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안녕하셨습니까?”
요 며칠 전에 가까이 계신 한 분이 돌아가셨습니다. “아침에 소천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연락이 온 것입니다. 며칠 전에도 건강한 모습을 뵌 분인데, 다른 분은 어제도 뵈었다고 했는데, 그야말로 “밤새 안녕하셨습니까?”라는 말이 무색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히브리서 성경 기자는 히브리서 9장 27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성경 기자는 사람에게서 죽음은 누구에게나 한번은 찾아오는 정해진 이치임을 말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이라고 죽음에 한 번이란 말을 하고 있는 것은 그 뒤에 두 번 세 번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아주 단호하게 말하여 사용하는 강조어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한 번은 죽습니다. 그 뒤에 또 따라다니는 죽음이 아닙니다. 사람은 두 번 죽고 세 번 죽고 하는 것이 없습니다. 사람은 한 번 죽은 후에는 그 죽음에서 다시 산 자가 되어서 살아 있다가 다시 죽음에 처해지는 반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이렇기에, 성경 기자는 모든 사람은 한 번은 다 겪는 죽음으로 인해서 있는 일에 관심을 갖습니다. 그것은 말이죠. “그 후에는 심판이 있을 것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 기자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은 다 겪게 되는 이 죽음에 있게 하는 죄를 없애기 위해서 세상 끝 - 종말 - 에 그리스도께서 오직 한 번 나타나셔서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자신을 단번에 드려 한 번 죽으셨다는 것을 알게 해 주기 위해서 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그리스도께서 이제 두 번째 나타나실 것인 재림을 말합니다. 그때는 우리의 죄 때문에 다시 희생제물이 되기 위하여 오시는 것이 아니라, 영생을 소망하고 생명의 주를 의존하며 그리스도를 기다림의 고대에 있어온 대로 영원히 살아있게 하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보내신 구주이십니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자신 안에 있는 모든 자를 그들의 모든 죄로부터 구원하십니다. 이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당하시는 단 한 번의 희생제물로 충분합니다. 그러기에 말이죠. 그것으로 다시는 죄와 상관없는 거룩한 자로 그리스도의 나타나심과 함께 우리도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것을 ‘성화 - 성도의 견인(하나님의 견인) - 영화’로 말해 왔습니다. 이것을 점진적이고 발전적인 과정에 의하여서 구원을 이루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여 오고 있는 폐단이 있습니다만, 이것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본래적인 의미는 우리에게 있는 모든 죄에서의 ‘하나님의 구원’이며, 우리의 모든 죄에서 있는 ‘구원의 완전성(온전성)’입니다.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십시오. 내가 주의 뜻을 행하러 왔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황소나 염소의 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사람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친히 성소의 희생제물이 되고자 인간의 몸이 되셔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오직 ‘그리스도의 피’만으로 죄로부터 구원받는다는 구원의 원리를 세우셨습니다. 이로써 첫 번째 것(율법)을 폐하시고 두 번째 것(십자가의 도)을 세우셨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실 것을 말하면서,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고,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요.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그리고 로마서 6장에서 말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해야 하겠는지를 말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을 하지 않고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게 하신 것에 있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우리 모든 믿는 자들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그 날’, 그분이 십자가에 달려 흘리신 구속의 피로 참으로 정결하여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그분의 거룩하심으로 우리가 그분 앞에 나타날 ‘그 날’, 진정 ‘그 날’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그 날’이 우리에게도 참으로 가깝습니다. ‘그 날’이 ‘간 밤’에, 또는 ‘오늘 밤’에 있을 수 있으리만치 그렇게 참으로 가깝습니다. 그러니 “더욱 그리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의중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과연 더욱 그리해야 되지 않겠는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