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비추는 곳에 [001]
짙은, 머언 추억 속으로 빠져들어가게 끔 이끄는 아주 짙은 검은색ㅡ 그것이 루시의 머리칼의 색.
분명 흔한 색은 아니다. 눈부시게 빛나는 금빛, 흔하긴 하지만 가장 서정적인 갈색, 활활 불타오르는 듯한 붉은색, 보고 있기만 해도 시원해지고 바다소리가 들리는 듯한 파란색, 그리고 신비스러움의 절정인 은색… 그 어떤 색보다도 흔하지 않았다. 내가 가진 검은색은ㅡ
“야! 마녀! 오늘은 무슨 요술을 부릴거냐?”
“저번처럼 도망가기만 해봐! 이 마녀야!”
마녀, 요녀… 항상 루시의 뒤에 따라오는 말들이다. 올해로 10살이 되는 루시는 이런 놀림과 욕설들에 익숙해지며 커왔다. 부모님의 얼굴은 한번도 본 적도 없는 고아인데다가 한 가난한 농부부부에게 얹혀사는 처지에 그들에게 이런저런 걱정과 불만을 털어놓을 만큼 루시는 뻔뻔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보란 말야!”
급기야 아이들은 돌까지 던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루시는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유유히 돌을 피하며 제 갈길을 갔다.
몇년동안에나 맞아온 돌세례와 욕짓거리에 늘어나는 것은 민첩성과 맷집, 그리고 인내심 뿐 이었다. 특히 인내심은 루시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거의 경지에 오를 정도로 대단했다. 또래아이들은 물론이고, 보통 어른들도 갸뿐히 넘길 정도로 인내심이 대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인내심이란 것은 별로 쓸 데가 없었다.)
“그러니까, 사오라는 것은 당근이랑 오이랑… 음, 호…? … 그 다음 글자가 뭐지?”
루시는 그녀가 신세를 지고 있는 농부네에서 시킨 심부름을 검토하면서 빠르게 걸었다. 속력이 빠를 수록 아이들은 제대로 돌을 조준하지 못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어쩌다 하나 둘 맞는 다 해도, 그것은 10살 아이의 힘으로 던진 돌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제대로 맞지 않는 이상 그다지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아이 참, 글자를 좀 제대로 써주셨으면 좋을텐데.”
농부네의 꼬부랑 글씨를 한자한자 짚어가며 열심히 해독하는 루시에게 돌 하나가 또 날라왔다. 그 돌은 평소와는 다르게 무척이나 빨랐기 때문에 루시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머리에 명중했다.
“악!”
루시는 꽤 아픈 모양인지 머리를 감싸쥐고 주저앉았다. 그리고 던진 쪽을 쳐다보자 항상 그녀를 놀렸던 아이들이 새총을 들고서 실실 웃고 있었다.
“헤헤헤, 이거 꽤 잘 맞는데. 역시 솜씨가 좋다니까, 데니 그 녀석은ㅡ”
“항상 집에 쳐박혀있는 애송이치고는 좋은 솜씨지!”
낄낄거리면서 웃는 아이들. 루시는 항상 그랬듯이 그 아이들을 무시하고는 일어섰다. 그리고 치마에 묻은 먼지를 몇번 탈탈 털고 나서 가던길을 재촉했다. 하지만 그녀는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저 새총이 있는 이상 돌을 더 많이 맞아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
예상대로 돌은 쉬지않고 계속 날라왔다. 루시는 돌을 피하랴 걸음을 재촉하랴 글자를 판독하랴. 세가지 일을 동시에 하느라 무척 버거웠다. 하지만 그 일 중 어느 하나도 그만 둘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저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저 새총을 만들었다고 하는 ‘데니’ 라는 아이를 원망하는 것 뿐이었다.
“…… …아!”
요리조리 피하던 루시가 발 밑으로 날라오는 돌을 피하다가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상처는 무릎에 난 작은 생채기 뿐이었지만, 아이들이 던지는 돌로 인해 피가 난 것은 처음이라 그녀는 무척 당황했다. 허나 그녀가 넘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계속 새총으로 돌을 던져댔다. 루시는 자꾸 날아오는 돌에 신경질이 나, 그만하라고 말하려는 차… …
“그만해!”
그녀가 하고 싶었던 말을 저 멀리서 갈색머리의 남자 아이가 대신 말해주었다. 제법 고집스럽게 생긴 그의 얼굴속에 짜증이 서려있었다.
“뭐야, 애송이 데니아냐?”
그 아이가 루시가 계속 원망했던 데니라는 아이인 모양이었다.
“어이, 애송이ㅡ! 네가 만들어 준 새총 잘 쓰고 있다! 근데 무슨 일? 애송이님께서 왜 집 밖을 나오셨을까나?”
“내가 언제 그 새총을 사람을 쏘는 데 쓰라고 그랬지?”
그 데니라 하는 아이의 말은 꽤 위협적이었다. ‘애송이’ 타령을 하던 아이도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아이보다는 데니라 하는 아이가 훨씬 더 키가 컸기 때문이리라.
“뭐…뭐야… 네가 만든 새총이잖아!”
다른 아이가 꽤 용기있게 소리쳤다.
“나는 그것을 사람을 쏘는데 쓰라고 한 적이 없어. 한번 더 이런일이 일어나면, 새총을 모두 뺏기는 건 물론이고 내게 혼날 줄 알아!”
그의 말에 데니라 하는 아이가 주먹을 흔들면서 말했다. 아이들은 침을 그가 흔드는 주먹을 보며 나살려라 줄행랑을 쳤다. 그러자 데니라 하는 아이는 표정을 풀고 루시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일어나.”
루시는 그 손을 매섭게 쳐다보다가, 자신 혼자서 손을 탁탁 털고 일어났다. 덕분에 데니라 하는 아이가 내민 손이 무색하게 되버렸다.
“병주고 약주는 노릇이니? 나 혼자서 일어날 수 있어.”
“난 데니이르야. 데니이르 잇슈.”
얼렁뚱땅하게도 자기 소개를 하는 데니이르의 모습에 루시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그를 멍하게 쳐다보다가, 아직도 내밀고 있는 그의 손을 잡아 자신도 소개를 했다.
“난 루시. 성은 없어.”
그쪽에서 먼저 이름을 밝힌 이상 밝히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데니이르의 태도에는 전혀 악의가 없어보였다.
“내 새총때문에 다쳤다니 유감이야. 진심으로 사과할게. 그게 사람에게 쓰일줄은 꿈에도 몰랐어.”
“동물에게 쓰여서도 안돼.”
루시가 단호히 말하고는 뒤돌아섰다. 그리고 제 갈길을 가려고 하는데 뒤쪽에서 데니이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루시! 이거 네 것 아니야?”
데니이르는 무언가가 적힌 종이를 흔들고 있었다. 루시가 얼른 치마 주머니에 손을 넣어 심부름 종이를 찾아보았다. 얌전히 있어야 할 종이가 보이지 않았다. 루시는 얼른 데니이르에게 뛰어갔다. 데니이르가 들고 있던것은 역시나 루시가 잃어버릴 뻔 한 종이었다.
“아, 고마워ㅡ”
루시가 짤막하게 고맙다는 표현을 했다. 데니이르는 한참동안 종이를 들여다보다가 루시에게 건내주었다.
“혹시 이 종이를 쓴 사람, 프렌티 출신 아니니?”
… … ……… ……………
[“아주머니와 아저씨는 어느 나라 출신이세요?”]
[“프렌티란다. 그 곳은 정말 풍요로운 곳이었지.”]
[“그런데 왜 이 곳, 크렌치노로 오셨어요?”]
[“내가 한 말이 과거형이었잖니? 전쟁이 일어나서 폐허가 되버렸기 때문이야.”]
… … ……… ………… … ………
분명 프렌티가 맞았다.
“그걸 어떻게 안거야?”
루시가 눈이 휘둥그레지며 묻자 데니이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글씨 뒷부분이 약간 꼬불거려서 알았어. 프렌티 말은 꼬불거리는게 특징이거든. 에… 그걸로 보건데, 여기에는 당근, 오이, 호박 이라고 써져있는 것 같아.”
“아, 호박이었구나! 호박찜을 해주시려는 모양이야! 얼른 사러가야겠어! …얘얘, 정말 고마워.”
“데니이르야.”
데니이르가 싱긋 웃으면서 자신의 이름을 한번 더 밝혔다.
“그래, 데니이르. 고마워, 데니이르.”
저녁에 자신이 좋아하는 호박찜이 나올 것을 생각하니까 저절로 신바람이 났다. 루시는 한결 가벼운 발걸음으로 호박을 사러 상점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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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조금 길게 쓴 것 같습니다.
염치없이 또 새로운 소설을 시작했는데요.
아직 틀이 잘 잡히지 않았는데 무턱대고 올리고 봅니다.
수정은 차차 후에 해야 할 것 같아요.
지적, 꼬릿말은 감사히 받도록 하겠습니다(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