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려조에서의 행적
태조의 둘째 아들로 이름은 경(■), 초명은 방과(芳果),자는 광원(光遠)이다. 어머니는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韓氏)이고 정비 정안왕후(定安王后)는 판예빈시사 증문하좌시중 월성부원군 (判禮賓寺事 贈門下左侍中 月城府院君) 김천서(金天瑞)의 딸이고, 슬하에 15군, 8옹주를 두었다.
성품이 순직, 근실하고 지행이 단엄, 방정하면서 무략이 있었다. 일찍부터 관계에 나가 1377년(우왕 3) 5월 이성계(李成桂)를 수행하여 지리산에서 왜구를 토벌하였고, 1388년에 순군부만호(巡軍副萬戶)로서 도만호(都萬戶) 왕안덕(王安德) 등과 함께 국정에 폐해가 많았던 염흥방(廉興邦)의 옥사를 국문하였으며, 1389년(창왕 1)7월 절제사(節制使) 유만수(柳曼殊)와 함께 해주에 침입한 왜적을 방어하였다.
1390년 1월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한 공로로 추충여절익위공신(推忠礪節翊衛功臣)에 책록되었고,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올랐다. 그해 6월 자혜윤(慈惠尹)으로서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윤사덕(尹師德)과 함께 양광도(楊廣道)에 침입한 왜적을 영주(寧州) 도고산(道高山)아래에서 격파하였고, 이어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삼사우사(三司右使) 등을 역임하였다.
2. 타의로 오른 왕좌
조선왕조가 개창되자 1392년 영안군(永安君)에 봉하여지고 의흥친군위절제사(義興親軍衛節制使)에 임명되었으며, 그 이듬해 의흥삼군부 중군절제사(義興三軍府 中軍節制使)로 개수(改授)되는 등 병권에 관여하였다.
1398년 8월 정안군 방원(靖安君芳遠)이 주동이 된 제1차왕자의 난이 성공하면서 세자책봉문제가 제기되자 [당초부터 대의를 주창하고 개국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업적은 모두 정안군의 공로인데 내가 어찌 세자가 될 수 있느냐?]라고 하면서 완강하게 거절하였으나 정안군의 양보로 결국은 세자가 되었다. 그 1개월 후 태조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태조의 양위는 자의에 의하였다기보다는 타의에 의하여 반강제적으로 이루어졌지 않았느냐는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정종은 자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정안군의 양보로 즉위하였으므로 무력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정종조의 정치는 거의 정안군의 뜻에 의하여 전개되었다.
3. 불안한 왕권하의 정치
1399년(정종 1) 3월 개경으로 천도하였고, 같은해 8월 분경금지법(奔競禁止法)을 제정하여 관인(官人)이 권귀(權貴)에게 의존하는 것을 금지하여 권위를 약화시켰으며, 1400년 2월 이른바 제2차 왕자의 난을 계기로 정안군을 세제로 책봉하였다.
그해 4월 정당문학 겸 대사헌(政堂文學兼大司憲) 권근(權近)과 문하부좌산기상시(門下府左散騎常侍) 김약채(金若采) 등의 상소를 받아들여 사병(私兵)을 혁파하고 내외의 병권을 의흥삼군부로 집중시켰다.
계속하여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郎贊成事) 하륜(河崙)에게 명하여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를 의정부로 고치고 중추원을 삼군부(三軍府)로 고치면서, 삼군의 직장(職掌)을 가진 자는 의정부에 합좌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의정부는 정무를 담당하고, 삼군부는 군정을 담당하는 군․정분리체제를 이루었다. 이러한 개혁은 왕권의 강화를 위한 것이었고 방원의 영향력하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하겠다.
또, 1399년 3월 집현전을 설치하여 장서(藏書)와 경적(經籍)의 강론을 담당하게 하였다. 그해 5월 태조 때 완성된 《향약제생집성방 鄕藥濟生集成方》을 편찬하였고, 11월 조례상정도감(條例詳定都監)을 설치하고, 1400년 6월 노비변정도감(奴婢辨正都監)을 설치하여 노비변정을 기도하였다.
4. 방원에게 양위하다
재위시에도 정무보다는 격구(擊毬) 등의 오락에 탐닉하면서 보신책을 삼았지만, 왕위에서 물러난 뒤에는 상왕(仁文恭睿上王)으로 인덕궁(仁德宮)에 거주하면서 격구․사냥․온천․연회 등으로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였으며, 태종의 우애를 받으면서 천명을 다하였다.
1419년(세종 1)12월 온인공용 순효대왕(溫仁恭勇 順孝大王)의 시호를 받았고, 1420년 4월 중국으로부터 받은 공정(恭靖)의 시호를 더하여 공정온인 묘호(廟號)가 없이 공정대왕(恭靖大王) 1681년(숙종 7) 정종(定宗)의 묘호를 받았다. 능호는 후릉(厚陵)으로 풍덕에 있다.
定宗大王의 생애
공민왕이 즉위한 뒤 대륙의 원제국(元帝國)은 점차 허물어져갔고, 고려 역시 계속되는 개혁정치에도 불구하고 원과 연결된 정치세력의 움직임으로 인해 그 효과를 보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공민왕은 과감하게 원과의 관계를 끊으면서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했다. 원의 기황후(奇皇后)와 연결되었던 기철(奇轍) 등의 기씨 일가를 평정함과 동시에 쌍성(雙城 : 영흥부)을 토벌하여 나름대로 국세(國勢)를 떨치기 시작했지만 잇따른 개혁의 실패와 권문세족(權門勢族)의 정치․경제․사회 등 전반에 걸친 침탈과 탈점, 폭정으로 고려는 점차 왕조 말기적인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이렇게 정종대왕(이하 정종이라 함)이 태어난 해인 1357년(고려 공민왕 6)은 번영과 고난을 겪으면서도 근근히 유지되어 오던 고려의 400년 왕업이 허물어져 가던 무렵이었다. 또 이 해에는 왜구가 개성에까지 침입하여 흥천사(興天寺)에 있는 충선왕(忠宣王) 및 계국대장공주(줔國大長公主)의 영정을 가져가는 등 왜구가 극성을 부리던 시기였다. 한편으로 중외학교(中外學校)가 수리되고 성균관을 동대문 밖에 옮겨서 신축하였으며 또 대사성(大司成)의 관제를 신설하여 성리학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당시 국내외의 정황이 어수선한 틈속에서 고려의 쌍성총관부 공격 때에 내응하여 원나라의 세력을 축출하는데 큰 공을 세우고 후에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로 임명된 할아버지 리자춘은 동북면 방면의 실력자로 그 가세를 떨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 태조의 아버지 환조(桓祖) 휘 자춘(子春)은 그 동안 쌓아온 지위와 명망을 업고 북방의 실력자로 떠오르게 되었고 그의 아들로서 훗날 조선을 건국하는 태조는 환조가 쌓은 이 같은 배경을 충분히 활용하면서 무예와 병서, 그리고 경서(經書) 등을 두루 익혔다. 그리고 그는 당시 이미 촉망받는 젊은이로 북방의 별로 떠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바로 천명(天命)으로 받은 군주(君主)의 운명은 자신의 노력이 없었다면 허사로 돌아갔을지도 모를 터인데 태조는 이미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1356년(고려 공민왕 5) 태조는 당시 22세였는데 이 때 그는 그의 탁월한 기마(騎馬)와 격구(擊毬) 솜씨 등을 바탕으로 단오절(端午節) 격구경기에서 놀라운 기예를 보여 공민왕의 주목을 받았고 이후 비로소 벼슬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무인으로서의 기예와 출중한 용병술로 용맹을 떨치게 된다. 이 해 함흥(咸興) 귀주동(歸州洞) 사저에서 기거하던 그의 부인 한씨(韓氏)는 둘째 아이를 잉태하였다. 태조의 출사(出仕)와 아기의 잉태라는 겹경사는 집안 사람들 뿐만아니라 인근의 사람들 모두의 부러움을 샀다. 1357년(고려 공민왕 6) 6월을 지나면서 한씨는 만삭의 몸으로 항상 만사에 신중하고 몸가짐을 삼갔다. 그리고 7월 초하룻날 한씨는 마침내 고성을 울리는 아기씨를 순산하게 되었으니, 이 아기가 바로 훗날 태조를 옆에서 수행하면서 왜구를 물리치고, 태조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되는 태조의 2남 방과(芳果)인 것이다. 왕위에 오른 뒤 그는 휘를 ‘경(■)’이라 하였으며, 자(字)는 광원(光遠)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