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읽었던 책 요약입니다. 실패한 것이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는 디나카가 부럽습니다.
멋지다 다나카
1등도 꼴찌도 해본 적 없는평범한 사람들에게 보내는 메시지!학사 출신, 대기업 낙방, 만년 주임….전 세계를 놀라게 하고 일본 열도를 감동시킨한 노벨상 수상자의 이야기!
▣ 저 자 구로다 다쓰히코
▣ Short Summary 2002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여 세계를 놀라게 한 '시마즈 제작소'의 주임 연구원 다나카의 평전. 친척의 양자로 입양되어 자란 어린 시절, 과묵하고 집요한 성격 때문에 외곬으로 통했던 학창 시절, 연구실 근무가 좋아 승진 시험도 치지 않았던 회사 생활들을 찬찬히 훑으며, 한 노벨상 수상자의 소탈한 인간적 면모를 묘사하고 있다. 아울러 노벨상으로까지 이어진 세기의 대발견을 일개 사원 신분이 해낸 배경과 노벨상 수상과 연관된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이 펼쳐지며, 과학 강국을 있게 한 일본 정부와 기업의 저력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다나카 고이치는 천재도 아니고 괴짜도 아니다. 그저 직장 동료처럼, 이웃처럼 평범하다. 그래서 다나카의 이야기는 노벨상 역사에 기록된 여느 천재들의 스토리보다 우리에게 더욱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2002년 10월 9일 오후 6시 15분, 스웨덴의 왕립 과학 아카데미 담당자는 일본에 국제전화를 걸어왔다. 그가 찾는 사람은 교토에 있는 시미즈 제작소 라이프 사이언스 연구소의 다나카 고이치였다.
“당신이 다나카 고이치입니까?” “네, 그렇습니다만….”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일을 마치고 슬슬 퇴근하려던 다나카는 낯선 외국인으로부터 영어로 걸려온 전화에 잠시 당황했다. 뒤이어 ‘노벨상’이라는 단어가 귀에 들어왔고, ‘컨그래처레이션!’이 이어졌으나, 그때까지도 무슨 일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잡음이 섞여 이야기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설마 내가 노벨상을…? 스웨덴에 그와 비슷한 상이 있나보다’라고 반신반의하면서 간신히 감사하다고만 말하고는 일단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몇 분 뒤, 회사 안의 전화들이 일제히 울려 대기 시작했다. TV에 나온 뉴스 속보를 본 사람들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전화를 걸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그제야 노벨상이 그 노벨상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최초의 낭보는 그렇게 해서 다나카에게 전해지게 되었다.
1장 어딘지 조금 남다른 아이
1959년 8월 3일 다나카 고이치는 도야마 현 도야마 시에서 태어났다. 현청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 중심부에 위치한 신가와라마치는 미야모토 무사시의 소설 『반딧불이 강』의 무대가 된 ‘족제비 강’이 흐르고 목가적인 정취를 지닌 옛날 집들이 주욱 늘어선 곳이다.
다나카의 본가는 목공구 판매와 수리를 가업으로 3대째 하고 있었다. 부친 미쓰토시는 술을 즐겼으며 옛날 장인의 기질을 고스란히 간직한 분이었으므로, 늘 부지런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모친인 하루에도 가게의 경리 일을 맡고 있었는데, 월말이 되면 늦게까지 야근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다나카는 미쓰토시 내외의 친아들이 아니었다. 친어머니는 산후 회복이 좋지 않아 다나카를 낳은 후 26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다나카를 맞아들일 때 하루에는 자신의 세 자녀를 불러 앉혀 놓고는 다나카가 새로 집에 들어왔다고 해서 삼남매의 대우가 더 나빠졌다는 불평은 하지 말 것을 아이들에게 일렀다. 다행히 삼남매 모두 다나카가 그런 사실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허물없이 서로 어울려 지냈으며, 다나카는 극히 평범한 사남매의 막내로 성장해 갔다. 다나카가 유년기를 보낸 1960~70대는 전후 베이비 붐과 맞물려 입시 전쟁이라는 말이 생겨났을 만큼 아이들 사이의 경쟁이 치열하던 시대였지만, 미쓰토시 부부는 억지로 공부를 시키지는 않았다. 공부도 어느 정도만 하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여겼고, 다나카가 스스로 알아서 잘하고 있는 한 참견은 거의 하지 않았다.
다나카는 여름방학이면 곧잘 근처의 산과 바다로 어머니와 둘이서 식물채집을 하러 가곤 했다. 그리고 “이건 이름이 뭐예요?”하고 어머니에게 물어본 뒤, 집에 돌아오면 반드시 도감을 보고 확인했다. 다나카는 밖에서 놀기를 좋아했는데 도야마에서는 마음껏 자연을 접할 수 있었다. 톱날을 수리하는 기술을 가진 부친이 주로 한 일은 망가진 톱니들을 하나하나 줄로 갈아 다시 날을 세우는, 끈기를 필요로 하는 작업이었다. 다나카는 이런 아버지의 등을 바라보면서 성장했고, 장인으로서 자신을 일을 대하는 자세를 차츰 배워갔다.
다나카는 싸움 한 번 하지 않아 울면서 집에 돌아온 적도 없고, 공부도 어쨌거나 그렇게 싫어하지 않는 듯 했다. 부모 입장에서 보면 다나카는 그야말로 손 갈 일이 없는 아이였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수업이 끝나면 남자 아이들은 대부분 한데 모여 야구를 했지만 그는 거기에 끼지 않았다.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주위에 휩쓸리지 않는 언제나 싱글벙글 잘 웃는 아이였다. 다나카는 모험을 좋아하는 아이였지만, 한번은 누나 야스코와 함께 영화를 보고 오다가 지름길로 가려는 누나에게 “학교에서 정해 준 안전한 길로만 다녀야 한단 말이야.”하고 고집을 피우는 상당히 고지식하고 얼마쯤은 융통성 없는 면도 있었던 것 같다.
다나카는 학교에서 쉬는 시간이면 책을 읽었고, 집에서는 종이를 가지고 배나 비행기 모형을 만들었으며, 밖에 나가면 전차의 맨 앞자리에 앉아 멍하니 바깥 풍경을 바라보곤 했는데, 어쨌든 혼자서 무언가에 몰두하기를 좋아했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6학년까지 다나카의 담임을 맡았던 분은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한 선생님이었다. 다나카가 화학의 세계에 눈을 뜬 것은 고학년이 된 후의 일이다. 과학 수업 시간의 일이었다. “눈이 내리는 것 같아요!” 비커 안에 정신이 팔려 있던 고짱(고이치의 어릴적 애칭)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붕산을 물에 녹인 뒤 식혔다가 다시 추출하는 실험을 하던 중에 수용액 속에 반짝 반짝 빛을 내는 흰 결정체가 떠오르는 모습을 본 것이다. 그로부터 3개월 뒤 수증기에 시험관을 드리워 물방울을 만드는 실험을 하던 중에 다나카는 또다시 작게 중얼거렸다. “어? 붕산과 똑같네.” 이전 실험과 결부시켜 고체, 액체, 기체라는 물질의 형태 변화를 직감적인 이미지로 이해한 것이다. 이러한 사고가 가능한 아이는 그리 흔치 않다.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던 담임 선생님은 그 자리에서 붕산 실험을 다시 해보이며, 다나카가 알아차린 것을 학급의 다른 아이들에게도 이해시키려고 했다.
6학년이 된 다나카는 양초가 타는 모습을 보면서 연소방식의 원리를 배운 것도 아닌데 ‘한순간 불꽃이 작아진다.’는 작은 발견을 한 적이 있고, 물을 넣은 샬레에 막대 자석을 담그고 바늘을 꽂은 부유물을 띄워 자석의 힘을 관찰하기 위한 수업 도구 제작에 고심하던 선생님에게 물보다 기름의 점성이 강하니까 바늘이 움직이는 것을 천천히 관찰할 수 있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당시 담임 선생님은 흥미롭게 공부할 수 있는 사이언스 매직으로 아이들의 잠들어 있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려 했다. 그리고 이런 풍부한 발상 사례들을 한데 정리하여 더욱더 수업을 활기 있게 만들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다나카는 그 후에도 담임 선생님의 영향을 받아 과학 과목에 커다란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다나카는 중학생이 되어서도 성적이 좋은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1등은 아니고, 반에서 5, 6등 하는 천재형이 아닌 순수한 노력형이었다. 다나카가 고교 2학년이던, 어느 화학 시험 시간 때의 일이다. 시험이 끝나기 10분 전에 다나카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을 나가려고 했다. 담임이 시간이 남았으니 그냥 있으라고 하며 책상을 내려다보니, 답안은 정확하게 작성되어 있었다. 이것은 다나카가 자기 길을 가는 타입임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다. 그리고 얼마 후 대학의 진로에 대해 상담하는 시기를 맞아 다나카는 도호쿠 대학 공학부로 진학 의사를 밝혔다. 선생님은 처음에는 무리라고 이야기를 했다. 그것은 그를 더 분발시키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다나카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유니크한 교수님들이 계시고, 자유로운 연구를 할 수 있는 학풍이 마음에 든다. 그리고 더 큰 도시는 수선스러워서 나한테는 맞지 않는다.”고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호쿠 대학 합격을 목표로 공부에 박차를 가했다. 문제집에 실린 해답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할 정도로, 이과 계열의 과목은 자신감이 붙어 있었다. 충분한 준비를 갖추어 대학 시험에 임했고, 마침내 단번에 합격할 수 있었다.
1978년 3월, 다나카가 도호쿠 대학에 다니기 위해 센다이 지방에서 하숙을 시작하려 할 때의 일이다. 갓난아기인 다나카를 데려와 길러 준 양어머니 하루에는 이제 다나카에게 출생의 비밀을 알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대학에 입학하기 위한 서류 절차에서 친아들이 아니라는 것이 알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진실을 알게 된 다나카는 “몰랐어요.”하고만 말하고는 2층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다나카는 그로부터 사흘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고 얼마쯤 지나자, 예전의 그로 다시 돌아왔다.
드디어 다나카가 처음으로 집을 떠나 혼자서 꾸려 가는 하숙 생활이 시작됐다. 하지만 그의 마음 한 곁에는 친어머니에 대한 생각이 무겁게 걸려 있었다. 한편 길러준 부모님께 은혜를 갚고 싶기도 했다. 어찌할 바를 모른 채로, 다나카는 마음을 돌려 스스로 무언가 한 가지 일에 파고들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전기공학을 전공하여 엔지니어의 길을 모색해 보기로 최종 결정했다.
대학 시절의 다나카는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으며, 모든 사람과 행동을 같이하기보다는 자기만의 페이스로 혼자서 어떤 일인가에 몰두하는 편이었다. 성실했지만 두각을 나타내는 성적은 아니었으며, 과에서도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존재였다.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고독한 청년은 아니었으며 평범한 다른 대학생들처럼 스키 캠프에 참가하여 익살스런 표정으로 사진을 찍기도 했다.
다나카는 자신의 가설이나 실험이 옳다는 확신이 생기면 끝까지 그것을 구명해 내려는 자세를 갖고 있었다.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으며, 좋은 의미로 아주 고집스러운 데가 있는 학생이었다. 다나카가 전기공학의 세계에 흥미를 갖고 본격적으로 몰입하게 된 계기는 ‘논리정연하게 결론까지 이어지는 아름다움’에 이끌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4학년이 되자 앞날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시기가 찾아왔다. 연구자로 대학에 남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할 생각은 별로 없었다. 그는 회사에 취직하여 자신이 만든 무엇인가가 실제로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일을 하루빨리 시작하고 싶었다.
그가 가장 먼저 지원했던 회사는 소니였다. 하지만 면접에서 긴장을 한 나머지 기본 공식이 생각나지 않아 최종 단계에서 낙방하고 말았다. 낙방한 후에 연구실을 드나들며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지만 다음 취직 자리를 결정하지 못한 채 얼마쯤은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그를 조용히 지켜본 사람은 다나카가 1983년에 졸업하기 전에 1년 동안 지도를 맡아 주었던 연구실의 아다치 사부로(현재 도호쿠 대학의 명예교수)였다. 다나카는 어느 날 혼자서 아다치 교수의 방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친어머니에 대해 가만가만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다치 교수는 자신도 숙부인 양아버지의 손에서 성장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콤플렉스를 느끼지 말라고 충고해줬다. 이 일을 계기로 아다치 교수와 다나카 사이에는 보통의 사제지간에서 느낄 수 없는 특별한 유대가 맺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다치 교수는 다나카에게 시마즈 제작소를 추천했다. “교토에 좀 독특한 회사가 있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다나카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회사였지만, 의료 분야에 적지 않은 관심을 갖고 있던 그로서는 X선 장치나 CT 장치를 제작하는 시마즈 제작소가 당연히 눈에 번쩍 뜨일 수밖에 없었다. 지난날 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 간절했던, 돌아가신 생모에 대한 생각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의사가 아니더라도 어쩌면 의료 현장의 뒤에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입사 전에 다나카는 견학을 위해 시마즈 제작소를 방문했고, 거기서 처음으로 당시 개방 중이던 질량 분석계를 접했다. 그리고 그것이 장차 질병의 원인이나 생명의 구조를 연구하는 데 유용하게 쓰일 장치라는 것을 알았다. 다나카는 자신이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구체적인 목표를 마침내 발견했다.
2장 '실패한 덕분에'의 철학
1984년 4월 다나카는 시마즈 제작소에 입사했다. ‘인류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것을 어느 날 예기치 않게 만들어 낸다’는 연구자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을 예감하고 있던 다나카는 본인의 희망대로 직장 내에서 열심히 일하며 연구 활동에 매진했다. 연구에 집중해 있을 때의 다나카는 예전과 다름없이 옷차림이나 머리 모양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자신이 맡고 있는 일에 골몰해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복도를 걸어가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1984년 10월부터는 단백질 분석 장치 개발에 나서게 되었다. 매트릭스(완충제) 지원 레이저 이온화법 연구가 시작된 것이다. 다나카가 속한 연구 팀이 도전한 분야는 레이저 광선을 쐬어 단백질을 분석하는 기술이었다. 그 기술은 당시 학계에서는 불가능하다는 쪽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단백질이 열에 약하기 때문에 레이저 광선을 쐬면 산산조각나기 쉬웠기 때문이다. 문제는 레이저 광선의 충격을 흡수하는 완충제를 발견하는 일이었다.
다나카는 아침부터 밤까지 실험 장치 앞에 앉아 모든 것을 하나하나 측정했다. 연구를 막 시작한 무렵에는 리포트에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단백질 등을 분석해 내는 작업은 현 단계에서는 ‘꿈같은 이야기’에 해당된다.” 그러나 다나카는 포기하지 않았다.
연구를 시작한지 2년 가량 지난 1985년 2월, 평소와 다름없이 여러 가지 완충제를 실험하고 있을 때였다. 다나카는 용기를 착각하여 본래 혼합할 생각이 없었던 완충제, 글리세린과 코발트를 우연히 섞게 되었다. 코발트 미세 분말은 매우 값이 비쌌으므로, 다나카는 잘못 혼합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깝다는 생각에 버리지 못하고 그것을 사용해봤다. 그러자 미세 분말인 코발트가 레이저를 흡수하여 글리세린의 양과 코발트 분말의 양이 가장 최적의 상태가 된 지점에서 커다란 단백질이 이온화하여 분리되는 게 아닌가. 계측기에 이제까지 본 적이 없는 신호가 나타난 것이다. 세기의 대발견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단백질 분석 결과는 물결 모양으로 표시되는데, 그 파형에는 노이즈라 불리는 불필요한 정보들이 많았으므로 필요한 정보를 가려내는 정확한 눈이 무엇보다 요구되었다. 그러한 노이즈와 의미 있는 정보의 미세한 차이를 입사 2년차인 다나카가 가려낸 것이다. 그것은 동일한 데이터를 베테랑 연구자가 지켜보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노이즈로 잘못 판단할 수 있을 정도의 지극히 미세한 차였다. ‘이상하다, 왜 그럴까?’라고 생각한 것이 발단이었다. 다나카는 혹시 장치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여러 가지 요인을 다시 생각해보았다. 일주일 뒤에는 확신을 가졌고, 틀림없는 수치가 분명하게 얻어진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착각하여 잘못 섞었다.”, “아깝다고 생각해서 그냥 써 보았다.”, “그것을 꾸준히 지켜보고 있었다.”는 이 세 가지 우연의 조합이 있었기에 가능한 발견이라고 다나카는 술회한다. 그러나 아무리 우연이라고 해도, 결코 단순한 우연은 아니었다. 다나카는 이 우연을 찾아내기까지 수많은 완충제를 조사했다. 여러 다양한 조건을 바꾸어 가면서 반년 가까이 반복에 반복을 거듭하며 실험을 계속했던 것이다. 이제까지 단백질의 분자량은 천 몇백 정도만 측정할 수 있었지만 다나카가 속한 팀의 프로젝트가 끝난 1986년 3월에는 질량 수치 3만 5,000의 세계 최고치를 달성했다.
다나카는 이 대발견을 이룬 직후에도 이것을 다른 데 응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고 한다. 회사도 이 기술을 이용한 제품화에 주저하다가, 다나카의 상사가 ‘제품화하는 것이 좋겠다!’고 용단을 내려야 할 정도였다. 다나카가 이를 대외적으로 발표한 것은 1987년 5월 교토 공예섬유 대학에서 열린 일본 질량 분석 학회에서였다. 그때는 모두들 ‘색다른 걸 해 냈군.’ 정도의 반향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4개월 뒤 열린 중·일 연합 질량 분석 토론회에서 다나카의 운명을 바꾸어 놓을 만남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9월 16일, 레이저 이온화 질량 분석계의 권위자인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의 로버트 코터 교수가 초대되었는데 그는 강연에서 분자량이 높은 물질을 결코 검출하지 못할 것이라고 강연했다. 그 강연을 듣고 있던 다나카는 교수가 단상에서 내려오자 질량수가 10만 정도까지 나타난 데이터를 내보였다. 놀란 코터 교수는 다나카의 데이터 사본을 받아 미국으로 가져갔고, 생체 고분자 연구에 몰두하던 메릴랜드 대학의 캐서린 펜슬로 교수에게 그 데이터를 보여 주었다. 새로운 발견을 깨달은 두 사람은 미국이나 유럽의 연구자들에게 다나카의 성과를 소개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다나카의 이름이 전 세계로 널리 퍼져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1987년의 그 학회에 참가했던 사람 중에는 다나카의 놀라운 연구 성과를 알아차린 또 한 사람의 연구자가 있었다. 오사카 대학의 고 마쓰오 다케키요 교수이다. 그는 다나카에게 하루 빨리 영문 학회지에 투고할 것을 권유했다. 왜냐하면 최초의 벽을 넘어선 다나카 팀은 제품화에 난항을 겪고 있었으나, 연구 발표 직후 실용화에서 먼저 돌파구를 찾은 독일 팀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다나카는 곧 영어 논문을 투고했고, 한편 경쟁 관계에 있던 독일 뮌스터 대학의 미하엘 카라스 교수와 프란츠 힐렌캄프 교수도 공동 명의로 논문을 투고했다. 힐렌캄프보다 한 달 정도 늦은 다나타의 논문이 통과된 것은 힐렌 캄프 교수의 논문 안에 1987년 다나카가 학회에서 발표했던 내용이 기재되어 있었고, 특허도 1985년에 인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 팀은 자신들의 연구가 다나카의 발견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을 공정하게 기록하였던 것이다. 독일 팀은 연구자 윤리를 준수한 것이 었고, 이것이 역전 수상의 결정적 단서가 되었다.
강연 등에서 자신의 과거 실패담을 말할 때 하도 여러 차례 이야기해서, 이제는 그만의 독특한 개인기라 할 수 있을 정도가 된 말투가 있다. 예를 들어, 입사 당시 맡았던 연구 내용이 순조롭게 진척되지 않아 수상의 계기가 된 연구 방향으로 전환하게 되었을 때의 에피소드가 그것이다. “먼저 표면 분석을 하려고 했는데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다행히’도 말이지요. 그것이 만일 성공했더라면 오늘과 같은 날은 오지 않았을 겁니다.” 보통 사람이 하기 힘든 것이 바로 이 ‘다행히도’라는 사고방식이다. 연구에 늘 따르게 마련인 ‘실패’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것이 그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는데, 이는 연구자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적용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사안이기도 하다. 다나카는 예전부터 강연에서 이렇게 말해 왔다.
“저는 수없는 실패를 겪었고, 그럴 때마다 의기소침해져서 이제 더 이상 쳐다보기도 싫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왜 실패하게 됐는지 밝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끝까지 구명하지 않으면 같은 실패를 반복하고 맙니다. 실패는 다음 일의 실마리라는 말을 항상 스스로에게 되뇌어 왔습니다.”
3장 기술자의 마음을 찾아서
다나카는 10월 15일 교토에서 열린 일본 생산학회 대회 주최의 세미나에서 자사 제품의 소개를 맡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노벨상 수상 결정 후 최초의 강연이었는데, 이 설명회는 애초에 학회 참가자만을 대상으로 기획된 것이었다. 이어 개최된 일반 시민도 참가하는 특별 강연회는 앉을 자리가 없을 만큼 성황을 이루었다. 다나카는 수상 직후에 비해 어느 정도 긴장이 누그러진 상태인 듯 보였으나, 노벨상 수상자로서는 이례적인 직함이 화제였던 것을 반농담 삼아, “주임인 다나카입니다.”라고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2002년 노벨 화학상은 3명에게 공동 수여되었는데, 전체 대상은 ‘생체 고분자의 동정(同定) 및 구조 해석을 위한 방법 개발’이다. 다나카가 개발한 것은 현재 커다란 주목을 받고 있는 기초 연구 분야이다. 그 방면에서는 ‘기초 중의 기초 기술’이라 여겨지고 있으며, 그러한 작업이 평가받은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라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다.
다나카는 수상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어째서 내가?’하는 생각을 했었다. 수상 대상이 된 연구는 5명의 팀원이 함께 한 것이었으므로 혼자 받아도 괜찮은 걸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예를 들어 코발트를 사용하는 아이디어는 다른 연구자가 특허를 받았는데, 그것이 없었더라면…. 그 밖에도 측정 회로를 개발한 사람, 계측기를 개발한 사람 등등 5명이 모이지 않았더라면 이온 측정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다나카는 “나는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모두 같이 연구해서 이런 발명을 했다. 그리고 그 성과에 대해 누군가 한 명을 선발해야 하는데, 가장 마지막까지 눈에 들어온 사람이 나였다. 그래서 내가 수상 대상이 된 것이라고 말입니다.”
다나카는 일본이나 한국에서 “분석 기술을 지닌 젊은 연구자들이 모두 기뻐하고 있다.”는 반향을 접한 뒤, 자신의 수상이 묵묵히 일하는 세상의 기술자들에게 의욕과 용기를 주었다면, 그것은 참으로 멋진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일본의 학계에서는 지금까지 기술자나 기업 연구를 한 단계 낮추어 보는 풍조가 있어 왔다. 더구나 바이오 분야에서는 대학이나 기업이 큰 차이가 없는데도 대학의 교수는 자신들이 한 수 위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번 다나카의 수상은 그러한 생각을 불식시키는 데도 공헌했다고 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노벨상 심사 기준이 그러한 분위기를 부정하고 있음을 보여 준 것이다. 더군다나 다나카의 수상은 노벨상 역사 중 ‘이례 중의 이례’로 평가 받고 있다. 다나카처럼 박사나 석사 학위를 소지하지 않은 수상자는 처음이며, 화학상에 있어서는 세계에서도 유례 없는 일이라는 점이다. 다나카는 실로, 학력은 실력의 잣대가 될 수 없음을 보여 준 것이다.
다나카가 몇몇 우연들을 성공으로 이끌어 낸 힘은 바로 그 실력이었다. 연구자들이 하는 일이란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그것을 조사하고, 결과적으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들을 엄청나게 벌이며, 어디인지도 모르는 결승점을 향해 매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나카에게 있어 1985년의 대발견은 결코 결승점이 아니었으며 어쩌면 애당초 결승점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연구자의 길일지도 모른다. 연구자에게 있어 성공에 이르느냐 아니냐는 먼 길을 돌아가느냐 지름길을 가느냐의 차이일 뿐, 어차피 날마다 꾸준한 노력을 끝없이 해야 하는 일이라는 사실만큼은 영구불변의 진리일 것이다.
수상 후 다나카는 지난날을 돌아보며 이제까지 걸어온 길을 회상하는 일이 많아졌다. 다나카가 처음 입사할 당시, 시마즈 제작소는 기업 규모로 치면 중간쯤밖에 되지 않았다. 당시는 경기도 좋을 때여서 이른바 대기업에 취직한 학생들이 많았다. 소니의 입사 시험에서 떨어진 일에 대해 묻자, 다나카는 이렇게 대답했다. “만약 소니에 입사했더라면 지극히 뻔한 전기 개발자가 되어 아주 상식적인 일을 했을 것이고, 이번 수상 대상이 된 것과 같은 엄청난 발견을 했을 거라는 생각은 안 듭니다. 결과론이기는 하지만, 소니의 시험에 떨어져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4장 아름다운 사람, 다나카 고이치
다나카의 노벨상 수상에 대해, 회사는 그에 상응한 대우를 해 주어야겠다고 여겨 주임인 그를 임원으로 승진시키려는 의사를 본인에게 타진한 바 있으나, 다나카는 이를 사양했다. 어디까지나 현장에서 연구 개발을 계속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사는 다나카에게 1,000만 엔의 특별 보상금과 연구자의 최고 지위인 ‘펠로’라는 직책을 안겼다. 이는 미국 기업들이 채용하고 있는 제도로, 급여는 임원과 동일하며 자유롭게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직책이다. 대우는 2계급 특진하여 부장급이지만, 업무는 지금까지 해 오던 대로 작업복을 입고 일하는 엔지니어인 것이다.
개인 사물함 앞에서 평소와 다름없이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이로써 평소 때의 제 자신으로 돌아오게 됐습니다. 양복을 입고 있으면 제가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거든요.” 하면서 “휴~” 하고 안도하며 일터로 향하는 다나카. 그와 같은 해에 입사한 70명의 동기 중 과반수는 관리직으로 승진해 있다.
노벨상 수상 이후 일본에서도 다나카에게 여러 상이 수상되었다. 문화훈장, 교토시 시민 영예상, 교토 특별 영예상, 현민(縣民) 영예상, 기타닛폰 신문 문화상, 바이오 인더스트리 협회 특별 명예상, 일본 이노베이터 특별상 등이며, 문화공로자로도 선발되었다. 도호쿠 대학으로부터는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받았으며, 교토 대학과 도호쿠 대학으로부터 객원 교수 초빙을 받았다.
시마즈 제작소는 ‘다나카 노벨상 기념 연구소’를 창설했다. 또한 다나카와 공동으로 연구해 온 팀 동료 4명에 대해서는 사장 특별상이 수여되었으며, 1인당 25만 엔의 상금도 지급되었다. 다나카로서는 국내 최고 영예인 문화훈장까지 받게 되어 그 기쁨이 더할 텐데, 과거 문화훈장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적지 않다.
애당초 상을 거절했다가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결국 받아들이기로 한 ‘기인 작가’ 나가이 가후, 늘 신고 다니던 고무신 대신 구두로 갈아 신고 3등 열차를 타고 올라와 수상식에 참석한 ‘청빈한 수학자’ 오카 기요시, 노벨상과의 이중 수상을 거절한 ‘노벨 문학상의 작가’ 오에 겐자부로 등 천재 중에는 괴짜가 많은 것도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국민적 상을 받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때로 보통 사람들과는 동떨어진 면이 있는 듯하다. 하지만 다나카의 경우는 아내인 유코의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굳이 보통 사람들과 다른 점을 꼽자면, ‘평소 옷차림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 것’ 정도이다.
다만 다나카의 작업복에 대한 집착은 남다른 데가 있다. 작업복을 입는 자신에게서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고수하려는 그의 의지는 어쩌면 남들에게 그리 쉽게 이해될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그에게 있어 작업복은 바로 현장에 계속 남아 일하고 싶은 바람의 상징인 셈이다. 승진을 바라지도 않았던 다나카에 대해, 이제 아무도 그를 ‘괴짜’라고만 여기지 않는다.
5장 엔지니어의 꿈과 희망
사람의 유전 정보를 탐구하는 게놈 해석이 거의 종료된 지금, 포스트 게놈 계획으로 주목받고 있는 연구가 바로 단백질을 총망라하여 조사하는 작업이다. 21세기 생명과학의 열쇠를 쥔 그 해석에 단백질의 질량이나 구조를 알아내는 분석계는 없어선 안 될 존재이다.
단백질은 인간의 몸 속에서 만들어진다. 그것을 만들기 위한 정보는 생명의 설계도인 유전자에 입력되어 있다. 인간의 유전자 정보는 이중 나선으로 된 DNA에 들어 있는데, 그 정보는 4종류의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4종류의 유전 정보 중 3개가 한 조를 이루며, 여기서 아미노산이 만들어진다. 그러한 아미노산이 수백 수천 개가 이어져 단백질이 생겨난다. 유전자는 그 설계도이며 그 설계도에 따라서 단백질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다나카의 연구를 통해 만들어진 분석계가 오늘날과 같이 발달하게 된 것은 질량뿐 아니라 어떤 단백질이 어떻게 이어져 있는가 하는 구조까지 밝혀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거의 해석이 끝난 인간의 유전자 정보와 질량 분석계를 이용해서 얻은 결과를 잘 조합시켜 단백질의 아미노산 배열, 즉 구조를 결정해 가는 것이다. 다나카 팀이 개발에 나섰던 질량 분석계 기술은 “생명의 사전을 역으로 찾아볼 수 있게 한 기술”이라고도 일컬어진다. 게놈은 해독되었어도 아직 그 역할을 밝혀 내지 못한 유전자는 얼마든지 많다. 이를 단백질 쪽에서 파고들어 그 역할을 구명해 내려는 것인데, 이는 생명과학 전체에 혁명을 가져왔다고 말할 수 있을 만한 것이다. 다나카는 자신의 업적에 대해 이처럼 인간의 건강에 도움이 되고 있는 것이 무엇보다 큰 공헌이라 여기고 있다.
다나카 인생에는 연구라는 작업이 줄곧 함께 해 왔다. 그래서 현재 다나카가 가장 곤란을 겪고 있는 점은 연구에 집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생에서 최대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고 말할 정도이다. 질량 분석계의 세계는 경쟁이 워낙 치열해 한 달이라도 연구에서 멀어지면 불안하다.
수상을 통해 인적 네트워크는 넓어졌지만, 사실 자신의 연구 능력은 수상 전과 달라진 것이 없다. 주위의 기대와 자신의 능력 사이에 놓인 간극을 어떻게 메워 갈 것인가. 이 또한 연구를 재개했을 때 그에게 주어진 과제인 셈이다. 하지만 그는 개발하는 제품과 사용자와의 거리도 더욱 좁혀 나가겠다는 의욕으로 가득 차 있다. 생명과학에 종사하는 대학이나 기업, 공적 연구 기관의 연구자들과 서로 협력해서 새로운 분석계 개발에 도전한다는 계획이다.
“저는 엔지니어에 대해 동경과 긍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생각해 내고 그것을 실제로 활용하여 금방 쓸 수 있는 것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정말 매력적인 일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그런 일을 해 나가고 싶습니다. 학자가 아닌 엔지니어로 살아가는 것이 제게는 가장 잘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앞으로도 계속해 나가고 싶습니다.”
다나카는 보다 쉽게 질병을 진단할 수 있는 소형 분석계를 개발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가능한 한 간편하게 조작할 수 있고 데스크톱 PC 정도의 크기를 지닌 분석계를 만들어 약국이나 병원에 놓아둘 수 있다면 훨씬 많은 사람이 사용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의약의 질을 높이는 한편 의료비도 절감할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진 일인가. 혈액 검사만으로도 “당신은 이런 병의 징후가 있으니, 이런 약을 드시면 됩니다.”하고 진단할 수 있는 시대가 가까운 장래에 도래할 것이다. 다나카는 이처럼 “사람의 생명을 구한다.”는 자신의 처음 뜻을 구현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올해 마흔세 살의 다나카 고이치, 앞으로도 그는 지금까지 해 온 것처럼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고 자신의 발로 걸어다니고,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 내고 싶다.”는 바람을 계속해서 간직해 갈 천생 엔지니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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