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 번째 고난예고와 한 여인의 요구(2)
마 20:17-28
17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18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19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20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23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24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 20:17-28 / [수난에 대한 세번째 예고;막10:32-34,눅18:31-34]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열두 제자를 곁으로 불러 18) 예루살렘에서 자신에게 일어날 일을 말씀하셨다. `나는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19) 그들은 나를 로마 정부에 넘겨 주어 그들의 조롱을 받으며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20) [으뜸이 되고자 하거든 종이 되라;막10:35-45] 그때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아들들과 함께 예수께 와서 절을 하며 청을 드렸다. 21) `무엇을 원하느냐?' 예수께서 물으시자 그 부인이 대답하였다. `주님의 나라가 서거든 저의 이 두 아들을 하나는 주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주십시오' 22) 그러자 예수께서 그 부인에게 `네가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하는 말이냐?' 하고 말씀하신 뒤에 야고보와 요한을 향하여 다시 `너희는 내가 마시게 될 그 무서운 잔을 마실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대답하였다. `예, 저희는 마실 수 있습니다.' 23) 예수께서 그들에게 다시 말씀하셨다. `너희도 정녕 내 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편과 내 왼편 자리에 누가 앉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은 내 권한이 아니다. 그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내 아버지께서 미리 정해 놓으셨다' 24) 다른 열 제자들은 이 말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게 분개하였다. 25) 그리자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말씀하셨다. `이방인이 왕들은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백성을 내리누른다. 26) 그러나 너희들은 그렇게 하지 말라.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높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27) 만일 너희가 으뜸이 되기를 원하거든 반드시 종처럼 섬기는 사람이 되라. 28)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의 죄값을 치르기 위하여 목숨을 내주려고 온 것이다.'
< 설 교 >
주님, 제 자식을 부탁드립니다
마 20:20-28 / 인명진목사
2000년 전 예수님께서 사셨던 시대에도 치맛바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자식을 위해 여기저기 쫓아다니 는 치맛바람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본문 말씀 마태복음 20장을 보면 세배대의 아들 요한과 야고 보의 어머니가 하루는 예수님을 찾아와 예수님의 나라가 임할 때 내 두 아들을 예수님 좌우에 있게 해달 라고 말합니다. 성경을 보면 이때 예수님이 참 잘 나가던 때였습니다. 많은 병자를 고치는 능력을 보여주 었으며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는 놀라운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아마도 예수 님의 제자였던 야고보와 요한은 이런 모습을 어머니에게 이야기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7장 을 보면 이들에게는 예수님과 함께 한 특별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명만을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셔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셨습니다. 그리고 엘리야와 모세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영웅인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셨으니 예수 님께서 큰일을 이루실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님 께서 틀림없이 큰일을 이루실 것이다,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아가 틀림없으니 미리 예수님에게 아들에 대 해서 약속을 받아두자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한 들리는 소문으로는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신임하셔서 천국열쇠를 주셨다고 하니 예수님에게 자식들의 앞날에 대해 확실한 약속을 받으려고 하게 된 것입니 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말씀은 사복음서 중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마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잘 나가시니까 제자들 간에 서로 누가 어떤 자리에 갈 것인가 하는 다툼이 일어났다 고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는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찾아와 청탁을 한 것으로 나타 나 있습니다. 자식의 일이니까 체면 불구하고 찾아와서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지금이나 옛날이나 자식을 위하는 부모의 마음은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요즈음 부모들은 자식에 대한 사랑에 아예 눈이 먼 것 같습니다. 무엇이든지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자식사랑에 목숨을 겁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선생님에게 맞으면 그 부모가 학교에 와서 선생님 을 대들고 폭행하고 처벌까지 한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자녀들을 나무 랐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아이가 잘못하면 종아리를 때려달라고 부탁을 하기도 했습니 다. 그런데 요즈음은 자식이 무슨 용의 알이나 되는 듯 깨질까봐 다칠까봐 벌벌 떱니다.
우리 교회의 어린이 집에서 일어난 일을 들어보면 화가 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자라나면서 싸 우고 넘어지고 다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그런데 조금 무슨 일이 있으면 이것이 부모의 싸움이 됩니다. 부모들의 맹목적인 사랑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든 부모들의 바람은 어떻게 든 자식이 잘 되는 것입니다. 자식이 잘 된다고 하면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종종 자녀 들의 사교육비를 대기 위해 남편이 벌어오는 돈으로는 부족하니까 어머니들이 노래방에 나가거나 파출 부를 나가는 등 온갖 일을 다 한다는 기가 막힌 이야기를 듣습니다. 합니다. 나는 못난 사람이지만 자식 을 잘 되어서 그럴듯한 인물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 부모들의 한결같은 마음입니다.
우리 교회의 젊은 부부들 중에 아이들을 지혜롭게 믿음으로 신앙으로 잘 기르는 부모들이 있어 제가 이 들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이들 중에서 큰 인물이 나올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 게 자녀들을 잘 기를 수 있을까 하는 것도 우리는 성경에서 그 대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선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자녀들의 출세를 부탁하는 이 어머니에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대답하셨는가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주 엉뚱한 대답을 하고 계십니다. 26,27절을 보면 너희 중에 누구든 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 이 되어야 하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식이 출세하기를 원하면 어머니들이 먼저 자녀들이 사람들 을 잘 섬기고 희생할 수 있는 사람으로 길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자녀들 잘 기르면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자녀를 기르고 있습니까? 이 아이가 다른 사람을 섬기고 희생하고 봉사하는 아 이가 되기를 위해서 기도하십니까? 학교에서 공부를 잘하고 똑똑하고 좋은 회사에 취직하고 출세하기를 위해서 기도하십니까? 어떤 마음으로 기르십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존경받지 못하는 것은 우리 부모들이 자녀들을 잘못된 마음으로, 잘못된 목표를 가지고 길렀 기 때문입니다. 미련한 부모들이 자식을 앞날을 망친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봉사하고 나누고 희생하는 교육 속에서 자란 아이어야 큰 인물이, 으뜸이 되는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자식을 잘 기른 두 어머니가 나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와 모세의 어머니입니다. 이 둘은 여 러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중 세 가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 모세와 사무엘은 두 어머니에 게 아주 귀한 특별한 아이였습니다. 모세가 태어났을 때 바로가 유대여자에게 낳은 사내아이를 다 죽이 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죽음 가운데서 살아난 아이입니다. 같이 태어난 다른 아이들은 다 죽었는데 목숨 을 건진 아이입니다. 사무엘은 그 어머니 한나가 오랫동안 눈물로 기도하고 낳은 늦둥이 금지옥엽과 같 은 아이입니다. 두 번째 공통점은 두 어머니가 다 그 귀한 아이를 버렸습니다. 모세는 태어난 지 삼 개월 만에 나일강가에 버려졌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성전에다 젓떼자마자 어린 사무엘을 버렸습니 다. 세상적으로 보면 못된 어머니들입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귀한 아이들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바로의 공주가 기르게 되고 사무엘은 실로 성전의 선지자가 기르게 되었습니다. 결과 이 두 아이는 역사 상 큰 인물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해방하는 구원자가 되었고 사무엘은 위대한 선지자로 이스 라엘을 건국하는 건국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아이들 이라고 자신이 길렀다면 이들이 평범한 아 이로 자랐을 지도 모릅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부모들이 자녀들을 끼고 절대로 놓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도 옛날에는 결혼을 하면 독립을 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결혼을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자식을 망치는 일입 니다. 부모를 보고 자란 아이는 부모와 같은 아이밖에는 못됩니다. 우리가 자식을 기르는 데는 한계가 있 습니다. 잘 길러도 나만큼 밖에는 못 기릅니다. 아이를 역사 속에서 길러야 합니다. 그래야 역사적 인물 이 됩니다. 하나님께 맡겨야 하나님께서 위대한 인물로 길러주십니다. 내가 기르면서 나보다 훌륭한 자 녀가 되기를 바란다면 상식적으로 맡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역사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래야 그 아이가 자유롭고 훌륭한 아이로 자랄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아이들 때문에 힘들어 하는 교인들에게 저는 손 떼라고 한 마디 합니다. 손을 떼는 날부터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됩니다. 70년대부터 우리의 아이들은 아버지를 사회에서 빼앗겼습니다. 공휴일도 쉬 는 날도 늦게까지 일하면서 아이들은 아버지의 얼굴을 모르고 자랐습니다. 그리고 가정에서 아버지의 자 리를 지켜주어야 할 어머니가 아버지를 몰아냈습니다. 아버지의 빈자리를 어머니가 채웠습니다. 돈을 주 면서 이것이 아버지가 힘들게 번 돈이라고 해야 하는데 자기 돈인 것처럼 아버지의 역할을 했습니다. 사 회가 아버지를 빼앗아가고 가정에서 어머니가 아버지를 몰아냈습니다. 그러나 더 심각한 것은 요즘 아이 들은 어머니마저 빼앗겼습니다. 어머니가 집에 없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텔레비전과 인터넷과 핸드폰이 키웁니다. 이것이 어머니가 되었고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아이들이 약사빠르고 똑똑하고 영악하 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어린이답게 순진하고 꿈이 많아야 하는데 어린이다운 모습이 없습니다. 더 나 아가 아이들이 하늘도 빼앗겼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별로 좋은 환경은 아니었지만 하늘을 가슴에 품 고 흙을 묻히고 꽃과 나무와 새와 함께 살았습니다. 저는 초등학교까지 올갠이 없는 학교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음정이 엉망이지만 음에 대해 민감합니다. 새소리 파도소리 바람소리를 듣고 자랐기 때문입니 다.
한 없이 욕심이 많은 우리들이 기르니까 탐욕스러운 아이가 됩니다. 천박한 생각으로 아이들을 기르니 까 꿈을 가지고 높은 이상을 지닌 아이가 될 수 없습니다. 청소년들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아이들에 게 아버지 어머니를 돌려주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국가에서 특별법을 만들어 최소한 자녀가 초 등학교에 다닐 때까지만이라도 모든 아버지 어머니가 저녁 일곱 시까지는 가정으로 돌아가 함께 밥을 먹 고 하루의 삶을 이야기하도록 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곱 시까지 가정에 안 들어가는 부모는 처벌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는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특별히 자녀가 으뜸이 되는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부모들이 꼭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아이들을 사랑하되 그것이 부모 들의 이기적인 마음 자기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것이 되지 않도록 자식들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일등해라 잘해라 성공해라 출세해라 대신 다른 사람을 섬기고 봉사하고 희생하고 질줄 알고 양보하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아무리 자식이 소중해도 하나님보다는 앞세우지 말고 하나님 뒤에 세워야 합니다. 아 이들에게 나는 너를 사랑하지만 하나님보다는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어머니 치 마폭에 싸지 말고 모세처럼 역사의 강물에 자녀를 맡겨야 합니다. 집안에 붙잡아 두지 말고 사무엘처럼 하나님의 집에 우리의 자녀를 맡겨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자녀들이 모세와 같은 위대한 역사적 인물 사무엘과 같은 훌륭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 나라와 이 민족 하나님의 교회에 위대한 일꾼 자랑스러운 인물이 될 것입니다.
어린이날을 맞이하여 우리 어린이에게 줄 가장 큰 선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의 자녀들에 대한 마음을 바꾸는 것이 여러분의 자녀에게 꼭 필요한 선물입니다. 자신의 자녀들을 부탁하는 야고보 와 요한의 어머니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어린이날에 자녀들에게 주는 선물이길 바랍니다.
예루살렘 정복을 꿈꾸는 제자들
마 20:20-28 / 이정선목사
마태복음의 플롯은 갈릴리에서 시작된 천국 복음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진격하는 구조입니다. 마치 변방에서 일어난 저항군이 세력을 확장하면서 중앙을 향하여 진격하는 것과 같습니다. 저항군이 중앙을 향하여 진격해 오면, 중앙에서는 할 수만 있으면 저항군이 멀리 있을 때 군대를 보내어 막으려고 할 것입니다. 저항군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중앙에서는 위기감이 커집니다. 저항군이 중앙에 도착한다는 것은 그동안 저항군을 막으려던 모든 시도가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 과정에서 군사력이 소진되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중앙 권력이 전복되는 것입니다. 한편, 중앙을 향해서 진격하는 저항군의 입장에서는 중앙에 다가갈수록 사기가 충천하고 기대감이 고조됩니다. 중앙에 도착해서 기존의 권력집단을 무너뜨리고 자기들이 새로운 세상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일행은 갈릴리를 본거지로 삼아 활동하다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길을 떠났습니다. 요단강 동편을 따라 남하하다가 다시 요단강을 건너 유대 지경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여리고에 도착했습니다. 여리고는 요단강을 건너서 만나는 첫 번째 도시입니다. 예루살렘이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여리고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약 40km로 자동차로 4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예수님 일행이 걸어서 간다고 해도 이틀이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가까워질수록 제자들은 중앙을 향해 진격하는 저항군 병사들의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다윗이 정복하여 왕국의 도읍으로 삼은 이래, 예루살렘은 다윗의 성(City of David)으로 불렸습니다. 수백 년 동안 유대인들의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 삶의 중심이 되어왔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예수께서 그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것입니다. 메시야로 오신 예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접수하시고 왕이 되는 꿈에 부풀어 있습니다. 그들에게 군대는 없지만, 아무 염려가 없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이 보여주신 능력이라면 아무리 많은 군대라도 거뜬히 물리치고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이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까요? 목적지가 가까워올수록 가서 해야 할 일의 계획이 분명하게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누가 무엇을 하고 누구는 어떤 일을 맡고 하는 구체적인 행동 지침까지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의 마음 속에 있는 것과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기대가 매우 달랐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목적은 거기서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일을 다시 한 번 말씀하십니다.
17절에서 19절 말씀이 그 내용입니다. 열두 제자를 따로 불러서 하시는 말씀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세 번째였습니다.
맨 처음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셨을 때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다는 것은 예수께서 자기 계획을 알리실 때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더니 (마 16:21)
두 번째로 말씀하신 것은 변화산에 다녀오신 후입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하셨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습니다. 산 정상은 잠시 천국의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제자들이 그것을 보고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나는 대화의 내용은 예수의 죽으심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죽임을 당하시는 것이 천국에서 결정된 일이고, 그 계획대로 진행되리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보여준 사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산에서 돌아오신 후에 다시 한 번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 (마 17:22-23)
그리고 세 번째로 말씀하신 것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이제 예루살렘이 지척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다시 한 번 말씀하시는 것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며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마 20:18-19)
그런데 이 세 번의 경우에 제자들이 보여준 반응은 아주 달랐습니다. 처음으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하셨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잡고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강력하게 반대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무슨 일이라도 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나타내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마 16:22)
그런데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은커녕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꾸중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하늘에서 결정되어 예수께서 하시려고 하는 일입니다. 대속의 죽음으로 인간을 구원하시는 일이지요. 사람의 일이란 아마도 베드로의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권력을 잡으시는 일입니다.
두 번째 말씀을 하셨을 때는 첫 번째처럼 강력하게 반대하는 분위기와는 제자들이 달리 심히 근심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시는 것이 하늘의 뜻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았기 때문에 반대하기보다는 근심했던 것이 이해가 됩니다. 근심을 했던 이유는 자기들이 꿈꾸는 메시야 왕국이 실현되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 (마 17:23)
그런데 세 번째 말씀하신 후에는 제자들이 반대도 하지 않고 근심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다음에 일어난 사건은 높은 자리를 놓고 서로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이해가 안 되는 일이지 않습니까? 예루살렘 입성을 눈앞에 두고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면 붙잡혀 고난을 당하고 죽게 될 것이라고 하는데, 제자들은 서로 높은 자리 차지하겠다고 싸우다니요.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마 20:20-21)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마 20:24)
예수님은 세 번에 걸쳐 똑같은 말씀을 하시지만, 제자들의 반응이 달라진 것은 그만큼 그들이 무뎌졌기 때문입니다. ‘듣기 좋은 노래도 석 자리 반’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처음 들었을 때는 감동적이었던 것도 자꾸 들으면 시시해집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죽임을 당하신다는 말도 처음에는 충격적이었지만, 자꾸 듣다 보니 적응이 되었는지 별로 놀랄 일이 아니게 된 것입니다. 무뎌진다는 것은 생명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뭔가를 당연하게 여기는 순간부터 우리는 감동을 상실하게 됩니다. 혼자 살던 총각이 결혼을 했어요. 아내가 차려 주는 식탁을 대할 때마다 감회가 새롭습니다. 혼자 살면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거나 대충 건너뛰며 살던 것을 생각하면 너무 감사하고 행복했습니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아내가 밥 해주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면서 반찬투정을 하게 됩니다. 당연하게 여기는 순간부터 감사와 행복 대신에 불평과 불만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모든 남편들이 아내가 밥 해 주는 것 한 가지만이라도 늘 감사하게 생각할 수 있다면 부부 사이에 평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 받게 된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 같은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처음 믿었을 때는 그렇게 놀랍고 큰 은혜가 없었습니다. 나를 자녀 삼아주신 것이 너무 감사하고 황송했습니다. 그래서 주 예수보다도 귀한 것은 없고,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겠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도 이제는 그저 담담한 사실일 뿐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이 안정기에 접어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메말라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감정이 무뎌지는 것은 메말라가는 것입니다. 가뭄에 말라버린 잔디가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생명이 넘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 많이 들어서 새로운 것도 없고 감동도 없다고 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들을수록 새롭고 감동이 넘쳐야 마땅합니다. 우리의 심령이 무뎌지고 생명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서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에도 제자들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은 그 말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제자들의 귀에는 예수님이 죽으러 예루살렘에 가신다는 말이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반대도 하고 근심도 했지만, 이제는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믿는 매우 특별한 메커니즘이 있습니다. 심리학에는 선택적 기억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교통사고를 낸 사람과 당한 사람이 진술한 것을 보면 완전히 다릅니다. 둘 중에 한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지만, 실제로 두 사람은 자기가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 진실을 말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똑같은 사건을 경험하고서도 각자가 자기에게 유리한 것을 기억하고 불리한 것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택적 기억입니다. 믿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은 믿어지고, 믿고 싶지 않은 것은 안 믿어지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서 죽임을 당하시는 것은 믿고 싶지 않은 일입니다. 그럴 것 같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은 물 위를 걷기도 하시고, 바람과 파도를 꾸짖으셔서 잠잠케 하신 분입니다. 귀신도 쫓아내셨고 죽은 사람도 살리셨습니다. 그런 분이라면 아무리 많은 군대가 잡으러 온다고 해도 걱정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붙잡히고 로마 군인들에게 넘겨져 죽임을 당한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죽으신다면, 지금까지 예수님만 바라보고 살아온 자기들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것입니다. 지난 세월이 아깝고, 그렇게 품었던 꿈이 부끄럽게 될 것입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서 전에 하던 일을 하며 사는 것도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죽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믿을 수도 없고, 믿고 싶지도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셔도 이제는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우리가 믿는 대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믿어야 하는 것이지, 우리가 믿는 것이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안 들어도, 나에게 손해가 되어도, 진리 앞에서는 고집을 꺾어야 합니다. 진리를 부인하고 진실을 회피하는 사람은 나중에 더 큰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그때 마침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나아와 절하며 뭔가를 요청했습니다. 그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도록 해 주시라는 것입니다.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이모가 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예수님의 일행 중에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도 동행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가 예수님 일행의 후원자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재정적으로도 후원을 했을 것이고, 여러 가지 실제적인 봉사도 많이 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야고보와 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예수님의 최측근 제자들이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상당히 불공평한 게임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예수님의 이모가 되는 어머니를 내세워서 좌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청탁을 했으니, 다른 제자들이 가만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특히 베드로가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제자들 중에서 자기가 서열 1위라고 생각했는데, 젊은 것들이 하극상을 해도 유분수지요. 그리고 어머니가 따라오지 않은 제자들은 서러워서 제자 노릇도 하기 힘들다고 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러 가시는데, 높은 자리 달라고 구하는 제자들을 보시니 그 마음이 어찌했겠습니까? 한심한 생각도 들었을 것이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믿지 않고 한 자리 차지할 생각만 하는 제자들의 미숙함에 속이 답답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러니까 이 두 형제가 자신 있게 말합니다. ‘네, 마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마시려는 잔은 고난과 죽음이었습니다. 그 잔을 마실 수 있다고 한 이 두 사람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헤롯왕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죽였다고 했습니다(행 12:1-2).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할 수 있었던 야고보가 이렇게 허무하게 일찍 순교를 당해버린 것입니다. 교회의 크나큰 손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굳이 얘기를 하자면 예수님이 마시려는 잔을 자기도 마실 수 있다고 큰소리를 친 결과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잖습니까? 다행히 요한은 제자들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아 일찍 죽은 형의 몫까지 충성스럽게 일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살면서 평생 그 잔을 마실 수 있다고 큰소리치면서 높은 자리 달라고 했던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을까요?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분위기가 험악해진 제자들에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법입니다. 그 나라의 왕이신 예수께서도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제 주님은 섬김의 왕으로서 자기 목숨을 십자가에 내놓으시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이야기의 요점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일어날 일을 두고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과 긴장입니다. 예수님은 죽으러 가시는데, 제자들은 한 자리 차지할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출세를 해보려던 제자들의 꿈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간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꿈이 성취될 것입니다.
내가 나서고 내가 높아지는 곳에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되는 일이 일어났다면, 인간의 구원은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가 낮아지고 내가 섬기는 곳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제자들은 아무도 한 자리 차지하는 사람이 없었고, 예수님은 끌려가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지만, 거기서 여러분과 제가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이 열렸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법을 알고 따를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이 우리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방 집권자들이 하는 대로 따라 살지 말고,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 오셨던 우리의 왕이신 예수를 본받고 그분에게 배우며 사는 모습이 우리 가운데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또 우리 가정에서 우리가 서로를 높이고 서로 섬기려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큰 일을 행하실 줄 믿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과 동떨어져 살면서 내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이 따라오시기를 바라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거절당한 소원
마 20:20-28 / 이필재목사
오늘 성경말씀의 기록도 예수님 사순절 기간 중에 일어났던 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어떤 여자가 자기의 두 아들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에게 매우 당돌한 요청을 하는 것,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이 답변하신 것으로 말씀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먼저, 이 집의 배경을 살피면 아버지 이름이 ‘세베대’라고 오늘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어부 생활을 했는데 비교적 어부 생활에 만족하고 조금은 여유 있는 집으로 성경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종들도 많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 집의 두 아들은 야고보와 요한으로 둘 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에 있습니다. 어머니는 ‘살로메’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여인이 성경에 여러 번 나타나는데 예수님과 친척이 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자매지간입니다. 살로메는 예수님과 촌수로 따진다면 예수님의 이모가 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모가 되는 살로메가 오늘 자기의 두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와서 절을 하면서 무엇을 해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절까지 하며 요청을 하는 것을 보니까 보통 요청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물었습니다.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그랬더니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이 살로메의 소원에 즉시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반응입니다. 예수님의 반응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느냐 하면 기가 막힌 것입니다.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내 좌편에 앉고 내 우편에 앉는 것의 의미가 도대체 어떤 것이냐? 무엇을 바라고 내 좌우편에 앉기를 원하느냐?” 또 그것을 지금 이 자리에서 “명하소서. 임명하소서.” 아예 임명장을 달라고 하니까 예수님이 참 기가 막히신 것입니다. 그래서 기가 막힌다는 반응을 보이시며 살로메의 생각을 지적했습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권세를 부리고 싶어서 내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하니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
우리 인간은 기본적 몇 가지 본능적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평생을 통해서 버리지 못하는 소원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생존 본능이라는 것입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오래 살고 싶은 소원을 인간은 누구나 다 가지고 살기 마련입니다. 제가 10대적에는 부흥회를 많이 쫓아다녔는데 그때 부흥사들은 부흥회 기간 동안 꼭 한번 짚고 넘어가는 말이 있었습니다. 어느 부흥회를 가보아도, 어느 부흥사 이야기를 들어도 그 문제는 한 번씩 짚고 넘어갔는데 바로 천국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옛날에는 부흥사들이 무슨 질문을 던지고 교인들이 대답하는 형식의 설교를 많이 했습니다. “천국을 믿으십니까?” 교회 온 사람이 안 믿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아멘!” 그럴 거 아닙니까? “천국이 그렇게 좋다는 것도 믿으십니까?” “아멘!” “그러면 천국 가시길 소원하십니까?” 모두 “아멘!” 큰소리로 대답합니다. “오늘 가시기 원하십니까?” “…….” 그렇게 천국이 좋다고 믿으면서도 생존본능을 넘어서기는 어렵다는 것이 증명되는 겁니다. 그게 인간의 본능적 욕구입니다. 그 다음에는 평등적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누리는 것을 나도 누리고 싶어 합니다. 다른 사람이 명품을 가지고 있으면 나도 가지고 싶습니다. 뭐든지 다른 사람이 누리는 것을 나도 누리고 싶습니다. 사실 유행이라는 것은 잠깐 지나갑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따라잡기를 원합니다. 왜? 남이 누리기 때문입니다. 내게 별로 그렇게 유익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른 사람이 누리는 것을 내가 누리지 못할 때 그 스트레스나 섭섭한 마음을 참을 수가 없어서 따라가고 싶어 하는 것이 평등적 본능입니다. 그 다음에는 지배 본능적 욕구가 있습니다. 권세자가 되어서 집권하기 원합니다. 오늘 예수님이 많은 사람을 내 마음대로 명령하고 부리고 싶어 하는 지배 본능적 욕구를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렇게 되기 위하여 끝없는 투쟁을 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입니다.
저도 한때는 살맛났던 때가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인데 제가 여기 분당 초등학교 1회 졸업생입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교장선생님이 아침 조회할 때 꼭 전교생을 모아놓고 교단에 서셔서 “오늘은 이거, 오늘은 이거…….” 어쨌든 학교에 간 날은 비 오는 날 빼놓고는 반드시 아침 조회를 합니다. 선생님들이 모두 앞에 서있고 교장 선생님 계신 바로 그 앞에 전교생을 향해서 명령을 하는 대대장이 한 사람 있게 마련인데 바로 제가 그 일을 했습니다. 생활 주임 선생님이 저에게 권한을 주셨습니다. “네 말 안 따르는 사람은 우리 선생님들 앞에 다 있고 교장 선생님도 계시니까 벌주어도 괜찮다.” 그러면 신이 났습니다. 그래서 “차렷! 열중 쉬어!” 하다가 잘 안 따라하면 “4학년! 땅 바닥에 손대고 1분간 엎드려!” 벌을 주었습니다. 그러면 제 말대로 엎드려야 합니다. 생활지도 선생님이 그렇게 해서 군기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흐느적거리고 잘 안 따라하면 그때가 제 세상입니다. “5학년 어떻게 된 거야? 줄 똑바로 서!” 그때가 정말 살만 했습니다. 어린 아이도 지배 본능적 욕구가 좋습니다. 그런데 어른은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일평생 이런 것을 누리려고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욕심을 부렸고 전쟁을 많이 했습니다. 알렉산더, 나폴레옹, 칭기즈 칸, 히틀러 이런 사람들은 무엇입니까? 온 세계를 한번 흔들어보고 싶은 지배 본능적 욕구가 끝이 없이 발전한 것이 세계 전쟁 역사입니다. 인간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살로메는 지금 거기에 사로잡혔습니다. 예수님이 지적하셨습니다. 집권자들이 권세를 가지고 사람들을 임의로 부리는 것에 매력을 느껴서 “내가 왕이 될 때 당신의 두 아들을 하나는 좌편에, 하나는 우편에 앉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냐?” 실제로 그러했습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반응이 나옵니다. 이 말을 들은 다른 제자들의 반응인데, 바로 24절에 나옵니다.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열 제자가 화가 났습니다. “아니, 쟤네들이 벌써 저런 정치를 해?” 여러분! 한 공동체 안에서 특정한 사람이 특별 취급을 받고자 할 때 그 공동체의 분위기는 살벌한 경쟁의식이 생겨집니다. 무서운 견제 세력이 반드시 등장하게 마련입니다. 다른 열 제자가 이 사건을 보고 분하게 여겼다는 이 말은 자기들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이날부터 예수님의 열 두 제자 공동체는 험악해 졌습니다. 저마다 눈치를 보면서 이 출세의 기회를 이제 때가 되었으니까 놓치지 않으려고 잔머리를 굴리고 조금이라도 우수한 점을 내세우는데 신경을 곤두세웁니다. 그러면 그런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이 살로메라는 여자는 왜 이렇게 두 아들의 출세 작업에 치맛바람을 일으키고 나왔는가?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사역은 거의 끝나갑니다.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는데 우선 자기의 두 아들과 예수님은 어떤 다른 제자의 관계보다도 친밀한 관계에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왜냐? 예수님과 이종사촌입니다. 혈육관계입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든지 마리아, 즉 예수님의 어머니와 살로메는 빨리 통합니다. 지름길로 연결되는 비밀 통로를 가지고 있으니까 자신만만합니다. 또, 평소 예수님의 마음을 관찰해 볼 때 열두 제자 가운데 예수님의 제일 사랑하는 제자는 자기 아들, 바로 요한입니다. 그것은 성경에 나옵니다. 사랑받는 제자라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살로메의 마음에는 ‘틀림없어! 예수님의 마음은 우리 아들에게 제일 많이 있어.’ 보십시오. 예수님은 어떤 특별한 의미 있는 일을 행하실 때 열두 명의 제자 가운데 세 사람을 선택합니다. 변화산에 올라가서 신비한 광경을 보여주실 때 다른 제자들은 오지 말라 하셨습니다. 야고보, 요한, 베드로 세 사람만 데리고 올라가셨습니다. 그래서 세 사람만 그것을 보았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그를 살리러 가는 그 현장에도 다른 사람은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아무도 들어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야고보, 요한, 베드로만 데리고 가셨습니다. 이 두 아들은 항상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철야기도를 하실 때 다른 제자는 못 오게 하셨습니다. 야고보, 요한, 베드로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살로메의 두 아들은 언제나 빠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틀림없다.’ 그래서 어머니 살로메의 마음에는 자신감이 있을 만합니다. ‘우리 두 아들은 충분히 열두 제자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특별 관심과 사랑 가운데 있는 것이다.’ 이렇게 확신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습니다. 베드로가 걸립니다. 가만히 보니까 이 베드로가 심상치 않게 수제자의 자리를 확보해 나갑니다. 살로메는 이 베드로 때문에 사실 불안한 겁니다. 그래서 오늘 그 베드로 앞에서 “명하소서. 아예 이쯤에서 다른 사람들이 절대로 이 자리를 넘보지 못하게 좌편, 우편의 권세를 내 아들 두 사람에게 이제 임명장을 주소서.” 이렇게 말해놓으니까 분위기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살로메가 그럴만한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살로메는 예수님의 경제적 후원자였습니다. 잘 살았습니다. 선교 사역에 절대적 도움을 주었습니다. 예수님도 그의 소원을 거절하기 힘든 관계입니다. 이러한 모든 관계를 이리 재어 보고, 저리 재어 봐도 절대 자신감이 있으니까 대담하게 나와서 그러한 자기의 마음을 충분히 발표한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이러한 행동이 가져올 수 있는 파장을 계산하지 못할 미련한 여자가 아닙니다. 머리 회전이 빠른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난처해 졌습니다. 이 돌발적인 당돌한 요청에 대해서 어떻게 답변하실 것인가? 예수님은 아주 어려운 상태에 빠졌습니다. 사실 이 때 인간 예수의 마음을 우리가 헤아릴 수 있습니다. 싫으나 좋으나 열두 제자는 3년 동안 자신들의 모든 내용을 다 포기하고 자기를 따라왔습니다. 사실 리더로서 예수님도 이 제자들에게 만족할만한 선물을 주고 싶습니다. 왜 안주고 싶겠습니까? 한 조직의 리더가 갖는 아름다운 마음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저 같은 목사도 갈보리 교인들이 원하는 것을 모두 주고 싶지 거절할 마음이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 사정은 좀 다르지만 다 똑같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남자들은 가정의 가장으로서 가족들에게 원하는 선물은 뭐든지 다 들어주고 싶습니다. 그것을 거절하고 싶은 아버지가 어디 있습니까? 가족들이 원하는 것을 다 해주고 싶습니다. 주님도 지금 열두 명의 자녀를 거느린 가장 같은 위치에 있는데 그들이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고 싶습니다. 아픔이 무엇인가? 자신이 절대로 줄 수 없는 것을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이거 어떡하나?’ 남자들 잘 모르지만 요즘에 여자들 핸드폰에 유행하는 문자가 있습니다. “사정상 남편 급매합니다. 해당 구청에 정품으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명예 양도해 드립니다. 아끼던 물건인데 유지비가 많이 들어서 할 수 없이 급매합니다. 아직 쓸 만하고 AS는 안되고 반품도 사절하고 덤으로 시어머니까지 끼어 드릴 테니 사 가십시오.” 이런 문자가 오고 간다고 합니다. 예수님인들 제자들이 소원하는 것을 모르시겠습니까?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이 절대 주실 수 없는 것을 요청했습니다.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느냐? 도대체 내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이 무슨 길인지 알고 있기나 하고 그런 요청을 하느냐? 만약 당신이 내가 가는 이 길이 무슨 길이란 것을 알았다면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오히려 안하려고 도망을 갈 것인데, 모르기 때문에 나한테 그런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이 그의 말씀대로 고난의 잔을 마실 때 제자들은 좌편, 우편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만약 살로메가 정말 예수님을 바로 이해하였다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 비아돌로로사 골고다 가는 그 언덕에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지고 고통을 받으시는 예수님 곁에 가서 “예수여! 이 무거운 십자가를 어떻게 혼자 지고 가시겠나이까? 내 두 아들은 젊습니다.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서 주님을 도와 이 무거운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게 하옵소서.” 이래야 합니다. 예수님이 바라셨던 것은 그런 말입니다. 만약 그렇게 말했다면 예수님께서는 살로메에게 무엇이라고 답변하셨겠습니까? “여자여! 그대는 장하도다. 나는 제자를 키운 보람을 오늘 찾았노라. 그래, 너의 두 아들은 하늘의 복이 있을지어다.” 아마 흐뭇하고 감격해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살로메도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도 예루살렘의 지도자들도 갈릴리 사람들도 다 똑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가 민족 해방자가 될 것이며 장차 이루어질 아브라함 후손의 도성인 예루살렘의 왕권을 갖게 될 것이다. 집권자가 되어서 백성의 임의로 주관하고 대인이 되어서 권세를 부릴 수 있는, 적어도 로마를 내쫓을 수 있는 정치적 권력의 왕이 되실 것이다. 그때가 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여러분! 좌편, 우편이라는 것은 우리나라에도 있었습니다. 옛날에 좌정승, 우정승 국가의 견제 세력의 두 그룹을 두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살로메는 어떻게 됩니까? 자기의 언니인 마리아가 대비마마가 됩니다. 그러면 자기는 그 곁에서 온갖 영광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지금 계산하고 있는데 심상찮게 떠오르는 실세 베드로가 신경이 쓰여서 ‘쟤는 왜 항상 저기 끼는 거야? 쟤가 왜 수제자야? 내 두 아들이 있는데…….’ 그래서 베드로 앞에서 “오늘 명하소서. 그 자리는 누구도 안주겠다고 임명장을 내 아들에게 지금 주소서.” 야심 많은 여인의 안방정치에 아주 강인한 요청이 나옵니다.
이제 예수님은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살로메의 요청에 대해서 제자들은 나름대로 생각을 추리하고 예수님을 의심합니다. “저 여자가 저렇게 당돌하게 나오는 것은 평소에 예수님이 암시적 신호를 보인 것이 아니냐?” 여기 제자들이 분히 여겼다는 간단한 문장으로 되어 있지만 이 문제가 그들 가운데 얼마나 심각한 쟁점이 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왜냐? 이런 기회가 올 때 남자들 세계는 출세를 위해서 장해 요소에 대해서 무자비합니다. 죽여 버립니다. 그게 남자들 세계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험악한 분위기를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가? 예수님은 이렇게 설교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크고자 하고 으뜸이 되려는 욕심이 있다면 너희는 섬기는 자가 되고 종이 되어야 하리라.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섬기려 하고 나의 몸까지 마지막에 모든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래도 내 좌우편에 있기를 원하느냐?” 사람들은 조용해졌습니다. 우리 살고 있는 이 사회를 이익사회라고 부릅니다. 그 말은 이익이 있을 때에만 몸을 바치도록 되어 있습니다. “한 달에 월급 얼마 줄 테니까 그 약속을 믿고 몸을 바쳐라.” 만약 일을 잘했다는 평가를 받으면 사람의 이익과 직분의 권위는 점점 더 많아집니다. “당신 계장으로 있었는데 과장이 되기도 하고 부장이 되기도 하고 나중에 사장으로 승격이 되기도 하고 그리고 거기에 따르는 이익도 점점 커지고…….” 그런데 큰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한 계념을 가지고 교회 들어온 사람입니다. 교회는 정 반대의 길을 갑니다. 교회 봉사 많이 하는 사람은 항상 교회 와 있습니다. 그 시간이 얼마입니까? 손해도 납니다. 헌금도 많이 해야 합니다. 교회 일 하다가 마음도 상합니다. 날마다 손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정반대의 생각을 하고 예수님께 살로메가 요청을 한 그 일에 대해서 “내가 간 길은 이 길이다. 따라오겠느냐?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느냐?” “마시겠나이다.” 그렇게 대답한 사람들이 다 도망갑니다.
역사가 흘러갔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대로 십자가에서 고난의 잔을 마시고 죽으셨습니다. 도망갔던 제자들이 하나씩 둘씩 다시 모여서 평소에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을 성령에 의해 재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아! 우리가 가야할 길은 이 길이구나. 결국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희생의 길을 가야 한다. 우리도 예수와 같이 죽어야 한다.” 그렇게 깨닫고 오순절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다음에 주님의 뜻을 이해하고 일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도망갔던 사람들이 무엇을 합니까? 변화산에, 그리고 몇 군데 특별히 초대받은 세 사람을 보십시오. 베드로는 예루살렘 초대교회 설립자가 됩니다. 이 땅에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를 최초로 예루살렘을 세우는데 제일 공헌한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그래서 가톨릭에서 베드로를 1대 교황이라고 합니다. 예수님 좌편, 우편에 앉기를 바랐던 야고보와 요한은 이 세상이 아닌 하늘나라에서 예수님 좌우편에 앉았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야고보는 열두 제자 가운데 주님을 위해서 피를 흘리는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요한은 밧모섬에 죄수의 몸으로 유배를 가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하여 인류에게 남겼습니다. 세 사람이 가장 큰 일을 했습니다. 사순절에 우리가 이런 절기를 지키고 기도를 하고 말씀을 묵상한 이유가 뭔가? ‘아! 예수님이 나에게 주시려는 것이 뭔가? 진심으로 예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소원이 뭔가? 내가 예수님께 바랐던 소원이 뭔가?’ 이것을 정리합니다. ‘아! 이제부터 나는 주님의 소원을 따르자. 그 길이 비록 피를 흘리며 험악할지라도 나에게 주신 사명이 이것이로구나.’ 그리고 도망갔던 제자들이 다시 모여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기초를 세웠던 일을 우리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정리하는 것이 사순절의 의미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되시기를 ….
당신도 으뜸이 될 수 있다
마 20:20-34 / 최영기목사
세상에서는 엘리트가 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모든 조건이 잘 맞아야합니다. 우선 집안이 좋아야합니다. 지방에 사는 부모보다는 도시에 사는 부모 밑에서 태어나는 것이 좋습니다. 무모가 재력이 있어서 좋은 과외를 시켜줄 수 있어야합니다. 다음에 좋은 대학에 입학을 해야합니다. 졸업한 대학이 신통치 않으면 엘리트가 되는 것이 힘듭니다. 졸업한 후에는 좋은 회사에 취직을 하던지 좋은 대학원에 입학을 하여야합니다. 졸업하고 작은 회사에 취직을 하면 유명한 큰 회사로 옮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거기에다 결혼을 잘하는 것도 엘리트가 되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 이러한 모든 것을 다 갖추어야 되니 엘리트가 되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이 통치하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누구나 원하면 으뜸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늘나라 백성이 누리는 복입니다. 세상에서 엘리트가 되고 으뜸이 되는 것보다 하늘 나라에서 으뜸이 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잠시 존재하지만 하늘 나라는 영원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으뜸은 잠시이지만 하늘 나라의 으뜸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으뜸이 되는가?
1. 고난을 각오한다
으뜸이 되기 위하여 고난을 각오한다는 것은 하늘 나라에서 으뜸이 되고자하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으뜸이 되고자하는 사람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저는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 중에서 게으른 사람을 보지 못했고 잠 많이 자는 사람을 보지 못했고 약속 시간에 늦는 사람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남보다 안 자고 남보다 더 오래 일하고 남보다 더 성실 하려 했기 때문에 성공한 것입니다.
하늘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으뜸이 되려면 희생을 치를 각오를 해야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요한과 야고보 어머니가 아들과 함께 와서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두 아들을 가장 높은 두 자리를 차지하게 해달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다른 복음서를 비교하여 보면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 이름은 살로메이고 예수님 어머니 마리아와 자매 관계인 것을 추정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모벌이 되니까 이런 부탁을 할 수 있었다고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물론 이들은 원하는 약속을 받아내지 못했습니다. 성자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계신 동안에는 하나님에게 철저하게 순종하셨습니다(빌 2:6-7). 그래서 누가 하늘 나라 에서 큰 사람이 되느냐고 하나님에게 맡겼습니다. 잔이라면 고통과 고난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면서 다가올 고난을 잔에 비유하셨습니다(마 6:29). 두 형제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고난의 잔을 마셨습니다. 야고보는 사도 중에서 첫 번째 순교하는 영광을 누렸고(행 12:1-2) 요한은 계시록에서 밧못섬에 귀양을 갔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계 1:9).
이때에 예수님께서 왜 "내가 마시려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고 물었겠습니까(22절)?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 되려면 고난을 감수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계신 것 아닙니까? 이에 대하여 두 제자들은 씩씩하게 마실 수 있다고 대답을 합니다. 이들이 어떻게 이렇게 대답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제자들도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 되려면 고난을 감수해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하늘 나라에서 으뜸가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면 고난을 감수할 각오를 하시기 바랍니다. 남에게 오해도 받고 잘못하지 않고도 먼저 사과해야할지도 모르고 열심히 섬겨준 사람에게 배신을 당해야할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으뜸가는 사람이 당연히 치러야 하는 대가입니다.
지금은 가정 교회가 유행처럼 되어서 가정 교회를 하지 않으면 유행에 뒤지는 것처럼 생각할 정도가 되었지만 제가 처음 가정 교회를 시작할 때에는 이단이라는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이 지역 목사님들이 청문회 비슷한 것을 만들고 오라고 해서 가서 자신을 변호하기도 해야했습니다. 그러나 속이 상하면서도 크게 흔들리지 않았던 것은 신약교회를 회복해보자는 운동을 일으키면 반대와 저항이 없을 수 없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큰 일을 하려면 반대와 저항과 핍박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주를 위하여 큰 일을 하고 으뜸가는 사람이 되려면 고난과 희생을 불가피합니다. 그러므로 고난과 희생과 핍박을 예상할 뿐만이 환영하고 환영할 뿐만이 아니라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마 5:11-12). 사도 베드로도 고난을 당하면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벧전 4:13-14). 주님께 쓰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고난과 희생과 핍박을 두려워하여 사양하지 않는 성도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섬긴다
두 제자가 자리 청탁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머지 제자들이 분개합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 하늘 나라 에서 위대한 사람이 되고 으뜸이 되는 원리를 가르쳐주십니다(26-27절). 그것은 섬기는 사람이 되고 종이 되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으뜸이 되기 위하여서는 힘이 있어야합니다. 실력도 있어야하고 체력도 있어야하고 머리도 좋아야하고 아는 사람도 많아야합니다. 그래서 으뜸이 되는 것이 어렵습니다. 으뜸이 되었다고 해도 더 실력이 있고 더 머리가 좋고 더 아는 사람이 많은 사람이 나타나면 으뜸 자리를 내 주어야합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 에서는 섬기는 사람이 위대한 사람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원하기만 하면 위대한 사람이 될 수가 있습니다. 가장 많이 섬기는 종이 되기로만 결심하여 으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 목자 가운데에 사역의 열매도 많고 주위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목자들이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에는 세상적인 자격을 따지면 별로 갖추지 못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어떻게 인정받는 지도자가 되었습니까? 이들의 공통점은 남을 잘 섬긴다는 것입니다. 섬기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권위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순종하고 으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비교적 건강한 이유는 섬기는 사람들이 많아서입니다. 섬기는 목자들 가운데에서 더 많이 섬기고 더 낮다고 다른 목자들이 인정해주는 사람들이 집사가 되어서 교회 일을 돌보니 교회가 건강해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많은 교회가 약한 상태에 있는 이유는 섬기는 사람들 지도자로 세우지 아니하고 사회 신분이 있는 사람, 성경 공부를 많이 한 사람, 재력이 있는 사람을 세우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지도자의 고갈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도자가 되겠다는 사람은 많습니다. 왜 지도자가 되겠다는 사람들은 많은데 국민들은 지도자가 없다고 합니까? 다 다스리는 지도자가 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섬기려는 지도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인만이 섬기는 지도자가 될 수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섬기는 지도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첫째는 동기 부여가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높아지기 원하는 이유는 자신을 섬기는 사람을 많이 거느리고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고 재는 맛이 있기 때문에 지도자가 되고 높아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25절). 섬기는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둘째는 모델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델로 삼는 지도자는 다스리는 지도자입니다. 물론 입으로는 고사에 나오는 섬기는 지도자를 찬양을 하지만 실제로 되고 싶은 지도자는 다스리는 지도자입니다. 셋째로 능력이 없습니다. 섬김은 의도만 갖고 있다고 되지를 않습니다. 세상 사람은 섬김을 살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잠시 섬김의 삶을 살다가 포기하기도 하고 섬김으로 시작했다가 다스리는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섬기는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늘 나라 에서 큰 사람이 되고자하는 확실한 동기 부여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 그리스도인에게는 확실한 모델이 있습니다. 자기 몸을 버리기까지 하시면서 섬김의 본을 보이신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28절). 또 그리스도인에게는 성령님이 내주하시면서 섬김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저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섬기는 지도자들이 많이 있어야 세상이 변하는데 그리스도인만이 섬기는 지도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목자들 가운데에는 목자 되기 전에는 세상적인 다스리는 지도자 노릇을 하다가 목자가 되어 목장에서 섬기는 연습을 하면서 직장에서도 점점 섬기는 지도자가 되어 가는 것을 많이 봅니다. 한국에 간 이진수 집사님은 주말에 회진을 돌 때에 보통 의사들이 하듯이 레지던트를 시키지 않고 본인이 직접 돈다고 합니다. 환자는 섬김의 대상이라는 자세 때문입니다. 사업을 하시는 목자 가운데에는 사업이 어려워져도 자신을 포함하여서 전 직원을 월급을 줄여서 감원을 하지 않는 분이 있습니다. 직원을 섬기는 사장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초등 학교 교사를 하는 딸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교사가 된 것을 단순히 직업으로 생각하지 말고 남을 섬기는 방법으로 생각해라. 공부 잘하는 애들 뿐만이 아니라 공부를 못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들에게 관심을 더 쏟아주어라. 그래서 그런지 말을 듣지 않던 아이들이 자기 반에 들어와서는 착한 아이, 공부 잘하는 아이가 된다는 말을 들으면서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다 섬기는 사람이 되어서 하늘 나라 에서도 으뜸이 될 뿐만이 아니라 사회에서도 으뜸이 되어서 사회를 바꾸고 나라를 바꿀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가여운 마음을 갖는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떠날 때에 장님 둘을 만났습니다. 이들은 큰 소리도 예수님에게 애걸하여서 눈을 떴습니다(29-34절). 마태가 이 사건을 왜 이 부분에 삽입했을까요? 마태는 예수님의 모습 가운데에서 섬김의 본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은 갈 길이 바쁘신 분이십니다. 해야할 일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맹인 둘이 큰 소리를 지를 때에 주위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꾸짖은 이유도 (31절)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바쁜 주님의 갈 길을 방해하는 것처럼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름을 멈추시고 그들을 고치셨습니다. 왜 고치셨습니까? 34절에 보면 그들을 가엽게 여기셨다고 합니다.
섬기는 지도자가 되려면 가여운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큰 지도자가 되면 효율이 중요하고 결과가 중요해집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섬기는 지도자가 되려면 이웃을 불쌍해하는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예수님처럼 바쁜 일정을 멈추고 불쌍한 사람들을 돌볼 수 있어야합니다.
사실 오늘 설교가 가장 필요한 사람은 저입니다. 교회가 커지고 가정 교회 사역이 이곳 저곳으로 확대되면서 시간에 쫓기다보니까 중요한 일만 신경을 쓰게 됩니다. 사역에 꼭 필요한 사람들만 만나게 됩니다. 그러다가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읽으면서 다시 정신을 차렸습니다. 사역과 전연 상관이 없는 분들, 불우한 분들을 위한 시간을 할애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니면 다스리는 지도자가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결심은 신년 결심과도 상관이 있습니다. 설날은 우리 집에서 목회자들과 집사님들이 모여서 협의회를 갖고 다음에 준비한 음식을 나누고 둘러앉아서 새해 결심을 나눕니다. 나는 무엇을 결심할까 생각을 해보니까 결심할 것이 생각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새로운 결심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도 예수님 닮은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지요. 그러면서 깨달은 것이 나도 모르는 새에 자신의 변화는 추구하지 않고 교인들의 변화만 기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변화해야한다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깜짝 놀라서 신년 결심을 주일 내 설교를 반드시 1회 이상 삶에 적용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사역에 몰두하다보면 효율과 결과에 매이기가 쉽습니다. 사랑과 가여워하는 마음을 잊기가 쉽습니다. 그러면서 섬기는 지도자가 다스리는 지도자가 되어서 이웃에게 도움을 주기보다 이웃에게 상처를 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속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으뜸이 되기 위하여서는 항상 마음에 가엾어하는 마음을 간직해야합니다. 사람이 숫자로 보이고 사역하면서 조바심과 사람들에 대한 짜증으로 차 있을 때에는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연민의 마음을 기도하여서 항상 으뜸 되는 사역자로 있어야할 것입니다.
4. 세상적인 사고를 배격한다
으뜸이 되기 위하여서는 세상적인 사고에서 하나님의 사고로 관점을 바꾸어야합니다. 으뜸이 되기 위하여서는 종이 되어야한다는 것은 당시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사상입니다. 당시에 겸손은 미적이 아니라 악덕이었습니다. 철학자 니체도 겸손을 나약한 사람에게만 필요한 악덕으로 매도하였습니다. 그는 초자연인 (super hero)을 갈구하였습니다. 히틀러가 이 사상을 받아들였고 그 결과 수많은 유대인을 학살하였습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천국에 있다고 바울을 말했습니다(빌3:20). 우리는 천국의 시민으로서 하늘 나라 나라 법에 의하여 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사람과 다르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하늘 나라 의 법과 세상의 법이 다른데 어찌 그 백성들의 삶이 다르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많은 분들이 달라 보이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고와 방식을 쫓아갑니다.
술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저는 술 먹는 것이 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서양 사람들처럼 음식 맛을 더하기 위하여 음식과 더불어 와인이나 맥주를 한 잔 하는 것은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국 사람은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술을 끊어야합니다. 한국 사람은 음식 맛을 돋구기 위하여 술을 먹는 것이 아니라 술을 먹기 위해서 음식(안주)을 먹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람은 취하기 위하여 술을 마십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믿는 사람들, 집사 장로들도 같이 술을 마시고 룸 사론에도 같이 간다고 합니다. 세상과 다르게 되면 왕따를 당하고 사업이고 직장 생활에서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인구가 25%라면 4명 중의 하나가 기독교인인데 이들이 마음을 합하면 술 문화 하나 바꾸지 못하겠습니까? 또 하나님이 계시면 왕따 당하여 일에 실패하도록 두어두시겠습니까?
우리는 새로운 문화로 세상 문화를 바꾸어야합니다. 그러기 위하여서는 다르게 사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합니다. 세상과 다르게 살면 처음에는 시기도 하고 왕따도 시키지만 계속 의연하게 자세를 잡으면 세상 사람들이 따라 오게 되어있습니다. 영화배우 가운데에 Michelle Pfeiffer라는 여자 배우가 있습니다. Batman 영화에도 출연한 여우입니다. 이 사람 입술 양끝이 약간 올라가서 어떻게 보면 언청이 같습니다. 본인도 입술 때문에 비관을 많이 했답니다. 그런데 영화 몇 개가 히트를 치니까 젊은 여자들이 성형 외과를 찾아와서 그 배우 입술처럼 만들어 달라고 한답니다.
우리는 하늘의 법칙을 쫓아 살아서 세상을 변화시켜야합니다. 다르게 살면 핍박이 올 수도 있지만 겁낼 것 없습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글을 썼습니다. 주위 환경의 어려움 가운데 한 청년이 아버지를 찾아왔습니다. 하소연을 듣고 난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부엌에 갔습니다. 냄비 세 개를 난로 위에 얹어놓고 한 그릇에는 당근, 한 그릇에는 생 달걀, 한 그릇에는 커피 원두 콩을 넣고 물을 붇고 끓이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 당근은 흐물흐물해졌습니다. 계란은 삶아져서 딱딱해졌습니다. 아버지는 커피 원두 콩을 넣고 끓인 물을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향기 나는 커피가 되어있었습니다. 이 아버지가 가르쳐주려고 하는 교훈을 무엇입니까? 끓는 물 같은 역경이 닥쳐올 때에 어느 사람은 당근처럼 무너지고 어떤 사람은 계란처럼 강퍅해지지만 성도들은 커피 원두 콩처럼 역경을 향내 나는 커피처럼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성도님들이 평범한 신앙 생활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고난과 역경을 환영하고 세상과 달라지기는 두려워하지 않으면 열심히 섬겨서 하늘 나라에서도 으뜸이 되고 세상에서도 으뜸이 되는 삶을 선택하시기를 바랍니다.
섬기는 공동체
마 20:25-28 / 김상복목사
교회는 섬김의 공동체입니다. 성숙한 사회에는 자원봉사자들이 많습니다. 우리나라는 자원봉사자 비율이 1-2%정도도 안 되지만 선진 국가들은 50%가 넘습니다. 어느 봉사단체의 글을 읽고 제가 감동을 받았습니다. “자원봉사는 21세기의 패션(fashion)이다. 자원봉사가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음을 믿는다.” 일종의 신앙고백이군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사회봉사에 참여하여 성숙한 사회를 이루게 한다.” 즉 성숙한 사회와 자원봉사자 사이에 연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만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는 비성숙한 사회요,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남들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노력과 정성과 몸과 물질을 주어서 그들을 더 빛나게 하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가 성숙한 사회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봉사단체가 발표한 것인데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문화입니다.
감사한 것은 우리나라에 시민단체들이 많은데 리더들이 대부분 기독교인들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최근에 국제 구호활동도 많이 있지요? 기아대책기구라든지, 무주택자에게 집을 지어주는 사랑의 집짓기 “해비태트” 운동이라든지... 어느 건설회사는 신입사원을 선발하고 가장 먼저 자원봉사 교육을 시켰다고 합니다. 직원들이 자기만을 위해 살지 않고 시간 나는 대로 봉사를 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회사는 자원봉사 마일리지 시스템을 만들어서 자원봉사의 시간이 많으면 거기에 상응하는 혜택을 준다고 합니다. 저는 이런 글을 읽고 “우리나라가 참 좋아지는구나. 그리스도의 문화가 이제 사회에까지 번져가는구나”하고 흐뭇해졌습니다.
성남에 사시는 어떤 할머니에게 세 명의 자녀가 있는데 둘은 미국에, 하나는 호주에 있답니다. 그런데 어머니를 전혀 돌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연락을 끊은 지가 10년이 넘었답니다. 그래서 성남의 자원봉사자들이 할머니를 찾아가 목욕도 시켜드리고 청소도 해드리고 먹을 것도 만들어 드렸답니다. 그러다가 무슨 일이 생겨서 한 달을 걸렀는데 그 사이에 그만 할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뒤 늦게야 봉사자들이 부랴부랴 가서 장례를 치러드렸습니다. 그 이후로 독거노인 모닝콜이라는 자원봉사가 생겼다고 합니다. 자기 동네에서 혼자 사시는 노인들에게 하루에 한 번 규칙적으로 전화를 드려 안부를 묻는 일입니다. 이런 봉사는 참 좋은 일이지요. 우리 교회도 성남의 복지관을 운영하지 않았습니까? 독거노인들이 점심을 제대로 잡수시지 못하니까 하루에 한 끼 점심을 대접해드렸지요. 거동이 힘들어 복지관에 나오지 못하는 분들에게는 반찬을 배달도 해드렸습니다. 자원봉사를 한 분들에게 기름값을 할인해 주는 주유소가 있다지요. 다 좋은 일들입니다. 우리나라도 이제는 자원봉사자들이 많이 나타나서 성숙한 사회로 가고 있습니다.
섬김은 대가를 바라지도,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도 않습니다. 알아주지 않는다고 섭섭해 하지 않습니다. 섬김은 그 자체에 의미가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이웃과 사회를 위해 자신을 바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 봉사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이름을 내기 위해 자원봉사를 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제가 실망한 일이 있습니다. 어떤 남자가 제게 와서 자기 아들이 대학 1학년인데 대학에서 봉사기록부를 가져오라고 하는데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시간이 없으니 그냥 봉사했다는 증명서를 좀 만들어달라는 것입니다. 아들이 그런 부탁을 하면 “네가 아버지를 거짓말쟁이로 만들려고 하느냐? 아버지를 어떻게 보고 이러느냐?”고 혼을 내도 모자랄 텐데 아들 편을 들면서 열심히 알아보고 있으니 그 가정교육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남의 복지관에도 어느 어머니가 오셔서 자기가 봉사를 하고 아들이 봉사했다고 써달라고 했답니다. 우리 교인입니다. 어쩌면 여기에 앉아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만약 여러분 중에 계시다면 오늘 회개하십시오. 어떤 인정을 받기 위해서 봉사한다는 생각 자체가 잘못입니다. 봉사는 섬김의 자세로, 자원해서, 기쁘게 할 때 가치가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람은 대개 최고의 권력자가 되어서 권세를 부리며 마음대로 살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요한과 야곱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당시 18세, 20세 정도로 예수님의 제자 중에 제일 나이가 어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머니를 모시고 와서 전에는 안하던 짓을 합니다. 예수님께 넙죽 엎드려 절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너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시니 그 어머니가 하는 말씀이 “예수님이 장차 왕이 되시면 우리 큰 아들은 왕의 오른 쪽에, 작은 아들은 왼쪽에 앉혀 주십시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는 것이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정말 위대한 것은 세상이 말하는 것과 다르다.”
그런데 요한과 야고보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열 제자가 듣고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겼다”고 하였습니다. 왜 화가 났을까요? “우리도 지금 그걸 보고 따라 다니는데 저 젊은 것들이 자기 어머니까지 동원해서 선수를 치네” 한 것입니다. 사실 야고보와 요한은 많은 직원을 거느린 어업회사 사장의 아들로 야심이 대단했습니다. 요한은 상당히 앞서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그 당시에 벌써 세례 요한의 운동에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자기 선생인 세례 요한이 어느 날 예수님을 보고 “나는 저 사람의 신발 끈도 풀지 못한다. 저 사람은 흥하고 나는 쇠하리라” 하자 바로 그를 떠나 예수님에게로 간 사람입니다. 그는 명예와 권력을 적극적으로 원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나머지 열 명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큰 것을 좋아하지요. 조그만 잔으로 술을 마시고도 대포 한 잔 했다고 합니다. 작은 나라지만 이름은 대한민국이라고 했지요. 우리는 과시하고 싶어 합니다. 내가 잘 난 것을 보이고 싶어요. 이것이 모든 인간의 욕구입니다. 왜 그럴까요?
높은 자리와 권력을 가지면 두 가지를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본문은 이야기합니다.
첫째로,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둘째는 “또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라고 합니다. 권력과 돈과 명예와 높은 지위가 있으면 자기 멋대로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고 자신의 명령에 사람들이 죽고 살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쩌다 사극을 볼 때면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한지요. 내용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런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이 감사한 것입니다. 권세를 부리고 마음대로 살고 모든 사람이 내 앞에서 무릎 꿇는 것을 보고 싶은 것이 인간의 소원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이 모두 그랬다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큰 자리 하나 갖고 싶어서 애타하는 것이 우리 한국 사람들의 모습이지 않아요? 이 세상은 권력자, 부자, 이름 있는 자들을 우러러 보고 그렇게 되기를 갈망합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은 우리가 진정 위대하고 으뜸가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의 어부 출신이 대다수인 평범한 제자들을 모아놓고 “너희들은 위대한 사람이 되어라. 으뜸가는 사람이 되어라”고 하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위대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위대한 사람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으뜸이 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에 의하면, 잘 섬기는 사람이 최고의 인물입니다. 자리가 아니고 타이틀이 아니고 권력이 아닙니다. 권력을 가졌으면 그 권력을 가지고 국민을 가장 잘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권력을 주셨습니까? 국민을 잘 섬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권력으로 자기 주머니만 채우고 사과박스로 돈을 받았다가 들켜서 망신을 당하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왜 여러분에게 박사학위를 주며, 사장을 만들어주며, 국회의원, 대통령 등 권력자를 만들어주십니까?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자기의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을 잘 섬기라고, 그들에게 최고의 유익을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가장 위대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세상의 눈으로는 자신의 실력과 능력을 과시하는 사람이지만,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다른 사람들을 위대하게 만들어 놓는 사람이 진정 위대한 사람입니다. 자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편안해지고, 자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건강해지고, 자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즐겁고 행복하고 존엄성을 느끼게 되고... 이런 것이 바로 진정 위대한 사람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타이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26절) 라고 하였습니다. 정말 위대한 사람은 집권자가 되어서 마음대로 권세를 부리고 자기 잘난 것을 자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여러분과 저를 놓고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예수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 사람들과 다른 가치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껍데기가 아니라 속을 본다는 것입니다. 자리가 아니라 섬김을 본다는 것입니다. 권력과 기회와 영향력과 돈과 건강을 받았으면 그것을 통해서 주위 사람들을 유익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과는 달라야 한다고 하십니다. 여러분! 정말 다릅니까? 다르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진정한 섬김을 통하여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위대한 사람들, 으뜸가는 사람들, 제일가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는 영어성경에 “No! Not so among you!”라고 되어 있습니다. 부정어를 두 번 사용함으로써 이 세상과 기독교인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종류가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고, 위대함의 정의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26절)고 하셨습니다.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자리를 통해서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주고 잘 섬기는 사람이 진정 위대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위인이 많지 않습니다. 머리 좋은 사람, 학벌 좋은 사람, 돈 많은 사람, 유명한 사람들이 세상이 보는 위대한 사람들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위대한 인물들이 얼마든지 어디에나 있습니다. 신입사원 중에도, 중견사원 중에도, 높은 사람들 중에도 위대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과 그 사상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위대한 사람이요, 그 사람이 나라와 민족과 사회와 공동체에 큰 유익을 줄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첫째가고 으뜸가고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섬김에 있는 것이지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종종 교회에서도 세상적 가치관이 보입니다. 엿새 동안 세상에서 살다가 일곱 째 날에 교회에 오는데, 그래서 세상을 교회에 심으려는 잘못된 태도가 나타납니다. 세상을 교회로 갖고 와서 교회를 세상과 똑같은 곳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으뜸가고 위대한 것이 무엇인지를 잘 배워서 세상으로 다시 나가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문화를 세상에 일으켜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며 우리에게 보여주신 본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우주를 창조하시고 소유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이 땅에 있는 우리를 하늘나라로 들어가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모든 것을 소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가난하게 되신 것은 가난한 우리를 부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신 것은 사람의 아들들을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위대하신 예수님이 자기를 희생해서 우리를 위대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최근에 미국에서 그리스도의 수난(The Passion of the Christ)라는 영화가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 열흘 동안의 이야기를 영화화한 것인데, 예수님의 고난을 너무 생생하게, 의학적으로 너무 정확하게 표현해서 보는 사람들이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가기도 한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반유대주의를 일으켜 자기들을 핍박하려고 만든 영화라고 항의하기도 합니다. 감독 멜 깁슨은 이 영화를 만들면서 자신의 영적인 삶이 많이 변화되었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우리나라에는 그 영화가 들어오지 않았는데 아마 곧 오겠지요. 기독교인이 천만 명이 넘으니까 또 하나의 기록을 세우겠군요. 예수님은 그렇게 희생하셨습니다. 자기를 바쳐서, 자기를 가난하게 해서, 자기를 없애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면서, 자기를 죽이며 섬기셨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고, 자기가 윗사람이라고 대접받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여자들 중의 한 분이 룻입니다. 룻기에 보면 주인 보아스가 농사짓는 하인들에게 먼저 “하나님께서 너희와 함께 있기를 원하노라”라고 축복하며 인사합니다. 한국적인 상식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어떻게 주인이 먼저 하인들에게 인사를 합니까? 하인들이 먼저 인사를 하면 점잖게 받거나 무시하는 것이 한국적 주인의 모습이지요. 그러나 예수를 믿는 주인들은 먼저 하인들에게 인사를 합니다. 먼저 보아스가 인사하고 축복하니까 그 하인들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복주시기를 원합니다”라고 답례합니다. 제가 이 부분을 깊이 묵상해 보았습니다. 기독교인의 문화는 윗사람이 먼저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축복을 빌어주는 데는 나이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가족들과 이웃들에게 먼저 축복을 빌어주는 것이 신자들의 문화입니다.
제가 미국에 가서 제일 이상했던 것이 누구나 모르는 사람을 보고 “Hi!”하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이상하게 느껴지고 불편했습니다. 그러나 오래 지나고 보니까 그것이 바로 기독교의 문화였습니다. 어른이나 윗사람이 먼저 축복을 해주면 젊은 사람들이나 아랫사람들이 얼마나 감동을 받겠습니까? 여러분 중에 어른이라고 생각되시는 분은, 또는 교회의 어른이라고 생각되시는 분은 먼저 젊은 사람들에게 다가가 축복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보고 젊은 사람들이 “사회에서는 어른들이 인사를 받으려고만 하는데,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어른들이 젊은 사람들을 앞장서서 위해주는구나” 생각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문화가 우리 교회와 가정에 풍성하게 임하기를 원합니다.
성경은 “서로서로 섬기라”고 합니다. 제가 “서로서로”라는 성경구절을 찾아보고 놀랐습니다. 무려 50여 가지가 있더군요. 남편에게 아내를 사랑하라 하고, 아내들에게는 남편에게 복종하라 하고, 또 서로서로 복종하라고 하였습니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습니다. 자기의 위치에 상관없이 먼저 섬기려는 기본적인 태도를 가질 때 여러분과 저는 이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에서 으뜸가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 주셔서 새로운 섬김의 문화가 여러분의 몸에 배이고, 우리 교회와 가정과 사회에 예수 그리스도의 문화가 왕성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섬겨주라
마 20:25-28 / 김상복목사
이 세상에서 아무리 찾아보아도 가정처럼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가정의 달 5월 첫째 주에는 어린이들을 어떻게 키울지 생각해보았고 둘째 주에는 부모님들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셋째 주와 넷째 주에 이어 오늘 마지막 주일에는 사랑의 언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서로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랑의 언어를 배워서 적절히 사용하자는 것입니다. 사랑의 언어란 말 뿐 아니라 행동과 우리의 삶 전체를 이르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각자 알아듣는 언어가 다릅니다. 오늘은 사랑의 언어에 대해 세 가지를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사람들은 언제 사랑을 느낄까요? 선물을 받을 때입니다. 크던 작던, 찬물 한 그릇이라도 무엇인가 서로 주고받으면 사랑을 느낍니다. 사랑은 존경을 나타내는 것이고 선물은 존경과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나라와 문화 언어 종족을 막론하고 사랑하는 사람끼리 선물을 주고받는데 이것은 선물이 사랑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손님이 오시면 따뜻한 정을 표하기 위해 마실 것 한 잔이라도 내놓습니다. 주는 것을 참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27가지의 영적 은사 중에 'Gift of Giving'(주는 은사)라는 것이 있습니다. 남에게 무엇인가 주는 것이 너무 기쁘고 즐겁습니다. 우리 권사님 중에 음식솜씨가 아주 뛰어난 분이 계십니다. 아마 권사님의 음식을 안 먹어본 분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음식을 만들어 주고 싶고, 주면 즐겁습니다. 대접을 받는 사람은 사랑을 느끼게 되지요.
예전에 우리나라에는 서로 담배를 권하는 아주 나쁜 관습이 있었습니다. 모르는 사람과 대화를 할 때 담배를 한 개비 권하고 시작하기도 했습니다. 당시에는 그것이 정(情)이었지만 지금 알고 보니 아주 고약한 일을 한 것입니다. 폐가 나빠지고 입안에 암이 생길 수 있어요. 그 때는 그런 것을 잘 몰랐지요. 잘못된 사랑으로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혔으나 그 당시에는 그것이 하나의 문화였습니다. 요즘은 또 술을 권해서 상대방을 완전히 망가뜨려놓기도 합니다. 그것도 일종의 사랑 표현이라고 착각합니다. 초대 한국교회 당시에는 술 담배를 했었습니다. 그것이 천당 가는 것과는 상관이 없으니까요. 그러나 술 담배가 백해무익하고 술 때문에 가산을 탕진하는 사람들을 보고 일찍부터 좋지 않은 습관들을 제거했습니다. 그리고 그 돈을 모아 만주와 제주도 등지에 선교사를 보냈습니다. 참 잘 한 것입니다.
선물은 사랑의 상징입니다. 부부 사이에 최악의 경우는 결혼반지를 빼 내던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둘 사이의 사랑이 끝났음을 의미합니다. 제가 지금 끼고 있는 반지는 결혼반지는 아니지만 사랑의 상징입니다. 이전에 목회하던 벧엘교회가 준 것입니다. 우리 부부도 결혼하면서 금반지를 하나씩 만들어 끼었었는데 순금이라 색도 누렇고 물렁물렁해서 더 이상 낄 수가 없게 되었어요. 그래서 지난 번 금 모으기 할 때 교회에 냈습니다. 제가 한국으로 오기 바로 전날 밤, 벧엘교회가 큰 호텔에서 파티를 열었습니다. 제가 도착하자마자 입구에서 교인들이 저를 붙잡더니 다짜고짜 제 넥타이를 풀고 나비넥타이를 매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제 아내를 어디론가 데리고 갔습니다. 5분 후에 제 아내는 면사포를 쓰고 나타났어요. “아니,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목사님, 오늘이 두 분 결혼 25주년이시지요? 그리고 내일 떠나시니까 저희가 지금부터 작별인사 겸 두 분의 25주년 결혼기념식을 거행하겠습니다.” 제 세 딸이 여자 들러리이고 부목사님 세 분이 남자들러리입니다. 웨딩마치가 울리고 수석부목사님이 주례를 서고 온 교인들과 함께 즐겁게 은혼식을 시작했습니다. 제 아내와 저 사이의 사랑을 확인한 후 덧붙여 “당신은 벧엘교회를 영원히 사랑하겠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제가 개척한 교회인데 어떻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교인대표들이 저에게 이 반지를 끼워주었습니다. 지금도 이 반지를 볼 때마다 따뜻한 벧엘교회 성도들을 생각하고 참 즐겁고 행복했던 그 시간들을 늘 상기합니다. 교회를 세우고 오랫동안 수많은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나고 행복했던 그 시간들을 기억합니다.
선물은 사랑의 상징입니다. 여기 돌조각 하나를 가지고 왔습니다. 팔려면 5원도 못 받겠지만 저에게는 좋은 선물입니다. 무너진 베를린 장벽의 돌조각입니다. 한국도 통일이 되기를 바란다며 독일 사람이 1990년 4월에 저에게 주었습니다. 저도 이산가족이거든요. 비록 한 조각의 돌에 불과하지만 제가 이것을 서재에 놓고 볼 때마다 한국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한 그 독일 사람을 기억하게 됩니다. 선물은 사랑과 관심의 상징입니다. 우리가 서로 선물을 주는 것은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여기 작은 카드가 하나 있습니다. 겉으론 하찮아 보이기도 합니다. “몽고를 위해 기도해주세요(Pray for Mongolia)"라고 써 있는 이 카드는 몽고인들이 저에게 준 선물입니다. 이런 것들이 제 서재 여기저기 놓여있어서 볼 때마다 그 사람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분들은 나를 생각하며 작은 것이나마 저에게 주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사랑을 표현하는 사랑의 언어입니다. "Thank you"라고 쓴 카드도 하나 있군요. 우리 대학생들이 몇 마디씩 저에게 글을 쓰고 겉에 자기들 사진을 붙여서 주었어요. 저는 사진 속의 얼굴들을 볼 때마다 우리 대학생들을 생각하고 사랑을 느끼고 기도하게 됩니다. 저는 평생 많은 사랑의 선물을 받았고 때로는 큰 선물도 있었지만, 사랑은 큰 돈이 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 더 보여드리겠습니다. 뒷면에 신문을 뜯어 붙이고 앞면에는 수채화로 우리교회를 그린 종이접시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의 솜씨이니 피카소와 비교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서재를 드나들며 이 그림을 볼 때마다 정다운 그 아이와 부모를 생각합니다. 돈의 가치가 아니라 우리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사랑의 가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선물 주기를 아주 즐거워합니다. 오늘 아침에도 어느 집사님이 저에게 선물을 가져오셨습니다. 잘 익은 토마토입니다. 그것 2개를 먹고 나왔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사랑의 표현입니다. 서로 주고받는 기쁨이 사랑입니다. 물론 선물 주고받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요. 돈을 잘 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축을 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축을 잘 하는 사람에게는 선물 준다는 것이 고통입니다. 한 푼이라도 모아야지요.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돈을 쓰지 않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쓰는 것이 기쁨이지요. 각각 언어가 다릅니다. 접근과 태도가 다릅니다.
여러분도 각자 여러분의 아내가 좋아하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동안 여행 갔다 오며 선물을 사다 주었을 때 아내가 가장 좋아한 것을 생각해보면 좋아하는 것 몇 가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 살면서 조금 놀란 것은 그들은 선물을 받으면 거의 까무러칠 듯이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뜯어보고는 “This is exactly what I wanted."(이게 바로 내가 원하던 거야) 합니다. “Wonderful! Magnificent! Fantastic!” 저렇게 좋아하는데 또 선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요. 그런데 우리는 선물을 받게 되면 “뭐 이런 걸 가져오셨어요?” 하지요. 때로는 선물 받기가 곤란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누군가가 선물을 주면 기쁨으로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행 중에 아내를 위해 뭔가를 사왔는데 “색깔이 틀렸어. 이런 시시한 것을 사왔어”라는 말을 들으면 다시는 아내를 위해 사고 싶지 않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나를 이렇게 기억해주다니 너무 고마워요” 라고 인사하고 정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남편 몰래 다른 사람을 주십시오. 그래야 주는 기쁨이 있고 사는 기쁨, 돈을 쓰는 기쁨이 있지 않겠습니까? 각자 사랑의 언어가 다릅니다. 우리도 무엇을 어떻게 주어야 할지 연구해서 상대방에게 꼭 맞는 사랑의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서로의 사랑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의 언어는 선물을 주는 것인 동시에 받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랑의 언어는 자기 자신을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주시고 목숨을 주셨습니다. 로마서 12장 1절에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의 헌금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잘 쓰입니다. 확실합니다. 여러분의 시간과 재능도 교회에서 잘 쓰입니다. 그런데 그 무엇보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여러분 자신입니다. 저도 종종 이런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저는 연약하고 부족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입니다. 실수도 많고 생각도, 지혜도 부족합니다. 종종 문제도 일으킵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께서 쓰실 만한 존재가 못됩니다. 그러나 나를 바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받아주시고 사용하여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제일 기뻐하시는 것이 나를 바치는 것일 것입니다. 또 나를 바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하셨어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좋은 선물도 반갑지요. 그러나 자기 자신을 서로에게 주는 것이 가장 소중한 선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러분의 아이가 학교 축구시합에 나갔다고 하십시다. 초등학교 축구시합이 뭐 그리 대단하겠습니까? 그러나 “너 잘 해”하고 말 것이 아니라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와서 아빠의 눈으로 그 아이의 뛰는 모습을 봐주는 것이 바로 아이에게 아버지 자신을 주는 것입니다. 끝난 후에 다른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즐거워하는데 자기는 아무도 없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 자기 부모의 존재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저도 제 아이들을 키울 때 음악 콘서트 한다고 해서 가보면 아이들 솜씨야 신통치 않지요. 그러나 그 자리에 가서 아이와 함께 있어주는 것, 그것으로 아이들은 대단한 정서적, 감성적인 따뜻함을 느낍니다. 같이 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축복입니다.
아내가 “여보, 오늘 좀 빨리 들어와요” 했는데도 자정에 맞춰서 들어갑니다. 아무리 빨리 들어오라고 부탁을 해도 바쁘다, 회식이 있다 하면서 친구 동료들과 같이 지내느라고 늦습니다. 하루 종일 집에서 혼자 있는 아내가 사랑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집에 빨리 와달라는 것은 집에 와서 특별히 무엇을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같이 있어달라는 것입니다. 같이 앉아 TV를 보는 것만으로도 사랑을 느낍니다. 물건을 사 들고 들어와야 사랑이 아니라 내가 가족과 함께 있어주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에게 아버지의 칭찬 한 마디가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중년의 어느 분이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펑펑 웁니다. 이유를 물으니 “아버지가 나를 자랑스럽다고, 사랑한다고 하는 말을 일평생 한 번 듣고 싶어서 혹시나 하고 기대했는데 이제 돌아가셨으니 다시는 들어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도 슬펐지만 아버지의 따뜻한 말 한 마디를 아직도 기다리고 있는 자기의 모습이 슬퍼서 운 것입니다. 자식을 위해서든, 아내를 위해서든 여러분 자신보다 더 귀한 선물은 없습니다. 남편이 하는 일에 동참하고 같이 있어주는 것이 사랑의 언어입니다. 사랑의 가장 강력한 상징은 주는 것인데 선물을 주고 우리 자신을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부모의 가장 큰 기쁨은 자식들의 얼굴을 보는 것입니다. 돈을 드리거나 옷을 사오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에게는 자식의 얼굴과 목소리가 최고의 선물입니다. 부모는 자식의 음성을 들을 때 환희를 느낍니다. 부모님께 얼굴을 자주 보여드리십시오. 제가 참 즐겁게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우리 성도들 가운데 아들과 며느리, 사위, 손자 등 온 가족이 주일에 같이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제가 그들에게 어떠냐고 물으면 너무 좋다고들 하지요. 적어도 1주일에 한 번은 자녀들을 교회에서 만나니까요. 예배 마친 후에 같이 국수를 먹으며 얼굴을 보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 없답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나는 결혼하면 다른 교회에 가서 우리끼리 예배드리겠다고 생각하는 젊은이가 있으면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주중에 일부러 부모님을 찾아갈 필요도 없고 교회에서 예배드리며 자연스럽게 만나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주는 사랑을 나누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섬겨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본문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유능해지고 권력을 얻고 부자가 되고 통치자가 되어 사람들을 지배하며 살고 싶어 한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마지막 욕망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자기마음대로 말하고 행동하며 사람을 통치하는 것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너희들 중에는 절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세계, 영적인 세계에서는 가장 위대한 자는 섬기는 자다. 섬기는 자보다 더 위대한 존재는 없다. 통치자가 위대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세워주고 다른 사람의 종이 되어주는 것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요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해 나 자신을 희생하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물을 받아 자기 제자들의 더러운 발들을 다 씻으시고 수건으로 닦아주셨습니다. 이것이 위대합니다.
섬김을 받는 것, 큰 사랑입니다. 섬겨주는 것도 대단한 사랑입니다. 사도 바울도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갈 5:13)고 말합니다. 지난주에도 말했듯이 사랑은 일방통행이 아니라 쌍방 통행입니다. 서로 주고받는 것이지 한 쪽에서만 주고 섬기면 지칩니다. 주기만 하고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가슴에는 한이 맺힙니다. 사랑은 서로 섬기는 것입니다. 엄마가 아들에게 “쓰레기 좀 버려라” 하면 “네” 하고 벌떡 일어나 얼른 버리고 와서 “엄마, 더 할 것 없어요?”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엄마, 나 게임하는데 조금 있다가 할게요.” 이것은 엄마의 소중함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요즘은 남편들이 사랑을 표현하기 참 좋은 시대가 되었어요. 사회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고, 또 주택 자체가 아주 편리해졌어요. 예전에는 부엌을 드나들기가 구조적으로 불편했지만 이제는 거실 옆이 바로 부엌이지요. 남편들이 가끔 설거지를 도와주기가 좋습니다. 저도 어쩌다 한 번 하는데 괜찮아요. 설거지를 하며 제가 알게 된 것은 식사 후에 제 아내가 부엌에 있는 시간이 반으로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릇을 씻고 아내가 치우는 것이 반반이에요. 그걸 알고 나니 가끔 설거지를 도와주고 싶어요. 대단한 것이 아니지만 서로 섬기겠다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아내의 필요와 사랑의 언어가 무엇인지 찾아서 남편이 아내를 생각하고 존중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무엇이 내 아내, 내 남편, 내 자식, 내 부모님에게 맞는 언어를 찾아서 계발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 믿는 아내들에게는 남편이 교회 한 번 와 주는 것이 대단한 사랑입니다. 제가 여러 차례 봤지만, 남편이 어쩌다 교회에 나오는 날은 아내가 거의 미칩니다. 자존심 때문에 남편에게는 말 안 하지만 저에게 하지요. 남편이 저에게 인사하고 지나가면 아내는 뒤에서 저를 보며 너무나 좋아라 합니다. 그것이 자기를 주는 사랑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40대 초반일 때 60대 중반의 어느 장로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키도 크고 얼굴이나 풍채가 너무 잘 생기셨어요. 한국 사람으로서 그렇게 잘 생기신 분은 처음 봤습니다. 그런데 장로님 댁에 갔더니 아내 되시는 권사님은 장로님의 절반밖에 안되는 자그마한 분이셨어요. 그 장로님이 예수를 믿게 된 것은 아내가 남편의 사랑의 언어를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남편은 마작을 좋아했습니다. 주말이면 친구들을 불러 밤새도록 마작을 하면서 아내에게는 계속 음식을 해내라고 합니다. 보통 아내들 같으면 또 그러냐고 불평을 했겠지만 이 아내는 남편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묻고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라면서 밤새 먹을 것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니 남편이 속으로 조금 미안해졌지요. 하루는 아내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친구들 다음 주일에 또 데리고 오세요.” 아내는 남편의 사랑의 언어를 알고 이렇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또 와요? 속상해 죽겠어. 맨날 이게 뭐예요. 잠도 못 자게 하고.” 이것은 사랑의 언어를 모르는 것입니다. “친구들을 얼마든지 데려오세요, 그런데 나에게 한 가지 소원이 있어요.” “그게 뭔데?” “1주일에 한 시간만 나에게 주세요.” “그것 못주겠어? 뭐 하게?” “주일 아침 한 시간만 주세요. 나하고 교회가게요.” “아, 그거 못해주겠어?” 아내가 사랑의 언어를 쓰니 나도 그래야 되겠다 하고 교회에 왔는데 밤새도록 놀던 남편은 교회 맨 뒷자리에 앉아서 졸 준비를 합니다. 설교가 시작되면 자기 시작해서 설교 끝나면 깨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설교가 귀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그 교회의 장로님이 되었습니다. 아내의 사랑의 언어가 남편을 녹인 것입니다.
섬겨주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배우자가 원하는 것을 해주는 것, 섬기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알레이다라는 78세의 화란 할머니는 평생 담배를 피우는 나쁜 습관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끊고 싶어도 자기 의지로는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끊어 뭐하랴 하면서 줄담배를 피웠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이 할머니가 담배를 끊었어요. 79세의 할아버지를 만나 사랑을 하게 된 것입니다. 78세라도 겉만 그렇지 속은 18세와 다름없지요. 어느 날 할아버지가 청혼을 했는데, 지혜로운 할아버지는 결혼의 조건으로 할머니가 담배를 끊는 날 결혼을 하자고 했던 것입니다. 사랑은 의지보다 강합니다.
사랑의 언어는 각자 다릅니다. 내가 이해하는 사랑의 언어, 네가 원하는 사랑의 언어가 다릅니다. 우리는 지난 3주 동안 사랑의 언어를 하나씩 배워왔습니다. 오늘은, 사랑은 선물을 주는 것이요 사랑은 자기 자신을 주는 것이며 사랑은 섬겨주는 것이라는 점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이렇게 할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납니까. 사랑은 상대방의 마음에 안정을 줍니다. 사랑을 받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안정감이 생깁니다. 사람이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안정감입니다. 누군가 나를 헌신적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인생은 살만 합니다. 안정감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영원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면 괜찮습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당신은 가치 있는 사람입니다”라고 자존감을 세워주는 것입니다. 무시하고 멸시하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가치를 높여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인간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의 소중함입니다. 안정감, 자존감,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여러 방법으로 각자에게 사랑을 표현함으로써 안정감을 주고 자기의 가치를 높여주고 그 사람이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고 무시하고 경시하면 불안해집니다. 마음에 안정이 없어지고 자기의 가치가 떨어집니다. 인간은 자기의 가치가 떨어질수록 살 맛이 안 납니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사람들이 왜 자살을 합니까? 대 기업가, 시장(市長), 높은 사람들이 왜 자살합니까? 멸시를 당하고 수치를 당하고 가치가 떨어지면 죽는 것입니다. 사랑은 가치를 높여주는 것입니다. 안정감을 주고 가치를 높이고 소중함을 보여주면서 그들의 가슴 속에 긍정적인 감정을 넣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 주셔서 우리 모두가 사랑의 언어를 배워 많은 사랑을 체험하는 행복한 가정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서적인 위인이 되는 세 가지 길
마 20:25-28 / 김우생목사
예수님의 제자들은 만찬하러 가는 길에도 예수님께서 왕이 되면 누가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인가의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위대해지는 것에 관심을 가집니다. 죽고 난 후에도 오랫동안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안겨주는 위인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미국의 아브라함 링컨이나 영국의 처칠, 그리고 인도의 간디 등의 위인들은 그들이 가고 난 다음에도 계속적으로 많은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견해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순신 장군이나, 최근의 인물로 김구 선생을 여러 세대에 걸쳐 감동을 주는 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위대한 사람은 어떤 자질을 가지고 있을까요? 위대함이란 반드시 유명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위대함 곧 큰 자는 어떤 자질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방인 집권자들에 대해 말하기를 저희는 임의로 주관하고 그리고 권세를 부리는 그를 지도자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즉 하나님 나라에서는 다른 한 원리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위대하다고 하는 자질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오히려 낮아지고 종이 되어 섬기는 자 그가 위대한 자이며 큰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목숨을 주려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시며 동등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권리를 자신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고 종의 형체를 입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극히 높임을 받으시고, 만주의 주가 되시고, 모든 무릎이 그 앞에 끓으면서 그를 주로 시인하게 된 것입니다. 진정 위대한 것은 무엇인가요? 성경에 나오는 몇몇 인물을 통해서 성서적인 위인이 되는 길과 자질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Ⅰ. 에스라 - 말씀을 사랑함 (헌신된 사람)
첫째로 구약 인물 중에 에스라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정 사랑한 사람으로 연상됩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헌신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위대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사랑과 깊은 헌신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에스라서를 읽어보게 되면 에스라 7장 9절과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손의 도우심을 입었다"는 말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에스라 7장 10절에서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를 결심하였었더라"라고 말씀합니다. 에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연구하고 준행하여 말씀 가르치기를 결심하였습니다. 왜 하나님의 선하신 도움의 손길이 임하였습니까?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헌신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아닥사스다 왕이 에스라에 대해 왜 그가 위대하며 그 능력과 힘의 원천이 어디서 왔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7장 14절에서 "너는 네 손에 있는 네 하나님의 율법을 좇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에스라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마다 마음에 담아두고 묵상하고 적용하며 이 말씀을 가지고 나가 전하기를 원했습니다. 에스라의 손안에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에스라 7장 21장에서 "나 곧 나 아닥사스다 왕이 강 서편 모든 고지기에게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하늘의 하나님의 율법의 학사겸 제사장 에스라가 무릇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신속히 시행하되"라고 말씀했습니다. 아닥사스왕도 에스라를 인정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이 그의 가까이에 있는 율법의 학사 에스라에게 있음을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에스라 7장 25절에서 "에스라여 ! 너는 네 손에 있는 네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네 하나님의 율법을 아는 자로 유사와 재판관을 삼아 강 서편 모든 백성을 재판하게 하고 그 알지 못하는 자는 너희가 가르치라"고 말합니다. 에스라에게는 하나님의 지혜가 있음을 아닥사스왕도 인정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위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지혜가 있고 그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란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참으로 위대한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위대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 절대적인 헌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자 하는 열정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생활의 표준이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 속에 권위로 우리에게 임하신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1장 7-8절에서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에 헌신된 자를 성공케 하시고 축복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이 임하셔서 그 사람을 쓰시고 그 사람을 통해서 위대한 일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에스라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Ⅱ. 느헤미아 - 비전의 사람 (목적이 있는 사람)
두 번째는 느헤미야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히브리 성경에서 한 책으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즉 계속적으로 기록된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비전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보시듯이 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비전이라고 하는 것은 보는 것을 말합니다. 비전은 하나님을 말씀을 통해서 계시됨으로 내가 보는 환상을 말하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묵시가 없는 백성은 방자히 행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다가 바벨론에 70년 포로로 되어 있다가 돌아왔을 때 느헤미야가 와서 보니까 성전은 재건되어있었지만 성벽은 황폐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성벽을 재건하기 위하여 함께 결속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상당한 반대도 있었습니다. 외부의 원수들의 공격과 내부의 분열의 위기도 있었으며 내부의 타락도 있었습니다. 그런 느헤미야의 지도력 하에서 황폐된 예루살렘 성이 52일만에 재건되었습니다. 느헤미야의 성벽 재건 역사와 스룹바벨의 성전 재건 역사와는 큰 대조를 이룹니다. 스룹바벨의 성전 재건은 70년 일찍이 재건되었습니다. 그런데 성전을 재건할 때 반대에 부딪혀서 14년 동안 재건을 멈추고 그대로 버려 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의 비전을 이루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우리에게 어떤 일을 맡겨주시든지 큰 역사입니다. 비전을 잃어버리게 되면 쉽게 낙망하게 됩니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고 했습니다. 그 묵시는 계시를 말합니다. 목적이 없게 되면 방자히 행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따라 하나님께서 보시는 대로 보지 못하면 방자히 행하고 망하게 됩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비전이 있었습니다. 이 느헤미야와 스룹바벨의 비전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 비전을 잃지 않게 됩니까? 사도시대가 지난 250년경 로마제국 내에 그리스도인들이 5-12%였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불과 얼마 되지 않은 소수가 비전을 갖고 자신을 드려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그 당시 로마 제국의 십분의 일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저들에게는 비전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비전은 하나님이 보시는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비전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듯이 온 세상이어야 하며, 우리의 비전은 멀리 가는 시력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비전은 우리 생애에 한정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비전은 세계이어야 하며 우리의 비전은 하나님 중심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하기를 원하시고 마지막 영혼까지 복음이 전해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기로 굳게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갈보리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심으로 그분에게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고 비전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다 이루셨기에 오늘날 우리가 값없이 죄 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런 비전을 가졌기에 돌에 맞아 죽은 줄 알았지만, 그는 다시 일어나 돌로 친 곳에 다시 들어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목적이 있었고 비전이 있었기에 목숨을 다하여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위탁하신 복음을 전하는 바로 그 일을 감당한 것입니다.
성서적인 위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보시듯이 보시는 비전을 가진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위대한 사람입니다.
Ⅲ. 에스더 (모르드게) - 용기의 대명사
세 번째 사람은 한 여성인 에스더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에스더는 용기 있는 사람의 대명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용기 없는 비전은 침체되기 마련입니다. 비전과 꿈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비전이 있으면 계획이 있고 프로그램과 스케줄이 있습니다. 그러나 꿈은 항상 공중누각입니다. 꿈은 꾸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진정 싸울 용기가 없다면 그것은 비전이 필요 없는 공중누각 즉 일장춘몽의 꿈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위대한 사람들을 통해서 용기를 볼 수 있습니다. 에스더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생명을 무릅쓸 용기를 가졌습니다. 모르드게는 에스더에게 권면합니다. 그는 참으로 위험스러운 일이었지만 에스더에게 권면하며 용기를 북돋고 있습니다. 에스더는 비록 왕비였을지라도 왕이 의를 베풀지 않았다면 그는 죽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용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러한 용기를 가질 수 있었습니까? 그는 자기백성 유대인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백성이 망하리라는 사실 때문에 바로 그 사랑이 용기를 갖도록 했습니다. 또한 그의 삼촌 모르드게가 용기를 북돋우어 줌으로 자기의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왕 앞에 나가 중보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에스더는 왕의 은총을 입고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게 되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의 친구였습니다. 그분은 자기목숨을 죄인을 위해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동일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복음으로 말미암은 비전을 가지고 있었으며 저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기의 삶과 목숨까지 주기를 원함으로 저들을 인도하는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누가 성경에서 말하는 위인입니까? 에스라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자가 위인입니다. 그리고 느헤미야처럼 비전을 가진 자입니다. 에스더처럼 사랑과 용기를 가진 자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도 바울의 삶 속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그러한 자질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것처럼 누가 큰 자인가? 이방인의 집권자들처럼 임의로 주관하는 자인가? 권세를 부리는 자인가 ? 이런 사람이 위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세월이 지나고 정권이 바뀌고 시대가 바뀌면 뒤집히게 됩니다. 가장 위대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종이 되는 것이며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대속물로 주려고 오셨습니다. 여기에 가장 위대함이 있습니다. 가장 어려울 때 의기소침해 있지 말고 작은 자가 되지 맙시다. 대신에 성경에서 말하는 위인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에 헌신하며 비전을 가지고 사랑하며 용기를 가지고 나아갑시다.
예수님의 섬김을 본 받는 성도
마 20:28 / 강성찬목사
교육하는 교회, 선교하는 교회, 봉사하는 교회라는 목표아래 담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자는 표어를 정하고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달로 정하였습니다. 생활 목표는 예수님의 섬김을 본 받는 성도입니다. 이 시간 생활 목표인 예수님의 섬김을 본 받는 성도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 하며 은혜를 사모 하고자 합니다.
부모님께 순종하여 받드시는 섬김
(눅 2:51)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고 합니다.
예수님은 고향 집에서 어머니와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어머니와 아버지께 순종하며 부모를 받드러 섬겼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섬겼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순종하면서 섬겼다는 사실입니다. 효도는 순종하는 일입니다. 부모를 기쁘시게 하는 일은 순종입니다. 그래서 엡6:1에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도 (딤전 5: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고 합니다.
옛날 농촌에 한 가정이 사는데, 부인은 교회를 잘나가는 집사님이고, 그 교회 여전도회 회장입니다. 그런데 남편은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거기에다 자기 아내가 교회만 갔다 오면 때리고, 난리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정에는 자녀도 5남매나 있었지만, 남편은 노름하고, 사람 때리고, 주색잡기나 하고, 가정 살림은 하나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 여 집사님이 집안 살림을 꾸려나가며 아이들을 키워나가야 했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이 심방을 가셨는데, 그 남편이 그 모습을 보고 책을 잡아 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때리고, 핍박하여 교회도 못나갈 정도로 괴롭게 했답니다. 그렇게 매일 맞아가면서도 불평하나 하지 않고, 신앙 생활하면서 열심히 살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 집사님이 40대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버렸습니다. 그때 남편이 정신이 번쩍 납니다. 집안 살림을 보니 막막합니다. 장례도 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는 그때, 목사님께서 광고하셔서 먹고 살수 있도록, 양식과 연탄도 도와 주고 장례를 인도해주셨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사람이 자신이 과거에 했던 행동을 생각하면, 부끄럽고, 죄스럽습니다. 결국 미안한 마음에 "이제부터 교회를 나가야겠다!" 결심하고 예배라는 예배는 다 참석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니 교인들이 "아내 죽더니 정신 차리고 하나님 믿네!"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 믿고 교회 나온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가 죽으면 지옥 가는 문제 때문에 교회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아내와 목사님, 그리고 교회에 감동해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안 믿는 친척이나 가족에게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갑니다. 예수 믿으셔야 합니다." 라고 전도해도 나오지 아니하는 일이 있는가 하면 삶에 감동을 받을 때 나오는 일들도 있습니다.
일군을 세울 때에도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딤전 3:7)라고 합니다.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요12:9,11)고 합니다.
영적으로 죽었던 우리가 거듭나 빛과 소금의 사역을 감당 하며 섬김의 사역을 다 할 때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역사가 함께 할 줄 믿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겸손의 섬김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수건을 허리에 동이시고 대야에 물을 떠다가 그 거룩한 손으로 더러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너희들도 이와 같이 행하게 하려 본을 보였노라 하시고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요13:15,16)고 합니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아래 사람을 섬기고, 상전이 종을 섬기면 복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복을 받으려면 형제와 이웃을 섬기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1)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일 3:14) 고 합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내가 영생을 얻었는지 못얻었는지 알게 된다고 합니다.
요한서신에서 형제는 예수 믿고 구원받은 신자들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같은 생명을 받은 성도들은 믿지 않는 형제, 친척들 보다 더 반갑고 사랑스러워야 정상입니다. 이유는 육신의 형제는 육신의 피가 같지만 믿음의 형제는 예수님의 피가 성도들 속에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신자들이 밉고 꼴 보기 싫다면 진정 거듭났는지 다시 한번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를 가진 사람들끼리 서로 끌어당겨 주고 일으켜 세워주고 얼싸안아 주어야 합니다. 서로 섬기지 않는 곳은 지옥이요 서로 섬기는 곳은 천국이 됩니다.
사람들의 삶의 모습은 다양합니다.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와 알베르 까뮤는 모두 노벨상 수상자입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박사 학위만도 네다섯 가지나 되는 사람인데 아프리카 람바레나에 가서 흑인 문둥병자들을 치료해 주며 그의 삶을 바쳤습니다. 그가 아프리카 적도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모두 그를 미쳤다고 했었습니다. 그는 노벨 상금으로 아프리카에 병원을 짓고 흑인들을 치료해 주며 생애를 보냈는데, 사람들은 오늘날 그를 20C의 태양이라고 불렀습니다. 까뮤는 상금을 가지고 한적한 교외에다 멋있는 별장을 짓고 신나게 승용차를 타고 별장으로 가다가 전주를 들이받고 직사해서 그의 생애를 마치고 말았습니다.
남을 섬기는 생활이 바보 같고 어리석어 보이고 밑지는 생활 같아도 이것이 보람 있는 생활이요 복된 생활입니다. 남을 섬기고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사람은 자기도 행복해집니다.
이러한 섬김의 삶을 위해서는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빌2:3)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서로 섬기는 곳입니다. 특별히 교회에서 앞서 일하는 일군들은 섬김의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섬길 줄 모르는 사람은 섬김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섬길 줄 모르는 사람이 섬김을 받으면 교만해져서 패망하고 맙니다. 섬기는 삶은 교만을 버린 겸손한 삶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을 섬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또한 형제와 이웃을 섬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자기보다 높은 사람을 섬기는 것은 쉽습니다. 자기보다 힘이 센 사람, 권력이 많은 사람, 돈이 많은 사람을 섬기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 아래 있는 사람을 섬기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체면과 자존심의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발을 닦아주기 위해서는 무릎을 꿇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낮은 곳에서 행해야 합니다. '낮아져라, 겸손하라, 버려라, 종이 되라......'. 이런 말들은 기득권을 가진,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주신 말씀입니다. 자기의 권세를 자랑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선생과 주가 된 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더 이상 낮아 질래야 낮아질 수 없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말이 필요가 없습니다. 많이 알고 있기 때문에, 더 많이 배웠기 때문에, 더 많이 가졌기 때문에, 더 힘이 세기 때문에, 섬김에 장애가 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선행이 왜 문제가 되었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을 낮추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선행을 남들에게 선전함으로 자신들의 경건성과 의를 과시하려 했기 때문에 주님께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낮은 자리 남들의 시선이 머물지 않는 자리, 모두가 싫어하는 곳에서 섬김의 도를 실천하는 참 제자들이 됩시다.
십자가에서 희생하심으로 섬김
마가복음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주님은 얼마든지 영광 중에 왕 노릇하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계시면서 한번도 그 능력으로 자신의 유익을 구한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름과 그 능력이 입 소문으로 전해지면서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는 은연중에 예수님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곳을 피하셔서 산 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우리가 잘 섬기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포기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나의 작은 이기심이, 알량한 자존심이 우리의 생각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포기해야 기쁨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섬기기 위해 우리 자신을 포기할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빌2:7,8)라고 한 말씀입니다. 이 말을 동일시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공감한다는 말과도 일치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같아지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섬기고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와 똑같은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와 똑같이 고난도 당하시고, 시험도 당하셨습니다. 그 이유를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 4:15)고 합니다.
우리 연약함을 공감하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우리와 똑같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땅 끝 오지에 가서 주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전혀 다른 문화에 적응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특별히 오지에 사는 사람들은 음식을 통해서 서로의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음식들을 먹고사는 사람들의 습관을 따른다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찾아 나오는 무리를 보시고 목자 없는 양이 유리하며 방황하는 것처럼 민망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민망히 여기셨다는 것은 창자가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과 같은 아픔이라고 주석가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남을 섬기기 위해 우리는 섬기려고 하는 사람과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들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알버트 슈바이처의 저서인 '아프리카의 이야기'에는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지만 읽으면 마음이 괴로운 사연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이런 내용도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산중에서 맹수에 쫓기고 있는 토인이 한 사람 있었는데 그것을 본 같은 아프리카인은 그 쫓기고 있는 사람이 어느 부족에 속한 종족인가를 살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자기 부족의 한 사람인 것이 확인되면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그 사람을 구출하기 위해서 온갖 희생을 감수하지만 만약에 그 사람이 다른 종족으로 인식이 되면 전혀 무관심하게 그냥 지나쳐버린다는 것입니다. 이 철저한 너와 나의 구별은 부족의 한계에서 너무도 선명해지는 것이 아프리카 토인의 당연한 윤리라고 합니다.
우리는 엄격히 보면 <나>이외에는 모두 타인입니다. 가족도 친구도 모두 타인에 불과합니다. 오직 나는 나 하나만의 생존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만을 위해서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가 이렇게만 살아간다면 우리는 우리만의 행복이 있으리라고 믿어도 좋겠습니까? 정말 이것이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사실이겠습니다.
너 없는 나 그리고 나 없는 너. 이것은 외롭고 무기력합니다. 우주의 광대무변한 그 속에 한 점 먼지에 불과한 이 지구에 살면서 우리가 세계가족을 형성하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너만의 불행도, 나만의 불행도 아닌 우리의 공통적인 비극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
슈바이처의 아프리카 관찰 중에서 생사의 기로에서 쫓기는 인간의 고귀한 생명을 구하는 데까지 부족의 구별부터 한다는 그것만으로도 미개한 민족이라는 치욕스러운 낙인을 받아 마땅하다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도 우리의 생활 주변에서 그 아프리카의 미개한 토인과 같은 생각으로 지나왔던 길목은 없었던가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대수롭지도 않게 마음을 아파하는 인간애의 애끓는 가슴도 없이 그냥 어떤 비극 앞을 지나쳐 버린 그런 무감각한 우리의 발길이 어느 길목에 남지 않았던가 하고 말입니다.(슈퍼 바이블-너와 나)
신자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 섬겨야 합니다. 칼빈은 "왕이라도 섬김이 없이는 진정으로 의롭게 다스릴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 다같이 섬기는 자가 됩시다.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합시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깁시다. 섬김의 본을 보이신 예수님을 본 받아 섬기는 모두가 됩시다.
섬기러 오신 예수
마 20:28 / 이정익목사
오늘은 2005년도 마지막 주일이자 성탄절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4주간의 대강절을 보냈습니다. 대강절은 세상에 오시는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하며 기도로 기다리는 기간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에서 예언되신 그대로 호젓하게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모습을 보면 그 모습 속에 상당한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 3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초라하게 태어나신 일”입니다. 여행 중에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 모습에 상당한 메시지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의 인생이 결코 평탄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하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가장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신 일입니다. 가장 가난한 목수의 집을 배경으로 해서 태어나셨습니다. 그 부분 때문에 예수님은 두고두고 사람들로부터 무시를 당합니다. 아마 예수님이 당시 이름난 부잣집에서 태어났더라면 그렇게 무시당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마구간과 가난한 집, 여기에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오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은 영광을 받으러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님을 암시하는 상징들입니다. 영광을 받으러 오셨다면 오실 때 요란하게 오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조용히 오신 것은 영광과는 상관도 없다는 것을 암시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예수님이 자신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아주 짤막하고 분명하게 표현했습니다.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로다.”
Ⅱ
그렇게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이 섬기는 일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감동을 주고 세상을 즐겁게 하는 일이 이 섬기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너희는 섬기는 자가 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이 세상에서 섬기신 모습이 대표적으로 몇 가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는 “고치시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병도 그냥 병이 아니고 원초적인 병자들을 골라 고치셨습니다. 나병환자, 앉은뱅이, 혈루병자, 귀신들린 자, 소경, 저는 자 등입니다. 원초적인 병을 가진 병자들의 고민은 대단할 것입니다. 그리고 불가능한 병을 고친다고 행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소망스런 일입니까. 가끔 병원에 가서 환자들을 보면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속상할 때가 참 많습니다. 도무지 도와줄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심방할 때는 고치는 능력을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또 마음이 답답해서 그렇겠지만 고치는 은사를 달라고 40일 금식기도한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3년 동안 종횡무진 돌아다니시며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가르치시는 일”이었습니다. 인간은 무지합니다. 육신의 세계도 잘 모르지만 영적인 세계에는 더욱 무지합니다. 그 무지한 인간들을 하나씩 하나씩 가르치셨습니다. 천국을 가르치셨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셨고 나의 할 일은 무엇인가를 알게 하셨고 나의 종말을 알게 하셨고 내가 살아가야 할 생존의 이유와 목적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 내용이 산상수훈에서 깊이 있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또 “위로”하셨습니다. 인간은 위로를 받아야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이 세상에는 그 때나 지금이나 상한 마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당시는 유대인들이 로마로부터 압제당하고 나라를 잃고 살아갈 때입니다. 거기에 가난한 사람들, 질병에 걸린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들에게 무엇보다도 위로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들을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모두 큰 기대에 마음이 들떴습니다. 저 사람이라면 뭔가 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저 사람이라면 로마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저 사람이라면 로마를 물리치고 이 민족으로 하여금 해방하게 해서 잃어버린 다윗시대의 화려했던 모습을 재현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까지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를 호산나를 부르면서 열렬하게 환영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당시 사람들은 위로자가 아니고 정치적 메시야가 되어 주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렇게 당시 사람들은 예수께서 강한 힘을 가진 정치적 메시야가 되어 주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을 정치적 예수로, 해결사 예수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문제만 있으면 해결해 달라고 떼를 쓰는 것 아닙니까. 일은 자기가 저질러 놓고 무조건 해결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몸도 자기가 무질서해서 다쳐 놓고 병들게 해 놓고 고쳐달라고 떼를 씁니다. 술을 물마시듯 하고 담배를 두 갑씩 피우고 주일도 무시하고 돈을 벌겠다고 일하다가 병이 생겼는데도 찾아와 무조건 고쳐달라고 떼를 씁니다. 그때 하나님도 참 입장이 곤란하실 것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그런 사람들이 찾아오면 한사람도 그냥 돌려보내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위로자였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30년 동안 침묵하고 기다리셨습니다. 그래서 동네에서 예수님이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로 조용히 계시다가 30세가 되면서 어느 날 갑자기 혜성처럼 나타나 병자들을 고쳤고 기적을 일으키면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회개하고 복음을 받으라“고 외치셨습니다. 예수님이 고치시고 가르치시고 위로하신 이유는 복음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이 “복음을 받아들임” 이것이 가장 기본적인 은총입니다. 사람이 잘 사는 것, 성공하는 것, 건강한 것 다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알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궁극적인 일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사람이 잘 살고 잘 먹고 출세하고 성공하는 것, 지식을 가지는 것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이 조금 잘 먹고 잘 살고 성공했다는 것, 그것이 뭐가 대단한 것입니까. 그것이 있으나 없으니 짤막한 인생은 그대로입니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믿음이 아주 좋은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꿈을 꾸다가 환상을 보게 됩니다. 그는 환상 속에서 천국엘 가게 됩니다. 천국에 도착하니까 문에서 천사가 “너는 누구냐”고 묻습니다. 그래서 “나는 어거스틴이고 그리스도인입니다“하고 대답하자 천사가 다가와서 보더니 “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네 머릿속에는 온통 키케로의 철학으로 가득 차 있다, 돌아가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그래서 깜짝 놀라 잠을 깨 보니 꿈이었습니다.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자기는 지금까지 믿음이 좋은 줄로 알고 살아왔는데 객관적으로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평가를 받고 보니까 자기는 지금까지 헛 믿음생활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지성이 믿음인줄 알고 착각을 했던 것입니다.
오늘 지성으로 믿음을 대신하는 신앙인들이 참 많습니다. 내가 성경을 많이 알고 신앙지식이 있다는 것을 믿음이라고 착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알기는 많이 아는데 그 믿음이 창백하고 용기가 없고 구체적인 고백이 없습니다. 이론은 앞서는데 용기가 없고 참여가 없고 헌신이 없고 눈물이 없습니다. 그 믿음이 지성신앙입니다. 그 믿음이 어거스틴이 착각한 믿음입니다. 머릿속에 온통 키케로의 철학, 신학, 교리, 교권, 경건, 역사들만 가득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고백이 없고 눈물이 없고 용기가 없고 헌신이 없고 열정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생활이 키케로의 철학만으로 가능하다면 예수님은 그렇게 구차하게 오시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가르치고 고치고 위로하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외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믿음은 철학으로 율법으로 수양으로 지식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오셔서 실제로 보이시고 치료하시고 직접 섬기는 모습을 보여 주며 너희도 이같이 하라고 강조하셨습니다.
Ⅲ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오늘은 우리의 할 일을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예수께서 하신 일을 구현하고 실천하고 행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이 하시던 일을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고쳐야 합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병든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육신의 병을 앓는 사람은 병원으로 안내해서 고쳐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병원에서 고치는 병 보다는 고치지 못하는 병이 훨씬 더 많습니다. 정신의 병, 마음의 병은 병원에서 약으로 수술로 고칠 수 없는 병입니다. 이런 병은 모두 신앙으로 고칠 수 있는 병입니다. 이것을 고치지 못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살인, 증오, 파괴가 나타납니다. 살인, 증오, 파괴 등의 모습은 모두 마음의 병을 고치지 못하고 악화되어 나타나는 병입니다. 이 병들은 마음에 신앙이 들어가면 다 고쳐지는 병입니다.
또 전하는 일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사명 가운데 가장 큰 사명은 전하는 일입니다. 아주 좋은 음식점에 가 본 경험이 있는 분은 친구들을 그곳으로 데리고 갑니다. 아주 먼 곳일지라도 데리고 가서 맛을 보게 합니다. 그것이 전도입니다. 그렇게 데리고 가는 것이 전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음식점에는 돈을 써가며 잘도 데리고 가는데 교회에는 데리고 갈 줄을 모르는데 있습니다. 전도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맛있는 음식점에 친구를 데리고 가듯 데리고 오는 것이 전도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전하는 일에 전념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시대에 이 전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 일이 주께서 하시던 일을 마무리 하는 일입니다.
또 세상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일입니다. 특히 그 시대에 소외되고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일입니다. 가난한 사람들과는 할 수 있는데 까지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할일이고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입니다. 그래서 평소에도 교회가 구제를 하지만 성탄절 헌금은 전액 이웃에 주는 것입니다. 그것도 안하면 직무유기입니다. 주님은 성경에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소금이 되고 빛이 되는 일은 세상과 함께 하는 일입니다. 그때 이 세상이 따뜻해지고 조화가 조성되고 평화가 이루어지며 그때 이 세상에 감동이 나타나고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됩니다.
저는 며칠 전에 CEO들의 성공담을 기록한 책을 읽었습니다. 정진구라는 CJ식품서비스 총괄사장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분은 “사업에 실패한 적이 없다”고 자신 있게 고백했습니다. 그 성공은 함께 하는 삶에서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우리 어렸을 때 카스텔라가 한창 유행했었습니다. 카스텔라를 만들려면 재료로 계란이 필수입니다. 그런데 소풍 때만 되면 계란 품귀현상이 일어나서 카스텔라를 만들기가 참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분이 알아보니까 계란이 나환자촌에서 90% 이상이 생산된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그래서 찾아가 직거래를 상담하는데 한마디로 거절당했습니다. 외부인들은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분이 나환자촌으로 직접 들어가 한동안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환자들을 목욕시켜주고 식사도 같이 하고 잠도 같이 잤습니다. 그러니까 서서히 마음을 열어 계란 직거래에 성공해 삼립식품이 카스텔라로 인해 대 회사로 성공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함께 하는 삶입니다. 함께 할 때 거기서 감동이 주어지고 마음이 열리고 공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삶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삶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함께 하는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나환자 전도하면 다미엔 신부를 들 수 있습니다. 하와이 군도에 몰로카이라는 섬이 있습니다. 몰로카이라는 말은 “하늘을 꿈꾸는 섬“이란 뜻입니다. 이런 이름을 가진 몰로카이 섬이 100년 전만 해도 악명 높은 나환자 수용소였습니다. 그곳에 들어가면 누구도 탈출 할 수가 없습니다. 섬 주변에는 모두 암벽이고 주위에는 물살이 거세어서 죽어야만 나오는 곳입니다. 몰로카이 섬은 말 그대로 생지옥입니다. 그 섬에 다미엔이라는 신부가 33세의 나이로 전도하기 위해서 스스로 들어갑니다. 들어갔는데 아무도 그를 맞아주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펼쳐놓고 사랑을 설파했지만 돌아온 것은 빈정댐뿐이었습니다. “사랑, 그것은 당신들처럼 건강한 사람들의 잠꼬대야.”
다미엔은 그때 깨달았습니다. “이들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는 함께 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다미엔은 그때부터 기도를 고쳤습니다. “주여 나에게도 저들이 앓고 있는 나병을 허락하소서.” 그리고 그는 끓는 물에 손을 집어넣어 화상을 입힙니다. 그리고 그 위에서 비로소 나병이 옮기 시작합니다. 그때 그의 나이가 49세 때입니다. 그는 기도대로 나병환자가 되었습니다. 나병이 발병한 후에 다미엔은 비로소 당당한 마음으로 강단에 서게 됩니다. 강단에 서서 그가 외친 첫마디가 “형제들이여”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날 일생에서 가장 감동을 주는 설교를 했습니다. “형제들이여, 나도 여러분들과 똑같은 나병에 걸렸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하듯 하나님도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때 그 설교 한마디가 그곳에 모여온 많은 나병환자들의 눈에서 비로소 눈물이 흘러내리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미엔은 끝까지 치료를 거부하고 결국 나병으로 죽어서 그 섬을 떠납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시신은 그의 고향 벨기에로 갑니다. 그런데 섬에 남아 있던 나환자들이 이 다미엔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남아있던 나병환자들이 다시 그의 시신이라도 보내달라고 탄원을 합니다. 그래서 고향에 묻혀있던 다미엔의 오른 팔 하나가 그들에게로 다시 돌아옵니다. 그곳 나병환자들은 그 팔을 몰로카이 섬 땅에 묻고 그곳에 묘비를 세웁니다. 그리고 그 묘비에 나병환자들은 진심어린 마음으로 “그는 나환자들의 아버지였다”라고 썼습니다.
Ⅳ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을 어설프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어설프게 이웃과 함께 한다고 말하면 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더 큰 소리로 비웃음을 당합니다. 돈 몇 푼주고 구제했다고 사진이나 찍는 것으로 다 했다고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함께 하는 것은 마음도, 생각도, 삶도, 정신도, 뜻도 함께 해야 그것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대접받으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군림하기 위해서 오신 것도 아닙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한 가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 세상과 함께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죄인들과 함께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무능한 사람들과, 병든 사람들과, 무지한 사람들과 함께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이 땅의 사람들과 함께 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이 세상에 섬기는 자로 오셨습니다.
봉사를 다하신 주님
마 20:28 / 강성찬목사
(마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인터넷에서 올린 어떤 청년의 글이라 합니다. 그는 중학교 때 진따라는 별명을 가진 친구가 있었는데, 하는 짓도 진따고, 생긴 것도 진따고, 왕따의 전형적인 모델이었다고 합니다. "야! 내 숙제 좀 해!" 하면 "어. 알았어!" 했고, "야! 볼펜 예쁜데. 내가 가져도 되지!" 하면 "어. 그래." 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학교에 청소 일 하시는 찐따 아버지가 찾아왔습니다. 다리를 절며 아들에게 다가가 큰 봉투를 건네주었는데 아이들이 궁금해했습니다. "야! 찐따. 거 뭐냐?" "음. 우리 아빠가 너희 주라고 가져오셨어." 봉투 안에는 빵이 들어 있었는데, 진따 아빠가 자기 아이가 왕따인 것을 알고 잘 봐달라는 의미로 사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은 "야! 그 빵 청소하다 주워온 것 아냐!"하고 조롱하면서 아무도 먹지 않았습니다. 그날 진따는 말없이 그 빵을 그냥 가져갔습니다. 다음 날, 진따가 학교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틀이 지나고, 삼일이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이 웃었습니다. "야! 진따가 땡땡이도 치네." 다시 며칠 후에 종례시간 때 선생님이 조용히 말했습니다. "얘들아! 진호가 많이 아프단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병원에 못 가서 병이 커졌대. 선생님도 엊그제 가봤는데 많이 아픈 것 같다. 너희들도 한번 가봐라."
그날 몇몇 친구들이 진따에게 가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진따집을 찾아 달동네로 올라가는데 아직도 한참 더 올라가야 한다는 한 친구의 말을 듣고 반 아이들은 찐따를 원망했습니다. "찐따 정말 슈퍼맨이었네. 도대체 매일 이 길을 어떻게 다녔어." "진따 다리 봤잖아. 그래서 다리가 두꺼웠나봐."
드디어 찐따 집이 나왔습니다. 금방 무너질 듯한 화장실 만한 집이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면서 소리질렀습니다. "야! 진따! 아니, 이진호 우리들이 왔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가는데, 방이 너무 적어 10명이 다 들어갈 수 없어서 두세 명씩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처음 들어갔다 5분쯤 후에 나온 친구들이 눈이 퉁퉁 부어있었습니다. "야! 너 왜 그래? 울었냐?" "아냐. 그런데 이제 진호 어떡하냐?"
친구의 감추어진 눈물을 보고 무거운 마음으로 방으로 들어갔는데 진호가 보였습니다. 머리가 퉁퉁 부어 ET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진호야!" "어. 경수 왔구나!" "왜 이래!" "약 먹으면 곧 나아질 거야." "뭐야! 약을 먹어! 머리가 이렇게 퉁퉁 부어 눈도 못 뜨면서 병원도 안 가!" "괜찮아!" 야윈 그의 얼굴을 보니까 가슴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진따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저씨! 지금이라도 병원에 가셔야죠?"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그 동안 찐따에게 누구 하나 따뜻한 시선을 보내주지 않았지만 그날만은 달랐습니다. "야! 찐따. 꼭 나아야된다. 너 안 나오면 내 숙제는 누가 해주냐." 그날 저녁 진따 집에서 나오는데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야! 찐따 괜찮겠지?" 대답이 없었습니다. "야! 말 좀 해봐! 진따 괜찮겠지." 그래도 아무도 말이 없었습니다.
그런 바램과는 달리 진따는 계속 학교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곧 방학이 되었고, 다시 개학을 했는데도 여전히 진따 자리는 비어 있었습니다. 개학 후 일주일쯤 지났을 때 선생님이 입을 여셨습니다. "얘들아! 진호 별명이 진따였니? 진호가 하늘나라 갔다. 가기 전에 너희들 얘기 많이 했다고 그러더라."
그 말을 듣고 너무 서럽고 너무 진따에게 미안해서 욕이 나왔다고 합니다. "병신! 쪼다! 찐따 같은 자식. 그래 우리 안보니까 좋겠다." 그날, 반 전체가 조용했습니다. 그 흔한 지우개 던지기도 없었고, 자주 하던 말뚝박기도 아무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 엄청나게 울었습니다. 불쌍한 친구를 못살게 군 비열한 친구였다는 생각에 울음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12년이 지났는데 지금도 가끔 진따가 보고 싶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인터넷에서 '진따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습니다. "찐따야! 나다. 기억 나냐? 우리 엊그제 동창회 했다. 너한테 숙제시키던 명식이도 나왔고 네 뒤에 앉아서 샤프 콕콕 찌르던 정호도 나왔다. 명식이는 결혼했다. 딸도 있는데 지 에빌 닮아 시집은 다 갔다고 생각한다. 정호는 PC방 사장됐다. 만나서 너 얘기 많이 했다. 너 혹시 하늘 나라에서도 왕따 당하는 거 아니냐고 하면서 웃었다. 진따야! 너 춥니! 안 추워? 너 얘들이 많이 보고 싶어하는데. 진따야 정말 미안하다. 너 다음 세상에서 우리 만나도 친구 해줄 거니? 응? 말 좀 해봐? 야! 찐따.... 내 말 안 들리니? 진따야! 하늘 나라에서 잘 있는 거지! 보고싶다. 진호야."
옛날 어느 곳에 집을 고래등같이 지어놓고 창고에 많은 곡식을 쌓아놓고 하인을 많이 두고 사는 부자영감이 있었는데, 그는 찾아오는 나그네 손님을 잘 접대하지 않고 푸대접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사돈이 왔는데 부자영감은 사돈에 대해서는 몹시 친절하여서 사랑채에 모셔 놓고 잘 대접하였습니다. 해가 기울 무렵 나그네 한 사람이 묵어가기를 청하자 심성이 고약한 영감은 사돈이 와 있어서 거절도 못하고 사돈과 한 방을 쓰도록 하였습니다. 저녁때가 되어 잘 차린 밥상이 들어오자 눈치 빠른 나그네가 선뜻 나서면서 말하였습니다. "먼길을 오느라고 점심도 걸렀더니 어떻게나 시장한지 실례지만 어르신은 뒤에 받으시고 제가 먼저 실례하겠습니다."하고 나그네가 받아먹었습니다. 얼마 후 하인이 나그네에게 줄 간장하고 새우젓뿐인 꽁보리 밥상을 차려왔을 때 불가불 사돈이 그 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돈은 무척이나 기분이 나빴지만 밥상을 갖고 싸울 수도 없고 하여 억지로 꽁보리밥 을 간장과 씹어먹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주인영감이 들어와서 두 사람의 상이 바뀌어져 있는 것을 보고 부아가 났지만 하는 수 없어 그냥 나가버렸습니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왔습니다. 아침 밥상이 들어오는데 간장에 새우젓뿐인 밥상을 먼저 보냈습니다. 그 밥상을 받자 나그네는 그 밥상을 사돈 영감 앞에 갖다 놓으면서 말했습니다. "어제 밤에는 정말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너무 시장해서 염치 불구하고 먼저 상을 받았지만 오늘 아침은 체면상 영감님이 먼저 받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 먼저 상을 받으세요." 이에 사돈은 "이 상은 나그네 상이고 뒤에 오는 상이 내 것이오." 하고 말할 수도 없고 또 그 반찬 없는 꽁보리밥을 먹어야 했습니다. 얼마 후 닭다리에 생선 구이까지 놓인 푸짐한 밥상이 들어왔습니다. 나그네는 얼른 받아 맛있게 밥을 먹었습니다. 열심히 식사를 하고 있을 때 주인영감이 들어와서 상이 또 바뀐 것을 보고 밖으로 나가면서 소리치며 투덜거렸습니다. "무슨 일이 이렇게 꼬인단 말인가? 이거 어디 부아가 나서 살수가 있나? 이 놈의 집을 모두 헐어버릴까 보다."
나그네는 아침밥을 잘 먹고 나서 밖으로 나와 하인에게 말하였습니다.
"도끼 좀 찾아 주시오." 주인이 나와서 도끼의 필요성을 묻자, "대접을 잘 받았으니 밥값이라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듣노라니 아까 주인 영감님께서 집을 허물어 버리겠다고 하시니 그 일을 제가 도와 드릴까 하구요." 주인 영감은 그만 나그네에게 잘못했다고 빌었습니다. 나그네는 "사람을 무시하지 말고 차별 대우를 하지 마시오."라고 말하였습니다.
한해를 보내며 우리들을 돌아 보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세베대의 아내가 자기 아들인 요한과 야고보를 예수님의 좌, 우편에 앉게 하여 달라는 부탁을 하였습니다. 그 여인은 언젠가는 예수님께서 세상의 권세를 잡으실 날이 있을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의 집권자들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권세를 부리는 것으로 자랑스럽게 여기지만 예수님의 제자된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고 스스로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이어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고 미 말씀대로 섬김의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종의 신분으로 섬기시고 봉사하려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요르단의 새 국왕 압둘라 2세(38)가 즉위 이후 몇번씩 전통 복장으로 변장한 채 일반 국민들의 상황을 알아보기 위한 잠행 시찰에 나섰다합니다. 왕위에 오른 압둘라 국왕은 아랍 전통 복장에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차림으로 수도 암만 북동부 자르카 정부병원을 방문, 진료상황 등을 꼼꼼히 체크했다합니다. 압둘라 국왕은 이전에도 TV 리포터와 택시기사, 노인 등으로 변장한 채 국민들의 생활실태를 직접 시찰했었다합니다. 최고 권력자인 왕이 직접 이렇게 길거리로 나서서 백성들의 일상 생활을 경험하고 어려움을 몸으로 경험하는 것은 신하들의 말만 듣고 탁상행정을 하는 것과는 천지차입니다. 압둘라 국왕의 이 같은 변장 취미는 아버지이자 전임자 후세인 전 왕을 연상시키지만, 변장 정도는 기껏해야 수염투성이 얼굴을 천으로 가릴 정도였던 아버지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합니다. 왕이 되면 의례히 궁궐에 앉아서 신하들의 보고만 듣고 말로써 모든 것을 다스리는 것이 일반적인 전통입니다.
왕은 신분적으로 일반 백성들과는 전혀 다르며, 언제나 백성이 왕을 위해 존재하지 왕이 백성을 위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행정 관료들조차 현실은 전혀 모른 채 책상머리에만 앉아서 온갖 행정을 처리하기 때문에 많은 폐해들이 나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온전한 권세는 군림하고 억압하고 다스리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데서 나오는 것임을 성경은 계속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백성들로 하여금 전혀 알아보지 못하도록 분장을 하고 그들의 일상 생활을 일일이 돌아보며 애로사항을 체크하는 요르단 왕의 통치는 진정 백성들을 그만큼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는 평가를 합니다.
주님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오셨고 봉사의 사역을 감당 하셨습니다
(빌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본체이신 성자 하나님이시지만 하늘의 영광으로부터 이 낮은 땅을 향해 내려오셨습니다.
종의 신분으로 오셨습니다. 종은 섬기는 자입니다. 그는 주인에게 속해 있어야 하며 주인의 뜻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을 섬겼고 인류의 종으로서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의 고통과 고난을 대신 져주셨습니다. 그는 섬김을 받아야 할 분으로서 남을 섬기는 모든 자들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자기의 피조물을 섬기는 봉사의 사명을 다 하셨습니다
'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라고 하신 말씀은 세상에 오셔서 행하신 일을 잘 표현해 줍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섬김을 받으실 목적으로 일하셨다면 굳이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구차한 세상까지 오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섬김을 받는 영화로운 자가 아니라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고난 받는 종으로 친히 그 몸으로서 인류의 죄 값을 치루시기 위해서 오셨을 뿐입니다.
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의 경제가 한창 다시 일어설 무렵의 일이라 합니다. 일본의 한 대기업이 미국 일류대학 출신의 고급 엔지니어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급적 박사학위도 있고 일본어도 능숙한 미국인을 선호했습니다. 오랜 수소문 끝에 마침내 그러한 사람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그는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신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선교를 하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즉시 높은 대우와 여러 종류의 혜택을 약속하면서 자기들의 회사에 와줄 것을 제의했지만 그는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그들은 보수가 적어서 그러는 줄 알고 파격적인 제안을 갖고 찾아갔지만 그때도 그의 대답은 "노"였습니다."도대체 무엇이 문제입니까"라고 그들이 물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물론 대우는 충분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일거리가 나의 삶을 바칠 만큼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왕으로 삼으려는 사람들을 피항셨고 그리하지 마옵소서 말리는 베드로의 만류도 뿌리치시고 속죄의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기 까지 섬기시며 봉사를 다하셨습니다
(요13:4-5)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정진구라는 CJ식품서비스 총괄사장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분은 "사업에 실패한 적이 없다"고 자신 있게 고백했습니다. 그 성공은 함께 하는 삶에서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우리 어렸을 때 카스텔라가 한창 유행했었습니다. 카스텔라를 만들려면 재료로 계란이 필수입니다. 그런데 소풍 때만 되면 계란 품귀현상이 일어나서 카스텔라를 만들기가 참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분이 알아보니까 계란이 나환자촌에서 90% 이상이 생산된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그래서 찾아가 직거래를 상담하는데 한마디로 거절당했습니다. 외부인들은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분이 나환자촌으로 직접 들어가 한동안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환자들을 목욕시켜주고 식사도 같이 하고 잠도 같이 잤습니다. 그러니까 서서히 마음을 열어 계란 직거래에 성공해 삼립식품이 카스텔라로 인해 대 회사로 성공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신을 주시기까지 섬기시며 봉사를 다하셨습니다
대속의 확실성은 오직 생명의 피, 곧 무흠한 그리스도의 피가 흘려질 때라야만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피에 생명이 있으며 그리스도의 피만이 모든 죄를 속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레 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봉사의 절정은 자기희생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남을 섬기기 위해 결심은 하지만 여기에서 되돌아가곤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경제적 유익과 육신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연약한 이웃을 위해 의연히 자신을 내어 주는 것이 바로 희생입니다. 이 희생은 외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내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정신적 즐거움을 송두리째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기대 조건 없이도 하나님의 의를 위해 기꺼이 자기를 내어 주고 심지어는 자신의 생명까지도 바칠 수 있는 것이 참 된 희생입니다. 예수께서는 생명과 전 생애를 죄인에게 주시는 데 충성하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셨고 섬기는 자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섬기며 봉사하여야 합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섬기신 일, 즉 그의 대속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가 여전히 남들의 섬김을 받으려 한다면 그것은 이미 성도의 특성을 잃어버리고 무미건조한 상태로 전락해 가는 증거라고 해도 좋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한 자들은 그분의 성품을 따라 남을 섬길 수 있어야 하고 필요한 자에게 자신을 내어 줌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봉사를 필요로 하는 자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아낌없이 시간, 재능, 경제력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60대 되는 어느 장로님을 만났는데 키도 크고 얼굴이나 풍채가 너무 잘 생기셨는지 한국 사람으로서 그렇게 잘 생기신 분은 처음 봤다고 합니다. 그런데 장로님 댁에 갔더니 아내 되시는 권사님은 장로님의 절반밖에 안되는 자그마한 분이셨어요. 그 장로님이 예수를 믿게 된 것은 아내가 남편의 사랑의 언어를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남편은 마작을 좋아했습니다. 주말이면 친구들을 불러 밤새도록 마작을 하면서 아내에게는 계속 음식을 해내라고 합니다. 보통 아내들 같으면 또 그러냐고 불평을 했겠지만 이 아내는 남편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묻고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라고 하면서 밤새 먹을 것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니 남편이 속으로 조금 미안해졌지요. 하루는 아내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친구들 다음 주일에 또 데리고 오세요." 아내는 남편의 사랑의 말을 알고 이렇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또 와요? 속상해 죽겠어. 맨날 이게 뭐예요. 잠도 못 자게 하고." 이것은 사랑의 말을 모르는 것입니다. "친구들을 얼마든지 데려오세요, 그런데 나에게 한 가지 소원이 있어요." "그게 뭔데?" "1주일에 한 시간만 나에게 주세요." "그것 못주겠어? 뭐 하게?" "주일 아침 한 시간만 주세요. 나하고 교회가게요." "아, 그거 못해주겠어?" 아내가 사랑의 말을 쓰니 나도 그래야 되겠다 하고 교회에 왔는데 밤새도록 놀던 남편은 교회 맨 뒷자리에 앉아서 졸 준비를 합니다. 설교가 시작되면 자기 시작해서 설교 끝나면 깨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설교가 귀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그 교회의 장로님이 되었습니다. 아내의 사랑의 말이 남편을 녹인 것입니다.
봉사가 사랑입니다. 섬기고 봉사하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알레이다라는 78세의 화란 할머니는 평생 담배를 피우는 나쁜 습관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끊고 싶어도 자기 의지로는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끊어 뭐하랴 하면서 줄담배를 피웠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이 할머니가 담배를 끊었어요. 79세의 할아버지를 만나 사랑을 하게 된 것입니다. 78세라도 겉만 그렇지 속은 18세와 다름없지요. 어느 날 할아버지가 청혼을 했는데, 지혜로운 할아버지는 결혼의 조건으로 할머니가 담배를 끊는 날 결혼을 하자고 했던 것입니다. 사랑은 의지보다 강합니다.
시간과 재능, 열정과 물질 그리고 온 마음을 쏟는 봉사요 사랑입니다. 갈보리에서 확증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은 모리아 산에서의 순종과 봉사로 응답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소유한 전체를 드리는 제사이며 신앙의 참 모습입니다.
교육하고 선교하며 벙사되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는 한 해를 마무리 하면서 봉사를 다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봉사를 다하기로 다짐하며 사명 감당하며 영광 돌립시다.
섬기는 좋은 일꾼이 됩시다
마 20:28 / 강성찬목사 / 전주동부교회
어떤 분이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그 교회에서 노벨상을 수상했다는 물리학자를 소개받았습니다. 물리학자는 마침 교회 청소를 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이름난 물리학자인데 교회 청소를 하고 계십니까?'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 안에 계신 그분이 청소하게 하십니다.' 방문객은 다시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물리학자가 되셨습니까?' 그는 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 안에 계신 그분이 나로 물리학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자기보다 하나님을 내세우는 철저함 앞에 방문객은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합니다. 물리학자는 자신의 존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았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큰일을 맡기심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함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직분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섬김의 실천을 하고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이와 같이 충성된 종들은 섬김을 받기보다는 섬기기 위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므로 생활 속에서 작은 본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주님께서 이 세상에 자신을 맞추시고 오셔서 섬기신 일을 잘 표현해 줍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빌2:6-8)셨다고 합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섬김을 받으실 목적으로 일하셨다면 굳이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구차한 세상까지 오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높아지고 섬김을 받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도중 여리고에 이르기 전 세베대의 아들들은 그리스도의 여정이 곧 끝나게 된다는 것을 눈치 챘고, 이때가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요구를 할 기회라 생각했을 것이고 그들의 든든한 배경인 어머니가 함께 했다고 합니다.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마 20:20-21)합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베들레헴을 방문한 사람들은 누구나 느끼는 일은 지금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거주지로서 예루살렘에 비해 아주 보잘것없는 시골입니다. 예수탄생 교회가 크게 세워져 있어 눈길이 가지만, 주님 나실 때는 황량한 마구간 터였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리도 낮은 자리에 오셨을까요? 이보다 더 낮은 자리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요!
이스라엘로 들어오기 전에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이집트에서 출발하여 광야를 따라 시내 산을 지나오게 되는데 그 길을 인도했던 모세의 모습이 생각날 수밖에 없는 여정이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왕궁을 떠나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 목자생활을 했습니다. 모든 목자들이 그랬듯이 모세도 그때부터 나무 지팡이를 손에 들기 시작했을 것으로 봅니다. 석 자가 넘고 여섯 자는 못 되는 지팡이입니다. 그것을 갖고서 피곤할 때 의지하고, 짐승이 달려들 때 쫓아내고, 양을 이리저리 이끌고, 열매를 따거나 깊은 데서 건져 올리는 데 사용합니다.
모세가 처음으로 이집트 왕을 만나러 갔을 때 이 지팡이를 들고 있었습니다. 왕궁의 사람들이 얼굴을 찌푸릴 만큼 말라빠진 막대기였습니다. 손때 묻고, 끝이 갈라지고, 먼지에 절은 이 지팡이가 뱀이 되었고, 강물을 피로 변하게 했고, 온 땅에 하나님의 심판을 내리게 하는 능력의 물건이 되었습니다. 그 후로 모세는 이스라엘을 영도하는 지도자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때가 덕지덕지 낀 지팡이가 어울리지 않는 위치였습니다.
혹시 이렇게 말한 사람들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모세님! 이제 우리는 새 나라를 세울 것이고 당신은 지도자이며 왕이십니다. 위엄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질서가 서고 백성이나 적군들이 당신을 가볍게 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낡은 지팡이를 버리고 금빛 찬란한 칼로 지휘하십시오.”
그러나 모세는 자신의 처지가 바뀌었다 해서 지팡이를 칼로 바꾸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홍해 앞에서 “네 지팡이를 들라.” 명하셨고, 르비딤에서는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너는 반석을 치라.” 하셨습니다. 생수가 폭포같이 쏟아져 목마른 백성들의 갈증을 순식간에 풀어 주었습니다.
모세라는 사람은 일약 지도자로 그 처지가 바뀌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의 마른 막대기를 사용하셨습니다. 높은 자리에 올랐다고 해서 모세가 때 묻은 지팡이를 던져 버렸다면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도 멀리 떠나갔을 것입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재능과 힘은 약한 나무 지팡이에 불과하나 모세의 지팡이가 하나님의 지팡이가 된 것같이 ‘나’라는 존재도 하나님의 ‘나’로 되어가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의 손 안에서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 낮은 자리에 오신 예수님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낮은 자리를 가르치신 주님의 교훈을 듣고 실행하여야 합니다.
낮은 자리에 있기를 원하는 사람은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사심 없이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려면 정말 평안하게 낮은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높은 자리, 책임 있는 자리에 올라갈수록 마음의 평정은 점점 흔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주님께서 우리를 더 높은 자리로 억지로 몰아넣지 않으시는 한 가장 낮은 자리를 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도 잘 아십니다. 이 사람이 더 높아져서 압력과 책임이 부가되어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아십니다. 평정을 유지하는 비결은 겸손해짐에 있습니다. 높아질수록 더욱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칭찬하시고 친히 들어 올려 주십니다.
낮은 자리에 있기를 원하는 사람은 남의 말을 진지하게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은 말을 많이 하는 것이 능력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또 자기 의견을 거침없이 말할 수 있어야 인정받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남의 말을 정성스럽게 들어주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배우는 사람은 선생님의 가르침을 열심히 듣습니다. 들음은 겸손한 자세요, 구도자의 진지한 모습입니다. 자리가 높아진 사람이 남의 말을 진지하게 듣는 것처럼 아름다운 일은 없습니다. 입을 작게 하고 귀를 크게하며, 가슴을 넓게 열어 진리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낮은 자리에 있기를 원하는 사람은 기쁘게 웃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너무 쉬운 말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것처럼 어려운 일도 없습니다. 웃을 줄 안다는 것은 마음이 열려 있고 따뜻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상처를 받지 않는다는 표현입니다. 웃음은 갖가지 격식으로 인해 매여 있던 관계를 풀어 주고 평안을 선사합니다. 낮은 자리에 있어도 평안하고 욕심이 없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웃음입니다. 주님께서는 평안히 낮은 자리에서 미소 짓는 사람에게 찾아오십니다.(그윈(Gwynn) 기독교 교육학자)
예수님께서 낮은 자리에서 태어나시고, 가난한 자와 병든 자들을 돌보시는 사역을 감당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역을 옆에서 지켜 본 제자들이건만 막상 예루살렘이 가까워오자 서로 욕심 경쟁이 일어났습니다. 세베대의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잽싸게 주님께 다가가 정치적 요구를 했습니다. “선생님, 소원이 있습니다.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님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십시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막 10:38)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마시는 잔, 내가 받는 세례”라고 하신 것은 고난의 이미지를 수반하는 것입니다.
일부 학자의 해석에 따르면, 잔을 마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가리키며, 세례를 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을 가리킨다는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이유를 섬김과 순종으로 표현합니다.
그러기에 생애도 순종으로 이어짐을 말씀 합니다.
(눅 2:51)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리고 순종을 마지막으로 장식합니다.
(빌 2:8-11)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리스도께서 큰 대제사장이 되어 온전하게 되신 요건으로 순종을 말씀합니다.
(히 5:8-10)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그러기에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은 사람은 버림을 받게 되는 것이 구약의 기본 원리였습니다.
사무엘이 하나님께 불순종한 왕 사울에게 예언할 때,“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삼상 15:22-23)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순종하여 온전하게 되시고, 이제는 그에게 순종하는 자들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시며 주님께서 사명을 수행하셨습니다.
(사 53:10)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곧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시는 길을 가는 것이며, 속건제물이 되어 인간들의 죗값을 보상하신다는 의미를 수반하고 있습니다.
순종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종의 행로는 고난으로 점철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는 영화로운 자가 아니라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고난 받는 종으로 친히 그 몸으로서 인류의 죄 값을 치루시기 위해서 오셨을 뿐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본래 높은 자리에 올라 남을 지배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이런 욕망의 씨앗은 남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막 10:43-45)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리스도의 섬기신 일, 즉 그의 대속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가 여전히 남들의 섬김을 받으려 한다면 그것은 이미 성도의 특성을 잃어버리고 무미건조한 상태로 전락해 가는 증거라고 해도 좋습니다.
섬김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아낌없이 가진 그것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한 자들은 그분의 성품을 따라 남을 섬길 수 있어야 하고 필요한 자에게 자신을 내어 줌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사람의 대속을 위해 어떤 동물의 희생 제사나 기름을 태움으로써 사역을 감당하지 않았습니다. 대속의 확실성은 오직 생명의 피, 곧 무흠한 그리스도의 피가 흘려질 때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피에 생명이 있으며 그리스도의 피만이 모든 죄를 속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레 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섬김의 절정은 자기희생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남을 섬기기 위해 결심은 하지만 여기에서 되돌아가곤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경제적 유익과 육신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연약한 이웃을 위해 의연히 자신을 내어 주는 것이 바로 희생입니다.
이 희생은 외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내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정신적 즐거움을 송두리째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기대 조건 없이도 하나님의 의를 위해 기꺼이 자기를 내어 주고 심지어는 자신의 생명까지도 바칠 수 있는 것이 참 된 희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과 전 생애를 죄인에게 주시는 데 충성하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셨고 섬기는 자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사야 53장은 종의 고난에 대한 예언으로 그 묘사가 대단히 처연하고 사실적입니다. 주의 종은 질고를 지고 슬픔을 당하며, 징계를 받고 채찍에 맞아 찔리고 상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토록 고난을 당하는 이유가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이라고 밝힘은 종의 고난에 대속적 성격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목적이 있습니다. 종은 계속하여 곤욕과 능멸을 당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위해 변호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습니다. 이 종을 양에 비유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이 정리한 바에 의하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입니다. 요한은 먼저 그리스도를 세상 죄를 담당하는 속죄양으로 소개합니다. 여기서 세상 죄란 죄책을 말합니다. 죄를 지음으로써 모든 인간으로 하나님께 채무를 졌습니다. 곧 사망의 채무입니다.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그러나 모든 인간은 이 채무를 변제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인간의 소유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이 채무를 갚을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곧 제사 제도입니다. 짐승을 인간 대신 죽임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에 대한 채무를 대신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완전한 죄의 보상은 못 되었습니다. 구약의 전통적인 대제사장은 높은 권위를 갖고 있었고,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위대한 사역을 맡았지만 결국 연약한 인간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 가운데 엘리라는 사람은 인간적으로 지나치게 부족한 모습을 보이다가 결국 비참하게 최후를 마치고 말았습니다(삼상 4:12-18). 이런 인간들이기 때문에 제사장은 백성을 위한 속죄 제사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즉, 인간은 그 지위가 어떠하든지 자기를 위한 속죄가 필요합니다.
대제사장 아론이 제단에 나아가 자기를 위한 속죄제 송아지를 잡은 것이 이런 까닭입니다.
(레 9:8) 이에 아론이 제단에 나아가 자기를 위한 속죄제 송아지를 잡으매
모든 제사 드리는 일은 결코 소홀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제사 드리는 절차가 복잡하더라도 거룩한 깊은 뜻들이 들어 있으니 엄숙하게 드려져야 합니다.
또한 백성들을 위한 헌제를 드리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리는 것은 의미가 깊습니다. 제사장은 다른 사람을 위해 사역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가 발각되면 즉시 자백하고 죄를 버림으로 깨끗한 삶을 추구해 나가야 합니다.
이런 인간의 연약함을 극복하고 온전한 제사장이 되신 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히 10:1-10)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제사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 위에 말씀하시기를 주께서는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는 원하지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고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생명을 짐승의 생명이 대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구약에서의 모든 속죄 제물은 그리스도로 인한 완전한 속죄의 표상이었으며, 완전한 속죄는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요한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의 모든 죄 짐을 떠맡고 광야로 떠났던 아사셀 양으로 비유합니다.
(레 16:10)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는 산 채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지니라
(레 16:21-22) 아론은 그의 두 손으로 살아 있는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아뢰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지니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접근하기 어려운 땅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지니라
과거 아사셀 양은 이스라엘의 죄를 대신 지고 그 죄를 이스라엘에게서 멀리 옮겨 놓았습니다. 이스라엘을 죄와 상관이 없게 만들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사역이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과거 아사셀 양은 이스라엘의 죄만 이스라엘과 분리시켰지만 예수께서는 온 세상의 죄를 모든 사람으로부터 분리시킨다고 요한은 증거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하시며 섬기신 것입니다.
찬송가 461장 십자가를 질 수 있나는 미국의 말랏(E.B. Marlatt 1892-1976)목사가 지었는데, 그는 디포대학을 마치고, 보스톤 신학교를 거쳐 영국의 옥스퍼드대학, 독일의 베를린대학을 마쳤습니다. 제 1차 세계대전 때 포병 장교로 근무했고, 보스톤대학 철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근무하고 있던 어느 날(1926년), 종교 교육학부가 헌신예배를 드리면서 이 때 부를 수 있을만한 찬송가 한 편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이 때 말랏 교수는 오래 전부터 마음속에 깊이 인상지어진 어떤 계기를 통한 한 편의 찬송시가 구상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보스톤대학 신학교 학생시절인 1911년 그의 나이 19세 때, 신약신학 강의 시간에 마카스 뷔유엘 교수의 열강이 있었습니다. 강의 내용은 마가복음 10장의 강해였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형제가 예수님께서 영광중에 왕위에 오를 때, 자기 형제에게 그 좌우편을 허락해 달라는 욕심어린 요청을 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하실 때 저희가 "할 수 있나이다"라는 내용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강의를 들은 후 말랏은 심중에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목숨이라도 내어 놓겠느냐"물으신다면 "내가 그럴 수 있나이다(We are able)라고 대답할 수 있겠는가!"라는 자신을 채찍질하는 질문이 생기기 시작하여 그때까지 간직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찬송가 청탁을 받자 이 생각이 곧 떠올라 짓게 된 것이 "십자가를 질 수 있나 주가 물어 보실 때 죽기까지 따르오리 저들 대답하였다 우리의 심령 주의 것이니 당신의 형상 만드소서 주 인도 따라 살아갈 동안 사랑과 충성 늘 바치오리다"라고 구절을 작사하였다합니다. 그리고 이보다 2년 전에(1924년) 신학교 대학원생인 메이슨(H.S. Mason 1881-1964)이 한 곡조를 작곡하였는데 진취적인 아름다움 때문에 많이 연주되었고, 보스톤 대학생들은 암기할 정도로 유명해지던 중인데 이 곡조에다 이 가사를 결합시켰더니 바로 그 찬송가를 위해 작곡된 듯 너무도 잘 맞는 찬송가가 되어 이 찬송가는 급속도로 유명해졌고, 각종 헌신 예배 때 헌신 찬송가로 널리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며 좋은 일꾼 되기를 소망하는 한 해를 살면서 자신을 낮추시고 이 땅에 오셨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며 자신을 희생하시어 섬김의 사역을 감당하신 주님을 본 받아 섬기는 좋은 일꾼들이 됩시다.
메시야를 알아본 소경들
마 20:29-34 / 이정선목사
예수님 일행이 여리고를 떠난다는 것은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의 마지막 구간을 시작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공생애를 약 3년으로 추정하는데, 그 3년의 공생애가 이제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서 결론이 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사렛이라는 작은 동네에서 목수로 사시다가 때가 되니 드디어 군중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면서 그가 메시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태어나셨을 때 사탄은 헤롯 왕을 동원해서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집요하게 따라붙는 사탄을 따돌리고 예수를 애굽으로 피신시켰다가 나사렛이라는 시골 구석에 깊이 감추셨습니다. 30년 동안 메시야를 찾아 헤매던 사탄은 예수께서 군중 앞에 자신을 드러내시자마자 즉시 광야로 데려가서 시험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예수님의 적수가 될 수 없었습니다.
사탄의 시험을 이기신 예수께서는 본격적으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장 큰 관심사 하나는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면, 하나는 일반 대중에게 천국 복음을 전파하신 것이고, 또 하나는 제자들을 가르치신 것이었습니다. 3년 동안 예수께서 바리새인들과 싸우면서 주장하신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많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것은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완성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사람들에게 그가 메시야이심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는 일이었습니다. 갑자기 나타난 소경을 고쳐주신 이 사건은 그 목적을 훌륭하게 수행합니다. 우리는 눈을 뜨게 된 소경에 초점을 맞추기 쉽지만, 그보다도 소경을 고치신 예수님께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소경이 고침 받아 눈을 뜨게 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 사람 개인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그 사람 개인에게 일어난 사건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어떻게 사용되었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마찬가지입니다. 각자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어떤 의미가 있으며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은혜를 주셨다면, 그것은 그것 가지고 여러분이 행복해지는 것으로 끝나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 세상에 드러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고난을 주셨다면, 그것으로 여러분이 괴로움 당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고난보다 훨씬 크고 중요한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야 합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서 소경을 고쳐주신 것이 그분의 능력과 메시야 되심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 사건이 되었던 것처럼, 여러분의 생애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세상에 하나님을 증거하는 일에 사용되도록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참으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인생인 것입니다.
여기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 일행이 여리고를 떠날 때 소경 둘을 만났다고 했는데, 누가복음에서는 여리고에 가까이 오실 때에 한 소경을 만났다고 했군요(눅 18:35). 그러나 마가복음에서도 예수께서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라는 소경을 만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막 10:46). 그렇다면 이 사건은 여리고에 들어오실 때가 아니라 나가실 때 일어난 것 같은데, 왜 누가는 들어오실 때 일어났다고 기록했을까요? 마태와 마가는 예수께서 여리고에 들러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기록하지 않았지만, 누가는 여리고에서 일어난 중요한 다른 사건을 같이 기록합니다. 바로 삭개오 이야기입니다. 바디매오 사건은 여리고 성 밖에서 일어났고, 삭개오 사건은 성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누가는 이 두 사건을 기록하면서 바디매오 사건을 앞에 배치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들어가실 때 일어난 사건처럼 기록된 것 같습니다.
소경이 두 사람이었는지 한 사람이었는지의 차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태의 기록에 두 사람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 두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가와 누가가 한 사람이라고 기록한 것은 그 두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의 행동이 주목할 만한 것이어서 그렇게 기록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 일행이 여리고를 떠날 때에 큰 무리가 따랐습니다. 아마도 여리고 성의 주민 대부분이 따라 나왔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많은 사람이 모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그 행하시는 이적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마침 유월절 명절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차피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했는데,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신다고 하니 잘 되었지요.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예수님은 큰 무리와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또 그것은 예수께서 메시야로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무르익고 있었던 분위기를 잘 반영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때 길 가에 앉아 있던 소경 두 사람이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소경들이 길목에 앉아 있었던 것은 구걸하기 위해서입니다. 마가는 그를 소경 거지라고 소개했고, 누가는 소경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명절을 맞아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이 시기는 구걸하기에 최적의 조건이었을 것입니다.
갑자기 큰 군중이 지나간다는 것을 알고 거지들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께서 지나가신다고 일러주었습니다. 그러자 이 소경들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꾸짖자, 소경들은 더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다가 잘못하면 사람들에게 두들겨 맞을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소경이라고 하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으로 통했습니다. 눈이 안 보인다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는 큰 죄를 지은 죄인이 하나님께 벌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런 소경들을 마음 놓고 경멸할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언어 사용 습관을 보면, 죄인이라는 단어가 많이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가 아니라, 사회에서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공식적인 명칭이었습니다. 세리나 창녀 같은 사회에서 손가락질 당하는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죄인으로 불렸고, 소경이나 절름발이와 같은 육체적인 장애를 가진 사람들 역시 죄인으로 분류되었습니다. 이것은 고칠 수 없는 질병이나 장애는 죄의 결과라는 유대인들의 세계관이 반영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회에서 그런 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이었겠습니까? 극도로 종교적 집단인 유대인 사회에서 죄인이라는 것은 아무런 가치나 존엄성을 소유하지 못한 버림받은 삶이었습니다. 아무도 그들을 사랑하지 않았고, 아무도 그들을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이 바리새인들의 눈에는 이해도 되지 않을 뿐 아니라 못마땅했던 것입니다.
이 두 소경은 그렇게 비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비웃음과 경멸을 견디면서 구걸이라도 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것입니다. 이 소경들은 예수께서 다른 소경들의 눈을 뜨게 하셨다는 소문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들의 눈도 볼 수 있게 해 주실 수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자기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행여 예수께서 멀리 지나가버려서 들리지 않을까 목청껏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던 사람들은 갑자기 일어난 소동을 썩 유쾌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메시야를 모시고 예루살렘을 향해 진격하는 의미심장한 순간에 웬 거지 소경들이 소란을 일으킨단 말입니까? 이런 가치 없는 인간들에 의해 메시야의 행진이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소경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습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다른 일 같았으면, 사람들의 꾸짖음에 아무 말도 못하고 입을 다물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의 인생이 달린 순간입니다. 예수님을 그대로 보내버리면 그들은 죽을 때까지 다른 사람들의 멸시를 받으며 비참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들의 소리를 들으시고 만나 주신다면 분명히 그들의 눈을 뜨게 하실 것이고, 그렇게만 되면 인생이 바뀌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꾸짖는 소리가 귀에 들어오기나 하겠습니까?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는데 조용히 하라고 해서 쉽게 포기하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기회를 너무 쉽게 포기하는 것 같아요. 한두 번 기도하다가 잘 안 되는 것 같아서 포기하고, 별로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아서 포기하기도 합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매달리지 않는 이유는 절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어도 잘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잠비크에서 선교사역을 하면서 수많은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체험한 하이디 베이커 박사는 이렇게 묻습니다. “부요한 자들, 그리고 부요한 문화 가운데 기적과 초자연적인 역사를 경험하는 일이 왜 이렇게 드물까요? 예수님께서는 왜 천국을 심령이 가난한 자들의 것이라고 하셨을까요?” 베이커 박사가 발견한 답은 가난한 자들이 가진 절대적인 의존성, 배고픔, 필요, 절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간절하게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 소경들이 그랬습니다.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꾸짖고 때리고 위협한다 해도 소리 지르는 것을 멈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좀 더 진지하고 절실했으면 좋겠습니다. 힘들다고 하는 사람은 많은데, 하나님께 매달리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새벽기도에도 나와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힘들고 고통스러운 문제들을 하나님께 내놓고 부르짖어 보십시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그것 아닙니까? 이 소경들이 눈도 안 보이고 사람들의 멸시를 당하며 사는 것이 너무 힘들고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그들을 구원하시고 인생을 바꾸실 분이 지나가신다는데도 그냥 입 다물고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조용히 하라고 꾸짖는 소리에 잠잠할 수 있습니까? 이들은 죽기 살기로 소리 지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부르짖는 것은 그러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습니다. 그 부르짖는 소리가 예수님의 귀에 들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발걸음을 멈추시고 그 소경들을 부르셨습니다. 왜 그렇게 소리를 지르느냐고 물어보십니다.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는 이유도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들으시고 우리를 만나 주시기를 원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도 아시고 우리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 아시는데, 굳이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서 부르짖어야 하느냐고 반문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고, 부르짖는 사람에게 주님이 대답해 주실 것입니다. 힘들다고 불평만 하고 앉아 있다는 것은 사실은 별로 힘들지 않다는 얘기지요.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은, 이 소경들이 예수님을 부르는 칭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릅니다. 즉 이 소경들은 예수께서 메시야로 오신 분이라는 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예루살렘 입성을 눈앞에 두고 있는 시점에서, 이 소경들이 예수님을 메시야의 칭호로 부르고 있다는 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소경들의 입을 통해서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을 선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경들이 말한 대로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사실은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뜨게 하시는 이적으로 증명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소경들과 예수님이 환상의 콤비를 이루어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경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라 부르고, 예수님은 소경들의 눈을 뜨게 하시고, 손발이 착착 맞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과연 예수께서 메시야라는 것을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소경이고 거지였던 이 사람들이 눈을 뜨게 되어 예수님의 일행에 합류했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행진하는 군중의 사기가 한껏 고조되지 않았겠어요? 진실로 메시야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시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다는 믿음과 기대가 부풀어 오르지 않았겠습니까?
물론 흥분과 기대 속에서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나중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지르게 됩니다. 이스라엘을 회복할 메시야라고 생각했는데 붙잡혀서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메시야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배반하고 등을 돌린다 해도, 이 소경들은 끝까지 예수님의 곁을 지켰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들의 인생을 바꾸신 구세주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시는 것을 보고 믿은 사람과, 자기가 눈을 뜨게 되어 믿은 사람이 같을 수 있겠어요?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고 동네에 들어가서 메시야를 만났다고 사람들에게 소리쳤습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다 나와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 사람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요 4:42). 우리가 처음에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예수를 믿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 상태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내가 직접 하나님을 만나야 하고, 그분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야 하고, 그분의 역사하심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믿음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세상을 구원하신 구세주로만 믿는다면 별 느낌이 없습니다. 나는 그저 60억 인구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그분은 다른 사람들의 구원자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신 나의 개인적인 구세주이신 것을 믿게 될 때, 그것이 구원을 받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며 부르짖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그래서 늘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마 20:29-34 / 김경수목사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싫어하는 사람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부정적인 사람을 싫어하십니다. 부정적인 것은 믿음이 없다는 것이죠. 믿음이 없는 사람을 싫어합니다. 10명의 정탐군들이 부정적인 보고를 할 때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더불어 부화뇌동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광야로 회군시킵니다. 염려하는 사람들을 싫어하십니다. 이 또한 믿음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패배적인 사고, 불가능의 사고, 비방하는 사람, 험담하는 사람, 방탕한 사람, 악한 말을 하는 사람, 무례한 사람, 교만한 사람, 죄를 짓는 사람, 오만한 사람 등등.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고 물리치십니다.
반면에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가능성의 사고를 하는 사람, 기적을 기대하는 사람, 긍정적인 사람,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 비전의 사람, 목적지향적인 사람, 미래지향적인 사람,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 예배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신실한 사람, 충성스런 사람, 예의로운 사람 등등.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소경은 구조적으로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눈을 뜨지 못하는 것만큼 불편하고 어려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이들에게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눈이 열리고 세상을 보게 된 것입니다. 불가능이 가능케 되고 불행이 행복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감사가 한숨을 대신하는 놀라운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이런 축복이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어떻게 이와 같은 기적이 나타나게 되었을까요?
먼저는, 이 두 소경의 반전은 주님을 부르면서 시작이 됩니다.
누구 한 사람 관심도 기울여 주지 않고 손가락질을 당하면서 천대와 멸시만 받으며 살아 왔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정적인 순간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말입니다. 분명히 그들은 주님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어 왔을 것이며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주님께서 지금 자신들 앞을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언제나 기적은 주님을 만나면서 시작이 됩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기적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분만이 우리들을 풍요롭게 해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삶을 변화시켜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그냥 지나치지 않도록 하십시오. 좋은 것을 주시고 풍성하게 채워주시기를 원하시는 주님을 그대로 지나치게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저지를 수 있는 최대의 실수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주님께서 지나쳐 가지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교제를 원하시지만 거절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신 목적을 요10장에 자세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10:10)-“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이 세상에서 나를 풍성하게 해 줄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은 나를 이용하고 마지막에는 아무 쓸모짝에 없다고 버리는 곳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나를 버리지도 않으시고 외면하지도 않습니다. 언제나 당신을 부르면 기꺼이 오셔서 긍휼히 여기시고 치유하시고 풍성케 하여 주십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이렇게 좋으신 주님을 사람들은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탕자를 보십시오. 아버지의 간섭을 싫어합니다. 그리고는 당돌하게도 자신에게 돌아올 분깃을 요구합니다. 아버지는 탕자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지만 아들은 그것을 정리하여 아버지의 간섭이 닿지 않는 먼 타국으로 가버리죠. 이것이 사람들의 생리입니다. 사람들은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고자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고 미련한 짓인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를 떠나는 순간 불행을 자초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없는 곳은 어둠이고, 불행이며, 염려와 두려움 밖에는 없습니다. 물론 잠시의 쾌락과 기쁨을 누릴 수는 있겠죠. 그러나 말 그대로 잠시일 뿐입니다. 그 쾌락이 끝이 나고 잠시잠간의 기쁨이 바닥을 드러내면 말할 수 없는 회한과 공허가 밀물 듯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주님께 가까이 오십시오. 주님을 멀리 떠나려고 하지 마십시오. 주님을 떠나 절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등지는 순간 어둠을 만나게 되고 도적을 만나게 됩니다. 오직 주님 안에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탕자는 짐승의 먹이조차 먹지 못하는 절망의 나락 끝자락에서 아버지의 품을 그리워합니다. 생각만 해도 너무나 좋습니다.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의 배려, 아버지의 인애로우심, 나의 모든 허물과 잘못까지도 용납하시고 받아주시는 분,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는 알지 못했던 행복들입니다.
주님을 절대로 포기하거나 거부하지 마십시오. 주님을 거부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입니까? 그러나 그보다 주님을 거부함으로 오는 후폭풍은 더할 나위 없이 절망적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소경은 자신들에게 온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않습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언제 다시 이 기회가 올런지 모릅니다. 인생에는 늘 기회가 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믿을 수 있을 때 마음을 열고 그분을 영접하십시오. 주님을 영접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주님, 내 마음속에 오십시오. 이제부터는 주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십니다.”
이렇게 고백하면 그분께서는 기쁨으로 내 마음속에 오셔서 기쁨을 주시고 평안을 주시고 문제를 해결하시고 육신의 질병을 고치시고 감사가 넘치는 축복의 삶을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두 번째로, 이 두 소경은 주변의 장애가 있어도 굴하지 않고 더욱 주님을 부르면서 가까이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소경은 주변의 무리들이 잠잠하라고 꾸짖고 나무랗지만 그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소리를 질러 간청을 합니다.
(31)-“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많은 장애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 중에서도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트러블이 많을 것입니다. 사람 때문에 넘어지지 마십시오. 사람은 그럴 수 있습니다. 다른 지체들이 나에게 상처를 준다고만 하지 마십시오. 나도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자신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다른 이의 티끌만 본다고 책망하신 적이 있습니다. 자신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용하면서도 다른 지체들에게는 냉철한 잣대를 들이대고 상처를 받고 상처를 주면서 살아가는 것이 사람들의 삶의 방법처럼 보여집니다. 그러나 절대로 사람 때문에 신앙에 빨간불이 들어오지 않도록 하십시오. 혹시나 주님께서 상처를 주고 아픔을 주었다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아니 주님께서 상처를 주어도 결단코 시험에 들지 마십시오.
수로보니게 여인을 기억하십니까? 주님께서 이방 여인이라고 개취급을 하였습니다.
(마15:27)-“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시험에 드는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참으로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내 앞에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는데 어찌 시험에 들어 지옥을 향해 달려갈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래서는 안 됩니다. 날마다 천성을 향하여 믿음의 경주를 하여야 합니다. 달음박질 하는데 어찌 장애물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참고 인내하십시오.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물 위를 걷던 베드로는 갑자기 태산 같은 파도가 덤벼들자 두려움과 무서움으로 인해 물속으로 빠져 들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만약에 그가 계속하여 주님을 바라보면서 오히려 그 큰 파도를 서핑 하듯이 즐겼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는 주님을 놓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환경 때문에 넘어질 일이 생기고 사람 때문에 시험들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일지라도 결코 시험에 들거나 넘어지지 마십시오.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승리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로, 이 두 소경은 기적을 기대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간절히 부르면서 간청하는 그들을 향해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33)-“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이 두 소경은 한 끼의 식사나 돈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잠시의 도움을 요청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불행의 원인이었던 소경이 고침받기를 소원했던 것입니다.
(33하)-“주여 우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기적을 기대하는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나아온 것입니다. 사람들은 고칠 수 없지만 주님께서는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적은 자신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기적을 기대하는 희망.
아브라함도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적을 기대하는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주님으로 인해 나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주님으로 인해 형통할 것이다. 나는 주님으로 인해 복될 것이다. 주님의 기적은 일어날 것이다. 반드시 나의 인생에도 기회는 올 것이며 기적은 일어날 것이다.
이런 기적을 기대하는 믿음과 희망을 가지십시오.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도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주님의 기적은 지금도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말을 하면 허황된 것이라고 놀리는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래도 나는 이런 믿음의 고백과 희망이 좋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대부분 저녁에 되어 하루를 살펴 보면 좋은 일이 있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리고 더 많은 기적이 곧 일어날 것이라고 하는 예감을 갖게 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절망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끝모를 나락 끝에 자신들 모두는 죽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소유하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생각과 사고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주님께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실 뿐만 아니라 나를 도와주시고 보호하시며 축복하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갈릴리 가나 혼인 잔치가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도 초대를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낭패를 만났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마리아는 주님께 이 사실을 고하면서 기적을 기대하는 믿음을 보여 드립니다. 주님께서는 정중히 거절하셨지만 끝내 마리아의 기적을 바라는 믿음과 희망을 외면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 되는 기적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너무 좋습니다. 기적을 바라는 믿음과 희망이 좋습니다. 물론 그 시간에 절망을 선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절대로 절망을 선택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에게는 한 가지 습관이 생겼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절대로 절망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염려가 오고 걱정이 발생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저는 기적을 기대하는 믿음과 희망을 선택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기적을 기대하는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좋아하십니다.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하시고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연단시키고 훈련하신 과정을 보십시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식을 주실 수도 있었지만 그보다 아브라함의 왜곡되고 굴절된 사고와 생각을 변화시키시기 위해 자식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계속하여 여호와께는 능치 못함이 없다고 고백하도록 기다리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하는 줄 아십니까?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까지 십자가에 죽이시면서 사랑하셨습니다. 그 큰 사랑을 받은 저와 여러분들은 담대히 그분 앞에 나아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간구할 수 있습니다. 기적을 기대하며 나아오는 당신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좋아하십니다. 기적을 기대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지금도 저와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기적을 기대하는 믿음과 희망을 가지십시오.
사업이 불 같이 일어나는 기적을 꿈꾸십시오.
직장이 복될 것이라는 기적을 꿈꾸십시오.
질병이 나을 것이라는 기적을 꿈꾸십시오.
자녀들이 형통할 것이라는 기적을 기대하십시오.
절대로 절망을 선택하지 마십시오.
선택하는 대로 여러분들의 미래는 결정될 것입니다.
기적을 기대하십시오.
그 사람에게 주님께서는 기적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