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자를 추앙하는 이상한 나라.
정율성 기념사업에 대한 논란과 관련하여 강기정 광주시장은, 정율성 기념사업에 대한 논란과 관련, "정율성 선생 기념사업은 중앙정부에서 먼저 시작했다"며 "그 시작은 35년 전 노태우 대통령 재임시기인 1988년으로, 서울올림픽 평화대회추진위원회에서 정율성 선생의 부인인 정설송 여사를 초청하며 한중우호의 상징으로 삼았던 일"이라고 하면서 "문재인 정부시기인 2021년에는 국립국악원 70주년을 기념해 그의 미공개 소장품을 전시하는 특별전을 개최했다. 지난 30년간 정율성 선생은 국익을 위해 다양한 목적으로 활용됐다. 처음에는 북방정책의 맥락에서 공산권과의 교류 목적으로 이후에는 한중우호 교류사업의 일환으로 최근에는 중국 관광객 유치를 위해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목적은 조금씩 달라졌지만, 정율성 선생이 우리 정부의 대 중국 외교의 중요한 매개였음은 분명하다"고 했다(뉴시스 기사 인용).
정율성은 어떤 인물인가. 나무위키를 중심으로 인용해본다.
정율성은 1914년 전남 광추 출신이다. 1929년 전주신흥학교에 입학하였다가 의열단 가입을 위해 1933년 학교를 중퇴하고 중국 난징으로 건너가서 항일 무장 투쟁 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하여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서 수학하며 피아노, 바이올린, 성악 등을 공부한다. 1936년 그는 첫 작품 '오월의 노래'(五月之歌)를 작곡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난징을 떠나 1937년 10월 중국공산당의 본거지인 옌안에 가서 본격적인 공산당 활동을 시작했다.
중국과 북한의 군가를 다수 작곡했는데 특히 중국에서는 중국인민해방군군가의 작곡가로 유명하여 혁명투사로 지정되어 있다. '의용군행진곡'의 녜얼(聂耳, 1912~1935), '황허대합창'의 셴싱하이(洗星海, 1905~1945)와 함께 흔히 중국 3대 음악가(또는 악성(樂聖)) 중 1명이라고 알려졌으나#, 이는 사실상 국내에서 붙여진 명칭으로 "中國排名前三的音樂人"라는 검색에도 정율성 등은 인터넷에 나타나지 않는다. 즉, "한국의 3대 음악가"라는 정의가 애매하듯이 국내 언론에서 붙여진 명칭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아무리 중국이 공산당 체제라고 해도 군가 작곡가를 역사상 최고의 3대 악성으로 공식 인정한다는 사실은 사회적으로 의문스러운 부분이다.
1939년 중국공산당 정식으로 가입하여 6.25전쟁 때 조선인민군 소속으로 남침에 참전하였다가 도중에 저우언라이와 김일성의 협의에 따라 중국 인민지원군으로 소속을 변경하여 다시 참전했다. 1945년 12월 소련 군정 하의 북한에 가족과 함께 도착해서 북조선인민위원회 소속으로 활동했다. 이후 해주에서 조선로동당 황해도 도당위원회 선전선동부장으로 활동했다. 이 때 음악전문학교를 창설하고 인재를 양성했다. 1946년 2월, 부부 동반으로 김일성과 대면했다. 1947년 평양으로 올라와 조선인민군 구락부 부장을 지냈다. 아울러 인민군 협주단을 창단하여 단장이 됐다. 1948년 2월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한 공로로 김일성으로부터 상장을 받았다.
1950년 6월 6.25 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인민군 소속으로 참전하였으며, 서울 점령 직후 서울에 내려와 주둔했다. 그는 개전 초기 서울 점령 직후부터 9월까지 쭉 서울에 머물렀다. 그의 아내 딩쒜쑹도 함께 서울에서 머물렀는데, 8월경 돌연 딩쒜쑹 혼자서 중국으로 돌아갔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황이 뒤바뀌던 1950년 9월, 저우언라이가 김일성에게 그를 중국으로 보내 줄 것을 요청하여 중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중국에 돌아와서 중국공산당적을 회복하고 아울러 중화인민공화국 국적도 취득했다. 그해 12월 중국 인민지원군의 소속으로 다시 참전하였다.
1956년 북한에서 8월 종파사건으로 연안파가 숙청되던 시점 이후 북한과 왕래를 끊고 중국에 완전히 정착했다. 1966년부터 시작된 문화대혁명 기간에 홍위병들의 수많은 협박과 함께 친구들에게서 받은 원고가 모두 수색당해 많은 악보 등이 유실되는 등 시련을 겪었다. 문화대혁명 시절부터 고기잡이 취미가 생겼다고 한다. 1976년 마오쩌둥이 죽고 문화대혁명이 끝나자 그해 복권되었다. 그는 새로운 창작 열정에 불타 저우언라이 총리를 흠모하는 연가와 건국 50주년을 기념하는 대작에 착수했으나, 그해 12월 7일 베이징 근교의 한 운하에서 낚시를 하던 도중 심장병으로 돌연 쓰러져 62세로 사망했다. 사망 후 중국의 국립묘지인 ‘팔보산(八寳山) 혁명 공묘’에 안장되었다(나무위키 인용).
이러한 사실로 보아 정율성은, 중국에 귀화한 중국인으로 공산주의 음악가라는 점, 의열단에 가입하기 위해 중국에 가서 중국공산당 활동을 하였고, 남침 전쟁이 참가하고 북한 김일성 정권하에서 조선로동당 황해도 도당위원회 선전선동부장으로 활동하면서 공산주의 음악전문학교를 창설하였음을 알 수 있다. 2개의 국가에서 활동적으로 공산주의 활동을 한 인물이다.
자유대한민국에 중국 공산주의자인 정율성의 기념관을 만들겠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강기정은 “서울올림픽 평화대회추진위원회에서 정율성 선생의 부인인 정설송 여사를 초청하며 한중우호의 상징으로 삼았던 일"이라고 하면서 기념관을 만드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려고 하고 있는데 자신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노태우 정권이 일시적으로 한중우호의 상징으로는 삼았을지는 몰라도 기념관을 세우자고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히 해야 한다.
문재인 정권이 러시아에서 독립군 800여 명을 죽이고 1,000여 명을 강제노역장으로 보내 죽게 만들어 독립군의 씨를 말려버린 러시아와 북한에 거주한 공산주의자에게 훈장을 주겠다고 한 사실이 있다. 이러한 공산주의자가 이 나라의 독립에 끼친 영향은 미미하고 동족 간의 전쟁에서 북한 편이 되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던가.
6.25남침 전쟁이 끝난 후 공산주의자, 부역자를 처단하지 않은 것 때문에 지금까지 공산주의자를 추앙하다시피하고 사회공산주의자가 활개를 치고 있다. 공산주의자 인명부를 작성하여 누가 공산주의자이며 누가 북한에 부역하여 동족의 가슴에 총질한 자인지를 국민이 알아야 할 때다. 그 자손은 지금 무엇을 하면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밝혀야 한다. 정부가 온갖 위원회를 만들고 있지만 정작 만들어야 할 위원회는 ‘공산주의자 및 그 부역자의 행위에 대한 진실규명 위원회’ 여야 한다.
정율성 기념회 논란을 보면서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윤이상이다. 윤이상은 루이제 린저와의 대화에서 자신은 절대 공산주의자가 아니고 북한과 오로지 문화적 연계만 있을 뿐이라고 했다. 윤이상이 북한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보면 윤이상을 알 수 있다. 북한은 윤이상을 북한을 위한 음악을 통한 통일운동가로 평가하고 있으며 매년 가을마다 윤이상 음악회를 열고 있고, 윤이상 음악연구소와 연구소 부속 관현악단인 윤이상관현악단까지 꾸려가고 있다는 것만 봐도 윤이상은 자신의 변명과 달리 공산주의자로 볼 수 있고 친북 음악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첫댓글 정율성 윤이상은 추앙받고
홍난파 박시춘 김동진은 친일파라 낙인 찍혔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