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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주 예수님의 수제자라 할 수 있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아래 본문에서와 같이 세 번이나 부인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저주하고 맹세까지 하면서 부인했던 실제는 모든 인생들에 있어, 교회사 전체에 있어 가장 충격적인 사건들 중 하나인 것임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그러한 베드로는 구주 예수님을 3년간이나 가장 가까이에서 따라다니면서 뜨끈뜨끈한 복음의 말씀들을 생생하게 들었고, 온갖 모양의 구원의 일과 하나님 나라의 역사들을 강렬하게 보고 누리며 체험했던 것일 뿐 아니라 그 자신 또한 직접 행하게 되기도 하는 등 최고로 특별한 제자 훈련을 받았다고 볼 수 있는 자인 것이기에 더욱 더 그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실상 그 베드로를 보면서 악한 세력들이 가득한 험악한 세상에서 연약한 육신의 몸을 입고 사는 한 우리 인생들이 얼마나 연약할 수 있는 것인지, 다시 말해 구주 예수님께서 초라하고 아무 힘없어 보이는 모양새로 잡히심과 함께 수치스럽고 비참하게 고초를 겪으시면서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인 상황에서 예수님을 그렇게 만들었던 자들이 얼마든지 자신에게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두려움들, 그와 함께 수시로 엄습하는 죽음의 공포들 앞에서 한 인생이, 아무리 대단한 자였다고 한들 어디까지 약해지고 비겁해 지며 사악해 질 수 있는 것인지를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좀 더 직접적으로는 마태복음 26장 40~41절에서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라고 증거되어 있는 말씀에서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는 것이듯이..
그때 당시에 두려움과 위기 등으로 인해 시험에 든 것이고, 순간순간 깨어있지 못했던 것이며, 실질적으로는 그에 있어 기도하지 못했던 것이고, 무엇보다 진정 마치 옛 사람과 같은 자신의 힘이나 세상적인 방법들이 아닌 살아 있고 깨어 있는 말씀의 신앙과 함께 생생하고 강렬하게 예비되어 있는 하늘의 힘과 은혜와 실제를 제대로 덧입지 못한 것이 그렇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자 이유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러한 베드로를 보면서 여러 가지 면들을 발견할 수 있고 통찰할 수 있는 것인데 우선은 아무리 대단한 자라도, 실제로 구주 예수님을 3년간 따라다니면서 제자 훈련을 그 누구보다 특별하게 받은 베드로 같은 자라고 하더라도 인간인 이상 완전할 수는 없다는 사실, 그 자체로는 얼마든지 약해지고 악해지며 생각 이상으로 비겁해 지고 실망스럽게 될 수 있다는 사실, 심지어는 최악 중의 최악까지도 될 수 있다는 사실, 특히 인간적인 힘, 세상적인 힘이 아닌 살아 있는 말씀의 신앙으로 더 몸부림치면서 더욱 기도함과 함께 깨어 있지 않으면, 실질적으로는 말씀의 영이신 성령님으로 인한 시공을 넘는 전지전능의 하늘의 힘과 은혜와 실제를 생생하게 덧입지 않으면 그 누구라도 안 된다는 사실인 것인데..
바꾸어 말하면 아래 본문의 베드로는 물론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마다 악한 세력들이 가득한 험악한 세상에서 연약한 육신의 몸을 입고 살면서 별의 별 일들, 별의 별 사람들이 다 있을 수 있고, 생각 이상의 문제와 위기들, 두려움과 절망들 등에 얼마든지 빠질 수 있는 현실 속에서 날마다 순간마다 처음에 믿음으로 구원에 참예케 된 사랑, 이치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아버지의 창세 전부터의 뜻과 약속과 섭리 안에서 어떤 식으로든 오직 한 분 구주 예수님을 의지하고 그 이름으로 기도하면서, 특히 사도 바울과 같이 순간순간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고 붙잡으며 그 이름으로 기도하고 찬미하면서 바로 그 이름에 약속되신 성령님으로 인한 시공을 넘는 전지전능의 하늘의 힘과 은혜와 실제를 덧입어 죄악들, 악한 세력들, 온갖 유혹과 시험들, 염려와 두려움들, 제한과 한계들, 시련과 위기들 등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고, 혹 범하게 된 죄악들에 있어서는 최대한 빨리 자복하며 참회하고 돌이키면서 동시에 다른 그 무엇보다 최우선으로 말씀을 정말 하나님의 말씀으로 제대로 사모하고 가까이하며 읽고 들으며 묵상하고 실천하며 증거하는 등과 같은 결단과 몸부림들로 나아가고 또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며, 그러면서 가면 갈수록 직접적으로는 말씀의 영이신 성령님으로 더욱 더 충만케 되고 근원적으로는 말씀으로 하나되신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기뻐 역사하심이 됨으로 인한 하늘의 힘과 구원의 일들, 온갖 응답과 승리와 이적과 복과 열매와 부흥들 등으로 더욱 차고 넘치게 됨과 함께 더더욱 죄악들이 아닌 살아 있고 깨어 있으며 치열하고 뜨거운 말씀의 신앙, 말씀의 열정까지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있을 수 없는 최악의 모습과 죄악들에도, 곧 구주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고, 게다가 저주하고 맹세까지 하면서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구원이 돌이켜지지 않게 된 것일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이후에 있어서 사도행전에서 증거된 말씀에서 잘 확인할 수 있는 것이듯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고 완전히 역전케 되어 말씀을 사모하고 실행하며 증거하는 일에 있어서 목숨까지 아끼지 않는 신앙이 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고, 그와 함께 한 번의 증거로 인해 3000명이나 회심하면서 세례까지 받게 된 역사, 또한 구주 예수님의 이름의 선포 한 번으로 성전 미문의 나면서부터 못 걸었던 자가 그 자리에서 일어서게 된 역사, 게다가 8년 동안 중풍병에 걸려 있던 애니아가 순식간에 낫게 된 역사, 심지어는 죽은 다비다까지 다시 살게 된 역사, 더 나아가 이방 백부장 고넬료의 가정에서의 성령님의 강렬한 역사 등 정말 말도 안 되어 보이는 응답과 이적들, 흥왕과 열매들 등에 있어 가장 귀하게 쓰이게 된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인데..
그 이유와 근거는 조금도 복잡할 수 없는 것으로 그 위치와 역할과 권한 상 모든 주권과 통치와 섭리의 하나님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뜻하시고 계획하시며 약속하시고 예정하시며 준비하시고 진행하시면서 그의 시간에 따라 정말 나타내시고 누리게 하시며 가능하게 하시고 이루신 구원이라는 것이, 게다가 그와 같은 사랑과 은혜와 긍휼의 하나님이실 뿐 이날 공의와 형평과 질서의 하나님 또한 아니실 수 없는 하나님 아버지로 인한 값없는 은혜와 공짜와 같은 선물인 역사에 있어서 온 세상과 전 인류, 모든 시간과 공간보다 더 크신 성자 하나님이시자 구원자이시며 중보자이시고 특히 아담과 하와 때부터 죄악과 진노와 사탄과 음부와 사망과 심판들의 영적 노예 상태에 빠진 우리 인생들과 하나님 아버지 사이의 길과 통로와 접점 등의 위치와 역할과 권한의 구주로서 십자가에서 그 목숨값으로 모든 대속과 대신, 나음과 화평 등을 위한 값과 대가들을 대신 다 치르심과 함께 시대와 나라들을 넘어 모든 구원을 다 이루신 구주 예수님께서 전적으로 함께 직결되지 않을 수 없는 구원이라는 것이, 뿐만 아니라 직접적, 현실적, 경험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그 위치와 역할과 권한에 따라 처음부터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시자 구주 예수님의 이름에 약속되신 분인 성령님께서 시공을 넘는 전지전능의 하늘의 힘과 실제로 인해 정말 시간과 공간들을 초월해서 믿음과 함께 말씀대로 하나하나 모두 다 생생하게 누리고 경험하며 강렬하게 나타나고 성취되어 지는 구원이라는 것이, 진정 근원적으로는 그렇듯 우리 인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하늘의 힘과 구원의 일들의 중심, 근본, 실체이신 분인 것일 뿐 아니라 삼위일체라는 그 존재와 개념 상 구약과 신약 시대, 오늘날 우리들, 모든 인류 역사들, 심지어는 천지창조와 창세 전, 세상 끝 날과 영원에 이르기까지 잠시라도 분리, 별개, 변개이실 수 없는 반면 언제나 함께 이시고 그 위치와 역할과 권한에 따라 완벽하게 조화되시며 완전히 하나되시어 한 뜻을 이루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되심으로 인한 구원이라는 것이 시간과 시대들, 공간과 나라들을 뛰어 넘어 생각하고 상상하는 이상으로 강력한 것이기 때문이고, 게다가 구원이라는 것은 믿음으로 인해 값없이 참예케 되어 이미 하나님의 것이 된 것일 뿐 아니라 영생이라는 측면까지도 이미 포함된 것이기에 다시 돌이켜 질 수 있는 개념 자체일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인 것이며, 다만 그 백성들이 구원에 참예케 된 후에 범하게 되는 크고 작은 죄악들에 있어서는 그 모양과 정도와 강도에 따라, 또한 하나님 아버지의 시간과 계획과 섭리에 따라, 그리고 그 당사자의 영성과 그릇과 준비 등에 따라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더욱 사랑하셔서 라도 아비의 심정으로 더 이상 죄악들을 반복하지 않고 하루바삐 돌이키며 속히 제대로 된 믿음에 서게 되도록 그의 시간까지 하늘의 힘과 응답과 승리와 복들 등은 막으시곤 하는 것이고, 대신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들 등과 같은 징계들을 아끼지 않으시곤 하는 것이며, 마치 광야 40년과 같이 돌고 방황케도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상 그렇지 않고 만에 하나라도 그렇게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값없이 참예케 되고, 그와 함께 이미 천국과 부활과 영생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된 구원이라는 것이 어떤 행위들에 따라 돌이켜 지는 것이라면 아래 본문의 베드로는 물론이거니와 그때 당시의 대부분의 제자들부터, 특히 믿음의 대선배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큰 은혜와 승리와 복의 때에 하나님께서 주신 바로 그러한 최고의 은혜와 축복의 직위와 권한을 오용하고 악용해서 유부녀와 간음을 범했고 심지어는 심히 충성된 그 남편까지도 마치 살인 교사와 같이 죽게 했던 다윗부터 구원이 돌이켜 졌어야 마땅했을 것이고, 실제로 죄라는 것이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으로 그러한 하나님의 법은 육신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눈으로 범하는 죄악들에 관한 것들도 다 포함되는 것이며, 더군다나 요한일서 3장 15절에서는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라고 증거되어 있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듯이 마음의 미움까지도 그 정도로 큰 죄악인 것이기도 하기에 실제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 중 그 자체로 완전한 의인은 단 한 사람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며 오히려 날마다 계속해서 머리털보다 더 많은 죄악들의 위협에 놓일 수 있는 억만 죄인이기 쉬운 면들이 있는 것이기에 그렇게 행위가 기준인 것이라면 단 한 사람도 구원이 돌이켜지지 않을 자 없을 것이며, 당장 그 누구보다 오늘 이 시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부터 이미 일백 번 구원이 돌이켜 졌어야 마땅했을 것인데..
실상 그와 같은 모든 이치와 원리들, 사실과 실제들은 그러한 은혜와 복들을 이용, 또는 오용, 악용해도 된다거나 죄악들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여겨도 된다거나 하는 차원, 또는 다른 한편으로 우리들의 죄악과 불신앙들을 합리화하는 차원 등일 수가 없는 것이고, 오히려 그와 정반대에 가까운 것으로 악한 세력들이 가득한 험악한 세상에서 연약해 지고 걸려 넘어질 수도 있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한 번 더 오직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 붙잡으면서 더욱 더 죄악들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됨을, 혹 범하게 된 죄악들에서 정죄하고 절망하거나 침륜에 빠지게 두면서 뒤로 물러설 것이 아니라 참으로 더 늦지 않게, 진정 최대한 빨리 다시 한 번 그 어디서든, 그 어떠한 때에도, 그 누구라도, 그 어떤 상태에서도 십자가를 붙잡을 수 있고 있어야 함을, 그와 함께 반드시 소망이 있음을, 무엇보다 그 예수님의 십자가 목숨값 구원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되심이 생각 이상, 상상 이상으로 강력함을, 얼마든지 다시 일어설 수 있음을, 그 어떠한 상황들에서도 합력하여 선이 되며 심지어는 역전까지도 될 수 있음을, 무엇보다 여러 믿음의 선배들의 한 때의 연약과 실패들을 교훈 삼아 더 이상의 옛 사람과 같이 인간적인 힘과 세상적인 방법들이 아니라 순간순간 더욱 십자가 붙잡고 그 이름으로 기도하며 바로 그 이름에 약속되신 성령님으로 인한 하늘의 힘과 은혜와 실제를 갈망하면서 죄악들이 아닌 살아 있고 깨어 있는 말씀의 신앙, 말씀의 열정으로 가면 갈수록 치열해지고 뜨거워지지 않으면 안 됨을 함께 소원하고 갈망하며 기도하고 결단하며 몸부림치고 되새길 수 있도록 하는 하나님으로 인한 기회이자 통로이며 예비인 것임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마태복음26:69~75)
*양범주목사의 '21세기 두란노서원'/2024년 11월 6일(수)1부/사진 조연진사모, 이미지 박원영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