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2.20 (토) 독립문역 1번 출구에서 멋쟁이들과 반가이 만나서 2월 정기 인왕산행을 안산즐산했소이다.
보성 57 건아들이 인왕산 정상에서 잠시 기념촬영
아파트 숲을 지나 힘차게 오르는 멋쟁이들~~~ 건강을 위해서 화이팅~~~
인왕산 성곽입구에서~~~한컷!!!
인왕산에는 태조, 무학대사의 기도터와 사직터널에서 자하문까지 서울 외곽을 쌓았던 성곽이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산 이름마저 왕(王)자를 쓰지 못하고‘인왕(仁旺)’으로 고쳤다가, 1995년에 와서야‘인왕(仁王)’이란 본래 이름을 되찾았다.
산행코스는 독립문역->인왕산성곽길->매바위->인왕산정상->성곽길->청운공원->국궁전시관->사직단->경복궁역맛집 까지 널널히 3시간을 성곽을 오르면서 발전하는 서울의 모습과 김도박사의 구수한 태조 이성계의 한양천도와 역사에 대한 문화해설도 들어면서 건강한 산행을 가졌습니다.
선바위
2개의 거대한 바위가 마치 스님이 장삼을 입고 서 있는 것처럼 보여 ‘禪’자를 따서 선바위라 불렀다고 전한다. 암석 숭배의 일종으로 이곳에서 소원을 빌면 모두 이루어진다고 여겨 일찍부터 신앙의 대상이 되어왔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남산에 있던 국사당(國師堂)을 선바위 근처로 옮겨온 뒤로 이곳을 찾아 소원을 비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나게 되었다. 조선 태조가 성을 쌓을 때 문신 정도전(鄭道傳)과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이 바위를 성 안으로 할 것인지 성 밖으로 할 것인지를 놓고 의견 대립을 보였으나 결국 정도전의 의견에 따라 성 밖으로 밀려났다는 일화가 있다
범바위
매바위
정상에 오르면 경복궁을 중심으로 인왕산과 함께 조선시대 한양을 둘러싸고 있던 내사산인 낙산, 남산, 백악산이 펼쳐진다. 정상 아래편에 겸재의‘인왕제색도’에 나오는 매바위와 치마바위가 장관을 이룬다.
서울 시내의 청와대와 경복궁을 바라보면서 한양의 역사에 대한 해설을 진지하게 듣는 동무들~~~보기 좋다
김도박사의 경복궁에 대한 해설과 청와대에 대한 진지한 문화해설에~~~
또한 일제시대의 경무대에 보조해설도~~~
경복궁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다섯 개의 궁궐 중 첫 번째로 만들어진 곳으로, 조선 왕조의 법궁이다. 한양을 도읍으로 정한 후 종묘, 성곽과 사대문, 궁궐 등을 짓기 시작하는데 1394년 공사를 시작해 이듬해인 1395년에 경복궁을 완성한다. ‘큰 복을 누리라’는 뜻을 가진 ‘경복(景福)’이라는 이름은 정도전이 지은 것이다
경복궁이 자리 잡은 위치는 도성의 북쪽 북악산 기슭으로 풍수지리설에 입각한 주산(主山)의 바로 아래이다. 궁의 전면으로 넓은 시가지가 전개되고 그 앞에 안산(案山)인 남산이 있으며 내수(內水)인 청계천과 외수(外水)인 한강이 흐르는 명당(明堂) 터이다. 궁의 왼쪽으로 종묘가 있고 궁의 오른쪽에 사직단이 자리 잡고 있다.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경복궁 안에 청사(廳舍)를 신축하면서 1927년 오운각(五雲閣) 외의 모든 건물과 시설을 철거하고 총독관저를 이 곳에 지었다. 청와대 본관은 바로 이 때 건축한 것이다.1945년 8·15광복과 더불어 미군정이 시작되자 이 곳은 그대로 군정(軍政)장관의 관저로 사용되었으며,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어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면서 ‘경무대(景武臺)’라고 불렀다. 그 후 1960년 4월 4·19혁명 후 민주당정권이 들어서면서 대통령 윤보선(尹潽善)이 경무대의 주인이 되자 곧 ‘청와대’로 개칭하였고, 1990년 프레스센터인 춘추관과 대통령 관저가 신축되었다. 1993년 8월 대통령 김영삼(金泳三)의 지시로 일제강점기의 조선총독이 기거하였던 구관은 철거되었다.
또한 청와대 앞 숲속엔 7대 소궁 저경궁(儲慶宮) 대빈궁(大嬪宮) 육상궁(毓祥宮) 연호궁(延祜宮) 선희궁(宣禧宮) 경우궁(景祐宮) 덕안궁(德安宮) 이 있다는 해설도
*저경궁:1755년(영조 31)인조의 생부 원종의 생모인 경혜유덕인빈 김씨(敬惠裕德仁嬪金氏)의 신위를 봉안하고 향사하면서 저경궁
* 대빈궁: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를 폐비시키고, 왕후에까지 올랐다가 5년 만에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고 사약을 받았다. 그후 1722년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으로 추존되고, 동시에 대빈궁이 세워지면서 이곳에 신주가 봉안되었다.
*육상궁:육상궁은 숙종의 후궁이며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신 묘이다. 영조 원년(1724)에 건립된 것으로 당초에는 숙빈묘라고 하였던 것을 영조 29년(1753) 묘를 승격하여 육상궁으로 고쳤다.
*연호궁:궁정동 칠궁의 하나. 조선 영조의 후궁인 정빈(靖嬪) 이씨(李氏)의 사당이다.
*선희궁:조선 제21대 임금인 영조(英祖)의 후궁이자 사도세자(思悼世子:장헌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暎嬪李氏)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
*경우궁:조선 제23대 왕 순조의 생모인 수빈박씨(綏嬪朴氏 : 정조의 후궁)의 사당
*덕안궁:조선 제26대 임금인 고종의 후궁이자 영친왕(英親王)의 생모인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엄씨(嚴氏)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
효자동에 대한 역사해설도~~`
경복궁 가까이에 있으므로 환관(宦官:내시)들의 집단거주지였는데 환관 중에는 궁 안에 거주하는 장번(長番)도 있지만 출퇴근하는 출입번도 있었다. 출입번의 경우는 처첩을 거느리고 호화롭게 산 사람이 많았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 집단거주지였던 원효로와 총독부 관사가 있던 효자동을 잇는 전차노선이 지금의 효자로에 개설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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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쪽의 무악산/ 안산의 모습
인왕산 정상에서 보성 57 건아들 화이팅!!!
저 산넘어 세검정이 있는데 세검정이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궁궐지 宮闕志》에 의하면, 인조반정 때 이귀(李貴)·김류(金瑬) 등의 반정인사들이 이곳에 모여 광해군의 폐위를 의논하고, 칼을 갈아 씻었던 자리라고 해서 세검정이라 이름지었다고 전한다.
세검정에서 창의문으로 가서 인조반정을 일으켰답니다.
선조의 둘째 아들 광해군은 포학무도하여 인목대비를 감금하고, 의붓동생 영창대군을 귀양 보냈다가 죽였으며, 다시 능양군마저 죽이고자 하였다. 능양군은 종사의 위태로움을 탄식하고, 또한 자기에게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비밀리에 무신(武臣) 이서, 신경정, 김류, 이귀 등과 더불어 난을 일으키기로 상의하였다
인조반정에 대한 도박사의 해설이~~~
인조반정은 1623년 이귀, 김유 등 서인 일파가 정변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인조를 왕위에 앉힌 사건.
반정세력은 이듬해인 1623년 음력 3월 12일을 거사일로 정해 준비하였다. 그리고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을 한편으로 끌어들이고, 장단부사 이서와 이천부사(伊川府使) 이중로(李重老) 등이 군졸을 이끌고 모여들었다. 하지만 이이반(李而攽)이 이 사실을 고변하여 정변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었다. 그래서 정변이 예정되었던 3월 12일 저녁에 박승종(朴承宗) 등은 추국청(推鞫廳)을 설치해 고발된 모든 사람을 체포하려 했다. 하지만 후궁과 연회를 벌이던 광해군은 이를 재가하지 않았고, 붙잡았던 이흥립마저 풀어주었다. 결국 이이반의 고변으로 상황이 더욱 급박해진 반정세력은 예정대로 정변을 추진하기로 했다. 능양군은 친병(親兵)을 이끌고 연서역(延曙驛)으로 가서 이서 등과 합류하였는데, 무리가 1,400여명이 되었다. 이들은 삼경에 창의문(彰義門)의 빗장을 부수고 도성으로 들어가 곧바로 창덕궁(昌德宮)으로 갔다. 이흥립은 궁궐을 지키던 병사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여 내응하였고, 초관(哨官) 이항(李沆)이 돈화문(敦化門)을 열어 반정세력을 궐 안으로 끌어들이면서 정변은 손쉽게 성공하였다.
광해군은 후원문(後苑門)으로 의관(醫官) 안국신(安國臣)의 집으로 피신하였으나 곧바로 붙잡혀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능양군은 새벽에 조정의 관리들을 소집하여 병조참판 박정길(朴鼎吉) 등을 참수하였으며, 광해군의 총애를 받던 상궁(尙宮) 김씨(金氏)와 승지 박홍도(朴弘道) 등도 그 자리에서 죽였다. 그리고 경운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의 존호를 회복시켜준 뒤에 그 권위를 빌어서 조선의 제16대 왕인 인조(仁祖)로서 왕위에 올랐다
성곽길을 따라 우정도 나누고 시내를 구경하면서 간깃먹으러 갑시다.
데크휴게소에서 막걸리와 간식으로 목도 축이고~~~
치마바위에 대한 해설도~~~
연산군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진성대군(晋城大君)이 중종이 되자 그 부인 신씨(愼氏)는 친정아버지 신수근(愼守勤)이 반정 때 피살되었는데 반정을 주도해온 박원종(朴元宗) 등이 죄인의 딸은 왕비가 될 수 없다하며 반대하자 인왕산 아래 사직골 옛 거처로 쫓겨나 살게 되었다.
중종은 부인을 잊을 수 없어 경회루에 올라 인왕산 기슭을 바라보곤 하였으며, 신씨는 이 말을 전해 듣고 종을 시켜 자기가 입던 붉은 치마를 경회루가 보이는 이 바위에 걸쳐 놓음으로써 간절한 뜻을 보였다. 이 일로 인해 사람들은 이 바위를 치마바위라 불렀다.
국궁전시관 황학정
단군성전에서~~~
: 우리나라 시조인 단군을 모시기 위한 사당. 활쏘는 곳이 5곳 있는데 그중 황학정만이 남아 지금도 활쏘기 대회가 열리고 있다.
사직단 해설도~~~
한양(漢陽)에 도읍을 정한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고려의 제도를 따라 경복궁 동쪽에 종묘(宗廟), 서쪽에는 사직단을 설치하였다.
사직단에는 1년에 네 차례의 대사(大祀)와 선농(先農)·선잠(先蠶)·우단(雩壇)을 제사지내는 중사(中祀), 그 밖에 기곡제(祈穀祭)와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기도 하였다. 이 사직단의 설치와 함께 사직서(社稷署)가 생겨 제사의 수발을 맡았다.
하산후 강희인산악회장께서 보성57 산악회 발전을 위해서 부라보!!!
임범상의 건강에 대한 설명도 듣고~~~
강회장의 마지말 말씀으로 오늘의 산행을 잘 마무리 했습니다.
동무들 담에 또 만날때까지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