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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5일(목) 제13일차 변화무쌍한 날씨를 보다
5시 50분에 기상했다. 햇반과 멸치로 식사를 했다. 나오니 가이드 뤼가 작별인사를 하러 문 앞에 나와 서있었다. 같이 사진을 찍고 또 찍어 주었다. 그리고 출발했다. 성당에 달 비친 모습이 아름다웠다. 오늘 오르니요스 델 까미노로 간다. 지명이 길다. 까미노라는 명칭이 붙은 이름은 천 년 이상 이어져 온 순례길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마을 이름이라고 했다. 거리는 29.5킬로다. 도시 성문에 나와 도심 시내 길을 걸었다. 도중에 비가 내려 우비를 착용했다. 도심 길거리에도 조각과 벽화 등 볼만한 것이 많았다. 그 중 한 벽화는 실제 나무와 어울려 예술성을 더한 듯 보였다.
이제 교외의 까미노 길을 걷게 되었다. 바르에서 쉰 뒤 내가 먼저 출발했다. 비가 내리다 그치다 반복하더니 이제는 세찬 바람에 진눈깨비까지 내렸다. 그러더니 비도 그쳤다. 날씨 변화무쌍하다.
오르니요스 델 까미노 마을 표지판이 보인다. 이내 숙소에 도착했다. 11시 45분이다. 거리가 근 30킬로였는데 4시간 45분 만에 도착한 것이다. 아무래도 진눈깨비가 내려 주변 풍경 볼 것 없이 앞을 향해 걸었고 혼자 출발하여 걸은 것이 그렇게 빨리 오게 된 것 같다. 숙박비로 10유로를 냈고 이층 침대에 배정을 받았다.
박동문 선생님에게 어제 내부 성당 내부 사진을 카톡으로 보내 달라고 했다. 이번에도 일찍 주간 미션에 달성해 통신비 할인 신청을 했다. 슈퍼에서 사과, 토마토와 식사용으로 양파도 구입했다. 와이파이가 한 동안 작동이 안 돼 애먹었다. 간밤에 벌레에 물린 자국이 크게 났다. 그 이야기를 했더니 주변에서는 내가 물린 사실보다는 베드버그에 물린 것이 더 걱정하는 듯했다. 확인이 필요했다. 전 부장에게 가서 물린 자국에 대해 물었다. 전 부장은 베드버그가 아니라고 했다. 베드버그에게 물리면 줄 잇듯이 물린 자국이 생긴다고 했다. 그러면 내가 무엇에 물린 것 같으냐고 재차 물었다. 그것은 아마 풀숲에 들어갔거나 앉았을 때 벌레에 물린 것일 수 있다고 했다. 어제 걸을 때 물길 아닌 풀길을 걸은 것이 원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 부장이 몹시 가려우면 노 선생님에게 약이 있으니 약을 얻으라고 했다. 노 선생님에게 가서 사정을 이야기하고 약을 얻었다. 그간 베드버그에 대한 공포 때문에 줄곧 침대에서 침낭을 깔고 있었다. 알고 보니 나 이외에 침대에서 벌레에 물린 사람도 있었다. 저녁은 외식했다. 밤에 어깨에 파스를 부착한 뒤 잤다.
4월 26일(금) 제14일차 메세타 고원을 즐기다
5시 50분에 기상했다. 7시 5분 전에 출발했다. 오늘은 어제와 달리 비가 내리지 않았다. 한결 낫다. 우리가 거의 마지막에 출발한다. 숙소 앞에서 항상 마지막에 점검하고 출발하는 전 부장이 나를 배웅하듯 쳐다보았다. 오늘은 까스트로 헤리스로 간다. 거리는 21킬로다. 이른 아침이라 아직도 어두운데 사람들 어지간히 일찍들 준비하고 출발한다. 날씨 쌀쌀하고 바람도 부는 편이었다. 박 선생님은 날씨가 춥다며 장갑을 꼈다.
나는 장갑을 끼지 않았다. 사실 겨울에도 장갑을 잘 끼지 않는다. 내복도 안 입은 지 오래 되었다. 몸이 나면서 추위를 덜 타게 되었기 때문이다. 장갑을 잘 끼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는 사진을 찍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사진은 순간을 놓치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장갑을 끼고 있다가 벗고 사진을 찍으면 늦다. 또 다시 끼는 것도 번거롭다. 그래서 아예 장갑을 안 끼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다.
메세타 고원은 말 그대로 높은 지대에 있다. 주변에 나무가 없고 초원이 아득히 펼쳐져 있다. 그 평원 지대에서 부는 바람을 온몸으로 받아야 한다. 나는 그 쌀쌀한 바람을 즐겼다. 시원해서 좋다고 생각했다.
멀리 지평선에서 구름을 뚫고 해가 솟기 시작했다. 나는 연신 돌아보면서 일출 장면을 찍었다. 햇살이 내 몸을 비끼고 지나가며 내 긴 그림자를 만들었다. 내 작은 키가 부쩍 커진 모습이다. 고운 황톳길 위에 설핏 비치는 햇살로 빚어진 거인(?)의 모습이 순간 아름답게 보였다. 내가 내 모습을 찍었다.
초원을 배경으로 박 선생님 사진을 찍어 주었다. 나도 모처럼 찍어 달라고 했다. 기분 좋은 상태였다. 찍은 사진을 추후에 보니 내가 몹시 탔다. 얼굴도 그렇고 손등도 그렇고. 햇살 닿은 부분과 안 닿은 부분이 확연히 달랐다. 그간 날이 덥지 않고 흐리고 비가 와서 썬크림을 바르지 않았었다. 여기는 자외선이 강한 지역이니 신경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푸른 하늘과 드넓은 초원도 아름답지만 멀리 줄지어 서있는 풍력 발전기의 모습도 하나의 풍경이었다.
고원 지대에서 잠시 내려가는 계곡에 온타나스 마을이 있었다. 바람도 잦아들고 날도 훨씬 밝아졌다. 바르에 들어가 커피 한 잔 하며 쉬었다. 이제 평원에 난 길이 아니라 산길로 간다. 또 다른 기분으로 걸었다. 걷다가 멀리 하얀 탑이 보였다. 둔덕을 넘어 가까이 가서 사진을 찍었다.
긴 가로수 길을 한참을 걸어 까스트로 헤리스에 오게 되었다. 그 입구에 거대하고 성문이 있었다. 아름답고 웅장해서 가까이서도 사진을 찍었다.
산성에서 마을 입구까지 다시 직선으로 뻗은 길을 걸었다. 가까이 보여도 거리를 재보니 1킬로가 넘었다. 까스트로 헤리스는 요새 마을이라고 했다. 그리 보였다. 멀리 산성이 보이고 교회가 보였다. 조화가 이루어져 그 모습도 아름다웠다. 마을로 가는 주변 풍경도 아름다웠다. 마침 낮은 두 개의 산이 구름의 장난으로 명암이 뚜렷이 대조되었다. 그 풍경도 아름다웠다.
마을 입구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 마을로 바로 들어가는 길과 숙소 등으로 가는 길로 나뉘어 있었다. 우리는 거기서 숙소로 가는 길을 택했다. 그래도 앞으로 숙소까지 800미터는 더 가야 했다.
알베르게에 찾아 갔다. 12시였다. 내일 아침을 포함하여 13유로를 냈다. 여기는 전부 1층 침대여서 좋았다. 우리는 2층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와이파이가 침대에서는 잘 안 돼 로비에 와서 했다. 여기는 자판기에 신라면, 빵, 소시지, 음료수 등이 진열돼 있었다. 점심은 빵과 미숫가루로 때웠다. 윤 이사에게 차문을 열어 달라고 했다. 캐리어에서 햇반과 라면을 꺼냈다. 슈퍼에 갔다 왔다. 간식으로 먹을 사과, 토마토 등을 구입했다.
산성의 요새에 갔다 오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갔다 온 일행이 있어 물어보니 30분 정도 걸린다고 했다. 박 선생님은 그 시간에 저녁 준비를 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혼자 가려다가 혹 같이 가실 분이 있느냐고 일행에게 물었다. 일행 중 오늘 카페에서 대화를 나눴던 여자 분이 같이 가겠다고 했다. 마침 당신도 가고 싶었는데 잘 되었다고 했다.
산성에 올라가면서 본 표지에 세계 문화유산이라고 쓰여 있었다. 산성에 올라가기를 잘 했다고 생각했다. 길 따라 동굴 집이 여러 채가 있었다. 몇 집은 여기서 사람이 살고 있는 듯했다.
두 갈래 길에서 대로가 아닌 소로를 택해 올라갔다. 기대에 부응하듯 아름다운 성채가 나무 사이로 나타났다.
성채 입구를 찾아 안으로 들어갔다. 아래 성채를 둘러 본 뒤 계단을 타고 이층 성채에도 올라가 보았다. 이번에는 산성을 나와서 산 정상으로 올라갔다. 성 전경을 볼 수 있었다. 성 전경을 찍었다. 그리고 아까 가지 않은 대로를 통해 내려왔다.
박 선생님은 무척 시장했던 듯 내가 예정 시간보다 늦게 온 것을 나무랬다. 주방엔 닭요리를 해 먹고 있던 일행이 있었다. 우리 반찬에 닭고기 반찬까지 얻어먹으니 밥이 더욱 맛이 있었다. 식사 후 내가 박 선생님에게 산성이 좋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박 선생님이 같이 올라가 보자고 했다. 좀 전에 내려 왔지만 다시 산성으로 올라갔다.
아까 산성 이층만 올라갔는데 알고 보니 3층도 있었다. 아직도 강렬한 햇살에 산성이 온통 황금빛이었다. 성채 위에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사방이 너른 평야에 홀로 우뚝 선 위치에 산성이 있었다. 천혜의 요새였다. 그리고 저 멀리 언덕에는 바람이 많이 부는 듯 열 지어 서있는 풍력 발전기가 수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 가운데 우리가 서 있는 산 그림자가 길게 드리웠다. 아래로는 한낮에 우리가 걸어 왔던 길과 교회, 그리고 마을이 보였다. 석양을 맞이하며 마을로 내려왔다.
오늘 산성을 두 번 올라서인지 걸음 수가 4만보를 넘었다. 발가락도 그간 걸은 후유증으로 부어 있었다. 그 발가락을 밴드로 감쌌다. 그리고 어깨에 파스를 부착하고 잤다. 밤에 난방기가 제대로 작동이 안 돼 춥게 잤다.
4월 27일(토) 제 15일차 문화 유적을 보다
5시 반에 기상했다. 아침은 어제 산 빵, 우유, 주스로 대신했다. 6시 50분에 출발했다. 오늘은 프로미스타로 간다. 25.5킬로다. 마을길을 잘 찾아 빠져 나왔다. 일단 앞에 보이는 언덕을 넘어가야 한다. 지평선 너머에서는 해가 떠오르기 직전이었다.
굽이굽이 오르는 언덕길이었다. 언덕은 떠오르는 태양이 햇살로 온통 붉은 빛이다. 앞에 보이는 언덕의 꼭대기에는 하얀 석비가 햇빛을 받아 노랗게 빛났다. 저기 넘어가면 일단 정상에 오르는 것이다. 굽이마다 돌아서서 일출을 바라보았다.
언덕 위에 올라 정상에 서있는 비 앞에 섰다. 비를 찍었다. 그리고 평원을 지나 내리막길에 접어섰다. 드넓은 평원이 펼쳐졌다. 그런데 조금 전까지 따라오던 박 선생님이 보이지 않았다. 기다리다가 혼자 내리막길을 탔다.
내처 쭉 펼쳐진 평원의 길을 걸었다. 삐수에라 강의 다리를 건넜다. 주 경계를 넘었다. 리오하주에서 빨렌시아 주로 넘어 온 것이었다. 그 빨렌시아 경계비 사진을 찍었다.
도중에 바르에서 쉴 때 박 선생님이 왔다. 속이 불편해서 용변을 보고 왔다고 했다. 그런 줄 모르고 혼자 달려와서 미안한 마음에 커피 한 잔 쏘았다. 이후 같이 걸었다.
계속 평야를 걸었다. 그 드넓은 땅이 농지였다. 이는 인력으로는 안 될 터. 거대한 농기구가 그 농지에 서있었다. 변화 없는 농지의 푸른 풍경을 보며 길을 계속 걸었다. 세 언덕이 조화를 이루며 승경을 이루었다. 눈에 잠시 휴식을 주었다.
다시 계속 대지를 걸었다. 보야디야 델 까미노 마을에 왔다. 인구 200명 정도의 작은 마을이었다. 전에는 순례자를 위한 병원을 운영했고 주민 2천 명 정도가 산 큰 마을이었다고 한다. 14세기에 지어진 성모승천성당이 있었다. 이 마을에서 태어난 아이는 성당 안의 13세기에 만들어진 세례대에서 지금도 세례를 받는다고 알려져 있다.
성당 밖 광장에는 15세기에 지어진 고딕 양식의 심판의 기둥이 있다. 이 마을의 자랑거리이자 까미노 프랑스 길에서 가장 아름답고 오래된 심판의 기둥이라고 불리고 있다고 한다. 석주 기둥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때 일행 중 가톨릭 신자인 한 분이 왔다. 성당에 들어갈 입구를 찾는다고 했다. 박 선생님도 그분과 동행했다. 나도 사진을 찍은 뒤 입구를 찾았다. 그런데 문이 닫혀 있었다. 사제인 듯한 분에게 입구를 물었더니 문이 닫혀 있다고 했다. 개방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박 선생님이 보이지 않기에 먼저 갔나 보다고 길을 떠났다. 그런데 미심쩍었다. 그냥 말없이 갔을 리는 없을 터이다. 그래서 박 선생님을 한참을 기다리다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행방을 물었다. 박 선생님이 오셨다. 그분 또한 나를 찾는다고 마을을 돌다가 온 것이라고 했다. 이후 다시 동행했다.
이번에는 가스띠야 수로를 만났다. 로마시대 이래 18세기 이후까지 옥수수 방앗간을 돌리는데 쓰였고 경작물을 운송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수변 길을 따라 가는데 마침 수로를 따라 관광선이 오고 있었다. 이제는 수로가 운반용, 농사용뿐만 아니라 관광용으로도 사용되고 있었다.
옛 수로시설 앞에 왔다. 옛 로마시대의 역사적 유물의 현장이었다. 다리를 건넜다. 이제 프로미스타 숙소 앞에 다 왔다. 박 선생님이 시장했던지 식당에서 식사부터 하고 숙소로 가자고 했다. 그러자고 했다. 점심으로 단품인 빠에야를 시켰다. 생각보다 가격이 비쌌다. 콜라 값을 포함하여 17유로를 달라고 했다. 빠에야 가격이 너무 비싸 어찌된 영문인지 물었다. 점원은 빠에야 음식 옆에 쓰인 가격은 다른 음식 값이다. 내가 시킨 음식은 아래 쓰인 가격이라고 했다. 속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내가 순례 길에서 바가지를 썼다고 느낀 첫 순간이었다. 식사를 한 뒤 숙소 앞으로 갔다. 숙소 앞에도 식당이 많이 있었다. 좀 더 걸어와 여기에서 식사를 할 것을.
프로미스타엔 우리가 좀 빨리 도착했지만 식사한 뒤 숙소에 왔기에 결과적으로 숙소에 늦게 온 것이 되었다. 2층 침대를 사용하게 되었다. 먼저 슈퍼에 갔다. 가는 길에 본 가로수가 아름다웠다. 저녁엔 인근의 호텔 식당에서 정식 메뉴를 시켰다. 호텔 음식이라 그런지 깔끔하다. 하몽도 나왔다. 그런데 가격은 12유로밖에 되지 않았다.
숙소 인근에 어린이 놀이시설이 있었다. 한 바퀴 휙 돌며 구경했다. 저녁 햇살에 비친 성당도 아름다웠다. 사진을 찍은 뒤 숙소로 돌아왔다. 와이파이가 잘 되어서 뉴스 검색도 하고 카톡도 했다.
4월 28일(일) 제16일차 전 부장과 대화를 나누다
5시 50분에 기상했다. 아침 식사는 과일로 때웠다. 준비를 마친 뒤 6시 40분에 출발했다. 오늘은 까리온 데 로스 꼰데스로 간다. 비교적 거리가 짧은 19.5킬로다.
오늘은 평원 길을 걸었다. 그늘 없는 평원 길을 그것도 직선대로 옆 까미노 길로 가게 되었다. 조그마한 마을을 지났다. 길거리에 순례자 상이 서있었다. 또 까미노 길을 한참 갔다.
이제 바르에서 좀 먹고 가고자 했다. 그런데 그 마을에 바르가 없었다. 마을 주민이 위로 가면 있다고 했다. 우리가 망설이니까 손짓을 해 주었다. 가서 보니 조그마한 호텔이 있었다. 그 카페에서 쉬었다. 카페 콘 레체를 시켰는데 가격도 일반 바르와 다름이 없고 심지어 커피를 더 주기도 했다. 우리는 서비스에 만족했다. 우리나라 호텔과는 그 가격이 전혀 달랐다. 다음부터는 호텔에 가서 커피를 마시는 것을 주저하지 않게 되었다.
또 똑같은 길을 걸어갔다. 어제 공지에서 차도와 나란히 이어진 길도 있지만 포블라시온 데 깜포스에서 우측 길로 가면 우회루트가 있다. 좀 더 한적하게 걸을 수 있다고 했다. 과연 두 갈래 길이 나왔다. 그런데 아직 ‘포블라시온 데 깜포스’라는 표지는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직진했다. 걷다 보니 그 표지가 나왔다. 다시 되돌아가기는 그렇고. 그냥 그 직선 길을 걸었다.
가는 도중에 바르에 앉아있는 이기숙, 전일섭 부장을 보았다. 이기숙님이 반가워했다. 그제 산성에 동행한 분이다. 나에게 오라고 하며 커피 한 잔을 사주었다. 그 이후 나는 전 부장과 같이 걸으면서 대화를 나눴다. 전 부장은 시인으로 등단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나도 내 소개를 했다. 국어 선생이었고 내 아버님이 시인이었다. 아버님 돌아가신 후 내가 유고시집을 냈다고 했다. 나중에 귀국하면 시집도 보내 드리겠다는 약속도 했다. 대화하면서 가서 지루함을 면했지 오늘 볼 풍경은 그다지 없었다. 땡볕에 그을린 일직선 대로변의 황톳길, 똑같은 모습만 보여 주는 푸른 농지뿐이었다.
까리온 데 로스 꼰데스에 도착했다. 시내로 들어왔는데 숙소 방향을 찾을 수가 없었다. 교차로 한 가운데 순례자 상이 서있었다. 알베르게를 어느 방향으로 찾아가야할지 모르겠다. 그냥 오던 방향으로 직선 길로 갔다. 알베르게가 보이지 않았다. 물어물어 숙소를 찾았다. 숙소에 12시에 도착했다.
여기는 수녀가 운영하는 숙소였다. 7유로를 지불했다. 오늘은 다 1층 침대였다. 위치만 선택하면 되었다. 점심은 식당에서 햇반과 라면으로 때웠다. 박 선생님이 설거지를 한다고 내 숟가락까지 가져갔는데 없어졌다. 내가 다시 주방에 가서 찾아보았지만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 없었다.
식후 슈퍼를 찾아 외출했다. 얼마 안 가 바로 아까 그 교차로 지점이 나왔다. 처음에 방향을 좌측으로 잡았으면 바로 숙소 입구에 도착했을 것이었다. 슈퍼는 찾을 수 없고 아까 오다가 본 가게에 갔다. 거기서 과일 등을 구입하고 돌아왔다.
저녁에 식사하러 다시 나갔다. 아까 외출하면서 알아 둔 레스토랑으로 갔다. 그 식당 간판에는 한국어로도 쓰여 있었다. 7시 반부터 문을 열었다. 문 앞에서 기다렸다가 들어갔다. 손님이 홀 안에 가득 찼다. 대부분 우리 일행들이었다. 우리는 송아지 고기를 주문했다. 고기 양이 많아 포식했다. 식사를 마친 후 숙소로 돌아와 쉬었다.
4월 29일(월) 제17일차 단순한 색조의 길, 화려한 색조의 하늘
아침 5시 반에 일어났다. 한 호실에서 일층 침대에 다 같이 자니 사람들이 대충 아침 몇 시에 일어나서 나가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6시 되니 벌써 호실의 사람들이 거의 다 빠져 나갔다. 이런 상황을 두고 박동문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옆 침대에 누워 있던 어떤 여성분이 담요를 걷고 앉더니 지금 자고 있으니 조용히 해달라고 했다. 어이없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여기 세 명을 제외하고 다 나간 상황이었다. 그 사람들이 부스럭거리며 준비하고 빠져 나갈 때는 잘 잤고 지금은 이야기 소리 때문에 자지 못하겠다는 것인가. 알겠다고는 했다. 아무튼 이상한 사람들이 꽤 많다.
우리는 준비를 마친 뒤 6시 40분에 출발했다. 오늘은 테라디요스로 간다. 27킬로로 좀 멀다. 시내를 바로 빠져 나와 대로변 까미노로 걸어갔다. 아직 이른 새벽이다. 뒤돌아 본 마을은 불빛만 남긴 채 잠겨 있었다. 야경 같았다. 그리고 하늘은 일출 전의 모습으로 붉게 물들었다. 일출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은 난생 처음 느꼈다. 저녁놀의 화려한 빛을 본 것 같았다.
오늘도 가로수 그늘 없는 길이었다. 대로변을 따라 쭉 걸었다. 어제와 똑같은 날씨에 똑같은 풍경이었다. 밭도 개간했거나 안 했거나 정도의 차이밖에 없었다. 볼만한 것은 맑고 푸른 하늘과 천변만화하는 구름뿐이었다. 나는 역으로 하늘과 구름 외 찍을 것이 없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이런 길 사진도 찍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순례길이 승경이라고 좋은 사진만 보내면 이 또한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 아닌가.
오늘 박 선생님이 컨디션이 좋은 듯 바르에 먼저 와서 나를 기다렸다. 순례자 그림이 바르 벽에 걸려 있었다. 더위에 지친 순례자의 모습이었다. 내 모습 같았다. 차 한 잔을 마신 뒤 같이 출발했다.
길이 좀 나아졌다. 이제 차로와 떨어진 순례 길로 걸어가게 되었다. 간간이 가로수가 서있는 길도 걸어갔다. 이것도 새로운 길을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사진을 찍었다.
길 위에 순례자 중 누군가 돌로 까미노 표지석인 화살표 상을 표시해 놓았다. 그 형상이 흐트러지지 않은 것은 그만큼 이 지역이 건조한 지역이리라는 반증이리라. 나는 그것도 승경이라고 생각해 사진을 찍었다. 레디고스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거기만 마을이라서 그런지 좀 가꾼 가로수가 있었다. 마을을 통과하여 까미노 길을 걸었다. 다시 평원 길을 걸어 오늘 목적지인 테라디요스에 도착했다. 알베르게는 바로 마을 입구에 있어 바로 보였다. 12시 20분에 도착했다. 10인실 1층 침대에 자리를 잡았다. 외국인 두 명과 함께 숙박했다. 작은 마을이었다.
점심은 알베르게 식당에서 먹기로 했다. 정식 메뉴가 10유로로 싼 편이었다. 후식 메뉴는 물 아니면 포도주 둘 중 선택이었다. 콜라나 맥주는 사먹는 것이었다. 포도주를 시켰다. 놀랍게도 한 병이 나왔다. 다 마시지 못하고 호실로 가져왔다.
손빨래를 했다. 그리고 이를 뒷마당에 빨래를 널었다. 휴식을 취한 뒤 홍 교수와 마을 산책을 나섰다. 너무 작은 마을이었다. 가게조차 없었다. 그냥 돌아왔다. 저녁도 이 식당에서 식사했다. 이번에는 후식으로 물을 시켰다. 식사를 한 뒤 콜라를 샀다. 마당 벤치에 앉아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다.
스페인의 명품은 하늘과 구름이다. 청명하고 푸른 하늘, 천변만화하는 구름은 정말 우리나라가 수입해야 할 천연자원이다. 숙소에 앉아서 그 구름과 하늘 사진을 찍었다. 좋은 날씨에 그새 빨래가 다 말라 건수했다.
4월 30일(화) 제18일차 샤아군을 지나다
5시 반에 기상했다. 준비를 마친 뒤 6시 40분에 출발했다. 오늘은 베르시아노스 델 까미노로 간다. 23.5킬로다. 어제 우리는 2인실 배정을 받았다. 한결 발걸음이 가벼웠다. 사람 마음은 이렇듯 간사하다.
오늘도 청명한 날씨였다. 어제와 다른 점은 구름이 없다는 것이었다. 직사광선이 직접 내리쬐었다. 그래서 그런지 덥게 느껴졌다. 카페에서 박동문 선생님이 썬크림을 내어 발랐다. 나도 얻어 발랐다. 그간 나는 배낭 무게를 줄인다면서 썬크림도 배낭에 넣어 가지고 다니지 않았었다. 이제 가지고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박 선생님은 과일을 썰어 드신다. 나에게 등산용 칼도 있다. 이 역시 똑같은 이유로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이 또한 앞으로 챙겨 가지고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숲길을 지나 발데라데이 강의 ‘성모의 다리’를 건넜다. 여기서는 보통 강이라고 부르지만, 우리 눈에는 소하천이다. 하천의 물은 다 마른 상태였다. 다리 건너편에 작은 예배당이 있었다. 그리고 옛날 마을을 출입하던 문이었던 듯 옛 건축물의 유적이 남아있었다.
계속 걸었다. 13킬로 지점에서 비교적 큰 마을인 샤아군이 나타났다. 철로를 건너는 다리를 지나 도심을 걸었다. 도중에 전일섭 부장을 만나 같이 걸었다. 샤아군은 예술적인 보물과 유적이 잔뜩 있는 마을이다. 우리는 도심을 지나가면서 멀리 개선문이 서있는 것을 보았다. 석조다리를 건넜다.
어제 공지에서 ‘석조다리를 건너 3.6킬로 지점에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뉘는데 여기서 왼쪽 루트로 가야 한다. N-120과 N –601 도로 교차로에서 우측 도로로 넘어가지 않고 길을 건너 까미노로 진입한다.’고 했다.
꼼꼼히 읽어 보면 무슨 말인지 알겠지만 대충 보아서는 특히 뙤약볕에 멍해진 머리로 보아서는 무슨 말인지 짐작이 잘 안 되었다. 다행히 우리는 전 부장과 같이 가서 길 찾는 데는 큰 문제는 아니었다.
갈림길에서 전 부장의 안내를 받아서 길을 건넜다. 그런데 그 다음 단계인 두 갈래 길에서 헷갈렸다. 다른 외국인 순례자도 헷갈리는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우리는 잘못 되었음을 직감했다. 다행히 이기숙 씨가 우리가 가야할 도로를 정확히 짚었다. 박 선생님이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던 외국인을 불러 그쪽 방향으로 가지 말라고 했다.
길 한 편에 휴식처가 있었다. 순례자들이 잠시 쉬어 가고 있는 곳이다.
12시 40분에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주변에 큰 마을은 없고 알베르게만 덜렁 있는 위치였다. 오늘 숙소 사장은 어제 우리가 머문 사장과 같다고 했다. 한 사장이 두 개의 알베르게를 운영한다고 했다. 위치를 잘 잡아서 알베르게를 운영하는 수완 있는 사업가가 아닌가 싶다.
우리는 트윈 룸 5번 룸을 배정받았다. 19유로씩 냈다. 2인실이라고 해도 우리나라 여관 수준이다. 모텔 수준에 비해서도 한결 등급이 떨어진다. 하지만 그간 다인실에서 잤던 우리로서는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캐리어에서 옷걸이, 과자, 책자, 그간 쓰지 않았던 양말과 팬티를 꺼냈다. 등산복도 새로 꺼내 갈아입었다. 차에서 물병을 가지고 나오며 그간 내지 않았던 물값으로 5유로 냈다. 방안 짐을 정리하면서 썬크림, 스위스제 등산용 칼도 이 참에 배낭에 챙겨 넣었다. 와이파이도 잘 터졌다. 만족스러웠다.
점심은 식당에서 10유로 정식을 먹었다. 후식의 오렌지는 먹지 않고 챙겼다. 식사 후 손빨래를 했다. 이번에는 수건, 양말뿐만 아니라 상의, 팬티도 빨았다. 줄이 늘어져 입지 못하는 팬티는 과감히 버렸다. 이제 여유가 생겼다. 샤워도 하고 메모도 정리하고 즐겨찾기 정리도 했다.
저녁은 햇반과 컵라면으로 식사했다. 가져온 돈을 꺼내 세어보았다. 내가 1,600유로를 가져왔다. 그중 600유로만 써서 1,000유로가 남아 있었다. 오늘이 순례길 20일차인 것을 감안하면 꽤 많이 남은 셈이었다. 그간 햇반과 라면으로 식사해서 식사비가 많이 절약되었다. 이제 햇반은 거의 다 떨어졌다. 앞으로 다 사먹는 데 돈이 더 들어갈 것이다. 어쨌든 오늘 돈도 세어 정리할 수 있는 여유는 이렇게 2인실 숙소에서 생겨날 수 있었다.4월 27일 동영상을 제작했다. 이를 공시했다. 전처럼 잠에 빠져 늦게 일어나는 실수가 없도록 알람을 6시로 조정했다.
5월 1일(수) 제19일차 그늘 없는 길을 걷다
6시에 일어났다. 박 선생님이 내가 간밤에 코를 골았다고 알려 주었다. 둘이 한 방에서 잤으니 잘 들었을 것이었다. 나는 피곤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내 몸은 내가 피곤했다는 것을 아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제 그리 힘든 코스를 걸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이 심신 불일치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내가 조심해야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지만 생각지도 않던 고민거리가 생기게 되었다. 아침은 미숫가루를 꺼내 마셨다. 짐을 꺼내 놓은 뒤 6시 40분에 출발했다. 아직은 동트기 전 서편 하늘도 멋있어서 한 장 찍었다.
오늘은 만시야 데라스 무라스까지 간다. 27킬로다. 좀 멀지만 오늘도 직선 도로다. 목적지까지 이른 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박 선생님은 컨디션이 좋은 듯 잘 걸었다. 비탈길이 아닌 아스팔트길을 운동화를 신고 가니 발가락 통증이 없어 좋은 듯 했다. 나는 그간 어깨 통증으로 고생했다. 그런데 문제는 어깨 통증이 어깨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허리까지 내려오는 것이었다. 이 또한 걷는 데 지장이 왔다.
윤 이사가 8킬로 지점 첫 마을 엘 부르고 라네로에 있는 식당에서 신라면과 햇반을 판다고 했다. 그 식당에 박 선생님이 선착해서 나를 기다렸다. 나는 신라면만 먹겠다고 했다. 박 선생님은 사드시지 않고 내가 먹는 모습만 즐기듯 바라보았다. 우리나라 신라면 맛은 아니었다. 유럽 수출용 라면인 듯했다. 기념으로 한글로 쓰인 간판 광고판을 찍었다.
그 이후 까미노 길은 대로변 길에, 직선도로에, 그늘 없는 땡볕 그대로의 지루하기 짝이 없는 길이었다. 지나가면서 큰 마을도, 작은 마을도, 농장도, 집도, 샘도, 작은 숲도 작은 그늘도 만나기 어려웠다. 그러기에 이 길은 오늘날 스페인에 현존하는 가장 완벽한 로마식 길로 평가받는다고 한다. 그 길을 걸었다. 하늘 구름만 멋졌다. 도중에 쉼터 그늘에서 잠시 더위를 식혔다.
만시야에 들어서니 그제야 수로가 보였다. 숙소 위치를 물어서 찾아갔다. 1시 40분이었다. 무니시팔 공립 알베르게였다. 5유로를 냈다. 출입문에서 기다리고 있던 전 부장이 ‘초라합니다’라고 한 마디 건넸다. 우리 호실은 5호실이라고 했다. 1층 침대에 자리를 잡았다. 폴란드 외국인 한 명이 있었다. 그 외 다들 한국인이어서 그도 불편할 듯하다. 그런데 의외로 이런 상황에 익숙한 듯 쿨하게 우리를 대했다. 짐 푼 뒤 출입문에서 나오면서 보니 현관으로 가는 길만 빼고 좌우로 양쪽에 2층 침대가 줄지어 있다. 바닥엔 배낭으로 길목이 가득 차 있었다. 숙소가 여관이 아닌 피난처 같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짐을 푼 뒤 슈퍼부터 갔다. 오늘 박 선생님이 재료를 사서 요리를 해보겠다고 의욕을 보였다. 그래서 과일, 음료수 외에도 양파, 피망 등을 샀다. 그런데 정작 돼지고기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하몽을 샀다. 점심은 바르에 가서 돼지고기를 사먹었다. 그 후 숙소로 돌아와 카톡 작업을 한 뒤 휴식을 취했다. 저녁 시간이 되었다. 주방에 요리할 재료를 가져갔지만 우리가 산 하몽은 요리용이 아니었다. 그냥 비닐을 벗겨 먹는 것이었다. 모처럼 박 선생님이 요리 실력을 뽐낼 수 있는 기회는 사라졌다. 오히려 다른 분이 요리한 고기 한두 점을 얻어먹었다. 햇반에 멸치 그리고 오늘 산 양파로 식사했다. 밤에 4월 27일자 순례길 스토리 동영상을 게시했다. 팔순 할아버지가 고맙다고 인사했다.
5월 2일(목) 제20일차 북부 지방의 대도시 레온에 가다
5시 반에 기상했다. 내가 밤에 어쨌느냐고 물어보니 오늘도 내가 코를 골았다고 했다. 나뿐만 아니라 홍 교수, 폴란드 인까지 코를 골았다고 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는 이야기였다. 미숫가루를 꺼내 아침을 대신했다. 내 준비물을 먼저 차에 실었다.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박 선생님이 준비물을 가지고 나가서 들어오지 않았다. 혹시 먼저 갔나 싶어서 전 부장에게 물으니 간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혼자 나섰다. 가는 길을 다른 때는 미리 물어 보았는데 급한 마음에 물어보지 못하고 나왔다. 6시 20분이었다. 밖은 아직 깜깜했다. 박 선생님은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앞서가는 외국인 한 분이 있었다. 내가 무심코 다리를 건너가니 고맙게도 그 방향이 아니라며 옆의 까미노 표시를 알려 준다. 한동안 그 뒤를 따라갔다.
날이 밝아졌다. 이제 나 혼자서도 까미노 표지를 확인하며 갈 수 있다. 도중에 바르 하나 있었지만 지나쳤다. 대로변으로 나왔다. 길가 벤치에 앉아 쉬었다. 박 선생님이 왔다. 화장실에 간다고 말했었다고 했다. 화장실에 나와서 내가 없으니까 전 부장에게 내 행방을 물었고 뒤쫓아 왔다고 했다.
그때부터 동행했다. 오늘은 레온까지 간다. 18.5킬로밖에 되지 않는다. 레온은 큰 도시였다. 일찌감치 우리는 레온 시에 들어섰다. 그런데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시장기를 해결하려 찾아보아도 문 여는 바르가 없다. 하는 수 없이 골목 길가에 앉아 배낭을 풀고 가져온 과일을 먹은 뒤 걸었다. 우리는 교외에서 시내 중심가 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다행히 바르를 발견했다. 커피와 빵으로 아침을 먹었다.
길 건너 레온 시 관광안내소가 있었다. 여러 명의 안내인이 나와 있어 활발히 안내 봉사 활동을 하고 있었다. 관광 지도를 얻었다. 우리 현 위치, 숙소 위치 등을 물었다. 친절하게 표시해 가며 가르쳐 주었다. 거기서 세요를 받았다. 기념사진을 같이 찍으려고 했다. 바쁘신 것 같아서 일하시는 모습만 찍었다. 그 안내인은 내가 찍는 모습을 보더니 포즈를 취해 주었다. 가다가 나는 약국에서 어깨에 붙일 파스를 샀다. 잡화점에 가서는 잃어버린 숟가락을 구입했다. 잡화점 건너편 아울렛에서 박 선생님이 원하던 가방을 살 수 있었다. 도심 입구에 들어왔다. 분수에서 내뿜는 물줄기가 시원하다.금전의 문에 왔다. 레온은 로마 군대의 주둔지였고 옛 왕국의 수도였다. 이번에는 도심을 지나갔다. 양화점에 갔다. 거기서 박 선생님은 맘에 드는 운동화를 샀다. 대폭 할인하는 상품이라고 현찰로만 받았다.
가우디가 건축한 보니테스 건물 앞으로 갔다. 건물 안에 들어가 가우디를 소개한 사진을 보고 동영상을 시청했다. 인근의 까떼드랄로 갔다. 장엄한 고딕 양식의 건물이었다. 입장료가 있다. 6유로인데 시니어 할인은 5유로였다. 5유로로 입장했다. 내부가 조각, 성화, 모자이크 장식으로 화려했다. 성당 안에 30분 이상 머물다가 나왔다.
점심으로 10유로 정식을 먹은 뒤 오늘 우리가 묵을 알폰소 호텔에 갔다. 2시 20분이었다. 배정 받은 호실에 입실했다. 트렁크를 가져와 물건을 정리하고 손빨래를 했다. 호텔인지라 와이파이가 잘 되었다. 4월 26일자 동영상을 공시했다. 동영상을 게시한 김에 첫날 피레네 산맥을 넘는 동영상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4월 13일자 동영상도 만들어 공시했다. 의미를 살리기 위해 동영상 마지막 장면에는 카톡에 게시된 단체사진을 넣었다.
저녁은 햇반과 컵라면 두 개로 식사했다. 이제 가져 온 햇반, 라면은 다 떨어졌다. 마지막 만찬이었다. 아쉬웠다. 더 가져 왔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내가 가져 온 멸치와 고추장은 더 이상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트렁크에 집어넣었다. 박 선생님은 저녁에 외출하여 거리를 구경한 뒤 돌아왔다. 나는 호텔에서 그냥 쉬었다. 오늘 산 파스를 뜯어보니 봉지에 두 개 들어 있었다. 그 중 한 개를 어깨에 붙였다. 알람은 6시 반에 맞췄다.
5월 3일(금) 제21일차 이해하지 못할 일을 겪다
알람 소리보다 먼저 일어났다. 준비를 한 뒤 7시 15분부터 호텔 조식을 했다. 식후 사과와 바나나를 챙겨 가지고 나왔다. 세요를 찍은 뒤 호텔을 나섰다. 최낙권 씨가 어제 내가 보낸 동영상에 감사 인사를 했다. 호텔을 나오려니까 박동문 선생님이 전 부장과 한동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제 박 선생님이 숙소에서 한 농담을 가지고 한 여성분이 고소를 하겠다고 여행사 측에다 이야기를 한 모양이었다. 박 선생님은 그 여성이 한 말의 내용을 심각하게 듣고 대처하는 여행사 측에 불만을 전했다고 했다. 나도 어제 농담하는 그 자리에 있었지만, 문제 삼을 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그 여성이 박 선생님 말에서 뭣을 곡해했는지 모르겠다. 물론 오해하기 쉬운 농담은 하지 않으면 좋다. 그렇다고 고소니 뭐니 하는 것은 또 무엇인가. 이 또한 이해하기 어려웠다. 8시 14분이 되어서야 호텔에서 출발했다.
오늘은 산 마르틴 델 까미노로 간다. 25킬로다. 한 동안 시내를 관통하며 걸어갔다. 먼저 공원을 만났다. 거기서 순례자 동상을 만났다. 여행사 홍보 사진에도 실렸던 사진이다. 오늘도 대로변으로 가는 길이었다. 한참을 걷다 바르에 들러 차 한 잔을 한 뒤 걸었다. 도중에 성당이 있어 들어갔다가 나왔다.
이제 도로변에서 벗어났다. 까미노 길로 들어섰다. 좀 한적해지고 걸을 만했다. 가다 보니 전 부장이 그 여성과 동행하면서 걸어가고 있었다. 여행사 측에서는 이런 사건이 발생하면 곤란해지겠지. 각별히 관리하면서 그 여성에 신경 쓰고 있는 모습이 역력했다. 나는 그 여성분이 일행으로부터 따돌림을 받거나 여행사로부터 관리대상이 되거나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그 일이 박 선생님과 관련이 되어 있어 저절로 관심의 대상이 되었을 뿐이었다.
오늘도 박 선생님은 컨디션이 좋았다. 한참 앞서 갔다. 바르 앞 의자에 앉아서 일행이 아닌 다른 여행객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도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분에 대해 물어보니 목동에 사시는 분이고 조카와 자유 여행을 하고 있다고 했다. 여행도 순례도 이분처럼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야 여행에 필요한 여러 절차를 잘 모르니까 여행사에서 위탁해서 하는 것이지만.
2시에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5유로를 냈다. 다인실 1층 침대에 자리를 잡았다. 숙소에 식당이 있었지만 마을 레스토랑으로 갔다. 흑인 여성이 카운터를 보고 있었다. 시골이라 그런지 메뉴판이 없었다. 박 선생님은 돼지고기를, 나는 살라다 믹스타를 주문했다. 가격은 다른 식당과 별 다름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평소대로 내가 계산을 하고 나온 가격대로 즉시 돈을 해결하는 것이 그간 우리 방식이었다. 내가 계산을 하러 갔다. 20유로를 주었는데 그 직원이 달랑 1유로만 나에게 주었다. 어이가 없었다. 가격을 물어보니 책정한 가격도 이해가 안 갔지만 계산이 엉터리였다. 계산을 해 주며 보여 주었지만 숫자를 볼 줄 모르는지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바쁜지 무조건 ‘노’ 하며 주방을 왔다 갔다 했다. 내가 그 자리에서 계속 기다리니까 안 되겠던지 여기 식당에 온 그 목동 분에게 계산을 부탁한다. 그분이 스페인 말을 조금 하니까 이 상황을 해결할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 같다. 나도 그분에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분이 차분히 2유로는 저분 식사 값이고 1유로는 내가 받을 식사 값이라고 설명했다. 그러자 2유로를 돌려주었다. 계산대로 하면 잔돈을 더 받아야 했다. 그 돈은 포기했다. 계산기만 두드려 보면 금방 나오는데 어떻게 저런 식으로 여태까지 장사하면서 지내왔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어이가 없었고 불쾌했다.
숙소에 돌아온 뒤 카톡 작업을 했다. 호실에서 와이파이가 안 돼 나와서 작업을 했다. 식당 측에 저녁 식사를 예약 신청했다. 저녁이 되자 박 선생님은 오늘 점심 식사 내용이 좋았다며 다시 그 식당으로 갔다. 나는 남아서 숙소의 식당에서 식사했다. 빠에야는 양이 풍부했다. 빠에야 가격이 9유로면 싼 것이다. 싸고 맛있으면 되었다. 박 선생님도 식사한 뒤 돌아왔다. 그 식당에서 주문했던 돼지고기는 못 먹었지만 식사는 잘했다고 했다. 데일리 메뉴는 가격이 정해져 있으니 시빗거리가 될 수가 없을 것이었다. 어쨌든 나도 저녁 식사에 만족하였으니 그럼 되었다고 생각했다.
5월 4일(토) 제22일차 아스트로가 도시로 오다
5시 45분에 기상했다. 넓은 호실에 외국인 혼자만 남고 한국인은 다 빠져 나왔다. 그 마지막 사람이 나였다. 불을 꺼준 뒤 나왔다. 6시 25분에 출발했다. 아직은 어두웠다.
오늘은 아스트로가 도시까지 간다. 23.5킬로다. 8킬로를 걸으니 오스삐딸 데 오르비고라는 마을이 나왔다. 아름다운 돌다리가 있었다. 자료에 의하면, 이 다리는 로마시대에 축조된 후 여러 시대를 거쳐 중보수를 거쳤고 현재 19개의 아치로 되어 있다. 까미노 프랑스 길에서 가장 긴 석조교라고 한다.
이 다리는 중세기 레온 출신의 기사 수에로의 사랑 이야기의 전설로 ‘명예의 통로’라고 불린다고 했다. 이 글을 읽고 중요한 다리라고 생각해서 다리 앞뒤 양측에서 사진을 찍었다. 다리 건너 와서 한 편에 사진 찍기 좋은 장소가 있었다. 하지만 역광 때문에 찍기 어려웠다. 하는 수 없이 다른 반대편의 장소로 옮겨 사진을 찍었다. 다리 위 아래로 새가 많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다리 인근의 바르에서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계속 그늘 없는 대로 길을 걸어야 했다. 도중에 우리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한 순례자 상이 있어 찍었다.
드디어 아스트로가 도시 교외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철로를 넘어가야 한다. 철로를 넘어가는 가교가 복잡하다. 편의성보다는 미적인 고려를 한 설치물이었다. 동행하던 홍 교수가 우리가 이런 것을 배워야 한다고 한 마디 했다. 건너가니 아스트로가 시가 보였다.
언덕을 오르니 알베르게가 보였다. 12시 35분에 도착했다. 성당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다. 5유로를 냈다. 거기서 수녀를 돕는 한국인 여성이 우리를 안내했다. 이 알베르게는 샤워실만 남녀 공용일 뿐 건물 전체가 깨끗하고 좋았다. 한 층 전체를 한국인만 사용한 점도 좋았다. 나는 4인실에서 1층 침대를 사용했다.
짐 정리를 마친 뒤 식사하러 나갔다. 조그마한 광장이 나타났다. 거기 광장의 한 식당에 들어가서 식사했다. 돼지고기 단품을 시켰다. 양이 생각보다 많다. 다 먹지 못하여 싸달라고 했다. 여기서 그런 적은 처음이었다. 식사한 뒤 숙소에 돌아왔다. 여기는 와이파이가 잘 되었다. 한동안 카톡 작업을 했다. 5월 2일 동영상도 카톡에 게시했다. 휴식을 취한 뒤 다시 외출했다. 중세 건축물의 옛터가 보존돼 있는 곳에 가서 사진을 찍었다.
아스트로가 시는 레온과 같이 로마시대에 형성된 오래된 도시였다. 광장을 지나 이번에는 가우디가 설계한 주교궁에 갔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지는 않았다. 외관만으로도 동화 속 궁전인 양 화려했다. 인근에 또 규모가 큰 까떼드랄도 있었다. 여기도 입장료가 있다. 이번에도 들어가지 않고 외관만 찍었다. 다 구경하고 돌아오면서 슈퍼를 들렀다. 큰 슈퍼임에도 우리가 찾는 라면이나 햇반은 없었다. 과일, 음료, 야채 등만 구입했다. 숙소로 돌아오면서 광장의 하늘을 보았다.
하얗게 핀 뭉게구름이 푸른 하늘과 어울려 아름다워 보였다. 사진을 찍었다. 순간 새가 구름 쪽으로 비상했다. 그러니까 내가 새 사진을 찍었다기보다는 새가 사진에 찍혔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사진 한 장 건진 느낌이 들었다.
저녁엔 오늘 낮에 싸온 돼지고기에 야채로 때웠다. 싼 값에 두 끼를 해결해서 좋았다.
5월 5일(일) 제23일차 메세타 고원 마지막 길을 걷다
6시에 기상하여 35분에 출발했다. 인근 바르에 들러 아침 식사를 하기로 했다. 토스타에 커피 콘 레체로 식사했다. 3유로였다. 바르에 고객 기재란이 있었다. 박 선생님이 기재란에 ‘다녀가다’고 사인했다. 아무튼 이런 식의 식사가 간편하고 싸서 좋았다. 그 후부터 아침은 이런 식으로 해결했다.
오늘은 라바날 델 까미노로 간다. 23.5킬로다. 오늘은 흐렸다. 흐린 가운데도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쳤다. 순간이었지만 햇살이 언덕에 내리비치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길은 어제보다 한결 나았다. 순례자들도 많이 보였다. 바르에 들어가 어제 사온 사과, 토마토, 자두 등의 과일을 먹었다. 내가 먼저 출발했다. 한참을 기다려도 박 선생님이 보이지 않기에 그냥 혼자 걸어갔다.
알베르게로 찾아가는 길은 복잡했지만 도로 골목에 숙소를 알리는 표지를 발견해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11시 35분에 알베르게에 들어갔다. 숙박비는 5유로였다. 강당 같은 호실로 들어갔다. 이층 침대가 줄지어 있었다. 그런데 여기는 두 개의 침대가 붙어 있는 형태였다. 나헤라 공립 알베르게와 같은 형태였다. 1층 침대는 몇 군데 있었다. 하지만 옆 침대에 여성이 있다고 했다. 그 자리는 잡지 않았다. 문가 통로에 남아있는 1층 침대에 자리를 잡았다. 뒤에 도착한 박 선생님이 상황을 보더니 이층침대보다는 그 자리를 사용하겠다고 했다. 실내는 좀 어둡고 추웠다.
마당으로 나왔다. 어느 분이 식사하는 것을 보니 돼지고기에 김치로 식사하고 있었다. 김치를 어떻게 시켰느냐고 물었다. 그분은 돼지고기 식사에 김치를 추가로 시켰다고 했다. 돼지고기는 6유로인데 김치 2유로다. 전체 8유로였다. 우리도 점심을 그리 시켰다. 다른 분들에게도 ‘로모 이 김치’ 그런 식으로 주문하라고 가르쳐 드렸다. 참고로 ‘로모’는 스페인어로 돼지고기 등심을 말하고 ‘이’는 영어의 ‘and’에 해당한다.여기서는 와이파이가 잘 되긴 하는데 호실에서는 안 되었다. 호실 안이 어두컴컴해서 햇살 좋은 마당에서 주로 시간을 보냈다.
저녁에는 윤 이사의 알선으로 여기 파견돼 와 있는 한국인 신부 인용균 씨를 만났다. 그분이 시간을 내서 산티아고 순례길의 의미에 대한 강의를 해 주셨다. 순례길이 만들어진 역사와 취지를 잘 설명해 주셨다.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예수의 제자 야고보는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로마 지배 당시 지구의 땅끝이라고 생각하던 갈리시아 지방으로 선교하러 왔다. 당시는 걸은 것이 아니라 배를 타고 왔다. 제자 두 명만 겨우 키운 야고보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순교를 당했다. 야고보는 제자에게 자기가 포교 활동을 하던 갈리시아 지방에 묻어 달라고 했다. 스페인은 700년 동안이나 무어인의 지배를 받았다. 그리고 야고보의 무덤은 잊혀졌다. 스페인은 고산지대인 북부 지방만 무어인의 점령을 당하지 않은 상태였다. 계시에 의하여 야고보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그 이후 이길 수 없다고 한 전쟁에서 승리하고 스페인은 무어인으로부터 해방하게 된다. 무어인의 감시에서 벗어나 있던 많은 기독교인들이 프랑스 생장에서 시작되는 북부 순례길을 걷기 시작했다. 천 년이 되는 순례길의 시작이었다. 여러분은 믿거나 안 믿거나 목마름에서 이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결과적으로 야고보의 제자들이다. 마음의 갈증을 야고보의 무덤에서 발원하는 물을 마셔 목마름을 해결하라.
쉬우면서도 이해가 잘 되는 말씀이셨다. 인 신부는 오늘 여기 참석해서 강의를 들은 사람은 오늘 저녁 미사에 참석할 것을 주문했다. 그리고 오늘 참석한 사람의 카페에 당신의 글을 게시하겠다고 했다. 또 내일 7시 반에 만나 장도를 기원하는 기도를 해주겠다고 했다.
나는 인 신부가 주문한 대로 미사에 참석했다. 여러 나라 신부가 각기 다른 나라 언어로 기도해 주셨다. 한국인 신부도 기도해 주셨다. 미사를 마치고 나와 한국어로도 소개되어 있는 안내판을 보았다.
저녁도 낮에 먹은 대로 로모 이 김치를 먹었다. 식당 측에 내일 아침 식사 시간을 물어보니 6시 반이라고 했다. 출발 시간과 관련하여 박 선생님과 상의했다. 나는 신도가 아니고 박 선생님이 참석한다면 출발 시간과 방법을 정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박 선생님이 내일 기도회에는 참석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면 내일 아침 식당에서 6시 반에 식사한 뒤 출발하기로 했다. 저녁에 성당에 가서 미사에 참석했다.
오늘로써 4월 26일에 시작된 메세타 고원 길을 이제 끝마쳤다. 그간 열하루 걸었다. 지금은 그래도 낫지만 혹서기나 혹한기에는 정말 힘든 길이 될 것이다. 오죽하면 눈물의 길이라고 할까. 내일은 모처럼 높은 산을 넘게 된다. 그보다 더 가파른 길을 내려가야 한다고 했다. 귀숙한 후 어깨에 파스를 부착했다. 상의도 바꿔 입었다.
5월 6일(월) 제24일차 오르는 길은 아름다웠고 내려가는 길은 험하였다
오늘도 5시에 출발하는 사람들로 눈을 떴다. 우리는 6시 반에 식사하고 가기로 했기에 천천히 움직였다. 오늘 기도회에 참석하고자 하는 사람들 역시 가지 않고 남아 있었다. 그런데 6시 반이 지나도록 식당문은 열리지 않았다. 안에서 준비는 하고 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출발했다. 인근의 바르에서 카페 콘 레체에 토스타를 시켜 아침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친 뒤 박 선생님이 화장실을 갔다 오겠다고 했다. 꽤 기다렸다. 한참 뒤에 나온 박 선생님이 나에게 기도회에 참석하겠으니 먼저 가라고 했다. 변심한 이유를 들어보니 어제 인 신부가 카톡에 올린 글을 화장실에서 읽었다고 했다. 산티아고를 가는 이유가 확실히 이해가 된 듯했다. 나는 알았다고 하고 혼자 출발했다. 오늘은 몰리나세까로 간다. 26킬로다. 어제 윤 이사가 공지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오늘 서서히 오르막길을 따라 6킬로 가면 마을이 나온다. 거기서 2킬로를 더 가면 철 십자가가 나온다. 이곳은 천여 년 전부터 이곳을 지나가는 순례자들이 신앙과는 무관하게 자신을 지켜 달라고 돌을 쌓아 올린 곳이다. 철십자가를 지나 약 2.3킬로 지점 만하린을 지나 7킬로 정도 꽤 심한 경사도의 내리막길을 걸어 엘 아세보 마을에 도착한다. 이 마을은 흑회색 칠판석으로 지붕을 얹은 집들이 모여 있다. 엘 아세보 마을을 지나 도로를 따라 내려가면 암브로스 마을을 지나 비포장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돌이 많아 유의해야 한다. 오늘 해발 1153미터에서 서서히 1505미터까지 올랐다가 580미터까지 내려간다.
오늘 거리도 거리지만 힘들게 걷게 되겠다는 예보나 다름없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출발했다. 언덕에서 일출을 보았다. 꽃들이 산야에 잔뜩 깔려 있었다. 길을 올라갈 때는 꽃들이 옷소매를 스치기도 했다. 가는 길마다 다양한 빛깔의 꽃무리를 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흰 꽃이었는데 붉은 꽃으로 다시 노란 꽃무리들이 나타났다. 빛깔의 향연이었다. 점점 고산지대가 되니 꽃들도 앉은뱅이처럼 키가 작아졌다. 가까운 길로부터 멀리까지 산야는 꽃으로 물들었다. 여기 와서 여태껏 경험하지 못한 아름다운 경치였다. 나는 연신 감탄을 하며 산을 올랐다. 이윽고 고지대 마을에 당도했다. 바르에 들렀다가 다시 올랐다.
멀리 철십자가 보였다. 가까이서 보니 순례자들이 쌓았다고 하는 거대한 돌더미가 쌓여 있었다. 그 위에 사람 몇 키나 되는 철십자가 서있었다. 철십자 기둥에는 사람들의 소원물이 몇 점 부착되어 있었다. 한 동안 머물면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지나간 뒤에도 뒤를 돌아보고 사진을 찍었다.
멀리서 보이던 설산은 한결 더 가까워졌다. 저 앞산 봉우리처럼. 마치 산에 붉은 물감을 칠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내가 조금 전에 본 꽃무리가 만든 환상적인 승경이었다. 이제는 설산을 옆으로 지나게 되었다. 시장기가 들었다. 사과를 꺼내 먹으며 휴식을 취했다. 날씨는 화창했다.
이제 내리막길이었다. 사실 오늘 길은 오르막길보다 내리막길이 문제였다. 거친 돌이 내리막길 내내 깔려 있었다. 조심을 하는 데도 등산화의 앞부분이 돌에 마구 부딪쳤다. 발톱도 조금 아파오는 듯했다.
흑회색 칠판석으로 지붕을 얹은 집들이 모여 있는 아세보 마을이 보였다. 여기서 점심을 해도 되겠지만 오다가 커피를 마신 때문인지 시장하지 않았다. 더 내려가도 될듯했다. 계속 걸어 내려갔다. 일부 사람들이 이런 까미노 길을 발이 아파 못 걷겠는지 아예 도로 아스팔트길로 걸어가는 것도 보였다.
드디어 몰리나세까 마을로 들어섰다. 석조다리를 건너가면서 본 하천이 한가히 보였다.
숙소가 어디 있는지 찾으려고 두리번거렸다. 마침 윤 이사가 내가 금방 지나친 골목길에서 나오면서 그 골목길로 들어가라고 했다. 길목을 지키고 있었던 듯하다.
알베르게에 1시 40분에 도착했다. 마침 제니퍼가 와 있었다. 제니퍼는 여기서 8킬로 떨어진 폰페라다에서 살고 있다고 있다. 우리 일행이 가까운 곳에 와 있어 도와주려고 왔다고 했다. 숙박비로 9유로를 냈다. 1층 침대를 썼다. 와이파이가 잘 되었다. 점심을 먹지 않은 채 카톡 작업을 했다. 두 시간 뒤에 박 선생님이 당도했다. 발가락이 아픈 상태에서 거친 길을 내려오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고 했다. 도중에 배가 고파서 식당을 찾아가 점심을 먹은 뒤 내려왔다고 했다. 나는 사과와 마차, 그리고 커피로 시장기를 달랬다. 그 대신 저녁은 잘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 찍은 사진이 좋았기에 그 사진으로 동영상을 만들어 게시했다.
6시가 되었다. 슈퍼에 들러 사과 및 콜라를 구입했다. 그리고 식당을 찾고 있었다. 마침 제니퍼와 일행 몇 분이 식사하러 나오고 있었다. 합류했다. 넷이서 한 테이블에 앉았다. 제니퍼와 상의한 끝에 좋은 포도주를 선택하고 샐러드와 소고기 3인분을 주문하기로 했다. 주문은 제니퍼가 해 주었다. 질 좋은 쇠고기였다. 가격은 21유로씩 냈다. 낮에는 그렇게 잘 되던 와이파이가 밤에는 안 되었다. 알베르게 측에서 경비 문제로 와이파이를 끈 것이었다. 그냥 잘 수밖에 없었다.
5월 7일(화) 제 25일차 템플기사단 성채를 보다
일찍 일어났다. 준비를 한 뒤 6시 20분에 숙소를 나섰다. 까미노 길은 대로변으로 죽 이어져 있었다. 식사는 바르에 들러 하면 되었다. 그런데 주변에 바르가 없었다. 너무 일찍 나온 것인가. 도중에 불이 켜 있는 곳이 있었다. 박 선생님은 시장기를 달래고 싶어했지만, 나는 그곳이 알베르게라서 탐탁지 않았다.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내 뒤에 있던 일행들이 내 앞으로 지나갔다. 박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는데 길 건너편의 순례자가 소리쳤다. 까미노 길이 여기 있다는 것이었다. 일행이 그 소리를 못 들으니 나에게 손짓했다. 네 일행이지 않느냐 하는 제스처였다. 나도 일행에게 소리쳤다. 내 소리를 들은 듯 뒤를 돌아봤지만 다시 돌아와서 가기는 싫은 듯 그냥 시내로 가버렸다. 나는 박 선생님과 같이 시내 길로 가지 않고 까미노 길을 걷기로 했다. 까미노 길이 걷기도 좋았고 가면서 보는 풍광도 좋았다.
오늘 우리가 가는 곳은 까까벨로스다. 24킬로다. 도중에 들르는 도시가 폰페라다다. 언덕에 올랐다. 도시가 큰 듯 사진 한 장에 다 안 잡혔다. 그래도 이런 전경을 찍을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우리가 가는 까미노 길이 아무래도 우회로인 듯하고 마을이 있어도 바르가 문을 열지 않았다. 시장했지만 하는 수 없었다. 한참을 걸어갔다. 이제 도심지로 들어왔다. 앞에 있는 일행분이 여기 까미노 표시는 있지만 우선 템플기사단의 성채 가스띠요 템플라리오스부터 가자고 했다. 나보다 나이 많은 어르신이지만 나의 휴대폰에는 없는 구글 맵을 보며 선도했다. 나도 그러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서 뒤따라갔다. 오길 잘했다. 웅장한 성채가 떡 버티고 서있었다. 거기에 제니퍼가 와 있었다. 일행은 이미 와서 갔거나 뒤이어 이곳에 왔다. 우리는 먼저 성채 사진을 찍었다. 인근의 바르에서 커피와 크로와상으로 아침을 먹었다. 제니퍼에게 아까 본 까미노 표지에 대해서 물으니 그것은 다른 길의 표지라고 했다. 우리가 제 길 제대로 찾아온 것이었다. 아침에 앞서간 일행에게도 물었다. 우리는 까미노 길로 돌아온 것 같은데 시내가 빠르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자기들도 시내를 돌아서 왔다고 했다. 어느 길이 돌아온 것인지는 판단이 잘 안 섰다.
식사 후 다시 출발했다. 도심의 광장을 지나 내려갔다. 긴 하천이 있고 천변에서 뛰어가는 사람이 보였다. 성채 뒷모습이 보기 좋았다. 이어 천변 옆의 공원길을 걸었다.
푸엔타스 누에바스에 왔다. 가게에 들러 커피와 빵을 먹으며 쉬었다. 가게엔 여자 그림이 걸려 있었다. 박 선생님이 예술품이라며 찍자고 했다. 나도 재미로 찍었다. 오해할까 봐 찍은 사진을 카톡으로 보낼 수는 없었다.
가게에서 나와서 걸었다. 도로가에 작은 교회가 보였다. 마침 교회 앞의 신도가 세요를 찍으라고 우리를 불렀다. 먼저 교회 안을 둘러보았다. 밖에서 본 모습과 다르게 교회 내부는 화려했다. 제자와 만찬을 하고 있는 예수의 천정화도 있었다. 보고 난 뒤 세요를 찍었다. 지갑 속의 잔돈을 다 털어 기부금으로 냈다. 이어 캄포나라야로 왔다. 주의하라는 대로 고속도로를 건너는 육교를 지나 걸었다.
1시에 까까벨로스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어제 공지에서 룸에 2인실, 3인실이 있으니 주인에게 신청하라고 했다. 우리는 2인실을 신청했다. 20유로씩 냈다. 우리가 묵는 2인실은 명색이 호스탈인데도 와이파이가 안 되었다. 시장해서 여기서 운영하는 식당에 갔다. 나는 단품으로 스파게티를 주문했다. 호스탈 식당에서는 와이파이가 잘 되었다. 식사 후에도 한동안 앉아 카톡 작업을 했다. 박 선생님은 시내를 둘러본다고 나갔다. 나는 숙소에 돌아와 쉬면서 동영상도 만들고 그간 잘 찍었다고 생각하는 사진을 추리는 작업을 했다. 박 선생님이 돌아왔다. 걷다가 제니퍼와 만나 가게에서 당신이 좋아하는 꿀을 샀다고 했다. 저녁은 그 식당에서 정식으로 먹었다. 샤워한 뒤 알람을 6시에 맞춰 놓고 푹 잤다.
5월 8일(수) 제26일차 스페인 하숙 촬영지를 들르다
6시 반에 기상했다. 준비를 마친 뒤 7시 10분에 출발했다. 바로 마을을 지나 교외로 접어들었다. 오늘은 베가 데 발까르세로 간다. 26킬로다.
어제 공지에서 “비야프랑카 마을은 프랑스 순례자들이 순례를 마친 후 이곳에 집을 짓고 정착하면서 형성되었다. 작은 프랑스라고 부를 정도로 프랑스 마을의 향취를 풍기고 있다. 요즘 TVn에서 방영되고 있는 ‘스페인 하숙’을 촬영한 장소가 여기에 있다.”고 했다.
포도밭을 지나 한참 가니 ‘비야프랑카 3킬로’ 표지가 보인다. 나는 중도에 들르는 지명을 정확히 모른 채 프랑스 마을을 지난다고만 알았다. 비야 프랑카. 마을 이름 자체가 프랑스 마을의 뜻을 담고 있었다. 이윽고 비야프랑카에 들어왔다. 아직 아침을 안 먹었기에 마을 입구의 바르부터 들어갔다. 토스타와 커피로 식사했다. 통신사 연결이 비로소 되었다. 카톡으로 지금 비야프랑카를 지나고 있음을 알렸다.
마을로 들어가다가 전 부장과 일행을 만났다. 전 부장의 안내로 ‘스페인 하숙’ 프로그램을 촬영한 알베르게로 동행했다. 출입문을 지나 골목길로 들어서니 넓은 공터가 나왔다. 그리고 알베르게를 드나들던 출입문이 보였다. 출국하기 전에 스페인 하숙 프로그램을 2회 정도 본 적이 있었다. 건성으로 보았기에 확실히 이곳이 촬영지였는지는 잘 몰랐다. 출입문 앞에서 인증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여기엔 촬영지 표시가 전혀 없었다. 제작진은 2월에 이미 촬영을 마치고 철수했다고 했다. 그렇다 해도 이곳 사람들은 이곳이 한국 사람들이 찾는 관광 명소가 될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듯했다. 새삼 우리나라와 환경이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알베르게에서 거리로 나왔다. 마을 건축물과 순례자 상, 그리고 다리에서 본 천변 건축물에서 스페인과 다른, 프랑스 향취가 느껴졌다.
두 갈랫길. 산으로 가느냐, 도로 따라 가느냐는 우리 선택이었다. 우리는 산으로 가는 길을 가기로 했다. 전 부장도 오늘 이 길을 처음 간다고 했다. 전에도 왔지만 그때는 비가 내려 일반도로로 갔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행운이 있다. 그간 대체로 맑은 날씨 속에서 걸었다. 며칠간 비와 진눈깨비를 만나긴 했다. 그렇지만 평지를 걸은 때여서 큰 어려움이 없었다. 언덕에 오르니 프랑스 마을의 전경을 볼 수 있었다.
기대한 대로 산 속의 아름다운 풍광은 볼 수 있었다. 그 대신 일반 도로 걷는 길보다 3킬로는 더 걸었다. 이제 하산 길로 들어섰다.
평지로 내려오니 발까르세 강이 나타났다. 발까르세 강은 수량이 풍부했다. 물줄기가 여러 군데인 듯 지나도 강줄기가 나오고 또 강줄기가 나왔다. 점심때가 되어 시장했다. 숙소까지 3킬로는 더 걸어야했다. 그래서 입구 식당에서 식사하기로 했다. 12유로를 주고 정식 메뉴를 먹었다. 식사를 하고 나오니 비가 내렸다. 잠시 우비를 착용하고 걸었다. 지나가는 비였다.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3시 반이었다. 현관 쪽 1층 침대를 사용할 수 있었다. 충전부터 했다. 그리고 나와 마을 약국에서 파스를 구입했다. 카톡을 하기는 시간이 너무 늦었다. 안사람에게만 했다. 윤 이사가 주방에서 닭볶음탕을 만들었다. 숙소에 와서 식사하라고 했다. 식당에 가서 조금 먹고 왔다. 여기는 와이파이가 잘 안 되었다. 오늘 찍은 사진으로 동영상을 만들었지만 전송 속도가 느려 포기했다.
저녁에는 홍 교수, 박 선생님과 함께 마을 레스토랑을 찾아갔다. 순례자 정식을 시켰다. 나는 전채에서 칼도 가예고를 주문해 맛보았다. 가예고는 흰콩과 양배추, 감자, 라드 등으로 만든 갈리시아 지방의 전통 수프다. 삶은 콩과 우거지가 들어있어 그런지 우리나라 된장국과 많이 다르지만 그런 느낌이 났다. 나중에 알았지만 가예고는 ‘갈리시아 지방의’의 뜻을 담고 있는 말이었다. 갈리시아 지방의 특산 음식이란 뜻이겠다. 우리는 보통 가예고라고 말했는데, 정확히 말하면 칼도 가예고라고 해야 했다. 숙소로 돌아오니 이미 소등한 상태였다. 아직 9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어두운 상태에서 간단히 짐 정리했다. 발만 닦은 채 자리에 들었다.
5월 9일(목) 제27일차 오 세로브레이로 봉에 오르다
5시 45분에 일어났다. 카톡으로 어제 사진만 전송했다. 미숫가루로 아침을 때웠다. 그리고 7시 10분에 출발했다.
오늘은 오 세로브레이로로 간다. 13.5킬로의 짧은 거리다. 그렇지만 616미터에서 1,296미터까지 오른다. 거기 산 정상 부근에 알베르게가 있다고 했다. 길을 나서다가 카페에서 아침을 먹고 가기로 했다. 시간이 되어야 열기에 좀 기다렸다가 들어갔다. 커피에 토스타를 먹고 출발했다. 산을 오르는 길에는 박 선생님과 속도 차이가 났다. 먼저 올라서 카페에서 기다렸다가 다시 출발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비를 착용했다. 박 선생님과 차차 속도 차이가 나면서 혼자 오르게 되었다.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11시 반이었다. 그런데 알베르게의 문은 1시부터 연다고 했다. 일단 배낭을 현관 앞에 두었다.
갈리시아 주에 들어오면서 달라진 것이 있다. 이정표다. 산티아고까지 남은 거리 숫자가 다른 주와 달리 적혀 있다. 그리고 좀 더 촘촘히 세워져 있다. 박 선생님이 오신 뒤 입실을 기다리는 시간에 식당에서 식사하기로 했다. 박 선생님은 칼도 가예고 음식을 시켰다. 나도 그것을 시켰다. 박 선생님의 음식은 나오는데 내 차례는 음식이 떨어졌다고 나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식탁의 빵만으로 시장기를 달랬다. 시간이 돼 등록을 하려고 알베르게의 현관 앞으로 갔다. 아까와 달리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이 무척 많아졌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날씨는 차가웠다. 그런 상태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한참을 기다려 순번을 탔다. 5유로를 냈다.
여기 알베르게 모습은 대강당에 2층 침대가 죽 나열되어 있는 합숙소를 연상하면 된다. 내가 배정받은 곳은 이층침대였다. 침대가 붙어 있는 형태여서 누구와 자는 것인지도 중요했다. 상대는 노년의 북구 아줌마였다. 여기는 와이파이도 안 되었다. 절차가 까다로워 제대로 등록할 수 없었다. 쉬면서 5월 9일 동영상을 제작해보기도 했다. 시장해서 5시에 저녁을 먹기로 했다. 점심 때 고기 시킨 분의 음식을 보니 그릇에 고기 양이 무척 많이 담겨 있었다. 그것을 보고 절반을 시켜 먹는 분도 보았다. 그래서 나도 고기 절반만 시켰다. 절반으로도 양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식당은 와이파이가 잘 되었다. 거기서 메모를 하는 등 충분히 와이파이를 활용했다. 그리고 천천히 나와 귀숙했다. 아무래도 외국인 여자와 자게 되니 조심하게 된다. 잠자리가 불편했다. 박 선생님도 자리가 불편했던 듯. 오늘 같은 날에 다른 숙소 2인실을 예약해서 자야했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
5월 10일(금) 제28일차 명품 순례자상을 보다
6시에 기상했다. 불을 켠 상태였다. 아침을 미숫가루로 때우고 출발했다. 밤새 내리던 구름비는 그쳤다. 그 대신 짙은 안개가 산 계곡을 감쌌다. 6시 40분에 출발했다. 숲길을 걸어 내려갔다. 차차 안개는 사라졌다.
오늘은 뜨리아 까스텔라로 간다. 22킬로다. 4킬로를 걸었다. 이제 알토 데 산 로케 언덕으로 올라갔다. 1,270미터 고지다. 어제 공지에서 여기에 갈리시아 출신의 유명한 조각가 호세 마리아 아꾸냐의 상징적인 작품 바람을 뚫고 가는 순례자 기념비를 볼 수 있다고 했다.
과연 언덕에 올라서니 세찬 바람이 불어 왔다. 뒤에서 바라보니 순례자 상이 바로 어제 말한 그대로 그 모습이었다. 일단 뒷모습을 찍었다. 그리고 앞모습을 찍었다. 얼굴 모습도 찍으려 했으나 어둡고 역광이어서 잘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곳에서 그런 명품을 봤고 사진을 찍었다는 데 기뻤다.
계속 걸었다. 마을에 들러 커피와 토스타로 아침을 때웠다. 전 부장과 같이 걸었다. 전 부장은 둘레길 전문가다. 그래서 산티아고 순례 길을 마친 뒤 국내에서 갈 수 있는 둘레길에 대해 물었다. 여러 군데를 말해 주었다. 그중 가장 좋은 곳, 추천해 줄만한 곳을 물으니 지리산 둘레길이라고 했다. 국내에 들어와서 계획을 세워 걸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세찬 바람도 이제 그만 잦아졌다. 차츰 해가 나기 시작했다. 다음에는 홍 교수와 이기숙 씨를 만나 걸었다. 까미노 길의 풍광은 점차 좋아졌다. 전망 좋은 곳에 한참 머물며 사진을 찍기도 했다.
이윽고 라밀이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거목으로 둘러싸인 마을이었다. 곳곳에 잘라낸 나무토막에서도 거목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800년 된 밤나무를 만났다. 그 밤나무 사진을 찍었다.
12시 반에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2인실을 쓰자고 박 선생님에게 권유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박 선생님이 고개를 흔들었다. 2인실을 쓰려고 했으면 어제 썼어야 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다인실 1층 침대에 자리를 잡았다. 숙소 안의 풍경을 찍었다. 알베르게 안의 모습이 이곳보다 나은 곳도 있었지만 대개 이랬다. 그간 한 번도 이런 모습을 안 찍었기에 한 번은 찍어야 할 것 같았다.
점심은 알베르게와 같은 사장이 운영하는 레스토랑으로 갔다. 10유로 정식을 시켰다. 그런데 전채에 빠에야가 있었다. 빠에야를 시험적으로 시켜 보았다. 평소에는 박 선생님과 같이 살라다 믹스타를 시켰었다. 양이 단품으로 주문한 것같이 많았다. 메인 요리에는 소고기, 후식에는 포도주와 파인애플을 주문했다. 오늘 시킨 메뉴가 10유로짜리 순례자 메뉴가 아닌 15유로짜리 일반 메뉴 같았다. 만족했다.
식당 책자를 보니 오늘 내가 본 순례자 상이 소개되어 있었다. 오늘 알토 데 산 로케에서 순례자상 얼굴 사진을 제대로 못 찍었기에 대신 책자 사진을 찍었다. 알베르게에서는 와이파이가 잘 안 되는데 여기 식당에서는 잘 되었다. 5월 8일과 9일의 순례길 동영상을 연속하여 게시했다.
숙소에 돌아와서 카톡을 했다. 사진 전송 속도는 느리지만 글자는 제대로 갔다. 오늘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오늘 날짜 동영상을 만들었다. 저녁에도 그 식당에 갔다. 시장하지 않아 간단히 단품 빠에야를 시켰다. 낮에 잘 먹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단품 메뉴는 콜라 값도 따로 받는다. 그래서인지 점심때처럼 양이 많고 싸다는 느낌은 없었다. 식당에 온 김에 오늘 낮에 만든 오늘 날짜 동영상을 게시했다. 오늘만 세 개의 동영상을 올렸다.
다시 숙소에 돌아오니 와이파이가 잘 안 되었다. 밤에는 껐는지 아예 불통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