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경남도민일보 디카시 신춘문예 당선작
뜸
정병윤
혈血을 뚫는 의연한 말씀
얼굴도 모르는 당신
보고 싶습니다
인연因緣이라는 화두는 가슴에 묻어 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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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디카시가 3,000대1의 경쟁에서 영예의 왕관을 차지 할 수 있었던 키는 어디에 있을까? 무엇보다도 화자가 순간 포착한 따스한 밥공기에서 이미지화 되는 강한 임펙트(impact)가 참신하여 심사자의 눈길을 붙들어 맸을 것이다. ㄱ거기에 밥공기에서 피어 오르는 따스한 김을 ‘말씀’ 혹은 ‘뜸’으로 순간 읽어내는 힘을 읽었을 것이다. 디카시의 생명인 극순간의 시적 형상으로서의 영상 기호를 놓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뜸이 든 ‘밥’에서 뭉실하게 피어오르는 따스한 ‘김’은 허공으로 스며드는 ‘뜸’의 분신이며 체취(體臭)라는 기호적 의미를 우리에게 던져준다. 뜸이 따스하게 든 ‘김’이라는 언표가 ‘血을 뚫는 당신의 의연한 말씀’이라는 참신한 은유로의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순간포착의 시적 형상과 융합된 혈血의 기호적 의미로서의 알레고리를 낚아 챌 수 있었던 것이 당선의 일등공신이 아니었을까 싶다.
2.
부연하자면, 이 디카시는 두 개의 입을 제대로 가지고 있어 더욱 그렇다. 두 개의 입이라니? 일찌기 실존철학자 하이데거는 시인을 “神과 인간 사이의 존재자(存在者 )”라고 명명하고 있는 것을 보면 어쩌면 시인은 神의 대행자이자 에이전트가 아닐까? 그러므로 디카시에서는 대행자이자 에이전트로서의 시인은 사물이나 자연에서 시적 감흥을 느낄 때 그것은 시인의 의지를 넘어선 뮤즈 (어떤 근원적 존재)의 작용으로 보는 신비성을 띠게 된다. 디카시가 서정시와는 달리 근본적으로 영상의 말과 문자의 말을 동시에 융합하여 가지는 두 개의 입을 가지고 있어야하는 이유다.
3.
한편, 제목인 ‘뜸’은 위와 같은 ‘혈의 말씀’이라는 기의도 있지만 한방에서의 ‘치유적 의미’의 표상으로 읽을 수 있어 중의적인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이러한 중의는 결국 압축적으로 제시되는 서사나 의미구조로까지 후경화되는 인식으로까지 확장시키고 있어 신춘문예 당선작품으로서 손색이 없어 보인다. 말하자면 영상과 문자가 합해져서 완벽한 하나의 텍스트(text)를 융합 해 내고 있는데다가 서정시에서처럼 선경후정의 완벽한 시적 진실이라 할 수 있는 뮤즈로서의 구 인연과 구원과 그리고 그리움을 드러내주고 있는 묘기를 보여주고 있어 돋보일 수 있었을 것이다.
4.
후반부의 행간으로 눈길을 더듬어 보자. 화자는 ‘의연한 혈의 말씀’을 통해 얼굴도 모르는 당신에 대해 혈(血)의 온기를 가슴으로 느낀다. ‘당신’은 너와 나이며 우리 모두의 인연 관계자들이며 결국 의연한 말씀 일 혈육의 메타포다. 그런 ‘뜸’이기에 혈육을 뚫는 ‘인연’으로서 당신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굴곡진 생(生)의 심연을 드러내고자 하는 시인의 작시(作詩)의도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 뿐인가? 여기서 그러한 血 로서의 ‘뜸’은 위에서 언급한바 처럼 구도적이며 보고싶은 그리움의 염원으로 까지 확장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因緣이라는 화두를 가슴에 묻어야 하는 화자의 심정을 어찌 독자가 짚어내지 못하랴.
5.
그렇다. 영상때문에 문자가 더 빛나고, 문자 때문에 영상이 더 빛나야 하는 것이 디카시의 본 모습이요 지향점이다. 디카시는 영상 포착을 통한 극순간의 시적 감흥을 드러내는 것일진데, 거기에 무슨 사람의 말을 더 보탠다는 말인가? . 그러므로 디카시는 짧을수록 좋다는 것은 포착 된 영상은 줄일 수 없으므로 문자가 하는 말을 최대한 줄이라는 의미일터. 이 시가 그러한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드물게 발견되는 참 좋은 디카시다. < 悳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