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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인 두 사람을 고치심
마 20:29-34
29 그들이 여리고에서 떠나 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따르더라
30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31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32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3 이르되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34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마 20:30-34 / 맹인 두 사람이 길가에 앉아 있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큰소리로 `선생님, 다윗의 자손이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31)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하였으나 그들은 더욱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32) 예수께서는 그들이 있는 곳에서 걸음을 멈추시고 33)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선생님,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하고 그들이 간청하자 34) 예수께서는 측은히 여기시고 그들의 눈에 손을 대셨다. 그러자 즉시 그들은 눈을 뜨게 되어 예수를 따라갔다.
본문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기 전에 보이신 마지막 기적으로 맹인 두 사람을 고치신 일입니다.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29-30) 예수님께서 여리고에서 떠나갈 때 큰 무리 가운데 둘러싸여 있던 맹인 두 명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께서 모든 병을 치료하고 자신 같은 맹인들의 눈도 뜨게 했다는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질문처럼 자신들을 향한 부정적인 시각에서 자유롭지 못해 군중에서 떨어져 있습니다. 게다가 볼 수 없기에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예수님을 뒤따를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늘 구걸하던 방식입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실 길과 때를 맞추어 미리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생일대의 단 한 번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절규합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소리칩니다. 비록 맹인이지만 자신들도 사랑받을 만한 당신의 백성이라는 뜻이고, 예수님을 향한 간절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 질러(31) 주변의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맹인들에게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고 위압합니다. 하지만 간절한 이들은 다수 목소리를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전통적이고 율법적인 관념에 빠진 군중의 기세에 눌리지 않습니다. 잠잠하라는 군중의 소리에 자신들의 소리가 묻힐까봐 더 크게 소리칠 뿐입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반복할 뿐입니다. 어떤 미사여구도, 사족도, 중언부언도 없는 주님의 심장을 울리는 소리입니다.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32-34) 이들의 부르짖음이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였습니다. 이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맹인들의 눈을 회복시키기는 너무나 쉽고 그분의 본성에도 맞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분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자녀로서의 부르짖음이며, 무엇을 하여 주기 원하느냐 묻게 만들기까지 그분의 측은지심의 가슴을 두들기는 진정한 절규뿐입니다.
적용: 이상으로 두 맹인의 기도와 태도에서 당신은 무엇을 배웁니까? 너무 평탄해서 틀에 박힌 게으름에 기도를 잊었나요? 기나긴 세월, 아직도 지속되는 고통에서 이제는 기도의 신비조차 불신하고 있지는 않나요?
예수님의 기적의 현장에 언제나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사’입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보며 가엾게 여기며 마음 아파하신 예수님.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아시는 그 분 앞에 온전히 내려놓을 때 다가와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곳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이것을 아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마음을 세상에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사랑과 축복의 은혜를 흘려보내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도록 도와주소서.
< 설 교 >
불쌍히 여기사
마 20:29~34 / 고신일 감독
성경을 높이 들고 우리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저는 예수 믿어 구원받았습니다(요3:16).
저는 예수 믿어 하나님 자녀 되었습니다(요1:12).
저는 예수 믿어 천국 백성 되었습니다(빌3:20).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시118:24),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습니다(딤후3:14~17).
눈을 열어 주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보고 깨닫게 하소서(시119:18).
"아멘"으로 순종하여(고후1:20)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되게 하소서(마5:16). 아멘.
그런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무한경쟁의 시대
우리나라 사람들은 스포츠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지속적으로 좋아하는 것 같진 않습니다.
축구도 월드컵 경기 때나 대한민국 외치며 온 나라가 들썩이지
프로축구 경기장에 응원하러 가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야구도 성적이 좋은 팀 팬들이 주로 야구장에 가지
성적 안좋은 팀 관중석을 보면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열광적으로 스포츠를 좋아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미국 사람들은 좋아하는 것을 넘어 열광하는 스포츠가 많습니다.
특별히 미국의 4대 스포츠라고 불리는
미식축구, 야구, 아이스하키, 농구는 정말 인기가 많습니다.
그래서 프로 경기는 물론이고 대학경기, 고교경기도 TV 중계를 합니다.
올해 초 미국 고교 농구대회에서 ‘아로요 밸리’여고와 ‘블루밍턴’고교의 경기의
전반전 점수가 104-1, 후반전 점수가 161-2였습니다.
경기에 패한 블루밍턴은 끝날 때까지 한 골을 제대로 못 넣었습니다.
2점을 넣은 것도 자유투로 얻은 것입니다.
그런데 승리한 ‘아로요 밸리’의 감독에게 2경기 출전 정지의 징계가 내려졌습니다.
지나치게 많은 점수 차로 이긴 것은 스포츠 정신에 어긋난다는 이유였습니다.
<2015.01.18. 연합뉴스 기사, 참조>
2009년에도 비슷한 일이 미국에서 있었습니다.
100-0으로 이긴 여고 농구 코치가 학교로부터 해고통보를 받았습니다.
0점으로 패한 팀은 <집중력 부족>이나
<난독증> 등을 겪고 있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특수학교 소속이었습니다.
승리 한 팀의 교장 선생님은 사과문까지 발표했습니다.
그 교장 선생님은 “너무나 부끄럽고 당황스럽다”며
“우리는 기독교적이지 못했고(Christlike)
경기에 임하는 마음가짐도 진지하지 못했다”고 하며 사과했습니다.
<2009.1.23. 경향신문 참조>
사실 이긴 자만이 살아남는 스포츠 세계에서
이겼다고 징계를 받고, 이겼다고 사과를 한다는 것은 선뜻 이해되지 않는 일입니다.
최선을 다해 경기에 임했더라도 약한 상대에 대한 배려가 없었다면 비난받을 수 있습니다.
냉혹한 스포츠의 세계라고 하더라도
약자를 배려하고 함께 안타까워하는 ‘긍휼’도 스포츠의 덕목이기 때문입니다.
손자가 걷기 시작하고 팔에 힘이 생기면 할아버지들이 손자와 팔씨름을 합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져줍니다.
그게 할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손자하고 팔씨름할 때마다 이기는 할아버지가 있다면 회개하세요.
약자를 배려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갖고
함께 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스포츠의 정신이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 … 출세하기 위해 …‘경쟁’합니다.
남보다 앞서려고, 높아지려고, 첫째가 되려고 하다 보니
‘약육강식(弱肉强食)-약자의 살은 강자의 먹이가 된다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기기 위해서라면 …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물론, 경쟁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좋은 조건을 만들어 살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힘없고 연약한 사람들을 긍휼의 마음으로 돌보는 것이
예수 믿는 우리의 책임 중에 하나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긍휼의 마음
긍휼(矜恤, pity, compassion)은 가엾게 여겨 돌봐주는 것을 말합니다.(신7:16; 30:3; 고후4:1)
다정히 사랑하며 측은히 여기는 것(삼상23:21; 시25:6),
불쌍히 여겨 동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용어사전 참조>
긍휼은 평범한 친절이나 부드러운 마음씨 이상을 말합니다.
긍휼을 뜻하는 영어단어 ‘compassion’은
라틴어 ‘파티(pati)’와‘쿰(cum)’에서 나왔습니다.
이 두 단어를 합치면 ‘함께 고통 받다’는 의미입니다.
즉 ‘긍휼은 상처와 고통이 있는 곳에서
아픔과 두려움, 혼돈과 고뇌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 눈물겨운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붙잡아 주고
외로운 사람들과 함께 있으려 하고
슬픈 눈물 흘리는 사람들과 함께 울어주는 것이 긍휼입니다.
구약성경에서 긍휼은 크게 두 가지 단어로 사용되었습니다.
‣ 먼저 히브리어 ‘라하밈’은 본래 ‘자궁’이란 뜻입니다.
자궁은 생명이 잉태되는 곳입니다.
아기가 자궁 안에 있을 때 완벽한 보호를 받습니다.
힘을 얻고, 성장하게 됩니다.
긍휼은 완벽한 보호를 해주려는 마음, 힘이 없고 연약한 이웃에게
힘을 주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국의 청교도 설교가였던 토마스 왓슨(Thomas Watson, 1620-1686)은
“사랑과 은혜와 긍휼은 하나님의 품속에서
나란히 자라가는 의좋은 세 자매”- 토마스 왓슨 라고 표현했습니다.
‣ 그리고 ‘라하밈’ 말고 ‘헤세드’도 있습니다.
이 말은 택한 백성과 맺은 언약에 기초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낼 때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호세아 선지자는 택한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긍휼’의 차원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택한 백성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저버리고 파기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언약을 지키시며 택한 백성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라이프 성경사전 참조>
긍휼은 하나님의 대표적 성품입니다.
신명기 30장 3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되 …”(신 30:3) 하였고,
다윗도
“… 내가 곤경에 빠졌도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심히 크시니 …”(대상 21:13) 했습니다.
느헤미야도 하나님께 기도할 때
“…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느 1:5) 라고 했습니다.
시편에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찬양하고 긍휼을 구하는 기도가 자주 나옵니다.
시편 59편 17절에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시 59:17) 했고,
시편 86편 15절에는
“그러나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시 86:15) 라고 간구하였습니다.
신약에서도 에베소서 2장 4절에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 …”(엡 2:4) 이라고 했고,
빌립보서 2장 27절에도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빌 2:27) 했습니다.
이처럼 ‘긍휼’은 언약에 기초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나타내며(시51:1; 사33:2; 단9:18),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성품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시25:6) <교회용어사전 참조>
신약성경에서도
‣ 만 달란트 빚진 종을 불쌍히 여긴 왕(마18:23-35),
‣ 방탕한 생활을 하고 돌아온 둘째아들을 측은히 여기고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춘 아버지(눅15:11-32),
‣ 강도 만난 자를 불쌍히 여겨 살려낸 사마리아인(눅10:25-37) … 에게서 하나님의 긍휼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사건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을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보내신 것 <성육신>입니다. (엡 2:4 / 딛 3:5-6)
그래서 우리가 ‘메리 크리스마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3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벧전 1:3) 했고,
베드로전서 2장 10절에도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벧전 2:10) 했습니다.
원래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그러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상 사람들의 죄값을 치루시려고 십자가에 피흘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길이 되어 주셨고,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구원을 얻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구원, 기쁨, 찬양해야 하는 이유고
그래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을 기뻐하며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큰 사랑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토록 엄청난 긍휼을 우리에게 베푸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또한 앞으로 오는 모든 세대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보여 주시려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그의 자비를 나타내셨습니다.”(엡 2:7-쉬운성경)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신 우리들에게
긍휼을 베푸셨을 뿐 아니라 긍휼의 마음을 주셨습니다.
아무리 감정의 기복이 없고, 차디찬 사람이라도 그 사람 마음에 긍휼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아도 …
우리는 긍휼의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긍휼에 ‘휼(恤)’자는 마음 심(心) 변에 피 혈(血) 자가 합쳐진 글자입니다.
즉, 심장에 피가 흐른다면 (살아 있다면) 긍휼히, 남을 불쌍히 여기며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 하재성, <긍휼, 예수님의 심장>, SFC, p.28. 참조. ]
우리 교회가 여러 기관을 운영하고,
- 어려운 교회들을 후원하고, 해외 선교사들을 돕고 …
물론 우리 교회가 온 세상의 어려운 사람들, 기관을 다 도울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 김장 하면 김치 한 포기씩 내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도 홀로 사시는 분들에게 전달했습니다.
- 새벽송 받으면 담임목사에게 선물 할 만큼의 돈을 준비해 봉투를 내라고 했습니다.
제가 쓰려고 걷는 것이 아닙니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함입니다.
- 500명이 넘는 어린이들을 지원하고 …
- 안 입는 옷 가져와라 … 선교사들에게 성탄 선물 보내고 …
군대 간 청년들에게 성탄선물 보냅니다.
왜 그런 일들을 합니까? 돈 쓸데없어서 …? 우리가 먼저 받았기 때문입니다.
받으시는 분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이 ‘라면과 쌀’이라고 합니다.
올해도 긍휼의 마음으로 여러 곳을 도왔습니다. 더 도울 것입니다.
많은 사역을 감당하시느라 모두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그러나 더 많이 해야 합니다. 더 많이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것’(마 10:8)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농사를 지으면 수확 후 일부를 남겨 두어야 했습니다.
레위기 19장 9~10절을 봅니다.
9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10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레위기 19:9~10)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농사를 지을 수 없어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조치였습니다.
그러나 잘 들으세요.
교회가 이 땅에 있는 목적이 단순히 가난한 사람들,
굶주린 사람들과 나눠 먹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모이는 것이며,
예배하기 위해 있는 장소가 교회입니다.
그러나 예배드리기 위해 모인 우리들은
생활 속에서 여유가 있을 때 하나님께 풍성히 드리고
이웃에게 베풀고 나누고 자신도 윤택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땀 흘려 정성으로 모아 드린 헌금의 일부를 돕는 일에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고,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어 가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에 믿지 못하는 불신감이 팽배해 있습니다.
그래서 긍휼의 나눔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물론 제대로 사용되어야 할 돈이 그렇지 못해서 불신이 생겼습니다.
우리가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돕고 있는데 잘 전달되는지
제가 해마다 여름에 직접 가서 확인합니다.
우리가 내는 생명살리기 헌금으로 그 아이들이 풍족하게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우리의 작은 헌금으로 그 아이들을 보호받고 있습니다.
몇 년 전에 강원도 쪽에 비가 많이 와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우리교회도 수재민헌금을 걷고, 장로님들과 헌금을 어떻게 전할 것인지 의논하고 있는데
TV 뉴스에 기사가 나오는데
‘돈은 은행에 넣어두고 언제 전할지 모르고 물품은 창고를 지어 보관하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우리 교회 장로님들에게 홍수 난 곳에 직접 가서
그 지역 교회에 교인들을 모아놓고 기둥교회에서 거둔 것이니 교회에서 의논하여 사용하시라고 했습니다.
기관을 통해서도 제대로 사용되어야 할 돈이 엉뚱하게 사용되니 사람들 마음에 불신이 생겼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 나는 이제부터 개인이나 어떤 기관을 돕지 않겠다
- 나는 교회에 헌금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하기 싫은 사람의 핑계일 뿐입니다.
부평에 김상현감독님이 시무하고 있는 부광교회가 있습니다.
그분 아들이 군대에 가있었을 때 아들 면회를 가면서 큰 트럭으로 빵을 한가득 싣고 갔다고 합니다.
부대가 발칵 뒤집혔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 얘기를 듣고 아들 먹을 것만 가져가면 되지 트럭으로 가져갔느냐고 물었습니다.
어떻게 내 아들만 주느냐는 것입니다.
가져가서 같이 먹이려고 생각하다 보니 트럭으로 가져가야
한 개라도 아들이 더 먹을 거 아니냐는 것입니다.
저는 그 마음에 감동받았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우리가 나누려는 마음,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마음
그 마음뿐 아니라 실천하는 것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도 하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그런 것 때문에 핑계 대고 안하는 것은
마치 아이를 깨끗이 씻겨 놓고 더러운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이까지 같이 버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 33절에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마 18:33) 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긍휼의 마음으로 사역하셨습니다.
본문에 보면 두 명의 시각장애인이 나옵니다.
그들은 길 가에 앉아 있었는데 구걸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소리를 질렀습니다.
“…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마 20:30)
하지만 사람들은 시끄럽게 외쳐대는 그들을 향해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주저하거나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욱 큰 소리로 똑같이 외쳤습니다.
“…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마 20:31)
사람들은 그들이 갖고 있던 고통과 아픔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저 길을 막는 방해꾼으로 여겼기에,
자신들이 집중하여 보고 있는 예수님을 볼 수 없게 만드는 사람을 조용하게 만들려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던 걸음을 멈추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부르신 후 말씀하셨습니다.
“…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마 20:32)
예수님이 그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셨을까요?
예수님은 그들의 속사정을 아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마 20:33)
이미 예수님의 마음에는 그들을 향한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그래도 그들의 입으로 말하게 하셨습니다.
지금도, 다 아시지만 우리의 입으로 고백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아십니다. 그래도 입을 열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형편과 사정을 아뢰시기 바랍니다.
소리 내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입으로 고백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긍휼의 마음은 언제나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기적을 이뤄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긍휼의 마음을 갖고 살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강림절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 눈물에 … 관심과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먼저, 여러분의 가족의 아픔, 친척의 아픔과 고통을 여러분의 마음에 품어야 합니다.
함께 신앙 생활하는 성도들, 이웃을, 그리고 세계 곳곳의 사람들을 …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예수님의 오심은 하나님의 긍휼의 표현이십니다.
우리가 자주 부르는 찬양 중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찬양을 들으며 가사를 가슴에 담으십시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아버지 당신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이 있기를 원해요
아버지 당신의 눈물이 고인 곳에
나의 눈물이 고이길 원해요
아버지 당신이 바라보는 영혼에게
나의 두 눈이 향하길 원해요
아버지 당신이 울고 있는 어두운 땅에
나의 두 발이 향하길 원해요
나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내 모든 뜻 아버지의 뜻이 될 수 있기를
나의 온 몸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내 모든 삶 당신의 삶 되기를
기도자의 좋은 자세
마 20:29-34 / 오창우 목사
1.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20-23)
예수님의 제자가운데 야고보와 요한이 있는데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와서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에 입성해서 왕이 되시면 제 두 아들을 하나는 좌의정, 또 하나나는 우의정을 주세요’라고 말씀을 드렸더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네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구하는데 무엇을 구하는지 모르는 것이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함께 성경을 읽으시겠습니다.
“(20)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21)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22)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23)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2.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24-28)
제자들이 누구는 좌의정, 우의정 되게 해 달라는 소리를 듣고 화가 났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불러다가 타이르는 내용이 나옵니다.
“(24)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25)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26)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27)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28)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제자들이 화가 난 것은 권세를 부려야 하는데 권세를 부리지 못할 것 같으니까 예수님께서 안타까워하시면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19장을 보게 되면 부자 청년이 영생을 얻는 방법에 대해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네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청년이 어떤 사람이 천국에 가는지 또 묻습니다. 이제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는 얘기를 하니 하는 말이 베드로가 우리들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다고 자기들을 드러냅니다. 잘했다. 네가 12보좌에 앉아서 심판한다고 말씀하시면서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포도원의 품꾼의 얘기를 하고 오늘은 세베대의 두 아들이 이런 얘기를 하니 화내는 제자들에게 네가 으뜸이 되려거든 종이 되라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이것과 마가복음과 연결이 된 다음에 오늘 본문이 나오는 것입니다. 잘 보시기 바랍니다.
3. 예수께서, 만지시니...예수를 따르니라(29-34)
‘예수께서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고 하셨습니다.
보게 되어 예수님을 따랐는데 제자들은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29)그들이 여리고에서 떠나 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따르더라(30)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31)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32)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33)이르되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34)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오늘 본문의 내용만 가지고는 응답받는 기도, 기도하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앞부분까지 연결해서 보게 되면 오늘 본문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바로 제자들과 맹인들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을 위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공로의식에 사로잡혀서 내가! 내가! 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일등인지, 네가 일등인지 화도 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먼저 된자가 나중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면 종이 되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을 우리가 먼저 믿고 직분이 있는 성도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 본문을 연결을 하다 보면 이것은 방법이라고 보다는 신앙인의 자세, 태도에 대한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기도자의 좋은 자세’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기도자의 좋은 자세는?
34절“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앞전에도 화내는 제자들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서로 일등이 되려고 하지만 결국 하나님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불쌍히 여기사 고쳐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좋은 기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사람의 자세 세 가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간절히 변화를 원하라
30절“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맹인 두 사람이 .. 소리 질러,..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도서”
맹인들이 간절히 변화를 원하고 있습니다. 단지 눈을 뜨고자하는 간절한 소망과 기대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입니다. 죄인 구원받아서 의인이 됩니다. 의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련받아서 거룩해지는 성화가 됩니다. 예수님을 1년 믿고 2년 믿으면 거룩해 져야 합니다. 거룩함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처럼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모습이 보여야 합니다. 이것이 성화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 우리가 완전히 영화롭게 되는 영화가 되는 것입니다. 의인이 성화다 되고 성화가 영화가 되는 이런 변화의 과정을 향해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변화되는 것이야말로 우리들의 신앙생활의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변화되려고 하지 않으려는 사람이기때문에 먼저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된다는 말을 들으면 어떻겠습니까. 부끄럽고 비참한 일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변화되어야 합니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님이 탈세를 해서 경영권을 내려 놓았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입성했습니다.
그러면서 첫마디가 “토요타가 무너지는 것을 보고 내가 나오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어서 하는 말이 “삼성이 일등가는 제품들을 10년후에는 보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삼성핸드폰이 세계 점유율이 24%정도 합니다. 그런데 지금 애플의 아이폰이 2.2%입니다. 비교한 결과가 나왔는데 24%의 수익금과 2.2%의 수익금의 차이가 1조원차이가 난다고 합니다. 2.2%가지고 있는 아이폰이 24%를 가지고 있는 삼성을 앞서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격차는 더 벌어집니다. 핸드폰이 스마트 폰으로 가고 있는데 LG나 삼성은 많이 늦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노트북, 컴퓨터도 상용화된 것이 6년이 안되어 가는데 이제는 아이폰으로 다 가고 있습니다.
아이폰안에서는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크기는 점점 작아지고 휴대하기 편해지고 이 시대에 맞게 변화하지 않으면 망하게 돼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의 실적에 안주해서는 변화하지 않으면 우리는 나중되고 도태될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신앙인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고난이 오면 기도해서 변화의 과정으로 삼는 것입니다.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고난이 와서 고난이 아니라 변화의 과정으로 받아들일줄 알아야 합니다.
반대로 어리석은 신앙인은 고난과 시련이 오면 원망과 불평을 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화를 내고 불평하고 자기 공을 자랑했습니다. 고난은 죄때문이라고 하면서도 마귀의 장난이라고 취급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으니까 변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간절히 변화를 원하고 있습니까? 기도는 간절히 변화를 원하는 것입니다.
한 눈먼 소년을 보고 “이 소년은 누구의 죄때문입니까?”라고 묻자 예수님께서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눈이 멀게 됐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소년의 아픔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쓰임을 받았습니다. 할렐루야! 우리의 고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임받기를 바랍니다. 아멘! 기도를 해야 합니다. 변화를 주시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변화를 간절히 원할 뿐입니다. 그래서 변화를 원해서 좋은 기도자가 되고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유머와 가지를 가진 영국의 유명한 작가 버나드 쇼우가 어느날 어떤 사람에게 “선생님! 어떤 사람이 낙천주의자이고, 어떤 사람이 염세주의자입니까?”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버나드 쇼우는 이에 말하기를 “자, 여기에 내가 한 컵의 물을 반만 먹고 놓아두었다고 합시다. 이때 그 반 정도 남은 물 컵을 바라보고 ‘아직도 반이나 남았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낙천주의자이고 ‘반밖에 안 남았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염세주의자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낙천주의자와 염세주의자는 같은 물 컵을 바라보지만 생각하고 표현하고 대처하는 방법이 전혀 다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 경우를 보고 ‘이것은 기회다. 이것은 변화의 기회다. 더 큰 은혜 주실 줄로 믿습니다.’라고 생각을 하는 사람은 신앙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사람입니다. 그러나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이것이 마귀때문인지, 죄때문인지, 내가 무슨 잘못을 했냐, 하나님이 계신지 안계신지를 논한다면 우리는 망하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니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보는 사람입니다.
엘리사가 아람군대가 쳐 들어와서 사마리아 성을 둘러 싸고 있을 때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 게하시를 위해 기도하기를 “하나님, 게하시의 영안을 뜨게 해 주세요.”
이것은 아람군대가 도단성을 포위하고 죽이겠다고 하는 것만 보지 말고 주변의 환경만 보지 말고 영안을 열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라는 것입니다. 영안이 열려져 불 말과 불 병거로 지키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보고 기뻐하고 하나님의 승리를 경험합니다. 영안이 열려지기를 기도하세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봐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고난 속에서 변화를 간절히 원하고 하나님 안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국가대표 축구선수 이영표가 유소년 축구 선수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보았습니다. 이영표씨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고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우리 축구 대표선수들의 문제는 안이함이라고 합니다. 국가 대표가 되면 다 된 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1시간을 한 뒤에도 열심히 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말하는 건 서울에서, 한국에서 아시아에서 세계에서 나보다 열심히 하는 사람이 없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열심히 하라는 말입니다. 천재는 노력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사람을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예를 들어서 모든 일을 즐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배고프면 어떻게 합니까? 밥을 먹습니다. 배고파서 걱정하십니까? 아프면 어떻게 하십니까? 병원에 갑니다. 고난이 왔습니다. 신앙인은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 있음을 알고 하나님의 계획을 바라보면서 즐기는 것입니다. 교회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즐기시기 바랍니다.
자세가 중요합니다.
고난이 오면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말만하면 죽은 신앙입니다. 행동하는 믿음이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간절히 변화를 원하면 하나님께서 변화시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둘째, 그래도 은혜를 간구하라
31절“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 질러’
맹인들이 기도하는데 제자들이 꾸짖었습니다. 그랬더니 맹인들이 더욱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래도 더욱 간절히 간구합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기도하려고 하면, 주의 일을 하려고 하면 더 방해하는 세력이 나타납니다. 이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각오해야 합니다. 뜻을 두고 기도하면 반드시 마귀가 먼저 찾아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간 금식기도를 마쳤을 때 제일 먼저 찾아온 것도 마귀입니다. 마귀는 한 번에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마귀는 3번이나 집요하게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아들이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며 시험했습니다.
방해세력이 있어도 기도해야 합니다.
다니엘은 기도의 사람입니다. 그의 일생에 얼마나 방해하는 세력이 많았습니까. 다윗은 얼마나 많은 방해를 받았습니까. 그때마다
다윗도 “여호와여 그리하여도 내가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라 하였나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하여도’라는 반응이 있습니다. 아무리 어려움과 고통이 앞을 막아도 원망 대신 주님을 힘 있게 부르겠다는 시인의 반응, 바로 우리가 배워야 할 고난을 직면한 성도들의 반응인 것입니다.
에스겔 선자자는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그랬습니다. “그래도.. 구하여 할지니라!”
욥이 고난을 받으니 아내가 떠나고 친구들도 오지 않습니다. 그래도 욥은 “어떤 일을 당해도 여전히 주는 내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것처럼 여러분에게 이러한 신앙의 고백이 계속해서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자지 못함과 말할 수 없는 시련 속에서 허덕일 때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김영모과자점의 김대표를 일으킨 한 권의 책이 있다고 합니다.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라, 최악의 경우를 받아드릴 마음의 준비를 하라, 최악의 경우를 개선하라”
‘카네기 행복론’이란 책이의 내용입니다.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라, 최악의 경우를 그대로 받아들여라, 그리고 최악의 경우를 개선하라!”
이 글귀가 그의 인생을 180도 바꿨습니다. “어려서부터 내가 처한 상황을 원망하며 좌절만 했어요. 하지만 군대에서 이 책을 접하면서 현실을 받아들이는 긍정적인 자세를 갖게 됐죠” 고등학교 중퇴가 전부인 김대표는 배워야겠다고 결시했고, 책벌레가 됐습니다. 지금은 대한제과협희 회장으로 직접 쓴 제빵 안내서가 미국에서 베스트셀러에 오르게 했습니다.
여러분 요즘은 기업에서 어떤 일을 할 때 전에는 우리가 회사를 위해서 무엇을 하면 되겠느냐고 질문을 했더니 하지 못할 일들이 얘기가 되더랍니다. 그래서 거꾸로 우리 상황에서 최악의 경우가 무엇이냐고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최악의 경우는 누구다 다 있습니다. 이 최악의 경우속에서 우리는 최선을 찾아내야 합니다.
기도하려고하면 방해 세력이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만 바라고 기도하는 방법은 최악이 아니라 최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시대가 이렇다, 사람들이 이렇다 안되는 얘기들만 합니다. 사람을 바라보면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이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최선을 생각해야 합니다.
가버나움에 중풍병 걸린 친구를 네 사람의 친구가 데려왔는데 사람들이 많아서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속에서 지붕을 뚫고 들어가서 예수님의 치유를 받습니다. 할렐루야!
그 어떤 방해 세력에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또 그 일을 위해서 동역자를 세우는 일입니다. 혼자서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두 세사람이 모여서 함께 기도를 하면 더 큰 힘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두 세 사람이 함께 있는 곳에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그래도 기도하기 위해서 기도의 동역자를 세우시기를 바랍니다. 가족끼리 하시는 것도 좋습니다. 또는 같은 동성의 또래를 기도의 동역자로 세우시는 것도 좋습니다. 혹 목사님들을 기도의 동역자로 세우시기를 원하시면 단순기도를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써서 주시면 됩니다.
그래도 방해세력이 있어도 하나님만 바라보고 기도의 동역자가 함께 할때 하나님이 크신 응답으로 함께 하실 줄로 믿습니다.
셋째, 분명하게 소원을 말하라
32-33절“...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여러분 큰 문제가 생기면 기도가 단순해집니다.
배를 타고 가다가 물속으로 빠졌습니다. 여러분은 무슨 기도를 하시겠습니까? ‘살려주세요’ 돈이 없으면 돈달라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죽을 경우가 되면 살려달라고 하고 배고프면 먹을 것을 달라고 기도를 하면 됩니다. 우리들 중에 기도제목을 물어보면 ‘글쎄요. 건강해도 좋고 돈 좀 벌면 좋겠고..’라고 대답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대답은 분명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하시는 겁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입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기도문을 항상 가지고 다니던 한 부인이 식료품 가게에 와서 성탄절 만찬에 아이들을 먹을 수 있을 만큼만 식료품을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이 부인은 아주 가난한 과부였습니다.
가게 주인이 “돈이 얼마나 있느냐”고 물으니 “남편이 전쟁에 나가 죽어서 기도밖에는 정말 아무 것도 해 드릴 것이 없습니다”면서 배고픈 어린 아이들을 봐서라도 조금만 도와 달라고 했습니다.
불만스런 가게 주인은 이렇게 제안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기도를 종이에 써 주세요. 그러면 그 무게만큼 식료품을 주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무리 많은 기도를 쓴다고 할지라도 종이 몇 장이 얼마나 무게가 나가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이 부인은 접혀진 노트를 주머니에서 꺼내면서 그 주인에게 건내 줍니다.
“우리 어린애가 지난밤에 아파서 옆에서 병간호를 하면서 기도를 적어 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전해주었습니다.
이 주인은 그 기도를 읽어보지도 않은 채 저울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자 이 기도가 얼마치의 식료품 무게가 되는지 달아봅시다” 그러면서 저울의 눈금을 바라보고 있는데 놀랍게도 빵 한 덩어리를 놓았는데도 저울은 꿈쩍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식료품을 올려놓았는데도 저울은 이상하게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주인은 더욱 당황해 하면서 다른 물건들을 더 올려 놓았습니다. 이제는 저울에 더 이상 물건을 올려 놓을 수 없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 때 주인은 “어서 이 물건을 봉지에 담아 가시오. 나는 바쁘니까...” 그러면서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이 부인은 몇 번이고 감사하다면서 눈물을 흘리며 돌아갔습니다.
나중에 가게 주인이 알아보니 저울이 고장이 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몇 년 동안 주인은 가끔 의아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때 일이 정말 우연의 일치였을까? 어떻게 그 부인이 미리 기도를 써 가지고 왔을까? 왜 그 부인이 저울이 고장났을 때 찾아 왔을까?’
그 때에 그 부인이 적은 기도문은 많은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단지 “주여!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라는 기도였습니다.
요즘 승리하는 비법가운데 하나가 선택집중입니다.
모든 것을 다 잘하는 사람은 못삽니다. 한 가지를 잘해야 잘 사는 것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선택집중! 소원을 분명히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빵가게 주인이 기도는 역시 무섭다는 것을 알았답니다.
제가 중국 연길에 갈 때 성경책과 설교집을 많이 가지고 갑니다. 중국에 성경책을 가지고 가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래서 항상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이 책 지켜주세요.’ 연길에 교회를 짓고 많은 지교회들을 짓는데 돈을 현찰로 가져갑니다. 그 돈을 위해서도 기도를 합니다.
한번은 두만강 복지관이라고 두만강 근처에 복지관을 지었는데 서소문교회에서 음향시설을 해 준적이 있습니다. 그 때 한번 빼앗겼습니다. 다른 분이 가서 뒤늦게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그 후에 저희들이 가져가는 성경책이든지, 선교비를 가져가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가리우셔서 주의 일을 지금까지 잘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간절한 소원을 분명히 적어서 기도할 때 응답이 있습니다.
비제이 마하잔이라는 사람이 ‘아프리카 파워’라는 책에서 그가 소개한 아프리카의 속담입니다.
“나무를 심어야 할 가장 좋은 시기는 20년 전이었다. 그 다음으로 좋은 시기는 바로 지금이다”
기도도 지금은 가장 좋은 시기입니다.
간절히 변화를 기대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도 방해세력이 있으면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소원을 분명히 할때 하나님께 놀라운 축복으로 함께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죄짐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 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께 맡기세
주께 고함 없는 고로 복음 얻지 못하네 사람들이 어찌하여 아뢸줄을 모를까
C. 하나님나라 제사장이 되기 위한 기도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주님, 변화받기를 위하여 어떤 방해에도 낙심하지 않고 은혜를 간구하고 분명하게 소원을 말하여 보고 주님을 따르게 하소서!”
메시야를 알아본 소경들
마 20:29-34 / 이정선목사
예수님 일행이 여리고를 떠난다는 것은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의 마지막 구간을 시작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공생애를 약 3년으로 추정하는데, 그 3년의 공생애가 이제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서 결론이 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사렛이라는 작은 동네에서 목수로 사시다가 때가 되니 드디어 군중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면서 그가 메시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태어나셨을 때 사탄은 헤롯 왕을 동원해서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집요하게 따라붙는 사탄을 따돌리고 예수를 애굽으로 피신시켰다가 나사렛이라는 시골 구석에 깊이 감추셨습니다. 30년 동안 메시야를 찾아 헤매던 사탄은 예수께서 군중 앞에 자신을 드러내시자마자 즉시 광야로 데려가서 시험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예수님의 적수가 될 수 없었습니다.
사탄의 시험을 이기신 예수께서는 본격적으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장 큰 관심사 하나는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면, 하나는 일반 대중에게 천국 복음을 전파하신 것이고, 또 하나는 제자들을 가르치신 것이었습니다. 3년 동안 예수께서 바리새인들과 싸우면서 주장하신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많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것은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완성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사람들에게 그가 메시야이심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는 일이었습니다. 갑자기 나타난 소경을 고쳐주신 이 사건은 그 목적을 훌륭하게 수행합니다. 우리는 눈을 뜨게 된 소경에 초점을 맞추기 쉽지만, 그보다도 소경을 고치신 예수님께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소경이 고침 받아 눈을 뜨게 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 사람 개인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그 사람 개인에게 일어난 사건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어떻게 사용되었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어떤 의미가 있으며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은혜를 주셨다면, 그것은 그것 가지고 여러분이 행복해지는 것으로 끝나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 세상에 드러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고난을 주셨다면, 그것으로 여러분이 괴로움 당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고난보다 훨씬 크고 중요한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야 합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서 소경을 고쳐주신 것이 그분의 능력과 메시야 되심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 사건이 되었던 것처럼, 여러분의 생애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세상에 하나님을 증거하는 일에 사용되도록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참으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인생인 것입니다.
여기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 일행이 여리고를 떠날 때 소경 둘을 만났다고 했는데, 누가복음에서는 여리고에 가까이 오실 때에 한 소경을 만났다고 했군요(눅 18:35). 그러나 마가복음에서도 예수께서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라는 소경을 만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막 10:46). 그렇다면 이 사건은 여리고에 들어오실 때가 아니라 나가실 때 일어난 것 같은데, 왜 누가는 들어오실 때 일어났다고 기록했을까요? 마태와 마가는 예수께서 여리고에 들러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기록하지 않았지만, 누가는 여리고에서 일어난 중요한 다른 사건을 같이 기록합니다. 바로 삭개오 이야기입니다. 바디매오 사건은 여리고 성 밖에서 일어났고, 삭개오 사건은 성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누가는 이 두 사건을 기록하면서 바디매오 사건을 앞에 배치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들어가실 때 일어난 사건처럼 기록된 것 같습니다.
소경이 두 사람이었는지 한 사람이었는지의 차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태의 기록에 두 사람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 두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가와 누가가 한 사람이라고 기록한 것은 그 두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의 행동이 주목할 만한 것이어서 그렇게 기록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 일행이 여리고를 떠날 때에 큰 무리가 따랐습니다. 아마도 여리고 성의 주민 대부분이 따라 나왔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많은 사람이 모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그 행하시는 이적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마침 유월절 명절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차피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했는데,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신다고 하니 잘 되었지요.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예수님은 큰 무리와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또 그것은 예수께서 메시야로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무르익고 있었던 분위기를 잘 반영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때 길 가에 앉아 있던 소경 두 사람이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소경들이 길목에 앉아 있었던 것은 구걸하기 위해서입니다. 마가는 그를 소경 거지라고 소개했고, 누가는 소경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명절을 맞아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이 시기는 구걸하기에 최적의 조건이었을 것입니다.
갑자기 큰 군중이 지나간다는 것을 알고 거지들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께서 지나가신다고 일러주었습니다. 그러자 이 소경들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꾸짖자, 소경들은 더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다가 잘못하면 사람들에게 두들겨 맞을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소경이라고 하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으로 통했습니다. 눈이 안 보인다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는 큰 죄를 지은 죄인이 하나님께 벌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런 소경들을 마음 놓고 경멸할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언어 사용 습관을 보면, 죄인이라는 단어가 많이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가 아니라, 사회에서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공식적인 명칭이었습니다. 세리나 창녀 같은 사회에서 손가락질 당하는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죄인으로 불렸고, 소경이나 절름발이와 같은 육체적인 장애를 가진 사람들 역시 죄인으로 분류되었습니다. 이것은 고칠 수 없는 질병이나 장애는 죄의 결과라는 유대인들의 세계관이 반영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회에서 그런 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이었겠습니까? 극도로 종교적 집단인 유대인 사회에서 죄인이라는 것은 아무런 가치나 존엄성을 소유하지 못한 버림받은 삶이었습니다. 아무도 그들을 사랑하지 않았고, 아무도 그들을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이 바리새인들의 눈에는 이해도 되지 않을 뿐 아니라 못마땅했던 것입니다.
이 두 소경은 그렇게 비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비웃음과 경멸을 견디면서 구걸이라도 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것입니다. 이 소경들은 예수께서 다른 소경들의 눈을 뜨게 하셨다는 소문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들의 눈도 볼 수 있게 해 주실 수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자기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행여 예수께서 멀리 지나가버려서 들리지 않을까 목청껏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던 사람들은 갑자기 일어난 소동을 썩 유쾌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메시야를 모시고 예루살렘을 향해 진격하는 이 의미심장한 순간에 웬 거지 소경들이 소란을 일으킨단 말입니까? 이런 가치 없는 인간들에 의해 메시야의 행진이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소경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습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다른 일 같았으면, 사람들의 꾸짖음에 아무 말도 못하고 입을 다물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의 인생이 달린 순간입니다. 예수님을 그대로 보내버리면 그들은 죽을 때까지 다른 사람들의 멸시를 받으며 비참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들의 소리를 들으시고 만나 주신다면 분명히 그들의 눈을 뜨게 하실 것이고, 그렇게만 되면 인생이 바뀌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꾸짖는 소리가 귀에 들어오기나 하겠습니까?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는데 조용히 하라고 해서 쉽게 포기하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기회를 너무 쉽게 포기하는 것 같아요. 한두 번 기도하다가 잘 안 되는 것 같아서 포기하고, 별로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아서 포기하기도 합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매달리지 않는 이유는 절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어도 잘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잠비크에서 선교사역을 하면서 수많은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체험한 하이디 베이커 박사는 이렇게 묻습니다. “부요한 자들, 그리고 부요한 문화 가운데 기적과 초자연적인 역사를 경험하는 일이 왜 이렇게 드물까요? 예수님께서는 왜 천국을 심령이 가난한 자들의 것이라고 하셨을까요?” 베이커 박사가 발견한 답은 가난한 자들이 가진 절대적인 의존성, 배고픔, 필요, 절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간절하게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 소경들이 그랬습니다.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꾸짖고 때리고 위협한다 해도 소리 지르는 것을 멈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좀 더 진지하고 절실했으면 좋겠습니다. 힘들다고 하는 사람은 많은데, 하나님께 매달리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새벽기도에도 나와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힘들고 고통스러운 문제들을 하나님께 내놓고 부르짖어 보십시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그것 아닙니까? 이 소경들이 눈도 안 보이고 사람들의 멸시를 당하며 사는 것이 너무 힘들고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그들을 구원하시고 인생을 바꾸실 분이 지나가신다는데도 그냥 입 다물고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조용히 하라고 꾸짖는 소리에 잠잠할 수 있습니까? 이들은 죽기 살기로 소리 지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부르짖는 것은 그러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습니다. 그 부르짖는 소리가 예수님의 귀에 들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발걸음을 멈추시고 그 소경들을 부르셨습니다. 왜 그렇게 소리를 지르느냐고 물어보십니다.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는 이유도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들으시고 우리를 만나 주시기를 원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도 아시고 우리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 아시는데, 굳이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서 부르짖어야 하느냐고 반문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고, 부르짖는 사람에게 주님이 대답해 주실 것입니다. 힘들다고 불평만 하고 앉아 있다는 것은 사실은 별로 힘들지 않다는 얘기지요.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은, 이 소경들이 예수님을 부르는 칭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릅니다. 즉 이 소경들은 예수께서 메시야로 오신 분이라는 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예루살렘 입성을 눈앞에 두고 있는 시점에서, 이 소경들이 예수님을 메시야의 칭호로 부르고 있다는 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소경들의 입을 통해서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을 선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경들이 말한 대로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사실은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뜨게 하시는 이적으로 증명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소경들과 예수님이 환상의 콤비를 이루어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경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라 부르고, 예수님은 소경들의 눈을 뜨게 하시고, 손발이 착착 맞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과연 예수께서 메시야라는 것을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소경이고 거지였던 이 사람들이 눈을 뜨게 되어 예수님의 일행에 합류했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행진하는 군중의 사기가 한껏 고조되지 않았겠어요? 진실로 메시야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시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다는 믿음과 기대가 부풀어 오르지 않았겠습니까?
물론 흥분과 기대 속에서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나중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지르게 됩니다. 이스라엘을 회복할 메시야라고 생각했는데 붙잡혀서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메시야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배반하고 등을 돌린다 해도, 이 소경들은 끝까지 예수님의 곁을 지켰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들의 인생을 바꾸신 구세주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시는 것을 보고 믿은 사람과, 자기가 눈을 뜨게 되어 믿은 사람이 같을 수 있겠어요?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고 동네에 들어가서 메시야를 만났다고 사람들에게 소리쳤습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다 나와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 사람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요 4:42). 우리가 처음에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예수를 믿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 상태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내가 직접 하나님을 만나야 하고, 그분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야 하고, 그분의 역사하심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믿음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세상을 구원하신 구세주로만 믿는다면 별 느낌이 없습니다. 나는 그저 60억 인구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그분은 다른 사람들의 구원자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신 나의 개인적인 구세주이신 것을 믿게 될 때, 그것이 구원을 받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며 부르짖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그래서 늘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마 20:29-34 / 김경수 목사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싫어하는 사람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부정적인 사람을 싫어하십니다. 부정적인 것은 믿음이 없다는 것이죠. 믿음이 없는 사람을 싫어합니다. 10명의 정탐군들이 부정적인 보고를 할 때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더불어 부화뇌동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광야로 회군시킵니다. 염려하는 사람들을 싫어하십니다. 이 또한 믿음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패배적인 사고, 불가능의 사고, 비방하는 사람, 험담하는 사람, 방탕한 사람, 악한 말을 하는 사람, 무례한 사람, 교만한 사람, 죄를 짓는 사람, 오만한 사람 등등.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고 물리치십니다.
반면에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가능성의 사고를 하는 사람, 기적을 기대하는 사람, 긍정적인 사람,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 비전의 사람, 목적지향적인 사람, 미래지향적인 사람,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 예배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신실한 사람, 충성스런 사람, 예의로운 사람 등등.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소경은 구조적으로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눈을 뜨지 못하는 것만큼 불편하고 어려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이들에게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눈이 열리고 세상을 보게 된 것입니다. 불가능이 가능케 되고 불행이 행복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감사가 한숨을 대신하는 놀라운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이런 축복이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어떻게 이와 같은 기적이 나타나게 되었을까요?
먼저는, 이 두 소경의 반전은 주님을 부르면서 시작이 됩니다.
누구 한 사람 관심도 기울여 주지 않고 손가락질을 당하면서 천대와 멸시만 받으며 살아 왔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정적인 순간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말입니다. 분명히 그들은 주님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어 왔을 것이며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주님께서 지금 자신들 앞을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언제나 기적은 주님을 만나면서 시작이 됩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기적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분만이 우리들을 풍요롭게 해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삶을 변화시켜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그냥 지나치지 않도록 하십시오. 좋은 것을 주시고 풍성하게 채워주시기를 원하시는 주님을 그대로 지나치게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저지를 수 있는 최대의 실수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주님께서 지나쳐 가지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교제를 원하시지만 거절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신 목적을 요10장에 자세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10:10)-“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이 세상에서 나를 풍성하게 해 줄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은 나를 이용하고 마지막에는 아무 쓸모짝에 없다고 버리는 곳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나를 버리지도 않으시고 외면하지도 않습니다. 언제나 당신을 부르면 기꺼이 오셔서 긍휼히 여기시고 치유하시고 풍성케 하여 주십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이렇게 좋으신 주님을 사람들은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탕자를 보십시오. 아버지의 간섭을 싫어합니다. 그리고는 당돌하게도 자신에게 돌아올 분깃을 요구합니다. 아버지는 탕자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지만 아들은 그것을 정리하여 아버지의 간섭이 닿지 않는 먼 타국으로 가버리죠. 이것이 사람들의 생리입니다. 사람들은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고자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고 미련한 짓인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를 떠나는 순간 불행을 자초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없는 곳은 어둠이고, 불행이며, 염려와 두려움 밖에는 없습니다. 물론 잠시의 쾌락과 기쁨을 누릴 수는 있겠죠. 그러나 말 그대로 잠시일 뿐입니다. 그 쾌락이 끝이 나고 잠시잠간의 기쁨이 바닥을 드러내면 말할 수 없는 회한과 공허가 밀물 듯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주님께 가까이 오십시오. 주님을 멀리 떠나려고 하지 마십시오. 주님을 떠나 절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등지는 순간 어둠을 만나게 되고 도적을 만나게 됩니다. 오직 주님 안에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탕자는 짐승의 먹이조차 먹지 못하는 절망의 나락 끝자락에서 아버지의 품을 그리워합니다. 생각만 해도 너무나 좋습니다.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의 배려, 아버지의 인애로우심, 나의 모든 허물과 잘못까지도 용납하시고 받아주시는 분,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는 알지 못했던 행복들입니다.
주님을 절대로 포기하거나 거부하지 마십시오. 주님을 거부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입니까? 그러나 그보다 주님을 거부함으로 오는 후폭풍은 더할 나위 없이 절망적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소경은 자신들에게 온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않습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언제 다시 이 기회가 올런지 모릅니다. 인생에는 늘 기회가 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믿을 수 있을 때 마음을 열고 그분을 영접하십시오. 주님을 영접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주님, 내 마음속에 오십시오. 이제부터는 주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십니다.”
이렇게 고백하면 그분께서는 기쁨으로 내 마음속에 오셔서 기쁨을 주시고 평안을 주시고 문제를 해결하시고 육신의 질병을 고치시고 감사가 넘치는 축복의 삶을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두 번째로, 이 두 소경은 주변의 장애가 있어도 굴하지 않고 더욱 주님을 부르며 가까이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소경은 주변의 무리들이 잠잠하라고 꾸짖고 나무랗지만 그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소리를 질러 간청을 합니다.
(31)-“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많은 장애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 중에서도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트러블이 많을 것입니다. 사람 때문에 넘어지지 마십시오. 사람은 그럴 수 있습니다. 다른 지체들이 나에게 상처를 준다고만 하지 마십시오. 나도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자신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다른 이의 티끌만 본다고 책망하신 적이 있습니다. 자신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용하면서도 다른 지체들에게는 냉철한 잣대를 들이대고 상처를 받고 상처를 주면서 살아가는 것이 사람들의 삶의 방법처럼 보여집니다. 그러나 절대로 사람 때문에 신앙에 빨간불이 들어오지 않도록 하십시오. 혹시나 주님께서 상처를 주고 아픔을 주었다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아니 주님께서 상처를 주어도 결단코 시험에 들지 마십시오.
수로보니게 여인을 기억하십니까? 주님께서 이방 여인이라고 개취급을 하였습니다.
(마15:27)-“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시험에 드는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참으로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내 앞에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는데 어찌 시험에 들어 지옥을 향해 달려갈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래서는 안 됩니다. 날마다 천성을 향하여 믿음의 경주를 하여야 합니다. 달음박질 하는데 어찌 장애물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참고 인내하십시오.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물 위를 걷던 베드로는 갑자기 태산 같은 파도가 덤벼들자 두려움과 무서움으로 인해 물속으로 빠져 들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만약에 그가 계속하여 주님을 바라보면서 오히려 그 큰 파도를 서핑 하듯이 즐겼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는 주님을 놓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환경 때문에 넘어질 일이 생기고 사람 때문에 시험들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일지라도 결코 시험에 들거나 넘어지지 마십시오.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승리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로, 이 두 소경은 기적을 기대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간절히 부르면서 간청하는 그들을 향해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33)-“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이 두 소경은 한 끼의 식사나 돈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잠시의 도움을 요청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불행의 원인이었던 소경이 고침받기를 소원했던 것입니다.
(33하)-“주여 우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기적을 기대하는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나아온 것입니다. 사람들은 고칠 수 없지만 주님께서는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적은 자신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기적을 기대하는 희망.
아브라함도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적을 기대하는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주님으로 인해 나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주님으로 인해 형통할 것이다. 나는 주님으로 인해 복될 것이다. 주님의 기적은 일어날 것이다. 반드시 나의 인생에도 기회는 올 것이며 기적은 일어날 것이다.
이런 기적을 기대하는 믿음과 희망을 가지십시오.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도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주님의 기적은 지금도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말을 하면 허황된 것이라고 놀리는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래도 나는 이런 믿음의 고백과 희망이 좋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대부분 저녁에 되어 하루를 살펴 보면 좋은 일이 있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리고 더 많은 기적이 곧 일어날 것이라고 하는 예감을 갖게 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절망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끝모를 나락 끝에 자신들 모두는 죽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소유하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생각과 사고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주님께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실 뿐만 아니라 나를 도와주시고 보호하시며 축복하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갈릴리 가나 혼인 잔치가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도 초대를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낭패를 만났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마리아는 주님께 이 사실을 고하면서 기적을 기대하는 믿음을 보여 드립니다. 주님께서는 정중히 거절하셨지만 끝내 마리아의 기적을 바라는 믿음과 희망을 외면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 되는 기적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너무 좋습니다. 기적을 바라는 믿음과 희망이 좋습니다. 물론 그 시간에 절망을 선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절대로 절망을 선택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에게는 한 가지 습관이 생겼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절대로 절망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염려가 오고 걱정이 발생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저는 기적을 기대하는 믿음과 희망을 선택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기적을 기대하는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좋아하십니다.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하시고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연단시키고 훈련하신 과정을 보십시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식을 주실 수도 있었지만 그보다 아브라함의 왜곡되고 굴절된 사고와 생각을 변화시키시기 위해 자식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계속하여 여호와께는 능치 못함이 없다고 고백하도록 기다리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하는 줄 아십니까?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까지 십자가에 죽이시면서 사랑하셨습니다. 그 큰 사랑을 받은 저와 여러분들은 담대히 그분 앞에 나아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간구할 수 있습니다. 기적을 기대하며 나아오는 당신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좋아하십니다. 기적을 기대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지금도 저와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기적을 기대하는 믿음과 희망을 가지십시오.
사업이 불 같이 일어나는 기적을 꿈꾸십시오.
직장이 복될 것이라는 기적을 꿈꾸십시오.
질병이 나을 것이라는 기적을 꿈꾸십시오.
자녀들이 형통할 것이라는 기적을 기대하십시오.
절대로 절망을 선택하지 마십시오.
선택하는 대로 여러분들의 미래는 결정될 것입니다.
기적을 기대하십시오.
그 사람에게 주님께서는 기적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마 20:29-34 / 최종천목사
봄이라고 생각합니다. 봄이라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번 주에는 좀 추운 날씨가 있다고 예보는 되지만 그래도 우리는 봄이라고 인정을 합니다. 거듭되는 체험은 우리 마음에 어떤 원칙을 제시해줍니다. 3월이 되면 따뜻하고 봄이 되곤 했으니 비록 좀 추워도 3월은 봄이라고 일관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힘들어도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체험하고 깨달은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있음을 분명히 알고 그 시련을 기대와 소망으로 이겨냅니다.
저는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어떠한 시련 속에서도 겨울 지나면 봄이 오듯이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가 반드시 임함을 믿으시기를 소원 드립니다.
요즘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또 이루기 원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드려짐입니다.
이 교회도 18주년을 지나서 이제 3기 사역이 마쳐지는 21주년을 2년 9개월 정도를 남기고 있습니다. 주님이 이 분당중앙교회를 통해서 복음을 가르치고 전파하시며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결과가 무엇일까를 우리를 통해서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은 백성들이 이제는 주님이 이루신 길을 따라 그들의 삶에 아름답고 영화로움을 이루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이 세상의 질깃한 삶의 끈에 매여서 이제까지 삶의 수준에서 누리던 희로애락과 생로병사의 인간의 겪는 감정과 현실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기쁨에 거하시기를 원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우리의 기쁨이 되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인간들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우리의 감정을 넘어 이룸이 우리의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더욱 억지가 아니라 이제까지 살아온 삶을 넘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광과 진정한 축복입니다.
내가 기뻐서 기쁜 것보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니 더 감사하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백성들을 기쁘게 하니 더 감사하게 될 때 우리는 초신자를 넘어선 헌신자요,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해나가는 인류애 실천의 역사를 이루는 백성들이 될 것입니다.
지난 두 주간동안 우리는 내 삶이 주께 드려지기를 원합니다라는 주제를 가지고 두 주간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나를 부르셨을까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를 부르셔서 반드시 이루실 하나님의 뜻이 계시기에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나를 부르신 그 주님의 부르심을 깨닫고 그것을 이루어드리는 삶이 가장 행복한 삶입니다. 주님이 하신 일과 우리의 할 일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주님은 천국의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치셨고 병든 자와 약한 자를 고쳐주셨고 해결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천국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치는데 힘을 써야하며 병든 자와 약한 자를 치료하고 돌보는 일에 우리 힘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기쁨임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께 드려지는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세 번째 시간입니다.
내 삶이 주님 앞에 드려지길 원한다면 ‘내 모습 이대로 주님께서 받아주십시오’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나의 부족한 모습, 나의 연약한 모습, 하나님께서 더욱 더 온전하고 깨끗하게 하나님께서 정죄시켜 주시고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만드셔서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하는 것은 더욱 더 고귀한 소망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서 더욱 더 아름답게 하시고, 비밀을 볼 수 있게 하시고, 은혜를 체험하게 하시고 우리의 삶에 모든 마음을 열어 하나님의 뜻을 품을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귀한 은혜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이제 오늘 성경을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알게 된 두 사람의 맹인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병을 고치고 기적을 행하고 각종 능력을 행사하는 말씀을 듣고 그 복음의 아름다운 소식에 기대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나를 돌봐 주시면, 내 모든 병이 나을 수 있고 내 눈이 떠질 수 있다고 기대를 했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예수님이 그들의 앞을 지나가는 기척을 느낄 때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하고 예수님께 간절히 외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다가와 그들의 눈을 고쳐주시기를 원했지만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변사람들이 그들을 힐난합니다.
“왜 이렇게 떠들고 왜 이렇게 난동을 부리느냐?”
오히려 힐난이 돌아오고 꾸지람이 그들에게 돌아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들은 낙망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더 소리를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간구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소리를 들으시고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묻습니다.
“네. 저희가 눈을 뜨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을 만져 곧 보게 하시고 그들은 예수님을 쫓는 장면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게 되면 예수님을 따라가며 외치는 많은 사람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의 무리 중에서도 그들의 무리가 지나가는 것을 볼 때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의 눈에 띄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그들의 눈을 떠 주기를 원하는 이와 같은 두 사람의 맹인과 그들의 간절한 외침도 아무 소용없이 오히려 꾸지람만 돌아오는 이와 같은 안타까운 상황, 그리고 그 가운데 낙심하지 않고 다시 예수님께 소리쳐 간구하는 이들의 마음의 열심과 뜨거움, 그리고 예수님의 고쳐주심의 역사가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이제 이와 같은 내용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온전히 드려지기 위해서 우리 삶에 어떠한 일이 있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가 첫 번째 생각하는 것은 주님을 신뢰하고 그 능력을 확신하는 심정으로 주님께 진정한 은혜를 구하는 인생의 모습입니다.
‘맹인 두 사람이 길가에 앉았다가’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가혹한 우리 인생의 실현입니다.
인생은 때론 이해할 수 없는 많은 시련과 고통의 올무 속에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너무 안타깝고 가련한 인생이라는 마음의 애잔한 심정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삶이란 주어진 현재의 운명이 영원히 바뀌지 않고 고정된 것만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와 같은 어려운 상태와 그리고 주님의 만남이란 주님의 새로운 역사가 일어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어려움이 주님의 은혜를 선포할 귀중한 기회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황무지에 떨어짐을 낙심으로만 삼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의 기회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만약 그것이 끝이라도 우리는 수고하고 애쓰다 주님 앞에 인정받고 주님나라에 임한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어차피 내 인생 이렇게 될 줄 알았다가 아니라 같은 어려움으로 인생을 마치더라도 주님께 은혜를 간구하고 주의 은총을 소망하는 후회없는 인생을 살고 주님 앞에 가는 것이 우리 인생의 꿈입니다.
두 사람이 똑같이 몸이 불편했어요.
한 사람은 그저 이와 같이 몸이 불편하니까 나는 정말 인생이 비관스럽구나라고 생각하면서 결국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께 간절히 부르짖었어요. 그러나 주님은 그에게 아무 응답도 하지 않으셨고 이 사람은 그냥 그것으로 말미암아 아픈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 이 두 사람은 똑같이 세상을 떠났으니 같다고 말할 수 있겠죠. 그러나 두 사람의 차이는 분명히 있습니다.
한 사람은 아픈 상태에서 낙심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한 사람은 아픈 상태에서도 주님의 은혜를 간절히 소원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는 이와 같은 믿음의 아름다운 모습 속에 주님나라 갔으니 그는 그의 믿음을 실현하고 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의 믿음을 하나님께 보여드리고 하나님을 갈망하는 믿음 속에 주의 나라에 가게 되었으니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이렇게 생각합시다.
오늘 여기서 많은 분들이 다 같이 예배를 드리고 있어요. 오늘도 1부, 2부, 3부, 4부, 5부, 6부 많은 분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똑같이 예배를 드리고 있어요. 과연 똑같이 예배를 드리고 있을까요? 전 아닌 것 같아요.
오늘 여기 있는 분 중에는 정말 모든 것을 집중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분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분들은 마음속에 혹시 다른 생각 하실 수도 있겠죠.
‘오늘 끝나고 어디 급히 가야 되는데...’ 마음이 초조하신 분들도 있겠지요. 분명히 똑같은 모습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어도 그 내재가치-실제적인 모든 모양은 다를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이 세상에서 나서 고생하고 병들어서 세상 떠나는 것 같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는 소원의 백성들에게는 결국 그들이 같은 유사한 삶을 마쳐진다 할지라도 그들에게는 믿음으로 간구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아름다운 믿음의 역사가 이루어짐을 생각을 하게 합니다.
기도해서 안 들어주신 것이 아니라 기도라도 할 수 있는 믿음을 발휘할 수 있었다는 것이 우리에게 축복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함을 듣고 그들이 소리를 질렀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으로 인한 소망이 생겼고 희망의 외침이 그들에게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주님으로 인하여 복음의 소식을 듣는 순간부터 인생의 새로운 시작이 이루어집니다. 주님은 우리의 소망이고 희망이고 새로운 삶의 변화를 이룬 근원이 되심을 믿고 확신하는 순간 우리 인생에는 새로운 봄이 도래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복음의 소식은 우리 인생의 새로운 희망과 삶의 발걸음을 이루게 합니다. 봄이 되면 만물이 기지개를 켜는 것처럼 우리 인생에 새로운 장면을 향한 소망의 움돋음이 우리 삶에 새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비로소 우리 삶에 소망이 생기고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외침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주님은 우리 마음에 뜨거운 열망을 주셔서 삶의 힘을 주시고 소망 속에 은혜를 간구하는 새로운 시도를 이루게 하십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주님을 향한 간절한 간구와 자비의 은혜를 구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을 향한 눈물의 간구와 호소가 있을 때 우리 인생은 새로운 은혜의 장면에 진입하게 됩니다.
내 인생 언제 새로워지나?
내 인생 언제 꽃피워지나? 라고 징조를 느끼기 원한다면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열망이 있는가 없는가를 살펴보시면 돼요.
아침에 여러분 해 뜨는 거 보셨죠? 어둑해지는 새벽녘에 해 뜨는 것을 봐야겠다고 기다리면 우리의 생각보다는 훨씬 오래 기다려야 합니다. 해가 뜰 것 같은데 쉽게 뜨지 않는단 말이죠. 그런데 이제 불그레한 햇무리가 지기 시작하죠. 그러면 우리는 이제 해가 뜨나보다 하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그래도 또 오래 시간이 걸립니다. 하지만 불그레한 햇무리가 솟기 시작하면 해가 수평선이나 지평선 저 아래 있다고 할지라도 해는 곧 떠오를 거야 하고 그 징조를 봐서 우리는 해가 떠오르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해가 솟아오르기 시작하면 쏙 하고 빠져나오게 되죠.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생에도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징조가 있습니다. 그 징조가 무엇일까요?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믿음의 열망이 생기는 거예요. 하나님을 향하여 뜨거운 소망이 생기는 것이란 말입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두 명의 맹인이 우리 주님을 향하여 간절히 소리 질러 그들의 소원을 아뢸 수 있었던 것처럼 그들의 마음에 뜨거운 열정과 열망의 간구가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기도를 시작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소망이 꿈꾸어지십니까? 하나님의 은총의 서막이 열린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기쁨은 주님을 향해 소망을 가짐으로 내 인생의 슬픔이 막을 내릴 수 있습니다. 기쁨이 임하면 슬픔이 물러갑니다. 빛이 임하면 어둠이 사라집니다. 언제나 슬픔 끝나나 라고 생각하지 말고 먼저 기쁨을 기대합시다. 그러면 슬픔은 물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인생의 축복은 주를 향한 부르짖음에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여호와께 부르짖고 부르짖으면 여호와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반드시 반석위에 세우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 삶의 상황이 우리의 바람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낙심하지 않으며 더욱 간절히 주님의 자비와 은혜를 구합니다.
오늘 성경을 보니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간절히 예수님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외쳤더니 예수님은 대답도 하지 않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좀 조용히 하라고 핀잔을 줍니다.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하되...’
우리 인생이 이럴 때가 있어요.
정말 애써서 노력했는데, 어떻게 좀 살아보려고 버둥댔는데, 오히려 더 좋아지지 않고 더 마음상하는 가슴 아픈 일만 생길 때가 있는 것입니다. 맹인은 눈이 떠지기를 원했지만 오히려 꾸중만 돌아왔어요. 삶이라는 것은 너무 실망되고 힘쓰고 애씀이 꺾일 것 같은 참담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생에 맑기를 원했다고 모든 날씨가 맑아버리면 우리는 사막이 될 겁니다.
비오기를 원하는 인생에게 날마다 비만 온다면 홍수가 나겠지요.
어떤 일이 안될 때 그것도 주님의 뜻이요, 이것을 통해 이룰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다고 믿으면 우리 인생은 달라지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해결키위해서 간구합니다. 안된다면 어떤 하나님의 뜻이 있겠지 하고 생각하고 기대합시다. 이것은 억지믿음이 아닌 하나님의 길이고 축복입니다.
우리 인간의 바람대로 모든 것이 된다면 인생의 슬픔이 없을 뿐 아니라 그 슬픔을 극복하는 기쁨 또한 없을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된다면 슬픔만 없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극복하는 기쁨자체도 없어져요. 그러므로 때때로는 어떤 경우도 하나님의 역사와 은혜가 내게 존속한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삶에는 의외성도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의외로 가슴 아픈 일이 있으면 의외로 기쁜 일도 있을 수 있음을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내 소원이 거절당할 때 있으면 내 소원이 들어질 때도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뿌린 씨앗이 다 소출되는 것이 아니라 일부는 썩어지지만 일부가 자라서 백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을 맺음을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더욱 소리 질러 가로되’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음에 간절히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간구했지만 돌아온 것은 불쌍히 여김 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의 핀잔이었습니다. 너무 가슴 아팠죠. 그러나 그들은 거기서 꺾이지 않았습니다.
우리 한 번 따라서 합시다.
“꺾이지 않았습니다.”
결코 좌절되지 않았습니다.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가혹한 상황을 더욱 아프게 하는 시련의 연속에도 불구하고 주를 향한 기대와 소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우리 삶의 승리는 단 한 번의 시도로 이루어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어떤 사람이 승리하는가하면 실패를 실패로 여기지 않고 또 한 번 시도하라는 하나님의 의도로 알고 진행하는 사람이 결국은 승리하게 되어져 있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인생이란 실패에 좌절하지 않기 게임인 것 같습니다. 실패에 좌절하지 않는 사람이 누구인가, 고통 중에도 낙심하지 않는 사람이 누구인가? 이것이 인생의 승패를 좌우하는 것 같아요. 결코 시련이 우리를 무너뜨릴 수 없으며 가혹한 시련의 중첩은 우리를 더욱 더 강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믿음의 힘이란 고지를 향하여 가는 것만이 아니라 고지에 올라갔다가 밀어 떨어뜨려져도 다시 고지를 향하여 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마침내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실 겁니다. 결국 믿음의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이 세상에서 삶을 마친다고 해도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소망이 있다는 내세관의 형성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 세상에 버틸 힘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살아서 이루어지면 감사하고 그것을 이루다가 이 세상을 떠날지라도 영광이라는 생각이 우리의 삶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소리를 질렀습니다. 낙심할 상황에서 더욱 더 힘을 냈다는 말입니다. 시련은 우리를 강하게 하는 하나님의 축복이요, 양약입니다. 시련과 아픔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더 간구하며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으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간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이 지속된다면 내게 어려움을 통하여 이루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외면치 않는데 왜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십니까? 그 어려움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입니다. 단 한 번에 들어져야만 하나님의 응답이라면 인생에는 깊은 인내와 사색과 삶의 먼 곳을 바라볼 수 있는 시야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인생은 의외로 시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제가 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제가 하나님의 큰 은혜를 마음속에 깊이 느낀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아이들이 다 커서 옛날 얘기인데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적에 제가 여름휴가를 제주도에 아이들을 데리고 간 적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적에는 잘 다투는 것 같아요. 왜 그렇게 애들이 싸우는지 모르겠어요. 지금 그 얘기 하면 아이들이 다 커서 그런지 저희들끼리도 웃고는 합니다.
아주 치사한 것 가지고 싸웁니다. 종이쪼가리 조그만 것 가지고 싸우고 어디 앉느냐하는 이런 자리다툼 하고 그래요. 생각해 보니까 애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어른도 그런 것 같아요. 종이쪼가리 가지고 싸우잖아요. 그리고 또 어느 위치에 있느냐 하는 이런 것 가지고 다툼하고 그렇잖아요. 그런데 너무 다투고 싸워서 제가 “너희들 왜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하느냐?” 라고 얘기를 했더니 잘하겠다고 하더니 또 싸워요.
제가 걔네들을 보면서 참 은혜를 받았던 거예요. 돌아오는 날 제주도 공항에 데려오는데 제가 양옆에 둘 손을 잡고 뒤에서 제 집사람이 한명을 데리고 오는데 저보고 그러더라고요. “복도 많으셔. 공주님이 두 명이네.” 그러더라고요.
제가 “저 뒤에 하나 또 있습니다.” 그랬거든요. 그런데 제가 올 때 걔네 세 명을 한 명도 안 버리고 다 데리고 왔어요. 왜냐하면 너무 버리기에는 좀 아깝더라고요. 그때 제가 느낀 거예요.
내가 이런 애들을 하나도 안 버리고 정말 이렇게 지겹게 싸우는 애들 하나도 안 버리고 데리고 왔다라고 생각하니까 그 때 큰 은혜를 받은 것이 있습니다.
나도 웬만하면 하나님이 안 버리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니까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여러분 하나님이 잘 안 버리십니다.
“아멘.” (아멘 안하는 사람은 버릴지도 몰라요. 하하하.)
하나님이 잘 안 버리세요. 제가 이 생각을 하니까 너무너무 감사하더라고요. 정말 하나님이 적어도 나를 버리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이 나에 대해서 결국 그 마음을 거두시지는 않는다. 그걸 어떻게 버리시겠습니까? 버릴 수가 없지요.
제가 요즘 무슨 생각이 드느냐하면 인생의 기쁨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마음의 편안함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시간이 가면서 조금은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아요.
제가 목사로서 늘 이렇게 설교를 하는데 사실 목사로서 이 설교를 하면서 늘 목사의 심정에는 설교를 드리고도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제일 민망한 때가 설교 끝나고 저기 밖에 나가서 인사할 때예요. 제가 그때마다 성도들을 볼 때 민망한 적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다음에는 다시 안 올 것 같아요. 제가 생각하기에 교회에서는 기적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성도들이 매주 오는 게 기적인 것 같아요.
오늘도 아까 2부 예배 끝나고 어떤 분이 나가다가 그러시더라고요.
“애쓰셨어요.”그러더라고요.
잘 못하는 설교지만 애는 썼네. 그 뜻인 줄 알고 제가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목사가 설교하고 나서 속 시원하게 설교했다고 생각하는 적은 일 년에 두 번 정도 있는 것 같아요. 전반기 한 번, 후반기 한 번. 그리고 한 오십 번 정도는 정말 마음속에 부대낌이 있고 낙심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점점 편해지더라고요. 무슨 생각이 드느냐하면 참 뻔뻔스러운 생각인데 이런 마음이 들더라고요.
‘다음에 더 잘하면 되지.’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까 어떤 분이 “아멘”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지금 잘 못하고 있단 뜻이에요. 하하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는 가운데 가장 큰 것 중의 하나가 참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시는 것 같아요. 평가에 대해서 편안하고 또 이러저러한 내용에 대해서 편안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수용의 기쁨과 의지가 있을 때 마음이 좀 편안해지잖아요.
귀가 좀 편안해지고 마음이 편안해지고 그것이 결국 우리들에게 있어서 축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합니다.
사람들이 핀잔을 주어도, 오히려 꾸짖음을 주어도, 주님이 은혜를 주시기 전에 사람들이 핀잔을 주어도 그 마음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마음 꾸덕꾸덕함을 가지고 더욱 더 간절히 소리를 질러 의연하게 구하는 이와 같은 모습들, 이것이 은혜인 것을 생각합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는 실망하는 사람이 아니라 더욱 더 간구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내게 임하였다는 사실은 낙심할 순간 내가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한 번 더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낙심할 여지가 없기에 낙심할 수 없고 낙심하지 않으며 더 간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의 호흡이 있는 순간까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고 우리를 인정한 것입니다.
심지어 주님이 우리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원이 없도록 생명 다할 때까지 주님께 간구하다가 주님 앞에 갈 뿐입니다. 믿음은 들어주시지 않는 주님을 야속해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까지도 간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렇게 기도했는데도 안 들어주십니까?’ 이렇게 하나님을 야속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지금까지 이렇게 기도할 수 있고 믿음을 지킬 수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게 믿음이에요.
주님은 십자가에서 절규하셨죠. 하지만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주님의 은혜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에도 불구하고 그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이루신 거죠. 우리는 심지어 이 세상에서 마지막 고통을 당함으로도 우리 사역의 완성을 이룰 수 있음을 분명히 확신해야 합니다.
삶의 성취라는 것은 한 방향으로만 평가될 수 없습니다. 의연한 죽음으로 그의 삶을 완성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마지막으로 그의 삶의 최고의 아름답고 화려한 마지막 완성을 이룬 사람들도 있습니다.
정말 그렇게 기도했는데 병도 안 고쳐 주시고 끝끝내 세상을 떠났다-이렇게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병을 겪으면서도 그렇게 마지막까지 기도하다가 주님 앞에 갈 수 있는 뜨거운 믿음을 가지고 갔으니 행복한 사람이다-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께 간구할 수 있는 것이 축복이고 믿음이지요.
저는 목사로서 어려운 문제가 있었습니다. 중환자실에 방문을 해서 기도를 할 때예요. 도대체 어떻게 기도를 해야 될까요? 정말 마지막 호흡기 꽂고 생명의 호흡조차도 사그라져가는 이와 같은 우리 생명을 볼 때 하나님 끝까지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목사로서 바른 자세인지 아니면 하나님 이 영혼을 받아주십시오 하고 마음에 포기하고 그렇게 기도하는 것이 바른 자세인지 정말 마음에 혼동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마음속에 확신이 생겼어요. 어떤 확신이냐 하면 우리 인생의 의무는 무엇인가? 우리 인생에 마지막 호흡이 있어질 때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하나님께 애절하게 간구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아름다운 소원인 것 같아요.
하나님 마지막 순간까지 호흡이 있다는 것은 기회이고 축복이고 하나님의 은혜이니 하나님께서 이 순간 낫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생명 거두어 가시는 것은 하나님의 권한이에요. 하나님의 권한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권한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데,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데, 마치 방금 하루가 남았건 이틀이 남았건 며칠이 남았건 우리가 알지를 못하는데 그것을 마음에 이미 결정하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미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로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모든 권한은 아닌 것 같아요.
우리는 기도할 수 있는 권한이 있고 결정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니 어떠한 어려운 순간에도 하나님 앞에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마지막 마치는 순간까지는 우리로서 해야 될 모든 것을 해야죠. 그리고 결과가 주어지면 기쁨과 감격과 수용함으로 받아들여야지요. 주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간절한 기도가 있지요.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에요. 가망이 없는 상황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수로보니게의 여인, 귀신들린 아들을 데리고 나온 아버지, 중풍병자 대신 나온 백부장, 모두가 인간으로 볼 때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주님 앞에 나와 그들은 주님이 말씀만 하시면 모든 것이 되겠다고 믿고 주님 앞에 나온 결과 그들에게 새로운 은혜가 임하였던 것을 봅니다.
“더욱 소리 질러 가로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간절한 마음의 소원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우리의 간절함에 응답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오늘 성경을 보니 “너희에게 무엇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예, 주여 우리가 눈뜨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보게 되었고 그들이 주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주님의 생각은 달라요.
다른 사람들은 이들이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할 때 그들을 조소하며 그들을 꾸짖으며 “좀 조용히 해라. 왜 이렇게 나대느냐? 좀 조용히 해라. 왜 이렇게 너희들 난동을 피우느냐?” 하고 꾸지람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생각을 그들과 달랐어요.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어떤 평가를 하던, 나에게 어떤 여러 가지 역사가 있건 주님의 생각은 그것과 다를 수가 있단 말입니다. 심지어는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평가하던 주님의 생각은 그것과 다를 수가 있단 말이죠.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 같고,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해결할 수 없는 능력인 것 같고, 내가 생각하기에 도저히 되지 않을 상황인 것 같지만 주님은 내 생각과는 다르고 주변 사람들 생각과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우리가 무조건 죄짓고 회개하고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주님 앞에 간절한 은혜로 간구할 수 있다는 말이죠.
주님은 우리보다 우리를 더 관대하게 용서하시고 기회를 주시고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죠. 인간에게는 자비를 얻지 못해도 주님은 우리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간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해도 주님은 이해하십니다.
주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우리의 애절한 소원을 주님 앞에 간구하는 진실 되고 간절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예, 눈 뜨기를 원합니다.”
미사여구가 필요 없었어요. 주님 앞에 부끄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정말 이 문제는 사람에게 있어서 피맺힌 절규였어요. 우리의 소원을 아룁시다. 기회 있는 대로 소원합시다. 기도의 응답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나를 외면해도 오직 주님만이 나를 돌아볼 것이라는 마음의 간절한 소원이 있을 때에 주님 앞에 이루어지게 되는 경우를 봐요.
오직 주님만 바라볼 때입니다.
더욱이 오늘 성경을 보면 주님이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문제는 주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는 순간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셔서 주님의 손으로 내 심령을, 내 연약함을 주께서 만져주시고 치료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는 주님의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합니다. 가련하지 않은 인생은 없어요.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도 누구든지 불안하니까 여러 가지 장치를 둡니다. 인생의 병듦과 늙음과 위치 바뀜은 아무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 한 번 따라서 합시다.
“사람에게는 불쌍히 여김 받지 말고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읍시다.”
그래요. 우리는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되 사람에게는 불쌍히 여김을 받지 않는 의연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 앞에는 헐벗은 가난한 심령이되 사람들에게는 축복받는 풍요로운, 나누고 베푸는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 주님께 불쌍히 여김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저는 우리 성도님들을 위하여 간구합니다. 우리도 낙심하지 말고 간구합시다. 그리고 애씁시다. 어떤 결과라도 받아들이고 다시 간구합시다. 어떤 결과라도 실망하지 말고 또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합시다.
이들은 간절히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간구했지만 돌아온 것은 엉뚱한 대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거기서 낙심하지 않고 주님을 향하여 또다시 간구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기도 했어요.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이 진 거예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하는 그들의 말이 그대로 실현되니 그들이 승리한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알고 보니 이 게임은 누가 힘으로 이기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역할을 누가 얼마나 잘 감당하느냐 하는 것을 가지고 평가하는 게임인거죠.
주님은 배역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이와 같은 지능 대역이었어요.
그러나 그 배역을 잘 감당하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때 승리하고 기쁘고 자랑스럽고 사람들에게 당당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배역을 맡을 시간이 있습니다. 그 역할 잘 감당해야 되죠. 그러나 어떤 때는 어렵고 힘들고 사람들에게 조소받고 힘들어하는 이런 배역을 감당할 시간이 있을 겁니다. 그 때도 그 역할을 잘 감당하시되 그 역할을 감당하면서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든 역할을 잘 감당하셔야 됩니다. 어려울 때 의연하고 어려울 때 하나님을 더욱 더 찾고 어려울 때 하나님 앞에 든든히 서고 어려울 때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내 모습 이대로 주님 앞에 드리는 것도 감사하지만 내 모습이 변화되어 하나님 앞에 새롭게 되어 내 눈이 떠지고 내 심령이 열어져, 내 마음이 넓어져 내 능력이 다듬어져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다면 더 큰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오늘도 우리의 눈을 열어 하나님의 세계를 보고, 능력의 세계를 보고, 하나님의 권능 속에 사용되는 하나님의 백성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절망은 없다
마 20:29-34 / 김삼환목사
우리 모든 인간에게는 어려운 일이 있어도 절망은 없습니다. 국가의 문제나, 개인의 문제가 제아무 리 크고 많을지라도 절망할 정도로 어려운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주님이 은혜 를 주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면 우리는 어떤 문제도 해결될 줄로 믿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어렵다고 걱정들을 모두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어려움은 우리가 주님을 찾아 나아갈 때, 주 님 앞에 이 어려움을 맡기고 민족적인 회개가 일어나고 영적인 부흥이 일어날 때에 우리는 오히려 더 크게 발전할 수 있는 그런 소망을 가지고 이 시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은 보는 눈 도 다르고 듣는 귀도 다릅니다. 해결하는 방법이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주님이 우리 와 함께 하시면, 나사렛 예수, 다윗의 자손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는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 못할지라도 주님은 하시고 우리 인간의 힘으로 다 불가능한 일도 주님은 다 하시는 것입니 다. 주님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게 하실 수 있고 만나를 땅 위에 내려서 수백만을 먹이신 이스라엘 의 4백 년 역사를 볼 때 아무 것이 없는 곳에서도 하나님은 언제든지 우리를 향하여 모든 길을 열어놓 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리고에 있는 소경과 같이 주님에게 부르짖고, 믿음으로 부르짖고, 그를 찾고, 그에게로 나아가는 것, 이것이 사는 길이요, 부흥하는 길이요, 국가의 문제를, 우리 자신의 문제 를 해결하는 길인 것입니다. 지금부터 약 한 200여 년 전에 우리보다 천 배 만 배 어려웠던 나라가 있 습니다. 그 나라는 바로 덴마크라고 하는 나라입니다. 그 때에 덴마크는 프러시아라고 하는 나라(지 금 독일)와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전쟁에 지면 보화도 권력도 땅도 다 빼앗기지 않습니까. 모든 사람 이 가지고 있는 좋은 것은 다 빼앗아 가 버립니다. 여자들도 다 데려가 버립니다. 노인들과 어린아이 들만 남습니다. 이 처참하게 버림받은 이 덴마크가 더 이상 소망이 없습니다. 더구나 땅도 좋은 땅은, 비옥한 땅은 다 가져가 버렸습니다. 쓸모 없는 산악지대만 남는 어려운 가운데 빠졌습니다. 국가 은행 도 파산이 왔습니다. 모든 은행이 다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일자리가 없습니다. 비극이 왔습니다. 이 절망과 어두운 땅에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그룬드비 목사님이라고 하는 분 이 그 때 이 나라에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3애(愛) 운동을 일으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 자. 사람을 사랑하자, 이웃 사랑하자라는 거예요. 서로 사랑하자라는 거예요. 그리고 자연을 사랑하자 는 겁니다., “우리는 이제는 끝났다, 이런 땅 가지고 우리가 어떻게 사냐?” 이러지 말고 이런 땅도 사 랑하자는 거예요. 이 세 가지 운동을 일으키면서 이 나라가 절망에서 일어납니다. 살아납니다. 소생합 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어디에 두었느냐 하면 정신적인 성격을 바꾸는 데 포인트를 맞췄습니다. 우 리 성격을 고쳐야 된다, 성격 개조해야 된다라는 거예요. 우리 마음의 절망, 비난, 불평, 원망, 부정적 인 것, 모든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지도자에게 돌리고 온 나라가 전부 서로 미워하며 증오하는 이 때 에 그룬드비 목사님은 아니다라는 거예요. 하나님을 사랑하자는 거예요. 우리 모두 서로 사랑하자는 거예요. 열심히 일하자는 거예요.
그래서 그 때에 덴마크에 체조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나라 국민 체조가, 세계 체조가 다 거기서 나왔잖아요? “학교에서 공부하자” 그래서 모두가 공부를 하고 일어났 습니다. 그 짧은 기간에 비극에서, 저주에서, 멸망에서, 사라져야 할 지상의 나라가 지금 2백 여 년 동 안 세계 최고로 잘 사는 낙농 국가, 선진국이 되고, 과학이 앞서가는 국가가 되고 경제 안정이 한번도 흔들리지 않고 내려오는 국가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삽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안됩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물려주어도 하나님을 떠 나면 안되고요 아무리 비극과 절망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에 게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자녀에게 천억 재산을 물려주고 1조 재산을 물려주어도 하나님 없는 재산 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그러나 자손들에게 나무 가지 하나 물려주지 않아도 하나님 믿는 이 믿음 가지고, 그 마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 정신만 가지고 나가면 그 사람은 세계를 향하여 큰 일 할 수 있습니다. 애굽으로 붙들려 갔던 요셉이 자기도 살고 가족도 살고 애굽도 다 살렸습니다. 우리 는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가면 살아납니다.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환난, 시험, 재난, 절망, 사고, 어떤 저주 위기 앞에서도 한 가지만 딱 알면 됩니다.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주님을 찾 으면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오늘 여기에 나오는, 여리고에 있는 소경과 같이 주님만 부르짖으면 됩니 다. 저는 교통사고가 나도 어디에 전화를 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집에 불이 나도 어디에 전화하는지, 몇 번에 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강도가 와도 어디에 전화할지 나는 모릅니다. 나는 그런 거 안 합니 다. 왜 그러냐? 하나님께 아뢰면 다 해결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저는 그 믿음 가지고 있 기 때문에 모든 문제에 대해서 자유롭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라도 해결할 수 있으니까 어떤 일도 하나 님은 할 수 있으니까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못할 일이 어디 있어요? 나는 이 믿음 때문에 오 늘날까지 수많은 위기, 환란, 이 큰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은 언제나 나를 도와주셨어요. ♪주는 나의 큰 능력 주는 나의 큰 소망 내가 항상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주님은 나의 소망이십니다. 그는 부유 하십니다.
그는 능력이 무한하십니다. 그는 안 계시는 곳이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제가 우리 교회 집사님의 어린아이가 아파 가지고 서소문에 있는 한일병원에 좀 심방 와달라 그래서 갔어요. 가서 보니까 애가 태어난 지 석 달 반밖에 안됐는데 석 달을 입원했어요. 엄마 젖 한번도 못 먹고 링겔만 석 달을 맞았어요. 수술도 했어요. 아무리 의학이 좋지마는 애가 태어난 지 석 달 동안 계 속 병원에 있었으니 애가 태어날 때보다도 3분의 1도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마치 쥐 한 마리 벗겨 놓은 것과 같은 정도예요. 정말 그런 비참한 생명이에요. 그래놓고 이 애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그 래요. 그 애 아버지도 유명한 의사입니다. 그 애 할아버지도 유명한 의사입니다. 다 병원 합니다. 그 애 외할아버지도 의사입니다. 집안이 다 서울대 출신들, 다 의사예요. 그 집은 최하가 서울대예요. 전 부다 서울대 의사들이에요. 처음 이 가정이 얻은 아들인데 이 아들 살리려고 모든 힘 다 쏟는 거예요. 링겔이 여기도 있고 여기도 있고 호스를 별의 별 데 다 꽂아놓고 얘를 지금 치료하고 있는 거예요. 세 계에 있는 좋다는 약은 다 갖다놓고 치료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능력도, 아무것도 없는 저를 불러 다가 기도해달라는 거예요. 그러나 나는 능력이 없어요, 나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는 한 가지 믿는 것이 있어요. “하나님은 할 수 있다, 주님은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절망은 없습니다. 어떤 위기 앞에 서도 절망은 없습니다. 한 열 세 명의 의사들이 거기 죽 둘러있어요. 그래서 선생님, 얘가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 그랬더니 아이고 목사님, 우리는 최선을 다했는데 안됩니다. 현대 의학으로는 길이 없 습니다. 그래서 제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일은 이 가정을 전도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 릴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이 가정이 믿음이 없는 가정, 예수 잘 믿지 않는 가정인데 이 아이를 통 하여 예수 믿도록 이 아이를 고쳐주십시오“ 기도했는데 어떻게 됐게요?
기적이 일어났어요. 얘가 살 아난 거예요. 소생한 거예요. 그래서 애 아버지는 지금 우리교회 안수집사고요 한 5백 베드 되는 큰 병원을 운영하고 있고요. 이 집안이 몽땅 다 나옵니다. 다 이 아이 때문에 예수 믿고 하나님을 믿는 이렇게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이 집안이 깨달은 거예요. 십일조도 꼭꼭 하고, 얘는 지금 우 리 교회 교회학교에 잘 다니고 있어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절망은 없습니다. 뭐 무슨 전화번호, 무 슨 어디 누구 아느냐? 여러분, 어려운 일을 당할 때는 천 분의 1초 내에 해결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교통사고만 해봐요, 1초만 해도 늦어요. 1초면 이미 벌써 천국 가는 거예요. 그때 어디에 전화하겠다 는 거예요? 간단한 거예요. 마음으로 믿기만 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건져주시는 거예요. 덴마크를 위 기에서 살려주시고 영국도 위기에서 살려주시고, 온 세계 역사에 위기를 당할 때마다, 기도할 때마다 들어주신 하나님, 우리의 기도도 들어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요한복음 7장 37절에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 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있는 것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했습니 다. 목마른 자들아 내게로 오라고 했습니다. 내 영혼이 내 삶이 목마릅니까? 무거운 짐 진 자들아 오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주님 앞으로 가야 합니다. 짐을 지고 가야 합니다. 문제를 가지고 가야 합니 다. 시험을 가지고 가야 합니다. 내 모든 이 모습 이대로 가야 합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면 주님의 한 없는 사랑과, 주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과 우리를 불쌍히 여기심이 우리의 허물을 묻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죄를 묻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모두를 해결하여 주시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또 이런 경험을 반 드시 해야 됩니다. 이번에 올림픽에 가는 우리 선수들도 경험해야 돼요. 아, 하나님이 그때 내가 한번 만 나갔는데도 은혜 주시는구나. 하나님은 우리를 도와주세요.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가서 주님을 부 르짖으면 주님은 소경들의 부르짖음을 들어주시는 것처럼 우리 모두의 부르짖음을 들어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 이거 누구 때문이다 자꾸 이런 식으로 나가면 안돼 요.
우리는 어려움을 통하여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찾아야지 서로 원망 불평하면 안돼요. 저의 친구 한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실력도 있고 능력도 많고 공부도 많이 하고 다 갖췄는데 목회가 그렇게 안돼 요. 너무너무 고생하는 거예요. 나는 이분이, 이 친구가 고생하는 것을 너무너무 잘 알아요. 그러나 내 가 말해줄 수 없어요. 지가 뭐 천하에 잘났다는데요. 만나면 항상 교인들 비판하고요 자기 교회 나오 는 사람 욕하고 장로님 욕하고 그러니 되겠어요? 은혜 받으러 왔는데 자기가 은혜를 끼칠 생각은 안 하고 교인들 약점만 찾아내고 허물만 자꾸 찾아내고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만날 때마다 교인 말 안 하면 주변에 있는 교회들, 큰 교회들 자꾸 비판하는 거예요. 내가 보면 속으로 야, 너는 그 장로님 문제가 아니라 네 문제야! 여러분, 문제가 어디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 주변 문제가 아니야 네 문 제야. 그런데 말하면 자기가 듣겠어요? 친구간에 말 한마디 못했는데 이번에 편지가 왔어요.“야, 내 가 이제 조금 눈을 떠서, 내가 예수님을 발견해서, 나이 60이 넘어서 이제 목회가 뭔지 이제 깨달았 다”는 겁니다. 얘가 이제 제 길로 들어섰구나, 얘가 이제 살 길이 열렸구나, 주님을 만났구나, 지금까 지는 내 힘으로, 내 눈으로, 내 생각으로 하니 안 되는 거예요. 이제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니 길이 열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봐야 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 의 마음이니” 교회 나오는 것은 예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예수 사람되고 예수의 능력으로 옷 입 고, 힘입고, 예수 그리스도를 목표로 살기 위해서 주님 앞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 시면 넉넉히 해결될 줄로 믿습니다. 누구 때문이 아닙니다. 자꾸 누구를 향해 돌 던져서는 안됩니다. 오늘도 나온 모든 성도들이 영혼의 치료가 되고 마음의 치료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룬드비 목사가 성격을 바꾸지 아니하면 이 나라를 바꿀 수 없다, 이 나라를 군사적으로, 경 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이 나라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경제도 엉망이고 정치도 엉망이고 이 나라가 다 무너졌지마는 우리가 주님께로 돌아가 우리의 마음만 바꾸면 에덴동산을 다 만들 수 있는 것입니 다.
에덴동산은 우리 마음에 먼저 에덴동산이 주어져야 우리 가정도 에덴동산이 될 수 있고 이 사회 도 에덴동산을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50년 전 1952년 7월 4일날 서른 여섯 살 된 플로렌스라고 하는 여성입니다, 남자도 아닌 여 자 분이 LA에 가면 카타리나라고 하는 섬이 있어요. 이 섬에 가서 캘리포니아까지 해변까지 수영을 하겠다고 선언했어요. 몇 십 킬로를 말이죠, 그 당시만 하더라도 세계가 깜짝 놀랐어요. 그래서 전 미 국이 TV로 생중계를 하고 라디오로 전국에 생중계를 했어요. 이 분이 열 여섯 시간을 헤엄을 쳐 가지 고 자기가 단독으로 횡단하는 이 엄청난 길을 혼자 여자 힘으로 한 거예요. 저도 이 섬까지 가봤는데 빨리 가는 배로도 한 40분 가야되는데 말이죠 이걸 건너가는 거예요. 놀라운 일이잖아요. 수영장에 가 서도 20미터도 못하는 우리들 생각하면 얼마나 놀라워요? 잠도 안자고 쉬지 않고 열여섯 시간 해봐 요 그거 대단한 체력이잖아요. 그런데 불과 얼마 남겨두지 않고 안개가 자욱히 껴 가지고요 중간에 포 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다 횡단을 못하고 중간에 포기했습니다. 그 다음날 안개가 걷히고 보니 까 자기가 포기한 그 지점에서 캘리포니아 해안까지 거리가 얼마냐, 500미터를 남겨두고 포기한 거예 요. 너무 안타까운 일이죠. 그래서 기자회견을 할 때에 이분이 말했어요. 내가 포기하게 된 것은 피곤 해서도 아닙니다. 물이 차가워서도 아닙니다. 힘들어서도 아닙니다. 안개가 자욱 끼여서 앞이 보이지 않으니까, 아무도 이걸 안 알려주어서 알 수가 없으니까, 점점점점 몸이 침울해지고 약해지고 겉잡을 수가 없어져 가지고 포기했다는 거예요. 여러분, 오늘 중요한 것은 뭡니까? 우리 힘을 빼앗는 것은 뭡 니까? 시야가 가려지니까요 멀리 못 보니까 완전히 포기하게 되는 거예요. 오늘 우리 사회의 문제가 어디 있느냐? 우리 모두에게 마음의 안개가 끼었어요. 멀리 못 보는 거예요. 원망하고 불평하고 낙심 하고 순간적인 쾌락에 빠지고 절망하고 자살하고 멀리 안개가 끼었어요. 우리 가정에 안개가 끼었어 요. 마음에 안개가 끼었어요. 이기주의와 의심과 인간의 이 소극적인, 부정적인 안개가 꽉 끼었어요.
그러니까 힘이 빠지는 거예요. 삶의 목표가 없는 거예요. 우리 가정의, 삶의 목표예요. 왜 사느냐? 왜 결혼하느냐? 왜 자녀 기르느냐? 왜 공부하느냐? 목표가 천리 만리 쫙 보여야 되는데 오늘 현대인들 이 이런 목표의식이 없는 거예요. 목적을 상실해버린 거예요. 우리는 교회에 왜 나와요? 주님을 바라 보고, 기도하고 회개하고 내 마음에 가득한 안개를 다 성령의 불로 태우고 예수의 보혈로 씻어서 내 마음이 깨끗하고 정결하기를 바랍니다. 어두운 영안이 밝아지기를 바랍니다. ♪내주여 어둔 영혼을 환 하게 하소서♪ 오늘 세속 문화 퇴폐 문화의 안개가 끼어 가지고 인터넷을 통하여 온갖 음란한 퇴폐문 화의 앞만 보고 그냥 윈도우만 보고 밤을 새우는 사람들이 수백만 수천만 입니다.이렇게 나가니 어떻 게 우리가 미래를 향하여, 세계를 향하여 나갈 수가 있겠어요? 우리는 멀리 보아야 합니다. 교회에 왜 나옵니까? 멀리 보려고 나오는 거예요. 앞의 것만 보고 멀리 안보면 사람은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 다. 넘어지는 거예요. 국가도 넘어져요, 가정도 넘어져요, 개인도, 믿음도 넘어지는 거예요. 여러분, 자전거 배울 때 못타보셨어요? 자전거 배울 때 기본이 뭐예요? 멀리 보는 거예요. 앞에만 보면 온몸 이 휘어지는 거예요. 스케이트 탈 때 어떻게 해야 돼요? 멀리 봐야 돼요. 그래야 잘 가는 거예요. 앞 만 보면, 그대로 나가떨어지는 거예요. 배 탈 때 여러분 어떻게 해야 돼요? 멀리 봐야 돼요. 낚시 할 때 멀리 봐야 돼요. 앞만 보면요 출렁출렁해서 금방 배멀미하는 거예요. 교회에 왜 나와요? 멀리 보려 고 나오는 거예요. 천국 보려고 나오는 거예요. 하늘에 계신 하나님, ♪하늘에 계신 아버지 이름 거룩 하사 주님 나라 임하시고 뜻이 이루어지이다♪ 멀리. 오늘 우리는 멀리 보지 못해요. 앞의 것만 보고, 오히려 앞에만 봐도 괜찮은데 뒤의 것을 보고 뒤의 걸 또 찾아 가지고 몇 십 년 전의 것을 다 들춰냅니 다. 100년 앞을 말해야지. 여러분, 2백 년 우리 앞날을 바라보십시다. 3백 년 앞날을 보십시다, 5백 년 앞날을 보십시다, 천 년 앞날을 보고 준비해야 될 거 아니에요? 세계를 향하여 큰 일은 일 이 십 년 준 비해 가지고 되지를 않는다고요. 다 오십 년 목표하고 해야 큰 일을 할 수 있다고요. 큰 작품 큰 건물 단시일에 나오는 게 하나라도 있어요? 멀리 보고 미래를 이야기해야지, 모이면 미래를 말해야지, 모 이면 과거 이야기하면 어떻게 돼요? 젊은이와 노인이 어디에 차이가 있어요? 저는 어디 가더라도 노 인들한테 가서는 요 빨리 이야기 안하고 인사만 하고 나와요. 왜? 붙잡히면 과거 이야기 때문에 세 시 간 네 시간 매어 달립니다. 어디 가서 뭐 했고--, 그 분들은 100% 할 말이 (미래는 요단강 밖에 없으 니까) 전부 과거 이야기하는 거예요. 과거에 어디 가서 뭐했고 무슨 일 했고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노인들이 계시는 집안에 누가 젊은 사람이 인사하러 오면요 며느리가 빨리 불러내야 돼요. 그만하고 나오라고. 그래야 그 사람이 압박에서 해방되지 안 그러면요 네 시간 다섯 시간 끝이 없습니다. 왜? 과거를 이야기하니 할 말이 너무 많은 거예요. 미래는 젊은 분들이 이야기합니다. 젊은 사람은 과거 를 말하지 않습니다. 미래를 이야기해요. 건강하고 젊은 사람은 미래를 말하지 과거를 말하지 않습니 다. 과거 말하면 안돼요. 가정도 과거 말하면 안돼요. 저도 우리 집사람이 워낙 미인이어서 과거가 있 는지 모르는데 나는 말 안 해요. 뭐하러 그런 말해요? 미인이면 당연히 좋아하는 총각들이 따를 수 있 는 거고 그런 거지 그걸 가지고 뭘 누구 아냐 언제 만났냐 그런 걸 따지면 그 집은 안되게 되어 있는 거예요. 따라하세요, 과거를 묻지 말라. 기독교는 과거를 말하는 종교가 아니에요. 내 과거는 예수의 보혈로 씻어지는 거예요. 정결하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를 높이시면 높아지는 거예요. 미래를 이야기해야 되는 거예요. 할렐루야. 우리나라는 할 일이 많습니다. 국력을 길러야 됩니다. 하나가 돼 야 됩니다. 힘을 모아야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큰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중국 보십시오. 고구 려를 자기 나라라고 말하잖아요. 그래서 우리나라가 저 땅이란 말이 바로 그렇게 이루어지는 거예요. 조금만 우리가 어려워보십시오. 한양에 그 때 청나라가 여기 있었지 않나 다 그 말하는 나라예요. 왜 그러냐면 중국 역사는 몇 천 년 동안 인류와 세계를 향하여 봉사한 경험이 없는 나라예요. 지금까지라 도 이 20세기 오면서 어떤 면으로도 인류를 위해 봉사함이 없는 나라가 중국입니다. 그냥 먹고사는 돈 밖에 모르고 자기밖에 모르는 민족이에요. 항상 쳐들어가서 빼앗는 민족이에요. 뭐 대단한 줄 알고 거 기 우리가 붙어 가지고 먹을 거 생기는 줄 아는데 몇 십 년 동안 수 십억 불 우리 기술 다 갖다 주었지 마는 우리가 나중에 중국 가서 달라 그래봐요 주나요. 이걸 잘 알아야돼요. 우리는 우리 힘을 길러야 됩니다. 일본이나 중국이 저 미국같이 어리석게 우리나라 와 가지고 도와줄 민족이 절대로 아닌걸 알 아야 됩니다.
미국은 기독교 정신이니까 생명 바쳐 이웃을 사랑하고 어디든지 돕는 것이지 중국을 비 슷하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중국은 곰이에요. 삼키는 나라예요.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저 사람들 이 미국 사람같이 여기 와서 지원해주고 그냥 깨끗하게 물려주고 우리를 도와줄 나라냐? 한가지도 안 도와줄 나라라는 걸 알아야 돼요. 우리가 그들에게 준 것을 생각하더라도 어마어마합니다. 우리 한 국 교회가 중국 지원한 것만 해도 수백 억입니다. 우리 교회도 몇 억 쏟아 다 부어줬어요. 그러나 저 사람들이 그 은혜를 아냐? 절대로, 쓱 닦는 민족이지 저 사람들이 우리 도와줄 민족이 아니라는 걸 알 아야 돼요. 어디 가도 중국 사람은 장사꾼입니다. 비단의 장사 왕 서방 몰라요? 우리가요 하나님을 위 로 전적으로 의지하고 다음에는 우리 국민들이 하나가 돼야 돼요. 하나가 되는 일이 뭐냐? 과거를 묻 지 말아야 돼요. 과거로 돌아가면 안돼요. 이거는 국민이 낱낱이 분열이 되고 그 자손들끼리 또 대적 이 되는 겁니다. 사람은 현재 인물은 하나도 없는 거예요. 나도 이미 오늘만 지나면 과거 인물이 되기 때문에 다 과거로 돌아갈 사람들인데 또 끊임없이 과거를 캐고 캐고 캐고 캐고 끊임없이 캐나가면 이 나라는 안되게 되어있는 거예요. 우리 모두 미래를 향하여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을 바라보면서 앞 으로 나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안개가 끼이면 안돼요. 이 마음에 안개를 걷어내야 돼요. 가정의 안 개를 벗어내야 돼요. 성령의 주시는 은혜와 능력으로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무장하고 주 예수 그 리스도로 나와 민족을 구원하고 세계와 인류를 구원하는 성도들 되기를 바랍니다. 느헤미야 8장 10절에 보면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 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아야 됩니다. 그러면 마음이 넓어집 니다. 사랑할 수 있습니다. 교회 나와서 마음을 넓히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는 다니면 서 마음이 닫혀 가지고 모기 간 같이 마음이 좁아 가지고 무슨 큰 일을 할 수 있겠어요? 하나님이 함 께 하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여러분들은 우리 모든 성도들은 우리 모두를 끌어안 고 관용하고 서로 사랑하고 장점을 이야기하고 잘한 걸 말하고 허물은 덮어주고 미래를 말하고 과거 는 덮어주고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마음은 심고 부정적인 뿌리는 뽑아내고 우리 마음에 어두움은 몰 아내고 주의 빛으로 환하게 비추어서 우리 모두를 살리고 소생시키는 성도들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 을 부르짖으십시오. 주님의 백성이 되고 주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은 할 수 있다는 이 믿음을 가지고 끊 임없이 주님에게 도전해 나가십시오.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얻는다고 했습니다. 레위기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는 짐승들이나 새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는 대표적인 것이 타조 같은 거 먹지 말라 그래요. 왜 먹지 말라 그래요? 타조는 이것도 저것도 아 니라는 거예요. 새냐? 날개가 있지마는 새는 아니야, 날지를 않으니까. 그럼 동물이냐? 동물도 아니 야, 날개가 있으니까 동물도 아니야.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은 먹지 말라는 거예요. 곤충도 뭐라 그랬 죠? 곤충을 다 먹어도 되느니라. 그러나 곤충이 날개가 있는데 날지 못하는 곤충은 먹지 말라. 이게 뭐예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 믿는 거지 믿으면서 안 믿는 사람과 타협하고 죄와 타협하고, 우상 숭배하는 데 가면 또 고개 숙이고, 이것은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사람을 좋게 하려면 여기 가면 이래하고 저기가면 저래 하면 사람은 좋게 할 수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을 좋게 할 순 없어요. 그 런 사람은 내 것이 없어지는 거예요. 이 사람도 좋아 그러고 저 사람도 좋아, 그런 사람은 다 버림받 는 거예요. 요사이 영화 같은 것도 보면 애인이 이 사람도 애인이고 저 사람도 애인이면 둘이 다 떨어 져나가는 거예요. 하나에게도 사랑을 받을 수 없는 거예요. 사랑은 한 곳에서 이루어지고 한 우물을 파야 되고 거기에 어려움도 있죠, 그러나 어려움 그것이 하나님에게 인정받게 하는 거예요.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은 어려움은 안 당하죠, 그러나 내 기업은 없는 거예요. 교회도 여기 가면 시험 있 으니까 저 교회 가야 되겠다, 저 교회 가니까 또 어려움이 있으니까, 말 많으니까 말 없는 교회 가야겠 다. 저 교회는 말은 없는데 일이 많구나, 일 없는 교회 가야되겠다, 이 교회는 일이 많으니까 저 교회 는 선교 많이 하니까, 그러면 평생 돌아다니다 끝나는 거예요. 부평초와 같이 왔다갔다 뿌리 없이 헤 매면 안 되는 거예요. 내 자리를 철저하게 지키는 거예요. 우리 어머니는 이모가 세 분, 그리고 어머 니 해서 사형 제인데 안동 김씨 종가 댁이 팔 대를 외동으로 내려오셨어요. 얼마나 외할아버지가 무서 운지 몰라요. 수염이 여기까지 내려와요. 그런데도 우리 어머니는 끝까지 혼자서 제사 한 번을 안 지 내는 거예요. 절을 절대로 안 하는 거예요. 외할머니가 돌아가셔도.. 지금 같으면 이해가 되요. 그러 나 칠 십 년, 육 십 년 전에 이게 가능한 일이에요? 그 당시에 여자가 이게 가능해요? 그러나 철저하 게 믿음을 지키는 거예요. 내가 어려서 다 본 거예요. 믿음 지키는 어머니보고 온갖 내게 환란이 있어 도 나는 어머니 따라서 어느 우상에도 절을 안 했어요. 어떤 제사도 지내지 않았어요. 사람에게는 나 쁜 소리 들었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내게 도장을 찍어주는 거예요. 오, 얘를 통해서 내가 일을 해야 되 겠다 이 가정을 통해서 일 해야 되겠다. 여러분, 확실한 믿음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 닌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다 좋게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좋게 하면 사람은 다 따라오게 되 어 있어요. 사람은요 아무리 인기 좋고 전 국민이 박수하는 것 같아도 바람에 나는 겨와 같아요. 인기 는 바람에 나는 겨예요. 한 순간에 거품이에요. 안개예요. 한 순간에 다 떠나가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 니에요.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은 영원히 내 편이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도와주세요.
세상의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나 하나님이 함께 하는 임마누엘의 축복은 영원한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출세 하려면, 하나님을 잘 경외하여 복을 받으려면 영원히 하나님 잘 섬기기를 바랍니다. 오늘 2부 예배에 다녀간 우리 교회에 반주를 하던 나춘영 집사님이 있는데 그 남편은 우리나라 엘지 라고 하는 큰 회사에 다녔어요. 나춘영집사가 해외 유학 가서 몇 년 둘이 별거하고 있었어요. 그 남편 이 회사에서 회장님이 오셔 가지고 술을 돌리는데 간부들이 다 모두 받는데, 자기 앞에서 회장이 직 접 따라 주면서 돌리는데 우리 집사님이 회장님, 저는 교회에 다니기 때문에 아직까지 한 번도 안 먹 었는데 어떻게 먹겠습니까? 그 대신 제가 이 회사에 다른 면으로 충성을 하겠습니다. 이것만 용서해 주십시오. 그래서 전체 술 분위기를 이 분이 다 깨뜨린 거예요. 그러니까 모두 다 내일이면 끝나는 줄 알았대요. 그러나 이 분은 나 이 회사 나가도 좋다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셔야 된다는 거 예요. 확실한 믿음은 인정받습니다. 지났더니 회장님이 더 큰일을 맡기더래요. 우리 교회에 장로님들 도 여러분이 있어요. 큰 재벌회사에 전무로 있던 우리 장로님이 계신데 거기는 무당 데려다가 굿하는 상무가 따로 있대요. 무당상무에요. 일년에 몇 번씩 다 가서 거기에 절하고 그래야 하는데 난 못한다 그랬대요. 나는 교회에 다니니까 못한다 그랬대요. 나중에는 회사에 전무가 되었고 회사가 부도가 나 서 회장님은 감옥에 가고 알거지가 되었어요. 하나도 없어요. 남은 재산은 노조에서 추적을 해서 싹 다 빼앗아 갔어요. 이랬는데 나중에 하나님께서 우리 장로님을 얼 마나 많이 축복 하셨는지 모릅니 다. 여러분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아요. 하나님을 두려워하세요. 하나님은 다 갖고 계세요. 사람보고 앞날 때문에 죄짓지 말아요. 앞날은 저 분이 갖고 있다고요.
물질 때문에 사람 따라가지 말아요. 물질 의 축복은 저 분이 갖고 계세요. 노후의 문제도 저 분이 갖고 있고 자녀의 문제도 저 분의 손에 있는 거예요. 누구를 따라가십니까? 하나님을 의지하고 승리하는 성도들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확실한 믿음으로 민족을 구원하고 나라를 구원해야 합니다. 예수 잘 믿어야 합니다. 교회 생 활 잘 해야 합니다. 행복과 가정은 분리할 수 없듯이 예수 잘 믿는 것하고 교회는 분리할 수 없습니 다. 교회에 잘 다녀야 예수 잘 믿습니다. 교회에 잘 다녀야 신앙이 좋습니다. 교회 없는 믿음, 교회 없 는 신앙은 죽은 믿음입니다. 교회생활 잘 해야 합니다. 교회를 귀히 여기고 교회를 사랑해야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려움이 있지요, 핍박 많습니다.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건 확실한 투자요 반드시 승리하는 좋은 결과, 영원한 축복이 보장이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적당하게 살면 그런 건 없지 요. 그러나 보장받을 수 없어요. 하나이 함께 하는 임마누엘의 삶이 아닙니다. 오늘 국가적으로 어렵 다고 하지만 어려움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이 나라 살줄로 믿습니다. 속히, 한 시 간이라도 빨리 신앙을 하나님께로 유턴해서 내 앞날을 주님에게 끈을 맡기듯이 맡겨서 주님 뜻대로 살겠습니다 하면 절망은 없습니다. 일어납니다. 승리합니다. 잘 될 줄로, 기적이 일어날 줄로 믿습니 다. 자비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거룩한 주의 날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 님 앞에 나와 내 영안을 밝히 뜨고 주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적당한 믿음, 이 사람도 저 사람도 다 좋 게 하는 믿음에서 떠나게 하여 주셔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확실하게 살게 하여 주옵소서 성령으로 충 만하여 나라와 민족을 구원하고 내 가정을 구원하는 복된 성도들로 만들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응답받는 기도
>성경본문|
마20장 29절 ~ 3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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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제|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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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박지온목사
>비 고|
>첨부파일|
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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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0:29) 저희가 여리고에서 떠나 갈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좇더라
(마 20:30) 소경 둘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마 20:31)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마 20:32)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희를 불러
(마 20:33) 가라사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우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마 20:34)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저희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저희가 예수를 좇으니라
오늘 본문을 따라서 '기도응답의 비밀이다!' "응답 받는 기도다!" 그렇게 제목을 삼았습니다. 신앙생활에 '기도응답 받는다!' 그러면 다 됩니다. 문제는 신앙생활을 10년, 20년 평생을 해도 기도응답이 잘 안 된다, 기도가 잘 안 된다! 그러면 신앙생활이 안되게 되어있어요. 그런 신앙생활 자체가 어렵고 힘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루를, 아니면 단 몇 일을 신앙생활 했더라도 기도응답으로 신앙 생활이 되면, 그것은 기쁘고 감사함으로 신앙생활이 되어집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지금 타종교들이 자꾸만 더 성행해 지고, 기독교가 어려워지게 되는 배경이 바로 그겁니다. 기도응답이, 그렇게 오랫동안 믿어도 안 되기 때문에, 기독교의 종교가 퇴락하게 되고, 그 다음에 그 기독교에서 가장 특징적인, 그리고 신앙에 가장 핵심이 되는 기도응답이 안되니까, 기도응답에 사실적인 어떤 일을 대체해 놓은 것이 요즘 말하는 데로, 명상이라든지, 기 운동이라든지, 단전호흡이라든지, 뇌 호흡이라든지, 그런 게 됩니다. 기도응답이 되면 뭐 뇌 호흡, 명상 할 것도 없는데, 기도 응답이 안되니까! 그걸로 통해서 뭔가 기도를 대체했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여러분들이 지금 이걸 좀 붙잡아야 됩니다. 우리 성도들이 '기도응답이 안 된다!' 열심을 낼수록 종교로 빠집니다. 열심을 낼수록... '기도응답이 된다!' 가만히 앉아도 됩니다. 거기서 모든 것이 다 나오게 되죠. 그래서 우리가 '복음 운동이다! 복음이다! 전도운동이다!' 간단히 말해서 기도가 되느냐? 기도 응답이 오느냐? 기도응답의 실제가 사실로 여러분에게 있느냐? 그러면 복음이 되는 겁니다. 거기서 복음의 역사가 구체적으로 이루어지죠. 이것이 안 된다! 전부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기도했느냐? 오늘 본문을 통해서 기도의 내용을 좀 볼 수가 있습니다. 소경이 예수님 앞에 나가서 요구를 했던 이 부분이 바로 기도와 직결되는 부분이죠. 이 소경들이 나가서 기도했는데, 그 기도의 중요한 내용이, '뭐가 먼저 이루어져야 기도 응답이 되느냐? 그리고 응답 받는 사실적인 기도가 되느냐?' 하는 것이 벌써 먼저 나와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지난주에도 조금 설명을 드렸고, 이 일을 계속해서 우리가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만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인이 되어야 됩니다. 이것을 가지고 주권이라 그랬어요. 하나님이 나에게 주인이 된다!
그러면 이 주인이 된다는 것은 뭐로 통해서 이루어지느냐? 하나님이 내게, 또 나와 하나님이 생명 적인 관계가 이루어져야 됩니다. '나에게 생명을 주신 아버지요, 나는 아들이다, 자녀다!' 이 관계가 이루어져야 그 다음에 전지전능하시고, 창조주 되시는 그 하나님의 살아 계심이 믿어지고, 또 그 하나님께 모든 것 내 인생을 맡기고, 그 다음에 내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으로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이런 삶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먼저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생명관계! 그리고 하나님은 나의 주인이시오. 또 나에게 주권자이시다! 이것이 사실적으로 믿어져야 됩니다. 그리고 고린도 전서 12장 3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뭐라 그랬습니까? '주님이시다! 주시다!' 그렇게 할 수 없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신 중요한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뭐냐하면, "소경 둘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이 기도의 내용이 뭘 '이렇게 해 주십시오, 저렇게 해 주십시오!' 그게 아니었습니다. '주여, 우리를' 어떻게요? '불쌍히 여기소서!' 그런 기도입니다. 그 다음에 또 두 번째로 보면 똑같이 그렇게 말했어요. 31절에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똑같이 반복하는 내용입니다. 계속해서...
제자들이 막 꾸짖고 그래도 똑같은 기도입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럴 때에 우리 예수님께서 이제 구체적으로 다가가셔서 32절에,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희를 불러" 서서 이제 33절에 응답하실 순간입니다. "가라사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또 똑같은 말입니다. "주여 우리 눈뜨기를 원하나이다!" 당장 이렇게 그 자기들의 어떤 소원과 원망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제일 첫 번부터 뭔가 '주여' 라는 것은 당신의 마음대로, 당신의 계획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는 배경입니다 만은, 뭐냐하면 첫 번째는 '불쌍히 여기소서!' 하나님 앞에 나갔을 뿐입니다. 주님 앞에 나갔을 뿐입니다. 그 다음에 제일 마지막에 구체적인 소원을 말씀했습니다. 그것이 제일 마지막 부분에 그들에게 요구되고, 예수께서 성취시켰죠.
지금 이걸 우리가 실제로 좀 설명을 해 보면, 우리들이 그 기도하는 내용을 보면, 어떤 문제가 딱 닥쳤다! 어떤 사건이 딱 닥쳤다! 그러면 그 사건과 문제가 닥치자 말자 우리 마음이 어떤 생각을 하느냐 하면, 그 사건에서 해답을 스스로 내어요. 이건 '첫 번째는 이렇게 하고, 두 번째는 이렇게 하고, 세 번째는 이렇게 하면 되겠다!' 그러고는 좀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결론을 내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그런 것을, 방안을 가지고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 앞에 나갑니다. 그러면서 속칭 우리는 뭐라 그러느냐? '사람이 할 것은 하고, 하나님이 할 것은 해야지!' 그러면서...
그래서 '하나님, 이것은 이렇게 해 주시고, 저것은 저렇게 해 주시고... 첫 번째 이렇게 안 하면 두 번째 이렇게 해 주시고, 또 안되면 세 번째 이렇게 해 주옵소서! 이렇게 안 해주면 하나님 한번 봅시다!' 공갈도 치다가... 이게 이제 보통 우리 기도의 내용이에요. 그래도 잘 믿는 사람들의 그런 내용입니다. 일단은 다 대처를 해놓고, 그 다음에 하나님 앞에 가서 보고를 하면서, 이 보고형식입니다. 그러면서 '이 보고대로 하나님 안 해주면...' 그러니 하나님을 심부름꾼으로 만들어요. '안 해주면 안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용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주권자로, '하나님 보시옵소서, 하나님이 내 형편을 보시고 내 형편을 하나님이 긍휼이 여기셔서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대로 하나님이 인도해 주시고 이루어 주옵소서!' 이 기도가 안 되어요. 뭔 문제가 나오면 바로 이런 게 들어가야 됩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내가 이런 일 당하고 아무것도 할 수 있는 힘이 없고, 재간도 없고, 또 여유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셔서 내 형편과 사실을 아시는 분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나갈 때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 이 부분입니다. 먼저 하나님께 다 맡기고 겸손하게 들어가야 되는데, 그게 아니거든요. '하나님, 이렇게 안 해주면 안됩니다! 저렇게 안 해주면 안됩니다!' 그 다음에 뭐가 이렇게 될 때에, '하나님, 이렇게 해 달라고 그랬는데 왜, 이렇게 됩니까!' 이런 식으로... 그러니 안되면 원망하고 이런 것으로 나가게 되는 모습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먼저 우리가 절대적으로 하나님은 완벽합니다. 창조주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여러분과 제게 생명을 주신 누구입니까? 아버지입니다. 나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고, 가장 성공적이고, 가장 축복입니다. 내 마음과 생각대로 된다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이 없어요. 우리는 전부 이런 것들, 그래서 '내 마음과 생각대로 되게 하옵소서!' 비는 것이 우상숭배다! 이겁니다. 욕심을 따라 비는 것이...
그래서 여러분들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오늘까지 우리가 믿는 즉시 내 마음대로 생각대로, 욕심대로 안 버려 두신 것이 그건 감사할 일입니다. 받아합시다. "기도응답이 안된 것이 감사하다!" 되었다! 지구가 깨어지는 역사가 나옵니다. 여러분 역사 속에 지금까지 내 욕심대로 다 되었다! 그러면 지구가 다 깨어져야 돼요. 나는 지금까지 보면서 내 욕심대로 안된 것, 내가 기도한 것, 내 욕심대로 안 된 것! 그것은 감사할 일입니다.
뭐 예를 들어서 보세요. 우리가 뭔가 기도할 때에, 거의 우상 적인 기도, 이기적인 기도를 하거든요. 만약에 그 이기적인 기도가 다 응답되었다! 그건 이상한 거죠. 그리고 또 어떤 면에서 하나님이 이기적인 기도를 들어준다! 그러면 하나님도 곤란할 것 같아요. 뭘 해야 될지, 그 개다 장사는 '비 오지 마옵소서!' 그럴 것이고, 우산장사는 '비 오라!' 그럴 것이고, 아침에 나갈 때에 개다 장사는 '비 오지 말라'고 할 것이고 하나님은 누구기도를 들어야 됩니까? 그러면 비 한번 왔다가 또 맑았다가 이렇게 할 수도 없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거의 이런 일입니다. '개다'라 그러면 알죠. 나막신!
바로 우리가 지금까지 쭉 기도한 배경을 살펴보면요, 여러분 철야할 때나, 혹은 여러분 기도하는 내용을 한번 녹음해 보라니까요. 뭐라 그러는지, 전부 자기 욕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꾸 왜 종교다, 우상이다! 그러느냐? 우리기도 내용자체가 복음이 아니에요. 그건 종교우상, 전부 욕심을 채우는 이런 기도로, 이런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응답했다!' 안 되는 겁니다. 망칠 줄 아는데, 그건 망할 줄 아는데, 그 기도가 응답이 될 수가 없죠.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이 기도할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은 모든 것이구나! 내 생명이요, 내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주인이십니다!' 그 주인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 밖에 우리에게는 참된 행복과 축복이 없습니다. 그 주인에게 모든 것 의탁하고, 인도 받는 자리에 서서 비로소 우리의 기도가 나갈 때에, 여기에 응답 받는 역사가 구체적으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어떤 관계가 이루어 질 때에 제일먼저 뭐냐하면, 우리에게 이런 확신이 옵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보면,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이런 믿음이 전제가 안되면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죠.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어떻게요? '살아서 내 기도를 들으신다!' 이게 지금 인식이 되어야 되죠.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이 지금 내 기도를 들으신다! 하나님 앞에 섰다!' 이것이 이루어 져야 되죠.
여러분 생명관계가 이루어진다! 그랬을 때에 만약에 자식이 뭔가 아버지 앞에 뭘 구할 때에, '아버지, 돈 만원주세요!' 그럴 때에, 이 자식이 아버지 앞에 나가지고 않고, 벽을 딱 보고, '아버지, 만원주세요!' 이러면 미친놈이에요. 똑같이 여러분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생명관계가 이루어졌다!' 그럴 때에, 여러분이 어디서 해야 되느냐? 그가 계신 것과, '지금, 하나님 앞에 나갑니다!' 내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 내 앞에 나와 같이 내 기도를 들으시는 실존으로 확인해야됩니다. 이게 안되고 막연하게 나와서,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 이런 식으로 기도해 가지고는 똑같이 뭐가 되어요? '미친놈이 된다!' 이겁니다. 기도가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여러분 정말 기도응답에 사실적인 역사가 이루어져야 되죠.
그 다음에 그뿐 아니고 반드시 기도할 때에는, 아들이 부모 앞에 나와서 돈 만원 달라고 그럴 때에, 반드시 줄 것을 믿고 나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님 앞에 기도할 때에 반드시 응답주십니다. 주님은 기도할 때마다 응답해 주시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계획이요, 역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계획이다!' 말로는 하면서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가 가지고,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가 붙잡았을 때에 우리가 늘 오해를 합니다. 뭔가 막...
예를 들어서 '하늘에서 돈 100만원이 뚝 떨어졌다!' 이런 식으로 그냥 좋아하고 받았을 때는 교만하기도 하고, 이상하게 그런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늘 바로 붙잡아야 될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진다!' 그럴 때에, 계획이 이루어지는 순간마다 겸손하게, '이루어졌구나! 성취되었구나!' 그러면서 그 계획을, 그 자체를 우리가 감사할 줄 알아야 되죠.
예를 든다면 부산에 간다! 그러면, 부산에 가는 대로 평사가 나오고, 조금 더 가면 어디가 나옵니까? 휴게소가 언양이 나옵니다. 언양이 나오는데, 그런데 이렇게 가면 차를 타고 가다가 평사가 딱 나왔다! '아, 평사가 나왔구나!' 그런 부산가는 길에 평사가 계획이 되어있고, 언양이 나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차를 차고 가다가 평사가 딱 나왔다! '아, 평사네! 이상하다, 왜 이런 게 나왔냐!' 그게 지금 신앙생활에 큰 문제거든요.
그 다음에 또 평사 휴게소에 들어갔다! 거기에 들어가면 뭐가 있습니까? 휴게소에 뭐가 있고, 또 마실 것도 있고, 음식도 안 있습니까! 그러면 거기에 한번 들어가 보자 들어가 놓고는 마실 것 있다고, '희안 하다, 신기하다, 이런 게 어디서 나왔냐!' 먹는 것, '아, 뭐 이런 것도 있느냐!' 이게 문제거든요. '아, 마실 것이 있구나! 그 다음에 이런 것도 있구나!' 그런... 왜? 계획이 되어 있어요. 가는 길에 언양이 나온다! '아, 언양이구나! 아, 언양이 나왔다!' 팔짝 팔짝 뛰고, '왜, 언양이 나왔을까!' 이게 지금 신앙생활에 계획이라고, 하나님 뜻을 모를 때에 나오는 배경입니다.
조금 기도응답 오고 나면, '말씀대로 성취되어 가는구나!' 세상에 막 지진이 나고, 전쟁이 나고, 어렵다! '아, 말씀대로 성취되어 가는구나!' 평안해야 되요. 그리고 또 뭐 '평사가 나왔다!' 그럴 때에, 가다가 '아, 이건 나 혼자 누리고, 나 혼자만 알고, 나 혼자만 비밀을 알고...' 다른 사람한테는 모를 줄 알고, 나 혼자만 받았다! 아닙니다. 부산가는 사람은 다 받습니다.
여러분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어쩌면 신앙생활이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모르니까, 뭔가 이상하게 행동합니다. 받아놓고도 팔짝 팔짝 뛰고, 교만하고, 자만하고, 또 조금만 잘 안되면 삐치고, 조금만 더 가면 될 건데, '너는 주고 나는 왜 안 주노!'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이것이 신앙생활에 구체적인 사실이 안되니까, 이 염려하고 걱정하고 말씀이 성취되었다 당연히 성취될 것 아닙니까! 말씀이 성취되었다! '어쩌면 나한테만 성취되느냐?'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붙잡고, 기도하고, 성령의 인도 받는 자들 모두에게 사실적으로, 구체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우리가 겸손하게, '주여, 올 것이 왔습니다, 이루어집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나가야 될 것 아닙니까! 이것이 안 될 때에 하나님께서 기도응답을 주셨다는 사실 자체가 안되니까, 이런 여러 가지 신앙생활 속에서도 많은 역 작용들이 나오게 됩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뭐 '다락방 한다, 전도 사역한다!' 다른 게 아닙니다. 바로 이 배경입니다. 여러분 계획 중에 계획이, '하나님의 계획안에 들어왔다!' 그러면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잖아요. 그런데 그 계획 중에 계획이 뭐냐하면, 구원 계획입니다. 여러분 성경 전체에 하나님의 계획 중에 계획이 뭐냐? 구원하시는 계획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뭐 옛날에 우리 교회 신학 할 때에, 그 다음에 조직신학 할 때에, 그 다음에 그 성경에서 뭔가 조직 하에서 나오는 조직신학이 '나쁘다, 좋다!' 그런 배경이 아닙니다. 이 부분을 잘 이해를 해야 됩니다. 다 좋은 이야기이고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 배경 속에서도 조직신학에 중심이, 그 다음에 교리신학의 중심이 뭐냐? 구원역사입니다. 구원 사에 대한 설명이에요. 구원 사라 그럴 때에 다른 게 아니거든요. 바로 이 문제가 뭐냐하면, 여러분 구원 사라는 것이, 여러분과 제가 지금현재 말하는 뭡니까? 전도역사입니다.
구원하게 하시는 하나님! 바로 그분은 여러분과 저를 죽음과 멸망에서 구원해주신 것처럼, 나를 통해서 또 죽음과 멸망에 처한 자들을 구원해 주시는 전도 역사가 바로 구원사역, 구원역사요, 하나님의 계획 중에 계획이고, 그 속에 여러분과 저를 세웠다! 이게 이해가 되어버리면, 우리가 구체적으로 구원 사에 내 방향을 맞추어 버리면 뭡니까? 하나님의 계획 속에, 중심부에 뛰어드는 것 아닙니까!
그 하나님의 방향에 맞추는 가장 중심부에 사실적인 역사가 뭐냐? '전도의 역사다, 선교의 역사다!' 그래서 뭔가 '전도하면 복 받는다, 선교하면 복 받는다!' 그 말 배경이 다른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것이고, 하나님 계획의 가장 중심이니까, 복 받는다가 아닙니다. 벌써 그 중심이 '하나님이 그렇게 계획하심 속에 이루어지는 과정일 따름이다!' 그렇게 말씀을 이해하셔야 됩니다.
사도행전 13장 48절에 보면,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뭐라 그랬습니까? '작정된 자는, 계획된 자는 다 믿더라!' 이 사역이 사도행전 사역입니다. 이 역사 속에 여러분과 저를 세웠습니다. 오늘 이 역사 속에 우리가 조금만 맞추어 버리면, 여기에 다 이루어지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이 사실에 맞추어 나갈 때에, 여러분 지금 뭘 이해하셔야 되느냐 하면요. 이 사실에 조금이라도 눈을 뜨게 되는 순간부터, 여러분 구원의 역사에 눈을 뜨게 되는 순간부터, 응답이라는 사실이 구체화됩니다.
쉽게 말해서 안 믿는 사람들보고, 또 불신자를 보고, 또 어떤 면에서 그런 어떤 맥락에서 우리 마음에 뜨거워지는 시간이 옵니다. 그걸 사명이라 그러는데, '내가 저럴 때에 나와 같던 모습이구나! 꼭 나를 보는 것 같구나! 내가 저럴 때에 얼마나 어려웠느냐?' 그러면서 그들을 향해서 뭔가 긍휼과 자비와 소위 말하는 애통하는 마음이 내 마음에 터져 나오게 될 때에, 전부 기도응답입니다. 이것이 되기까지 여러분 기도응답에 중요한 시간표라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이 여러분 바로 이해가 되어야 됩니다.
그러면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불신자를 본다든가, 뭔가 저 사람이 내게 잘해줬다, 못해줬다 내게 어떤 힘겨운 사람이다!' 그럴 부분이 아닙니다. 그 사람을 딱 볼 때에 뭐가 옵니까? 내가 옛날에 고통 했던 과거의 모습이 바로 보여지는 것 아닙니까! 그때에 내가 얼마나 괴로웠느냐? 그러면 저 사람 속에 사로잡고 있는 배경이 뭐냐? 흑암에 세력입니다. 그러면 우리 기도의 제목이 나올 것 아닙니까! 이런 어떤 배경에서 연결되는 그의 기도와, 내 기도와, 그 다음에 내 삶에 기도가 전부 연결되어서 응답으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 점이 바로 이해가 되어야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불신자를 본다! 혹은 우리 자신들도 지금 현재도 그런 상황입니다 만은, 바로 '사단의 손에 있을 때에 망하는 시간표다!' 그렇게 안 봅니까! 그러니 우리는 이런 어떤 삶에 있는 자들을 볼 때마다 영적인 문제가 바로 일어나는 것을 보잖아요. 금방 사건과 상황 속에서 영적 문제라 그러면 여러분 뭘 보느냐? 사단의 세력 속에 지배되고 있다! 그 배경이 영적 문제입니다. 사단의 세력 속에 지배되어 있다! 이것이 영적 문제고, 이 영적 문제라는 것은 모든 지금 너와 내 관계 속에서, 복음이 없는 그런 자리에서 다 일어나는 문제입니다. 가문이나 개인이나 전부 여기에 문제 아닙니까!
이 문제가 일어나게 될 때에, 이 영적 문제에 걸렸을 때에,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닙니다. 우상숭배! 왜? 거기에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이 우상숭배 아닙니까! 여러분 이상한 것에 절하고, 뭐 빌고 하는 것! 그게 하고싶어서 하는 겁니까! 자기들도 안 하면 못 견디는데, 안 하면 실제로 망하는데, 그러니까 할 수 없이 빠져 들어가는 겁니다. 거기에 대한 참 처절한 어떤 모습들 우리가 이게 보여져야 되죠.
그 다음에 여기에 이런 모습이 보여질 때에, '정신문제 있다!' 그 다음에 따라오는 것 아닙니까! 정신문제 그럴 때에, '아, 영적 문제 있으니까 당연히 정신문제 나온다!' 그럴 때에, '정신이 돌아 가지고 뭐 이상한 소리한다!' 거기서 나오는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 잘 알아 들어야합니다. 내가 사단의 손에 빠졌을 때에, 할 수 없이 우상숭배하고, 돼지머리 놓고 절하고 있는 것! 그게 할 수 없이 빠져 나오려고 하다 보니까, 몸부림하다보니까! 그런 게 나올 수밖에 없잖아요. 그렇게 나올 수밖에 없는 그 사실 자체가 벌서 뭡니까? 정신적인 문제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여러분 돼지를 잡아놓고, 목을 떼어놓고, 그 앞에다가 절하는 자체가 정신적인 문제입니다. 정신이 돈 거죠. 벌써 살아있는 돼지도 복을 못 주는데, 돼지 모가지를 떼어놓고 죽어 가지고, 지금 죽은 되지를 앞에 놓고, '복을 줄 것이다!'라고 믿는 자체가 벌써 뭡니까? 그게 정신문제입니다. 다른 게 정신문제가 아닙니다. 거기에 따라서 오는 모든 정신적인, 실제적인 현상들이 나오게 되는 것 아닙니까! 뭐 분열증이 나오거나 이런 것은 그 다음에 문제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문제가 온다!' 그럴 때에, 따라서 오는 것이 정신의 실제적인 현상들이 나오게 되는 것 아닙니까! 따라서 분열증이 나온다던가, 이것은 그 다음에 문제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문제가 온다 그럴 때에, 따라서 오는 것이 정신문제는 따라서 오는 겁니다. 정신문제가 오게 되니까, 여러분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오면 생각, 마음 다 병들어 버립니다. 그러니까 육신 적인 병이 오는 것 아닙니까! '육신 적인 병이 온다!' 거기에는 뭐 그냥, 그냥 여러분 올 때에 뭐, 이상하게 이름도 모르고, 그것도 모를 병이 온다! 그런 정도의 이름 아는 병도 오고, 모르는 병도 오고, 별게 다 오죠. 다 거기에 정신적인 스트레스와 거기에 따라오는 그런 병들입니다. 이런 문제들입니다.
그 다음에 내가 병든다는 것도, 우리 부모들로부터 나로 통해서, 그 다음에 일어나는 모든 영적 문제들이 그래서 오는 정신적인 문제를 비롯해서, 오는 모든 병들이 육신 적인 것이라도, 모든 병들이 나만 아닙니다. 똑같이 누구에게 전달됩니까? '참, 지아비 닮아 가지고...' 누구한테? 자녀들한테 다 전달되는 것 아닙니까! 전부 전달되는 것 아닙니까!
새삼스럽게 늘 느끼는 것이지만 나는 자식들이, 우리 후대들, 후대들 이야기합니다 만은, 아이들이 커 가는 것보고,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나도 모르게 '지아비 닮았네!' 이 말이 안 나올 수 없어요. 여러분 아이들도 어디 커 놓은 것을 볼 때에, 제가 어릴 때부터 아이들 커 나가는 것을 쭉 보니까, 심지어는 걷는 것까지 닮아요. 어쩌면 그렇게 걷는 것도 닮는지! 나는 그걸 보면서 어쩔 때는 속으로, 돌아서서 웃습니다! 여러분 그대로 영적 문제가 전달됩니다. 그러니까 가문에 고질적인 모든 문제 다 닮아갑니다.
여기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이 다른 길이 없어요. 오직 뭐냐? 대가리부터 잘라야 됩니다. 뭡니까? 그 배경이, 흑암 세력이 그를 붙잡고 있기에 나오는 문제거든요. 흑암 세력의 대가리는 누구입니까? 사단의 역사입니다. 사단의 역사를 깨뜨릴 수 있는 분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 다른 게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 부르고, 그 이름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생명이 사실적으로 내게 이루어지게 될 때에, 우리는 그 이름 부를 때마다 누가 역사 합니까? 성령의 구체적인 역사입니다. 내가 하는 게 아닙니다. 천군 천사를 사실적으로 내게 영적인 역사로 동원하시고, 이 일을 이루어 나가시는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것을 조그만 이해하면 우리는 볼 때마다 뭡니까? '아, 저기에 복음만 증거 되면 되는데...' 이런 뜨거운 마음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이 나오게 되는 그때부터 뭡니까? 사명자가 되는 겁니다. 사명자가 다른 게 아닙니다. 사명자가 별나게 설친다고 사명자가 되는 게 아닙니다. 뭐 말을 잘해서 아닙니다. 하나도 못해도 좋습니다. 이런 것이 나올 때에 조용히 이런 배경가지고 기도하게 되는 그때부터 우리의 기도가 성취되고 응답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여기게 역사 하게 되고 이루어지는 은혜의 역사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6장 9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우리가 기도하는 기도의 첫 번째 문제가 누구를 확인해야 됩니까? 하나님이 아버지시다. 정말 우리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생명의 구체적인 관계가 이루어져야 된다는 사실이 바로 기도의 중요한 사실이요. 또 그 사실 속에서 여러분과 저를, 하나님 아버지로 모시는 순간에 하나님은 그 계획을 이루시는 한복판에 여러분과 저를 세웠습니다. 구원 역사입니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에 적용한다면 전도와 선교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지금 전도해도 되고 안 되고, 선교해도 되고 안 해도 되고, 그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가장 축복된 계획의 한 복판에 이 사실로 여러분과 저를 세웠습니다. 이 일에 여러분과 저를 오늘도 인도하실 것이고, 내일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확실한 보장 가지고 그때에 뭔가 성취된 말씀 때문에 나오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역사요, 그것이 따라 올 때에 기적이라고 볼 수도 있고, 그때마다 우리는 겸손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 나올 것이 나왔구나! 말씀이 성취되는 구나! 감사합니다!' 이렇게 해야 되지, 뭘 '팔짝팔짝' 뛰고, 또 뭐 '나왔구나!' 그러고 '보인다, 보인다!' 그러고, 그렇게 할 것이 없어요.
그래서 그 다음에 여러분 이해가 되어야 될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 성령의 역사를 오늘 좀 냉철하게, 너무 역설적이기 때문에, 혹시 여러분이 이상하게 뭔가 갈등이 올지도 모릅니다 만은, 잘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늘 시간 있을 때마다 그런 내용을 드렸죠. '성령이 임하신다!' 그것은 구원을 말합니다. 구원의 내주입니다. 신자들에게 받은 축복 아닙니까! 그게 '성령의 내주다!' 이게 구원이요, 생명의 역사입니다.
그 다음에 반드시 성령이 내주 하시면, 성령이 가만히 내 안에 들어앉아서 가만히 있습니까?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 인도하시는 데로 인도되어 따라가게 되면 반드시 뭐가 나옵니까? 사건의 역사가 나옵니다. 이걸 기적이라 그럽니다. 성령의 인도하시는 속에서 응당히 나오는 결과가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면 그 축복과 은혜의 역사로 나오게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 성령의 인도 받는 이런 일들이 많은 경우 중요하기 때문에 오해가 되어 있어요. 그래서 어떤 오해냐 하면,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에 있다! 하나님의 성령이 내 안에 있다!'인도하실 것 아닙니까! 인도하시는, 우리는 따라 가려고 보니까 어떤 생각을 했느냐 하면, 성령이 내 생각도 내 인격도 다 없애버리고 성령께서 막 자기 마음대로 '나를 강권적으로 인도해 달라!' 이런 식으로 기도할 때가 많아요.
그래서 옛날에 우리가 기도할 때에, '성령이여 강권적으로 역사 해 주옵소서!' 그게 전부 이상한 기도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이 강권적으로 내 의지와 내 생각을... 강권적으로 역사 하신다는 그 말이 '잘못되었다! 틀린다!' 그 게 아니고, 우리 이해가 틀렸어요. 그게 뭐냐? '내 생각과 내 의사 다 무시해 버리고, 당신이 막 강제로, 마음대로 한번 해 달라!' 그런 이야기거든요. 물론 그 배경에 맞는 부분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잘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모르게 무슨 생각을 했느냐 하면요. 어떤 사건과 일들을 인도해 가는 과정에서 뭘 생각하느냐 하면, 이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때에 뭐라고 그러느냐? '나는 생각도 안 했는데, 나는 하려고도 안 했는데, 성령이 막 강제로 나를 여기까지 왔다!'고 그러거든요. 그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여러분 의사와 여러분 결정하고 싶어하는 뜻과 상관없이 강제로 이끌어 간다!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여러분을 통해서, 여러분이 결정하고, 여러분이 좋아하게 하시고, 여러분들이 결정해서 일해가게 하십니다.
만약에 그 사람들이 무슨 일이 안되고 잘못되면, '막 나는 안 하려고 그랬는데, 하라고 끌고 가 가지고...'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는, 자기도 모르게 핑계하려고 하는, 그런 배경이 그 안에 깔려 있습니다. 잘 되면, '봐라! 내가 성령의 인도 받아서 잘 안 했냐!' 이런 식이고, 아니면 뭐냐? '내가 안 하려고 그랬는데, 나하고 상관없다!' 이런 식으로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는 그 배경도 거기에 깔려 있어요.
여러분 잘 알아야 합니다. 성령이 임하시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성령이 충만하면 할수록 받아합시다. "나는 맨 정신이 된다!" 이 말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막 정신 없이 끌려가는 게 아니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수록 여러분과 저는 맨 정신이 돌아와야 합니다. 정확하게 사건 앞뒤를 보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정확하게 생각과 마음이 정확하게 지혜를 가지고 총명을 가지고 판단하고 인도 받는 눈이 열리는 것이 성령의 인도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기도할 때에 빌립보서 4장 6절, 7절이 그 말 아닙니까! '감사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가면, 그리하면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뭐라 그랬습니까?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성령이 마음과 생각을 지키십니다. 기도응답이요, 성령 역사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상황과 어떤 사건에 부딪혔을 때에, 주제 파악을 잘해야 됩니다. 내가 설자리에 잘 서야 되고, 내가 말할 때에 말할 수 있어야 되고, 내가 말 안 할 자리에는 안 해야 되고, 그래서 정말로 정확하게, 이 순간에, '내가 이 시점에, 말해야 되겠다! 이 시점에 말하지 않아야 되겠다!' 주제파악을 잘해서 하나님의 지혜로 인도 받는 눈이 열려야 됩니다.
말 안 해도 되는데 가서 아무데나 말하고, 이건 뭐 '강구벌레가 달라붙는다'고 말하던가 그런데... 이것이 '성령의 인도다!' 아닙니다. 성령의 인도는 주책없는 짓이 성령의 인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정말 말할 때에 말하고, 설 때서고, 갈 때가고, 앉을 때에 앉을 수 있는 이런 정말 냉철한 의지와 지혜와 총명으로, 판단할 것을 정확하게 판단하는, 마음과 생각으로 인도 받는 것이 성령의 인도다! 기본적인 것입니다. 이것을 잘 이해를 하셔야 되요. 물론 때에 따라서는 혹시 그런 것이 없다고는 할 수 없어요. 그러나 거의 이것이 안 될 때에 다른 요소가 나옵니다.
말하자면 나도 모르게 자꾸 뭐 이끌려 가는 것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만은, 1차 적으로 나는 그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성령의 인도가 아니다! 왜? 우리가 잘 아는 데로, 요나가 하나님을 떠났을 때에, 그래서 뭔가 도망을 하려고 그러니까, 자기 의지가 그런 속으로 빠져들어서, 이미 벌써 다른 인도를 안 받습니까! 그때에 자기도 모르게 끌려갑니다. 마침 뭐가 나왔어요? 다시스로 가는 배가 딱 있었어요. 냉큼 올라탔어요. 그게 죽는 길이었습니다. 여러분 자기도 모르게 뭔가 막 끌려가고, 냉큼 올라타고 이끌려 가거든, '죽는 자리에 왔구나!' 그런 자리에 서 있거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리 흑암의 세력은 물러갈지어다! 맨 정신 차리게 해 주옵소서!' 정말 정확하게 내가 하나님 앞에... 그래서 여러분 생각 많은 사람들, 그 생각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도 속에 이끌려야 된다는 것을 오늘 말씀을 바로 붙잡아야 되겠습니다.
말씀을 하나 더 드리고 마칩니다. 그게 뭐냐하면, 그러면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 앞에 정확한 성령의 인도 받도록 하기 위해서 뭘 해 되느냐? 그래서 여러분 뭡니까? 기도해라! 이것을 기도라고 할 때에, 기도를 보통 이제 한번하고 끝난다는 게 아니고, 오늘 여기에 본문 말씀처럼 지속적인 기도! 반대가 올 수가 있고, 환경의 제재를 받을 수 있고, 이럴 때도 지속적인 기도! 그것이 성령의 인도 받는 일에, 또 그것을 가지고 마음과 생각을 인도 받는 길에, 중요한 내용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핵심에도 그런 이야기를 해 주었어요. 이걸 구체적으로 뭐라 그랬느냐? '개인 예배를 드려라!' 그랬어요. 개인 예배! '개인기도'라 그러니까, 기도를 한다고 하니까! 기도 자체를 못하게 하는 것이 악한 흑암에 역사거든요. 그러니까 기도를 못해요. 기도는 일단 하면 역사가 나옵니다. 기도를 아예 못하도록 만들어요. 여러분 기도를 1분씩만 해도 역사 합니다. 1분도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 흑암의 역사거든요.
그래서 기도라 그러지 말고 여러분 예배라 그래서, 구체적으로 한번 '정식 예배를 한번 해 보라!' 그랬습니다. 예배할 때에 사도 신경으로 시작해 가지고, 그 다음에 찬송 부르고, 그 다음에 기도하고, 기도를 오래할 것도 없고 여러분들이 마음에 원하는 데로 기도하고, 그 다음에 또 마지막 마칠 때는 주기도문으로 마치고 이렇게 예배를 드려요. 하루에 한번이라도 좋으니까! 이 시간을 가지게 될수록 그 다음에 따라오는 문제가 생기게 되요.
그 다음에 이 예배가 이루어지게 되면, 예배가 이루어지는 순간, 순간 여러분 그로 통해서 마음과 생각이 받아합시다. "맨 정신이 된다!" 성령의 인도 받을수록 하나님의 역사는 '맨 정신이 된다!'하는 그 배경 속에, 여러분 마음과 생각에 편안함이 있어야 됩니다. 뭔가 이것이 안 오면, 마음과 생각이 평안함이 안 오면, 편하지 않는 그 문제 따라서 뭔가 결정하게 되고, 인도 받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 걱정이 내 마음을 꽉 누르고 있습니다. 걱정에 의해서 내 결정이 영향을 받아버립니다. 마음과 생각이 어떤 환경에서도 이것에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내가 기도하는 그 기도 속에서 성경에 사실적인 인도를 받을 수 있죠.
그러면 그것이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다음에 기도하게 될 때에 24시간 정시기도가 이루어지고,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 다음에 24시간 기도 그럴 때에, '24시간 기도한다!' 그러면 또 안되어요. 뭐냐? 받아합시다. "생각을 기도로!" 이게 중요합니다. 생각이 나올 것 아닙니까! 여러분들이 사업하는 사람은 문제 생기면 계속 생각이 나옵니다. 웃다가도 생각이 나오고, 웃다가도 갑자기 사람이 우울해지고, 왜? 어떤 문제가 오면 그 생각이 계속 지배하고 있거든요.
그러면 뭐가 오느냐? 생각 속에서 계속 스트레스를 받으면 사람이 병이 나요. 그러니까 생각을 기도로 바꾸지 아니하면, 어느 누구도... 생각에 스트레스를 안 받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까 이 땅에 사는 사람이 다 어렵죠. 좋은 일하고, 일 많이 할수록 여기에 부딪혀 버립니다. 이때에 생각이 딱 들어오는 순간에 뭐로 바꿉니까? 기도로 바꿉니다. '하나님, 이 생각 하나님의 손에 맡깁니다. 하나님이 인도해 주옵소서!'
예를 들어서 여러분 그 자식들에 대해서, 어려운 문제에 부닥쳤다! 그러면 늘 부모의 마음에는 생각이 쑥 들어옵니다. 생각이 좋은 일을 할 때도 들어오고, 막 웃다가도 들어오고, 울다가도 들어오고, 일할 때 들어오고, 안 들어옵니까! 들어오는 순간, 순간 '하나님!' 들어올 때마다, '하나님의 손에 맡깁니다! 하나님이 이들을 축복하시고, 인도하실 것을 믿습니다! 주님이 지금 작업하시는 줄 믿습니다! 주님의 손에 맡깁니다!' 생각할 때마다 바꾸어 버립니다. 그러면 여러분 사업도 직장도 여러분 삶과 생활에 전부 이렇게 나가면 엄청나게 나오는 결론이 뭐냐하면, 평안함이 옵니다.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뭐가? 하나님의 평강이...
그러면 그때부터 여러분 닥치는 모든 문제와 사건이 어떤 영향아래 놓여있지 않습니다. 냉철하게 평가하고, 판단하고,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 안 그러면 걱정이 앞서서 생각을 바꾸어 버립니다. 판단을 바꾸어 버립니다. 염려가 앞서서 다른 것으로 바꾸어집니다. 그래서 혹시 여러분들이 무슨 결정이나, 무슨 성령의 인도 받는다고 그런 생각을 할 때에, 하나님 앞에 계속해서 기도하는 중에 마음에 평강이 있을 때에 결정을 하십시오. 기도를 '뭘 막 달라고 기도하다가 평안해졌다! 응답이다!' 그 말이 아니고, 내 마음과 생각이 평안할 때에 정확하게 놓고 평가하고, 판단하고 결정하십시오. 성령의 인도 받는 길입니다. 이 사실을 바로 붙잡아야 됩니다.
그래서 이 땅에 사는 여러분들, 이제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이 성취되는 놀라운 순간 순간이 우리 앞에 지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아마 한 주간의 삶에도 여러분 개인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참 평안과 안식이 이루어진다고 그럴 때에, 비로소 건강이 나오고, 여기에 구원의 기쁨이 나오고,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 속에 확인하는 만큼 감사가 나옵니다. 그 속에서 결정하고, 결단하는 사건들마다 성공할 수 있도록 결정하고 축복 받을 수 있는 일을 결정하게 되고, 그게 안 될 때에 우리도 모르게 스트레스 받아 가지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일에 결정합니다. 성령의 인도가 안 되죠. 성공할 수밖에 없는 일로 결정하면, 성공하는 것이 당연하잖아요.
말씀이 성취되었다! '아, 올 것이 왔구나!' '아, 내가 또 결정할 자리에 왔구나!' 그러지 말고, 성취되면 그냥, '이 과정이구나! 올 것이 왔구나!' 감사함으로 하나님 앞에, 더욱 겸손하게, 더욱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통해서 세계 복음화라는 귀한 계획 속에서 우리에게, 그 계획을 성취해 나가는 과정 속에, 하나 하나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가 나올 때에 겸손해지고, 감사하고, 평안해 질 수 있도록 오늘 말씀 통해서 한 주간도 주의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