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혁명과 찰스 1세의 처형 (1649년 1월)
<찰스 1세>
스튜어트왕가의 영국 왕(재위 1625∼1649)로서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와 덴마크의 앤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난 찰스는 어린시절 병약해서 부친이 1603년 영국 왕에 즉위했을 때도 여행에 따르는 부담 때문에 당분간 스코틀랜드에 남아 있어야 했다. 형 헨리와 누이 엘리자베스를 무척 사랑했던 그는 1612년 헨리가 죽고 이듬해 엘리자베스마저 라인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와 결혼하기 위해 영국을 떠나자 몹시 외로운 처지가 되었다. 평생토록 찰스는 약간의 말더듬이에다 스코틀랜드 억양을 버리지 못했다. 키가 작았으며, 플랑드르의 화가 안토니 반 데이크 경이 그린 초상화에서보다 실제로는 위엄이 덜했다. 늘 수줍음을 탔으며 주위사람들에게는 말수가 적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비쳤다. 신앙심이 돈독한 그가 왕위에 오르자마자 궁정 내에 저속한 분위기가 현저히 사라져갔다. 그는 왕의 통치권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라는 부왕의 확고한 신념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초기에 쓴 서한들은 다루기 까다로운 하원에 대해 강한 불신을 품고 있었음을 잘 나타내준다. 사실 그는 하원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만한 능력이 없었다. 유연함과 상상력이 부족했던 그는 권위 유지를 위해 늘상 습관적으로 써오던 정치적 위선이 결국 위신을 떨어뜨리고 신뢰를 무너뜨린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찰스는 1625년 3월 왕위에 올랐으며 그 직후 프랑스 왕 루이 13세의 누이인 앙리에타 마리아와 결혼했다. 그해 6월, 왕위에 오른 후 처음 의회가 소집되었을 때 당시 찰스 1세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버킹엄 공작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 있었기 때문에 즉각 분쟁이 발생했다. 스페인과의 전쟁이 명백히 실패로 돌아가고 있었으나 그는 자신의 외교정책이나 전쟁비용 등에 관해 의회에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당시 하원은 청교도들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국왕에 동조하는 세력은 고교회파(高敎會派)로 알려진 사람들이었다. 청교도들은 원고 없이 즉석에서 하는 기도나 설교방식을 옹호하고 있었던 반면, 고교회파는 기도문을 통한 기도와 예배의식의 엄격한 준수를 더 강조하고 있었다. 이때문에 찰스 1세와 하원 사이에 반목이 생겨 의회는 톤세(稅)와 파운드세 등의 관세부과에 대한 국왕의 권한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다만 의회의 권력을 강화하는 경우에만 예외로 했다. 관세부과권은 그 이전의 군주들에게는 종신토록 부여된 권리였다.
찰스는 하원의 일부 지도자들을 출신 지방의 주장관으로 임명해 의회에서 교묘히 축출했음에도 불구하고, 1626년 2월 2번째로 소집된 의회에서 의원들은 왕의 정부에 대해 더욱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상황이 어려워지자 찰스 1세는 불법임을 잘 알면서도 강제로 국채를 끌어들였다. 국채모집에 불응한 수석재판관을 해임하고 70여 명의 기사와 젠트리들을 체포하도록 명령했다. 이런 고압적인 조치들은 국민의 반감을 더욱 고조시켰고 이 문제는 다음 번 의회에서 폭넓게 논의되었다. 1628년 3월 3번째로 의회가 열릴 무렵, 라 로셸의 프랑스 프로테스탄트를 지원하기 위해 나선 버킹엄 공작의 원정군이 무참히 격퇴당했으며, 정부는 완전히 신뢰를 상실했다. 하원은 즉시 국왕이 멋대로 부과한 세금과 인신구속을 비난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키고 이어서 권리청원을 마련했다. 권리청원은 4가지 원칙, 즉 의회의 동의 없이 과세하지 말 것, 정당한 이유 없는 구금의 반대, 백성들의 집이나 소유지에 병사를 숙영시키지 말 것, 그리고 평화시에 계엄령을 선포하지 말 것 등을 요구했다. 찰스 1세는 이 청원의 승인을 피하려 했으나 결국 어쩔 수 없이 청원에 정식으로 동의했다. 1629년 1월, 4번째 의회가 소집되었을 때 버킹엄 공작이 암살당했다. 하원은 교회 내에서의 이른바 '가톨릭 관행'의 부활에 반대하고, 또한 의회의 동의 없이 국왕 직속관리들이 톤세와 파운드세를 부과하는 데 반대하고 나섰다. 1629년 3월 2일 찰스 1세는 의회의 휴회를 명령했으나, 이에 앞서 하원의장이 의장석에 착석한 채 국왕의 행위를 비난하는 3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찰스 1세는 이같은 의회의 조처를 혁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후 11년 동안 한 번도 의회를 소집하지 않고 영국을 통치했다.
찰스 1세는 더이상 의회의 보조금 승인에 의존하지 않으려고 프랑스 및 스페인과 평화조약을 맺었다. 왕실의 채무는 100만 파운드가 넘었지만, 이로써 확대된 무역에서 생기는 관세수입과 전통적으로 국왕의 수입원이 되어왔던 강제징세를 합치면 평화시 수입원으로는 충분할 것이었다. 또한 왕실지출을 절약하려 애썼으며, 해군 유지를 위해 소위 선박세를 부과했는데 1634년 항구를 시작으로 나중에는 내륙도시들까지 부과대상으로 삼았다. 당시 재무법원 소속 재판관들이 이를 적법한 것으로 인정했으나 1638년경에는 전국적으로 완강한 저항이 일었다. 그는 왕권신수설을 신봉하고 있었으므로 국민이나 의회가 아닌 오직 신에 대해서만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진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백성들에게는 '관대한 양부(養父)'로서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종종 나태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나 주로 행정개혁을 지시할 때는 열정적으로 돌변했다. 그러나 군업무와 궁정의 세세한 일에까지 개인적으로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찰스가 스코틀랜드인과의 전쟁에 휘말리게 된 1639년까지 대체로 왕국은 어느 정도는 번영을 누렸던 것으로 보인다.
버킹엄이 죽은 뒤 왕의 측근 고문관이 된 두 사람,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로드와 유능한 아일랜드 총독인 스트래퍼드 백작의 자문에 따라 찰스는 1640년 4월에, 나중에 단기의회로 알려진 의회를 소집했다. 소집 목적은 스코틀랜드와의 전쟁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것이었다. 의회는 먼저 정부에 대한 불만사항을 논의할 것을 주장하며 전쟁 재개에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이에 5월 5일 찰스는 다시 의회를 해산했고 선박세 징수는 계속 시행되었으며 전쟁도 계속되었다. 8월 스코틀랜드 군대가 국경을 넘어 진격해왔을 때 찰스의 군대는 뉴번에서 속수무책으로 포격당했다. 2차례나 패한 것에 상심한 찰스는 귀족회의를 열었고 그들의 자문에 따라 다시 의회를 소집했다. 이렇게 소집된 장기의회는 1640년 11월 웨스트민스터에서 개최되었다.
새로 선출된 하원의원들은 단기의회 의원들만큼이나 비협조적이었다. 그들은 최근에 찰스가 시행한 조처들을 비난하고 스트래퍼드를 비롯한 각료들을 반역죄로 탄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찰스는 타협적인 태도를 취해, 3년마다 1번씩 의회를 개최한다는 법안(Triennial Act)에 동의했다 (→ 색인 : 3년회기법). 그는 자신이 보호해주기로 약속한 스트래퍼드를 구하겠다는 결심을 밝혔으나 이 일마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1641년 5월 12일 스트래퍼드가 참수대로 향하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 찰스는 의원들의 동의 없이 의회를 해산할 수 없다는 법령에 동의해야만 했다. 또한 선박세와 그밖의 자의적인 금융조처가 위법임을 선포하며 지난 11년 동안의 통치방식을 전면적으로 비난하는 법안도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나 이렇게 양보하는 한편으로 8월에 스코틀랜드를 방문해 반(反)의회파를 규합, 지지세력을 구축하려 했고 이를 위해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완전한 확립에 동의하고 스코틀랜드 신분의회 의원들을 왕실관리로 지명하도록 허용했다. 그러는 사이 휴회기간이 끝난 의회는 런던에서 다시 소집되었다. 1641년 11월 22일 하원에서는, 즉위 이후 찰스의 실정을 낱낱이 밝힌 대간의서(Grand Remonstrance)를 159:148로 통과시켰다. 가톨릭교도인 왕비가 탄핵될까 우려한 찰스는 극단적인 행동에 들어갈 태세를 갖추었다. 상원의원 1명과 하원의원 5명을 반역죄로 체포할 것을 명하고 400명을 이끌고 직접 체포하러 나섰다. 그러나 의원들은 의사당을 빠져나가 런던 시내로 숨었다. 일이 실패하자 찰스는 1월 10일 잉글랜드 북부로 떠났다. 왕비는 2월 찰스를 위해 왕실의 귀금속 등을 저당잡히고 돈을 마련하기 위해 네덜란드로 떠났다. 소강상태가 이어졌다. 그러나 7월에 와서 양 진영은 모두 긴급히 전쟁준비를 하고 있었다. 찰스는 8월 22일 공식적으로 노팅엄에서 왕실 상비군을 조직했고, 곧 온 나라에서 산발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1642년 9월 의회파 군대의 사령관 에식스 백작이 중부지방을 맡기 위해 런던을 떠났고, 찰스는 웨일스 변경의 군대를 충원하고 병사를 양성하기 위해 슈루즈버리로 사령탑을 옮겼다. 1643년 왕당파 진영은 요크셔와 남서부 등지에서 승승장구했다. 찰스는 궁정과 군사령부를 옥스퍼드로 옮기고 자신은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에서 가벼운 마음으로 지냈다. 그러나 의회군은 스코틀랜드의 서약파와 동맹을 맺고, 1644년 1월 스코틀랜드 군대가 잉글랜드에 입성했다. 찰스의 군대는 수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고 런던에 집결하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찰스는 옥스퍼드 서부 및 남서부 전역에 걸친 내부 방어선을 성공적으로 지켰고, 조카인 루퍼트 공에게 나머지 지역의 기병대 지휘를 맡겨 급파했다. 약 1년간은 찰스의 진영이 우세했으나 결국 여러 차례 평화를 타진해볼 수밖에 없었다. 이는 아무 소득이 없었으나 의회파에 내분이 일기 시작했다는 소식은 상당히 고무적이었다.
1645년은 결정적인 해였다. 6월 14일 토머스 페어팩스와 그의 부관 올리버 크롬웰이 조직한, 고도의 훈련과 전문성을 갖춘 신형군(New Model Army)이 네이즈비 전투에서 찰스와 루퍼트 공을 격파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해 여름과 가을 내내 왕당파 군대는 기나긴 패배의 늪에서 허우적댔다. 11월 5일 찰스는 옥스퍼드로 돌아왔으나 1646년 봄 옥스퍼드가 포위되었다. 4월말 변장을 한 찰스는 2명의 동행인과 함께 옥스퍼드를 떠나 5월 5일 뉴어크에 있는 스코틀랜드 서약파 진지에 도착했다. 그러나 1647년 1월 서약파는 의회파의 승리를 인정하고 스코틀랜드로 떠나면서 찰스 1세의 신병을 의회파에 넘겼다.
8월, 런던 행군이 있은 후 햄프턴 궁으로 옮겨진 찰스는 2명의 자녀 헨리와 엘리자베스를 만났다. 그는 11월 11일 탈출했으나 찰스를 데리고 저지를 거쳐 프랑스로 가려던 친구의 계획이 어긋나는 바람에 아일오브와이트로 가게 되었다. 충실한 의회파인 이곳의 주지사는 찰스를 캐러즈브룩 성에 가두고 감시했다. 이곳에서 찰스는 군대 지도자와 잉글랜드 의회 및 스코틀랜드인들과 복잡한 협상을 벌였다. 그는 거리낌 없이 한쪽에 약속한 내용과는 반대되는 것을 다른 쪽에 약속했다.
1648년 8월 찰스를 지지하는 스코틀랜드인 최후의 군대가 프레스턴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제2차 내란이 끝났다. 군대는 이제 찰스 왕을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원흉'이자 참사의 원인으로 비난하고 반역죄로 재판에 회부할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찰스는 1648년말 햄프셔의 허스트 성으로 옮겨졌다가 그곳에서 크리스마스 기간에 윈저 성으로 이송되었고, 1649년 1월 20일 웨스트민스터 홀에 설치된 특별 법정에 섰다.
찰스 1세는 대역죄와 '왕국에 대한 크나큰 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고발되었다. 그는 법정의 합법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유는 '국왕은 지상의 어떤 권력에 의해서도 재판받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변호도 거절하고 자신은 '영국민들의 자유'를 위해 싸웠노라고 항변했다. 1월 27일 사형이 발표되었다. 폭정, 반역, 살인, 사회에 해악을 끼친 죄로 처형 명령이 내려졌다. 사형은 1649년 1월 30일 화요일 아침 화이트 홀의 연회장 바깥에 세워진 처형대에서 집행되었다. 찰스는 여전히 자신은 '국민의 순교자'임을 주장하며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1주일 후 그의 시신은 윈저 성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