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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고난예고와 한 여인의 요구(1)
마 20:17-28
17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18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19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20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23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24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 20:17-28 / [수난에 대한 세번째 예고;막10:32-34,눅18:31-34]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열두 제자를 곁으로 불러 18) 예루살렘에서 자신에게 일어날 일을 말씀하셨다. `나는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19) 그들은 나를 로마 정부에 넘겨 주어 그들의 조롱을 받으며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20) [으뜸이 되고자 하거든 종이 되라;막10:35-45] 그때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아들들과 함께 예수께 와서 절을 하며 청을 드렸다. 21) `무엇을 원하느냐?' 예수께서 물으시자 그 부인이 대답하였다. `주님의 나라가 서거든 저의 이 두 아들을 하나는 주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주십시오' 22) 그러자 예수께서 그 부인에게 `네가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하는 말이냐?' 하고 말씀하신 뒤에 야고보와 요한을 향하여 다시 `너희는 내가 마시게 될 그 무서운 잔을 마실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대답하였다. `예, 저희는 마실 수 있습니다.' 23) 예수께서 그들에게 다시 말씀하셨다. `너희도 정녕 내 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편과 내 왼편 자리에 누가 앉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은 내 권한이 아니다. 그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내 아버지께서 미리 정해 놓으셨다' 24) 다른 열 제자들은 이 말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게 분개하였다. 25) 그리자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말씀하셨다. `이방인이 왕들은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백성을 내리누른다. 26) 그러나 너희들은 그렇게 하지 말라.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높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27) 만일 너희가 으뜸이 되기를 원하거든 반드시 종처럼 섬기는 사람이 되라. 28)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의 죄값을 치르기 위하여 목숨을 내주려고 온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대해 말씀하시는 세 번째 예고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17-19) 예수님은 예루살렘 가까이 오자 제자들을 따로 불러 인자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고 그다음에 이방인들에게 넘겨져서 조롱과 채찍질을 당하며 죽게 될 것을 미리 알리셨습니다. 여기서 숙고해 볼 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인 무리는 그 당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아니고 궁극적으로 세상의 모든 죄인, 즉 죄인인 나 자신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준 장본인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실 것입니다.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20-23) 그때,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와서 절을 하며 말합니다. “주님의 나라를 이루실 때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달라”는 요청입니다. 물론 그들이 아는 주님의 나라는 지상의 나라일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너희들이 그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너희들은 아직 모른다고 하십니다. 오히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묻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할 수 있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내 잔을 마시라” 합니다. 그 잔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좌우편 곧 최고로 높은 자리를 누구를 앉힌 것인가는 내 아버지의 주권이라 하셨습니다. 이후에 요한은 가장 오랫동안 복음을 전한 사람으로, 야고보는 제자들 중에 최초의 순교자로서 주님의 잔을 마셨습니다.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24-28) 그러잖아도 서로 자리다툼에 민감한 열두 제자들은 이 소식을 듣고 분노했습니다. 이들을 보신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방의 집권자들의 권력욕, 곧 이 세상의 가치관을 가졌다고 책망합니다. 그리고 교훈하시기를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합니다. 또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궁극적으로는 많은 사람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내 생명마저 주려고 왔노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처럼 가룟 유다를 제외한 제자들이 자신의 생명을 다해 복음의 종이 되어 섬겼습니다.
적용: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라는 말씀이 내면에 잘 흐릅니까? 불편하십니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무엇을 바라며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걸까요? 나의 욕심과 허영, 그리고 부귀영화가 아닌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바라보며 삶을 살고 있는지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잊는 순간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나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살려는 의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구원 계획과 하나님 나라의 선포 계획이 이 땅 모든 이들에게 들려지고 그 소망이 이루어지기까지 바른 신앙의 길 가게 하소서.
< 설 교 >
그러나 살리라
마 20:17-19 / 이수영목사
오늘 본문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이미 여러 차례 반복하신 말씀, 아주 분명하게는 세 번째로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번의 예고는 이전의 예고들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예고의 장소와 시점에서의 차이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분명히 예루살렘에서의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예고하신 때는 베드로가 그 유명한 신앙고백을 했을 때였고 그 장소는 빌립보 가이사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두번째로 분명히 예루살렘에서의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예고하신 것은 갈릴리에서였습니다(마17:22-23). 그런데 오늘 본문이 전하는 예고는 실제로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고 계실 때 하신 것입니다.
본문 17-18절을 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했습니다. 이제 그 동안의 예고가 눈앞의 현실로 다가왔으니 만큼 앞서 예고하실 때보다 긴장감이 더욱 넘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발견하는 예수님의 세 번째의 명백한 예고가 앞섰던 예고들과 다른 두 번째 차이점은 그가 당하실 고난들을 보다 상세히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그저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시고 제삼일에 살아나실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마16:21).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18-19절을 다시 봅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줄 것"이라 하신 말씀 가운데 "인자"란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가리키실 때 사용하신 독특한 호칭입니다. 자기 자신을 가리키시되 특별히 메시야로서의 사명완수와 연관시켜 사용하신 호칭입니다. 즉 본래 영광 중에 계시던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세상을 구원하시려 사람의 아들로 낮추어 오셨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마치신 후에는 다시 아버지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실 당신 자신을 가리키시는 이름이 "인자"였던 것입니다.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줄 것"이라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이방인"이란 로마인들, 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로마 총독 빌라도와 그의 명령을 집행한 로마군사들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의 공회는 예수님에게 사형을 선고할 수는 있었으나, 로마의 법은 그들에게 사형을 집행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요18:31에도 보면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의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전하는 복음서의 기록들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예고하신 그대로 실제로 이루어졌음을 우리에게 보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어떤 절차를 밟아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훤히 내다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본문 1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자신이 당하실 고난의 내용들을 여러 가지로 예고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 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눅18:32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조롱"을 조금 더 자세히 전합니다: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다"고 말씀하셨다고 전합니다. 채찍질은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형벌이었지만, 보통 십자가의 처형을 집행하는 과정의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채찍이 보통 채찍이 아닙니다. 여러갈래의 채찍 끝에는 작은 납덩어리들이 달려있어서 채찍을 치면 그 납덩어리들이 살에 박혔다가는 채찍을 잡아당기면 그 납덩어리들이 살점들을 뜯어내는 그런 채찍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는 대로 예수님께서 예고하신 조롱과 침뱉음과 채찍질 등 모든 고난은 그대로 다 예수님께서 당하셨음을 우리는 복음서의 증언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27:26-31을 봅니다: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그러나 우리가 무엇보다도 주목할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말씀하실 때마다 항상 다시 살아나실 것을 함께 언급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주님께서는 19절에서 보듯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셨습니다. 매 예고 때마다 끝에 덧붙이시기를 잊지 않으신 말씀 즉 "그러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는 말씀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의 궁극적 승리를 보장하신다는 그의 확신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그저 "제삼일에 살아나리라"로 번역되어있지만 보다 정확히 말하려면 "일으켜 세워지리라", "살려지리라" 같이 수동태로 옮겨져야 할 부분입니다. 즉 아버지 하나님께서 살리시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과 죽음 가운데 내던져지겠지만 그것은 내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돌보심 가운데 그의 궁극적 승리와 영광을 위해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의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제삼일에"라고 한 것은 3일 동안이란 말이 아닙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신 때를 "제구시"라고 일제히 전하고 있습니다. "제구시"란 오후 3시를 말합니다. 금요일 오후 3시에 돌아가시고 주일 새벽에 이미 다시 살아나셨으니 만 하루 반만에 다시 사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온전히 죽음 가운데 계셨던 날은 단 하루뿐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리는 지체없이 일어났음을 뜻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하나님의 뜻에 거슬려서 예수님을 죽음에로 몰아넣은 악의 세력과 그 불의의 승리는 결코 오래갈 수 없고 순식간에 허사로 돌아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이 사실들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당부하신 우리들 각자의 십자가에 대하여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특별히 두 가지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첫째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고난은 쉽게 치를 수 있는 추상적 고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주님을 따르고자 할 때에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고난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살점이 뜯기고 피투성이가 되게 하는 채찍질을 당하는 것과 같은 고통, 옷을 발가벗기우고 가시관이 머리에 씌워지며 갈대를 손에 들려지는 것과 같은 희롱, 침 뱉음을 당하고 머리를 얻어맞는 것과 같은 모욕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십자가 고난은 이런 외적인 고통만이 아닙니다. 내면의 고통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에는 수많은 무리들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행해질 축제와 거기서 누릴 기쁨을 향하여 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축제의 기쁨에 대한 기대에 젖어있을 때 홀로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준비해야 했던 예수님의 단독자의 외로움은 우리들의 십자가에도 따라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던 제자들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토록 거듭 고난과 죽음을 예고하신 직후에 있었던 사건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 바로 이어지는 20절 이하는 무엇을 기록하고 있습니까? 세베대의 아들들 즉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청탁을 했는가 하면, 나머지 열 제자는 그것을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마저도 당신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로지 지위와 영광에 대한 관심에만 사로잡혀 있음을 보셔야 했던 예수님의 절대고독은 또한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이기도 한 것입니다.
주님을 바르게 따르는 믿음은 이러한 모든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눈을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려야 합니다. 고난의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셨지만 "그러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신 대로 과연 부활하신 예수님과 그를 다시 살려 일으켜 세우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라, 그러나 살리라" 하신 주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살리라", 이 말씀은 모든 악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를 약속하는 것입니다. 모든 불의와 억압에 대한 의의 승리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모든 믿음의 고난 뒤에 반드시 따르는 영광스럽고 복된 삶을 확인시켜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살리라", 이 말씀 붙들고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메어주시는 십자가를 기쁨으로 메고 가는 우리들 되기를 바랍니다.
무엇을 원하느냐
마 20:17-23 / 조상호목사
전에 한 번 소개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요한 페터 헤벨이 쓴 <세 가지 소원>이란 동화가 있습니다. 젊은 부부가 별로 부족한 것 없이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러하듯이 그들에게도 지금보다 조금만 더 행복했으면 하는 아쉬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두 부부가 난로 가에 앉아 호두를 깨먹고 있는데, 한 요정이 찾아와서 ‘소원 세 가지를 말하면 내가 들어주마’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부부가 무슨 소원을 말해야 할지 망설이자, 요정은 ‘1주일의 시간을 줄 것이니 잘 생각해 보라‘고 말하더니 이내 사라졌습니다. 두 부부는 무슨 소원을 이야기해야 할 지 고민이 되어 다른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혹시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소원을 불쑥 이야기하게 될까봐 두렵기도 했습니다. 요정이 다녀간 이튿날 저녁이었습니다. 저녁식사로 먹을 감자가 냄비에서 익어가는 동안, 두 사람은 앞으로 누리게 될 행복을 생각하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잘 익은 감자를 꺼내 접시에 올려놓는 순간, 맛있는 냄새가 코끝을 찌르자 아내는 아무 생각 없이 무심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에다 방금 구운 소시지나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아내는 별다른 생각 없이 그렇게 말했던 것인데, 그 첫 번째 소원은 이루어지고 말았습니다. 방금 구운 소시지 하나가 굴뚝을 통해 접시로 떨어졌던 것입니다. 겨우 소시지 하나를 빌다니, 몹시 화가 난 나머지 남편은 불쑥 이렇게 말해 버렸습니다. “이 놈의 소시지 저 여자 코에나 가서 붙어라.” 그러자 두 번째 소원도 이루어졌습니다. 남편이 말한 대로 소시지는 아내의 코에 철썩 달라붙고 말았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두 부부는 크게 낙심이 되었습니다. 세 가지 소원 중 두 가지 소원을 썼는데도 그들에겐 은전 한 닢도 생기지 않고 아내의 코에 소시지만 하나 붙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는 수 없이 두 부부는 요정에게 부탁하여 아내의 코에 붙어 있는 소시지를 떼어달라고 간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코에 붙어 있던 소시지는 떨어져버렸지만, 결국은 세 가지 소원을 모두 써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아무 것도 얻은 것 없이 본래의 자신에게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질문하겠습니다. 만약 <세 가지 소원>이란 동화에서처럼, 소원을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면, 여러분들은 어떤 소원을 말하시겠습니까? 만약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느냐”라고 물으신다면, 여러분들은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입을 열어 말하지는 말고, 한 번 속으로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중심으로 <무엇을 원하느냐>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눌까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직전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이유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수제자인 베드로조차 스승이신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가셨을 때, ‘예루살렘에 올라가 서기관과 장로들에게 고난을 당하여 죽은 다음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절대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가, 주님으로부터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16:23)라는 심한 책망까지 받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유월절이 다가오자, 3년간의 공생애를 마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이유를 다시 한 번 말씀하셨습니다. 다같이 18절과 19절을 보겠습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예수님은 당신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이유를 다시 한 번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아직도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본문과 같은 내용이 누가복음 18장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누가복음 18장 32절과 34절을 보면 제자들의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을 것이나 그는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제자들은 3년 동안이나 따라다니며 훈련을 받았으면서도, 주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이유를 아직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가신다고 말씀하는데도,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면 로마제국을 무찌르고 이스라엘의 임금에 오르게 될 것이고, 제자들인 자기들이 나라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갑자기 한 여인이 두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그 여인은 세베대의 아내이자, 예수님의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였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자매였기 때문에, 족보로 따지면 예수님은 살로메의 조카가 됩니다. 살로메는 친척관계를 이용하여 주님께 찾아왔습니다. 다같이 본문 20절을 보겠습니다.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여기 ‘그 때’란 본문 바로 앞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후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을 때를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살로메는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캔사스 출신의 한 목사가 뉴잉글랜드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차역에서 한 성도를 만났습니다. “고향에는 별일 없습니까?” “토네이도가 불어 저의 집이 조금 무너졌습니다.” 목사는 눈살을 찌푸리며, “전혀 놀랄 일이 아니군요. 그러게 제가 전부터 똑바로 살라고 경고하지 않았습니까? 당연한 벌을 받는 것입니다”라고 충고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도는 “그런데 목사님, 목사님의 집은 다 무너졌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목사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면서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아, 역시 하나님의 뜻은 인간이 헤아릴 수 없군요”.
살로메는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가신다는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주님께서 곧 벌어질 십자가의 사건을 말씀하고 있는데, 야고보와 요한 두 아들을 데리고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분인 것을 압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만족시켜 주십시오.” 한마디로 말하면 살로메는 지금 치맛바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원래 ‘치맛바람’을 국어사전에서는 ‘치맛자락이 야단스럽게 움직인다’고 되어 있지만, 요즘에는 ‘여자의 극성스러운 활동’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치맛바람이라는 말은 투기바람, 애정바람, 등과 함께 요즘 많이 사용되는 말 중의 하나입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대치동 엄마, 강남 아줌마, 헬리콥터 엄마들을 치맛바람을 일으키는 대표적인 엄마들로 손꼽고 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이 살로메는 치맛바람을 일으키며 극성을 부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살로메의 행동이 이해가 되십니까? 지금 주님께서는 고통스런 수난과 죽음을 말씀하시는데도, 두 아들을 위해 청탁을 하고 있는 살로메의 행동이 이해가 되십니까?
제가 결혼하기 전에는 그녀의 행동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니 이해는커녕 몰상식한 여자라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 기르다 보니 그녀의 행동이 조금은 이해가 됩니다. 아마 이미 결혼해서 자식을 키우는 부모들, 특별히 엄마들은 살로메의 행동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될 것입니다. 이 자리에 세익스피어의 명언 가운데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실제로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몬드대학교 신경과학과 그레이그 킨슬리 교수팀이 '엄마가 된다는 것이 여성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쥐 실험을 통해 연구한 결과, 아기를 출산해서 엄마가 되는 순간부터 여성은 아기를 잘 키울 수 있도록 그에 맞게 두뇌의 힘이 강화된다는 연구결과를 얻었다고 합니다. 어미가 되기 전후 쥐의 뇌를 촬영해 분석한 결과, 뇌의 많은 부분에서 모양과 크기에 변화가 생긴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또한 움직임을 관찰했더니 새끼를 출산한 어미 쥐는 전보다 더 용감해지고, 먹이를 찾기 위해 5배나 더 빨리 움직이며, 공간 지각력도 더 향상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면, 많은 변화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지난주 목요일 저녁 청년개인양육반 마지막 시간으로 교회에 모였을 때 분명하게 확인했습니다. 어느 집사님 가정에서 제공해주신 탕수육과 짜장면을 청년들과 함께 먹었는데, 그 때의 모습과 2주 전에 알파 해피하우스 시간에 여자 집사님들과 자녀를 키우는 엄마들이 짜장면을 먹던 모습이 전혀 달랐습니다. 2주 전 해피하우스에서 여자 집사님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소리를 내면서 맛있게 짜장면을 먹었던 것 같은데, 지난주 목요일 저녁 청년 자매들은 달랐습니다. 청년자매들이 짜장면을 먹을 때는 왼손으로 긴머리를 귀 뒤로 올리고 조심스럽게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영어로 Big different였습니다. 이처럼 미혼 아가씨와 자녀를 키우는 엄마는 분명히 다릅니다. 아가씨 때는 지하철 안에서 음료수 하나 마음대로 마시지 못하지만, 엄마는 간난 아기가 배고프다고 보채면 지하철 안에서도 아기에게 젖을 물립니다. 아가씨 때는 배가 고파도 귀찮아서 굶지만, 엄마가 되면 자기는 먹지 않아도 자녀에게는 식사를 준비해줍니다. 아가씨 때는 엄마들이 치맛바람 일으킨다고 욕을 하지만, 엄마가 되면 자식을 위해 아무 거리낌도 없이 치맛바람을 일으킵니다.
지금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도 자식을 위해 치맛바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고통스런 수난과 죽음을 말씀하시는데도 두 아들을 출세시키기 위해 “저는 당신이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분인 것을 압니다. 우리의 원하는 것을 들어주십시오.”라고 청탁을 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원하느냐” “살로메야,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니?“ 그 때 살로메가 무엇을 부탁한 줄 아십니까? 다같이 21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여기에서 ‘주의 나라’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녀가 말하는 나라는 성경적 의미가 아닌, 세속적인 성격의 단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임금이 되신다면, 자기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주님의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주님 다음가는 높은 자리에 앉게 해달라는 뜻입니다. 살로메는 두 아들을 출세시키기 위해 주님께 청탁을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과 같은 내용이 마가복음 10장 35절 이하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거기에 보면, 여고보와 요한 두 사람의 행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막10:35,37) 어머니 살로메만 ‘높은 자리에 앉게 해달라’고 주님께 청탁을 한 것이 아니라,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도 주님께 청탁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어머니에 그 아들입니다. 아들들도 어머니처럼 권력에 대한, 출세에 대한 욕심이 많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욕심은 비단 살로메와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24절에서 “열 제자가 듣고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나머지 10명의 제자들도 야고보와 요한 두 사람 못지않게 출세에 대한 욕심이 많았습니다. 살로메와 두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인척관계를 이용하여 선수를 쳐서 주님께 높은 자리를 달라고 청탁을 하는 것을 보고 분노했습니다. 그들이 무슨 특별한 잘못을 저질러서 분노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을 먼저 했기 때문입니다. 10명의 제자들도 야고보와 요한과 살로메처럼, 높은 자리에 대한 욕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높아지는 것보다 이 땅에서 높아지는 것을 원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고 말았습니다. 다같이 22절과 23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주님은 높은 자리에 욕심을 내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마시려고 하는 고난의 잔을 마실 수 있느냐, 즉 십자가의 고통에 동참할 수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따르고자 하는 제자는 고난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에 재직할 때,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고향이 평안북도 평산군 능내면인데, 어느 날 고향에서 한 청년이 대통령이 기거하는 경무대에 와서 비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대통령의 고향 친구 아들입니다. 능내동에서 아무개 왔다고 하면 만나주실 것입니다.” 비서로부터 전해들은 이대통령은 그 청년을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이 사람아, 자네 부친은 잘 계신가?” “저의 부친께서는 수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 우리 선산은 어떤가? 우리 조상들의 무덤이 있는 선산은 어떤가?” “예, 저의 부친께서 돌보시다가 돌아가신 다음에는 제가 각하 조상의 무덤을 돌보다가 내려왔습니다.” “고맙네. 자네 혼자 살려면 힘들겠군. 내게 뭐 부탁할 것이 없는가? 자네 소원이 뭔가? 나에게 말하게.” 청년은 너무 기뻐서 말했습니다. “각하, 있습니다.” 소원이 있다는 말을 들은 이승만 대통령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게 뭔가?” “예, 저는 순경이 되고 싶습니다.” “어렵지 않네.” 그리고는 비서실장을 불러서 “비설실장, 자네가 이 청년에게 순경 자리 하나 마련해주게”라고 말하며 청년의 청을 들어주었습니다. 그 청년은 자신이 순경이 되었다고 좋아하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때 대통령이 기가 막힌 표정으로 비서실장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불쌍한 녀석, 겨우 구하는 것이 순경 자리인가? 조금 더 큰 것을 구해도 내가 얼마든지 줄 수 있는데, 겨우 순경 자리 하나 구하다니!” 그 청년은 대통령이 자기 아버지의 둘도 없는 친구이고, 또 자기가 대통령 조상의 무덤을 돌보아 준 사람인데, 겨우 순경 자리 하나 달라고 요청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를 자세히 보면, 이승만대통령에게 ‘순경 자리 하나 달라‘고 요청했던 그 청년과 매우 비슷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치 주님으로부터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라는 책망을 받은 살로메와 제자들처럼, 주위에 보면 겨우 눈앞에 있는 조그마한 문제에만 매달려 있는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무엇을 먼저 구해야 하고 무엇을 나중에 구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차원에서 본다면 솔로몬은 우리에게 기도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3장 4절과 5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제단에 일천번제를 드렸더니 기브온에서 밤에 야훼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주님께서 살로메에게 “무엇을 원하느냐”라고 물으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솔로몬은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언뜻 보면 지혜를 구한 솔로몬의 기도가 왜 특별한지 왜 그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기도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이 무엇 때문에 지혜를 구했는지를 알게 되면, 그의 기도가 왜 그렇게 탁월한 기도로 손꼽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솔로몬이 지혜를 달라고 기도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솔로몬이 지혜를 달라고 했을까요? 그는 왕이었습니다만, 아직은 그의 왕권이 안정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 다윗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지만, 그의 왕권은 불안했습니다. 다윗 왕에 비해 솔로몬은 상대적으로 강력하지 못했습니다. 또 쿠데타를 일으킨 적이 있는 압살롬과 아도니야를 따르던 사람들이 아직도 솔로몬의 주위에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얼마든지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모든 시간과 노력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나라를 잘 다스려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용감한 병사나 강력한 무기나 충성스러운 부하들을 구한 것이 아니라, 지혜를 구했던 것입니다. 그의 이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그래서 과거나 현재나 미래에 전무후무한 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구하지 아니한 부와 명예와 강력한 왕권도 같이 주셔서 이스라엘을 잘 다스릴 수 있게 되었고, 역사에 길이 남는 위대한 왕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기도는 은혜와 복을 가져오는 통로가 됩니다. 영국의 소설가 C.S. 루이스(Clive Staples Lewis ; 1898~1963)는 “하늘의 것을 목적하라. 땅의 축복은 저절로 따라온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옛말에도 ‘소부유근 대부유천(小富由勤 大富由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작은 부자는 근면이 만들지만, 큰 부자는 하늘이 만든다’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작은 것을 성취할 수는 있지만, 큰 것은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경제학의 대부인 아담 스미스(Adam Smith ; 1723~1790)는 “경제를 배후에서 조종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손, 곧 하나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책임져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솔로몬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혜와 복을 받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6절에서 ‘헛된 영광을 구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헛된 영광’이란 자신만을 위한 영광입니다. 결국 자신의 이익과 정욕을 위하여 구하는 것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나의 이익과 정욕을 위한 헛된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인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끝으로 실제로 있었던 한 실화를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어느 노처녀가 중매로 한 남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외모나 성격이 마음에 썩 들지도 않아서 계속적으로 만날 것인가에 대한 확신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남자를 만났던 근처 병원에 일이 있어 갔다가, 저 멀리에서 하얀 가운을 입고 지나가는, 그 남자를 보았습니다. 순간 ‘노처녀 인생에도 볕들 날이 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고, 너무나 기뻤습니다. 중매 때 만나고 더 이상 만나지 않으려고 했지만,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주말에 그 남자와 데이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커피숍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데, 그 남자가 핸드폰으로 전화를 받더니 갑작스런 수술이 생겼다고 가보아야겠다는 것입니다. ‘괜찮으니까 빨리 가보라’고 밝은 미소를 하면서 보내 주었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 그 남자가 프로포즈를 하자 노처녀는 기쁘게 OK하고, 쇠뿔도 단김에 하라고 얼마 있지 않아 결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남편은 외과 의사가 아니라, 수술실에서 수술할 때마다 털들을 깨끗하게 밀어주는 면도사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너무 실망이 되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노처녀가 면도사를 의사로 착각하고 덜컥 결혼을 한 것입니다. 줄을 잘못 잡은 것입니다. 주위에 보면, 실세가 아닌 것을 붙잡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겉으로 화려하게 보이는 것을 붙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부자를, 또 어떤 사람은 OO 직업을 가진 사람을, 또 어떤 사람은 지식인, 정치가를 붙잡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줄을 잘 잡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실세 중의 실세가 되시는 하나님을 붙잡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2주 전에도 소개한 적이 있는데, 최근 현대사에서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 ; 1839~1937)만한 부자는 없습니다. 록펠러에게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당신은 어떻게 하여 그 엄청난 재물을 모을 수 있었습니까?” 하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어머니로부터 기도하는 법을 배워, 가장 부자이신 하나님을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상의 시시한 것을 붙잡은 것이 아니라, 축복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붙잡았습니다. 여러분, 명예와 재물과 건강을 붙잡기보다, 명예와 재물과 건강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주변사람을 의지했다가 실망하거나 권력을 의지했다가 허탈해하지 말고, 실세 중의 실세가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복된 인생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최고의 인물이 되자
마 20:20-28 / 김상복목사
사람은 누구에게나 최고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어느 분야든 최고는 단 한 명입니다. “커서 무엇이 될래?” 물으면 많은 아이들이 “대통령!”이라고 대답하는데, 그들은 머지않아 실망할 것입니다. 대통령은 한 명 밖에 없으니까요.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도 12명의 후보가 뛰었지만 한 명만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이명박 당선자는 첫 소감으로 ‘섬기는 대통령’이 되겠고 했는데, 예수 믿는 사람들은 바로 알아들었지요. 다른 자리에서 그는 “예수님이 최고의 리더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섬기는 대통령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명박 당선자는 현대건설 회장일 때 교회의 집사로 섬겼습니다. 예배위원을 하겠다고 하니 처음 온 사람은 차량위원을 하라 해서 새벽에 나와 늦게까지 차량안내를 하였습니다. 세상에서는 회장이었지만 교회에서는 세상의 지위를 내려놓은 차량안내 집사였습니다. 그분이 ‘섬기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을 때는 예수님을 염두에 두었던 것입니다.
세상에서 최고가 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고등학교를 같이 졸업한 100명이 60세가 되었을 때 그 중 3~5% 만이 성공한 부류에 속한다고 합니다.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세상에서는 대답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모두가 100% 최고의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모두 최고의 인물이 되기를 원하셨고, 그래서 그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세상의 최고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최고의 권력을 가져야 합니다. 본문에도 보면 최고를 추구하는 세배대의 가족이 나옵니다. 세베대는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와 요한의 아버지로, 갈릴리 북쪽 가버나움에서 어업을 했는데, 베드로 같은 어부가 아니라 어업회사 사장이었습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많은 고용인이 있었다고 합니다. 돈을 많이 벌어 세상적으로 최고의 인물이었던 것이지요. 집도 갈릴리 가버나움과 예루살렘에 두 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락방이 있는 2층집이었는데 당시에는 부자만 다락방을 가질 수 있었어요.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도, 부활하실 때도 제자들이 그 집에 모여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에 갔다가 시체가 없어진 것을 보고 뛰어간 곳이 바로 그 집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집안에는 제사장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명망 있는 집안이지요. 그들은 예수님도 잘 섬겼습니다. 세베대의 아내는 리더십이 있어서 헤롯왕의 재무장관 부인을 포함한 부유한 부인들을 모아 팀을 만들어 섬겼습니다.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에게 필요한 것, 제자들의 먹을 것을 공급하며 끝까지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예수님이 가야바의 궁전에서 재판받을 때 제자들도 모두 그곳에 갔습니다. 입구에 보초들이 서 있는데 요한은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하고는 그냥 들어갔습니다. 베드로도 그렇게 인사만 하면 되는 줄 알고 “안녕하세요?”하고 들어가려니까 보초가 “당신 누구요?”하며 막았습니다. 요한이 한참 가다가 인기척이 없어서 돌아보니 베드로가 입구에 잡혀 있어요. 요한이 가서 “이 사람은 내 친구요!”라고 말하고 같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요한의 집안은 세상에서 성공한 집안이었습니다.
이들은 세상에서 최고의 인물이 되려는 야심도 대단했습니다. 어느 날 그 어머니가 아들 둘을 데리고 예수님께 와서 엎드려 절을 합니다. 전과 다른 태도를 보고 예수님께서 물었습니다. “뭘 원하느냐?” 여자가 대답합니다. “예수님, 그동안 제가 예수님께 얼마나 투자했는지 잘 아시지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실 때 오른쪽에는 내 큰 아들을, 왼쪽에는 작은 아들을 앉혀주세요. 이스라엘에서 우리와 같은 가문이 없도록 우리를 최고의 인물로 만들어 주세요. 제가 3년 동안 공연히 그렇게 투자한 줄 아십니까?”
최고의 인물, 유명한 사람이 되는 것은 모든 사람의 소원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본문 24절을 보십시오.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요한 어머니의 말을 들은 나머지 열 제자들의 반응이 어땠습니까? 기뻐했나요? 천만에! 분이 났습니다. 자기들도 그것만 바라보고 지금까지 예수님을 따라다녔는데 젊은 것들이 선수를 치다니요! 계산해 보니까 당시 요한은 16~17세, 형 야고보는 19~20세 정도였어요. 다른 제자들은 그들보다 나이가 많았고, 베드로는 아마 50세 쯤 되었을 거예요. 최고의 인물이 되길 원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마음입니다.
요한 어머니의 요청을 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22절). 두 젊은이는 “주여! 마실 수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잔은 사실 고통의 잔, 십자가의 잔, 죽음의 잔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모르고, 그저 자신의 야망을 채우기 위해, 최고의 인물이 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참 대단한 형제요, 대단한 집안입니다. 대단한 부와 가문을 가진 이들이 이제 최고의 권력과 명예마저 원합니다.
세상에는 이런 식으로 자기의 유익, 세력, 명예, 돈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하겠다는 부류가 있습니다. 지난 대통령 선거 때도 보지 않았습니까? 전과 똑같이, 변명할 시간도 갖지 못하게 선거 사흘 전에 마구 터뜨렸습니다. 권력을 얻기 위해서는 못할 짓이 없습니다. 세계와 우리나라의 역사가 그런 모습을 많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최고의 자리는 결국 하나님께서 정하십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예요. 내가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걸 알면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승진을 위해 노력합니다. 강사에서 조교수가, 조교수에서 부교수가, 부교수에서 전임교수가 되길 원합니다. 노력하고 기대했는데도 안 될 때는 실망이 크지요. 내가 과장이 되길 원했는데 다른 친구가 되면 얼마나 속상합니까! 다 때려치우고 사표 던지고 나오고 싶어요. 그런데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섭리를 따라 결정하십니다. 절대 주권자 하나님을 바라보시면 여러분이 이 땅에서도 비교적 평화롭게 살 수 있습니다.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21절). 인간적으로도 아니고, 온 가족을 동원하는 것도 아니고, 논의나 투표로도 아니고, 요한의 어머니는 그저 예수님께서 “내 오른쪽에 앉아라. 왼쪽에 앉아라!" 하며 두 아들 모두를 앉혀달라고 합니다. 대단한 여자입니다. 이런 것을 치맛바람이라고 하지요. 그것을 바라고 지난 3년간 투자를 많이 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른쪽에 앉거나, 왼쪽에 앉거나 하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의 섭리에 따라 하는 것이다. 너무 거기에 연연하지 말라. 자꾸 연연하면 사람이 치사해진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직분이나 자리에 너무 연연하지 마십시오.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세상적인 것입니다. 자리나 명예 같은 것으로 자신의 가치를 결정하려 하거나 그것에 연연하면 참 힘듭니다. 그런 것들은 하나님께 맡기고 정말 위대한 사람들이 되길 원합니다.
모든 사람이 최고가 되길 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25절). 최고가 되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적, 이기적 생각입니다. 그 자리의 권력으로 뽐내며 멋대로 살아보고 싶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맞출 필요 없이 다른 사람들을 내 마음에 맞추게 하고 싶은 것이지요. 권력과 돈과 명예를 쥐고 다른 사람들을 전부 자기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들고 싶은 겁니다. 또한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라고 했습니다. 이런 것이 생기면 뻐기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주무르며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과거 우리나라 정치도 그렇지 않았습니까? 이런 것이 인간세계 최고 인물들의 모습이요 우리가 어디서나 늘 보는 것입니다. 때로는 교회에서도 이런 모습을 볼 때가 있습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다릅니다. 하나님께 최고 인물의 기준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100%, 여러분 전부 최고의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최고의 인물이 되는 것을 가르치시고 그 방법을, 하나님의 가치를 보여주셨습니다. 26절에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라고 아주 점잖게 번역을 했지만, 신약성경 헬라어 원문을 보면 부정어가 두 개나 들어있습니다. 부정어가 하나만 있어도 강한 표현인데 두 개나 들어있어요. 어떤 영어 성경은 이 구절을 "No! Not so among you!(아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다!)"로 아주 잘 번역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표현을 최대로 하신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과 하나님의 기준은 완전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종류가 다르고, 그가 베푼 친절이 다르고, 그의 행동과 태도가 다르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방법으로는 1%, 3%, 5%만 최고의 인물이 되지만 하나님의 방법으로는 모두가 최고의 인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즉 위대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을 말씀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께 있어서 최고의 인물은 자리도 권력도 돈도 인기도 아닌, 섬기는 자라는 것입니다. 섬김(service)이란 무슨 뜻입니까? 사전적인 뜻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전력을 다하여 봉사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뜻은 손님의 주문을 받는 것입니다. 식당에 손님이 들어왔는데 종업원이 “설렁탕 드세요”하지 않고 “무얼 드시겠습니까?”라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손님이 무엇을 먹고 싶어 하는지 알아보고 그것을 정확히 파악해서 해드리는 것이 섬김입니다. 최고의 음식을 차려서 손님이 만족스럽게 먹고 즐거워하며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지요.
‘섬긴다’는 단어는 교회에서 많이 사용하는 ‘집사(디아코너스)’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집사가 무엇입니까? 지금까지는 내가 섬김을 받았지만 이제 하나님과 교회와 사람들을 섬기며 살겠다고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현대 건설의 회장이 하나님의 교회에 와서는 차량 안내자가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필요한 것은 현대건설의 회장이 아니라 차량 안내자입니다. 그것을 알고 찬바람을 맞으며 호각을 불어가면서 차량 안내를 합니다. 이것이 섬김입니다.
왜 섬깁니까? 내가 섬기는 그 사람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지요. 왜 남편이 아내를 섬기며, 왜 아내가 남편을 섬깁니까? 왜 부모가 자식을 섬깁니까?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소중하게 대하는 겁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의 작품이요, 예수님이 친히 피흘려 구원하신 사람이요, 천하보다 귀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람을 소중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인간관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칭찬하고 욕을 하지 않는 것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사람,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에게 어떻게 욕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래서 섬기는 것입니다. 이명박 당선자는 앞으로 5년 동안 섬기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함께 기도해서 정말 국민을 섬기는 대통령, 국민을 섬기는 정부가 되기를 원합니다.
캐나다에는 'Service Canada'라는 정부조직이 있습니다. 국민이 뭔가 필요하여 이곳에 연락하면 ‘One-stop service’로 어떤 문제든지 전력을 다해서 도와줍니다. 우리는 서류 하나 떼려고 동사무소에 가면 “구청에 가세요”, 구청에 가면 “시로 가세요”, “서류 하나 더 준비해오세요” 하며 뱅글뱅글 돌립니다. 요즘은 많이 좋아졌지만 전에는 참 고생스러웠습니다. 이것은 섬김이 아니라 지배지요. 'Service Canada'는 아주 포괄적인 서비스입니다. 교육, 훈련, 직장, 의료, 주택, 이민, 재정, 법적 지원, 개인서류 만들기, 저축계획, 특별행사, 창업지원, 여행정보까지 국민이 도움을 필요로 하면 정부가 나서서 도와주는 겁니다. 국민의 어려움을 국가가 해결해주어 국민들이 편안히 잘 살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 주셔서 우리 정부도 이처럼 섬기는 정부가 되길 원합니다. 국민이 무엇이든 하고 싶은 의욕이 생기도록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지금은 뭘 하고 싶어도 도장을 18개 받아오라 합니다. 16개 받고 너무 지친 나머지 아파 누워서 나머지 2개는 못 받고 끝나고 말아요. 이건 아닙니다! 앞으로 나라의 모든 서비스가 'One-stop service'가 되어 국민이 참 편안하게 일할 수 있게 하는 정부가 되기를 원합니다.
어느 마을에 눈이 많이 왔습니다. 아버지가 집 앞의 눈을 깨끗이 치우고 들어오니 17살짜리 아들이 소파에 누워 TV를 보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밖에 눈이 많이 왔구나. 네가 지금 20분만 투자를 하면 앞으로 20년 동안 보람 있고 기쁜 일이 있는데 너 그거 한 번 해볼래?” “아빠! 그게 뭐예요?” “너 옆집 아주머니 혼자 사는 거 알지? 그 아주머니 집 앞에 눈이 잔뜩 쌓여있는데 아주머니 몰래 치우고 와. 그러면 네가 20년 동안 참 기쁠 거야.” 그 아들은 나가서 몰래 재빨리 눈을 치우고 들어왔습니다. 15분밖에 안 걸렸어요. 잠시 후 아주머니가 나와 보니 자기 집 앞의 눈이 다 치워졌어요. 깜짝 놀라며 기뻐했지요. 20년 후에 그 아들이 글을 썼습니다. “아버지께서 20분으로 20년이 기쁠 거라고 하셨는데 나는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하면 참 기쁘다. 내게 그렇게 하신 아버지께 정말 감사한다.” 대가 없이 선을 행한 섬김의 결과입니다.
섬김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There's joy in serving Jesus"(예수님을 섬김에는 기쁨이 있다)"라는 영어찬송도 있습니다.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예수님처럼 진심으로 섬기는 사람들 삶에는 기쁨과 만족이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섬기는 최고의 인물들이 되길 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27절)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최고입니까? 다른 사람을 이용해서 최고가 되려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최고로 만들어주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으로 인해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의 분위기가 좋아진다면 여러분이 최고의 인물, 위대한 인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기는 사람을 최고의 인물이라고 하셨습니다. 지위, 명예, 학위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섬김에는 격이 없습니다. 누구나 섬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에서 최고의 인물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내 목숨을 바쳐 많은 사람들이 유익하도록 대속물로 주기 위함이다.” 섬김은 주는 것이요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본을 받아, 받는 자가 아니라 주는 자, 최고의 인물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사람, 이 사람이 최고입니다. 나라, 교회, 가정에서 누구든 섬기는 사람이 최고가 되는 것입니다. 1%, 3%가 아니라 여러분이 예수님처럼 섬겨서 100% 전부가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하고 축복이 되는 인생을 사시기를 원합니다.
내가 마셔야 할 잔
마 20:20-28 / 노경모 목사
삼페인이라고 하면 뚜껑이 펑 튀어 나가면서 하얀 거품이 쏟아져 나오는 술이지요. 프랑스 샴파뉴 지방에서 만들어지는 천연 발포성 포도주인데 샴페인은 상류사회를 상징하고 서양에서는 벼락부자라는 뜻으로 사용되지만 약혼 결혼 세례 기념일등 축하하는 행사에는 없어서는 안될 기쁨과 행복의 술이라고 합니다.
일이 잘되었을 때, 성공하거나 승리했을 때, 이 샴페인을 터뜨립니다. 그 샴페인을 잔에 담아 '브라보'하고 건배를 합니다. 얼마나 기분 좋고 멋지겠습니까? 사람들마다 샴페인을 터뜨리고 삼페인의 잔을 들기를 바랍니다. 즉 성공하고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샴페인 잔과도 같은 성공의 잔을 들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예수님의 제자들의 어머니를 들 수가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자녀들이 잘 되기를 바라고 자녀들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마음은 동일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세베대의 아들인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찾아 갔습니다. 왜 예수님을 찾아 갔겠습니까? 아들의 출세를 부탁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고 정치적인 메시야 왕국을 세울 때, 자기 아들들을 예수님의 최 측근으로 발탁해 달라는 것입니다. 옛날로 말하면, 영의정, 좌의정이고 지금으로 말하면, 국무총리, 비서실장 정도가 되겠지요. 자기 아들들이 성공의 잔을 마시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 때 주님은 의미심장한 질문을 하십니다. 22절을 보면,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겠느냐?'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잘 되기를 바랍니다. 내 자녀들이 잘 되고, 내 가정이 잘 되고, 사업이 잘 되고, 모든 삶의 영역이잘 되기를 바랍니다. 형통하기를 바랍니다. 성공하기를 바랍니다. 건강하기를 바랍니다. 물론 잘 되어야 하지요. 그리고 당연한 우리의 소망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성공의 잔, 형통의 잔, 승리의 잔을 마시도록 기도하고 소원하기 전 주님이 말씀하시는 잔을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잔은 무엇을의미할까요
첫째, 섬김의 잔입니다.
주님의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낮아지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나신 것은 인간이 구더기가 되는 것보다도 더 큰 낮아지심입니다. 왜 이렇게 낮아 지셨습니까? 바로 우리들을 섬기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권력자와 같이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음을 제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28절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그러므로 너희들도 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종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출세하기를 원하는 제자들에게 다른 사람을 섬기라고 하시고, 종이 되라고 하시는 말씀은 아주 도전적이고 충격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주님처럼 섬기는 자가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섬김의 잔을 마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른 사람이 나를 섬겨 주기만을 바라고, 나는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에 무관심하고 귀찮아 한다든지 하면 아직 우리는 주님이 원하시는 성숙한 신앙의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섬김의 잔을 마셔야만 우리는 주님과 함께 영광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공하고 싶습니까? 잘 되고 싶습니까? 존경을 받고 싶습니까? 종이 되십시오. 섬기십시오. 이것이 정답이요 비결입니다. 본문 26, 27절이 바로 이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둘째, 고난의 잔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시는 순간에도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육신의 몸을 입고 태어나시는 것도 그렇지만 마땅히 태어나실 장소가 없어서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얼마나 힘드셨겠습니까? 우리 주님은 공생애 기간 3년은 고난의 연속이셨습니다. 공중의 새들도 머리 둘 곳이 있는 데 나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신 주님을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삶이 얼마나 고난의 연속이었는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서 53:3에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여기서 간고는 가난하고 고생스러움을 말하고, 질고는 병고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멸시, 천대, 가난, 슬픔, 병으로 인한 고통 등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어려움과 고통을 다 당하셨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제사장들, 종교지도자들로부터 엄청난 정신적인, 육체적인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서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은 갖은 고난을 다 당하시다가 드디어 십자가에 못박혀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고난과 고통의 절정이지요.
이 고난의 잔을 너희들이 받을 수가 있느냐 하는 물음입니다. 우리는 이 주님의 물음 앞에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고난의 잔을 마시겠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러한 놀라운 은혜를 주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우리로 하여금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믿고 구원얻고 영생을 누리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너무나 감사하지요.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만 알고 있다면 절반 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나머지 절반의 정답이 무엇인지 아세요.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빌립보서 1:29에 명확하게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의 잔을 마셔야 합니다. 내 일 때문에, 내 문제 때문에 고난 받을 수도 있지요.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위해서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고난을 요리 저리 피해서는 안됩니다. 감사함으로 그 고난에 동참해야 합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로마서 8:17의 말씀이지요.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기업을 받는 상속자라면, 이러한 영광을 받을 자라면 당연히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바울도 골로새서 교인들에게 이렇게 기쁨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1:24에,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우리도 주님을 위해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고난을 받읍시다. 주님을 위해서 받는 고난을 기쁘게 여깁시다. 마태복음 5:11-12을 현대어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제자라는 이유로 모욕당하고 박해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비난받을 때 너희는 행복하다. 그럴 때 행복해하고 즐거워하라. 너희가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 옛 예언자들도 이같이 박해를 받았다는 것을 생각하라.
셋째, 죽음의 잔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셨습니다. 육체만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영혼까지 버리심을 당해야만 하셨습니다. 자존심도, 인격도 핍박자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가 침뱉음을 받으셔야 했고, 주먹으로 구타를 당하셨습니다.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이렇게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이 다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과 함께 이 모든 것이 죽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살아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욕심이 살아있고, 우리의 이기심이 살아있고, 우리의 야망이 살아있고, 우리의 자존심이 살아있고, 우리의 고집이 살아있고, 우리의 옛 습관과 성격이 살아있지 않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이 죽음의 잔을 받을 받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내가 죽어야만 내 안에 주님께서 사실 수가 있습니다. 내가 죽어야만 내 속에 계신 성령님께서 일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날마도 죽노라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우리가 죽었음을 깨달읍시다. 죽었음을 확인합시다. 내가 죽었음을 선포합시다. 그리고 그렇게 삽시다.
기독교는 역설적인 종교입니다. 성경은 역설적인 교훈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잘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역설적이라는 말을 아시지요? 어떤 주장이나 이론이 겉보기에는 모순되는 것 같으나 그 속에 중요한 진리가 함축되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섬겨라 그러면 큰 자가 된다. 종이 되라 그러면 으뜸이 될 것이다. 주라 그리하면 넘치게 되리라. 버려라 그러면 찾게 될 것이다. 죽어야 살리라.
오늘 우리는 이제 이기적인, 내 중심적인, 이해타산적인 신앙의 자세를 다 내려넣고, 이제 주님의 주시는 잔을 받읍시다. 주님의 섬김의 잔, 고난의 잔, 죽음의 잔을 내가 받겠습니다. 이렇게 고백하고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섬김이 축복입니다!
마 20:20-28 / 崔仁根 牧師
1. 왜 섬겨야 하나요?
(1) 으뜸이 되어야 하니까...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詩人)인, 바이런(Lord Byron)은 그리스도인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바이런은 어떻게 친구를 섬겨야 하는지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한 힘센 선배가 자기 친구를 괴롭히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바이런은 어떻게 해서든지 친구를 돕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바이런은 태어날 때부터 한 쪽 다리가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힘으로는 친구를 곤경에서 도울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이런은 자기 친구를 때리고 있는 힘센 선배 앞에 용감하게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곤 {자기 친구를 몇 대나 때릴 생각이냐}고 물었습니다. 선배는 성난 목소리로 "네가 무슨 상관이냐"고 되물었습니다.
그러자 바이런은 선배를 바라보면서, {나머지 절반은 내가 대신 맞으면 안 되겠느냐}고 나직히 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바이런은 친구의 아픔을 함께 나누어지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친구를 도우려는 마음은 있어도, 그를 도울 수 있는 능력이 부족했던 바이런과는 달리, 우리 주님은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기에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태도는 바이런이 보인 겸손한 태도와 동일하십니다.
마태복음 20:27-28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종}이라 부르지 않고 {친구}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그분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으뜸이 되기 위해 남을 누르고 일어서는 것이 아니라, 죽기까지 섬기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방법입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친구를 섬기기 위해, 우리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쩌면 친구를 위해 우리의 시간을 내어 주어야 할 때가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때로는 친구를 위해 우리의 노력과 재물을 주어야 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친구를 돕되, 기쁜 마음으로 하십시오. 겸손한 마음으로 하십시오. 가슴에 오만함을 가득 담고 내미는 도움의 손길은, 얼음처럼 차가울 뿐입니다. 거기에는 상대를 향한 따스함이 없습니다.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시고,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주신 주님을 묵상하십시오. 그리고 오늘, 우리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묵상하는 사람은 결코 오만할 수 없습니다. 오늘도 그리스도 안에서, 겸손히 섬기는 자의 삶을 사는 하루가 되시길 소망합니다.
(2) 섬길 수 있는 자만이 다스릴 수 있으니까...
미국의 찰스 콜슨(Charles Colson)은 예수님을 알기 전 닉슨 대통령의 보좌관으로 있다가 거듭난 후 교도소 전도자로 다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쓴 책에 미국 의회 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순간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순간은 인도 캘커타의 고인이 되신 테레사 수녀가 미국 국회를 방문하여 연설했던 때라고 합니다. 미국 사람들은 대부분 연설 때 연설자에게 박수를 아끼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상하게도 테레사 수녀가 연설을 마치자 그 누구도 박수를 치지 않더랍니다. 오히려 침묵만이 감돌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숨 막히는 감동과 전율이 그들의 가슴과 목을 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박수를 칠 여유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마지막 테레사 수녀가 던진 한마디의 말 때문이었습니다.
“섬길 줄 아는 사람만이 다스릴 자격이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빌립보서 2:3-4 /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하라.”
(3) 섬김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길이니까...
(마20:28)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사람을 받은 자만이 줄 수 있습니다
사랑은 받은 이 만이 줄 수 있습니다. 섬김은 사랑의 빚을 갚는 것입니다. 필리핀의 부유한 사업가의 아들이 마닐라의 성서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그는 기숙사의 욕실과 화장실이 불결하다고 학장에게 불평했습니다. 그러자 학장은 미소를 지으며 “내가 조치해주지” 라고 말하고는 곧장 기쁨이 가득한 얼굴로 화장실을 깨끗이 청소한 뒤 자애롭게 말했습니다. “자, 이만하면 마음에 드나? 우리 학교는 청소부를 고용할 형편이 안돼서 모두 자원하는 심정으로 자기 일을 한다네. 사랑의 빚진 자가 되게 함이 우리 학교의 교육목표일세.”
이 사건은 그가 졸업 후 목사가 되어 미국 시카고 자유교회에서 가난하고 소외받는 외국학생들에게 사랑의 빚을 갚는 일에 일생을 바칠 수 있는 교훈이 되었습니다. 그는 어려울 때마다 자기 손바닥에 십자가를 그으면서 주님에게 진 사랑의 빚을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생각하면 교만한 마음을 품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섬김에는 축복이 따릅니다
(1) 섬김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시100:2)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지어다
(시126:5-6)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 오리로다
(마28:8)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할쌔
테레사 수녀가 미국을 여행하는 중에 어느 한 자매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자매는 자살하고 싶은 괴로운 심정을 테레사 수녀에게 고백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 지 묻는 그 자매에게 이렇게 제안했습니다.
“자살하기 전에 내 부탁을 하나 들어주세요. 딱 한 달만 내가 일하고 있는 인도의 캘커타에 와서 나의 일을 좀 도와주신다면 그 다음에 당신이 어떻게 해야 될지 말씀해 드리죠.”
그 자매는 테레사 수녀의 말대로 캘커타 슬럼가에 가서 가난하고 병들어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돕고 섬겼습니다. 그들을 위해 몸 바쳐 일하다 보니까 그녀의 마음에 삶에 대한 의욕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그 자매는 그들을 돕고 섬기는 데서 순수한 환희를 느꼈고 한 달 후에는 테레사의 다른 조언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그 자매는 그 곳에 머물러 일하면서 테레사의 좋은 조력자가 되었습니다.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사도행전 20:35
(2) 섬김에는 칭찬이 있습니다
(마8:5-10)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와하나이다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3) 섬김에는 축복이 따릅니다
(룻4:13-17) 이에 보아스가 룻을 취하여 아내를 삼고 그와 동침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그로 잉태케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자부가 낳은 자로다 나오미가 아기를 취하여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그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주되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 하여 그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비인 이새의 아비였더라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마 20:20-28 / 송기성목사(정동제일교회)
오늘은 종교개혁 502주년 기념주일입니다. 종교개혁은 종교 자체의 개혁이라기보다 종교인의 개혁이라고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개혁의 대상은 종교인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기독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에게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잘 변합니다. 좋은 뜻에서 변하기도 하지만 좋지 않은 면으로 변하곤 합니다. 그런 변화는 변질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 원인은 다양합니다. 무지와 욕망, 교만과 불신 등으로 인해 우리들도 변질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면 그것이 더욱 실감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를 때에 저마다 바라고 원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누가 먼저 나서서 노골적으로 말씀을 드리지 못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발을 벗고 나섰습니다. 그들의 어머니도 아들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예수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고자 했습니다. 그녀는 성모 마리아의 동생 살로메였습니다. 따라서 그녀는 예수님의 이모였으며,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이종 사촌 동생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What do you want?)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이 원하는 바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예수님이 그들에게 원하시는 것과 전혀 달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출세지향적인 욕망을 내려놓고 천국지향적인 소명을 품어야 합니다.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12제자들 중에 가장 사랑하시는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에게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고 물으셨을 때 그들은 서슴지 않고 그들이 원하는 것은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또 하나는 주의 왼편에 앉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막10:37) 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당연히 그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전혀 뜻밖에도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 라며 그들의 영적인 무지를 지적하시고, 그들의 출세지향적인 욕망을 거절하셨습니다. 그리고 천국지향적인 소명을 품게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지난 3년 동안 제자들에게 천국의 본질과 특성에 관하여 여러 가지 비유를 통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주의 나라 곧 메시야 왕국의 본질에 대한 오해를 떨쳐버리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들이 기대했던 주의 나라는 주께서 로마의 지배와 압박으로부터 그들을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해방시켜 다윗 왕 시절과 같이 강력한 국가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세 번씩이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할 것을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주의 나라 또는 주의 영광을 세상적인 나라와 영광으로 집착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출세에 대한 욕망을 품었을 뿐 그들이 진정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그들은 그들이 정작 구해야 할 것은 출세지향적인 높은 자리가 아니라 천국지향적인 소명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전재중 변호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서울대학교 법대에 다닐 때에 하나님밖에 몰랐습니다. 기독교단체 IVF에서 말씀으로 단단히 훈련을 받으며 버스에서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목사가 어울린다는 말을 자주 듣기도 했습니다. 법무관을 거쳐 1989년부터 로펌에서 변호사로 일하게 된 그는 윤리적으로 기독교와 상치되는 일들을 겪으면서 하나님께 소명을 받지 않고 자의적으로 선택한 길이었다는 것에 자책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다가 일본에서 유학 중에 소명을 발견한 그는 1999년 법조계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만들어나갈 것인지를 몇몇 법률가들과 고민하면서 ‘크리스천 변호사 펠로우십’ (Christian Lawyers Fellowship)을 창립했습니다. 그리고 이 기독법률가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법무법인 ‘소명’을 세웠습니다. 그는 자신을 포함해서 상당수의 법조인이 소명을 발견하고 이 길을 왔다기 보다, 그냥 공부를 잘해서 온 것이며, 자신의 우수함을 증명할 신화를 만들기 위해서 온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게 된다는 자성과 함께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주께서 이 땅에서 저희를 섬기셨듯이, 이제 저희도 이 법률직에서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어려운 이웃을 섬기게 해달라고 기도하지요. 자기 신화를 만들려는 유혹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눈앞의 이익이나 승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가 세워지기를 간구합니다.” 아멘!
예수님께서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하시자 베드로는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실 때에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며, 또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영생을 상속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마19:28-29).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운 까닭은 천국지향적으로 살지 않고 출세와 성공에 집착하며 세상지향적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천국지향적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은 출세 지향적인 삶을 내려놓아야 하는데 그것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원하는 것은 출세와 성공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마16:24) 천국지향적인 삶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출세지향적인 욕망을 내려놓고 천국지향적인 소명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의 천국을 (롬14:17) 맞이하며 영생을 상속하시기를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을 내려놓고 주님중심적인 이타심을 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요한에게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마가복음에는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막10:38) 고까지 물으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잔’과 ‘세례’는 예수님이 직접 당하게 되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눅12:50)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막14:36) 하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고난의 잔을 마시셨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라고 하신 주님의 물음에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할 수 있나이다” (We can)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자신있게 대답한 것은 예수님이 마시는 잔에 대하여 오해를 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들이 기대했던 주의 나라와 주의 영광은 전혀 고난과 상관없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기대했던 주의 잔은 기쁨과 영광의 잔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를 아직도 잘 몰랐던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이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예수님께 청탁하는 말을 듣고 두 형제에게 분히 여겼습니다. 이는 그들도 출세지향적인 야욕을 품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방인의 집권자들은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권세를 부리지만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마20:26-28)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을 떨쳐버리지 못하였기에 자리다툼을 하고 분개하며 분노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그들은 그들이 정작 품어야 할 것은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이 아니라 주님중심적인 이타심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학생 복음운동의 조상으로 유명한 찰스 토마스 스터드 (Charles Thomas Studd, 1862-1931) 선교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 시절 공부에서도 수석을 달리는 학생일 뿐 아니라 아주 탁월한 크리켓 선수였습니다. 1882년 대학 3학년 때 그는 ‘영국의 가장 위대한 크리켓 선수’ 라는 격찬을 받을 정도로 경이적인 기록을 세우며 10대의 우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는 형의 모습을 보면서 인생의 무상함을 생각하게 되었고, 무디 부흥사의 설교를 들으면서 그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기로 결단하여 1885년 2월 중국 선교사의 길로 나섰습니다. 그는 유산으로 받은 수십억의 재산을 무디신학교와 조지 뮬러의 고아원과 구세군 사업에 기부하였습니다. 재물과 명예, 출세와 성공 등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선교의 길로 나서자 사람들은 그의 재능이 아깝다고 했습니다. 누군가가 그에게 “여보게, 이것은 자네에게 지나친 희생이 아닌가?” 하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며 나를 위해 죽으셨다면, 그 분을 위한 나의 어떤 희생도 결코 크다고 할 수 없습니다.” (If Jesus Christ is God and died for me, then no sacrifice can be too great for me to make for Him.) 46년 동안 중국과 인도 선교를 하고 중앙 아프리카 선교를 개척한 그를 사람들은 “브와나 무쿠바” 곧 “위대한 하얀 추장” 이라고 부르며 존경하였습니다. 그의 비전과 헌신으로 시작된 WEC(World Evangelization for Christ) 선교회는 50개국에서 모인 2000여 명의 선교사가 80여 개의 나라에서 사역하고 있습니다. 1931년 7월, 70세로 소천한 찰스 토마스 선교사, 그는 “인생은 한번뿐이고 그것은 곧 지나가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해 한 일은 영원할 것이다.” 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재물이 많은 한 부자 청년 관원이 예수님께 와서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고 여쭈었습니다. 그는 계명을 다 알고 어려서부터 지킨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그에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그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그에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갔습니다 (막10:17-23).
어려서부터 계명을 다 잘 지킨 사람은 사실 보기 드문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을 사랑하시고 제자로 삼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에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 때문에 근심하고 예수님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주님중심적인 이타심입니다. 한 가지 부족한 것 때문에 예수님을 등진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을 내려놓고 주님중심적인 이타심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한번 뿐인 인생, 그것도 곧 지나가버릴 인생을 그리스도를 위한 일에 헌신하시기를 하나님 아버지의 원대로 십자가를 지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1546년 2월 18일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63세의 나이로 자신이 태어난 아이슬레벤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임종하기 전에 뜻밖의 고백을 했습니다. “우리들은 거지입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Wir sind Bettler, das ist wahr! We are beggars, this is true!)
사람들은 거지를 무시합니다. 동냥을 주기는커녕 거지의 쪽박을 깨뜨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지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리고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은 거지나 거지같은 사람에게 한 것이 곧 주님께 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거지에게는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분히 세상적이고 이기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더 귀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천국의 영생과 당신 자신과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출세지향적인 욕망을 내려놓고 천국지향적인 소명을 품기를 원하시며,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을 내려놓고 주님중심적인 이타심을 품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대로 자기개혁을 통해서 주님의 소명을 따라 천국의 소망을 품고 살아가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무엇을 원하느냐?
마태복음 20:20~28 / 이성우 목사
제가 존경하고 따르는 한 선배 목사님이 쓴 글에서 본 내용입니다. “언젠가 한 장로님께 ‘요즘 기독교인들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기는커녕 오히려 십자가를 타고 다니려고 한다.’는 걱정 섞인 말씀을 들었습니다. 성도들을 참 신앙으로 이끌어야 하는 목사로서, 정말 가슴을 저릿하게 찌르는 비수처럼 느껴졌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주님을 따르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알려주는 말씀으로서 깊은 공감을 주는 말씀으로 마음 깊숙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따로 시간을 내서 종교의식을 행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마디로 말해서 그 예수님을 따라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고 따라야 할 예수님은 마태복음 7장 13절~14절 말씀에서 주님을 따르는 자세에 대해 아주 단호하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이 말씀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는 주님의 또 다른 말씀을 떠오르게 합니다. 이처럼 주님을 따르는 길은 쉽고 평안한 길이 아니라 좁고 험난한 길, 자신을 죽이며 나아가야 하는 길임을 주님은 아주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따라서 그 길을 따르려면 인생 전체를 거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위에서 소개한 말씀에 나오는 ‘협착하다.’는 말은 ‘좁다’, ‘욱여 싸이다(고후4:8).’ 또는 ‘환난을 당하다(고후7:5)’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따르는 길은 신약성경의 복음서가 예수님께서 가신 3년 동안의 공생애를 증거 해 주고 있듯이 고난을 각오하지 않으면 함께할 수 없는 길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순교를 각오하며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 당시에는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자체가 이미 순교를 각오하는 결단이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주님의 이름 때문에 박해를 받거나 순교할 일은 없지만, 지금도 순교자의 정신을 갖지 않고는 주님을 온전히 따를 수 없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희생을 감수하며, 손해를 보더라도 헌신하는 신앙의 자세를 가져야 주님을 온전히 따를 수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위에서 소개한 말씀에 나오는 ‘들어가다.’라는 말은 ‘공유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 즉 주님의 길을 따르려면 주님과 뜻을 공유해야 합니다. 주님과 같은 생각을 하며 따라야 합니다. 자신의 생각을 앞세우거나 고집하면 주님을 온전히 따를 수 없습니다. 성도들에게는 ‘주님 차장되시니 차표 필요 없어요.’라는 믿음도 중요하지만, 그와 동시에 ‘주님과 같은 배를 타고 가는 사람으로서 주님의 뜻과 생각을 공유하고 따른다.’라는 믿음도 필요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과 영생으로 인도하는 길이 되시는 분입니다. 그 진리의 길이 아무리 좁고 험해도 주님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방향을 향해서 그 주님을 믿고 따라가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결국 우리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 인생의 주인을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 의지하고 따랐던 주인을 버리고 예수님을 우리 인생의 참된 주인으로 새롭게 모셔 들이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과거의 삶에서 떠나는 청산이 필요하며, 이제부터는 오직 새로운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며 따르는 삶이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필요를 구할 뿐 주님을 온전히 따르지 않는 현실 속에서 분명한 깨달음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로 표현이 가능하지만 한 마디로 말해서 ‘도상의 존재’ 곧 ‘길을 걸어가고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가는 길이 어떤 길인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한번 밖에 주어지지 않는 기회이기 때문이며, 각각의 인생길은 그 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잘못된 길로 가게 되면 심각한 문제를 만들어 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제 각기 자신의 인생길을 걸어가기 위해서 순간순간 접하게 되는 정보들을 분석하고 취사선택해서 각각의 길을 책임적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문제는 잘못된 정보를 듣고 잘못된 분석과 판단을 하게 되면 그 결과는 엄청난 결과를 만들어 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생길을 바르게 걸어가기 위해서는 바른 가르침을 통해서 바른 정보를 습득하고 바르게 배우며 바르게 길을 가는 바른 실천이 대단히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최근에 벌어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를 접하면서 다시 한 번 바른 정보의 중요성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무수히 쏟아져 나오는 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무엇이 바른 정보인지를 판단하고 파악된 바른 정보를 가지고 바르게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 결국은 삶의 질과 관련이 있고 생명과도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영원한 삶과도 관련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단사상과 사이비 신앙을 전하는 사람들의 문제만 봐도 그렇습니다.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을 구렁텅이로 이끌어 가는 사람들의 무책임한 실상은 잘못된 신앙을 가르치는 이단종파의 지도자들뿐만이 아니라 정치 지도자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 감염 병 사태와 관련해서 중국 정치 지도자들이 보여준 행태는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자신들의 권력욕심 때문에 사람들의 생명을 아주 가볍게 여기는 심각한 양상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바른 정보를 차단하고 정보를 조작하여 발표하며 잘못된 대처로 무수히 많은 생명들을 희생시키고 있습니다.
이제 곧 4월 15일이면 총선을 앞두고 있는데, 바른 정치 지도자를 선택하여 일을 맡기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 일을 위하여 우리는 바른 판단과 바른 선택을 해야 합니다. 최근 우리 사회는 심각한 가치 혼란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 말을 바꾸고 판단의 기준을 바꾸는 정치인들의 모습뿐만이 아니라 법적인 판단의 기준도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어서 우리 사회가 아주 많이 위험한 상황입니다. 최근의 뉴스 가운데 소위 사법농단 사태와 관련해서 ‘사법 농단 사태가 위헌적이고도 불법적인 재판 개입 사실은 모두 인정되지만, 무죄’라고 선고한 1심 재판부의 판결 결과를 접하면서 우리 사회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인 마태복음 20장 20절~28절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우리들 또한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의 시간적인 배경과 공간적인 배경은 예수님께서 이제까지의 공생애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셨던 갈릴리를 떠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어간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행적들과 말씀들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본문 말씀을 이해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한 주간의 시간을 남겨둔 상태에서 하신 말씀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제까지 예수님은 두 번에 걸쳐서 예루살렘에 올라가게 되면 당하게 될 십자가 수난을 제자들에게 예고하셨는데, 십자가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이제 그 길을 가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스스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자신이 온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로서의 사명이 주어져 있음을 분명하게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 사명을 완수하시기 위해서 지금 그 길을 가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길이 결국은 많은 사람들에게 천국과 영생을 선물하기 위한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가 천국을 은혜로 누리게 하신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이 세상살이 가운데 지고 있는 가장 무거운 짐인 죄의 짐을 벗겨 주셨습니다. 이러한 은혜를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기 위해서 성자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우리를 위한 대속 제물로 내어주시는 값비싼 희생을 치르셨습니다.
이렇게 은혜로 주어진 구원의 은혜, 천국을 누리게 된 삶이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그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그 은혜에 대해서 반응하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깨우쳐 주시기 위해서 주님은 오늘의 본문 말씀 앞부분에서 먼저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며, 세 번째 수난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20장 1절~16절까지의 포도원 품꾼의 비유는 우리가 죄의 짐을 벗고서 천국과 영생을 선물로 받아 누리게 된 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자신의 포도원에 품꾼으로 써 주는 것을 결정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주인의 몫입니다. 그런 점에서 아침 일찍부터 정상적인 시간에 포도원에 품꾼으로 일을 하게 되었던지, 아니면 한 시간을 남겨둔 시간에 포도원에 품꾼으로 일을 하게 되었던지 간에 그 자체가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그런데 일을 마치고 나서 하루 품삯을 계산하는 과정에서 뜻밖의 반응이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첫 시간부터 온 사람들은 주인이 약속한 대로 주는 대가에 대해서 불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함으로 받아 누리기보다는 불평과 불만을 드러냄으로 잘못된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어진 오늘의 본문 말씀은 주님께로부터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잘못된 따름을 보이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제자들은 하나같이 세상적인 욕심을 구하면서 예수님을 따랐던 사실을 성경을 통해서, 특별히 오늘의 본문 말씀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인 살로메라고 하는 여인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고 계신 예수님 앞에 나와서 청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어머니의 행동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에서 분히 여기는 반응을 보이고 있는 다른 제자들 역시 얼마나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고 얼마나 영적으로 무지한 상태에서 잘못된 욕심을 가지고 있는지를 깨우쳐 주고 계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직전에 세 번째 수난을 예고하셨는데, 그 주님을 따른다고 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가장 먼저 제자들을 부르셨고 그들과 3년 동안의 공생애 기간 동안 동고동락하면서 천국을 가르쳐 오셨는데, 어머니까지 나서서 자기 자식들을 위해서 엉뚱한 것을 구하는 모습을 보시면서,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며 시기하고 질투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시면서 주님은 얼마나 답답해하시고 안타까워 하셨을까요? 그래서 예수님은 본문 21절 말씀에서 동상이몽, 곧 같은 방향으로 길을 가면서도 다른 생각과 다른 목표와 다른 욕심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고 있는 이 어머니와 제자들을 향해서 이렇게 묻고 계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무엇을 원하느냐?”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에게 주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지를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말씀하시면서 본을 보여주시고 계신 주님의 모습을 본문 말씀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런 제자들에게 다시 한 번 천국을 누리며 살아가야 할 천국시민의 합당한 삶의 자세를 말씀하시기 위해서 이방인의 집권자들과 천국시민의 삶의 자세를 비교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천국시민의 합당한 삶의 자세에 대해서 친히 본을 보여주시면서 본문 2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니라.”
본문 말씀에 이어지는 두 소경 치유 이적에 대한 말씀은 영적으로 어리석고 욕심스러움에 사로잡혀서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았으면서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가장 가까이에서 말씀을 들었으면서도 바르게 깨닫지 못했던 제자들의 모습과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 이야기를 통해서 이들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마음을 아주 분명하게 드러내고 계신 것입니다. 이들 두 소경은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 곧 메시아로 오신 분이심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길을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향해서 간절하게 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그 주님을 통해서 눈을 뜨게 되었고 그 주님을 따르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정상인의 비정상적인 따름과 비정상인의 정상적인 따름이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바른 믿음은 주님을 온전히 따르는 따름이 동반되는 믿음으로 나타나야 함을 깨우쳐 주고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목숨까지도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으로 주어진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가지고 매 순간마다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거룩한 삶을 통해서 지금 천국을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으며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생에 대한 분명한 소망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믿음, 어떤 생각, 어떤 자세로 무엇을 구하며 주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참된 그리스도인은 오직 주님의 말씀과 삶을 통해서 베풀어 주신 가르침을 본받아 그 주님께 순종하고 그 주님을 진정으로 따라가는 것임을 믿으시고 주님의 가르침에 전적으로 순종하기 위해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구하며 살아가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성도의 제일 사명
마 20:20=28 / 이한규 목사
< 성도의 제일 사명 >
어느 날, 한 여성이 담임목사에게 찾아가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게는 말 못할 은밀한 죄가 있어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너무 고민되어서 찾아왔어요. 저는 주일에 교회에 올 때마다 교인들을 죽 둘러보면서 제가 교인 중에 제일 예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어요. 그것이 죄인 줄 알아도 통제가 안 돼요. 이 죄를 어떻게 극복하나요?” 그때 목사님이 대답했습니다. “자매님! 너무 고민하지 마세요. 그것은 죄가 아니라 오해예요.”
살다 보면 그런 비슷한 오해들이 많습니다. 죄도 주의해야 하지만 오해도 주의해야 합니다. 특히 성도가 가장 주의해야 할 오해는 “위대함이 무엇이냐?”에 대한 오해입니다. 위대함은 자리나 위치나 소유나 외모에 있지 않고 ‘더 성숙해지고 더 섬겨주는 것’에 있습니다. 부자나 권력자는 VIP(very important person, 매우 중요한 사람)는 될 수 있어도 MIP(most important person, 가장 중요한 사람)는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MIP는 ‘섬겨주는 성숙한 사람’입니다.
왜 하나님이 성도들 구원하시고 사명을 주셨습니까? 사랑으로 섬기며 복음을 전파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섬기는 삶은 반드시 나누는 삶을 동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복음과 재능과 소유 등 자기 것을 최선을 다해 나누십시오. 돈을 벌 때도 나누려고 벌고 물건을 살 때도 나눈다는 심정으로 사십시오. 그런 나눔의 철학으로 살면 물건을 살 때 사치를 부리지 않을 것이고 반대로 적절한 가격을 지나치게 후려쳐 깎으려고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업과 나눔이 공존할 수 있을까요? 사업은 자선이 아니기에 이윤을 내야 하는데 종업원들의 월급을 더 주려고 하고, 복지혜택도 더 제공하고, 적절한 납품단가도 보장해주고, 사회에도 기여를 하는 등 나눔의 철학을 가지고 기업하면 사업에서 성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창조적인 아이디어와 지혜를 주시고 최상의 기회와 만남을 주시면 나눔의 철학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사업을 잘 할 수 있다고 믿고 그런 은혜와 축복을 구하십시오.
특히 영혼 구원을 위한 일에는 더욱 힘써 나누십시오. 가끔 교회 형편 이상으로 선교후원을 하면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필요는 언제 채우고 우리 비전은 어떻게 이루나?” 그러나 나눔이 최상의 비전인 줄 믿고 도와야 할 의무를 외면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설득하십시오. “그래! 하나님이 후원할 마음을 주신 것이 복이지. 그렇게 하나님의 심정을 따라 힘써 나누면 내게도 축복과 행복이 찾아올 거야.”
선교사님들의 어려운 기도제목을 듣고 그때 반응해서 돕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기도제목을 듣지 않아도 평소에 돕는 삶을 체질화하십시오. 정기적인 후원에 나서고, 예상외의 수입이 생기면 자발적으로 후원에 나서고, 좋은 일이 있거나 삶 자체가 감사해도 자발적으로 후원에 나서십시오. 선교사님들은 어려워도 대개 스스로 도와달라는 말을 잘 꺼내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선교사님들이 힘들다고 말하기 전에 기도 중에 어떤 감동이 생기면 스스로 알아서 돕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선교사님들과 교류하다 보면 어려운 사정을 많이 듣습니다. 지난주에도 자동차 고장 난 얘기, 냉장고 필요한 얘기, 자녀의 교육 문제, 건축비 문제 등등 여러 선교사님들의 필요를 들었습니다. 그런 기도제목들이 워낙 많아서 일일이 다 소개하지 못합니다. 특히 그런 얘기들 중에는 평신도에게는 직접 못하고 목회자인 제게만 할 수 있는 얘기들도 많습니다. 구차하게 들릴 수 있고 못난이처럼 사역을 잘 못하고 있는 것으로 들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사역이 전반적으로 어려워진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사역을 잘 못해서 의식주도 잘 해결하지 못한다고 너무 못났다고 하지 마십시오. 지금 목사님들 중에 택시와 트럭 운전하는 분들과 막노동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개척교회와 중형교회는 점차 죽어가고 이마트 같은 초대형교회만 커지니까 80%의 사역자들이 먹고사는 일조차 힘들어진 것입니다. 선교사의 경우도 초임 선교사님들은 대개 사역도 어렵지만 생활도 어렵습니다. 그런 사정들을 알아주고 전방에 있는 선교사님들을 위해 후방에서 최선을 다해 후원하려고 하십시오.
항상 나눔의 사명을 가지고 열심히 기도하고 일하고 사업하십시오. 하나님의 뜻은 자신이 받은 축복으로 힘든 사람들에게 살 길을 열어주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고 하나님의 거룩한 비전을 이루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음지의 뿌리 동역자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불쌍한 영혼을 구원하시고 살 길을 열어주시려는 거룩한 비전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힘든 영혼을 돕고 거룩한 비전의 보이지 않는 뿌리 역할을 하는 뿌리 동역자가 되는 것은 성도의 제일 사명이 되어야 합니다.
<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 >
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려고 예루살렘에 가는 길에 일어난 일입니다. 이 본문은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기뻐하시는지 잘 교훈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기뻐하실까요?
1. 순수하고 깨끗한 사람
본문 바로 앞부분인 17-19절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삼일 만에 살아나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아주 어두운 분위기입니다. 그 분위기에 역행해서 한 여인이 치맛바람을 일으켰습니다. 세배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절하면서 자기의 두 아들들을 주님 나라의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한 것입니다(20-21절).
그때 주님은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22절). 그들이 뭔가를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그런 약삭빠른 마음으로는 주님의 좌우편에 앉지 못하고 우직하게 충성하는 사람이 주님의 좌우편에 앉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약삭빠른 마음은 약삭빠른 도둑보다 더 안 좋은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큰 착각이 있습니다. 약삭빠른 생각을 하면서 “내가 참 영리하구나! 나는 잘 살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사기 치는 것입니다. 남에게 사기 치는 것보다 자신에게 사기 치는 것이 더 불행한 것입니다. 결국 ‘약삭빠른 것’은 ‘영리한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것’입니다. 약삭빠른 사람은 잘 살 것 같지만 더 못 삽니다. 반면에 순수하고 깨끗하게 살면 겉으로는 손해 보는 것 같지만 결국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2. 십자가를 지는 사람
본문 22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때 예수님의 마시려는 잔은 십자가였습니다. 결국 십자가를 기쁘게 질 때 주님의 좌우편에 앉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면류관도 없습니다.(No Cross, No Crown).
일전에 어떤 발 사진을 보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발이 못생겼는지 마치 희귀병 병자의 발 같았고 나무뿌리처럼 생겨 마치 엽기 사진 같았습니다. 그 발은 바로 세계적인 발레리나인 강수진 씨의 발이었습니다. 한 여류 시인은 그 발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녀의 성공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하루 19시간씩, 1년에 천여 켤레의 토슈즈가 닳아 떨어지고 멀쩡한 발이 괴물 발처럼 될 정도로 노력해서 얻은 성공입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영광도 없지만 영혼도 부패합니다. 그러므로 복만 받으려고 하지 말고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를 기쁘게 지려고 하십시오. 무엇이 십자가입니까? 남을 위해 희생하는 것도 십자가이고 말없이 음지에서 최상의 헌신을 하는 것도 십자가지만 시련과 고난 중에도 “하나님! 이 시련과 고난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는 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하며 진심으로 감사하는 것도 십자가입입니다. 그처럼 기쁘게 십자가를 질 때 주님의 좌우편에 앉게 되고 조만간 축복의 문도 활짝 열릴 것입니다.
3. 성령 충만한 사람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때문에 나머지 10제자가 두 제자에게 크게 분노했습니다(24절). 성령 받기 전의 제자의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사람의 본능은 늘 “누가 크냐?”고 다투게 합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면 남이 나보다 앞서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남이 큰 실수를 해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해합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하면 얼굴도 밝아지고 마음이 어린이처럼 되면서 미움과 상처와 한에 맺혀 살지 않게 됩니다.
어린이들은 매를 맞아도 다음날에는 환하게 웃고 놉니다. 자녀에게 매를 대면 부모는 마음이 아파지고 우울해지지만 정작 맞은 어린이들은 하루만 지나면 벌써 잊어버립니다. 또한 심하게 싸우면 어른들은 그 후유증이 오래 가지만 어린이들은 금방 잊고 다시 친해집니다. 그런 모습이 바로 성령 충만한 모습입니다. 아무리 타당한 이유가 있어도 한 맺힌 감정을 오래 품는 것은 성령 충만한 삶이 아닙니다.
신비하고 화려한 성령의 은사는 있는데 마음속에 한과 상처와 미움이 그대로 있다면 그것은 사실상 감정 충만이고 자랑 충만이고 무대의식 충만이지 성령 충만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싫고 밉고 섭섭한 마음이 들 때마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내게 주신 축복의 십자가다. 그 사람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었을 거야.” 그런 마음을 가지고 성령 충만한 삶을 살 때 하나님은 그를 누구보다도 기뻐하시고 축복하실 것입니다.
4. 종처럼 섬겨주는 사람
그때 제자들이 누가 크냐는 문제로 시기하고 분노하는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이 안타깝게 생각하시면서 본문 26-2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 앞에서 권세를 부리는 일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하는 일이다. 너희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 너희 중에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
신앙의 핵심목표는 나를 높이려는 것이 아니라 남을 섬기려는 것이고 축복 많이 받는 것이 아니라 축복 받고 그 축복을 남을 위해 쓰려는 것입니다. 복에 집착하면 영혼이 황폐해지고 축복도 저주로 변합니다. 또한 섬김만 받으려고 하면 관계가 깨지면서 자기도 손해를 보지만 섬겨주려고 하면 관계가 좋아지면서 자기도 유익을 얻습니다. 모든 인간관계가 다 그렇습니다. 받으려고 하면 결국은 손해 보지만 주려고 하면 더 많은 것을 얻습니다.
왜 섭섭함이 생길까요? 받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주려고 하면 섭섭함이 없고 더 주려고 하면 더 섭섭함이 없습니다. 결국 주려는 마음을 체질화시킬 때 진정한 행복이 있습니다. 누가 큰 사람입니까? 많은 종을 거느린 사람이 아닌 많이 종이 되어주는 사람입니다. 하늘로 올라가는 사닥다리는 올라가는 방향에 있지 않고 내려가는 방향에 있습니다.
사실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의 자리다툼은 그 전의 갈릴리에서도 있었습니다(막 9:30-37). 그때 제자들은 다투면서 저마다 타당한 논리를 내세웠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수제자임을 내세우고 요한은 자기가 제일 사랑 받는 제자임을 내세웠을 것입니다. 마태는 돈을 많이 버는 세관원의 자리를 포기한 사실을 내세웠고 안드레는 자신이 최초의 제자임을 내세웠고 가룟 유다는 자신이 제일 신뢰받는 재정담당자임을 내세웠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큰 인물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 잘못이거나 성공을 원하는 것이 나쁜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성공을 원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성공을 잘 활용하면 됩니다. 그래서 성공이 나쁘다는 질책 대신에 누가 큰 인물인지에 대한 정의를 내려주시며 큰 인물은 종처럼 남을 섬겨주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세상에서는 많은 사람을 거느릴 때 크다고 하지만 예수님은 많은 사람을 섬길 때 크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진리에 대한 실물교육을 위해 예수님은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 어린이는 힘도 없고 돈도 없어서 성공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고 요구만 많습니다. 자녀를 낳으면 그때부터 주는 삶이 시작됩니다. 만 18세가 넘어 성인이 되면 안 줘도 될 것 같은데 계속 줄 일이 생깁니다. 마침내 자녀가 결혼하면 안 줘도 되고 받을 날이 시작될 것 같지만 그때도 부모는 계속 주는 입장이 될 때가 많습니다.
그처럼 세상적인 시각으로는 귀찮고 전혀 성공에 도움이 안 되는 어린이와 같은 약한 존재를 잘 영접하는 것이 결국은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란 말씀입니다. 세상은 없는 사람들을 무시하지만 성도는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없는 사람을 무시하면 그만큼 축복이 깎이지만 없는 사람을 섬겨주면 그만큼 축복이 쌓입니다. 결국 없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주느냐에 따라 앞날의 축복과 행복과 보람이 현저히 좌우되고 천국의 상급도 현저히 좌우될 것입니다.
< 소외자의 친구가 되어주십시오 >
한 청년에게 중학교 때 진따란 별명을 가진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는 하는 짓도 진따고 생긴 것도 진따였습니다. 친구들이 “야! 내 숙제 좀 해!” 하면 “어. 알았어!” 했고, “야! 볼펜 예쁜데. 내가 가져도 되지!” 하면 “어. 그래.”라고 했습니다.
어느 날, 학교에 청소 일 하는 찐따 아버지가 찾아왔습니다. 다리를 절며 아들에게 다가가 큰 봉투를 건네주고 가자 아이들이 물었습니다. “야! 찐따. 거 뭐냐?” “음. 아빠가 너희 주라고 가져오셨어.” 봉투 안에는 빵이 있었는데 진따 아빠가 자기 아들이 왕따인 줄 알고 잘 봐달라고 사온 것이었습니다. 그때 친구들은 조롱했습니다. “야! 그 빵 청소하다 주워온 것 아냐!” 그러면서 아무도 먹지 않아서 그날 진따는 말없이 그 빵을 그냥 가져갔습니다.
다음 날, 진따가 학교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틀이 지나고, 삼일이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이 웃었습니다. “야! 진따가 땡땡이도 치네.” 다시 며칠 후 종례시간 때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얘들아! 진호가 많이 아프단다. 형편이 어려워 병원에 못 가서 병이 커졌단다. 선생님도 어제 가봤는데 많이 아픈 것 같다. 너희들도 한번 가봐라.”
그날 몇몇 친구들이 학교 끝나고 진따에게 갔습니다. 진따집을 찾아 달동네로 올라가는데 아직도 한참 더 올라가야 한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 다른 친구들이 말했습니다. “찐따 정말 슈퍼맨이었네. 어떻게 매일 이 길을 다녔어?” “진따 다리 봤잖아. 그래서 다리가 두꺼웠나봐.”
드디어 찐따 집을 찾았습니다. 빌라 후문에 있는 낡고 작은 단칸방 집이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면서 친구들이 소리 질렀습니다. “야! 진따! 아니, 이진호! 우리들이 왔다!” 그런데 방이 너무 적어 10명이 한꺼번에 다 들어갈 수 없어서 서너 명씩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처음 들어갔다 5분쯤 후에 나온 친구들이 눈이 퉁퉁 부어있었습니다. “야! 너 왜 그래? 울었냐?” “아냐! 그런데 이제 진호 어떡하냐?”
친구의 감춰진 눈물을 보고 무거운 마음으로 작은 방으로 들어가자 진호가 보였습니다. 머리가 퉁퉁 부어 ET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야! 진호야!” “어. 경수 왔구나!” “왜 이래?” “약 먹었으니까 곧 나을 거야.” “뭐! 약을 먹어! 머리가 이렇게 퉁퉁 부어 눈도 못 뜨면서 병원도 안 가!” “괜찮아!” 야윈 몸을 보니까 가슴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진따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저씨! 빨리 병원에 가셔야죠?”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그 동안 찐따에게 아무도 따뜻한 시선을 주지 않았지만 그날만은 달랐습니다. “야! 찐따. 꼭 나아야 된다! 너 안 나오면 내 숙제는 누가 해주냐?” 그날 저녁 진따 집에서 나오는데 아무도 말이 없었습니다. “야! 찐따 괜찮겠지?”하고 물어도 아무도 말이 없었습니다. 또 “야! 말 좀 해봐! 진따 괜찮겠지.”라도 해도 역시 아무도 말이 없었습니다.
그 후 진따는 계속 학교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방학이 되고 다시 개학해도 여전히 진따 자리는 비어 있었습니다. 개학 후 일주일쯤 지났을 때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얘들아! 진호 별명이 진따였니? 진호가 하늘나라 갔다. 가기 전에 너희들 얘기 많이 했다고 하더라.” 그 말을 듣고 너무 슬프고 너무 진따에게 미안해서 욕이 나왔습니다. “병신! 쪼다! 찐따 같은 자식. 그래, 우리 안보니까 좋겠다!”
그날, 반 전체가 조용했습니다. 흔한 지우개 던지기도 안 했고 자주 하던 말뚝 박기도 안 했습니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 엄청나게 울었습니다. 불쌍한 친구를 못살게 군 나쁜 친구였다는 생각에 울음을 참지 못했습니다.
그로부터 10여년 후, 그는 진따가 보고 싶어서 <진따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습니다. “찐따야! 나다. 기억 나냐? 우리 엊그제 동창회 했다. 네게 숙제시키던 명식이도 나왔고 네 뒤에 앉아 샤프로 콕콕 찌르던 정호도 나왔다. 명식이는 결혼했다. 딸도 있는데 지 에빌 닮아 시집은 다 간 것 같다. 정호는 PC방 사장됐다. 만나서 너 얘기 많이 했다. 너 혹시 하늘나라에서도 왕따 당하는 거 아니냐고 하면서 웃었다. 진따야! 너 춥니! 안 추워? 너 친구들이 많이 보고 싶어 한다. 진따야! 정말 미안하다. 너 다음에 우리 만나도 친구 해줄 거니? 응? 말 좀 해봐? 야! 찐따! 내 말 안 들리니? 진따야! 하늘나라에서 잘 있지? 보고 싶다. 진호야.”
하나님은 역자의 친구가 되어주고 돕는 삶을 무엇보다 기뻐하실 것입니다. 또한 사랑을 나눠주러 거친 전방으로 간 선교사님들을 돕는 손길도 다 기억해주실 것입니다. 요새 ‘사역의 필요’는 말해도 무능하게 보일까봐 ‘생활의 필요’는 말하지 못하고 깊은 고통에 신음하는 선교사님들이 많습니다. 그래도 선교사님의 구체적인 실명을 공개해 기도제목을 내놓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분들의 명예와 자부심을 지켜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들을 이해하고 선행적으로 나눔에 최선을 다해 나서고 또한 더 많이 나눌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사십시오.
살면서 ‘얻으려는 일’에만 관심을 두지 말고 ‘드리려는 일’에도 관심을 두십시오. 나눔에 관심을 기울이고 힘써 실천할 때 하나님은 그 영혼에 풍성한 행복감을 선사하실 것입니다. 이제 기도할 때마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제가 도울 사람이 없습니까? 제가 져야 할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이 시간에 제가 도와야 할 사람이 생각나게 하시고 실제로 손을 펴서 그를 돕고 섬기게 하소서!”
요새 입시철이 다가오면서 입시생 부모들이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이가 이번 시험을 잘 보게 하소서!” 반면에 이렇게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이가 많은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게 하소서!” 어떤 기도를 먹고 자란 자녀가 능력 있고 부요하고 복된 자녀가 될까요? 당연히 후자의 기도를 먹고 자란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전자의 기도를 하면서도 후자의 기도를 결코 놓치지 마십시오. 전자의 기도가 VIP(very important prayer, 매우 중요한 기도)라면 후자의 기도는 MIP(most important prayer, 가장 중요한 기도)입니다.
우리 교회는 지난 4년 간 “예수 믿고 인물이 되라!”는 비전을 가지고 계속 기도해왔습니다. 우리 당대와 후대 중에 인물이 한 사람만 나와도 몇 천 명, 몇 만 명 교회가 하는 일 이상을 할 수 있음을 깨닫고 그런 비전을 가진 것입니다. 그 기도대로 이뤄져 이제 조만간 우리 중에 인물 나는 역사가 나타날 줄 믿습니다. “인물이 되라!”는 말은 단순히 “성공한 큰 부자가 되라!”는 말이 아니라 “나눔의 거목이 되라!”는 말입니다. 그런 비전을 가지고 기도하고 준비하고 서로 격려하면서 창조성과 지혜를 발휘해 열심히 사십시오.
오늘 성찬식을 할 때 다시 한 번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기억하고 나눔과 섬김의 삶을 새롭게 다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기도할 때마다 ‘달라는 기도’도 하면서 동시에 ‘나누게 해달라는 기도’도 꼭 잊지 마십시오. 그런 나눔을 위한 기도가 바로 예수님의 기도였고 그런 나눔의 삶이 바로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그처럼 ‘나눔과 섬김의 사명’을 늘 기억하면서 내일의 보람과 행복과 축복을 예비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어느 날, 한 여성이 담임목사에게 찾아가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게는 말 못할 은밀한 죄가 있어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너무 고민되어서 찾아왔어요. 저는 주일에 교회에 올 때마다 교인들을 죽 둘러보면서 제가 교인 중에 제일 예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어요. 그것이 죄인 줄 알아도 통제가 안 돼요. 이 죄를 어떻게 극복하나요?” 그때 목사님이 대답했습니다. “자매님! 너무 고민하지 마세요. 그것은 죄가 아니라 오해예요.”
살다 보면 그런 비슷한 오해들이 많습니다. 죄도 주의해야 하지만 오해도 주의해야 합니다. 특히 성도가 가장 주의해야 할 오해는 “위대함이 무엇이냐?”에 대한 오해입니다. 위대함은 자리나 위치나 소유나 외모에 있지 않고 ‘더 성숙해지고 더 섬겨주는 것’에 있습니다. 부자나 권력자는 VIP(very important person, 매우 중요한 사람)는 될 수 있어도 MIP(most important person, 가장 중요한 사람)는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MIP는 ‘섬겨주는 성숙한 사람’입니다.
왜 하나님이 성도들 구원하시고 사명을 주셨습니까? 사랑으로 섬기며 복음을 전파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섬기는 삶은 반드시 나누는 삶을 동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복음과 재능과 소유 등 자기 것을 최선을 다해 나누십시오. 돈을 벌 때도 나누려고 벌고 물건을 살 때도 나눈다는 심정으로 사십시오. 그런 나눔의 철학으로 살면 물건을 살 때 사치를 부리지 않을 것이고 반대로 적절한 가격을 지나치게 후려쳐 깎으려고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업과 나눔이 공존할 수 있을까요? 사업은 자선이 아니기에 이윤을 내야 하는데 종업원들의 월급을 더 주려고 하고, 복지혜택도 더 제공하고, 적절한 납품단가도 보장해주고, 사회에도 기여를 하는 등 나눔의 철학을 가지고 기업하면 사업에서 성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창조적인 아이디어와 지혜를 주시고 최상의 기회와 만남을 주시면 나눔의 철학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사업을 잘 할 수 있다고 믿고 그런 은혜와 축복을 구하십시오.
특히 영혼 구원을 위한 일에는 더욱 힘써 나누십시오. 가끔 교회 형편 이상으로 선교후원을 하면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필요는 언제 채우고 우리 비전은 어떻게 이루나?” 그러나 나눔이 최상의 비전인 줄 믿고 도와야 할 의무를 외면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설득하십시오. “그래! 하나님이 후원할 마음을 주신 것이 복이지. 그렇게 하나님의 심정을 따라 힘써 나누면 내게도 축복과 행복이 찾아올 거야.”
선교사님들의 어려운 기도제목을 듣고 그때 반응해서 돕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기도제목을 듣지 않아도 평소에 돕는 삶을 체질화하십시오. 정기적인 후원에 나서고, 예상외의 수입이 생기면 자발적으로 후원에 나서고, 좋은 일이 있거나 삶 자체가 감사해도 자발적으로 후원에 나서십시오. 선교사님들은 어려워도 대개 스스로 도와달라는 말을 잘 꺼내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선교사님들이 힘들다고 말하기 전에 기도 중에 어떤 감동이 생기면 스스로 알아서 돕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선교사님들과 교류하다 보면 어려운 사정을 많이 듣습니다. 지난주에도 자동차 고장 난 얘기, 냉장고 필요한 얘기, 자녀의 교육 문제, 건축비 문제 등등 여러 선교사님들의 필요를 들었습니다. 그런 기도제목들이 워낙 많아서 일일이 다 소개하지 못합니다. 특히 그런 얘기들 중에는 평신도에게는 직접 못하고 목회자인 제게만 할 수 있는 얘기들도 많습니다. 구차하게 들릴 수 있고 못난이처럼 사역을 잘 못하고 있는 것으로 들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사역이 전반적으로 어려워진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사역을 잘 못해서 의식주도 잘 해결하지 못한다고 너무 못났다고 하지 마십시오. 지금 목사님들 중에 택시와 트럭 운전하는 분들과 막노동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개척교회와 중형교회는 점차 죽어가고 이마트 같은 초대형교회만 커지니까 80%의 사역자들이 먹고사는 일조차 힘들어진 것입니다. 선교사의 경우도 초임 선교사님들은 대개 사역도 어렵지만 생활도 어렵습니다. 그런 사정들을 알아주고 전방에 있는 선교사님들을 위해 후방에서 최선을 다해 후원하려고 하십시오.
항상 나눔의 사명을 가지고 열심히 기도하고 일하고 사업하십시오. 하나님의 뜻은 자신이 받은 축복으로 힘든 사람들에게 살 길을 열어주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고 하나님의 거룩한 비전을 이루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음지의 뿌리 동역자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불쌍한 영혼을 구원하시고 살 길을 열어주시려는 거룩한 비전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힘든 영혼을 돕고 거룩한 비전의 보이지 않는 뿌리 역할을 하는 뿌리 동역자가 되는 것은 성도의 제일 사명이 되어야 합니다.
<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 >
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려고 예루살렘에 가는 길에 일어난 일입니다. 이 본문은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기뻐하시는지 잘 교훈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기뻐하실까요?
1. 순수하고 깨끗한 사람
본문 바로 앞부분인 17-19절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삼일 만에 살아나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아주 어두운 분위기입니다. 그 분위기에 역행해서 한 여인이 치맛바람을 일으켰습니다. 세배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절하면서 자기의 두 아들들을 주님 나라의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한 것입니다(20-21절).
그때 주님은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22절). 그들이 뭔가를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그런 약삭빠른 마음으로는 주님의 좌우편에 앉지 못하고 우직하게 충성하는 사람이 주님의 좌우편에 앉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약삭빠른 마음은 약삭빠른 도둑보다 더 안 좋은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큰 착각이 있습니다. 약삭빠른 생각을 하면서 “내가 참 영리하구나! 나는 잘 살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사기 치는 것입니다. 남에게 사기 치는 것보다 자신에게 사기 치는 것이 더 불행한 것입니다. 결국 ‘약삭빠른 것’은 ‘영리한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것’입니다. 약삭빠른 사람은 잘 살 것 같지만 더 못 삽니다. 반면에 순수하고 깨끗하게 살면 겉으로는 손해 보는 것 같지만 결국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2. 십자가를 지는 사람
본문 22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때 예수님의 마시려는 잔은 십자가였습니다. 결국 십자가를 기쁘게 질 때 주님의 좌우편에 앉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면류관도 없습니다.(No Cross, No Crown).
일전에 어떤 발 사진을 보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발이 못생겼는지 마치 희귀병 병자의 발 같았고 나무뿌리처럼 생겨 마치 엽기 사진 같았습니다. 그 발은 바로 세계적인 발레리나인 강수진 씨의 발이었습니다. 한 여류 시인은 그 발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녀의 성공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하루 19시간씩, 1년에 천여 켤레의 토슈즈가 닳아 떨어지고 멀쩡한 발이 괴물 발처럼 될 정도로 노력해서 얻은 성공입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영광도 없지만 영혼도 부패합니다. 그러므로 복만 받으려고 하지 말고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를 기쁘게 지려고 하십시오. 무엇이 십자가입니까? 남을 위해 희생하는 것도 십자가이고 말없이 음지에서 최상의 헌신을 하는 것도 십자가지만 시련과 고난 중에도 “하나님! 이 시련과 고난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는 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하며 진심으로 감사하는 것도 십자가입입니다. 그처럼 기쁘게 십자가를 질 때 주님의 좌우편에 앉게 되고 조만간 축복의 문도 활짝 열릴 것입니다.
3. 성령 충만한 사람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때문에 나머지 10제자가 두 제자에게 크게 분노했습니다(24절). 성령 받기 전의 제자의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사람의 본능은 늘 “누가 크냐?”고 다투게 합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면 남이 나보다 앞서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남이 큰 실수를 해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해합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하면 얼굴도 밝아지고 마음이 어린이처럼 되면서 미움과 상처와 한에 맺혀 살지 않게 됩니다.
어린이들은 매를 맞아도 다음날에는 환하게 웃고 놉니다. 자녀에게 매를 대면 부모는 마음이 아파지고 우울해지지만 정작 맞은 어린이들은 하루만 지나면 벌써 잊어버립니다. 또한 심하게 싸우면 어른들은 그 후유증이 오래 가지만 어린이들은 금방 잊고 다시 친해집니다. 그런 모습이 바로 성령 충만한 모습입니다. 아무리 타당한 이유가 있어도 한 맺힌 감정을 오래 품는 것은 성령 충만한 삶이 아닙니다.
신비하고 화려한 성령의 은사는 있는데 마음속에 한과 상처와 미움이 그대로 있다면 그것은 사실상 감정 충만이고 자랑 충만이고 무대의식 충만이지 성령 충만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싫고 밉고 섭섭한 마음이 들 때마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내게 주신 축복의 십자가다. 그 사람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었을 거야.” 그런 마음을 가지고 성령 충만한 삶을 살 때 하나님은 그를 누구보다도 기뻐하시고 축복하실 것입니다.
4. 종처럼 섬겨주는 사람
그때 제자들이 누가 크냐는 문제로 시기하고 분노하는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이 안타깝게 생각하시면서 본문 26-2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 앞에서 권세를 부리는 일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하는 일이다. 너희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 너희 중에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
신앙의 핵심목표는 나를 높이려는 것이 아니라 남을 섬기려는 것이고 축복 많이 받는 것이 아니라 축복 받고 그 축복을 남을 위해 쓰려는 것입니다. 복에 집착하면 영혼이 황폐해지고 축복도 저주로 변합니다. 또한 섬김만 받으려고 하면 관계가 깨지면서 자기도 손해를 보지만 섬겨주려고 하면 관계가 좋아지면서 자기도 유익을 얻습니다. 모든 인간관계가 다 그렇습니다. 받으려고 하면 결국은 손해 보지만 주려고 하면 더 많은 것을 얻습니다.
왜 섭섭함이 생길까요? 받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주려고 하면 섭섭함이 없고 더 주려고 하면 더 섭섭함이 없습니다. 결국 주려는 마음을 체질화시킬 때 진정한 행복이 있습니다. 누가 큰 사람입니까? 많은 종을 거느린 사람이 아닌 많이 종이 되어주는 사람입니다. 하늘로 올라가는 사닥다리는 올라가는 방향에 있지 않고 내려가는 방향에 있습니다.
사실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의 자리다툼은 그 전의 갈릴리에서도 있었습니다(막 9:30-37). 그때 제자들은 다투면서 저마다 타당한 논리를 내세웠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수제자임을 내세우고 요한은 자기가 제일 사랑 받는 제자임을 내세웠을 것입니다. 마태는 돈을 많이 버는 세관원의 자리를 포기한 사실을 내세웠고 안드레는 자신이 최초의 제자임을 내세웠고 가룟 유다는 자신이 제일 신뢰받는 재정담당자임을 내세웠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큰 인물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 잘못이거나 성공을 원하는 것이 나쁜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성공을 원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성공을 잘 활용하면 됩니다. 그래서 성공이 나쁘다는 질책 대신에 누가 큰 인물인지에 대한 정의를 내려주시며 큰 인물은 종처럼 남을 섬겨주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세상에서는 많은 사람을 거느릴 때 크다고 하지만 예수님은 많은 사람을 섬길 때 크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진리에 대한 실물교육을 위해 예수님은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 어린이는 힘도 없고 돈도 없어서 성공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고 요구만 많습니다. 자녀를 낳으면 그때부터 주는 삶이 시작됩니다. 만 18세가 넘어 성인이 되면 안 줘도 될 것 같은데 계속 줄 일이 생깁니다. 마침내 자녀가 결혼하면 안 줘도 되고 받을 날이 시작될 것 같지만 그때도 부모는 계속 주는 입장이 될 때가 많습니다.
그처럼 세상적인 시각으로는 귀찮고 전혀 성공에 도움이 안 되는 어린이와 같은 약한 존재를 잘 영접하는 것이 결국은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란 말씀입니다. 세상은 없는 사람들을 무시하지만 성도는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없는 사람을 무시하면 그만큼 축복이 깎이지만 없는 사람을 섬겨주면 그만큼 축복이 쌓입니다. 결국 없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주느냐에 따라 앞날의 축복과 행복과 보람이 현저히 좌우되고 천국의 상급도 현저히 좌우될 것입니다.
섬기는 자가 큰 자입니다
마 20:20-28 / 이기복 목사
금년 8월 본교회 표어는 “섬김”으로 ‘영적 성숙과 재충전의 달’입니다. 오늘 8월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여 마 20:20-28절의 말씀을 통하여 “섬기는 자가 큰 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기독교는 섬김의 종교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의 섬김을 받아야 할 하나님의 아들이요 온 인류의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섬기는 자의 본을 보이셨고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오히려 섬기는 자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위로 하나님을 섬기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섬기고 사랑해야 하지만 특별히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섬김을 받으려 하는 사람이 아니고 남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요 12:26).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함을 말씀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은 한 마디로 섬기는 사람입니다.
금년이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해입니다만 중세 당시의 카톨릭교회의 교황을 비롯한 지도자들의 타락 중의 하나가 절대 권력을 가지고 교만과 온갖 부정과 부패를 저지른 것입니다. 교회와 지도자들이 섬김의 도는 망각하고 교권을 가지고 권력을 장악한 결과 교황부터 모든 사제가 타락하는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섬긴다는 말의 헬라어는 “디아코니아(Diakonia)”입니다. 여기서 온 말이 영어로 집사라는 말의 “디콘(Deacon)”입니다. 사도행전 6장에 보면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 전하는 일에 전념하기 위해 교회 역사상 최초로 일곱 집사를 세웠습니다. 그 기준이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칭찬을 듣는 사람으로 일곱을 택하여 안수하여 섬기고 봉사하며 구제하는 일을 맡겼습니다(행 6:1-7). 그 중의 한 사람이 스데반 집사로 기독교 역사에 최초로 순교한 평신도입니다. 이 말씀과 제도를 기초로 교회의 모든 직분은 섬김과 봉사의 직분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본받는 삶이요 제자된 본분입니다.
1. 기독교의 섬김은 세상 질서와 다릅니다.
“섬긴다”는 말은 본질적으로 낮은 자가 높은 자를 대하는 기본적인 행위로서 높은 사람의 필요를 위해 낮은 사람이 수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이나 윤리는 차원이 다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온 인류의 구세주이시며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친히 섬기는 자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존귀와 영광과 대우를 받아야 할 주님께서 가장 낮은 자리에 오셔서 섬기는 주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를 본받아 섬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사셨습니다. 세상의 질서와 윤리는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섬김을 받고 온갖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높은 자리일수록 큰소리치고 지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이 들어간 나라들은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섬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어로 장관을 “미니스터(minister)”라고 합니다. 그런데 “미니스터”의 근원은 바로 헬라어 “디아코니아(Diakonia)” 즉 “섬기는 자”입니다. 그래서 목사도 영어로 ‘미니스터’라고 합니다.
그런데 세상이 타락하면서 지위가 높은 자리일수록 권력을 휘두르고 섬김을 받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요즈음 군대에서 지휘관들이 공관병을 사적인 관리인으로 전락시켜 흔히 말하는 ‘갑질’을 해 오다가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군대에서도 높은 계급을 가질수록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는데 정반대가 되었습니다.
특히 지역 주민이나 국민들의 투표로 선택된 국회위원이나 지자체장이나 의원은 뽑아준 주민이나 국민들의 공복(公僕)이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선거할 때에는 모두가 국민의 충복(忠僕)이 되어 섬기겠다고 철통같이 약속하고 90도로 몸을 굽히다가 장 자리에 오르면 부정부패를 일삼고 국민들을 우습게 여기고 교만하기가 말할 수 없습니다. 또 대통령도 모든 국민을 섬기는 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대통령이 되면 무소불위(無所不爲: 하지 못하는 일이 없다는 뜻으로 절대 권력을 가진 자가 권력을 남용하여 약자 위에 군림하는 것)의 권력을 휘두르는 자리로 착각하다가 결국 역대 대통령들이 철장 신세를 졌습니다. 말로가 불행해졌습니다.
2. 기독교의 윤리는 철저히 섬기는 윤리입니다.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것은 섬기는 자가 된 것입니다. 섬기는 자는 낮고 천한 자가 아닙니다. 가장 존귀하고 아름다우며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진정으로 존경을 받는 사람은 낮은 자리에서 남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높은 자리라고 교만하고 남을 무시하거나 갑질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성경적으로 사탄 마귀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섬기라고 직책을 부여받은 천사들이 교만하여 섬김을 받으려고 하다가 타락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영입니다. 세상에서 주님의 몸된 교회가 타락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에서 다투고 나누어지는 이유가 바로 섬김을 받으려는 사람들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서로 섬기려고 앞장서는 교회는 절대로 타락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인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이제부터 하나의 성직자가 되어 섬기는 자가 됨을 의미합니다. 마틴 루터는 “만인사제직(萬人司祭職)”을 종교개혁의 중요한 핵심으로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누가 성경이 말하는 성직자냐?”고 할 때 안수 받은 사제나 목회자만 성직자가 아니고 세례 받아 거듭난 모든 그리스도인은 “거룩한 백성이요 왕과 같은 제사장”이요 성직자라는 것입니다.(벧전 2:9) 제단에서 성례를 집행하고 설교하는 사제나 목회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거리를 청소하는 청소부도, 가장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열심히 가족을 돌보는 주부도, 남의 냄새나는 구두를 손질하는 사람도 성직자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들은 철저하게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정신을 깨닫고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갱신하고 날마다 새로워져서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제자들이 “누가 하늘나라에서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이냐?”는 문제를 가지고 다투었을 때 예수님은 철저하게 섬김과 희생의 도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도 십자가는 지지 않고 섬김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할수록 섬김과 봉사가 몸에 배어야 합니다. 섬기고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이 행복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변화된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3. 예수님은 친히 섬김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본문 28절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세상을 호령하고 섬김을 받으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종의 자리에서 섬기 위함이었습니다. 빌 2:6-7절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라고 말씀했고 8절에는 “사람의 모양을 가지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 오셨고 낮은 자와 함께 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만 섬김의 도리를 말씀한 것이 아닙니다. 친히 섬기는 자의 본을 보여 주셨고 실천하셨습니다. 본문에 세베대의 아들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가 예수님을 찾아와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님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23절에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25절에 이방인들은 집권자들이나 권력자들이 높고 좋은 자리를 차지하겠지만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다고 말씀하셨고 26-27절에서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28절에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 앞에 무슨 좋은 자리 타령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 뿐 아니라 더 실제적인 섬김의 본을 보여 주신 말씀이 요한복음 13장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하셨습니다. 만찬 후에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발을 닦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가식적이거나 교육을 위해서 한 번 하신 것이 아닙니다. 섬김은 예수님의 삶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고금을 막론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은 섬기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짜 교인이 된 사람들은 예수님을 이용하여 온갖 부귀와 영화를 누리고 섬김을 받으려고 하였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중세기에 종교지도자들이요 오늘날 이단의 교주들입니다.
4. 섬기는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본문 26-27절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세상적으로 말하면 크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지배하고 다스리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사람입니다. 권력이, 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짓밟고서라도 올라서야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복음은 크고자 하는 사람은 섬기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정말 역설적인 논리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기독교와 교회의 진리입니다. 교회에서는 결코 세상적으로 출세한 사람이 큰 사람이 아닙니다. 돈 많고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으뜸이 아닙니다. 겸손하게 낮아져서 남을 섬기는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감리교 학교인 배재학당은 교훈이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입니다. 한국 최초의 선교사였던 아펜젤러가 배재학당을 세우면서 교훈을 그렇게 정하고 자신도 그렇게 살다가 젊은 나이에 순교하였습니다.
역사에도 보면 세상을 빛내고 위대한 일을 한 사람들은 특징은 남을 섬기는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세상적으로 얼마든지 출세하고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인물인데도 스스로 남을 섬기고 봉사하는 자리에서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이들은 보기에는 약한 것 같으나 이 세상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에이브라함 링컨, 위대한 선교사들, 21세기의 성자 알버트 슈바이처, 남아공의 넬슨 대통령, 테레사 수녀와 같은 사람들의 아름다운 섬김과 헌신은 역사에 길이 남을 별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부귀와 영화를 누리고 온갖 권세와 힘을 과시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그 보상을 다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겸손히 섬김의 도를 실천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만 아니라 하늘에서 그 상이 클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늘의 스타가 되어 영원히 빛을 발할 것입니다. 마10:41-42절,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장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내 잔을 마실 수 있느냐
마 20:20-23 / 김태한목사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건은 예수님의 사역 말기(末期)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가 예수님께 와서 요청을 했습니다. 자기 자식들에 대한 부탁이었습니다. “주의 나라에서(in your kingdom)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않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은 대답 대신 오히려 질문을 하셨습니다. “부인께서는 부인이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다시 야고보과 요한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내 잔을 마실 수 있느냐?” 두 사람은 선뜻 대답했습니다. “예. 주님! 마실 수 있고 말고요.”
많은 잔(盞, cup)들이 있습니다. 승리의 컵이 있습니다. 축구, 테니스 같은 운동경기에서 우승하면 우승컵을 받습니다. 그 팀의 주장이 환하게 웃으면서 컵을 들고 있는 사진을 찌고, 인터뷰를 하는 사진들을 우리는 많이 보았습니다. 이런 컵들은 성공과 영웅주의와 명성과 인기와 그리고 부(富)의 상징입니다.
죽음의 잔이 있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의 은 잔이 있습니다. 이 잔에 베냐민의 짐에서 나왔을 때 형제들은 사색(死色)이 되었습니다. 이사야나 예레미야에 나오는 잔은 하나님의 진노의 잔(이사야 51:17, 22, 예레미야 25:15)입니다. 이 잔은 심판과 파멸의 잔입니다. 소크라테스(Socrates)의 잔이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잔을 독배(毒杯)라고 하지요. 이 잔 속에는 독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잔은 죽음의 잔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예수님께서 두 제자에게 “너희가 내 잔을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을 때, 이 잔은 무슨 잔이겠습니까? 두 사람이 선뜻 대답한 것을 보면 아마 두 사람은 이 잔이 무슨 잔인지 몰랐던 것 같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入城)하시면 임하시게 될 “주의 나라”에서 마시게 될 축배(祝杯)의 잔으로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만일 그 잔이 축배의 잔이라며 못 마실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 잔은 마시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성경을 좀 읽은 사람들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잔에 대하여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막연하게나마 “죽음의 잔”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예수님께서 소크라테스같이 죽음의 잔을 마셨습니까?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죽음의 잔을 나누어 주십니까? 여러분과 저는 죽음의 잔을 받아야 합니까? 그렇다면 우리 중에 과연 예수님이 주시는 이 잔을 받을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요한복음 6장에 조금 슬픈 말씀이 있습니다. 6장에 예수님께서 물고기 2마리와 보리떡 5개로 5,000명을 배부르게 먹였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기적은 삽시간에 좁은 유대나라에 퍼져 나갔습니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예수님께 모여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않고,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 하리라(6:35).”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또 기적을 일으키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모여든 사람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니 내가 주는 떡은 세상의 생명을 위해서 주는 내 살이니라……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니라(6:51, 53, 55).” 무리들이 수군거렸습니다. “어째 이 사람 느낌이 좋지 않아! 오늘 떡 먹긴 글렀다!” 하면서 집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이 일 때문에 예수님의 추종자들 중에도 많은 사람이 떠났습니다. 모두들 떠나고 결국 벳세다 들판에예수님과 12 제자만 남았습니다.
모두가 떠나 버린 자리는 텅 비고 적막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입을 여셨습니다. “너희들도 나를 떠나겠느냐?” 마음 착한 제자들은 어떻게 대답할지 몰라 했습니다. 역시 이런 때는 베드로 밖에 없었습니다. “주님, 무슨 말씀이세요? 주님을 떠나다니요? 주님께 영생의 말씀이 있는데 우리가 누구에게로 간단 말입니까(6:67-69)?
대단히 심각하고 중요한 말씀입니다. 끝까지 주님을 버리지 않고 주님께 충성한 사람들에게 마지막 주어지는 것이 “죽음의 잔”이라면, 일찌감치 벳세다 들판에서 예수님을 떠난 사람들이 훨씬 현명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심각한 말씀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결국 주어지는 것이 “죽음의 잔”이라면, 지금이라도 믿음을 포기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조금 더 성경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가복음 14:36).” 이 말씀에 나오는 잔은 또 무슨 잔입니까? 이 잔이야말로 “죽음의 잔”입니까?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고린도전서 11:25)” 성경에 잔도 많습니다. 이 잔은 또 무슨 잔입니까?
이 잔은 생명의 잔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라”고 하시면서 나누어 주시는 이 잔은 생명의 잔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신 잔은 죽음의 잔이 아니라 생명의 잔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잔을 축복의 잔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하는 성만찬의 잔은 축복의 잔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냐(고린도전서 10:16)?” 그렇지만 이 말씀의 뜻이 이해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성만찬에 참가하면서도 그 뜻을 잘 몰라요. 왜 이 잔이 축복의 잔이 됩니까?
제가 좋아하는 사람 중에 헨리 나우엔(Henri J. M. Nouwen, 1932-1996)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네델란드에서 태어난 카톨릭 신부이며, 신학자입니다. 본래는 심리학을 공부했습니다. 미국으로 건나와 신학과 심리학을 통합하여 연구했던 그는 뛰어난 학자였습니다. 30대에 노틀담 대학에서 심리학을 가르쳤고, 1971년, 39세의 나이에 예일대학에서 가르쳤습니다. 그가 예일대학에 교수로 갈 때 일화는 유명합니다. “나에 대해서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논문 심사도 하지 않고 무조건 교수로 오라고 한다면 가겠다.” 교수 초청에 대하여 이렇게 답장을 보냈다고 합니다. 나의 학문적인 성취와 업적에 대하여 심사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만큼 그는 학자로서 지적(知的)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1981년, 49세의 나이에 그는 학자라면 누구나 동경하는 하바드 신학부의 교수가 됩니다. 그러나 그는 한 순간에 하바드에서의 자신의 보장된 생활을 거부하고 1986년부터 캐나다 토론토의 정신 박약 장애자들을 위한 공동체인 데이브레이크(Daybreak)에 들어가 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하다가 1996년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하바드를 떠난 후 데이브레이크에서의 생활은 나로 하여금 세상을 새롭게 보게 하였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바드의 강단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것을 그는 정신 박약아들을 섬기면서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간결한 문체(文體)로 맑은 글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책을 통해서 세상을 새롭게 보게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책이「예수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Jesus, 1989)」입니다. 제가 최근에 읽은 그의 책이 「내 잔을 마실 수 있느냐? (Can you drink the cup? 1996)」입니다.
나우엔은 이 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만찬의 잔을 “잔을 붙들기(Holding the cup)” “잔을 치켜 들기(Lifting the cup)” “잔을 마시기(Drinking the cup)” 라는 3단계로 설명합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잔(the cup of life)을 붙든다는 것은 지금의 자신의 삶을 심각하게 돌아보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이렇게 돌아보기를 두려워 한다고 합니다. 대답도 할 수 없는 질문이 생기고, 우리가 확실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에 대하여 의심이 생기고, 예상치 두려움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를 두려워 한다고 합니다. “그냥 살면 되지. 그렇게 생각한들 뭘 해? 문제만 복잡해지지.” 이렇게들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자신의 삶을 돌아 보기를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지금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용기를 내서 돌아 보십시오. 그렇지 못한 사람은 삶의 방향을 잡지 못하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잔을 붙든다는 것은 동시에 자신에게 이렇게 묻는 것을 말합니다. “이 잔을 받아든 나는 누구인가? 이 잔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 이 잔을 마셔도 괜찮은가?” 그의 말이 옳습니다. 이 잔은 우리의 삶을 말해 줍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잔을 붙드는 것입니다(We hold our own cup.). 우리의 삶은 누구도 대신 살아 줄 수 없습니다. 나의 삶은 나만이 살 수 있는 unique한 것입니다. 옆에 사람들이 나를 도와 줄 수는 있지만 결국 모든 선택과 결정은 내가 해야 합니다.
나우엔이 이렇게 말합니다. 1957년, 그가 25세가 되던 해에 그는 신부가 되었습니다. 신부가 되는 안수식의 하이라이트는 추기경(Cardinal)이 성배(聖杯, chalice)를 건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우엔에게 특별한 성배가 주어졌습니다. 이미 신부가 된 그의 삼촌이 금으로 아름답게 조각된 그의 성배를 나우엔에게 준 것입니다. 우리 가문에서 신부가 나온 것이 너무 기쁘다고 하면서 그의 성배를 조카에게 준 것입니다. 나우엔이 영광스럽게도 안수식에서 이 성배를 추기경으로부터 건네 받은 것입니다. 그는 그 때의 감격을 평생 잊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데이브레이크에서 장애자들에게 성만찬을 베풀기 위해 잔을 들었을 때 예수님의 말씀이 그의 가슴을 창으로 찌르듯이 찌르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가 금으로 된 성배를 건네 받던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서라면 하나도 힘들지 않았을 그 질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데이브레이크에서 장애자들에게 컵에 포도주를 따라 주는 그 순간에 귓전에 예수님의 질문이 들려왔습니다. “너는 나의 잔을 마실 수 있느냐?” 그는 다시 자신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나는 정말 예수님께서 마신 그 잔을 마실 수 있는가?”
그렇습니다. 여러분! 내 잔 속에 그분의 피가 부어졌습니다. 내가 들고 있는 이 잔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내 생명이 섞여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이 잔을 마신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신 것과 똑 같은 잔을 마시는 것입니다. 두 생명이 이 잔 속에 섞여 있기 때문에 이 잔은 예수님이 마신 잔과 같은 잔이지만 동시에 나의 잔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성만찬의 신비(the mystery of Eucharist)입니다.
예수님이 마신 잔은 슬픔(the cup of sorrow)의 잔입니다. 쓰디쓴 잔입니다. 예수님의 슬픔은 자신을 위해서 슬퍼하는 슬픔이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한 슬픔이었습니다. 배고프고, 고문 당하고, 외롭고, 거절 당하고, 버림받는 고통에서 오는 슬픔은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당해야 하는 슬픔이고 아픔이었습니다. “너희가 내 잔을 마실 수 있느냐?” 하고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물었을 때 제자들은 마실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잔이 슬픔의 잔인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잔은 동시에 기쁨의 잔(the cup of joy)입니다. 예수님의 기쁨이 슬픔에 가리워져 있습니다. 이 기쁨을 보지 못하고 슬픔만 보는 사람은 예수님의 잔을 마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실 것이다(요한복음 20:23).”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잔이 우리의 잔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슬픔과 기쁨의 잔이 우리의 잔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요한복음 16:20).”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6:22).”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나우엔이 자기 자신에게 던졌던 질문은 오늘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정말 예수님의 마셨던 그 잔을 마실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붙들고 있는 잔을 높이 듭니다. 예수님은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when I am lifted up from the earth, will draw all men to myself.. 요한복음 12:32).”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잔을 높이 드는 것은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셨던 잔을 우리도 마시겠습니다. 이제 그분의 잔은 나의 잔입니다.” 이것을 세상에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또한 “나는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슬픔을 당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아픔을 당하고, 때로는 거절을 당하고, 때로는 모욕을 당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잔이 동시에 기쁨의 잔인 것을 믿습니다. 그분의 피가 내 잔 속에 부어졌습니다. 이제 그분의 잔은 곧 내 잔입니다.” 이렇게 세상을 향햐여 담대하게 선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들리심은 세상의 축복이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의 잔을 높이 드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축복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에 이처럼 쓰임을 받게 되었습니까? 포도주의 종류가 다양한 것처럼, 우리의 삶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 저렇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생동안 명예와 부를 좇아 삽니다. 어떤 사람은 권력을 좇아 다니는 삶을 삽니다. 어떤 사람은 한번도 다른 사람을 사랑해 보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해 보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을 한번 섬겨 보지도 못하고 그렇게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목적으로 삽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슨 은혜로,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을 위해 부름을 받게 되었습니까?
우리의 잔을 높이 드는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한 축복의 잔입니다. 동시에 이 잔은 세상을 위한 축복의 잔입니다. 이 세상이 우리의 입을 통해 복음을 듣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이 우리를 통해 섬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높이 드는 잔은 이 세상을 위한 축복의 잔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냐(고린도전서 10:16)?” 하고 말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잔을 마십니다. 잔을 남기지 않고 끝까지(to the bottom) 다 마십니다. 한 순간에 마셔 버리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맛을 음미(吟味)하면서 다 마십니다. 잔이 다 빌 때까지 마십니다. 여기에 두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요한복음 13:1). 예수님은 철저하게 자신을 내 주셨습니다. 피 한방울까지 우리를 위해서 흘리셨습니다. 주님은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 세상을 향한 주님의 슬픔과 그리고 주님의 기쁨을 매 순간마다 느끼며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것처럼 우리도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그렇게 살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길을 끝까지 갈 것입니다. 중간에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이 그의 생명을 쏟아 부으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생명을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쏟아 부을 것입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할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1:26).”
둘째로, 우리의 빈 잔을 하나님께서 채워 주실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의 빈 잔을 채워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잔은 넘치게 될 것입니다. 다윗의 고백처럼, 우리도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편 23:5)” 하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전 세계의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주님의 잔을 붙드십시오. 높이 드십시오. 그리고 그 잔을 마십시오. 여러분이 높이 들어 마시는 잔이 여러분 자신에게, 그리고 이 세상을 향한 축복의 잔이 되게 하십시오. 오늘은 사탄의 가슴이 서늘한 날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운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확인하는 날이 될 것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마 20:20-28 / 이삼규목사
우리는 지난 수요일‘참회의 수요일’(재의 수요일, Ash Wednesday)을 시작으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되새기며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는 [사순절]을 맞이했습니다. [사순절]은 우리말‘사순’(四旬), 즉‘40일’로, 부활절로부터 주일을 제외한 40일간의 기간을 말합니다. 이 기간은 찬란한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는 준비의 기간으로 신앙의 성장과 회개를 통한 영적 준비의 시기입니다. 그래서 많은 경건한 성도들은 이 기간에 금식하며 참회하는 마음으로 지냅니다.
성경에서‘40’이라는 수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데, 모세가 시내산에서 40일간 율법을 받은 사건, 엘리야의 40일 동안의 여행, 광야에서의 40일간의 예수님의 금식, 무덤 속에 계셨던 40시간, 부활에서 승천까지의 40일간의 기간 등에서 나왔으며, 서기 325년 니케아공의회에서 40일로 공식화되어졌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귀한 사순절을 보내면서 주님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을 생각하며 내 자신의 모습을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사순절 첫 주일입니다. 사순절 첫 주일을 맞이하면서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사람마다 삶의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미래를 정하면 그것을 이루는 꿈을 꿉니다. 무엇이 되어야 할지 정하지도 않은 사람이라면 꿈도 없을 것입니다. 꿈이 없는데 이루어야 할 목적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세상에 오신 목적이 분명하셨습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내어 주셨습니다.
잘못된 요구
그런데 가장 가까웠던 제자들은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오신 목적을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이용해서 출세의 기회를 노리는 제자들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마지막 길을 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길을 재촉하셨습니다.
(마 20:17)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은 십자가로 가는 길입니다. 고난의 길입니다. 그 동안 주님을 따라 다니던 많은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특별히 12제자만을 따로 데리시고 예루살렘으로 가시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따로 데리고 가셨다는 것은 주님의 깊은 의도가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연구해 보면 주님은 많은 제자들 가운데서 12 제자를 선택하셨고, 그 중에서도 핵심 멤버로 세 명의 제자를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입니다. 열두 제자도 특별한 훈련을 시키셨지만 핵심 멤버였던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더욱 강도 높은 훈련을 시키셨던 것을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중요하게 생각하셨던 자리에는 그들을 꼭 따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예를 들어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 변화산에서 기도하시며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형되실 때,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변하여 핏방울이 되도록 고민하시며 결단의 기도를 하실 때 그들은 항상 주님 곁에 있었습니다. 그만큼 주님께서 그들을 귀하게 보셨으며 특별 훈련을 시킬 필요성을 느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십자가로 가는 마지막 길에 주님은 12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을 가시게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12제자만을 따로 데리시고 길을 가신 것은 그들에게 중대한 말씀을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길을 가실 때 주님은 무엇을 말씀하셨습니까?
(마 20:18)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마 20:19)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
이것은 주님께서 자신이 고난을 받으시고 부활하실 것에 대한 세 번째 예언입니다.
첫 번째는 마16:21에서, 두 번째는 마17:22,23절에서 예언하셨습니다. 주님의 예언들을 보면 예언의 횟수가 거듭됨에 따라 더욱 구체화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참으로 안타까운 심정으로 자신의 고난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때 누가 찾아왔습니까? 세배대의 두 아들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 살로메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주님 앞에 나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였습니다.
(마 20: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가복음을 보면 두 사람이 나와서 요구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막 10:3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막 10:36)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막 10:37)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마가복음에 비추어 생각해보면 어미가 부탁했던 것은 야고보와 요한의 요구이기도 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에도 대답은 야고보와 요한에게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똑 같은 의견일치를 보았고 특히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님의 이모였기 때문에 아마도 이모가 자기 조카에게 부탁하는 것이 더욱 효과가 있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같은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주님의 나라에서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기를 소원하였던 것입니다.
주님의 답변
주님은 그들의 구하는 소원을 들으시고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막 10:3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막 10:39)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막 10:40)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그들은 주님께 무엇을 구하여야 하는지 바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세례를 받을 수 있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지 못하면서 "할 수 있나이다"라는 엄청난 말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미래를 결정 짓는 중대한 대답이 되고 말았습니다. 주님은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대답한대로 야고보는 제자들 중에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으며, 요한은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받았고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산 순교자라고 말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주님께 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신을 위한 것입니까? 주님을 위한 것입니까? 야고보와 요한처럼 잘못된 것을 구하고 계시는 분은 안 계십니까? 혹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주님을 이용하려고 하시는 분은 안 계십니까?
얼마 전에 새로운 참여 정부가 출범을 하였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하기 전에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라는 것이 조직되었습니다.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인수위원이 되어서 대통령이 지난 정부로부터 인계 받아야 할 것들을 점검하였습니다. 아마도 이들 중에는 차기 정부에서 중요 요직으로 발탁되기를 내심 기다렸던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의욕을 가지고 일하였는데 나중에 보니까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는데 자기들의 이름이 빠지는 것을 보고 실망하며 한숨을 내쉰 분들이 여러 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분명 예수님께서 유대의 치리자가 되면 높은 자리를 주실 것이라고 기대하였던 것입니다. 그 동안에는 서로 눈치만 보았는데 이제 노골적으로 자리를 요구한 것입니다.
열 제자들의 분노
열 제자들이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겼습니다. 그들이 분노하는 마음을 가졌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자신들에게도 그러한 욕망이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 주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두 제자에 대해서 분히 여기는 마음을 가졌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나는 그러한 마음이 없다고 말 할 수 있겠습니까? 크게 되는 것, 높아지기를 원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마음일 것입니다. 그런 욕망이 없다면 그 사람은 무엇인가 잘못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크게 되는 방법이 문제입니다.
제자들은 세상적인 방법을 가지고 하늘 나라에서도 크게 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세상적인 방법이 통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방법이 있고, 하늘 나라의 방법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늘 나라에서 크게 되는 길이 무엇일까요?
1)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26절).
세상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섬기는 일을 합니까? 종이나 하인들이 하는 일입니다. 낮은 사람들이 하는 일입니다. 세상에서는 하인들이나 종이 섬기는 일을 한다고 해서 그들을 존경하거나 결코 높이지 않습니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자신을 높여서 섬김을 받는 것이 세상적인 방법입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는 섬김을 받는 자가 큰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가 큰 자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섬김을 받으려 오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오셨습니다.
마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1878년 윌리암 부스의 구세군이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을 때 세계 도처의 남녀들의 구세군에 입대하기 시작했다. 한때는 주교가 되려고 꿈꾸었던 한 남자가 대서양을 가로질러 미국에서 영국으로 입대하기 위해서 건너왔다. 사무엘 브렝글은 구세군에 입대하기 위해서 훌륭한 목사의 직분을 그만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처음에 부스 사령관은 그의 입대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부스는 그에게 "당신은 너무나 오랫동안 보스로 군림해왔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브렝글에게 겸손을 가르치기 위해서 그에게 다른 훈련병들의 군화를 닦는 일을 시켰다. 이에 실망한 브렝글은 "내가 기껏 군화나 닦기 위해서 대서양을 건너 나의 꿈을 좇아왔단 말인가?"하고 중얼거렸습니다. 그런데 그때 환상 중에 거칠고 무식한 어부들의 발을 씻으려고 엎드리고 계시는 예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주님'께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당신께서 그들의 발을 씻기셨군요. 그렇다면 이제 나는 저들의 구두를 닦겠습니다.' 사무엘 로간 브렝글이 기꺼이 그리고 사랑스럽게 그들의 더러운 군화를 닦으려고 했을 때 그는 청지기의 사명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성공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님처럼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그것은 가치 있게 경험한 교훈이었습니다. 브렝글은 의미 깊은 청지기의 직분을 경험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구세군 최초의 미국인 감독관이 되었습니다.(성공병으로부터 자유로운 목회, 켄트 휴즈. 바바라 휴즈)
여러분 중에도 열 명의 제자들처럼 높아지기를 원하시는 분은 안 계십니까? 그렇다면 섬기는 자가 되십시오. 어제 우리 고향 교회에서 임직식이 있었습니다. 100년이 넘은 교회 역사상 많은 임직자를 세웠습니다. 축사를 해달라고 해서 다녀왔습니다. 행사가 끝나고 손님을 접대하는데 한복을 입은 권사님들이 내려오더니 얼른 방에 들어가서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손님접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른 날 같으면 몰라도 임직을 받는 날이니 다른 사람의 축하를 받고 대접을 받을만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곧 바로 내려와서 손님들 시중을 드는 것을 보면서 직분자는 바로 저런 모습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보았습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맡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대접받는 직분이 아닙니다. 대접받으려 직분을 맡았다면 어서 그 직분을 내놓아야 합니다. 교회의 직분은 섬김의 직분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2)종이 되어야 합니다(27절).
예수님은 하늘 영광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종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마가는 예수님을 소개할 때 종으로 오신 예수님을 소개하였습니다. 바울도 빌립보서 2장에서 주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 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주님은 종이 되셨고 자기를 낮추셨으며,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빌 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빌 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오늘은 사순절 첫 주일입니다. 이 귀한 시간에 우리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 계십니까?
마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주님은 오신 목적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주님은 섬김을 받으려 오신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섬기려 오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나의 영혼과 생명을 위해서 예수님이 섬겨주신다는 말입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사건입니까? 만일 주님의 이런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사순절 첫 주일을 맞이하는 오늘 주님의 오신 목적을 마음에 깊히 새기시는 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겸손의 길
마 20:20-28 / 이종윤 목사
지난 몇 주간 예수님의 제자의 도를 배우는 가운데 오늘은 겸손의 길에 대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본받아야 되는데 그 분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런고로 누구든지 겸손하지 않고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겸손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누구나 할 수 있을 것 같으니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 겸손인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 새 사람의 체험을 한 사람만이 겸손할 수 있습니다.
Ⅰ. 그리스도와 같이 겸손의 길을 가야한다.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이 내게 명령하셨기 때문에 괴로워도 어려워도 모든 일에 방해가 생긴다 할지라도 그 일을 계속 할 수 있는 사람을 겸손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잘 익은 곡식일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하며 빈 수레는 오히려 요란하다고 합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은 잘 익은 곡식처럼 겸손의 허리를 띠고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 참 모습일 것입니다. 동물에게는 겸손이 없습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겸손이 있는 것이고, 우리가 주님의 형상을 받았기 때문에 주님처럼 겸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늘의 영광보좌를 버리시고 아버지께 순종하며 세상에 내려와 죽기까지 자기를 낮추신 예수님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Ⅱ. 짓누르는 네개의 짐을 벗어버리지 않고서는 진정한 겸손한 자가 될 수 없다.
1. 교만의 짐 보따리를 던져버려라.
겸손의 반대는 교만일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겸손하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예수의 제자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순종해야 합니다. 자기를 사랑하거나 교만한 마음을 가지거나 오만한 자리에 앉는 것을 다 벗어버리지 않고서는 우리는 참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왕이라 생각하며 특별한 대우를 받아야한다는 착각을 하며 살아갑니다.
2. 위선의 짐을 벗어버려야한다.
아닌 것을 기라 하고 있는 것을 숨기려고 할 때 이것은 위선을 가져오는 죄가 될 것입니다. 조금만 성공했는데 많이 성공했다고 허세 부리고 허풍을 떠는 것, 이것이 위선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겸손해지지 못합니다. 그러니 모든 허세와 위선을 벗어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그대로, 내 모습 이대로가 겸손의 모습이자 가장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3. 우리는 인위적인 것을 벗어버려야한다.
위선이라는 것은 내가 백만원이 있는데 천만원이 있는 것처럼 허풍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한푼도 없는 빚쟁이가 백만원이나 있는 것처럼 하는 것은 인위적인 꾸밈입니다. 아무것도 없으면서 있는 것처럼, 간사하고도 간교하게 하는 것이 인위인 것입니다. 그런 모습을 벗어던져버려야 우리는 예수 앞에 바로 설 수 있습니다.
4. 자기 성취를 위해 투쟁하는 짐을 벗어버려라.
오늘 많은 사람들이 자기 성공을 위해 투쟁을 합니다. 열심인 것은 나쁜 것이 아니나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닌 자기를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교만으로 가는 지름길이 됩니다. 교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자기 만족입니다. 자기가 성취했다는 생각으로 자기 힘으로 해냈다고 생각함으로 교만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가장 위험한 시간은 실패하고 낭패한 것이 아닌 성공하고 높은 자리에 올라섰을 때일 것입니다. 그런 만큼 스스로를 위해 투쟁하는 짐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을 위해 투쟁하는 제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Ⅲ. 하나님과 함께 시작을 하라.
오늘 우리는 모든 일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해석하고 그 속에서 일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위선이 가증된 것이 되고, 괴로움밖에는 남을 것이 없을 것입니다.
결론
오늘 하나님 앞에서 겸손의 허리띠를 띠고 주님을 따르는 참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섬길 자를 세우라
마 20:20-28 / 김상복 목사
월드컵 도중 지자제 선거를 진행하니까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가 없다. 월드컵 대회의 찬란한 시합의 모습을 보다가 지자제 선거 후보자들 간의 시합을 보면 너무도 초라하게 보여서 재미가 없고 짜증나게 만들어서 계속 보고 싶지도 않다. 앞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분들이 이런 월드컵과 같은 국제적 행사와 선거를 같은 기간에 계획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월드컵과 지자제 선거는 도저히 경쟁이 되지 않는다. 독일과 사우디 아라비아와의 축구시합 같다. 8대 0 정도이다.
그러나 우리 시와 도를 이끌어 가야 할 우리의 지도자를 선출해야 한다. 시장과 시의원, 도지사와 도의원은 우리가 사는 지역사회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좋게, 더 편리하게, 더 효율성 있게, 더 살기 좋게 만들어 줄 수 있는 분들을 후보자들 사이에 찾아서 선택해 주어야 한다.
할렐루야교회 성도들의 시민의식은 대단히 높다. 나는 이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기뻐하고 있다. 다른 교회에서는 통계를 내 본 일이 없겠지만 할렐루야교회는 제가 이 교회에 담임목사로 온 이래 지난 10여년 동안 선거가 있었을 때 여러 차례에 걸쳐 투표율 조사를 해 본 일이 있다. 많은 분들이 기억할 것이다. 첫 번째 선거가 지자제 대표 선거였다 우리가 아직 서울에 있었을 때 강남지역의 투표율 평균이 40%가 조금 넘는 정도였다. 그러나 할렐루야교회의 성도들은 80%가 넘었다. 서울 사람들의 평균 보다 두 배가 투표를 했다. 그 다음 대통령과 국회의원 선거를 했을 때는 평균 투표율이 역시 평균치를 훨씬 넘는 95%였다. 그러나 문제는 20대와 50대가 연령별로 비교했을 때 한국의 평균보다는 훨씬 높았지만 우리 교회 성도들 간에는 가장 낮았다. 또 남자가 여자들 보다 투표율이 여러 포인트 뒤지고 있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지적했고 더 적극적인 투표 참여를 독려한 적이 있었다. 그 결과 투표율은 더 높아져서 평균이 97.5%로 상승했다. 아마도 대-한민국의 어느 곳의 어떤 공동체 중에도 이처럼 높은 투표율은 없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또 감사한 것은 20대와 50대의 투표율이 교회 내의 연령별 평균치를 거의 따라 왔고 또 하나 감사한 것은 남자의 투표율이 여자의 투표율보다 1% 더 높아 처음으로 남자들이 여자들의 시민의식을 따라 잡은 것이다. 남자들이 98%, 여자들이 97% 여서 평균이 97.5%가 되었다.
1.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기 나라를 사랑한다. 또 마땅히 사랑해야 한다. 이번 축구대회에도 나라마다 애국가를 부를 때 모두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숙연해지며 자기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 하려고 결심을 한다. 자기 나라가 잘 할 때 기뻐 뛰며 좋아한다. 자기 나라 팀이 잘 하도록 응원을 한다. 마땅한 일이다.
사도행전 2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지경을 나누어 주셔서 각각 나라를 지정해 주셨고 각각 한 나라에 속하여 그 나라에 살도록 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나라를 이끌어 갈 사람을 뽑는 선거에 참여하여야 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투표는 기본권리요 의무이다.
2. 투표일을 공휴일로 만들어 주었는데 투표는 하지않고 놀러만 간다면 그것은 무례한 행동이다.
3. 투표한 사람만이 대표자들의 시정과 도정과 국정에 대해 할 말이 있다. 의무를 행하지 않은 사람들은 말할 자격이 없다.
어떤 사람을 선택할 것인가?
1. 자신의 삶에서 성공적으로 살아온 사람들 가운데서 선택해야 한다.
2. 모범적인 시민들 가운데서 선택해야 한다.
3. 가정생활을 원만하게 해 온 사람, 자기 직장이나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온 사람
4. 자기 공동체 안에서 언제나 인정을 받으며 살아 온 사람
5. 가정, 직장, 이웃, 사회에서 긍정적으로 기여해 온 사람
6. 보편적 가치가 높은 사람
7. 대인관계가 좋은 사람
8. 큰 공동체 지역이나 시나 도 살림에 전문적 지식과 경험과 기술이 있어서 반드시 공헌할 수 있는 종류의 사람
9. 다른 사람들과 함께 협력해서 일 할 수 있는 사람
10. 특별히 우리 사회에서는 정직한 사람
11. 성장과정에서도 비교적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한 사람, 극단적 경험을 많이 한 사람은 마음에 상처가 많아
정서적 안정이 없기 때문에 감정에 치우치고 모두에게 유익한 결정이 아니라 편파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다.
12. 희생정신이 있는 사람
13. 몸과 마음과 영혼이 건강한 사람
14. 겸손한 사람
15.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
16.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사람
17. 결국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려는 사람이다.
정치인들의 세계에서는 자신의 권세와 재물과 인기와 자기 과대망상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사람들의 관심과 박수를 받으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자신이 마치 하나님이나 된 것 같은 망상 속에 빠진다. 박수를 받을수록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더 겸손하게 하나님과 백성을 섬기려 하는 사람이라야 한다.
섬기는 사람이 위대한 자요, 섬기는 사람이 큰 자요, 섬기는 사람이 으뜸되는 자이다. 자기 중심적인 사람은 너무 사람이 작아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예수님은 섬기기 위하여 오셨다. 섬김을 받으러 오신 분이 아니시다. 섬기되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러 오신 분이시다.
죄는 인간의 수많은 문제를 야기 시킨다. 죄에서 인간을 구하여 속박에서 자유를 주고 두려움에서 평화를 주고 증오에서 해방시켜 사랑을 즐길 수 있도록 자신을 주어 희생하러 오셨다.
지배자가 되려 하는가, 통치자가 되려 하는가, 권세를 누리려 하는가, 과대망상에 빠져 있는가. 다른 후보를 헐뜯는가, 몸과 마음과 영혼에 건강한 모습이 있는가. 결국 자신을 바쳐 주민과 시민과 도민을 섬기려 하는가, 주장하려 하는가, 무엇보다 더 고상한 인격과 인품이 있는가. 전문적 능력이 있는가를 분별하여 여러분의 판단에 가장 좋은 사람을 선택하여 우리가 사는 지역과 도시와 도를 더 좋은 곳으로 만드는데 하나님께서 주신 시민의 권리와 의무를 이행하여야 한다.
섬기는 평신도
마 20:20-28 / 김윤기 목사
본 교단 제87년차 총회가 제정 공포한 평신도주일이 금년에 제11회를 맞게 됩니다. 평신도주일은 하나님의 백성(Laos)인 평신도들 모두가 교회의 주체인 동시에 적극적인 구성원으로서 교회부흥과 이 세상 구원에 쓰임 받는 일꾼이 되도록 하므로 평신도의 바른 양육을 통한 평신도의 정체성과 사명을 재인식케 하고 결단을 촉구하는 특별주간으로 지키는데 그 의미가 있습니다. 2002년 교단 표어가 "성결의 빛으로 새 역사를 펼치는 교회"라는 로서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는 교회와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 목표를 향해 기도하며 실천해야 할 시기라 믿고 평신도주간을 보다 의미 있게 보내야 합니다.
교회의 머리되시는 예수께서 세상에 계신 이유는 자신을 위함이 아니오 세계의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교회의 본래의 존재 이유도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함께 세계를 위해서 있습니다. 본 회퍼는 "교회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고 말했습니다. 만일 교회가 이웃과 세상에 대해 무관심하고 자기 중심주의, 세력 증강에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그것은 타락의 근본입니다.
예수는 또한 인류에게 해방과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세상에 계셨습니다. 그는 정신적인 해방 운동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인간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친히 병자를 고치시고 굶주린 대중을 기적으로 먹이시기도 하셨고, 성전을 도적의 소굴로 삼는 자들에게 개혁의 채찍을 들기도 하셨습니다.
평신도의 사명도 주님의 행하심 같이 선교와 봉사를 통해서 인류를 해방시키려 함에 있습니다. 교회는 이 사회에 직장을 갖고 사회와 가장 많이 접촉을 갖고 대화를 나누는 평신도를 통해서 본래의 사명을 완수해야 합니다. 교회는 거룩한 교회적 세계를 형성하여 신도에게 속된 세계로부터의 피난처를 제공하려는 것이 아니라 복음 전선의 전투 본부요 성도의 병사(兵舍)인 교회는 이 본부에서 평신도에게 영적 힘을 공급하고 그들을 훈련시켜 세계로 보내어 그 속에서 사명을 완수케 하려는 것이 근본 사명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으뜸이 되어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자 온갖 노력을 다합니다. 심지어 다른 사람들을 모함하거나, 자기와 비슷한 처지에 있거나 우월한 사람을 어떻게 해서라도 음해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이 으뜸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본문의 내용은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나아와서 주의 나라가 세워질 때 자기의 두 아들을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내용입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1. 하나님을 잘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죄에서 구원하신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함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1절에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했고, 또 고린도 전서 6장 20절에 보면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드릴 때마다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예배드려야 하고, 교회에서 맡은 일을 감당할 때에도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충성해야 되며, 또 어디서 무슨 사업을 하던지 무슨 장사를 하던지, 직장에서 무슨 일을 하던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던지 역시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해야 됩니다.
우리는 기럇야아림 사람 아비나답의 집 사람들처럼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합니니다. 삼상7:1-2에 "기럇야아림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궤를 옮겨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 놓고 그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히 구별하여 여호와의 그궤가 기럇여야림에 들어 간날부터 이십년 동안을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사의 시대가 끝나고 이스라엘 왕국이 출범하기 직전, 즉 제사장 엘리의 시대에서 사무엘의 활동시대에로 접어들던 과도기는 이스라엘 역사의 영적 암흑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외적으로는 블레셋의 침공을 방어하기가 무척 어려웠고, 내적으로는 실로의 성소가 황폐하여 신정의 기능이 마비되어 버렸는가 하면 사회는 강력한 사사가 없으므로 백성들이 목자 없는 양처럼 방향 감각을 잃고 말았습니다. 블렛셋 사람들에게 빼앗겼던 법궤가 기적적으로 이스라엘에 돌아오긴 했으나 아직 나라가 안정되지 못하고 실로의 성소를 지키던 제사장 엘리와 그의 자식들이 죽음으로 성소에 안치할 형편이 못되었습니다.
(삼상6:19-20에 보면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고로 그들을 치사 (오만)칠십인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애곡하였더라 벧세메스 사람들이 가로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뉘게로 가시게 할꼬 하고" 의논 끝에 기럇여아림 거민에게 보내기로 했으며 그들은 하나님의 궤를 산지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안치키로 했습니다.
오늘날처럼 혼탁하고 어지러운 세상에서 아비나답처럼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를 제공하고 언약의 말씀을 정중하게 모시며 자녀들로 하여금 그 말씀을 받들어 살도록 하는 신자가 있다면 그는 진정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요, 영원히 축복받은 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은 아비나답처럼 하나님을 정성을 다해 섬기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우리 성도들은 형제와 이웃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오셨다고 말씀하시면서 너희도 형제를 섬기는 자가 되라고 교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로만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생활로도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요 : 13: 1-17에 보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허리에 수건을 동이시고 대야에 물을 떠다가 제자들의 더럽고 냄새나는 발을, 섬기는 마음으로 손수 씻어 주시는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고 본을 보였노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고 말씀하시었습니다.
즉, 높고자만 하지말고 낮은 자리에서 이웃을 섬기는 자가 되라는 말씀이요, 으뜸이 되어 영광만 받으려 하지말고 종의 자리에서 섬기는 자가 되라는 말씀이며, 위에 앉아서 대접만 받으려 하지말고 아랫자리에서 섬기는 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하면 복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 가족은 물론 우리의 이웃은 모두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들이 교회를 다니든 안 다니든, 하나님을 믿던 안 믿던 영적으로 탈선되어 살뿐이지 사실은 모두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이요, 우리의 이웃들입니다. 더욱이 예수 안에서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은 말 할 것도 없이 한 피 받은 한 형제요 한 가족들입니다. 성씨가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가문이 다르고 환경이 다르다 할지라도 알고 보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들이요 한 이웃들입니다. 그러므로 나와 여러분들은 우리의 형제와 우리의 이웃들을 잘 돌봐주고 때로는 힘이 되어 주기도 하고, 그리고 섬기는 자가 되어 복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0세기 정신적 거성중의 한 사람인 슈바이처 박사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공부하던 중에 행복한 자기는 불행한 자들을 위해서 살고 무엇인가 봉사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30세 까지는 자기를 위해 살고, 그 후 부터는 남을 위해 살겠노라고 결심합니다. 30세에 이미 목사로, 신학자로서, 대학교수로서 또 음악가로서 명성을 떨쳤습니다. 그러면 남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 무슨 일로 인류에게 봉사할 것인가? 그는 어느 날 신문을 보고 그의 인생의 사명을 발견했습니다. 아프리카 콩고 지방에서 흑인에게 의료봉사를 할 하나님의 일꾼을 구하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할 일을 깨닫고 의학공부를 7년 간 한 다음에 부인과 함께 아프리카로 떠났습니다. 거기서 90세가 되도록 흑인들을 위해 봉사했습니다. 슈바이처로 하여금 90평생을 흑인을 위하여 봉사하게 한 힘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믿음의 힘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활동하셨던 팔레스타인에는 헤르몬 산에서 발원한 요단강 상류의 물을 받아 큰 호수를 이루고 있는 호수가 갈릴리 바다입니다. 이 호수는 자기가 받은 만큼의 물을 다시 아래로 흘려 보내 요단 강의 본류를 이루게 합니다. 한편 요단 강의 종착점에 위치하고 있는 사해는, 자기에게 흘러든 물은 단 한 방울도 남에게 주는 법 없이 모조리 자기가 끌어 안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받은 만큼 남에게 주는 갈릴리 호수는 생명력이 넘쳐서 그 속에 온갖 물고기들이 뛰노는데, 받기만 할 뿐 남에게 전혀 줄줄 모르는 사해는 이름 그대로 죽음의 바다가 되어 그 속에서는 단 하나의 생명체도 살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세상의 원리는 낮은 자가 높은 자를 섬기고, 낮은 자는 높은 자가 되려고 힘쓰고 전심전력하는 것이 정상이겠지요. 높은 자는 권위로 낮은 자를 얕잡아 보고. 이래서 나타나는 현상이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면 다리가 찢어 진다" 가 아닐까요. 뱁새는 황새처럼 보이기 위해 힘쓰다 다리가 찢어지고 마는 절망이 세상에서는 언제나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쳐 준 삶의 방식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낮고 낮은 우리를 죽기까지 섬기셨듯이, 우리 그리스도인은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섬기는 것이지요. 즉, "황새가 뱁새의 보폭에 맞추어주는 것"이 아닐까요. 교회 안에서 자칭 자신이 "황새"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뱁새"를 위해 보폭을 줄여 주시기 바랍니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23:11-12)"고 주님은 말씀을 하시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평신도 주일에 평신도를 새롭게 발견하여 주를 위하고 교회와 이웃들을 위해 봉사하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섬기는 자가 위대하다
마 20:20-28 / 황광민목사
약 2백 여년 전에 영국에 윌버포스라는 정치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21세에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그가 정치를 시작하면서 가장 심각하게 느껴진 것은 인권문제였습니다. 어린아이들도 하루에 18시간을 일하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흑인 노예들의 인권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있었습니다.
당시 영국은 선박사업이 크게 번창하였습니다. 해외수출입이 각광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호황을 누리던 것은 노예를 잡아다가 파는 사업이었습니다. 노예선은 흑인들을 한 배에 약 500명씩 싣고 왔는데 짐승처럼 취급하며 좁은 공간에 짐짝처럼 겹쳐서 싣고 왔습니다. 구토한 음식물과 분뇨가 범벅이 된 배의 지하실은 지옥과도 같았습니다. 실려오는 동안 상당수의 노예들이 죽었고, 죽은 노예들은 바다에 던져져 상어 떼의 밥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크리스천이었던 윌버포스는 신앙양심상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1788년 노예제도는 당연히 폐지되어야 한다고 국회에서 담대히 외쳤습니다. 그러나 즉시 조롱을 당하고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영국국회는 윌버포스가 제안한 노예제도 철폐 안을 보기 좋게 부결시켰습니다. 그는 굴하지 않고 다시 노예를 철폐하자는 투쟁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러나 2년 후에도 그의 제안은 또 보기 좋게 부결되었습니다. 윌버포스는 신앙양심상 도저히 물러설 수 없었습니다. 그는 국민들 앞에서 집요하게 자신의 신념을 외쳤습니다. 놀랍게도 국민들의 호응은 상당히 컸습니다. 흑인노예가 재배한 설탕을 먹지 말자는 운동에 30만 명이나 동참하였습니다. 그래도 영국국회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윌버포스의 노예제도 철폐 안은 1797년에도 부결되었습니다. 1798년에도 부결되었습니다. 그리고 1800년에도 부결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계속되었는데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1801년에는 상원에서 노예제도 철폐 안이 통과되었고 이어 하원에서도 283대 16으로 통과되었습니다. 그 날 영국 국회는 윌버포스의 불굴의 투쟁에 특별한 경의를 표했다고 합니다. 국회의원 전체가 일어나서 기립박수를 치면서 그의 노고를 치하하였습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에는 섬기는 자가 위대한 자임을 가르쳐주시는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려는 사람들에게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은 봉독한 본문을 중심으로 하여 <섬기는 자가 위대하다>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높아지려는 욕망
인간은 누구나 높아지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니체는 "생물이 존재하는 모든 곳에는 권력에 대한 욕구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높아지려는 욕망이 있었습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은 이에 대한 예수님의 뜻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12제자들에게 수난을 예고하셨습니다. 17-19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리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에게 넘겨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3일에 살아나리라" 아멘. 이렇게 주님은 비장한 각오를 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아들들과 더불어 예수님께 나아와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하여 주시기를 요청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십자가를 지려고 하시는데 높은 자리를 탐내고 있으니 착각을 해도 보통 착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셨고 제자들은 "마실 수 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마시려는 고난의 잔을 제자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면 곧 축배를 들 것이라고 착각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신 있게 그 잔을 마실 수 있다고 대답하였던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그의 어머니와 더불어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 주시기를 청하였다는 말을 제자들이 들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두 형제에 대하여 분개했습니다. 본문에서 사용된 '분히 여겼다'는 말은 매우 강한 분노를 가르킵니다.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의 깊은 뜻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은근히 높은 자리를 기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형제가 그 자리를 가로채려고 하자 분개하였던 것입니다.
제자들 사이에 소요가 일어나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6-27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아멘. 여기서 주님은 진정 위대한 사람은 섬기는 사람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방인들의 권력에의 의지
예수님은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아옹다옹하는 제자들에게 이방 권력자들처럼 되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 25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라고 하였습니다. 이방인들은 군림하기 위하여 높아지려고 하지만 성도들은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깨우쳐 주셨습니다.
미국 대통령의 한 비서관이 정신과 의사를 찾았습니다. 그는 잠을 잘 때나 목욕할 때에 백악관 출입증을 몸에 지니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이 불안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사가 알아보니 백악관 직원들이 거의 비슷한 증세를 보였다고 합니다.
말단 직원들도 백악관에 드나드는 것만으로도 우쭐댑니다. 그러다가 좀더 지위가 높아지면 케네디 센터 극장에서 대통령을 위한 홀에 같이 앉기를 바랍니다. 그 뒤에는 백악관 지하실에 있는 체육관에 들어갈 수 있는 열쇠를 탐내게 됩니다. 이어서 대통령이 행차할 때 대통령 차에 얼마나 가까이 갈 수 있는가에 신경을 쓰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회식 중에도 일부러 무전 호출기를 작동시키고 마치 대통령의 호출이 있는 것처럼 위장하기도 합니다. 권력에 마취된 사람들의 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권세에는 특권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권력이 있는 곳에는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권력을 잡으면 돈 보따리도 쏟아져 들어옵니다. 이 맛도 한번 보면 손을 놓을 수 없습니다. 말로는 섬긴다고 하지만 실상은 백성 앞에 군림할 수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이것을 즐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는 섬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여 섬기는 자가 되라
26절의 말씀을 보십시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라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예수님은 역설적인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마다 크고자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사람마다 으뜸이 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섬기는 자가 되고 서로 종이 되라고 하십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습니다. 삶의 본질을 촉구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도는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안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도들도 출세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출세를 하든 안 하든 본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도 군림하지 말고 끝까지 섬기는 자세를 지켜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자녀들이 출세하기를 기원합니다. 그러나 섬기는 삶의 본분을 잊지 마십시오.
섬긴다는 말은 헬라어로 '디아코니아'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어원의 '디아코노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종이라는 뜻도 있고 권력자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 말은 중요한 의미를 시사합니다. 권력자는 종이요, 섬기는 자임을 보여줍니다. 영어로는 minister라고 하는데 같은 의미입니다.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아프리카의 어느 나라를 방문했을 때 직업란에 minister라고 적었습니다. minister는 장관이라는 뜻도 있고 성직자라는 뜻도 있습니다. 성직자나 장관은 모두 섬기는 자라는 의미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프리카 공항 직원은 한국에서 장관이 온 줄로 알고 상부에 신고를 했습니다. 결국 그 나라에서는 한국의 장관의 비공식 방문인 줄 알고 후히 대접을 했다고 합니다. 그 목사님도 영문을 모른 채 후한 대접을 받고 왔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오래 전의 이야기입니다.
목사나 장로는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장관이나 대통령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본분을 지켜 섬길 때 진정 존경을 받습니다. 섬기는 사람들이 위대한 사람들입니다.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더 많이 섬겨야 합니다. 이방인들처럼 높은 자리에 올라 군림해서는 안됩니다. 성도들은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섬기는 자의 모델 예수 그리스도
여러분!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십시다. 예수님이 섬기는 자의 모델입니다. 28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만 하시지 않고 몸소 섬기는 삶을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이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당시에는 종들이 손님들의 발을 씻겨 주었습니다. 그것은 종들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일을 선생이시요,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몸소 행하셨습니다. 요즘 우리가 흉내내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일을 하셨습니다. 참으로 위대한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잔을 저희가 마시겠습니다
마 20:20-28 / 유영설목사
1. 요즘의 부모들도 자녀들을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보내려는 어머니들의 치맛바람이 대단합니다. 자녀들이 좋은 학교로 배정받도록 위장전입을 해서 문제가 되는 고위인사들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감동하고 귀감이 될 만한 자녀 양육과 지도로 성공한 자녀들의 삶을 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 읽은 본문을 통해서 한 무명여인의 자식을 위한 헌신적인 믿음의 행위를 볼 수 있습니다.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아들들을 데리고 왔습니다.(막1:19) 우리는 이들의 어머니를 예수님께 꾸중 듣는 여인, 치맛바람을 일으킨 여인으로 말합니다. 명예욕에 사로잡힌 여인쯤으로 이해합니다. 두 아들을 주님의 나라, 우편과 좌편에 앉게 해달라는 요청 때문에 부정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수난의 장소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수난 당할 것이라는 세 번째 수난예고가 있었기 때문에, 상황도 살피지 못하는, 분수와 지각없는 여인으로 비쳐지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간청을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라는 마로 묵살하신듯 합니다. 우리도 이 무명의 여인을 치맛바람을 일으키는 여인으로 이해해야 할까요? 마가복음 10:35-45을 보면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간청한 사람은 세배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아니라 야고보와 요한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 말하는 제자들의 모습은 부정적이고 부족하고 무지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공생애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수난을 만류하는 베드로,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했는데도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 오히려 그들은 가버나움으로 가는 길에서 “누가 더 높은가?”로 다투기까지 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꾸중들은 자들은 수제자를 자청했던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중심으로 한 예수님이 제자들이었지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는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너희가 무엇을 구하는지 모르고 있다.” 이때 ‘너희’는 복수로 기록되어 있는 것과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라고 한 부분도 그렇습니다. 이 말을 들은 10명의 제자들이 두 형제(야고보와 요한)를 보고 분개한데서도 나타납니다.
2.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는 실제인물입니다. 막1:19-20은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막15:4에서는 이 여인을 살로메라 하고 요19:25에 나오는 예수님의 이모로 추정하는 여자이기도 합니다. 이 여인의 이름이 마태복음에서는 끝내 밝혀지지 않고 무명여인으로 남기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로 불립니다. 세상에는 이른바 실체가 밝혀지지 않는 밝힐 수 없는 일들이 많습니다.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로 불리던 여인은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사역하시던 처음부터 함께 했던 여인들 중의 한사람이었습니다.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처럼 고향과 남편과 집을 뒤로하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던 여인입니다. 자식의 명예를 위해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요청한 여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따라간 자식들과 동행하는 어머니로 봐야합니다. 자녀의 행복을 위해 끈질기게 예수님께 간청했던 여인의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귀신들린 딸을 둔 가나안 여인의 심정과도 같습니다. 세상의 어떤 어미가 자식의 인생을 축복하지 않고 무관심하겠습니까? 말은 안 해도 도울 수 없어도 온 마음이 자식에게 가있는 법입니다. 자식들이 선택하고 결정한 새로운 인생길을 함께 떠난 여인, 그것이 어머니로서 가져야 하는 마땅한 사랑입니다. 이 어머니에게서 자녀의 문제를 소홀히 하지 않는 어머니상을 봅니다. “주님의 잔을 저희가 마시겠습니다.”라고 고백한 것을 지키고 해낼 수 있도록 격려하는 어머니의 깊은 사랑에 감동해야합니다. 딸의 병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과 제자들을 괴롭게 하며 간청하는 가나안여인의 행위는 꾸중의 대상이 아니라 칭찬과 존경의 대상입니다.
3. 자녀들의 삶 중에서 가장 관심이 가는 것이 무엇입니까? 한국의 어머니들은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가고 돈 많이 버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것을 위해 어머니들은 온갖 희생을 감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치맛바람을 지나 치마태풍까지 일으키니 이것이 교육인가를 의심하게 합니다. 심령이 파괴되고 망가진 자녀를 그대로 방치해 두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믿음생활을 하지 못하는 자녀를 꾸중하고 책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가르치고 권면하고 끌어안고 축복기도 하고 감사하는 법을 가르치고 세상을 이길 수 있도록 영적능력을 길러주어야 합니다. 그런 자녀가 야고보와 요한처럼 “저희가 주님의 이 잔을 마시겠습니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주님의 잔을 마실 수 있는 자녀들은 세상을 빛내고 세상에 희망을 줍니다.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는 그런 자녀가 되도록 하고 있습니다. 자식이 선택하고 결정한 일에 대해 함께 기도하고 길을 가는 어머니상이 중요합니다.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는 예수님의 십자가수난에 끝까지 동행했던 여인입니다. 아들들도 따라가지 못한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동행했습니다. 신분 때문에 예수님이 좋은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환경이 좋아서도 아닙니다. 예수님과의 관계 때문에 구속의 은총에 감격하면, 주님이 함께 해주심을 잊을 수 없는 은혜라 생각되면 십자가길 까지 가는 것입니다.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존경받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따라갔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존경받을만한 것이었으며 길이길이 남는 행동이었습니다.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 같은 신앙의 체험과 예수님 따름의 열정들이 많을 때 “주님, 저희가 주님의 잔을 마시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우리 믿음의 자녀들이 많아질 것입니다.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 같은 십자가를 향한 걸음은 가정을 새롭게, 자녀를 복되게, 교회를 부흥하게 합니다. 그리고 비겁과 침묵을 깨뜨리고 헛된 욕심에 사로잡혀 있는 이기적인 사람들을 일깨웁니다.
패러독스(paradox)의 진리
마 20:20-28 / 노경모목사
예나 지금이나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변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자녀들이 잘 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분이 어머니인 것 같아요. 그런데 이런 것이 지나치거나 상식을 넘어선다면 도리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게 됩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학생인 자녀들을 둔 어머니들의 치맛바람이 쎄다고들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치맛바람이라는 것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에서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이 두 제자의 어머니가 두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 앞에 나와서 절하고, 오늘 날로 말하면 깎듯이 인사를 드리고 부탁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나라에서 권력을 잡거든 자기 두 아들을 요직에 등용시켜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로마로부터 압제를 받고 있는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정치적인 구세주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로마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면 예수님은 틀림없이 이스라엘 나라의 왕의 될 텐데 우리 아들을 요직에 발탁해달라고 것이지요.
오늘 분문 20절, 21절의 내용이 바로 그 내용입니다.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그 요청을 받으신 예수님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너희들이 나를 잘못 알고 있구나, 그래서 너희들이 구하는 것도 잘못 구하는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정치적인 해방자, 정치적인 구세주로 잘못 알고 있으니 아들을 위해서 예수님께 구하는 내용도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지십니다. 22절에,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주님이 마시려고 하는 잔은 정치적인 메시야 되기 위한 축배의 잔이 아닙니다. 죄인을 위하여 대신 십자가를 지시는 고난의 잔입니다. 죽음의 잔입니다. 이 잔을 너희가 지금 마실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이것은 아들들의 출세를 위해 기대감을 갖고 찾아온 두 제자의 어머니의 마음에 찬 물을 끼얹은 꼴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어머니가 간청을 하면 우리는 틀림없이 이제 중요한 요직을 맡게 될거라고 기대를 하고 있던 두 제자의 마음에도 역시 충격을 주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주님은 우리에게 놀라운 패러독스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패러독스는 역설입니다. 역설(逆說)이라는 것은 역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는 것이지요. 마치 진리와는 정반대로 모순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속에는 아주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패러독스의 종교입니다. 역설의 진리가 복음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종교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통해서 세 가지의 패러독스의 진리를 깨닫고 마음에 새기고 순종하며 따라가기를 바랍니다.
첫 번째의 패러독스는 ‘죽어야 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마사려는 잔을 마시겠느냐?’ 물으신 것은 ‘나처럼 죽을 수 있겠느냐?’는 물음인 것입니다.
너희가 잘 되기를 원하느냐 출세하기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너희는 지금 고난을 받아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지금 죽음이 길을 걸어가라는 것입니다. 고난 속에 들어가는 것은 출세와는 반대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죽음의 길로 들어서는 것은 성공과는 정 반대의 방향으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잘되고 출세하고 성공하기 위해서는 돈도 써야 하고, 뒤를 든든하고 봐주고 밀어주는 권력자들이 있어야 하고, 또 출세하고 성공하면 권세를 부리고 으시대면서 잘 난체 하는 것이 세상의 모습인데 하나님을 믿는 너희들의 모습은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25-27절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예수님은 우리를 영원한 죽음에서 살리기 위해서 친히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죽으셨기 때문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죽음이 없었다면 어떻게 다시 다시는 일, 부활이 있었겠습니까?
오늘 날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으로 바로 살기 위해서는 죽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자아가 죽어야 합니다. 우리의 옛사람이 죽어야 합니다. 바울도 고린도전서 15:31에 자기 자신은 날마다 죽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미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의 죄악된 옛사람, 정욕과 탐욕의 노예가 되었던 우리의 옛사람은 이미 죽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제자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중요한 일을 맡으려면 이들은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날 우리가 주님 안에서 성공하고 싶습니까? 주안에서 출세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먼저 우리의 못된 자아가 죽어야 합니다. 고집이 죽어야 합니다. 교만과 불순종을 죽어야 합니다.
두 번째 패러독스는 ‘얻고자 하려거든 버려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버리는 것을 보여줍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주님의 자신의 생명을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살을 버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버렸습니다. 심지어서는 입고 계신 옷까지 버린 것입니다. 로마의 병정들이 주님의 입고 있는 옷까지 제비뽑아 취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의 권좌를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 아들의 영광을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 버리신 것입니다. 주님이 버리시니 부활의 영광을 얻게 되셨고, 우리는 영생을 선물로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얻고자 하는 경향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겉옷을 달라고 하는 자에게 속옷까지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진정으로 얻고자 하는 자는 버려야 한다는 말씀은 진리입니다.
영생을 억기 위해서 어떤 선한 일을 해야 되냐고 묻는 부자 청년, 자기는 계명을 다 지켰다고 자신있게 말하는 부자 청년에게 예수님은 ‘너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줄 때 하늘의 보화를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6:38에서 주님은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전도서 11:1도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100세 때 얻은 독자 이삭을 하나님을 위해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이삭을 되돌려 주셨을 뿐만 아니라 놀라운 축복까지 주셨습니다.
영성의 기초는 버리는 것입니다. 버릴 때 인간적인 것이 아닌 하늘의 것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얻고자 한다면 주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버립시다. 시간도 버립시다. 물질도 버립시다. 우리의 정성도 버립시다. 버림으로 얻게 되는 놀라운 은총을 받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 패러독스는 ‘크고자 하거든 섬기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26-27절에 말씀하십니다.
크게 되는 것과 섬기는 것은 반대의 개념이 됩니다. 으뜸과 종은 반대의 개념입니다. 밑에 있는 사람이 윗사람을 섬깁니다. 종이 상전을 섬기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그 분야에서 잘한다고 생각하면 그 분야에서 돋보이기를 원합니다. 그 분야에 대해서는 남의 밑에서 도와주는 일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없으면 으뜸이 될 수가 없는데 말입니다.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가 보디발의 집에서 종으로 섬겨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감옥에 가서 간수장을 섬겨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억울한 일이지요. 그러나 그는 섬겼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종이 되고 섬기는 과정 속에 넣으신 것입니다. 섬겨야 높아질 수 있습니다. 종이 되어야 으뜸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 과정을 거친 요셉을 하나님이 애굽의 국무청리로 높이셨습니다.
주님도 섬기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죄인들을 섬기셨습니다. 27절에 주님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주님이 섬기셨는데 주님이 종이 되셨는데 우리도 섬겨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도 종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다. 이것을 실천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영적인 성숙도가 결정됩니다.
그렇다면 이 기독교의 패러독스의 진리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죽어야 산다’, ‘버려야 얻는다’, ‘크고자하거든 섬겨라’ 어떻게 이 논리를 풀 수가 있겠습니까? 인간적인 생각과 논리로는 풀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논리로 풀어야 합니다. 성경의 논리로 풀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하세요?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적으로 죽으면 그냥 죽게 되지면 죽는 자를 하나님께서 살리십니다. 세상적으로는 얻으려고 하는 자는 얻기 위해서 갖은 방법과 수단과 노력을 강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버리는 자에게 하나님께 많은 것을 얻게 하십니다. 남을 섬기고 남의 종이 되는 자를 하나님이 높이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에 기독교의 패러독스는 세상의 진리가 감히 견줄 수 없는 진리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패러독스의 진리를 다시 마음에 잘 새기고 그대로 실천해 봅시다.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놀라운 것들을 취하고 소유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은총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큰 자가 되려면
마 20:20-28 / 이용효목사
오늘은 우리교회 설립25주년이 되는 주일입니다. 독일의 철학자인 <에른스트 블로호>는 교회를 <세상에 희망을 주는 유일한 공동체> 라고 불렀습니다. 헨리나우웬은 교회는 “노예에서 해방되어 소망으로, 암흑에서 해방되어 빛으로 죽음에서 해방되어 생명으로 부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라고 설명했습니다. 아픔대신에 위로와 소망을, 상처대신에 나음을 입은 곳, 비난과 미움대신에 용서와 화해가 있는 곳, 그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남녀노소 구별 없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스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하늘 문이 열리고 은혜의 물줄기가 터지는 역사가 일어나는 곳이 교회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 가운데서 서머나교회와 빌라델비아교회를 제외한 대부분의 교회가 부족한 점과 허물들이 있었지만 주님은 일곱 교회 사자들을 붙잡고 교회 사이를 왔다 갔다 하시며 늘 교회에 임재 하신다.(계1:20)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만이 주님의 관심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허물이 많은 교회라 할지라도 주님은 교회에 대한 비전을 버리시지 아니하시고 기대의 끈을 놓지 아니하시고 희망을 갖고 권면하신 것이었습니다. 전 예일대총장인 디모디 드와이트박사는 교회를 위해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를 사랑합니다. 당신의 눈동자처럼 소중하고/ 당신의 손바닥에 기록해 놓은 교회/ 바로 그 교회를 위해 눈물이 흐르오며/ 교회를 위한 근심과 고생은 세상에서 나의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아끼지 아니할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를 섬기는 우리들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요? 항상 무익한 종입니다. 라는 자세로 겸손히 섬겨야합니다. 폴란드 노조지도자 출신으로 대통령을 지낸 바웬사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그가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공장의 전기공으로 취직하여 험한 일을 하였습니다. 월급은 우리나라 돈으로 20만원 정도였습니다. 그는 대통령을 지낸 사람으로 외국 기업의 고문이나 강연을 맡아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많았고, 집필활동이나 여행 등으로 남은 인생을 편하게 지낼 수 있었지만 그의 건강과 생명이 있는 동안 사회에 봉사하며 살겠다고 하였습니다. 고대 세상의 정복자들이나 왕들이 모이면 세 가지를 가지고 서열을 정했다고 합니다. 1)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느냐? 2)얼마나 많은 군인과 노예들을 거느리고 있느냐? 3)얼마나 많은 금과 은을 소유하고 있느냐? 그러나 우리 예수님의 나라는 이와는 정 반대였습니다. 1)얼마나 섬겼느냐? 2)얼마나 사랑했느냐? 3)얼마나 희생하였느냐? 이것이 우리 왕이시고 주님이신 그 분께서 이 땅에서 보여주신 삶의 모범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며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12명의 제자들은 주님을 따르는 길이 힘들고 어렵지만 훗날 주님의 나라가 임할 때 그 보상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와 요한이 어머니 살로메를 시켜 예수님께 청탁을 하였습니다. 주님의 나라에서 자기 두 아들이 하나는 좌편 하나는 우편 즉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그 자리가 험악해 졌습니다. 그 때 주님은 본문의 말씀으로 주님의 나라에서의 평가는 세상 기준과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설명하여 주셨습니다.
1. 주님의 나라는 자신을 낮추어 섬기는 자가 큰 자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도리어 섬기려 하고”(28절) <섬긴다>의 원어는 <디아 코노스> 로서 일꾼, 협력자, 시종 드는 자, 봉사자, 서비스하는 자 라는 뜻이고, 풀어보면 <먼지를 일으키며 여기 저기 바쁘게 다니며 봉사하는 자>를 뜻합니다. 과연 우리 주님은 어릴 적 부모를 도와 목수 일을 하시며 부모를 섬겼고, 공생애 3년 동안은 팔레스타인 땅 전역을 부지런히 다니시며 복음전하시고, 가르치시고, 병든 자를 고치셨습니다. 주님은 식사할 겨를도 없이 봉사하셨고, 행로에 지쳐 우물가에 앉으셨습니다. 새벽 미명에 일어나 기도하시고 하루 일과를 시작하셨고 밤에도 습관을 좇아 산에 들어가 기도하셨으며 낮에는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들을 찾으셔서 그들을 섬기셨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의 전 생애는 철저히 섬기신 삶이셨습니다. 우리들도 주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았다면 주님처럼 이웃을 섬겨야 할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대학교 총장 하시던 분이 은퇴하여 그 학교 수위나 혹은 경비원으로 일하는 예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미국의 카터 대통령은 은퇴 후 헤비타트 운동에 참여하여 손에 망치를 들고 구슬땀을 흘리며 집 없는 사람들의 집을 지어주는 일을 20십년 이상 계속하고 있습니다. 용산교회 김일환 장로님은 육군 중장 출신으로 상공부 장관과 내무부 장관, 교통부 장관을 두루 지낸 분으로 유명합니다. 그분은 장로로서 수 십 년 동안 교회당에 제일 먼저 나와 성도들에게 일일이 주보를 나누어 주며 한 분 한 분 사랑으로 맞이하여 그 분의 삶을 지켜 본 많은 성도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교회 분위기를 섬김의 분위기로 바꾸신 분으로도 유명합니다. 아브라함은 한 부족의 족장임에도 불구하고 아내 사라의 매장지를 구하기 위해 가나안 원주민들에게 허리를 굽혀 절을 하며 겸손히 구했습니다. 하늘나라에서 큰 자는 자신을 낮추는 자입니다.
2. 주님의 나라는 종이 되어 섬기는 자가 큰 자입니다. 27절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종은 희랍어로 <둘로스>로서 자신의 재산이나 소유가 없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노예를 가리키며, 종은 오직 주인에 대한 의무와 복종만 있을 뿐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실 때 마구간에 오셨고, 방 한 칸도 없이 남의 방을 빌려 사용하셨고, 돌아가신 후 무덤마저 남의 무덤을 빌려 사용하셨습니다. 주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깃 들 곳이 있건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 백성들에게 성막을 만들라고 하신 후 자신의 방인 지성소를 가로 세로 4.5미터 즉 6.6평 정도로 만들어 그곳에 임재 하셨고, 나중 가나안에 들어간 후 성전을 건축할 때 지성소를 가로 세로 20규빗 즉 22평정도 되는 방으로 만들어 그곳에 임재 하셨습니다. 참으로 겸손하신 왕이십니다. 성경 빌립보서2:5~8절에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 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크라이슬러 자동차 회사 회장 <아이아 코카>의 자서전에 보면 그가 대학 졸업 후 포드자동차 회사에 말단 사원으로 들어가 32년간 한 직장에서 종처럼 일했다고 했습니다. 처우가 나빴어도 불황으로 힘들 때도 다른 사람들 떠나 갈 때도 그는 한 직장에서 꾸준히 흔들리지 않고 종처럼 섬겼더니 결국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그를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일본의 유명한 정치가 <가다이카>씨는 정치범으로 감옥에 들어갔을 때 먼저 들어와 있던 죄수들이 신고식을 시키고 그에게 화장실 청소를 명할 때 처음에는 내키지 않았지만 요한복음13장을 일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도 제자들의 발을 씻겼는데 내가 못할 것이 뭐 있는가. 죄수들의 발도 닦아주자, 밑바닥 일을 하자 그렇게 종처럼 섬겼습니다. 그는 나중에 출옥 후 일본 제 12대 중의원 의장이 되었습니다. 우리로 하면 국회의장에 자리에 오른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종이 되어 섬겼습니다. 고오치 교회의 장로이기도 한 그는 매 주일 예배드리러 오는 교인들의 신발을 받아 신발장에 넣어주는 일을 하고, 예배를 필하고 나갈 때 신발을 찾아 주는 일을 맡아 하였습니다. 한 번은 군 고급 장교가 그의 신발을 찾다가 화를 내며 “내 신 어딨어” 라고 반말로 명령하자 <가다이카>는 “예 높은 분의 신은 제가 따로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늦어 죄송합니다.”라고 사과하며 꺼내 주었습니다. 나중에 그 장교가 그 분이 국회의장이란 사실을 알고는 충격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교회 장로님들은 오랫동안 화장실 청소를 도맡아 하셨는데 이제는 안수집사님들이 자신들이 하겠다고 하여 일감을 뺏겨버리고 말았습니다. 종이 되어 섬기는 것은 이 땅에서도 존경받고 하늘나라에서 큰 자가 되는 지름길입니다. 3. 하늘나라에서는 남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살 때 큰 자가 됩니다. 우리 주님은 종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정도를 넘어 이제는 대속물로서 자신을 드려 희생하셨습니다. <대속>이란 말의 원어는 <뤼트론>인데 원래의 의미는 <빚진 사람이 노예가 되었을 때 그를 석방시키기 위하여 지불하는 돈이나 댓가, 혹은 전쟁 포로를 석방시키기 위하여 지불하는 몸 값>을 의미합니다. 구약시대 용어로는 짐승의 희생을 뜻하고 신약에서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몸을 드려 살을 찌고 피를 다 쏟아 생명을 바쳐 희생하시므로 우리를 죄와 저주와 지옥의 영원한 멸망에서 구속하셨습니다. 1941년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포로 한 명이 탈출했습니다. 그 사실을 보고 받은 수용소 소장 프리쉬는 그날 저녁 포로들을 전부 한 자리에 집합시켜 놓고서 명령을 내렸습니다. “도망자를 체포하지 못했다. 그 자 대신에 너희들 가운데 10명이 벙커에 수용되어 굶어 죽게 될 것이다.” 전혀 음식을 먹지 못하고 죽게 된 포로들의 얼굴에는 절망이 스쳤습니다. 소장이 한 걸음 다가서서 맨 앞줄에 서 있는 포로들의 얼굴을 차갑게 노려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손을 들어 대상자를 가려내기 시작했습니다. "너!" 얼굴이 완전히 백짓장처럼 창백해진 사내가 앞으로 나섰습니다. “너...너...그리고 너...또 너....” 그렇게 해서 10명이 모두 가려졌습니다. 그들은 이제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내가 울부짖었습니다. “오, 불쌍한 내 아내와 자식들...!” 그 순간 갑자기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포로의 대열 가운데 한 사람이 이탈해서 소장 앞으로 나섰습니다. 소장이 재빨리 권총을 뽑아 들었습니다. “멈춰! 이 폴란드 놈이 왜 이러는 거야?” 포로는 침착하게 대답했습니다. “저 사람 대신 내가 죽겠소.” “너는 누구인가?” “나는 사제요.” 잠시 동안 둘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습니다. 소장은 마음을 굳혔다는 듯이 퉁명스레 말했습니다. “좋다. 저 자들과 합류하라.” 이렇게 해서 사제는 죽음의 행렬에 합류하여 4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람들은 나중에서야 그가 폴란드 출신의 프란시스코회 소속 <막시밀리언 콜베> 신부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우슈비츠의 한 생존자는 30년이 흐른 뒤에 <막시밀리언 콜베>의 희생이 수용소에 갇혀 있던 나머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수용소 전체가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다. 우리는 영적인 암흑 속에서 우리 가운데 누군가가 사랑의 기준을 높게 세우려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른 이들처럼 고문을 당하고, 이름과 사회적 지위를 잃어버린, 알지 못하는 그 누군가가 자신과 전혀 관계가 없는 이를 위해서 고통스런 죽음을 자청한 것이었다. 때문에 우리는 인간성이 땅에 떨어지고 폭압자들에게 무릎을 꿇고, 또 절망이 승리한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눈물을 흘리며 소리쳤다. 수천 명의 포로들은 세계가 계속해서 존재하리라는 것과 고문을 일삼는 자들이 그것을 파괴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요한복음15:13절에 주님은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절)고 하셨고, 자신이 친히 한 알의 밀알처럼 죽어 희생 하므로 많은 죄인들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셨습니다. 사랑의교회 이수정 집사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들이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이수정집사는 어릴 적 부모들이 그를 버려 고아원에서 자랐습니다. 그녀는 장애인과 결혼하였지만 시댁의 구박을 견디다 못해 죽으려고 양잿물을 마셨습니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식도가 타버려 평생 고통을 안고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녀는 식당의 식모로 취직하여 일하던 중 라디오 방송설교를 듣고 예수님을 알게 되어 근처에 있던 개척교회인 사랑의교회에 출석하여 제자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매 주일 떡을 만들어 교인들을 대접하였고 주일 예배 후에는 근처 강남 성모병원을 찾아 환자들을 위로하며 기도하여 주고 그들을 돌보는 일을 하다 옥목사님의 품에 안겨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랑의교회 옥목사님은 교인들에게 우리는 이수정집사님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섬김의 삶, 종의 삶, 희생의 삶은 인간의 힘으로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이러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임하시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가운데 부어주시면 능히 감당할 수 있을 줄 압니다.
한 어머니의 소원
마 20:20-28 / 이종윤목사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 번에 걸쳐 십자가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때 베드로는 항변하며 ‘그리 마옵소서’라고 했고,(마16:21) 제자들은 매우 근심했습니다.(마17:22-23)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했던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자신의 두 아들을 예수님 좌, 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마20:20-28) 어린이 주일에 자녀를 위한 우리 부모님들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I. 한 어머니의 소원
야고보와 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예수님을 가장 가깝게 모시던 이들이었지만 변화산 경험(마17장:1-13)을 한 후 오로지 영광 받으실 주님 생각으로만 가득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세베대의 아내로 예수님의 이모 - 막1:19, 마27:56을 막15:40, 16:1과 비교)는 그때를 준비하려고 예수님을 찾아와 간청합니다. 사실, 어머니가 자녀를 위한 꿈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본능적 욕구 - 생존욕구, 사회적 본능, 정치적 본능 - 를 정죄 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금욕주의나 염세주의가 아닙니다. 주님은 으뜸이 되고 싶으면 종이 되라고 하셨지 되지 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자기 자식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살로메의 문제는 예수님의 제자로는 만족할 수 없고 수제자가 되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II. 예수님의 대답
1. “네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22)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비장한 걸음을 걷고 있는 자신 앞에서 자리다툼이나 하는 여인에게 ‘너는 네가 구하는 바를 알고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우리는 무엇이 되느냐 보다 ‘왜 그 같이 되기를 원하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만약 이 여인이 주님을 중심으로 생각했다면 아들이 주님을 위해 쓰임 받을 것을 생각했을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가치관입니다.
2.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22)
주님의 잔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고통 없이 부활의 영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잔은 자기를 부인하는 잔입니다. 그때 그들은 ‘할 수 있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자신 만만한 대답이었으나 그것의 헛됨이 곧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되셨을 때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칩니다.(마26:56) 예수님은 책망 대신 예언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23절) 먼 훗날 야고보는 헤롯으로부터 순교를 당했습니다. (행12:12) 요한은 그리스도 때문에 밧모섬에 유배되었습니다. (계1:9) 그들은 주님의 잔을 받은 것입니다.
3. 그러나 그 영광은 예비된 자가 받을 것이다.(23)
이 영광은 하나님이 지명하는 자가 받게 될 것입니다. 내 노력, 수고, 인내, 희생이 있어도 하나님의 복이 임해야 합니다. 이 어머니의 요청은 의미 없는 간구입니다. 당신은 자녀를 위하여 헛된 기도를 드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III. 예수님의 경고
그렇다면 야고보와 요한을 향한 열 제자의 질투감정은 자연적이고 당연한 것입니까? 그것은 두 형제가 보였던 이기적인 욕망과 똑같은 것이므로 주님은 그들을 불러다가 따끔한 경고를 하십니다.
1. 그리스도 안에서는 세상적 서열이 용납될 수 없습니다.
세상집권자는 백성을 다스리고 부립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다 형제요 한 가족입니다. 누가 스스로 주인 노릇을 하려면 그는 그리스도의 왕권을 침해한 자가 됩니다.
2. 그리스도인의 위대함은 섬김의 위대성에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26절)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 섬기러 오신 그리스도를 닮는 자가 높임을 받게 됩니다. 세상이 말하는 으뜸이 되려 하지 말고, 섬기는 일에 으뜸에 되어 남을 위해 대속의 제물이 되신 예수님처럼 희생하는 수고를 하라는 것입니다.
결론을 말씀 드립니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구해야합니까?
1. 자녀를 위해 큰 것, 섬김 받는 자리, 으뜸의 자리를 구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을 구하십시오. 그러나 희생하고 섬기는 일에 으뜸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2. 주님의 뜻을 중심으로 구하십시오.
내 계획, 자녀보다 하나님 뜻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먼저 생각하십시오.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 세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은 모두 자신의 아이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되기를 기도했습니다. 주님과 주님의 교회를 위하여 내 자녀가 쓰임 받도록 기도합시다.
3. 부모 된 자도 겸손해야 합니다. 천국은 어린아이같이 낮은 자의 것입니다.
자녀만 겸손하고 희생하며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게 하지 말고 자신도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섬기는 일에 으뜸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섬김의 도리
마 20:20-28 / 손상률목사
한번은 세베대의 아내가 자기 아들인 요한과 야고보를 예수님의 좌, 우편에 앉게 하여 달라는 부탁을 하였습니다. 그 여인은 언젠가는 예수님께서 세상의 권세를 잡으실 날이 있을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의 집권자들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권세를 부리는 것으로 자랑스럽게 여기지만 예수님의 제자된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고 스스로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섬기는 자의 도리는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그 대상이나 방법이나 목적이 완전히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보다 높은 사람 곧 상전이나 권세자를 섬기지만 예수님께서는 낮은 사람, 또는 죄인을 섬김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그 방법도 사람들은 법이나 형식에 의하여 섬기지만 예수님은 사랑과 희생으로 섬기십니다.
그뿐 아니라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섬겨주므로 자기에게 돌아오는 유익을 목적으로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섬김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 생명과 구원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섬김의 도리를 실천하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종으로 자처하여 섬기기를 잘하는 사람을 큰 자요 으뜸 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은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여 성도가 섬겨야 될 대상과 방법,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I.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만이 유일한 경배의 대상임을 일러줍니다(출 20:3).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할 때 이는 다른 어떤 대상과도 비교될 수 없는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경배하는 것을 뜻합니다. 신명기 10:12-13에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고 하였습니다.
(1) 유일하신 주권자입니다.
이사야 43:1에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 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 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43:21에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 중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자기 소유로 삼았다는 것과 또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을 찬송하며 경배하게 하는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고 하였습니다(롬 11:36).
(2) 구원하신 분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을 회고 하면서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고 하였습니다(신 33:29).
하나님의 구원은 그의 본성인 사랑이 작용하여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은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할 때 바로 왕의 속박을 끊고 구원하여 내신 것으로 나타났습니다(출 20:1-2). 또 한 가지는 유대 왕국의 멸망과 함께 바벨론 포로생활을 할 때 하나님의 구원이 작동되었습니다. 시편 126:1에 보면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고 하며 그 때의 감격을 노래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구약시대의 구원 역사는 사실상 죄와 죽음에 얽매인 인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롬 8:1-2).
(3) 축복하시는 분입니다.
신명기 11:26에는 하나님께서 복과 저주를 그 백성에게 두었다고 하였습니다. 곧 하나님만이 모든 복의 근원자가 되심을 뜻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과 법도에 따라 하나님을 잘 섬기게 되면 약속하신 모든 복을 자자손손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신명기 1:11에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현재보다 천 배나 많게 하시며 너희에게 허락하신 것과 같이 너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시편 128:1-2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Ⅱ. 부모를 공경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0:12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하였습니다.
(1) 부모는 공경의 대상입니다.
이 말씀은 “여호와를 경외하라”는 말(시 34:11)과 구별이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라”고 하는 말은 종교적인 용어로써 경배의 대상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섬기는 것을 뜻합니다(전 12:13). 그러나 여기 부모를 공경(恭敬)한다고 할 때 이는 신적인 대상이 아니라 인간적인 요소에서 최상의 존경과 섬김을 뜻하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공경이라는 말(카베드 : ך󰔪󰗏)은 “무겁다”는 뜻이 있습니다. 히브리말에 사람의 몸 안에 있는 간장(肝臟)을 카베드라고 하는데 이렇게 보면 인체의 기관 중 간장이 소중한 것처럼 사람에게 있어서 부모의 위치나 그 존재가 매우 귀하고 소중히 여김을 받아야 된다는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자식에게 있어서 부모는 자기를 세상에 있게 해준 근본이기 때문에 소중합니다. 잠언 23:25에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2) 약속 있는 첫 계명입니다.
에베소서 6:1-2에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십계명 중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다섯 번째 계명입니다. 그 중에도 1계명에서 4계명까지는 하나님께 관계된 계명이고, 5계명에서 10계명까지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지켜져야 될 대인윤리(對人倫理)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인간윤리 중 그 첫 번째 되는 비중을 가진 것이기 때문에 첫 계명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반포하신 계명은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되는 선택사양이 아닙니다. 반드시 지켜야 되고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명령이요 법칙입니다. 에베소서 6:1에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고 하신 말씀도 따지고 보면 “주 안에서”라고 했으니 이는 하나님의 법도 안에서라는 의미이며 또 “이것이 옳으니라”고 하여 마땅한 도리임을 천명한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자기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을 하나님께 대한 신앙 행위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세의 현상 중 부모를 거역하는 행위를 지적하였고(딤후 3:2),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섬긴다는 핑계로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은 자를 준엄하게 책망하셨습니다(막 7:11-13).
(3) 효도 하는 자에게 축복이 있습니다.
모세가 준 율법에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하였습니다(출 20:12). 이 말씀을 근거하여 사도 바울은 효도를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 하고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하였습니다(엡 6:3).
전도서 12:13에는 “일의 결국은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그 명령을 순종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으며 또한 그것이 수 천대까지 이르도록 보장하였습니다(신 28:1-6).
사도 요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진리 안에 행하는 사람에게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하였습니다(요3서 1:2).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부모 공경을 잘 하는 사람에게 약속된 축복 중 잘 된다는 것은 마치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모든 행사가 형통케 되는 것을 뜻합니다(시 1:1-3).
그리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한 것은 나이 많도록 오래 산다는 것 도 되지만 그보다도 자자손손 대를 이어가며 하나님 앞에서 복된 삶을 산다는 뜻이 있는 말입니다(렘 35:19).
Ⅲ. 어른을 존경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공경하여야 될 대상은 부모님 외에도 스승이나 웃어른들이 포함됩니다. 옛날 사람들은 군사부(君師父)라고 하여 나라의 임금과 자기를 가르친 스승과 부모를 동열에 올려놓고 공경하게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가정이나 교회나 사회에서 섬김의 본분을 다하여야 합니다.
어느 때나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그가 속한 사회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자기의 위치를 지켜야만 됩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산상보훈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하고 섬김을 통하여 나타내어야 할 사명을 강조하였습니다.
(1) 그리스도인의 소양입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성인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부모나 가족에게 그리고 선배나 스승으로부터 도움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어떤 경우라도 자기가 존경하고 감사해야 될 대상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요즘처럼 각박한 시대를 살다보면 많은 사람이 자기의 기준에서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선배도 스승도 무시해 버리고 노인들을 홀대하는 잘못된 풍조가 만연해 진 것입니다. 이런 시대일수록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소양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로마서 12:16에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고 하였습니다. 빌립보서 2:3에는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하였습니다.
(2) 어른을 공경할 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의 부모나 친척이 아니라도 나이 많은 사람을 존경하며 섬겨야 됩니다. 레위기 19:32에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하였습니다. 디모데전서 5:1에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하라”고 하였습니다. 5:2에는 “늙은 여자를 어미에게 하듯 하며 젊은 여자를 일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하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나이 많은 사람을 섬기고 노인을 공경하는 것은 그들의 생애와 이루어 놓은 일들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비록 남겨 놓은 업적이 자랑스럽지 못하다 하더라도 그 시대와 그 환경에서 어렵사리 세상을 극복하며 자기소임을 다했다는 점에서 평가해 주어야만 합니다.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지난날의 역사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이 정도라도 기반이 세워졌고 또 더 나은 내일을 희망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만 됩니다. 과거를 부정하는 사람에게 밝은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것이며, 선배나 어른을 존경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누구도 존경해 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섬김의 도리를 실천할 때만이 사회적인 통합과 국가적인 발전도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뛰어난 지도력을 행사하는 것 같아도 도덕과 윤리를 무너뜨리고는 건전한 사회를 이룰 수 없는 법입니다. 역사적으로 인류 공동체에 있어서 하나님이 정한 순리와 질서가 지켜질 때 비로소 평화와 번영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섬기는 마음
마 20:20-28 / 박상훈목사
비가 오고 나면 날씨가 추워집니다. 날씨가 추워지면 이따금씩 생각나는 인물이 있습니다. 고려말 공민왕 때의 사람이었던 문익점입니다. 그 당시에는 겨울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추위를 견디지 못해 얼어죽었습니다. 그래서 겨울은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무서운 죽음의 계절이라고 여겨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러한 때 문익점은 사신으로 중국의 원나라에 파견이 되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놀라운 사실을 한 가지 발견했습니다. 날씨는 중국이 더 추운데 이상하게도 얼어죽는 사람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를 알아보니까 우리 나라 사람들은 베옷을 입고 있는데, 그들은 목화를 재배해서 그것으로 따뜻한 솜옷을 만들어 입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문익점은 나라를 위해서, 백성들을 섬기기 위한 마음으로 목숨을 건 결심을 했습니다.
그 당시 중국측 국경 경비대의 검문은 아주 살벌했습니다. 원나라에서도 목화를 재배한지 얼마 안되었기 때문에, 함부로 목화씨를 가지고 나가다가는 죽음을 면키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는 궁리 끝에 자기가 쓰는 붓뚜껑 속에 목화씨앗 세 알을 몰래 감추었습니다. 그리고는 가까스로 국경을 넘었습니다. 그는 정성을 다해 씨앗을 심고 가꾸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전국적으로 목화가 재배되었습니다. 그리고 난 뒤 문익점은 자기의 장인인 정천익과 함께 물레 만드는 법과 베 짜는 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 결과 우리 나라 사람들도 겨울을 따뜻하게 날 수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나라의 공직자들에게 섬기는 마음만 있으면, 그들이 자기의 직권을 남용해서 자기 주머니만 채우는 일은 사라질 것입니다.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회사야 부도가 나든지 말든지 그저 자신의 권리만 찾으면 된다는 식으로 격렬하게 시위하고 파업하는 일들도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교회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도 섬김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라, 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주님의 몸된 교회는 절로 평안한 가운데 든든히 서게 되고 또 절로 부흥하고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어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해서 우리 속에 있는 섬김을 받고자 하는 마음을 지워주시고, 그 대신 섬기는 마음으로 가득 채워주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향해서 올라가게 되셨습니다. 두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은 자기들의 어머니를 데리고 예수님에게로 왔습니다. 그리고는 엉뚱한 부탁을 했습니다.
"주의 나라에서 둘 가운데 하나는 주님의 우편에 앉게 하시고, 하나는 주님의 좌편에 앉게 해 주옵소서."
참으로 답답한 노릇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왜 예수님이 지금 예루살렘을 향해서 올라가고 계십니까? 영광스러운 자리에 오르시기 위해서 올라가시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기 위해서 올라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은 어떠한 자리입니까? 두 강도가 달린 십자가입니다. 그런 것도 모르고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을 요구한 것입니다. 2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예수님은 너무나 답답하신 나머지 그러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교회의 일군을 뽑기 위해서 투표를 합니다. 왜 우리가 집사가 되고, 또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려고 합니까? 물론 딤전3:1에 보면 사도 바울이 이러한 말씀을 했습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교회에서 직분을 받는다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사모해야 합니다. 그러나 왜 우리가 그 직분을 가지고자 하는지, 이유와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그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신다는 사실만 알았지, 왜 예수님이 올라가셔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꾸중을 받았습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왜 장로가 되어야 하고, 내가 왜 권사의 직분을 받고자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른다면, 예수님은 똑같은 말씀으로 우리를 질책하실 것입니다.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섬김을 받기 위해서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섬기는 마음의 중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크게 세 대지로 나누어서 말씀을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세상 사람들이 으뜸이 되기 위해서 쓰는 방식을 살펴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세상적인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본문에는 세상 사람들이 흔히 쓰는 방식들이 세 가지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첫째로, 세상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앉기 위해서 높은 사람 곁에 가까이 가려고 합니다. 예컨대 대통령과 악수하는 장면이나 나란히 서서 찍은 사진 등을 크게 확대해서 벽에 걸어놓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내가 이만큼 유명인사인 줄 알아라." 은연중에 자신을 과시하는 것입니다. 지금 야고보와 요한도 똑같이 세상적인 방식을 썼습니다. 그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20∼2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예수님이 가운데 앉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존귀하신 분입니다. 누구나 다 우러러보는 귀하신 분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좌우편에 야고보와 요한이 앉아 있습니다. 그것을 세상 사람들이 보면서 그들을 얼마나 대단하게 여기겠습니까? 야고보와 요한은 그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자기들의 어머니까지 동원했습니다. 그들의 어머니는 육신으로 따지면 예수님의 이모가 되는 사람입니다. 요즘 말로 비유하자면 친인척을 동원해서 인사청탁을 한 것입니다. "우리 아들 한 표 좀 찍어줘! 우리 딸 한 표 좀 찍어줘야지!" 세상적인 방법을 쓴 것입니다.
둘째로, 세상 사람들은 큰 소리부터 치고 봅니다. "내가 국회의원에 당선이 되기만 하면 그런 식으로 안할 것입니다. 이렇게 할 것입니다. 저렇게 할 것입니다." 하긴 무엇을 합니까? 하지도 못할 공략을 수없이 남발합니다. 야고보와 요한도 그러했습니다. 2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일단은 큰 소리 치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사로잡히셨을 때 야고보와 요한은 어떻게 했습니까?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버려 두고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고난의 잔을 마시지 못했습니다. 자기 힘으로는,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2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예수님은 결국에 가서 야고보와 요한이 고난의 잔을 마실 것을 아셨습니다. 뒤에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오순절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의 충만함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 그들은 달라졌습니다. 야고보는 열 두 제자 가운데 가장 먼저 주를 위해서 순교 당했습니다. 칼로 목베임을 당했습니다. 자기의 힘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힘 주시니까 가능한 것입니다. 야고보가 그렇게나 으뜸이 되는 것을 소원하더니 결국은 예수님이 그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그는 순교하는 일에 으뜸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예수님의 고난의 잔을 받아 마셨습니다. 요한도 주를 위해서 핍박당하고 밧모 섬에 귀양을 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일생을 살면서 고난의 잔을 다 받아 마셨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힘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힘 주셔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이 결국에는 고난의 잔을 마시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23절 하반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참 제자의 길은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절대적으로 순복하는 것이 성도의 바른 모습인 줄 압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하나님이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간에 섬기는 자의 마음으로 나를 낮추면서 섬겨야 될 것입니다.
계속해서 24절 말씀을 보십시다.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왜 열 사람의 제자가 야고보와 요한에 대해서 분히 여겼습니까? 따지고 보면 그들의 마음 속에도 똑같은 심리가 들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도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열 제자가 예수님의 좌우편의 자리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다면 야고보와 요한, 이 두 사람에 대해서 분히 여길 필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들에게도 똑같이 높아지고자 하는 심리가 있었으니까, 야고보와 요한에게서 그만 화가 나고 질투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똑같이 약합니다. 누구에게나 높아지려고 하는 심리가 있기 마련입니다.
셋째로, 세상 사람들은 권세를 휘두르기를 좋아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자신이 높아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2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전에 헤롯 임금이 그러했습니다. 그가 생일을 맞이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그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그런데 그가 불법적으로 얻은 아내 헤로디아의 딸이 나와서 아주 멋지게 춤을 추었습니다. 헤롯의 마음을 기쁘게 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권세를 과시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큰 소리 쳤습니다.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너에게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
그 때 헤로디아의 딸이 자기 어머니와 상의하고 난 뒤에 무엇을 요구했습니까?
"세례 요한의 머리를 접시에 담아서 내게 주소서."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의롭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일면 헤롯의 마음 속에 근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큰 소리를 쳤으니까 자기의 권세를 과시하고 싶어서 결국은 허락했습니다. 세례 요한을 죽였습니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권세를 휘두르기를 좋아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자기가 높아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다 세상적인 방법입니다. 26절에서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세상 사람들은 그리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는 달라야 할 것입니다. 그런 세상적인 방법을 써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장로님이 되시고 권사님이 되신다고 해서 교회에서 큰 자입니까? 그것이 예수님의 좌우편 자리입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다.
"아니, 무슨 이런 사람이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고 안수집사가 되나?"
이렇게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나 다 똑같이 죄인이고, 다 똑같이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힘, 곧 성령의 역사로 감당하는 것입니다. 누가 어떠한 직분을 맡게 되든지 간에 우리는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오, 하나님! 그들에게 힘을 주셔서 충성스럽게 그 직분을 잘 감당하게 해 주옵소서."
또 세상 사람들은 권세를 휘두르기를 좋아합니다. 의무보다는 권리를 찾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달라야 할 것입니다. 권리보다는 의무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 직분자의 의무가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헌금의 의무도 있고, 전도의 의무도 있고, 또 자신의 집안도 잘 다스리는 등 의무가 많습니다. 그러나 목사인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기본적인 의무는 예배에 출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직분이 없을 때는 주일 낮예배에 출석하는 것으로 만족을 삼더라도, 집사의 직분을 받게 되면 주일 저녁예배는 출석하셔야 합니다. 또 권사님이 되시고 안수집사님이 되시면 삼일밤예배에 참석을 하셔야 됩니다. 그리고 교회의 기둥이라는 장로님이 되시면 새벽기도회나 철야기도회에 빠짐없이 참석하셔서 교회와 교인들을 위해서 기도로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권리보다는 의무를 다하는 섬기는 마음을 가질 때, 교회는 평안한 가운데 든든히 서게 되고 절로 부흥하고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자기의 의무는 다하지 않고 권리만 찾으려고 하니까 교회에 이런저런 어려운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나의 권리를 주장하기에 앞서 내가 과연 직분자로서 의무를 감당할 수 있는지, 그것을 먼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이 없으신 분들은 이와 같은 마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 하나님! 이번 기회에 뽑히지 않게 성령께서 역사하여 주옵소서."
둘째로, 하나님 나라에서 으뜸된 자는 누구인지 살펴봅니다.
26절 말씀을 보십시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예수님은 오늘 말씀에서 크고자 하는 사실 자체를 나쁘게 보지는 않으셨습니다. 2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으뜸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9:24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신앙의 경주에서도 우리가 상 받도록 열심히 뛰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방식과 세상 나라의 방식은 서로 다릅니다. 여러분, 세상 나라에서 야고보와 요한의 잘못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자기의 영광을 구하려고 했습니다. 자기가 편안하게 살고, 자기가 더 많은 권세를 누리기 위해서 높아지려고 했습니다. 동기가 불순합니다. 그것이 잘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를 위해서 핍박당하는 일에 있어서도 큰 자가 되고, 고난 당하는 일에 있어서도 으뜸이 되는 것입니다. 순교하는 일에 있어서도 으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는 동기가 서로 다릅니다. 방법이 다른 것입니다.
세상 나라에서는 높고자 하는 자가 높은 사람 가까이에 가려고 합니다. 큰 소리 치기를 좋아합니다. 권세를 휘두르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26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여러분, 교회에서 누가 큰 자입니까? 여자 가운데 권사님이 큰 자입니까? 전도사님이 더 큰 자입니까? 남자 가운데 큰 자는 누구입니까? 시무장로님이 큰 자입니까? 은퇴하신 원로장로님이 더 큰 자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교회대표인 당회장이 더 큰 자입니까? 모두 부질없는 노릇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섬기는 자가 큰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큰 자가 되기 위해서는 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아무리 많은 물질이 있어도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면 섬기지 않습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많은 학식을 배웠다 할지라도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면 섬기지 않습니다.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큰 자는 섬기는 자입니다.
또 교회에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27절 말씀을 보십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스스로 낮추어서 종된 자가 으뜸이 된 자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의 종이 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네가 나의 주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인이 잘되는데 샘을 내고 질투하는 종을 보셨습니까? 주인이 잘되면 종은 함께 기뻐합니다. 주인이 힘들어할 때는 종도 같이 힘들어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종을 나무랍니다. 그렇다고 해서 종이 주인에게 대들거나 미워하지는 않습니다. 종은 오로지 주인을 위해서 존재할 뿐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내가 너의 종이 되어서 섬기는 자의 자세를 가질 때 그 사람이 큰 자요, 그 사람이 으뜸된 자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 나라에서는 자기가 자기를 높이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서 남을 낮추어 버립니다. 세상 사람들은 시간만 나면 그저 남을 흉보고 헐뜯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렇게 해야 자기가 높아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체질화되어 있습니다. 시간만 나면 불평하고 비판합니다. 그래서 간혹 "저 사람 정신병자 아니야? 어떻게 입만 열면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드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달라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높일 필요가 없습니다. 높은데 관심을 둘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높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약4:10의 말씀을 보십시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른 사람이 나를 낮춘다고 해서 너무 마음 아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이 나를 낮추는 것보다 내가 나를 더 낮추어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마음에 평안이 옵니다. 마음에 자유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인정해 주시고, 하나님이 칭찬해 주시고 높여주시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큰 자는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는 자가 아닙니다. 교회에서 큰 자는 무슨 직분을 가진 자가 아니고, 종처럼 자기 자신을 낮추는 자, 곧 섬기는 자가 으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높여 주시니까요.
셋째로, 예수님은 자신의 삶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섬김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2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세상의 왕들은 섬김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추호도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당연히 섬김을 받으셔야 마땅한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섬김의 삶만 사셨습니다. 말씀으로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기도로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배고픈 자에게 떡을 주시면서 섬기셨습니다. 병든 자를 치료하시면서 섬겨 주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 가면서까지 섬기셨습니다.
여러분, 섬김의 극치가 무엇입니까? 내가 너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러하셨습니다.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나를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 섬김의 극치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을 바치기까지 하시면서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열 두 제자들, 특별히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게 되었을 때 몹시도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정말 자신들이 무엇을 구했는지 알지 못했다는 뉘우침이 마음에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그와 같은 마음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성 따미엔은 몰로카이 섬에서 나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자신의 일생을 다 바쳤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그곳에 도착했을 때 나환자들은 그를 보며 건강한 사람이 왔다고 마음의 문을 열지 않습니다. 그 때 따미엔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스스로 나병환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몸에 나병이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진실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오, 하나님! 제가 저들 앞에서 '우리'라는 말을 비로소 사용할 수 있게 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는 나병환자들을 돌보면서 우리라는 말을 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몸에 나병이 번지면서 비로소 그는 그들과 함께 하나가 되어 우리라는 말을 쓸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그와 같은 마음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끝까지 낮추셨습니다. 섬김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빌2:5의 말씀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예수님의 마음은 섬김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섬기셨는지 빌2:6∼8절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스스로를 지극히 낮추셨습니다. 죽기까지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빌2:9∼11절의 말씀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 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섬기는 자가 큰 자가 되고, 또 종된 자가 으뜸이 된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자신의 삶을 통해서 친히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스스로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 세상 사람들의 마음, 마귀의 마음을 이 시간 깨끗하게 지워버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처럼 스스로를 낮추고 섬기는 마음을 회복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기뻐해 주실 것입니다.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지극히 높여 주실 것입니다. 섬김을 받고자 하는 마음에서 섬기는 마음으로 돌아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