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에 알현한 이후로 4년을
손꼽아 기다렸던 덴마크의 왕자님이 돌아 오셨습니다. 뒤숭숭한 날씨 덕분에 정화수 떠놓고 비가 오지 않기를 기원했건만 구름으로 뿌옇던 목요일.
영화 <말아톤>의 초원이가 "비가 주륵주륵 내립니다"라고 말하는 듯한 환청에 시달리며 헉헉거리며 국립극장 산길을 올라갔더랍니다. 공연
시간 1시간 전인 7시부터 매표를 한다는데 6시 50분에 창구 앞에 서서 유난을 떨었습니다. 비슷하게 유난을 떠는 다른 관객들과 줄 꼬리를
이루고 있으려니 이윤택 연출가님이 슬쩍 보고 가시더군요. 헌화(獻花). 이 열정과 기대감이 제가 배우와 연출가에게 바칠 수 있는 헌화라는 생각을
했더랍니다. 4년을 기다렸고, 기억했고, 기록했으며 다시 왔습니다.
1. 2001년
버전과 2005년의 차이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국립극장 야외극장으로 옮겨가면서 무대가 변할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작품이 이렇게 달라질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세익스피어
원전 그대로 갑니다. 이전 공연에서는 없었던 망 보는 병사들이 선왕의 유령을 보고 놀라는 장면이라던가, 햄릿 왕자가 배우들을 만나
배우들에게 시연해 볼 것을 요구해서 한바탕 놀아보는 장면이 추가 되었더군요. 호레이쇼가 영국으로 떠난 햄릿의 편지를 받는 장면도
그렇고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제가 2001년 공연에서 느낀 것은 엄청난 속도감과 역동성이었습니다. 살아 숨쉬는 청년의 열정 그
자체였던 것이죠. 심지어는 1막에서 햄릿이 극중극을 끝내고 "연극
만세!"라고 말할 때면 그 열기가 관객석까지 전해집니다. 고뇌하고, 슬퍼하고, 생각하면서도 숨 가쁘게 움직이는 태양같은
왕자님이셨죠.
4년만에 만난 왕자님은 성숙한 성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생각하고,
고민하고, 절규했으며, 절망했습니다. 세상이 온통 어둡고, 까매서 희망을 걸 곳이 없는 자의 회의 어린 눈이라고 해야할까요. 이 어두운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빛을 불러 일으키려는 시대의 영웅같은 면모를 보이시더군요. 어둡고, 추악한 세상과 싸워서 비극적으로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의 죽음
뒤로 새로운 시대가 펼쳐지는 순교자였습니다. 2001년 공연에서 그런 이미저리(imagery)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극명하게 들어나지는
않았었거든요. 세익스피어의
원작 대사가 거의 빠지지 않고 그대로 들어가는 것도 놀라웠고요. 주리줄창 읊어대는 긴 독백들을 조금의 위화감과 지루함 없이 소화해 낸 배우분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또 하나 주목할만한 점은 호레이쇼가 바뀌었다는 것이죠.
제가 줄줄이 설명을 늘어놓는 것보다 연출가님과의 대화를
옮기는 것이 보다 효과적일 것 같습니다. 공연이 끝난 후 어느 대학에서 단체 관람을 왔는지 연출가분과의 대화 시간을 주더군요. 저에게는 무척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궁금한 것이 많았고, 정말로 이야기를 듣고 싶었거든요. 맨 앞 줄에 앉아 "질문 있으세요?"라는 말이 끝나자마자 손을
들었습니다.
(아래의 대화는 이해를 위해 재편집 되었음을
밝힙니다.)
빨간그림자: 2001년 공연을 보았던 관객입니다. 그때와는 여러모로 달라졌는데요. 일단 추가된 장면이 상당히 많습니다.
물론, 세익스피어의
희곡에 원래 있던 장면이기는 하지만 이전 공연에서는 다루지 않으셨던 부분입니다. 공연이 소극장에서 야외극장으로 옮겨오면서 무대의 스케일이 커졌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다른 연출적 의도가 있으셨던 것인지요.
이윤택 연출가님: 2001년 공연은
140분 공연이었습니다. 무척 짧았죠. 2005년 공연은 2시간 30분이고요. 2001년이 속도감은 비교할 수가 없이 빨랐겠죠. 2005년
공연이 길어진 것은 가능하면 세익스피어
원작을 살리고 싶었던 탓입니다. 이 공연은 올해로 10년째입니다. 그리고, 끝없이 변해갔죠. 실험도 했었고, 한국적인 전통 이미지를 억지로 충돌
시켜 결합한 패스티쉬적인 시도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제가 쉰이 넘은 나이여서인지 고전을 그 자체로 연출하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가장
세익스피어다운
연극을 해보고 싶었던 것이죠. 게다가 하늘극장 무대가 세익스피어
시대의 무대와 유사하지 않습니까. 핀 마이크를 쓰지 않은 채 배우들의 성량에 의지해 무대 끝까지 대사를 칠 수 있어야 하는
환경이고요.
빨간그림자: 2001년 공연에서는 호레이쇼에 많은 비중을 두셨다고 생각합니다. 1대 햄릿이셨던
김경익씨를 2001년에 호레이쇼의 역할로 두셨던 것은 그만큼 의미 부여가 크셨다는 뜻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이번에는 호레이쇼가 극중극 배우의
역할을 합니다. 왜 관찰자적인 시선을 포기하셨는지요.
이윤택 연출가님: 2001년의
호레이쇼는 완벽한 관찰자였습니다. 심지어는 다른 인물들과는 의상도 다르지요. 그런데 이번에 호레이쇼는 극중극 배우의 역할을 합니다. 저는 이
작품이 세익스피어의
'연극론'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 지점에 방점을 찍고 싶었습니다. 연극이란 무엇인가. 연극의 힘이 무엇인가를 주목하고 싶었던
것이죠.
빨간그림자: 2001년 공연에서 클로어디스와 선왕을 같은 배우가 연기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클로어디스와 선왕
유령이 결국 더블자아라는 뜻으로 해석했습니다. 둘 다 햄릿의 아버지이지만 한쪽은
극복해야할 대상으로서 존재하는 아버지이며, 다른 한쪽은 부채의 대상으로서의 아버지라고 봤거든요. 그런데 이번에는 선왕 유령과 클로어디스를 각각
다른 배우가 연기하도록 하셨습니다. 왜 이 부분의 연출이 달라졌는지 궁금합니다.
이윤택
연출가님: 클로어디스와 선왕 유령이 같은 배우였던 것은.... 딱히 의도가 있었다기 보다는 공연을 올리다 보면 배우들이 여러 역할을 겸하게 되는
까닭입니다.(정리하자면 제 해석이 비평가들이 저지르기 쉬운 실수인 '과잉된 의도 부여'였던 것이죠. 그만큼
작품이 읽어낼 면이 많았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유령을 따로 분리시킨 것은 첫째로 배우가 조금 더 몸의 움직임에 집중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냥 볼 때는 잘 모르시겠지만 유령의 움직임은 많은 집중력과 훈련을 필요로 합니다. 매우 힘든 동작이죠. 이전에 클로어디스와
유령의 역할을 왔다갔다 할 때 배우가 업되었던 감정을 다스려 클로어디스에 몰두하는 것을 힘겨워 하더군요. 이번에는 동작 자체에 조금 더 집중하게
하고 싶었습니다. 둘째로, 고전을 그대로 재현한다는 맥락에서 보자면 세익스피어
시대의 <햄릿> 공연에 대한 기록들을 살펴보면 유령이 무대를 마구 돌아다니며 관객들을 깜짝깜짝 놀래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원
텍스트에서 나타나는 유령이 주는 연극적 효과 자체를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이것은 저의 소소한 궁금증이었고, 공연을 보시는 분들은 마음 자체로서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공연에서 햄릿이 "연극
만세"라고 말하는 것이 어떤 맥락에서 나오는 이야기일지. 불의와 폭력에 저항하는 수단으로서 연극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장면을 만들어내는 배우와
연출가의 마음이 무엇일지. 그런 희곡을 쓴 극작가의 심정까지 말이죠. 선왕의 유령, 오필리어의 유령과 만나는 햄릿의 접신은 언제봐도 놀라울 만한
장면이고, 극중극을 통해서 선왕의 대사가 오필리어에게 명확하게 이해되는 순간 터져나오는 비명 소리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오필리어의 육체
위로 흙이 덮어지는 순간에 보여지는 죽음의 느낌까지 말이죠.
2. 배우, 연기,
그리고....
만약에 사석에서 질문을 할 기회가 있던 거라면..... 정말로 은밀하게 여쭈어 보고 싶었던 질문이
있었답니다. 2005년 공연에서는 거투르드와 레어티즈가 코믹 릴리프 역할을 합니다. 곧잘 코믹한 캐릭터로 묘사되는 폴로니우스는 오히려
진지합니다. 이게 의도된 연출인 것일까요, 아니면 배우의 연기의 문제인 것일까요. 저로서는 상당히 당혹스러웠답니다. 단 한번도 두 캐릭터를
코믹터치한다는 의도를 읽지 못했으니까요. 물론, 코믹한 대사가 들어간 것이 아니라 배우분의 연기 톤 자체 때문입니다. 거투르드에 대한 신랄한
시선 때문에 위장된 슬픔의 분위기를 넣으려고 했다고 하더라도 제가 볼 때는 지나친 오버 액팅입니다. 그래서 거투르드가 울면, 관객석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옵니다. 심지어는 햄릿을 위한 독배를 마시고 죽으려는
순간에도 말이죠. 저로서는 그녀가 왜 이렇게까지 웃음거리가 되어야 하는지를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레어티즈분의 경우 대사가 잘
안들립니다. 발성이나 성량 자체의 문제가 아닐까 싶네요. 핀 마이크를 쓰지 않는 무대이다 보니 레어티즈의 경우 대사가 거의 먹혀서 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녀린 오필리어의 대사가 뚜렷하게 들리더군요. 다른 것은 다 둘째치고 레어티즈의 붉은색과 파란색 공단 블라우스는
조금....... 그렇더군요. 삼베와 면의 재질과 대비되는 레어티즈의 속성을 표현하려고 했다고 하더라도 배우가 그 옷을 입고 나오는 순간
관객들이 킬킬댄다면 조금 그렇지 않나 싶습니다. 미친 오필리어가 머리에 꽃 화관을 씌우자 레어티즈가 절규하는 장면에서 관객들이 많이 웃게
되네요. 무덤지기들이 레어티즈와 오필리어에게 흙을 덮을 때 레어티즈가 계속 대사를 치게 되어 있는데 너무 정석대로 흙을 뿌려 입에 흙이 너무
많이 들어가 배우가 말을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무덤지기 분이 조금만 타이밍을 맞춰주신다면 배우가 한결 수월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햄릿과 오필리어의 연기는 참
좋았습니다. 그 기나긴 독백을.... '사느냐, 죽느냐(To be or not to be... 연희단은 죽느냐, 사느냐로 시작하기는 하지만)로
시작되는 긴 독백은 번역이 워낙에 유려해서 위화감이 없습니다. 원 텍스트를 한 줄도 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짧고, 명료한 구어체의 말투로
정리되는 깔끔함이라니. 세익스피어의
텍스트들은 보통 영문학자분들에 의해서 번역되기 때문에 곧잘 문어체로 둔갑하는데 이토록 정갈한 구어체의 대사들을 들으니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4년이라는 시간 동안 저도 나이가 든 것인지 2001년 공연에서는 이 독백을 못들었던 것 같은데(별로 귀에 안 들렸던 것이겠죠) 이번 공연에서는
유별나게 다가오더군요. 레어티즈와의 결투 장면이 말 그대로 '볼거리'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도 놀라웠고요. 칼이 부딪치자 불꽃이 튀고(말
그대로 쇠의 마찰 때문에요), 햄릿의 힘에 레어티즈의 칼이
구부러질 정도였습니다. 이 장면이 이토록 스펙터클한 역할을 하다니. 오랜 훈련과 연습을 통해 잘 훈련된 배우들의 몸 연기가 그 자체로 경탄을
이끌어내는 장면이었습니다.
이전에는 잘 느끼지 못했던 오필리어의 유리 조각 같이 섬세한 연기에도 감탄했습니다. 지극히 섬세하고,
가냘퍼서 신경이 부숴진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햄릿에 대한 사랑과 뿌리치자
울먹이며 매달리는 모습, 극중극을 통해서 자신에게 했던 이야기가 무엇인지 전모를 알게 되는 순간 지르는 비명까지. 이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오필리어의 섬세함에 스스로 머리를 쥐어 뜯으면서 "아아, 왜 몰랐었지. 왜 몰랐었지" 이러면서 탄식했습니다. 레어티즈였던 장재호님은 클로어디스가
되셨더군요. 역할에 비해 젊은 분이셔서 햄릿과 나이 차이가 별로 안나게
느껴져서 형 같은 분위기가 나기는 했지만 클로어디스의 독백을 그 배우분에게서 들었다는 것 자체로 의의를 두고 싶었습니다. 그래도 장재호님의
레어티즈가 심히 그리운 공연이었습니다.
3. 아쉬움과
미련
그리하여 2005년에 저는 다른 왕자님을 뵙고 돌아왔습니다. 이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취향으로.... 저는
2001년 공연이 더 좋았답니다. 역동성에 반했던 탓인가 봅니다. 공연은 당연히 변하는 것이고, '같은 강물에 두번 다시 발을 담글 수는
없다'는 말처럼 현재가 지나가면 복제된 똑같은 공연을 만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겠죠. 연출가분의 방향을 보아도 이전 공연으로 돌아갈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이것은 약간의 아쉬움. 연극을 접하는 관객으로서 늘상 갖게 되는 '순간을 정지시키고 싶은 욕망'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햄릿이 죽어가며 호레이쇼에게
말했듯...... 보고, 기억하며, 기록하고, 다시 올 재회를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