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먼 데 하늘이 꿈꾸려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제주도 사람들의 심성 속에 잡은 7월의 이미지는 ‘청포도가 익어가는 고향’에 가깝다. 청포도가 익어가는 집도 있지만 주업은 감귤과 감, 딸기 감자 고구마 따위이다. 들판에 가면 복분자(산딸기)가 널려있어 우리 어릴 때는 이것만 주워 먹어도 배가 물렀다.
제주시 아라동에 속해 있는 가시나물(한자로는 寧坪上洞, 영평이란 지명은 일본 식민지 시절 명명된 것)은, 말이 제주시이지 잡음하나 안 들리는 아득한 산골구석 같은 느낌이 드는 그런 마을이다. 가시나물 주변은 울창한 숲과 과수원으로 온통 진초록색 일색이다. 귤꽃 향기에 고향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숲 속 마을...도심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발전하였지만 가시나물은 그동안 그린벨트로 묶여있어 결혼해서 살림을 치릴 집 하나를 마음대로 지을 수 없었다. 그 덕분에 가시나물은 교외의 오랜 전원적인 풍치를 간직하고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맑고 신선한 공기와 정신의 안식을 제공한다.
시중심부에서 5.16도로를 따라 한라산 쪽으로 5km정도 가다가 아라국민학교의 맞은편 동쪽길로 5분쯤 접어들면 가시나물(영평상동)이 나타나고, 여기서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1.3km정도 내려가면 영평하동이 나타난다. 시내에서 택시를 타면 15분 정도나 걸릴까.
불과 10년전만 해도 가시나물은 교통이 불편해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오지였다. 그래서 우연히 이 마을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은 제주(濟州)시에도 이런 마을이 남아있는가 하는 놀라움도 갖는다.
‘가시나물’이란 마을 이름은‘곳(수풀) 남(아래 있는) 마루(마을)’이란 뜻이다. 동네가 셋으로 나눠져 있다. 맨 아래는‘황소왓’, 중간 동네부터‘가시나물’이라고 하지만, 맨 윗동네를 따로 ‘섯굴치’라고도 한다. 나주김씨 종가는 거대한 조록나무가 자라는 맨 윗동네에 있다. 알동네 마을로 들어가는 길 주변부터 온통 방풍림과 잡목림이 울창하고 군데군데 계곡이 시선의 변화를 끌면서 한층 전원적인 느낌을 갖게 한다.
초여름을 맞은 가시나물은 온통 짙푸른 색으로 덮여있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자귀나무 으름덩쿨 등이 서로 엉켜 6월의 햇볕을 받아 짙은 향취를 풍긴다. 야트막한 언덕을 의지 삼아 자리잡은 나무 사이로 겨우 인가가 보인다. 고향을 떠난 이들의 마음속에는 돌아가고 싶은 곳. 가시나물도 그런 곳이다. 아름다운 마음을 만나면 한없이 머무르고 싶어 “에이, 여기 머물러 버리자.” 가시나물도 그런 상념이 머리를 스치는 곳이다. 실제 이곳에 불현듯 들렸다가 머물러 버린 이들이 이곳 인구의 반을 넘는다.
한라산 기슭에서 발원하여 너른 들판을 굽이돌아 화북내(禾北川)으로 이어지는 무드내는 곳곳에 다른 모습의 계곡을 만들고 있다. 마을 중심부를 상하로 내려 나가는 무드내 위에는 넓은 다리, 좁은 다리들과 ‘배고픈다리(洗越橋)’도 걸쳐있다. 나무가 우거지고 계곡과 샘이 있으니 절 또한 많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가시나물을 나무와 다리, 그리고 절이 많은 삼다(三多)의 마을이라고도 한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뽑혔는가. 4.3사건에 소개(疏開)되어 폐허가 되어버리고 살고 있던 권당들은 죽거나 흩어져 있다가 다행히 1955년 경 마을은 재건되었고 가목 조록나무는 살아남았다. 나주 김씨 종가(제주시영평동2061의 1번지)의 가묘터에는 종문의 번창을 상징하듯 400년 수령을 자랑하는 조록나무(제주도 지방기념물 제21호)가 생생하게 자라고 있다. 이 나무는 자생수가 아니고 그 종손이 가시나물에 들어오면서 식수한 나무여서 5년전 제주도종친회가 ‘가목(家木)’으로 정해져 있다.
이 나무와 가보(家譜)와 동네 금석문에 미루어 보면 가시나물은 지금부터 460 여 년 전에 설촌된 것으로 보인다. 지금 이 마을에는 현재 상.하동을 합해 260여 가구에 1천1백 여 명쯤 살고 있다. 이들의 반쯤은 나주김씨이거나 나주김씨와 연관된 가족들이다. 예부터 향교에 출입하던 유림이 많아 반촌(班村)이라는 긍지와 자부심 또한 대단했던 마을이지만, 이제는 화엄사 천화사 영불암 등의 사찰이 눈길을 끄는데, 최근 들어 도심과 가까우면서도 산천의 분위기가 좋아 수 십 개의 사찰이 들어서고 있다.
가시나물에서도 젊은 세대들이 자꾸만 도심으로 빠져 나간다. 그래서 자손은 시내로 내려와 살고 어른들은 마을을 지키는 아픔을 이 마을은 안고 있다. 마을의 젊은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등진다면 그린벨트 속에서의 도시인들의 휴식은 너무 몰염치한 것이 아실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젊은이들의 고향을 떠나지 않게 하면서도 그 푸름을 잃지 않게 하는 지혜는 없을까.
비록 나 역시 이러한 고향으로부터 '등짐'을 한 탓이라지만 '77드림' 제 식솔들 또한 자신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소싯적 기억들을 더듬고 쓸어내리는 애틋한 마음은 한시도 고향을 멀리할 수 없느 '태솔흔 땅'의 정서가 가득하기 때문일 것이리라......
첫댓글 순석아! 너 영평아이구나.... 나 모슬포 촌놈.................ㅋㅋ
초여름 가시나물, 에이 여기 머물러버리고싶은 곳... 글을 쭈욱 읽으면서 가슴이 아리다. 마음에 깊은 초록물이 드는 것 같고..가시나물 오래도록 살아온 이들의 기운,두고두고 오래오래 영원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