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ⅩⅣ. 지정환 신부 순례이야기
프랑스에 있었을 때의 얘기다. 파리의 본당신부와 함께 벨기에로 출장을 간 일이 있었다. 리에주를 지나 브뤼셀에 갔고, 도중에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렀다. 이것저것 주섬주섬 들고 계산을 하려고 카운터에 갔다. 유학올 때 지정환신부가 건넨 지폐를 내밀었다. 점원은 위아래로 쳐다보더니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는 다른 일을 했다. 파리의 본당신부도 다른 쇼핑을 하면서 기다렸다. 한참이 흐른 후 맞닥뜨린 건 다름아닌 벨기에 경찰들. 경찰들은 경찰서로 가자고 했다. 영문도 모르는 채 상황이 전개되자, 파리의 본당신부가 경찰들에게 말했다. 누구라는 것부터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그런 것이냐고까지. 그제야 경찰들의 시선의 혐의가 온화로 바뀌게 됐다. 그러면서 점원에게도 설명하자, 점원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계속 아래쪽에 수그리고 다른 일을 하는 시늉을 했다. 이유인 즉, 건넨 지폐가 고액권이고 게다가 지금은 잘 통용되지 않는 희귀지폐였던 까닭이었다. 낯선 이방인 유학생이 허름한 차림으로 건넸으니, '주웠다' 아니면 '훔쳤다' 정도의 판단이 섰을 것이다. 조폐은행에 갔더니, '점원이 받았으면 횡재했을 것인데. 바꾸지 마시고 잘 가지고 계세요.' 한다. 유학을 서두를 때 지정환신부가 '내가 줄 것은 이것밖에 없네. 미안하구만. 그래도 혹여 벨기에를 가거들랑 식사라도 한 끼.' 하며 건네고 또 무심코 받은 것인데, 자신은 자린고비처럼 살면서도 큰 것을 베푼 지정환신부의 마음을 읽는 순간이었다. 이 얘기로 지정환신부 순례이야기 시작을 하는 것은 실은 그 자체로도 조심스럽다. 당신이 스스로 사제이기에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치매가 시작될 무렵. 무지개가족들과 더불어 있는 자리에서 어렸을 적부터의 얘기들을 풀어냈고, 무지개가족들은 지정환신부의 이런저런 얘기들 말고 진정한 얘기들을 담아줬으면 하는 바람을 심어줬기 때문이다. 단지 그 이유.
임실성당을 국가문화유산으로 올리려는 일을 추진하면서 브리핑을 하는 기회가 주어졌다. '무엇을 말할까.' 하다가 떠오른 것이 발이었다. 전동성당을 지은 보두네신부의 급작스런 죽음의 소식을 듣고 대구에서 달려온 드망즈주교가 주검에서 언뜻 비친 발을 보고 '얼마나 아름다운가.[Quam Speciosi]'라고 했다. 바오로사도의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에서 나온 이 말을 떠올리려면, 파리외방전교회에 걸려있는 쿠베르탱작가의 '떠나는 선교사'의 그림을 보면 된다. 이제 영영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는 선교사에게 부모와 형제와 친지와 친구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발에 입맞춤해서 축복하는 것밖에. 떠날 때 입맞춤하던 곱디고운 발이 선교지에서 때로는 들판을 헤매고 때로는 산속을 헤치며 다녔으니 일그러진 발이 된 것은 분명한 일. 드망즈주교의 눈앞에 보인 보두네신부의 발이 그러했으리라. 그리고는 반세기가 흘러 전동성당에 온 지정환신부. 전동성당에서 찍은 어느 세례식의 장면에 눈에 띄는 것은 지정환신부의 검정고무신. 그리고는 부안성당과 임실성당과 무지개가족 등을 거치면서 다닌 지정환신부의 발자취는 분명 보두네신부의 발자취와 판박이였을 것이다. 보두네신부의 주검을 보는 드망즈주교의 모습을 그려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외팔이화가인 최영면작가는 오랜 구상 끝에 그림을 완성했지만, 조합하지 못하고 파편적인 단면들을 따로따로 그렸기에 지하에 쳐박아놓았었다. 그러다가 김봉술신부가 성당에 걸면 좋겠다고 해서 무심코 건넸다. 어느날 신태인도 국가문화유산을 추진하려고 한다고 해서 갔더니 거기에 걸려있어서 다시 보게 된 그 그림. 그리고 그 발. 무심코 흘렸던 외팔이화가의 말이 맴돌았던 까닭이었다. 발을 찾아헤매다 지정환신부의 발이 가장 들어맞는 발일 것 같아서 청했더니 '푸하하' 하더니만 기꺼이 발모델이 됐던 까닭이다. 발이 거룩하게 와닿는다.
나가사키의 고토열도에 가면 소막[牢室]이 있다. 몰리고 쫒겨서 고토열도까지 왔건만 종교의 자유가 있는가 싶더니 이내 또 가뒀다. 코딱지만한 소막에 수많은 가쿠레기리스탄[숨은그리스도인]을 잡아넣었지만, 그들은 기도소리로 화음을 만들어냈다. 그런 소막들이 여러 곳. 성당 부근들의 소막들은 대체로 그런 형태들을 띠고 있고 바로 옆 울타리에는 검은소 몇 마리가 낯선 이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나가사키 도처에 후쿠오카 도처에 교토도쿄 도처에 흔히 보는 소얼굴의 비스킷. 그리고 그 안의 까망베르 치즈와 로슈포흐 치즈의 크림. 인기가 좋다. 여기든 저기든. 아마 그 조화를 보면 소를 키우는 백정과 치즈 전달한 선교사 그리고 배에 실려온 비스킷 등이 수세기와 수세대를 거치면서 만들어진 것이 분명하다. 지정환신부의 고향 벨기에에는 호가든이라는 널리 알려진 맥주가 있다. 이 맥주의 로고에는 농부의 지팡이와 주교의 지팡이가 있다. 부임한 주교가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만든 맥주인 까닭이다. 걸죽한 이 조화는 많은 이의 입맛을 돋운다. 처음 이름의 디디에신부는 부안성당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 간척사업을 하고 땅을 일궜다. 다음 이름의 지정환신부는 임실성당에서 굶주린 이들을 위해 목장사업을 하고 양을 키웠다. 정약종이 백정 황일광과 어울리고 정약용이 백정 김석태와 대화하듯, 천민[賤民]이 천민[天民]이 되는 세상은 이렇게 대를 이었다. 정약종은 순교하고 정약용은 유배되고 지정환도 추방됐다. 이유는 백성을 선동함. 하지만 뿌려놓은 씨앗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임실의 치즈학교도 부안의 제과학교도 프랑스의 최고학교에 답사한다. 학교들도 마치 지정환신부를 아는듯 정성껏 가르친다. 다리를 놓고 통역을 하는 가운데도 '이 무슨 조화일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든다. 그리고 후대들이 이런 일화들을 담은 비스킷은 얼마나 또 달콤할지 기대된다.
'그리스도의 평화[Le Paix Du Christ]'. 지금은 천주교마산교구장인 이성효주교가 유학생시절 오를리[Orly] 근처 프랑스본당에 있었고, 한번은 유학생들을 잔치에 초대했다. 미사 중 평화의 인사를 할 때 이제 갓 온 유학생이 건넨 말이다. 그런데 프랑스인 모두 이상한 표정으로 쳐다보기에, 미사 끝에 물으니 여성형[La Paix]을 남성형[Le Paix]으로 잘못 말한 것이 원인이었다. 문제는 발음상 남성형[Le Pet]은 평화가 아니라 방귀였으니 이상할 수밖에. '그리스도의 평화[La Paix Du Christ]'가 순식간에 '그리스도의 방귀[Le Pet Du Christ]'로 둔갑했던 것이다. 그리고는 얼마 안 있어 프랑스로 보낸 배편의 짐이 도착했다. 프랑스가 담뱃값이 비싸다는 것을 안 유학생은 몇 보루 더 집어넣었는데, 그것이 문제가 됐던지 오를리의 세관에 불려갔다. 갔더니 세관장이 대번에 '너 그 방귀[Le Pet]' 하고 박장대소를 하더니만, 짐을 풀려고 하니까 '뭐하러 그러냐.'며 그냥 가져가란다. 이성효신부가 있던 본당의 신자였던 것이다. 유학생은 방귀[Le Pet] 덕을 본 것이고. 그렇게 어설펐던 유학생은 여전히 지금도 어설프지만, 프랑스국립도서관이 직지심체요절을 오픈하게 하고, 프랑스국립기록원이 한지몽골문서를 공개하게 한다. 복본의 허락까지 받아가며. 하기야 미사중 뭣모르고 한 그런 행동으로 들이댔을 것이니 어쩌면 다들 형식과 절차를 거치지 않은 진솔한 편지 한 통에 수긍했을지도 모른다. 부안의 제과제빵학교가 르꼬르동블루[Le Cordon Blue]라는 일류학교에서 실습하겠다고 할 때 사람들은 묵묵부답인 그곳에 문을 두드리는 것은 헛수고라고 생각했다. 그곳에 신시도에서의 영광호와 승리호를 들먹이며, '드디어 여러분이 은혜를 갚을 시간이 왔다.'고 썼다. 답신은 왔고 오케이. 세계 최고의 셰프들은 정성껏 가르쳤고, 작년에 이어 올해는 르노트르[LeNôtre]에서 청소년들이 실습한다. 바로 그 방귀[Le Pet] 사건이 있던 곳에 있는.
1847년 신시도에 프랑스 구축함과 호위함인 영광호와 승리호가 좌초됐다. 1846년 김대건신부와 더불어 순교한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사들의 죽음에 항의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또다른 속셈은 문호개방이었을 것이 분명했다. 베트남의 항구를 열게 한 두 함선 모두 기세등등하게 왔건만 부안 앞바다 뻘에 빠지고 선원 오백여명은 옴쭉달싹 못하고 갇힌 셈이 됐다. 다행인 것은 팔월 한여름이어서 얼어죽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문제는 굶주림. 며칠은 비스킷으로 연명했지만 이내 동나자 동요가 일었을 것이다. 더러는 섬을 약탈하자고 했을 것이고 더러는 내륙 가까이까지 갔을 것이다. 남은 무기로 살기 위해서. 하지만 그들은 편지를 썼다. 전라도관찰사 홍희석을 통해 조선조정에. 주절이주절이 쓴 내용의 핵심은 '살려달라.' 답신이 없이 몇 주가 지나자 선원들은 아사 직전에 이르렀고, 그제서야 나타난 조선배에 '소고기' 등을 포함한 식량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프랑스로 무사귀환한 선장들과 선원들은 배를 잃은 것에 대한 진술보다 더 감동적으로 구원의 손길을 묘사한다. '굶어죽기 일보직전에 나타난 손길'. 조선왕조실록에 한두줄 적힌 사건은 프랑스국방부기록원의 진술내용과 언론보도로 더 구체화됐고, 의원이던 빅토르위고에게는 장편 "바다노동자[Le Travailleur De La Mer]"의 영감을, 청년이던 쥘베른에게는 해양소설들의 감각을 솟구치게 한다. 그리고 몇세기가 지난 이후 당시 선장이던 샤를르리구[CharlesRigout]의 후손은 국제원조로 한반도를 돕고, 한국전쟁 직후의 폐허에서 지정환신부는 바로 그 부안에서 간척사업을 벌여 신앙인이건 아니건간에 공평하게 땅을 무상으로 선사한다. 방귀[Le Pet]라는 해프닝의 발단은 실은 오랜 평화[La Paix]에 있었고, 부안의 아이들은 양식[Le Pain]을 빚어만드는 결과에 이르렀다. 이 아이들은 이태석신부와 원선오신부와 지정환신부의 바람처럼 어쩌면 이제는 아프리카에 눈물겨운 그 빵[Le Pain]을 선사할 것이다.
