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5일(토)
* 시작 기도
주님...
간밤에 날이 너무 더워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설쳤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송골송골 맺히네요.
도무지 누워 있을 수 없어서 일어나 묵상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마치 개가 무더위에 혀를 내놓고 숨을 헐떡이듯 내가 그렇습니다.
더위가 우리를 힘들게 할지라도 주님이 당하신 십자가 고난과 비교할 수 있겠는지요?
주님은 그 뜨거운 불구덩이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친히 들어가셨는데요.
오늘 이 하루가 비록 지내기 힘든 날일지라도 거기에 연연해하지 않고 주 안에서 평강을 누리기 원합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십자가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이 땅에서 주의 뜻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바로 주님의 뜻이오니 거기에 마음을 두고 살게 하소서.
그 나라가 바로 영생임을 압니다.
따라서 쇠락의 법칙에 썩어지고 없어질 이 땅에서 영원한 나라의 영생에 소망을 두고 사는 이 하루가 되게 하소서.
거룩한 불구자가 되어 영적 하루살이의 삶을 살아내기 원합니다.
손끝의 움직임 하나, 입에서 나오는 말 하나, 발걸음 하나가 주님을 찬양하는 것들이 되기 원하오니 주의 긍휼을 베풀어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벧후 3:1-9
제목 :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1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두 편지로 너희의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나게 하여
2 곧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3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 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4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5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6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 나의 묵상
흩어진 나그네, 즉 성도들에게 두 번째 편지를 쓰는 베드로 사도는 이 세상 마지막에 되어질 일들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을 통해서 주님이 주신 명령이다.
마지막 때에는 자기 마음이 끌리는 대로 행동하는 정욕이 판을 칠 것이며, 사람이 사람을 비웃고 조롱할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고 약속한 그 약속은 도대체 지금 어디 있느냐?, 지금도 여전히 이 세상은 처음 창조될 때와 똑같이 그대로 있지 않느냐?”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고의로 부인하려는 악한 의도를 가지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 악한 의도가 결국 노아 당시의 세상을 물로 심판하여 멸망당하게 하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하늘과 땅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대로 보호하고 계신 것은 경건하지 않고 믿지 않는 사람들을 마지막 심판하실 날에 불사르기 위함이다.
따라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주의 약속이 더디고 느려 터져서 오지 않을 것이라고들 하지만, 결코 더디거나 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모두 회개하여 구원 받는데 이르기까지 오래 참으시는 것임을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예로부터 세상의 종말은 항상 회자되고 있다.
세상의 종말은 도대체 언제 올 것인가?
세상에 종말이 오면 세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거기에 민감한 사람들은 자기들의 주변에 조그만 변화가 있거나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만 하면 종말에 대한 징조로 보면서 삶을 포기하거나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거짓 교사들의 말처럼 세상이 창조될 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고 볼 수도 있다.
그 하늘이 그 하늘이고, 그 땅이 여전히 그 땅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을 육신의 눈으로만 본 결과이다.
결코 세상은 그 하늘이 그 하늘, 그 땅이 그 땅이 아니다.
창조 이후로 사람들은 살기 좋은 세상, 살기 편한 세상을 만들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애써 왔지만, 이 세상은 끊임없이 신음 소리를 내면서 앓고 있다.
거짓 교사들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신다는 약속은 헛소리에 불과하다고 말하면서 이 세상은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임을 주장한다.
그런 이유는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들은 하나님에게로부터 분리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이런 불순한 의도는 그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바로 사탄의 궤계요 전략이다.
창조 이후로 사탄은 끊임없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분리시키고자 노력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담과 하와는 에덴에서 살았다.
그곳은 하나님의 품속과 같은 곳이었다.
그들의 육체는 에덴에 있었지만, 그들의 영혼은 날마다 하나님의 품속에서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하루는 하와를 찾아온 뱀이 그를 유혹하여 하나님과 분리시키고 그들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도록 한 것이다.
하나님과 분리시키려는 그 미혹에 아담과 하와는 넘어지고 말았다.
결국 아담 안에 있는 그 죄는 아담 이후 오고 오는 모든 사람들이 짊어진 죄가 되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그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분리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심으로 하나님과 분리된 당신의 자녀들을 다시 찾으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과의 분리됨 때문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토록 처절하게 절규하셨던 것은, 물론 육신의 고통과 아픔도 컸기 때문이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 아버지와의 분리됨이었다.
창세전부터 한 번도 아버지와 분리되지 않으셨던 아들이, 하나님과 분리된 우리들을 다시 하나되게 하기 위하여 당신이 분리되는 그 고통을 당하셨던 것이다.
어린 자녀의 양식은 어머니 품속이다.
아무리 맛있는 것을 주어도, 아무리 좋은 것을 주어도 엄마가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런 것은 엄마가 있을 때 그 다음에 필요한 부차적인 것들이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도 아버지 품속에 계셨고 항상 아버지와 함께 하셨다.
한 번도 분리된 적이 없으신 아들이 십자가에서 아버지와 분리됨의 고통을 당할 때 그 고통은 그 어떤 고통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래서 주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규하신 것이다.
이와 같은 사탄의 궤계와 전략은 창조 이후로 변하지 않고 있다.
거짓 교사들의 말처럼 세상이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사주하고 있는 사탄의 전략이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탄의 사주를 받은 거짓 교사들이 성도들의 영혼을 도둑질 하여 이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도록 정욕에 빠지게 한다.
자기들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비웃고 조롱하면서 편을 가르고 왕따를 시키기도 한다.
그런데 그것은 베드로 사도 당시에만 있었던 일이 아니라 오늘날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다.
성경은 분명히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세상의 종말이 올 것이기 때문에 항상 종말을 준비하며 살라 하고, 또한 종말을 현재로 사는 믿음의 자세를 견지하라고 한다.
(고전 15:54-58)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사도 바울은 우리가 죽을 것이나 믿는 자들은 썩지 아니함을 입는 부활이 있을 것을 이야기 하면서 자신의 삶의 방법이 곧 종말을 현재로 사는 것이었다.
마지막에 멸망당할 원수는 사망이지만, 그 원수된 사망을 향하여 지금 내가 상대해 주겠다고 나오라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많은 경우 영적 지도자들이 말은 종말이라고 하면서도 가르치는 것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대해서만 말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종말을 현재로 살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고 복 받아서 이 땅에서 영화를 누리면서 살라는 것이다.
예수 잘 믿으면 사업 잘 되고, 예수 잘 믿으면 직장에서 승진 잘 되고, 예수 잘 믿으면 자식이 잘 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사월초파일이 마치 국가적 경축일처럼 되었다.
불교인들만의 축제가 아니라 전국가적인 축제로 승격된 것 같다.
이 날이 되면 전 국토가 들썩인다.
특히 불교의 상징인 절이 위치한 곳은 바다를 끼고 있거나 자연 경관이 빼어난 산자락에 위치해 있다.
언젠가 이런 모습을 한 번 보고 싶어서 사월초파일에 유명한 절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나의 판단 미스였을까?
들어가는 입구부터 장사진을 이루더니 절 안에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경내를 쭉 돌아보는데 입구에서부터 12지의 띠별로 석상을 만들어놓고 그 아래에는 불전함이라는 돈을 넣는 통을 비치해 두었다.
자기 띠에 맞게 돈을 넣고 빌면 소원이 성취된단다.
절 곳곳에 그런 부처상들이 있었다.
아들을 낳는다는 득남상.
좋은 대학에 합격시켜 준다는 부처상.
사업을 성공시켜 준다는 부처상.
병에 걸리지 않게 해 준다는 부처상 등등등...
이것을 쭉 돌아보면서 아마 부처가 살아 있었다면 가슴을 치며 통탄했을 거라는 생각을 해봤다.
세상의 종교도 너무 변질되어 버렸다.
바닷가 전망 좋은 바위 위에 금으로 만들어 놓은 커다란 금부처상이 떡 하니 앉아 있는데 거기에 많은 사람들이 엎드려 절하면서 헌금하고 있었다.
마침 절의 한 관리원이 와서 불전함을 열고 돈을 꺼내는데 정말 빗자루로 그 안을 쓸어서 커다란 가방에 담는 것이었다.
세상의 종교도 변질되어 가고, 세상도 변한다.
문제는 위로부터 온 생명의 기독교가 변질되고 있다는 것이다.
복음을 통하여 생명을 전하는 기독교가 세상의 종교로 전락하는가 하면, 그렇게 돌아본 불교의 민낯을 우리 기독교도 그대로 자행하고 있다는데 대해서 씁쓸한 맛을 감출 수 없었다.
더욱이 그런 중심에 내가 서 있었다는 사실은 나를 더욱 끔찍하게 만들었다.
복음을 알기 전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이 이 땅에서 모두 잘 살기를 원하신다.
가능하면 부자로, 병들지 않고, 좋은 대학에 가기를 원하신다고 가르쳤다.
특별한 사람들의 경우 감당하기 힘든 고난을 받고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지 일반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니까 하나님께서 그런 복을 주신다고 가르쳤던 장본인이 바로 나였다.
이런 나는 이 땅의 수많은 절들과 다를 바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 나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나의 정욕을 다 쏟아내 버렸다.
이제 더 이상 세상의 영화나 그런 가치관을 다 버렸다.
아니 주님께서 버리도록 만드셨다.
그리고 이제 오직 주님의 얼굴을 구한다.
거짓 교사들이 종말은 오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라는 그런 미혹에서 벗어나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종말을 현재로 사는 삶을 살고 있다.
그것은 날마다 말씀으로 묵상하면서 그 날을 준비하는 것이며, 말씀 속에서 주님과 깊은 교제와 사귐을 갖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그날의 외침이 바로 나의 외침이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한 사람이라도 더 회개하여 주의 구원에 참여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금도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시는 주님의 그 소원에 함께 동참하여 그 날을 기대와 소망으로, 종말을 현재로 살아간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나의 육신의 정욕이 나와 세상을 괴물로 만들고 있습니다.
주의 말씀을 전하는 목사이면서도 주님의 진정한 뜻을 모르고 자행자지 했던 이 못난 종은 죽어 마땅한 자였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기독교를 땅의 종교로 전락시키는데 크게 일조했던 자가 여기 있나이다.
그런 나는 주의 심판만이 합당한 자입니다.
주여, 나를 주의 심판으로 죽여주옵소서.
그러나 오직 주의 생명으로 다시 살게 하소서.
그리하여 주의 복음이 증거되게 하시고, 이 복음을 통하여 생명으로 살게 하소서.
나의 나 된 것은 오로지 주의 은혜이오니 오늘도 나를 써 주소서.
주의 은혜임을 알기에 날마다 그 은혜 안에 살기를 원합니다.
점점 변질되어 가는 이 세상, 변질되어 가는 기독교가 다시 복음으로 회복되게 하시되 종말을 현재로 사는 굳건한 믿음을 회복하게 하옵소서.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이 기다리시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 더욱 주의 품을 사모하는 자가 많아지게 하옵소서.
영원한 그 날을 소망하며 오늘 하루도 주의 소망이 넘치는 날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