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정사진
김정호
음력 4월 보름날. 아버지의 기일忌日이다. 며칠 전부터 준비한 제수 음식을 제사상에 예법대로 진설한다. 마지막으로 아버지 영정사진을 제사상 제일 위쪽에 모신다. 촛불을 밝히고 향을 사르며 제사를 정성을 다해 모신다.
아버지는 졸수卒壽를 한 해 앞두고 5년 전 시절 인연을 다하시어 저세상으로 먼 길을 떠나셨다. 아버지가 사셨던 어려운 시절, 누구나 다 그렇듯이 힘들고 어려운 세상에 오셔서 많은 영욕의 세월을 보내고 가셨다. 다섯 번째 맞이하는 제사에 정성을 다한다. 제사에 참석한 가족들이 엄숙한 분위기에 숨을 죽인다. 장자인 내가 초헌관이 되고 아들이 아헌관으로, 동생이 종헌관으로 술을 따르고 절 2배씩을 한다.
몇 해 전만 해도 우리 집에는 제사가 많았다. 많게는 1년에 기제사만 9번 모셔야 한다. 보통 4대 봉제사로 8번 제사를 모시지만, 증조할머니가 두 분이셔서 9번 제사를 올린다. 게다가 설, 추석 명절 차례상에다 가을 묘사까지 합하면 1년에 12번 집안에 기름 냄새가 가득하다. 내가 청도 김씨 주부공파 원자 채자元采 할아버지 이후 8대 종손이므로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해서 제사 음식 차리고 제사를 모시는 일은 다반사가 되었다.
없는 살림에 제사 돌아오듯 한다고 시도 때도 없이 다가오는 제사 준비에 아내의 수고가 여간 아니었다. 호랑이는 굶어 죽어도 풀은 뜯어 먹지 않는다고 하실 정도로 완고하신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2년 전 큰 결단을 내리셨다. 기제사는 2대 조상까지만 모시고 명절 차례는 4대 조상님을 모시기로 하였다. 정통 예법에는 맞지 않는 방식이지만, 세류에 맞는 변칙적인 방법을 택하신 것이다.
제사를 모실 때에는 신위神位를 담은 지방紙榜 써서 붙이고 제사를 모신다. 제사를 주관하는 제주가 초헌관이 되어 술잔을 채우고 제사 축문을 읽는 것이 통상적인 예법이다. 허나 우리 집 가풍에는 축문을 읽지 않는다. 제례 법이야 예로부터 전해오는 가풍에 따라 각자 다를 수 있다. 그것을 아무도 탓하거나 시비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예로부터 축문과 지방을 쓸 줄 알면 고을에서 선비 대접을 톡톡히 받았었다. 일자무식인 농투성이들은 제사 때가 되면 고을 선비에게 작은 선물꾸러미라도 들고 가서 축문과 지방을 써가지고 와서 제사를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우리 증조부께서 학덕이 높은 선비로서 평생을 사셨다. 그 뒤를 이어 모두 나이가 들면 지방 쓰는 법을 몸으로 익히고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 아버지도 그렇게 하셨고 나 역시 당연하게 지방을 붓글씨로 정성을 다해서 쓰곤 하였다. 이제는 그 풍습을 아들에게 물려줄 때가 되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아들에게 지방 쓰는 법을 알려주었으나 시큰둥한 표정이다. 붓글씨도 써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한문 실력도 영 아니다. 붓글씨는 굳이 붓이 아니더라도 붓을 닮은 펜들이 많이 있으니 어느 정도 연습하면 흉내는 내겠지만, 문제는 어려운 한문이다. 아버지 지방에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 등 남자 조상님들 지방은 글자 한두 자씩만 추가하면 되겠지만. 아직은 생존해 계시지만, 언제 어떻게 가실지 모를 어머니, 할머니, 증조할머니, 고조할머니 두 분 지방에는 본관과 성씨를 써야 하므로 조금은 복잡해진다. 그도 글자가 한정되어 있으니 조금만 익히고 노력하면 별로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아들 말로는 요즘 세상에 누가 붓글씨로 일일이 지방을 쓰느냐며, 간단하게 컴퓨터에 저장해 두었다가 제사를 모실 때 뽑아서 정해진 규격대로 잘라서 지방을 대신하자는 주장이다. 우리 아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교육과정에서 한문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요즘 젊은 세대들의 공통된 의견일지도 모른다. 아들뿐만 아니라 손자 대에도 제사에 지방 쓰는 일이 풍습이 전승되리라는 보장이 없다. 해서 영정사진이 있는 분은 사진으로 대체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문제는 명절 차례를 지낼 때 윗대 조상님들은 영정사진이 없으니 어떻게 하느냐다. 결국 내가 직접 쓰기로 하고 차후에는 아들의 처분에 맡길 일이다. 정 안되면 아들의 말과 같이 컴퓨터에 저장된 지방 글을 활용하는 방법도 있으리라 생각이 된다.
제사를 모신다는 것은 돌아가신 조상님을 추모하는 절차이다. 누가 이르기를 잘 차려진 음식을 조상님이 다 잡수시고 가신다면 모르기는 해도 제수음식을 지금의 절반도 차리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어쩌면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제사를 모시고 남은 음식으로 동기간에 모여서 조상님을 추모하고 가족 간의 우애를 돈독하게 하는데도 큰 의미가 있다.
내가 가고나면 영정사진으로 제사를 모시든, 지방을 쓰서 붙이고 제사를 지내든 내가 간섭할 일이 못 된다. 아들의 처분에 맡길 수밖에 없다. 아들 역시 또 그의 아들의 처분에 따를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아무리 변한다 하여도, 조상님들이 돌아가신 날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아름다운 제례 문화는 영원하였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첫댓글 세류에 맞는 방법을 택하신 아버님이 대단하십니다. 제례는 참 어려운 일 같습니다. 산자와 죽은 자를 어떻게 만나게 할 것인가. 후세들이 더 현명하게 만들어 가겠지요
사무국장님 어줍잖은 글 올릴까 말까 많이 망설이다 올렸습니다 허나 수필을 쓰야하는 의미를 다시 생각하면서 글 올렸습니다 고맙습니다
저희 집도 제사는 확실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같은 생각들을 하시는구나 싶어서 빙그레 웃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소진 선생님 현대를 살고있는 우리들의 고민이 아니겠습니까? 이 글을 쓰면서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이런 고민이 수필을 쓰야하는 이유로 받아들입니다 편안한 밤 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