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몰고 북천면의 양귀비축제장을 빠져나왔다. 차바퀴에서 흙덩어리가 떨어져 둔탁하게 차량 하단 부를 쳐댄다. 흡사 함석지붕에 소나기가 내리는 소리와 같았다. 축제장은 처음부터 들릴 마음은 없었다. 지인의 사무실을 들렀다가 그곳을 들러보라는 말에 따랐다. 그리고 그곳에서 비빔밥 한 그릇으로 점심요기를 끝내고 주차장을 빠져나오다 비온 뒤의 진흙탕을 만난 것이다.
그리고 어디로 갈까? 처음부터 계획한 코스가 아니라서 망설여졌다. 그렇다.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그 길을 가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양보면, 그 지나가는 길 주변 어딘가에 지난시절 너무나도 따스하고 마음 편하게 대해주던 누님이 두려운 마음으로 시집갔던 시댁이 있고, 초등학교 1학년 때 같은 책상에 앉아 가운데를 금 긋고 영역 다툼하던 무던한 짝지가 시집간 곳도 있을 것이다.
처음 와보는 것 같은데도 왠지 낯설지 않은 생각이 드는 것은 웬 조화일까? 누님이 시집갔던 마을은 도로변에서 한참 떨어져 있었다. 결혼 후 그곳에서 살지는 않았지만 언젠가 볼일이 생겨 한번 멀리 산을 넘어 가본 적이 있었었다. 누님은 대구와 부산에서 살다 오래전에 야속하게도 갑자기 먼 곳으로 떠나버리고 말았었다.
그리고 짝지가 시집을 간 곳은 어디쯤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같은 동네에 살았었지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서는 헤어져 지냈다. 그의 소식을 들은 것은 내 나이가 마흔을 넘겼을 때였다. 어느 고향 모임에서 어렴풋이 그의 소식을 들었었다. 객지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결혼을 하고 고향 가까운 시골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하였었다. 나는 마냥 시골이라는 단어 한마디에 왠지 친구가 불행할 것이란 잘못된 편견을 가졌었다.
두 여인의 꽃가마가 지나갔었던 시골 길은 잘 정비되어 있었다. 교행 하는 차마져 별로 없는 편이라 밭이나 들에 심어진 농작물도 바라다보고, 무성한 푸른 숲들을 감상하며 힐링의 기쁨도 맞볼 수 있었다. 오염될 것 같지 않은 작은 하천의 물 흐름, 도시 건물 못지않게 잘 지어진 농가주택들을 보면서 이젠 농촌도 매우 풍요로울 것이란 상상도 해 보았다.
언젠가 부산에 사는 지인들이 이 곳 어디에서 다슬기를 많이 잡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아마도 잘 보존된 청정의 자연이 자리 잡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끝내 부모의 권유에 따라야 했던 누님의 행적이 있었던 시댁도 기억에서 사라졌고, 회갑이 훌쩍 지나버린 짝지가 당장 어디에선가 이마에 흐른 땀을 훔치며 나타날 것만 같은 동네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처음 들어선 길이라 가는 길목 이정표를 만날 때마다 어디로 갈 것인지 망설여졌다. 고전, 진교, 사천이란 지명들이 나타났다. 지명을 알지만 직접 가보지 않은 영역이기 때문에 어디로 방향을 잡아야 할지가 막연했다.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늦게 핀 꽃들만이 계절을 자랑했다.
어림짐작으로 바닷가가 가까울 것이라 여겨지는 쪽으로 차를 달렸다. 먼발치에 주변에서 가장 높은 금오산이 바라다 보였다. 산을보니 대략의 방향감각이 섰다. 그 곳 산허리엔 부산과 순천을 잇는 고속도로가 나있고, 나도 산악활동을 통하여 그 산을 몇 번인가 올랐었다. 봄이면 오르는 주변에 진달래를 비롯한 아름다운 꽃들이 많고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남해바다의 풍광이 그만이다.
차는 점점 고속도로를 향하여 다가가고 시야는 넓어지기 시작했다. 배드리? 지명을 살펴보니 어릴 적 어른들에게서 들었던 곳이었고, 나훈아의 노래 ‘물레방아 도는데’의 배경이 된 곳이라 하였다. 이곳 어디에 5일장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눈여겨 살펴보았으나 보이질 않는다.
고속도로 굴다리를 넘어서니 강둑이 가까이 보였다. 전도는 하동과 남해, 광양의 갈림길이기도 하다. 가까운 곳에 고향을 두고서도 어릴 적부터 객지에 머무르는 것을 좋아했던 나로서는 친숙하지 않은 곳이었다. 그런데 작년 이맘때 하동읍에서부터 강변을 따라 이곳까지 긴 도보여행을 한 적이 있었다.
마트가 있는 주변에다 차를 세우고 빵과 아이스크림을 샀다. 점심으로 비빔밥 한 그릇을 해 치웠으나 여행에서 충족시켜야할 포만감이 덜했고, 차안의 열기도 만만찮았다.
고속도로 인터체인지가 있는 곳이라 차들이 많다. 지난주에 이어 이번 주까지 각종 기념일이 끼어있고 날씨가 좋아 야외를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세상 살기가 어렵다고들 아우성을 질러대면서도 놀만한 유원지마다 차량과 사람들로 넘쳐난다. 언제부터 우리가 이렇게 여유로워졌는지 궁금한 부분이다.
다시 차를 몰아 남해바다를 향하여 달렸다. 지난번에도 이곳은 공사 중이었는데 여전히 그대로였다. 반대편 진교에서 남해를 잇는 도로도 내가 알기엔 도로확장공사가 근 10년 넘게 계속되고 있다. 본래 선거철이면 공약은 거창하게 세워놓고 나서 정작 실천은 시간이 많이 걸린다. 예산을 확보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근처 갈사만을 보더라도 오래 전 제철소가 들어선다며 기대를 갖고 많은 준비를 하더니 없었던 일로 되어버려 유치권행사 프랑카드가 걸려 있는 것을 본적이 있었다. 그래도 현지 주민들은 그러한 정치인들을 배척하질 않는 게 특이하다. 그는 자신을 몰라주어도 자신은 그와 친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는 생각이다.
바닷가로 향하는 도로를 타고 내려간 곳 고전면에서는 주민을 위한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크고 작은 천막을 치고 그 속에서 음식물을 나누어 먹으며 노래잔치가 한창이었다.
조금 떨어진 바닷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트렁크에서 은박깔개를 꺼내어 물 빠진 작은 섬으로 건너갔다. 답답한 마음이 다소나마 가라앉는다. 목조다리 밑에선 황새 한 마리가 우두커니 해변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녀석도 황혼 부루스를 서러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바닷물이 점점 빠져들자 어린 애들을 동반한 외지인들과 동네 할머니들이 조개 캐기에 나섰다. 손동작을 보니 조개가 있긴 한데 별반 재미는 없는 모양새다.
노래자랑이 끝자락에 왔는지 실력들이 그저 그랬다. 마지막 두세 명 점수를 매긴다면, 가사 50점, 박자 30점, 음정 15점정도? 하여간 아무리 권유며 흥에 나섰다 해도 분위기를 깨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어야 했다. 하긴 그런 재미라도 없으면 시골살이가 뭔 재미가 있을라고.
그렇게 한동안 귀청을 울려대던 마이크 소리도 꺼지고 바닷가는 적막을 깨는 통통배 엔진소리만이 들려오고 있었다.
불어오는 시원한 바닷바람에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짐을 싸서 다시 차를 몰고 남해대교를 건너니 남해각이란 건물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옛날 생각이 머리에 떠 올랐다.
30여 년 전, 부산에서 직장을 다니던 중 우연한 기회에 친구를 사귀었었다. 당시에는 지역 간의 차별이 있었음에도 전북 임실이 고향인 그는 나에게 모든 면에서 잘 대해 주었었다. 우리는 급격히 가까워졌고, 가끔 만나서 술을 마시고 여행도 같이 하였었다. 그러던 중 어느 초여름 그는 나에게 남해에 볼일이 있다면 같이 갈 것을 제안했고 둘은 시외버스에 올랐었다.
그가 남해각에서 사람을 만나 볼일을 마쳤으나 우리가 부산으로 되돌아갈 차가 끊겨버렸었다. 하는 수 없이 남해읍으로 향하여 여인숙에 숙소를 정하고 실컷 술을 마신 적이 있었었다. 그게 내가 나이 마흔이 될 때까지 남해에서 머문 최초의 추억이었었다.
그 후 그와의 관계는 지속되다 사소한 말다툼으로 우린 헤어졌었다. 시간이 지나 내가 부산을 떠나온 후 그를 몇 차례에 걸쳐 찾았으나 끝내 그의 소식을 알 길이 없었었다. 그에게 더 잘해주지 못한 것이 못해 아쉬웠었다. 서로가 외롭던 시절의 추억이라 내내 마음의 빚을 지고 살아왔다.
남해의 바닷가를 이동하다 갯벌체험 무리들을 보았다. 수백 명이 넘을 것 같은 사람들이 물이 빠진 바다에 들어가 조개를 줍고 있었다. 관광버스며 승용차 그들이 타고 온 차량들의 행렬도 대단했다. 대부분이 어린 아이를 데리고 온 젊은이들 있지만 할아버지 할머니와 삼대가 같이한 보기 좋은 가족들도 있었다.
요금은 1인당 10,000원인데, 빌린 장비를 반납하면 2,000원을 돌려받는다? 하여간 대략 현장에서 계산을 해보아도 바닷가에 깔린 돈이 수백 만 원이라. 과연 풍요롭고 살만한 동네인 것 같았다.
다시 남해대교 아래로 돌아와 횟집에 앉아 쫄깃한 자연산 회를 먹었다. 이곳도 몇 년 전에 도보여행을 하였던 곳으로 바다는 언제보아도 마음을 설레게 하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진교를 들어가기 전에 ‘사등’이란 이정표가 눈에 들어온다. 가보진 못하였지만 그곳 또한 한때는 나의 마음이 머물러 있였었다. 40여 년 전 군대생활을 하면서 라듸오에서 흘러나오는 펜팔구함이란 소리를 들었었다. 여자가 감히, 그때도 그랬었다.
군인이란 편리한 신분을 이용하여 접선을 하였더니 답장이 왔었다. 사등이라는 자신의 고향은 금오산과 바다가 보이는 언덕배기라고 하였다. 전형적인 시골처녀는 아니라고 생각은 하였으되 그녀의 글 솜씨는 제법 괜찮았다. 취침점호가 끝나면 내가 부쳐져 온 편지를 병사들에게 읽어 줄 수 있는 정도의 글이었으니 말이다.
휴가를 나와 두 번을 만났으나 누님이 만남을 만류했었다. 이야긴 즉, 순수하지 않을 것이란 짐작이었었다. 한동안 소식이 없다 제대 후 어느 날 편지를 받았었다. 낼 모레 결혼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 편지를 받아보니 우체국 소인이 열흘 전에 찍혀있었다.
6년 전쯤엔가 갑자기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잘 사느냐?’고. 어떻게 내 전화번호를 알았을까? 아는 사람도 없는데. 그리곤 다시 연락이 끊어졌다. 원 사람도 옛일은 그렇다치고 매정하기로서니...언젠가 그녀의 고향마을에라도 한번 가 보아야겠다.
오늘도 차는 달린다. 그러나 아무런 추억도 떠오르질 않는다. 자주 다니는 도로나 고속도로엔 추억이 없다. 있었어도 비바람에 씻겨 나가버렸을 것이다. 누구를 기억하고 그 무엇을 생각나게 한다는 것은 나의 통장에 돈이 남아 있다는 것과 같이 푸근하게 느껴진다.
돌이켜보면 다정한 누님도, 시골로 간 짝지도, 헤어져 소식모르는 친구나 바다가 보이는 언덕배기의 그녀도 아련히 가물거릴 뿐 가슴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마음은 한적한 옛 시골의 추억을 갈구하면서도 육신은 복잡스런 도회를 향하고 있다. 늙었음이고, 자신의 의지대로 삶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현실이다.
때론 나의 염원은 배낭을 메고 인도나 아프리카 사막을 끝없이 걷는 것인데, 그것은 그러한 지난 일들을 잊어버리고 싶다는 어리석은 판단에서 온 연유일까? 돌아올 기약 없이 마냥 그렇게...
첫댓글 어디 기행문 출품이라도 한다면 우수상은 족히 탈 만한 수작의 글 입니다
저 경우도 마라톤대회나 동기회 행사를 치뤄고 하루도 지나기전 별반 큰의미를 요즘은 찾기 힘들다는 생각인데
가급적 그냥 생각을 줄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생각을 불러 일으키는 글도 잘 안쓴다는 ㅋ 게으른 자의 변명이죠~~
참! 지극히 소극적으로 산다고 하였는데 인연이란 실타래처럼 걸려 있더이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