사로잡힌 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교회에 일찍 20년, 50년 전에 구원받아서 하나님을 위해 많은 봉사를 하셨나요? 헌금과 일을 하셨나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께 뭔가 드린 봉사는 아닙니다. 교회에 나오셔서 주를 위해 봉사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우리의 특권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얘기합니다. "내가 모든 다른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라!"
오늘 우리는 추수감사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다른 것 다 접어두고 한가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추수감사절을 맞은 여러분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부모와 아내, 자녀와 사람들을 향해 불평의 마음이 있습니까? 감사의 마음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목회자가 알아주지 않는다고, 우리 교회가 왜 이렇게 되어 가냐고, 공로를 잊어버리는 교회가 아니냐고, 혹시 불평하여 먼저 하나님께 부름 받았지만 나중 된 자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까?
여러분에게 부탁드립니다. 나중 된 자가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랍니다. 먼저 된 자가 되셔야 합니다. 먼저 된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살아가는 겁니다. 아침의 공기도, 예배를 드리는 것도, 헌금을 드리는 것도... 모든 것을 감사하며 사는 자! 이것이 늦게 들어온 자의 심정이요, 천국에서는 이런 자가 먼저 된 자가 될 줄 믿습니다.
나중 온 사람들처럼
마 20:1-16 / 김광일 목사
성녀라고 불리웠던 테레사 수녀는 그녀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순결한 감동을 안겨 주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테레사 수녀가 남을 질투하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은 주변 사람들에게 커다란 도전이 되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테레사 수녀가 어린 아이의 고름을 만지면서 치료하고 있을 때 그녀를 방문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묻기를 "수녀님! 당신은 잘 사는 사람, 평안하게 살아가는 사람, 그리고 높은 자리에 올라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에 시기심이 생기지 않습니까? 이런 삶으로 정말 만족하십니까?" 라고 물었답니다. 그 사람의 질문에 대하여 테레사 수녀는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그녀가 대답하기를 "허리를 굽히고 섬기는 사람에게는 위를 쳐다볼 수 있는 시간이 없으니까요!" 라고 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녀의 말은 "나는 다만 섬기고 봉사하는 일에만 전념할 뿐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기하고 질투하며 생을 낭비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참 섬김의 지혜를 터득한 이 여인에게서 참된 섬김과 봉사를 배워야 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해 댓가를 받고 싶어합니다. 또한 댓가를 받음에 있어서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우열을 가리려고 합니다. 이러한 마음 때문에 받은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않고, 받은 은혜에 감사할줄 모르며, 오히려 원망과 불평 속에서 만족할 줄 모르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사람은 사람을 섬기거나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할 바를 다하고도 만족함이 없이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포도원에 나중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어 보려고 합니다. 중요한 점은 그들이 나중에 들어왔지만 주님께서 그들을 먼저 들어온 사람들과 똑같이 대해주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지 않았을까요? 나중 온 그들이야 말로 참된 섬김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참된 섬김의 생활을 하는 임원들과 성도들이 되어지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참된 섬김의 사람들은 일할 수 있게 하신 것만도 은혜임을 아는 자들입니다
우리나라도 IMF 시대가 시작되면서 제일 심각하게 발생한 문제가 바로 실업문제였습니다. 새벽부터 나가 일자리를 찾아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주인이 그들을 마지막에 품군으로 불러주지 않았다면 절망적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처자식을 돌볼 수도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직장이 없어 쉬고 있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소리가 있습니다. "그저 월급이야 주든 말든 일할 곳이 있으면 좋겠다"는 말입니다. 특히 요즈음 실업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가끔 듣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가 일단 취직을 하게 되면 완전히 달라집니다. 옛 말에 "뒷간에 갈 때 마음 다르고, 올 때 마음 다르다" 라는 말이 있는데, 그런 것을 보면 옛 말이 하나도 그른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 주인에게 불만을 토로하고 있는 품군들의 문제가 바로 이 문제입니다. 먼저 들어온 자들은 나중들어 온 자들과 똑같이 자기들을 주인이 대하고 있음에 불평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불러주셔서 일하게 하신 것이 얼마나 큰 은혜였는지 이미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님이 불러주심에 감사해야 합니다. 나중온 사람들은 그것을 너무나도 느낀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은혜를 절실하게 알았습니다. 먼저된 자들은 나중 들어온 자들의 불러주신 은혜만도 감사하고 있었음을 같이 느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본래 허물과 죄로 죽어야 했던 존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지 않으셨더라면 허송세월하다가 영원한 멸망으로 나아가야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통해 우리를 하나님의 일군으로 삼아주셨습니다. 또한 우리는 각자의 직장에서 열심히 일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망과 불평 속에 만족과 감사를 모르고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자신의 본래적 모습을 잊어버렸고 불러주신 은혜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은혜를 베푸셨고, 주님의 교회가 나를 필요로 하고 있음에 감사해야 합니다. 자신을 바로 알고, 은혜를 아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불러주신 하나님의 은혜, 일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참된 섬김의 사람들은 남과 비교하거나 시기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은 일을 다 마치고 주인이 품삯을 계산할 때에 나중에 들어온 사람부터 품삯을 주게 하였습니다. 그때 마지막에 들어와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의 돈을 주었습니다. 일은 한 시간 했는데 하루 품삯을 준 것입니다. 그러자 그 모습을 지켜 본 맨 먼저 온 사람들이 자신들은 더 받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자신들에게도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자 원망했습니다.
사실 그들의 원망과 불평은 자기의 일한 것을 받지 못한 데서 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한 데나리온을 약속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원망은 다른 사람이 받는 것이 배가 아파서 나온 원망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안고 있는 커다란 문제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문제는 내가 절대적으로 빈곤하고 못 살아서 생기는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잘 살아서 배가 아픈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홧김에 불을 질렀다는 사람도 나오고 있습니다.
어쩌면 사회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도 이러한 문제가 존재합니다. 서로 비교하고 시기하는 마음, 질투하는 마음 때문에, 심지어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도 마음이 하나가 되지 못하고 서로 돕지 못하고 있습니다.
유대의 랍비들의 이야기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천사가 두 여행객을 만나 같이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사람은 욕심이 아주 많은 사람이었고, 또 한 사람은 시기와 질투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한참을 여행하다가 천사가 그들과 헤어질 때가 되었습니다. 그때 천사가 말하기를 "두 분 중에서 먼저 저에게 소원을 말하는 분에게는 제가 그 소원을 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분에게는 첫째 사람이 얻을 것의 갑절을 드리겠습니다." 라고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욕심이 많은 사람은 상대방보다 갑절을 받고 싶은 생각에 먼저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시기심이 많은 사람은 상대방이 자기보다 더 많이 얻는 것을 견딜 수가 없어서 말을 못했습니다. 이렇게 한참 동안을 서로 눈치만 보고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참다 못한 욕심 많은 사람이 시기심이 많은 사람의 목을 잡고 말하기를 "자네가 먼저 말하게! 그렇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을걸세"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시기심 많은 친구가 할 수 없다는 듯이 말하기를 "내 소원은 눈 하나가 장님이 되는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 순간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시기심 많은 사람은 애꾸가 되었고, 욕심많은 사람은 두 눈이 멀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분명합니다. 시기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욕심을 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묵묵히 자기의 소원을 얘기하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면 됩니다.
오늘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가 바로 이것입니다. "내게 무엇이 있었다면, 혹은 내가 이렇게 태어났더라면" 하면서 남과 비교하지 말고, 자신이 해야 할 일만 하면 됩니다. 남을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말고 함께 힘을 합하여 감사한 마음으로 일하면 됩니다. 그리고 받은 은혜에 만족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참된 봉사의 자세이고, 거기에 바로 참된 기쁨과 행복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째로 참된 섬김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원칙을 따라 섬기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원칙이 무엇인지 오늘 본문 말씀이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본문에 나오는 포도원 주인은 바로 하나님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주인은 분명히 마음이 너그러운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일이 없어 놀고 있는 사람들을 그냥 둘 수 없어 다 포도원으로 불러들였습니다. 9시에도 나가서 불러들였고, 12시에도 나가서 불러들였습니다. 세 시에도 나가서 불러들였고, 퇴근 시간을 한 시간 남겨 두고도 나가서 품군들을 모았습니다. 이와 같이 주인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지금까지 잃어버린 시간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지난 시간을 후회할 필요 없이, 누구를 원망할 필요도 없이 주어진 시간에 열심히 일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주인에게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느냐가 아니었습니다. 포도를 얼마나 땄고, 몇 시간 일했느냐가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일할 기회를 줄 때 일하기만 하면 된다는 점입니다.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 주인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하면 됩니다. 사실 신앙 생활을 할 때 이같은 원리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포도원에서, 나의 교회에 와서 일을 하라" 라고 하실 때에 "예" 하는 마음으로 나서야 함이 중요 합니다..
때때로 일을 하다 보면 어떤 사람은 큰 일을 한다고 작은 일을 무시합니다. 또한 어떤 사람은 큰 일은 어려워서 못하고 작은 일은 시시해서 못한다고 합니다. 너무 늦어서 못하는 사람도 있고, 너무 앞서자니 잘난 척 하는 것 같아 못하다가 아무 것도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능숙하지 못한 것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에 나오신지 얼마 안된 분들은 늦었다고 염려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늦었으면 늦은대로 더 감사한 마음으로, 더 고마운 마음으로 열심히 일하면 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다 똑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유로 결론을 맺기를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되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된 사람은 누구이며,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된 자는 누구입니까? 섬길 수 있는 것이 은혜인 줄 알지 못하고, 자신의 수고를 내세우며 원망하는 사람, 남과 비교하고 시기함으로 불평하는 사람은 먼저 와서 많은 일을 하였지만 결국 책망받은 사람이 나중 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늦었지만 나중들어 온 사람은 선택된 은혜에 감사함으로 일하고, 하나님의 원리를 따라 일하는 사람은 칭찬받는 일꾼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는 바로 이러한 자세의 일꾼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언제나 나중 들어온 일꾼의 심정처럼 변하지 않고 불러주신 은혜를 늘 감사하고, 다른 이와 비교하지 않고 묵묵히 내 일만 하면서 하나님의 결산을 기다리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과 교회를 섬기기로 임명된 임원들과 우리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이런 자세로 신앙생활 하심으로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는 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마지막 품꾼의 자세
마 20:1-16 / 김홍도목사
여러분이 기도해 주셔서 중국 심천과 위해에서 큰 은혜 가운데 성회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시는 중에 어떤 포도원 주인이 이른 아침에 거리에 나가서 놀고 있는 사람들을 불러다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삯을 주기로 약속하고 포도원에 들여 보낸 사실을 말씀 하셨습니다.
아침 일찍이 나가서 품꾼을 들여 보내고 제 3시(오늘의 9시)에 나와 보니까 아직도 놀고 있는 품꾼을 불러다 들여 보내고, 제 6시(12시)에도 놀고 있는 품꾼을 불러다 들여 보내고 제 9시(3시)에도 또 놀고 있는 품꾼들을 들여 보내고, 제 11시(오늘의 오후 5시)에도 놀고 있는 품꾼들이 있어서 한 데나리온씩 주기로 하고 들여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고맙다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마감시간이 되서 주인이 품꾼들을 불러다가, 이른 아침에 온 사람이나 오후 늦게 들어온 사람이나 다 약속대로 한 데나리온씩을 나누어 주었더니 나중에 온 사람들은 황송하고 감사해서 받아 갔는데 먼저 온 자들에게도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 주었더니 투덜투덜 불평하면서 말하기를 “나중에 온 사람들은 겨우 한 시간밖에 일 안했는데 한 데나리온씩 주면서 종일토록 뜨거운 햇빛을 참아가며 고생을 한 우리들에게도 겨우 한 데나리온씩밖에 주지 않느냐?”고 시기하고 불평하는 말을 했습니다. 그때에 주인은 불평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내가 네게 약속한 대로 한 데나리온씩 주지 않았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내가 주고 싶어서 주는 것은 내 뜻인데 내가 착한 일하는데 네가 왜 나를 악하게 보느냐?”고 책망해 보냈습니다. 본문 말씀에 언뜻 이해가 안 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1. 포도원의 의미는 무엇인가?
천국에 관한 비유가 많은데, 어떤 것은 마음 천국에 관한 말씀이고, 어떤 비유는 천년왕국에 관한 말씀이고, 어떤 것은 영원무궁 천국에 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천국에 관한 말씀은 교회 천국에 관한 말씀입니다. 포도원과 같은 교회를 통하여 죄로 말미암아 멸망받을 소망없는 인간들을 불러서 천국 백성 만든다는 말씀입니다. 교회는 천국의 자녀를 생산하고 확산하는 구원의 기관입니다. 아침에 들어온 자나 점심때 들어온 자나 오후 5시에 문 닫기 직전에 들어온 사람들이나 다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 주었다는 것은, 어려서 믿었던지 청년기에 믿었던지 노령에 죽기 직전에 교회에 나와 예수님을 믿었던지 다 죄사함 받고 영생을 얻어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교회는 잃은 영혼을 안타깝게 찾으시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잘난 사람, 못난 사람, 악한 사람, 선한 사람 따지지 말고 교회로 불러들여 구원받게 해야됩니다.
너무 늦었다고 할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너무 죄가 많아서 소망이 없다는 사람도 없습니다.
2. 다같은 품삯을 주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본문에 보면 아침 일찍 들어온 사람이나 9시, 12시에 들어온 사람이나 오후 3시나 5시에 들어온 사람이나 다같이 한 데나리온씩 주었다고 했는데 그것은 우리가 영생을 얻고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우리의 일한 대가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전혀 자비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로 우리 죄를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를믿고영접하면값없이구원받는다는것을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장 16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복음을 잘 설명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공로나 가치를 따져 주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즉,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우리의 선행이나 공적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값없이 거져 받는 것)”고 하셨습니다. 50년 믿은 사람이나 30년 믿은 사람이나 1년 믿은 사람이나, 아니 오늘 처음 나온 사람이라도 우리 죄를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즉시 구원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4장 4절~8절에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인데 많은 사람들이 이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행함으로 구원받는다고 하거나 믿음과 행함 둘 다 있어야 구원받는다고 합니다. 지난번 위해에 갔더니 바로 전에 계시던 목사님이 자꾸 행위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쳐서 큰 갈등이 생겨 불안해 있다가, 이번에 은혜를 받고 성령받고 크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강도 한 사람은 죽는 순간에 죄를 회개하고(죽어 마땅하다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면서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기억해 주십시오”하고 믿음을 고백할 때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분명히 구원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중풍으로 혹은 암병으로 죽어가면서 예수님을 영접한 뒤에 얼굴이 천사같이 빛나며 천국이 보인다고 하고 천사들이 마중온다고 기뻐하며 숨을 거두는 모습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서 면류관이나 상급은 받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이단자들이 들어와서 예수님도 믿어야 하지만, 율법도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하는 교훈을 듣고 복음신앙을 떠나는 것을 보고 경고하신 말씀이 갈라디아서 1장 7절~9절에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강력히 말씀하셨습니다.
포도원에 들어간 품꾼들은 일찍 들어갔거나 낮에 들어갔거나 오후 늦게 들어갔거나 다 주인의 긍휼과 사랑으로 한 데나리온씩 받은 것처럼, 누구나 오래 믿었거나 새로 믿었거나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구원받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복음을 알지 못해서 일찍 들어온 품꾼처럼 불평합니다. 그렇게 쉽게 구원받을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3. 먼저 들어온 품꾼들의 불평
품삯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 즉 오후 5시에 들어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한 자들도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 주고 아침 일찍 들어온 자기들도 같이 한 데나리온씩만 주는 것을 보고 불평했습니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고 투덜거리며 불평했습니다. 때끼니가 없어 굶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불러다가 일시키고 삯을 주었거늘, 나중에 들어온 사람과 똑같이 삯을 준다고 선한 일을 행한 주인을 악하게 보면서 원망했습니다. 그때에 주인은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고 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는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된 자들도 있음을 보여줍니다. 반드시 먼저 믿고 오래 교회에 다녔다고 잘 믿는 것도 아니고 나중 믿었다고 잘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나중 믿는 사람들이 잘 믿고 축복받는다고 시기, 질투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오래 믿지 않았어도 바르게 믿고 잘 믿어야 하나님께 인정받고 축복도 빨리 받는 것입니다. 교회의 직분도 하나님이 알아서 맡겨 주시는데, 오래 믿었다고 해도 잘 믿지 못한 것은 생각지 않고 나중 믿은 사람이 집사 되고 권사 되고 장로 되었다고, 또 축복받았다고 목사나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먼저 온 포도원 일꾼과 같은 것입니다.
선한 것을 악하게 보는 죄를 짓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시기 질투하면 결국 자기만 더 손해를 보게 됩니다.
4. 마지막 품꾼의 봉사의 자세
이 천국의 비유에서 가르치는 중요한 교훈의 하나는 주님의 교회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오후 5시에, 마직막에 들어온 품꾼과 같은 자세로 일하고 봉사해야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하는 그 심정으로 살고, 일해야 합니다. 자기 공치사나 하고 “나를 몰라주다니”하는 마음을 갖는다거나 공로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공치사나 하는 것은 단연코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먼저 들어온 사람들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받았다고 슬슬 눈치나 보면서 시간만 보냈다고 생각됩니다. 게다가 나중 온 사람들에게도 자기들과 같이 한 데나리온씩 주는 것을 보고 불평했습니다.
그러나 맨 나중에 들어온 품꾼은 자기 가족들을 굶길 뻔했는데, 써주신데 대해서 감사 감격한 마음으로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일했습니다. 일할 자격도 없는 자기를 불러 일시켜준데 대해서 너무나 고맙고 감사해서 땀을 흘리며 열심히 일했습니다. 종일 농땡이 치며 일한 사람들보다 더 많이 일했을지 모릅니다. 주인이 보기에 비록 짧은 시간 일했지만 마음에 흡족했을 것입니다. 이 마지막 품꾼이, 먼저 들어와서 공치사나 하고 건방지게 구는 사람들보다 더 마음에 들었을 것입니다. 먼저 들어온 품꾼들도 주인이 불쌍히 여겨서 불러주지 않았다면 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한 데나리온도 못받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선택을 받아 예수님의 십자가보혈의 공로로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마지막 품꾼과 같은 자세로 신앙생활하고 겸손히 충성해야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일을 많이 했어도 “우리는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입니다.”하는 자세로 일해야 합니다. 주님의 일꾼으로 써준 것만도 감사한데 힘들다고 투덜대고, 새해에는 사표내고 그만 둘 생각이나 한다면 결코 주님의 축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포도원에 언제 오셨습니까?
마 20:1-16 / 안효관목사
비유는 사실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상황이나 진리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가르침의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가르치실 때 비유라는 방법을 가장 즐겨 사용하셨습니다.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할 정도로 비유를 많이 사용하셨고, 즐겨 사용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1절에서 “천국은 마치 …과 같으니” 라고 시작하고 있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천국에 대한 비유의 말씀입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떤 포도원에 할 일이 많아서 포도원 주인이 품꾼을 부르러 이른 아침에 일꾼들이 모여 있는 장터에 나갔습니다. 이스라엘의 노동시간은 아침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12시간입니다. 그러기에 포도원 주인이 이른 아침에 장터에 나가서 품꾼을 불러 포도원에 들여보냈다고 하는 것은 일을 시작해야 할 시간인 아침 6시에 품꾼을 불러서 포도원에 보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른 아침에 부른 품꾼으로는 일손이 부족하자 주인은 제3시 - 우리 시간으로는 아침 9시에 나가서 놀고 있는 사람들을 다시금 품꾼으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낮 12시와 오후 3시에도 시장터에 나가서 놀고 있는 사람들을 불러다가 품꾼으로 썼습니다. 그리고 하루 일과가 거의 다 끝나 가는 오후 5시 - 이제 일이 끝날 시간이 1시간 밖에 남지 않았는데도 시장터에 나가서 품꾼을 불러 포도원에 가서 일하도록 하였습니다.
하루 일과가 다 끝났습니다. 주인이 포도원 품꾼들을 불러 모아놓고 품삯을 지불하는데, 오후 5시에 와서 1시간만 일한 사람이나 아침 6시에 와서 12시간 동안 일한 사람이나 모두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 비유 속에서 포도원에 일꾼으로 부름 받은 품꾼에 우리 자신을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포도원에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일꾼 중에 하나라면 여러분은 몇 시에 부르심을 받은 일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본문 2절 말씀에 보면, 포도원 주인은 이른 아침에 일꾼을 고용하면서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을 하고 포도원에 들여” 보냈습니다. 9시에 나가서는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그렇게 약속하고 일꾼들을 포도원에 가서 일하게 하였습니다. 12시나 오후 3시에도 역시 같은 약속을 하고 일꾼들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오후 5시에 나가서는 얼마를 주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고 단지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그렇게만 말씀하고 일을 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오후 5시에 와서 한 시간만 일한 사람이나 12시에 와서 6시간 일한 사람이나 아침 일찍 와서 12시간 일한 사람이나 모두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을 주었습니다. 여기에 하루 종일 일한 사람들의 불평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들의 불평은 당연한 것일지 모릅니다. 한 시간만 일해서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면 12시간을 일한 자기들은 12 데나리온을 받아야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수치상으로 하면 그게 맞습니다. 그러나 포도원 주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사회에서 ‘한 데나리온’은 일용노동자나 군인들이 하루 일해서 벌 수 있는 품삯입니다. 일반적으로 한 가족이 하루 먹을 양식을 살 수 있는 돈이 한 데나리온입니다. 그렇다면 왜 포도원 주인이 맨 나중에 와서 한 시간만 일한 사람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주었는지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사실 얼마나 열심히 일했고 몇 시간을 일했느냐 하는 것을 가지고 품삯을 따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연봉제도의 도입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월급제도와 달리 연봉제도는 일한 능력에 따라서 적절한 대우를 받는 제도입니다. 단순히 얼마나 오랫동안 회사에서 근무를 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만큼 일했고 또 얼마만큼 직장에 도움을 주었느냐에 따라서 받는 보수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보니 같이 회사에 입사한 사람 사이에서도 회사를 위해서 얼마나 일을 했느냐에 따라는 받는 보수가 달라집니다. 그게 세상적인 경영방법으로 볼 때는 합리적인 방법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오는 포도원 주인은 달랐습니다. 세상적인 경영방식으로 품삯을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몇 시간 동안 얼마만큼 일했느냐 하는 것을 따지지 않고, 일꾼과 그들의 가족에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자신의 포도원에서 일한 사람들을 상품가치로 판단하지 않고, 존재가치로 판단했다는 것입니다.
만일 자신의 포도원에서 일한 사람이 늦게 채용되어서 하루 종일 일하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한 데나리온을 받아가지 못했을 경우, 그와 그 가족들은 그 날 저녁과 다음날에는 굶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포도원 주인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그래서 일한 대가대로 품삯을 지불한 것이 아니라, 그와 그의 가족의 생계와 삶을 위해서 한 데나리온씩을 지불한 것입니다.
그러나 일찍 온 품꾼들은 그런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자기들을 불공평하게 대우했다고 주인을 원망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먼저 포도원에 들어와서 하루 종일 일한 사람들이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불평했던 품꾼들에게서 발견되는 4가지 잘못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아침 일찍부터 일을 한 사람들은 자신과 사랑하는 가족이 그날 저녁과 다음날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감사해야지요. 그러나 하루가 다 저물어가도록 자신들을 불러주는 곳이 없어 서성거려야 하는 그들은 하루 종일 처자식이 굶주려야 할 일을 생각하면서 얼마나 마음 졸였겠습니까?
7절에 보면 하루 종일 장터에서 놀고 있는 사람에게 포도원 주인이 다가가서 물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만 있느냐?” 그랬더니 그들이 대답합니다.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을 품꾼으로 써달라고, 일용 노동자들이 불려 가는 시장터에 가서 하루 종일 서성거렸지만, 자신들을 써 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루 종일 11시간이나 시장터에서 서성이며 얼마나 마음 졸이며 기다렸겠습니까? 돈을 벌어가지 못하면 사랑하는 가족들이 굶주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이제 곧 하루 일과가 끝날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한 가닥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시장터에서 서성거리며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침 일찍 포도원에 가서 한 데나리온을 받기로 하고 일을 한 사람들은, 비록 힘들게 일은 했겠지만 가족들이 굶주려야 한다는 것 때문에 마음 졸이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포도원에 가서 열심히 일하든 게으름을 피우든지 간에 주인이 약속한 한 데나리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당연히 감사해야 했습니다. 오후 5시에 포도원에 고용된 사람은 11시간 동안이나 ‘사랑하는 가족이 굶주려야 한다.’는 것 때문에 안절부절 못하고 시장터를 헤매고 다녀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침 일찍 온 일꾼은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니 당연히 자신을 일꾼으로 써 준 포도원 주인에게 감사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감사 대신에 불평을 하였습니다.
우리 사회에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하는 것을 깨닫게 된 계기가 IMF였습니다. IMF가 터지고 수많은 실업자들이 발생하면서 일할 수 있는 자리가 있다는 것에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이태백’이라는 말입니다. 삼팔선, 사오정, 오륙도라는 말과 함께 ‘이태백’이라는 말이 유행하는데, ‘이십대의 젊은이 가운데 태반이 백수’라는 뜻입니다. 일하고 싶어도 일할 자리를 얻지 못해서 애를 태우고 있습니다. 또 청년 실업자가 50만명을 육박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땀 흘려 가며 열심히 일을 할 수 있는 일자리가 주어지고, 또 일할 수 있는 건강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아침 일찍 포도원에 온 일꾼들은 그런 것에 감사할 줄을 몰랐습니다. 오히려 약속한대로 한 데나리온을 주었다는 것에 불평했습니다.
여러분! 지금 내 형편, 내 상황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늘 더 좋은 상황, 더 좋은 형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런 바램은 지금 내게 주어진 상황에 감사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한 희망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내 상황, 내 형편에 불평하고 원망한다면 더 나은 내일, 더 좋은 희망의 날이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을 것입니다. 내 집은 아니라 하더라도 - 비록 전세나 삭월세 단칸방이긴 하지만 저녁이 되면 돌아가서 쉴 수 있는 내 보금자리가 있다는 것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넉넉하게 살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먹고 살 수 있는 경제적인 여건이 된다는 것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일할 수 있는 일터가 있고, 일할 수 있는 건강이 있다는 것에 우리는 늘 감사해야 합니다. 그렇게 감사하는 삶을 사는 사람에게 더 밝고 희망찬 미래가 열리게 될 것입니다.
아침 일찍부터 포도원에서 일한 사람의 두 번째 잘못은 다른 사람을 전혀 생각해줄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침 일찍 포도원에 와서 일한 일꾼이나 저녁 5시에 들어와서 1시간만 일한 사람이나 모두 일용노동자들입니다. 하루 일해서 하루 벌어먹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서로 자기들의 처지를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하루 종일 일해서 한 데나리온을 받는다면 1시간만 일한 사람이 한 데나리온의 1/10일을 받는다면 그 가족이 먹고사는데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하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단순히 자기보다 적게 일했으면서도 자기들과 똑같이 품삯을 받았다는 것을 가지고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11-12절에 보면 “집 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그렇게 원망하고 불만을 드러냅니다. 우리 속담에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습니다. 남이 잘 되는 것을 보면 못마땅해 하고, 남이 잘 되는 것을 시기하고 질투한다는 것입니다. 아침 일찍 와서 일하고서 한 데나리온을 받아 주인에게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꼭 그런 사람들 같습니다. 모두가 하루 일용할 양식을 얻었다는 것에 함께 기뻐하고, 어깨동무 하면서 포도원을 나설 수는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참으로 선하고 사랑이 있는 사람 - 이웃을 생각해 줄줄 아는 사람이었다면, 아침 일찍부터 와서 힘들어 일하기는 했지만, 주인에게 불평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료들이 나보다 적게 일을 하긴 했지만 하루 벌이를 했으니 참 다행이다’ 그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또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내 이웃이 잘되고 내 이웃이 어려움을 잘 극복하면 함께 기뻐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소유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웃의 아픔을 함께 아파할 수 있고, 이웃의 기쁨에 함께 기뻐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이 바로 신앙의 마음입니다. 남이 잘 되는 것에 배 아파하고, 남이 잘못되면 기뻐하는 그런 삐뚤어진 마음은 절대로 신앙적인 마음이 아닙니다.
세 번째로 아침 일찍 온 사람들은 늦게 온 사람들과 비교했기 때문에 불평하고 주인을 원망했던 것입니다. 분명히 아침 일찍 포도원에 가서 일하기로 할 때에 ‘한 데나리온을 받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주인은 그 약속대로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왜 불평이 생겼습니까? 그것은 한 시간만 일한 사람과 자신을 비교했기 때문입니다. ‘한 시간 일한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면 12시간 일한 나는 12데나리온을 받겠지, 아니 12데나리온을 아니라 하더라도 최소한 한 데나리온보다는 많이 받겠지’ 그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사실 포도원 주인이 자신에게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약속한 대로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일꾼을 대우하는 것을 보니까 주인이 꼭 잘못한 것같이 여겨졌던 것입니다.
여러분! 절대로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결국 손해 보는 것은 자기 자신뿐입니다. 아침 일찍 온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고 와서 하루 열심히 일하고 약속대로 한 데나리온을 받았기에 기쁨으로 포도원을 떠나갔다면 그에게 불평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과 비교하니까 불평이 생겼습니다.
우리는 가끔 다른 사람을 보면서 ‘저 사람은 저렇게 일이 잘 풀리는데 나는 왜 이렇게 일이 꼬이기만 할까’ ‘아무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것 같은데 하나님은 왜 나를 도와주시지 않을까, 내가 저 사람보다 못한 것이 뭔가’ 그렇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내 신앙이 자랄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내가 다른 사람보다 못하면 내 자신이 초라해집니다. 내 자신이 초라해지면 결국 손해 보는 것은 나 자신입니다. 또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내 상황이나 형편이 더 낫다고 우쭐거릴 필요도 전혀 없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우쭐거리는 그 순간 우리는 우리 마음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상실하게 됩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가 소개됩니다. 바리새인이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모범적인 기도를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버림받은 이유는, 바리새인의 기도가 세리와 비교하는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 18:11) 그게 바리새인의 기도입니다. 그런 기도는 하나님께 거부당합니다.
하나님은 비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언제나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나 자신의 모습만을 보아야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나대로 존귀한 존재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네 번째로 아침 일찍 포도원에 온 일꾼은 자신의 생각을 내세워 주인을 불의하다고 몰아세우고 있습니다. 그게 아침 일찍 온 일꾼의 잘못입니다. 주인은 약속한대로 한 치도 잘못함 없이 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적게 일한 사람에게는 사랑과 자비를 베푸셔서 넉넉하게 주셨습니다. 일찍 온 사람에게 잘못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넉넉하게 은혜를 베풀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먼저 온 사람은 마치 자신에게 잘못한 것처럼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래서 주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13-14) 주인은 분명히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한 시간만 일한 사람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은 주인의 마음입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15) 주인이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주인은 자신의 선한 뜻대로 일을 처리하고 있을 뿐입니다. 오히려 어려운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은혜를 베풀었을 뿐입니다.
우리도 때때로 하나님의 넓고 크신 마음은 생각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내 마음대로 판단하기에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하나님께 불평하지는 않습니까? 신앙생활은 내 생각, 내 판단, 내 마음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판단,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살면 우리에게 불평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면 우리 마음은 늘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몇 시에 부름 받은 일꾼입니까? 여러분은 몇 시에 하나님의 포도원에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언제 하나님의 포도원인 우리 후포중앙교회에 부르심을 받으셨습니까? 내가 다른 사람보다 먼저 신앙생활을 시작했고 내가 다른 사람보다 먼저 우리 후포중앙교회에 일꾼이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 더 많은 은혜를 베푸시고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한 것같이 느끼고 있다면, 우리는 아침 일찍 포도원에 갔으나 불평함으로 주인에게 책망을 들은 그 일꾼들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먼저 부름을 받았다는 것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봉사하고 수고했다는 것 때문에 다른 사람 앞에서 어깨가 우쭐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수고하고 봉사했다면 그것 자체로 우리는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먼저 부르시고 일할 수 있게 하셨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다른 사람들이 세상 속에서 자신의 부귀와 영달을 위해서 헛된 몸부림을 치고 있을 때,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내 생애를 투자할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몇 시에 하나님의 포도원에 오셨습니까? 내가 몇 시에 왔느냐 하는 것은 내가 언제 부름을 받았느냐 하는 시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후 5시에 와서 한 시간 일하고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받은 사람은 주인에게 감사하고 기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언제 하나님의 포도원에 오셨든지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고 늘 그 은총을 찬양한다면 우리는 5시에 온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한 시간만 일한 나에게 이런 큰 은혜와 사랑을 주시는구나 하고 감사한다면 우리는 맨 나중에 부름을 받은 자입니다. 맨 나중에 부름을 받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살아가면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들입니다.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16) 이게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바라기는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처럼, 여러분의 생애가 하나님의 포도원에 부름을 받았다는 것으로 늘 감사하고, 다른 사람을 생각해 줄줄 아는 넉넉한 마음으로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 그 뜻을 이루어가는 일꾼으로 살아가셔서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는’ 축복을 누리며 사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부름받은 기쁨
마 20:1-16 / 오정호목사
온전한 신앙은 삶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2:17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진단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과연 살아있는 믿음인지를 진단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여러 가지 일들을 만나는데 신앙적인 선택을 하는 순간 순간 하나님의 성품을 닮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동일한 상황을 만나도 어떤 사람은 아름답게 반응하지만 어떤 사람은 침몰하고 맙니다.
신앙은 말씀을 삶에 적용시키는 것입니다. 삶에서 말씀의 원리를 적용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말씀으로 살려다 보면 고난이 올 수도 있지만 오히려 우리의 영적인 근육이 강화되는 기회입니다.
우리 믿는 자들도 어려운 고난의 현장을 당하면 당황하고 슬퍼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계속 엎어져 있지는 않습니다. 주님이 힘 주시고 다시 일어나게 하십니다. 우리가 찬송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날마다 잘되기 때문만이 아니라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면서도 찬송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할지라도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하물며 잃은 것이 없다면 마땅히 찬송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본문은 잃은 것이 없는데도 감사하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불평과 불만으로 반복되는 삶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11,12절>. 10절을 보면 "1 데나리온을 받았다"고 했는데, 데나리온은 은전의 단위로 장정 한사람이 하루 일하고 받는 넉넉한 품삯입니다. 그런데 원망했습니다. '원망'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의성어로 나타나는데 '주절주절하다, 투덜대다'등의 못마땅해 불평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잃어버리고도 감사하는 사람이 있는데 받았는데도 원망합니다. 은혜가 떨어지면 받고도 불평합니다. 많이 받았고, 남들보다 좋은 환경으로 감사할 조건이 많지만 문제는 은혜가 떨어진 것입니다.
*저들이 원망의 자리로 떨어진 이유가 있습니다.
1. 은혜를 물질화 시켰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포도원에 먼저 부름 받아 들어온 자들입니다. 그전에 장터에서 놀고 서 있던 자들입니다. 일이 없는 실업자들입니다. 요구되지 않은 자들입니다. 사람은 아무도 자기를 필요로 하지 않을 때 가장 슬픕니다. 평생직장으로 알고 열심히 근무하다 여러 요인으로 직장을 그만둔 분들의 상실감은 대단히 큽니다.
포도원 주인의 눈에 띄어 일이 주어진 것은 대단한 행운이었습니다. 쓰임 받은 것에 대한 감격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관심은 주인이 베푼 은혜가 아니라 돈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절대적인 은혜를 상대적인 것으로 대체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은혜로 시작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물질화 되어버립니다. 하나님의 진리와 직분을 돈과 바꿉니다. 물질화 시킵니다. 절대적인 것을 상대화시킵니다. 그 결과는 원망과 불평뿐입니다.
인도에 한 가난한 이발사가 있었습니다. 가진 것이 없었지만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임금님의 머리를 만지는 특권을 누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영광으로 알고 콧노래를 부르며 머리를 만지는 이 이발사를 보고 임금이 언짢아 "나는 임금으로 권력, 물질 등 가질 것을 다 가졌고 너는 가진 것이 별로 없는데도 왜 나보다 행복해 보이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이발사가 "임금님 화 푸세요!"라고 하자 더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신하 가운데 똑똑한 자를 불러 그 원인을 상담했습니다. 그러자 그 신하가 말하기를 "임금님, 임금님은 아흔 아홉 개의 악순환을 하지만 저 사람은 그것을 모릅니다. 금돈을 저 사람에게 주어보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신하의 말대로 했습니다. 갑자기 예기치 않은 금돈이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이발사가 세어보다가 아흔 아홉 개이니까 스트레스를 받고 하나를 채우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되어 버렸습니다. 콧노래는 사라지고 모든 삶을 오로지 금화 하나 얻기 위해 전력질주 합니다.
가진 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하기 보다 없는 것을 갖기 위해 삶을 집착하다 보면 본질을 놓치고 결국은 감사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것이 삶의 왕좌에 앉아 우리의 행복을 다 가로챕니다. 이것 때문에 행복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주셨음에도 없는 것 몇 개 때문에 아무 것도 받지 않은 것처럼 사는 자들이 있습니다.
2. 이웃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여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장터에 다섯 번 나갔습니다. 다섯 번째 부름을 받은 자들은 한 시간 일하고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이 한 데나리온은 주인이 약속한 것이지만 품삯을 받는 자들은 너무 고맙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이들의 기쁨을 보고 같이 기뻐해야 하는데 먼저 와서 일했던 자들은 계산부터 하기 시작합니다.
본문의 비유는 천국의 비유입니다<1절>. 이 비유의 핵심은 구원의 은총이 하나님의 선물이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인간의 공적에 좌우되지 않고 하나님의 선택으로 말미암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법칙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달리실 때 인생 마지막 순간에 구원을 받은 한편 강도를 생각하면 억울해 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찬양해야 하는데, '나는 평생 예수를 믿었는데 불공평하지 않는가?'라는 상대적인 비교로 불평합니다. 내 마음속에 있는 자부심과 우월성이 꿈틀거리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만족이 안되면 견딜 수가 없습니다.
서울 구치소 경비대대장이신 박효진 장로님이 이런 간증을 하셨습니다. 한 부분을 전해 드린다면 "....전과자에 대한 시각을 바꿔야 합니다. 들켰느냐 안 들켰느냐, 잡혔느냐 안 잡혔느냐의 차이일 뿐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우리 모두가 죄인입니다. 로마서1:29-31에는 21가지의 죄목이 나오는데 세상의 법대로 한다면 각기 다른 형량이 내려지겠지만 하나님의 법은 무조건 사형입니다. 큰 바위 돌이라 해서 바다 물에 가라앉고 작은 조약돌이라 해서 바다 물에 뜨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시각에는 큰 죄든지 작은 죄든지 차이가 없습니다. 세상은 사형수로 가득 찼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형수들을 불러서 새 생명을 얻게 하시고 구원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상대적인 비교를 해서 더 나은 대접을 받고 싶어합니다. 이 마음을 고치지 않으면 은혜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이해하고 마음의 문을 넓혀야 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성도들의 마음속에 형제에 대해 열린 마음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형제들의 성공을 나의 성공으로 받아들이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3. 늦었다고 한탄하지 말고 불러주신 주님을 기쁘게 합시다<16절, 19:30>.
하나님의 구원은 한번 주시면 다시 빼앗아 가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은 천차만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에서 먼저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중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여호수아는 80이 넘은 나이였는데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그 명령에 순종하고, 후손들에게 유산을 분배하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나이가 많아 예수를 믿게 되었어도 남은 생애 주님을 더욱 기쁘시게 해드리는데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가정적인 면에서는 주님의 이름으로 자손들을 마음껏 축복해 주세요. 또 한가지는 새로남교회의 믿음의 청사진을 가지고 기도와 충성을 다하여 우리 새로남교회가 만년동에 아름다운 교회당을 건축하고 대전권의 죽어 가는 100만을 책임지는 영혼구원의 산실로 쓰임 받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과거인생을 실패했다고 생각되는 분들도 늦었다고 한탄하지 말고 이제라도 주신 것을 가지고 불러주신 하나님 앞에 기쁨을 드리는 삶을 살면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복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더 많은 기쁨의 제목들을 주십니다. 항상 구원의 은혜 쓰임 받는 기쁨에 젖어 살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먼저 부름 받은 특권이 있었지만 특권을 상실한 채 불평하는 사람들의 대열에 끼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 인생을 불러 주신 것만으로도 내 인생은 성공이요 축복인 것을 고백하는 감격시대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포도원 일꾼의 자세
마 20:1-16 / 최건호 목사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 20:16)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포도원 비유를 통해 제자들에게 천국에 관한 올바른 지식을 가르치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은 우리의 노력의 대가나 가치를 보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과 은혜와 주권을 가지고 포도원 주인의 자비와 은혜의 원리에 따라서 우리를 부르시고 보상하고 대접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포도원과 같은 구원의 동산이며 하나님의 선택받은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포도원에 들어온 마지막 일꾼과 같은 자세로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감당하는 복된 일꾼들이 되어야 합니다.
첫째, 소명의 은혜에 대해 감사해야합니다(마 20:7).아무도 쓰지 않고 쓸모없는 사람을 포도원 주인은 불렀습니다. 더욱이 마지막 시간에 부른 것입니다. 그래서 포도원 일꾼 가운데 가장 감사하고 감격해서 일한 사람은 마지막에 부른 사람입니다. 그는 정말 열심히 일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 포도원 주인은 감동을 받고 그에게 가장 먼저 품삯을 주었을 것입니다.(마 20:8) 오늘 우리는 이 마지막 부름 받은 포도원의 일꾼 같은 나를 불러주시고 일꾼으로 선택해 주신 그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일하는 일꾼의 자세를 본받아야합니다.
둘째, 주인은 부른 일꾼들에게 언제나 공정합니다(마 20:13).주인은 포도원에 일찍 들어온 사람과 늦게 들어온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씩 주겠다고 약속 했습니다. 그리고 일이 끝나자 포도원 주인은 약속한대로 일꾼들에게 한 데나리온씩 주었습니다. 일찍 온 사람에게나 늦게 온 사람에게 주인은 변하지 않는 신실함과 공정함을 가지고 계약을 성실히 이행한 것입니다. 그리고 약속대로만 한 것이 아니라 은혜로 품삯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일꾼은 소명의 은혜, 부르신 은혜, 선택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일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주인의 부름을 받고 택함을 받아 일꾼이 되었다는 사실에 감사하면서 일하는 일꾼이 되어야합니다.
셋째,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할 때 성공과 실패는 재능이나 주어진 여건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마 20:14).어떤 태도로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것을 그리고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소명감과 일에 대한 보람을 가지고 감사와 기쁨으로 일하는 사람은 피곤하지 않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2절에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전에는 이것을 몰라서 예수를 핍박하고 죄인 괴수와 같은 인생을 살았는데 이제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일꾼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부르시고 인정하시고 충성된 일을 맡겨 주시니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무슨 일을 할는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이라고 하는 소명감과 천직의식을 가지고 일할 때 그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되고 인생을 보람되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모두 포도원의 마지막 일꾼 같이 포도원 주인 되시는 하나님이 나를 하나님의 일꾼으로, 하나님의 성전에서 예배하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도하는 사람으로 불러주고 써주신 것을 감사하면서 일할 수 있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렇게 일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능력과 건강과 성령의 신령한 은사를 우리에게 더 부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넓은 은혜 큰 구원
마 20:1-16 / 황광민 목사
들어가는 이야기
영국의 헨리 4세는 법을 숭상하던 인물로 손꼽힙니다. 그는 법을 어길 때는 그의 아들도 가차없이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런데 헨리4세 때에 영국의 부녀자들의 사치가 심했습니다. 얼마나 사치가 심했던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왕은 계속하여 계몽도 하고 경고도 하였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마침내 헨리 4세는 금이나 보석 등으로 몸을 치장하는 것을 금한다는 법을 공포하였습니다. 그러나 법이 공포되었어도 효과가 없었습니다. 사치는 여전하고 사람들은 방탕했습니다. 왕은 난처했습니다. 전부 잡아 가둘 수도 없고 법을 폐기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왕은 궁리 끝에 사치를 금하는 법에 단서 조항을 부칙으로 추가시켰습니다. "단, 이 법은 매춘부와 소매치기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자 법의 효과가 금방 나타났습니다. 그렇게도 심하던 사치의 바람이 가라앉았다고 합니다. 법은 지켜질 때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은 천국의 법칙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1절을 보면 "천국은 마치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가나 집주인과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천국은 마치 무엇과 같다"는 표현은 천국의 법칙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한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라에는 통치의 법칙이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그 하나님의 통치의 법칙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는 이 법칙을 따라 신앙 생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포도원 주인을 주인공으로 하여 비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느 날 주인은 품군들을 모아 하루 한 데나리온 씩 품삯을 정하고 일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제3시 즉 오전 9시에 장터에 나가보니 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주인은 그들도 포도원에 가서 일하게 하였습니다. 또 정오에는 오후3시에도 장터에 나가 놀고 있는 사람들에게 상당한 품삯을 약속하고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상식을 뛰어 넘는 파격적인 행동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후5시에도 장터에서 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주인은 그들에게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품군으로 써주는 사람이 없어 놀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주인은 그들도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라고 하였습니다. 일이 마칠 때가 한 시간 밖에 남아 있지 않았을 때의 일입니다.
그리고 해가 저물어 품삯을 나누어주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주인은 맨 나중에 오후 5시에 온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하루 품삯에 해당되는 금액이었습니다. 이에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랐습니다. 모두가 감격했습니다. 한 시간 남짓 일하고 하루 품삯을 받은 사람들도 감격했습니다. 먼저 와서 일했던 사람들도 주인이 더 많이 줄 것이라는 기대 가운데 감격했습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주인은 3시에 온 사람에게도, 정오에 온 사람에게도 한 데나리온 씩만 주었습니다. 심지어 하루 종일 일한 사람에게도 똑같이 한 데나리온 만을 주었습니다.
이에 아침 일찍 온 사람들이 불평을 했습니다. "주인님, 나중에 와서 한 시간만 일한 사람들도 한 데나리온을 받았는데 하루 종일 더위를 이겨가며 수고한 우리를 똑같이 여겨 한 데나리온을 주시니 너무합니다." 그러나 주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다.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약속하지 않았느냐? 네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사람에게 너와 똑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나를 악하게 보느냐? 이와 같이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리라." 아멘
앞서 간다고 잘난 척 말라
이 말씀은 예수께서 앞서간다고 잘난 척 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앞서 간다고 잘난 척하지 말라." 이것이 본문을 말씀하신 1차적인 목적입니다. 본문 바로 앞에, 마태복음 19장 30절에,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 비유의 끝에도 똑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즉 먼저 간다고 잘난 척 하는 사람들에게 경고하신 말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앞서가는 사람들은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초청 받은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죄인들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이렇게 작은 자, 죄인들은 은혜를 받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들에게도 똑같은 은혜를 선포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유대인 지도자들이 반발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훌륭한 지도자들과 세리 같은 사람들이 똑같은 은혜를 받을 수 있느냐는 항의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똑같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잘난 사람들도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못난 사람들도 물론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고는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앞서간다고 잘난 척 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교만에 빠지지 마십시오. 절대적 선이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십시다. 얼마든지 역전 당할 수 있습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될 수 있습니다.
상식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은혜
또한 본문의 말씀은 상식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줍니다. 주인이 아침 일찍이 품군들을 만나 품삯을 정하고 일을 시키는 것은 당연한 모습입니다. 또 오전 9시나 정오쯤에 나가서 놀고 있는 사람들에게 상당한 품삯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일을 시킨 것까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후 3시나 오후 5시에 사람을 불러 일을 시키는 것은 상식을 뛰어넘는 행위입니다. 물론 저들이 그때까지 일 시키는 사람이 없어 놀고 있었으니 불쌍한 사람임에는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 일을 시키는 것은 일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파격적인 행동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파격적인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잘난 사람만 부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못난 사람도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지식 있는 사람만 부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능력 있는 사람만 부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은총을 부어 주십니다. 이것은 보통 사람들의 가치관과는 매우 다릅니다. 사람들은 잘난 사람을 좋아합니다. 잘난 사람들과 사귀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잘난 사람이거나 못난 사람이거나 똑같이 사랑하십니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똑같이 사랑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배워야 합니다. 잘난 사람만 좋아하지 말고 못난 사람도 아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실제로도 잘난 사람들과 같이 하는 것보다 못난 사람들과 같이 하는 것이 편합니다. 로마 대학의 한 수학교수는 "미남 미녀들은 타인의 행복을 침해하고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미남 미녀들은 사람들에게 비현실적인 기대감을 주어 사회를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잘난 사람을 배척하자는 말은 아닙니다. 성도는 잘난 사람만 좋아하지 말고 못난 사람도 똑같이 좋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넓은 은혜
또한 본문은 하나님의 넓은 은혜를 소개합니다. 본문의 주인공 포도원 주인은 한 시간만 일한 사람에게도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넓은 은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슨 자격이 있어서 받은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이 무슨 자격이 있어서 하루 품삯을 똑같이 받겠습니까? 자격이 없어도, 자격이 모자라도 똑같이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의 넓은 마음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한 시간 일한 사람이 한 데나리온 받은 것을 자격이 있어 받았을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즉 그 사람은 한 시간 남은 늦은 시간에 일군으로 부름을 받았으니 감사한 마음으로 일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 시간 동안이지만 쉬지 않고 정말 최선을 다하여 일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래서 주인을 기쁘게 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하나님의 은혜보다 인간의 공로를 앞세우는 생각입니다. 인간의 공로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만족시켜 드릴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공로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먼저 부름 받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공로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본문의 비유에서 먼저 부름 받은 사람들은 주인의 처사를 원망하고 비난하였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나중에 온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 속에는 공로사상이 깔려 있습니다. 자기들은 받을 자격이 있지만 받을 자격도 없는 사람들에게 왜 똑같이 대우해 주느냐는 불평입니다. 이러한 공로사상은 하나님의 넓은 은혜와 대치됩니다.
우리는 무슨 자격이 있어서 구원받지 않습니다. 구원받는 것은 철저히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며 내세운 구호가 바로 이것입니다. 개혁주의자들은 "오직 은총으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성서로"라는 세 마디를 외쳤습니다. 그 중에서 첫 번째가 "오직 은총으로" 입니다. 무슨 자격이 있어서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무슨 공로가 있어서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선행이나 공로가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직 선행이나 공로의 무슨 자격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넓은 은총 가운데서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구원을 받습니다.
웨슬리도 성화를 강조했지만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성화 또는 성결을 이루자는 것은 구원의 조건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구원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화를 이루자는 것입니다. 웨슬리에게 있어서도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 받습니다. 웨슬리도 개혁자들처럼 오직 은총, 오직 믿음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초 위에 성화의 교리를 세웠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넓은 은총에 의한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의 신비에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 은혜의 자유
그리고 본문의 비유는 하나님의 자유 하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주인공은 자신의 넓은 은혜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비방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나의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어떤 조건에서도 자유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공로, 선행 등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구속받지 않습니다. 시험관은 점수에 의해 합격을 시킬 수 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합격시키거나 불합격시킬 수 없습니다. 시험관은 그 점수를 떠나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시험점수에 따라 다르게 판정을 내려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조건이나 자격을 초월하여 자유롭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칼빈은 그러나 하나님의 자유를 지나치게 강조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절대주권, 절대자유를 강조한 나머지 인간이 구원받거나 구원받지 못하거나 하나님께서 정하신다고 주장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구원하고 어떤 사람은 선택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이중 예정론이 그것입니다. 이것은 지나친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자유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유는 인간의 공로, 선행, 자격에 속박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은총을 베푸시는 자유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넓은 은혜 큰 구원을 환영합시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넓고 높아서 인간의 자격을 따지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은총을 베푸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요한 웨슬리 목사의 주장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넓고 큰 은혜를 감사하면서 충성을 다하는 성도가 되십시다.
먼저된 자가 나중될 수 있습니다
마 20:1-16 / 이동원목사
저는 지난 열흘 동안 105분의 우리 교회 성도님들을 모시고 터키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아무래도 터키 성지 순례의 꽃은 갑바도기아 방문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이 지역은 지상에 존재했던 가장 거대한 규모의 암굴 공동체와 지하도시들이 원형그대로 남아있는 곳인데 여기서 우리는 지난날 박해시대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어떤 고난을 감내하며 믿음의 삶을 살았는가를 온 몸으로 느낄수 있는 현장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작은 암굴 까지 합하면 무려 3,000여개의 암굴 교회들의 족적들이 남아있는 불가사의한 현장에서 우리는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이 얼마나 안이한가를 자책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특히 "깊은 우물"이란 뜻을 가진 지하도시 데린큐유에서 우리는 무려 지하 120m 약 8층까지의 땅속으로 내려가 십자가 형태의 지하 예배실에서 순례단과 함께 찬양하고 예배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저의 마음속에 단 하나의 질문이 있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들이 이런 고난을 감내하였을까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 안에서 들려온 대답은 하나였습니다. 나중에 웃는자가 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훗날에 주님앞에서 그리고 후손들앞에 부끄럽지 않을 복음의 미래를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물론 1세기의 모든 성도들이 예외없이 다 그런 승리로운 믿음생활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는 적지 않은 배도와 변절, 타락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딤후 1:19-20에 보면 "--어떤 이들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라고 변절자들의 이름까지 기록합니다. 딤후4:10에는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라고 기록합니다.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당장 오늘의 편안함을 위해 내일의 역사를 그리고 영원을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역사의 부끄러운 자들로 남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비극은 비단 후메내오, 알렉산더, 데마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이것은 여러분과 저의 이야기가 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먼저 된자들이 나중 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잘 출발하여 나중에 부끄러운 자가 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처음은 보잘 것 없는 출발이었으나 나중 인생을 영광으로 마무리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의 포도원 일군의 비유는 바로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담고 있습니다. 먼저 된자들이 나중되는 이유-무엇때문일까요?
1. 흥정의식 때문입니다.
본문의 배경은 마태 19:27-30입니다. 어느날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주님께 나아와 매우 솔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19:27을 보십시오.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아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이것이 바로 흥정의식이 아닙니까? 그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서 보이지 않는 영생의 약속으로 만족할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의 삶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의 변화로도 만족할수 없었습니다. 피부에 와닿는 손익계산상의 플러스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Give가 있었으면 구체적인 Take가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주일날 시간 드리고 물질 드리고 몸 드려 봉사했으면 무엇인가 가시적인 축복이 내게 돌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식이 잘되거나, 증권이 잘 되거나 아니면 아파트 값이라도 오르든가 아니면 로또라도 당첨되든가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흥정의식 곧 바겐 의식인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이 흥정이 시작되자 믿음의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아무래도 손해본다고 느끼기 시작한 것입니다. 본전 생각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위기가 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19:29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반드시 배로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흥정의식으로 너는 이제 나중된 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19:30말씀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않으시고 20장 본문에서 포도원 일군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신 이유가 무엇때문입니까? 여기 먼저 부름심을 받아 포도원 일군된 자들에게 한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20:3을 보십시오. "또 제 삼시에 나가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7절을 읽어보십시오. "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어떤 단어가 반복됩니까? "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본래 부르심을 받기전 인생을 낭비하고 무의미하게 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부르시어 구원하셨습니다. 이것이 은혜 아닙니까? 우리 죄사하시고 구원 하신것만 해도 감사한데 거기다가 일군까지 삼아주셨습니다. 이것이 또한 은혜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이 은혜의식을 상실할 때 우리는 흥정의식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그때가 나중됨의 위기가 찾아오는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2. 비교의식 때문입니다.
본문 11절에 보면 오전 삼시(우리 시간으로 오전 9시) 육시(정오12시) 구시(오후3시)에 먼저 와서 일한 사람들이 제 십일시(오후 5시)에 온 사람이 자기들과 동일한 한 데나리온의 삯을 받자 주인을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받은 후 집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11절) 왜 원망합니까? 10절에서 대답을 찾아보십시오.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 씩 받은지라" 나중 온 자와 비교한 것입니다. 이 비교가 불평을 낳은 것입니다. 원망을 낳은 것입니다. 우리네 인생살이나 신앙생활에서의 그 어느 날 문득 내안에서 일어나는 불평을 성찰해 보십시오. 그 대부분의 원인이 비교의식 때문인 것을 우리는 쉽게 간파할수 있습니다. 비교하기 전까지 행복했던 내가 상대적 비교를 시작하자 갑자기 자신을 불행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이 비교의식이 발전하면 질투도 되고 계급의식으로 자리잡기도 합니다. 이번 성지순례에서 이런 재미있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이 여행이 경건한 은혜의 여행이 되도록 쇼핑을 허용하지 않다가 마지막 날 이스탄불에 와서 그 유명한 그랜드 바자에서 두 시간정도 쇼핑 시간을 드렸습니다. 얼마나 행복해 하시는 지요? 버스에 물건들을 사가지고 와서는 서로 얼마를 깍았다고 자랑을 하더니 갑자기 표정들이 시무룩해 지시더러구요. 자기보다 꼭같은 물건을 더 싸게 산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자 행복이 달아난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이런 비교의식을 극복할수 있을까요? 비교의식의 성경적 처방은 창조의식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 한 사람도 꼭 같지 않게 다르게 지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얼굴도 다르고 개성도 기질도 다르고 은사도 다르고 따라서 인생의 가는 길이 다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만의 독특한 소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 소명을 발견하고 내가 갈길을 나 답게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옆집 아줌마처럼 꼭 같이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다른 색깔의 인생을 산다는 것이 인생의 다양성의 멋이요 아름다움인 것입니다. 현대인의 불행은 획일화의 불행인 것입니다. 제발 다른 사람이 당신과 다르게 살 자유를 허용하십시오. 당신의 방식을 강요하지 마십시오. 모방하지도 마십시오. 그러면 비교할 일도 질투할 일도 없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만 허락하신 그 삶의 정황을 감사하고 즐거워하십시오. 그리고 당신과 다른 이웃이 당신 곁에 있는 것을 즐거워하십시오. 그러면 나는 나의 영역에서 언제나 먼저 된 자로 살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고 비교의식의 노예가 되면 그 순간 이미 당신은 나중됨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3. 공로의식 때문입니다.
10절에 먼저 온 자들이 더 받을 것을 기대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더 받을 만큼 공로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당연히 더 대접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공로의식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공로의식에 사로잡히는 순간 반드시 우리를 찾아오는 귀신들이 있습니다. 섭섭 귀신입니다. 내가 이 집안에서, 이 직장에서, 혹은 이 교회에서 이만큼 공로를 세웠는데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섭섭하다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우리는 섬김의 기쁨을 잃어버립니다. 신앙생활의 감격을 상실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 공로의식을 극복할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출발점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다윗은 자신의 기도실에 목동시절의 의상을 늘 걸어놓았다고 합니다. 그가 목동의 자리에서 출발한 것을 잊지 않고자 한 것입니다. 삼하 7:18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잇습니다. "다윗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관대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우리의 출발점이 어디라고 하셨습니까? 장터에서 놀던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값을수 없는 은혜에 빚진 자들인 것입니다. 저는 공로의식을 극복하는 유일한 처방이 바로 이 빚진자 의식이라고 믿습니다. 바울은 로마서1:14에서 "--나는 빚진자라"고 말합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자라"
그래서 옛날 우리 선배들은 기도를 마무리하며 "공로없는 죄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혹은 "다만 예수님의 공로 받들어 기도하옵나이다"했던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 주신 주님 그리고 그 구원의 주님을 우리에게 증거하기 위해 생명을 버린 우리의 선배들을 생각하면 실로 우리는 빚진자에 불과합니다. 이 빚진자 의식이야 말로 우리를 겸허한 봉사자로 살게하는 유일한 성경적 처방이라고 믿습니다. 이번 터키 성지순례에서 우리는 서머나(이즈밀)에서 폴리캅 기념 교회를 방문하였습니다. 사도요한의 제자로서 서머나 교회를 목양하던 폴리캅은 유대인들의 참소로 체포되어 총독앞에 끌려 옵니다. 총독은 그가 예수님을 부인하기만 하면 그를 놓아 주겠다고 말합니다. 이때 폴리캅은 이런 유명한 대답을 남깁니다. "나는 86년간이나 그리스도를 섬겨왔오. 그분은 이제까지 한번도 나를 해롭게 하신일이 없건만 내가 어찌 나의 왕을 져버릴수 있겠습니까?"
유대인들과 형리들은 그 날이 안식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장작개비들을 모아 불을 지폈습니다. 폴리캅은 조용히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준비되셨습니까? 그러면 이제 나를 태우시오. 내가 어찌 잠시 타다가 꺼질 불을 두려워하겠오. 어서 할 일을 하시오" 그리고 폴리캅은 기도를 시작합니다. "오 주님 저를 구원해주시고 이렇게 순교자의 반열에까지 세워주시니 웬 은혜입니까? 이제 저를 받아 주시옵소서" 이상하게 불이 그를 에워싸고 태우지 못하자 한 형리가 칼을 들어 그의 옆구리를 찌르매 붉은 피가 솟구치며 그는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이 폴리캅 기념 교회 천장에는 불란서의 유명한 화가 레이몽 페레(Raymond Pere)가 그린 그의 순교성화가 그려 있는데 인상적인 것은 형리 뒤에 두손이 포승줄에 묶인 화가 자신의 그림을 그려 놓은 것입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의 순교는 바로 나를 대신한 순교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값없이 선물로 주어지지만 그러나 이 선물이 나에게까지 전달되기 위해서는 문자 그대로 순교자들의 값비싼 피의 강이 흐르고 흘러 우리가 마침내 복음의 소식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빚진자 들입니다. 갚을수 없는 은혜에 빚진자 들입니다. 이 빚진 자의 의식이 우리를 지배하는 한 우리는 방종할수 없습니다. 교만할수 없습니다. 다만 감사함으로 한 평생 주님과 주의 백성들을 섬길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런 빚진자의 의식을 상실한다면 우리는 "먼저 된 자로서 나중되리라"는 주의 책망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은총의 의식과 빚진자의 의식으로 산다면 오히려 나중된자라도 먼저 되어 주 앞에 설 것입니다. 할렐루야!
제가 이번 성지순례를 인도하면서 계속하여 묻고 대답하고 강조했던 일관성 있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일세기의 성도들 바울 요한 누가 디모데 오네시모 브리스가와 아굴라 에비브라 이들은 모두 자기 시대 자신들의 삶의 장에서 복음의 빚진자로서 그 책임을 다하고 갔다는 것입니다. 먼저 된자의 책임을 다 한 것입니다. 이제 남은 질문은 이것입니다. 이 시대의 먼저 된자로서 당신은 어떻게 살고 계십니까? 어떻게 복음의 빚을 갚으려 하십니까? 아니면 지금처럼 그렇게 안이하게 사시다가 먼저 되고도 나중된자로 주님앞에 서시겠습니까?
<설교 적용 질문>
1. 본문의 배경인 마태 19:27의 질문을 베드로가 던진 이유를 말해 보십시오.
2. 본문의 3절과 7절에서 "놀고"라는 단어가 시사하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3. 10-12절에서 먼저 온 자들의 항의의 밑바탕에 깔려있는 의식을 다시 풀어서 말해 보십시오.
4. 먼저 부름 받은 일군이 나중 되는 이유들을 전체적으로 정리하면서 나에게도 해당되는 의식들이 있는지 나누어 보십시오.
포도원에 들어가라
마 20:1-16 / 성홍모목사
우리들이 운전하면서 길을 가다보면 접촉사고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교통사고를 겪고 쓴 간단한 글을 있어 읽어본 일이 있습니다.
'가장 귀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승용차를 운전하여 출근하는 길에서 있었던 사고를 경험한 한 사람의 글이었습니다. 길을 가는데 옆 차가 바짝 붙여지나가면서 승용차의 문짝을 찍 긁어놓았습니다. 그는 차를 멈추었습니다. 상대편 차를 운전하던 젊은 부인이 허겁지겁 내리더니 그에게 다가왔습니다. 그 여성이 얼마나 놀랐는지 얼굴빛이 사색이 되어 있었습니다. "미안합니다. 제가 아직 운전에 서툴러서요. 변상해드릴게요" 그 여성은 바로 잘못을 인정하였습니다. 그 여성은 자기의 차 앞바퀴 부분이 심하게 찌그러진 것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이틀 전에 산 새 차인데 이렇게 찌그러뜨려 놓았으니 남편 볼 면목이 없다며 계속해서 눈물을 뚝뚝 흘렸습니다. 사고를 당한 사람도 그녀가 참으로 안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튼 사고 보고서에는 운전면허증과 보험 관계 서류 등에 관하여 상세히 적어야겠기에 여러 증빙 서류를 담은 운전석 옆의 사물함을 열어 한 봉투를 꺼내주었습니다. "이건 저의 남편이 만약의 경우를 위해서 필요한 서류들을 담아둔 봉투예요" 이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또 다시 울먹였습니다. 그런데 그 서류들을 꺼냈을 때 맨 앞장에 굵은 펜으로 다음과 같은 커다란 글씨가 적혀 있었습니다. "여보, 만약 사고를 냈을 경우에 꼭 기억해요. 내가 가장 사랑하고 걱정하는 것은 자동차가 아니라. 바로 당신이라는 사실을" 그녀의 남편의 글이었습니다. 사고를 당한 이 사람이 그녀를 다시 쳐다보았을 때 그녀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습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고 걱정하는 것은 자동차가 아니라, 바로 당신이라는 사실을"
예, 그래야 합니다. 우리는 물질중심의 가치관을 버리고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소중하게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한 사람의 영혼입니다.
성경을 읽는 중에 참으로 해석하기 어려운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오늘 읽은 16절의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세상적인 가치나 기준을 놓고 보면 나중 된 자는 언제나 나중에 서게 됩니다. 먼저 된 자는 먼저 되는 법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세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일은 시간적으로 먼저 오거나 일찍 온 것 때문에 단순 비교로 어떤 특권이 주어지거나 서열이 메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앞에서는 조금 늦게 왔어도 늦은 것이 아니요, 일찍 왔어도 이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포도원에 언제 들어오셨습니까?
제자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이런 질문을 드렸습니다. 마태복음19:27에서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라고 했습니다. 이 때 우리 주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19:28-30) 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시는 여러분, 주님께 충성하시는 여러분, 무엇을 좀 받을 것이라고 하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여러 배를 받고, 상속한다는 말은 주님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요, 나중에 가서 그런 은총이 있으면 좋고 그런 보상이 없어도 우리의 믿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의 비유에서 말씀하는 것은 구원이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있다는 것과 인간적인 선후나 우열의 차이가 없이 평등하게 주어진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포도는 맛이 좋고, 당도가 많아 초가을의 과일로도 손색이 없습니다. 우리 포도는 그 맛에 있어서 세계 어느 나라의 포도보다 뛰어납니다. 특별히 서해안 일대의 포도는 하루에도 늦은 시간까지 햇볕을 받아 당도가 뛰어나고 상품가치가 아주 높습니다. 이스라엘도 지중해성 기후에 일조량이 풍부하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좋은 포도를 재배하고 세계 제일의 포도주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지중해를 끼고 있는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포도를 많이 재배하고 포도주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좋은 포도를 수확하려면 할 수 있는 한 하루라도 햇볕을 더 받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더 이상 두면 물러지고 상품의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에 수확할 때에는 하루, 이틀 사이에 일제히 수확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 때는 많은 일손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오늘은 줄거리를 말씀드리고, 이 비유가 주는 의미를 찾아보겠습니다.
포도원을 경작하는 주인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포도원에 일할 것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주인은 인력시장이 서는 장터에 가서 일꾼을 불러 포도원으로 들여보냈는데, 그 사람과 하루의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합의하고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게 하였습니다. 한 데나리온이란 돈은 로마의 은돈으로 군인과 일꾼의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이른 아침이란 해뜰 무렵인데 오전 6시경을 말합니다. 주인은 일꾼들을 데리고 그의 포도원에 돌아와 이런 저런 일들을 명하고 또 다시 인력시장이 서는 장터에 나가보니 오전 9시경이었는데, 그 때도 몇 사람들이 빈둥거리고 있었습니다. 주인은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도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시오. 적당한 품삯을 주겠소"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일을 하러 포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들과는 적당한 품삯을 주겠다고 하였으니, 꼭 한 데나리온을 주겠다고 약속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주인은 일꾼들을 포도원으로 인도하고 또 장터에 나가보니 낮 12시가 되었는데, 놀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 포도원에 들여보냈고, 다시 오후 3시에 나가보았는데, 여전히 놀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 포도원에 들여보냈습니다.
주인은 오후 5시가 되었을 때에 장터에 가보니 아직도 빈둥거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왜 당신들은 온종일 이렇게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고 있소"하고 물었습니다. 그들이 주인에게 말하였습니다.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켜주지 않아서 이러고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때에 주인은 이들에게 말했습니다. "당신들도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시오"라고 했습니다.
날이 저물어갑니다. 이스라엘에서 일꾼의 품삯은 당일로 지불해야 되었습니다. 일꾼들이란 하루 벌어 하루 먹어야 할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었기에 임금을 체불하거나 여러 번 나눠주면 살아가기가 힘들었습니다. 신24:15에 "그 품삯은 당일에 주고 해 진 후까지 미루지 말라. 이는 그가 가난하므로 그 품삯을 간절히 바람이라.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지 않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먼저 일꾼들의 입장에서 말씀이 주는 의미를 발견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 주님은 천국을 설명하시고 있습니다. 하늘나라는 포도원 주인의 사정, 마음, 입장, 포도원 주인의 심정이나 그가 한 처사와 같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포도원에 들어간 일꾼들이 이른 아침에 다함께 들어갔다고 하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는 들어온 시간대가 가지가지요, 그 차이가 분명하고 어떤 것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른 아침에 6시경에 들어와 12시간 일한 사람과 마지막 한 시간 정도 일한 사람은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일찍 들어온 사람은 할 말이 있습니다. 마지막에 온 사람보다 더 받아야 하든지 아니면 마지막에 들어온 사람에게 적게 주어야 공평합니다.
우리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므로 상처받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인간관계에는 언제나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평가로 나뉘어지고 있습니다. 상담학과 심리학에서는 교류분석(TA: Transactional Analysis)이란 이론이 있습니다. 이 이론은 1958년 미국의 정신과 의사인 에릭 번(Eric bern)에 의하여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고, 교류하는지를 연구한 것입니다.
나와 다른 사람, A와 B란 사람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긍정과 부정은 4가지의 태도로 나타납니다. 이것을 심리학에서 "교류분석"이라고 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 긍정적인 사람으로, 다른 사람과도 긍정적인 교류를 보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성격이 좋습니다. 이런 사람은 인간관계에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 긍정적인데, 다른 사람에게 대하여 부정적인 교류를 가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대하여 부정적인 사람인데, 다른 사람에게는 긍정적인 교류를 보내는 사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부정적인 사람인데,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교류를 보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면서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언제나 부정적인 생각만 가지고 대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그 사람은 행복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모릅니다. 이런 사람은 염세주의자가 되고, 항상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한 맺힌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자기는 태어나서는 안될 시대에 태어났고, 정말 태어나서는 안될 집에 태어났으며, 내가 못 사는 것은 잘 사는 사람들 때문이라고 원망과 불평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른 아침에 온 사람이 자기보다 늦게 들어온 사람 때문에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가지고 함께 좋아하고 기뻐할 수 있을 때에 우리 자신도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나는 일찌감치 일거리를 찾았으니 감사합니다. 빈둥거리며 놀다가 집에 돌아가지 않고 일하고 돈 받아 돌아가니 감사합니다. 주인이 한 데나리온 준다고 하고는 약속을 깨뜨리고 이런 저런 핑계로 임금을 깎으려고 하는 판에 이 주인은 약속한 대로 정확하게 한 데나리온을 주니 감사한 일입니다. 나보다 늦게 들어온 사람도 가정을 가진 사람인데, 오늘 후한 주인을 만나서 그들도 하루 먹고 살 수 있을 만큼 벌어 가지고 가게 되었으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긍정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를 생각해도 감사하고, 다른 사람을 생각해도 감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은 이렇게 나에게도 긍정적으로 다른 사람도 긍정적으로 대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긍정적으로 처신하고 사람을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 IMF 이후에 생긴 말들 중에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들이 많아졌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태백"이라는 말입니다. 회사를 나올 수밖에 없는 직장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50대, 40대, 30대 연령을 표현하는 다른 말도 있어도 가장 마음 아픈 것은 20대 청년에게 붙이는 "이태백"이란 말입니다. 청년 실업이 50만, 60만이라고 하니, 이 나라가 큰 걱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십대의 한참 일할 청년들의 태반이나 놀고 있다는 말로 "이태백"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지금 일하고 있습니까? 감사해야 합니다. 불러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합니다. 비록 넉넉하게 살아가지는 못해도 일할 자리가 있고, 불러주신 것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서 주인의 입장을 깊이 생각하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오늘은 반드시 그 넉넉한 성품, 사랑하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주인을 만나보고 가셔야 합니다. 여기 주인은 하나님의 한없이 넓고 크신 성품을 그대로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행한 대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사랑할 대상으로 대하시고 있습니다. 너는 늦게 와서 한 시간 일했으니, 1데나리온의 1/16인 한 앗사리온이나 받아가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의 포도원 주인은 한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품어주시는 분입니다. 세상적인 경영이론을 도입하여 사람을 놓고 손익을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몇 시간 일하였느냐, 일한 만큼 주려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와 그의 가족이 먹고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합니다. 하루 일한 성과를 가지고 사람을 평하는 것이 아니라, 일꾼과 그의 가족 그리고 그의 삶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일꾼들을 대할 때에 노동가치나 상품가치로 대하지 않고, 생존가치와 존재가치로 대하시는 것에 정말 감사를 드립니다. 일한 값으로 품삯을 주는 것이 아니라, 먹고 살라고 생계비로 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포도원 주인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우리를 하늘나라의 일꾼으로 부르시고 포도원에 들여보내시는 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포도원을 들어가는 것이 한 데나리온 받을 것 때문에 좋아할 것이 아니라, 우리를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부르시고 포도원에 들어오게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가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버렸어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른 아침에 일어나 장터에 나가서 일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불러옵니다. 하나님은 먼저 유대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후에는 이방인도 포기하지 않고 찾아오셨고, 불러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한번 유대인을 부르시고 그치신 것이 아니라, 또 다시 선지자들을 보내시고 때로는 제사장을 세우시기도 하고, 성전을 건축하게 하셨습니다. 오전에 나가서 죄인들을 부르시고 구원의 자리로 들어오라고 초청하시고 있습니다. 뜨거운 대낮에 주인이 어디를 다닐 것입니까? 그래도 장터에 나가 아직도 일거리를 잡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지 보시고 있습니다. 이제 해가 넘어갈 시간이 다 되었는데 그래도 장터에 나가서 놀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보시고 불러들이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한 시간 남았을 뿐인데, 사람을 고용하면 손해가 된다느니, 아니면 일한 만큼 적은 돈을 주려고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어둡고 캄캄한 무지의 세계를 살면서 방황하던 우리 한국 민족도 마지막에 한 시간 남겨놓고 불러주셨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몰라주고 일꾼으로 받아주는 사람이 없어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지 않고 마지막에 은혜로 불러주셨습니다. 오늘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라고 하시는 것은 은혜 베풀어주실 이유를 삼기 위하여 불러주신 것입니다. 일하였으니 돈을 주신 것입니까? 포도원에 들어왔으니 돈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으로 부르시고 초청하시는 음성에 순종하여 왔을 때에 구원하여 주시고, 하늘나라를 상속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구원받은 감격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을 구원하러 나가야겠습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한 시간 남겨놓고도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 안에 들어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대낮에 뜨거운 햇볕을 마다하지 않고 장터로 길가로 나가시면서 사람을 부르시고 찾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이른 아침에 들어온 일꾼이 가졌던 생각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가 잘못된 생각을 가진 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공로가 있는 사람이요, 먼저 온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분명 먼저 온 사람이었지만 나중 되고 꼴찌 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결정적인 잘못이 있다고 하면 하나님 앞에서 자기는 마땅히 받을 자격이 있다는 공로의식, 채권자 의식이 있었습니다. 우리 중에도 이와 같이 은혜의 동산에 먼저 왔으면서도 나중 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채무자가 아닙니다. 우리로부터 빚지신 분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의당 갚아주어야 하고, 우리는 당연히 받아야 할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늘나라를 위하여 무엇인가 조금 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은혜요, 감사한 일입니다.
"먼저 온 자들이 더 받을 줄 알았더니"라는 말씀을 경계해야 합니다. 교회가 어지럽게 되고, 하나되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의 하나인 것은 이런 채권자 의식입니다. 사람은 힘써 수고한 만큼, 헌금하고 봉사한 것을 알아주지 않을 때에 괴롭습니다. 이곳이 세상이라면 얼마든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지막 한 시간 남겨놓고 부름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라는 말뿐입니다. 보상을 바라고 일하지 말고, 불러주신 은혜에 감사하여 일합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 뜨거운 심정을 본받아 아직도 장터에서 배회하고 있는 사람들을 초청하고 불러야 합니다. 영혼을 구원하는데 하나님은 함께 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도바울처럼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사람을 사랑하고, 복음을 전파하여야겠습니다. 우리들이 한 영혼을 구원하려 전도할 때에는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전도의 주권은 100% 주님께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는 마지막 한 시간 남아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장터로 달려가야 합니다. 우리 주님의 영혼 구원하시는 마음을 가지고 복음을 전파하여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원의 포도원에 들여보내야 합니다. 영생을 주시기를 작정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이제 9월과 10월에 한 영혼이라도 하나님의 포도원에 들어올 수 있도록 가서 사람을 불러와야 합니다. 행13:48에 보면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증거하면 되고 예수님만 자랑하면 됩니다. 나머지는 우리 주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라고 하면 세계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고 흠모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한 기자가 어린 소녀의 피고름을 닦아주며 치료하는 테레사 수녀를 방문하였습니다. "수녀님, 당신은 잘 사는 사람들, 평안하게 살아가는 사람, 그리고 높은 자리에 올라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에 시기심이 생기지 않습니까? 정말 이런 삶으로 만족하십니까?"라고 물었답니다. 그 때에 테레사가 이 말로 대답하였습니다. "허리를 굽히고 섬기는 사람에게는 위를 쳐다볼 시간이 없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정말 위대한 봉사와 섬김의 정신입니다. 시기할 것 없고, 질투할 것도 없고, 다만 섬길 뿐이지,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쳐다보고 구경할 여유 있는 시간이 없습니다. 불러주신 것만으로 감사할 뿐이지, 어떤 보상도 생각 없습니다. 얼마동안 일했다는 생각도 가지지 마십시오. 오직 불러주신 것을 은혜로 알고 마지막 한 시간 생명 다하여 충성하시기를 바랍니다.
포도원 품꾼 비유
마 20:1-16 / 홍문수목사
우리가 성경을 읽다 보면 종종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를 들어서 ‘네 원수를 사랑하라,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살리라, 오른 뺨을 치면 왼뺨을 돌려대라, 속옷을 달라고 하면 겉옷까지 주라 ...’ 이런 것들입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 좀처럼 이해되지 않아서 고개를 갸우뚱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 공부도 하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체험 저런 체험을 하다보면 “아하! 그 말씀이 바로 그런 뜻이었구나~ ” 하고 깨닫게 됩니다. 결국 상식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성경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 인간의 얕은 생각과 현격하게 차이가 납니다. 사 55:8~9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열린 마음으로 겸손히 대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말씀 속에 담겨진 오묘한 진리를 깨닫습니다. 성경 말씀은 인간의 상식을 너머서는 놀라운 진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 진리를 하나하나 깨달으면서 우리 인간의 얕은 생각을 하나님의 높은 생각에 맞춰가면서 신앙이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말씀 속에 하나님의 진리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함께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눕니다.
[1] 포도원 품꾼 비유 : 주인과 품꾼, 하나님과 그의 백성
본문은 예수님이 천국의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말씀하신 비유입니다. 비유는 영적 진리를 보다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합니다.
포도원 주인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위치한 팔레스틴 지방의 포도 수확기는 9월 경입니다. 9월의 어느 이른 아침 그 주인은 품꾼을 구하러 나갑니다. 여기서 이른 아침은 해가 뜨는 오전 6시를 가리킵니다. 주인은 일당으로 1데나리온을 주기로 약속하고 품꾼들을 고용합니다. 1데나리온은 당시 로마 화폐로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그 후 제3시가 되어 또 나갑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낮 시간을 일출(오전6시)에서 일몰 시간(오후6시)까지로 잡습니다. 그 사이 시간을 12등분해서 제1시, 제2시, ... 이런 식으로 시간을 표시했습니다. 그러니까 제3시는 오전 9시가 되는 것입니다. 이때에는 정확하게 품삯을 약속하지 않고 품꾼들을 고용합니다. 그 후에 또 제6시 즉 정오에, 제9시 즉 오후 3시에도 그렇게 했습니다. 심지어는 제11시, 일몰 1시간 전에도 나가서 품꾼을 구해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일손이 딸려서 라기 보다 놀고 있는 사람들을 차마 보지 못해서 품꾼으로 고용해 주려는 인상이 농후합니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많은 품꾼들이 포도원에 들어갔고, 마침내 해가 저물었습니다. 품꾼들이 줄을 서서 품삯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나중 온 사람들부터 줍니다. 맨 마지막 제11시에 온 사람들에게 1 데나리온씩 줍니다. 아마 그들은 매우 감격스러웠을 것입니다. 1시간 앞두고 고용된 것만 해도 감지덕지인데, 예상치 않게 하루 품삯을 다 받은 것입니다. 그들보다 일찍 들어온 사람들은 내심 더 많은 품삯을 받으리라 기대하고 부푼 마음으로 기다립니다. 그런데 웬걸 일찍 온 사람들도 모두 다 1데나리온씩 줍니다. 그러자 그들의 반응이 어땠습니까? 주인을 원망하고 난리입니다. 그러나 주인은 불평하는 그들을 책망합니다.
이 비유에서 포도원은 ‘천국’을 가리킵니다. 주인은 ‘하나님’을 가리키고, 품꾼은 ‘하나님의 백성’ 된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우리는 천국에 관한 몇 가지 진리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2] 포도원 품꾼 비유에 담긴 진리 : 은혜의 법칙, 보상의 법칙
① 은혜의 법칙 :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본문의 이야기 속에서 보통 상식과 맞지 않는 부분이 무엇입니까? 맨 처음에 온 사람들은 무려 12시간이나 포도원에서 일했습니다. 맨 나중에 온 사람들은 겨우 1시간 일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모든 사람들을 일괄적으로 1데나리온씩 주느냐 이 말입니다. 너무 불공평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불평합니다. 12절.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상식적으로 시간 수대로 쳐서 삯을 줘야 하지 않습니까? 먼저 온 사람들이 불평하며 볼멘소리를 하는 게 당연합니다. 우리도 그들의 입장이었다면 당연히 그랬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주인은 정색을 하며 뭐라고 말합니까?
13절~15절 / “ ...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그렇게 하는 것은 주인의 ‘주권적 뜻’이라는 겁니다. 주인이 자기 것을 갖고 자기 뜻대로 할지라도 무슨 문제냐 이겁니다. 맨 처음에 오전 6시부터 일한 사람은 1 데나리온을 약속했고, 다른 사람들은 약속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맨 처음에 온 사람들도 할 말이 없고, 다른 사람들은 더더욱 할 말이 없다는 겁니다.
따지고 보면, 당시 상황으로 보건대 일찍 온 사람들이나 늦게 온 사람들이나 사실 주인이 품꾼으로 고용해 준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당시는 너무 가난하던 시절입니다. 우리나라도 과거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옛날 서울역에 지게꾼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누군가 일을 시켜주면 감지덕지입니다. 아무도 일을 시켜주지 않으면 하루 종일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 공을 치기 일쑤였습니다. 이 비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주인이 그들을 불러주지 않았다면 공을 치고 처자식을 굶길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말하자면 주인이 그들 모두에게 은혜를 베푼 것입니다. 1 데나리온은 삯이라기보다는 주인의 은혜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곧 우리가 은혜로 구원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아무 공로 없이 단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믿음으로 죄와 사망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영생을 얻었습니다. 당시에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제자들이나 유대인들은 ‘공로 구원 교리’에 찌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언가 선행을 하고, 무언가 공적을 세워야 구원을 받을 줄로 알았습니다. 이런 생각은 우리 한국인들도, 아니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사상입니다. 불교도 유교도 세상의 모든 종교가 사실은 그런 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을 말씀합니까? 인간은 죄인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제아무리 선을 행하려 해도 그것으로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겁니다. 따라서 인간끼리 비교하면 크고 작고, 선하고 악하고 구분이 될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게 그거’라는 겁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죠. 하나님의 의의 기준을 100점이라고 수치로 표현해 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본래 의로운 자로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타락함으로 그 의에 미치지 못하는 죄인이 된 겁니다. 물론 개인차가 있어서 어떤 사람은 90점짜리입니다. 그 정도면 굉장하죠. 그러나 의로운 자는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80점, 70점, 60점, ... 모두 다 죄인입니다. 인간끼리 비교하면 누가 낫고 누가 못하고 말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볼 때는 다 ‘그게 그거’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 입학시험에 커트라인이 있는데, 거기에 미달되면 점수가 높든 낮든 그게 그겁니다. 어떤 분은 그래요. 차점으로 떨어졌다고. 말하자면 수석으로 불합격했다는 겁니다. 그래도 어쨌든 불합격입니다. 불합격은 수석이나 꼴등이나 매한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공로가 없으면 절대로 죄에서 구원 받을 수 없고,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는 십자가 대속의 공로를 믿음으로 구원 받아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인간의 조건이나 공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곧 ‘은혜의 법칙’입니다. 엡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은혜의 법칙 때문에 우리 인간이 구원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믿음’입니다. 그래서 요6:29 보면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이런 은혜의 법칙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예가 성경에 나오죠. 십자가에 달린 한 강도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평생 죄만 짓다가 마지막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됩니까? 눅23:42~43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지막 순간 믿었지만 예수님의 육성으로 직접 구원을 보장받았습니다. 그는 분명 천국에 들어간 것입니다. 아슬아슬한 구원입니다! 마감시간 직전에 천국에 들어간 케이스입니다. 정말 너무 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그 강도가 천국에 들어가서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또 한편으로는 얼마나 가슴을 얼마나 쓸어내렸을까요?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네~” 하면서 말입니다.
목회하면서 이런 경우를 종종 봅니다. 평생 예수님을 믿지 않다가 임종 직전에 예수님을 믿음을 영접하고 숨을 거두는 경우를 봅니다. 옆에서 보는 입장에서도 정말 짜릿한 기쁨이 있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유의할 게 있습니다. 우리가 오래 믿었다고 해서 나 자신의 공로가 있는 양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평생 믿고 수고했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우리가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이미 은혜로 구원 받은 것을 감사하는 마음에서 나온 당연한 행위일 뿐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혹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일찍 믿으나 늦게 믿으나 구원 받기는 마찬가지라면 차라리 죽기 직전에 믿는 게 낫잖아? 요즘 식으로 말하면 그게 경제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죠. 영생은 죽어서 천국에 가서 시작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서부터 우리 영혼 속에서 시작됩니다. 세상이 알 수 없는 신령한 기쁨과 평안이 부어집니다. 그것을 놓치고 세상에서 방황하면서 세속적인 3류 쾌락을 따라다는 게 얼마나 헛된 일입니까? 만일 늦게 믿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3류 인생으로 살고 싶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겁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또 한 가지 모르는 게 있습니다. 믿음의 기회가 중요합니다. 기회는 항상 있는 게 아닙니다. 인생의 마감시간은 미리 정해져 있는 게 아닙니다. 언제 마지막이 될지 자기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시간은 항상 ‘지금’입니다. 고후6:2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사55: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그러므로 지금 기회를 놓치면 영영 놓칠 수도 있는 겁니다.
유명한 여배우 마를린 먼로의 이야기입니다. 그녀가 죽기 얼마 전 빌리 그래함 목사를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서로 시간이 없어서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살해서 죽은 겁니다. 그 현장에 가서 본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죽기 직전 어디엔가 전화를 하려고 했었는지 수화기가 내려져 대롱대롱 달려 있더라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빌리 그래함 목사가 얼마나 통탄을 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아직 마감 시간이 되지 않았을 때 예수 믿고 구원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가족과 이웃에게 부지런히 복음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이미 믿게 된 것을 날마다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공로 없으므로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뜨거운 구원의 감격의 식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믿은 지 오래될수록 자칫 잘못하면 감격이 상실될 수도 있음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② 보상의 법칙 : 충성한 자에게 주시는 또 다른 은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구원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믿은 이후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고 하나님과 교회, 복음을 위해 충성하면 보상을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구원의 은혜가 너무 커서 평생 수고하고 헌신해도 갚을 길이 없는데 말입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평생 수고하고 헌신한다 해도 그것만으로 어떻게 구원 받을 수 있습니까? 턱도 없죠. 그 크신 하나님의 은혜를 베푸시고도, 우리의 적은 헌신을 보시고 보상해 주신다는 겁니다. 이 세상 살 동안 축복해 주시고, 이 세상 떠날 때 하늘 의 상급을 주신다는 겁니다. 말이 보상이지, 사실은 이것 또한 은혜입니다.
구원의 은혜와 상급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예화를 하나 소개해 드리죠. 옛날 신대륙 개척시대에 아일랜드 출신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신대륙으로 가서 성공하려는 꿈을 갖고 있었습니다. 가난했던 그는 겨우 노자를 마련해서 런던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뉴욕까지 갈 배 삯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선장에게 통사정을 합니다. 나중에 꼭 갚겠으니 제발 태워 달라고. 어쩐지 그 청년이 마음에 들어 선장은 승선을 허락합니다. 말은 안 했지만, 받을 생각은 아예 접고 공짜로 태워준 겁니다. 청년은 선장의 은혜가 너무 고마워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자진해서 구석구석 청소를 하고, 선원들의 일을 도왔습니다. 수개월 후 뉴욕 항에 도착합니다. 청년은 내리면서 선장에게 다시 확인합니다. 다음에 찾아와서 배 삯을 꼭 갚겠노라고. 그러자 선장은 자기 호의였으니 갚을 필요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봉투를 하나 내놓았습니다. 배 안에서 그동안 일한 대가라며 ... 청년은 어리둥절했습니다. 아무리 일을 했다 해도 배 삯에 미칠 수 없는데, 배 삯은 공짜로 해 주고 게다가 용돈까지 주다니!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보상입니다. 우리가 구원의 감격 때문에 감사하며 수고하는 게 당연하지만, 그래도 갚을 수 없는 은혜인데, 가외로 우리의 수고와 헌신을 기억하시고 보상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또한 기가 막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과연 그 보상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주인이 불평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을 참고하면 알 수 있습니다. 본문 16절.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이 말씀은 부름 받은 순서대로 보상이 주어지지 않음을 암시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역전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즉 먼저 믿은 사람이 나중 믿는 사람보다 뒤처질 수도 있다는 겁니다. 물론 먼저 믿은 사람이 초지일관 계속 잘 하면 계속 앞설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먼저 믿든 나중 믿든 최선을 다하는 게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i) 늦게 믿은 사람의 이점 - 늦게 믿은 게 자랑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이점이 있습니다. 늦게 믿은 게 너무 안타까워서 남은 시간 더 열심히 충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유에 나온 사람 중 제11시에 온 사람들 중 그런 사람이 있었을 겁니다. 너무 황송하고 고마워서 다른 사람보다 더 열심히 충성을 다했다면 주인이 얼마나 좋아했겠습니까?
톨스토이가 그랬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습관적인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중년이 넘어 뒤늦게 진정한 회심을 체험합니다. 그러고 나니까 지난 세월이 후회막심한 겁니다. 그래서 참회록을 쓰고 마지막 순간까지 충성을 다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임종을 앞두고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게 그의 마지막 기도입니다. “주여! 내 인생의 마지막 며칠, 마지막 몇 시간이라도 당신께 헌신하며 당신만 바라보며 살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나중 믿었어도 이렇게 살 수 있다면 하나님이 보상해 주십니다.
그런데 늦게 믿고도 대충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지 않아도 지난 세월이 아까운데 말입니다. 벧전4:2~3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그러므로 여러분 중에 혹시 늦게 믿어서 아쉽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이제부터라도 최선을 다하고 충성을 다하면 앞서 축복을 누리고 하늘의 상급을 얻는 일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ii) 먼저 믿은 사람의 이점 - 일찍 믿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모태 신앙인이 제일 부럽습니다. 오래 동안 믿은 사람은 더욱 성숙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고, 더욱 주의 일에 충성할 기회가 많은 겁니다. 오래 믿고, 오래 충성하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렇게만 되면 금상첨화입니다.
그런 분을 소개해 드리죠. 박요한 목사님이라고, 지금 90세인 어르신입니다. 대전남부교회 원로목사님으로 총회장을 지내신 분입니다. 지난 9월 총회 때 정정한 모습으로 설교하시는 모습을 뵙고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대단한 일이 있습니다. 그분은 은퇴 후 사모님과 사별하셨는데, 자식들에게 부담 주기 싫다며 혼자 사시면서 계속 복음 전도에 헌신하셨습니다. 현직에 계실 때도 충성했는데, 은퇴 하신 후 섬 선교를 위해 무려 23년 동안 헌신하신 겁니다. 한국의 거의 모든 섬을 다니셨습니다. 숨질 때까지 계속 그 일을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일평생 그렇게 사셨으니 얼마나 좋은가! 같은 그리스도인으로 너무 부럽습니다!
그런데 참 안타깝게도 먼저 믿었는데 오히려 잘못하는 경우도 이따금 봅니다. 교만하고 자랑합니다. 되지도 못하고 된 줄 압니다. 별 것도 안 하고 많이 한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러면 안 되죠.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자들이므로 감사할 것 밖에 없습니다. 평생 수고하고 헌신한다 하더라도 당연한 것입니다. 결코 일찍 믿었다고 교만하거나 태만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일찍 믿었으면 일찍 믿은 대로, 늦게 믿었으면 늦게 믿은 대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숨지는 그 순간까지 부족해도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세상에서는 1등만 쳐 주지만 하나님은 최선을 다한 사람을 최고로 알아주십니다.
1968년 멕시코 올림픽 때의 일입니다. 폐회식을 위해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모인 수많은 관중들이 한 마라톤 주자를 위해 기립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일까요? 금메달리스트가 아닙니다. 꼴찌였습니다. 탄자니아 ‘아크와리’ 선수입니다. 그는 도중에 넘어졌습니다. 무릎이 깨져 피가 철철 흘렀고, 통증도 굉장했습니다. 나중에는 눈의 초점이 풀릴 정도로 정신까지 혼미해졌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완주했습니다. 그는 골라인을 통과한 후 기절하고 말았습니다. 그가 곧 깨어나자 기자들이 달려들어 질문합니다. “어차피 꼴찌인데 왜 끝까지 피를 흘리며 달렸습니까?” 사실 마라톤 경기가 맨 마지막이므로 그 선수 때문에 폐막식 시간까지 늦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의 조국이 나를 머나먼 이곳까지 보냈습니다. 비록 조국에 금메달을 안겨주지 못하지만, 기권해서 나의 조국에 불명예를 끼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게 곧 올림픽 정신이요,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추구할 인생의 원리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포도원 품꾼 비유를 통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을 다시 한번 기억하며 평생 뜨거운 감격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인생의 마감시간이 올 때까지 최선을 다해 끝까지 충성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땅에 사는 동안 복을 누리고, 이 세상 떠날 때 천국에서 영원한 상급을 얻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누가 더 달라고 할 수 있습니까?
마 20:1-16 / 성홍모목사
우리가 한 본문을 대할 때에는 전후 문맥을 읽어보고, 역사적인 상황과 배경을 알아보는 것이 좋습니다. 이 비유의 직접적인 배경이 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실 때에 재물이 많은 부자 청년이 와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청년은 어려서부터 율법의 계명을 따라 살았습니다.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는 주의 말씀에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이때에 예수님은 이 청년에게 결단을 요구했습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젊은 사람이라면 이상을 추구하고 돈은 없어도 상관없다고 결심할 수 있는 나이인데, 재물이 축복의 길을 가로막았습니다. 이 사건은 성경에서 안타까운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청년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으며 영적인 갈급함도 있었고, 주님을 찾아와 영생의 문제를 가지고 의논할 만큼 흠이 없는 청년이었습니다. 또한 재물이 많은 부자였으니, 얼마나 자랑스런 사람입니까? 그런데 그가 재물이 많으므로,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따르라는 말씀에 걸려서 주를 따르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이 사건이 있은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랐습니다. “주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우리 주님은 12제자들은 예수님이 “자기의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12보좌에 앉아 12지파를 심판하는 자리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을 남겨주셨습니다. 마19:30에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새번역에는 “그러나 첫째가 된 사람이 꼴찌가 되고, 꼴찌가 된 사람이 첫째가 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한 사람이 큰 포도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포도원에는 때로 시간을 다투어 일할 것이 많았습니다. 주인은 이른 아침에 장터-인력시장에 나가서 사람들을 불러들였습니다. 시장과 광장 한 구석에 사람들이 모여 일자리를 구하고 있었습니다. 인력시장에는 사람들이 일찍부터 나와서 불을 피워놓고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주인은 한 사람당 1데나리온을 약속하고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일꾼들을 들여보내고 그것으로 끝났다고 하면 사건이 될 수 없는 일상적이고, 평범한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은 더 많은 일꾼을 부르려고 계속 쉬지 않고, 장터에 나오고 있다는 것으로 사건화 되고, 의미 있는 교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주인은 오전 아홉시 쯤 나가서 보니, 사람들이 장터에 서서 빈둥거리며 있었습니다. “여러분,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시오. 적당한 품삯을 주겠소.”라고 하고는 포도원에 들여보냈습니다. 주인은 다시 열두시 정오와 오후 세 시쯤에 나가보니 그래도 사람들이 일거리를 찾지 못하고 서성대고 있었습니다. 그들도 불러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라고 했습니다. 오후 5시쯤이 되었습니다. 이제 한 시간만 지나면 해가질 것이요, 일할 수 없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 때에도 장터에는 서성거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왜 당신들은 온종일 이렇게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고 있소?”라고 했더니, 놀고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켜주지 않아서 이러고 있습니다.”라고 했더니, 주인은 “당신들도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을 하시오”라고 했습니다.
곧 해가 넘어가고 저녁이 되었습니다. 일꾼들은 저녁이 되기를 손꼽아 기다리게 됩니다. 일이란 어떤 일이라도 힘든 것이요, 남의 일이란 어느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남의 일을 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얼른 임금이나 받아가지고 기다리는 가족들에게 돌아가서 저녁 먹고 편히 쉬고 싶습니다. 주인은 임금을 주기 위하여 자기 관리인에게 말했습니다.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사람들로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사람들까지 품삯을 치르시오”라고 일러주었습니다. 관리인은 저녁 때, 나중에 들어온 사람부터 역순으로 임금을 주는데 1데나리온 씩 주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눈여겨보던 맨 처음에 와서 일을 한 사람들은, 은근히 좀 더 받으려니 하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한 데나리온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선에 주는 돈은 받아 넣고, 주인에게 따졌습니다. “마지막에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는데도, 찌는 더위 속에서 온종일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였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이보시오. 나는 당신을 부당하게 대한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의 품삯이나 받아 가지고 돌아가시오. 당신에게 주는 것과 꼭 같이 이 마지막 사람에게 주는 것이 내 뜻이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내가 후하기 때문에 그것이 당신 눈에 거슬리오?”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느낀 것인데, 여러 가지 문제점이 보이고 있으며, 합리적이지 않은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설교하는 목회자로서 우리 교인들이 생각할 수 있는 문제점이 있다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본문을 접근해보았습니다.
우선 포도원에 일꾼이 필요하였다면, 한꺼번에 다 불러들였으면 불평할 것도 없고, 일손이 모자라지도 않았을 터인데, 주인이 지혜롭지 못하여 여러 번 수고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생각하기를 이른 아침에 들어온 사람부터 약속한 한 데나리온을 주어 보내놓고, 그들이 나간 다음에 다시 오전 9시 때에 들어온 사람들을 불러 한 데나리온을 주어 보내고, 이런 식으로 큰소리 칠 사람들을 먼저 보낸 후에 마지막으로 들어온 사람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주었으면 좋았을 것인데, 노임을 주는 순서를 거꾸로 해서 문제가 일어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한 데나리온 약속한 일찍 들어온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는 한 데나리온을 주고, 다음에 들어온 사람에게는 4/5 데나리온을 주고, 그 다음 정오에 들어온 사람에게는 3/5 정도 주고, 오후 3시에 들어온 사람에게는 2/5정도 주고, 마지막 들어온 사람에게는 1/5정도 주었으면 할 말이 없고, 공평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의 하신 말씀을 보면 포도원 주인은 나중에 들어와서 한 시간 정도 일한 사람에게도 1데나리온, 오후 3시 경에 들어온 사람도 1데나리온, 정오에 들어온 사람도 1데나리온, 오전9시 경에 들어온 사람도 1데나리온, 그리고 하루 종일 이른 아침부터 저녁이 될 때까지 일한 사람도 1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하루 종일 땀 흘리면서 일한 사람이 볼 때에, 주인이 하는 처사가 마땅치 못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얼마나 일하였느냐 하는 것은 상관하지 않고, 모든 일꾼들에게 동일한 액수, 1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와 호의를 발견해야 합니다.
데나리온이라는 돈은 로마의 돈으로 예수님 당시에 노동자가 하루 동안 일하고 받을 수 있는 임금이었습니다. 노동자나 직업군인의 일반 보병이 하루 일하고 받는 값이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주막 주인에게 건네준 치료비용이 2데나리온이었습니다.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인 사건에서 엄청난 군중을 먹일 수 있는 돈을 말할 때에 200 데나리온의 떡으로도 부족할 것이라고 말한 것을 본다면 1데나리온이란 돈이 아주 가치 있는 돈이었고, 1데나리온을 가지고 부족하지만, 25명 정도는 한 끼 먹일 수 있는 돈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데나리온은 한 가족이 하루 동안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 정도의 돈이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 주님은 하늘나라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절은 1절에 있습니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포도원의 주인으로 표현되고 있는 하나님의 성품, 그 하나님을 만나고 감사하며, 응답하면서 돌아가야만 합니다.
포도원 주인은 포도 수확기를 맞아 일꾼을 찾고 있습니다. 주인은 이른 아침에 인력시장에 나가서 일꾼들을 모아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있습니다. 유대나라에서 포도 수확은 9월말 경에 시작하여, 우기가 오기 전에 서둘러 마쳐야 합니다. 유대인 사회에서 하루 동안 일하는 것은 대략 10-12시간 정도로 해가 뜨는 시간부터 해질 때까지였습니다.
당시에 장정들이 나가서 놀지 않고, 일거리를 얻고, 하루 벌어서 식구들을 먹일 수 있다는 것은 잘 사는 사람들이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베풀 수 있는 혜택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직장이 있어 하루도 허송세월하지 않고, 보람 있게 일하고 자기 가정을 돌아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알아야 합니다. 내가 잘나서 다 잘되는 것으로 알지 않고, 나의 나 됨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인정해야 합니다.
‘유진 로우리’박사는 세계 설교학의 권위자요, 스토리텔링 설교 방법을 제창하신 분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이 본문을 ‘가족의 언약’이라는 입장에서 해석하라고 주문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글을 그대로 인용해봅니다. “여러분이 현재 세 아이의 부모라고 상상해 보십시오. 아들들은 각각 세 살, 여섯 살, 아홉 살입니다.
자, 당신은 아홉 살 박이 아이가 세 살 박이 아이의 세 배만큼 집에 오래 있었다고 해서 세 배 더 사랑하겠습니까? 아홉 살 박이 아이가 세 살 때보다 부모를 세 배 더 사랑하겠습니까? 도대체 무슨 소립니까? 그것은 말이 안 됩니다. 우리는 가족입니다. 맞습니다.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이 스토리 또한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가족의 언약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베드로는 그것을 사업적 거래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그 포도원 주인은 이제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가 다시 장터로 돌아온 이유는 아직까지 초대받지 못한, 응답할 기회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지 살피기 위해서입니다. 보십시오. 아침 7시에 초대를 받았는지, 9시에 초대를 받았는지, 정오에, 오후 3시에, 5시에, 혹은 2시에 받았는지,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포도원에 초대받은 것은 집에 초대를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 이상 무엇을 바라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포도원에 초대를 받은 것은 집에 초대를 받은 것이라는 가족의 언약이라는 관점에 본문을 보라고 하십니다.
포도원 주인은 당신의 나라에 한 사람이라도 더 불러들이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천국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지금 포도원 주인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 비유의 말씀을 잘 관찰해보아야 합니다. 주인은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을 포도원에 들어와 일하게 하고, 가족을 먹여 살리라고 혜택을 주시고 있습니다. 주인은 이른 아침에 장터에 나가보았습니다.
어떤 주경학자는 5차례의 시기를 두고 이른 아침은 아담시대, 오전9시 경은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시대로, 정오의 시기는 모세 시대로, 오후 3시 경은 바벨론 포로 시대로, 오후 5시 경은 그리스도의 시대로 보려는 이도 있습니다. 확대해석은 필요치 않다고 봅니다. 어떤 학자는 개인의 관점에서 유년기, 청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로 생각해볼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시기가 다 다르고,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이 본문의 말씀을 경제논리로 보지 마십시오.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정도에서 보려고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가진 성경이 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말이라고 하면 무슨 진리가 있겠습니까? 많은 부분이 역설적이고,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믿을만한 가치가 있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점과는 아주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으니, 믿을 가치가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이신 하나님은 역사적으로 세상 끝 날까지, 개인적으로는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품꾼을 부르시고 찾으시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방황하고 헤매고 있던 죄인들, 누구도 거들떠보지도 않던 사람들, 저녁때가 되어도 누구 한 사람도 불러주는 이 없고, 알아주는 이도 없는데, 포도원 주인이신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고, 찾아오시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사람, 한 사람, 한 영혼에 관심이 있지, 한 데나리온은 사실 중요치 않습니다. 사람을 불러 일하게 하시고, 가족을 돌아보게 하고, 한 사람으로 자신감을 가지고 복되게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여기서 사람이 많이 일하고 적게 일하는 것보다, 포도원에 들어왔다는 것을 중요시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빠르고 늦은 것이 없습니다. 오래 믿었느냐, 짧게 믿었느냐 하는 것보다 포도원에 들어온 것을 같이 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오래 믿었느냐는 것보다, 믿음의 태도를 귀하게 보십니다. 오후 5시에 들어온 이는 주인의 손길만 바라보고, 주인이 늦게라도 불러주신 것을 은혜로 알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한 시간을 일하였어도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침 일찍 들어왔다고 생각하는 자세에서, 나는 들어올 수 없는 사람인데, 늦게라도 들어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나는 다만 감사할 뿐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주인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잘 지키시는 정의로운 하나님이십니다. 이 주인은 아침 일찍이 직접 장터에 나가서 일꾼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찍 불러주신 것도 은혜요, 일거리가 없어 하루 종일을 걱정하였는데, 늦게라도 불러주시고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신 것도 은혜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었는데, 주인이신 하나님의 은혜로 부름 받았고, 주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주인의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다고 하면 오후 5시 경에 나가지도 않고, 부르지도 않을 것입니다. 경제논리라고 하면 말이 안 되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사람을 소중히 생각하십니다. 한 사람이라도 밖에서 버림받지 않도록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게 하십니다.
이 비유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실 때에 공로주의, 율법주의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베드로를 책망하시는 것이 바로 공로사상입니다. 나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랐으니, 다른 사람보다 더 좋은 자리를, 더 많은 축복을 받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공로사상입니다. 우리는 일찍 부름을 받았으니, 일거리가 없어 서성거리고, 가정을 생각하며 초조하고, 자식들을 어떻게 먹기고 공부시킬 것인지 노심초사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일찍 부름 받은 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방황하지 않고, 주일학교 때부터 믿었으니, 그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는 채권의식을 가진 사람처럼 먼저 믿은 것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빚진 사람처럼 채무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나는 일찍 포도원에 들어온 일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사람들은 종일 일한 것에 감사한 마음이 없었습니다. 먼저 부름 받고, 가족을 능히 책임지고 이끌어가고, 사람 노릇하는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 의로 가득차서, 어려운 형편의 사람들에 대한 연민의 정이 없었습니다. 늦게 들어온 사람에 대하여 동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혹시라도 나는 오래 일한 사람으로 주인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른 사람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공평하시고, 사랑이 풍성하신 주인인데, 인색하고 옹색한 사람으로 평가할 수 있는 우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나는 다른 사람보다 더 받아야 할 사람이고, 나보다 더 일한 사람과 비교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보다 늦게 들어오고 조금 일한 사람과 비교하면서 나는 저 사람보다는 더 받아야 할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다 나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늘나라에서 받을 보상이나 상급이란 것이 일찍 믿었다거나, 오랫동안 사역자로 헌신하였다는 일의 분량이나 일한 시간의 차이로 인하여 주어지고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로 평가되는 것을 알게 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일의 양을 보시는 분이 아니라, 일하는 태도를 보십니다. 하나님은 일한 시간의 길이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감격 속에서, 불러주신 것을 은혜로 받아들이며, 감사하면서 일하고 헌신하는지를 보시고 있습니다. 하늘나라는 하나님의 관점에 이해해야지, 인간의 공로사상을 가지고 평하지 말아야 하나님의 은혜로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나는 이른 아침부터 일한 사람입니까? 나는 다른 사람보다 인정받고 있으며, 다른 사람보다 더 가진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면 겸손하고 절제하고 감사만 해야 합니다. 나는 가진 것이 많다, 가진 특권이 많다, 나는 인정받아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하실 때에는 자아가 살아서 주인 노릇하기에 이것은 내려놓아야 할 교만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교만을 버리고 겸손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주십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기 전에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자신 있게 요구하듯이 말했습니다. 마19:27입니다.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12제자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은 이른 아침에 들어온 일꾼이라고 생각하느냐? 더 많은 것을 받을 것으로 생각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는 오후 5시에 온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겸손하며, 감사하며, 불러주신 것만으로 충분하고, 내일도 불러주신다고 하면 최선을 다하겠다는 정신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동안 아무도 나를 써주지 않았는데, 어떤 사람도 눈여겨보아주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불러주신 것으로 감격 속에 사는 것입니다. 누가 더 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나를 불러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면서 보답할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 한 영혼이라도 포기하지 않고, 한번 더 나가보면 더 구원할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장터를 향하시는 주인의 마음을 이해하고 감사하며, 우리도 그런 마음으로 영혼을 구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긍휼로 구원받았습니다. 주님의 영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차시기를 바랍니다.
불만모드에서 감사모드로
마 21:1-16 / 양인순목사
오늘은 지난 6개월을 지켜주신 하나님 앞에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맥추감사주일입니다. 원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밀이나 보리를 처음 거두고 나서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로부터 시작됐습니다. 비록 오늘날 우리들이 보리나 밀 농사를 짓지는 않지만 6개월을 뒤돌아보며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드리는 절기입니다.
오늘 말씀의 키워드는 ‘감사’입니다. 미국에서는 말을 처음 배울 때 ‘아빠, 엄마’ 다음에 가르치는 단어가 ‘감사’라고 합니다. 일상의 삶 속에서 ‘땡큐(Thank you)’라는 단어가 너무 자연스럽습니다. 아주 사소한 것에도 땡큐를 연발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라는 말에 참 인색합니다. 지난 6개월 동안 내 입술에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얼마나 하셨는지요? 가족들을 향하여, 교우들을 향하여, 직장 동료들에게, 이 사회와 나라를 향하여 몇 번이나 감사의 표현과 고백을 하셨는지요?
<지금은 여성시대> 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미고사 운동’을 펴는 것을 들었습니다.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 이 말을 하는 것이 어렵습니까? 쉽습니까? 마음 문이 열린 사람은 쉽지만 닫힌 마음, 강퍅한 마음을 가진 분들이 이 말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행복하기를 원하신다면 ‘미고사’를 생활화하십시오. 우리 한 번 실습합니다. ‘여보 미안해! 여보 고마워! 여보 사랑해’ (젊은 분들은 ‘자기’를 넣어서)
성경은 말세가 되면 사람들의 마음에 감사가 사라진다고 지적합니다. 우리는 지금 ‘불만의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회 곳곳에 불만의 소리만이 넘쳐납니다. 가정에도, 교회에도, 학교에도, 공장에도, 사무실에도, 시청 앞 광장에도 불만의 소리가 넘칩니다. 모두가 불만의 소리를 높이는 이 시대에 감사하며 산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축복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삶의 모드(Mode)를 어디에 맞추어 놓느냐 입니다. 어떤 분은 삶의 주파수가 항상 불만 모드에 맞춰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원망하고 불평할 준비가 돼있습니다. 이런 분의 모토는 “나는 불만스럽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입니다. 소위 불만 중독증에 걸린 분입니다.
매사를 약간 삐딱하게 봅니다. 인생의 카메라 렌즈를 항상 부정적이고 어두운 면에 비춥니다. 매사가 원망이고 불평입니다. 자신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자아상을 갖고 있습니다. 열등감과 낮은 자존감 때문에 쉽게 상처를 받습니다.
남 잘되는 것도 맘에 들지 않습니다. 세상 모든 일이 불만스럽습니다. 항상 이마에 갈매기를 그리고 삽니다. 양 볼에는 ‘왕짜증’이 붙어 있습니다. 이런 분은 후에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웨 궤양에 걸리거나 각종 질병에 시달립니다. 혹시 이것이 나를 보고 하는 말이구나 생각하면 빨리 감사모드로 바꾸시기 바랍니다.
감사모드는 삶을 긍정적으로 보는 태도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더 좋은 것을 바라보는 적극적 태도입니다. 남을 배려하고, 이해하고, 존중하는 태도입니다. “나는 감사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얼마나 멋진 모습입니까? 감사하는 태도는 삶 전체를 아름답게 비추는 햇볕과 같습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보고를 여는 열쇠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감사 모드에 항상 초점을 맞춥니다.
신앙생활은 한 마디로 감사하는 생활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처럼 어떤 불만족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는 믿음을 가지고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언젠가 하나님이 나를 높여 주실 것을 믿고 나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불만모드를 가지고 원망과 불평을 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포도원 주인이 노동시장에서 일꾼을 모집해서 포도원에 들여보냅니다. 포도원 주인이 ‘이른 아침 (해 뜰 때)’에 일꾼들을 구하여 하루 한 데나리온씩 주기로 약속하고 포도원에 들여보냅니다. 일손이 부족했든지 주인은 ‘제 3시(해 뜬 후 3시간이 지난 때)’에도, ‘제 6시(정오 때)’에도, ‘제9시(오후 3시)’에도 노동시장에 나와 일꾼을 모아 포도원에 들여보냅니다. 이스라엘에서 포도를 거두는 시기에는 매우 바쁩니다. 익은 포도를 제 때에 거둬들이지 못하면 손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11시 즉 해지기 한 시간 전에 시장에 나가보니 그때까지도 일거리를 얻지 못하고 놀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주인은 해질 때가 다 되었지만 그 일꾼을 포도원에 들여보냅니다.
하루해가 지고 일이 끝난 다음 일군들을 모아놓고 품삯을 나눠줍니다. 먼저 제 11시에 온 일군, 즉 한 시간만 일한 사람에게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줍니다.
그 때 이른 아침에 온 일군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한 시간 일한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면 우리는 아무리 못 받아도 다섯 데나리온 정도는 받겠지’ 그러나 그 생각은 오산이었습니다. 나중에 그들의 손에 쥐어진 돈은 한 데나리온뿐이었습니다. 그들은 투덜거립니다. 불만이 가득합니다. “세상에, 이런 경우가 어디 있는가?” “어떻게 한 시간 일한 사람과 종일 뙤약볕에서 수고한 사람을 같이 취급한단 말인가?” 그때 주인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주님의 이 비유는 누구를 향해서 하신 말씀일까요? 당시 영적인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바리새인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교훈하신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 19장의 내용과 연결이 됩니다. 부자 청년이 영생에 대해서 질문했을 때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 오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근심하며 갑니다. 이런 안타까운 상황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처럼 어렵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낙심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다’ 말씀하십니다.
이 때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27절)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주님을 위해서 집이나 형제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여러 배의 복을 받고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시면서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30절)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연속선상에서 오늘 비유가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 사이에 영적인 특권의식이 싹트고 있음을 아십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는데 우리는 무슨 상을 받을 수 있습니까? 무언가 대가를 바라고 주님을 따르고 있는 모습을 보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위해 한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내가’ 앞서고, 하나님이 나에게 베푸신 그 크신 은혜와 사랑보다 내가 주님을 위해 행한 공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영적으로 넘어지는 상태입니다.
주님은 이런 영적인 자만심, 영적인 특권의식, 영적인 공로주의를 경계하시면서 다시 한번 강조하십니다. “이와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20:16) 예수님께서는 겸손히 허리를 동이고 끝까지 충성스럽게 일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너보다 훨씬 앞서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불평과 불만의 소리가 높아만 가는 이 시대에 어떻게 하면 우리가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첫째로, 비교모드에서 창조모드로 전환하라.
제일 먼저 온 자들이 원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10절에 대답이 있습니다.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 씩 받은지라.” 바로 비교가 원망과 불평을 가져옵니다. 처음 계약할 때부터 이들은 한 데나리온을 받기로 약속되어 있습니다. 일을 마치면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해지기 한 시간 전에 온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은 것을 보고 비교한 것입니다. 한 시간 일한 사람과 하루 종일 일한 사람을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은 물론 비합리적입니다. 그러나 처음 계약만을 생각하면 억울할 것도 없고, 불평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비교하는 순간 원망과 불평이 터져 나옵니다.
우리의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 바로 비교입니다. 내 안에 있는 원망과 불평의 대부분은 비교로부터 출발합니다. 내가 누군가와 비교하는 순간 열등감이 생기고, 질투가 일어납니다.
여자 분들이 동창회 모임에 다녀오면 괜히 신경질이 납니다. 학교 다닐 때 자기보다 공부도 못한 친구가 남편 잘 만나서 럭셔리한 패션에 고급 차를 몰고 나타납니다. 남편 자랑을 늘어지게 하다가 오늘은 내가 제일 고급 음식으로 쏘겠다고 합니다. 따라가서 먹기는 먹는데 맛이 없습니다. 괜히 열등감이 발동합니다. 화가 납니다. 집에 오면 반갑게 달려오는 강아지를 걷어찹니다. 그리고 수고하고 돌아온 남편에게 공연히 바가지를 긁습니다. 지금까지는 남편이 최고인줄 알았는데 공부 못하던 친구와 자기를 비교한 순간부터 모든 것이 불평거리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암 중에서 제일 무서운 암이 바로 비교암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전에 싱가폴에 있을 때 백화점에서 TV를 샀습니다. 당시에는 어느 정도 흥정이 가능했습니다. 비싼 물건이기에 하루 종일 발품을 팔아서 가격비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싸게 부른 곳에서 가격을 흥정했습니다. 좋지 않은 영어실력으로 손짓 발짓 다해가면서 값을 깎았습니다. TV를 싼 가격에 샀다는 자부심에 기뻤습니다. TV를 볼 때마다 흐뭇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에 친구 목사님이 오더니 얼마 주고 샀냐고 묻기에 자랑스럽게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내가 산값보다 훨씬 더 싸게 산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얼마나 속이 상하고, 화가 나던지요? 그 다음부터는 TV보기가 싫어졌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친구에게 얼마주고 샀냐고 절대 묻지 마세요. 혹시 실수로 물어 봤다면 절대로 바가지 썼다고 말하지 마세요. 저렴하게 잘 샀다고 말해 주세요. 그게 지혜입니다.
마귀는 서로를 비교하도록 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상하게 하고, 질투와 시기심을 유발합니다. 어떻게 하면 비교의식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창조의식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필요에 의해 지으셨습니다. 얼굴도 다르고 개성도 기질도 다르고 은사도 다릅니다. 인생의 가는 길도 다릅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만의 독특한 소명이 있습니다. 그 소명을 발견하고 내가 갈 길을 묵묵히 걸어가면 됩니다. 내가 꼭 옆집 아줌마처럼 살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친구를 흉내 낼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인생의 색깔을 따라 살면 됩니다. 그것이 인생의 멋이요 행복입니다.
자신의 삶의 방식을 상대방에게 강요하지 마십시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창조모드로 바꾸십시오. 그 속에 주님이 주시는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아직도 비교모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이 시간 창조모드로 전환하십시오.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의 작품임을 인정하십시오. 비교하지 말고, 나의 나됨을 감사하며 즐기십시오. 비교의식의 노예가 되는 순간 우리는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는 비극을 초래하게 됩니다. 나는 하나님이 지으신 최고의 걸작품임을 믿으며 사는 것이 바로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비결인 줄 믿습니다.
둘째로, 보상모드에서 은혜모드로 전환하라.
제일 먼저 온 자가 감사하지 못한 이유는 바로 공로의식, 보상의식입니다. 나는 맨 나중에 온 사람보다 일찍 와서 일했기에 당연히 많은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심리가 작용합니다. 물론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일을 하는 목적이 되면 문제입니다.
반대로 제일 마지막에 부름 받은 일군은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먼저 온 자와는 한 데나리온이라는 품삯을 약속하고 불렀지만 마지막에 온 자와는 품삯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다른 일꾼들은 진작 불려갔는데 왜 이 일꾼은 불러 주는 사람이 없었을까요?
아마도 몸이 약하거나, 나이가 들었거나, 뭔가 일하기에는 부족해 보였기 때문이 아닐까요? 일하지 않으면 안되는 절박한 상황인데 아무도 자기를 불러주지 않습니다. 해는 저물어 가는데 빈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선택받지 못했다는 자괴감과 집안 걱정에 마음이 천근만근 무겁습니다. 그 순간 포도원 주인이 오더니 자기를 부릅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절망의 상황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한 것이죠. 만약 여러분이 마지막에 부름받은 일군이라면 어떤 자세로 일했을까요?
자기를 불러 준 것만으로도 감사해서 열심히 일했을 것입니다. 해가 떨어지는 것을 아쉬워하며 최선을 다해 일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제일 먼저 와서 일하는 품군과 마지막 품군의 일에 대한 태도는 너무나 다릅니다. 먼저 온 일군은 하루를 떼우면 품삯을 받는다는 보상 심리로 일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온 일군은 나같은 사람을 품군으로 써준 것 만으로도 감사하며 일합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의 삶입니다.
건강한 교회에는 보상심리로 일하는 사람보다 은혜에 사로잡혀 일하는 일군이 많습니다. 나같이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을 불러서 이렇게 소중한 일을 맡기시다니 감사하기도 하지. 내가 진작 더 젊었을 때에 부름받았더라면 좋았을 것을...이제라도 불러서 써주시니 감사합니다. 내게 주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하면 좋을까요? 이런 태도를 가지고 일하는 일군이 넘치는 성지교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마지막에 온 일군이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받았을 때 어떠했을까요? 당연하다고 생각했을까요? 아닙니다. 너무나 송구스럽고, 고마운 마음으로 얼굴을 들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돈을 받아야 할지 아니면 받지 말아야 할지’ 당황했을 것입니다. 주인이 베풀어 준 은혜를 오랫동안 잊지 못하고, 기회만 되면 은혜를 갚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이 주는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우리가 천국의 시민권을 가진 것은 하루 종일 일해서 얻은 품삯처럼 우리가 뭔가를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내 공로나 의로운 행위로 이루어진 것이 결코 아닙니다. 겨우 한 시간도 채 일하지 않은 일꾼처럼 우리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데 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너무나 엄청난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의 입에서는 ‘감사합니다! 할렐루야!’라는 말 밖에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교회 봉사는 바로 이런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로 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들이 주의 일을 하면서도 때때로 원망하고 불평할까요? 공로의식 때문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많이 수고했다는 겁니다. 저 사람보다 먼저 와서 10시간이나 더 넘게 일했다는 겁니다. 교회 안에 이러한 공로의식 때문에 고생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불평은 왜 나를 알아주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알아서 모셔야지, 내가 이만큼이나 했는데 왜 교회에서 알아주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리더스다이제스트의 설문조사에 의하면, 목회자들의 불만 1호는 내가 그렇게 수고하고 사역했는데, 왜 교인들이 나의 수고를 알아주지 않는냐 입니다. 반대로 교인들의 불만 1호는 내가 이렇게 이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봉사했는데, 우리 목사님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목사도 불평이 있고, 교인도 불평이 있습니다. 공로의식 때문입니다. 무언가 보상받고자 하는 보상심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를 불러주신 처음의 자리로 돌아가십시오. 첫 사랑의 기쁨과 감격의 은혜가 넘쳤던 자리로 돌아가십시오. 보상모드나 공로모드에서 빨리 은혜의 모드로 전환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기쁨과 감격이 넘치는 복된 신앙생활을 하는 비결인 줄 믿습니다.
셋째로, 불만모드에서 감사모드로 전환하라.
제일 먼저 불려온 일군은 비교하고, 보상심리에 사로잡혀서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받은 후 집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반응을 생각해 봅니다. 먼저 온 품군처럼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아니, 그럴 수가 있습니까?” “왜 우리를 저 늦게 온 사람과 똑같이 취급합니까?” 원망 불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도 얘기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주인님, 감사합니다. 저 형제에게도 똑같은 품삯을 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저 친구는 어제에도 일을 못해 집안 식구들은 쫄쫄 굶었습니다. 오늘 아침에 저희들이 주인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저 형제보기가 얼마나 민망했는지 몰랐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이면서 인생을 살아왔습니까? 우리는 남이 잘 되면 배가 아프고 속이 상해서 소화도 제대로 못시키지 않았는지요. 우리는 경쟁하는 상대가 잘 안되면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지 않았는지요.
D.L. 무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원수가 잘못되었을 때 ‘그것 참 고소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이미 영적으로 병든 것이다.” 그렇습니다. 상대방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기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태도입니다. 내안에 아직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고, 아픔이 있을지라도 나를 불러주시고, 여기까지 함께해 주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십시오.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불만모드를 이제는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모드로 전환하십시오. 그것이 참된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자를 기뻐하시고 축복하십니다. 감사하는 자에게는 더하여 넘치게 하시는 복을 주십니다. 감사하는 자에게는 마음의 평강을 주십니다. 감사하는 자에게 좋은 사람을 붙여주십니다.
수도원과 감옥의 차이를 비교해보십시오. 환경으로 보면 수도원과 감옥은 비슷합니다. 그런데 차이가 있습니다. 수도원에는 평안과 찬양이 있습니다. 그러나 감옥에는 불만과 욕설이 있습니다. 수도원과 감옥의 차이는 바로 감사입니다. 똑같은 환경에서 살지만 감사가 있으면 천국에 사는 것이고, 감사가 없으면 지옥에 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6개월을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맥추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동안 잃어버린 감사를 회복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감사는 행복한 습관이고, 하늘의 보고를 여는 열쇠입니다. 나의 삶에 기적을 불러일으키는 촉매입니다. 감사는 바로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수 있는 비결입니다. 아직도 내 삶 가운데 원망과 불평이 있습니까? 비교모드를 창조모드로, 보상모드를 은혜모드로, 불만모드를 감사모드로 전환하십시오. 감사는 0.3초의 기적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가슴으로 감사를 느끼는 시간이 0.3초입니다. 감사를 위해 매 순간 0.3초를 투자하십시오. 감사의 생각과 감사의 말과 감사의 행동을 하십시오. 그 속에 더하여 넘치게 하시는 놀라운 주님의 은혜와 축복이 임할 줄로 믿습니다.
꼴찌와 첫째
마 20:1-6 / 문기태목사
옛날 이스라엘에는 인력시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들이 장터에 나가서 서성거리고 있으면 일꾼이 필요한 사람들이 나타나 적합하게 보이는 사람을 불러 품삯에 대한 흥정을 하고 합의하면 그를 데리고 가서 일을 시킵니다.
이스라엘땅은 과일이 자라기 적합한 기후조건을 갖춘 지역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서 나는 과일을 유럽에서는 제일로 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3대 나무를 들면 무화과, 감람나무 그리고 포도나무를 꼽습니다. 그만큼 이스라엘에서 포도나무는 흔합니다. 그런데 과일은 얼마나 햇빛을 많이 받고 자랐느냐?하는 것에 의해 당도가 높고 낮음을 결정 짓습니다. 포도주도 어느 해에 담갔느냐?를 중요하게 여긴다고 합니다. 일조량이 유난히 많았던 해의 포도로 담근 것이면 맛이 훨씬 좋아 값이 더 많이 나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포도원의 농장주는 포도를 딸 때가 되면 긴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햇빛을 더 많이 받도록 기다렸다가 따야 당도가 좋은데 이게 문제가 있어요. 바로 뒤에 우기가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겨울이 우기거든요. 당도를 높이기 위해 조금, 조금 더 기다리다가 그대로 비바람이 몰아치면 농사가 다 망치는 거예요. 일찍 포도를 따자니 당도가 낮아서 안 되겠고 좀 기다렸다가 따자니 비가 오면 다 망치겠고 어렵습니다. 그렇게 아주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결정하여 이제 포도를 딴다 할 때가서는 그야말로 온 일손을 다 끌어다가 포도를 따게 되는 거예요. 이것만으로는 손으로 해야 되니까, 모두가 달려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도 주인이 다급하게 장터에 나가서 일꾼을 구하는 것을 볼 수가 있어요. "너도 가서 일해라. 너도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이렇게 닥치는대로 재촉을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만큼 일손이 많이 필요하고 빠른 시간에 수확을 마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이른 아침에 나갔다.'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에 제 삼시, 제 육시, 제 구시, 제 열한시. 이렇게 수시로 장터에 나가 일군을 만나 데리고 왔습니다. '제 삼시'는 우리 시간으로 말하면 아홉십니다. 육시는 정오입니다. 유대나라의 시간을 우리 시간으로 잠깐 바꾸어서 생각을 하면 이른 아침 즉 여섯시, 그리고 아홉시, 열두시, 오후 세시, 다섯시 마지막 포도원에 들어간 사람은 1시간 밖에는 일하지 못했습니다. 일할 시간이 한 시간밖에 없는 그 사람에게도 주인은 말합니다. "내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라." 한 시간 남았으니, 그까짓 거 해봐야 얼마나 일하겠나? 하지 않았어요. "한 시간도 소중해, 남은 시간 한 시간동안 내 포도원에 가서 열심히 일하라." 이렇게 재촉을 했습니다.
이미 일거리를 놓치고 하루의 시간을 다 보냈는데, 한 나절을 다 보낸 이 사람들에게 주인은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상당한 것을 주리라." 말합니다. 이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주인에게는 일손이 아주 부족합니다. 기회를 놓치면 일년 농사가 헛수고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한 시간 일할 사람도 마구 받아 주시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할 사람이 이렇게 소중하고 부족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더 많은 이들에게 중요한 기회를 주고싶어 하십니다. 기회를 공평하게 주고 싶어하십니다. 나이 많은 사람이나 젊은 사람이나 건강한 사람이나 병든 사람이나 지식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모두에게 지금 좋은 기회를 주고 싶어 하십니다.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한 데나리온을 주마." 하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하루 종일 일한 다음에 저녁에 노동자들에게 품값을 당석에서 주게 돼있습니다. 그런데 맨 나중에 온 사람부터 주었다 이겁니다. 문제가 여기 있어요. 맨 나중에 온 사람 1시간 밖에 일안했는데 한 데나리온을 주었어요. 그 다음사람도 한 데나리온, 그 다음 사람도 한 데나리온 . 아침부터 하루 종일 일한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저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었으니까, 적어도 우리에게는 다섯 데나리온을 주겠지.' 하고 기대했는데 그도 한 데나리온이에요. 여기서 원망을 하는 거요. 원망할 만하잖아요? "우리는 하루 종일 일했는데 한 데나리온 . 왜 저 사람들은 잠깐 밖에는 일하지 않았는데 왜 역시 한 데나리온 입니까?" 이게 불공평한거라 이거죠. 그래서 먼저 온 이들이 원망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이라면 불평하고 원망하지 않았을까요? 그 원망과 불평이 부당합니까? 당연합니까?
만약 여러분이 농장주인이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약 저 같았으면 뒤에 온 사람부터 주지 않고 먼저 온 사람부터 한 데나리온을 주었을 것입니다. 받아 가지고 간 후에 주었으면 더 받으리라는 기대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두 감사하게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것만 챙겨서 돌아 간 후에 혹 나중에 알았어도 따지러 오지는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본문의 주인은 나중에 온 사람부터 주었습니다. 그러니 시끄러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 시간 일한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으니 '나는 더 받겠구나!' 하고 기대가 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나중 온자들 부터 준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었습니다. 불평과 원망을 하리라 계산한 주인의 의도였습니다.
예수님이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주 중요한 것을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나중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써 나중되는 자가 많을 것이다." 입니다. 오늘 우리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는 꼴찌가 되는 일이 흔히 있을 것이다." 말씀을 하시려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잠간 포도원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 혹은 교회를 상징합니다. 일군은 하나님의 사람을 상징합니다. 물론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곡식이 희어져 가는데 일군이 부족하다. 하신 주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먼저 온 일군을 누구일까요? 유대인들입니다. 그리고 먼저 믿은 사람들입니다. 나중에 온 일군은 이방인, 세리, 죄인들입니다. 그리고 뒤늦게 믿기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하시려는 말씀은 무엇일까요?
1. 은혜를 깨달으면 첫째가 되고 모르면 꼴찌가 된다.
이 본문을 설교하면서 먼저 온 사람들은 빈둥거리며 놀면서 일했고 나중에 온 사람은 미안해서 짧은 시간이지만 열심히 일을 해서 더 많이 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를 보아도 그런 말씀도 없고 암시하는 부분도 없습니다.
이 말씀은 먼저 유대인들을 겨냥한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적자 후손들이고 특별히 선택을 받은 선민이라는 것입니다. 그에 반해 이방인들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외인들이요, 율법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는 야만인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은 우습게 여기고 항상 자기들의 성경 지식과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자랑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회 있을 때마다 유대인들을 책망했습니다. 오히려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셔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믿음을 통한 구원을 강조했습니다.
죄인도 회개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이방인들도 구원받아 풍성한 생명을 누릴 수 있다. 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니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은 한없이 미운 존재였습니다.
본문에서 보면 이른 아침에 일하러 온 사람들은 유대인을 암시합니다. 이 유대인들은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려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행실을 이방인들의 행실에 비추어 볼 때 너무 완벽에 가까웠습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유럽을 배우며 살아 세상의 때도 묻지 않았고 그러니 당연히 특별대접을 받을 것이다.' 하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렇게 하다보니 불러준 은혜, 좋은 일을 하게 되었다는 기쁨과 감사가 희미하게 잊혀졌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아 죄 용서를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신들은 죄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은혜보다는 자신의 행위를 의지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들에게 필요함을 못 느끼고 거부합니다. 윤리적으로, 성경적으로 완벽에 가까운 삶을 사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기를 잘합니다. '우리는 일찌기 조상적부터 이제까지 율법을 잘 알고 지켰으며 안식일을 철저히 지켰다. 금식도 자주 하고 기도도 열심히 하는데 너희는 그게 뭐냐? 이제껏 하나님도 모르고 우상앞에 절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께 인정받고 천국에 가겠느냐?'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들도 죄인입니다. 똑같이 하나님의 큰 은혜가 필요한 불쌍한 이들입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반면에 많은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고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이들은 이제까지 하나님을 모르고 방탕하게 산 것이 후회가 되고 부끄럽게 짝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불러 주시고 일할 기회를 주시니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모릅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주님을 위해서 살려고 최선을 다합니다.그러니 하나님께서 제일 늦게 믿고 돌아온 이들을 첫째 자리에 올리십니다. 그리고 먼저 믿은 이들은 꼴찌로 만드십니다.
(마 20: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 말씀은 오후 세 시 다섯 시에 온 사람들은 그 만큼 일은 못했지만 그래서 한 데나리온을 받아 가야 굶고 있는 가족들을 먹여 살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것이지만 불쌍히 여겨져서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너희가 그것을 가지고 불평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품삯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내가 남보다 더 고생하고 수고했으니 당연히 더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목청을 높입니다. 공부를 더 많이 했으니 이정도는 월급을 받아야 하는데 왜 이것밖에 안 주냐? 민주화과정에서 고생을 많이 했으니 능력이 부족해도 장관 한 자리는 주어야 하지 않느냐? 결국 그런 생각때문에 나라가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나라위해 희생하여 나라가 좋아졌으니 보람으로 만족하겠다.' '주님과 교회를 위해 헌신하여 좋은 결과를 보게 되었으니 감사하다. 나는 그것으로 보상을 받은 것으로 여기겠다.' 하는 사람이 많이 나와야 나라가 건강해지고 교회가 은혜스러워집니다.
토레이 박사가 호주에서 집회를 인도할 때에 강단위에 쪽지가 올라왔습니다. "박사님, 저는 기도 제목이 하나 있습니다. 오랫동안 기도했는데 응답이 없습니다. 저는 3대째 장로교 신앙생활을 하고 있고 25년동안 주일학교 교사로 봉직했고 20년동안 교회 장로로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습니까?"
토레이 박사가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당신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공로를 내세워 기도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공로의식을 말살하기 전까지는 기도가 절대 응답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품삯을 구하지 말고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공로를 늘 바라보며 불평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바라보며 항상 감격하시기 바랍니다.
2. 비교하다 보면 꼴찌가 되고 비교하지 않으면 첫째가 됩니다.
그러니까 다시 한번 생각해보세요. 주인과 나와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원망할 것 없어요. 애당초 약속이 한 데나리온이니까 그렇잖아요? 그것도 9시에 온 사람, 12시에 온 사람으로 생각해보면 난 반나절밖에는 일하지 않았잖아요. 그러니 얼마나 고마워요? 주인과의 관계에서 보면은 놀지 않고 하루일하고 품삯을 받았다는 것만을 가지고도 만족하고 감지덕지 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나와 똑같이 대우받는 것이 마음에 안 들어요. 그게 마음에 안 드는 거예요. 그래서 비교하다 보니까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심리학 이론 중에 '교류분석'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의 모습을 네 가지로 분류해서 생각합니다. 첫째는 자신에 대해서는 긍정적이고, 남에게 대해서는 부정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감이 있는가 하면 남을 멸시하는 교만이 있어요. 자신에 대한 문제는 다 긍정적이고 남은 항상 부정적으로 봐요. 이 평가기준 때문에 이 사람은 불행합니다. 또 하나는 자신에 대해서는 부정적이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사람이 있어요. 이 사람은 항상 남을 부러워하며 살아요. 남의 처지만 좋아보여요. 남의 떡만 커보여요. 남의 자식은 잘된 것 같고 내 자식은 잘못된 것 같아요. 심지어는 남편도 남의 남편이 훨씬 좋고 내 남편은 '어쩌다 저런 게 걸렸나?' 이렇게 생각한데요. 항상 불평이라는 거예요. 항상 내 것은 나쁘고 남의 것만 좋아보이니 큰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많이 있어요. 그 다음에 세 번째는 뭐냐면 자기에게 대해서도 부정적이고 남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에요. 이 사람이 염세주의자에요. 항상 이 사람은 불평 원망이죠. 세상 다 망했어요. 비관적이죠. 그런가하면 자기에 대해서도 긍정적이고, 남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사람이 있어요. 나 자신도 행복하고 남도 행복하게 봐요. 그리고 남을 부러워 할 것도 없고 더불어 행복할줄 아는 사람이에요. 이런 네 가지 사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본문에 대단히 귀중한 말씀이 있어요. 두고두고 생각하십시오. 주인은 말씀합니다.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무슨 말입니까? "네가 받은 것이 은혜라고 왜 생각을 못하느냐? 네가 받은 한 데나리온을 왜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느냐? 내가 너를 부르지 않았다면 너는 하루 종일 장터에서 놀고 공쳤을 거 아니냐? 내가 너를 불렀기에 하루 일했고 또 품값도 받는 것 아니냐? 네 것. 그것이 많던 적던 내가 본래 너와 약속한 것 아니냐? 너와 나와의 약속이 한 데나리온이다. 이것은 정당하게 받은 것이다. 합당하게 받은 것이요 또 은혜롭게 받은 것이다." 그 말입니다. 얼마나 중요한 얘깁니까?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것을 인하여 감사하십니까? 난 하나님께 받은 좋은 것이 하나도 없다라고 생각하십니까?
미국 스텐포드대학교 필립 하츠 박사가 조사한 자료를 소개하겠습니다. 이 지구상의 60억 인구를 똑 같은 비율로 100명으로 줄여서 한 마을에 모아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100명중 아시아인은 57명, 유럽인은 21명, 아메리카는 14명, 아프리카인은 8명이었습니다. 52명은 남자, 48명은 여자 70명은 비기독교인 30명은 교회를 다녔습니다. 20명만 자기 집에서 살았고 80명은 적정 수준이 못미치는 주거 환경에서 살았습니다. 100명중 70명은 문맹이었고 백 명중 50명은 영양부족을 겪고 있었습니다. 100명 가운데 한 명 만이 대학교육을 받았습니다.
통계적으로 보면 지구촌에 살면서 내 집이 있고 먹을 게 있고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주 복이 많은 선택된 사람입니다. 게다가 전쟁의 위험, 감옥에서의 고독, 기아의 괴로움등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세계인 구 상류층 500만명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체포, 고문, 죽음의 위협없이 매주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라면 특별한 행운아입니다. 냉장고에 먹을 것이 있고 몸에 걸칠 옷이 있으며 잠잘 수 있는 집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 75%의 사람들보다 더 풍요로운 삶을 사는 셈입니다. 만약에 저축해 둔 약간의 돈이 있어서 아이가 아플 때 병원에 입원시킬 수 있고 친구에게 식사를 대접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지구촌에서 상위 8%에 해당하는 부자에 속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최소한 그정도는 속하는 굉장한 부자들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왜 여러분은 하나님이 주신 여러분의 것은 제껴 놓고 남의 것을 시기하고 불평하며 못마땅해 합니까? 불행한 감정에 사로잡힙니까? 하나님이 말슴하십니다.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여러분 혹시 일찍 구원받은 것이 억울합니까? 남보다 더 많이 헌신하고 충성한 것이 억울합니까?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손해본 것 같습니까? 뒤 늦게 불려 온 내 가족이 나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목 마땅합니까? 혹시 공연히 나보다 다른 사람에게 주님이 더 많이 은혜 베푸시지 않나? 하는 생각때문에 은혜받고도 행복하지 못한 것은 아닙니까? 그런 마음을 품고 있으면 첫째 인생으로 시작하였어도 꼴찌 인생으로 끝나게 됩니다.
오직 은혜로 내가 있습니다. 잃어버린 기회도 꾸짖지 아니하시고 새로운 기회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이 얼마나 고마운 말씀입니까? 사실은 일을 했으니 돈을 주는 게 아니고요, 돈을 주기 위해서 일을 시킨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한 시간밖에 남지 않았음에도 "이 사람아 처자식이 있는데 놀고 있어서야 되겠나? 한 푼 벌어야 살게 않겠는가?" 이 주인의 마음이 얼마나 귀합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불쌍히 여기시고 또 은혜를 베푸십니다. 새로운 은혜를 베푸십니다. 현재라고 하는 시점에서 기회는 공평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내가 오늘 얼마나 절대적 은혜에 감사하면서 사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내가 사는 현재, 현재 이 현시점, 이 현실 이대로가 내게 주신 은혜요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은혜가 뭡니까? 그것을 소중히 여기세요. 이미 주신 모든 것이 내게 주신 최상의 은사임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 기회, 약속, 축복들을 깨닫고 불평하지 않고 감사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여 일하면 여러분은 꼴찌 인생으로 시작하였어도 첫째 인생으로 역전시킬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부터라도 하나님의 포도원에 가서 일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부름받은 종들
마 20:8-16 / 이삼열목사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는 오늘 우리 사는 현실 세계에서도 그대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본문의 포도원은 하나님의 동산이다. 새벽부터 부름 받은 자와 낮에 부름 받은 자, 저녁 일이 다 끝날 때 부름 받은 자의 상황은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관심이라 볼 수 있다. 오늘 본문말씀의 초점은 바로 늦게 부름받고 포도 동산에 들어간 인물에게 있는 것 같다. 아침부터 온 사람이나 낮에 부름 받은 자들은 모두가 1데나이온을 얻기 위해 수고했으나 늦게 부름 받은 자는 부르심에 감격하여 최선을 다 한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감사와 감격의 종교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 예수의 피 공로로 구원 얻은 감격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실 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재능이나 능력의 차이란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1,000 피트 상공에서 빛을 내려다보았을 때에는 높고 낮은 건물들의 차이가 없듯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가진 것은 보잘 것 없는 것뿐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는 그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5달란트 받은 자와 2달란트 받았던 자가 주인이 없는 동안 열심히 수고하여 본전과 이익금을 주인 앞에 내놓았을 때 주인은 두 사람에게 똑같은 말로 칭찬하고 있다. (마태복음25:21,23)
우리 모두는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존재한다. 이것을 섭리라고 말한다.
이 땅 위에 의미 없이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는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 아닌가!
탈무드는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땅 위에 있는 사람 가운데서 천국에서 쓸 인물을 구하기 위해 천사 가브리엘을 지상에 보냈다. 가브리엘 천사가 돌아와 보고하였다. ”지혜있고 유능하기는 하나 성실하지 못한 자와 좀 우둔하고 어리석은 것 같으나 성실한 두 종류의 인물을 추천하였을 때 하나님은 “좀 어리석은 듯 하나 성실한 자를 불러오라. 내가 그에게 지혜와 능력을 줄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에는 충실하게 자기 일에 정성을 다 하는 자가 요구된다는 말씀이다.
마지막으로 “저무는 때가 온다”는 것이다. 롬14:10에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다.”고 말씀하고 있다. 오늘 나에게 끝날이 온다하더라도 부끄럼 없는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겠다. “늦게 부름 받은 자의 감격을 안고”
저에게는 큰 자랑거리가 있습니다. 아버님과 장인 모두가 순교하신 순교의 가정입니다. 저희가 평양에 있을 때 남쪽에 계시던 친구 목사님들이 아버님을 남한으로 모셔오기 위해 수 차례 남한으로 길을 인도하는 안내자들을 평양으로 보내왔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것을 거절하였습니다. 1948, 9월 이번이 마지막기회이니 “꼭 안내원과 함께 남쪽으로 오기 바란다.”는 말과 함께 안내자가 왔을 때 아버님은 “내 교회의 양 무리가 500명이 있는데 나 혼자 살겠다고 도망할 수 없소. 우리 교인 모두가 남쪽으로 갈 수 있을 때 함께 가겠소.”
한마디로 거절하고 1949년 12월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순교하셨습니다. 나는 이 자랑거리와 영광을 안고 지금까지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입니다. “주님을 뵈옵는 그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