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6일(연중 제6주일) 영원한 생명을 위한 가난
예수님은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 마태오 복음에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셨는데(마태 5,3), 여기서는 실제로 가난한 너희 제자들이 행복하다고 선언하셨다. 그들은 배와 그물, 수입 좋은 세관 자리 등 모든 걸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고 그래서 실제로 가난하게 됐다. 그들에게는 빵도 넉넉하지 않았고, 그날그날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해야 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 인해 가난해졌고 모든 삶을 하느님의 섭리에 의존해야 했다. 예수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모든 걸 걸어야 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이 다스리는 곳, 하느님이 전부인 곳이다. 제자들이 그랬다. 잘 몰랐겠지만 그들은 벌써 하느님 나라에서 살고 있었던 거다. 예수님에게 모든 걸 걸었으니 말이다. 그들의 가난이 가져다준 선물이다. 그렇다고 해서 재물이 악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데 재물은 우리 마음을 아주 쉽게 흔들어 놓는다. 구도자 중에 가난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스스로 선택한 가난이라서 맑은 가난, 청빈(淸貧)이라고 부른다. 재물이 나빠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찾고 따르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로 가난한 이웃에게 행복하다고 말한다면 그들에게 모욕이 될 거다. 가난한 삶은 정말 힘겹고 자존감도 잃게 만든다. 교회는 영적인 구원만을 말하지 않는다. 전인적이고 현실적인 차원의 구원을 선포하고 노력한다. 하느님이 그들의 눈물과 고통을 절대 모르시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의 수입 안에는 그리고 그리스도인 각자의 수입 안에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야 할 몫이 포함되어 있다. 그 돈은 거룩한 돈이라서 먼저 떼어놓고 나머지를 사용한다. 마치 하느님께 드리는 거처럼 그 돈은 반드시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져야 한다. 그 돈이 그들이 가난을 극복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해도, 하느님이 그들을 잊지 않으셨음을 알리기에는 부족하지 않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우선 선택한다. 하느님 마음이 그들에게 더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부자가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부유한 이들이 하느님만 의지하기란 쉽지 않을 거다. 그들은 이미 받을 걸 다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루카 6,24).”
바오로 사도는 말한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우리 신앙은 수많은 사람이 피를 흘리며 지키고 전해준 참으로 고귀한 것이다. 이런 신앙을 얼마 안 있어 결국 다 남의 것이 되고야 말 재물을 기원하는 정도로 여길 수는 없다. 나의 믿음은 하느님 나라, 영원한 나라로 가는 길이다. 주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예레 17,5).” 우리 하느님은 질투하는 분이라서 우리가 다른 것, 재물이나 사람에 마음을 주는 것을 참지 못하신다.
예수님, 모든 걸 버리고 주님을 따른 베드로 사도에게 집, 형제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와 토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마태 19,29)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과연 말씀하신 대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저는 이미 영원히 살기 시작했다고 믿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더욱 순수하게 주님을 따르고 사랑하게 도와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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