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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 지녔을 뿐 하나의 사람으로서 그 사람의 인권을 인정하고 존중해 주어야 한다고 말이다. 사회에서뿐만 아니라 평상시 학교에서도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없애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 일단 학생들은 장애인에 대해 옳지 않은 편견을 가지거나 차별 행위를 해서는 안 되고 도움이 필요하다면 할 수 있는 한 도와주도록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장애 체험이나 장애 관련 포스터 및 글짓기 대회를 해마다 개최함으로써 학생들이 좀 더 장애에 대해 관심을 가지도록 도울 수 있다. 나아가 나라에서는 장애인을 위한 일자리를 마련하고, 장애인이 불편할만한 시설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
최근 시각장애인을 다른 드라마가 방영되었는데, 시각장애인 역을 맡은 배우가 시각장애인에 대해 잘 표현하고, 연기한 것 같다. 시각장애인은 과연 어떻게 밥을 먹지? 누가 먹여줘야만 하나? 라고 궁금해 하여본 적이 있었는데 드라마에서 일반인이 밥상에 시계방향으로 어떤 반찬이 있는지 알려주면 시각장애인도 밥을 먹는데 지장이 없었다. 그리고 시각장애인은 앞을 볼 수 없어서 항상 지팡이를 들고 다니며 걷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모르는 길을 혼자 힘으로 찾기는 좀 힘들어보였다. 또한 이를 악용해서 돈을 뜯어내는 불량배를 만나면 참 곤란하겠단 생각도 들었다.
나는 이 드라마를 통해 시각장애인에 대해 여러 가지로 궁금했던 점들을 풀 수 있었다. 드라마를 보면서는 시각장애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기도 했다. 나는 잠시라도 눈을 감고 있어도 답답할뿐더러 앞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한데 시각장애인은 평생을 그러고 있으니 얼마나 힘들지 모르겠다.
게다가 시각장애인은 앞을 볼 수가 없으니 길을 알려주거나 반찬이 어디에 뭐가 있는지 등을 알려주어야만 하기 때문에 다른 장애인들 중에서도 더 많은 도움이 필요할 것 같다. 그리고 만약 내가 갑작스레 실명이 된다면 아마 더 힘들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계속 보지 못하는 것과 보다가 보지 못하는 것에는 분명 차이가 있으니까 말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시각장애인에 대해 조금이나마 더 이해하게 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산문 부문 장려상
현정이가 내게 준 선물 / 광주 서광중학교 2-5 이혜원
우리 학교에는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1학년 동생이 있다. 그 아이의 이름은 현정이다. 현정이는 급식을 먹으러 갈 때 선생님의 도움을 받는다. 선생님께서 휠체어를 밀어주어 급식실까지 이동한다. 학교에 신입생 입학식을 마치고 얼마 되지 않은 3월의 어느 점심시간이었다. 현정이가 점심을 먹으려고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런데 그 누구도 현정이 자리 주변에 앉으려고 하지 않았다. 점심시간에는 급식실에서의 자리다툼도 치열하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나처럼 아침을 거르고 학교에 오기 일쑤다. 이유는 각자 다르겠지만 나는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버릇이 있어서 아침에는 밤을 거의 먹지 못하는 편이다. 그 날도 마찬가지다. 늦잠을 자서 아침을 먹지 못하고 허겁지겁 책가방 챙겨서 학교에 지각하지 않고 도착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했다. 그래서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뱃속에서는 빨리 뭔가를 좀 채워달라고 난리가 난다.
나는 무척이나 배가 고팠다. 오전의 마지막 시간 종소리가 울리기 무섭게 급식실로 가서 줄을 섰다. 한참을 서있으니 내 차례가 되었다. 밥과 반찬을 식판에 받아서 자리를 잡기 위해 테이블을 한 번 훑어보았다. 테이블 마다 삼삼오오 모여앉아 식사하는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내가 비집고 들어갈 빈자리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나처럼 식판을 들고 자리를 잡기 위해 서성이는 친구들도 많았다. 그런데도 현정이가 있는 쪽으로 선뜻 걸어가는 친구는 없었다. 현정이는 넓은 테이블에 선생님과 둘이 앉아서 밥을 먹었다.
순간, 그런 현정이의 모습이 엄청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나는 너무 배가 고파서 어디든 빨리 앉아서 밥을 먹어야했기에 아무 거리낌 없이 현정이 옆에 앉아서 점심을 먹었다. 그렇게 현정이와의 첫 인연이 시작 된 것이다. 그 날은 그냥 가볍게 목례만하고 긴 인사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나는 현정이의 옆에 앉아 밥을 먹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점점 친한 언니와 동생 사이가 되었다. 어느 정도 가까워진 다음에는 전화번호를 주고받을 만큼 우리는 친해졌다.
그리고 현정이에 대해 알게 된 사실이 두 발로 걸어 다니는 이유 하나로 그 동안 내가 얼마나 거만하고 오만했는지를 깨닫게 해줬다. 현정이가 휠체어를 타게 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라고 했다. 여름 더위를 피해서 아빠 차를 타고 가족끼리 동해바다로 피서를 가다가 교통사고가 났다고 한다. 그래서 가족들도 많이 다치고 현정이는 허리뼈를 심하게 다쳐서 걸을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말로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나도 어느 날 갑자기 현정이처럼 저런 사고를 당해서 걷지 못하면 어쩌지.’ 라는 생각을 하니까 눈앞이 깜깜해졌다. 만일 나에게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나는 현정이처럼 밝지도 못하고 당당하지도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 동안 얼마나 대충 살았는지 반성을 하였다.
나는 마음만 먹으면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어디든지 걸어서 다닐 수가 있다. 집에서 학교에 오는 길도 마찬가지이다. 아침에 조금만 일찍 일어나면 엄마한테 잔소리 들으면서 엄마가 태워다 주신 자동차를 타지 않아도 될 것이다. 걸어서도 얼마든지 등하교가 가능한 거리에 우리 집이 있다. 그런데도 나는 아침마다 엄마에게 부탁해서 엄마 차를 타고 등교를 했었다.
하지만 현정이를 알고 난 뒤부터는 내 생활에 변화가 생겼다. 저녁에 조금 일찍 자고, 아침에 조금 일찍 일어나서 꼭 걸어서 등하교를 하게 되었다. 그랬더니 나는 살 빠져서 좋고, 엄마는 자동차 기름 값 아껴서 좋고, 현정이와의 사이도 더 가까워지고 모든 일이 다 좋은 쪽으로 풀려나갔다. 오늘도 나는 현정이 옆에 찰싹 붙어 앉아서 점심을 같이 먹었다.
이런 내 모습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쳐다보는 친구들이 아직도 있다. 하지만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그 친구들도 언젠가는 현정이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 나처럼 활기찬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친한 친구를 만들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다가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산문 부문 장려상
장애인의 소원, 우리의 현실 / 대구 영신중학교 2-4 서한결
민수를 만난 것은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다. 민수와 나는 같은 반이었다. 한창 친구들과 떠들고 뛰어다니며 놀고 있을 나이에, 우리 학교에서 한 명만이 늘 혼자 앉아 외로움과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민수는 어릴 때 교통사고로 인해 지체 장애인이 됐다고 했다. 민수는 몸이 불편한 것 외에는 전혀 우리와 다를 것이 없었다. 공부도 그럭저럭 잘해서 늘 중상위권에 속했고 얼굴도 전혀 뒤처지지 않을 만큼의 멋진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팔과 다리를 사용하지 못해서 항상 절뚝절뚝 거리며 어머니의 부축을 받으며 지냈다. 민수가 절뚝대며 길을 걸어 다닐 때 마다 내 친구들은 모두 민수 흉내를 내며 놀려댔었다.
물론 나도 그랬다. 그 아이가 얼마나 힘들어 했을지 생각도 안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비웃으며 놀려댔었다. 그렇게 나와 친구들은 아무렇지 않게 민수를 놀려댄 시간이 어느새 일 년이 다 되어갔다. 자습을 하느라 조용하던 어느 날, 교실에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네. 네. 네?” 갑자기 선생님께서 소스라치게 놀라시며 말을 잇지 못하셨다. 우리는 전부 놀라서 선생님께 무슨 일이냐고 여쭸다. 한 동안 말을 못하시던 선생님이 전화를 끊은 뒤 울면서 말씀하셨다.
“모두 내 탓이야. 민수가 얼마나 힘들어 하는 지도 모르고… 얘들아. 민수가 어제 저녁에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 내리려고 했단다. 민수네 엄마가 말씀하시더라. 민수가 친구들이 놀리는 게 싫고 두려워서 차라리 하늘나라에서 두 팔, 두 다리 모두 사용해서 뛰어다니고 싶었다고 울면서 말했대. 친구들하고 함께 어울리고 싶었단다. 너희들도 이번 일을 계기로 많이 성장하고 이해하는 학생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우리의 장난과 무심함이 민수를 그토록 힘들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막심한 후회가 들고 내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그 때 선생님께서 몰래 나를 복도로 부르셨다. “한결아. 지금 민수 어머니께서 볼 일이 있어서 멀리 가셨는데, 일단 집으로 돌아오고 계신다고 하네. 너희 집이랑 민수집이 가까우니까 괜찮다면 학교 마치고 민수집에 한 번 둘러봐 줄래?” 나는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를 마치자마자 나는 민수에게로 갔다. 민수는 절뚝거리며 문을 열어줬다. 내가 올 줄은 상상도 못했는지 잠시 동안 문 앞에서 입을 못 다물고 있었다. “민수야. 미안해…” 민수에게 미안한 마음을 담아 사과를 했다.
민수는 배시시 웃었다. 민수의 손은 붕대로 감겨 있었다. 빨간 피도 보였다. 도대체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이 갔다. 민수는 와줘서 고맙다고 했다. 그러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팔다리를 마음대로 쓸 수 있으면 좋겠어. 친구들과 장난도 치고 축구도 하고 싶어.” 그렇게 말하는 민수를 보고 그 단순한 꿈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달았다. 그렇게 많은 dll야기를 나누고 앞으로는 절대 놀리지 않고 친하게 지내기로 약속했다.
집에 가는 길에 나는 생각해 봤다. 내가 만약 민수 입장이었더라면 어땠을까? 사람들이 장애인이라고 손가락질을 하고 왕따 시키고 나를 외면한다면 나는 어떨까? 나는 지금껏 내 몸이 건강하고, 신체에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만족해 본적이 없다. 그리고 볼 수 있다는 것이,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지금부터라도 내가 멀쩡하게 살아 생활하고 있는 사실에 만족하며 살아야겠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장애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이해하며, 민수를 비롯한 수많은 장애인들이 꿈을 잃지 않고 살아갔으면 좋겠다.
산문 부문 장려상
우리들의 친구 용재야! 희선아! 어디 있니?/ 대전 동화중학교 1-2 류수현
용재, 희선. 지금 내가 가장 궁금해 하는 이름이다. 어쩌면 나와 같은 동화초등학교를 나온 친구들도 같은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용재와 희선이는 나의 초등 6년 생활을 함께 지내온 장애우 들이다. 용재와 희선이 그리고 그들의 친구들과 나는 조금 특별한 사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초등학교 6학년 때 ‘새싹 동요제’ 라는 합창대회에 참여한 일이다. 나는 그 친구들과 함께 대회에 나갔다. 무대 위에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선다는 것 자체가 부담되고 쑥스러운 일이다. 하물며 그 친구들과 함께 한다는 것은 어쩌면 선생님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한 것 일지도 모른다. 노래 시작을 알리는 반주가 들리자, 두려움과 긴장감을 느낀 친구 하나가 내 손을 꼭 잡았다.
작은 체구를 가진 친구가 어쩜 그렇게 커다란 힘을 내는지 놀랐다. 그 힘은 자신의 두려움의 강도를 나타내는 듯하였다. 그 친구는 내 손을 잡음으로써 내게 기대고 안정감을 느끼고 싶었을 것이다. 손을 잡은 것뿐이지만 나는 그 손의 따뜻함이 내 마음 깊이 전달되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더욱 당당히 열심히 대회에 참여하였다. 대회가 끝난 후 우리는 상장을 받았다. 특별상이었다. 하지만 나는 상장을 받는 것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대회에 함께 나가는 것을 처음에는 꺼려했기 때문이다. 그저 그 친구들 옆에서 조연의 역할을 해 주었을 뿐인데 말이다.
나는 이런 친구들이 내 생활에서는 매우 익숙하다고 생각하였다. 어린이 집 때부터, 초등학교 6년 생활, 준거집단 RCY 활동, 그리고 아빠 회사 봉사활동을 통해서이다. 또한 초등 5, 6학년 때 RCY에서 활동 하면서 직접적으로 장애우들에게 봉사활동을 한 적도 있다. 나는 지금껏 내가 장우들을 차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지만, ‘새싹 동요제’를 통해서, 많은 것을 느끼고 알게 되었다. 나 역시 다른 사람들과 똑같았다는 것을 그저 그들을 불쌍하고 도움을 줘야 된다는 의무감뿐이었던 것이다.
친구들은 내 곁에 없다. 같은 동네에 살지만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본적이 없다. 우리 엄마는 며칠 전에 그 친구들도 같은 학교에 진학했냐고 물어보셨다. 어디에 있을까? 나 역시 궁금하다. 초등학교 때 학습 도움실 선생님과 담임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어쩌면 이 아이들이 너희들 보다 더 행복한 아이들일 것이라고…” 나는 어느 비 오는 날, 우산이 없이 비 맞고 가는 용재에게 우산을 씌어주어 용재 엄마께로 데려다 준 적이 있다. 활짝 웃으며 몇 번이고 고맙다고 말하는 용재와 용재 엄마가 얼마나 행복해 보이던지. 너무나 고마워하는 용재 엄마의 얼굴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우리는 흔히 ‘장애’ 라고 하면 선천적인 신체장애, 정신적 장애만을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한순간에 장애인이 될 수 있다. 나는 정신적인 우리들의 장애가 더 크다고 생각한다. 최근, 왕따 학교폭력 자살 학업성적 등으로 인해 심리적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는 우리들 역시 가장 큰 장애가 아닐까 생각한다. 아직도 장애우들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우리들, 색안경을 벗고 우리와 같은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아야겠다.
용재와 희선이가 지금 우리 곁에 없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책임일 지도 모른다. 우리가 좀 더 차별 없는 시선으로 그들을 위한 마음을 갖고 생활하였으면, 지금 우리와 같이 중학교 에 진학하였을지도 모른다. 우리들의 친구 용재, 희선이가 우리들과 함께 꿈을 꾸고 이룰 수 있는 사회가 되고 그들과 같은 처지에 있는 모든 장애우들이 우리와 함께 웃을 수 있으며 꿈 많은 청소년 시절을 함께 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용재와 희선이는 어디 있는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글의 마침표를 찍는다.
산문 부문 장려상
나도 여자랍니다 / 서울 경희여자중학교 3-6 박이경
왁자지껄한 점심시간, 아이들은 초복의 급식 메뉴가 닭갈비라는 소식에 부산스레 급식실로 뛰어간다. 한창 인기인 아이돌 그룹 얘기를 하던 중 앞줄에 서 있는 지인이를 보고 인상을 찌푸린다. 장애가 있는 지인이는 혼자 점심 먹기 일쑤다. 일부러 괴롭히는 애들은 없다지만 나서서 도와주는 애는 반장 민희 밖에 없다.
“야, 박태윤. 다 먹고 축구 한판?”
다른 반 남자애들 말에 태윤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박태윤은 우리 학교 ‘인기남’이다. 말수가 적지만 재치 있고 리더십도 있는 편이다. 여자애들의 고백도 많이 받는 것 같던데 그런 데엔 관심이 없나 보다.
역사 선생님 특유의 경상도 사투리가 교실을 울린다. 몇 명은 눈꺼풀과의 싸움에서 진 지 이미 오래다. “알겠지요, 여러분? 이번 단원의 핵심이에요. 자, 줄그어요, ‘고려와 다르게 조선은 성리학을 기초로 한 유교 국가였다.’ 그럼, 7번 박태윤, 1번 문제 읽고 답 해봐요.” 정답을 말한 박태윤은 선생님의 칭찬을 들으며 자리에 앉는다. 친구들과 피시방을 다니며 다 놀면서도 공부까지 썩 잘한다. 다음으로 선생님은 53번 지인이를 부른다. “세…종의 업적은 무어…엇이 있는가?”
지인이는 말할 때와 다르게 글을 읽을 때는 심하게 말을 더듬는다. 애들은 그런 지인이를 보며 웃거나 듣기 싫은 듯 표정을 구긴다.
오늘따라 등교한 애들이 야단법석이다. “무슨 일 있냐?”고 참견하기 좋아하는 찬현이에게 물어보니 박태윤의 책상 위에 분홍색 하트 모양 포스트잇과 바나나 우유가 있었단다. 애들은 누가 놓았던 것인지 떠들썩하다. 나도 꽤 궁금해졌다. 우리 반에서 처음 벌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어딘가 익숙해 보이는 글씨체라고 생각하며 자리에 앉았다. 생각보다 하트 포스트잇의 주인공을 찾기가 어렵다. 반 애들은 벌써 며칠 째 추측 중이지만 이렇다 할 단서가 없다. 그 동안 우유의 맛은 달라져왔다. 오늘 박태윤의 책상 위엔 커피 우유가 있었다. 다 먹은 식판을 들고 일어나자 따라 일어난 수연이와 혜리가 내게 묻는다.
“너 오늘 매점 갈 거지? 뭐 먹을 거야?”
“글쎄, 더우니까 쭈쭈 바나 먹으려고.”
“그러자. 에구, 더워.”
쭈쭈 바를 먹으며 친구들과 운동장 쪽으로 돌아가려는데 함성소리가 들려온다.
“꺄! 박태윤, 멋있다!”
박태윤이 골을 넣었나. 여자애들 반응을 보아하니 그런 듯싶다. 옆에 있던 수연이와 혜리의 눈도 그새 반짝인다. 속으로 혀를 끌끌 차며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아까 급식을 먹던 지인이가 운동장을 바라보며 웃는다. 박태윤을 응원하는 중이었다.
“쟤, 김지인 아니야? 뭐야, 쟤 박태윤 좋아하나?”
“헐. 어이없다. 장애인 주제에, 자기가 뭐라고?”
뜻밖이다. 지인이가 박태윤을 좋아하다니! 그제야 하트 포스트잇 위의 글씨체와 지인이의 그것이 머릿속에서 겹쳐진다. 못마땅하게 여긴 여자애들은 교실로 뛰어 들어가 소리친다.
“김지인이 하트 포스트잇인가 봐!”
하트 포스트잇의 중인공은 결국 반 애들에게 알려지고 말았다.
지인이가 박태윤을 좋아한다는 게 알려진 것도 벌써 며칠째. 박태윤은 특별한 반응이 없다. 애들은 나와 같이 놀랐고 그 중 몇 명은 지인이 앞에서 험담을 하기도 했다. 방학이 시작되면 한참 서로를 못 볼 것이다. 애들도 서서히 잊겠지 뭐. 1학기 성적표를 받아 들고 낙담했지만 서둘러 떡볶이를 먹으러 갈 채비를 한다. 선생님과 반 친구들에게 인사하고 교실을 나가려던 순간, 지인이가 박태윤에게로 다가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소리로,
“태윤아! 나 너 좋아해! 비록 겁나서 이렇게 말한 적은 없었지만… 방학 잘 지내!” 라며 대답을 듣지도 않고 나가버린다. 박태윤은 그 자리에 서서 슬쩍 웃으며 친구들과 함께 자리를 뜬다.
지인이는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은 사랑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개학 후 어떻게 될 진 아무도 모른다. 누구보다 순수한 사랑을 한 용감한 자인이 모습에 빙그레 웃음이 난다.
산문 부문 장려상
아빠 / 서울 문영 여자 중학교 3학년 정반 강민아
어렸을 때 나는 아빠를 로봇이라고 생각했었던 적이 있었다. 아빠의 오른쪽 다리에 항상 씌워져 있던 보조기 때문일 것이다. 어린이 집에 가서 다른 친구들의 아빠들을 보기 시작한 6살 이전까지 난 아빠의 다리가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별로 느끼지 못했다. 아빠의 한 쪽다리가 불편하다고 해서 일상생활에 크게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늘 나랑 활동적으로 놀아주려고 하셨으니까.
그러다가 어린이 집에 다니기 시작한 후부터 그런 걸 느끼기 시작했던 것 같다. 다른 친구들의 아빠와 좀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느꼈던 사건이 있었다. 7살이 되고 나서부턴 아빠가 어린이 집에 데려다 주셨다.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아침에 아빠께서 나를 교실에 데려다 주고 가셨는데, 친구 하나가 우리 아빠의 다리가 이상하다며 말을 꺼낸 것이었다. 물론 친구들이 나를 놀리거나 비꼬려는 의도로 그런 말을 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 때는 어린 마음에 충격을 받았는지, 아니면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는지 모르겠지만 친구들 앞에서는 차마 자존심이 상해 울지는 못하고 집에 돌아와 엄마에게 그 말을 하며 서럽게 울었던 게 생각이 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바보 같고, 철이 없었던 것 같다.
6살의 나는 지금만큼은 아니더라도 자존심이 셌고 성격도 강한 편이라 놀림을 당했다는 사실에 상처를 받았던 것 같다. 그 날, 집에 와서 저녁을 먹으며 엄마한테 이 이야기를 했다. 엄마도 내가 이런 말을 들을 거라곤 생각을 전혀 못 하셨던 것 같다. 내가 말을 마치자 당황하시며 말을 잇지 못하셨던 게 기억이 난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저녁을 다 먹은 후에야 엄마가 입을 여셨다. 아빠의 다리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 때 난 아무 생각 없이 엄마의 이야기를 들었다. 엄마는 내가 살면서 명심했으면 하는 것 한 가지를 말씀해주셨다. 내가 아빠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누가 뭐라 해도 아빠는 네 아빠고 그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또 아빠는 항상 최선을 다해 너를 행복한 딸로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니까 부끄러워하지 말고 당당해져라’ 라고… 이제야 나는 아빠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한 엄마의 뜻을 알 것 같다. 아빠는 항상 노력하시며 살아오셨다. 몸의 일부가 불편하다는 콤플렉스를 지니시고도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하고, 또 노력해서 지금의 자리까지 오셨다. 오히려 몸이 불편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서 남들보다 더 열심히 사신다.
아무리 일이 많고, 바빠서 새벽에 들어오시더라도 꼭 아침에 나를 학교로 데려다 주시면서 ‘우리 딸 좋은 하루 보내!’ 하고 웃으시면서 손을 꼭 잡아주신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요즘 치킨을 통 못 먹고 있다고 아침에 투덜대던 걸 기억하시고 치킨을 사다주셨는데 그걸 받는 순간 내가 말한 사소한 것까지 신경을 써주신다는 것에 감사드렸다. 아빠에게 이 글을 쓴다고 말씀을 드리니까 열심히 써보라고, 자기를 소재로 이런 글을 써줘서 고맙다고 하셨다. 내가 오히려 고맙다고 말씀 드리고 싶었다.
이런 내용으로 글을 쓰는 게 달갑지 않으실 수도 있는데 오히려 아빠는 흔쾌히 웃으시면서 쓰라고 말 해주셨다. 이런 아빠께 항상 고마운 마음뿐이다. 요즘 부쩍 일이 많아지셔서 밤늦게 들어오시거나 일찍 들어오시더라도 바로 주무시는 바람에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었는데 얼마 전 학교에서 어버이 날 편지 쓰는 행사가 있었다. 그 때 아빠께 평소에 부끄러워서 말 하지 못했던 감사하다는 내용으로 편지를 썼다. 며칠 후 어버이날에 그 편지를 받고 활짝 웃고 계실 아빠의 모습이 떠오른다.…
산문 부문 장려상
지은아 미안해!/ 서울 휘경여자중학교 1-3 강민아
산과 들에 형형색색의 꽃들이 수를 놓은 듯 예쁘게 피어있다. 봄을 제일 먼저 알려주는 건 꽃과 나무 같다. 봄이면 생각나는 내 친구 지은이!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일이다. 다니던 학교에서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간 적이 있었다. 모든 것이 새롭기만 한 학교에서의 첫 날은 낯설기도 하고, 기대도 되고, 두렵기까지 했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갈 용기가 없어 서성이고 있는데 선생님께서 들어오라고 하셨다. 선생님께서는 내 소개를 하라고 하셨다.
며칠 전부터 엄마와 자기소개 연습을 열 번도 넘게 했는데 아이들 앞에서니 아무 것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저 내 귀에는 쿵쾅쿵쾅 심장소리만 들렸다. 겨우 이름만 이야기하고 자리에 앉았다. 내 짝꿍의 이름은 이지은. 새로운 나를 보고 밝게 웃어주는 지은이가 정말 고마웠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교문을 나오는데 엄마가 나를 기다려 주고 계셨다. 학교에서의 첫날은 내 짝꿍 지은이를 만난 이야기로 엄마와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둘 째 날, 나는 제일 먼저 지은이를 찾았다. 그런데 지은이가 이상했다. 같은 반 남자 친구들이 지은이를 때리고 바보라고 놀리고 있는데도 지은이는 그저 웃고만 있다. 나 같으면 화를 내거나 울 것 같은데 그런 지은이가 나는 이상해 보였다. 나는 “하지 마” 하고 싶었지만 낮선 친구들을 향해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수업 종이 울리고 선생님께서 들어오셨다. 지은이는 선생님께도 자기를 괴롭힌 친구들을 말하지 않는다. 지은이는 정말 착한 친구인가?
지은이는 말이 별로 없다. 그래서 짝꿍인데도 대화를 많이 해보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은이 어머님께서 교실로 오셨다. 그리고 나에게 지은이 이야기를 해주시는 거다. 지은이는 지적 장애가 있는 친구라며 많이 도와주고 친하게 지내달라고 하셨다. 지은이가 나를 좋아한다고도 말씀해주셨다. 얼굴도 예쁘고 몸도 아픈 곳이 없어 보이는 지은이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날부터 지은이의 가방도 들어주고 재잘재잘 수다쟁이가 되어 지은이를 재미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다른 친구들과도 많이 사귀어 학교생활이 즐겁고 행복했다.
지은이도 나에게 말도 하고 장난도 친다. 드디어 우리가 친구가 된 것 같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던 어느 날, 미술 시간에 공룡을 만들어 전시해 놓은 것을 누가 팔 다리를 떼고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다. 내가 열심히 만들어 놓은 공룡을 보니 화도 나고,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더 황당한 일은 지은이가 그렇게 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은이는 수업시간에 바지에 오줌도 싸고, 내 공책을 찢어놓고, 어떤 날은 내 팔을 물고, 머리를 때리고 모둠 수업이 있는 우리 조는 항상 지은이 때문에 상도 받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런 지은이가 점점 싫었다. 그래서 선생님께 짝을 바꿔 달라고 말씀도 드렸다.
그 후 나는 지은이랑 점점 멀어지고, 지은이를 잊은 채 지냈다. 또 지은이가 항상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아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지은이 어머니께서는 학교에서 일을 하신다. 그래서 자주 교실에 올라와 지은이를 보살피신다. 어느 날 지은이 어머니께서 “정인아 지은이와 잘 지내줄래? 지은이가 정인이를 좋아하는데.” 라고 말씀하시는데 나는 “싫어요. 자꾸 지은이가 저를 힘들게 해요.”라고 말을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여름이 다가오는지 체육시간에 운동장에 나가 달리기를 하면 땀이 뻘뻘 났다. 지은이가 일주일 동안 학교를 오지 않고 있다. 나는 왠지 궁금했다. 어디가 아픈 걸까? 얼마 전 지은이가 학교에서 똥을 쌌다. 같은 반 친구들은 냄새 난다며 놀리는 친구도 있었고, 지은이 어머니를 부르러 간 친구들도 있었다. 아줌마는 지은이를 데리고 화장실로 가셔서 씻기시며 지은이를 때리며, 울고 계셨다. 나는 마음이 아팠다. 그 때 생각했다. 장애를 가진 지은이에게 잘해주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됐다. 이 일 후 아주머니께서 병이 나셨고, 지은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어 지은이도 학교에 못 온 거다.
여름 방학이 시작되고 나는 다시 예전의 학교로 돌아갔다. 전학을 간 곳도 좋았지만, 예전 친구들이 너무 그리워서 엄마에게 눈물로 내 마음을 이야기하고 돌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졸업을 하고 나는 지금 중학교 1학년이다. 그동안 지은이란 친구를 잊고 있었는데 글짓기 공고문을 읽다보니 장애인 친구에 관한 글이었다. 그 때 나는 지은이가 생각났다. 내 마음속에 고맙고, 미안했던 친구 지은이! 이 기회를 통해 지은이에게 내 마음을 이야기 해보고 싶었다.
“지은아 정말 미안해, 너의 진심을 물라준 나를 이해해줘. 우리 서로 좋은 친구로 기억하며 살자. 나도 지은이 너를 좋아했었어.”
주위에 장애를 가진 친구가 있다면 저처럼 후회하지 마시고, 정말 마음으로 그 친구를 이해해주고 감싸주세요. 우리와 다른 몸을 가진 친구지만 마음만은 순수하고 좋은 친구랍니다. 지은이란 친구는 저를 좋아하는데 제가 다른 친구들처럼 자기와 잘 지내다 멀어지게 될까봐 그런 행동을 했던 거라고 합니다. 좀 더 일찍 제가 장애인 친구들을 알 수 있었다면 저 또한 그러지 않았을 겁니다. 지금부터라도 저는 다시 장애가 있는 친구를 만나게 된다면 진정한 마음으로 좋은 친구가 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산문 부문 장려상
우리도 그들처럼/ 전북 진경여자중학교 2-2 소수연
초등학교 때, 친척 동생들과 어울려 눈에 안대를 쓰고 ‘나 잡아 봐라’ 놀이를 한 적이 있다. 술래가 되어 안대를 썼을 때 생각보다 훨씬 더 깜깜해서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눈을 가리고 나니 모든 감각이 손과 귀로 쏠리는 것 같았다. 손을 앞으로 쭉 뻗어 닿는 느낌으로 집안의 가구와 방향을 짐작하고, 소리, 발소리 등을 듣고 그들을 잡기 위해 허둥대다가 부딪치고 넘어지고 다쳤다. 놀이를 끝내고 보니 허벅지와 팔뚝의 군데군데 멍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중학교에 들어와서 1학년 때 학교 행사 중 ‘장애체험교육’ 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어서 또 다시 안대를 쓰게 되었다. 이번에는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안대를 쓰고,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교실 가장자리 한 바퀴를 돌았다. 미리 책상을 가운데로 몰아 놓아서 비교적 장애물이 없었는데도 방향감각을 잃어서 자꾸 교실 벽에 부딪쳤고, 그 때 마다 친구들은 깔깔대고 웃었다. 목발 짚고 학교 진입로부터 교실까지 들어오는 체험도 했었는데 겨드랑이가 너무 아파 선생님이 안 보는 사이 몇 걸음은 그냥 걸었다.
나는 이러한 경험들을 통하여 우리 주위에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불편할지를 몸으로 느끼고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장애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유심히 살펴보게 되었고, TV프로그램에서도 장애인을 다룬 것을 진지하게 보게 되었다.
그 결과 예전에 가졌던 장애인들에 대한 생각이 많이 변화되었다. 전에는 신체장애나 정신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니 내가 특별히 신경 쓸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었다. 우리 가족이나 일가친척 중에도 장애인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적장애를 가진 친구와 한 교실에서 생활해 보고 그 친구도 지금까지의 내 친구들과 다른 점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강원래 아저씨가 진행하는 장애인을 위한 TV프로그램을 보고 전에 댄스 가수였던 아저씨의 건강했던 모습을 동영상으로 본 뒤에 나에게도, 우리 가족에게도 장애는 언제든 닥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만약을 생각하게 되었다. 만약 내가 저 아저씨처럼 어느 날 교통사고를 당해 두 다리를 못 쓰게 되어 휠체어가 없이는 원하는 곳에 갈 수 없는 처지가 된다면 어떨까. 내가 조심성이 없어 눈에 무언가 들어가 어느 날 갑자기 실명을 하게 된다면 어떨까. 우리 집은 드라마에 나오는 시각 장애인 여주인공처럼 부자도 아니고, 나는 그 언니처럼 예쁘지도 않은데… 그렇게 장애인이 되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게 된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장애인이라고 원하는 직장에 들어가기도 힘들면 어떨까. 시내버스 안에서나 엘리베이터에서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어 눈칫밥을 먹게 된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온갖 생각을 다 하게 되었다. 그제야 장애인들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알게 된 것이다.
세상의 모든 장애인들 중 자신이 원해서 그렇게 딘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별을 당하고, 무시를 당하고, 동정까지 받게 된다면 얼마나 억울할까. 내가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정말 견디기 힘들 것 같다. 그러므로 나는 앞으로 장애인들을 대할 때 나와 똑같은 사람으로서 대할 것이며, 동정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내 친구들과 가족들에게도 이런 점을 이야기해서 장애인을 대할 때 우리 이웃집의 식구들을 대하듯 하도록 앞장설 것이다.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 이희아, 헬렌 켈러, 스티븐 호킹, 박은수 박사, 임안수 박사, 안드레나 보첼리 등 장애를 극복하고 정상인보다 훨씬 더 뛰어난 능력을 보이며 성공한 사람들이 많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의 성공적인 이야기에 감동받으면서도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도 있다. 다들 자신에게 직접 닥치지 않은 이야기라서 그럴 것이다. 그들도 우리처럼 정상인이었을 때가 있었고, 우리도 그들처럼 어느 순간 장애인이 될 수도 있는데 아무도 그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이런 사실만 늘 생각하고 산다면 장애인 차별대우라든지, 인권 침해 문제 따위는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기다려본다.
산문 부문 장려상
마음의 두 다리로 걷고 싶다. 세상을 향해…/ 서울 대원국제중학교 3-3 김서경
“서경아! 빨리 일어나. 서둘러”
추석 연휴 아침, 엄마의 다급한 목소리에 눈이 떠졌다. 늦잠을 잘 수 있는 황금연휴에 ‘웬 봉사활동이야’ 한참을 투덜거리며 부랴부랴 버스에 몸을 실었다.
한사랑재단(중증장애인 보호시설)에 도착해서 처음 그 언니를 보았을 때 나는 약간 얼굴을 찌푸렸다.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는지 아님 나이가 어려서 철이 없었던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난 장애인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왜 이런 곳에 와야 하는지’ 또 ‘말도 안 통하는 사람들과 무엇을 할 수 있을까’하는 이런저런 생각들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렇게 쓸데없는 생각을 했는지 조금은 한심해서 웃음이 난다.
처음 그곳에 들어갔을 때 거북한 마음에 난 옆에 있는 엄마의 손을 꼭 붙잡았다. 엄마와 내가 돌봐준 언니는 18세로 나보다 몇 살 위였지만 몸무게가 채 20kg도 안되고 혼자서는 몸을 가눌 수 없는 중증지체장애인이다. 하지만 “예쁘다”는 칭찬 듣기를 좋아하고 안아주는 것을 좋아하는 소녀 같은 언니였다. 언니와 산책을 하고 송편도 만들면서 해맑게 웃는 언니의 모습에 신기하게도 조금씩 장애인에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 버스에서 몸은 녹초가 되었지만 내가 지금 건강하게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잊고 지내던 초등학교 때 방문했던 장애인 시설에서 ‘장애인’체험이 생각났다. 장애인의 마음을 헤아려 보기 위한 체험이었다. 장님을 체험했던 나는 두 눈을 눈가리개로 가리고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산책을 한 적이 있다. 평소에는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걷던 길이 어찌나 불편하고 넘어질까 두려워 다리에는 힘이 들어가고 집에 와서는 몸살이 날 정도로 피곤했다. 그 날 하루는 나의 건강한 두 눈에 감사함을 느꼈다.
세상을 바꾼 위대한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가진 삶의 장애와 한계를 극복한 사람들이다. 요즘은 너무 쉽게 포기하고, 너무 쉽게 지쳐버리는 사람들이 많다. 끊임없는 노력과 끝까지 할 수 있다는 의지가 어떻게 삶을 바꾸는지 나는 한 권의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임임택씨의 ‘1%변화가 100%의 삶을 바꾼다.’를 읽고 장애는 불편일수는 있어도 결코 불행은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 21살에 찾아온 희귀질환 ‘베체트병’으로 두 눈을 실명, 후천적 장애를 딛고 실명의 어둠조차 신이 주신 선물이라 말씀하시는 멋진 분이다.
오늘 나는 ‘장애인과 나’를 생각해 보며 부끄러운 반성을 하게 되었다. 나는 한 부모 가정의 자녀다. 조금은 남과 다른 환경 때문에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때가 많았다. 성적이 향상되고 수상실적이 늘면서 국제중학교에 입학했을 때에도, 내가 전교1등 졸업을 했을 때에도 ‘한 부모 자녀’라는 말이 주홍 글씨처럼 따라다녔다. 어릴 때에는 조금 위축되기도 하고 마음에 상처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난 세상의 편견을 뛰어넘고 싶었다.
한 부모 가정의 자녀라도 얼마든지 예의 바르고 공부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앞으로 미래사회는 다양성을 존중하고 차이를 인정하되 차별하지 않는 사회가 되어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어린 시절 마음의 장애를 갖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저 조금 남과 다를 뿐인데… 내가 내 스스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다양성을 존중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세상을 향해 당당해 질 수 있었다. 나는 마음의 장애였고, 장애인은 몸이 조금 불편한 것뿐이다. 우리는 모두 똑같은 사람이다. 생각이 사람을 바꾸는 것이다. 아주 잠시 장애인을 다른 시각으로 보았던 내 자신이 한심하고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많은 반성을 하게 되었다.
앞으로 만나게 될 장애인들과 소중한 인연을 맺고 싶다.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며…
산문 부문 장려상
아무런 문제 되지 않아/ 충북 청주 충북여자중학교 1-5 임도현
2012년 3월 4일, 6학년 3반 교실 문이 드르륵 열렸다. 교실 저편에 앉아 퉁명스러운 얼굴로 나를 돌아보던 박민지. 개학식 날 달갑지 않은 얼굴로 서로를 마주했었다. 절뚝거리며 나를 쳐다봤던 민지와의 첫 접촉은 봄 소풍이었다. 3월 식물원으로 소풍을 갔던 우리는 온종일 걸어 다녀야 했다. 다리가 불편했던 민지의 휠체어는 나와 내 단짝 혜정의 몫이었다.
부회장이라는 이유로 휠체어를 밀라는 그 말씀이 6학년 첫 소풍을 가는 나와 혜정이 에게는 야속하기만 했다. 그래도 선생님 말씀이니 밀어주려 가는 순간 선생님의 손이 내 팔목을 잡았다. “자기도 미안할거야. 웃어줘. 도와주는 사람이 웃지 않으면 도움 받는 사람은 불편해.” 선생님의 그 말을 되새기며 민지를 밀어주었다. 번갈아가며 미는데도 꽤나 힘이 들었다. 선생님께서 힘들어하는 우리를 보고 좀 쉬라고 하셨다. 그래서 다른 친구들이 밀어주게 되었는데 이상하게도 다른 친구들과 웃고 떠드는 민지를 보며 왠지 모르는 질투심을 느꼈다.
생각해 보니 친해지고 싶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 때는 친해지고 싶어 하는 내 마음 자체를 인정하지 못했다. “장애인인데다가 저렇게 퉁명스러운데 왜 친해져야 돼?” 그렇게 부정했었다. 며칠 후 담임선생님께서 은밀하게 부르셨다. 민지에게 3가지 칭찬을 하고, 실천이 완성되면 언제든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라고 하셨다. 하지만 절대 외모나 옷차림, 물건이 아니고 잘하는 것, 그날따라 좋아 보이는 점을 칭찬해 주라고 하셨다. 아무리 칭찬할 것을 찾아보려했지만 잘 보이지 않아 1가지 밖에 못하였다. 다음날 칭찬을 못했다는 마음에 여러 가지 말을 건네 보았다. 낯을 가리는 성격 탓에 친근감 있게 달라붙어 이야기 하지는 못했지만 내 방식대로 말을 건넸다.
지나가면서 옷 샀냐고 물어도 보았고, 공부중이냐고 괜히 찔러보기도 하고 나도 너처럼 열심히 해야겠다는 둥 고심 끝에 몇 마디 던졌던 게 아직도 기억이 난다. 말을 건넬 때 마다 민지는 어색하게 얼버무리고 넘겼다. 그런 내 모습을 보셨는지 선생님은 식사 시간마다 민지 이야기를 나에게 많이 꺼내셨다. 또래에 비해 예민하고 눈치가 있던 나는 선생님이 내가 민지와 친해졌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선생님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과 새로운 경험을 해보고 싶은 마음, 그리고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수련회를 가게 되었다. 그런데 야외활동에서 민지가 훌라후프를 통과해야하는 상황이 있었다. 누가 봐도 불가능해 보였기에 우리는 민지에게 쉬고 있으라고 하고 활동을 진행하였다. 그 때 아무도 모르게 우리를 멀리서 지켜보시던 선생님께서 오셔서 민지에게 왜 쉬고 있냐고 하였다. 민지는 이런 활동이기에 자신이 할 수 없어 쉬고 있었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선생님은 “왜 박민지가 빠져. 충분히 할 수 있어. 민지 일어나고 같이 참여해.” 이 말을 들은 우리는 민지가 휠체어를 타는데 어떻게 전신을 훌라후프에 통과 하냐고 물었다. 선생님은 그 말을 듣고 민지가 보조기를 차면 충분히 할 수 있다고 하셨다. 민지를 보내고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잘해야 돼. 그래야 다른 반 애들이 무시 안 해. 잘해줘. 박민지도 할 수 있어. 가서 같이해.” 라고. 그 말을 듣고 우리는 스피드가 우선이었던 그 게임에서 비록 졌지만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우리를 이렇게 바른 시선으로, 옳은 아이들로 고쳐주신 선생님께 정말 감사드린다. 세상에는 많은 장애인들이 있다. 그들은 우리가 장애인이라고 손가락질 하지 않아도 내면의 상처가 깊다. 장애우가 타고 다니는 휠체어의 손잡이는 장애우가 잡으라고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잡아서 밀어주어야 한다. 시작이 반이라고 한다. 한번 먼저 다가가면 그 다음은 나머지 반만큼만 더 노력하면 내가 바뀔 것이고 내가 바뀌면 내 주위가, 주위가 바뀌면 사회가 바뀔 것이다. 내 작은 말 한마디, 작은 노력이 이 세상 모든 장애인들의 마음에 힘이 된다면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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