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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부인(貞敬夫人) 해평윤씨(海平尹氏)행장
*子 :만중(萬重)지음*
태부인(太夫人:존칭하는말)의 성은 윤씨니 선계는 선산(善山) 해평(海平)에서 나왔다.
고조의 휘는 두수(斗壽)이니 영의정,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이요.
시호는 문정공(文靖公)이다. 증조의 휘는 방(昉)이니 영의정이요, 시호는 문익(文翼)인데, 다 공덕이 있으므로 어진 정승이 계승되었다 칭한다. 할아버지의 휘는 신지(新之)니 선조의 따님 정혜옹주(貞惠翁主)를 취처하여 해숭위(海崇尉)에 봉해졌고,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났으며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아버지의 휘는 지(墀)니 인조조 명신으로서 벼슬은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 남양홍씨니 경기감사 휘 명원(命元)의 따님이다. 참판공은 다른 자녀가 없었으며 정혜옹주는 다른 손주가없고 오로지 태부인 한 사람 뿐이었다. 때문에 친히 안어 기르고 소학(小學)을 가르쳤다.
[고조 윤두수- 증조 윤방 - 조 윤신지(선조 정혜옹주) - 부 윤지]
태부인은 총명하여 한번만 가르쳐주면 문득 입에 오르니 옹주는 항상 말하기를,
“여자된 것이 아깝다”했다. 장성함에 미처 의복과 음식을 풍족하고 사치하지 못하게 하면서 말하기를 “후일에 빈한한 선비의 아내가 된다면 어찌 능히 이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했다.
우리 아버지에게 출가하자 경계하여 이르기를 “너희 시댁은 예법의 가문이니 부도에 어긋나서 나에 수치스런 일을 끼침이 없게하라”했다. 그의 훈계함이 이와 같으므로 태부인 이 출가할 때 나이 14살인데도 시댁 가족에게 칭찬을 얻었다. 정축(丁丑1637)년 노란에 선부군(先府君:죽은 아버지의 칭호)이 江都(강화도)에서 순절하였는데, 이때 태부인은 바야흐로 임신 중에 당삭이 되었다. 홍부인(洪夫人)의 우소(寓所)인 포구(浦口)에서 배를 얻어 화를 모면 하니 이때 선형(先兄:죽은 형을 일컬음)은 겨우 다섯 살이요, 불초는 태에서 떠나지도 않았었다.
난리가 간정되자 두 고아를 끌고 본가의 부모 슬하에 의탁하여 안으로는 홍 부인을 도와 가사를 보살피고 밖으로는 참판공을 봉양하는데 능히 뜻을 기르기를 옛 효자와 같이하고 틈으로 서사(書史)를 열람하여 스스로를 즐기니 조예는 깊어졌다. 이리하여 참판공은 아들이 없는 슬픔을 잊었고 문목공(文穆公)은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손녀로 더불어 말하매 가슴이 활짝 열리는 것 같으니 이가 만약에 남자라면 어찌 우리 집에 하나의 대제학(大提學)이 아니겠는가?”했다. 우리 할아버지의 상사에 장지를 회덕현 정민리에 점령하고 선부군은 그 뒤쪽에 부장하게 되었는데 어느 지사가 말하기를 “그 장소가 후손에 게 불리하다”했다.
참판공은 의심하여 부인에게 말하기를 “나의 힘이 능히 개장할 만하니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서울 국내로 이장하여 고아 과부들의 절(節)일때 성묘를 편리코자하노니 어떻게 생각하는가?”했다. 부인은 대답하기를 “풍수가(풍수가) 의 말은 본래 망매하여 믿기 어렵고 선영국내에 장사지내면 신도가 편안할 줄로 생각되며 또한 호중(湖中:충청도)에는 시댁의 가족들이 많이 거주하는 만큼 아이가 장성하기 전에는 그들의 수호를 의뢰할 것이니 이장을 원치 않습니다.”했다. 참판공이 세상을 버리자 홍 부인은 애통과 신병으로 일을 보살피지 못하고 또한 제자들의 가사를 감금하는 이도 없었다.
태부인은 홀로 수명의 여비(女婢)로 더불어 상사의 도구를 판비하여 의금(의금)과 제전을 정돈하고 풍결(豊潔)하게 하여 예절에 맞지 않음이 없으니 보는 이들은 특이하게 여겼고 그 후 어머니 상에도 또한 그와 같이 했다. 이후부터 가사가 더욱 곤란하여 심지어는 몸소 길삼하여 조석을 이어가는 지경에 이르되 항상 태연하여 근심과 번뇌한 용모가 없고 또한 불초 형제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했다. 대개 어릴때 부터 가루에 골몰하여 서책 공부에 방해 될까 염려한 것이다. 불초 형제가 어려서 배울때 밖의 스승이 없었고 소학(小學)사략(史略) 당시(唐詩)등등은 태부인이 스스로 가르쳤다. 자애는 특이 했으나 공부의 과정은 지극히 엄격했다.
항상 말하기를 “너의 무리는 다른 사람과는 같지 않으니 반드시 일후에 재주가 한등 남보다 솟아야 겨우 남의 대열에 들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행검이 없는 자를 꾸짖을 라면 반드시 말하기를 ‘과부의 자식이라’ 하나니 너희들은 뼈저리게 생각하라.”했다. 불초의 형제가 과실이 있으면 반드시 손수 매를잡고 울면서 말하기를 “너의 아버지가 너의 형제로서 나에게 부탁하고 세상을 버렸으니 네가 만약 이와 같이 한다면 내가 무슨 면목으로 너의 아버지를 지하에 보겠는가! 배우지 못하고 살려면 빨리 죽는 이만 같지 못하다.”하니 그 말씀의 애통 박절함이 이와 같으므로 선형(先兄)의 문장이 비록 천품적(天品的) 이기는 하나 과문의 일찍 성취된 것은 태부인의 격려한 힘이 많았었고 만중(萬重)같이 어둡고 미련하여 스스로 포기한 정도이지만 가르침이 지극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이때 난리를 지난 지 얼마 안 되어 서적을 구할 수가 없었다. 맹자(孟子), 중용(中庸),등 많은 서책을 태부인이 다 벼루어서 구입하고 좌씨전(左氏傳)을 팔으려 하는 자가 있는데 선형(선형)이 마음으로 애중히 여겼으나 권질이 많으므로 가격을 묻지 못 했었다.
태부인은 곧 베틀에 있는 명주를 끊어 그 대가를 보상해주고 이밖에는 아무런 저축이 없었다. 또 이웃 사람이 옥당의 아전이 된 자에게 부탁하여 홍문관내의 사서(四書)와 시경(詩經)언해를 빌려 모두 손수 등초했는데 자획이 정묘하고 섬세함이 구슬을 꿴 것 같아서 한 획도 방필함이 없었다. 참판공께서 말년에 서자를 두고 이미 세상을 버린 후에 종질로서 입후 했다. 태부인은 감싸고 가르치기를 일체 불초 형제와 같이하고 두 아우들도 또한 어머니처럼 섬겨서 노경에 이르도록 사람들은 간격의 말이 없었다. 그들과 살림을 나누매 전장의 척박하고 노복의 늙고 가난한자를 선택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청렴한 이름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것이 나의 하고자 하는 바이다.”했다.
서제가 죽으매 또 그의 고아를 데려와서 여러 손자로 더불어 같이 배우게 하니 이때 태부인의 나이가 이미 5,60이 되었는데도 손자를 수명이나 가르치니 대개 이를 즐거워하므로 피로를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천성이 글을 좋아하여 늙어서도 폐지하지 않고 더욱 역대 치란(治亂) 명신(名臣)의 언행보기를 기뻐하여 때로는 자손에게 가르쳐주고 절대로 필찰(筆札:글씨 와 편지)과 읊조리는데 마음을 두지 않았다. 부녀를 가르치매 길삼, 음식, 차사[歲時], 향사 등에 넘지 않고 일을 임하매 더욱 경건하여 이미 가사를 인계했음에도 오히려 몸소 그릇을 씻고 반찬을 만들어서 심한 질병과 피곤함이 아니면 남에게 대리로 시키지 않았다.
미망인 이 된 뒤로 부터서는 평생을 거무죽죽하고 소박한 옷을 입으며 조금만 화미해도 일찍이 몸에 대지도 않았고 연회에 참여하지 않으며 음악을 듣지 않았다. 선형이 이미 영귀하자 수연(壽연)을 베풀 것을 간청했으나 마침내 허락하지 않고 오직 자손의 과거에 급제한 경사에는 잔치와 음악을 허락하면서 말하기를 “이는 진실로 문호적인 경사요 내 일신의 기쁨만 아니라”했다. 계사(癸巳1653)년에 선형이 과거에 급제하여 비로소 국록의 봉양을 얻게 되고, 만중(萬重)이 또한 을사(乙巳1667)년에서 과거에 급제했다.
정미(정미1669)년에 선형이 2품직을 받게 되자 부인은 정부인에 봉해지고 갑인(甲寅1674)년에 인경왕후(仁敬王后)가 숙종의 비가 되자 선형은 부원군에 봉해지고 태부인도 또한 정경부인에 승진되었다. 인경왕후가 어릴 때 태부인의 품에서 자라는데 기르기를 반드시 정도로 해서 왕후의 나이 11세에 세자빈의 간택에 응하게 되었는데 주선과 응답하기를 성인(成人)과 같이 하니 궁중(宮中)사람들 모두가 기뻐하고 탄복했다.
이후부터 선형은 매양 가문의 성만(성만)을 염려하여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우리-집으로 하여금 이 정도에 이르게 한 것은 모친의 힘이다” 했다. 태부인은 틈으로 왕비를 보이게 되면 문득 경계를 올리어 옛 어진 왕비의 일을 일컫고 일호도 사적인 혜택에는 언급하지 않으니 인선(仁宣:효종의 비 장씨) 명성(明聖:현종의 비 김씨) 두 국모를 공경하고 존중히 여겼다. 경신(庚申1680)년에 인경왕후가 승하(昇遐)하자 평소에 사용하던 의복과 기물을 왕자나 공주에게 넘겨줄 곳이 없었다.
명성왕후는 궁인(宮人)에게 말하기를 “내가 차마 이 물건을 보지 못 하겠다. 이제 다 본방(本房)에게 주고자 하노니 나의 뜻으로서 전달하라”하니 본방(本房)이란 왕비의 본가를 일컫는 말이다. 태부인은 대답하기를 “인경왕비께오서 비록 아들이 없으시나 일후에 국가에서 자손의 경사가 있으시다면 이 역시 인경왕후의 자손이오니 저장하여 기다림이 옳을 뿐만 아니오라 궁중에서 사용하던 좋은 물건을 어찌 감히 사가에 둘 수 있겠습니까?”하니 궁인(宮人)이 복명(復命)하자 명성왕후는 크게 칭찬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진실로 본방의 훌륭함이 이렇게 처리 할 것을 짐작했다.”하고 주상은 이 말을 듣자 또한 말하기를 “이는 사군자(士君子)의 행실이다”했다. 정묘(丁卯1687)년 봄에 선형은 어머니 슬하를 영원히 떠나게 되었는데 태부인의 나이는 70이 넘었다.
자손들은 차마 최복(喪服)을 드리지 못 했다. 태부인은 묻기를 “어이하여 상복을 만들지 않는가?” 했다. 대답하기를 “우리나라 풍속에 부녀자들은 오직 삼년상에 최복을 갖추고 기년이하는 다만 포대(布帶)로 성복하는데 이제 기년복에 해당되므로 최복을 만들지 않은 것입니다.”했다. 태부인은 말하기를 “장자의 복을 어찌 다른 기년복에 비하겠는가?”하고 드디어 예문과 같이 성복했다. 불초는 태부인 이 상가에 계시면서 조석으로 애통하여 병환이 되실까봐 나의 집으로 모시려 했다. 태부인은 울면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비록 늙고 병들어 제사에 참여하지 못하지만 조석으로 곡성(哭聲)을 들으면 내가 참제 하는 것과 같은 생각이 드는데 만약 너의 집으로 간다면 어떻게 마음을 진정 하겠는가? 또한 여러 손자를 보면 저의 아비를 보는 것과 같은데 만약 네 집에 있게 된다면 저 손자들이 어떻게 나를 자주 와서 보겠는가?” 하고 여러 번 간청해도 이에 따르지 않았으니 비록 비애중에 있으면서도 예문에 돈독함이 이와 같았다. 이해 가을에 불초가 국사를 말하다가 서새(西塞:서북지방)로 귀양가게 되었다. 태부인은 문밖에 전송하면서 말씀하시기를 “영해(嶺海)의 행차는 옛 사람도 면하지 못한 것이니 그곳에 가거던 자신 스스로를 사랑하고 나로서 염려하지 말라”했었다.
이듬해에 국가에 큰 경사가 있으므로 석방의 은혜를 받고 돌아와 모시게 되었는데 수개월도 안 되어 기사사화(己巳士禍)가 일어났다.
곧 사형에서 감면되어 남해(남해)로 안치되고 손자 세 사람이 잇달아 절도(絶島)로 귀양가게 되었다. 태부인이 평소에 천촉 병환이 있어 추운 계절을 당하면 문득 발작됐었다.
선형의 상을 당함으로부터 연이어 우척(憂척:근심하고 슬픈일)을 당하자 본병이 가첨되어 이해 겨울에 병환이 위독한데도 오히려 손자와 증손에게 훈계하기를 “가정의 환란으로서 위축 되지 말고 쓸데없다 하여 학업을 폐기하지 말라” 했다. 조석 상에 조금만 색다른 반찬이 있으면 문득 기뻐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우리 집 음식이 본래 이와 같지 않았다”했다.
돌아가시기 수일전만도 순순(諄諄)하게 근검으로서 자부 손부를 경계하고 이밖에는 오직 한 아들 세 손자가 장향(장鄕: 독기가 많은 땅)에 있는 것을 말씀하고 나머지는 계련하는바가 없었다.
아! 슬프다 처음에 선형이 태부인이 연로함으로서 미리 수의[百歲衣:송종의 옷]를 마련하려 한 대 태부인은 이 사실을 알고 이르기를 “정축(丁丑1637)년에 너의 아버지 상사에 재물이 없어 예절을 갖추지 못 한 점이 많은데 이제 어찌 나에게 그보다 더 잘할 수 있겠는가?” 했다. 대답하기를 “전후의 가정 형편이 같지 않습니다.” 하니 태부인은 말하기를 “나도 또한 어찌 이점을 알지 못 하리 오마는 다만 한 광중에 장사지내면서 후박(厚薄)이 서로 다르다면 내 마음이 어찌 편하겠느냐” 했었다. 이때에 이르러 제 손들이 송종을 모시는데 붉은빛 보라색 화려한 것을 사용치 않았으니 남긴 뜻을 참작 한 것이다.
태부인 이 만역(萬歷) 정사(정사1617)년 9월12일에 탄생하여 73세를 일기로 기사(기사1689)년 12월25일에 세상을 버렸다.
손남 진화와 증손 춘택(春澤)등이 영구를 모시고 선부군(선부군)의 묘를 열고 합장하니 경오(경오1690)년 2월21일 이었다. 태부인 의 성품이 인자하고 용서함이 많아서 자손을 감싸고 비복을 부리매 항상 은혜와 사랑에 과하면서도 단아, 방정, 준엄, 개결하여 명랑하게 장부(丈夫)의 풍도가 있었다. 선형이 일찍이 서울 근읍에 부임하여 그 고을이 잔폐하고 녹봉이 박해서 봉양이 풍부하지 못함으로서 한탄한대 태부인 이 말하기를 “다행히 국은을 무릅써 따뜻한 온돌방에서 배불리 먹는데 이것이 부죽하다면 어데서 만족을 취하겠는가? 네가 능히 마음을 다한다면 무슨 봉양이 이보다 더 두텁겠느냐?” 했다. 손자 진구(鎭龜)가 감사가 되었을 때 관할내의 수령이 태부인 의 생일에 옛 비례를 의거 예폐를 보내왔는데 그 사람은 진실로 통가(通家)의 정지였다. 모든 사람이 말하기를 “의리에 사양할 수 없다” 했으나 마침내 받지 않았다.
말세에 교묘한 사기로서 아전과 시정배들이 오로지 청탁을 일삼으니 임관한 존속 부녀 들이 더욱 뇌물을 보내는 요로였다. 불초 형제가 환로에 나간이후로 혹여시 조그마한 편지도 어머니의 눈앞에 온 일이 없었으니 여기에서 그 나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액회와 궁곤에 처해도 민망히 여기지 않고 영귀에 임해도 교만하지 않으며 참혹한 화를 만나서 사람으로서 감내하지 못할 일이로되 의리와 운명에 편안하여 흔들리지 않고 위축되지 않았으니 다만 남보다 지나친 찬품만이 아니라 서책을 박람하고 옛 을 상고한 힘을 속일 수 없는 것이다.
이러므로 친척과 이웃에선 보기를 엄한 스승과 같이하여 모두 모범을 삼게 되었다. 그의 발언과 처사가 의리에 합하여 궁중의 풍화를 돕고 영광스럽게 임금의 표창을 받았으니 이는 또한 근대의 규문에서 듣기 드문 일이요 옛적에는 이른바 “여자로서 선비의 행실을 지녔다”는 말에 우리 태부인은 실상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다. 전(傳)에 이르되 “선을 쌓은 집에 는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다.”하고 서전에 이르되 “가득하면 덤을 부르고 겸손하면 보탬을 받는다.”하였으니 우리 태부인 분은 선을 쌓고 보탬을 받는 도에 적합하지 않음이 없는데 정축(丁丑)年에 남편상을 당함으로서 많은 어려움과 고초를 겪고 갑인(갑인)년에 이르러서는 극도의 영광이라 이르겠는데 그로 인한 근심이 곤란과 박약할 때보다 더 심하여 얼마 안되 어 인경왕후께서 승하하셨고 우리 선백씨의 순효(純孝)로서 봉양을 마치지 못하였으며 수년 사이에 세태가 크게 변천됨으로서 자손이 나누고 흩어져서 세상에서 슬피 여기는 바가 되었으니 이는 사람으로서 보답하는 하늘 이치에 의심이 없을 수 없다. 비록 그렇긴 하나 세상에선 완복을 향유하여 한평생을 부귀에 즐겁게 지나면서도 죽은 날에 남으로서 칭찬 할 만 한 사실이 없는 것이라면 이는 진실로 태부인 으로선 부끄럽게 여긴 바이다.
태부인이 2남을 낳으니 맏아들인 선형 만기(萬基)는 영돈령부사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으로서 일찍이 병조판서(兵曺判書), 대제학(大提學)을 지냈다. 선형의 직급이 높고 현달하되 태부인 이 일찍이 기쁜 기색이 없더니 대제학이 되매 이에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일개 부인으로서 너의 형제를 가르치매 항상 두려워하기를 너희들이 고루하고 배움이 없어 선인(先人:宣祖 선고)의 수치와 모욕이 될까 했더니 이제야 거의 모면했다.” 하였다. 막내는 곧 불초 만중(萬重)이다.
선형은 군수(郡守) 한유양 의 따님을 취처하여 4남3녀를 낳으니 맏은 진구(鎭龜)요 다음은 진규(鎭圭)니 모두 문과 급제하고 다음은 진서(鎭瑞) 진부(鎭苻)는 다 성관하지 않았다.
인경왕후(仁敬王后)는 제매(娣妹)에서 맏이요 다음은 정형진(鄭亨晋)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이주신(李舟臣)에게 출가했다. 만중(萬重)은 판서(判書)이은상(李殷相)의 딸을 취처하여 1남4녀를 낳으니 남 진화(鎭華)는 진사(進士)요 딸은 문과 급제한 이이명(李이命)에게 출가했다.
진구(鎭龜)의 남은 춘택(春澤) 보택(普澤) 운택(雲澤)이요 나머지는 다 어리다.
진화(鎭華)의 남은 다 어리고 정형진(鄭亨晋) 이이명의 소생도 다 어리다.
만중(만중)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죄가 많아서 평생에 아버지의 안면을 알지 못하고 난리때 탄생하느라 어머니의 노고가 보통 사람보다 백배나 되었는데 우둔하여 아무런 지식이 없고 은혜와 사랑에 친압하여 안색을 승순하기에 어긋남이 많었고 분수에 맞지 않는 영귀가 어버이를 영화롭게 함이 아닌데 창광(猖狂: 미침)하고 우매하여 함정을 밟음으로서 우리 태부인에게 평생의 슬픔을 끼쳐드렸으니 불효의 죄는 하늘에 관통하는데 오히려 목을 찌르거나 배를 갈라서 귀신에게 사죄하지 못하고 벌벌 떨면서 독기 어린 바다 가시 울 속에서 삶을 구하니 아! 슬프도다.
돌이켜 생각하건데 하늘의 이치가 정상에 돌아오지 않고 남은 목숨이 떨어지게 되었는데 진실로 두렵건데 우리 태부인의 좋은 말씀과 훌륭한 행실이 점차 암매하여 후손에게 모범을 드리울 수 없으므로 감히 슬픔을 억제하며 아픔을 참은채 손수 언행(言行)의 일통을 기록하여 몇장을 등초해서 여러 조카에게 넘겨주는 것인데 성품이 본래 어둡고 막히어 언행을 잘 보지 못하고 더구나 정신이 소모되어 십분의 일만을 기록하게 되니 불초의 죄가 이에 이르러 더욱더 큰 것이다. 생각의 기억으로는 태부인 께서 일찍이 근대의 비문과 묘지를 보다가 부덕(부덕)의 칭찬이 태과한 것을 병들게 여기면서 말씀하시기를 “규문내의 행검을 남으로서 알바가 아닌데 병필(秉筆)가 들이 다만 가장(家狀)만을 빙자하므로 그 말 자체가 증거의 자료가 못되는 것이다. 그런것이 아니라면 어찌 우리나라의 현부인이 이처럼 많겠느냐?” 하셨다. 이 말씀이 낭랑하게 귀에 남아 있으므로 이제 덕행을 칭술하는 문자에서 감히 한글자도 꾸며 만들지 못하고 차라리 간략히 하는것은 대개 우리 태부인의 평소의 뜻에 따르자는 것이다. -끝-
이글은 광산김씨충정공 문헌록 에서 한자를 한글로 해석 한 것
노도 유배 생활 10개월이 채 못 되어 사랑하는 어머니 윤씨부인의 사망 소식을 접한다. 효자로 소문난 그에게는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충격이었다. 그는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위해 ‘정경부인 윤씨행장’이란 글을 쓴 후, 그로부터 2년 4개월만인 숙종 18년(1692) 4월에 56세의 생애를 마감했다. 김만중의 시신은 그가 거처하던 초옥 왼편 산언덕에 묻혔다. 그리고 그해 9월 그의 친족들에 의하여 시신을 육지로 이장되었다. 묘 터가 있던 그 산언덕은 무척 가팔랐는데, 막상 그곳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양편 소나무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바다 풍경이 그림 같다.현재 노도의 김만중의 묘는 아직도 빈자리로 남아 있다. 이상하게도 400년 이상 지난 지금까지 그 자리에는 나무 하나 자라지 않고 잡풀만 드문드문 자라나고 있었다. 한이 서려 있는 자리라 나무조차 그곳으로 뿌리내리기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