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은 서구문명의 오만한 시각에 의해 제 3세계의 문화가 어떻게 왜곡, 전달되는가를 보여준다. 문명발달사의 앞 페이지를 차지한 서구인들은, 동양은 서양에 비해 열등하다고 정리하고 그 믿음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여러가지 증거자료들을 열거한다. 그것은 문화적 편견이다. 서구 합리주의에 바탕을 둔 지식권력은 동양의 문화를 야만적인 것으로 규정하는데, 그때의 동양은 실제와는 다른, 그들이 창조한 동양이다. 따라서 서구인들이 바라본 동양은 어떤 면에서는 기괴하고 신비하며, 비이성적이고 낭만적이다. 물론 [오리엔탈리즘]에서의 서구는 프랑스나 독일같은 유럽 각국이고, 오리엔트는 근동지역에 국한된다. 하지만 문명불평등 이론을 적용하는 데는 미국(서양)/한국, 혹은 일본(동양)식의 적용도 어색하지 않다.
[라스트 사무라이]는 오리엔탈리즘의 한 극점에서 형성되었다. 이 영화는,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필연적으로 구시대 지배 이데올로기와 결별해야 했던 일본 메이지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일본을 군사강국으로 만들기 위해, 서양 군대의 장교를 초빙해서 병사들을 훈련시키려는 천황의 계획은, 그때까지 힘의 근원이었던 사무라이 집단과 충돌하게 된다. 그것은 단순히 총/칼의 충돌만은 아니다.
그러나 천황은 대신들에 둘러 쌓여 우유부단하고 나약하기만 하다. 열강들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천황 주변의 대신들과 밀약을 맺고 약소국 일본에 압력을 행사한다. 첨예한 정치적 대립은, 그러나 [라스트 사무라이]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영화가 멋있게 포장될 수 있도록 주인공 주변에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으면 된다.
얼핏 [라스트 사무라이]는 주군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사무라이 집단의 독특한 문화에 매혹당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위장술이다. 한 꺼풀 벗기고 들어가면, 여전히 서양 문명의 오만한 우월의식이 깔려 있다. 수없이 등장하는 전투씬은 철저하게 총과 대포/칼과 활의 대립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장엄한게 아니라 무모하게 비쳐진다. 합리적 이성의 세계 속에서, 대포와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군대를 향해 말을 타고 칼을 휘두르며 돌진하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어리석음이다.
헤이안 시대 이후 하나의 계급으로 발달한 무사집단으로서의 사무라이는, 하층 계급의 무사와 구별되는 상층계급의 무인들이었다. 에드워드 즈익 감독은, 남북전쟁이 끝난 후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알그렌 대위(톰 크루즈 분)를 일본으로 보내, 서구의 무사와 동양의 무사를 충돌시킨다. 발상은 재미있다. 그러나 [라스트 사무라이] 속에 묘사된 사무라이 집단의 특성은, 철저하게 알그렌 대위의 시각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그것은 동시에 보편적인 서양인들의 시각이기도 하다.
막부 말기의 사무라이 출신 정치인, 사이고 타카모리의 일대기를 그린 이반 모리스의 [고귀한 실패]를 바탕으로 한 [라스트 사무라이]의 각본은, 허구다. 막부시대가 끝나고 메이지 유신 시대가 시작되던 19세기 후반의 일본은, 전통적 가치가 무너지고 새로운 가치가 정립되던 혼돈의 시기였다. 카츠모토(켄 오타나베 분)는 사무라이 정신의 상징이다. 영화는 서양 무사의 상징인 알그렌 대위가, 동양 무사의 상징인 카츠모토를 만나, 사무라이들의 명예와 의리, 충성심에 매료되며 내면의 변화를 겪게 되는 것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양 문물에 비해 월등하게 우월한 서양 문물을 보여주는데 힘을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전히 동양은 잘못되어 있으며, 서양 문명의 전달자는 박애정신으로 가득차 있다. 야만적이지만 신비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사무라이의 보스 카츠모토도, 서구 문명 자체에 대해서는 우호적이다. [라스트 사무라이]는 동양정신에 매료된 서양인을 등장시켜서 동양정신에 대한 구애를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여전히 잘못된 오리엔탈리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라스트 사무라이]는 또, 최근 할리우드에 불고 있는 일본 열풍을 반영하고 있다. 타란티노의 [킬빌]을 비롯해서 올해 개봉할 영화 중에서도 일본에서 촬영된 영화가 많다. 베르툴루치의 [마지막 황제], 스필버그의 [태양의 제국]이나 혹은 [티벳에서의 7년][쿤둔]처럼 중국을 소재로 한 영화에서 일본으로, 영화의 소재가 중심이동한 것 같다. 알그렌은 사무라이들 사이에서 특별대접을 받으며 그들의 무예까지 전수받는다. 그것은 그가, 단순히 푸른 눈의 이방인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서양문명에 대한 동양인들의 열등의식 때문일까?
에드워드 즈익 감독은 브래드 피트 주연의 [가을의 전설]에서도 신비주의에 대한 흠모를 담은 적이 있다. 원스탭이라는 인디언이 그가 평생 지켜본 루드로 일가를 회고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영화의 첫 장면에 등장하는 짐승 사냥의 이야기는 영화 전체를 지배한다. 죽은 짐승의 영혼에 대한 나레이션은, 에드워드 즈익 감독이 서구의 합리주의적 이성의 세계와는 다른, 신비한 동양정신에 매료되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그러나 [가을의 전설]은 둘째 트리스탄역을 맡은 브래드 피트와 세 형제와 차례로 관계를 갖는 수잔나 역의 줄리아 아몬드를 스타로 만들었지만 연출력에서는 의문이 많은 작품이었다.
[라스트 사무라이]는 [가을의 전설]보다 훨씬 스케일도 크고 연출력도 안정되어 있다. 또 톰 크루즈라는 할리우드 톱 스타와 일본의 연기파 배우들이 합류하면서 새로운 자장을 빚어내는데 성공하고 있다. 새로운 소재와 새로운 이야기를 원하는 할리우드의 돌파구를 단숨에 해결해주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 뿐이다. 이 영화는 서양문물에 대항해서 부강한 나라를 꿈꾸며 구시대와 결별해야 했던 천황의 정치적 사유를 깊이있게 들여다 보지도 못하고 있고, 주군을 향한 일편단심 충성심을 보이는 카츠모토의 내면이 입체적으로 형상화되어 있지도 못하다. 관객들은 오직 알그렌 대위의 시각으로 일본 문화와 사무라ㅓ이 정신에 접근한다. 그것이 한계다.
[라스트 사무라이]는, 동양에 대한 서양인들의 환상을 적절하게 충족시킨다. 그러나 서구적 시각에서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불합리한 모순으로 가득찬 동양을 설정하고, 그 반대편에 합리적 이성의 세계에 토대를 구축하고 있는 서양을 대립시킴으로써, 자신들이 살고 있는 기존 세계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확인하려고 한다. 이것이 거슬린다. 결국 서양인들의 일방적 시각에 의한 우월적 드러냄이, 우리들의 지지를 가슴 깊은 곳에서 끌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